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044화
다음날 아침, 자연스럽게 눈을 뜬현수는 암막커튼 사이로 흘러나오는 햇빛을 멍하니 쳐다보며 정신을 차렸다.
어젯밤 그렇게 격렬하게 했는데도 고작 몇 시간의 잠으로 멀쩡하게 눈을 떠지는 것이 정말 다시 한 번 젊음의 위대함을 느꼈다.
시간을 확인하니 퇴실 시간까지 3시간 정도 남아있었고, 효주를 깨울까 하다가 그냥 팔을 괸 채 누워서 그녀를 관찰했다.
“으…. 음….”
그녀는 어제 하루가 많이 고단했는지 약하게 코를 골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끔 몸을 뒤척이며 괴상한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입을 헤 벌리고 침을 흘리기도 하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참 예쁜 얼굴이었다.
‘오늘은 제대로 데이트나 하면서 꼬셔볼까?’
그녀의 자는 모습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구경하던 현수는 문득 그녀와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전생에서도 공부에 찌들어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해보지도 못한 채 매번 섹스만 했었고, 이번 생도 매번 섹스만 하다보니 여유롭게 남들도 다 하는 데이트를 가끔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여전히 괴상한 자세를 취하고 침을 흘리고 있는 효주를 보며 어떤 데이트를 할까 고민하고있을 때쯤, 효주가 슬며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현수와 눈을 마주쳤고, 몇 초간 눈을 마주친 상태로 정적이 흘렀다.
“꺄아악!”
효주는 지금 그녀가 취하고 있는 자세와 얼굴에서 느껴지는 액체의 감촉과 함께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현수를 보며 창피함에 소리를 지르며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현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섹스까지 하면서 못 볼꼴 다 봤는데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거지?’
여자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씩은 정말 이해가 안가는 것 같았다.
효주는 조금 진정이 됐는지 이불을 아직 뒤집어 쓴 채로 말했다.
“왜 안 깨우고 나 쳐다보고 있어?”
“그냥 예뻐서쳐다보고 있었어.”
현수의 대답에 효주는 또 아무말 없다가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거짓말 하지마!”
“진짠데….”
현수의 말에 효주는 이불을 슬쩍 내리고 눈만 빼꼼히 내밀며 새침한 말투로 말을 돌렸다.
“그래서 지금 몇 시야?”
“지금 10시야.”
“몰라…. 나 더 잘 거야.”
이불을 뒤집어쓰며 얼굴을 다시금가린 채 효주는 씩씩대며 말했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진짜 잘 거야?”
현수의 달콤한 저음의 목소리에 효주도 한층 수그러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몰라….”
현수는 이불을 들추고 효주와 눈을 마주하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민망한 듯 눈알을 돌리며 현수와 눈을 계속해서 피했다.
현수는 아까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데이트코스를 효주에게 제안했다.
“오늘 드라이브 하러 갈래?”
이제 갓 대학생이 된 그들의 데이트는 아직 고등학생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신선함을 찾던 현수는 성인이 돼서야 할 수 있는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그제서야 현수의 눈을 마주치며 의아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드라이브? 운전 할 줄 알아?”
현수는 수능을 치자마자 겨울방학때 면허를 바로 딴 기억이 있기 때문에 차를 렌트하는데도 문제가 없었고, 전생에 운전도 몇 번 해봤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나 1종 보통이야.”
“….”
처음 보는 현수의 허세 가득한 말에 효주는 할 말을 잃은 듯 불신 가득한 눈으로 현수를 게슴츠레 쳐다봤다.
장난스레 말하긴 했지만, 자신을 못 믿는 듯 바라보는 효주를 보며 약간의 오기가 생겼다.
“나 못 믿어? 나 진짜 운전 잘한다니까?”
효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석연찮게 대답했다.
하하….
“알겠어…. 근데 차는 있어?”
효주의 어색한 웃음과 마지못해 하는 대답에 현수는 장난으로 하던 허세가 진심이 되었다.
“차는 빌리면 되지. 나 면허 딴 지 1년 넘었어. 어디로 갈까? 강원도? 인천? 말만 해.”
‘내가 겉은 이래도 나이 꽤나 먹은 아저씬데 운전 하나 제대로 못 하겠냐.’
효주의 도발 아닌 도발에 현수는 귀엽다는 듯 웃으며 곧장 쉐어링카 어플로 퇴실 시간에 맞춰서 차를 예약했다.
그 후 꼰대인 척 자신의 운전실력을 기대하라는 듯 허세를 부렸다.
약간의 허세를 부리는 듯 한 드립에 효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짜 운전 잘하나 지켜본다?”
“기대하라고.”
퇴실 시간이 다 되자마자 두 사람은 곧바로 차가 준비된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현수는 휴대폰에 네비를 찍은 뒤, 효주가 안전벨트를 메자마자 시동을 걸고서 매끄럽게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로에 나간 이후부터 굉장히 부드럽게 차가 나아가자 효주는 깜짝 놀랐다.
“뭐야? 진짜 좀 하네?”
“그럼 진짜지. 솔직히 잘하는 건 아니고, 그냥 할 줄 아는 수준이야.”
현수는 운전하기 전에는 허세가 가득하더니 실제로 운전을 하고 나서부터는 갑자기 겸손을 떨었다.
기대감이 전혀 없었던 효주의 눈빛이 막상 운전을 시작하자 확 달라져 보였다.
“어디서 배웠어?”
“그냥. 아버지가 운전도 기술이라고 스무 살 되자마자 바로 아버지 차 몰게해주셨어.”
“오…. 되게 멋있으시다.”
현수는 효주를 슬쩍 보고 우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악셀을 밟아 속도를 조금높였다.
“재수할 때 가끔 바람 쐬러 나가던 곳이 있는데 거기로 가자.”
주말의 서울 도로상황은 벌써부터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였고, 현수는 한적하고 뻥 뚫린 도로를 달리고 싶었다.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점점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
서울을 벗어나는 것을 기점으로 점점 도로에 차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현수는 과하지 않게 속도를 조금씩 높였다.
그리곤 가끔 신호가 걸릴 때마다 블루투스와 휴대폰을 연결해 음악을 틀었다.
“오~ 이 노래 뭐야? 되게 좋은데?”
회귀 전 기준으로 현수는 옛날 사람이라서 플레이리스트에 대한 걱정이 조금 있었지만, 그래도 현 시점에서는 통하는지 효주는 적절한 음악에 신나는 듯 말했다.
답답했던 도로는 사라지고 톨게이트를 통과해 고속도로가 나오자 효주는 제대로 된 드라이브를 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얼굴에 환한 미스를 띈 채 노래를 흥얼거리며 현수에게 재잘거렸다.
현수는 10년이 넘는 시간만에 잡는 운전대였던만큼 고속도로를 나오자 손에 땀이 나며 꽤나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금세 적응이 되어 나중에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효주의 손을 잡은 채 그녀와의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근데 언제까지 옆에 손잡이 잡고 있을 거야?”
효주는 본능적으로 창문 위에 달린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고, 현수의말에 그것을 깨달았는지멋쩍은 웃음과 함께 손을 떼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그들은 이내 웃음이 터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도착하는 내내 이어졌다.
효주는 정말로 즐거웠는지 현수가 차를 몰고 첫 번째로 도착한 한적한 동네의 맛집에 들어서고 나서도 입가의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여긴 어디야?”
음식점의 외관은 꽤나 허름한 편이었지만, 주변에 주차된 차들의 대수가 꽤 많았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묻는 그녀의 말에 현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가끔 오던 곳이야. 너도 먹어보면 놀랄걸?”
안으로 들어서자 손님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외관과는 다르게 실내는 깔끔하고 모던한 스타일의 인테리어였다.
현수는 효주를 창가 쪽 구석 자리로 데리고 가 능숙하게 메뉴를 주문했다.
“진짜 몇 번 와봤나 보네? 여긴 어떻게 알아?”
“수능 끝나고 자전거 여행하면서 찾은 곳인데 너무 맛있어서 가끔 찾으러 왔었어. 여자친구 생기면 꼭 데리고 오고 싶었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효주의 눈치를 살피자 그녀는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리고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척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 오는 건데.’
사실은 오 년 뒤에 맛집으로 유명해져 온갖 유튜버들이 찾아와서 처음 오는 현수도 능숙하게 주문을 할 수 있었다.
인테리어를 구경하며 이리저리 사진도찍고 이야기를 나누고있을 때쯤, 예쁘게 플레이팅 된 음식이 나왔다.
“우와. 진짜 이쁘다. 먹기 너무 아까운데?”
“그렇지? 이래서 여자친구랑 같이 오려고 했어.”
현수는 말을 끝내고 나서도 수저를 들지 않고 효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안 먹어?”
“사진은 안 찍어도 돼?”
효주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허겁지겁 휴대폰을 꺼내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으며 말했다.
“진짜 센스 하나는 최고인 거 같아. 깜빡할 뻔했네.”
효주는 포토타임이 끝나고 수저를 든 채 현수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크게 한 입 음식을 베어 문 효주는 눈을 휘둥그레지며 감탄했다.
“우와, 진짜 맛있는데?”
현수는 귀여운 효주의 반응에 아빠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먹는 모습을 구경하며 수저를 들어 맛보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식당을 나선 그들은 들뜬 마음으로 근처를 잠시 산책 한 뒤 차로향했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
차에 올라탄 효주는 기대감에 젖은 눈빛으로 현수에게 물었다.
효주의목소리와 표정은 처음 서울에서 별다른 기대 없이 차에 올라탈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만큼 맛집이긴 했지.’
드라이브 코스부터 방금 나온 음식점까지, 세 시간 가량의 데이트 코스는 효주가 한석과는 해보지 못했던 색다르고 데이트다운 데이트였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 또한 현수는 자신 있었다.
“밥 먹었으며 카페로 가야지. 이번에도 되게 좋을 걸?”
“오. 자신 있나 본데?”
“당연하지. 여기가 내가 가본 곳 중에 제일 분위기가 좋았어.”
“뭐야? 누구랑 그렇게 많이 돌아다닌거야? 의심스러운데?”
현수는 효주의 말에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나 진짜 혼자서 바람 쐬는 게 좋아서 이리저리 많이 돌아다녔어. 진짜야.”
효주는 피식 웃으며 약간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차 있으니까 되게 좋네. 이런 데이트는 처음 해보는 것 같아.”
“그래? 그럼 여태까지 어떻게 놀았어?”
‘한석이랑은 이렇게 안 놀아 봤어?’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효주는 현수의 말에 살짝 얼떨떨한 표정으로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악셀을 밟았다.
이번 드라이브도 예쁜 가로수길이 펼쳐진, 뻥 뚫린 코스였다.
효주는 음악을 들으며 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는 한석과의 비교되는 데이트가 마음에 걸리는지 밥 먹기 전보다 텐션이 떨어져 보였다.
현수는 효주에게 적당한 말을 걸어주다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아까 전에 잡았던 것과는 달리 효주도 현수의 손을 꼬옥 잡으며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렇게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드라이브 데이트는 이어졌다.
한참을 수줍어하던 효주가 입을 연 것은 저편의 건물을 본 순간부터였다.
“어? 헐! 설마 저기가는 거야!?”
현수는 효주가 기뻐하는 반응을 보이자 피식 웃으면서 차를 그 건물의 주차장에 주차했다.
효주가 호들갑을 떨며 예쁘게 꾸며진, 반짝거리는 건물을 차창 너머로 올려다봤다.
* * * *
음식점과 마찬가지로 건물은 외관보다 내부가 더 화려했다.
다른 점이라면 건물은 외관도 깔끔하고 예뻤지만.
마치 현대에 귀족의 저택이 존재했다면 이런 디자인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세련되고 고급진 인테리어에 효주는 넋을 놓고서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효주를 보며 역시 카페는, 특히 여자에게 카페는 음료보다 인테리어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 어때? 예쁘지?”
“응. 엄청 좋은데?”
효주가 눈을 흘겼다.
“너 진짜 혼자 온 거 맞아?”
현수가 의아한 눈으로 효주를 바라봤다.
“남자애가 무슨 일로 이런 데를 와?”
“여기 커피가 얼마나 맛있는데?”
효주의 미간이 내천자를 이루며 현수에게 쏘아댔다.
“그걸 믿으라고?”
현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않게말했다.
“마셔보면 알걸?”
현수는 효주의 손을 잡아 이끌어 카운터로 향했다.
이제 자연스럽게 잡는 손에 효주는 약간 신경이 쓰이는지 현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지만 현수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효주는 손에 대한 의식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앞에 화려하게 데코레이팅된 디저트들이 펼쳐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