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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비트-39화 (39/57)

39화

심지어 준은 그걸 진심으로 혐오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고대의 식인 괴물에게 머리를 내어주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이를 갈았다.

“가족 얘긴 하기 싫어.”

“그렇구나.”

여기에는 서열에 집착하는 아버지와 어린 동생에게 열등감을 품은 형이 그에게 호칭을 비롯하여 온갖 학대를 자행했다는 배경이 있었지만, 그런 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나비가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존재가 그의 마음을 긍정하니 준은 조금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 따위가 어쩔 수 없는 더 상위 차원의 존재가 알아준다잖아.

“네 아빠를 싫어하는구나?”

“……응.”

“혹시 네 눈도 아빠 짓이야?”

“…….”

정말 저 괴물에게 말려들기는 싫지만, 그간의 설움이 북받쳐 코끝이 찡해졌다. 그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다 알아줬다. 아무리 사회에 자연스럽게 섞이기에는 좀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더라도, 그녀는 인간들을 관찰해왔다. 준 같은 경우를 많이 본 거다. 그래서 긴 설명 없이도 전부 알아냈을 거다.

그는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증오하지만, 실제로는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겁쟁이라는 것을.

역시 눈이 가려진 채로 따듯한 물에 머리를 적시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살면서 처음 본 종류의 괴물이 그의 머리를 상냥하게 감겨주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어서 그런 걸까. 마음의 벽이 허물어져 간다.

“너 우는 거 맞지?”

“…….”

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랫동안 감춰 두고 있던 속마음을 들키자, 생각하고 있던 게 줄줄 새어 나온다.

“모르겠다……. 난 무서워하는 데 지쳤어. 차라리 여기서 네가 날 죽이면 편해질 것 같아.”

“음.”

“죽일 거면, 안 아프게…….”

그는 너무도 겁쟁이라 자살도 할 수 없다. 죽고 싶다면 다른 사람이 죽여줘야만 한다. 하지만 아무리 안 아프게 죽인다고 해도, 준은 자신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이 닥쳐오면 그는 온 힘을 다해 도망가려 할 것이다.

준은 단 한 번도 두려움을 이겨내는 데에 성공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도망 못―.”

“……그래.”

나비는 인자한 척 대답했다.

필사적으로 당황하지 않은 척 한 것이다.

사실 나비는 그의 깊은 내면세계를 이해한 적이 없다. 다 준의 착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아버지를 싫어한다. 좀 가족사가 복잡해 보일 때 혹시 아버지를 싫어하냐고 물어보면 다 싫어한다고 대답한다. 그건 그냥 던져본 질문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나비는 그냥 그를 이해한 척하기로 했다.

“내가 살려달라고 해도 듣지 마. 나는 아무 때나 살려달라고 하니까…….”

복잡한 방법으로 자살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는 할까?

왜 우는지 정서적으로 전혀 공감 안 된다. 인간들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우는 경우가 잦았으니, 귀납적 추론을 통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얘도 우나 보다 싶었을 뿐이다.

준의 복잡하고 섬세한 내면세계를 나비는 하나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쟤가 저러는 걸 보니 무언가 마음속 어떠한 것을 건드리긴 한 모양이다.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좋은 이웃이 되는 건 성공한 것 같다.

아마…… 천 년 동안 노력해본 나비의 성과가 무의식적인 뭐시기나 거시기에서 빛을 발하여 이젠 의식하지 않아도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아무튼 잘 된 거겠지!

나비는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녀는 용기를 얻었다. 그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심리 분석을 시도했다.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변태 같은 성벽이 가족 내력이었구나.”

“야!”

삶과 죽음이 음란한 것이라고 모욕당하자 준이 벌떡 일어났다. 마침 샴푸도 끝났기에 나비는 이번엔 저지하지 않았다. 대신 머리를 말리기 위해 그를 미용실 의자에 앉혔다. 준은 저항같지도 않은 저항을 하며 순순히 앉았다.

나비는 자신이 심리 분석까지 해냈다는 사실이 기뻐 참을 수 없었다. 이제는 인간에 대한 어떠한 이론을 설정하고 검증하는 단계까지 올랐다. 그녀는 아마도 산속에서 태어났던가 어릴 때는 바닷속에 있었던가 하여간에 자연과 하나 되지 않았던가.

천 년의 세월이 흘러 야생 동물에서 학자로…….

“인간들은 사실 다 마조히스트라는 내 이론이 증명되고 있어.”

“뭐라고!?”

“너 매운 거 좋아하지?”

좋아한다. 준이 대답을 못 하자, 나비는 의기양양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거봐.”

“아니, 매운 거랑 무슨 상관…….”

나비가 시끄러운 헤어드라이어로 그의 머리를 말리기 시작하자 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 와중에 헤어스타일이 세팅되고 난리다. 선이 가는 그의 얼굴에 맞춰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하고 심플하면서도 화려한…… 그거가 되고 있다.

“넌 은찬이 가족인데 내가 너를 왜 죽여. 나도 너랑 잘 지내고 싶거든. 왜 안 믿어주는지 모르겠어.”

“근데 지금 뭐 하는…….”

“백만 원이야.”

“…….”

바가지다.

목숨값으론 싸다. 준은 그냥 말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나비는 햇살처럼 웃으면서 바가지 가격을 결제했다. 그녀에게 이상한 오해를 덧씌운 데에 따른 합의금이었다.

“감사합니다.”

“……널 국정원에 제보한 사람이 누군지는 안 들어도 돼?”

“아, 참. 그것도 말해. 다 말해라. 네 창피한 취미도 말해.”

준은 한숨을 쉬었다. 원래는 그냥 여기서 정보만 말하고 도망치려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그녀에게는 조금 더…… 자신의 내면세계를…… 보여줘도 될 것 같다. 받아줄 것 같다. 천 년이나 살아서 그런가, 그릇은 넓다…….

준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옷 소매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내 창피한 취미…… 보여 줄게…….”

***

나비는 준의 집에 초대 받았다.

보여달라고는 했지만 진짜로 초대까지 하면서 본격적으로 보여 주려 할 줄은 몰랐다. 나비의 프로페셔널한 샴푸질과 가위질이 그의 내면세계에 무슨 변화를 일으켰는지 모르는 그녀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웃의 집에 초대 받는다는 이 사회적인 활동을 거절하고 싶지도 않다. 나비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의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조수석에 앉아 다른 것을 물었다.

“내가 안 무서워?”

교통사고 날 뻔했다. 준은 식은땀이 고인 손바닥을 재빨리 옷에 문질러 닦았다.

“……네가 정말로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맞다면, 쉽게 감정에…… 휩, 휩쓸려서, 날 죽, 죽일 것, 같, 같지는―.”

“안 죽인다니까. 아까는 죽여달라더니 이랬다 저랬다야. 은찬이랑 가족이 맞긴 하구나.”

나비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보탰다.

“난 배고플 때만 사람 죽여. 그것도 방공호에 잡아둔 사람만 죽여. 21세기에 아무 데서나 사람을 죽이면 뒤처리를 어떻게 하겠니.”

“…….”

안심이 하나도 안 된다.

그 외에도 나비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자영업자를 이렇게 막 초대해도 되는 거냐고 물었지만 준이 어차피 오늘치 매상은 자기가 다 결제해주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니 바가지를 씌운 나비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도무지 친해진 건지 안 친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비는 그냥 떨떠름하게 ‘작업실’의 대문까지 따라갔다.

말만 작업실이지, 사실상 준이 가출한 이후로 살고 있던 집이다. 이곳은 높은 층에 있던 주거용 오피스텔이었다. 돈을 많이 버는지 집도 꽤 넓었다.

“말해두는데, 여기 초대 받은 건 네가 처음이다.”

준이 경고하듯이 말했다. 사실 은찬이 두어 번 들락날락하긴 했는데 그건 초대가 아니라 침입이었으니 세지 않는다.

나비는 기쁘기보다는 부담스러웠다.

“집들이 선물을 안 가져왔어.”

“필요 없어. 용건만 해결하고 빨리 꺼져.”

“스트립쇼 한다고?”

“뭐??”

“벗으려는 거 아니야?”

창피한 취미를 보여준다고 했지 벗는다고 한 적은 없다. 그의 취미는 뭐가 되었든 벗는 것보다는 덜 창피한 일이다. 그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냉큼 방문을 열었다.

“그런 성적인 취미 아니거든! 자!”

과연 방 안에 그의 부끄러운 취미가 있었다.

그곳은 일종의 서재나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책장과 책상 위에서 서른 개가 넘는 바비인형들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궁중 파티를 하고 있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하고 번쩍번쩍하며 대체로 분홍색이 많았다.

다 큰 남자가 집념으로 인형을 갖고 논 흔적이다.

“어…….”

나비에게는 문화 충격이었다.

“차라리 벗지 그랬어.”

“벗, 벗는 것보단 이게 덜 창피하지.”

“이런 짓을 하면 조상님이 노하셔……. 네 불알을 훔쳐 갈 거야…….”

“그게 조상이냐? 악귀지!?”

준이 도로 방문을 쾅 닫았다. 나비가 유교적으로 반응하자 괜히 더 창피해졌던 탓이다.

“이제 돌아가.”

전나비는 지하 방공호에서 사람을 죽인다. 다 큰 남자가 사실은 인형의 집을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할 군번이 아니다. 둘 중 누구 취미를 더 숨겨야 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나비 쪽이다.

나비가 다시 뭐라 입을 열려는 낌새를 보이자, 준이 먼저 선수를 쳤다.

“뭐라고 하지 마. 비웃으면 죽여버릴 거야. 한마디도 하지 말고 그냥 집에 가.”

살인 청부업자가 죽여버린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빈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비 눈에는 준이 슬슬 경계하는 검은 고양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안 비웃었어.”

“‘아직’이잖아! 너는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형 놀이하면 조상님이 뭐라 안 하냐? 빨리 가. 꺼져버려.”

조금 유교적으로 충격 받았을 뿐, 비웃지는 않았다. 그렇게 반박하려 했으나 뒤따라온 말이 너무 사실이라 나비는 말을 잃었다.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형 놀이를 해……?

듣고 보니 말이 되는 거다. 자기가 하는 일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형 놀이를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나름대로 식량과 유대를 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비는 순식간에 모든 투지를 잃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맞아. 난 비웃을 자격이 없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갑자기 우울해하자 오히려 이번엔 준이 더 당황했다. 안 그래도 행동을 예측하기 힘든 상대인데 기분까지 널뛰면 곤란하다.

준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운을 뗐다.

“저기, 우울해 할 필요는―.”

“너도 인형들 벌거벗겨서 다리 사이까지 네 손으로 목욕시키니.”

“난 변태 아니거든!?”

준이 벽을 쾅 치며 화냈다. 그러나 나비는 식량들을 벌거벗겨서 다리 사이까지 자기 손으로 목욕시킨다. 나비는 더욱 우울해져 아무 의자에나 걸터앉았다.

“나만 변태였구나.”

“옷을 왜 벗겨. 옷을 입히려고 사 모으는 거야.”

준은 너무 당혹스러워서 냉혹한 킬러답지 않게 의외의 정보까지 누설했다. 나비는 놀랐다. 자신의 행동에 기반하여 생각했으니, 당연히 그도 벗기려고 모으는 줄 알았다.

입히려고 모은다면, 모으는 것은 인형이 아니다.

“인형을 모으는 게 아니라 드레스를 모으는 거였어?”

“……이, 인형은 그냥 모델이야. 드레스는…….”

준은 뜨거워진 얼굴을 연신 소매로 쓸면서 우물쭈물 대답했다.

“……예쁘잖아.”

“…….”

확실히 예쁘긴 예뻤다.

드레스 없이 대충 후줄근하게 카디건만 걸쳤어도, 얼굴이 워낙에 미려하고 고우니 예뻤다. 나비가 아까 머리를 매만진 탓에 오늘은 두꺼운 안경도 없어 홍조 띤 피부가 더욱 잘 보였다.

머리 만져두길 잘했다. 오늘의 신준은 극상의 미모를 자랑했다. 예쁜 것을 모으는 심정이 절절히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준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채 수줍게 중얼거렸다.

“……예쁜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러게. 나도 예쁜 거 좋아해.”

문득 나비는 자신이 이렇게 해서까지 준과 친해지고 싶은 이유를 깨달았다. 단순히 은찬의 가족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래서 너랑 가까워지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어.”

“……!”

준은 한 박자 늦게 그 말을 이해하고 놀랐다.

나비는 진지했다. 이게 다 강은찬 때문이다. 예쁜 애들에 대한 묘한 감정을 알려줬다.

……뭐, 세상에 강은찬 같은 인물을 한 번에 두 명이나 만날 수는 없다. 준은 은찬과는 다른 타입이다. 세심하게 따져보면 나비가 요새 관심을 갖는 인간들이 전부 다른 타입이기는 하다. 하지만 골자는 같다.

예쁜 애들 주물럭대고 싶다. 느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귀여운 것이다.

그런 애들한테는 예쁜 옷 입혀도 괜찮지 않아!?

나비는 다시 방문을 열고 인형 옷들과 준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드레스는 인형이 아니라 너한테 입혀야겠는데.”

“!!”

준은 다리가 풀려서 넘어졌다. 예쁘다는 말을 들은 것으로 모자라 그런 옷을 입혀야겠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이런 취미는 공개해도 기껏 해봐야 비웃음을 사고 끝나는 정도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나비를 쫓아낼 수 없다. 그는 심장이 두근대는 몸을 감추며, 바닥에 주저앉아 괜히 몸을 배배 꼬았다.

“나, 나 같은 남자한테는 그런 거 안 어울려. 네가 낫지.”

거짓말이 아니다. 준은 진실로 그렇게 생각했다.

옆에 강은찬이 있어서 자주 왜소해 보인다는 평가를 듣지만, 사실 신준만 떼놓고 보면 그도 상당히 남자다운 체형이었다. 실외 활동을 아무리 꺼린다고 해도 그는 은찬의 바로 다음 가는 킬러다. 얼굴과 몸의 선이 아무리 고와도 기본적인 체형이 가려지는 건 아니다.

안 어울린다. 정말이다. 하늘하늘하고 화려한 드레스는 인형처럼 예쁜 사람들에게나 입혀야 한다. 예를 들어, 전나비 같은.

나비가 훨씬 잘 어울릴 게 분명하다. 그러나 나비는 그 말을 간단히 부정했다.

“네가 잘 어울릴 것 같아. 안 이상해.”

“이상해.”

“예쁠 거라니까. 네가 조금밖에 안 살아서 별로 본 게 없어서 그래.”

나비는 뽐내듯이 말했다.

“당장 300년 전만 해도 이 정도 치장이야, 너처럼 어디 귀족한테 첩으로 팔려갈 얼굴에는 흔한, 음, 크흠, 흠. 아무것도 아니야. 됐어. 너 같은 남자한테는 안 어울려. 왜냐면 넌 남자도 아니니까.”

그러다 재빨리 헛기침하며 내뱉은 것들을 무마하려다 모순된 말까지 뱉고 말았다. 너는 남자도 아니라는 말과 첩으로 팔려갈 거란 말 중에 현대인에게는 어느 쪽이 더 상처일까? 무엇이 더 시대의 아름다운 가치를 훼손시키는 말일까? 나비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미 다 들었다.

‘첩으로 팔려갈 얼굴…….’

다른 건 다 지체더라도, 그 대목만큼은 준에게 뜻깊게 다가왔다.

그녀는 적어도 70년 동안 얼굴이 변하지 않은, 인간의 눈에는 불로불사로 보이는 미지의 생물체다. 300년 정도가 쉽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나이가 무척 많은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첩은, 그의 어머니나 이복동생의 어머니 같은 요즘 시대의 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리라. 옛날 첩이다. 잘은 모르겠으나, 옛날 첩들은 노예나 다름없지 않았을까. 사실상 나비는 준이 성 노예에 걸맞은 얼굴이라 한 것과 다름이 없는 듯하다. 그건 어감이 좋지 않다.

‘첩이 되면…….’

팔려간 첩의 처우는 부군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아무래도 그는 역시 사랑받고 싶다.

준은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작게 꿍얼거렸다.

“……아무한테나 첩으로 팔리긴 싫어.”

그렇겠지.

나비는 현기증이 나서 이마를 짚었다. 인신매매가 비윤리적인 일이 된 지가 언제인데 옛날 얘기 한 번 꺼냈다고 시대의 가치관을 헷갈려 버렸다. 하여간 추억팔이가 문제다. 하지만 진짜로 첩으로 잘 팔리게 생긴 걸 어떡해. 다시 생각해보니까 추억팔이는 문제가 없다. 쟤 얼굴이 문제다.

‘아무한테나’가 붙었다. 좋은 주인이라면 팔려가도 좋다는 뜻임을 나비는 눈치채지 못했다. 날치기 합리화만 빠르게 진행됐다.

준은 무릎걸음으로 조금 더 나비에게 가까이 가서, 그녀를 올려다봤다. 나비는 숨 쉬는 걸 잊을 정도로 당황했다. 무엇을 기대하는 건지 준의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 꿈에 부풀어 있어, 순간 어린 소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상하다고 하지 않을 거지?”

그것도 그냥 어린 소년도 아니고 세기의 미소년으로 보였다.

무언가,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 세기의 미소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건 도의적으로 못할 짓처럼 느껴졌다. 나비는 어떤 거대한 세상의 이치에 짓눌려 그가 뭘 기대하는 지도 모르고 대답했다.

“그래.”

“!”

준은 웃지 않았지만, 나비는 어째 그의 주변에 꽃이 활짝 피는 특수 효과 같은 게 보이는 듯했다. 혹시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눈이 침침하다’는 현상인 건가 싶어 나비가 눈을 비빌 때 준이 일어났다.

“거기 앉아있어. 금방 올게.”

그러고 다른 방 안으로 들어가 문 닫고 사라졌다. 거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나비의 머리가 고속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뭔데. 아니…… 뭔데. 뭐 하려는 건데.

사실은 알고 있다. 아마…… 흐름 상, 어째, 그거 같다. 입고 오려는 것 같다.

하지만 무엇을? 무엇을?? 인형들은 로코코 시대에나 있을 법한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있다. 아무래도 현대에 와서 구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지 않나. 남이 뭘 입을지에 대해서 이토록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현대에 무슨 드레스가 있어. 그것도 남자 애첩이 입을 법한.

“저기.”

상념에 빠져 있던 나비는 문이 달칵 열리자마자 튕기듯 일어났다. 문틈으로 준이 슬쩍 들어왔다. 준은 정말 드레스를 입었다. 나비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종류의 드레스를.

세상에는 홀복이라는 게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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