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20x4 상하이 그랑프리 - 상하이 인터내셔널 서킷.
트랙 길이 5.451km, 레이스 랩 56랩, 레이스 거리 305.256km, 16개의 코너, 랩 레코드 1:34.742
요 며칠간 턱 밑에 잠겨 찰랑거리던 무력감의 수위가 단숨에 높아진다. 천장 바로 밑까지 찰랑거리는 허상을 노려보던 루크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몸이 움직인 것은 그로부터 1시간 뒤였다.
묵직한 발을 내려 딛고 창가로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의욕은 가라앉는다. 그는 맥없이 기대 창밖의 분주한 차량의 행렬과 인영의 교차를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팔을 들어 턱 밑을 매만지던 루크의 시선이 부연 중국의 하늘에 멈췄다. 그나마 얼마 전 무기력의 근원을 마주한 뒤 약간이나마 해소의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 긍정적인 점이었다.
당장 그 머릿속에서 자신을 지우라는 말을 들었던 주제에 루크는 자신과 에단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용기, 혹은 자신감이라고 하기보다는 과거의 경험에 근거한 상황 판단이었다. 그는 애초에 자신이 마침표를 찍지 않으면 관계가 마무리되었던 적이 없었다. 모든 경우 우선권은 자신이 쥐고 있었다. 관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계약에서도 줄곧 그래 왔기에 삶 전체가 그러했다 표현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뭐랄까… 일단은 에단의 분노를 이해하고 자리를 피했고 연락을 기다렸다. 다음 날 단 한 가지도 보고하지 않는 에단의 태도를 보면서도 루크는 지리멸렬한 와중에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루쯤 화가 안 풀렸을 수도 있지. 늘 레이스에 골몰하던 에단의 모습을 상기한 그는 휴대폰을 내려 두고 에단의 화가 풀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다음 날도.
그다음 주가 되었을 때 루크는 결국 먼저 말을 꺼내 보고자 골몰했지만 도무지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또 하루가 지나고.
무릎 인근을 머물던 무력감이 단숨에 허리 위까지 치솟았고 일정들은 취소되기 시작했다. 굳이 비서진에게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은 눈치를 챘는지 알아서 일정을 대체하고 의사 결정을 보류하기 시작했다.
물론 화가 났을 것이며 분노의 당위성도 이해했다. 하지만 당신을 위해서잖아. 에단. 나는 진심이었어.
진정한 이별의 실마리가 보이자 무력감은 턱 밑을 찰랑거렸고, 루크는 그제야 비로소 이해했다. 이것이 실연의 고통, 혹은 그 언저리에 자리한 무언가라는 것을.
그리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실감이 들이닥쳤다.
오늘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슈트와 구두가 침실 밖 응접실 소파 곁에 가지런히 마련되어 있었다. 셔츠에 팔을 끼워 넣어 잠그며 루크는 시선을 방구석의 카펫의 가장자리에 두었다.
생각은 천천히 이어졌다. 감성적인 생각은 이제 지긋지긋할 지경이었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다.
애초에 자신은 에단을 가진 적이 없었다. 가진 적도 없었으니 상실감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저 좀… 눈길을 끌었고 드라이빙을 할 때면 눈을 못 떼게 하는 점이 있었다.
에단은 약간 고지식했고 언제나 헬멧을 뒤집어쓰고 있던 얼굴은 작은 점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입매와 눈가, 고집이 들어찬 턱의 선이 볼만했고 슈트로 가려져 있는 몸은 탄력 있고 손가락 끄트머리 하나까지 희고 곧다. 그 무시무시한 속도의 레이스 카에 늘 감싸여 있던 덕분인지.
그러니까 애초에 자신의 것은 아니었고, 호기심이 동했고, 여기까지 인정한다. 그래서 함께했다. 날숨을 뱉을 때마다 얕은 가슴골 사이의 오르내림이나 힘을 주었을 때 팽팽하게 납작해지는 아랫배, 길고 매끈한 안쪽 허벅지 근육이 허리를 감아 옥죄어 올 때의 강한 힘이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엎드려 날연하게 드러누워 있는 허리를 매만지면 척추 기립근의 모양이 자연스레 도드라지도록 둔부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도.
결코 그를 가진 적은 없지만. 가만히 그 순간 고개를 뒤틀어 입을 맞추는 찰나를. 체온을 덮어 아래에 온전히 가두어 두는 그 느낌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루크는 몇 번이고 커프스 링크를 끼우기 위해 헛손질을 하다가 짜증스레 그것을 집어 던졌다.
아직은 헤어지고 싶지 않다. 그리고 되도록 그가 온전히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모습으로 함께하기를 바랐던 것뿐이었다.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을까.
진심이었기에 어떻게든 이야기가 통할 줄만 알았다. 분노할 것은 물론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최악으로 치달을 줄은 몰랐단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진심이니까. 귀결되는 마지막 생각이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루크는 커프스 링크를 주우려 다가갔다가 무릎을 굽힌 채로 킥킥 웃었다.
너무나도 우스운 일이다. 내장이 꼬이는 것만 같다. 이마를 덮었다가 눈가를 쥐고, 입매를 가렸던 손이 천천히 커프스 링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순간, 입가에는 웃음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의상과 함께 준비된 전신 거울을 루크가 지그시 쏘아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이를 들고 헐겁게 목 주변에 둘러매었다.
나의 이런 진심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매듭을 성기게 짓고 있으려니 호텔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크가 대꾸 없이 매듭을 다시 짓는 동안 문이 열렸다. 현관을 지나 응접실로 들어온 크리스는 멀쩡하게 눈을 뜨고 서서 타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루크를 보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한숨을 마음껏 내쉬었을 뿐이다.
요즘 비서진들은 루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휴대폰에 메시지를 남기는 경우는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경우 루크의 의견을 구하려 했음을 증거로 남기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크리스는 지루하도록 천천히 타이를 매는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결국 직접적으로 물었다.
“요즘 레이싱 팀 이야기 듣기 싫어하는 거 아는데 오늘은 정말 결정을 해야 해. 올해 마지막 그랑프리잖아. 에단 재계약 어떻게 할 거야?”
그래. 그것도 있었다. 당연히 해치워야 할 일이었지만 도저히 해결하고 싶지 않았던 일. 루크는 미간을 좁히며 잠시간 대답이 없었다. 이런 일이 빈번했기에 크리스는 재촉 없이 그 옆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간 룸 안에는 옷감이 스치는 소리만이 반복되었다.
마침내 타이의 매듭은 완벽한 대칭을 이루었다. 손을 떼어 내며 루크가 대답했다.
“계약서 보내.”
“조건은?”
“그때 말한 대로 하고.”
그 말을 뱉는 루크의 표정이 지나치게 개운치 않아 혹시라도 무슨 번복이 있을까 곁에서 잠자코 기다렸던 크리스가 시간을 확인했다.
망나니 같은 린드베르그가의 차남이야 시간을 물처럼 쓴다지만 그 아래에서 오만 잡무를 처리하는 자신은 이미 이 한마디를 묻기 위해 쓴 10분이 뼈아프다. 크리스는 다시 묻지 않고 룸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에서 미련을 떨쳐 내기 위해 루크는 머리를 대충 쓸어 올려 마무리했다.
오후 1시. 루크는 홀로 내려가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다섯 개의 붉은 등이 점멸하고, 올해의 마지막 그랑프리를 위해 레이스 카가 스타트할 시간이 다가온다. 그 시간이 아주 확실하게 머릿속에 박혀 있었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마지막이라고 해도 올해의 마지막일 뿐이다. 앞으로 에단은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레이스 카를 타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루크는 호텔을 나섰다.
호텔의 벨보이가 문을 열어 주었고 그는 롤스로이스의 뒷좌석에 혼자 앉았다.
창밖의 정경은 이국적이었다. 동서양의 조화와 신식과 구식이 대중없이 어우러진 건축물이 블록을 지날 때마다 다채로운 색감으로 변화해 간다. 청색의 유리로 외관을 덮은 건물의 청나라 전통 문양이 새겨진 출입문을 바라보던 루크는 차창에 이마를 기대었다. 영국에서 F1을 처음 언급했던 그날의 칙칙하고 고루한 풍경보다 산만하고 찬란하다.
차라리 그때가 나았을까. 하지만 그날보다 지금 이 순간 루크는 훨씬 살아 있는 기분을 느낀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뱃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무력감은 숨이 막히지만. 멍한 머리는 새로운 실마리를 잡는 순간마다 명료해진다. 이것 또한 새로이 살아 있는 기분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것 역시 근거 없는 자신감일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돌이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 정말로 포뮬러 원의 시트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어렵지는 않은 일이다. 이미 다른 포뮬러 원 팀들은 모두 내년의 드라이버를 발표했고 오직 린드베르그 레이싱만이 내년의 드라이버 라인업을 확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테이블의 모서리를 부러뜨릴 듯 움켜쥐었던 손아귀를 오래도록 상기했으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안전과 편안함. 그리고 부까지. 모든 것을 쥐여 주겠다고 하는 데에도 어째서 에단은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일까.
깊은 침묵에 잠긴 채 과거를 관조적으로 바라보았다. 더듬고, 다시 더듬어 돌아본 길은 애초에 하나였고 명료하기까지 하다.
왜일까가 아니다. 에단은 원래부터 그랬다. 그리고… 그 무엇에도 개의치 않고 앞을 바라보는 모습에 이끌렸던 것이 바로 자신이었던 것을.
차창 너머로 마치 유럽의 건축물을 본따 만든 듯한 양식의 성당이 있었다. 높은 곳에 임한 십자가가 차 안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루크는 어둠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검지를 내려 성호를 그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것뿐인 일이 생길 줄이야. 지난한 삶에서 가장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다.
***
“지구의 한 바퀴, 오대륙 육 대양 스무 번의 그랑프리를 거쳐 드디어 지금 이곳에 왔습니다. 상하이 그랑프리. 올해 마지막 그랑프리 일정입니다!”
“그랑프리의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관심을 끄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내년 린드베르그 레이싱에 에단 한의 잔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흘러나오는 소식에 따르면 옵션을 모두 포함했을 때 연봉이 4배는 상승한 다년 계약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시즌 후반부에 잠시 주춤했지만 에단의 올해 퍼포먼스는 재계약을 진행하기에 충분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죠.”
“늦은 감도 있죠. 어쨌든 이렇게 린드베르그 레이싱의 시트가 모두 결정되었습니다. 작년에 2년 계약을 했던 리암과 올해 새로운 계약을 맺은 에단. 두 사람이 내년에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내년 포뮬러 원 그랑프리의 모든 시트가 결정된 순간입니다.”
레이스 카에 올라타기 직전, 조지가 헐레벌떡 달려와 건넨 헤드셋을 쓰자 흘러나온 중계방송이었다. 어쩐지. 갑자기 몇 분 전부터 지나가는 인간들마다 죄다 축하한다는 말부터 하고 지나가서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던 중이었다.
오늘까지도 무슨 말이 없어 내심 포기하고 있었던 재계약이다. 에단은 기쁨도, 분노도 아닌 기묘한 표정이 되어 헤드셋을 다시 조지에게 건넸다. 그 표정을 안도로 해석한 조지가 활짝 웃었다.
“이제 걱정할 거 없으니까 원 없이 달리고 와.”
“걱정이 아니라 잠깐만.”
“왜?”
“왜 계약이 확정이라고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 모르겠는데.”
“응?”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하는 조지에게서 헬멧을 넘겨받던 에단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내가 계약서에 사인을 했어?”
“……어어?”
“아직 사인을 안 했는데 왜 확정된 걸로 보도되고 있냐는 거야.”
“그건… 그러니까…….”
“네가 대신했어?”
“아니. 그럴 리가!”
화들짝 놀라 높아지는 목소리에 양옆을 지나다니던 팀원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개러지 안을 드나드는 기자들의 시선마저 모이자 지레 겁을 먹은 조지가 더욱 바짝 다가서며 속삭였다.
“그, 그럼. 에단. 설마 사인 안 할 거야?”
사정없이 떨리는 조지의 눈동자가 수많은 말을 함축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남아 있는 포뮬러 원 시트는 없다. 말이 통하든 통하지 않든, 심지어 전 연인 사이이든. 팀 오너와 어떤 끔찍한 관계로 얽혀 있더라도 단 하나 남은 포뮬러 원의 자리를 거절하는 드라이버가 있을 리 없다. 그게 당연하기에 언론도 마음 편히 지껄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혹은 누군가가 확정적으로 말하라고 했거나.
방염 장갑에 감싸인 손아귀에 힘을 주며 헬멧을 눌러쓴 에단은 좁아진 시야 안에 갇혀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 순간 저 제안을 기어코 거절해서 자신이 화를 낼 때마다 타격을 입는 루크의 표정을 보고 싶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 따위는 집어치워야 마땅하다.
그래도 한결 안심이 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더욱 복잡하던 생각은 갑자기 조지를 밀치며 바쁘게 다가온 딘 덕분에 끊겼다. 급한 전달 사항이 있나 싶었건만 딘은 무뚝뚝한 얼굴로 양팔을 벌려 에단을 꽉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그는 이마를 헬멧에 거의 부딪치기라도 할 기세로 눈을 마주치며 똑똑히 말했다.
“오늘은 절대 안 돼.”
“알았어.”
“제발 부탁이야. 너 때문에 그랑프리마다 내 수명이 깎이고 있는 거 알아?”
“잘 알지. 올해 고생 많았어.”
“아니, 아니야. 아직 그런 말 하지 마. 에단. 오늘 그랑프리가 멀쩡하게 끝나고 나면 그 인사 받아 줄 거야.”
딘은 마지막까지 경고를 더하며 헤드셋을 똑바로 쓰더니 피트 월로 달려갔다. 개러지 앞 피트 로드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딘의 뒷모습을 보며 에단은 그를 대신해 성호를 그었다. 오늘은 마지막 그랑프리이고 무모한 주행은 정말 마지막일 거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 더 견뎌 줘.
환호와 긴장이 개러지 내부를 터질 듯 메워 가고 있었다.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다. 스티어링 휠을 쥐고 레이스 카에 앉기 전, 에단은 여전히 앞바퀴 옆에 딱 달라붙어 서 있는 조지에게 눈짓했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비키라는 눈짓에도 가만히 있던 조지가 순간 허둥지둥 물러났다.
“왜 그래?”
“아니, 아니야. 난 널 믿어 에단. 응원할게.”
“그건 알아.”
늘 레퍼토리처럼 나오는 응원을 줄줄 늘어놓는 조지의 상박을 툭 쳤다. 한쪽 다리를 들어 레이스 카의 콕핏에 밀어 넣던 에단이 넌지시 물었다.
“우리 팀 오너 안 왔어?”
“아직 안 온 거 같아. 차가 밀렸나. 아니면 인터뷰에 잡혔거나.”
“그래.”
“찾아 볼까?”
조지의 질문에 에단은 헬멧을 썼음에도 확연히 보이도록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내가 그 자식을 찾기는 왜 찾아!?”
“그건.”
네가 물어봤으니까. 입을 꾹 다문 조지의 항변에 에단은 순간 높아진 목소리를 새삼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 일 없는 듯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기자가 들이민 카메라, 그리고 마지막 체크를 마친 수석 엔지니어의 머리통 사이로 시야가 뻥 뚫린 구석이 있었다. 개러지의 입구에 선 루크의 장신이 남들보다 불쑥 솟아 있다. 어느 노년의 신사를 향하고 있던 그의 눈동자와 찰나의 순간 마주쳤다.
큰 키에 주변을 압도하는 존재감은 검은 옷 때문인지 오늘따라 유독 뚜렷했다.
뚫어져라 바라보던 에단은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막상 손가락질을 하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기에 차라리 헬멧에 얼굴이 가리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루크는 연신 제 옆에서 지껄이고 있는 누군가에게 눈길을 할애하지 않았다. 대신 에단을 향해 미소 지었다. 싱긋 웃는 미소에 깊게 팬 보조개가 멀리에서도 보인다.
손가락을 치켜들었던 에단은 주먹을 꾹 쥐며 내렸다. 할 말도, 쏟아 낼 감정도 넘쳐 나지만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시선을 끊어 낸 그는 결국 레이스 카의 좁디좁은 콕핏에 앉아 다리를 뻗었다.
또 제멋대로 한 짓거리가 분명히 있겠지만 그래도 아마 잘해 보겠다고 한 거겠지. 뒤죽박죽 섞인 상념이 그나마 정돈되어 가라앉는다.
그랑프리가 끝난 뒤 추궁해 봐도 될 것 같았다. 마치 나 잘했지? 하는 양 의기양양하던 미소를 머릿속에 새기며 에단은 스티어링 휠을 손아귀의 힘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랑프리가 시작한 것도 아니건만 서킷 주변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엔진의 굉음이 커져 갔다. 요란한 배기음은 점점 심장의 울림과 비슷해진다. 그 소음을 따라 주차장을 가로질러 들어간 루크는 그랑프리가 임박해 한가해진 팀 빌딩의 부근과 이동식 트레일러를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따라온 사라는 경호원을 시켜 접근하는 기자를 막았다.
높이 쌓인 타이어의 사이를 지나쳐 개러지로 들어왔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둥근 렌즈를 눈알처럼 굴리며 그를 포착한다. 그는 가장 완벽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팀을 가로질렀다.
리암은 이미 출발했고 레이스 카에 당장이라도 올라탈 듯 바짝 붙어 선 에단을 바라보았다. 레이싱 엔지니어가 쓸데없이 에단을 끌어안은 뒤 놓았고 자신의 매니저와 시답잖은 장난을 치는 것도 보였다. 루크의 반듯하던 눈썹이 약간 비뚤어졌다. 레이스에 인생이며 모든 것을 갖다 바친 것처럼 군 것치고는 지나치게 한가해 보이는 태도였다.
그 와중에 내년 스폰서를 제안했다는 인도의 에너지사 대표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대뜸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찰나 지나가던 크리스가 루크의 귓가에 스치듯 속삭였다.
“이 주 전부터 미팅 요청 무시했었잖아. 스폰서 해 주겠다는 걸 이따위로 대하는 레이싱 팀이 어디 있어. 제발 듣기만 해라, 듣기만.”
그리고 뭐가 바쁜지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버린 크리스 때문에 타이밍을 놓친 루크는 결국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레이스 카의 프론트 윙 자리에 스폰서 스티커를 붙이길 원한다는 남자의 목소리는 다행히 개러지의 소음에 묻혀 똑똑히 들리지 않았다.
온 정신을 분산시키는 소란 속에서 루크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보았다. 사실 핑곗거리로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직 에단의 앞에 서기는 좀… 그랬다. 뭐가 좀 그렇냐면. 어쨌든 그렇다.
마음 편히 헛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상념에 잠겨 있던 순간이었다. 방심한 찰나 몸을 돌리던 에단의 헬멧이 이쪽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진짜인가 싶었지만 헬멧 안 형형하게 노려보는 눈동자는 분명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심한 표정 그대로 굳은 루크는 뚫어져라 바라보던 에단의 몸짓을 주시했다. 손가락을 들어 이쪽을 가리킨다.
무시당하지 않았다는 안도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에단의 새까만 시선이 거두어진다.
자신과 있는 것 자체를 거부하던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은 반응이었다. 루크는 그의 손가락질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드라이버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크루들의 말에 힘입어 레이스 카에 올라탄다.
루크는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 점퍼를 입은 이들의 맨 뒤에서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모니터를 함께 응시했다. 한 바퀴의 주행 뒤 다섯 개의 레드라이트가 동시에 점멸하는 그 순간의 정적이 거짓말처럼 고함이 몰아쳤다.
“마지막 그랑프리가 지금 시작합니다!”
“두 번째 그리드. 미켈라의 스타팅이 좋습니다. 선두 라인의 혼선! 그 뒤에 세 대가 엉킵니다. 린드베르그! 첫 번째 코너에서 코너의 안쪽을 파고듭니다!”
개러지 안의 긴장이 순식간에 치솟았다가 환호로 뒤바뀐다. 밀어붙여! 각기 나라의 말로 외치는 고함 속에서 루크는 홀로 숨을 헐떡였다. 난전은 연이어 이어졌다. 2번 코너. 3번 코너. 4번 코너…….
7랩에 접어들며 레이스 카들이 일렬로 순위를 잡아 달리기 시작했다. 피트월, 바로 너머의 서킷에는 굉음과 함께 지나가는 레이스 카의 모습이 흔적처럼 스쳐 보일 뿐이었다.
자신에게 인사해 보이는 커뮤니케이션 담당자와 테크니션 디렉터에게 짧은 미소를 남긴 것은 반사적인 제스처일 뿐이었다. 루크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함성과 굉음을 뚫고 최대치로 볼륨을 높인 스피커에서 해설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8번 코너의 연석을 주의해야 합니다.”
‘레오의 펑쳐로 타이어 잔해가 아직 서킷에 남아 있습니다. 에단! 아슬아슬한 간격이었습니다.’
“1cm 정도 될까요?”
“그래도 2cm는 되겠네요.”
커브의 연석 옆으로 그림 같은 곡률을 그리며 고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린드베르그의 레이스 카가 슬로 모션으로 잡힌다. 루크는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았다.
어젯밤, 다시 속도를 높일 수 없겠냐는 질문에 감독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가 설명을 늘어놓았다.
‘레이스 직전에는 규정상 손댈 수 없어요.’
그렇게 세팅을 다시 되돌리지 못한 레이스 카를 끌고 나간 에단은 곡예에 가까운 드라이빙을 선보이고 있었다. 고속 직선 주로에서 쫓아온 페라리의 레이스 카를 막아서고 코너를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에단의 드라이빙에 환호성이 터진다. 그만큼 다른 팀의 거친 욕설이 방송을 탄다.
“좋았어!”
“그래! 그거야!”
주먹을 쥐고, 박수를 치는 그들의 환희를 뒤에서 바라보던 루크는 외따로 떨어진 기분이 되었다. 팔짱을 끼고 기둥에 기대자 사라가 곁으로 다시 다가와 속삭였다.
“에단이 그랑프리를 시작하기 전에 저희 재계약 의사는 확실하게 듣고 탔대요.”
“뭐래.”
“굉장히 기뻐했다고 하는데요.”
“그 매니저가 한 말이야?”
“네.”
“그럼 안 믿을래.”
350km의 속력으로 달리는 저 레이스 카에서 내리고 난 뒤에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빠를 것이었다. 기뻐하기는. 손가락질했던 것을 보니 무언가 불만인 게 분명하다. 루크는 연신 줄어드는 랩 수를 지켜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다양한 순간이 있었다. 에단은 2위로 달리고 있었다. 그 뒤를 뒤쫓는 페라리의 기세가 심상찮았기에 모두의 환호와 탄식을 불러일으켰다.
“에단. 코너를 빠져나가는 속도가 너무 좋아요.”
“페라리가 직선 주로에서 따라잡아도 코너에서 다시 벌리기를 반복합니다.”
“0.8초까지 가까워졌던 격차가 1.3초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깥에서는 탄식과 환호가 오르내리고 개러지 내부는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루크는 누군가가 건네준 헤드셋을 쓴 채 모니터 아래 버튼들을 꾹꾹 눌렀다. 에단과 그의 레이스 엔지니어인 딘의 대화가 번갈아 들렸다.
- 코너 조심해.
- 뒤에 누구야?
- 미샤. 일단 오버스티어가 안 나게 조심해.
- 차이는?
- 1.128초 차이.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 괜찮아.
- 안 괜찮아!
그들의 라디오는 또 다른 전쟁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코너를 벗어나는 에단의 레이스 카 후미가 방송에 잡힌다. 모니터를 노려보던 루크는 자신의 옆을 지나친 크루가 한 말을 똑똑히 들었다.
“오늘도 원 스톱으로 갈 거 같대.”
“괜찮은 거야?”
“글쎄.”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이는 제스처를 지켜본 심정이 참담했다. 너희가 그걸 똑바로 판단해서 드라이버를 들어오게 해야 할 거 아니야. 안 오겠다고 하면 잡아끌어서라도!
그 답답한 마음을 대변하듯 헤드셋 너머 레이스 엔지니어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 에단. 10분 후 2섹터에 비가 내릴 거야. 이런 주행으로는 절대 안 돼.’
- 알아. 그 전까지 간격을 벌리려는 거야.
- 안 돼. 우리는 직선 구간에서 속도가 부족해.
- 그럼 피트인 전까지만.
그 순간 갑자기 흥분한 해설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페라리. 속도를 내기 시작합니다!”
코너의 마지막, 직선 구간에서 끝내 속력을 낸 페라리의 붉은색 레이스 카가 린드베르그의 레이스 카와 나란히 첫 번째 코너에 접어들고야 만다.
먼저 프론트 윙을 들이민 건 린드베르그의 레이스 카였다. 하지만 붉은 레이스 카는 악착같이 코너의 안쪽을 파고든다. 그에 밀려 바깥으로 크게 돌던 하얀 레이스 카의 부드러운 주행이 흔들린 것 역시 순간이었으리라.
단 한 호흡보다도 짧았다. 서킷 밖으로 튕겨 벽에 부딪친 레이스 카의 마지막은. 최첨단 기술을 집약시켰다는 리버리의 흩날리는 조각은 마치 흰 눈의 폭풍과 같았다.
그 순간은 찰나와 같이 영원처럼 흘렀다.
그 후의 과정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루크는 포뮬러 원 서킷에서 그런 고요를 처음 겪었다.
개러지의 바깥으로 달려 나간 모두는 오로지 한 방향을 바라본다. 그들의 뒤통수는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저 서킷의 너머, 방금 전 에단의 레이스 카가 멈춰 선 그곳을 향하고 있으리라.
“병원으로 바로 갈 거래!”
“레드 플래그 떴어.”
“재출발 준비해!”
그 혼돈으로부터 루크는 뒤돌아 나왔다.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길이 보이는 대로 달렸다. 트레일러 사이를 지나치고 빌딩을 지나 차가 세워진 주차장으로 향하는 순간, 꿉꿉하던 대기는 결국 비를 흩뿌린다.
음소거 되었던 세상은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온 사방은 숲의 나뭇잎이 비벼지듯, 벌레가 들끓어 드글거리듯 소란스러웠다. 플래시 소리와 앞을 다투는 소음, 그들을 막는 이들까지.
차를 찾은 것은 기적이었다.
루크는 운전석의 손잡이를 쥐고 숨을 헐떡였다. 슈트의 소매 끝에 동그랗게 고인 물방울이 떨어진다. 손이 움직이질 않는다. 마음이 이렇게 급한데……! 짧은 공황을 뒤흔들며 고음의 높은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보스!”
터진 스포트라이트에 잠시 눈앞이 흐려졌던 루크는 제 옆에 가깝게 다가온 사라가 발뒤꿈치를 들고 속삭이는 소리를 겨우 포착했다. 그녀는 전에 없이 엄격한 표정이었다.
“보스. 아직 괜찮아요.”
루크는 도대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뭐가 괜찮다는 걸까.
“지금 운전 못 하시는 거죠?”
사라가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차의 기다란 보닛 위로 가늘게 떨어지는 빗방울보다도 고요했다. 루크는 간신히 대답했다.
“……응.”
“지금 제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전해서 돌아서는 척하세요. 에단을 보러 달려가는 것보다 FIA 스튜어드들에게 항의하는 게 더 중요한 것처럼요.”
“…….”
“잠깐 안에 들어갔다 오시면 제가 운전할게요.”
“에단은?”
“잠깐만. 5분만 기다렸다 가면 돼요.”
네? 하며 반문하는 목소리가 다시 그를 부른다. 루크는 그런 그녀의 손아귀 아래 형편없이 굳어 버린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추적이는 빗물이 두피를 적시고 어깨를 두드린다. 그 무게마저 더해진 듯 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어금니가 부러질 듯 이를 가는 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핏대가 서도록 힘을 주어 보아도 손가락을 굽히는 게 고작이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는 결코 차에 올라탈 수 없다. 운전은커녕 핸들을 움켜잡는 것이라도 할 수 있을까?
찰칵. 그 순간 터진 플래시가 빗물로 얼룩진 얼굴의 옆면에서 터졌다. 손등을 부여잡은 사라의 손이 루크를 잡아끌었다. 차의 주변으로 둥그렇게 둘러싸기 시작하는 인파와 기자들이 결국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보스. 어서요.”
“……그래.”
손잡이를 간절히 부여잡은 손이 그제야 풀렸다. 그리고 그녀의 곁을 스쳐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오직 앞으로만. 다시 팔을 붙잡는 사라를 밀어 낸 루크는 방금 전 자신의 사진을 찍었던 어느 한 기자의 앞에 섰다. 기자의 팔을 붙잡았다.
“병원 어느 쪽이야?”
“병원이요?”
“드라이버들이 가는 병원.”
“나가서… 루쉔 공원 쪽으로…….”
뜻밖의 상황에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던 기자는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루크는 남자를 밀치고 기자들의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다시 한번 플래시가 터졌다. 등 뒤를 흘러 적신 빗물로 달라붙은 셔츠가 고스란히 찍혔을 것이다.
기자들은 주저하면서도 결국 카메라를 들었다. 그들의 틈바구니를 파고들며 사라가 소리쳤다.
“보스! 잠깐만요! 잠깐……!”
악다구니를 써 봤자 이 순간의 극적임을 높일 뿐이다. 영문을 모른 채 연신 셔터를 눌러 대던 기자 하나가 의아한 시선으로 돌아보자 사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리고…….
루크는 기자들을 헤쳐 무방비한 모습 그대로 빗속을 걸었다. 달리기 시작한다. 사라는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사진이 찍힌다면 이젠 수습조차 불가능하다. 사람들을 헤쳐 파고들며 루크의 팔을 붙잡으며 얼굴을 올려 보았다. 보스, 제발 좀! 하고 외치려던 말은 그녀의 입 안에 갇힌다.
밀치는 이에 가로막혀 갈라진 라이트가 루크의 얼굴에 빛과 그림자를 드리웠다. 턱이 단단하게 굳은 옆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그녀가 손쉽게 상상할 수 있는 슬픔이 아니었다. 분노, 걱정 그 감정마저도 도려내진 탁한 공허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고의 순간은 직감으로 감지한다. 그 찰나는 깨닫자마자 닥쳐오기 때문에 도무지 손쓸 도리가 없다. 단 몇 cm, 몇 mm의 차이로 통제를 잃은 레이스 카가 연석을 넘어 밀려나자마자 가까워지는 벽이 단숨에 닥쳐온다.
시각으로 인식된 정보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기 직전, 세상이 붕괴하는 듯한 굉음이 울리고 에단은 레이스나 자신의 안위보다 먼저 생각했다.
하필 오늘. 루크가 와 있는데.
그 뒤의 기억은 토막 난 감각으로 이어졌다. 고개를 뒤로 젖힌 순간의 고통이나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린 순간 들이닥친 빛 따위로.
차단된 소음이 한 번에 들려온 때도 있었다. 새까맣던 눈꺼풀 사이로 빛이 들이닥치자 에단은 일단 양 손가락 끝을 움직였다.
옆구리 옆에 늘어져 있는 손가락의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다음. 발을 움직여 보려던 그는 떨어져 나간 듯한 왼 다리의 감각에 홀로 침음했다. 다리가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인지 보고 싶었지만 고개를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대신 이 광경을 찍고 있을 카메라를 생각해 에단은 어떻게든 오른팔을 한번 들어 올렸다. 죽지는 않았다는 신호를 어떻게든 남겨 놓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후 형편없이 흔들리는 구급차를 탄 순간부터는 모든 의식을 놓았다.
차가 멈추고, 매캐한 소독약의 냄새가 번져 나가는 하얀 병동에 갇혀 평생 들을 중국어는 다 들었을 것이다. 에단은 다시 한번 눈을 꾹 감아 버렸다. 그리고 팔을 제멋대로 뒤집어 깊게 파고드는 링거 바늘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주입되는 약물 덕분에 팔은 차갑고 무겁게 늘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각성은 둔탁하고 느릿했다. 의식이 현실과 이어진 것은 대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을까.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는 생경한 감촉이 깃든다. 처음에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고 이어서 약물의 냄새가 콧속을 메웠다. 문득 감고 있는 눈꺼풀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전신의 무시무시한 근육통도.
에단은 왼팔을 들어 올리려다가 살 속에서 링거 바늘이 부대끼는 따끔함에 반대 팔을 올렸다. 병실 바깥의 부산스러움에 다시 귀를 기울이려던 순간 침대 난간을 부여잡은 조지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에단! 괜찮아?”
“괜찮아.”
먼저 물으려던 말보다 조지가 목소리가 더 빨랐다. 에단은 도무지 괜찮은 곳이 없는 것 같았지만 짧게 대답하며 눈을 다시 감았다. 조지의 목소리가 머리통 속을 윙윙 울리게 하고 있었다.
“너 머리 아프면 말해. 찍어 봤을 때는 문제없었지만 혹시 몰라.”
“그래.”
“그 외에 어디라도 말해, 제발.”
“…나 다리 붙어 있어?”
그새 폭삭 삭아 버린 듯한 조지는 에단의 물음에 악을 쓰듯 외쳤다.
“그런 장난 치지 마! 제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장난이 아니라. 다리가 아팠던 기억이 마지막이라 그래.”
“금 갔어. 그게 다야.”
“떨어져 나가진 않았고?”
“그런 말 하지도 말라고 했어.”
“내가 엄살이 심했네.”
윽박지르는 조지의 어투가 심상찮았기에 바깥에도 들렸을 것이 뻔했다. 린드베르그의 하얀 유니폼을 입은 이들이 병실로 들이닥쳤다. 딘과 팀의 전반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맡는 직원들까지.
그들의 면면을 보고 있으려니 도무지 할 말이 없다. 가장 앞에 서 에단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딘이 착잡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감독님은 인터뷰 중이야.”
“……볼 낯이 없네.”
“내 얼굴은 볼만한가 보지.”
“미안해.”
“어떻게 된 건지 기억은 나?”
“우리가 코스 먼저 선점했는데 가로막길래 밀려난 것까지는 기억나.”
“네가 부딪친 그 벽은 방호 처리도 제대로 안 된 벽이었어. 리버리가 단숨에 조각났다고. 그 뒤에 따라붙던 레이스 카들이 아슬아슬하게 비켜 간 게 천만다행이야. 단 한 대라도 네가 탄 콕핏 옆을 들이받았으면 넌 정말 끝이었어!”
“……할 말이 없어.”
“널 밀어 냈던 그 드라이버는 질질 짜면서 인터뷰 중이야.”
에단은 그 말이 픽 웃음을 지었다. 여론을 생각해 미리 질질 짜는 것인지 진심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어쨌든 그 꼴이 퍽 우스울 것이 뻔했다. 기운 없는 태도로 피식 웃는 에단의 태도에 딘의 한숨이 깊어졌다.
“알아. 미안해.”
“뭘 알아.”
“내가 자꾸 브레이크를 늦게 잡으니까 그쪽도 갈 데까지 가 보자 하고 가로막았겠지.”
“제발, 제발!”
“미안하다니까.”
“네 잘못만은 아닌 걸 알지만 그래도 도무지… 제기랄.”
딘은 드러누운 자신의 드라이버에게 드디어 잡은 기회를 틈타 잔소리를 쏟아 내야 할지, 아니면 그를 다독여야 할지 헷갈리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마치 생각에 여유를 주려는 듯 병실의 문간에서 누군가가 손짓했다.
“딘. 감독님이 인터뷰 좀 도와 달래.”
“왜.”
“에단의 주행에 대해서.”
“아. 젠장. 몰라. 다 잡아떼. 우리 드라이버는 잘못 없는 거야!”
“그러니까 그 주장에 힘을 좀 실어 달라고. 통상적인 레이트 브레이킹 정도다 하고 확답을 달라는데.”
“데이터 어딨어?”
기세 좋게 외치던 딘이 서슬 퍼런 손가락질로 에단을 가리켰다.
“너는 여기 얌전히 누워 있어. 나 아직 할 말 안 끝났어.”
“가만히 있을 거야.”
에단은 얌전히 시야의 끝에 걸리는 다리를 눈짓했다. 어차피 도망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런 주행을 보여 주었던 드라이버마저 지켜보겠다 의기투합한 팀 크루들이 나가고, 에단은 닫힌 문을 물끄러미 보다가 조지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연락 왔어?”
“달려오고 계셔. 지금 연락이 바로 안 되네. 비행기 때문에 그런 거 같아.”
“젠장. 일단 문자라도 넣어 드려. 나 멀쩡하게 깨어났다고.”
“그래. 그래야겠다. 리처드 경에게도 연락 넣어 둘게.”
“빌어먹을 우리 가문이랑… 또 어디 할 데 있나?”
“에이전시에도 연락해 줘야지. 너 의식 잃었던 것치고 아주 사리 분별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전해 줄게.”
조지는 풀이 죽은 얼굴로도 틈이 날 때마다 힐난을 퍼부었다. 그 힐난에 대꾸할 말이 없던 에단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등세모근에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손을 넘겨 짚어 보려 했더니 이번에는 어깨 부근을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았다.
어색한 자세로 멈춰 있던 에단은 결국 손을 내리고 물었다. 아까 조지가 먼저 고함을 치지 않았다면 눈을 뜨자마자 물을 뻔했던 질문이다.
“우리 팀 오너는?”
“병원에 와 있어. 그쪽도 인터뷰며 기자들 상대하는 거 같던데 곧 올라올 거야.”
“내 사고 봤어?”
“똑똑히 보고 제일 먼저 달려왔어.”
그 말을 듣자 사정없이 짓눌렸던 갈비뼈 부근이 더욱 욱신거리는 것만 같았다.
“……뭐라고 해?”
“나도 아직 못 들었어. 너 신경 쓰느라.”
“미안해.”
“아니야.”
대꾸하는 조지의 목소리는 꾹꾹 감정을 눌러 죽인 듯 납작했다. 그 뒤로도 말을 쏟아 내던 조지가 결국 휴대폰을 들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닌 척해도 사방에서 연락이 오는 것 같았다.
조지마저 나가자 에단은 지탱하고 있던 목에 힘을 풀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맥이 풀려 어지러웠다. 아닌 척했지만 태연한 얼굴로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모가 상당하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올해의 시즌은 끝났다. 어머니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는 중이고 레이스 카는 박살이 났다. 아마 박살이 났을 거다.
그리고 루크는… 어쩌면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뜯어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달리다가 벽에 들이박아 버리는 드라이버에게 재계약을 제안했던 것 자체를 말이다.
인터뷰에는 일단 수습을 위해 좋게 말하겠지만 아직 계약서에 사인한 것은 아니니 없던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 생각만으로도 충돌의 순간보다도 더한 둔통이 일어난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사고에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필 그가 보는 앞에서 들것에 실려 나오다니.
하필…….
뼈아픈 실책에 마른 입술을 오므렸다가 폈다. 발치 너머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시선이 돌아간다. 그리고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병실의 문을 조용히 닫은 루크는 상체를 반쯤 일으켜 앉은 에단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바깥 복도와 유리된 고요가 병실 안을 감돌았다.
그는 병실을 가로질러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머리끝부터 떨어지던 시선이 붕대를 감아 둔 왼 다리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의 얼굴은 무뚝뚝해 보였고 희게 질려 있었다. 어딘가 우수에 젖은 것 같기도 했다. 분위기 탓인가 싶었던 루크의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조금 짙은 색으로 가라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 에단은 눈동자를 다시 굴렸다. 그의 목을 감싼 흰 와이셔츠의 색도 왜인지 조금 축축해 보였다.
사고가 난 뒤 비가 왔던가. 루크의 목소리가 그 생각을 끊었다.
“몸은 어때요.”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라고 하기에는 차가 두 동강이 났던데.”
“원래 레이스 카는 잘 망가져요.”
되는대로 지껄여 봤지만 어림없어 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속여 볼 만했을지도 모르지만 요즘의 루크는 포뮬러 원의 지식이 상당한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무슨 말을 쏟아 낼 것 같았던 루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목울대를 한 번 움직였고 다시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는 한겨울 동토의 가장자리처럼 싸늘해 보였다. 그리고 침대 곁의 의자에 주저앉다시피 했다. 그러고 나서야 에단을 바라보았다.
골몰하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역시 계약 따위는 다 그만두자는 말일까. 더 이상 팀 오너로서 볼 일도, 어떠한 접점도 없이 모두 집어치우자고.
그래.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침묵을 지키는 옆얼굴은 음울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말할 기회는 지금뿐일지도 모른다. 토할 것같이 울렁거리는 속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말을 꺼냈다.
“루크. 그쪽은 내가 화를 내도 제대로 변명하지 않고 그게 나를 위한 일이라는 말이나 했었지만…….”
하지만 입을 열자마자 나온 말은 전혀 생각과 다른 엉뚱한 말이었다. 허공을 배회하던 루크의 눈동자가 정확한 초점을 잡아 에단을 바라보았다. 감정이 복잡한 와중에 황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에단은 다급하게 말을 수습했다.
“아, 젠장. 이걸 이야기하려던 건 아닌데. 잠깐만요.”
“……아주 단단히 벼르고 있던 거 같은데.”
“아니, 그러니까 나는 그랬던 당신과 다르게…….”
어째 말을 할수록 더욱더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점차 감수성을 잃어 가는 상대의 표정 변화에 에단은 저 스스로의 머리를 한 대 칠 뻔했다. 사고가 났을 때 머리를 제대로 박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사고 영상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왜 이렇게 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온단 말인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나는 그러지 않고 지금 바로 사과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한 와중에 사과할 게 있는 게 놀랍네. 뭡니까.”
“레이스를 그따위로 한 것과.”
이 말을 내뱉기 위해서는 과감한 드라이빙으로 포디움에 올랐던 지난 몇 경기의 영광까지 고스란히 깎아내려야만 했다. 그것은 실로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기에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신이 보고 있는 앞에서 사고가 난 것.”
“…….”
“부딪치기 직전에 그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 와중에 다른 데 정신이 팔리니 그렇게 사고가 난 건가.”
홀로 자신을 다그치던 에단이 다시 힘주어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어요. 포디움에 오르거나 뭐든 잘되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
“그랬겠죠.”
“그런데 이렇게 되어 버렸네.”
“…….”
“그게 너무 미안해.”
에단은 병원의 새하얀 시트 위 올려진 손을 움직였다. 텅 빈 양손은 스티어링 휠을 쥐었던 순간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아직도 손아귀가 얼얼할 뿐이다. 그렇게 악을 쓰고 달려들었건만 남은 것이 없다.
없는 정도면 차라리 낫지. 커리어를 처박고 병실에 처박혀 있는 꼴이라니.
빈 손아귀를 노려보는 와중에 그 위에 덥석 커다란 손이 올려졌다. 다가온 손은 피부만을 어루만질 듯 조심스레 살갗 위를 엄지로 문지르더니 다시 떨어진다. 차마 손을 못 대겠다는 듯 자신의 양손을 맞잡은 루크가 중얼거렸다.
“내 앞에서 사고가 난 거. 맞아. 그건 사과해야지.”
한숨을 내쉬고, 이번에는 단단한 허벅지를 움켜쥐는 손의 마디가 희게 질렸다. 번들거리는 광택의 슈트를 거세게 움켜잡았던 루크가 돌연히 몸을 바싹 기울였다.
“내가 얼마나, 어떤 생각으로 왔는지 모르죠.”
“미안해요.”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달려왔는지 모를 거야. 절대로.”
“병원 복도를 달려왔다는 거죠?”
“그랑프리 트랙부터 달려서 병원 복도도 달렸지.”
“대체 왜 뛰어왔어?”
“기사는 안 보이고 나는 운전을 못 하겠길래.”
“진짜 그랬다고?”
“덕분에 기자들은 열심히 기사를 쓰고 있을 거야. 당신이 소속된 레이싱 팀은 오너가 아직 운전 트라우마도 제대로 극복 못한 놈이라고. 내년에 정말 잘해 줘야 돼.”
“……빌어먹을.”
아무리 봐도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에단은 머리를 거세게 헝클였다. 만류하는 손에 손목을 붙잡히고 나서야 분통을 터트리던 몸짓을 멈췄다.
“정말 미안해. 정말…….”
“이건 내 잘못이야.”
“내 탓이잖아요.”
“거기서 정신을 좀 차렸어야 했는데 무식하게 달려온 건 나야.”
“그래도.”
“내 부족함일 뿐이기도 하고.”
“그것도요. 나 때문에 그게 다 드러난 거니까……. 빌어먹을. 대체 뭐라고 말해야 돼.”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움켜쥘 듯 손아귀를 단단히 말아 쥔 에단이 루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냥 그런 기분이네요. 내가 다 잘못한 것 같고. 그런 것 같아.”
그런 말을 하는 에단의 표정에는 본 적 없는 낯선 감정이 어려 있었다.
적막 속에서 루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이제는 자신이 솔직할 차례다. 그간 지나친 순간이 많았지만 이 타이밍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계약의 순간 스낵처럼 건넸던 말을 별안간 기억하곤 했었다. 레이스를 보다가 간간이 떠오르던 그 말은 에단의 얼굴을 마주하면 잊혀져 아직 하질 못했다. 하지만 바로 몇 시간 전, 하얀 레이스카에서 튀어 오른 카본 파이어의 파편이 산란하던 찰나에 다시 떠올라 가슴을 저미게 했었다.
“내가 계약 때 했던 말 기억나요?”
“한두 개가 아니라 어떤 걸 말하는지 모르겠네.”
“죽을 때까지 밟고 알아서 살아 돌아오라고 했던 말.”
“그건 괜찮았어요.”
“내가 안 괜찮아졌잖아.”
그것만큼은 아직 기꺼워하는 태도에 고개를 젓는 루크는 그 짧은 사이 한풀 지친 얼굴이었다.
“난 당신이 위험에 처하지 않길 바라.”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이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든 레이싱을 계속하겠지.”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포뮬러 원이 아니더라도 드라이버가 갈 자리는 많더라고요. 인디카나 르망 24시간. 나스카까지. 별게 다 있더라고.”
“이젠 잘 아네요.”
기특하다는 듯 지어지는 미소를 보고 루크는 대꾸하기 전 차라리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아침부터 준비한 말은 마치 감정이 덩어리져 엉킨 듯 쉬이 뱉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2년이면 충분하겠죠.”
“뭐가요.”
“당신이 포뮬러 원 챔피언에 오르는 날 말입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에단은 루크의 속을 꿰뚫어 볼 듯 응시했다.
“솔직히 난 여전히 모르겠어요. 레이스에 왜 그렇게 목을 매는지, 다른 걸 뭐든 해 준다는데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도. 하지만… 내 이해가 무슨 상관이겠어. 당신이 그렇다는데. 그리고 난 그런 당신이 좋았던 거고.”
아직 믿지 못하겠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상대를 바라보며 그가 힘주어 말했다.
“2년 동안 원하는 만큼 타고 와요.”
“…….”
“그동안 믿고 있을게.”
눈가가 붉어지도록 오랫동안 눈꺼풀조차 깜빡거리지 않던 에단이 간신히 말을 꺼낸 건 한참 뒤였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난 이제 당신과의 관계가 그렇게 긍정적인지는 모르겠어. 스폰서여서나 다른 거 때문이 아니야. 신경이 쓰여서 미쳐 버릴 것 같아.”
“어떤 게 그렇게 거슬리길래 그러지. 계약할 때 넣어요.”
“앞으로 그랑프리마다 안 올 수 있겠어요?”
원하는 걸 계약에 넣으라는 말에도 에단의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자꾸 신경이 쓰여서 그래. 드라이브할 때나. 언제든…. 당신이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집중을 못 하겠어.”
그 말의 뜻을 곰곰이 곱씹던 루크는 슬그머니 치미는 미소를 억눌렀다. 그와 동시에 심각한 표정을 계속해 짓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 좋아 죽는 차에 앉아 드라이브를 하면서도 내 생각이 난다고. 집중을 못 할 만큼.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자각은 있는 걸까.
억눌린 신음성을 목울대 너머로 삼키는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에단이 계속 중얼거렸다.
“말이 안 되는 거 알아요. 여긴 당신 팀이니까.”
“그렇죠. 그런데도 내가 보는 건 싫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응. 그러니까 나를 계속 생각하며 타. 레이싱 카에 타는 순간부터 출발하고 코너를 돌 때, 우승까지. 모든 순간마다 나를 기억해요.”
“…….”
“난 당신이 레이스 카에 타는 게 싫고, 당신은 내가 레이스를 보는 게 싫고. 우리 굉장히 잘 어울리는 거 같아. 안 그래요?”
그 말에 오래도록 루크를 응시하던 에단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솔직히 계약 취소할 줄 알았어.”
“그래도 나 봐줄 거야?”
“내 잘못이니까……. 어쩔 수 없죠.”
말은 어쩔 수 없다는데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눈동자에 핏발이 서는 것이 똑똑히 보인다. 루크는 그 말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울컥거리는 심정을 삼키는 기색이 역력한 연인의 눈가를 쓸었다. 핏발이 선 것도 맞는데 충격으로 눈동자의 실핏줄이 터진 흔적도 보인다. 그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빨리 우승해 줘요. 제발.”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요?”
“뭐더라. 한 말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F1 드라이버는 곁에 믿어 주는 사람만을 둘 수 있다고 했던 거.”
“아아. 그 말.”
“이젠 나를 믿어 주네. 2년 안에 포뮬러 원 챔피언이라니.”
“그건 원래 믿고 있었어.”
“그래요?”
믿기는커녕 가소롭다는 태도에 루크가 항변했다.
“그건 오해야. 당신이 챔피언 되는 걸 문제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하지만 포뮬러 원이 챔피언이라고 사고가 안 나는 스포츠는 아니잖아. 챔피언이 지나간다고 다들 비켜 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 그게 문제죠. 빌어먹을. 더 달려들겠지. 널 어떻게든 앞지르겠다고.”
기운차게 늘어놓던 변명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점점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상상도 하기 싫은지 루크는 몸을 의자에서 일으켜 허리를 굽혔다. 푸르스름한 멍이 들기 시작한 환자의 광대의 위 부근에 입술을 문지르고 숨을 들이켰다. 짙어진 체취가 눅눅하게 폐부를 적신다. 아직 살아 있는 자의 온기를. 그 체취를.
그 사고에서도 기어코 살아 돌아와 있는 것이 아찔하기는 하다. 다들 이 정도면 경상이라고 했지만, 그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인 건지. 파편이 휘날리던 당시를 상기하며 떨리는 주먹을 움켜쥔 루크는 가만히 아랫입술을 물었다. 가슬가슬한 입술의 각질이 느껴진다.
내뱉어지는 숨을 가만히 들이마시다가 고개를 떼어 냈다. 그 순간 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간에 양팔을 지지해 서 있던 크리스가 짜증스레 외쳤다.
“이젠 더 이상 시간 못 끌어. 당장 끝내.”
“끝났어. 문 열어도 돼.”
루크의 대답에 부리나케 문간에서 벗어난 크리스가 그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 들어왔다.
“에단. 괜찮아요? 큰 문제는 없다고 듣긴 했어요.”
“괜찮아요.”
대답하던 에단은 바삭거리는 시트 아래 손가락이 굼질거려 얽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매정하게 뿌리치기 전, 한 번 꾹 쥐었다 놓으니 루크의 시선이 움직인다. 그의 시선은 에단이 오래도록 안부를 나누는 내내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