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기말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청소시간이었다. 난 자청해서 쓰레기를 비우러 가는 걸 좋아했다. 쓰레기장으로 가는 길이 좋았기 때문이다. 줄지어 선 커다란 소나무와 학교 뒤의 산을 볼 수 있었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 보랏빛 꽃향유를 발견하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아직도 책갈피에 보랏빛 엉겅퀴랑 꽃향유가 있다. 보랏빛 꽃이 있는 책은 가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쓰레기장으로 가는 느릿느릿 걸음에 솔방울이 보였다.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는 걸 보니 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내가 솔방울을 한 바구니 주워오면 술을 담그곤 하셨다. 쪼그리고 앉아 몇 개 주워보는데 해윤이 나타났다. 그 역시 커다란 쓰레기통을 들고 있었다.
"이리 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쓰레기통응ㄹ 빼앗겨 버렸다. 난 엉거주춤 서서 해윤이 쓰레기장으로 가는 걸 지켜보았다. 한쪽 팔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온 그가 말했다.
"보충수업 들을 거야?"
"아니."
"그럼 학원?"
내가 고개를 젓자 과외를 하느냐고 물었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해윤은 양손에 쓰레기통을 쥐고 걸었다. 주춤하다가 뛰어가 우리 반의 쓰레기통을 잡아 당겼다. 그래도 해윤이 놓지 않아서 양쪽에서 나란히 들고 걷게 되었다.
"시험 잘 봤어?"
"그냥......."
"공부는 별로 못하나 보지?"
무안해서 고개를 숙였다. 해윤이 퇴원을 해 등교하고 있는 걸 알았지만 찾아보질 못했다. 바로 옆 반인데도 찾아갈 수가 없었다. 난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게 어려웠다.
"너 좀 의리 없더라? 혼자 먼저 퇴원하고."
서운한 듯 말했지만 해윤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쳐다보는 해윤의 시선을 모른 체하고 아판 보고 걸었다.
"다친 덴 괜찮아?"
"응. ........넌?"
"나? 나야 끄떡없어. 흉터가 좀 남겠지만 이 정도야 훈장이지. 안 그래?"
"아프진 않아?"
"걱정하긴 했냐?"
본관 안으로 들어서며 난 대답을 빼먹었다. 해윤도 아무 말이 없어서 좀 불편했다. 그때 계단에서 한 남학생이 급하게 뛰어내려왔다. 난 미처 피하질 못했고 그 남학생은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결국 오른쪽 어깨를 세게 부딪쳤다.
"아!"
쓰레기통을 놓치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부딪친 남학생은 휙 쳐다보더니 그대로 뛰어가 버렸다.
"야! 거기 안 서!"
어깨가 욱신했다. 아파서 잠시 어깨를 주물렀다.
"저 새끼 1학년 아냐!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바닥을 짚고 얼어서려는데 손이 뻗어왔다. 해윤이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의외로 강하게 느껴지는 손힘에 놀랐다.
"괜찮아?"
좀 전의 거친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응."
대답하고 쓰레기통을 들었다. 해윤을 두고 재빨리 계단을 올랐다.
"최사희!"
부르는 소리에 움찔 놀랐다. 누가 그렇게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일은 드물었다. 모르긴 몰라도 같은 반에서도 내 이름을 모르는 아이가 수두룩할 것이다.
돌아보니 계단 밑에서 해윤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 좋아해?"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해윤은 손에 가득 뭔가를 꺼내 들었다. 자세히 보니 아무렇게나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뭉치였다.
"이거 한도 내에서 쏠게. 떡볶이, 자장면, 김밥까지는 가능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쳐다보자 한 계단을 올라왔다.
계단을 오르내리던 학생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너, 먹는 거에 안 넘어가는 스타일이야?"
해윤의 진지한 표정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뭐가 웃긴 건지 몰라도 아무튼 내게서 가벼운 숨소리가 새어나갔다. 그러자 해윤이 눈을 크게 뜨고는 놀란 표정을 했다. 그 표정을 보고서 내 웃음은 거기서 멎었다. 빤히 보는 해윤의 시선이 민망해 몸을 돌렸다. 다시 계단을 오르는데 해윤이 팔을 붙잡았다.
"저, 정말 안 갈래?"
"집에 가봐야 돼."
그가 일찍 올지도 모른다.
"누가 집에 안 보낸대? 금방 먹고 보내줄게. 먹돌이네서 먹자. 거기 떡볶이가 제일 맛있거든. 너 혹시 떡볶이 같은 거 안 먹어?"
"먹긴 하지만..."
"그렇지? 좋아할 줄 알았어. 아무리 공주같이 생겼어도 여자들은 다.."
해윤의 광대뼈 언저리에 붉은 기가 퍼졌다. 나도 모르게 또 웃음이 났다. 해윤은 귀여운 면이 있었다. 왠지 거절하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해윤의 경쾌한 목소리와 선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주위의 시선이 상관없을 정도로.......
종례를 마치고 나오자 뒷문 쪽에 해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날 기다리고 있는 걸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으로 남학생과 같이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거였다. 무섭지 않아서 이상했다.
"장갑 껴."
"금방이라며?"
"그래도 껴. 손 시려."
해윤은 내가 장갑을 낄 때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가방 줘. 내가 들게."
"아, 아냐."
하지만 해윤은 막무가내였다. 자상하다고 생각해야 할지 제멋대로라고 생각해야 할지 난감했다. 지나가던 여학생들이 힐끔 쳐다보았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장갑도 가방도 다 보라색이네? 너 보라색 어지간히 좋아하나 보다."
"응."
"가까이서 보니까 얼굴 되게 하얗다. 실핏줄이 다 보여."
"........"
"렌즈 껴?"
"아니."
"눈이 반짝거려서........"
".............."
"너 좀 특이해. 그거 알아?"
"아니."
덜 녹은 눈이 뽀드득 밟혔다. 문득 첫눈이 내렸을 때가 떠올랐다.
"거 봐. 특이하지. 보통은 뭐가? 왜, 어디가 특이한데? 그렇게 물어야 정상이거든."
"......."
"집은 어디야? 멀어?"
"아니."
땅을 보고 걸으며 대답했다. 옆에서 걷는 해윤의 운동화가 무척 닮은 게 보였다. 흰 색 운동화가 거의 회색에 가까울 정도로 때가 묻고 낡아 있었다. 이 운동화를 신고 축구도 하고 그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형제는? 오빠나 언니 있어?"
"아니."
"중학교는 어디 다녔는데? 어디서 본 것 같아서 말야."
쳐다보자 해윤이 히죽 웃으며 변명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사실은 너에 관해서 아는 애가 없더라고. 여기저기 물어봤는데 완전 수수께끼던데? 너 어지간히 왕따더라. 그거 알지?"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애들이 괴롭혀?"
"아니."
"넌 나한테 뭐 궁금한 거 없어? 내 이름은 알아?"
묵묵히 걷다가 교문 앞에 다다라서야 궁금한 게 생각났다. 난 고개를 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폭발했을 때..."
"응. 그때 뭐?"
"왜 그랬어?"
그러자 해윤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들고 있던 가방 2개를 한 손에 잡아 어개에 둘러맸다. 자신감에 넘치는 두 눈이 날 똑바로 쳐다봤다.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난 그 말뜻을 모르는 것처럼 멍하니 보았다. 사실은 전혀 실감하지도 못했고 믿지도 않았다.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도 지금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멍청하게 서 있는 나를 끌어당긴 건 해윤이었다. 끌려가면서 내 손목을 잡고 있는 해윤의 손을 보았다. 그의 손과 달랐다. 힘줄도 적고 마디도 가늘고 피부는 더 까맸다. 해윤의 손은 보고 있어도 화장실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의 손을 보면 달랐다. 갑자기 아랫도리가 팽팽해져서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곤 했다.
분식집은 학생들로 붐볐다. 해윤에게 끌려 들어가자 몇몇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봤다. 난 시선을 내리깐 채 해윤이 빼준 의자에 앉았다.
"떡볶이 먹을 거지?"
해윤이 주문을 하고 직접 물도 가져와 테이블에 놓았다.
"우리 얘기 신문에 난 거 봤어? 요 며칠 아주 죽을 맛이었어. 교장에 담임에 엄마까지 어찌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넌 괜찮았어? 부모님 많이 놀라시지?"
"그냥......."
"너야 뭐 피해자니까. 난 엄마랑 둘이 살아."
"아버진?"
"이혼하셨어. 유치원 때."
"나, 나도 아버지가 안 계셔."
"이혼하셨어? 언제?"
"돌아가셨어. 10월에."
"올해 10월?"
해윤의 놀란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윤이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데 떡볶이가 도착했다. 붉은 양념이 촉촉이 밴 것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군침이 사르르 돌았다. 해윤에게서 포크를 받는데 식탁 위로 그림자가 졌다. 쳐다보니 그의 운전기사였다. 꾸벅 인사를 하는 운전기사를 보고 유리문 밖을 보았다.
"여, 여기 오셨어요?"
"네. 기다리고 계세요."
도로가에 서 있는 자동차를 보았다. 안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게 선탱 된 차가 번쩍번쩍한 광채를 발했다. 그의 차만 보아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가 와있단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나, 가봐야 될 것 같아. 가방 좀..."
"왜? 무슨 일인데?"
"미안해."
소란스럽던 가게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방을 준 해윤은 가게 밖까지 따라 나왔다. 운전기사가 차문을 열어줬다. 안쪽에 그가 앉은 게 보였다. 난 살짝 뒤돌아본 뒤 뒷좌석에 올랐다. 차창으로 해윤이 보였다. 차가 출발할 때까지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야?"
목소리에 돌아보니 그가 노트북컴퓨터를 보고 있었다.
"친구예요."
"친구?"
그가 되묻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누굴 친구라고 부른 적이 없었으니까.
"어디 가는 거예요?"
"식당. 저녁 먹고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리지."
차가 복잡한 도심으로 들어갔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도로가 많이 막혔다.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차안에서도 일을 해야 할 정도로 바쁜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십여 분 후, 그가 컴퓨터를 끄며 상체를 일으켰다. 좌석 깊숙이 앉고선 자기 허벅지를 두드렸다.
"이리 와."
의미를 깨달은 순간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부끄러운 짓인 줄 알면서도 홍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억눌려 있던 차 안의 공기가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의 차를 본 순간부터 그의 품에 안길 생각뿐이었다.
칸막이가 처져 있는 걸 확인하고 몸을 움직였다. 옆으로 몸을 돌려 그가 가리킨 허벅지 위에 앉았다. 정수리가 차 지붕에 닿을락말락했다.
그의 손에 허리가 당겨졌다. 그가 내 팔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두르게 했다.
"친구라고?"
그의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작은 기포 같은 전율이 몸속을 내달렸다. 그 작은 접촉에도 마구 떨리고 숨이 가빠졌다. 축축한 혀가 귓불을 핥다가 귓바퀴를 따라 헤엄쳤다. 발끝까지 전율이 일었다. 신음하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 해윤인가 뭔가 하는 녀석?"
부끄럽게도 벌써 뜨거운 증기탕에 들어온 것처럼 달아올라버렸다. 열기에 촉촉이 젖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어, 어떻게 알아요?"
그의 손이 올라와 교복 단추를 열었다. 기대에 들떠서 그의 뺨에 입술을 대며 기댔다.
"그 녀석에 대해선 너보다 내가 더 많이 알 걸. 괜찮은 녀석인 것 같더군. 환경도 나쁘지 않고."
열린 셔츠 사이로 그의 손이 들어왔다. 하얀 브래지어가 밀려 올라갔다. 해방된 젖가슴이 팽팽히 올라붙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시선과 손길이 닿을 때면 가슴이 더 커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꽉 쥐어 감싸면 말할 수 없이 부드러워지고 민감해졌다. 그의 손가락이 젖꼭지 주위를 맴돌았다.
"원하면 만나 봐."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봤다. 가슴을 애무하는 그의 손길에 홀려 입술이 열리고 호흡이 흐트러져 있었다.
"넌 좀 닳을 필요가 잇어. 너무 닫혀있는 것도 안 좋아."
"워, 원하지 않아요."
겨우 그 말을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가 가슴을 쥐고 주물러댔기 때문이다.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가 세게 주물러서 짜릿한 전율이 정수리까지 차올랐다. 유두가 딱딱하게 솟아 쓰라릴 정도로 민감했다. 그는 섬세하게 반응하는 그것을 집어 올렸다. 망울을 돌리고 꼭꼭 누르며 자극했다.
"으응....."
"대인관계도 중요한 거야. 그렇다고 약아지란 소리는 아니다. 백지 같은 지금 네 상태도 좋으니까."
"아............그, 그래도.........."
그에게 젖가슴을 맡긴 채 달뜬 숨을 헉헉, 내쉬었다.
"그래도 넌 내 거야. 널 만질 수 있는 건 나뿐이야. 털끝도 건드릴 수 없어. 그 누구도."
열망에 찬 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내 손은 그의 재킷 속으로 들어가 셔츠 위로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단단한 근육을 느끼며 헤매자 그의 유두가 만져졌다. 작은 유두를 찾아 그가 내 것에 하는 대로 손가락 끝으로 애무했다. 짙어지는 그의 눈빛을 보자 목이 탔다. 혀로 입술을 축이며 그의 입술을 봤다.
"네 몸을 너무 음란해. 교복으로 감추는 건 위선이야."
그의 머리가 가슴으로 내려왔다. 젖꼭지를 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능숙한 혀놀림으로 유두를 핥고 간질이며 자극했다. 이로 잘근 물었다가 굶주린 듯 빨아댔다. 뜨거운 흥분에 휩싸여 그의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헤집으며 거칠게 할딱거렸다.
"아흣.................!"
허벅지 사이로 축축한 열기가 번졌다. 골반이 꽉 죄어지며 벌써 수축운동을 헤대고 있었다. 그가 머리를 들자 젖은 가슴에 한기가 드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이 교복 치마 속으로 들어왔다.
"네 신음소리가 날 얼마나 미치게 하는지 알아?"
난 다리를 벌려 달콤한 액체가 흐르는 그곳으로 그의 손을 인도했다. 메마른 손이 허벅지 안쪽과 음부를 쓰다듬었다.
"아...............흐으............"
그 감칠맛 나는 애무에 난 더욱 다리를 벌리며 엉덩이를 들었다. 이윽고 손가락이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무릎을 좁혀 그의 손가락을 꽉 죄었다. 그의 손가락은 노련한 솜씨로 내 안을 휘저었다. 부드럽게 간질이다가 거칠게 쑤셔 넣고선 빠르게 움직였다. 점점 차오르는 자극에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흐느끼며 그에게 매달렸다.
"빨아 봐."
그가 입술을 열고 혀를 내밀었다. 난 허겁지겁 달려들어 미친 듯이 그의 혀를 빨았다. 질 깊숙이 들어온 손가락이 화끈한 열기를 일으키며 날 거세게 몰고 갔다. 그 마찰이 격렬할수록 난 그의 혀를 뜨겁게 빨며 끌어당겼다. 휘감아 온 그의 혀가 입 안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나를 누르고 내 의지와 영혼을 빼앗아가 버렸다. 그는 자신이 내키는 대로 날 유린하며 희롱했고, 난 내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그에게 바쳤다.
차가 정지하고 문이 열렸을 때 우리의 위치는 바뀌어 있었다. 그가 먼저 내리고, 뒤늦은 수치심에 얼굴도 못 드는 내가 내렸다. 베르사유 궁전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식당으로 들어섰다. 난 곁눈으로 조금 훔쳐봤을 뿐 자세히 볼 수도 없었다. 태연한 걸음으로 앞서 가는 그를 종종 뒤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빴다.
종업원이 나와 인사를 했을 때 잠깐 그를 살펴보았다. 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그는 숨이 막히도록 멋있었다. 고급 정장을 입은 늘씬한 몸뿐만 아니라 우아한 걸음걸이, 조각상 같이 똑 떨어지는 수려한 얼굴, 냉혹할 정도로 변함없는 표정, 큰 키로 내려다보는 싸늘한 눈빛, 그 모든 것이 그의 지위와 권력을 상징하고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은 안쪽으로 긴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회색 카펫이 깔려 있는 중앙에 커다란 식탁이 놓여 있었다. 짙은 보라색 벽지는 수십 개의 장미 바구니로 장식되어 있고 방 한 쪽에는 진줏빛 그랜드 피아노가 광택을 발하고 있었다.
먼저 안으로 들어선 나는 영롱하게 빛나는 장식품들에 현혹돼 걸음을 옮겼다. 그는 입구에서 전화를 받느라 지체되고 있었다. 종업원이 들어와 물을 따라 주었다. 긴 식탁 위에 맨 앞 단 두 자리에만 세팅이 돼 있었다. 종업원이 몸을 숙이며 인사했다. 엉거주춤 마주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나가는 종업원과 엇갈려 들어오며 그가 말했다.
"식사는 좀 있다 할 테니까 부르면 오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동안 난 그의 눈에 사로잡힌 채 앉아 있었다. 뚜벅뚜벅 걸어오며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그를 보았다. 내 몸은 차 안에서의 열기가 아직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였다.
두 팔을 잡힌 채 일으켜 세워졌다. 그의 두 손이 올라와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의 힘이 점점 강하게 옥죄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눈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지만 아프단 소리도 하지 못했다.
"위험해."
그가 쉰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한테 빠지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지 않을까."
그가 화가 난 것 같았다. 굳은 표정으로 거칠게 내 교복을 벗겨갔다. 난폭한 힘에 몸이 갈대처럼 뒤흔들렸다. 난 양말까지 다 벗겨진 알몸으로 식탁에 눕혀졌다.
"최음제 같아."
그가 아랫도리로 파고 들어오며 말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욕심나. 넌 알고 있었지?"
다리를 벌려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애욕에 들떠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차 안에서 타다 만 불시가 거세게 지펴졌다.
"알아? 네 몸은 마약보다 더 지독한 환각제야."
그의 유연한 손가락이 내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혀를 내밀어 핥자 입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왔다. 한동안 그의 손가락을 혀로 핥으며 빨았다. 젖은 손가락은 목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와 격렬히 애무했다.
"아직도 날 사랑해?"
그가 거칠게 허리를 튕겨 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아........!"
오직 신음을 내지르며 그의 리듬에 맞춰 엉덩이를 들썩이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마찰하는 사타구니가 쩝쩝 입을 다셨다. 거친 호흡과 차진 소리가 엉켜 쾌락의 콘체르토를 연주했다.
흐느끼며 손을 뻗었다.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간신히 뜬 눈으로 그를 보았다. 흐트러진 그의 모습을 보는 건 너무나 외설적이었다. 내게 열광하며 탐닉하는 그를 보는 건 대단히 황홀했다. 그의 굳은 표정이 무너지고 거기에 욕망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난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건 사랑이 아니야."
"아읏.........! 사, 사랑해요. 예전보다 더......."
"날 알지도 못하면서......!"
"아앗! 흐으.........!"
그가 사납게 파고 들어왔다. 내 몸은 완전히 들려져 식탁엔 거의 머리만 닿아 있었다. 허리가 잡혀 높이 들어 올려졌다.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바닥, 그 끝까지 자신을 밀어 넣었다. 서로 맞닿아 있는 음모가 땀과 애액으로 추축해졌다. 그는 손을 끌어 젖어있는 그의 음모를 만지게 했다. 손바닥으로 까칠한 그의 음모를 쓰다듬었다. 스스로의 야한 행동에 숨이 막혔다. 그와 맞닿은 부위에 손이 닿았을 때는 수치심과 쾌락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부드럽게 휘저었다가 솟구치는 그의 격렬함에 정신이 아득했다. 그가 점점 속도를 높여갈 즈음엔 몸이 불덩이처럼 타올랐다. 마지막 순간 그는 카펫 바닥에 사정을 했다. 누군가 저 얼룩이 뭔지 알게 될까?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했다.
천국에서 내려오기 싫었다. 그와 있으면 수치감을 싹 날아가 버렸다. 난 뻔뻔하게 알몸인 채로 누워 있었다.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가야 돼."
옆으로 누워 그를 봤다. 그는 빠르게 냉철한 사업가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셔츠를 정돈하고 바지지퍼를 올리고 넥타이를 맸다.
"지금이요?"
내 목소리는 몹시 어색하게 갈라져 나왔다.
"일이 생겼어."
"그 전화였어요?"
"그래."
"받지 말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나도 놀라고 그도 쳐다봤다. 순식간에 넥타이를 맨 그가 다가왔다.
"그렇게 있으면 또 해버리는 수가 있어."
"또 하고 싶어요?"
그는 몸을 굽혀 바닥에 흩어져 있는 교복을 주워 올렸다. 그리곤 누워 있는 날 일으켜 앉혔다. 내 턱을 잡고 쳐다보더니 갑자기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달려들어 허겁지겁 빨았다. 혀끝으로 턱을 몇 번이나 핥고서는 아쉽게 입술을 뗐다. 그러곤 내 눈을 바라보고선 깊게 울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넌 어떤데?"
"하, 하고 싶어요."
"얼마나?"
"많이."
"가기 싫다."
"정말요?"
"그래."
그는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지그시 훑고는 멀어져 갔다. 문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으론 좀 전의 격렬하고 관능적인 남자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걸어가며 그가 말했다.
"주문해 놨으니까 여기서 저녁 먹어. 윤 기사가 집에 데려다 줄 거야. 늦을 거다. 일찍 자."
그가 문을 열고 나간 뒤에도 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문을 여닫은 그 잠깐 사이 누군가 알몸으로 식탁 위에 앉은 날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난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한 사람 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