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첫번째열병-9화 (9/14)

#9

개학을 하고 새로 반편성이 됐다. 해윤과 같은 반이 되었다. 해윤 이외도 누가 2학년에서와 같이 나와 같은 반인지, 또 지난번 스키장에 같이 갔던 남학생들은 몇 반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궁금한 게 생기자 학교생활이 조금씩 재미있어졌다.

난 스키장에서 강도를 당할 뻔한 아이로 유명해져 있었다. 해윤의 친구들이 여기저기서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그 때 일을 물어오는 애도 있고, 괜찮은지 걱정해주는 애도 있었다. 난 점점 말하는 횟수가 늘었고 아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뚱해 있거나 위축되지 않고 차분하게 그들을 대했다.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대하도록 노력했다. 예전엔 두렵고 어색했던 것들이 차츰 괜찮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내게 자상해졌다.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필요한 건 없는지, 체크하고 챙겨줬다. 밤이면 그의 침대에서 열정의 천국 같은 시간을 보냈다. 가끔 그가 쉬는 주말이면 느긋이 앉아 영화를 보기도 하고 쇼핑도 하고 산책도 했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몰랐던 걸 조금씩 알아가게 됐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있는데 그가 퇴근해 들어왔다. 같이 보자고 했더니 싫다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얼마 있으려니 휙 나와서는 보고 잇는 비디오를  꺼버렸다. 밖에서 언짢은 일이 있었나 보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밤 그는 불을 끄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 너는 아무렇지 않냐고 했다. 너처럼 이상한 애는 처음 봤다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그의 말 한마디, 스치는 그의 딱딱한 표정에도 상심이 돼 풀이 죽어있었다. 그러자 그가 겨우 고백해왔다.

"공포영화는 질색이다. 당장 갖다 버려."

불을 켜고 잠드는 게 힘들었지만 무척 놀랍고 재미있고 행복한 밤이었다. 그의 평범한 일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싫어하면서도 말해줬기 때문이다.

그는 좀처럼 집에 일을 들고 오지 않았지만 늦게까지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정보를 검색하거나 했다. 그럴 때면 나도 덩달아 같이 책을 보기도 하고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서명이 되어 있는 서류를 보게 됐다. 그는 사인조차도 멋잇었다. 균형이 잘 맞고 힘이 넘쳐 보이고 예뻤다. 그래서 몇 번인가 종이에 흉내를 내보기도 했다.

처음 수를 놓기 시작한 건 손수건 귀퉁이였다. 재미가 붙어 양말목에도 자그마하게 하게 됐다. 그게 일이 점점 커져서 나도 모르게 그의 바지 주머니 안쪽에도 수를 놓아버렸다. 출근 준비를 하던 그가 바지를 들고 내 방으로 찾아왔다.

"이게 뭐야?"

"사인......"

"내 사인인데 내가 모르겠어?"

"싫으시면 지울게요."

"나 참. 엉뚱하긴."

그는 팬티 허리밴드에까지 수가 놓인 걸 보고 어이없어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녀석이라고 투덜대더니 갑자기 껄껄 웃었다. 그렇게 소리 내 웃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쨌건 화내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보라색을 싫어할 줄 알았는데........

우린 사랑을 나눌 때도 가끔 장난스러워졌다. 엉덩이를 깨물려고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하고, 사인펜으로 서로의 몸에 낙서를 하기도 하고, 신문의 십자퍼즐을 놓고 옷 벗기 게임도 했다. 장난스럽게 시작해도 끝은 언제나 황홀한 만족감을 줬다. 그런 사랑의 유희는 그에게 더 깊고 애틋한 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더 좋은 건 그가 주변 사람들 얘기나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말해준다는 것이었다. 난 말할 게 그다지 없어서 해윤이나 새로 알게 된 친구 얘기를 했다. 어느 날은 해윤이 어머니와 다툰 얘기를 전했다.

"해윤인 오토바이를 타고 싶은가 봐요. 근데 어머니가 반대하신대요. 위험하다구요."

"그맘땐 다 그렇지."

"그래도 해윤인 포기 안 할 건가 봐요. 적금을 털어서라도 살 거래요."

"적금?"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아놓은 돈이 좀 있대요. 어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용돈은 알아서 벌어 쓰라고 그러셨대요. 해윤일 보면 난 아메바 같아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단세포동물처럼 살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럼 밤마다 내가 아메바랑 하는 건가?"

"그러신 거예요."

"몰랐군."

"해윤인 굉장히 활력이 넘쳐요. 음 뭐랄까..........용수철 같아요."

"아직은 어리니까. 금방 녹슬어."

"어머니가 1년에 반은 외국에서 지내신다는데, 혼자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제 세상이겠군."

"그런데도 성격이 참 밟아요.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

"여름에 나무그늘에 앉아있으면 바람이 상쾌하잖아요. 해윤인 꼭 그 바람 같아요. 해윤인......."

그때 그는 산책을 멈췄고 집에 돌아와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의 거친 습격을 받았다. 깔아뭉갤 듯 덮치고는 끊임없이 몸을 요구해 왔다. 애태우는 애무에 내가 흐느끼며 애원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티끌조차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나 자신을 송두리째 내줬는데도 그는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의 몸짓에서 미미하게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더 뜨겁고 힘있게 안아줬지만 끝내 그의 불안을 해소해 주진 못한 것 같았다.

난 이제 그의 내면을 조금씩 감지하기 시작했고, 그게 무엇인지 알아가면서 내 무게가 더해져 가는 걸 느꼈다. 그를 알아가는 건 곧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었다. 그의 안에 있는 내 모습을 조금씩 엿보게 되니까.......

"너, 삼촌이랑 둘이 산다니까 외숙모가 챙겨줬어. 우리 집 김치도 외숙모가 다 해다 줘. 우리 모친이 좀 바쁘셔야 말이지."

해윤의 어머니는 패션숍을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였다. 어머니에 대해서 얘기할 때마다 밥도 못하고 스타일도 꽝이라고 투덜대긴 해도 어머니와 꽤 사이가 좋은 것 같았다.

난 김치통을 받아들고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기, 김치 있는데........"

"이거 보통 김치가 아냐. 갓김친데 얼마나 맛있다고. 이거 하나면 밥 두 그릇은 뚝딱이다."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학기에 접어들며 알게 된 거지만 해윤은 친구도 많고 인기도 많았다.

그래서 난 때때로 여학생들의 시기 어린 눈총을 받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그런 것조차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 난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센스 넘치진 않아도 더 이상 아둔하지도 않았다. 더이상 위축되거나 주눅 들지도 않았다. 아마 내게도 자신감이란게 생겼다는 걸 것이다. 그런 거라면 그건 그가 내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자체로는 별반 나아진 게 없으니......

"고마워. 잘 먹을게."

아이들이 김치통을 열고 맛을 보자고 덤벼들었다. 해윤이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 해윤이 김치통을 들고 뛰고 아이들이 뒤쫓고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웃으며 그들을 보고 있는데 어ㅓ떤 여학생이 시야를 막고 들어왔다.

무슨 말인가 할 듯 하더니 그대로 지나쳐 갔다. 그 전에도 그 여학생의 시선을 종종 느꼈던 게 생각났다. 왜 그러는 걸까? 궁금했지만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갓김치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더 좋아하셨다. 아주 맛이 잘 들었단다. 맛보면서도 너무 달게 드셔서 반을 덜어 드렸다. 그는 별 말이 없었다. 식탁에 올라와도 손도 대지 않았다.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았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빈 김치통 그냥 돌려주는 거 아니래서 고민이 됐다. 뭘 채워주나. 생각 끝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어! 안에 뭐 넣었어?"

김치통을 돌려주자 해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뚜껑을 열었다.

"이게 뭐야?"

"저번에 보니까 많이 닳은 거 같아서......."

"이야, 감동인데. 김치 주면 이런 거 주는 거야? 신난다. 신어봐야지. 근데 내 사이즈 어떻게 알았어?"

"신발장 열어봤어."

"냄새는 안 맡았지? 안 빤 지 오래 됐는데......."

해윤을 운동화를 신고 너무 좋아했다. 하루 종일 자랑을 하고 돌아다녀 모르는 아이들이 없을 정도였다. 해윤이 좋아하니 선물은 잘 고른 거 같지만 힐끔거리는 시선이 많아져 좀 부담스러웠다. 잘못한 건가, 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점심시간에 한 여학생이 다가왓다. 더러 눈길이 마주쳤던 그 여학생이었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단발머리에 눈이 큰 아이. 앞쪽에 앉고 공부도 꽤 잘하는 아이다. 이름은 아마도 남소화.

소화를 따라 간 곳은 건물 끄트머리애ㅔ 있는 창고였다. 부러진 책상과 의자, 낡은 매트 같은 것들이 먼지에 덮인 채 쌓여 있었다.

"점심시간 거의 끝나가니까 요점만 말할게. 나 엄해윤 좋아하거든. 1학년 때부터 우리 친했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소화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걸 보면 아둔함에서 아주 벗어나지도 못한 걸 것이다.

"네가 끼어드는 바람에 요즘, 아니 작년 겨울방학 때부터 해윤이가 이상해졌어. 예전 같으면 스키장도 나랑 갔을 텐데..........너, 엄해윤 좋아하니?"

꼭 쥐고 있는 소화의 주먹을 봤다. 내 주먹보다 작고 오동통해서 귀여워 보였다. 안경 너머 소화의 눈이 반짝거렸다. 애써 눈물을 참고 있는 걸까?

"좋아해?"

내게 화가 나 있다. 착해 보이는 아이가 적대하는 게 역력한 눈빛으로 날 쏘아보고 있다. 해윤을 좋아하느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해윤은 재미있고 편안하고 친절한 아이다. 하지만 소화는 그게 못마땅한 것 같다.

"좋아해."

움찔하는 소화를 보고 덧붙였다.

"하지만 원하지는 않아."

"뭐?"

소화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이상하게 쳐다봤다.

"좋은 아이라서 좋아하는데........넌 그게 싫은 거지?"

당황한 표정의 소화에게 한 걸음 다가서서 나직하게 말했다.

"그 기분 나도 알아."

"무, 무슨 기분?"

"그 사람 옆에 다른 여자가 있을 때 기분."

"그, 그럼 해윤이 옆에 있지 마. 얘기도 하지 마. 그럴 수 있어?"

뾰족하게 쏘아보는 시선 때문에 움찔했다. 당당하게 말하는 소화의 용기가 감탄스러웠다. 생일 날 밤 그 여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바로 내가 그 여자에게 소리치고 싶었던 건데..........

"아, 알았어."

순순히 대답하자 소화는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정말이지? 너 약속한 거야?"

"응."

"그리고 이 얘기 해윤이한테 절대 하면 안 돼. 알았지?"

고개를 끄덕이자 소화는 환하게 웃었다. 그때 난 그게 얼마나 어리석으며 무분별한 약속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소화의 기분을 좋게 해줬다는 안도감뿐이었다.

뺨에 차가운 게 톡 떨어졌다. 잠결에 비가 오는 건가, 생각했다. 희미하게 뜬 실눈으로 창문이 보였다. 내 방인데 비가 내리다니..........

"깨워서 미안하다."

그의 목소리다. 눈을 떠 보니 이미 영ㄹ기에 젖어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나 눈동자 깊숙이 숨겨져 있는 열정이 표면으로 드러나 있었다.

이불 속으로 그의 알몸이 들어왔다. 막 샤워를 했는지 비누향이 풍겨왔다.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하루 종일 서류, 회의, 인간에 시달려서 초죽음이 될 정도로 지쳐버려. 때때로 관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그 말에 놀라서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았다. 그가 그렇게 힘들어 하는지 몰랐다. 언제나 능숙하고 여유롭게 일하고 있는 걸로 알았다. 일이 힘들거나 지친 기색을 내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놀란 눈에 그의 입술이 내려왔다. 찌푸린 미간에도 입술이 닿았다.

"그런데도 집에 오는 차안에선 살아나. 너만 생각하니까. 집에 오면 네가 있으니까."

입술을 덮쳐왔다. 키스, 집요하게 내 구강을 범하고 혀를 얽어내는 짜릿한 키스.

촉촉한 그의 피부를 쓰다듬었다. 굵은 어깨와 두툼한 팔뚝, 넓은 가슴과 탄탄한 복부를 어루만졌다. 귀 밑의 부드러운 살을 핥는 그에게서 조금 쉰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참자. 깊이 잠들어 있으면 간단히 굿나이트 키스만 하고, 아니 얼굴만 보고 나오자. 그러면서 들어왔어."

겨드랑이를 핥고 가슴을 파고들어 왔다. 터질 듯 부풀어오른 젖가슴을 양손으로 주무르고 젖꼭지를 번갈아가며 핥았다.

"그런데 실패다. 넌 자면서도 날 유혹해."

그게 분한 건지, 물고 잇던 젖꼭지를 이로 달콤하게 깨물었다. 신음소리를 내자 다시 혀의 돌기로 달래듯 간질였다.

"하고 싶게 만들어. 피곤한데.........피곤하니까 더 미치겠어. 머리가 지쳐버려서 통제가 안 된다."

그가 얼굴을 들고 내려다보았다. 난 그의 목에 깍지를 끼고 다리 사이에 들어온 팽팽한 엉덩이를 감쌌다.

"네 탓이야. 열악한 남자의 본능을 이렇게 들쑤시는 게 아니라고. 알아?"

머리를 들어 그의 귀에 키스했다. 혀를 내밀어 핥으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냄새가 너무 좋아요. 빠지고 싶어.."

"넌 나한테 벌써 빠졌잖아."

애절한 고백은 어디가고 금세 자신감 충만한 기세로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왔다. 내 허벅지를 붙잡아 밀어 올리면서 전신의 체중을 다 실어왔다. 내 위에서 그가 쾌감의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 소리가 황홀해서 더 열렬히 엉덩이를 들썩였다.

벌써 6개월. 하지만 우린 더 서로를 갈구하고 애타게 원하고 있다. 목수의 연장처럼, 화가의 붓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익숙해지면서도 서로가 아니면 안 될 정도로 깊이 빠져들고 있다. 우리 사이엔 말로 끄집어 낼 수 없는 깊은 감정이 흐르고 끈끈한 욕망이 존재한다. 조금도 지치거나 느슨해지지 않고 가속도를 붙여가는 기나긴 장마 같다. 난 아직도 그의 손길에 떨며 아프도록 강한 열망에 몸서리친다. 예전보다 더 그를 원하고 있다. 그는 천 길의 산 같고, 천 길의 바다 속 같은 사람이다. 알면 알수록 깊이 빠져들어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드는.....................

해윤을 피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같은 반인데다 맨 뒷줄에 앉아서 수업 중에 속닥거리기도 좋았다. 아주 무시하는 게 힘들어서 그가 하는 얘기를 듣거나 가끔 단답형의 대답을 했다.

"다음 주부터 진학상담한대. 알았어?"

"아니."

"난 역시 울 엄마 소원 들어줘야 될 거 같아. 울 엄마 소원이 아들이랑 같이 패션쇼 하는 거거든. 그게 소원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잖아? 근데 늘상 그렇게 말하니까 아주 세뇌를 당해 버렸어. 쭉쭉빵빵한 여자모델들 동원해서 꼬셔대거든. 생각하면 나쁘지도 않은 것 같고. 넌 생각하는 학교 있어?"

"아니."

"뭐 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 거 없어?"

"..........."

"야, 현모양처해라. 울 외할머니 말씀이 여잔 그게 제일 좋은 거고, 제일 잘하는 거라더라. 울 엄마 보면 그 말씀이 딱 맞아. 현모양처,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냐."

"현모양처.........."

"왜, 생각 있어? 너 혹시 빨리 결혼하고 싶은 거 아냐? 맞지?"

"아, 아냐."

"아니라면서 얼굴은 왜 빨개져?"

"............"

"아, 담임 또 엄청 잔소리하겠네. 야, 성적 갖고 뭐라 그래도 기죽지 마. 착하고 예쁜데 성적까지 좋으면 너 왕따 당해."

".........."

"너, 무슨 일 있었어? 뭐 기분 나쁜 일 있었던 거야?"

"아니."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처음엔 그냥 이상하게 생각하던 해윤이 어느 날은 어디 아프냐고 물어왔다. 아니라고 답하자 고민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서야 난 소화와의 약속이 엄청난 부담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어리석고 아둔했던 것이다. 해윤을 대하는 게 점점 곤혹스럽고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하교할 무렵이었다.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해윤이 화를 터트렸다.

"너 요즘 왜 그래? 나한테 무슨 불만 있어? 삐친 거야?"

가방을 들고 나와 버렸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는데 뒤에서 해윤이 소리쳤다.

"야, 최사희!"

무시하고 도망치듯 걸었다. 거의 뛰다시피 건물을 빠져나와 교문을 향해 종종걸음 쳤다. 이 학교는 다 좋은데 운동장이 너무 넓다.

"최사희! 거기 좀 서!"

뛰어오는 소리에 나도 달리기 시작했다. 해윤에게 추궁당하면 소화와 한 약속 애기를 다 해버릴 것 같았다. 그때는 그냥 소화 마음을 이해하고 상처 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약속을 했었다. 뒤늦게 해윤을 대하면서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란 걸 깨달았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

어깨가 잡혀 홱 돌려졌다.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세차게 뿌리치고 말았다. 해윤은 놀라서 당황했다. 다시 몸을 돌려 걸었지만 몇 발자국 가지 않아 다시 해윤에게 잡혔다.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절대 그냥은 물어설 것 같지가 않았다. 그와는 달리 해윤의 기분은 얼굴에 다 나타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금방 알 수가 있었다.

"너 왜 그래? 왜 도망가는 거야? 내가 뭐 어쨌다고."

"그, 그냥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나랑? 왜?"

해윤은 정말 답답하고 분통이 터진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속시원히 말해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미쳐 날뛸 것 같았다.

"내가, 내가 원래 그래."

"좋아. 너 애들이랑 어울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아. 근데 요 근래엔 괜찮았잖아. 잘 지냈잖아. 갑자기 싫어졌어? 다 귀찮아졌어?"

"..........."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래도 난 아니잖아. 응? 우린.........우린 친구잖아. 안 그래?"

"이, 이젠 싫어. 너랑 있으면 다른 애들이 쳐다봐. 그런 시선 의식하는 것도 싫고..........신경 쓰는 것도 싫어. 넌 친구 많잖아. 이, 인기도 많고.................. 나 같은 거 아니라도 얼마든지......"

"누가 뭐라 그래?"

"아니."

붙잡는 해윤을 뿌리치고 걸었다. 뒤따라온 해윤이 다시 내 팔을 잡아챘다. 표정이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았다. 숨을 씩씩 몰아쉬어 가슴이 들썩거렸다. 눈에 힘이 들어가니 온순하게만 보았단 해윤이 거칠게 느껴졌다.

"누가 이상한 소리를 한 거지? 누구야? 소화야? 남소화지? 말해!"

해윤이 소리치는 바람에 난 흠칫 놀랐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힐끔힐끔 쳐다보며 쑥덕거렸다.

"누구 때문이 아니야. 내가 싫어서 그래."

"난 좋아. 난 네가 좋단 말야!"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까이 근접하지는 못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점점 불편하고 불안해졌다. 어서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해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데 구경하는 아이들 틈에 서 있는 소화가 보였다.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난 해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해윤과 소화가 내게 솔직했듯이, 나도 내 감정을 그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시선을 돌려 해윤을 정면으로 보고서 말했다.

"난 좋아하는 사람 있어."

해윤의 눈이 커졌다. 그대로 정지되어 꼼짝도 하지 않는 해윤을 두고 교문으로 향했다. 스키장 사고가 있은 이후로 난 등하교를 승용차로 하는 호강을 누리고 있었다. 눈으로 차를 찾는데 팔이 거칠게 잡아당겨졌다. 몸이 휘청해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누군데? 그게 누군데!"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해윤은 더 거칠게 내 팔을 움켜잡았다. 대답을 안 해서 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이러지마. 놔줘."

"너, 거짓말이지? 괜히 둘러대는 거지?"

"아니야."

"그럼 누군지 왜 말 못해? 이름 대 봐."

그때 갑자기 해윤의 뒤로 그림자가 졌다. 난 소스라치게 놀라서 다가온 그를 보였다. 그는 무표정한 채로 내 팔을 잡고 있는 해윤의 손목을 잡았다.

"아!"

해윤이 아파하며 손을 뗐다. 그는 난폭하거나 거칠지 않았다. 그저 내게서 해윤의 손을 떼 낸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누구도 범접 못 할 차가운 기운이 풍겼다. 남성다움의 표상처럼 세련되고 늘씬한 외모에 시선이 집중됐다. 그가 내뿜는 부와 권력의 아우라는 학생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가볍게 내 등에 손을 대고 차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밀거나 끌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강압적인 힘에 이끌려 가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무표정할 뿐이지만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란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착해서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쩌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그의 방문을 노크했다.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등을 돌린 채 넥타이를 풀고 있었다. 다가가자 허리에 손을 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물어오니 말문이 막혔다.

"저기..................., 지, 진학상담을 한대요."

"언제?"

"다음 주부터요. 오실 필요 없어요.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거기 앉아 봐."

그는 와이셔츠 단추를 몇 개 푼 다음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을 두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원하는 걸 말해 봐. 대학이든 유학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조치해 줄 테니까."

조치. 그 단어는 마치 내가 그의 업무 중 하나라는 느낌을 들게 했다. 내 성적이야 어떻든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처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난 그 어느 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겐 꿈도 희망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게 뭐야?"

해윤도 그런 걸 물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아무런 대답거리를 찾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답답함을 느꼈다. 나 자신에 대해 실망ㅇ감이 들고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 발전이라면 발전일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간절한 심정으로 물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는 잠시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마음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깊이 응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셔츠 단추를 마저 풀며 그가 말했다.

"조급하게 생각할 거 없어. 하고 싶은 게 생길 때까지 기다려 봐."

셔츠를 벗어던진 그는 시계를 풀어 테이블 위에 놓고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억지로 결정할 필요 없어."

"하지만......."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돼. 평생 내 곁에 있을 테니까."

그는 팬티를 벗고 알몸으로 다가왔다. 벌거벗은 채인데도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당한 자세로 서서 말했다.

"네가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적극 밀어주겠지만, 난 제가 원하지 않는 걸 엉ㄱ지로 하는 건 싫다. 넌 열정이 있어. 그걸 쏟을 뭔가가 반드시 있을 거야."

그는 몸을 돌려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 열정을 나한테 다 쏟아 붓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욕실로 사라졌다.

방으로 돌아와 교복을 벗고 샤워를 했다. 욕실에서 나와 옷을 입는데 문득  주위의 것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보랏빛 침구를 봤다. 잠자리, 책상, 옷, 심지어 볼펜 한 자루까지 모두 그의 돈으로 산 것이다. 그가 준 카드로 학용품을 하거나 속옷을 사거나 했다. 이사를 올 때 그가 교복이랑 이것저것 갖추라면서 준 카드를 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았다. 이 방 전체가 모두 그의 돈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노력해 얻은 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미래, 어두운 동굴 같은 그 미래가 떠올랐다. 그의 빛에 의지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순 있겠지만, 폭풍이 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칠 때조차도 나는 그에게 의지한 채 아무런 도움도 못 되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마치 작은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평생 이런 상태라면 벌레만도 못한 게 아닌가. 그의 돈이나 축내는 미물덩어리, 무용지물도 지나지 않는 거다.

청바지에 빨간 니트 셔츠를 입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교복을 벗으면 난 전혀 학생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운데 가르마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치렁치렁한 머리가 거의 허리까지 닿았다. 젖살이 빠져 턱 선이 더 갸름해졌다. 그의 키스에 길들여진 입술은 살집이 더 풍부해지고 윤기가 돌았다. 지나치게 발육한 젖가슴은 몸의 굴격에 비해 너무 컸다. 몸의 모든 지방이 거기에 몰린 것처럼 비대해져서 터질 것처럼 풍만하게 부풀었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곡선은 완벽한 S자를 그리고 있었다. 내 몸은 그가 탐하는 대로, 그가 부추기는 대로 성장하고 다듬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현모양처........"

결국 그와 함께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걸로 될까? 지금 날 차지하고 있는 건 그뿐이고, 그 이외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으니..........그래,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에게 쓸모있는 뭔가가 생각이 나겠지.

엉켜드는 생각을 자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그가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해물탕이 보글보글 꿇고 잇었다. 우린 저녁을 먹고 수영을 했다. 난 아직 물장구치는 수준이지만 그에게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적당히 몸을 풀 즈음 그가 손을 내밀어 왔다. 수영복을 벗겨냈다. 자연스레 몸을 섞었다.

한차례 사랑을 나누고 벌거벗은 채 그의 등에 기댔다. 그는 뒤에서 가만히 끌어안고 내 목덜미에 코를 비볐다.

"무슨 생각해?"

"........"

그가 혀로 민감한 귀를 간질였다. 간지러워서 웃으며 움츠렸다.

"응? 내가 지금 여기 있는데 무슨 생각하는 거야?"

"그, 그때 그 여자........"

간질이던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 여자라니? 누구?"

"전에 내 생일날 집에 데려왔던 여자요."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빵빵하게 부푼 유방을 움켜잡고 주물렀다. 이따금씩 손가락 끝으로 유두를 집어 애무했다. 커다란 젖가슴이 그의 손에 꽉 차며 손가락 사이로 살집이 비어져 나왔다. 무게감과 출렁이는 느낌을 즐기는 그의 애무는 짓궂으면서 음란했다. 참으려고 해도 절도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여자가 왜?"

"뭐.......뭐 하는 여자인지.."

"그게 왜?"

그는 계속 내 유방과 허리 주위를 애무하면서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구, 궁금해서요."

"그게 왜 궁금해? 별게 다 궁금하군.

고개를 돌려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밀어붙여 왔다. 혀가 깊숙이 들어와 내 혀를 끌어 감아올렸다.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아랫배를 지나 더 아래로 내려오고 잇었다. 능숙한 솜씨로 내 안을 찾아 손가락을 넣었다 빼며 교묘한 애무를 해왔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전신을 태울 듯 번져갔다.

그의 입술이 젖가슴으로 내려왔을 때 내가 물었다.

"이, 일하는 여잔가요?"

그가 고개를 들고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너, 계속 걸렸던 거야?"

"그게 아니라..........어, 어떤 여자길래....."

"어떤 여자라니?"

"일하는 여자예요?"

"일? 일하는 여자면?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현모양처는 싫어요?"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거렸다.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그대로 굳은 표정이 됐다. 난 그의 다리 사이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그의 가슴에 손을 댔다. 불안해지고 뭔가 자꾸 곱씹어 생각하게 되는 이 심정을 알아주기를 바라서였다.

"현모양처가 되고 싶어?"

"아직 모르겠어요. 해윤이 그러는데 그것도 어렵대요."

"교문 앞에 그 녀석이지?"

"네. 해윤이 어머니는 바빠서 한 집에 살면서도 얼굴 볼 시간도 없고 그렇대요. 해윤인 그런 것보단 현모양처가 낫다고...........밖에서 일하는 것도 좋겠지만 현모양처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고.........해윤이 외할머니가 그게 더..."

"마음대로 해."

별안간 그가 휙 몸을 돌렸다. 타일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운을 집어 걸치고는 쳐다보았다. 눈빛이 냉랭했다.

"그런 것까지 나한테 허락받을 필요 없어. 네 인생이니까 네 마음대로 해."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경멸에 가까운 표정이 너무 차가워 등골이 오싹해 왔다.

"그리고 경고하는데, 다시는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대지마."

목소리가 수영장 벾에 부딪쳐 쩌렁쩌렁  울렸다. 돌아서 가는 그를 망연자실한 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고 아늑했던 수영장이 춥고 썰렁하게 느껴졌다. 심장에 대포알 만한 구멍이 뚫려 얼음장 같은 불풍이 휘휘 불어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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