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1 3 / 내가 본 왕자 중 최악의 왕자 루시탄에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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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내가 본 왕자 중 최악의 왕자 루시탄에게
1
“옆방에 가 있어. 이 층에는 자네와 술라 말고는 아무도 없게 하고.”
“예.”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소년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은 이쪽을 슥, 바라보고는 내 등 뒤에 선 기사에게 턱짓을 했고, 기사는 정중하고 절도있는 동작으로 예를 올리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척, 척, 척, 척….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융단 위를 걷는 소리가 들렸다가 멀어져갔다.
소년은 천천히, 이 세계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낯익은 세트 요리들이 차려진 테이블의 상석에 앉고는, 제 옆자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앉지그래?”
“황송하옵니다만, 왕자… 전하.”
뭐가 그리도 우스웠는지, 거들먹거리며 다리를 꼰 채 팔걸이에 손을 얹은 소년이 키득키득, 제 나이에 어울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편하게 해, 편하게. 걸리버한테 괜히 복잡한 궁중 예의를 지키라고 트집 잡을 만큼 속 좁지 않으니까.”
“…그러시다면요.”
이쪽도 굳이 차리지 말라는 예의를 과잉으로 차리는 성격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마담 윕에게 채찍 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천성이 이런 걸 어쩌라고.
다행히 왕자는 체면치레를 냉큼 받아먹었다고 화를 내는 타입은 아니었는지 태연하게 자기 앞에 놓인 접시의 T본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기 시작했다…
TV에서나 보던 나보다 더 능숙하게 썰어 먹네.
“네가 걸리버인 걸 참작해서 일단 내 소개부터 하겠어. 난 제2 왕자 루시탄이다. 뒤에 붙는 길고 거추장스러운 꼬리표는 일단 떼고 얘기하자고.”
“로즈입니다.”
“흠. 생각보다 평범한 이름인데.”
걸리버치곤, 하고 단서를 붙이는 그.
물론 그 말에는 동의하지만, 뭐 달리 좋은 이름이 떠오르질 않아서 말이지….
그나저나 현생과 전생 양쪽을 통틀어서 생전 처음 대하는 T본 스테이크를 어떻게 썰어야 할지를 몰라 악전고투하고 있노라니, 왕자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봐, 뼈에 붙은 고기 한 점도 못 남기고 뜯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야? 게걸스러운 게 꼭 며칠 쫄쫄 굶은 개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왕자인데 너무 격의 없이 구는 것도 좀 자존심 상한다고.”
“주머니 사정이 든든했던 적이 없어 놔서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꼬맹이 새끼가 만나자마자 초대면에 사람더러 개 같다니 대체 뭐냐고.
왕자니까, 하고 용케 억누르고는 적당한 크기로 자른 스테이크를 입안에 넣었다… 맛있다. 저쪽에서 먹은 소고기보다 맛있다는 게 신기했다.
여기에서는 육우 개량이 안 돼서 엄청나게 질긴 고기에 소금 쳐서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밥을 주는데, 개 같다는 말을 들은 게 뭐 대수라고. 네, 개돼지 창녀 맞습니다. 멍꿀멍꿀.
신기한 짐승 보듯 바라보는 시선이 그다지 달갑진 않지만 배부른 소리를 할 수야 없지 않나.
“알지 모르겠지만, 이 나라에는 걸리버 보호 법령이라는 게 있다.”
포크로 푹 찍은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곤, 왕자는 포도주가 채워진 잔을 들어 흔들었다.
제 옆에도 와인이 한 잔 채워져 있긴 하지만, 마셔도 되는 건가 이거.
“그 법령으로 많은 걸리버가 보호받아 왕궁이나 귀족들과 계약하여 귀중한 지식이나 여신의 선물인 스킬을 발휘하곤 했지. 하지만 걸리버가 조금… 흔해질수록, 그 법령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도 생겨났어.”
포크가 자신을 향해 겨눠지는 것을 보곤,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 하고 떨었다.
높으신 분이 제발 그러지 말아줄래요. 나 같은 최하층 카스트는 댁이 후, 하고 입김을 불기만 해도 목숨이 이리 왔다가 저리 갔다 한다고.
“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지?”
“네, 뭐. 하지만 기대하시는 것만큼 대단한 능력은 아니에요. 여기 마법사들도 비슷한 걸 할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아니, 그것과는 다르지. 술라!”
왕자가 조금 소리를 높여 누군가를 불렀다. 하지만 옆방에서 발걸음 소리가 나지도, 하나뿐인 출입문이 열리지도 않았다.
문이 열리긴 했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말하자면 ‘공간의 문’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꾸물거리면서 일그러진 공간이 천천히 벌어졌다.
벌어진 틈바구니 너머에는 옆방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고, 콧수염이 짙은 중년 남성의 모습이 얼핏 스쳤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떠올릴 수 있었다. 저번에, 자신을 지명해 찾아왔던 그 기사! 그럼 대체 언제부터 이 왕자는 자신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단 거지?!
아무튼, 중년의 기사 쪽은 차치해두고…
들어온 사람은 회색 로브에 넓은 챙의 모자를 쓴 누가 봐도 나 마법사요, 하고 광고하고 다니는 복색의 잿빛 수염이 나무 잔뿌리처럼 길게 늘어진 노인이었다.
뚜벅뚜벅하고 옆방에서 이 방으로 들어온 마법사가 얼굴을 들었다.
마법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윽, 하고 신음이 저도 모르게 샜다.
허옇게 되어버린 눈동자와 탁한 흰자위. 의학에 밝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문외한인 자신이 봐도 그는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전혀 시력이 불편하지 않다는 듯 익숙한 발걸음으로 왕자의 옆에 섰다.
“궁정 대마법사인 술라. 저쪽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은 내 호위기사, 발스턴 경이고.”
“마법사 술라일세. 반갑네, 걸리버.”
“로…즈에요.”
그가 눈이 보이는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사이 그는 정확히 이쪽을 보고는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아무래도 보이는 모양이다.
“그럼 본론으로. 네 스킬을 한번 보여주지 않겠어? 흠, 술라.”
…왕자가 하라는데 안 할 수도 없고.
일단 마음을 굳히곤 바라보니 술라라고 불린 마법사가 허공에 조그마한 막대기를 들고 흔들었다.
톡, 톡, 톡 하고 뭔가를 두드리는 동작에 허공에 광점이 어렸고, 그 광점과 광점이 이어져 면이 되었다.
그 면에 색과 색이 입혀지고, 마치 홀로그램처럼 정교한 한 명의 여성의 모습이 되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건 못 해요.”
“왜지?”
“할머니라서. 제 나잇대의 여자만 될 수 있어요.”
홀로그램…? 아무튼, 술라의 손에 의해 떠오른 영상 속 여자는 팔순을 지긋하게 넘겼을 주글주글한 얼굴에 허리가 굽은 백발의 노파였다…
저건 못 한다. 자신과 크게 연령 차이가 없는 정도여야 가능했다. 이것은 변장이 아니라 ‘커스터마이징’이기 때문에.
흠, 하고 왕자가 침음성을 내고는 술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광점과 광점이 이동하여 서로 좁혀들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고, 면과 면의 색이 바뀌면서 천천히, 노파에서 시간이 되감기듯 젊은 여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구불구불하게 물결치는 곱슬 금발과 속눈썹이 기다랗게 펼치진 눈꺼풀 아래 푸른 눈, 도톰한 입술에 복숭아 같은 온기가 도는 뺨. 일단…, 특징은 파악했다.
잠시 뒤, 커스터마이징을 마친 자신의 모습을 본 왕자와 술라는, 이제껏 빙글빙글 여유롭던 표정을 거두고 꽤 놀란 얼굴이었다…
이게 그렇게 놀랍나? 자신은 마법사들이 마음대로 까마귀나 쥐, 검둥개로 변신하는 게 더 놀랍던데.
“…그렇게 뚫어지게 보시면 부끄러운데요.”
“술라. 어떤가?”
“네, 왕자 전하. 마법이 아닙니다. 틀림없습니다.”
호오, 하고 뭔가 써먹을 만한 패를 발견했다는 양 왕자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끄덕이고는 술라를 향해 턱짓한 왕자는 손을 들어 물러가려는 마법사를 멈춰세우고는 잠시 옆방 쪽에 시선을 두었다.
“술라. 이 방에 방음 주문을 써라. 아무도 이 방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해.”
“네, 왕자 전하.”
술라는 손에 든 막대로 허공에 초록색의 역삼각형을 그렸다.
그리고 막대 끝으로 그 가운데를 톡 하고 짚었고, 역삼각형이 빙그르르 돌아 커지면서 방 전체의 벽을 채웠다가, 벽에 스며들었다… 진
짜 이것만으로 방음이 되나? 아니, 이런 게 가능하면 굳이 자신의 스킬을 신기하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심지어, 그는 페리링이 마법을 쓸 때와 같은 영창조차 하지 않았다!
술라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벽 너머로 공간의 틈바구니를 열고 사라졌고, 방음까지 되었다면 이제 이 방에 있는 것은 자신과 왕자뿐이었다.
왕자는 흠, 하고 목이 타는 듯 잔에 채워진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물론 술라는 네게 보여주었던 노파가 될 수도 있다. 노파뿐만이 아냐. 박쥐가 될 수도 있고, 용으로 변신해 용에게 대항하는 것마저 가능하지.”
“아니, 그럼 난 더더욱 필요 없는 게.”
“하지만 그건 마법이기에 필연적인 약점을 갖는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이건 뭔가의 시험인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가 만약 자신의 능력에 흥미가 있다면, 자신의 스킬과 그, 할아버지의 마법과는 다른 뭔가의 차이점이 있어야 했다.
왕자의 말 중 ‘마법이기에’라는 말이 귀에 맴돌았다.
“혹시 마법이라서 들키기 쉽다던가?”
“정확해.”
의외라는 듯, 감탄했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으로 뭐든 가능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마법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아무리 수준이 뛰어난 대마법사라고 할지라도, 마법을 쓰는 데는 필연적으로 마나를 움직여야 한다. 그 기척을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게 낮출 수는 있어도 아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거든. 그래서 너같이, 그 누구도 마법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변장이 가능한 이가 필요하고.”
“잠시만요, 잠시만요.”
손을 들었다. 아, 이거 마치 수업에서 교수님에게 질문할 때의 그 느낌이다.
뭐 아무튼. 대충 이 녀석이 뭘 원하는지는 알겠는데.
“저와 같은 걸리버가 꽤 있었다면서요? 그럼 나 같은 스킬을 갖춘 사람도 있었을 법한데?”
“아니.”
왕자는 간단히 부정했다.
“지금까지 왕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적어도 이 왕국 내에서 너와 같은 능력을 갖춘 걸리버는 한 명도 없었다. 아마 다른 나라까지 조사범위를 넓혀도 마찬가지겠지. 장담은 못 하겠지만, 같은 능력을 가진 걸리버가 둘 이상 존재한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거든.”
유일무이한 능력이란 말인가.
넘버 원이든 온리 원이든, 단 하나뿐이라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 좋은 일을 창녀 짓에 써먹고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여도.
“그리고 여기부터가 본론이다.”
네? 그럼 이제까지는 뭐였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자 왕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꾸만 그러면서 옆방을 곁눈질하는 이유는 뭘까.
“바로 말하지. 나는 왕이 되고 싶지 않다.”
잘못 들었나?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면서 그가 던진 엉망진창인 말의 뜻을 이해하려 애쓰는 자신에게 왕자는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능력에 대한 건도 그렇고, 갑자기 이렇게 막 몰려오면 이해하기가 참… 어려운데요.
하지만, 일단 자신이 가진 정보로 판단을 해 보면…
“‘당신’, 형 있잖아요. 그… 미하, 뭐시기라고 하는 형이 왕세자잖아요?”
“…‘당신’?”
이번에는 그가 멍청한 표정을 지을 차례였나보다.
아마도 자신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상대가 이제껏 없었던 모양이지.
아니, 왕자고 자시고 궁중 예절 떼고 말하자고 한 사람은 당신이니까 거기에 대해 불만 말하기 없깁니다.
하지만 조금 긴장한 자신과는 달리, 당신, 당신… 하고 되뇌며 고개를 끄덕인 그는 그다지 불쾌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네 말이 맞아. 내게는 왕세자인 형이 있지. 하지만 형은 곧 왕세자 자리를 내놓게 될 것이고 그다음 왕자인 내게 차례가 돌아올 거야. 그건 별로… 아니 전혀, 달갑지 않아.”
“아니, 왜요?”
왜요, 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었다.
멀쩡해 보이는 왕세자가 갑자기 왜 자리를 내놓는가.
그리고 그렇다면… 누구라도 강렬하게 탐할 법한 왕위를 왜 달가워하지 않는가.
그도 그 말뜻을 눈치챘는지 희극인처럼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두 가지 의미의 질문에 모두 답해주었다.
“형은 남자 구실을 못한다.”
“뭐라고요?”
“안 선다고.”
발기부전?!
엄청 젊어 보였는데, 그 나이에 어쩌다가.
그것참 안 됐수, 하고 동정의 눈길을 참을 수가 없었다. 창녀에게 동정받는 왕세자라니 넌센스도 이런 넌센스가 있나.
“남자 구실을 못 하는 왕자로 하여금 왕위를 승계하게 할 순 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왕이 되기 싫은 이유는…”
꿀꺽.
이 세상 누구라도 되고 싶어 환장하고, 영혼을 팔아서라도 갈구하고, 수많은 피를 흘리게 하면서 많고많은 중세소설에서 주인공의 최종 테크인 왕이 되기 싫은 이유. 그것은…
“놀고먹고 싶거든.”
익스큐즈 미? 파든?
세상에서 가장 글러먹은 답변이 돌아와서, 순간적으로 벙쪄버렸다.
어떤 의미로는, 불능 이상으로 동정받아야 할 건 이 왕자가 아닌가…?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는 돈을 모으고 쓰는 데만 관심이 있어. …국민을 쥐어짠다는 의미가 아니니까 안심하고.
난 정당한 방법으로 이제껏 내 재산을 장사로 불려왔고, 앞으로도 장사가 순탄하다면 그럴 테지.하지만 만약 형을 제치고 왕이 된다면?
십중팔구 내가 이제껏 모은 재산은 모조리 국고로 들어갈 것이고 내 마음대로 1 탈랭 한 닢 쓰려면 재무대신의 눈총을 받으면서 수십 장의 서류에 서명해야 하는 신세가 되겠지.
지독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세상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군.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자기 돈을 그런 식으로 감시받으며 써야 한다면 누구라도 진절머리를 칠 것이다.
자신도 여기에서든 전생에서든 10원 한 장 빌빌거리면서 쓰지 않았나.
아니, 잠깐. 잠깐. 그것보다도…
“아니, 그런데요. 얘기가 연결되지 않잖아요.
왕세자 전하가… 그, 발기부전이라는 거랑. 내 스킬이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설마 내가 왕세자 전하의 취향인 여자로 변해서 세우라거나, 뭐 그런 거예요?”
“너 머저리냐?”
왕자치곤 거 말투가 너무 저렴한 것 아니야?
“일국의 왕세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나 본데…. 취향의 여자 따위는 왕실 연무장에 오열 종대로 세워서 왕궁 정문 밖까지도 세울 수 있는 게 왕세자의 위치라는 거다. 네가 어설프게 변해봤자 형의 것은 단 1 미르무르도 서지 않을 거라고.”
아, 네 그러심까. 그것참 잘됐네요.
하찮은 창녀랑 한 나라의 왕세자와의 위치 차이를 새삼 되새기게 해 주셔서 퍽 감사합니다.
“아니, 그러면 뭘 어쩌라고요. 이상형인 여자를 오열 종대로 왕궁 정문 밖까지 세워도 못 세우는 왕세자 전하의 자지를 내가 무슨 수로 세우란 거에요?”
“그건…”
흠, 하고 말을 하려다 마는 왕자.
아니, 당신은 사람을 열받게 하는 방법 중 하나가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란 걸 모릅니까?
방음 주문까지 썼으면서 뭘 그리 안절부절못한대.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래서, 날 도와주겠나?”
“도와달라…고요?”
그의 말투가 명령조가 아니라 부탁이었다는 것도 조금 의외였다.
한 나라의 왕자가 일개 창녀… 뭐, 걸리버이긴 하지만 자신에게 그냥 명령하는 게 아닌 것은 그가 명령보다는 계약에 더 익숙한 탓일까.
크게 나쁜 사람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령은 반감을 부르니까. 특히 자네 같은 걸리버에게는 더더욱. 그 누구라도 명령에는 반감이 생기게 마련이야. 깊은 충성심은 그 반감을 충분히 중화시키지만, 그건 내 방식이 아냐. 난 사람이 충성보다는 욕망에 더 쉽게 마음이 움직인다고 생각하거든.”
적어도 당신한테 왕관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겠네요.
뭐, 하지만 교섭해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라고요.
“그럼 마담이랑 교섭하세요. 이게 뭔지 잘 아시잖아요.”
목에 매인 목줄을 살짝 당겼다가 놓았다… 그것만으로 살짝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아니, 하고 왕자… 루시탄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오로지 내가 필요한 사람하고만 거래를 한다. 내게 필요치 않은 자와는 그다지 교섭할 의사가 없어.”
“아니, 말은 멋지게 하는데 난 숨 쉬는 것 말곤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예라고요! 당신이랑은 다르게!”
“그럼 그 ‘마담’이라는 자와의 교섭은 네가 직접 하도록 해. 네가 그러길 바란다면 난 후원자의 위치에 기꺼이 서지.”
흥, 하고 재밌다는 듯 빙글거리는 웃음. 아, 조금 재수 없다.
얼마가 들든, 하고 덧붙이는 게 더더욱. 아니, 지금 날 탈랭 주고 사고파는 케무이 씨네 가게 상품쯤으로 본 거야? 사실 거의 비슷하긴 하지만!
“뭐, 생각할 시간은 필요하겠지. 하룻밤이면 충분히 결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응?
아니 잠깐. 왜 옷을 벗는 거죠? 촛불은 왜 끄는 거고? 자, 잠깐!
“끄아악?!”
“거 참 조신하지 못한 비명인데.”
“그거 존나 미안하게 됐네요!”
갑자기 공주님 안기를 당하면 누구라도 놀랄 걸요?!
무거우면서 허세 부리지 말라고요! 씩씩거리며올려다보자 피식, 그는 명백하게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
이 정도는 왕자에게 당연한 단련이라고그렇게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재수없음이 12등급인데 그 곱상한 얼굴에 죽빵한 방 먹여줄까, 목숨 하나 걸고! 그리고 납작해졌군, 하고 말해줄거야!
윽, 하고 침대에 거의 던져지듯이 눕혀졌다.
손을 탁탁 털고는 벽을 똑똑 두드리는 왕자.
옆방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방음 주문이 제대로 듣고 있는지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하고 예복의 단추를 마저 뜩, 뚝 풀어내는 그의 행동에 어째서인지 질겁하며 침대 머리맡으로 슬금슬금 도망갔다.
아니, 어째서인지 진정되지가 않는데…!
상의를 벗어 휙, 하고 내던지며 컴팩트하지만 탄탄하게 단련된 상체 근육을 내보이고는, 그가 침대 위로 올라와 다가온다.
마, 마치… 거짓말하다가 늑대에게 쫓기게 된 양치기 소년이 이런 기분인가?! 얼굴 가까이에서, 히죽 이를 드러내고 보태는 그 한 마디가, 참걸작이었다.
“알리바이는 만들어야지.”
최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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