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 그 때의 난 누군가의 손길이 그리웠던 것 같다. 따스하면서 강인한 손길이..........
난 산골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보통 산골이 아니었다. 생활상을 얘기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6.25때 어디냐고 되물을 그런 첩첩산중의 산골에 살았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는 없었다. 아버지의 방문은 날 보기 위해서라기보다 할머니에게 생활비와 딸의 양육비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9살에 아버지가 2시간 거리에 있는 분교에 넣어줬다.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 학교에 가던 날, 난 양쪽 머리에 개나리를 꽂고 진달래 꽃반지를 끼고 할머니의 자주색 꽃버선을 신고 있었다. 선생님들이 보고 많이 웃었던 게 생각난다. 산에서 사는 내겐 자연스러운 패션이었지만, 사실 그 누구의 이해도 받지 못하는 패션이긴 했다.
학교라는 놀이터에 가는 건 좋았다. 하지만 친구들과 썩 어울리진 못했다. 난 깡마른데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눈에 띄게 피부가 희니 것도 걸림돌이였다. 게다가 내 양말은 언제나 짝짝이였고 눈은 고양이라고 놀려댈 정도로 질색이었다. 어쩌다 마주치는 마을의 할머니들은 내가 할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난 할아버지를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서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학교 가는 길에는 들꽃이랑 열매가 탐스럽게 피어서 날 현혹시키곤 했다. 등교를 하면 2교시 시작이거나 이미 시작되어 있는 게 다반사였다. 어느 가을날엔 등굣길에 하교하는 아이들을 만난 적도 있었다. 아이들은 날 외계인 보듯이 했다. 소극적이고 뚱한 내 성격으로는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심히 등교를 했다. 2시간 거리의 학교를 1년여 간 다녔다.
10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산골집을 등지고 아버지에게 끌려 도시로 나왔다. 아버지가 높고 큰 대문 앞에 멈췄을 때 난 뒷걸음질을 쳤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쿵쾅거려서 두려웠다. 그 떨림은 무엇의 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우악스런 손에 잡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지러움을 느꼈다. 짙은 라일락 향기 때문이었을까.......
희고 붉은 꽃들과 초록빛 잔디와 분수 같은 걸 지났다. 잘 다듬어진 넓은 정원은 마치 동화 속의 성으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봄산의 화려함, 여름산의 싱그러움, 가을산의 운치, 겨울산의 아련함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낯설어서 신비롭게 보였던 것 같다.
마법처럼 그가 나타났다. 그는 커다란 그네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놀라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뭔가가 움직였다.
그의 발치에 앉아 있던 송아지 만 한 개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시골의 누렁이보다 훨씬 크고 하얗게 빛나는 털을 가졌다. 개가 내게로 다가왔다. 점점 더 커지며 시야를 가득 채우는 개 때문에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휘잇! 테리!"
휘파람 소리가 개를 불러들였다. 개가 큰 몸집을 돌려 그에게로 갔다. 그가 목덜미를 쓰다듬어주자 커다란 개가 아기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난 홀려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마치 사자를 다루는 조련사 같이 보였다.
그가 개를 끌고 다가오자 아버지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따님인가 보군요."
"네, 도련님. 인사드려야지. 어서 인사 안 드리고 뭐해."
아버지가 어깨를 잡아 흔들었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눈높이와 비슷하게 서 있는 사자 같은 개 때문이 아니었다. 커다란 개를 마음대로 다루는 그를 보고 미리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까마득히 높이 있었다. 아버지보다 키가 크고 가슴이 넓고 다리가 길었다. 거인 같았다. 그의 큰 체격이 날 더 두렵게 만들었다.
"최 기사님이랑 안 닮았네요."
"네. 제 엄마를 빼닮아서...."
"엄마가 미인이셨구나."
얼굴조차 모르는 엄마............그 단어 때문이었을까? 휙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다. 순간, 깜짝 놀랐다. 그런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왕자님 같았다. 흰 얼굴에 부드러운 머릿결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만화영화에서나 보았던 바로 그 왕자님의 모습이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공주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홀린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게 재미있었는지 그가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줬다. 테리에게 하듯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겐 굉장한 '접촉'이었다. 그때까지 누구도 내게 그런 식으로 쓰다듬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조차도 말이다. 그 접촉 때문이었을까. 바뀐 환경 때문이었을까. 그 날 ㄹ이후 난 열흘을 앓아누웠다.
아버진 그의 아버지를 모시는 운전기사였다. 아버진 그의 아버지를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우린 궁전처럼 큰 그의 집과 같은 주소, 하지만 전혀 다른 지하방에서 살았다. 넉넉하지도 궁핍하지도 않은 생활이었다. 활기 넘치진 않았지만 무료하지도 않았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또한, 순간순간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했다. 생활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다. 불만스럽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은 그저 그런 생활이었다.
아버진 10년 만에 함께 살게 된 딸아이를 어떻게 다뤄야할지 몰랐던 것 같다. 집에 들어오면 방이라도 좀 쓸지 이게 뭐냐, 일찍 자거라, 하는 말뿐이었다. 나라도 새살을 떨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러질 못했다. 아버지가 낯설기도 했고 생경한 도시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교의 아이들은 이상한 차림으로 다니는 날 괴롭혔다. 짝짝이 양말이나, 바지 위에 입은 꽃무늬치마 같은 걸 보고 놀려댔다. 하지만 난 보라색과 빨강이 좋았다. 그 두 가지 중 하나를 바쁜 아침에 선택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보라색 바지에 빨간 치마를 덧입곤 했다. 몇 번 말리며 호통을 치시던 아버지도 결국은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학교의 아이들은 모두 자신감이 넘치고 발랄해 보였다. 그들은 총총한 눈빛에 체격도 도전적으로 컸다. 난 체력, 공부, 센스, 모든 면에서 뒤처졌다. 그래서 더 따돌림을 당했던 것 같다. 놀려대던 아이들은 내 등을 때리기도 하고 머리칼을 쥐어 뜯거나 발을 걸어 넘어뜨리기도 했다. 그래도 난 울지 않았고 화도 내지 않았으며 노려보지도 않았다. 아프고 성가셨지만 꾹 참았다. 본디 그리 애살스럽지 못한 나지만 참을성은 많았다. 그러자 아이들도 지쳐갔고 곧 흥미를 잃었다. 난 외톨인 채로 있는 게 편했다.
2년쯤 지날 무렵, 난 한여름 옥수수처럼 삐죽삐죽 크고 살도 붙었다. 안채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세 끼 밥을 잘 챙겨주신 덕분이었다. 몸에 탄력이 붙고 피부에 윤기도 흘렀다. 이목구비도 또렷이 자리 잡아 갔다. 학교에선 말없이 한 구석에 존재하며 공부는 꼴찌 면하는 정도로 했다. 어딘가 모르게 위축돼 있었고 가라앉았으며 친구도 없었다. 겨우 아는 체를 하는 두어 명이 있을 뿐이었다. 공부에도 노는 것에도 데면데면했다. 가지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심심한 것도, 외로운 것도 잘 몰랐다. 아이다운 욕심, 집착, 변덕 같은 것도 없었다. 아니, 없었던 게 아니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보랏빛 밤, 불을 켜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들어와 보시면 분명히 화를 내실 테지만,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는 산골에 살았던 내게 형광등 불빛은 지나치게 밝았다.
어둠 속에서 소리를 들었다. 산골에선 방에 혼자 있으면 벌레소리, 개울소리, 바람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하지만 여기선 자동차 경적소리만 이따금씩 들려올 뿐이었다.
발톱을 깍기로 했다. 할머닌 밤에는 손톱발톱을 깍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호랑이가 와 냄새를 맡고는 그 주인을 알아차려 물어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도심까지 호랑이가 찾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톡.......톡.......톡.
경쾌한 소리가 어둠에 섞여 들었다. 그때 소리를 뒤덮는 어떤 냄새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처음엔 비린내 같았다. 그러다 점점 산짐승의 냄새가 떠올랐다. 언젠가 본 무를 캐먹는 멧돼지의 냄새 같기도 했다. 진짜 호랑이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발톱 냄새를 맡고 어슬렁거리며 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두려움과 함께 호기심이 생겼다.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고 나가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마술처럼 현관문이 열렸다. 호랑이는 아니었다. 빛의 날개를 펼치고서 나타난 어둠의 실루엣. 어둠 속에서 분명 눈이 마주쳤다.
"이리 나와 봐."
말 잘 듣는 로봇처럼 흐린 정원의 불빛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내게 무선모형 자동차를 보여줬다. 시원스레 달리는 걸 보여주고 원을 그리며 도는 묘기도 해보였다. 그러더니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조종법을 설명했다. 자상하게 몇 번이나 가르쳐 주고는 내게 조종기를 맡겼다. 미숙한 내 조종에 갈피를 못 잡는 자동차를 보더니 그가 말했다.
"때때로 저건 제 의지를 발휘해."
왜 이걸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조종기를 놓을 순 없었다.
"안 믿겨?"
"어떻게 그래요?"
"제가 가고 싶은 방향대로 무전을 보내는 거야. 사람의 뇌로."
말하는 그의 입, 그의 시선, 그의 표정을 봤다.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그의 모습만 선명히 떠올랐다. 최대한으로 커진 내 동공과 집중된 뇌가 그를 담아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미풍에 흩날리는 머리칼, 허리춤에 올려 있는 손, 굳건히 버티고 있는 다리, 모래알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한 운동화, 깊게 스며드는 그의 목소리..........
"그럼 손이 저절로 움직여. 너도 느낄 수 있을 거야. 저 놈의 작은 진동까지............그게 얼마나 짜릿한지도....."
그때 그는 등대 같았다. 망망대해에 우뚝 서 드넓은 바다를 밝히는 등대, 상상으로만 보았던 그 등대 같았다. 허리케인, 해일에도 끄떡하지 않을.......
"가졌다고 맘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지. 저 놈은 의지가 있어. 그래서 매력적인 거야. 강하면 강할수록..."
그가 말한 건 단지 모형 자동차일 뿐이었지만 난 깊이 열중했다. 아버지가 올 때까지 정신없이 몰두했다.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그것에 매달려서 안달했다. 뜻대로 커브를 틀어주면 좋아서 까르르 웃기도 하고, 생각대로 안 되면 안타까워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때때로 지시하는 그의 목소리에 끄덕끄덕했다. 고개를 갸웃하고 설명을 듣고, 눈을 마주치고 웃고, 그의 손안에서 손을 움직이고, 그를 웃고 하고, 그 웃음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늦게 아버지가 오셨을 때 난 자동차 조종에 푹 빠져 있었다. 뭔가에 그렇게 깊이 심취해 있었던 건 도시에 온 이후 처음이었다. 아직 재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에게 조종기를 넘겼다.
"갖고 싶어?"
받지 않고 그가 물었다. 욕심내는 법을 몰라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는 말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난 보라색 레이스 치마에 빨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커다란 나비 모양의 핀으로 올려 묶은 머리가 허리까지 길었다. 발 한 쪽에는 슬피러, 다른 쪽에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내 신발을 본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어 조종기를 가져갔다.
"그럼 노력하는 거야, 악착같이."
그 후로 매일 그를 기다렸다. 무선모형자동차를 갖고 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난 내 마음이 무선모형자동차에 가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가 돌아오는 시각에 맞추처 대문 앞을 지켰다. 그러다 그를 기다리는 게 하루 일과가 돼버렸다. 항상 바쁜 그였지만 그는 한 번도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살짝 미소를 띠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리곤 곧 보통 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 순간 그의 귀한 미소는 내게만 향한 것이었다. 그는 결코 잘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웃으주면 난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기뻤다. 그때부터 조금씩, 내가 갖고 싶은 게 무선모형자동차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마도 그는 본격적으로 회사에 투입됐던 것 같다. 그에게는 언제나 서너 명의 사람들이 따라다녔다. 그가 매우 중요하고 바쁜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내 생각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인물이란 걸 알게 된 건 아주 나중이었다). 사람들을 거느리고 걸어가는 그를 보면서 산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크고 듬직하고 포근한 산. 산처럼 빛과 무지개와 안개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뒤에는 언제나 눈부신 광채가 따랐고, 때때로 난 그 광채로 인해 어지러움을 느꼈다.
술을 마시면 아버진 엄마 얘기를 했다. 욕이 대부분인 주정 속에서 엄마가 죽은 게 아니라 날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진 가끔 여자를 만났지만 결혼까지는 가지 못했다.
아버진 그게 모두 내 탓이라고 말했다.
어느 밤, 아버지의 한탄과 비난 섞인 술주정을 피해 밖으로 나왔을 때 그를 만났다. 현관에서 나오는 그는 날 보지도 않고서 바람처럼 홱 지나갔다. 세찬 걸음과 굳은 표정이 매우 화난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나도 모르게 그를 쫓아갔다. 하지만 그는 차를 타고 나가버렸다.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그의 차를 보았다.
그날 밤, 자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새벽녘, 차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방을 뛰쳐나갔다. 밖은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맨발인 채로 후다닥 뛰어나온 난 놀라서 움찔했다. 천둥과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는 폭우에 흠뻑 젖어서 바위에 앉아있었다.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휙 들었다. 난 흠칫 놀라서 젖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가 손짓했다.
억센 비를 맞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다가가 그의 발밑, 젖은 잔디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테리처럼 그의 발치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젖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곤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내 얼굴을 때리는 빗줄기를 가려주었다.
난 졸음이 오는 걸 느꼈다.
"나 기다렸니?"
어깨에서 등으로 따뜻한 게 흐르는 걸 느끼며 그를 보았다.
"안 돌아오면 어쩌려고."
젖은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정했다. 감정 없는 목소리도 차분했다. 하지만 난 그가 화가 나 있다고 느꼈다. 화를 잘 참는 난, 참고 있는 그의 화를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도 나랑 비슷하구나 생각했다.
"내일도 기다려줄래?"
따뜻해진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저절로 웃어지는 입술로 빗물이 들어오고, 마주 보는 그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약속한 거다."
"매일매일...."
내 다짐에 그가 웃었다. 하지만 그건 보통 때의 미소와는 어딘가 달랐다. 며칠 후 아버지로부터 어떤 얘기를 들었다. 폭우가 내리던 날, 요양소에 있던 그의 생모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들과 집 앞까지 쫓아오는 남학생들로 내가 성숙하고 있단 걸 깨달ㄹ았다. 반에서는 맨 뒷자리에 앉았고 속옷 사이즈도 한 치수씩 커져 갔다. 시장의 할머니가 '아가씨' 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도 난 여전히 구멍 난 양말에 조각천 꽃무늬를 오려붙여 신고, 체육복 바지 뒷주머니엔 보라색 패랭이꽃을 수놓아 입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그를 기다렸다.
한여름 밤, 정원의 흐린 불빛 아래에서 나방들이랑 놀고 있었다. 그의 차가 도착하는 소리에 얼른 대문으로 뛰어갔다. 문을 열자 예상했던 대로 그가 차에서 내리고 잇었다. 그는 내게 미소를 보이며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의 지난 5년은 매일 밤 이랬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가면 난 뒤엥서 눈으로 굿나이트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덴 그 밤,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그가 새삼스럽다는 듣ㅅ 날 쳐다보았다. 습관적으로 뻗은 그의 손이 내 머리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는 손을 거두고는 날 뚫어지게 봤다. 그 순간 난 그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뭔지 알 수 없지만 숨이 막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인어공주가 왕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인어공주보다 더 열렬하게 봤을지도........
"지금 몇 살이지?"
그가 물었을 때 전신에 소름이 오르르 돋았다. 심장은 터질듯 뛰고 얼굴은 뜨거운데도 몸이 파르르 떨렸다. 풀벌레 소리와 달빛, 열대야의 후텁지근한 열기가 내 연보랏빛 원피스를 헤집는 것 같았다. 피부를 기어 다니는 그 느낌에 목소리가 흔들렸다.
"여, 열일곱............"
그의 손이 내 뺨을 스쳤다. 난 불에 덴 것처럼 놀랐지만 숨을 멈춘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가까이 있었다. 아마 그에게도 내 심장소리가 들리지 싶었다. 밤바람을 타고 흐르는 그의 체취가 맡아졌다. 그의 냄새가 좋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체구가 내게 드리워졌다. 그런데도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다.
"내 강아지."
그가 속삭이고 간 뒤에도 내 심장은 좀처럼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 그가 어쩐지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는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처음엔 뭐 중요한 생각을 하고 있나 보다 했다. 그가 중요한 사람이고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한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무심함이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됐다. 점점 초조해지고 우울해졌다. 잠도 잘 수 없었고 식욕도 사라졌다. 그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몰라서 불안하고 걱정됐다. 하지만 바쁘게 지나가는 그를 붙잡고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불안이 나를 아프게 했다.
그의 무시가 엿새가 되고 일주일이 되었을 때, 난 거의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일주일째 날, 탈수 증세로 병원에 실려 갔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응급실이란 곳을 가게 됐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은 탓이었다. 아버진 화를 내며 야단을 치시다가 나중에는 좀 다정하게 대해주셨다. 이틀 동안 입원해 있었다. 그래서 이틀 동안 그를 기다리지 못했다. 그러니 난 또 불안이라는 금단현상에 시달렸다. 그땐 이미 그에게 중독돼 있었던 것이다.
이틀 뒤, 힘겨운 몸으로 다시 그를 기다렸다. 그게 쉬는 것보다 마음이 더 편했다. 이윽고 그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멈춰서 찌르듯 날 보았다.
"이리 와."
나는 좀 놀라고 떨려서 1분여 동안이나 그를 기다리게 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난 머리를 살짝 기울여 보는 그의 눈에 사로잡혀 멍했다. 처음 땅을 내딛는 아이처럼 한 걸음 다가갔다. 순간 철썩! 하는 소리가 났다. 그가 내 뺨을 때린 것이다. 그의 반 토막밖에 되지 않는 나는 폭풍 앞의 가랑잎처럼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충격에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있으려니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뺨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렸다.
"일어나."
그가 머리 위에서 말했다. 화끈거리는 뺨을 감싼 채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다가왔다. 무서워서 뒷걸음질 쳤다.
맞은 게 분하고 억울한 것보다 그가 날 때렸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이리 와."
그의 말을 거부하고 몸을 돌려 뛰었다. 하지만 곧 억센 두 손에 잡혀 휙 돌려졌다. 뿌리치려고 버둥거렸지만 양 팔이 꽉 잡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이 살갗을 파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너무 아팠지만 난 울지도 않고 노려보지도 않았다. 말했다시피 나도 그처럼 참을성에는 일가견이 있으니까.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물흐물했다.
쌕쌕 할딱이며 서 있었다. 그의 호흡이 느껴졌다. 그의 가슴 쪽을 올려다보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는 것 같았다. 보이는 것처럼 그도 침착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한심하게도 분한 게 사라지고 가슴이 뛰었다.
"어젠 왜 없었지?"
"벼, 병원에........"
"병원?"
머리를 끄덕이자 그의 손이 올라왔다. 얼얼하게 달아오른 내 뺨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병원엔 왜?"
"아파서.."
"나 때문에?"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순순히, 호락호락하게 내 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고 비웃을 것 같았다.
"내가 무시하면 아파? 병원에 갈 정도로?"
"............"
"날 기다리려면 아프지도 말아야 한다. 알겠지?"
그때, 그가 젖은 내 눈에서 뭘 봤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그는 나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한 내 감정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내 꺼가 되고 싶어?"
지나치게 직설적인 그 말은 질문이 아닌 것 같았다. 날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얼어붙은 채 그를 보았다. 충격과 부끄러움과 불안, 떨림이 내 안에 뒤섞여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할까......"
그가 걸어가며 중얼거린 말이다.
그 뒤로 이따금씩 그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정원사를 도와 물을 뿌리고 있을 때, 뒤뜰에서 감자를 깎고 있을 때, 등굣길에 스쳐가는 차 안에서, 정원에서 테리를 쓰다듬고 있을 때.........그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몸 안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게 나오는 것 같았다. 그게 부끄러워서 감히 그의 시선을 마주보지도 못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완전히 시선을 빼앗겨 멍해져 버렸다. 구체적으로 내가 그에게 뭘 원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난 그에게 푹 빠져버린 것이다.
아버지가 회장님을 모시고 출장을 간 날, 깊은 밤에 그의 전화를 받았다.
"얘기 좀 할까?"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어둠 속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심으셨어. 50년이 다 됐지."
그가 어둠에 묻혀 있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할아버진 웃음소리가 좋은 분이셨어. 온 집안이 쩌렁쩌렁, 이 나무가 다 흔들리도록 웃곤 하셨지. 나보다 이 나무가 더 ㅁ낳이 들었을 거야. 그리고 더 오래 간직하기도 하겠지. 이 집에서 나갈 때 가져갈 거다. 이 나무만은, 이거 하나만은....."
나는 그가 할아버지의 음성을 닮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목소리만큼 웃음소리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소리 내 웃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울림 좋은 음성을 들으며 그가 올려다보고 있는 느티나무를 보았다. 두툼한 줄기를 따라 돌며 냄새를 맡았다. 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살아 숨 쉬는 냄새였다. 그의 체취와 나무의 향기가 조화를 이루며 호흡에 섞여 들어왔다.
"화가 나거나 풀리지 않는 일이 생겼을 때, 여기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어. 참 묘한 일이지?"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목소리만 들려왔다.
"넌 어디야? 속상하면 어디다 맘 풀어?"
나무 너머에서 그가 물어왔다. 모습은 보이질 않고 목소리만 들리니 나무가 묻는 것 같았다. 그가 나무인 것 같고 나무가 그인 것 같았다. 그래도 느낌은 하나였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단 하나의 존재. 심장이 저릴 정도로 그가 느껴졌다.
"없어?"
그가 나무를 돌아 내게로 왔다. 시선이 마주쳤다. 난 손을 들어 펄떡대는 심장에 올리고서 말했다.
"여기에......."
가늘어진 눈이 내 가슴 쪽을 보았다.
"거긴.......거긴 참 작아 보이는데? ..........보기보다 깊은 가 보구나."
깊지도 않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밀어 넣어 왔다. 분노, 울분, 억울함, 눈물, 고통, 슬픔, 외로움, 모두 다.....
손을 내리고 고개를 떨구자 그의 손이 뻗어왔다. 내 턱을 잡아 올려 눈을 보게 했다. 어둠보다 더 검고 신비한 그의 눈을 보았다.
"그래서 내 맘도 풀렸을까. 거기에 내 맘도 풀어버렸을까."
그의 목소리는 내 육신에 투명한 망을 씌워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그의 눈에 사로잡혀 영혼이 빨려들어 갔다.
"넌, 네 눈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 착각하게 만들지 마."
착각?
"뭘 원해?"
내가 원하는 것? 느낌은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린 게, 열일곱밖에 안 된 게.........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런 눈을 하고 있으니까 더 미치겠단 말이다."
밤하늘보다 더 짙어진 눈동자에 은색 빛이 번득거렸다.
"말해 봐. 나한테 뭘 원해?"
그 순간 가슴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지만 언어가 되지는 못했다. 그에게 뭘 원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부터가 기적같이 여겨졌다. 내게 신경 쓰고, 내게 말하고, 내 눈을 바라봐주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을 원해도 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단지 난......
"조, 좋아요. 당신이....."
청명한 하늘처럼,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청록빛 산 끝에 걸린 구름처럼, 차게 감싸는 새벽안개, 투명한 이슬, 꿈결 같은 무지개, 깊은 물속처럼 그가 좋았다. 보면 행복하고, 사라질까 두렵고, 가질 수 없는 거 뻔히 알지만 그래도 그가 좋았다.
"그냥 무작정 행복해져요."
그의 눈 속에 있던 은빛이 흔들리더니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열기가 느껴지는 그의 호흡 탓인지 눈이 어둠 속의 불꽃같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네...............대답을 생각한 순간 심장이 팔랑팔랑 날아가 버릴 듯 두근거렸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이 너무 거대했기 때문이다. 그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지만 도저히 내 안에 있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소리 없이, 형태 없이 하늘에서부터 몰래 덮쳐온 것만 같았다. 그 절대적인 감정의 완벽함이 날 완전히 지배해 버렸다.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였다.
"여기서 널 발가벗겨도 행복할까?"
내색하진 않았지만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여기서 발가벗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네 다리를 찢고 널 피 흘리게 할 건데, 그래도 좋을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지독한 표현에 두려움이 일었다. 그래도 움찍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슴이 뛰어서 놀라웠다. 그의 말로 인해서 육체적인 접촉에 대해서 뜨거운 호기심을 갖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네 눈은 예스라고 말하고 있어. 뭔지도 모르면서..."
"아, 알고 싶어요."
갑자기 그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숨소리도 들릴 만큼 가까이 있었는데 한 걸음에 너무나 멀어져 버렸다. 한 순간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뀐 것이다.
"착각이었나."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굴더니........."
찡그리며 머리를 저었다.
"정말 알고 싶어?"
"네."
"후회하면 용서 안 해."
"후회 안 해요."
대답하자ㅏ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뜨거운 눈길로 날 봤다.
그가 뭘 원하는지 느낄 수가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 성적인 전율이 흐르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난 그물에 걸린 물고기 같았다. 심장은 세차게 뛰었고, 뜨거운 피와 세포응 몸속에서 거세게 파닥거렸다.
"넌 어무 어려."
"내, 내가 많이 부족한 거 알아요. 하지만, 하지만......"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덜 자란 키를 갖고 부질없이 껑충껑충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슬픈 건,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린 걸 장애로 여길 만큼 난 순수하지 않아. 너한텐 불행이다."
혼란스러워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어."
난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다. 다가와 내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고 떠나고 싶어도......"
나는 눈을 크게 뜨고서 머리가 흩날릴 정도로 고개를 저었다. 보내지 말아요. 떠나지 않을 거예요.
"흔들리면 난 잔인해질 거다. 흔들리지 마."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사라졌다. 한동안 난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나질 못했다.
가을로 접어들 무렵, 그에게서 테니스를 배웠다. 그가 사준 셔츠와 짧은 치마를 입고서 그의 품에 안겼다. 그는 뒤에서 날 감싸고서 내 허리와 팔을 잡았다. 그처럼 바쁜 사람이 시간을 내서 테니스를 가르쳐주는 거였다. 난 열심히 배우려고 했지만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힘줄이 툭툭 불거져 있는 그의 팔이 짧은 셔츠와 치마 사이 내 허리에 닿아있기 때문이었다.
"집중해."
시키는 대로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내 심장은 맹수에게 쫓기는 고라니처럼 팔딱거렸다. 그는 내 허리를 잡고 팔을 쓰다듬고 어깨와 등을 어루만졌다. 어쩌면 단순한 접촉이었을지 모르지만 난 만져지고 있다고 느꼈다. 작은 스침에도 내 피부는 격렬한 애무를 받은 것처럼 달아오르며 경련했다.
"코치를 붙일까?"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곧 의미를 알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집중해. 내 상대를 할 수 있을 만큼 늘어야 돼."
그때부터 난 안간힘으로 배움에만 매달렸다. 어떻게든 그의 상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시간을 내지 못할 때에도 혼자서 열심히 연습했다. 누가 보면 대회라도 준비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 덕에 내 테니스 실력은 일취월장 늘어갔다.
가을이 무르익은 어느 날, 바쁜 그를 기다리며 혼자 연습하기를 1시간. 벽을 상대로 공을 치고 있는데 오가며 인사는 하고 지내는 코치가 말을 걸어왔다.
"많이 늘었네. 잠깐 봐드릴까요?"
주춤하고 망설였다. 코치는 경계 어린 내 반응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경계심이 무너진 난 머리를 끄덕였다. 내 실력이 어느 정도 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게임을 하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코치와 얘기를 주고받았다. 스트로크에 자세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데 그가 나타났다. 난 반가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는 무표정했다. 코치의 인사에 고개를 까닥였을 뿐이었다. 그는 나를 완전히 무시한 채 코치와 게임을 했다. 난 무안하고 당황한 채로 지켜보았다.
그와 게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는 끝까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실망한 채로 샤워를 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입구에 그가 서 있었다.
"따라와."
복도를 따라 걷다가 그가 멈춰 섰다. 어느새 창이 있고 불빛이 있는 휴게실로 들어와 있었다. 휴게실은 탁자와 의자가 있고 음료자판기가 일렬로 줄 서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때마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돌아 선 그 앞에서 난 꾸중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 보는 그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교무실로 불려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가온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마음을 꿰뚫는 날카로운 눈빛을 대하자 숨통이 꽉 죄어드는 것 같았다. 아마 그는 저 눈빛만으로 사람을 조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코치가 좋아?"
그가 말했을 때 난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10대의 변덕이라니."
차가운 목소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하지만 그가 그냥 가버리려는 걸 알았을 때 내 반사 신경이 움직였다. 걸어가는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때 난 자존심도 반항심도 없었다. 오로지 그를 원하며 좋아하는 마음뿐이었다.
"다, 다신 안 그럴게요."
"뭘?"
"정말이에요."
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하지만 그는 경멸 어린 냉랭한 시선으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매몰찬 눈빛에 질려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팔은 놓았지만 그의 앞에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용서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확히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것, 말이다. 어려서 깨닫지 못하는 것, 말이다.
"순수한 채로 있는 네가 싫다."
"제발, 제발 옆에만 있게 해주세요."
정말 그것뿐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내 눈에 그는 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고 아름다우며 강한 남자였다. 그를 보면 이 세상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난 그의 그늘에, 그의 품에 있고 싶었다. 그의 곁에서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인어공주가 그랬듯이..
"널 망치려드는 내가 싫어."
열망으로 타들어갈 것 같은 내 눈을, 그는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가 내 뺨을 만졌을 때 그가 날 버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난 네가 내 옆에만 있길 바라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손이 내 어깨로 내려왔다.
"아니, 넌 몰라. 그런데 지금 나한텐 그것도 장애가 안 돼. 네가 모른다는 게, 모르면서도 이렇게 무방비하게 있어서 더 못 참겠어. 언제 전생을 보자. 넌 아마 장희빈이나 양귀비의 환신일 거다. 제왕을 휘젓는 여자."
손가락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넌 내 신경을 너무 건드려. 어리면서 성숙하고....."
그의 손이 요동치는 맥박을 짚으며 더 아래로 내려와 몸이 떨렸다. 두려우면서도 뭔지 모르게 두근거리는 감정이 교차되었다.
"순진하면서 교태가 흐르고....."
그의 손이 가슴으로 내려왔다. 난 펄쩍 놀라 눈이 왕방울 만해졌지만 꼼짝도 않고 서있었다.
"그 강아지 같은 눈으로 무심하게 볼 때, 얼마나 색기가 흐르는지 아느냔 말야. 도가 지나쳐."
"저, 저기...."
"어떻게 눈이 그런 색일까. 뭘 보고 있는 걸까. 지금 날 보고 있는 게 맞는 건가. 분명히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데도 왜 멀리 있는 것 같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조급해져."
그는 내 눈을 보는 게 화가 나는 것 같았다. 고양이 같은 눈.........아이들이 고양이 같다고 자꾸 놀려서 한번은 고양이를 잡고 한참동안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더니 눈동자가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중엔 좀 무서웠다.
무서워서 그도 화를 내는 걸까. 그 화를 내 가슴에 풀려는 건지......잡힌 젖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여름 내내 네 가슴에 눈독을 들였어. 얼마나 탱탱하고 부드러울까. 젖꼭지는 어떤 색일까. 사춘기처럼 상상했지. 날 가만 놔두질 않았어."
그의 노골적인 말에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오픈 된 공간, 금방이라도 누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 불안하고 또 무서웠다.
"자, 잠깐만..........."
"왜?"
"여, 여기서는....."
내가 정말 이런 걸 원하는 걸까? 난 확신이 서지 않았고 두려웠다.
"누, 누가 오면......."
"싫어?"
"그, 그게 아니라......"
"내가 만지는 게 싫어?"
"모, 모르겠어요."
"몰라? 그럼, 알게 되면 말해."
그는 거침이 없었다. 난 그의 깊은 눈에 사로잡힌 채 숨만 쌕쌕 내쉬었다. 셔츠를 열고 그의 손이 들어왔어도 난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브래지어 위로 그의 손이 닿았다. 내 몸은 폭풍 앞에 불꽃처럼 위태롭게 곤두섰다. 자꾸만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숨이 가바 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무서웠다.
"아, 안 될 것 같은데.."
헐떡이며 그렇게 속삭였다. 내 몸은 자꾸만 뭘 더 바라고 있었다. 속에서 더, 더 닿고 싶어 했다. 더 느끼고 싶어 하고, 더 뜨거워지고, 더 날아오르고........그게 너무 강렬해서 무서웠다.
"너도 날 상상했을까? 이런 거 상상했어?"
그가 물으며 브래지어 속으로 내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나는 놀라 숨을 들이켰지만 짜릿한 전율이 스치는 걸 느꼈다.
"내가 여기 만지면..."
그의 손이 내려와 엉덩이를 만졌다.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단지 한 손이면 된다는 듯이, 한 손으로 내 엉덩이를, 아니 나를 자신의 뜻대로 주물렀다. 본인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날 무너뜨렸다. 그는 그게 가능한 남자였다.
"기분이 어떨까?"
손이 내 청바지를 열고 가랑이 깊숙이 들어왔다. 팬티 위로 뜨거운 손길을 느꼈을 때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난 그게 내 비명소리라는 것도 몰랐다. 선 채로 그의 손 하나에 온몸이 녹아들고 있었다. 난 수치심과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묘하게 달떴다. 더 뜨거웠고 더 황홀햇으며 더 타락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버렸다.
"멈출까?"
"아, 아니..."
올라온 손이 복부를 어루만지다 팬티 속으로 침입해 왔다. 손바닥으로 음모를 문지르고 손가락을 이용해 내 속살을 헤집었다.
"난 여기도 상상했어."
낮은 음성과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내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하앗.....!"
난 참지 못하고 그의 팔에 매달렸다. 기댄 채로 뜨거운 호흡으로 할딱거렸다.
"날 봐야지."
그의 요구에 머리를 들었다. 그의 팔에 관자놀이를 대고 턱을 들었다. 처음 맛보는 뜨거운 흥분과 수치감으로 내 눈은 젖어 있었다. 손가락이 들어와 있는 가랑이 사이에도 습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가 사악한 미소를 보였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군. 작고 예민하고....."
"제, 제발...."
"내 마스코트."
"아.............그, 그만........"
"이사님."
그때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목소리는 매우 가까이서 들렸다. 나는 움찔 놀라 굳어져버렸다. 커진 동공으로 그를 보며 몸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팬티 속으로 들어와 있는 그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난 흥분과 수치감에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몰랐다. 감히 뿌리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의 손과 내 얼굴을 감추는 것뿐이었다. 그때 그의 손가락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내 안을 휘저었다.
"하응......"
온몸에서 힘이 좍 빠지는 것 같았다. 난 그의 팔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적거렸다. 부끄럽고 무서웠다. 그런데 몸은 떨리고 열이 나며 크림처럼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내 머리 위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접니다."
그는 한 손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여전히 날 유린하며.......
나중에 알았지만 그 전화는 그의 아버지와 내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전하는 전화였다. 하지만 그땐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전화 받는 내내 무표정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내 안으로 계속 파고들어왔다. 그가 통화를 끝냈을 때 난 쾌감에 녹아 몽롱한 상태였다. 내 안에서 빠져나가는 그의 손길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손가락을 닦으며 내게서 물러났다.
"사고야. 교통사고."
그는 낮게 허공에 대고 말했다. 난 떨리는 손으로 지퍼를 올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숨이 턱까지 차있었다. 그 숨을 자제하려고 입을 꽉 다물었다.
이미 입구까지 걸어가 있던 그가 몸을 돌렸다.
"이리와."
비틀대는 걸음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앞에 멈춰서자 그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옆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