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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비트-22화 (22/57)

22화

“와악!”

은찬은 칼에 찔려도 안 지르던 비명을 지금 지르면서 얼른 이불로 몸을 가렸다. 나비가 쓰던 이불로 온몸을 덮는 개변태 행위임이 틀림없었으나 아무튼 지금은 급했다. 그는 이불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일단 거실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형.”

피가 안 섞인 형제 관계에는 무척 조폭다운 사연이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인간 고기를 먹는 고대의 포식자라든가 아니면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수퇘지로서의 본능 같은, 거대한 자연의 흐름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아무튼, 은찬은 창문을 살짝 열었다. 열자마자 준이 탄식했다.

“미친놈…….”

“여긴 어떻게 알았어.”

“좀, 좀, 제대로 가려 봐. 부담스러워.”

나름 앞치마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던 은찬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이불을 좀 더 꼼꼼히 여몄다. 준은 몸을 가볍게 놀려 소리 없이 앞마당에 착지했다.

“그래…….”

그는 우선 위장용 안경을 벗으며 관자놀이를 짚고, 중요한 얘기를 하기 위해 서두를 꺼냈다.

“어후…….”

너무 어이없어서 서두가 나오질 않았다.

은찬이 헛기침을 했다.

“왜 온 거야.”

“왜 왔겠냐. 며칠 사이에 뇌가 녹았냐?”

여유롭게 잡담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준은 본론부터 꺼냈다.

“난 이 동네 떠서 다시는 안 돌아올 거야.”

그리고 은찬의 눈을 들여다보며 제안했다.

“네가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따라올 거냐, 말 거냐.”

은찬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가.”

준도 바로 수긍했다.

“그래. 넌 그냥 여기 있어라.”

“이유 안 물어봐?”

“말하지 마.”

준이 질색하며 손사래 쳤다. 그러나 은찬은 이 들뜬 감정을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연애는 아니지만 대충 그 비슷한 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 자랑스러운 사실을 꼭 말하고 싶다.

“누나가 날 예뻐해.”

“누…….”

한 번 불붙은 젊은 청년의 혈기는 쉽게 꺼지지 않았다.

“누님이 날 솜사탕 강아지 삼았어.”

현 상황에 대한 은찬 나름의 재해석이다.

필요 이상의 정보는 종종 정신에 타격을 주기도 한다. 준은 애초에 정보 수집력이 뛰어났다. 대충 강은찬의 꼬락서니를 보자마자 ‘아, 얘가 사랑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구나, 이대로 죽어도 자기 업보겠구나’, 싶던 참이었단 말이다. 강아지 삼았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식은 정말 알고 싶지 않았다. 괜히 왔다. 준은 귀를 틀어막으며 괴로워했다.

“알았어, 미친 새끼야.”

“난 밖으로 못 나가니까 형이 좀 나가서 내 옷 좀 가져와 줘.”

“싫어……!”

준은 온몸을 다해 질색하고, “그럼 간다.”라며 인사를 남기고 훌쩍 떠나려 했다. 은찬이 얼른 붙잡았다.

“잠깐. 왜 가는지는 말해줘야지.”

“왜겠냐?”

당연히 이 동네에서 느긋하게 살고 있던 어떤 고대의 식인 괴물에게 찍혔기 때문이다.

사실 준은 아직 나비가 구체적으로 방공호에 사람을 산 채로 가둬두고 배고플 때마다 하나씩 꺼내먹는 종류의 괴물이란 것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정황 증거로 보아 피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으니, 그거면 충분했다. 굳이 진실을 알겠다고 모험하다가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먼저 덤볐던 강은찬의 꼴을 보니 더더욱 알기가 싫었다. 알몸에 앞치마를 입고 꼬리 칠 준비하는 얼간이 말고, 자신의 이복동생이 암살에 실패했다는 부분 말이다.

은찬은 늘 준보다 훨씬 강했다. 은찬이 못 이기면 준도 못 이긴다. 그리고 준은 정말 되도록 싸움 같은 힘든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모로 봐도 도망가는 게 상책이었다.

어쨌든 은찬은 본래 뛰어난 살인 청부업자. 청부업자답게 준의 의도를 눈치챘다.

“누나를 피해서 도망가는 거야?”

“당연하지.”

준은 가벼이 작별인사를 건넸다.

“안 뒤지면 연락해라.”

“나한테 연락하려면 누나를 통해. 누나가 내 주인이니까.”

“미쳤냐……. 아무튼 간다.”

이러고 준이 훌쩍 떠나려 했다. 은찬이 또다시 얼른 붙잡았다.

“잠깐.”

“또 왜.”

준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은찬이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식은땀까지 흘리는 것을 보아 엄청나게 중대하고 위험한 얘기를 꺼내려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그놈의 알몸에 앞치마 입고 혼자 이불에 코 묻고 자위하고 있다는 뭐 그런 것들을 빼면, 근본적으로 무시무시한 상황이었다. 강은찬은 킬러이며, 그보다 더한 자에게 감금당해 있단 말이다. 여기서 나올 말이 무엇인가. 준은 덩달아 긴장했다.

은찬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형, 혹시…… 임신했어?”

“…….”

임…….

“뭐라고?”

“임신했냐고.”

준은……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 핵심 단어를 따라 내뱉었다.

“임신.”

“배 속에 아기.”

은찬이 다그쳤다. 준은 등을 돌려, 발자국을 남기면 안 되는데도 앞마당을 조금 서성거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진지하게 그를 쳐다보는 은찬의 머리통을 잡았다.

“머리 다쳤지.”

“안 다쳤어. 어젯밤에 누나 만났다며. 둘이 뭐 했어.”

“너 구하려다가 들켜서 도망쳤다, 등신아! 죽을 뻔 했거든?”

“!”

도망…… 들켜서 죽을 뻔?

너무 많은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은찬의 머리가 빠르고 냉철하게 돌아갔다. 은찬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준의 멱살을 잡았다.

“그런 음란한 짓을!”

이불이 흘러내려 결국 알몸에 앞치마 차림이 다시 드러났다. 눈에 띄면 안 되는 직업인 만큼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준이 비명을 질렀다. 고통스럽다.

“좀 가려, 시발! 음란한 건 네 머리통 내용물이고!”

“배 속에 아기가 생긴 거지? 나도…… 내가 형보다 더 예쁘고 가슴도 큰데!”

“상식적으로 남자가 어떻게 애가 생겨!”

“우리 누나의 존재부터 상식적이지 않아! 형 지금 임신해서 까칠해진 거지?”

“아악! 어젯밤에 죽을 뻔했거든? 근데 그냥 죽을 걸 그랬다!”

“어젯밤에 죽여줬다고?”

“어! 이제 너도 죽고!”

준이 은찬을 향해 전기 충격기를 내질렀는데, 은찬은 알몸에 앞치마 차림임을 신경 쓰지 않고 효율적인 동작으로 피했다. 동시에 준의 하나밖에 없는 안구에 큰 타격을 줬다.

준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시발놈아……!”

“가버려, 이 배신자야! 흑…….”

은찬도 쓰러져선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둘이 싸웠는데 둘 다 이기지 못했다. 패배뿐인 싸움이었다. 준은 간다고 소리치고는, 영혼에 상처를 입은 채 이번에야말로 훌쩍 떠났다.

어느 날 귀가했는데 옷장에서 가족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살인 청부업자의 삶이다. 둘 다 멀쩡히 살아있고, 심지어 연락처도 알고 있으니 이 정도는 나쁘지 않은 이별이다. 정말 이사를 하는 것뿐이다. 비록 서로 추잡한 모습으로 헤어지긴 했지만, 다음에 재회할 땐 둘 다 좀 더 성장해 있을까. 준은 조금 씁쓸하지만, 한편으론 후련한 마음으로 영원히 마을을 떠났다…….

25분 후에 다시 돌아왔다.

준은 아직도 거실에서 이불 애벌레가 되어 훌쩍이고 있는 은찬의 머리통을 겨냥하고, 힘껏 옷 가방을 던졌다. 은찬은 그 와중에 피한다고 피했는데 결국 안면 전체로 가방을 받아야 했다.

“읍!”

“제발 옷 좀 입어.”

“왜 돌아왔어.”

은찬이 차갑게 물었다. 꼴이 꼴이라 그다지 위협적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말싸움할 기력이 없다. 준은 본론부터 꺼냈다.

“나가는 길 출입 통제하던데 뭐 아냐.”

“!”

은찬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거 누나 잡으러 온 국가 정보원 격리팀.”

“……격리팀이 뭔데?”

“나도 처음 들어봤어. 새벽에 누가 우리 집 앞에서 기웃거리길래 잡아 봤더니 격리팀 팀장이더라. 근데 놓쳤어.”

“벌써 우리 집 됐냐?”

“팀장이 직접 움직이는 거 보니까 팀원은 많아 봐야 하나, 둘…….”

은찬이 턱을 짚고 중얼댔다. 준은 이마를 쳤다.

“그래. 새벽에 네가 싸울 때까지만 해도 멀쩡히 옷 입고 있던 거 봤다.”

“봤어? 형 변태야?”

“변태는 너고!”

신준은 경찰서에서 나비에게 겁탈당할 뻔했다고 눈물의 연기를 해낸 다음, 나비가 넋이 나간 틈을 타 그녀를 미행했다. 그래서 나비가 이 집으로 들어간 것도 봤고 새벽에 여기서 뜬금없이 강은찬이 나와 싸우던 것도 다 봤다. 그는 잠 안 자고 밤새 다 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 팀장이라는 사람이 병원에서 뭐라 말했는지도 들었다.

“아무튼, 따라가 봤는데, 입원 안 하고 내일 점심때는 집에 가겠대.”

“!”

“그거 지금 아니냐?”

***

그게 지금이었다. 국가 정보원 특수격리센터 전술팀 팀장 차유완은 양쪽 다리가 다 작살나서, 힘겹게 목발을 끌며 자신의 차로 돌아가고 있었다.

새벽 내내 자신의 팀원에게 연락하려 했는데 통신 수단이고 뭐고 다 부서졌다. 목숨을 건진 게 신기할 지경이다. 그는 병원에서 떨어진 곳에 세워둔 자신의 차까지 거의 한 시간을 땀 흘리며 걸어가 겨우 도착했다. 참고로 휠체어를 못 빌린 건 예산이 없어서다.

차유완 팀장은 운전석에 쓰러지듯 착석했다. 두 다리가 모두 박살 났으니 운전은 못 하지만, 그래도 스파이의 차 안에서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는 차 안에 숨겨둔 핸드폰을 꺼내 팀원에게 연락했다.

차유완 팀장이 팀원에게 전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자신은 중상을 입어 한동안 움직일 수 없다는 것. 포인트 지점에 숨겨둔 격리 대상의 머리카락을 찾을 것. 머리카락을 직접 서울까지 운반할 것. DNA 검사를 해서 인간이 아님을 밝힐 것. 그래서 추가 인력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추가 예산이라도 받아 맨날 점심으로 짜장면만 먹지 말고 이번엔 탕수육이랑 군만두도 추가하자, 얘들아. 그리고 나 죽을 거 같다, 데리러 와라……. 이걸 암호문으로 5초 만에 쳐냈다. 국정원 직원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숨을 돌리며 전송 버튼을 누르려는 그 순간, 뒤에서 창백한 손아귀가 나타나 그의 목을 졸랐다. 말할 것도 없이 강은찬이었다.

은찬은 차유완 팀장을 기절시키고, 죄책감을 못 이겨 고통스럽게 흐느끼다가, 그를 조수석으로 옮기고 운전대에 앉았다. 이 동네는 지리가 복잡하고 절벽이 많다. 경찰도 범죄 수사를 미지근하게 한다. 증거 인멸쯤이야 쉽다. 문제는 강은찬 그 자신의 양심이었다. 복잡한 마음과 함께 차가 출발했다. 은찬은 전면 창을 노려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누나를 위해 죽여야 해.’

은찬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이 자는 진작에 죽였어야 했다. 그의 실수로 몇 시간이나 더 살려두고 말았으니, 지금이라도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 강요받아서 하는 의뢰가 아니라 강은찬 그 자신의 선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누나.’

은찬은 결심을 굳혔다…….

다만 결심이 약간 모자라서, 은찬은 절벽 아래 뒤집힌 자동차 안에 갇힌 차유완 팀장이 정말 죽었는지 확인하지 못한 채 자리를 떴다. 설마 그가 머리카락을 숨긴 위치를 포함한 메시지를 끝끝내 전송하는 데에 성공했는지도 모르고…….

아무튼, 극도의 우울감에 사로잡힌 은찬은 터덜터덜 우회로를 이용하여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그즈음 나비의 미용실에서 금발이 된 할머니 단골 손님이 자기가 본 것을 친구들에게 다 말해버렸고, 친구들은 자신의 또 다른 이웃들에게 말했으며, 이웃들은 그걸 또 아는 사람들에게 다 말하고 있었다. 작은 동네에서는 그게 굉장한 이야깃거리였던 탓이다.

그리하여 결국 지나가던 강은찬까지 “그 미용실 이상한 아가씨가 결혼한대.” 따위의 소리를 들어버렸다. 그가 ‘이상한 아가씨’라는 정보만 듣고 바로 전나비를 떠올렸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간다.

은찬은 전력으로 달려갔고, 미용실 뒤쪽의 작은 창문에서 사람의 실루엣이 두 명이나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눈이 뒤집혔다. 그는 미용실 뒷문을 거세게 열었다.

“누님. 그 새끼 뭡니까.”

이렇게 된 것이다.

나비는 인간보다 조금 많은 것을 할 수 있기에, 은찬이 여기로 오고 있는 것까진 알고 있었다. 집에 있어야 할 그녀의 개가 마음대로 외출했다는 것까지는 조금 놀랐지만, 괜찮았다. 하지만 화를 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당황스러웠다.

누구 하나 죽일 기세라고 표현할 수준이 아니다. 이미 누구 죽이고 온 것 같다. 뭐, 실제로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는데,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비서 이연석이 봐도 좀 그래 보였다. 칙칙하고 어두운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비는 바람피우다 들킨 것처럼 놀랐다.

“너 왜…….”

“누구냐고요.”

은찬이 나비의 말을 잘랐다. 비서 이연석이 무서워서 얼른 대답했다.

“박용식 회장님 실종 건으로 왔…… 습니다.”

“근데 옷은 왜 벗고 있어.”

말이 반 토막 났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연석은 지금 죽었다. 그는 얼른 옷을 여미며 작게 말했다.

“유자차를 쏟아서요…….”

“은찬아.”

“누님.”

은찬이 또 나비의 말을 잘랐다. 배신당한 그는 분노로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탁상 위에 올려진 수갑을 들었다.

“이거 뭡니까.”

정신이 아득해져서 나비는 이마를 짚었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절망적인 전나비여도 알 수 있었다. 은찬이 뭔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다. 물론 유자차를 쏟고 수습하는 와중에 굳이 나비가 직접 몸을 닦았다는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듯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그것도 아닌 듯 맞는 듯하지만, 아무튼 전체적으로 보면 은찬이 오해했다는 말이다.

차분히 설명하면 풀 수 있다. 나비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동네 경찰이 두고 갔어. 단골 손님이라.”

“저 새끼한테 채우려고 하는 건 아닙니까?”

“나는 수갑이 필요 없어…….”

수갑을 쓰면 편하긴 하겠지만, 인간을 납치 및 감금하려면 나비는 맨손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은찬은 아직 아무것도 납득할 수 없었다. 은찬은 이연석의 허벅지에 매인 셔츠 가터를 가리켰다.

“저런 게 취향이십니까?”

“은찬아. 저건 그냥 옷이야.”

“그냥 옷이 아니라 변태 같은 옷입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 눈에만 변태 같은 옷이다. 듣고 있던 연석은 갑자기 복장이 부끄러워져서 유자차로 끈적이는 바지를 다시 입으려 했는데, 나비가 미용실용 큰 가운을 던져줘서 냉큼 그걸로 몸을 가렸다. 싸우는 와중에도 연석을 챙겨주는 걸 보고 은찬은 기가 막혔다. 그는 이제 연석의 수동적인 태도를 지적했다.

“당신은 아까부터 왜 가만히 있어?”

그리고 곧바로 나비의 의도를 의심했다.

“저를 버리고 새 개를 들이시려는 거죠?”

“은찬―.”

“저는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러면서 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나비가 조금 더 빨랐다. 나비는 몸을 날려 연석을 밀쳤고, 그가 앉아있던 의자에 조금 늦게 칼이 꽂혔다. 정확히 꼽자면 은찬은 저 불쾌한 침입자의 고간을 노렸다. 나비가 연석을 감싼 채 구르며 소리쳤다.

“은찬아. 사람을 막 죽이면 안 되지!”

“누님은 징기스 칸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여놓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정도는 아니거든!?”

“누님도 지구 온난화를 늦추는 데에 일조했어!”

“그렇게 말하니까 좀 뿌듯하다, 얘!”

기묘한 말싸움을 하며 나비가 연석을 보호하자 은찬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처음부터 잃을 이성조차 별로 안 남은 상태였는데 그것마저 휘발되어 버렸다. 은찬은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며, 어린애처럼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울면서도 몸으로는 빠르고 날렵하게 연석의 숨통을 노렸다. 나비는 거의 연석을 끌어안은 채 그를 막았다.

“좀 진정해 봐.”

“싫어! 그 새끼가 나보다 더 좋습니까!? 예? 막 보호해주고 싶을 정도로?”

“장소 좀 봐가면서, 어유.”

의자가 부서졌다. 은찬은 부서진 의자의 잔해를 무기 삼아 휘둘렀다. 좁은 공간 속에서 누군가를 보호하며 싸워본 적이 없는 나비는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그를 보호하면서도 속으로는 감탄했다. 은찬이 그녀가 봐왔던 인간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잘 싸웠던 탓이다.

다시 말하는데 나비는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인간들의 모습에, 구체적으로 꼽자면 그녀의 정체를 알고서도 그녀에게 덤비는 몇몇 인간들의 용기에 감동하곤 했다. 그녀가 순수하게 전사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잘 싸우면 가산점을 받는다.

나비는 사실상 은찬에게 공격받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큰 매력을 느꼈다. 공격하는 쪽이나 방어하는 쪽이나 실로 싸이코들이 아닐 수가 없었다.

“누나는 나 같은 귀여운 강아지를 집에 가둬놓고 바깥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어!”

그리고 은찬이 하는 소리가 은근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은찬아, 은찬아.”

“감히 누나한테 꼬리를……!”

나비는 연석을 보호하며 바닥을 굴렀다. 품 안의 그가 무겁진 않았지만, 자신보다 덩치가 큰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겨웠다. 특히나 강은찬 정도의 전사를 상대로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해야 했다. 나비에게 있어 이연석은 식량이 아니라 아직 동네 주민으로 분류되고 있었기에, 무고한 동네 주민을 죽게 내버려 둘 순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일터에서 시체를 치우기는 싫었다.

방어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나비는 좁은 휴게실에서 탈출했다. 은찬이 양손에 미용 가위 하나씩을 들고 곧장 뒤쫓았다. 육식동물의 그것처럼 변한 눈에서 누나의 사랑을 뺏어간 저 새끼를 반드시 죽여버리고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어머.”

이 와중에 나비는 멋있다고 감탄이나 했다.

개싸움을 벌이던 두 명과 끌려간 한 명은 미용실의 미끄러운 바닥으로 엎어졌다. 은찬은 그치지 않고 연석의 심장을 향해 가윗날을 힘껏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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