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001화
수능 만점.
한국대 의대 수석입학자.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로 대표되는, 최고 인기 전공인 성형외과 전공.
레지던트 2년 차임에도 이미 조교수 내정.
성형외과 의사로서 가져야 하는 최고의 스펙, 완벽한 외모.
이 모든 게 현수를 수식하는 설명들이었다.
학벌. 재력. 외모.
모든 걸 갖추게 될 나는 빛나는 미래를 향해 그저 걸어가기만 하면 됐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작은 한마디 거짓말 때문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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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년에 말이야. 한국대 의대 수석이었던 사람이었어. 어!”
현수가 막걸릿잔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눈앞의 학생은 현수의 자기 자랑을 으레 노가다꾼들이 하는 허세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아, 진짜요? 근데 왜 이런 거나 하고 계세요?”
현수는 씁쓸하게 웃으며 학생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유를 말하면 학생이 자신을 벌레 보듯 쳐다보는 눈빛으로 내려다볼 것만 같아서이다.
차라리 다른 노가다 꾼들처럼 허세를 부리는 사람으로 남는 게 나았다.
“됐고, 너는 몇 살이야?”
“저 27살이요.”
“딱 좋을 때구만.”
사실 현수와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외모상으로만 보자면 두 사람의 관계는 거의 삼촌과 조카 사이로 같았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겪은 세월의 풍파가 그의 얼굴을 망가트린 것이었다.
배우, 아이돌을 막론하고 수없이 많은 길거리 캐스팅을 받게 했던 외모도, 반복된 노가다와 현실을 잊기 위해 마신 끊임없는 술로부터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저 현수의 얼굴에 남아있는 것은, 그가 왕년에한 외모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들게끔 하는 과거의 흔적들 뿐이었다.
“딱 좋은 때긴요. 한참 머리 아플 시기구만.”
청년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남자에게 있어 이십 대 후반이라는 나이는 군대도, 대학도 끝나고, 이제 사회로 나가야만 하는 혼란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수는 청년의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그리움에 젖은표정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이십 대 후반이라는 나이는 혼란도, 고민도 없던,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학생을 바라보며 현수는 과거를 떠올렸다.
스물아홉 살 무렵.
그때 현수는 한국대 의대를 졸업한 뒤 병원에서 레지던트 2년 차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해에 현수의 삶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현수는 뉴스에서나 일어난 법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사건의 시작은 현수가 길을 가다가 어떤 스마트폰을 줍게 되는 것이었다,
당직이 끝난 뒤 잠시 바람도 쐬며 외출할 겸, 현수는 휴대전화의 주인을 찾아 돌려주러 길을 나섰다.
그렇게 만난 휴대폰의 주인은 그녀는 현수보다 3~4살 정도 어려 보였고, 눈길을 확 끌만큼예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눈꼬리가 올라가 안 그래도 사나워 보이는 인상이화장으로 더욱 도드라졌다.
한마디로 싸가지가 없어보였다.
‘아, 네. 이거 맞으세요?’
‘네네. 맞아요. 수고하세요.’
현수는 사례금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늦은 데다가 고맙다는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현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애초에 대가를 바라고 한 선행이 아니었기에 그는 불쾌함을 털어버리기로 맘먹고서 다시 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정확히 하루가 지난 뒤.
평소와 같이 당직을 선 뒤 고단했던 하루를 마무리 짓고 잠이 들려고 하던 찰나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김현수 씨, 현 시간부로 당신을 성폭행 혐의로 긴급체포합니다.’
현수는 머리가 새하얘졌다. 미란다의 원칙을 내뱉는 형사의 말은 머릿속에 들려오지도 않았다.
자신은 그럴 시간도, 이유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일을 저지른 일도, 오해받을 일도 하지 않았다.
잠시 정신을 차린 현수는 형사를 붙잡으며 말했다.
‘잠깐만요,무슨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요. 저 진짜 아닙니다.’
‘김현수 씨 아닙니까?’
‘아니 제가 김현수는 맞는데요…. 그니까 저느….’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서로 가서 나누시죠.’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한 채 현수는 형사들에게 둘러싸여 반강제로 경찰차에 실려 갔다.
유치장에 가둬진 현수는 침착하려 애썼지만, 도무지 침착할 수가 없었다.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지…? 성폭행이라니…! 이게무슨 소리야!’
‘침착하자. 레지던트를 시작하고 나서는 하루종일 병원에만 붙어있었잖아. 알리바이도 확실할 거야, 김현수. 누명 벗을 수 있어. 걱정하지 마.’
현수는 그렇게 다짐하고서 마음을 굳게 먹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시간대 알리바이를 대라고요. 김현수 씨! 이 시간대 알리바이가 없잖아요! 정확히 사건이 발생한 시각인데!’
‘이봐요 김현수 씨! 피해자가 당신이 성폭행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잖아요! 이 통화기록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첫 대면조사 날, 현수는 검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면 될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검사는 현수를 범죄자로 확신한 듯이 몰아세웠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낀 현수는 자신을 가해자로 지목했다는 피해자를 만나고 싶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피해자 보호라는 명목하에 현수는 피해자를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된 즈음.
현수의 인생이 망가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발생했다.
[수능 만점자, H대 의대 수석 엘리트의 이중성]
현수의 사건이 유력 일간지에 실린 것이었다.
성범죄자라는 낙인.
그것은 그의 상상 이상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그 낙인은, 국민정서법이라는 이름 아래서 현수의 가족들을 연좌제로 옭아매기 시작했다.
현수의 부모님은 그를 믿어주었다.
하지만 평소 개천에서 난 용이라며 입이 닳도록 아들 자랑을 하던 현수의 부모님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성범죄자라더라는 소문은 견디기 힘들어 보였다.
더 큰 문제는 현수의 여동생인 김현지였다.
잘생긴 외모에 의대생이라는 오빠를 둬서 평소 부러움을 사던 동생은 학교에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들을 듣고 다녔다.
어느 날 갑자기 면회를 온 현수의 여동생은 다짜고짜 그에게 악에 받친 소리로 울분을 토했다.
“미친 새끼야! 너 때문에 내가 학교에서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 알아? 벌레만도 못한 새끼. 너 같은 쓰레기는 그냥 거기서 평생 썩어야 해.”
현수는 그날 이후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래도 자주 면회를 와주시던 부모님의 발걸음이 뜸해졌고, 그나마 찾아올 때조차도 매번 점점 더 부모님의 얼굴이 수척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미안하다.이번에 찾아간 사람도 안된다고 해서….’
그리고 백방으로 변호사를 수소문하던 부모님의 입에서는 매번 변호사를 구하지 못했다는 말만 되풀이됐다.
결국 현수는 자신을 변호하겠다는 사람을 구하지 못해 국선 변호인을 선임해야만 했다.
그리고 재판이 갓 시작됐을 무렵.
갑작스럽게 여동생이 면회를 왔다.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버린 삶. 유일하게 남은 희망은 가족뿐이었던 현수에게 여동생의 면회는너무나도 반가운 것이었다.
그러나 면회실로 들어간 순간, 현수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현수와 현지를 가로막은 벽 너머에는 머리가 엉망진창으로 밀리고, 안대로도 가릴 수 없을 수 없을 정도로 멍이 든 눈과 다 튼 입술을 한, 저번에 봤을 때보다 눈에 띄게 마른 동생이 앉아있었다.
‘현지야. 꼴이 대체….’
‘아가리 닥쳐. 다 너 때문이니까. 마지막으로 경고하러 왔어. 다신 우리 가족 앞에 나타나지 마. 그냥 죽을 때까지 없는 사람처럼 지내.’
‘현지야…. 제발…… 제발……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정말이야. 믿어줘…….’
‘네가 했든 안 했든, 그건 이제 중요한 게 아니야.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박살 났어. 알아? 내 인생을 망가뜨린 건누군지도 모를 그 여자가 아니라 너라고!’
표독하게 쏘아붙인 여동생의 말에 현수는 억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 시간 이후로 내 눈앞에 띄면 둘 중 하나는 죽는 거로 생각해. 진심이야.’
현수의 여동생은 그에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서 사라졌다.
그렇게 현수의 여동생이 그를 저주하며 떠난 뒤, 가족들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 후 현수는 절망감에 파묻힌 채 재판일정을 하루하루 흘려보내야 했다.
그런데 재판이 이어지는 동안, 현수는 서서히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현수의 재판이, 너무 미뤄지는 것이었다.
변론기일이 수시로 연기되고, 연기 끝에 열린 공판에서는 주제가 쳇바퀴를 돌았다.
종래에는 선고 공판까지 재차 연기되었다.
그렇게 현수는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긴 시간에 걸쳐서 재판을 진행해야 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고, 현수는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피해자가 낳은 아기의 DNA와 자신의 DNA가 일치하지 않았고, 현수와 그녀가 만난 시간이 무척이나 짧았다는 것이 판결의 이유였다.
애초에 기소된 사실조차 의문이었다.
조금만 조사해봐도 현수를 용의선상에 올리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고, 사건이 이렇게 오래 끌릴 만한 것도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검사는 항소했지만, 어찌 됐건 1심에서 무죄가 나온 현수는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감옥을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이 무죄라는 것을 증명받았다고 생각한 현수는 악에 받친 상태였다.
‘다 죽여버릴 거야.’
현수는 자신으로 인해 인생이 무너진 내린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명예를 회복하리라고 다짐했다.
그것을 위해 지금의 상황을 다시 한번 공론화시키겠다고 생각하며 감옥을 나섰다.
그러나 현수가 감옥을 출소한 그 날.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누군가가 현수를 찾아왔다.
[서울시장 비서실장 박혁수]
불과 보름 전, 새롭게 선출된 서울시장의 비서실장.
현수는 그가 자신을 찾아온이유로 짚이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박혁수가 본론을 꺼내는 순간, 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금 진행 중이신 재판에 대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박혁수가 현수를 찾아온 용건은, 다름 아닌 협박이었다.
‘지금부터 최대한 조용히 지내세요. 쥐 죽은듯이.’
‘……어째서 나한테 그런 요구를 하는 겁니까.’
‘쓸데없는 데에 관심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과 당신 가족들이 다칠 겁니다. 지금 재판을 입 밖으로 꺼내도, 당신과당신 가족들이 다칠 겁니다.’
‘……협박하시는 겁니까.’
‘바로 알아들으셨군요. 하지만 마냥 협박만 하러 온 건 아닙니다. 지금부터 조용히 입 닫고 계신다면, 당신은 2심과 3심에서도 무죄를 받게 될 겁니다.’
‘그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전 지은 죄가 없으니, 당연히 무죄가 나와야죠.’
그러나 이어진 박혁수의 말에 현수는 동공이 흔들렸다.
‘정말로, 당연한 결과일 거라고 생각합니까?’
고저 없는 평온한 어조로 박혁수가 뱉은 말.
현수는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 경고를 무시하면 당신과 당신 가족은 지금의 처지마저 그리워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서울시장의 비서실장은 협박성 짙은 메시지를 남기고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밤.
현수는 남은 잔돈을 털어서 들어간 피시방에서 자신을 둘러싼 사건의 실마리를 잡을 수있었다.
[서울시장 당선인 소감(동영상)]
동영상 속에서 현수는신임 서울시장 성현재의 뒤에 서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성여은.’
무고하게현수를 범죄자로 몰아넣은 여자였다.
‘……성여은. ……성현재.’
그를 범죄자로 몰아넣은 그녀는, 무려 서울시장의 딸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서울시장의 딸은, 아랫배가 살짝 불러있는 상태였다.
일련의 정보들이 현수의 뇌리에 꽂히는 순간,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미스터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가 무고하게 잡혔음에도, 어설픈 증거밖에 없었음에도, 검사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이유.
그리고 재판이 이상할 정도로 질질 끌린 이유.
공교롭게도 지방선거가끝나자마자 현수에게 무죄가 선고되고, 그가 감옥을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
‘……이 개새끼들.’
한 번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하자, 나머지 조각들 또한 순식간에 조립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