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첫번째열병-7화 (7/14)

#7

스키여행에 동참한 건 다시 시드니로 돌아간 그가 전화로 명령했기 때문이다.

-장비를 못 갖춰줬군. 윤 기사한테 얘기해 둘 테니까 가서 사도록 해. 즐기고 와. 나 없이도 즐겁게 보내는 법을 익혀.. 안 그러면 너 우울증 걸려. 사진 찍어서 이메일로 보내 봐. 남자애들이랑 너무 어울리진 말고.

스키를 탈 마음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물론 그의 말대로 그없이 즐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를 만나기 이전에도 전혀 활동적이거나 사교적이지 못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명랑 쾌활한 아이가 되라니, 그건 내게 너무 버거운 요구다.

해윤은 장비는 대여하면 된다고 말했었다. 그대로 윤 기사에게 전해서 쇼핑은 생략했다. 하지만 여행까지 거짓말로 둘러댈 수는 없었다. 사진을 찍어 보내라니 말이다. 내 스키여행의 유일한 목적은 그에게 보내기 위한 사진을 찍는 거였다. 그런데 원기 왕성해 보이는 해윤과 이것저것 내게 꼬치꼬치 묻는 아이들 틈에서 뚱해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어느 정도 어울리게 되었다.

"아, 네가 최사희구나. 난 또 누군가 했네."

"근데 해윤이 이놈이랑은 언제부터 친했어? 둘이 어떻게 사귀게 된 거야?"

"야!"

"아니, 내 말은 둘이 첨에 어떻게 만났냐고."

"축구하다가 만났다니까. 사희가 공에 맞아서..............그때 너 표정이 참 묘했어."

해윤이 얼굴을 붉혀 아이들이 키키키 웃으며 놀려댔다. 당황하는 해윤의 모습에 나도 따라 웃음이 났다. 그러자 갑자기 아이들의 웃음이 뚝 끊겼다. 해윤을 포함한 남학생 셋이 날 보며 어색한 표정을 했다. 여학생은 나뿐이었다. 모두 일곱이라고 했을 때 여학생은 몇 명이냐고 물어볼 걸 잘못했다.

스키는 타지 않겠다는 내 계획은 입 밖에 내기도 전에 무산됐다. 당연히 내가 탈 거라고 생각하고 해윤이 장비와 옷을 빌려온 것이다. 고급을 씌워주고 신발을 신겨주는 해윤의 자상함에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스키는 싫었다. 춥고 축축해지고 넘어지고 굴러야 했다. 걷는 것조차 힘든 이걸 신고 저렇게 쌩쌩 미끄러지다니, 다들 존경스러울 뿐이다.

금방 포기하고 해윤의 외숙모와 아기와 있었다. 스키 타는 사람을 구경하며 우동을 먹었다.

"아까부터 죽 보고 있었는데 그거 어디서 샀어?"

해윤의 외숙모가 감탄한 건 내 손목시계였다. 그가 생일날 무더기로 사준 선물 중의 하나인 것 같은데, 테두리에 보라색 유리알이 깨알같이 박혀 있는 거였다.

"아마 백화점일 거예요."

"아마?"

"선물 받은 건데 아마 그럴 거예요."

"잠깐 봐도 돼?"

시계를 풀어 해윤의 외숙모에게 줬다.

"어머, 진짜네! 이거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이건 백화점에서 파는 물건이 아냐. 내가 보기엔 여기 보석, 유색 다이아 같은데...."

"다이아몬드요?"

"어? 어. 아, 정말 예쁘다. 나 한 번 껴 봐도 돼?"

"그러세요."

그녀는 시계를 자신의 팔목에 껴보고 좋아했다. 그러다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얼른 시계를 돌려줬다.

"근데 그거 학생이 하고 다니긴 좀 위험하지 않아? 나 같으면 잃어버릴까 무서워서 못 차고 다닐 거 같은데.......누구한테 선물 받은 거야?"

"사, 삼촌이요."

그때 난 시계가 왜 위험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예쁘고 마음에 들긴 하지만 애착이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선물을 건네줄 때 기분이 최악이었기 때문에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았다. 그가 내 버릇을 잘못 들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시계가 말썽이 된 건 그날 밤이었다. 저녁을 한바탕 푸짐하게 먹고선 떠들썩하게 놀다가 밤스키를 타러 간다고 모두 나갔다. 외숙모는 아기를 재우고 난 거실 베란다에 앉아 스키 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때 외숙모가 방에서 나오며 부탁했다.

"차에 좀 갖다 올래? 보현이 장난감 가방을 두고 내렸어. 얘는 딸랑이르 꼭 쥐어줘야 자거든. 보라색 꽃무늬 있는 가방이야."

기꺼이 심부름을 했다. 자동차 열쇠를 받아들고 주차장으로 갔다. 드문드문 가로등이 있고 콘도의 불빛 때문에 그리 어둡진 않았다. 기둥마다 설치된 스피커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접근해 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소리를 잘 듣는 내가 그렇게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열쇠를 꽂으려고 등을 돌렸을 때 뒤에서 세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계 벗어!"

대뜸 그렇게 말했다. 마치 내 시계를 알고 있는 것처럼......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있어! 허튼 짓하면 확 쑤셔버린다!"

위협하는 소리에 이어 허리춤에 뾰족한 느낌이 와 닿았다. 그제야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소리를 질러도 누가 와줄 것 같지도 않았다.

"빨리 시계 벗어!"

손목을 들어 시계줄을 풀었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잘못 움직이면 어떻게 될 거라는 상상이 공포를 부추겼다. 숨이 가빠왔다.

"빨리 안 벗어!"

차가운 손이 내 손목을 확 낚아챘다. 그 순간 시계의 보랏빛 보석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보라색을 좋아하는 걸 알고 그가 고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 위해서..........날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뺏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도 모르게 시계를 움켜잡았다.

"이게!"

남자가 나를 밀쳤다.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덩치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다. 다른 손에 어떤 무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가 준 시계를 모르는 남자에게 뺏기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아아아아악!"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시계를 꽉 움켜쥐고 두 눈을 질끈 감고서 공포에 찬 비명을 끝없이 내질렀다.

"야! 이거 안 놔!"

"싫어! 싫어! 꺄아아아악!"

다급해진 남자가 내 가슴을 밀쳤다. 몸이 차에 쿵! 부딪쳤다. 도난경보기가ㅏ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남자가 욕을 하며 날 때렸다. 난 바닥에 쓰러졌고 이어 남자가 달아나는 발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가면서 바닥에 뭔가를 집어던졌다. 바닥에 누운 채 손을 뻗어 끊어진 시계줄을 주웠다. 보석이 박힌 나머지 반쪽은 내 손안에 꼭 쥐어져 있었다.

보라색 꽃무늬가 있는 가방을 들고 방으로 갔을 때 내가 꽤 긴 시간을 지체한 걸 알았다. 외숙모가 걱정돼 애를 업고 찾아 나오려고 할 참이었다.

"아우 난 또 길 잃어버린 줄 알고...."

그러다 내 얼굴을 본 외숙모가 소리를 질렀다. 그날 밤 난 리조트 내에 있는 병원의 신세를 졌다. 얼굴에 타박상을 입은 데다 넘어질 때 잘못해 발목을 삐었던 것이다. 치료를 받고 나오자 남자들은 범인을 잡아야 된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외숙모는 사람들 많은 식당에서 시계를 들고 그렇게 유난을 떠는 게 아니었다고 자책했다. 경찰에 신고하자고 했지만 난 남자에 대해 기억하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정말 별 끔찍한 놈을 다 보겠네!'

난 감정적으로 좀 무딘 편ㄴ인지 무서운 생각은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에만 집중할 뿐 그 외는 어떻게 되든 별 관심이 없는 아이였던 거다. 그런데 외숙모가 밤새 걱정을 중얼거리고, 외삼촌이랑 해윤, 해윤의 친구들이 분노에 치를 떠는 걸 보니 좀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렇지 않아하는 날 더 측은하게 보고 배려를 해줘서 불편할 정도였다. 좀 두려워하고 상처 받은 연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저 기분으로 어떻게 놀아. 그만 올라가자."

"무슨 소리야.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게 틀림없어. 한 건 올리려고 어슬렁거리고 있을 거야. 그런 놈은 아주 상습범이야. 잡아서 주리를 틀어야 돼. 어두워서 다행이었지. 사희 얼굴 봤으면 무슨 짓을.............."

"자기야!"

"아니 난.............., 불행 중 다행이라고."

"비겁한 새끼. 연약한 여자한테 해코지하는 새끼들은 인간도 아니에요."

"얘, 욕하지 마. 애기 들어."

"자는데요, 뭘."

분개하는 그들의 표정과 격앙된 어조를 유심히 보고 들었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같이 느끼고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화내며 짜증내고 찡그리고 그러면서도 이따금씩 킥킥거리고, '야! 지금 웃을 때야!' 핀잔을 주고. 그런 게 다 흥미롭게 보였다.

"난 괜찮아요. 예정대로 모레까지 있을래요."

"그 발목으로? 스키도 못 타잖아."

"보는 게 더 재미있어요. 여기 우동도 맛있구요."

내가 그들을 배려하고 있는 걸까? 모처럼 재미있게 지내고 있는데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이외 누군가의 생각을 생각해 보긴 처음이었다.

전화로 얘기했을 때 그는 무섭게 화를 냈다. 오면 날 때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겁도 없이 밤에 왜 혼자 다니냐고, 그까짓 시계가 뭐라고 강도랑 실랑이 하냐고, 사고를 당했으면 곧장 전화를 해야지 왜 이제야 말하냐고. 나한테 별명할 여지도 안 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그가 그렇게 고함을 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좀 두려운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다. 보름간의 출장에서 그가 돌아왔다. 내가 현관에 서 있는 걸 보고 그는 곧장 발목을 쳐다봤다. 아직 붕대를 감고 있긴 했지만 통증을 거의 없었다. 기사가 짐을 방으로 옮겨놓고 나갈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현관 앞에 벌 받는 아이처럼 서 있었다. 그 역시 꿈쩍도 않고 내 발목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사가 간 뒤 그가 말했다

"걸어 봐."

속으로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애쓰며 천천히 걸음을 뗐다. 복도 끝까지 가서 돌아보자 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오라고 손짓했다. 다시 그에게로 걸어가는데 발목이 약간 시큼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걸 그가 놓칠 리 없었다. 뚜벅뚜벅 걸어왔다.

"움직이지 말고 소파에 앉아 있어. 씻고 올 테니까."

그는 내가 거실 소파에 가 앉을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안 보는 사이에 내가 엄청 고통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그는 자신이 보고 판단한 대로 믿을 것이다. 전화에서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보름 만에 만나서 굳은 표정인 건 싫었다.

혼자 소파에 앉아있으려니 적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돌아왔는데 왜 이렇게 몸이 오슬오슬 떨리는지 몰랐다.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가 날 걱정하는 게 싫었다. 그럼 난 거기에 기대서 어리광 부리고 칭얼댈지도 모른다. 그를 귀찮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는 짜증을 낼 것이고 화를 내다가 귀찮아져 결국엔 버리고 싶어질 것이다. 상상처럼 그렇게 될까봐 무서워졌다. 그에 관해선 난 최고와 최악의 상태까지 상상하는 버릇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가 샤워하는 동안 가방을 풀어 정리하기로 했다. 세탁기에 넣을 것, 세탁소에 보낼 걸 챙겨두고, 이미 세탁이 된 건 예쁘게 드레스룸에 걸어 넣어두었다. 가방을 치우는데 그가 나왓다. 날 보고 우뚝 멈춰있는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모른 척하고 가방을 수납장 안에 넣었다.

"가만있으라니까 왜 말 안 들어."

그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순간 몸이 붕 떠올랐다. 놀란 난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나 잘 걸어요. 이제 다 나았어요."

그에게 안겨 걸으며 열심히 말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붕대도 곧 풀 거예요. 의사가...."

그가 날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발목을 살펴보았다.

"의사가 뭐래?"

"괜찮대요."

화난 것 같지 않았다. 표정도 들어올 때보다 많이 풀려 있었다.

"그게 다야?"

일어선 그는 곧장 전화기를 들었다.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태와 어떻게 하면 빨리 낫는 건지 물었다.

"일주일 정도 됐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화를 끊고 욕실로 갔다. 돌아와 직접 내 발목의 붕대를 풀었다.

"얼음찜질은 했어?"

"네."

"누가 해줬어?"

"내가 했어요."

"아주머니한테 부탁하지 그랬어?"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뭐."

붕대를 다 풀고 다시 날 안아 올린 그가 말했다.

"사실은 아직도 화가 안 풀린다."

좀 두려워져서 그를 쳐다보았다. 턱 관절에 힘줄이 솟은 게 보였다. 숨소리도 좀 거친 것 같았다. 무서워져서 그의 목을 꽉 안고 매달렸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서 간절히 애원했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그는 욕조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 날 앉혔다. 우윳빛 사기로 된 대야를 들고 와 발을 담그게 하고 발목을 마사지해줬다.

"뜨거워?"

"아뇨."

그는 목욕가운 차림으로 욕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부드러운 손길로 내 발목을 주무르고 있는 그를 보았다. 아직 젖어있는 검은 머리, 짙은 눈썹과 아래로 뻗어있는 긴 속눈썹, 진지하게 닫혀있는 입술, 검은 가운 사이로 보이는 가슴근육, 발목을 마사지하는 기다란 손가락.........보고 있으려니 가슴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나오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굳어있던 내 안의 뭔가가 녹아 흐르는 기분이었다.

"뭘 잘못했는데?"

"바, 바로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 혼자 그런 데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시계 같은 거 그냥 줘버렸으면 되는데.."

"왜 안 줬어."

"새, 생일선물이잖아요."

"그런 거 얼마든지 줄 수 있어."

"하지만........직접 골라 줬잖아요. 버릇없이 고맙단 인사도 안 하고 받은 건데.........."

"억지로 보내는 게 아니었어."

난 머리를 숙여 표정을 감췄다.

"다신 혼자 안 보내."

입술을 깨물고서 마사지 하고 있는 그의 손만 내려다봤다.

"단독 외출 금지라고. 알겠어?"

대답을 않자 그가 쳐다봤다. 물에서 손을 빼 내 턱을 잡아 올렸다.

"불만이야?"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젖어 있는 내 눈을 뚫어지게 보았다. 순간, 그가 미간을 찡그렸다. 손을 올려 내 광대뼈 언저리를 만졌다.

"여긴 왜 이래?"

눈치 못 챘으면 싶었는데.............강도에게 맞았던 자리다. 거의 없어졌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멍 자국이 푸르스름하게 얼룩져 있었다.

"어떤 개자식인지 잡히면 가만 안 둬."

"못 잡아요. 얼굴도 못 봤어요."

"잡을 거야. 아프진 않아?"

"다 나았어요."

"열심히 문질렀겠군."

"네?"

"계란 말야. 나 오기 전에 명 없애려고 엄청 문질렀을 거 아냐."

".....네."

"전화에서는 그런 말도 안 했어."

"화내니까......."

"너한테 화난 게 아니야."

그럼..........? 묻기도 전에 그가 몸을 일으켰다. 수건을 가져와 발을 닦아주고 날 다시 안아 올렸다.

"걸을 수 있어요."

"봤어."

그는 날 아래층 식당까지 안고가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손수 국을 데우고 밥을 푸고 식탁을 차렸다. 나는 꼼짝도 못하게 하고 말이다.

같이 저녁을 먹고 식기세척기를 돌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집에선 한 번도 술을 마시지 않았던 그가 와인을 꺼내왔다.

"한 잔만 하고 푹 자는 거다."

그와의 달콤한 해후를 기대했던 난 좀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날 안고 소파에 길게 누웠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함과 포근함을 느꼈다. 넉넉한 가슴을 베개 삼아 그의 몸에 기대어 누워 있으니 천국처럼 평화로웠다.

우린 거실에 누워 넓은 창을 통해 정원을 바라봤다.

"눈 와요."

긴 손가락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졸음이 오는 걸 느끼며 그 손에 뺨을 기울였다.

"쌓일까요?"

"쌓였으면 좋겠어?"

"네. 첫눈 왔을 때처럼......"

그때 난 알몸에 담요만 두른 채 눈을 구경했다. 나이트가운을 걸친 그가 오랫동안 손 놓았었다는 클라리넷을 들고 왔다. 기대하며 바라보자 그는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표정이 되었었다. '너 때문이야' 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서 연주를 해줬다. 감미로운 음악에 취해, 연주하는 그의 애수에 취해 눈 같은 건 까맣게 잊었었다. 그러다 같이 담요를 쓰고 정원으로 나왔다. 담요 속에서 난 그에게 꽉 안겨 있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데 그가 물어왔다.

"눈사람 만들어 본 적 있어?"

"아뇨."

"눈싸움은?"

"아뇨."

"아마 재미있겠지? 눈싸움하면서 찡그리는 아이는 못 봤으니까."

"안 해봤어요?"

"그렇게 한가하질 못했어. 태어날 때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가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와인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참을성 있게 그의 얘기를 기다렸다. 성량 깊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부드럽게 퍼졌다.

"딱 한 번 어머니와 눈길을 걸은 적이 있었어.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어머니는 굽 높은 부츠를 신고 있었어. 지금도 생생히 기억 나. 검정색 밍크코트에 부츠를 신고 뒤뚱뒤뚱............그날 어머니는 집에 오시질 않았지. 며칠 후에 아버지가 이혼을 하셨다더군. 2년 뒤에 새어머니가 들어오시고, 난 유학을 갔어. 그리고 5년 동안 한 번도 어머니를 못 봤지. 돌아와서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신단 걸 알았어. 식물인간으로.........죽으려고 목을 맸다더군."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그를 보려했다. 그러자 그의 손이 내려와 내 눈을 덮어버렸다.

"그냥 들어.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라 생각하고......"

손을 들어 내 눈을 가리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떼어서 깍지를 끼고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가만히 가슴에 댔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경험도 부족해 그를 어떻게 위로 해야 할지 몰랐다. 안아주고 싶은데 보는 것조차 거부하는 자존심 센 그에게 무슨 일을 해야 할지.............그저 이렇게 조용히 듣고 있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는 난.............초라했다.

내리는 눈처럼 고요히 그의 목소리가 쌓였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떠났으면 잘 살아야지. 사랑해서 자식까지 버리게 만든 사람이면 같이 죽든가. 남잔 떠나고 혼자 버려져서 바보처럼 그렇게 8년을..............8년을 버텼으면 10년, 20년도 버텼어야지. 죽은 것처럼 누워 있다가, 살앗는지 자는 건지 모르게 누워 있다가, 아무도 안 보고 그냥 가버렸어."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깍지 낀 내 손가락이 하얗게 변했는데도 멈추지 않고 힘을 줘 손가락이 아팠다.

뼈가 부서질 것 같았지만 꾹 참고 가만히 있었다. 손이 따뜻했으면, 내 손이 난로처럼 따뜻해 그의 떨림을 멈춰주길 바랐다.

"학교에서 집까지 20분. 펑펑 눈 오던 날...............손잡고 뒤뚱뒤뚱................그렇게 걷지를 말든가................."

함박눈이ㅣ 펑펑 탐스럽게도 내렸다. 침묵을 메우려는 듯 더 굵게 펄펄 쏟아져 내렸다. 산골집을 생각했다. 눈이 오면 밖엔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할머니와 방에서 지냈다. 잠을 자거나 나물을 다듬거나 수를 놓았다. 그도 지겨워지면 이렇게 눈 내리는 걸 구경했다. 이렇게 여유롭게가 아니라 멍하니, 지루하게 끝도 없이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보기만 했다. 그런 날이 하루도 되고 이틀도 되고 열흘도 되었었다.

"아직 한 칸이 남았어."

침묵을 깬 그의 목소리에 산골집이 멀어져갔다.

"네?"

"한 칸의 여유가 있다고. 끝까지 다 죄 버리기 전에 가는 게 좋을지도 몰라."

"무슨 말인지............"

"넌 지금 날 부셔야 하는 거야. 진작 내 손을 찢고 나갔어야 했어."

"왜, 왜 그래야 해요?"

"나는............잔인한 놈이거든."

"아니에요. 안 그래요."

"나는 야망이 큰 놈이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 뭐든지......네 목에 족쇄를 채울지도 몰라. 겨우 살아만 있게 숨통을 죄 놓고 내 옆에 묶어둘 수도 있어. 밥그릇을 조금만 옮겨도 목줄 때문에 굶어야 하는, 그런 신세가 될 수도 있다고. 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도 모르겠지. 어쩌면 평생일지도 몰라. 평생........."

"달아나지 않아요. 난 그런 생각 없는데........왜 못 믿는 거예요?"

"넌 믿을 수 있니? 내가 너.........평생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린 자신조차 믿지 못한다는 걸..........그도 나처럼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행복이 언젠가는 사라지지 않을까.............

감정이 강렬하고 아름다울수록 불안은 더 심해졌다. 바라는 마음이 강해질수록 실패와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면 그도 나도 어떻게 변해버릴지 몰랐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비바람 폭풍에도 끄떡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역시 불안하고 외로운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그 점이 불안하게 와 닿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그를 달래주고 감싸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은 내 안에 있었다.

"날 먹을래요?"

내 안에 있는 불안이 말했다.

"통째로 삼키라고?"

몸을 돌려 희미하게 웃고 있는 그를 봤다. 소파를 다 차지하고 누운 그의 긴 몸에 몸을 포개고 그의 가슴에 턱을 괴었다. 엎드린 채 손을 올려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면 평생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러고 싶어?"

머리를 끄덕이자 손을 뻗어왔다. 팔을 내 어깨에 둘러 꽉 안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숨소리가 굉장히 크게 들렸다.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서 심장소리를 들었다.

"그건 곤란해."

"왜요?"

"시시때때로 꺼내서 하고 싶을 테니까."

슬며시 웃음이 났지만 정말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도 했다. 그의 곁에서 하루 종일 그만 바라보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단단한 몸을 느끼고 상상까지 해버린 난 금세 달아오르고 말았다. 어느새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와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고른 숨소리와 체취가 너무 좋아서 흠뻑 취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더 잔잔해진 숨소리에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처음으로 느긋이 그를 보았다. 어째서 처음이냐면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언제나 나보다 늦게 잠들고 일찍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도 그가 잠든 모습을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조용히 몸을 일으켜 그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그의 집 정원에서 만난 이후로 나는 자랐고, 그는 아마 거의 같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거인 같고 강하고 멋지고 잘생겨 보였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버릴 데 하나 없을 것같이 늘씬하고 강렬하고 매력적이었다.

길고 긴 다리에 좁고 탄탄한 허리, 건장한 가슴팍, 두툼한 어깨, 넓은 턱, 매끈한 뺨, 감아도 예리해 보이는 눈...

넋을 잃고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아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뒤늦게 몸을 내려 담요를 가져왔다. 도저히 깨울 수가 없었다. 뭐가 고민인지, 뭐가 못마땅한 건지, 자면서도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 깨우기가 안쓰러웠다. 담요를 덮어주고 난 또 그의 잠든 얼굴을 감상했다. 이런 기회가 다시 안 올지도 몰라 한껏 담아두고 새겨두고 싶었다. 그래서 차마 손끝 하나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눈을 떴다면 그는 아마 어처구니없어 했을 것이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내가 그를 가여워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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