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일요일 오전, 골프웨어 차림으로 나서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왔다.
"날씨 좋은데 쇼핑이라도 다녀오든지."
"네."
"안 갈 거면서 대답은."
"쪽지시험이 있어요. 영어 단어 외워야 돼요."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공부하는 것 같던데, 너무 무리하지 마."
"네."
기사가 골프가방을 챙겨들고 나가자 그가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새벽에 운동을 너무 격하게 한 거 같아. 허리가 잘 돌아갈지 모르겠어."
키스하기 전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짙은 키스를 해왔다. 그러면서 손으론 터질 듯 부풀어오른 유방을 주물러댔다. 거침없는 혀에 입안 깊숙한 곳까지 점령당하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렸다. 그러곤 턱을 탐욕스럽게 빨아댔다. 새벽에 그렇게 격한 정사를 나누고도 내 몸은 금방 녹아들어 흐물흐물거렸다.
"그렇게 확 간 얼굴하면 발이 안 떨어지잖아."
"그래도 갈 거잖아요."
"네가 보챌 때가 좋아."
"마지막으로 일요일에 집에 있은 게 언젠지 알아요?"
"그 얼굴로 있어. 다녀올 때까지.........."
그는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고 가버렸다. 벌써 봄이었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정원에도 꽃이 만발해 화사했다. 그동안 내게 생긴 변화라면 무슨 일이든 일을 하는 여자가 되기로 했단 거다. 그가 현모양처는 싫은 것 같아서.
그와 나 사이에는 서로 건드리지 않는 골이 생겨 있었다. 작다면 아주 작고, 깊다면 아주 깊은 골. 나는 여전히, 아니 아니 점점 더 사로잡혀서 반한 남자에게 다시 반하고 또 반하며 그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 역시 날 아껴주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을 나눌 때마다 그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따금씩 그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나 또한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눈치를 보는 버릇이 생겼다. 수영장 이후로 난 다시 해윤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 어디에서도.....
거실에서 혼자 영어책을 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주말에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시지 않기 때문에 집엔 나 혼자 뿐이었다.
"누구세요?"
"나다."
모니터에 떠오른 얼굴은 그의 어머니였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시 굳어 있었다. 문을 열어주고 현관 앞에 섰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죄인이 형사를 기다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어머니, 정확히 말해 그의 계모는 전에 살던 집에서도 몇 번 마주치지 않았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출입하는 걸 가끔 목격했을 뿐이었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중년여성을 보았다. 그 나이의 여성에 비해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서 중압감이 느껴졌다. 여성스럽다거나 젊었을 때 아름다웠겠다는 생각보다는 여장부라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지는 타입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대답 없이 들어온 그의 어머니는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길을 던졌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해부하듯 훑어보고는 버리듯 시선을 뗐다. 곧장 거실로 가면서 역시 파헤치는 듯한 눈길로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난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엉거주춤히 서 있었다.
"공부 중이었니?"
얼른 허리를 굽혀 테이블에 흩어져 있는 책을 치웠다.
"물 한 잔 다오."
"아, 차라도....."
"물이면 됐다."
손님 접대가 꽝이었다. 급하게 정수기의 물을 받아 쟁반에 받쳐 들었다. 조심스레 테이블에 놓는데 찌르는 듯 매서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어찌나 살펴보는지 살갗이 다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거기 좀 앉아라."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죄 지은 것 마냥 계속 떨렸다. 새삼 그는 자신과 다르게 가족이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복형제이긴 하지만 동생도 셋이나 되고, 이 집이 아니더라도 갈 집이 있고, 회사도 있고.......그래 알고 있었다. 그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란 걸.
"아주 많이 컸네. 길거리에서 만나면 몰라보겠어. 이제 2학년인가?"
"3학년 올라갔어요."
"벌써 그렇게 됐어? 내년이면 성인이겠구나."
나이로는 아직 열여덟이다. 9살에 입학해서 열여덟에 고3이 된 건 아버지의 실수 탓이다. 산골학교에서 이쪽으로 전학 올 때에 4학년에 넣은 것이다. 그때의 선생님은 내가 키가 크고 10살인데다 아버지가 4학년이라니 그런 줄 알았던 모양이다. 뒤늦게 생활기록부를 보고서 3학년이냐고 물어왔지만 산골에서 난 2학년 수업을 받고 있었다. 선생님이 그 문제를 어떻게 덮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초등학교 3학년 수업을 빼먹어서 학교 공부가 뒤쳐졌는지도 모르겠다.
"보니까 설마가 설마가 아닌 걸 알겠다. 인형처럼 예쁘게도 생겼네. 회장이 혹할 만도 하겠어. 게다가 어리지, 혈혈단신이니 누구 하나 간섭할 사람 없지. 데리고 놀기에 딱 좋았겠지. 그 아비 핏줄이 어디 가겠니."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맞잡고 숨 죽여 있었다. 두 눈을 내리깐 채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부정은 거짓말이고 긍정은 해서는 안 되니까.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깊고 깊은 동굴에서 빛 하나 없이 서 있는 기분이었다. 무서웠다. 내 세상이 무너질까 봐............
"발뺌도 안 하는구나. 그래, 네 몸 갖고 네 맘대로 굴리겠다는데 누가 뭐라겠니. 이모란 여자가 어ㅓ쩌니 저쩌니 해도 허투루 들었더니, 식당이고 호텔이고 돌아다니지나 말지. 여기저기 흠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는데 처신을 어떻게 하는 건지, 원. 원조교제 말 도는데 이제 어쩔 거야. 흉문 돌면 회장 경질되는 건 시간문제야. 회사 망치려고 작정을 했어. 물러나더라도 내 아들들 공부 끝나거든 물러나야지. 사업 확대한다면서 여기저기 일 벌여놓고 회장 경질 어쩌고 하면 주가만 떨어져. 내 주변에 변변한 인물이 하나라도 있으면 내가 경질시키고 말겠지만, 내 아들들 크기 전까진 맡고 있어 줘야지."
그녀가 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내 피는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원조교제란 말이 머리에서 벌떼처럼 윙윙거렸다. 추하고 비도덕적이고 변태스러운 몹쓸 짓. 그런데 그와 내가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볼 거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의 회사에, 가족들에게 알려지면 그는 파멸이다. 나는 가진 게 없으니까 잃을 것도 없지만, 그는, 본인 말대로 야망이 큰 그는 다 잃는 것이다. 아! 어쩌지? 어떻게 하지? 그를 잃을 수도 없고 그가 회사를 잃는 건 더더욱 볼 수 없는데......
"우리 집안에 무슨 원수가 졌어? 회장 자리마다 잡아먹을 참이야? 아파트 하나 얻어 줄 테니까 니가 살아."
"......"
"왜, 싫어?"
"더, 덮어 주실 순 없나요?"
"뭐?"
나 스스로도 무슨 용기인지 몰랐다. 무슨 계획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그를 잃을 수 없단 생각뿐이었다. 그가 손가락질 받는 것도, 그를 떠나는 것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그가 불행하면 내가 더 불행하지만, 그를 떠나선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서웠고 급박했다.
"사모님."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모으고 빌었다. 빌면서 간절히 애원했다.
"사모님, 부탁드릴게요. 제발,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
"기가 막혀!"
"이, 이 집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갈게요. 죽은 듯이 지낼게요."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대양해운 회장이 아직 머리에 피똥도 안 벗겨진 애랑 산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도는 마당에! 내가 지금 그 녀석 체면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회사가 달린 문제란 말야. 회사가! 회사 평판이 하루아침에 걸레가 되는데......! 몇 명 밥줄이 걸린 줄 알아! 아휴, 내가 너 같은 것하고 무슨 얘길 하겠니?"
커다란 쇠망치에 얻은 맞은 기분이었다. 충격에 얼어붙어 버렸다. 우리 관계 때문에 그의 회사가 어떻게 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았다.
"이제 좀 알아듣겠어?"
멍하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가방을 챙겨 일어서는 모습을 망연히 지켜보았다.
"조금이라도 알아들었으면 정리를 해. 내 귀에까지 들어왔으면 곧 그 녀석 귀에도 들어갈 거다. 그땐 이미 늦어. 이사진들도 다 알게 될 테니까. 내일이라도 당장 짐 싸. 길게 끌어 좋을 거 하나 없다."
그녀가 돌아간 뒤에도 난 한참동안 거실에 꿇어앉아 있었다. 해갸 뉘엿뉘엿 져서야 저린 다리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두통이 왔다. 처음엔 커다란 도끼로 머리를 찍는 것 같더니 나중엔 머릿속에 밤송이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따갑게 아팠다.
어두운 방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밤송이와 함께 굴러다녔다. 산골집도 떠오르고 할머니, 아버지도 생각났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랑 송아지 만한 테리, 어둠 속에서 수영장 바닥으로 들어갔을 때, 수없이 나누었던 키스, 눈 내리던 밤 그가 해주었던 어머니 얘기, 내 몸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 뜨거운 눈빛, 신음소리, 격정, 땀..........
"여보세요?"
별 의식 없이 전화를 받고 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
"그냥......아무 것도 안 해요."
-준비하고 있어. 저녁 먹으러 갈 거니까.
".........."
-왜, 가기 싫어?
"아, 아뇨. 준비할게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전화는 끊어졌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어둠 속에서 옷을 찾아 입었다. 가슴 밑에 리본 장식이 있는 조금 귀여운 스타일의, 레몬빛 원피스. 몸매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치마 길이가 짧아 긴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보라색 구슬이 달린 작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대문을 나오자마자 그의 차가 골목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서 있는 날 본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기사를 보내고 차고 쪽으로 가 스포츠세단을 몰고 나왔다. 차가 앞으로 오길 기다렸다가 조수석의 문을 열고 앉았다. 샤워를 하고 옷도 갈아입었는지 그는 골프웨어 차림이 아니었다. 문득 그에게서 꽃향기 같은 게 느껴졌다. 자연의 꽃향이 아니라 좀 더 진한.........낯선 향수.
"뭐 먹을까?"
그를 보았다. 예리하고 강인하고 단호한 남자. 지기 싫어하고, 야망이 크고, 미친 듯 일하며, 잠자리에선 짐승처럼 본능을 발산하는 남자. 그러면서 미칠 정도로 빠져있다는 내게조차도 가슴 한 켠에 있는 응어리를 절대 내보이지 않는 남자.
이 남자 없인 안 돼. 그 없이 난 죽어버리고 말 거야. 떨어지기 싫어.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야. 아, 하느님. 제발 이 남자 빼앗지 말아주세요. 제 목숨까지 앗아가실 게 아니라면 제발.......
앞을 보며 운전하고 있던 그가 말했다.
"전화 목소리부터 이상하다 했어. 또 무슨 일이야?"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으로 핸들을 잡고 있는 그이 손등을 어루만졌다.
"부탁할 게 있나 보군."
"네."
"말해."
손을 내려 그의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느리고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긁고 손바닥과 손등을 돌려가며 쓰다듬었다.
"운전 중이잖아."
"안아주세요."
"지금?"
대답을 생략하고 그의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툭 불거져 있는 걸 바지 위에서 잡고 주물렀다. 감각적으로 손을 움직이자 그의 관자놀이에 파란 힘줄이 솟았다. 난 아예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일으켜 힘줄이 솟은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살짝 혀를 내밀고는 그 파란 힘줄을 따라 핥았다. 그대로 광대뼈를 타고 내려와 귓바퀴를 따라 돌리며 혀를 집어넣었다. 살짝 핥아 올리고는 낮게 속삭였다.
"지금 느끼고 싶어요."
당신이 내 옆에 있다는 거.........아무리 깊이 안겨도 느끼지 못할까 봐 불안해 미칠 것 같아요. 꽉, 숨이 끊기도록, 꽉 안아줘요. 내가 당신 거라는 거,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거 느끼게 해줘요. 지금! 아니면 죽을 거 같아요.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
차가 획 돌아 미끄러지더니 급정거했다.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어두웠고 그걸 알아낼 만큼 이성적이지도 못했다.
난 그가 시동을 끄자마자 그의 몸을 타고 기어올랐다. 욕망이 치솟아 몸이 덜덜 떨렸다. 다급히 그의 입술에 혀를 밀어넣고 거칠게 혀를 휘감아 당겼다. 자극 받은 그가 내 머리를 움켜잡고 멋대로 조종하기 시작했다. 난 그가 요구하는 대로 입을 한껏 벌린 채 목젖까지 혀를 날름거리며 도발했다. 그는 쉽게 유혹 당해주지 않고서 능숙하게 공격을 받고 되돌렸다. 물어뜯을 듯한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 얇은 팬티가 찢겨져 나갔다.
"아흐! 으, 응........!"
내 의도와는 달리 그가 조수석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의 체중과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조수석에 앉자마자 의자가 뒤로 홱 젖혀졌다. 틈을 주지 않고 그의 몸이 덮쳐들었다. 커다란 몸으로 짓누르더니 이로 콘돔의 포장을 물어뜯었다. 능숙하게 끼우고는 손을 뻗어왔다.
"결국 차에서 하게 만드는군."
분하다는 듯 으르릉거려서 웃음이 났다. 하지만 곧 웃음은 사라졌다. 그가 원피스 위로 팽팽하게 부푼 가슴을 만지며 다리 사이로 침입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욕정에 물든 그의 표정은 너무 달콤하고 야성적이었다. 만족감이 쾌감을 증폭시켰다.
"아아! 으응....!'
마음껏 신음을 내지르며 그에게 매달렸다.
"아.....더......더 빨리......."
엉덩이를 높이 들어 그의 것을 깊숙이 받아들였다. 내 안을 휘젓는 그의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의 전부를 원했다. 단지 그의 곁에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없었다. 그의 곁에 있는 것조차 안 된다는 마당에 난 그의 전부를 갖고 싶다는 열망에 몸부림쳤다. 그의 여자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내 남자로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의 야망, 그의 상처, 그의 사랑 전부를........
그가 양호실까지 찾아왔을 때 난 침대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다녀간 그 다음 날, 월요일이었다. 전날 밤 그는 내게 무슨 일이 분명히 있다고 계속 추궁했지만 아무 일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양호실로 들어오는 그의 표정을 봤을 때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어, 어떻게............"
담임이 삼촌이 데리러 올 거라고 말했을 때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왜 그에게 연락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정신을 잃은 것뿐인데........
그가 이마로 손을 뻗어왔다. 반창고를 떼 내고는 상처를 보더니 다시 붙여놓았다.
"신발 신어."
침대에서 몸을 내려 신발을 찾아 신었다.
"미안해요. 지금 바쁜 시각일 텐데........"
그가 앞서 양호실을 나갔다. 양호선생님이 분명히 앉아 있었지만 그는 유령 취급을 했다. 난 무안해서 더 깍듯이 인사를 드리고 나와서 그를 뒤쫓아 갔다. 걸음을 빨리 하니 두통이 몰려오면서 약간 어지러웠다. 잠깐 눈앞이 아찔해 벽을 붙잡았다. 몇 초간 눈을 감았다 떴는데 그가 눈앞에 서 있었다.
"넌 이제 재미있니?"
영문을 몰라 그를 쳐다봤다.
"내가 사색이 돼서 달려오는 게 보기 좋아?"
"미, 미안해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데....."
"이번엔 그냥 안 넘어가. 어제오후부터였어. 토씨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말해야 할 거다. 네 생각, 네 감정, 네 기억, 다. 알겠어?"
그는 대답 같은 건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날 안아들었다. 차에 태워져 보았더니 교실에 있어야 할 가방이 옆에 놓여 있었다. 차가 교문을 빠져나갈 즈음 어떻게 조퇴를 해도 되는 건가 생각했다.
넓은 도로로 접어들 때 그의 손이 어깨를 감싸왔다. 스르르 무너져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열을 짚듯 내 이마를 만지고 손을 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잡아 매만지더니 중얼거렸다.
"나밖에 없단 놈이 뭐 때문에 아파. 내가 옆에 있는데............"
어젯밤에도 계속 생각했다. 잠도 안 자고 수업도 안 듣고 쪽지 시험도 백지로 내버리면서 생각했다. 그가 양호실에 도착할 때까지 결론도 못 내리고 생각만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본 순간, 그의 가슴에 기댄 순간 마음이 정해졌다. 그의 옆에 있을 것이다. 그가 날 버리기 전까진.........그가 날 버린다면, 버려지면 그땐.........그땐 어떻게 그를 되찾을지 생각할 것이다.
집 앞에 도착해 다시 그에게 안겨 방으로 옮겨졌다. 그는 침대에 날 앉혀놓고 베개와 쿠션을 잔뜩 모아와 등 뒤에 쌓아줬다.
"편해?"
"네."
"의사 필요해?"
"아뇨."
"어떤데?"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이에요. 소화제가 이제 듣나 봐요."
"이마는?"
"따끔해요.'
"그건 의사가 와도 별 수 없고."
"네."
"그럼 얘기할 준비 됐어?"
그러려고 마음먹었지만 좀 겁이나 입술을 축였다.
"목말라? 그래, 나도 뭘 좀 마셔야겠다."
그가 마실 걸 가지러 나간 뒤 어떻게 털어놓을지 생각해봤다. 오늘 벌어진 사건에 대해선 솔직히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의 어머니가 한 얘기는 어디까지 전달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차분하게 얘기하고 싶은데 불안하고 무서웠던 감정이 되살아나 흥분하고 말 것 같았다. 울거나 움츠러든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와 내가 그의 어머니 말처럼 부정하고 추한 관계라고 인정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부정한 관계, 원조교제, 그런 단어는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재킷과 넥타이를 벗은 차림으로 돌아왔다. 가슴의 단추도 풀려 있고 소매도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상태였다. 그가 건네주는 구아바주스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침대 옆 탁자에 잔을 놓고 그가 맥주를 마시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침대에서 좀 떨어져 있는 의자에 앉아 내 쪽을 보며 맥주를 마셨다.
"점심을 먹고 체했어. 양호실에서 소화제 받아다 먹었는데 안 들었고."
"네."
"그 다음엔 기절이야. 책상 모서리에 부딪쳐서 이마가 찢어졌고."
누군지 상세히도 말한 모양이다. 하긴, 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차갑게 물었다면 세세히 설명할 수밖에 없었겠지.
"사이가 비어. 왜 기절한 거야?"
그가 정곡를 찍어 물어왔다. 꼭 숨겨야 할 얘기는 아니지만 막상 말하려니 창피했다.
"바, 바늘 때문에...."
"바늘?"
숨을 고르고 이불을 쥐어 구기며 고백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 산골에 살 때요. 할머니가 나 혼내실 때 바늘을 쓰곤 하셨어요. 말썽을 부리거나, 울음을 안 그치거나, 떼를 쓰거나 그러면 바늘로........이불 시침할 때 쓰는 큰 바늘로........."
"찌르셨나?"
그를 보지 않은 채, 이불 구기는 내 손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어디를?"
"여기저기.......주로 손등이나 발등....."
"용케 흉터가 없군."
"깊게 찌르거나 하진 않으셨어요. 그냥 혼내려고 하신 거니까 따끔하게 하셨는데......나한테 제일 무섭고 두려운 벌이었어요."
"바느질은 곧잘 하잖아."
"바늘이 무서운 건 아니에요. 할머니한테 수놓는 것도 배우고, 뜨개질도 배웠는걸요."
"찔리는 게 무서운 건가?"
"네. 밤에 꿈을 꿀 때도 있었어요."
"잘 때 한 번씩 울먹이는 게 그것 때문이었군."
놀라 그를 보았다. 그는 어느새 맥주를 다 마셨는지 주먹 안에 캔이 일그러져 있었다.
"내, 내가요? 내가 울먹여요?"
"가끔. 하나 더 해야겠어."
"회사는 어떡하고요? 그만 가봐야.."
그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다시 방을 나갔다. 여기서 끝내면 좋겠는데 그는 기어이 끝까지 다 들을 모양이다. 말을 하고 하니 마음 한쪽이 조금 편안해지긴 했다. 본론은 아직 시작도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내가 잠결에 울먹였다니 그건 정말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그는 어째서 한 번도 말하지 않았을까?
캔 뚜껑을 따며 들어온 그는 곧장 앉지 않고 입구에서 날 바라봤다. 한 모금을 길게 마시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표정이 없어서, 또 거리가 멀어서 그의 눈빛 속에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체했다니까 누가 손을 따준다 그랬겠지."
"네."
"엄해윤?"
"아, 아뇨. 남소화라고.............같은 반 친구예요."
"여학생이니까 바늘을 갖고 있었을 거고. 싫다는데도 바늘들고 덤볐겠군."
그는 사업가가 아니었으면 탐정을 해도 됐을 것이다.
"괜찮을 것 같기도 했어요. 벌써 오래 전 일이고........"
"근데 안 괜찮았지. 밤에 꿈을 꾸면서 울먹일 정돈데 괜찮을 리가 없지."
"네. 안 괜찮았어요."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서 토할 것 같았다. 산골집 작은 방에서 쥐새끼마냥 웅크려 울었던 게 떠올렸다. 할머니가 뾰족한 바늘 끝을 들이댈 때마다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었다. 울면 더 찌르실 테니까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입술에서 피가 흐르기도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무슨 짓이냐며 더 화를 내시고...
그는 의자에 앉았다. 맥주캔을 탁자에 놓고선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혼잣말처럼 나직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잘 울지도 않았군. 여리고 약해 보여도 강단이 있어 그런 줄 알았는데.....내가 기다리라고 한 그 순간부터 하루도 빼먹지 않고, 병원에 있던 이틀 빼놓고 계속, 날 기다리고 기다렸어. 때려도 울지도 않고.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안 울었지. 불 꺼진 방에 혼자 있으면서 무서워하지도 않고, 강도를 만나고 와놓고도 엄살 한 번 안 떨었어. 다른 여자애 같으면 한바탕 울었을 텐데. 무서웠다고 칭얼댔을 텐데........"
"............"
"너무 침착하고 차분해서, 나보다 더 조용한 이 기집애 확 흩트려놔야지 싶었어. 근데 결국은 내가 흩트려지는군."
그가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뺨을 어루만지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늘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팔려고 보낸 배가 뒤집혔다고 해도 그렇게 놀라진 않았을 거다."
"선생님이 연락하실 줄 몰랐어요. 금방 괜찮아질 거였는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연락하라고 말해놨으니까. 얼굴로 축구공 받아오던 그 날 바로."
"저, 정말요? 하지만 그땐 2학년이었는데. 담임 바뀌었어요."
"담임이라니. 당연히 교장한테지."
깜짝 놀라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교장선생님한테 그런 부탁을 해놨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교장선생님이 날 알고 계신단 건가? 기억하고 있다가 학년 올라가 바뀐 담임에게 내 얘기를 해뒀다는, 뭐 그런 얘기일까?
멍청한 표정으로 내 손을 가져가는 그를 보았다. 손가락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그는 손가락 마디마다 키스를 하고는 손등에 입술을 대고 중얼거렸다.
"얼굴에 상처 내는 거 그만 하랬더니 정말 말 안 듣는다."
따스한 입김이 느껴지는가 했더니 촉촉한 게 닿았다. 그가 혀로 손등을 핥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고 내 이름을 불렀다.
"사희야."
"네?"
"네 할머니 말고. 그러니까 돌아가셔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양반 말고. 또 내가 뭘 알아야하니?"
그에게 잡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꽉 말아 쥐자 그의 엄지가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다. 그게 큰 비밀이라도 되는 듯 힘주어 잡았다가 놓아줬다. 그에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빈틈없이 치밀한 그가 그냥 이대로 지나칠 리 없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만 시험해. 내가 참고 있는 거 모르겠어? 네 할머니만 아니었다면 무덤이라도 파헤치고 싶은 심정이야."
"화, 화났어요?"
"그래."
그의 눈을 보았다. 한 쪽 눈을 붙잡고 깊이, 또 다른 쪽을 붙잡고 깊이, 그리고 두 눈을 깊이...........그렇게 보았더니 뭔가 보였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활활 타고 있는게....
"화.......났군요."
"몹시."
"내가 이 말을 하면 더 화날지도 몰라요."
"기대돼."
깊이 심호흡을 했다. 그도 조금 긴장되는 것 같았다.
"어제 사모님이 오셨었어요?"
그의 눈썹이 꿈틀하는 걸 보았다. 그래도 입술을 축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요. 당신......."
"민태숙?"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빛에 있던 불꽃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더 이상 차가울 수 없는 냉랭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 여자가 왜?"
그의 적대감이 느껴져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소리가 돼서 나오질 못했다. 머뭇거리는 내가 답답했는지, 아니 벌써 눈치를 챘는지 그가 버럭 소리쳤다.
"그 여자가 왜!"
더 말문이 막혀 붕어처럼 입만 뻥긋뻥긋하고서 아무 말도 못했다.
벌떡 일어난 그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화를 냈다.
"제기랄! 체할 만도 해!"
캔이 벽으로 날아갔다. 사방으로 맥주가 튀었다. 멍하니 앉아 카펫이 물드는 걸 지켜보았다. 그 사이 그는 방을 나가고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에 분노가 실려 있었다. 절실히 뭔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젯밤부터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처결을 기다리는 것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