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첫번째열병-13화 (13/14)

#13

단순한 해프닝이었다. 해윤의 거친 말에 충격을 받았고, 그전에 그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그래서 잠시, 너무 간절히 그를 긱다리는 마음에 환각에 빠져버린 거다. 화가 난 해윤이 내 머리를 붙잡고 입술을 밀어붙였을 때, 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 환각으로 익숙하게 키스를 해버렸다. 십여 명의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기를 바라는 건 내 간절한 소망일뿐이었다. 특별히 결벽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두 번이나 양치질을 했다. 해윤이 미웠고 나 자신이 어이없고 싫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넌 아무 일도 없었어."

겉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키스하면 금방 들통나버릴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가 없을 테니까. 난 숨기지 못하고, 그는 예리해서 금방 알아채고, 그 전에 말해야 한다. 어쩌면 그는 웃어넘길지도 모른다. 겁내고 떨고 있는 날 놀려 줄지도......

해윤과 아이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해윤은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난 들을 여유가 없었다. 오로지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는 괴로움으로 가득 차있었다.

교문 앞에 기다리고 있는 차에 올랐다. 학생들의 따가운 눈초리에서 벗어나니 다소나마 긴장이 풀렸다.

"오셨나요?"

"네. 회사에 계십니다."

깜깜한 집으로 들어가 곧장 내 방으로 올라갔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금방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랐다. 한 번 더 울렸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현관의 문소리,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 곧장 내 방으로 다가오는 숨결......

문이 열리고 어둠 속에 그가 나타났다.

"두 번째군. 뛰어와서 안기거나 컴컴한 방에 토라져 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

불이 켜졌다. 그는 사흘 전보다 더 크고 위압적으로 보였다. 언제나처럼 빈틈없이 완벽하고 잘생긴 얼굴에 피로감이 느껴졌다. 한 팔을 문설주에 기대고 서서는 뒤로 감춘 팔을 내밀었다. 보랏빛 꽃이 한 아름이었다.

"스타치스. 너 좋아하는 보라색. 이걸로 첫 번째 모드로 전환하지 그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꽃을 사온 건..........기쁘고 행복으로 충만해야 할 이 순간에 난 더한 죄책감과 불안에 시달렸다.

차마 그를 똑바로 볼 수 없어 꽃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찰나의 실수, 한 번의 실수를 배반으로 여기진 않을 것이다. 배신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에 이 경우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이걸로도 안 풀린다 이거지?"

그가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 옆 탁자에 꽃다발을 놓고 내 앞에 다가와 섰다.

"사고가 있었어. 폭파사고."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 말고 우리 직원들. 그거 수습하느라 정신없었다. 기사 막고, 클라이언트 두 팀 미팅하고."

그의 한숨.

"틈틈이 업무 브리핑 받고, 직원 숙소랑 공장 돌고. 회사 갔다가, 다친 직원들 살펴보러 병원 갔다가, 지금 들어오는 거다. 무지 바빴고 빡빡했어. 잠깐이라도 목소리 들으면 긴장 깨질 것 같아서 일부러 전화 안 했다."

깊은 숨소리.

"설명은 이걸로 끝. 이제 그만 안자."

양팔을 벌리고서는 끈끈한 눈빛으로 날 녹여버렸다. 울고 싶을 만큼 그를 안고 싶었다. 격정이 온몸을 부서뜨릴 것처럼 소용돌이쳤다. 두 팔을 들어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운 그의 체취가 파도처럼 밀려와 날 취하게 만들었다.

갈비뼈가 아프도록 강하게 끌어안아 와서 가슴 속이 지잉, 울렸다.

"이제 네 차례야. 말해 봐. 얼마나, 어떻게 보고 싶었는지."

"많이요. 굉장히 많이."

"그리고?"

"걱정했어요."

"너, 한 번밖에 전화 안 했어."

"전화 못할 정도로 바쁜 거면 방해될 것 같아서요."

몸을 떼고 그가 내려다보았다.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눈빛이 곤혹스러웠다.

"엄청 속 꿇인 얼굴이잖아. 애가 어른처럼 구니까 그런 거야."

"피곤해 보여요."

"아냐."

다시 꽉 끌어 안겼다. 귓가에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손이 가슴으로 올라와 가볍게 문지르며 애무했다.

"침대에 묶어놓고 밤새도록 할 거다. 너, 내일 학교 못가."

그는 농담잉ㄴ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하고 교복을 벗겨갔다. 마치 새로운 탐험을 하듯이 내 피부 곳곳을 끈질기게 애무하며 돌아다녔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는 내 예상은 어림없는 거였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자동적으로 반응하며 열정에 함몰되었다. 낮의 돌발적인 상황 같은 건 떠오르지도 않았다.

알몸으로 뒤엉켜 거침없이 키스하고 애무하며 몸을 섞었다. 위험할 만큼 섹시한 그의 눈빛에 홀려서 몇 번이나 받아들이고 또 유혹했다. 근육으로 조각된 아름다운 몸을 탐닉하고, 애태우는 그의 손길에 흐느끼고 칭얼거렸다.

"나..........나 좋아해요?"

절정의 고비에서 터져 나온 내 목소리.

헐떡이는 신음 속에 섞여 정확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의식 한  쪽에서 분명히 외쳐대고 있었다.

날 좋아하나요? 날 사랑해요? 한 번만, 그 한마디만 말해줘요. 욕심만은 아니라고...........제발..............

내 안의 정복자는  뜨거운 에너지를 거칠게 뿜어내며 질문을 되돌렸다.

"너는. 넌?"

"조, 좋아해요. 정말.........정말 많이...........좋아해요!"

"왜?"

"....왜?"

모르겠다. 말할 수 없다. 머릿속이 온통 은백색 별들로 가득해...........

"말했었지? 네가 멈춰도 난 널 가질 거야. 잊지 마. 절대..........."

그는 평소보다 더 거칠고 집요하게 내 몸을 열었다. 내 죄책감이 그를 더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껴들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되고 싶었다. 불안한 내 영혼 따위는 버리고 차라리 그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불안한 내 영혼 따위는 버리고 차라리 그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팔이나 다리가 아니어도 좋았다. 영원히 그와 함께일 수만 있다면 속눈썹 한 올이어도 기꺼이 되고 싶었다.

우리는 지쳐 까라질 때까지 어우러졌다. 그러곤 동면에 들어간 두 마리의 뱀처럼 엉켜서 깊이 잠들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고요할 수 있었다. 심연 속의 평화처럼.......

생각이 바뀌었다.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으면 그러리라. 그가 알아서 좋을 거 하나 없는 일, 숨길 수 있다면 끝까지 말하지 않겟다고 결심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나 자신이 정말 아무렇지 않을 때에 고백하겠다고.

아이들의 쑥덕거림이 신경 쓰였다. 조금은 그들과 가까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면 내 눈을 피하는 눈들이 많아졌다. 해윤은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하면서도 접근해오지 않았고, 소화는 눈이 부딪칠 때마다 흘겨보았다. 불편했다.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장미향을 뒤로 하고 교문을 나왔다.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차로 다가가는데 문이 열리고 그가 내렸다. 반가움에 걸음이 빨라졌다.

"웬일이에요?"

미소 짓는 날 두고 그는 내 뒤쪽을 보았다. 고개를 돌려 보았더니 교문 앞에 해윤이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손목이 잡혀 끌려갔다. 거칠진 않았지만 힘이 들어간 손길이 끌어당겼다.

"무슨 일이야?"

고개를 저었다.

"할 얘기가 있나 본데?"

그의 예리한 시선을 피해 차에 올랐다. 뭔가 눈치를 채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더 이상 물어오지 않았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소풍."

"정말요?"

"날씨가 너무 좋잖아. 별장 가서 이틀 쉬고 오자."

너무 좋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복권에 당첨된 것보다 좋았다. 그와 단둘이서 주말을 보낸다는 생각에 해윤의 일도 까맣게 잊혀졌다.

별장은 호숫가에 있는 예쁜 벽돌집이었다. 정원엔 연못이 있고 토속적인 물레방아와 아담한 정자도 있었다. 호수 먼 곳에서는 제트스키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쌩쌩 달렸다. 여가를 즐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따뜻한 햇살, 청량한 공기, 아름다운 경치가 어우러져 천국 같았다.

"근데 나 어떡해요? 옷이랑 아무 것도 없는데....."

"그게 뭐 필요하겠어?"

날 부끄럽게 하고는 어깨에 팔을 둘러왔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내부를 깨끗하게 정돈 돼 있었다. 창문을 열자 호수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깊이 심호흡을 하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그가 가지고 있는 두 대의 휴대폰 중, 사적인 전화만 받고 있는 휴대폰의 벨소리였다.

"여보세요?"

창밖의 경치를 보며 그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은해? 오랜만이군. ..........뭐? 언제? ..........지금 어디야?"

몸을 돌려 통화하는 그를 보았다.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데 눈이 마주치자 그가 등을 돌렸다. 이상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해졌다. 직감이 사이렌을 울려대고 있었다.

"알았어. 곧 갈게."

전화를 끊고 그는 곧장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현관 쪽으로 움직였다. 상대가 받지 않는지 그냥 끊고는 돌아섰다.

"갔다 올게."

어디요? 왜 가는데요? 언제 와요? 꼭 가야 돼요? 묻고 싶은 걸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3초쯤 그 자리에 서서 날 바라봤다. 약속하는 것도, 안심하려는 눈빛도 아니고, 말 그대로 내 모습을 보는 눈빛이었다.

그가 떠난 뒤 혼자 주변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그의 전화를 받고 왔다며 관리인 부부가 와서 별장 안에 머물러 있었다. 날 혼자 두는 게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들과 같이 저녁을 먹고 얘기도 나누었다. 낯선 사람을 만나도 예전처럼 주눅 들거나 하지 않아서 분위기는 어색하지 않았다.

자정 무렵 차 소리가 났다. 그의 스포츠세단이 별장을 향해 오는 게 보였다. 현관으로 나가 그를 맞았다.

"이제 와요?"

뚜벅뚜벅 걸어온 그는 가볍게 포옹했다. 꽃향기가 감돌았다.

"뭐했어? 구경 좀 했어?"

안으로 들어가며 혼자서 이것저것 한 걸 얘기했다. 별로 재미있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나름대로 바빴군."

침대에 앉아 그가 옷 벗는 걸 지켜봤다.

"씻고 올게."

"네."

"같이 씻을까?"

농담과 함께 씨익 웃고는 혼자 욕실로 들어갔다. 보통 때의 그는 그런 걸로 농담하지 않았다. 같이 씻을까? 라는 말을 입 밖에 냈다면 그건 이미 같이 씻기로 결정 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싫다고 해도 기거이 욕실로 데려갔을 것이다.

내 모든 감각이 이상 전선을 포착하고 촉수를 곤두세웠다. 침대에서 일어나 그가 들어올 때부터 느꼈던 냄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꽃향기..........낯선 향수.

그가 벗어놓은 옷을 들출 때마다 향기가 진동을 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그의 검정셔츠에 묻은 얼룩........

옷을 정리해 두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끌어당겨 어깨까지 덮고서 옆으로 누워 눈을 감았다. 비어있는 옆자리에 그가 들어오기까지의 시간이 천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는 알몸이었다.

"뭘 입고 있는 거야?"

손이 허리를 타고 넘어와 셔츠의 단추를 풀려고 했다. 그 손을 잡아 밀어내고 이불을 끌어당겨 겨드랑이 사이에 넣고 꽉 눌렀다.

"졸려요."

"벌써?"

"1시가 다 됐어요. 피곤해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뒤에 쏠려있었다. 잔뜩 긴장한 공기가 느껴졌다. 폭풍전야 같다고 느낀 순간 우악스런 손이 어깨를 홱 끌어당겼다. 거센 힘에 돌려져 몸이 침대에 눌렸다. 생각할 새도 없이 그의 몸이 덮쳐왔다. 두터운 몸에 깔려 푹신한 침대로 묻혀버릴 것 같았다.

"왜 그래?"

어둠 속에서 금속성을 띤 눈빛이 번득거렸다. 복잡한 감정에 거친 그의 움직임이 충격을 더해 숨이 가빴다. 힘의 압박에 가슴이 더 요란스럽게 들썩거렸다. 마치 그를 유혹하려는 듯이 부풀어 올라서 민망할 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시선이 가슴을 주시했다. 입가에 오만한 미소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싫어서 몸을 비틀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말 졸려서 그래요."

"거짓말."

"컨디션이 좀 안 좋아요. 자고 싶어요."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속을 다 꿰뚫어보는 것 같아 눈길을 피했다.

"욕심 부리지 마. 너만 다쳐."

욕심? 마음속이 이렇게 불안하고 어지러운데도 아무 것도 묻지 못하고 있는데, 이게 욕심이라고? 은해란 사람이 누군지 너무 궁금한데도 참고 있는데......난 그에게 뭔가? 원망이 일었다.

단지 옆에 있고 싶을 뿐이라고 해놓고 그의 여자가 되길 소망했다. 그리고 이젠 그가 나만의 남ㅁ자이길 소망한다. 더 큰일인 것은 그게 잘못되었다고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 거다. 그는 날 꿰뚫어보고 포기시키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싫다. 포기할 수 없다. 죽으면 죽었지 다른 여자와 그를 공유하고 싶지 않다.

"내가 여자에게 줄 수 있는 한도 백 퍼센트, 너한테 주고 있어. 더 이상은 욕심 부리지 마."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피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목덜미에 숨결이 닿았다. 잠시 멈춰있던 그가 머리를 들었다. 눈빛이 더 싸늘했다.

"날 가졌다고 네 맘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군."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이대로 눈을 감아버릴까 싶었다. 두 팔을 올려 그의 목을 감으면 모든 게 행복한 색으로 입혀질 것 같았다.

"마스코트, 주인이 누군지 잊었나?"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여자로서 당당하게, 그의 마스코트 따위가 아니라 한 남자의 여자로 그를 대하고 싶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받아들여야 하나요?"

짙은 눈썹이 꿈틀하더니 차디찬 눈빛이 견고한 얼음성을 쌓아갔다.

"아니."

"피곤해요. 그뿐이에요."

날카롭게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진의를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가짜임을 알면서 속아 넘어갈 줄 것이냐, 말 것이냐를 판단하려고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깨가 놓여 놨다. 속으로 안도하는 것도 잠깐 금방 더 괴로워졌다. 그가 아예 침실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혼자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 됐다.

침대를 나와 그를 찾으러 나섰다. 그는 발 옆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박탈감과 함께 후회가 밀려들었다. 혼자 속을 끓여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건데.........

돌아와 홀로 침대에 누웠다. 그의 옆으로 기어들어 가지 않은 건 욕심 부리지 말라는 그의 말을 따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포근한 품에 안기면 이 밤을 달콤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침이면 다시 괴로워질 것이다.

난 대체 그에게 뭘까?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별장에서 나왔다. 우리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는데 아무 것도 묻질 못했다. 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나와, 그의 과거며 현재, 미래까지 다 가지려드는 나의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내 속에서의 전쟁이 치열해지면 아마도 그에게도 불똥이 튈 것이다.

집까지 태워다 준 그는 일이 있다며 곧장 가버렸다. 내 속에서 어떤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알고서 피해 달아나는 것 같았다. 온종일 그의 생잉ㄹ 선물을 준비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봤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뭘 원하든, 어떤 욕심을 부리든, 그에게 어떤 존재이든 난 그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원하는 걸 주지 않고, 욕심을 허용하지 않으며, 너 따윈 하찮은 존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바뀌지 않는 결론을 내려놓고서 고민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런데도 하루 종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불안하기 때문이었다. 그처럼 완벽한 남자가, 내게 찾아온 이 행복한 시간들이, 내 몫일 리 없으니까.......

그날 밤, 그를 기다리다 소파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내려다보는 그를 발견하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가 제지했다.

"움직이지 마."

독한 양주 냄새가 풍겼다. 다시 머리를 대고 누워 바라보자 단단한 체구가 덮쳐왔다.

"반항하지 마. 밀어내지도 말고, 피하지도 말고. 그대로 있어."

잠옷 단추가 하나하나 풀리고 속옷마저 제거됐다. 넥타이 하나 비뚤어지지 않은 정장차림의 그 앞에서 난 알몸이었다. 그 차이가 묘하게 색정적인 느낌으로 자아냈다. 군복 입은 남자들 속에 아찔한 차림으로 웃고 있는 마릴린 먼로의 느낌 같은 거였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나체일 때가 제일 예뻐. 어떤 명품 옷보다 나체인 게 좋아."

자세히 보니 그의 눈빛이 좀 이상했다. 110볼트의 전선에 220볼트가 흐르는 것 같은, 뭔가 삐끗해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

되물으며 그의 머리가 내려왔다. 목덜미를 파고들어 키스를 하며 피부를 따라 핥아댔다.

"안 좋은 일이라도.........."

"아니, 없어. 그런 일........절대 없어."

부정하는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강했다. 없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없진 않다는 의미..........

"이건 내 거야."

그가 손 안에 꽉 차는 젖가슴을 움켜쥐고 으르릉거리듯 말했다.

"내가 키운 거야. 내가 만지고 빨아서 키운 거야. 이건 내 거야. 진시황제도 이렇게 탐스럽고 예쁜 유방은 못 봤을 걸."

그는 거친 기세로 미친 듯이 젖가슴을 핥아대고 빨았다. 풍만한 살을 물어뜯을 듯 입 안으로ㅗ 빨아들이고서 젖은 소리를 내며 할짝거렸다. 침을 흘릴며 게걸스러운 짐승 같이 탐욕을 드러냈다. 손으로 세게 쥐고선 뽀족하게 솟아오른 젖꼭지에 이를 세웠다.

"아흑! 아........."

유두가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거친 욕망에 쾌감이 이는 것도 감출 수 없었다. 일면, 불안의 느낌은 있었다. 안으로 파고든 그가 더 격렬히 움직일수록 육감은 더 끈질기게 불안을 물고 늘어졌다. 그러면 난 또 그 불안을 몰아내기 위해서 온몸의 에너지를 그에게 쏟아 부었다. 무아지경에 빠졌어도 그를 꼭 붙잡고 매달렸다. 그대로 시간이 정지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불안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무섭게 덮쳐왔다. 소파에서 처절하리만치 뜨거운 사랑을 나눈 후, 그는 말이 없어졌다. 집에 들어와도 서재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물론 밤엔 내 침대로 들어와 열정적인 애무로 날 깨우고서 천상의 환희를 선사해 줬다. 하지만 대화도 없었고 시선조차 진지하게 교환하지 않았다. 애써,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회사 일이 뭔가 잘 안 풀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별장에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던 날 저녁, 그의 계모가 찾아왔다.

"너도 참 딱하구나. 생각이 없는 건지, 어쩌다 어린 게 못된 것부터 배웠는지 모르겠어. 졸업할 때까지 버티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미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겨우 최근에야 공부를 열심히 해서 기생충 신세만이라도 면해야겠다는, 그가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의 사람은 돼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을 뿐이었다.

"어차피 둘이 끝까지 갈 거라고는 생각 안 했을 거고. 그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을 거 아냐. 제 사생활이라고 간섭 말라는데, 그것도 총각일 때 말이지. 이제ㅔ 결혼하면 이게 다 흠인데, 한 치 앞을 못 본다니까."

두 번째여서 조금은 나을 줄 알았다. 그런데 도망가고 싶을만큼 두렵고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확신을 주지 않았고 난 자신을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았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박쥐처럼 사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쪽에서 알아볼 건 다 알아볼 테니까 입 조심해. 불쌍한 고아 애 하나 거둬들인 걸로 돼 있어. 숭고하고 거룩한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말야. 아직까지 이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지..........알게 되더라도 마주치게는 말아야지. 이번에도 못 알아듣고 버티면 쫓아내는 수밖에."

"사모님....:"

"국이 결혼할 거다."

결혼? 잠시 그 단어가 무슨 말인지 와 닿지 않았다.

"은해한테 상처 줄 녀석이 아니니까 곧 정리하겠지만, 최기사하고의 인연을 생각해서 미리 알려주는 거야. 맨몸으로 내쫓기든 말든 내 알 바 아닌데, 그래도 아직 애다 싶어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거야. 명색이 어민데 아들놈이 벌여놓은 일 수습은 해야지."

거대한 파도에 휩싸인 기분이었다. 충격에 귀가 멍멍해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머리가 번개를 맞아 조각조각 난 것 같았다.

"국이 상대론 최고 좋은 조건이야. 국이가 좋거든 딴 생각말고 국이 생각부터 해. 신부 아버지가 야당총재시다. 돌아가신 회장님이랑은 형, 아우로 지내시던 분이야. 그런 집안에서 너 있는 거 알면 국이 인생은 끝나는 거야. 그뿐이면 다행이지. 사회적으로 생매장 당하는 거라구. 알겠니? 너한테 뭐가 최우선인지 생각 좀 해 봐. 네 장래를 생각해야지. 유학이든 이민이든 보내줄 테니까."

눈앞에서 열심히 말하던 사모님이 일어나 나가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녀와 엇갈려 그가 들어왔다. 성난 눈길이 격돌했고 무슨 말인가를 하는지 입들이 벙긋벙긋 움직였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 거친 목소리가 나고부터였다.

멍한 눈빛으로 들어오는 그의 움직임을 쫓았다. 내 표정을 보고 그는 이미 모든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러면서 어떤 해명도 하지 않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결혼해요?"

계단에서 그가 멈춰 섰다. 뻣뻣한 목을 돌려보자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래."

다시 올라가는, 적어도 내 눈에는 태연해 보이는 그의 등을 보며 물었다.

"왜요?"

"서로 필요로 하니까."

"서로?"

몸을 돌려 내려오는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러고선 아주 복잡한 문제를 유치원생에게 설명하는 것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그 여자도 나도 결혼이 필용한 시기야."

이해할 수 없었다. 받아들이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 같았다. 그를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만, 내 영혼은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참혹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달라질 거 없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

"..........."

"그렇게 될 거야. 내가 말한 거 기억하지? 난 너 평생 안 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옆에 있어야 돼. 알겠어?"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현실감이 없었다.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배우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턱이 잡혀 들어 올려졌다. 꽃향기..........낯선 향수. 아주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와 지냈던 지난 시간들이 행복한 꿈이었거나............

입술이 다가왔다 떨어졌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전신의 감각이 모두 죽어버린 것 같았다.

"난......모르겠어요."

손을 떼고 돌아선 그는 주방으로 움직였다. 연한 갈색의 액체가 그의 입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유리잔을 들고 보는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더 이상 대화를 하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짜증스럽거나 싫증난다는 그런 표정...........하지만 난 알아야 했다. 내 머릿속에서 윙윙대는 이게 뭔지.........

"우리............계속 같이 살 수 있어요?"

"허용범위 안에선."

"허용범위?"

"결혼을 깰 순 없어."

벌컥 잔을 들이켜는 그를 본 순간 머릿속이 익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갑자기 모든 감각이 생살을 뚫을 듯 날카롭게 살아났다.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다.

"정말 결혼을 한다는 거예요?"

난 일이서 있었다. 폭력적인 감정이 불꽃처럼 일어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날 둘려싸고 있는 모든 걸 부서뜨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결혼은 제도일 뿐이야. 지금 나한테는 합병이나 마찬가지야."

"싫어요."

그가 다가오며 말했다. 표정은 냉담하고 목소리는 신경질적이었다.

"착각하지 마. 오버하지도 말고. 네가 나한테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내 반은 네 꺼다. 하지만 나머지 반은 아냐. 결혼은 나머지 반에 속해. 그것까지 넘보면 곤란해. 그건 네 몫이 아니고 줄 생각도 없어."

"회사랑 결혼은 달라요. 회사는 몰라도 다른 여자랑 당신은 나눠 갖긴 싫어요."

"질투하는 거냐? 아니면 상대가 네가 아니라서 맘 상한 거냐?"

"그래요! 둘 다예요! 둘 다! 아악! 아아! 아아아아악!"

비명을 질려버렸다. 귀를 막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신경이 끊어질 것 같았다. 닥치는 대로 붙잡아 던졌다. 영원히 그의 여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길 바랐지만 터무니없는, 절대 하느님이 들어주실 수 없는 꿈이란 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말의 기대는 하고 있었다. 그와 결혼해 그의 아이를 낳아 평생 함께 하는 꿈.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내게도 충격이었다. 티끌만큼의 기대가 날 다 차지하고 있었나 보다.

쿠션, 전화기, 책, 화병, 잡히는 대로 내던졌다. 난동을 부렸다. 믿을 수 없었다. 충격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억센 힘이 팔을 죄었다. 닥치는 대로 내뻗고 휘두르고 버둥거렸다.

"싫어! 싫어! 싫어어어어!"

머리가 흔들렸다. 고래고래 악을 쓰고 닥치는 대로 사지를 휘둘렀다. 단단한 족쇄에 온몸이 묶였다. 뿌리쳐도 밀려나지 않고, 소리쳐 울어도 소용이 없었다. 불시에 온몸의 기운이 좍, 한여름 가뭄처럼 싹 말라버렸다.

그에게 붙들려, 축 늘어져 안긴 채 나는 애원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발........제발 부탁이에요. 하, 하지 말아요."

몸이 놓여 놨다. 소파로 스러져 내렸다. 그는 한걸음씩 내게 물러났다. 아무리 떼를 쓰고 빌어도 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정한 마음을 돌릴 남자가 아니다. 그래서 마치 오염물을 보는 듯한 그의 눈빛에 나는 상처입지 않았다. 뒤집을 수만 있다면 더 참혹한 꼴을 당해도 상관이 없었다.

"무,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끝낼까 생각해요?"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침대에서만, 내 몸 닿을 때만 격렬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격하게 감정 보일 때도 있구나. 그 생각했다."

"재, 재미있나요? 내 꼴이......"

"이젠 비꼬기까지 하는군."

"비, 빌게요. 뭐든지..뭐든지 다 할게요."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엎드려 빌었다. 나는 자존심이 없었고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발닦이가 돼도 상관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유일한 내 미래였기 때문이다.

"일어나."

"제발.......버리지만 말아요. 제발..."

"안 버려."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강철보다 더 차고 딱딱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일어나."

"겨, 결혼은......."

"해."

"아, 안 변하고, 결혼도 하고........."

"그래."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 여자도 나도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결혼이다. 아무 문제 없어."

머리가 띵했다. 충격에 눈물마저 얼어붙어버렸다.

"그, 그여자도 나도.................둘 다 피, 필요한가요?"

"그래."

"말도 안돼요. 어떻게......, 어, 어떻게.........."

"말할 거다. 너에 대해서. 양해한다면 더 이상 나쁜 짓이 아니지."

"말도 안돼요! 양해할 리가 없어요. 어떤 여자가 자기 남편이......"

남편? 그는 남편이 된다. 어떤 여자의 남편..........그리고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럼 난.......그의 말대로라면 난.......

나쁜 여자.

몸이 붕 떴다. 그에게 안ㅇ겨 옮겨지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깎아놓은 듯 단정한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단단히 화가 났거나 엄청 못마땅한 것이다. 그게 그건가........

나쁜 여자 같은 건 상관하지 않는다. 지금도 나쁜지 좋은지 알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제일 악독한 마녀가 돼도 상관없다. 하지만.........

"나, 난 견딜 수 없어요. 막을 거예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을래요."

"넌 그럴 수 없어."

무기력한 저항감이 눈물을 흘려보냈다.

"우리 관계를 맘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거란 그의 말은 희망사항일 뿐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미 모든 상황이 변해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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