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096화
현수는 잠들어 있는 가윤을 보더니, 슬쩍 옷을 걸치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 소연과 통화는 계속 이어졌다.
-아…. 아니에요. 그냥 그날 잘 들어갔는지 궁금해서 전화해봤어요.
‘말이 되는소릴 해야지….’
고작 잘 들어갔는지 물어보려고 술에 취해 이렇게 전화를 걸어오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녀는 자신과 연락을 하고 싶다는 고민을 하다가 술에 취해 술김에 전화를 건 듯했다.
현수는 그녀의 상황을 파악하며 말을 받아줬다.
“잘 들어갔지. 넌 지금 뭐하고 있어?”
-지금…. 그냥 술 한 잔 하고 있어요.
“누구랑?”
-친구랑 둘이서요.
‘그 친구만 떨어뜨리면 술 취한 애가 절로 굴러들어오겠네.’
현수는 그녀와 통화를 할수록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
“언제까지 마시는데?”
-모르겠네요. 이제 곧 집에 들어가려구요.
현수는 농담을 칠 타이밍이 보이자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 시간에 벌써 들어가? 약하네.”
현수는 저번 과팅 때부터 술부심을 가지고 있던 소연을 살살 긁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트리거가 되었는지 수화기 너머로 발끈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는거에요! 아니거든요? 밤새 마셔도 멀쩡하거든요?
“오~ 그럼 내일 아침까지 술 마시는 거 인증 가능해?”
-그니까 아쉽게도 같이 마셔주는 친구가 집을 가야되서 어쩔 수 없이 가야되는 거에요. 아시겠어요?
‘야. 대화 티키타카 너무 좋고.’
현수는 또다시 자신이 파고들 틈이 나타나자 놓치지 않고 슬쩍 자신을 밀어 넣었다.
“에이 그건 상관없지. 그럼 내가 대신 마셔줄게. 어딘데?”
현수는 소연을 도발한 미끼를 농담 섞인 말과 함께 던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덥석 물었다.
-저야 좋죠. 오빠가 견딜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아이고. 누가 할 소리를?”
-와. 진짜 나와요. 안되겠네. 여기저번에 왔던 골목 주점 근처에 포차에요. 도착하면 전화해요. 안 오시면…. 알죠?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현수는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뒤, 소연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어, 왜?”
-지, 진짜로 나와요?
“응, 진심인데?”
소연은 장난으로 받아준 것이 정말로 나올줄 몰랐는지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녀가 현수에게 마음이 있다면 지금 나가겠다는 것을 굳이 말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현수에게 이렇게 연락한 것 자체가 마음이 있고, 그래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뜻이었다.
‘전화가 아니라 대면해서 대화 나누는 건 더 좋아했음 좋아했지 거절할 이유가 없지.’
그리고 소연은 딱 현수의 예상대로 대답해주었다.
-알겠어요. 그럼 친구 곧 가니까 아까 말한 곳으로 와요.
“알았어. 기다려.”
현수는 그렇게 집에 들어가서 옷을 차려입은 뒤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 . .
“진짜 왔네요?”
현수가 문을 열고들어가자 바로 앞에 소연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럼 거짓말인줄 알았어?”
“긴가민가했죠.”
소연은 현수가 도착한 것이 기분이 좋은 듯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많이 마셨어?”
현수의 말에 소연은 또다시 술부심을 부리며 대답했다.
“아니요. 이 정도는 간에 기별도 안 가죠.”
“근데 얼굴은 되게 빨간데?”
현수의말에소연이 고개를 저었다.
“주량이랑 그거랑 상관없는 거 알죠?”
“그래. 그렇다고 하자.”
현수는 슬쩍 그녀의 앞에 앉아서 잔을 내밀었다.
“자작하게 할 건 아니지?”
“그럼요.”
소연이 술병을 들고서 현수의 잔에 따라줬다.
그렇게 두 사람의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 * * *
‘얘는 생각보다 순수해 보이는데?’
소연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주영과 달리 내숭을 떠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처음에는 활발하게 현수와 곧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주영이 때문인가?’
현수는 표정이 안 좋아진 그녀에게 먼저 선수를 쳤다.
‘모르겠으면 확인해보면 되지 뭐.’
“너 근데 주영이가 나 만나는 거 알고 있어도 돼?”
“네?”
현수의 말을 듣자 소연은 마치 찔리기라도 하는 듯,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현수는 그녀가 그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긋이 쳐다보며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아, 그게 그니까…. 어제 주영이 만났어요?”
그녀는 어색한 말투로 말을 돌리기를 선택했다.
“응, 만났지.”
만났다는 말을 듣고서는 이제 체념한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서 현수는 코웃음이 나왔다.
‘보아하니 얘는 주영이가 마음에 걸리나 보네.’
소연은 현수에게 마음이 있는데, 어제 주영을 만났다는 소리에 그녀와 잘 됐는지 알고 체념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현수는 그 반응에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그럼 내가 자기 친구랑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연락할 정도로 나한테 마음이 있다는 거 아냐.’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누가 먼저 좋아했냐의 개념이 의미가 없지만, 여자들 사이에서그것은 굉장히 예민한 문제였다.
먼저 침 바른 사람이 짝사랑할 권리도 생기는 것. 그것이 바로 여자들 사이의 의리였다.
‘마침 잘됐네. 얘 입도 닫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근데 별 일은 없었어. 왜 그래?”
어찌됐건 소연을 먹으려고 했던 현수는 그녀에게 다시 희망을 불어넣었다.
소연은 다시 눈이 반짝이며 빛을 냈다.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주면안돼요?”
“음…. 그냥 잠시 만나서 이야기 좀 나누다가 헤어졌어.”
“아…. 그렇구나.”
소연은 친구가 차였다는데 표정은 오히려 좋아보였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던 그녀는 술기운과 다시 되찾은 용기때문인지 본심이 튀어나왔다.
“사실 원래 제가 먼저 연락하고 싶었는데 주영이가 오빠한테 빠진 것 같아서 연락 못했어요.”
“응?”
현수는 갑자기 급발진 해오는 소연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얘 설마?’
“오빠는 주영이 어떻게 생각하세요?”
현수는 소연의 표현방식에서 굉장히 께름칙함을 느꼈다.
‘일단 받아는 줘야겠지…?’
현수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소연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주영이보다 너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게 맞지 않아?”
소연은 심장이 쿵 떨어진듯한 표정으로 안그래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네, 네?”
현수는 미소를 지우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근데 나도 좀 걱정이 되는게 아무래도 너희 친구 사이가 멀어질까봐 걱정이네.”
소연은 현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표현이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좋아해야할지 걱정을 해야할지 혼란스러워보였다.
“그…. 저도 좀 걱정은 되네요.”
“일단 내가 주영이한테는 확실하게 선을 그을테니까 우리 몰래 만나면 되지 않을까?”
“그, 그거 조, 좋을 것 같아요.”
소연은 당황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듣는지 무슨 말을 내뱉는지 모르는 듯 보였다.
‘심장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네.’
그리고 현수는 조금씩 소연이 어떤 사람인지 확신이 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서로 까도 괜찮아졌을 때, 그때 말하면 되지 않을까?”
한 번 더 소연과의 만남을 비밀로 하자는 말에 그녀도 정신을 차리고 잠시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이제 서로의 마음도 확인했고, 여기서 계속 있기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이제 우리 나가서 좀 걸을까?”
현수는 계산을 한 뒤, 소연의 손을 잡은 채로 인적이 한산한 거리로 향했다.
그러나 고작 손을 잡은 채 걸었을 뿐인데 반응이 꽤나 격렬한 것을 보고 현수는 한숨이나왔다.
‘확실한 것 같은데…?’
처음 볼 때부터 소연은 남자경험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러나 경우가 좀 심한 것이 느껴졌다.
“소연아, 너는 제일 최근에 헤어진 게 언제야?”
“네? 음…. 저는 헤어진 적이 없어요.”
‘이러면 오늘 따먹기는 글렀네.’
현수는 허무함이 밀려왔다.
‘기껏 시간을 내서 나왔는데…. 그래도 아다 아니야?’
그러나 동시에 묘한 승부욕도 올라왔다.
원 큐에 바로 침대로 향하기 힘든 사람이 만약 첫경험을 이미 했던 사람이라면 뒤도 안돌아보고 집으로 향했을거다.
하지만 첫경험을 빼앗는 것은 언제나 보람이 가득 찼기에 오늘 바로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힘들더라도 천천히 시간을 들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정리하자마자 현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렇게 예쁜데 왜 남자들이 안 건드렸데?”
다른 사람이 했다면 인상을 찌푸렸을 느끼한 말이지만 현수가 이런 말을 꺼내자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현수의 어깨를 쳤다.
“무슨 그런 소리를…! 그보다 오빠는 여자들 엄청 많으실 것 같은데요? 멘트가 무슨….”
“소연아, 진심으로 별로 안 만났어. 생각해봐. 학생때는 맨날 공부만 해서 의대 들어갔는데 이제 개강한지 두 달째야. 만날 시간이 있었겠어?”
“음….”
나름 일리가 있는 말에 소연이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으며 수긍했다.
‘이제 슬 나가서 진도를 빼야 되는데.’
현수는 어디를 가야할지 고민했다.
‘좀 어둡고 분위기 잡기 쉬우면서도 사람이 없이 단 둘이서 있을 만한 곳.’
현수는 고민하는 와중에 그녀가 질문을 했다.
“오빠는 평소에 혼자서 뭐해요?”
“난 평소에 혼자 안 있지?”
“아 뭐야…. 재수없어.”
현수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평소에 뭐하길래 남자친구도 없이 혼자 지냈어?”
“음…. 저는 그냥 혼자 있는게 편했었거든요. 아! 저 혼자서 영화도 되게 많이 보러가요.”
‘영화? 영화관?’
어둡고 분위기 잡기 쉬우면서도 사람이 없이 단 둘이서 있을 만한 곳.
그곳에 사람만 없다면 단 둘이라는 조건까지 충족시켜주는 장소였다.
현수는 소연과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휴대폰을 꺼내 현재 상영중인 영화 중에서도 인기가 크게없고 상영 끝물인 영화를 찾았다.
‘이거다!’
“소연아, 우리 이제 어디로 갈까?”
당연히 이 자리가 끝이 아니라는 식의 말에 소연은 살짝 머뭇거리면서도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네? 어디 갈까요?”
“음…. 아! 아직 영화 상영하고 있을건데 우리 영화보러갈까? 나 보고 싶었던게 있거든.”
현수는 그렇게 말하며 휴대폰을 내밀며 상영예정표를 보여줬다.
현수는 소연이 이 영화를 봤는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과 있을 핑곗거리가 필요한 것인만큼, 그 핑곗거리를 제공해주면 덥썩 물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쁘지 않네요. 저도 오랜만에 다른 사람이랑 영화 보겠네요.”
소연도 쉽게 동의를 했고, 아까만해도 손을 잡는 것이 어색하던 그녀도 영화관을 향하는 지금은 꽤나 자연스러웠다.
현수가 고른 영화는 전형적인 한국 코미디 영화였다.
현수는 팝콘과 콜라 등을 산 뒤에 상영관으로 입장했다.
상영관에 들어섰을 때는 아쉽게도 한 커플이 있었지만 현수의 자리와 한참 떨어져있어서 서로 보기는 힘들어 보였다.
‘뭐 이정도면 딱 좋네.’
애초에 인기도 거의 없었고, 상영기간이 거의 끝물이었기에 사람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자 선수 입장!
‘진짜 한국 영화는 2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네.’
20년 뒤에도 나오는 뻔한 클리셰, 뻔한 대사에 지루함을 느끼던 현수는 은근슬쩍 소연의 무릎쪽을 잡으면서 말했다.
“진짜 꼭 한국 영화는 저런 대사를 치더라.”
현수의 말에 소연이 웃음을 터트리며 격하게 공감을 했다.
“맞아요! 저런 종류의 영화는 꼭 똑같은 대사를 치더라고요.”
어느덧 영화는 후반부를 향했고, 여전히 현수는 소연의 무릎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그녀는 손이 자꾸 신경 쓰였는지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