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첫번째열병-11화 (11/14)

#11

"엄해윤! 너 인마, 제정신이야! 요즘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거야! 너 정신 안 차릴래? 엉!"

반에서, 아니 전교에서 딱 2명일지도........

이상한 건 상위권의 해윤이 나와 같이 쪽지시험을 백지로 냈다는 것이다.

점심시간 학생들의 식판을 씻는 게 영어선생님이 내린 벌이었다. 난 해윤과 설거지통에 손을 담그고 밀려드는 식판을 씻었다. 해윤의 얼굴엔 긁힌 상처와 멍 자국이 있었다. 왜 그런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교문 앞에서 말다툼한 이후로 해윤은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더 해윤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으이구! 여기 고춧가루 남았잖아. 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이러면 두 번 일이야. 우리가 다 다시 해야 되잖아!"

식당의 아주머니가 역정을 내셨다. 죄송하다 말하고 해윤이 씻어놓은 식판을 다시 각져와 물에 헹구었다.

"이리 줘."

개수대로 손이 들어오더니 식판을 홱 채갔다. 그 바람에 물이 사방으로 뛰었다. 옷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어 괜찮았지만, 문제는 얼굴이었다. 물이 뺨을 타고 턱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해윤이 움찔 놀라는 걸 보고 난 아무렇지도 않게 손등으로 물기를 닦았다. 그리고 다시 설거지를 했다.

"누구 한 마디에 친구를 하고 말고 결정해? 그렇게 바보냐?"

물소리에 섞여 잔뜩 벼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흠칫했지만 그냥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식판을 씻었다.

"내 참 더러워서!"

갑자기 해윤이 식판을 내팽개치고는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나가버렸다. 뒤에서 아주머니들이 불러도 대답도 않고 나가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거의 있는 듯, 없는 듯 지냈기 때문에 누가 내게 화가 나 있거나, 나 때문에 불쾌해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걸 느껴보지도 못했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해윤의 행동이나 표정은 계속 마음에 걸려서 걱정됐다. 반에서 1,2등 하는 애가 자주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얼굴에 상처가 나 있는가 하면, 늘 떠들썩하게 친구들과 어울리던 애가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그게 모두 내 탓인 건지....

점심시간이 끝나고 교실에 들어갔는데 해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이 물었지만 누구 하나 아는 애가 없었다. 갈만한 곳을 찾아다녀 봤다. 새롭게 단장한 과학실, 농구장이 있는 체육관, 옥상, 매점, 쓰레기장까지.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가 않았다.

해윤은 종례시간까지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화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왔다. 난 할 말이 없었다.

"너한테 무슨 말 안 해?"

고개를 저었다.

"너...........정말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때 교문 앞에서 들은 모양인지 확인을 해왔다. 고개를 끄덕이자 소화가 망설이더니 말했다.

"나.........그래도 네가 해윤이랑 얘기하는 거 싫어."

"해윤이.........걱정 돼."

"네가 왜?"

"치, 친구니까."

그렇게 말하고서야 비로소 내 마음에 확신이 생겼다. 스키장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가 떠올랐다. 처음 본 사람들인데도 그들은 진심으로 날 걱정하고, 위로하고, 나보다 더 분개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흥분하는 그들이 이상했지만 싫지 않았었다. 생각해 보면 참 따뜻했었다. 삼촌과 둘이 사는 걸로 알고 김치까지 챙겨주는 그 마음이 내 가슴에 씨앗을 뿌렸나 보다.

"그래, 친구니까."

"넌 그러면 안 돼."

"어째서?"

"해윤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잖아. 전교에 소문이 좍 놨어. 네가 딴 사람 좋아하는 것도 다 알아. 근데 친구니 어쩌니 하면서 해윤이 옆에 있으면 너 양다리 걸치는 거야. 그럼 걔가 뭐가 돼? 얼마나 힘들겠어. 해윤이가 얼마나 괴로울지 생각 안 해?"

양다리? 괴롭다고? 해윤이가? 멍해졌다.

"네가 다른 사람 좋아해도 걘 너 좋아할 건가 봐. 그 마음 이용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나, 난........"

뭔가 마음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머리를 숙이고 있는 소화를 보았다. 자존심 상해하는 표정, 곧 눈물방울이라도 떨어뜨릴 것 같은 눈. 해윤이 소화한테 무슨 얘기 들은 거 아니냐고 추궁하던 게 생각났다.

"말했어? 지난번에 나랑 얘기했던 거."

"했어. 너한테 무슨 얘기한 거 아니냐고 다그쳐서 해버렸어."

소화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구나."

"이제 어쩔 거야?"

"뭘?"

"난 해윤이가 저렇게 방황하는 거 못 보겠어.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밤새며 공부하는데........계속 저러면 큰일이야. 안 그러리라 생각하지만, 만약 점점 더 저러면 그땐...............그땐 네가 좀 도와줘. 부탁할게."

다시 신중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래."

라고 대답해버렸다. 해윤이 만약 내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무슨 일이든 도와주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잊어버려. 흘려듣지 마. 정말로 잊어버리라고. 미친개가 짖었던 거야. 알았어?"

그러고 사흘이 지났다. 그는 곧장 출장을 갔고 돌아오기로 한 날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 더 연장이라는 전화를 받았다.

잊어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시 그의 어머니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그렇게 않으면 그의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무서웠다. 만일 그의 어머니가 경고한 대로 회사의 평판이 나빠지거나, 그의 위치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 너무 불안해서 그가 돌아와 무슨 말이든 해주었으면 싶었다.

최소한 그의 회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만이라도 알았으면 싶었다.

정규수업 외 2시간의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집 앞에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우선은 기뻐서 후다닥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1층은 컴컴했다. 2층 계단을 오르는데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가방을 맨 채 그의 방 쪽으로 걸었다. 2층 거실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이제 그가 정말 온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의 방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정적이 흘렀다. 문을 열어 보았다. 방 안 역시 어두웠다. 하지만 난 금세 그의 존재를 느꼈다. 그의 숨소리와 체취라면 천 길 동굴 속에서라도 찾아낼 수 있으니까.

어둠 속에서 침대로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거라면 익숙한 편이었다. 시야도 밝은 편이라 그의 실루엣을 금방 포착했다. 숨소리가 조금 무겁고 탁하게 느껴졌다. 다가갈수록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한 채 손을 뻗어 불을 켰다. 침대 옆의 스탠드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온통 땀으로 젖은 얼굴이..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너무 놀라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뜨거운 숨을 내뿜는 그의 얼굴은 백짓장 같았다. 입술조차 하얗게 말라 있었다. 정장차림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는데 셔츠의 목이며 가슴 부분이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종마처럼 튼튼해 보이던 그가 맥없이 누워 잇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꿈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었다. 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이마를 만져보았다. 그 열기에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동시에 그의 눈썹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찡그리는가 싶더니 눈을 조금 뜨고서 날 쳐다봤다. 알아보고는 다시 눈을 감더니 신음소리같은 걸 흘렸다.

"나.............아파."

목이 콱 막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예요? 왜 아픈 거예요? 언제부터 아파요? 의사를 부를까요? 병원에 가요? 앰뷸런스를 불러요? 머릿속에선 그렇게 쪼아대는데 내 성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보처럼 굳ㄱ어있는데 그가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다. 이번엔 제대로 눈을 떠 보더니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몸을 얼어붙어 버렸고 목소리는 실어증에 걸린 것 같았다. 무기력한 그의 모습에 완전히 충격을 받아버렸다.

간신히 일어나 앉은 그가 테이블 쪽으로 손을 뻗었다.

"물 좀...."

멍하니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를 보았다. 약 봉지와 물컵이 보였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걸어가 물컵을 잡았다. 그런데 한발짝도 떼기 전에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잔이 퍽! 깨지며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움직이지 마!"

그가 신음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괜찮아? 안 다쳤어?"

그 순간 날 묶고 있던 충격의 족쇄가 끊어졌다.

"오지 마요."

"너나 저리 가있어. 다쳐."

가방을 팽개치듯 놓고 일어나는 그를 붙잡았다. 그가 놀라는 걸 느끼며 억지로 침대에 앉혔다. 가까이 있기만 해도 그의 몸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그도 보통사람들처럼 아플 수 있다는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난 그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했던 걸까? 내 영웅이자 연인이 아니라 신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러니 아파 누워잇는 그가,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충격이고 공포고 불안인 거다.

"우, 우선......"

충격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머릿속은 여전히 공황상태였다.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 일단 누우세요."

"옷부터 벗겨줘. 축축해."

다시 움찍 놀라고 말았다.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머리까지 힘없이 떨구고 앉은 것만도 무서워 죽겠는데, 자존심이 철옹성같은 사람이 제 입으로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머릿속이 캄캄해지고 심장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조금 나아지려던 공포가 다시 엄습해 왔다.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

"어, 어디가 아파요?"

서서 양복 윗도리를 벗기는데 그가 기대어왔다. 내 명치 부분에 이마를 대고서 순순히 팔을 들었다.

"감기. ...............열나고 어지러워."

"병원엔 다녀왔어요?"

"응."

"언제요?"

"회의 때문에 시간을 못 내서...."

넥타이를 벗기고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힘없이 늘어진 그는 엄청 무거워서 머리만 기대고 있는데도 버티는 게 힘들었다. 그래도 그와 대화를 하는 동안 차츰 용기가 생겼다 그를 도울 수 있을 거라는.......

"그래서요?"

셔츠를 벗기면서 다시 한 번 놀랐다. 그의 피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뜨거웠기 때문이다. 대체 열이 몇 도가 되는 걸까? 정말 병원에 정말 다녀오긴 한 걸까?

"회의 때문에 병원에 못 간 거예요?"

"미루다가 결국..........회의 취소하고......."

"누, 누워요."

상의를 다 벗기고 침대에 눕혀 바지벨트를 풀었다. 이런 식으로 그의 몸에 손을 대는 건 처음이어서 좀 어색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의 바지를 벗기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병원에서 뭐래요?"

"주사......맞았어."

"입원 안 해도 된대요?"

"입원 안 해. 내일........출근할 거야."

아, 이 고집쟁이! 화가 났다. 보지 않아도 어땠을지 알 것 같았다. 말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하지만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그의 눈꺼풀이 힘없이 가라앉은 거만 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데...........

"야, 약은 먹었어요?"

"응."

잠들려는지 그의 숨소리가 낮게 잦아들었다. 팬티만 남기고 양말까지 벗겨냈다. 이불을 꺼내 몇 겹으로 덮어준 다음에는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아직 내 손에 들려져 있는 그의 양말을 발견했다. 양말은 빨게 세탁기에 넣어야지, 생각하자 그때부터 몸이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과 가슴은 물이 가득 찬 풍선처럼 울렁거리고 있었다. 뭔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버릴 것처럼...........

꾹 참고서, 괜찮다고, 다 괜찮아질 거라고 되니이면서 깨진 유리 조각을 치웠다. 그의 머리를 짚어보고 차가운 물수건을 만들어 그의 머리 위에 놓았다. 그가 물을 찾았던 게 생각 나 조심스레 그를 깨웠다. 푹 자도록 둬야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가 괜찮은 건지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으음......"

"물이에요."

손으로 그의 머리를 받쳐 들었다. 무거워 내가 끌려갈 것 같았지만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머리를 들었다. 옆의 베개를 끌어다 그의 등에 받치고 물컵을 입에 대주었다. 그는 실눈을 떠보더니 다시 눈을 감고서 물을 마셨다. 그러곤 다시 쓰러지듯 누웠다. 이불을 꼼꼼히 여며주고 수건을 다시 빨아 올려놓았다. 침대에서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그의 손이 뻗어왔다.

"어디 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는데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확실히 내 손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그의 손이 너무  뜨거웠다. 그 뜨거운 손을 잡자 금방 기운이 다한 듯 스르르 미끄러졌다. 이불 속으로 넣어주려는데 다시 잔뜩 쉬어 꺼끌꺼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말고 옆에 있어."

어느새 눈을 뜨고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이 촉촉이 젖어 우수에 가득 차 보였다. 불덩어리 같은 손이 다시 나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아직 열이 높아요.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나.........아파. 그러니까 옆에 있어."

그는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그 눈을 억지로라도 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눈을 뜨고 봤지만 아무래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열에 들떠 자신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는 게 아닌가, 두려움은 자꾸만 커져갔다. 움직여야했다. 그대로 있다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죽을 끓이고, 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헤대는 그를 달래고, 얼음주머니를 만들고, 식은땀에 젖은 몸을 닦이고, 자장가를 불러주고, 약간의 죽과 주스를 먹게 했다. 그리고 아침을 맞았다. 하지만 그는 평소의 기상 시각에 눈을 뜨지 못했다. 결국 장 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열이 안 내렸어요. .............네. 지금 주무세요.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침 일찍 의사가 다녀갔다.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지만 난 믿을 수 없었다. 아침 기상은 칼 같이 하는 사람이 여전히 눈을 못 뜬 채 파리한 모습으로 누워 있기 때문이다. 그의 팔에 꽂힌 주사바늘과 연결된 링거병을 보면 두려움이 더했다. 저게 약이려니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밤새 더 악화된 것이 아닌가, 불안감만 늘었다.

"학교 가려고요? 안색이 안 좋은데........."

의사가 남겨놓고 간 간호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의 교복차림 그대로였기 때문에 등교하려는 건 줄 안 것 같았다.

"괜찮아요."

간호사가 있어줘 다행이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간호사가 능숙하게 주사바늘을 꽂는 걸 본 순간 생각했다. 내가 아니라 밤새 그녀가 있었다면 그는 오늘 아침 거뜬히 일어날 수 있었을 거라고.

그가 깨어난 건 오전 8시. 난 감히 그의 곁에 가지도 못했다. 간호사와 말을 주고받는 그를 꿈인 듯 지켜보았다.

"쓸데없이........."

내 쪽을 보는 그의 눈빛에 짜증이 감도는 게 보였다. 드디어 정상적인 그로 돌아온 것이다. 안도의 숨과 함께 뭔가가 북받쳐 올랐다. 물색없이 터지려고 해서 목구멍을 꽉 닫고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다 돼 가요. 조금만 참으세요."

간호사의 말을 듣다가 다급히 방을 나와 버렸다. 곧장 방으로 가 어젯밤 갖다놓은 그 자리에 고대로 놓여있는 가방을 들고 나왔다. 때마침 그의 방에서 나오던 간호사랑 눈이 마주쳤다.

"찾으세요. 들어가 봐요."

침착하게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를 보면 꽉 막고 있는 감정의 봇물이 터져버리고 말 것 같았다.

"하, 학교에 갔다고 해주세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딴 생각 안 하고 수업에만 열중했다. 점심시간에는 카레라이스를 한 그릇 뚝딱 해치웠고, 음악시간에는 노래도 불렀으며, 선생님의 질문에 손을 들고 정답을 말했던 것도 같았다. 그 어느 날보다 빽빽하고 분주하게 보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해윤이 말을 걸어오기 전까진.......

하교시간, 운동장을 돌아 걷는데 옆으로 해윤이 따라붙었다.

"너 오늘 왜 이래? 나사 빠진 애처럼....."

내가 뭘......? 돌아보자 해윤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내 실내화........진흙투성이다. 눈을 드는데 얼굴로 차가운 게 흩뿌려졌다. 아......비가 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고 보니 교정 어기저기에 우산이 둥둥 떠다녔다.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뛰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그냥 맞으며 걷는 아이도 있었다.

"우산 없어?"

해윤의 머리와 등이 보였다. 해윤이 구부렸다 일어난 자리에 내 운동화가 놓여 있었다. 그때서야 실내화를 신은 채 교실을 나왔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비를 맞고서 걷고 있었다. 내 기억에는 없었다. 비가 오는 것도 몰랐다. 그러는 동안 내가 한 것이라곤 그의 생각을 밀어내려는 거였다. 그가 어떤지 생각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고, 고마워."

운동화를 신고 실내화를 갖다 두러 다시 교실로 갔다. 복도 신발장에 진흙투성이 실내화를 넣었다. 해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있어. 가서 우산 하나 사올게."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뛰어가 버렸다. 비를 맞고서 말이다. 그 모습이 참 시원하고 활기차게 보였다. 영화에 나오는 예쁜 장면처럼 뿌옇게, 느리게.........

"거기 있으라니까 왜 따라와?"

"네가 있어. 내가 사올게."

가게로 뛰었다. 숨이 차도록 빨리. 가방을 뒤져 겨우 지갑을 찾아 계산을 하고 빨간 우산을 샀다. 다시 학교 쪽으로 뛰어갔다. 해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얼른 우산을 펴 해윤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자, 받아."

해윤의 표정이 울겅불겅했다. 금방 울음을 터트리려는 꼬마아이 같았다.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금방 알 수 있는 해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중간이랄까. 좀 알 수 없었다.

"넌?"

내 빈 손을 보고 들어왔다. 나? 그래, 내 걸 깜박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미 젖었고 싫지 않았으니까. 비의 청량감이 내 머릿속을 개운하게 씻어주는 느낌이었다. 이왕이면 거친 수세미 같은 걸로 박박 씻어주었으면 싶었다.

"잘 가."

돌아서 걸었다. 최대한 느리게 걷고 있었다. 집에 가는 게 무서웠다. 그를 보는 게 두려웠다. 집이 어둠에 싸여 있고 그의 방이 비어있다면 목 놓아 울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시 혼자가 된다면 난 정말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뒤로 젖혀 우산을 보았다. 빨간 우산이 내게만 씌워져 있었다. 우산을 밀어냈다. 해윤의 머리 위에 씌우고는 다시 걸었다. 해윤은 포기하지 않았다.

"감기 걸려."

"아프고 싶어."

"뭐? 왜?"

"그 사람보다 더 아프고 싶어."

해윤이 멈췄다. 멈춘 우산을 뒤에 두고 걸었다. 걸어서 집까지 갔다. 집은 어두웠고 젖어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문을 열고 을씨년스럽도록 어두운 정원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섰다. 어두웠다. 2층에도 불빛이라곤 없었다. 오한이 들었다. 싫었다.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꼈던 어둠이 전신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둠이 목을 조르고 한 줄기의 공기도 허용하지 않았다.

간신히 불을 켰다. 헉헉,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뜨악하게 밝은 빛이 산소 호흡기였다. 숨을 몰아쉬며 2층을 둘러보았다.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뚝뚝 빗방울을 떨어뜨리며 그의 방으로 걸어갔다. 노크를 하고 밀어내듯 문을 열었다. 어두웠고 텅 비어 있었다. 떨림이 멈췄다. 불안보다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상상으로 수십 번 내 몸을 찔러댄 괴로움에 비하니 눈앞의 현실은 그리 잔혹하지 않았다. 한 번에 내 심장에 비수를 꽂아줬으니까........

그의 방에서 몸을 돌렸을 때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서재로 움직였다. 문이 약간 열려있었다. 손을 대자 소리 없이 스르르 열렸다. 불빛 속에 그가 서 있었다. 내게 등을 지고 책장에서 막 책을 빼내고 있었다.

책을 들고 돌아선 그를 본 순간, 눈이 마주친 순간, 물풍선이 터져 그 안에 있던 것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는 한숨을 쉬고 책상 위에 책을 놓고 허리에 손을 올렸다. 회색 바지에 검정색 셔츠 차림이었다. 칼라가 없는 브이네크라인 셔츠가 그를 더 건장하게 보이도록 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팔뚝, 넓은 가슴 근육이 셔츠에 굴곡을 만들었다. 조금도 아픈 사람 같지 않았다.

"윤 기사 못 봤어?"

못 봤다. 아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해윤과 우산을 쓰고 있어서 윤 기사도 날 놓쳤을 것이다.

"휴대폰을 사야겠다. 시도 때도 없이 걸게 될까 봐 안 사줬더니..........가서 뜨거운 물에 좀 담그고 있어. 전화 한 통만 하고 갈 테니까."

몸을 돌렸다. 비칠비칠 걸어 내 방으로 갔다. 욕실로 가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교복을 벗었다. 의식 없이, 그저 그의 말대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알몸이 되어 욕조에 몸을 넣었다. 수면을 바라보며 그냥 앉아있었다. 금방 그가 들어왔다. 쟁반을 손에 들고 있었다. 욕조가에 앉아 컵을 내밀었다. 우유였고 따뜻했다. 떨리는 손으로 받아 입술을 대자 꿀꺽꿀꺽 넘어갔다. 쉬지 않고 계속 넘겼다. 우유가 턱을 타고 흘러 물속으로 섞여 들었다. 천천히, 그리고 깨끗이 다 비운 잔을 그에게 건넸다. 잔을 치우고 그는 꿰뚫어보려는 듯이 날 쳐다봤다. 손이 뻗어와 내 턱을 잡아 올렸다.

"서럽게도 우는군."

나는 오래 전부터 울고 있었다. 그게 밖으로 흘러내린 건 입술에 우유가 닿았을 때부터였다.

"소리도 안 내고..........왜 울어?"

입을 열면 흐느낌이 터져 버릴 것 같아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눈이 짓무르도록 자꾸만 눈물이 넘쳐나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도 없었다. 그의 손을 피해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다리를 끌어안고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려 울었다. 눈물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무릎 밑으로 손이 들어왔다고 생각한 순간 욕조에서 몸이 들렸다. 그의 체취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침대에 앉혀졌고 이불에 감싸여 그에게 안겼다. 옹송그린 몸으로 그의 무릎 위에 아기처럼 안겨 있었다. 등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눈 녹듯 스러지는 응어리를 눈물로 쏟아냈다.

"엄살 좀 떤 대가치곤 너무 엄청나잖아. 놀랐니? 많이 놀랐어?"

머리에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젖었을 텐데, 온몸이 젖어 있는데.......

"옆에 있으란다고 잠도 안자고 버텼지? 세수는 하고 학교 갔어?"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흐느낌이 새어나갔다. 눈이 따갑고 머리도 아팠다.

"푹 아팠어. 뭐든지 제대로 해야 적성이 풀리는 놈이잖아. 제대로 아팠어. 아픈 김에 장난 좀 쳤지. 이 녀석 어쩌는지 구경하자 싶었어. 너 한 거 다 기억해. 열이 나 더워죽겠는데 자꾸 이불을 덮어서 짜증이 좀 났지. 억지로라도 입원시켜 버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끝까지 옆에 있더군. 내가 죽을병이라도 걸린 표정으로 말야. 무슨 생각하나 궁금해서 아침에 물어보려고 했는ㄴ데, 잠도 안자고 학교에 갔다잖아. 무슨 생각하는지 감이 오더군."

그는 눈치가 빠르고 똑똑해서 내 생각을 이해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기분, 내 감정을 똑같이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서 몸을 뗐다. 눈을 떠지지도 않을 만큼 퉁퉁 부었고 얼굴은 따갑고 끈적끈적했다. 감정이 북받쳐, 참았던 게 터져 버려서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몸이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잇어도 파헤쳐진 마음만은 못했다.

그의 눈이 흐릿하게 보였다.

"다, 당신 옆에 있어도...., 누, 누가 봐도 떳떳하게.........., 당신 옆에 있고 싶은데............그래도 되는 여자가 되고 싶은데........."

곰팡이 슨 듯한 소리가 내 목에서 흘러나왔다.

"무,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강해지고 싶어요. 흔들리지 않게..........누가 뭐래도............"

새로운 눈물이 흘러 뺨에 닿은 그의 손을 적셔버렸다. 깊게 바라보는 그의 눈에 대고서 마음속에 있는 걸 다 쏟아버렸다.

"당신 없으면 난...........나, 난 죽어요. 불 꺼진 방도 싫고, 아픈 것도 싫어요. 이렇게 약해 빠진 내가, 내가 제일 싫어요."

내 것 같지 않은 목소리가 절규했다. 피 맺힌 한이라도 있는듯이, 지상최대의 사투라도 벌이는 듯이 외쳐댔다.

"거, 겁이 나서 죽을 것 같았어요. 나, 나는 자격 없고, 당신한테 매달려서 사는 기생충이고........, 모, 몹쓸 전염병이고, 아무 도움 안 되는 짐 덩어리였어요. 그, 그걸 알아버렸어요. 다, 당신 없으면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만도 못하고..........내가, 내가 이기적인 걸 알았어요. 비 맞응면서, 길 잃고 헤매면서........알았어요. 어지러워 눈이 핑 돌아도, 아무도 없어요. 여기......, 당신 옆에 오는 것밖에는 하, 할 수가 없어요."

"내가 기다리고 있었잖아."

눈물이 너무 뜨거워 볼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주르르 흘러내린 걸 그의 손이 닦아내면 부질없는 짓 말라는 듯이 금방금방 또 다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 없으면요? 지, 집에 와도 없으면요?"

"그땐 네가 기다리면 돼."

"호, 혼자서요?"

그가 이불을 끌어다 아예 내 얼굴을 문질러 버렸다. 눈물은 닦였을지 몰라도 얼굴이 따끔따끔하고 쓰라렸다.

"감기였잖아, 인마. 암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무기력하게 누운 그를 본 순간 죽을 만큼 무서웠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천국도 지옥도 아니다. 그의 감기가 날 땅에 발 딛고 서도록 만들었다.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도 감기에 져서 하얗게 누워있을 수 있단 걸 깨달았다. 그건 내게 충격이었다. 그와 나 사이에 인플루엔자 따위가 침입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확고하고 옹골차다고 생각했던 안전망, 그건 내 환상이었고 바람이었을 뿐이었다. 감기가 현실을 일깨웠다. 노력하지 않으면, 나아지지 않으면 우리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그를 만졌다. 손으로 그의 머리를 만졌다. 결을 따라 짙은 눈썹을 쓸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 남자 곁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격스러워 내장까지 떨렸다. 날카로운 빛이 담긴 눈을 들여다보았다. 곧은 콧날, 광대뼈, 깎아놓은 것 같은 뺨과 턱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입술.........

"회사는요?"

"잠깐 갔다 왔어."

"하루라도 쉬면 하늘이 무너지죠?"

"밤새 간호하고 학교 가는 녀석보단 낫지."

훌쩍거리며 그의 가슴에 기댔다. 침대 옆에 있던 티슈상자가 무릎에 놓였다. 그가 일어나 드라이어를 가져왔다.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그가 머리를 말려주는 동안 많이 진정이 됐다. 언제 그랬냐 싶게 울음이 멎었다.

침대에 누웠다. 알몸인 채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정신은 또렷했는데 몸이 나른했다. 딱 달라붙은 셔츠 위로 그의 가슴을 매만졌다.

"아프지 말아요."

"비 맞고 다니지 마."

이불 속에서 그의 손이 움직였다. 척추를 따라 내려와 엉덩이 위에서 맴돌았다.

"제발 과로하지 말아요."

"다신 울지 말고."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그를 위해서 무엇인가가 돼야겠다 결심했다. 떳떳하진 않더라도 부끄러운 존재는 되지 말아야지.

그의 턱 아래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랑해요."

"알아."

"죽을 만큼........."

"안 죽을 만큼만 해."

하늘이 외면할 수 없게 노력할 것이다. 애쓰는 게 가여워서 차마 버리지 못할 만큼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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