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자연히 그는 나비의 허벅지에 걸터앉는 모양새가 되었다. 덩치 차이가 큰 데도 둘이 아무 불편함 없이 안정적으로 있을 수 있는 건 은찬의 운동 신경 덕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나비가 그냥 무식하게 힘으로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불편하다. 무엇보다도 이런 자세로는 자연히 은찬이 나비를 내려다봐야 한다.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간청했다.
“바닥에 내려가게 해주세요.”
“싫어.”
나비는 그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입에 김밥 하나를 물려줬다. 은찬은 당황해서 김밥을 문 채로 굳어버렸다. 나비 앞에만 서면 그는 바보가 되어 김밥 하나도 제대로 못 먹고 쩔쩔맸다.
나비가 재촉했다.
“씹어.”
씹으라면 씹어야 하는 거였다.
먹는 게 아니었다. 은찬은 그냥 입안의 음식물을 치아로 분쇄해 목구멍 뒤로 넘겼다. 그런데 그러자마자 김밥이 하나 더 들어왔다.
“잘 먹네.”
나비는 은찬에게 밥을 손수 먹여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방공호에서의 일이 오버랩 된다. 나비는 일일이 다 해주는 걸 좋아했다. 식량 관리라는 명분으로 그들이 직접 씻거나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무엇이든 직접 해주며 뿌듯해했다.
나비가 인간들 돌보는 것을 좋아한다면, 한낱 인간인 그는 그녀의 기쁨을 위해 기꺼이 입을 벌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적응이 안 돼.’
은찬은 끙끙대며 나비가 주는 것들을 어색하게 받아먹었다. 이런 보살핌은 평생을 받아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입에 뭐 넣어줄 때마다 최선을 다해 먹기는 하겠지만. 와중에 김밥은 더럽게 맛이 없다. 그 김밥집은 맛이 없어서 망해가는 곳이었다.
‘혹시 누나는 인간들이랑 미각이 좀 다른가.’
그럴싸한 생각이었다. 지금껏 나비가 준 것들을 되짚어보면 일리가 있다. 어쩌면 인육이 아니면 맛을 못 느끼는 걸지도.
하지만 휴게실에 쌓여있는 저 과자들은 다 뭐란 말인가. 미스터리한 일이다.
‘누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지금, 특히 더 알고 싶어졌다. 그런 욕망이 들자마자 은찬은 자기도 모르게 불쑥 말을 뱉었다.
“몇 살이세요?”
가장 궁금했던 것이다.
그는 말해놓고 나서야 이건 비상식량이 해도 되는 질문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벌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실수를 하다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인간의 목을 조르는 살인 청부업자인 그는 본래 이런 실수를 잘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충동적으로 해서는 안 됐다. 그는 욕구를 억누르고 숨죽이며 기다리는 것에 익숙하다. 하지만 나비와 엮이기만 하면 제어가 안 된다.
이번에는 엉덩이도 호되게 맞고 거칠게 뒤를 따이고 위로받은 직후라서 마음이 더 느슨해졌던 것 같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지금도 나비는 김밥을 먹여주다 말고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은찬은 무릎을 꿇기 위해 바닥으로 내려가려 했으나, 나비가 놔주지도 않았다. 결국, 두려운 마음에 그가 미리 사과했다.
“죄, 죄송합―.”
입에 김밥이 하나 더 들어왔다.
나비가 “으으음.” 낮은 탄식을 흘렸다.
“천 년 넘게 살았다고 하면 믿을 거야?”
“…….”
“근데 나 스무 살이야.”
나비는 나이를 헤아려보다가 모든 게 귀찮아서 대충 대답했다. 은찬이 즉답했다.
“그럼 저는 열여덟 살입니다.”
“……만약에 내가 열여덟 살이면?”
“저는 열다섯 살이거든요?”
“내가 열다섯 살이면.”
“저 일곱 살인데요??”
연하라는 포지션은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강은찬이었다.
나비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이 얘기도 하고. 이제 안 우울한가 봐. 자주 때려야겠어, 일곱 살 은찬이.”
거의 기습 공격에 가까운 말이었다.
강아지의 마음을 잘 알지 않으면 저런 말은 못 한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우울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새삼, 체벌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나 관심 받고 있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었다.
“너, 너, 너무 좋아요.”
“그래?”
그러자 다정하게 화답해준다. 정말로 너무 좋았다. 은찬은 두 손을 꼬옥 모으고 첫사랑에 빠진 어린 소년 같은 얼굴로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러나 동시에 드는 섬뜩한 생각이 있다. 그것은 그가 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움직이는 삶에 익숙하다 보니 생긴 버릇이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할 자격이 되는 걸까.’
여기서부터 출발한 생각은 그럴싸한 방향으로 뻗게 되었다.
‘매일 행복하다 보면 정신이 흐물흐물하게 녹는 거 아니야?’
게다가 자주 때려준다니, 그렇게 기분 좋은 걸 자주 당하다간 판단력도 경계심도 없는 동물처럼 나비에게 기대기만 하게 될 것 같다…….
나비는 그가 킬러였을 때 그를 거뒀다. 이제 그가 킬러가 아니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면, 그때는 실망해서 버리는 것일까? 은찬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비상식량이 상하면 당연히 버리겠지.’
은찬은 눈치가 빠른 편이다. 나비가 그의 강한 모습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매일 보살핌과 사랑을 받다가는 결국 답 없고 게으른 남자가 될 것 같다. 그렇다고 나비가 친히 엉덩이를 때려줄 때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도 없다.
‘내가 계속 정신 차리고 잘해야 한다.’
엉덩이를 맞으면서도 킬러로서의 냉철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혀 짧은 소리를 내거나 질투 때문에 정신을 잃을 게 아니라 도청기부터 빠릿빠릿하게 처리하는 게 낫겠다.
은찬은 냉큼 김밥 하나를 나비 입에 물려버렸다.
“응?”
나비가 얼결에 그걸 씹었다. 은찬은 과자 상자 옆에 올려둔 도청기를 집어 들었다.
“누님도 점심 드세요. 누가 설치했는지는 금방 알아낼 겁니다. 아는 사람 중에 전문가가 있거든요.”
“맛이 없다, 이거.”
“!”
“전문가가 누군데?”
나비가 그의 자세를 고쳐주며 가까이서 묻자, 은찬은 가슴이 설 뭔가 이렇게 그녀에게 제대로 도움이 되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매번 마무리가 어설퍼서 폐를 끼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필 그 전문가가 그녀도 아는 사람이다.
“그…….”
어떻게 말을 해야 나비에게 도움도 되면서 동시에 관심이 그에게로 쏠리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일단 ‘누나가 임신시켰던 그 남자요’는 절대 아니다. 은찬은 무난한 대답을 골랐다.
“제 형님이―.”
“준이?”
“그렇게 부르는 사이입니까!?”
은찬이 소스라쳤다. 오히려 나비가 더 당황했다.
“이름이 그거 아니야?”
“너, 너, 너무 가까운 사이 같잖아요! 가까운 사이입니까? 저보다 더?”
방금 질투 때문에 정신 놓지 말자고 결심해놓고 은찬은 또 같은 짓을 했다. 겨우 한 겹으로 덮어둔 ‘버려질 수 있다’는 불안감은 마음에 부는 작은 바람 한 점에도 훌렁 드러나 주체가 안 됐다. 특히나 그의 뱃속에는 나비의 아이가 없지 않은가.
“둘이 무슨 사이예요!”
“뭐 동네 이웃…….”
“그 새끼 이 동네 살지도 않거든요?”
은찬이 펄펄 뛰며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려 했다. 나비는 허벅지 위에 앉힌 그의 무게감과 체온에 만족하고 있었는데 자꾸 도망치려니까 심기가 불편해졌다. 사실 그가 자꾸 도망가려는 것까지 포함해서 만족스러웠지만, 괴롭히는 동시에 아껴주고도 싶다니 스스로의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아무튼,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허락 없이 내려가게 하지 않겠다. 나비는 그를 단단히 잡고 놔주지 않았다.
“은찬아. 자꾸 마음대로 할래?”
“!”
은찬이 바짝 얼어붙었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말했다.
“제가…… 귀엽지 않으신가요.”
“네가 제일 귀여워.”
정확히 뭘 묻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나비는 즉답했다. 그녀의 강아지는 귀엽지만, 정서적으로 조금 불안한 것 같다. 귀엽다고 더 말해주면 조금 괜찮아질까?
나비는 그의 얼굴을 잡고 제대로 말해주었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
물론 그는,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은찬이 못 알아들은 것같아 보여 나비가 다시 한번 분명히 말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네가 제일 귀엽다고.”
“…….”
세 번이나 연속으로 들었으니 외면할 수가 없다.
“…….”
은찬은 삐걱대며 다시 나비의 품 위에서 내려왔다. 상태가 이상해서 이번만큼은 나비도 봐줬다. 그는 건조기에서 옷을 꺼내 마구 입었다. 엄청 뜨거웠는데, 온도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신체도 만만치 않게 뜨거웠기 때문이다.
“시키신. 일. 하러. 다녀오겠습니다.”
말도 로봇처럼 삐걱삐걱 나왔다. 나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네가 깨 먹은 것들 새로 사러 가야겠다.”
“꼭 변상. 하겠습니다.”
“굳이 뭐.”
그러나 은찬은 이미 전 재산을 다 들고 오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다녀오겠습니다.”
“잠깐만.”
나비는 그를 불러세우고, 아까의 개싸움에서 안 부서지고 살아남은 미용실 시설들을 활용해 머리를 정돈해주었다. 잘생긴 얼굴이라서 전부터 아이돌 스타일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다. 대충 빗질만 해도 눈부신 얼굴이라 왠지 실력이 늘어난 느낌도 들 것이고. 나비는 5분 만에 그의 머리를 멋지게 세팅했다.
가위질을 몇십 년 했던 은둔 고수 미용사에게 헤어스타일을 세팅 받은 은찬은 얼굴에서 빛이 났다. 그러나 막상 본인은 그 자체의 미를 판단할 능력을 완전히 소실한 후였다. 그가 이해한 것은 ‘누나가 날 위해 뭔가 해 줬다’와, ‘누나가 내 머리를 만져 줬다’ 이뿐이었다. 머리가 아예 과부하가 걸려 멈춘 것 같다. 은찬은 삐걱삐걱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제 가.”
“존명.”
은찬이 삐걱거리며 뒷문으로 가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살면서 내봤던 목소리 중 가장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작고 빠르게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은찬이 다녀올게요.”
그러고 도망쳤다.
***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은찬이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길을 통하여 동네 변두리를 뛰어갔다. 목적지는 있었지만 대충 무작정 앞으로 뛰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목적지까지 최대한 돌아서 가는 루트로 달렸기 때문이다. 어렸다. 넘치는 에너지가 주체가 안 된다.
체력을 최대한 낭비하며 그가 향한 곳은 신준의 작업실이었다. 고층 빌딩이었는데 그는 굳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정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일부러 기력을 낭비할 수 있는 방향을 선택했다. 정문으로 들어갔어도 홍콩 영화 주인공처럼 문을 쪼개면서 등장했을 것이다.
강은찬처럼 혈기가 넘치는 타입도 아니고 느릿느릿 살아가던 신준은 당연히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괴담도 아니고 여기 고층 빌딩에 갑자기 창문으로 쳐들어오는 이복동생 때문에. 그것도 바닥에 척! 하고 멋지게 굴러 낙법으로 착지했다.
“형!”
분홍색 토끼 머리핀으로 앞머리를 고정하고 양치 중이었던 신준은 얼떨결에 그에게 칫솔을 겨누며 기겁했다.
“시발 뭐야.”
“누나가 내가 세상에서 제일 귀엽대!”
“어쩌라고! 신발이나 벗어!”
신발 벗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머리에 분홍색 토끼 머리핀을 꽂은 걸 완전히 까먹은 준은 그냥 입가만 닦고 벽에 기대 물었다.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이 안 된다. 겁이 많아서 최대한 숨어 사는 게 마음 편한 유형이니 말 다 했다.
게다가 저 자식 감금당하던 거 아니었나. 준은 한동안 나비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살기로 결심한 후 어디에 숨을지 은찬에게 말해준 적이 없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는가.
그러나 은찬은 이 장소를 그가 구입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몇 년간 모르는 척해줬을 뿐이다.
“형은 힘들 때마다 여기 와서 인형 놀이하잖아.”
“안 닥쳐!?! 인형 놀이 아니거든?”
지금의 강은찬은 그 무엇도 숨길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형이 장난감 가지고 노는 거 한 번도 부끄러웠던 적 없어. 그러니까 형도 내가 누나의 장난감이 된 걸 부끄러워하지 말―.”
“쪽팔린다, 새끼야!”
“너무해!”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부끄러운 취미를 들킨 준이 씩씩대며 양치 컵을 던졌다. 은찬은 그걸 보지도 않고 받아냈다. 받을 줄 알고는 있었지만 저렇게 정말 아무 타격도 못 입히는 걸 두 눈으로 보니 속에서 천불이 날 것 같았다. 준은 한 줌 남은 이성으로 화끈거리는 볼을 문지르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뭐하러 왔어.”
“누나가 내가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고 했어.”
“나가.”
은찬은 현관까지 몰리고 나서야 왜 왔는지를 기억해냈다. 그는 급하게 챙겨온 도청기를 꺼냈다.
“이것 좀 봐줘.”
준이 멈칫했다. 얼핏 봐도 도청기다. 그는 그걸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어디 있었는데?”
“누나 미용실에.”
은찬이 심각하게 덧붙였다.
“누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
까먹고 있는 모양인데 강은찬부터 살인 청부업자다. 애초에 그부터가 의뢰를 받고 전나비의 집에 침입하지 않았던가.
평소에는 똑똑하게 앞가림 잘하다가도 유독 사랑에만 빠지면 빡추가 되는 유형이 있던데, 그의 동생이 딱 그랬다. 준은 이제 은찬이 일산화탄소라도 마시고 있는 건지 심각하게 의심됐다. 아니면 얘가 정상적인 사춘기를 보내지 못해 결국 망가지고 말았다든가.
‘아버지가 봤으면 그 여자부터 죽이려 했겠다.’
감히 내가 애지중지 만든 ‘작품’을 망쳤다는 죄목으로 ‘교육’을 하려 들지 않을까 싶은데, 어째 전나비가 이길 것 같다. 준은 그 여자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무서웠다. 도대체 강은찬 이 똘추 새끼는 뭐랑 사랑에 빠지고 지랄인 건지.
역시, 전나비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를 해봐야겠다. 준은 도청기를 받아들었다.
“찾아볼 테니까 대신 다시는 찾아오지 마.”
“근데 형은 여자친구 많이 사귀어봤지.”
“나한테 연애상담 하지 마. 한마디도 하지 마. 입 닥쳐. 말하면 너 총으로 쏴서 죽이고 나도 자살할 거야.”
은찬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
은찬이 애꿎은 준을 괴롭히는 동안, 나비는 나비대로 은찬이 부숴 먹은 약품과 비품을 보충하러 쇼핑에 나섰다.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도 있지만 운 좋게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미용 재료 도매 업체가 있었다. 나비는 그 가게의 단골손님이었다.
정말 약품을 사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 그 옆에 애완 용품 전문점이 있었다. 간판에 커다랗게 멍멍이의 행복이라고 쓰여 있었단 말이다.
멍멍이의 행복.
“…….”
멍멍이의 행복…….
나비는 홀린 듯이 그 가게로 들어갔다.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거의 세뇌 수준이었다.
가게 주인이 살갑게 물었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거 있으신가요?”
나비는 그제야 자신이 애완 용품 가게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오랜 삶을 영위했지만, 여전히 대화라는 행위에 적응 중이었다. 누가 갑자기 말을 걸면 당황해서 생각하고 있는 걸 그대로 내뱉어 버린다.
“우리 개가…….”
“아! 강아지 견종이 어떻게 돼요?”
호모 사피엔스요.
자연스러운 대화를 하기 위해 오랜 세월 해왔던 노력이 빛을 발하여, 나비는 진실을 말하는 것을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대신 식은땀을 흘리며 두뇌를 풀가동하여 대충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실은 슬쩍 감출 수 있을 법한 대답을 골라냈다. 나비는 이만큼이나 성장했다.
“견종은 모르겠고 그냥 대형견이예요.”
괜찮은 대답이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비는 대화를 자연스럽게 잇는 데에만 모든 정신이 팔려있었다. 방금 그토록 부정하던 개를 주웠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가게 주인이 비즈니스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믹스견이구나.”
믹스견…….
나비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근친상간의 결과물이 아닌 이상에야 믹스라는 게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다행히도 나비는 표정이 겉으로 티가 잘 나지 않는 타입이라, 가게 주인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이것저것 추천해줬다. 또 하필 대형견 장난감이라는 게 인간의 입에 물리기에도 괜찮은 크기 같아서 나비의 동공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바구니에 대형견이 물기에도 튼튼하고 오래간다는 장난감 몇 개를 담아버렸다. 손님이 호구같이 자꾸 뭘 담자 가게 주인은 신나서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대형견이면 리드 줄도 자주 망가지고 그러죠?”
“리…… 드 줄……?”
그건 또 뭐야.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나비는 인간과의 소통을 처음 해본 외로운 크리처처럼 가게 주인의 말을 따라 했다. 애완동물은 관심 없던 분야라 거의 상식이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가게 주인이 조금 당황해서 말을 보탰다.
“대형견이면 산책 자주 나가시잖아요.”
“…….”
산책 같은 거 안 나가봤다. 대형견이면 산책을 나가야 하는 것인가……?
가게 주인은 개는 매일 산책을 나가야 하며, 요새는 목줄이 아니라 가슴줄을 매고 다닌다는 내용을 포함한 간단한 산책 가이드를 알려주었다. 나비는 경청했다.
잠시 후 나비는 멍청한 얼굴로 개도 안 키우면서 애완 용품을 잔뜩 들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