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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비트-6화 (6/57)

6화

나비의 옆, 바닥에 놓인 조그만 접시 위에서는 촛불 하나가 타올랐다. 나비는 불 없이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으니 촛불은 순전히 강은찬 때문에 가져온 것이었다. 은찬은 옷을 다 입은 누나와 촛불을 번갈아 봤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현실감각이 서서히 돌아온다.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삭막한 콘크리트 지하실, 어딘지 역한 냄새가 나는 공기와 그를 빤히 쳐다보는 연쇄 살인마.

낡은 캠핑용 야외 조명은 기어이 수명을 다한 모양인지 배터리를 갈아도 빛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비는 조명을 손으로 탕탕 쳐보다가, 시선을 느끼고는 은찬을 돌아봤다. 나비가 즉각 물었다.

“어디 아파?”

“아악!”

은찬은 자신의 뺨을 몇 대 세게 내려치고 급기야 벽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나비가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감싸 제지했다.

“자해는 안 돼.”

“오지 마, 만지지 마, 가까이 오지 마!”

강은찬이 발작하면서 구석으로 도망쳤다. 나비는 대놓고 상처를 받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누나라고 불러도 되냐며 친근하게 굴던 애가……. 뭐, 어둠 속에 반나절 좀 넘게 방치하기는 했다지만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나비는 시무룩해졌다. 이번엔 또 어디서 실수했을까. 인간관계는 늘 어렵다.

“진정해. 죽이려 온 건 아니야…….”

“저, 저리 꺼져.”

“밥 가져왔어. 저번에 준 건 먹었니?”

나비는 주섬주섬 밖에서 포장해 온 음식을 꺼냈다. 그리고 빈 그릇을 정리했다.

“먹었구나. 식욕은 있어서 다행이다.”

밥을 먹어야 살지. 나비는 안심하여 옅게 웃었고, 가져온 청소 도구들을 꺼냈다. 사람을 산 채로 감금해 두려면 밥 먹이기 뿐 아니라 청소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녀는 오늘 날 잡고 대청소를 하러 왔다. 나비는 흥얼거리며 바닥을 쓸고 닦았다. 저렇게 먹잇감이 겁에 질려 구석에만 있어 주면 청소하기 편했다. 물론 정신 상태는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뭐어, 숨만 붙어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방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은찬이 벌벌 떨며 가냘프게 말했다.

“초, 촛불 켜주세요.”

“어머?”

모르는 사이 촛불이 꺼졌다. 은찬은 잠시 기다렸다. 곧 촛불이 켜졌는데, 나비가 초 받침대를 들고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너무 가까웠다.

“!”

은찬이 벽 구석에 찰싹 몸을 붙였다. 나비가 배려 없이 물었다.

“우니?”

“…….”

우는 건 아니었는데 대충 비슷했다. 나비는 난처해졌다. 어떻게 달래야 하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모른 척하기도 좀 그렇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어제 강아지 같던 그의 눈빛을 떠올리고 은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많이 무서웠지?”

그러자 강은찬이 갑자기 또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나비는 섬세함이나 주의력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식량이 자해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그의 어깨를 잡았는데, 반대쪽에 초 받침대를 들고 있었단 걸 순간 까먹었다. 게다가 은찬은 저번 목욕 이후로 바지와 팬티가 다 찢겨 하의가 없었다.

촛농이 은찬의 말랑말랑한 엉덩이로 떨어졌다.

“아흑!”

내장에 날붙이가 들이박혀도 비명 하나 안 지르는 살인 청부업자가, 엉덩이에 가해지는 강한 자극에 소리를 질렀다. 의도치 않게 은찬을 괴롭힌 나비는 당황해서 그의 다리를 짚었다. 나비는 이때 은찬의 다리를 짚을 게 아니라 촛불을 수습해야 했다. 고여있던 촛농들이 은찬의 허벅지 안쪽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흑, 누……!”

예민해져 있던 성감대와 가까운 곳에 고통스럽고 짜릿짜릿한 자극이 내리꽂혔다. 은찬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누나’라고 외칠 뻔했다. 나비도 만만치 않게 당황해서 허벅지에 손을 대려다가, 이미 아픈 곳에 손대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에 그만 얼결에 그를 안아버렸다.

은찬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기에, 자연히 나비의 가슴에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헉, 누…….”

이번에도 누나라고 부를 뻔했다. 꿈속보다 훨씬 보들보들했다.

은찬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헉, 허억…….” 이러면서 손만 파들파들 떨며 괴이하게 굳어버렸다. 나비는 잘은 모르겠지만 ‘위로’가 효과가 있는 듯해 은찬의 머리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고 뒤통수를 쓸어줬다.

“착하지. 가만히 있어.”

“으, 어으, 으아아아…….”

“벌써 미쳐버렸구나, 불쌍하게…….”

나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신이 나가는 것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자해하는 쪽은 곤란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먹잇감들을 최대한 건강하고 신선하게 보존해두고 싶었다.

비록 나비의 긴 삶을 통틀어, 그게 무엇이든 그녀의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손에 꼽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은찬이 간신히 나비의 팔뚝을 밀었다.

“제, 제정, 제정신, 입니다만, 좀, 떨어져서…….”

“그래? 다행이다.”

나비가 반색하며, 은찬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고 뒤로 물러났다. 이상하게 이번 식량은 머리카락에 자꾸 손이 갔다. 간신히 해방된 은찬은 몸을 엉거주춤하게 구부리고 무릎을 끌어안았는데, 얼굴이 시뻘겠다.

“어디 아파?”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래?”

“…….”

정녕 모르는 것인가.

은찬은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눈만 내밀고 나비를 힐끔 바라봤다. 저 원망스러운 촛불 때문에 나비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요정처럼 보였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더러운 욕망 같은 건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은찬은 꿈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누나’까진 그렇다 친다. 이건 어제도 당당하게 요청했다. 나비는 은찬의 순결을 뺏어간 데다가, 아마도 연하는 절대 아닌 것 같았다. 근거는 없지만 그런 확신이 든다. 어쨌든 80% 정도로 자신감 있게 누나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정도는 씻김 당한 사람의 권리란 말이다.

그러나 ‘뉴냐’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은찬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벽에 머리를 박으려 했으나, 나비가 더 빨랐다. 나비는 아예 그의 발목을 잡고는 또 어제 목욕인지 빨래인지 능욕인지를 했던 곳으로 끌고 갔다. 끌고 가면서 촛농이 또 엉덩이로 떨어졌다.

“왜 자꾸 그래. 그게 다 우울해서 그래. 씻으면 괜찮아질 거야.”

당연히 은찬은 기겁했다.

“그걸 또 한다고요?”

“응.”

“싫습니다! 제가 하게 두세요. 왜 자꾸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해주십니까?”

“너를 못 믿어서…….”

은찬은 충격받았다.

“저 다 컸습니다?”

“그렇겠지.”

나비는 다 큰 성인 남성의 절규를 흘려들으며 그를 눕히고 본격적으로 옷을 벗겼다. 예전에는 그냥 입힌 채로 물속에 담갔다 빼서 빨래와 목욕을 한꺼번에 시도하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실수로 몇 번 익사시킨 후로는 나비도 많이 발전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은찬으로서는 이것이 최악이라 생각했고 맹렬하게 저항했다. 저번에 벗겨질 때도 곤란했지만 이번은 특히 더 곤란했다.

“안 됩니다, 이번만큼은 싫습니다.”

“왜?”

“왜냐니요!”

왜냐하면, 그의 잘못된 꿈이 그에게 잘못된 신체 변화를 안겨주었기 때문이고, 또한 그 결과물이 아직도 그의 팬티를 끈적하게 적신 채 남아 있던 까닭이다.

더불어서 아까 나비가 위로해준답시고 은찬의 머리를 껴안았는데, 이어서 이번에는 다리를 벌리고 올라타기까지 했으니 그것도 무척 곤란했다. 그는 지하실에 갇혀있음에도 아직 건강했다. 너무 뛰어난 신체 능력을 타고났고, 특히 나이가 어려 하반신이 굉장히 팔팔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그래서 은찬은 끙끙대며 저항했다. 은찬은 원체 힘이 셌다. 그런 그가 필사적으로 옷을 잡고 버티고 있으니, 자연스레 윗옷부터 찢어지고 말았다.

“아, 헉!”

몸에 그려진 용의 상태가 처참했다. 일전에 나비가 주물렀던 두툼한 가슴과 희고 끈적한 액체로 젖은 아랫배가 드러났다.

뒤늦게 은찬이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가려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비에게 장난감 취급당해 뻣뻣이 발기한 성기가 옷감에서 해방되자 퉁 튕겨 나와서는 배꼽에 철썩 붙었다. 심지어 아까 몽정했던 흔적이 골반과 음모에 잔뜩 엉겨 붙어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증거가 노출되었다. 은찬은 이제 와서 하반신을 가리기보다는, 차라리 얼굴을 가리는 걸 택했다. 신원을 감추는 것은 수치심을 느끼는 인간이 흔히 택하는 일이었는데 그는 그러면서도 허리 아래로는 저항을 멈췄다.

이제는 처분만 남았다. 은찬은 과호흡 수준으로 빠르게 호흡하며 평가를 기다렸다. 손가락 틈으로 살펴본 나비는 그의 다리 사이를 곤란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평가는 이러했다.

“……너 건강하구나.”

“아아악!”

나비는 비명을 지르는 은찬을 내버려 두고, 콘크리트 벽에다 예전에 박아 놓은 의미 모를 여러 설비 중 하나에다 촛불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저번처럼 간이 샤워기를 설치해 물을 틀었다. 목욕 준비에 자비가 없었다.

또다시 찬물을 시원하게 뒤집어쓴 은찬이 요란하게 발악하자 나비는 또 나름대로 그를 진정시킨답시고 몸으로 끌어안았다. 둘이 젖은 채로 밀착하게 되자 은찬은 더 발악했다.

그는 보일러가 뒤늦게 작동하여 따듯한 물이 나올 때쯤이 되어서야 소리 지르는 것을 멈췄다. 대신 흐느꼈다.

“얌전히 씻기만 할 테니까 혼자 목욕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보는 앞에서 혼자 하는 게 좋아?”

“네!”

“음.”

나비는 잠깐 고민했다.

“그래도 안 돼.”

은찬은 속이 터져서 나비의 어깨를 밀었다. 나비는 그의 위에 올라탄 채로 순순히 밀려나 줬는데, 엉덩이 밑으로는 여전히 은찬의 하반신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그래서 찬물을 맞았음에도 그의 남근은 여전히 단단하게 부풀어있었다. 그는 그게 민망해서 괜히 나비에게 화살을 돌렸다.

“정신을 못 차리겠습니다.”

“그래 보여.”

“남의 일 말하듯 하지 마십시오.”

“남의 일 맞는걸…….”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당신이 나쁜 겁니다.”

“그렇지, 내가 가두긴 했으니까.”

나비는 그걸 또 순순히 인정했다. 그가 또 울컥해서 나비에게 뭐라 한마디 하려는 순간이었다.

나비가 은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누나라고 불러도 돼.”

“…….”

그가 말을 잊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비는 청소 도구를 챙겨 온 바구니에서 거대한 칼을 꺼내 들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예?”

은찬의 성기가 급속도로 시들어버렸다.

‘……칼인데?’

몽정이고 지랄이고 그딴 꿈에 부풀어있을 때가 아니었던 거다. 은찬은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에서 눈을 못 뗐다. 까먹고 있었는데 이 여자는 연쇄 살인마다. 그리고 그는 죽을 날만 기다리며 지하실에 갇혀 있는 희생자다.

은찬은 벌벌 떨며 두 손을 모았다.

“오, 오늘이 마지, 마지막, 마지막입니까.”

“으음, 뭐가 마지막인지는 모르겠지만 생명은 누구나 늘 크고 작은 마지막을 맞이하며 산다고 생각해.”

나비의 손에서 칼이 화려하게 회전했다.

무의식중에 습관대로 돌리는 것 같은데 칼날 끝까지 그녀의 신체 일부인 것처럼 움직였다. 저런 건 처음 본다. 칼 가지고 노는 거야 강은찬이나 강은찬의 형님도 종종 하던 일이었지만 차원이 다르다. 은찬은 그녀가 지금껏 본 칼잡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고수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도 바깥에선 나름 킬러였고, 칼잡이들을 많이 보아왔는데도 그랬다. 너무 높은 경지를 목격한 충격에 의식의 한계가 확장될 지경이었다.

단순히 찔러 죽이는 수준이 아닐 거다. 저건 산 채로 해체된다.

그는 펑펑 울며 그동안의 삶을 속죄하기 시작했다.

“곱게 죽을 것 같진 않았습니다. 저는 이래도 싸요. 죄를, 흑, 죄를 너무 많이 지었으니까.”

“그래……? 내가 보기엔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연쇄 살인마가 그런 말 하니까 퍽이나 설득력 있군요.”

“그렇지?”

“방금 비꼰 겁니다.”

“오.”

나비는 몰랐던 사실을 지적받아 가벼이 감탄하고, 그의 눈가를 문질러줬다. 얼굴이 젖어있는 이유가 간이 샤워기에서 나오는 수돗물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잘 분간이 안 됐다.

“울지 마.”

“어떻, 끄흑, 어떻게 안 울어요.”

“울면 수염 밀기 힘들어져…….”

나비가 칼을 허공에 휘저으며 탄식했다.

은찬은 울면서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다가, 서서히 울음을 그쳤다. 대화가 좀 이상한 것 같다.

“……네?”

“잘못하면 베이니까.”

“…….”

뭔가 핀트가 어긋났다.

“……절 죽이시려던 게 아닙니까.”

“맞긴 한데.”

“거봐요.”

“오늘은 아니야.”

“뭐라고요?”

은찬은 방금 죽을 줄 알고 울음을 터트렸다는 게 부끄러워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칼은 뭡니까!”

“이거 면도기…….”

“면도기이이?”

그는 칼을 뺏었다. 나비는 그걸 또 그냥 어리둥절한 채 뺏겨주었다. 아무리 먹잇감이라지만 바깥에서 킬러로 살아온 사람이 무기를 손에 넣었는데 조금도 긴장하는 기색이 없어, 은찬은 그 와중에 자존심도 상했다. 하지만 어이없는 게 더 컸다.

“제가 학교는 못 다녔지만요.”

“그랬니?”

“그랬습니다. 그래도 이게 면도기가 아닌 건 압니다.”

은찬은 칼의 생김새를 다시 확인했다. 옛날식 면도기일 수도 있었다. 그는 옛날 면도기는 위험하게 생겼다는 걸 상식 수준에서 알고 있었는데,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랐다. 어쩌면 정말로 이렇게 생겼을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은찬에겐 이것이 면도기가 아님을 확신할 근거가 있었다.

“면도기가 이렇게 클 리가 없잖아요!”

그냥 칼이 무식하게 컸다.

나비가 감탄했다.

“예리한데.”

“‘예리한데’가 아니고요. 딱 보면 압니다, 보통. 누가 봐도 흉기잖습니까.”

“수염 밀 수 있으면 그게 면도기야.”

“이걸로 어떻게 밀, 으아악!”

나비가 은찬의 손목을 치며 그를 눕혔다. 은찬은 한쪽 팔 전체가 마비되는 듯한 통증에 칼을 놓쳤고, 나비가 그걸 우아하게 낚아채 입에 물었다. 심지어 그동안 거의 무표정이었던 주제에 지금은 좀 신나 보였다.

은찬이 넘어진 채 제 위의 나비를 올려다봤다. 칼을 입에 문 채 그의 위에 올라타, 물을 맞으며 즐거이 미소짓는 연쇄 살인마를.

“…….”

은찬이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오싹하게 전류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무서운데, 분명 무서운데 짜릿했다. 나비의 젖은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고 있는 게 황홀하고 좋았다.

나비는 오른손으로 아무리 봐도 면도기보단 대인용 살상 무기처럼 생긴 칼의 손잡이를 쥐고, 칼날 끝을 은찬의 안구에다 겨냥했다.

“보여? 네 생각 하면서 날 갈았어.”

“…….”

그는 말문이 막혔다. 뭔데 말은 로맨틱하고 난리지? 날을 어떻게 갈았는지 저거면 뼈도 종잇장처럼 썰리겠다.

은찬은 다시 벌벌 떨기 시작했다.

“오, 오늘 죽이려는 게 아닌, 아닌 거 확실하, 확실하시죠.”

“그럼. 피 한 방울 안 나게 해줄게.”

은찬이 믿을 건, 이 연쇄 살인마의 말뿐이었다.

나비는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가져온 바구니 속에서 면도크림을 꺼냈다. 면도칼은 정신 나간 주제에 면도크림은 또 제대로 된 거였다. 나비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상냥하게 그의 턱에다 크림을 발라 주었다.

은찬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동네 슈퍼만 가도 안전하고 제대로 된 면도기를 개당 100원에 살 수 있다. 그런데 왜 면도기가 저 모양인가. 면도크림 사면서 옆에 있던 일회용 면도기를 살 생각은 안 들었나. 저거 날 갈 시간에 그냥 사는 게 낫지 않나.

그러나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려면 턱을 움직여야 하는데, 지금 그 턱에 정신 나간 인간 사시미 칼날이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턱에 힘을 빼려고 했으나 좀체 마음대로 되지도 않았다. 칼이 워낙에 길어서 그의 눈앞으로 칼날이 왔다 갔다 했다.

은찬은 본디 살인 청부업자로,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겁을 먹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떨렸다. 그는 겁에 질려 울먹이면서 자신도 몰랐던 자신 안의 약한 부분을 강제로 드러낼 때 아랫배 어딘가에서 뭉근한 열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흐흥.”

그런데 나비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수염을 밀었다.

피부를 문지르는 손끝이 다정하고 섬세했다. 은찬은 이제 제 턱이 베이는 건지 아닌 건지 분간도 못 하고 굳어있었다. 이것도 일종의 정신 고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몸 위에 올라탄 어떤 연쇄 살인마는 눈치를 못 챈 모양인데, 벽에 걸어둔 초에서 촛농이 뚝뚝 떨어져 그의 발등에 떨어지고 있었다.

‘견뎌야 해…….’

영겁 같은 시간이 지난 후, 나비는 웃으며 칼을 내려놓고 그의 날카로운 턱을 비누로 씻겨 줬다.

“다 했어. 잘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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