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20x6년 12월 23일. 미국. 뉴욕.
뉴욕 맨해튼 5번가 록펠러 센터의 크리스마스트리는 에단의 상상보다 훨씬 거대했다. 힘껏 고개를 젖혀야만 알록달록한 전구로 장식된 트리의 꼭대기가 보인다. 챙에 가려진 상단부를 보기 위해 에단은 손끝으로 쓰고 있던 볼캡을 약간 들어 올렸다. 뻣뻣하게 젖힌 목이 뻐근해질 무렵 곁에 서 있던 루크가 고개를 약간 수그려 귓가에 속삭였다.
“내 옆 옆에서 알아본 거 같아.”
“또 착각 아니야?”
착각은 루크의 몫이건만 창피함은 자신의 몫이었기에 에단은 신중했다. 루크는 오늘 저녁 식사를 했었던 손바닥만 한 스테이크가 나오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서버가 알아본 게 분명하다며 10분마다 한 번씩 다가오는 서버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코스에 주방장이 내어 준 서비스 디저트마저도 에단을 알아본 주방장이 특별히 준비해 준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에단이 보기에 그건 그냥 손바닥만 한 스테이크를 내어 주는 주제에 한 재산 챙기는 레스토랑이 응당 보여야 할 친절함과 서비스인 것 같았다.
진지하게 케이크 접시를 노려보던 루크가 치즈케이크 옆 초코소스로 데커레이션 된 부분이 포뮬러 원의 어떤 부품 같다는 의견을 제시했을 때 창피함은 절정에 이르렀다. 에단은 인생의 대부분을 포뮬러 원에 바쳤지만 그렇게 생긴 부품 따위는 본 기억이 없다.
이번에도 비슷하겠지. 곁에 가까이 붙어 선 훤칠한 금발의 미남에게 거리낌 없이 힐난의 눈길을 보인 에단이 다시 록펠러 센터의 크리스마스트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에단의 구경만큼이나 루크의 주장도 끈질겼다.
“이번에는 진짜 맞아.”
“뭐라고 했는데요.”
“저기 더블 챔피언이 있다고 했어. 더블 말이야. 여기에 무슨 챔피언이 한 둘쯤 더 있을 수는 있지만 더블 챔피언은 흔치 않을 거 아냐.”
“헛소리 들은 거 아니야?”
“이름도 똑바로 말하던데. 에단 한이라고.”
증거가 확실한 편이길래 에단은 루크가 약간 비켜 준 어깨 너머 대각선 두 명의 남자를 보았다. 흥분해서 빠른 말을 지껄이고 있던 남자 둘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에단은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재빨리 눈을 돌렸다. 웃음 짓는 루크의 팔 떨림이 맞붙은 어깨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때. 이번에는 맞죠?”
“오늘 처음 맞았네.”
“어떻게 할래요.”
“가죠. 다 봤어요.”
이 인파 사이에서 한두 명이라도 더 알아보는 이가 나온다면 귀찮아질 것이 뻔했다. 에단은 미련 없이 양해를 구하며 두 명의 시선을 피해 반대편으로 빠져나갔다. 다행히 따라오는 이들에게도 장애물이 많았는지 뒤에서 별다른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록펠러 센터 앞을 가득 메운 인파를 빠져나가는 데에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명품이 즐비한 5번가의 초입으로 나온 뒤 에단은 볼캡을 더욱 깊게 눌러썼다. 그랑프리 중이거나 다른 곳이었다면 어디서든 관대하게 맞이해 줄 여력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오프 시즌 중에서도 단 일주일 뿐인 진정한 휴가 중이다.
그랑프리가 종료되고 다음 그랑프리가 열리기까지는 2개월가량의 시간이 있지만 그것이 모조리 휴식에 쓰이는 경우는 없다. 그렇게 빡빡하게 흘러간 2년이었다.
마치 예술 작품을 전시해 놓은 것 같은 백화점의 쇼윈도에 잠깐 시선을 돌리자, 그 앞에 있던 금발의 여성 한 명이 이쪽을 주시하다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에단의 눈길을 따라가던 루크도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저 여자도 알아본 거 같지 않아?”
“내가 보기에는 당신을 본 거 같은데.”
마침 쇼윈도의 크리스마스 장식 조명에 불이 들어왔고 루크의 옆얼굴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금발을 대충 손질해 넘기고 무릎까지 떨어지는 롱코트를 입은 뒤 폭넓은 체크 머플러로 목을 감싼 외양은 사업가라기보다 방금 전 광고에 등장하는 모델에 가깝게 보였다.
휘황찬란한 5번가를 두 사람은 계속 걸었다. 뒤이어 나타난 티파니의 쇼룸을 지켜보던 에단이 돌연 질문했다.
“그거 알아요?”
“뭘.”
“프러포즈 링은 3개월 치의 월급을 모은 가격이 적당하다는 말.”
“잘 알죠.”
루크는 옐로다이아몬드의 커다란 알이 세팅된 목걸이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 말 참 좋은 거 같아.”
“어떤 점에서.”
“우리도 그렇게 프로모션을 해야 했어. 첫 차는 3년 치 연봉을 모은 금액이 가장 완벽합니다. 이런 식으로. 어때요.”
“그러네.”
에단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티파니의 쇼윈도를 스쳐 지나갔다. 루크는 미련이 남는지 한 번 더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그와 나란히 섰다. 코너를 돌면서도 루크는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한 얼굴이 되어 혼잣말했다.
“3년은 조금 지나치고 1년 연봉이 적당한가. 어떻게 생각해요, 에단?”
어떻게 생각하냐면, 낭만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업가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단은.
“3년보다는 낫네.”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
그들이 뉴욕에서 묵는 숙소는 센트럴 파크 웨스트 바로 앞에 자리한 1900년대 초반에 지어진 호화 아파트였다. 숙소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루크의 몇 번째일지 모르는 집이기도 했다.
내부를 현대식으로 인테리어 했지만 아직 고전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 아파트였다. 복도가 갤러리처럼 쓸데없이 넓어 폭이 십몇 미터는 되어 보인다든가. 천장은 샹들리에를 달기에도 충분할 만큼 높디높은 점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에단은 그 모든 곳을 지나칠 때마다 공간 낭비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파트에 들어와 머플러를 벗자마자 걸려 온 전화를 받아 든 루크는 서재 문을 발로 밀고는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독일어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 것이 들린다.
한두 개의 단어로 추론해 보니 내일 그가 ‘잠시 얼굴만 비치고 올 일’이라고 칭했던 발표회에 대한 통화 같았다. 서재의 문틈으로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이는 루크에게 마주 웃어 보인 에단은 창가의 돌난간에 팔꿈치를 괸 채 센트럴 파크와 그 앞 도로의 분주함을 바라보았다.
레이스 카 콕핏의 끓는 열기와는 거리가 먼 호사였지만 그의 머리는 고민으로 가득했다. 아까 티파니 매장 앞에서 꺼낸 말은 괜히 꺼낸 것이 아니었다. 프러포즈를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건 좀 이르지. 3개월의 봉급… 광고에 나온 그 노란 다이아몬드. 구매할 수 있는 걸까? 루크와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홀로 되뇌던 에단은 갑갑함에 주먹을 불끈 쥐고 난간을 내리쳤다. 그래. 애초에 6년이라고 했어야 했다. 아니면 하다못해 4년이라도. 사고가 터졌던 그날. 2년 안에 그랑프리 챔피언이 되어 달라는 루크의 말에 감동해 넘어가는 게 아니었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계약을 해야 했는데!
지난 2년은 믿기지 않는 순간들뿐이었다. 작년. 페라리의 엔조를 단 2점 차로 제치고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이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들은 에단의 포뮬러 원 챔피언 타이틀이 어느 정도 운이 따라 준 결과라고 여겼었다.
그리고 2위인 메르세데스의 헤센을 따돌리고 2년 연속 챔피언에 오른 올해. 더블 챔피언은 그 누구도 운으로 치부할 수 있는 업적이 아니다. 에단은 안락한 기분에 감싸인 채 잠시간 기쁨을 음미하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SNS의 글을 관성적으로 훑어보던 그의 눈에 굵은 글씨로 강조 표시를 한 기사가 보였다. 눌러 보니 별건 아니었다. 추측이 대부분이다.
‘에단의 드라이빙 실력은 날이 갈수록 새로운 스타일로 변모하고 있다. 내년의 포뮬러 원 챔피언을 방어하기에 충분한 실력이다.’
아니다. 포뮬러 원 챔피언은 방어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재계약 실패로…… 불길한 생각을 애써 떨쳐 내며 그의 손가락이 다음 기사를 클릭했다.
‘……에단 한과 린드베르그 레이싱과의 재계약은 거의 확실시된 분위기이다. 우리는 그의 계약 여부가 궁금한 게 아니다. 궁금한 것은 그의 계약 조건이다. 사천만 달러가량의 연봉을 에단 한이 요구한 것으로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고 보너스와 옵션, 그리고 린드베르그사의 앰배서더 위촉 등의 조건이 추가로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에단은 무슨 변명을 하고 싶은 마음 따위도 들지 않았다. 자신은 결코 연봉을 올릴 생각이 없었다. 보너스도, 옵션도. 지금도 이미 충분하다. 린드베르그사의 앰배서더라니. 그런 건 대체 어디다 쓰는 것인가.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저 재계약을 해 주기만 한다면.
그사이 루크는 통화가 끝났는지 에단의 맞은편 의자에 다가와 앉았다. 코트를 벗어 셔츠만 걸친 차림으로 팔걸이에 팔을 올리자 너른 어깨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미안해요. 급한 전화라길래.”
“무슨 일인데요.”
“내일 발표에서 시연할 기술이 어떻다는데. 조금 일찍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미안.”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루크는 더없이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에단이 은퇴하고 처음 맞는 연말인데 일로 채울 수 없지. 금방 끝내고 돌아올게요.”
“……괜찮아요. 정말. 그렇게까지 뭐 그럴 건…….”
“크리스마스 지나면 놀이동산은 어때요. 한번 가 보고 싶다며.”
환하게 펴 반짝거리는 연인의 얼굴이 더없이 기쁘게 다가와야 할 텐데. 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에단은 이상하게 마음이 우울해졌다. 저놈은 나를 은퇴시켜 고작 놀이공원의 범퍼카에나 태울 예정임이 분명했다.
은퇴하면 세워 준다던 서킷도 그랬다. 얼마 전 설계랍시고 보여 줬는데, 거기 있던 차의 예시는 분명 고카트가 아니라 범퍼카의 디자인이었다.
그래. 약속을 했었지. 그때는 2년이 멀게만 느껴졌거든. 그 안에 진짜 월드 챔피언을 할 줄도 몰랐고……. 그거라도 안 했으면 미련이 있다고 어떻게든 우겨 보겠다마는.
하지만 포뮬러 원 챔피언은 두 번을 하면 타이틀을 뒷세대에게 양보해야 하는 그런 신사의 스포츠가 아니었다. 챔피언 중에는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원하면 일곱 번까지 하고 물러난 챔피언도 있단 말이다! 물론 그는 포뮬러 원의 영혼이자 전설이기는 하다.
다른 팀으로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었다. 설마 정말 은퇴시킬까 싶어 페라리의 계약 제안도 거절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에단은 답답함에 제 가슴을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루크에게 확실한 신뢰를 안겨 주고 한 번 더 린드베르그 레이싱과 재계약을 진행할 수 있을까. 그렇게 골몰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커플링이었는데 뭔가 그 정도로는 가망이 없어 보인다. 아까의 피도 눈물도 없는 반응을 보면 그럴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없으니 해법은 정면 돌파뿐이다. 에단은 비장한 어조로 물었다.
“루크.”
“응.”
“혹시 갖고 싶은 거 있어요?”
“갖고 싶은 거? 지난번에 그랑프리 우승컵 하나만 달라고 했더니 화냈잖아.”
“장난치지, 말고.”
순간 울컥 솟은 감정을 억누른 채 에단이 애써 상냥하게 다시 물었다.
“음. 정말 그거밖에 없는데 절대 안 된다면서요.”
“그건 소중히 여겨서 달라고 한 게 아니라 복도에 대충 전시해 둔다고 해서 그랬던 거죠.”
포뮬러 원 그랑프리 우승컵은 그것보다는 더 소중하게 대해져야 마땅한 물건이다. 루크는 아직 그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갖고 싶은 것이라는 말에는 역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다리를 꼰 채 대충 생각하는 티가 역력한 유럽 최고의 부호를 눈앞에 둔 에단의 심정이 울적함을 더해 갔다.
“하고 싶은 거라도. 내게 시키고 싶은 거나. 뭐든.”
“시키고 싶은 거요?”
“응.”
“흐음…….”
하며 다시 반대로 다리를 꼬는 포즈를 보니 궁리하는 바가 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짐작해도 피해 갈 방법이 없다.
눈동자를 굴리며 나른한 미소를 짓는 루크를 보며 에단도 마주 웃었다.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시즌 중에 자제하는 만큼 휴가 중의 관계는 과격하거나 기상천외한 것들이 가끔 있었다. 묶어 보거나 눈을 가려 보는 정도는 이미 마스터한 지 오래다. 레이스 카에서 해 보자는 말은 아직 못 들어줬다… 거기서 대체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 가늠도 안 된다.
“그럼, 우리 장난감 하나 써 볼래요?”
“……장난감만 쓰면 돼?”
대충 의도를 눈치채고 반문하자 루크는 더할 나위 없이 활짝 웃었다. 루크는 가끔 별짓을 다 해 보고 싶어 했지만 다행히 이상 성욕의 범주에 들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장난감 정도까지는 괜찮으리라. 에단은 그렇게 생각했다.
***
헐벗은 아랫배를 지그시 바라만 보던 루크의 손이 움직였다. 귀한 물건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모여든 허벅지 아래에 양손을 받쳐 넣고 양옆으로 밀어 내려 했다.
하지만 상대의 다리에 힘이 들어가 여의치 않았다. 힘을 주어 오므라든 발가락 끝을 보던 루크는 대신 무릎 뒤를 잡아 가슴에 닿도록 밀어 올렸다. 등이 둥글게 굽으며 밑이 완전히 드러났다. 긴장으로 올라붙은 엉덩이가 치덕치덕하게 젖은 젤로 번들거린다.
그 사이를 관찰하던 루크가 더없이 안타깝다는 어투로 말했다.
“힘주면 더 불편하지 않아요?”
“그게… 내 마음대로 되면…… 흣.”
“하긴.”
고개를 끄덕인 그의 고개가 옆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그럼 이제 뺄까요?”
끄덕이는 에단의 반응은 지금까지 중 가장 빨랐다. 루크는 그 반응에 더없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발간 기를 띠던 에단은 안이 불편한지 눈매를 잔뜩 찌푸렸다. 일그러진 미간은 미미한 경멸과 당황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 감정을 핥듯이 음미하던 시선은 긴 목선과 주물러져 도톰하게 부푼 가슴을 내려와 얕게 펄떡이는 배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새 좁게 다물린 허벅지 사이를 다시 힘주어 벌려 내었다. 루크는 그 안을 살피곤 천진한 웃음을 띠었다. 반쯤 심이 서 기립한 성기가 풋내를 풍기는 액을 흘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곧게 기립한 물건의 끄트머리가 투명한 액으로 번질거리는 것을 빤히 보다가 매끈한 회음의 아래를 보았다. 조밀하게 다물린 구멍 위로 삐죽이 꼬리를 내민 검은 고리형 손잡이의 그의 손가락이 툭 건드려졌다. 앙다문 에단의 입술이 희게 질려 갔다.
허벅지 안쪽으로 기어들어 오려는 주인의 손가락을 붙잡은 루크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혼자 뱉어 봐요.”
“뭐?”
“배 속에 힘을 줘서 스스로 뱉어 보라고.”
그 말에 경악이 인 눈동자가 깜빡이는 눈꺼풀 너머로 흔들리는 것을 본 루크가 크게 웃었다. 짙은 속눈썹의 색깔을 낱낱이 바라보면서도 다시 파고드는 에단의 왼손마저 붙들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팔뚝을 허벅지 바깥으로 치워 내고는 뱃가죽을 간질일 듯 가볍게 손바닥을 얹었다. 지그시 눌러지는 압박감에 다디단 헛숨이 뱉어졌다.
“누르지, 마……!”
“뱉어 내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놔, 차라리… 내가 할 테니까. 저리 치워.”
“그래. 직접 하겠다면 어쩔 수 없죠.”
에스코트를 거절당한 양 한숨을 내쉬는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해 보인다. 그 점이 에단의 심사를 가장 긁었다.
그래 봤자 어쩌겠는가. 이미 하겠다고 덤빈 것을. 그의 짙은 금발 위 거대한 샹들리에의 번쩍임에 애써 시선을 고정한 에단의 눈꺼풀이 잔떨림으로 깜빡였다.
힘껏 눈을 감고, 힘을 주는 아랫배의 울렁거림을 보는 루크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꾸물거리듯 움찔거리는 입구는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속살을 빼꼼 내보인다.
그렇게 몇 번의 힘을 주고서야 반질반질한 첫 칸을 뱉어 냈다. 하나. 둘. 두 개까지 뱉어 내고 허벅지 안쪽을 바들거리는 것을 안타까이 보던 루크의 손이 안으로 뻗어졌다. 다급히 제 다리 사이를 보던 에단은 당겨 주기는커녕 손잡이의 끄트머리를 툭 건드려 움직이는 손에 사납게 외쳤다.
“건드리지, 마! 이, 읏…….”
“알았어요. 힘들어 보이길래 도와주려고 했지.”
힘들어 보이면 당겨 주기라도 할 것이지, 건드리기만 해 놓고 루크는 퍽 억울해 보였다. 이 빌어먹을 짓거리를 빨리 끝내지 않으면 속이 터져 죽을 것 같다는 예감에 에단은 다시 입술을 앙다물며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윗배부터 쑥 꺼진 굴곡은 장골로 이어지는 부분까지 판판하게 이어지다가 아랫배 부분에서 미미한 윤곽으로 솟아 있었다.
아직 네 알이 차지한 부피만큼 부풀어 있는 그곳을 보던 루크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솜털을 간질이듯 놀리는 손가락에 에단은 더욱 힘을 주며 턱을 떨었다. 붉게 충혈된 구멍이 하나의 구체를 뱉어 내고 연이어 하나를 더 뱉어 냈다. 크게 벌어졌다가 옴짝거리며 좁혀 드는 그 모양새를 살피던 루크는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입술 깨물지 말라니까요.”
그 말에 복수하듯 에단은 붉은 아랫입술을 더 세게 윗니에 짓이겼다. 바짝 핏대가 선 목선을 안타까이 바라보던 루크는 하나를 더 움찔대며 뱉어 낸 아래 사정에 손을 뻗었다. 반질반질하게 젖은 구체를 연이어 이어 둔 검은 장난감은 이제 하나의 구체만을 물고 있었다.
기진한 에단은 붉어진 상체를 젖힌 채 침대에 완전히 누워 늘어졌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보던 루크가 결국 혀를 차며 손을 뻗었다. 손잡이를 잡아 단번에 뽑아내자 크게 벌어졌던 구멍이 벌름거리며 안을 내보였다.
“흐, 윽…….”
“괜찮아요?”
안부를 물으며 나긋하게 손을 맞잡았지만 루크의 시선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충혈된 것인지 원래의 색인지 모르겠지만 붉게 반질거리는 내벽은 드러나자마자 좁게 다물렸다. 한껏 벌려 놓아도 소용이 없다. 쯧 하고 혀를 찬 루크는 검지에 걸고 있는 구체를 들어 에단의 입가에 문질렀다. 찌푸려진 미간으로 보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길래.
“잠깐 물고 있어요.”
“뭐?”
“내가 입술 깨물지 말라고 했잖아요.”
“개자식아.”
욕설을 뱉으려 벌린 것이라 해도 입술이 벌어진 것은 맞았다. 말하는 입술 사이로 둥근 고무 재질을 힘주어 밀어 넣자 에단은 파들거리는 입술을 벌려 조였다. 새까만 싸구려 장난감을 입에 문 꼴이 여느 도색 잡지의 자극적인 한 컷보다도 강렬한 시각적 자극이 된다.
그 꼴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루크는 이미 부풀 대로 부푼 성기를 쥐어 감았다. 크게 껄떡이다가 제 무게를 못 이겨 한 번씩 처지는 그것은 이미 요도구에 기포가 일도록 젖어 기어들어 갈 구멍을 찾는 기색이 여실했다.
이미 질린 듯한 기색을 보이는 상대의 양 허벅지를 크게 쥐어 짓누른 루크가 다리를 벌렸다. 반질반질하게 속살을 드러낸 엉덩이 사이를 두툼한 귀두가 들쑤시며 이 순간을 즐긴다. 제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아는지 에단의 가슴이 큰 숨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그 숨이 조금이나마 잔잔해질 때까지 음낭을 뭉개고 젖은 대가리를 문지르던 검붉은 성기가 풀린 구멍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에단은 긴 신음을 내며 몸을 움츠렸다. 매 순간 냄새가 배도록 맛보면서도 늘 첫 삽입마다 이런 반응을 보냈다.
습관적으로 입을 맞추려던 루크는 제가 물려 둔 것을 보고는 아차 싶어 그 위에 입술을 눌렀다. 젤에 젖어 반질거리는 구체를 문 에단의 시선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루크는 크게 웃으며 허리를 더욱 짓눌렀다.
쭉 뻗은 어깨가 길게 젖혀졌다. 마치 제 가슴과 어깨 선을 자랑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루크는 울렁이는 내벽을 즐기다가 한 번 성기를 빼내어 구멍에 걸치듯 두고는 깔짝였다. 푹푹 얕게 쑤시는 흐름에 흔들리던 에단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제 몸을 가지고 노는 것임을 알아차린 순간, 허리를 당겨 직각으로 하고는 단번에 꿰뚫었다. 성기는 구체가 파고들었던 안까지 벌어진 뒤, 쑤셔 박아 열어젖혀진 장의 끄트머리를 단번에 파고들었다.
“읏…! 흐……!”
입이 비었다면 길게 울었을 입술이 오늘은 입에 물린 장난감을 오물거리며 타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턱가에 흘러내리는 말간 타액을 보며 루크는 함부로 허리를 놀려 안을 헤집었다. 쩍쩍 달라붙는 안이 녹을 듯 뜨거웠다. 다 녹여 먹겠군. 제 좆이 녹아나는 쾌감을 느끼면서도 루크는 크게 미간을 찌푸리며 속삭였다.
“빨아요.”
“…….”
“여기 아래가 내 걸 빠는 것처럼…….”
위를 점령한 이의 입에서도 지끈거리는 조임을 견디지 못하고 낮은 탄성이 흘렸다.
“입에 물려 준 것도 빨아 줘요.”
그와 함께 루크의 허리가 긴 궤적을 그려 퍽퍽 치받았다. 에단은 할딱이는 신음을 내다가 이내 미간을 좁힌 채 노려보았다. 하지만 느리게 목울대가 움직였다.
읍. 흡, 쯔읍. 하며 혀를 깔짝이는 소리가 났다. 타액은 턱선을 타고 줄줄 흘렀다. 성감에 푹 담가져 흐물거리는 눈매의 끄트머리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그 자리에 쪽 입술을 맞춘 루크가 제 아래의 미청년의 몸 위로 달라붙듯 완전히 올라탔다. 허리를 푹푹 지르는 순간마다 아래 깔린 몸이 퍼떡이며 허리를 내렸다가 이내 제 안을 내어 주듯 다리를 활짝 벌려 아랫도리를 문질러 왔다. 아래에서 꿈질거리는 허리의 단단한 놀림에 루크가 픽 웃었다.
“좆 물려 주니까 좋아요?”
“흐…….”
그 말과 함께 푹 파묻힌 거대한 성기가 안을 깔짝이듯 느리게 파헤치자 에단의 눈매가 이지러졌다. 고개는 흔들면서 안을 꽉 조여 무는 압박감에 루크는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하여튼, 버릇을 잘못 들여 놨지. 좋아도 좋다고 하는 법이 없었다. 더욱 거칠게 허리를 놀렸다.
“그래. 더. 더. 물어 봐요. 응?”
“흐응, 읏…, 흡, 흐.”
속살 하나까지 물고 늘어지도록 뻑뻑한 안을 연이어 꿰뚫자 헐떡이던 목이 쭉 뒤로 넘어가더니 안이 술렁였다. 가끔은 달래 주고 부드럽게 해 주는 것보다 제멋대로 쥐고 흔드는 것을 더욱 좋아한다는 것을 이젠 안다.
늘씬한 배가 접혀 허리가 둥글게 말리도록 아래에 바투 붙인 루크의 육중한 몸이 무게를 실어 내리찧듯 안을 쑤셔 댔다. 거대한 성기가 꿈틀거리고 파고들어 제가 차지할 용적을 몇 번이고 밀어 내어 확보했다. 에단은 제 몸을 벌리는 타인의 살덩이에 짐승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으, 흐…, 흑…….”
“밀지 마…. 오늘 원하는 대로 해 준다며.”
“흐윽.”
말 대신 노려보는 눈이 매서웠다. 그래 봤자 허리를 놀려 퍽 하고 치받자마자 눈동자가 다시 흐려진다. 할딱이는 숨을 뱉으면서도 싸구려 구체를 입술로 조여 무는 동그란 모양을 보고 루크가 환히 웃었다. 흰 침대의 한가운데 제 밑에서 다리를 활짝 벌리고 헐떡이는 에단이 제 좆으로 느끼고 있다니. 가히 장관이었다.
시트를 쥐어뜯는 손아귀마저 양손으로 쥐어 누르며 무게를 싣는 지지대로 삼은 이가 허리를 더욱 거세게 움직였다. 퍽퍽 치받는 소리 사이로 검붉은 성기가 발씬 달아오른 엉덩이 사이를 연이어 꿰뚫었다. 음모를 보드라운 살에 문지르듯 치받으며 허리를 깊게 굴려 움직이기도 했다. 그때마다 조여드는 발끝이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며 움직임을 크게 했다. 에단의 신음이 더욱 높아졌다.
“으, 윽, 흐……. 흑.”
“흣.”
깊숙이 쑥 들어온 좆이 안에서 경련하듯 사정하자 물을 줄줄 흘리던 에단의 성기에서도 더욱 거세게 말간 물이 흘렀다. 털듯이 몇 번 안을 짓치던 성기는 허연 길을 트며 쩍쩍 소리를 새로이 울리고 있었다.
제 안을 부풀려 가는 점액질의 느낌에 신경이 쏠린 사이 헐거워진 입에서 구체가 떨어졌다. 제 턱을 타고 떨어진 것에 당황해 에단이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턱을 잡아챈 손아귀가 억세게 눈을 마주쳤다. 새파란 루크의 눈동자는 번들거리고 있었다.
“물고 있으라고, 했잖아요.”
“흐, 흑……. 씨, 작작 좀… 미친… 자식아.”
“세게 해 주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어?”
“하…….”
“시즌 중에는 못 이래서 어떡해.”
“필요 없어, 흐…….”
“알아서 넣고 있는 건 아니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멱살을 잡을 듯 뻗는 에단의 손을 붙잡으며 쪽 소리가 나도록 마디마다 입을 맞추었다.
“아닌 거 알아.”
“그런데 왜 지껄여, 미친놈아.”
“그러게.”
아래를 가득 메웠던 성기는 심지를 유지한 채 천천히 몸을 물러 나왔다. 제 안에 들러붙은 듯 자리 잡은 게 쑥 빠지는 느낌에 에단이 몸을 옹송그려 부르르 떨던 순간이었다. 무릎을 꿇고 상체를 일으킨 루크가 에단의 어깨를 당겨 일으켜 앉혔다. 푹 꺼지려는 허리에 힘을 주어 바로 앉은 에단의 입가에 흉측하게 번들거리는 성기가 끄떡이며 문질러졌다.
“입 벌려 줘요.”
“하……. 차라리 저거 내놔.”
코끝까지 붉어진 채로 에단은 차라리 시트에 떨어진 장난감을 노려보았다. 에단이 제 뒷구멍에 처박았던 장난감을 입에 물겠다고 애원할 줄이야.
옆에 떨어져 있던 장난감은 에단의 바람과 달리 성기를 잔뜩 물고 있던 아랫구멍으로 향했다. 바로 눕혀 허연 정액이 빠끔거리며 나오려던 입구에 다시 구체를 처박자 흐윽 하는 소리와 함께 음낭이 추어 올라가도록 바들바들 아랫도리를 떨어 댔다.
그 다리를 접어 놓고 손을 뻗은 루크는 부드러운 머리칼을 아프지 않게 쥐어 에단의 얼굴을 제 아래에 가지고 왔다. 눈물에 젖은 광대를 핏대 선 기둥이 문질렀다. 희게 묻어나는 점액질이 꾹 다물린 눈꺼풀 위를 훑었다. 허옇게 엉겨 붙은 젖은 속눈썹을 보며 루크가 다시 한번 에단의 머리채를 그러쥐었다. 크게 손바닥을 벌려 뒤통수를 받치듯 당기고는.
“눈 떠 줘요.”
“하……. 흐…….”
“입 벌리고.”
흐리게 뜨인 눈은 새로 젖은 눈물로 울먹이고 있었다. 파들거리는 검은 눈동자에 아직 심지가 살아 있는 것이 더욱 아랫배를 지지듯 자극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알 리 없었다.
야트막하게 트인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로 사타구니를 뭉개듯 비비자 다시 술렁이는 눈꺼풀을 보았다. 루크는 혀를 찼다. 모멸로 벌벌 떠는 것치고 착실하게 흥분에 젖은 표정이지 않은가.
거친 음모에 비벼지던 입술은 제 할 일을 찾은 듯 더욱 벌려졌다. 턱관절이 벌어지고, 팽팽하게 부푼 음낭을 쪽쪽 빠는 소리가 울렸다. 혀끝으로 간질이는 감각을 즐기며 루크는 콧대 위에 얹듯이 문지르던 성기를 결국 입 안에 밀어 넣었다.
크게 벌어진 입 안으로 꾸물거리며 기어들어 간 성기가 늘씬한 목을 부풀리며 제 자리를 찾았다. 왕복하는 좆을 핥으며 에단의 손끝과 발끝이 경련하듯 오므라들었다. 두 눈을 꾹 감은 미남의 입 안이 들러붙듯 오므라든다. 아래 기둥을 혀로 살살 문지르는 감각을 느끼며 루크의 허리가 다시 거세게 움직였다.
새벽이 되자 장난감을 물지 않고도 부푼 아랫배가 파들거리며 솟았다가 움푹 꺼졌다. 힘을 주라는 말에 한껏 벌어진 다리 사이로 길게 정액이 흘러나왔다. 희고 끈적이는 것은 허벅지 사이에 엉킨 것도 모자라 구멍 밖으로 줄줄 흘러 침대 위에 가득 고여 들 정도로 양이 많았다. 제 배 속에 모인 타인의 정액을 뱉어 내며, 에단은 혀를 길게 빼물었다. 머리 옆 왼편에 앉아 죽지 않은 성기를 귓바퀴에 문지르던 루크가 다시 말했다.
“많이 졸려요?”
한껏 나긋한 어투였지만 길게 내민 혀와 윗입술 사이로 기둥이 얹혔다. 쓱쓱 문지르듯 한참을 마찰하는 동안 에단은 가물가물한 시야를 느끼며 턱을 크게 벌렸다. 에단의 온몸에 좆을 처박고 문질러 대던 루크는 혀 위에서 한참 미끄러지게 하다 가끔 귀두를 입 안으로 들이밀었다. 힘겨운 혀 놀림으로 쪽쪽 빨아 대는 모습을 기특하게 보던 그는 왼 볼이 툭 불거지도록 함부로 입 안에 쑤셔 넣다가 사정했다. 그르륵 소리와 함께 목구멍 너머로 밀어젖힌 채 사정하는 좆이 크게 꿀렁였다.
사정 소리와 목울대를 움직이는 꿀꺽임이 몇 번을 이어지고 나서야 경도가 살짝 가신 것이 입술이 걸쳐졌다. 마지막 액을 문지르듯 닦아 낸 그가 턱을 쥐어 에단의 입을 크게 벌렸다. 벌건 입 안 군데군데 엉킨 제 것을 본 루크가 환히 웃었다.
“보기 좋네요.”
“넌…, 그런 거 말고 다른 상담을 받아야 해.”
“어떤 걸.”
“눈알이 뭔가 잘못되었다든가, 취향 문제라든가.”
“내 취향이 왜. 완벽하잖아.”
“사람이 이 꼴인데 보기 좋다는 말이 나와?”
축축한 얼굴을 문지른 에단이 손바닥을 보며 탄식했지만 상대는 어림없었다.
“예쁘기만 한데 왜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에단은 차라리 천장에 가로지른 창살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뉴욕의 야경이 새어 들어오는 줄 알았건만 푸르스름한 자국을 보니 어느새 날이 밝은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뻑뻑하던 눈꺼풀이 한계로 치달았다. 저 빌어먹을 새끼가 잠든 제 몸에 뭔 짓을 할지 알 수 없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루크는 눈꺼풀을 간질이는 빛을 느끼며 눈을 떴다. 완연히 밝아진 방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창밖 도로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잇따라 울리는 경적 소리가 적막한 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는 느긋하게 목덜미를 주무르며 몸을 늘어뜨렸다. 불면이 심할 때에는 적막조차 거슬려 잠을 못 이루었는데 용케 뉴욕 한복판의 소음을 들으며 단잠이 들었구나 싶었다. 그것은 에단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그는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제 옆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잠이 든 에단의 허리께에 머문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그 과정에서 움푹 팬 등줄기를 간질이듯 손가락으로 더듬어 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엎드려 움찔거리는 목덜미를 보고는 손가락을 멈췄다. 대신 일어나던 중 허리를 숙여 그 자리에 입술을 대신 대었다 떼어 냈다.
발소리조차 죽인 채 움직이던 루크는 타이를 대충 목에 두른 뒤에야 침대 아래 던져져 있던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오늘의 행사 코디네이션을 맡았던 사라에게서 협박조의 문자가 가득했다.
일어나신 거 맞죠?
준비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오늘은 진짜 안 돼요.
저 진심이에요.
문 두드릴 거라구요!
휴대폰 액정을 향하던 푸른 시선이 그 뒤에 뒤엉킨 채 떨어진 시트나 젤 같은 것들로 향했다. 몸은 깨끗이 뒤처리를 했지만 시트는 되는 대로 구겨 돌돌 말아 던져두기만 했다.
그는 구둣발로 조심스레 그것을 한 덩이로 모아 들고는 옆방에 휙 던져 버렸다. 어제 사용되었던 검은색의 구체에도 이제는 흥미를 잃었다. 끙끙거리는 표정은 한 번쯤 볼만한 것이었지만 한 번 보기에 좋았다. 고작 저런 것을 처넣고 있기에는 늘 시간이 부족했다.
답장하는 루크의 손가락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사라가 정말 달려 올라올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일어났어.
지금 내려오실 거죠?
응.
뉴욕의 끔찍한 교통 사정을 생각했을 때 아슬아슬할 시간이기는 했다. 루크는 침대의 가장자리를 돌아 나가려다가 인기척에 뒤척이는 에단 때문에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끔뻑이던 눈꺼풀이 뜨이고 아직 초점이 잡히지 않은 검은 눈동자가 배회한다. 여전히 잠기운이 가득한 얼굴을 보던 루크가 작은 목소리로 조곤거렸다.
“에단. 거절할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물어볼게요.”
그 말을 들은 에단은 뻑뻑한 눈을 억지로 치켜떴다.
“또 뭘 하려고.”
“이상한 거 아니야. 우리 기술 발표회 같이 가겠냐고 물어보려고.”
“……꺼져.”
밤새 혹사당했던 목구멍에서 나온 목소리는 몹쓸 전염병에라도 걸린 양 거칠고 탁했다. 잔뜩 찌푸린 시선으로 자신을 보다가 몸을 돌려 버리는 에단을 본 루크가 숨죽여 웃었다. 헐벗은 어깨에 다시 손을 올린 그는 허리를 숙여 속삭였다.
“꺼지기는 할 건데 금방 올 거야.”
“마음대로 해.”
“자고 있어요.”
가증스럽게 다정한 목소리가 귓바퀴에 들러붙을 것처럼 달착지근하다. 에단은 팔을 들어 귀를 거세게 문지르려다가 뻐근한 어깨에 움직임을 포기했다. 대체 어제 했던 짓거리 중 어떤 자세 때문에 어깨에 무리가 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엎드려서 입에 처박았던 순간인가….
그 생각이 떠오른 찰나에 에단은 다시 눈을 떴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인지 방은 조금 더 밝아져 있었다. 맞은편의 시계를 보니 이미 정오를 넘은 상태였다.
시간을 보고도 에단은 눈만 끔뻑였다. 몸은 마치 원심력 기계에 넣어져 사정없는 속도로 돌려진 것 같았고 팔다리는 근육이 없어진 것처럼 기력이 없다. 레이스 카와 2시간에 가까운 사투를 해도 이렇게 진력이 빠지지는 않았다. 성적인 행위만으로 이런 탈력감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간밤에 닦아 냈는지 다행히 몸은 깨끗했다. 아랫배와 가슴께를 대충 쓸어 본 뒤 에단은 베개를 하나 더 쌓아 몸을 기대어 누우려고 했다. 순간 치미는 신음을 참아 내며 발바닥으로 시트를 단단히 밀어 냈다. 어딘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이를 악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개자식. 이번 계약서는 4년 써 달라고 해야지.”
그 말을 겨우 끝낸 에단은 다시 이불 속에 파묻혀 머리를 묻었다.
다시 가물거리는 정신을 깨우기 위해 손을 뻗어 휴대폰을 찾았다. 저 멀리 침대 끄트머리에 나동그라져 있어 그것을 집는 데 다시 하반신을 움직여야 했던 것이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무게가 허리에 바로 실리지 않도록 옆으로 누운 에단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간밤에 들어온 연락과 문자들을 확인하고 몇 가지 사항을 답장하여 보낸 뒤 습관적으로 SNS를 검색했다. 혹시 세상에 무슨 일이 새로이 생겼을까 싶어 검색하는 피드는 대부분이 포뮬러 원 레이싱과 관련된 내용이다. 흐린 눈으로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던 에단의 시선이 또렷해졌다.
‘루크 린드베르그, 포뮬러 원에서 두 번째로 가장 간절한 소원은 헤센의 은퇴.’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지 모를 기사다. 눌러 보자 짤막한 내용이었다. 올해 마지막 그랑프리를 찾았던 루크를 길 가다가 붙잡고 했던 인터뷰인 것 같은데 올해 소원을 이룬 거 아니냐는 질문에 시큰둥하게(짧은 인터뷰임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루크의 표정을 이렇게 묘사해 두었다.) 에단의 그랑프리 우승은 자신의 세 번째 소원이라 답변했단다. 그래서 두 번째를 물어보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루크는 메르세데스 헤센의 은퇴가 자신의 간절한 두 번째 소원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소리를 당당하게 하고 다니는 루크의 인터뷰를 보니… 안 그래도 퍽퍽한 목구멍이 더욱 불편해지는 것만 같았다.
대체 첫 번째 소원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따옴표로 표기되어 있었다.
“글쎄요. 첫 번째 소원은 더한 것이라 내 두 번째 소원이 그렇게까지 잘못으로 느껴지지는 않네요. 첫 번째? 그건 아직 비밀입니다. 아마 상상하는 건 아닐 겁니다. 하하. 언젠가 말할 수도 있는데 오늘은 아니에요. 뭐라고 해도 안 말할 겁니다.”
인터뷰의 끝에서 기자는 루크 린드베르그가 그만큼 올해 2위를 차지한 메르세데스를 의식하고 있는 게 아니겠냐는 해석을 남겼지만, 글쎄. 그건 아닌 거 같고. 일단 이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가장 간절한 첫 번째 소원. 알 것 같기도 했다. 헤센이 아닌 바로 자신의 은퇴겠지. 루크가 숨기지 않고 늘 자신의 앞에서 말하는 그 소원 말이다.
그래도 그걸 그랑프리 우승 날 말하지 않고 비밀로 할 정도의 눈치는 생긴 모양이다. 참으로 대단한 발전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웃음기가 어린 루크의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에단이 보기에 그 역시 이제 포뮬러 원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좋아하면서 자꾸 말만 저렇게 하곤 한다.
침대에 누워 그저 손가락질만으로 세상의 온갖 가십을 보는 기분은 꽤나 괜찮았다. 에단은 손가락을 계속해 움직였다. 방금 전 새 소식을 올린 린드베르그의 계정에서는 오늘 있을 기술 발표회를 라이브로 보여 주고 있었다.
음 소거 되어 미리 보기 동영상으로 움직이는 작은 인영을 바라보던 에단은 무심결에 동영상을 클릭했다. 원형의 넓은 공연장의 한가운데, 한 손을 슈트 주머니에 가볍게 쑤셔 넣은 루크는 뒤의 넓은 디스플레이로 시연되는 기계를 손짓하며 유려한 목소리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 중이었다.
“대용량의 배터리는 차량 바닥에 위치할 예정입니다. 차량의 내부 공간을 더욱 확보할 수 있죠. 이러한 공정은 레이저 가공과 접착, 접합 기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인공 지능 로봇이 진행합니다. 3세대 공정을 넘어선 4세대 공정. 맞춤의 대량화의 공정이라고 보는 게 가장 정확할 겁니다. 공장은 개방될 것이고. 생산 프로세스에서 소비자의 니즈를 직접 반영하는. 3D 프린팅 매뉴팩처가 진행될 것이라는 뜻이죠.”
능숙하게 프레젠테이션을 이끌어 나가는 저자가 바로 몇 시간 전까지 다른 남자의 허벅지를 핥고 어리광을 따위를 부렸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에단은 그 간극에 까닭 모를 배신감을 느끼며 영상을 노려보았다. 그의 손짓에 디스플레이는 다음 화면으로 넘어갔다.
“모든 전기 차는 항상 디지털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본사의 커넥티드 시스템으로 관리됩니다. 우리의 새로운 도전. 포뮬러 원에서 얻은 공기 저항의 최소화는 에너지 효율을 높여 차체를 평평하게 하는 디자인에 영감을 주었고.”
그다음 손짓으로 넘어간 영상은 캘리포니아의 광활한 해변을 비추었다. 소형 우주선과 비슷한 유려한 차체를 보자마자 에단은 눈가를 움찔했다. 언젠가 시험 주행 중인 차에 탑승해 공도를 달려 달라길래 어디에 쓸 일이 있나 싶었더니 여기에 쓰인 모양이었다.
클로즈업되어 잔뜩 폼을 잡은 자신의 옆모습이 스쳐 지나가자 조금 수치스러웠다. 어차피 갈 상태도 아니었지만 오늘 저 자리에 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에단은 루크의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영상의 포커스가 옮겨 가는 순간까지 움츠러든 어깨를 펴지 못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진행된 대도시 자율 주행은 마지막인 5단계 필드 테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완전 자율 주행을 위한 레이더, 라이더, 광학 기술 등을 이용하는 3차원 인식 센서 역시 포뮬러 원의 0.00001초마저 포착해 내는 정확성으로 완성에 근접해 가는 중이죠. 우리의 새로운 도전은 더욱 나은 결과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들어 줘서 모두 고마워요.”
그와 함께 꺼지는 스포트라이트와 밝아지는 천장의 조명이 프레젠테이션의 마지막을 알린다. 묵직한 박수 소리가 강당을 울리는 소리가 길게 이어진다. 에단은 그 박수 소리가 잦아지도록 오랫동안 영상을 보고 있었다. 어느새 화면은 종료되었다.
그의 비서가 발을 동동 구르며 쫓아다녔던 것에 비하면 훌륭한 프레젠테이션으로 보였다. 거기에 휩쓸려 함께 걱정했던 에단은 마음 놓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보았던 영상이 눈꺼풀에 뻐근함을 더했다.
루크는 사실 방심한 채로 힘차게 현관을 열었었다. 그러다가 고요한 내부의 분위기를 눈치채자마자 조심스럽게 경첩의 소리조차 나지 않도록 문을 닫고 숨죽여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일어나 시원찮은 표정으로 스트레칭이나 혹은 무언가를 하고 있을 줄 알았던 에단은 높게 쌓은 베개에 파묻혀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깨우는 게 나을까. 들었던 생각은 그가 눈살을 찌푸리자마자 반사적으로 숨을 죽인 뒤 재고하게 되었다. 근사한 저녁 식사보다는 어쩌면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한 해 동안 쉼 없이 레이스를 치렀던 그랑프리 챔피언의 휴가다. 그래, 이런 휴가가 더 필요할 거다.
그렇다면 내일의 볼 자신의 업무를 오늘로 당기는 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일 것 같았다. 루크는 단축 번호를 누르며 카펫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 서재로 들어갔다. 다행히 사라는 바로 그의 전화를 받았다.
- 무슨 일이세요? 저한테 절대 전화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너무 불길한데요.
“내일 볼 내년 리스크 보고 문 앞에 가져다 둬. 오늘 보고 피드백 보내 둘게.”
- 그거 내일 본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오늘 필라델피아 가려고 했는데 내일 가려고.”
- 들었어요. 그런데 거긴 왜 가는 거예요? 볼 것도 없는데.
“필라델피아치즈케이크 먹으러 가. 에단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래.”
- 어머.
“진짜 귀엽지 않아? 그런데 너무 귀여워하진 마. 무뚝뚝한 동양인 남자를 귀여워해서 뭐에 쓰겠어. 남편이나 실컷 귀여워해.”
- 저기, 보스. 자꾸 그러실 거면 저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제가 부탁드리지 않았나요?
사라의 진저리 치는 반응에 숨죽여 웃던 루크는 문틈 너머로 보이는 새까만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바로 전화를 끊을 줄 알았던 사라는 갑자기 질문을 했다.
- 그런데 계약서는 언제 말씀하실 거예요. 레이싱 쪽에서 당연히 내년에 에단이 탈 거로 생각하고 진행하고 있기는 한데 너무 늦으니까 정말 하는 거 맞냐고 자꾸 물어봐요.
“으음.”
듣지 못하게 문을 꼭꼭 닫을까 싶었지만 슬슬 눈치채도록 단서를 하나씩 흘려 줘야 할 것 같았다. 루크는 문을 열어 둔 그대로 대답했다.
“에단이 아니면 우리 레이싱 카를 누가 타겠어. 쓸데없는 걸 묻네.”
- 그럼 지금 보내요?’
“내일 저녁에 보내. 가면서 말하려고.”
- 그런데 왜 이렇게 늦어요? 혹시 에단 이제 은퇴하고 싶대요?
“아니. 내가 진짜 은퇴시킬 줄 알고 고민하는 거 구경 중이야.”
- 세상에. 나빴네요, 정말로.
“애초에 자기가 2년 안에 챔피언 하겠다고 했었어. 그리고 나 별로 괴롭히지는 않았어. 곧 말할 거야.”
세계 정상급 스포츠 선수를 한낮이 되도록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어서 목소리를 낮추고 있는 주제에, 루크는 괴롭히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태연하게 지껄였다.
계약서를 본 에단은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갈 때 알려 주는 것보다는 돌아올 때 알려 주는 편이 더 좋을 거 같았다. 설마 내가 정말 은퇴시킬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제 하자는 대로 다 해 주던 걸 보면 정말 그렇게 믿는 것 같기도 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에단이 매일 새로운 반응을 보여 주고 있는걸. 이러다 정말 나한테 반지라도 사 줄 거 같아.”
- 네네. 그건 부디 받은 다음에 자랑해 주세요.
“다음 주에 보여 줄게. 기다려.”
당당한 선언을 남긴 루크는 통화를 종료했다. 다음 주? 그때까지 갈 것도 없다. 크리스마스로 선물로 반드시 받아 내고야 만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루크는 콧노래를 불렀다.
창밖에서 질퍽한 눈이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다. 침대가에 앉은 루크는 와락 껴안아 온 팔에 이끌려 기꺼이 몸을 맡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