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첫번째열병-14화 (14/14)

#14

노을이 질 무렵 난 학교 쓰레기장에 있었다. 아카시아 향이 물씬 풍기는 그 초록의 무덤 속에 나를 파묻고서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 뭘 찾고 있거나, 혹은 뭘 버리고 있었을 것이다. 뚜렷한 건 아니었다. 그를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울거나 그렇지 않거나, 나 자신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렇게 모든 것이 모호하고 희미했다.

우뚝 걸음을 멈췄다. 담배 연기 속에 눈이 번득였다. 아! 저 눈..........

한 걸음 떼자 발등 위로 초록색 병이 굴러왔다. 병을 넘어 해윤의 옆에 앉았다. 불안정하게 서 있는 소주병을 잡아 한 모금 들이켰다. 병원의 소독약처럼 돋ㄱ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차면서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태우며 넘어갔다. 다음 순간 정수리까지 찡한 기운이 올라왔다.

"야!"

해윤이 술병을 빼앗아갔다. 다시 거칠게 빼앗아 병에 입을 대고 목젖을 젖혀 꿀꺽꿀꺽 삼켰다.

"왜이래!"

그 눈이다. 날 사로잡았던 눈. 갖고 싶어? 그럼 노력하는 거야. 악착같이....그렇게 말하던 눈.

"무슨 일 있어?"

손을 뻗어 해윤의 눈을 가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손을 뚫고 날 매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손을 내려 진짜 해윤의 눈을 보았다. 해윤의 손에서 담배가 타오르고 있었다. 손을 뻗자 다급히 비벼 껐다.

"수업시간에 여기서 뭐하는 거야? 빨리 내려 가."

말하며 일허서는 해윤을 보고 난 누웠다. 길게 자란 풀잎이 뺨을 간질였다. 차고 습기가 느껴졌다. 짙은 보랏빛에서 점점 검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았다. 알코올이 혈관 속으로 찌르르 번지는 게 느껴졌다. 나른하고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흙 속으로 파묻히고 싶었다.

"야, 최사희!"

"보지 마.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엎드려 버렸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팔을 베고 엎드렸다. 시선이 땅과 수평이 되니 잡초가 엄청 커보였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여기서 보니까 다르네. 저기 교회 말야. 참 예뻐 보인다."

멀리 있는 교회의 지붕에 마지막 태양빛이 걸려 아스라이 스러지고 있었다.

"아름답다."

"일어나. 옷 다 버려."

"상관없어. 어렸을 때 난 이것보다 더 지저분했어."

교회 너머 산기슭으로 과거의 편린들이 안개처럼 보였다.

"차갑고 어둡고.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음울한 아이........그런 얘기를 종종 들었어."

"네 실체를 못 봤겠지."

"아니, 그게 나였어.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진......."

"그 사람이 누군데? 네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누군데?"

"날 봐준 사람.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 사람. 날.........., 날 웃게 하고 아프게 하는 사람."

"그 사람 때문에 이러는 거야?"

"처음 봤을 때 지진이 일어나는 거 같았어. 심장이 천둥 번개가 치는 것처럼 쿵쾅, 쿵쾅, 쿵쾅........'

"그런 말까지 들어줘야 해?"

"......미안해."

"그런 말도 듣기 싫어."

"어차피 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애야. 불행을 안 끼치면 다행인 거야."

"너 어디 아픈 애 아니야? 자기 자신을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냐? 너 안 그래. 안 그렇다고. 알겠어?"

하지만 해윤의 목소리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공 찾으러 갔을 때, 누가 맞은 거 같은데, 맞아도 아주 오지게 맞은 거 같은데, 에이 어쩌지? 성질 대따 부리겠다. 각오하고 뛰어갔는데 그냥 가는 거야. 나도 모르게 잡았는데, 갑자기 주위가 온통 하얘지더라. 눈동자가 너무 맑아서 내 얼굴이 비쳐 보이는 것 같았어. 넋이 나간 애처럼 멍하게 쳐다보는데.....그래, 행복해 보이진 않았어. 그렇다고 불행헤 빠져 괴로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어. 그냥 깨끗하고 두명한 게........쓰러질 듯이 약해 보이고....., 내가 꼭 필요한 것 같고......, 내가 도와줘야 할 것 같고......."

혼자선 설 수 없는 위태로운 인간으로 보인다는 건 얼마나 무기력하고 바보스럽단 얘기일까. 선천적으로 불량이라 나비가 될 수 없는 애벌레 같다. 포근하고 안전한 고치 속에서 혹시 깨져버리지나 않을까 불안해하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티는 애벌레.......

"해윤아."

"왜?"

"엄해윤."

"........"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려 해윤을 보았다. 무릎을 세우고 앉은 해윤은 학교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좋은 표정이 아닌 건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숨을 못 쉬겠어."

내 말에 해윤이 들고 있던 술병을 줬다. 누운 채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짧게 끊어 두 번을 연거푸 마셨다. 술병을 돌려주고 해윤이 길게 들이켜는 걸 몽롱하니 지켜봤다. 손으로 입가를 훔치던 해윤이 내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 좀 쉬어지냐?"

"응."

"나 좋아하지?"

"응."

"눈치 깠어. 근데 그냥 친구지? 키스할 때 알았어. 네 표정이 딴 사람 보는 것 같았어. 그런 표정......그렇게 홀린 것 같은 눈은 처음 봤어. 그 남자 거지? 그 눈......"

일어나 앉으려니 현기증이 일었다. 적당히 기분 좋은 어지러움이었다. 치마를 대충 추스르며 해윤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시원한 사람이 불어왔다.

"뭐가 잘 안 돼?"

"........응."

"그럼 나한테 오나?"

"그런 걸까?"

"뭐가?"

"이게 아니면 저거. 저게 안 되면 다음 거. 그것도 아니면 그 다음, 그 다음 거. 그렇게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걸까? 사는 게 말야. 내가 찾아 헤매지 않아도 차례대로 다가오고 멀어지고 그렇게 흐르는 걸까."

"노땅 같은 소리도 잘하네. 싫은 게 다가오면 어쩔 건데? 좋은 게 떠나가면 어쩌고?"

그렇게 말한 해윤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가자. 2차 하러."

내미는 손을 보다가 붙잡았다. 날 일으켜주는 손이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손을 놓지 않은 채 언덕을 내려왔다. 미끄러져 깔깔 웃기도 하면서.

교복을 입은 채 술집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그래서 해윤의 집으로 갔다. 해윤의 어머니는 일 때문에 부재 중이었다.

해윤의 집은 넓은 빌라였다. 화려한 벽지에 눈에 띄는 패브릭, 색다른 장식품이 많아서 마치 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출장 겸 여행을 많이 하시는 해윤의 어머니가 수집한 것들 때문이었다. 유럽 왕족이 쓰던 것부터 아프리카 토산품까지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해윤이 장식품 하나하나에 얽힌 얘기를 해줬다. 유리장에 있는 술을 꺼내 마시면서 그렇게 얘기를 나누며 집 구경을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

어느새 난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시야응 뿌옇고 감각은 흐리멍덩하고 혀는 풀어져 발음이 배배꼬였다.

"너 첫사랑은 원래 깨지는 거다. 그러면서 마시고 있지?"

킥킥, 웃었다. 웅습지도 않은데 자꾸 웃음이 났다. 그런 날 보고 해윤도 피식 웃었다. 해윤은 1인용 소파에 가로로 누워 있었다. 엉덩이만 쏙 넣고서 양쪽 팔걸이에 머리와 다리를 늘어뜯린 모습이었다. 그 자세가 우스꽝스러워서 또 키득키득 웃음이 났다.

"야, 뭐가 그렇게 웃겨?"

"너, 너 꼭 멧돼지 같아. 식인종한테 잡혀가는...."

나는 참지 못하고 꺄르르 웃었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술이 튀어 교복을 적셨다. 우린 해윤의 어머니가 무지 아낀다는 비싼 양주 1병을 축내고, 그 다음으로 아낀다는 술을 해치우고 있었다.

"야, 그게 뭐냐? 교복에 술 냄새나겠다."

킥킥.

"우리 엄마 줄 테니까 갈아입어. 잠깐만."

조금씩 졸음이 몰려왔다. 하지만 마지막 남아있는 신경이 여긴 내 방이 아니어서 불편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감았던 눈을 뜨고 잔에 남아있는 술을 말끔히 마셨다.

"자, 이거 입어."

뭔가가 휙 날아와 얼굴을 덮었다. 웃으며 걷어내 보니 얇고 부드러운 천이 손에 잡혔다. 흰 바탕에 빨간색 꽃무늬가 있는 홈드레스였다. 색깔이 곱고 감촉이 좋아서 입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방에 가서 갈아입어. 안 훔쳐볼 테니까."

일어나 몸에 옷을 대봤다. 길이는 짧고 품은 클 것 같았다. 사진 속 해윤의 어머니는 자그마한 키에 통통했다. 입어 보면 재미있을 것 같은 새악이 들어 히죽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이 울렁거리고 벽도 흐물흐물해 보였다.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가는 기분이었다. 어떤 멜로디가 떠올랐다.

"음, 음음, 음........"

가사도 없이 흥얼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지퍼가 문제였다. 거울을 보며 손을 뒤로 도려 지퍼를 올렸다. 사이즈가 큰 데다 네크라인이 깊게 패여 한 쪽 어깨가 다 드러났다. 한쪽을 끌어 올리면 다른 쪽 어깨가 나오고, 드러난 어깨를 가리면 또 반대편 어깨가 나왔다.

"에이, 바보....."

그런 채로 비틀거리며 방을 나왔다. 킬킬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빙빙빙 돌았다.

"나 어때? 예쁘지?"

도는 걸 멈추자 벽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러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빙빙 도는 눈을 들어 간신히 보았다. 그가 서 있었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숙취 때문에 학교에 가질 못했다. 엉망진창의 고등학생이었지만 엉망진창의 여자까지 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한낮에 눈을 떠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샤워기 아래 섰을 때, 나는 최악이었다. 해윤의 집에서 그를 보고, 그 이후의 일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무사히 내 방에서 눈을 뜬 게 기적 같았다.

그를 동경하고, 그를 사모하며, 그를 원하게 되면서부터 내 불안은 시작됐다. 엄마의 따뜻한 품, 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 할머니의 환한 미소. 그건 꿈에서도 내 것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꿈처럼 바라보던 남자가 날 원한다고 말한 것이다. 믿기가 겁이 났다. 옆에서 자고 있는 그를 만져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가 날 뚫고 들어온 그 순간에도 몽롱한 꿈처럼 여겨졌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섞이기 시작하면서부터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나 자신만으로는 그와 함께인 걸 증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난 그와의 관계에 증명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인정할 만한 약속을........

우산 들고 마중 나와 주는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의 시선, 그의 목소리, 그의 미소가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세상은 그렇게 계산이 철저했다. 하나를 주면 하나를 뺏었다. 어쩌면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재수 없는 애여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불운을 타고난 아이. 그걸 잊고서 약속된 미래를 꿈꾸었던 것이다. 결국 모든 걸 잃게 될 줄 모르고.

하루 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았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뭐라고 말씀하셨지만 듣지 않았다.

처음으로 긴 시간 동안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난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 하고 있었다. 언제나 '넌 평범하게 살 수 없어. 넌 동굴 속의 박쥐처럼 사람들 눈에 안 띠면서 조용히 살아야 해.' 그랬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난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재주도 없는 애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난 꿈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꿈을.........

아무리 그를 사랑하고 원해도 그의 아내가 될 순 없다. 그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건 작운 화분에 커다란 소나무를 심으려드는 것과 똑같은 거였다. 그는 내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남자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행복할 자격도 충분히 있었다. 눈을 감으면 나도 그의 곁에서 행복할 수 있으리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내 두 눈은 세상을 보고 그를 보고 나 자신을 보기 위해 안달하고 말 것이다.

그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 나와 함께 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미래를 생각하는 게 두려웠던 거다. 이제 그 두려움을 받아들일 때가 온 거 같다. 막연한 두려움이 현실로 닥쳐온 거다.

그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신경을 곤두세운 채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런데 자정이 넘어서도 그가 오는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왠지 이걸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윤의 집에서 부딪쳤을 때의 무시무시한 표정이 떠올랐다. 술에 취해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비틀거렸던 내 모습이 어떨지 생각하니 참혹한 기분이 들었다.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고 가방도 내팽개쳐 둔 채 남학생의 집에서 술이나 마셔대고 있었으니 얼마나 한심하게 여길 것인가.

문득 반발심이 일었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나라고 못 그럴 이유가 어디 있나! 다른 사람과 있는 걸 보는 게 어떤 기분인지 조금은 알았겠지!

하지만 곧 절망감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가 뭐라고 할지 짐작됐기 때문이다. 조금의 동요도 없이, 좋은 녀석인 거 같으니 잘 지내보라며 간단히 말해버릴 것이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딸칵, 문이 열렸다. 움찔 놀라 쳐다봤더니 그가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옷도 갈아입지 않았는지 정장바지에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넥타이는 없고 셔츠 단추는 배꼽까지 다 풀어헤쳐 있었다. 앞머리가 흘러내려 이마를 가렸는데 눈자위가 좀 붉었다.

그는 방 중앙에 서서 미간을 좁힌 채 빤히 보았다. 방이 금방 그의 존재감으로 가득 차 공기가 술러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왠지 그가 진짜 같지가 않았다. 작은 솜털 하나하나가 모두 그를 감지하고 있는데도 가짜 같았다. 손을 뻗으면 물결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 같았다.

그는 다짜고짜 다가와 내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다정한 말 한마디 없었다. 괜찮니? 뭐 좀 먹었어? 같은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세상에 대한 두려움, 그의 진심에 대한 불안 같은 건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없이 키스를 하려고 했다. 키스. 그래, 그의 열정적인 키스가 더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그의 존재 이외는 모든 걸 사라지게 하니까.

덮쳐옹ㄹ 짜릿한 키스를 예감하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기대했던 달콤한 키스가 아니었다. 입술을 짓이기고 혀를 뽑을 듯 사납고 난폭한 키스였다. 깊숙이 파고 들어오는 혀끝에서 술 냄새를 맡았다. 밀어내려 해도 막무가내로 체중을 실어왔다. 그는 취해있는 것이다.

침대에 쓰러져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목덜미를 파고들며 바지를 벗기려 들었다.

"아직 숙취가 안 가셨어?"

그의 체중에 눌러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알코올  때문인지 처음으로 그의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 이러지 말아요."

"왜, 벌써 마음이 변했어? 어린놈이랑 어울리다 보니까 이게 아니다 싶어? 늙은 놈한테 청춘 저당 잡힌 거 같아? 그래서 억울해?"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그래? 아직은 순수하시다 이건가?"

갑자기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몸이 자유로워지니 허전함이 몰려왔다.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멍한 채로 그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뭔가를 찾는 듯 화장대 쪽으로 가더니 왼쪽 서랍을 휙 열었다. 거기엔 포장지에 딸려온 색색의 끈을 모아두고 있었다. 그것까지 그가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걸 찾고 있었는지 망설임 없이 리본끈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난 그렇지 못해. 순수하단 건 나한테 모욕이지."

손목에 리본이 묶였을 때도 그가 뭐하려는 건지 알지 못했다. 리본의 끝이 침대기둥에 묶이는 걸 보고서야 두려움이 엄습했다.

"뭐, 뭐하는 거예요?"

"편해 보이더군. 어느새 그렇게 가까워졌지? 미친놈처럼 날뛰는 동안 희희낙락 놀아나고 있어? 없어졌다고 보고 받고, 책상에 가방만 덩그러니 놓인 거 보고, 내가 어땠을 것 같아? 온 학교를 다 뒤졌어. 그 녀석이랑 가는 걸 봤단 얘기 듣고, 내가 무슨 상상을 했는지 알아!"

묶이지 않은 팔로 그의 어깨를 밀었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기묘한 빛으로 번득이는 걸 본 뒤론 목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내가 알던 그는 여기에 없었다.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스스럼없이 취하고 주정하고! 히죽히죽 잘도 웃더군!"

싫어요. 이런 거 싫어요. 눈으로만 애원할 뿐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난 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묶인 손을 당겨 풀려고 애쓰지도 않고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그를 차버리지도 않았다. 통제력을 잃은 난폭한 그의 모습에서 어떤 절망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를 괴롭히는 게 단지 이 상황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결혼,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그 결혼에 놓여 있는 장애, 공존할 수 없는 걸 이끌고 가려는 무모한 욕심, 선택에 대한 책임. 그 모든 것이 그를 짓누르고 들볶고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괴롭다는 걸 느끼자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언젠가 그가 들려주었던 클라리넷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홀로 서서 연주하던 그의 표정, 손가락, 움직임. 가슴을 적시던 그 애잔한 선율, 회한, 고독..........그 애상이 다시금 가슴을 무너뜨렸다.

"내가............거추장스럽죠?"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청바지를 벗기려던 그의 손이 멈췄다. 눈물 때문에 희부옇게 흐려 보이는 그의 눈빛이 매서웠다. 내 눈물을 바라보며 점점 더 잔인해졌다.

"뭐가? 사료 주는 게?"

살의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눈길이 얼굴을 핥으며 내려갔다. 셔츠를 젖히고 브래지어에 감싸인 젖가슴에 입술을 댓다.. 숨결은 뜨거웠지만 목소리는 냉랭하고 싸늘했다.

"배설물도 치우고 목욕도 시켜줘야지. 그 대신 귀여워 해주면 꼬리를 열심히 흔들잖아. 목덜미를 핥고 품으로 파고 들어 오기도 하고. 싫증나고 성가셔서 걷어차도 잠깐 쭈뼛할 뿐이지. 내 발밑에 엎드려 있다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와서 안겨야 해. 충실한 개는 불평하지 않아. 왜 그러냐고 따지지도 않고. 알겠어? 강아지?"

거친 손이 청바지를 벗겨냈다. 발가락엥서부터 천천히 더듬어 올라와 허벅지 안쪽 깊숙이 들어왔다. 팬티 속으로 들어온 손이 음부를 애무했다.

"어젠 정말 때릴 뻔했어. 발로 걷어차 버리고 싶었어."

그의 손길이 닿은 은밀한 내부가 더 열정적인 접촉을 기대하며 긴장하고 있었다. 촉촉한 것이 흘러나와 그의 손을 적셨다. 질척한 그 곳으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몸 안으로 퍼진 열기가 혈관을 타고 꿈틀거렸다. 그는 몸의 반 정도만 내게 포갠 채 쾌감에 들뜨는 날 구경했다.

"알고 있어. 네가 날 원했던 건 외로웠기 때문이란 거......."

뜨겁게 내 안을 유린하며 조롱하는 투로 속삭였다.

"지독한 고독에 둘렀싸인 가여운 병아리. 널 지켜주고 보호해줄 동지가 필요했지? 강하고 완벽한, 그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폭풍에도 무너지지 않을 둥지."

팽팽해진 젖가슴에 그의 입김이 스쳤다. 닿지도 않고 따뜻한 숨결만 불어대고서 머리를 뗐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근육질 가슴이 엿보였다. 매끄러우면서 단단한 그의 피부 감촉을 생각하자 목이 말라왔다. 나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축였다.

"우린 닮았어."

우악스런 손이 내 허벅지를 잡더니 거칠게 밀어 올렸따. 다음순간 얇은 팬티가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내며 찢겨나갔다.

"나도 마찬가지였거든. 날 감싸줄 따뜻하고 부드러운 둥지가 필요했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한결같이 날 믿고 기다려줄 둥지."

"아악!"

가랑이를 찢을 듯 밀어 올리며 그의 것이 들어왔다. 한 번의 동작으로 끝까지 밀고 들어와 온몸이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네가 날 기다리는 동안 나 또한 널 시험하고 날 시험했어."

"아흑!"

"내가 흔들어대도 넌 변하지 않았어. 내가 흔들려고 넌 날 지켜봐줬어."

그가 내 안에서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다. 쾌감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지만 어딘가 모르게 달랐다. 두 손이 묶여 그를 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를 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날 슬프게 만들었다. 이게 우리의 미래 같았다. 그는 직감이 뛰어난 사람이니까 벌써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괴로워하며 술을 마셨겠지. 내가 거치적거리는 거다. 내가 그의 괴로움인 거다. 잘할 수 있다고 말해도 나는 믿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애증이 얼마나 그를 괴롭혔는지도.........

그가 괴로워하는 게 느껴졌다. 사모님의 말이 떠올랐다. 무엇이 최우선인지 생각하라. 그의 곁에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의 안전. 그의 행복. 그가 괴로운 걸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 욕심이 그를 괴롭힌다면, 내 사랑으로 그가 불행해진다면.........

세차게 들어오던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엉덩이에 힘을 준 채 멈췄다.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그를 받아들이는 몸은 뜨거워도 내 심장은 경직돼 있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있지 않는 것과 같고, 듣고 있어도 듣고 있지 않는 것과 같았다. 나는 나를 감싸고 있는 고치에 생긴 균열을 보고 있었다. 조금씩 쩍쩍 갈라지더니 작은 틈으로 찬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그 바람이 날 싣고서 어디론가 날아버릴 것 같았다.

"날 봐! 날 보란 말야!"

"일주일에 몇 번이나 올 건가요?"

내 속을 뚫고 들어와 있는 그에게 맞춰 엉덩이를 들었다. 움직임을 멈추고 있는 그의 엉덩이를 다리로 감아 당기며 아랫도리를 비벼댔다.

"3일? 4일? 잠만 여기서 자는 건가요? 식사는요? 가끔 같이 외출도 할 수 있나요?"

그를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도 단단한 그것은 여전히 내 안에 있으므로 난 열심히 엉덩이를 움직였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괄약근을 조이며 게걸스럽게 빨아올렸다.

"부인이 4일이면 나랑 이틀 정도는 있어 줄 수 있죠? 부인이랑 두세 번 하면...........나랑 한 번은 해요."

"그만해."

두 손이 묶여 있어 더 숨이 찼다. 더 가까이, 더 강하게 안고 싶은 욕망에 온몸이 안달하며 할딱였다. 그 쾌감에 몰입해서 미친 듯이 아랫도리를 흔들었다.

"더............더 많이 가르쳐줘요."

그의 것을 물고서 엉덩이를 돌리며 들썩거렸다. 맨살이 부딪치는 질퍽한 소리에 희열을 느끼며 거칠게 신음했다.

"아흣! 내, 내가............더 기분 좋게 해주고 싶으니까..........가르쳐줘요."

덫에 걸린 짐승처럼 할딱이며 격렬히 그를 빨아들였다. 게슴츠레 뜬 눈에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피부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이마에 굵은 힘줄이 솟아 불끈거렸다.

"넌 내가 줄 수 없는 걸 원하고 있어!"

소리친 것보다 더 매서운 음성이었다.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한 냉엄한 어조였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거야! 알겠어!"

그가 난폭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끝 간 데까지 들어와 있는 것을 더 밀어 올리며 사납게 몰아쳤다.

"가진 거에 만족할 수 없다면 가! 그 자식한테나 가버려! 난 너한테 가족도 자식도 줄 수 없어! 그건 절대 네 몫이 아냐!"

다음 순간 쾅! 문소리가 났다. 난 두 팔이 묶인 채 아랫도리를 다 드러내고서 누워 있었다. 그가 빠져나간 걸 믿지 못하고서 아직도 움찔대고 있었다. 다리를 오므리고 현실을 직시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팔이 저려왔다.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온몸을 움직여 보는데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마치 한껏 유린당하고 버려진 창녀가 된 기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울다 지쳐 멍해져 있었다. 멍해진 머리로 무심히 생각했다. 평생 그의 강아지로 살고 싶었다.

날이 밝았음에도 그는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어쩌면 지난 밤 그대로 집을 나갔는지도 몰랐다. 난 청소를 하러 올라온 도우밈 아주머니께 발견 돼 간신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비참하고 굴욕적인 상황이었지만 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아주머니가 청소를 하는 사이 미역국을 끓였다. 그의 서재 책상 위에 생일선물을 챙겨놓고 방으로 와 짐을 쌌다. 싸면서 내내 전화를 할까, 메모를 남길까 고민했다. 그런 생각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결국 난 전화도 매모도 시도하지 못하고 집을 나왔다.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 내가 내 의지로 한 최초의 결단이자 행동이었다.

나만 아니면 그는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 것이다. 나란 존재가 그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그는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며 자식의 아버지, 아내의 남편, 가장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절름발이 의자와 같다. 다리 길이가 맞지 않아 계속 삐걱대는 의자. 그가 모자라는 것을 채우고 넘치는 부분을 잘라도 의자는 계속 삐걱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더 이상 고치려 애쓰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고서, 그냥 절름발인 채로 살아가기로..........

나는 지금 신문을 보고 있다. 그의 결혼식 사진을 보고 있다. 평소의 무표정인 그는 기억보다 더 단단하고 예리해 보인다. 은빛으로 빛나는 길고 날카로운 고검을 보는 것 같다. 분명한 현실인 가을의 결혼식. 그런데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어째서.........어째서............. 몇 번이나 거듭 본 건 신부의 얼굴이다.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 그의 허리 언저리에 있다. 숭고한 사랑, 고귀한 사랑.......... 활자가 눈에 와 박힌다. 그래도 믿지 못해 다시 사진을 본다. 신부가 휠체어에 앉아있다. 애잔한 미소를 띤 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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