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첫번째열병-2화 (2/14)

#2

그를 따라 이사를 했다. 사고로 아버지와 회장님이 돌아가시자 그의 계모가 집을 차지했다. 계모의 친정식구들이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과정에 어떤 소란이나 충돌이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같이 살자고 말한 것만 기억할 뿐이다.

그는 나와 할아버지의 느티나무를 데리고 이사를 했다. 3층짜리 저택에 그와 나 둘이 살았다. 일하는 아주머니들과 정원사, 운전기사 모두 출퇴근이라 그와 함께 있는 아침이나 밤 시간에는 둘뿐이었다.

이사하고 등교한 첫날. 그 전날 짐 정리를 하느라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을 설쳤다. 낯선 침대 때문이 아니라 그와 단 둘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집에서, 이 세상에서, 이 하늘 아래서, 내가 알고 의지할 사람이라곤 그뿐이었다.

그가 그랬듯 난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 회장님의 어마어마한 장례식과는 달리 아버지는 조문객 하나 없이 한 줌 재로 돌아갔다. 그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같은 날 아버지를 잃은 그와 난, 끝까지 담담한 태도로 아버지를 보냈다. 그와 난, 우린 참을성이 많았다.

교복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커피향기가 감돌았다. 주방 식탁에 그가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잉크냄새 풍기는 신문이 몇 겹으로 쌓여 있었고 커피와 막 구운 토스트가 김을 피어올리고 있었다.

난 주방 입구에 서서 신문을 보는 그에게 눈길을 빼앗겼다. 수려한 외모를 더욱 빛나게 하는 하얀 셔츠, 회색 양복, 검푸른 넥타이, 은빛 커프스, 부드러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이 차고 빈틈없는 모습. 얼음칼처럼 냉랠ㅇ하고 단호한 모습인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단지 신문을 읽을 뿐인데도 날카로움이 드러났다. 형형한 눈빛은 예리하고 깊어 보였다. 하지만 입술은, 완벽하고 지적으로 보이는 그에게 색을 입혔다. 조명에 따라 때로는 분홍, 때로는 빨강, 때로는 보라.......한숨이 나왔다.

"이리 와 앉아."

그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빰이 붉어진 걸 느끼며 식탁으로 다가섰다. 커피포트로 손을 뻗으려는데 그가 신문을 넘기겨 말했다.

"우유 마셔."

커피포트의 손잡이를 쥔 채로 그를 쳐다봤다.

"아직 성장할 나이야. 우유 마셔."

그 말에 반발심이 일었다.

"저는......난 다 자랐어요."

그의 시선을 느끼며 냉장고 쪽으로 갔다. 우유를 꺼내 잔에 따르는데 손끝이 떨렸다. 그가 날 아직 어린애로 생각하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12살이나 차이나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직도 우유를 먹고 성장해야 할 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키가 168센티미터에 몸무게가 50킬로그램이다. 여기서 얼마나 더 커야 그의 상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컵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토스트를 한 입 배어 먹는데 그가 말했다.

"스무 살까지는 자란다는 평균이론을 말한 거야."

"예외도 있을 거예요."

그가 신문에서 눈을 들었다. 난 얼른 시선을 내려 그의 눈을 피했다.

"네가 성숙한 건 나도 알아. 그 교복 속에 뭐가 있는지도 알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켜보는 그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부끄러워? 애는 애군."

"이, 이런 얘기 처음이라서..."

"말 안 해도 알 텐데? 내가 너 예뻐하는 거."

놀라서 바라보자 그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그래 예뻐. 지금 당장 무릎에 앉히고 싶을 정도로."

그 말에 화르르 달아올라 버렸다. 눈이 촉촉하게 젖을 정도로 몸이 뜨거워졌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흥분된 공기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더 이상 대화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가 물어왔다.

"학교는 어때?"

"좋은 거 같아요. 크고 깨끗하고...."

굳이 옮길 필요가 없었는데 그는 끝내 전학을 시켰다. 이사를 와 거리가 좀 멀어지긴 했지만 버스로 30분이면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었다. 근데 그는 기어이 차로 5분이면 되는 가까운 학교로 옮기게 했다.

"선생이지만 벌써 이름이 좀 났어. 실력 있는 애들이 많을 거야."

"그런 거 같았어요."

"괜찮은 녀석 있으면 사겨 봐."

난 우유를 마시려다 멈췄다. 신문을 보고 있는 그는 더 설명할 의사가 없어보였다.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망설이다 겨우 물었다.

"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그의 대답은 읽고 있던 기사를 다 읽고 신문을 넘길 때서야 들을 수 있었다.

"또래 친구 하나 없이 학교 다니게는 안 해. 남자친구, 나쁘지 않아. 청춘에 해볼 건 다 해봐야지."

나도 모르게 유리컵을 꽉 쥐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아."

"하지만....."

"학생은 학생다운 게 좋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났다. 왜 하고 싶지 않은지 생각해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다. 이렇게 무턱대고 화가 나기는 처음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컵을 놓고 벌떡 일어나버렸다. 그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왔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왔다. 거실 소파에 두었던 가방을 들고 문 쪽으로 달려 나가는데 그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차에서 기다려."

"버스 타고 갈래요."

"기다리라고 했다."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마음이 상한 채로 현관 앞에서 멈춰 섰다. 그가 구두를 신고 스쳐 나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슴에서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반항심인지, 슬픔인지, 고통인지 모를 격한 감정이 날 괴롭혔다.

대문 앞에 그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열린 차문 안으로 서류를 펼쳐 들고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혼란스런 기분에 휩싸인 채 그의 옆에 앉았다. 차가 강 위의 나룻배처럼 부드럽게 나아갔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누가 와 있다고?"

그는 전화기를 잡은 손을 옮기며 딱딱한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그걸 멋대로 하게 둬서는 안 되지. 그 여잔 주주일 뿐이야. 기다리라고 해. .....아니, 돌아서서. ...........그래."

바로 옆에서 울리는 깊은 음성 때문에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어쩔 수 없이 두근두근 반응하는 심장이 싫었다. 그가 미우면서도 이렇다니, 이건 심각한 중병일지도 모른다. 미쳤을지도 모른다. 12살이나 많은 남자, 길에서 부딪쳤다면 아저씨라고 불렀을 법한 남자에게 온 마음을 빼앗겨 버렸으니.....

한숨을 쉬고 창밖으로 보는데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가방을 잡고 있는 내 손을 그의 큰 손이 덮고 있었다. 포근하고 감촉이 좋았다. 하지만 난 아직 그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라는 걸 상기했다. 운전기사의 눈치를 보면서 손을 홱 잡아 빼버렸다.

"만나볼 이유 없지."

그는 아직 통화중이었다. 통화를 하는 그의 눈길이 내게로 향했다. 그는 무표정한 채로 다시 손을 뻗어왔다. 그 손을 피해 차문에 꼭 붙어 앉았다. 그러곤 아예 가방으로 손을 덮어버렸다.

"통화도 필요 없어. ............그래? 마음대로 하라고 해."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난 무시하고 꼿꼿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통화 중인 그의 목소리 사이로 긴장된 내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그는 계속 날 주시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후회가 들었다. 그까짓 일로 이렇게 토라지다니......

애같이 굴고 말았다.

그가 통화를 끝냈을 때 차도 학교 앞에 도착했다.

"차를 바꿔야겠군."

그가 중얼거리며 다시 전화기를 들어 통화를 시도했다.

"문 비서, 장 이사님 나오셨나?"

난 아무 말도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심통 난 아이처럼 볼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차가 멀어져도 괴로움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선박과 철강 회사의 주인이었다.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그는 장남이자, 대주주로서 회사를 물려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계모와 돌아가신 회장님의 형제들은 29세로 회장이 된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회사 일에 매달렸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내가 그를 경외하고 좋아하는 건 어마어마한 회사를 운영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큰 집을 척척 구입할 만큼 돈이 많기 때문도, 영어로 된 신문을 줄줄 읽을 정도로 똑똑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한결같이 무채색의 옷만 입는데도 멋있기 때문인 것만도 아니었다. 물론 숨이 막힐 정도로 멋있지만 그게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다. 내가 그를 경외하고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자신의 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모르는 걸 그는 알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인지 알며, 자신만이 그것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전투부대의 맨 앞에서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는 선봉장 같았다. 어떤 적장이 나와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승리할 것 같은 남자였다. 그러니 맨 끝의 병졸인 나는 '나를 따르라!' 는 그의 명령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믿음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설명하긴 힘들다. 7년간 그를 보며 느꼈을 뿐이다.

새벽 1시, 그가 들어왔다. 그때까지 난 자지 않고 대문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원을 걸어오는 그를 보고 얼른 머리를 빗었다. 조금 흩트렸다가 다시 빗기를 반복했다. 뭘 입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천사가 그려져 있는 커다란 셔츠를 골랏다. 허벅지는 가렸지만 무릎은 덮지 않는 길이였다. 고민 끝에 브래지어를 벗어던지고 빨간 물방울무늬가 있는 흰 팬티만 입었다. 그러고 셔츠를 입으니 봉긋한 가슴에 유두가 발끈 솟았다. 부끄러움에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너 뭐하고 있는 거니? 뭐하는지 알고 있어?

거울 속의 고양이 같은 눈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몸을 꼿꼿이 세우고, 묻는 나에게 대답했다.

좋으니까. 너무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아. 멈출 수가 없어. 나 같은 건 아무렇게나 돼도 좋아. 그 사람이 날 좋아만 해준다면......

망설임을 뿌리치려고 바쁘게 방을 나왔다. 그러다 계단을 올라오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 안 잤어?"

맨발로 걸음을 내딛었다.

"이, 이제 막 자려던 참이에요."

"잘 자라."

그가 자신의 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피곤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걸음이 무겁게 보였다. 난 소리 없이 그를 따라 들어갔다. 손을 뻗어 그의 양복을 받자 그가 놀란 듯 쳐다봤다. 내가 따라온 걸 몰랐던 모양이다.

"아, 아침에 그 말........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그냥 친구 사귀라는 말이었는데 내가 오, 오해했어요. 말씀대로 할게요."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넥타이를 풀었다. 그것도 받아듣자 와이셔츠 단추를 풀며 날카롭게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에서 드러난 내 다리를 훑어 내렸다. 난 얼굴을 붉혀서 다시 어린애 같이 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뻣뻣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시계와 커프스를 탁자에 놓은 그가 돌아서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가서 자."

난 그가 바지허리에서 셔츠를 빼는 걸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처음으로 그의 맨가슴을 보고 있는 거였다. 수영으로 다져진 넓고 탄탄한 가슴과 배가 드러났다. 전의 집 뒤에는 야외풀이 있었다. 거기서 그가 자주 수영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보진 못했었다. 몰래 상상은 해봤지만 감히 훔쳐볼 생각도 못해 봤었다.

벗은 셔츠를 든 그가 다가왔다.

"집어삼킬 듯이 보는군."

그는 내가 들고 있는 양복 위에 셔츠를 올려놓았다. 난 마치 방패라도 되듯이 그의 옷을 안아들었다. 갑자기 너무 두려웠다. 그가 아니라 내 안에서 구불거리는 야릇한 불길이 정말 무서웠다. 배운 적도 없고, 훈련 받은 적도 없는 그것이 제멋대로 타올랐다. 도저히 통제가 안 되는 괴물 같았다.

"피곤한 하루였어. 그만 네 방으로 가."

그가 바지 허리띠를 푸는 걸 보았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그런 날 보며 그는 천천히 바지를 벗었다. 검정색 삼각팬티가 나타났다. 근육으로 뭉쳐진 굵은 허벅지와 털이 부숭부숭 난 정강이. 난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내렸다. 그의 맨발을 보다가 마음을 다잡고 눈을 들었다. 그의 중심부에 시선을 꽂았다. 귀와 목덜미까지 빨개졌는데도 눈을 떼지 않았다.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불룩하게 솟은 그의 사타구니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3초만 더 그러고 있으면 네 나이를 잊어버릴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지?"

"3초?"

"아니, 벌써 잊어버렸어."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머리를 확 움켜잡았다. 난 작은 아픔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머리를 당기는 바람에 목이 젖혀지고 입술이 벌어졌다. 난 제단에 올려진 처녀 노예처럼 무방비한 상태였다. 품 안에 안고 있는 그의 옷가지들만이 유일한 가로막이었다.

"가랄 때 갔어야지."

사납게 입술을 밀어붙여 왔다. 숨이 막히도록 입술이 꽉 눌려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다음순간 아랫입술이 물렸다. 얼얼하도록 맹렬히 빨아들이고는 다시 거칠게 입술을 떼 갔다. 그의 난폭한 기세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비틀거리자 허리가 휙 끌려갔다. 상체가 뒤로 꺾였다. 내겐 첫키스였다. 그에게 젖가슴을 만지게 하고 아랫도리를 내줬지만 키스는 처음이었다. 난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키스 때문이 아니라 그걸 원하고 있는 나 자신 때문에 당황한 거였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다시 그의 입술이 내려왔다. 좀 전보다 부드러웠지만 그래도 격렬하고 고압적인 키스였다. 멍하게 받아들이고만 있는데, 어느 순간 찌릿한 느낌이 왔다. 저릿한 감각이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발끝까지 퍼졌다가 정수리까지 치솟아 올랐다. 물컹하고 부드러운 것이 부딪쳐 빚어지는 열기에 거의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 감촉과 뜨거운 타액에 정신이 아찔했다.

가물거리는 눈을 엷게 뜨고 그를 훔쳐보았다. 평소의 그와 너무도 달랐다. 날카로운 이성으로 똘똘 뭉친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격렬한 표정. 외설적이리만치 야해서 온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그는 입술로 내 입술을 부비고 핥았다. 그러다 갑자기 뜨거운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내 구강을 범했다. 한 번에 깊숙이 파고들어오는 공격에 난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아! 이대로...................이대로 영원히........!

가슴이 팽팽해져 얇은 셔츠의 압박이 거추장스러웠다. 유두가 삐죽이 솟아올랐다. 그가 입술을 뗐다. 그의 시선이 셔츠를 밀어 올리며 꼿꼿이 솟은 젖꼭지로 향했다. 그 시선에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았다.

"네 몸은 범죄를 유발시켜. 널 가지면 난 파렴치한이 돼."

말과는 달리 그는 다시 입술을 내밀었다. 쪼는 듯 입술만 대는 키스를 반복하다가 혀로 내 입술을 핥았다. 그러다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내 입안을 휘저었다. 내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정신없이 그에게 매달려 그의 혀와 입술을 갈구했다. 그의 혀는 들어올 때처럼 빠르게 달아났다.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떼졌다. 내 입술은 물론 턱까지 타액으로 물들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의 팔에 의지해 있지 않으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빨갛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벌린 채로 그의 입술만 보았다. 내 머릿속에는 키스만 가득했다. 먹이를 갈구하는 새끼제비처럼 그가 다시 뜨겁게 키스해 주기만을 바랐다.

"원하면 네가 해 봐."

홀린 것처럼 그의 입술을 봤다. 살아있는 건 원색적 본능뿐이었다. 촉촉이 젖어 윤기를 띠고 있는 그 입술의 감촉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천천히 발뒤꿈치를 들었지만 닿지 않았다. 턱을 들자 그의 머리가 내려와 주었다. 눈을 감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무런 반응도 않는 그의 입술에 열심히 키스했다. 그의 반응이 없어도 키스가 불러일으키는 열정에 빠져들어갔다. 그의 두 손이 뺨을 움켜잡았다.

"덤비지 마. 난 우릴 좀 더 애태우고 싶으니까."

그는 격하고 짧은 키스를 남기고 밀어냈다.

"샤워 해야겠다. 뭐 먹을 거 있나? 뭐라도 삼켜야지 안 되겠어."

붉게 물든 채 버려진 기분으로 서 있었다. 욕실로 들어가는 그를 보았다.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그의 뒷모습을 보고 다시 가슴이 뛰었다. 그가 욕실로 들어간 뒤에도 난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샤워를 마친 그가 주방으로 내려왔을 즈음 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냉장고 쪽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뭐라도 만들어 드릴까요?"

"뭐?"

"김치전이나 국수 같은 거."

"출출하진 않아. 물."

물을 꺼내 컵에 따라 주었다.

"사과무스케익 있어요."

"또?"

"셔벗이요. 망고셔벗."

"그걸로 하자."

냉동실에서 셔벗 두 개를 꺼내 포장을 뜯었다. 수납장을 열어 초록색 유리컵 두 개를 꺼냈다. 등에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한테 보이기 싫어?"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그의 시선이 내 다리를 보고 있었다. 그가 샤워하는 동안 청바지와 셔츠로 갈아입었었다. 브래지어도 하고 말이다.

대답 않고 다시 몸을 돌렸다. 컵에 셔벗을 담고 작은 스푼을 두 개 꺼냈다. 그러다 지난번에 도우미 아주머니랑 장 보면서 산 젤리가 생각났다. 먹음직스러워 보이길래 충동적으로 산 거였다. 아마 그게 키위랑 복숭아랑.....

냉장고 안을 재빨리 훑어보았지만 젤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저것 치우며 찾는데 안쪽에 쌓여 있는 젤리가 보였다. 꺼내서 유리접시에 담았다. 식탁에 셔벗과 젤리를 올려 놓고 그에게 스푼을 건넸다. 그와 마주 앉아서 젤리를 한 스푼 떠먹었다. 내일 아주머니께 과일을 좀 사두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작년 여름 생각나?"

아직 촉촉해 보이는 그의 머리는 흑단처럼 검고 윤기가 돌았다. 앞머리가 흘러내려 이마를 가렸다. 걷어 올려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손을 뻗진 못했다. 내심 뿌듯했다. 단정하지 않은 그의 이런 모습은 나밖에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식구들 여름 별장 갔을 때 말야. 집에 너랑 나랑 안산 아주머니, 이렇게 셋이 남았었잖아."

그가 언 셔벗을 긁어 먹으며 말했다. 차가운 셔벗에 그의 입술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에게선 시원한 비누향이 풍겼다.

"생각나요. 안산 아주머니 맹장염 터져서, 그때 정말 놀랐어요."

"집에 와서 늦은 저녁 먹었던 게 생각나. 그 수제비 정말 맛있었어."

할머니께 배운 수제비 솜씨였다. 맛있게 먹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생글 웃었다.

"언제 또 해드릴게요."

"네 기준으로 4인분."

그때 양이 모자랐던 게 생각났다. 할머니와 둘이 먹ㄱ던 걸 생각해 만들었는데 그가 의외로 많이 먹어서 부족해 했었다.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도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다.

"그날 네가 아주머니 보살피는 거 보고 놀랐었지."

셔벗을 먹으며 그의 얘기를 들었다.

"아프다고 비명 지르는 사람 옆에서 그러기 쉽지 않은데 말야. 평소보다 더 조용하더군. 넌 주위가 들뜨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편이야."

"모르겠어요. 놀라서 어떻게 했는지 생각 안 나요."

"장 비서보다 나았어. 내 눈빛만 보고도 내가 뭘 원하는지 금방 알아채더군."

난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가만있다가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할머니가 말을 좀 더듬으셨어요."

느닷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그의 눈길에 보충 설명을 했다.

"화날 땐 특히 심해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정도였어요. 그럴 땐 그냥 눈치로 알아들어야 됐거든요."

"그 얘길 난 왜 처음 듣지?"

화난 건가 싶어 봤지만 그는 무표정해서 알 수가 없었다.

"더 얘기해 봐."

"무슨 얘기요?"

"할머니 얘기."

"별로 할 얘기가...................그냥 보통 할머니셨어요. 키가 작으셨고 허리는 구부정하시고........."

그가 빤히 쳐다봤다. 너무 뚫어지게 쳐다봐서 마치 내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노래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셔벗을 뜨는 그를 보았다.

"전에 노래하는 걸 들었어. 감자 깎으면서 부르던데?"

"아......그, 그걸 들었어요?"

"한번 해봐."

"싫어요."

"내가 해볼까?"

"그걸 기억해요?"

"가사가 이런 거였어, 아마?"

"하지 마세요."

"술 취한 강산에 호걸이 춤추고 돈 없는 천지엔 영웅도 우누나. 얼싸 좋다. 이럴럴거리고 상사디야."

나는 그만 킥, 하고 소리내 웃고 말았다. 마지막 구절에서 그가 멜로디를 붙여 부른 것이다. 그 바람에 입 안의 젤리가 휙 날아가 그의 뺨에 튀고 말았다. 나는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뺨의 젤리를 떼 냈다.

"미, 미안해요."

"내 노래가 그렇게 아니야?"

다시 웃음이 터지려해 입을 막아야했다.

"그거 우리 할머니 노랜데........"

"너 해봐."

"그걸 어떻게 외우고 있어요? 신기해라."

"해보라니까."

"싫어요. 안 할래요."

"이래도?"

그가 젤리를 뜬 스푼을 들고 내 얼굴을 겨냥했다. 깜짝 놀라는 순간 그가 벌써 젤리를 내 얼굴에 튀겼다.

"아!"

뺨에서 차가운 젤리가 뚝 떨어졌다. 당황해 멍했다가 얼른 젤리를 떠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그는 손으로 간단히 막아버렸다. 약이 올라 다시 젤리로 스푼을 뻗치는데 그가 더 빨리 움직였다. 접시를 아예 들고서 공격 자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나는 놀라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안돼요!"

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젤리를 집어 통재로 내 얼굴에 던졌다.

"아야!"

오른쪽 눈에 축축한 것이 철썩 붙었다 미끄러졌다. 나는 분해서 셔벗을 집어 들었다. 손에서 셔벗이 녹아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걸 던지려고?"

"아뇨."

나는 잽싸게 걸어가 껑충 뛰었다. 그의 벌어진 셔츠 앞으로 셔벗 덩어리를 홱 넣어버렸다.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난 킥킥 웃으며 그를 보다가 무표정한 그의 반응에 멈칫했다. 그가 셔츠를 들어 올려 바지허리까지 내려온 셔벗을 꺼냈다. 이미 녹아 바지 속으로 셔벗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당황해서 가슴이 다 떨렸다.

"화, 화났어요?"

그의 셔츠가 젖은 걸 보니 더 겁이 났다.

"미, 미안해요.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그때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난 그가 냉장고  쪽으로 가는 걸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너 이리 와."

당연히 난 그의 명령에 따랐다. 쭈뼛거리며 다가서는데 그가 얼음통을 여는 게 보였다. 얼음을 꺼내는 그를 보고서 설마 했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 재빨리 몸을 돌렸다. 주방을 빠져나와 거실로 달아나려는데 그의 손이 뻗어왔다.

"꺄악!"

그에게 잡힌 난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달아나려고 몸부림치다가 바닥을 뒹굴었다. 차가운 손이 셔츠 목둘레를 잡아당기려 했다.

"하, 하지 마요. 아악!"

그의 표정을 봤더니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 헐떡거리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 하지만 금방 그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의 손을 피하려고 몸을 잔뜩 웅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에게 완전히 눌려버렸다. 그는 내 허리 위에 올라타서는 포로를 잡은 적장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다고 못할 줄 알고?"

너무도 쉽게 방어벽이 뚫려 버렸다. 셔츠 속으로 얼음 조각 서너 개가 쑥 들어왔다.

"앗, 차가!"

소름이 오르르 돋았다.

"맛이 어떠냐?"

그는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에게 이런 면이 있는지 몰랐었다. 언제나 진지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난 바닥에 누운 채 그를 보았다. 그가 내 몸 위에 앉아 있지만 무겁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그가 자신의 체중을 다 싣지 않은 걸 것이다.

"항복이야?"

"네."

"너무 쉽잖아. 재미없군."

갑자기 어색해져버렸다. 내가 진지해졌기 때문이다. 쉽게 항복하고 감정 실린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장난치며 그와 함께 좀 더 웃을 수 있었는데 내가 다 망쳐버렸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가 손을 뻗어왔다.

"그대로 가만있어."

그의 손이 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놀라서 굳어버렸다. 맨산을 더듬으며 옹ㄹ라오는 손길에 심장이 미친 듯이 파닥였다. 얼음에 돋았던 소름이 빠르게 녹아들었다.

"하나가 없는데......"

"버, 벌써 녹았나 봐요."

그가 몸을 내리며 손을 잡아주었다. 일어나자 바닥으로 얼음 조각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만 가서 자. 2시가 넘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 머리를 헝클어버렸다. 방으로 올라가는 그를 보고 서있었다. 이젠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 줘도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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