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첫번째열병-3화 (3/14)

#3

생일날 아침, 그의 축하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바쁜 그니까 체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한편, 꼼꼼하고 빈틈없는 사람이니까 챙겨주리라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등교하는 차 안에서 나는 계속 망설였다. 먼저 말을 거내 함께 저녁식사 할 기회라도 만들까 생각했다. 요즘 그는 항상 저녁 약속이 있고 퇴근도 자정을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취하지는 않아도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와 곧장 방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아침에 잠깐 보는 것 외에는 얼굴 볼 시간도 없어 같이 산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같이 셔벗을 먹던 그날 밤 이후로 제대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다. 난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는 점점 가까워 오는데 선뜻 용기가 나서지 않았다.

"할 얘기 있어?"

두툼한 서류에 시선을 둔 채로 그가 말했다. 예리한 사람이니까 초조해 하는 내 기색을 알아챘을 것이다.

"저..................., 오늘도 늦으세요?"

"당분간 그럴 거야. 왜?"

고개를 젓자 그가 내 쪽을 보았다. 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역시 아무 말 없이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등교를 했다.

그날 밤 그는 새벽 2시가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하며 기다리다 결국 인내의 한계가 왔다. 그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지만 받지 않았다. 두 번 더 실패한 뒤에 운전기사 아저씨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후닥닥 달려가 모니터를 보았더니 운전기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문을 열어주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가 운전기사의 부축을 받아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 참, 자기. 똑바로 좀 걸어요."

고음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망연자실한 채로 그를 보았다. 한 팔은 운전기사의 어깨에, 또 다른 팔은 연보라색 코트를 입은 여자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스쳐가는 그에게서 술 냄새가 풍겼다. 그는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정신이 아주 없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내 앞을 스쳐가면서 내 눈을 똑바로 보았기 때문이다. 난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그들을 뒤따랐다.

2층 그의 방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 입구에 서서 보니 그를 침대에 앉혀 놓고 옷을 벗기고 있었다. 이렇게 흐트러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충격에 빠졌다. 그와 내 보금자리인 이 집에 낯선 여자가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파마머리 여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방을 나오는 운전기사를 붙들어 물었다.

"좀 취하셨어요."

그건 봐서 안 일이지만 도대체 왜 취할 정도로 마셨단 말인가?

재우쳐 묻기 전에 운전기사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버렸다. 혼란스럽고 경황이 없어 배웅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와 여자만 두고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여자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여자의 손이 그의 옷을 만지고 그의 팔을 마음대로 들었다 놓는 걸 보았다. 싫었다. 싫어서 화가 나고 무서웠다. 나가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에 눈자위만 붉었다.

굳은 표정이었다.

이 여자 누구예요? 나가라고 해요. 여긴 우리 집이잖아요. 당신과 나, 둘만의 보금자리잖아요.

내 눈이 말하는 걸 그는 분명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어째서..........

상의를 다 벗긴 여자가 그의 벨트에 손을 댔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날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눈을 했다.

"어, 누구?"

여잔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그와 눈을 번갈아 보았다.

"자기, 이 아가씨 누구예요?"

".......조카."

뜸 들인 후에 나온 그의 대답에 나는 움찔했다.

"어머, 이렇게 큰 조카가 있었어요?"

"고등학생이야."

"아, 요즘 애들은 정말 조숙하다니까. 밤늦게 소란 피워서 미안해요. 우리가 잠 깨웠나 보다."

우리.......

"삼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자요."

여자가 예쁘게 웃으며 걸어왔다. 난 충격과 절망에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여자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잘 자요, 조카."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닫히자마자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조카 맞아요? 숨겨둔 여자 아냐?"

여자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밤에 취해 들어오면서 그가 여자를 데리고 왔다. 그가 지금 여자와 한 방에 있는 거다. 그게 뭘 뜻하는 걸까? 난 송장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묻고 묻고 또 물었다.

저 여자는 왜 가지 않고 그의 방에 있을까? 방에서 둘이 뭘하고 있는 거지?

멍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가 나오지 않으니까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도 모르게 방문에 귀를 붙였다.

"어머, 자기 몸 끝내준다."

뒤이어 들여오는 여자의 가쁜 숨소리...............

현실을 직시한 순간 뼛속으로 찬바람이 드는 것 같았다. 오한이 엄습해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새하얗게 질린 주먹을 부르쥐고 문을 향해 치켜들었다. 두드리려는 순간 뺨으로 떨리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뭔지 모를 감정이 날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참으려고 해도 차아지지가 않았다. 흐느낌을 죽이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방문조차 소리죽여 닫고는 침대와 스탠드 사이 작은 공간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불을 끌어 덮어쓰고서 소리 죽여 울었다.

나한테 뭘 보여주려는 걸까? 내 눈앞에서 여자랑 같이 있다니.........

당장에라도 뛰어들어 여자를 끌고 나오고 싶었다. 그는 아닌데 그 여자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그가 허락하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무서웠다. 다른 사람이, 다른 여자가 그를 빼앗아 갈까 봐....

불안에 떨며 흐느껴 울었다. 가슴이 더 이상 슬픔을 받아주지 않았다. 가슴에 그가 가득 차서 슬픔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건지............

나는 뭐라고 말할 수도 없다. 운전기사의 딸, 불쌍해 거둬 먹이는 고아........그뿐이니까.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굴 만나든, 어떤 여잘 집으로 데리고 오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버리지만 않는다고, 떠나진 않을 거라고 약속해달까? 마스코트는 아무런 요구도 할 수 없는 걸까? 만약 그가 약속을 해준다면 견딜 수 있을까? 모르겠다.

지금의 상태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새벽녘,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 짐을 쌌다. 각방에 닥치는대로 옷을 구겨 넣는데 손이 떨렸다.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가? 아무도 없다. 같이 있고 싶은 건 한 사람뿐이다.

다른 곳에선 도저히 살 수 없을 거다. 어떻게.........., 그를 안 보고 어떻게......

침대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다 기운이 빠져 침대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누웠다.

"뭘 원하는 건데?"

자신에게 물었다. 그랑 같이 있고 싶은 것만이 아니다. 그의 여자가 되고 싶다. 벌써부터 그랬다. 그의 품에 따스하게 안겨있고 싶었다. 그와 깍지를 끼고 걸어보고 싶었다. 그와 얘기하고 그의 미소를 보고 그에게 맛있는 수제비를 해주고.......상상하니 눈물 속에 미소가 고였다. 난 미친 여자처럼 울고 웃고 있었다.

아, 난 도대체 뭘 꿈꾸고 있는 걸까?

세수를 해도 지워지지 않는 눈물자국을 지고 등교를 했다. 아무리 취했어도, 여자랑 같이 잤어도, 그는 제 시각에 일어날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일어나는 시각 훨씬 전에 집에서 나왔다. 걸어서 학교엘 갔다. 평소보다 더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멍하니 창밖만 보다가 주의 받은 게 여러 번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 운동장에서 축구공이 날아와 내 뺨을 후려쳤다. 꽤 큰 충격이었다. 한동안 눈앞이 캄캄할 정도였으니.

"괜찮아?"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얼한 뺨을 쥐고 걸었다. 그런데 누가 팔을 잡아당겼다.

"야."

강제로 돌려져 보니 눈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하지만 난 누군가의 뒤로 펼쳐진 주홍과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멍든 가슴처럼 얼룩진 하늘이 어지러웠다. 잠시 비틀거렸는지도 모른다.

"야, 왜 그래? 다쳤어?"

어디선가 또 소리가 들려왔다. 붙잡혀 있는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렸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먹었다고 해서 죽진 않는다. 하지만 그를 못 보면 죽고 말 걱다. 이대로는 안 된다. 멍청하게 있다간 그에게 버림받을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버려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의 곁에 나만의 영역이 있어야 한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영역........

교문을 나와 집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교하는 아이들로 인도가 북적거렸다. 뛰고 장난치는 소리들로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한 쪽 뺨에 얼얼한 진통이 왔다. 부었는지 뺨이 무거웠다. 그때 누가 앞을 막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운전기사였다.

웅ㄴ전기사가 뒤로 눈길을 주었다. 도로가에 검게 선탠 된 승용차가 서 있었다. 보지 않아도 그가 있는 게 느껴졌다. 공기가 벌써 달랐다.

"타요."

운전기사의 재촉에 차에 올랐다. 마음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가 와준 것이 속없이 기쁜 걸 감출 수가 없었다.

그 기쁨이 바보스럽고 답답하고 절망스러워도 말이다.

그는 통화중이었다.

"8시?"

시계를 보고는,

"장소는? ..........알았어."

전화를 끊고 준비하고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

"헤롯백화점."

그러고 작은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 노트북컴퓨터로 빠져들었다. 옆에 내가 앉은 것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10분쯤 지났을까. 그동안 난 심통 난 아이처럼 고집스럽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긴장하고는 있었지만 점점 높은 빌딩과 북적거리는 거리가 나타나 지루하진 않았다.

"아침엔 왜 혼자 나갔어?"

아무렇지도 않은 질문. 어젯밤 일 같은 건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목소리. 내 목소리도 그처럼 평온할 수 있을까.

"그냥요."

"어제가 생일이었다고?"

움찔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장 비서가 그러더군."

장 비서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가 내 생일을 일러두지 않고서야.......한심스럽게도 난 생일을 알고 있는 그에게 더 감독하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야 보고 받았어. 요즘 회사일이 좀 복잡하니까 그런 줄 알아."

".........괜찮아요."

사실 아버지도 한 번 제대로 챙겨주지 않은 생일이다. 그가 날짜를 알게 된 건 작년에 웬 남학생이 집 앞에 장미꽃과 생일카드를 놓고 갔기 때문이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남학생이었다. 꽃을 받고 같은 반인 걸 알았을 정도였다. 그 꽃을 발견하고 가져다준 게 그였다. 그때 그가 물었었다. 미역국은 먹었냐고.

정말 어제가 생일이었다. 최악의 생일.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7시 반까지는 여유 있으니까."

"갖고 싶은 거 없어요."

"가보면 생기겠지."

"............"

"하루 늦은 거 알아. 그래도....."

"집에 가고 싶어요."

내가 겁 없이 그의 말을 잘라먹었다. 그러자 그가 드디어 컴퓨터에서 눈을 떼고 쳐다봤다. 그의 시선을 받자 마음이 흔들렸다.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의 괴로움이 되살아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그, 그 여자 누구예요?"

"너랑은 상관없는 여자."

그의 차가운 대답에 내 마음은 더 꽁꽁 얼어붙었다.

"집에 갈래요."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무시하고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검은 칸막이가 스르르 올라가 시야를 차단했다. 그는 얼마 전에 중얼거린 대로 정말로 차를 바꿨다. 운전석과 뒷좌석을 차단시킬 수 있고, 뒷좌석이 넓은 걸로.

공간이 밀폐되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무릎에 올려놓은 책각방을 꽉 쥐었다. 이윽고 완전히 차단되자 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초조해져서 입술을 잘근 씹었다.

"열일곱 살이면 열일곱답게 굴어. 어른인 척 참지 말고."

순간, 머리로 열기가 화르르 몰렸다.

"내 얼굴 보고 똑바로 말해. 뭐가 문제야?"

야단치는 듯한 그의 어조에 억눌러왔던 울화가 팍 치밀었다. 홱 고개를 돌려 명령대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나, 난 싫어요."

격정이 몰아쳐 목소리가 갈라졌다.

"뭐가?"

"싫어요."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분이 끓어올랐다.

"정말 싫어요!"

그때 그가 미간을 모으며 손을 뻗어왔다. 내 턱을 잡고선 무서운 눈을 했다.

"얼굴이 왜 이래? 맞았어?"

그런 건 상관없었다. 손을 확 떨쳐내고는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그가 다시 얼굴을 잡아당겼다. 그의 팔을 밀어내려 거세게 저항했다. 도리질을 치며 몸을 뒤로 빼고서 그와의 거리를 넓혀 앉았다. 한쪽 구석에 한껏 움츠리고 앉아 가방으로 방어막을 쳤다. 그가 유치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리와."

"내릴래요."

손잡이를 당겨 밀었지만 문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가기 전에 이리 와."

"싫어요! 싫다구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샘솟았는지 모를 일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가 냉랭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난도질할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날아들었다.

"지금 내가 싫다는 거야?"

"다른 여자랑 있는 거......못 견디겠어요."

순간, 그의 눈빛이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번득거렸다.

난 두려움과 절망감과 괴로움 속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에서 떠오르는 대로, 어젯밤에 퍼붓고 싶었던 말들을 쏟아내 버렸다.

"그 여자랑 같이 있었잖아요. 밤새...............나올 때 신발을 봤어요. 구두가 현관에 있었어요. 그 여자랑 밤새 같이.."

"잤냐고 묻는 거야?"

"어, 어떻게 우리 집에서..........나도 있는데.................."

"아는 얘기 말고 모르는 얘길 해. 그래서 뭐가 잘못됐단 거지?"

충격에 말문이 막혔다.

"자, 잘못 된 게 없어요?"

"너는 너고, 그 여잔 그 여자야. 헛갈리지 마."

"그게 무슨 뜻이에요?"

"행운의 마스코트는 소중하게 간직하는 거야. 그리고 그 여잔.......어려서 어렵겠지만 잘 들어."

커다란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믿을 수 없어 그를 보았다. 얼음칼 같은 눈이 내 심장을 그었다.

"소모품이야. 일회용소모품. 그에 비하면 넌 비품이지. 비품은 감가상각은 돼도 소모품처럼 한 번 쓰고 버리진 않아. 그러니까 울 것 없어."

비품. 학교의 빗자루나 휴지통 같은 것. 쓰고 보관해 두는 것. 오래 돼 낡고 쓸모없어지면 버리게도 되는 것.

그 비품이란 말인가?

그는 차의 붙박이 바에서 얼음을 꺼냈다. 비닐팩에 담고는 그걸 자신의 손수건으로 감쌌다. 그리곤 아무 말도 없이 내 손을 잡아 홱 끌어당겼다. 난 맥없이 끌려가 머리를 잡혔다. 말릴 사이도 없이 얼음팩이 부은 뺨에 와 닿았다. 차가움과 저릿한 통증에 절로 찌푸려졌다. 내 표정을 본 그가 얼음팩을 살짝 떼고 뺨을 살폈다.

"손자국 같지는 않고."

".........."

"뭐로 맞은 거야?"

"추, 축구공."

"얼마나 세게 찼길래............공이 날아오면 헤딩으로 받아버리든지, 피하든지. 정신 빼놓고 다니지 마."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있었다. 그는 백화점에 도착할 때까지 내 머리를 잡고 얼음팩을 대주었다. 백화점에 도착했을 때는 뺨도 내 기분도 어느 정도 안정돼 있었다. 표면적으론 그랬다. 하지만 속으론 상처 받은 채로 차갑게 얼어붙은 거였다.

그에게 끌려 백화점을 돌았다.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는 나를 그가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그는 평소와 같이 부와 권력의 오라를 내뿜으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시종처럼 그를 쫓아다니는 판매원들 속에서 난 잘못된 푯말처럼 서있었다. 그렇게 서서 그를 보고 있자니 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지위, 나이, 외모, 어느 것 하나도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주위에 사람이 많아질수록 나와는 하늘의 별보다 동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는 게 절실히 느껴졌다.

비품으로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까? 언제쯤 쓸모없어지게 될까? 지금은 그래도 필요하다니까, 그것으로 좋은 걸까?

그는 알아서 척척 옷이며 구두, 운동화, 가방, 액세서리 같은 걸 골랐다. 내게 묻지도 않고 입어보는 수고도 시키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닥치는 대로 물건을 샀다. 무관심하려고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레이스 달린 옷이나, 보라색 구두가 포장 될 때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가 나에 대해서 다 꿰고 있다는 생각에 더 설레었다.

마스코트는 소중하게 간직한댔어. 일회용소모품 보다 나은거야. 버림받은 것보다 나아. 그지?

난 나를 위로하며 단 몇 마디로 종업원들을 호령하고 주눅들게 하는 그를 보았다. 그의 양복은 대부분 회색이거나 짙은 남색이거나 검정색 정도다. 집에서 쉴 때 입는 옷도 거의 무채색이다. 언제나 최고급 양복을 깔끔하고 세련되게 차려입고 있다. 그렇지만 한 번도 내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한 적은 없다. 오히려 이렇게 알아서 챙겨주고 있지 않은가.

그는 날 쇼핑 가방과 함께 집에 내려주고 다시 회사로 가버렸다. 생일선물을 잔뜩 받았으면서도 감사하단 인사도 하지 않았다. 서운하고 황망했다. 떠나는 그를 붙잡든지, 그의 차 트렁크에라도 숨어들고 싶었다.

옷을 정리하며 생각해 본 결과 내가 바라는 건 그를 독차지하는 것이었다. 곁에만 있어도 행복하다는 아이는 더 이상 없었다. 그가 나와 24시간을 함께 보냈으면 싶었다. 난 점점 고마움도 모르고 염치없이 구는 탐욕스런 아이가 돼가고 있었다.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곧 방학이고, 그러면 그나마 여유가 있던 고2의 생활도 끝나고 고3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될까?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게 될까?

그때에도 그와 함께 할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길어지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미래는 내게 언제나 깜깜한 암흑, 출구 없는 동굴의 끝처럼 여겨졌다. 되돌아오긴 너무 먼 길이어서 막다른 끝에서 머물 수밖에 없는

동굴.

쪽지시험을 성의 없이 본 관계로 과학실 청소를 맡게 됐다. 수업을 마치고 과학실로 갔는데 남학생 몇 명이 남아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당황스러워 했다. 나 또한 잠시 멈칫했지만 그냥 청소하기로 하고 흩어져있는 실험도구들을 정리했다. 아무 말 없이 청소를 시작하자 모여 있는 남학생들은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렸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 남학생이 들어왔다. 들어오다가 날 보고,

"어."

하고 멈춰 섰다.

"야, 왜 이렇게 늦었어? 빨리 와."

쑥덕거리던 남학생들 쪽에서 그를 불렀다. 난 묵묵히 내 일만 했다. 계속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청소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잡념이 없어 마음이 평온했다.

"야, 내 말 안 들려?"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뒤에 들어온 남학생이 약간 화난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 몸집에 짧은 까까머리를 한 남학생이었다. 걸레질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얼굴 괜찮냐고. 그때 공에 맞은 거."

이 아이가 내가 공에 맞은 걸 어떻게 알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학생을 자세히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우리 반이라도 얼굴을 다 모르긴 하지만 우리 반 아이도 아닌 것 같았다.

"괜찮아 보이기는 한데............그때 너 오지게 맞은 거 같더라고. 내가 찬 건 아니지만 어쨌건 미안학[ 됐다."

경쾌한 표정의 사과였지만 장난 같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걸레를 잡았다.

"저기 난 7반인데, 넌 몇 반이냐? 혹시 6반 아냐? 복도에서 몇 번 본 거 같은데."

그때 남학생들 쪽에서 이쪽을 보고 소리쳤다.

"야, 빨리 와. 지금 불붙일 거야."

"잠깐만 기다려."

남학생은 뒤돌아보고 소리친 뒤 다시 날 향해 말했다.

"너도 같이 볼래? 우리 과학 동아린데 실험을 하나......"

그 순간 펑! 하는 굉음이 터졌다. 폭발음에 놀라 멍해져있을 때 내 앞의 남학생이 먼저 움직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커튼을 타고 솟아오르는 불꽃이었다. 난 남학생의 몸에 눌린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연이어 폭발음이 계속 터지더니 급기야 과학실 한쪽을 불길이 점령했다.

"일어나! 여기서 나가야 돼!"

강한 손에 이끌려 과학실 밖으로 나왔다. 날 복도 끝으로 끌고 나온 남학생이 말했다.

"소리 질러! 크게!"

나는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씩씩거리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서워? 걱정 마. 내가 있잖아."

그 상황에서 그는 장난스럽게 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소리를 지르며 다시 과학실 쪽으로 뛰어갔다.

"불이야!"

내가 움직인 건 뛰어가는 그 남학생의 등, 하얀 교복 셔츠를 붉게 물들인 게 피라는 걸 깨닫고부터였다. 떨리는 입을 겨우 벌렸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질 못했다. 목구멍에서 간신히 뭔가가 튀어나왔을 땐 난 아래층에서 소화기를 찾아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부, 불이야."

뒤늦게 터진 목청으로 허겁지겁 소리를 지르며 소화기를 들었다.

"불이야! 불이야!'

그 다음 시간은 단편적인 영상으로 기억에 남았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손에든 소화기를 누군가 가져가고, 검게 그을린 남학생들이 들것에 실려 나왔다. 화마와 물과 검댕이, 비명이 뒤엉킨 아수라장 속에서 그 남학생들 발견했다. 내 몸을 덮었던 그 남학생이었다. 난 끌리듯 들것에 실려 나오는 남학생들 따라 응급차게 올랐다.

남학생의 등에선 작은 유리 파편 12조각이 나왔다. 오른 팔에는 3도 화상을 입었으며 다리에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다. 불길에 비해서 비교적 경미한 상처라고들 말하지만 난 몇 시간만에 처참해진 남학생의 모습을 보는 게 힘들었다. 이 아이가 아니었으면 내가 훨씬 많이 다쳤을 것이다. 고마움보다는 놀라고 당혹스런 심정으로 잠든 남학생을 지켜보았다.

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중 가장 상처가 경미한 학생이었다. 그러니 경찰과 선생님들이 궁금한 것을 물어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워싸고 있는 그들을 향해 생각나는 대로 설명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남학생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는 대답을 납득하지 못했다.

"같이 있었으면서 그걸 몰라?"

"혼내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솔직하게 말해."

어르고 달래는 그들 앞에서 생각을 해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리만 더 아프고 목이 따끔거리면서 속까지 울렁거렸다. 사실은 병원에 온 이후로 계속 머리가 어지러웠다. 육체적으로 멀쩡했기 때문에 충격을 받을 만 한 일은 겪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더 몸이 불편해졌다. 그렇게 약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난 더 충격을 받았던가 보다.

"무슨, 무슨 실험을 한다고......."

간신히 쥐어짜 입을 여는데 응급실로 들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경찰과 선생님과 학부형, 의사, 간호사, 다른 환자들 등등으로 왁작거리는 응급실에 그가 나타난 것이다. 내 시선이 고정되자 날 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아갔다.

그는 마치 정글 속의 흑표범 같았따. 나른하고 유유히 거니는 것처럼 보여도 날카로운 눈은 주위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먹잇감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도 있고 말이다. 우아하게 걸어오는 그로부터 침묵이 번져갔다. 걸을 때마다 검정색 고급 양복이 팽팽한 근육을 드러내 보였다. 소란스럽던 응급실에 침묵의 폭탄이 떨어졌다.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그를 보는 건 그가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단순한 머리가 아니다. 사람에게서 풍기는 무게감, 광채, 혹은 흡인력 같은거다. 그는 보통사람들보다 좀 더 진중해 보이고, 인광이 더 빛나며, 타인을 매료시키는 사람이다. 별 중의 별, 북극성처럼.........

사람들이 마치 길을 인도하듯 그에게 길을 열었다. 난 벌거벗은 마네킹처럼 앉아서 걸어오는 그를 보았다. 그의 뒤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네 명이나 따라오고 있었다. 어느새 경호원이 넷으로 늘었나 보다.

눈이 마주쳤지만 그의 시선에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가 도착해 내 앞에 섰을 때 경찰과 선생님들은 뒤로 물러나 구경꾼처럼 서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회장님."

갑자기 어디선가 늙은 의사들이 대거 등장했다. 줄지어 와서는 그의 뒤에 병풍을 쳤다.

"박사님. 얘, 어떤가 좀 봐주십시오."

난 의지 없는 인형처럼 다시 눕혀져 여기저기 진찰 당했다. 응급실의 의사가 한 차례 했던 순서를 다시 밟고 있는 거였다. 의사는 마치 없는 병이라도 캐내려는 듯이 열심히 내 몸을 뒤적거렸다. 찰과상 이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상처를 들먹이며 하루 정도 입원해 경과를 살펴보는 게 좋겠다는 말으 했다.

"그러도록 하죠."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래로 지시가 내려갔다. 내가 일어나 항의의 말을 하려는데 옆의 침대에 있던 남학생이 이동했다. 병실로 옮겨가는 것 같았다. 하려던 말을 삼키고 그를 보았다.

"중역 스물세 명을 대기시켜놓고 왔어. 들어가 봐야 돼."

고개를 끄덕이자 다가와 헝클어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미 들였어? 며칠 전엔 축구공, 이번엔 폭죽놀이."

내려온 손이 내 턱을 잡아 올렸다. 그는 눈을 마주치고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빤히 들여다보았다.

"적당히 해. 내 심장 테스트해보는 건 좋은데, 얼굴에 자꾸 상처 내면 곤란해. 알았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그랬다면 내가 가만 안 뒀지."

턱에서 손이 떨어져 나갔다. 난 아쉬움을 느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계를 보고 그는 빠르게 말했다.

"15분쯤 있으면 장 비서가 아주머니랑 올 거야. 2시간, 아니 넉넉잡아 3시간이면 끝나. 그때까지만 참아. 뭐 좀 먹고 자둬."

그가 떠나자 모여 있던 의사들도 우르르 사라졌다. 응급실의 사람들이 나를 힐끔 훔쳐보며 여기저기서 수군댔다. 단 5분정도 머문 것뿐인데 그가 다녀간 여운은 길게도 남았다.

"몰라? 넌 신문도 안 보냐? 대양해운 서문 국 회장이잖아.'

"20대에 대양해운 물려받았다는 그 놈이구만. 실물이 쪼금 더 낫네. 역시 돈은 있고 볼 일이야. 의사들이 완전 강아지처럼 기잖아."

"며칠 전에 구조조정 한다고 노땅들 몇 명이나 숙청했다던데?"

"요즘 신문에 만날 나오는 그 회장이야. 내 친구 형이 그 회사 다니는데, 윗대가리들 완전 물갈이한다고 난리도 아니라네."

"근데 쟨 누구야? 동생인가, 조칸가?"

그런 말들을 뒤로 하고 응급실에서 나왔다. 내 발로 간호사가 안내하는 병실까지 걸어들어 갔다.

"저, 제 오른쪽에 있던 남학생............"

"아, 엄해윤 학생?"

엄해윤. 처음으로 그 남학생의 이름을 들었다.

"1207호실이에요. 다른 학생들은 아직 응급실에 있어요. 옷부터 갈아입어요."

간호사가 링거병을 거는 걸 보고 주사를 맞지 않겠다고 했다. 몸에 바늘을 꽂는 건 정말 끔찍했다. 간호사는 몇 번 더 강요를 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나가버렸다.

장 비서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아주머니 혼자 쇼파에 앉아 졸고 있었다. 자정이 가가운 시각,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친구 좀 보고 올게요."

내 입에서 스스럼없이 친구란 말이 나왔다. 아주머니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병실을 나왔다.

1207호실, 4개의 침대가 있는 병실은 어두웠다. 해윤의 침대에만 옅은 불빛이 남아있고 모두 꺼져 있었다. 환자도 보호자도 잠들어 쌕색 숨 쉬는 소리,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간이 소파에서 불편하게 자고 있는 아주머니를 지나 해윤의 침대 옆에 섰다. 해윤은 이어폰을 낀 채 잠들어 있었다. 표지에 고래 사진이 있는 책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있었다.

난 선 채로 잠든 해윤을 내려다보았다. 잠든 해윤의 얼굴은 내게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이 내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폭발이 있었을 때, 걱정 말라든 해윤의 목소리가 내게 와 닿았다. 눈빛과 목소리가 믿어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손을 뻗어 붕대가 감겨있는 팔을 쓸어보았다. 어떤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불의 악마성인지도 모른다. 무자비하고 강해서 매혹적인 불, 그 기운이 해윤에게로 뻗어갔을지도 모른다. 해윤의 팔을 잡은 채 의자에 앉았다.

졸음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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