〈 12화 〉 1 3 / 내가 본 왕자 중 최악의 왕자 루시탄에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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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침이 꽤나 분주하게 지나갔다.
왕자의 시녀들이 식사를 3층으로 바삐 올리는 가운데 옷매무시만 겨우 가다듬은 채 계단을 내려가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걸음걸이가 갈지자로 휘청였다.
결국 새벽이 지나가고 아침이 밝기 직전까지 해버린 데다 ‘서비스’ 한 번… 아니 두 번, 안에다가…. 마담의 말이 괜한 헛말은 아니었다는 걸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후우, 하고 볼을 발그레 붉히곤 한숨지으며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1층 로비로 내려왔다.
“키에리, 안녕.”
“안녕, 로즈. 마담이 찾더라. 일 끝나면 바로 사무실로 오랬어.”
“씻고 싶은데. 배도 고프고.”
“얼마 안 걸릴 거니까 바로 오랬어. 가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키에리가 뒷모습을 보고 건 인사에 뒤돌아보면서 적당히 대꾸하곤 앞장섰다. 옆에 따라붙으면서 나란히 걷노라니, 이쪽을 바라보는 키에리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좋았겠다? 왕자 상대도 다 해 보고.”
“신경 쓸 게 많아서 위에 구멍 뚫릴 것 같던데.”
“흥. 난 왕자랑 자보고 위에 구멍 좀 나봤음 좋겠네.”
질투하는 건가? 키득 웃고는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자 키에리는 한번 뾰로통하게 눈꼬리를 올려 흘겨본 뒤 손을 살짝 들어서…
“아얏!”
짜아악, 하고 엉덩이를 두들겼다. 눈물이 찔끔 배어나올 정도로 아파서 이쪽도 키에리와 똑같은 얼굴이 되어선 손을 들어 똑같이 고년의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아팠다고, 정말!
“…적당히 놀고 들어오지?”
사무실 밖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마담이 식은 눈으로 문을 열고 나와 짜증스럽다는 듯 말하기 전까지 서로의 엉덩이를 집요하게 노리는… 스팽킹, 은 계속됐다.
결국 마담이 바닥을 채찍으로 후려갈기면서 짜증스러운 듯이 내뱉고 나서야 나와 키에리는 씩씩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물러섰고, 흥, 하고 키에리는 사무실 바깥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다려줄 생각인가보다.
“페리링은요?”
“궁정 마법사에게 불려갔어.”
사무실로 들어왔다. 거의 언제나 별일이 없으면 사무실에서 잡무를 돕고 있는 페리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물으니 돌아온 대답은 그러했다. 그 회색 일색으로 차려입고 있던 할아버지 말이지. 잔에 얼음을 몇 개 집어넣고 그 위에 브랜디를 꼴꼴… 채운 뒤 그것을 한 모금 마신 마담은 아침부터 술기운 짙게 배어난 숨을 한 번 길게 내뱉었다.
“어땠어?”
“요금은 제가 받지 않았는데요.”
언감생심 왕자한테 요금 얘기를 어떻게.
언젠가의 대화가 생각나 그렇게 말하니, 마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숨을 또 내쉬곤 잔을 내려놓은 뒤 머리카락을 북북 긁는 모습이 제법… 재밌었다. 마치 못 하는 손님 아래에서 일 치르고 아침을 맞은 것 같은 반응.
“왕자한테 창녀값 청구하랴? 그거 말고,뭐 다른 얘기 없었냐고.”
“있었어요.”
후우, 하고 폐까지 깊숙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담의 몸이 달아하는 것을 보면 슬슬 지금이 적기인 것 같긴 한데. 조금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왕자가 저한테 한 얘기가 있긴 한데. 한번 들어보실래요?”
“말해봐.”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이쪽을 재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브랜디를 한 모금 마시는 반응. 괜찮은 건수의 냄새를 맡았으면서도 일단 한발 물러서서 경계를 풀지 않는 그런 눈이었다.
어쩔까. 쉽게 미끼를 물 것 같진 않은데. 여기서는 조금 돌아가서 접근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단숨에 단도직입으로 가는 게 좋을까.
이럴 땐 성격대로 가자, 성격대로.
“왕도에 가게를 낼 수 있게 해 주겠대요.”
콜록, 하고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시던 브랜디를 뱉을 뻔했다가 입을 닦으면서 드물게 마담은 꽤 당혹해하는 눈치였다. 기뻐서 펄펄 날뛸 거라 생각… 한 건 아니지만, 저렇게 대놓고 당황해할 줄은 몰랐는데.
“뭘 그리 놀래요? 가출했다가 들킨 귀족 아가씨도 아니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왕도에 무슨 가게를 낸다는 건데?”
일단 들어나 보자, 하고 관망하는 태도로 조금 누그러졌다.
이렇게 되면 일단 아예 틀려먹지는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일단 이 이야기를 어떻게 짜맞춰야 마담에게 더 구미가 당기는 얘기가 될지 머릿속으로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왕자가 자기 재산을 크게 투자한 곳이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일종의 재테크 개념으로.”
“재… 뭐라고?”
“…앗차. 걸리버 용어에요. 가진 돈을 굴려서 더 크게 만든다, 뭐 그런.”
나도 모르게 저쪽 용어를 써 버렸네. 크게 중요한 내용이 아니니 일단 넘어가고.
어흠, 하고 헛기침을 뱉곤 말을 이어갔다.
“왕자가 선이 닿아있는 곳이 동항로 회사래요. 거기에 나름 돈을 많이 깔아놔서 왕자의 입김이 세다고 하던데요.”
동항로 회사…
왕국 굴지의 무역회사로 상당한 규모로 화물선을 굴리는 큰 회사이다. 이런 시골 항구마을에서 동항로 회사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고, 그 이름이 나온 이상 마담도 마냥 이 이야기를 거절하지는 못하겠지.
“하필이면 거기냐고… 아니, 거기만큼 돈 깔기 좋은 곳은 별로 없긴 하지만. 그래서? 왕자가 하룻밤 화대로 그런 조건을 제시했을 리는 없고. 뭔가 이쪽에 원하는 게 있으니까 그 얘기를 했겠지. 마저 해 봐.”
“제가 뭔가 할 일이 있는 모양이에요.”
들을 준비가 되었다면 말하면 그뿐이다.
쐐기를 박아넣자. 한 번 더.
“어디서 말이 샜는지는 모르지만… 왕자는 제 스킬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그걸 이용해서 해결하고 싶은 안건이 있는 모양이고, 제가 잠시 왕자의 일을 도와주면 그 대가로 왕도의 항구에 가게를 열 수 있게 해주겠다고요.”
흐음, 하고 턱을 괴고선 생각에 잠기는 마담 윕의 얼굴은 잔뜩 찌푸린 채 입술을 조그맣게 달싹거리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상상 속의 주판이 요란하게 이리저리 알을 튕기며 손익계산을 바삐 행하고 있을 것이다.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으며, 그녀는 등받이에 등을 푹 묻었다.
“물론 위험한 일이겠지?”
“위험하지 않은 일이면 그만한 대가를 주겠어요?”
위험하지 않다고 해서 굳이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할 필요는 없다.
큰 대가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위험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는 건 어느 세계에서나 똑같으니까. 위기관리라는 건 어느 조직에서나 중요한 일이 아닌가.
다만 그 위험을 감수해서 왕도의 항구에 창관을 낼 수만 있다면…
부리는 매춘부들의 뱃속까지 금화로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돈이 벌릴 것이다.
“왕자가 직접 나설 정도의 일이에요. 부리는 이들도 많을 텐데 굳이 저 스스로 제 스킬을 확인하려고 할 정도라고요. 위험하지 않을 리가 없지만, 왕자의 직접적인 요청을 거부하는 것만큼 위험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욕망을 부추겨 위험을 감수해도 좋은 상황을 만들고, 퇴로를 한정해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예상대로 마담은 어지간히도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동안 고생한 값도 있겠다, 그 곤란해하는 얼굴을 보는 것도 꽤 유쾌한 기분이고.
“너 말야.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냐?”
잠시 침묵을 지키며 고민을 숨기지 않고 있다가, 결국 마담은 글라스 안의 브랜디를 마저 비우고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그 다음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의외인 울림을 품고 있었다.
“왕도는 여기 레짐과는 달라. 왕도는 온갖 악다구니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마굴이나 다름없다고. 게다가 왕실과 연루되는 일이라니. 넌 지금 네가 얼마나 쉽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
“혹시… 절 걱정해주는 건가요?”
“내 소유의 노예를 걱정하는 게 그렇게 의외인가?”
…지금 ‘노예’를 힘주어 말했던 것 같은데.
어깨를 한번 움츠렸다가 펴면서 특유의 입꼬리만 말아올리는 그 비틀림 웃음을 이쪽에 대한 걱정과 보이는 마담의 행동은 그다지… 제대로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한 가지 말해두긴 해야겠네. 지나치게 달콤한 얘기에는 반드시 쓴맛이 숨어있어. 세상일이 그렇게 다리 걸리는 것마냥 만만하지 않다는 거야.”
“알고 있어요.”
어떻게 모를까.
여기가 아닌 세계, 지금이 아닌 시간에서 자신은 쭉 그렇게 살아왔었는데.
의지할 것이라곤 자신의 손과 발뿐인 곳에서, 아득바득 기면서 꾸역꾸역 살았었는데.
“…하지만 왕도에 가게를 낼 수 있다는 데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좀 생각해 볼 테니까, 왕자가 구체적으로 네게 무엇을 시키려 하는지는 윤곽이라도 알아내.”
“알았어요.”
“나가 봐.”
이 정도면 일단 Ok한 셈이 되려나. 예상 밖으로 순순히, 그러나 덥석 물지는 않고 최대한 경계하는 게 마담다우면서도 마담답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무실을 나섰다. 키에리가 등을 벽에 기댄 채 기다리고 있다가, 한쪽 눈만 떴다.
“안에서 했던 이야기는 진짜야?”
“아, 다 들렸어?”
엿듣는 버릇은 좋지 않지만… 이쪽 계통에서는 뗄려야 뗄 수 없긴 하지. 조금은, 하고 대답이 돌아왔지만 거의 전부 들었을 거라고,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너 그거 알아? 여기에만도 망해서 흘러들어온 왕도 출신도 꽤 있다는 거.”
“그건 기품과 교양이 넘치는 키에리 얘기야?”
키득 웃으며 옆구리를 쿡 찌르자 빨간 물이 든 갈색 머리를 홱 돌리며 키에리가 도끼눈을 했다. 자신은 진지하게 충고하려고 했는데 이쪽이 장난식으로 받아들여서 골이 난 모양이다. 미안하다니까.
“…어흠! 마담만 해도 꽤 유력한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는 소문도 있어. 파혼 때문에 왕도를 뜬 케이스라고 하던데.”
“에이, 설마.”
사람 묶어놓고 채찍질하는 SM 변태가 무슨. 코웃음으로 일축하자 키에리는 선선히 수긍했다. 이 창관에서 마담의 SM 플레이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존경해 마지않는’ 마담 윕에 대한 그 존경심은 거의 채찍에서 나온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럼 그 채찍질은 귀족 집안의 전통이라든지 그렇단 말야?”
“그럴지도 모르고.”
사무실에서 로비로 통하는 복도를 이런저런 잡담을 재잘거리며 걷다 보니 이윽고 로비에 도착했다. 점심 전의 이른 시간이라 한산해야 할 터인 로비는… 의외로 조금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자못 부산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 로즈. 그게 말야.”
어쩐지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이 뒷덜미에 따끔거렸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미카 씨의 어깨너머로 불쑥 머리를 내밀어 바라보곤, 그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황당한 상황에 표정이 바로 와락 구겨졌다.
아니, 대체 지금 저기서 뭘 하는 거야 저 녀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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