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20x4 아부다비 그랑프리 - 야스 마리나 서킷. (17/20)

17. 20x4 아부다비 그랑프리 - 야스 마리나 서킷.

트랙 길이 5.281km, 레이스 랩 55랩, 레이스 길이 305.47km, 랩 레코드 1:26.342

사우디아라비아의 밤은 나이트 레이스가 끝나고도 기온을 떨구지 않았다.

사인을 요청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에단은 그 열기를 살갗으로 체감하며 이마와 앞머리 사이의 경계를 손등으로 훔쳤다. 온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꽁꽁 감싸 눈만을 내민 이부터 먼 대륙에서 함께 날아온 팬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 막 변성기가 지난 동양계 소년 하나가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의 기념 볼 캡을 내밀어 사인을 요청했다. 볼 캡의 둥근 부분에 사인하느라 골몰하던 에단이 사투 끝에 사인을 완성해 돌려주었다. 소년은 받아 들고는 주먹을 꾹 쥐며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에단, 하나만 질문해도 돼요?”

“들어 보고 대답해 줄게.”

“내년에도 린드베르그 레이싱에서 드라이버로 남아 있는 거예요?”

“아마도?”

반사적으로 입술을 당겨 웃어 보인 에단의 표정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소년은 상기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다음 사람이 내민 물건은 포뮬러 원 그랑프리의 티켓이었다. 비뚤어진 사인이 낙서처럼 그려졌지만 받아 든 상대는 소중히 그것을 품에 안고는 뭐라고 이야기했다. 뜻을 알 수 없어도, 음조로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에단은 통역가의 말에 귀 기울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경기도 응원하겠다고.

올해의 경기는 이제 단 한 번이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F1 드라이버로 남을 수 있는 경기 역시 단 한 번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린드베르그 레이싱은 재계약 의사를 전달하지 않는다.

에단은 그 사실을 잊기 위해 더욱더 레이싱에 몰두하고 온 정신을 쏟았다. 그러다 보면 루크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 역시 잊을 수 있었다. 자신이 그 후로 휴대폰을 쥐고 몇 번이고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럭저럭 잊히곤 한다.

인터뷰는 더 이상 에단에게 아쉽게 놓친 우승에 대해 묻지 않는다. 대신 느려진 레이스 카로 일으킨 기적에 대한 질문이 주를 이루었다. 오늘 이루어 낸 3위를 연신 기적이라 칭찬하던 리포터의 마지막 질문이 던져졌다.

“에단. 다음 그랑프리에서는 더 좋은 모습을 기대해도 될까요?”

리포터의 질문에 에단은 단단한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조금 느려지기는 했지만 훌륭한 패배자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최선을 다할 겁니다.”

“좋아요. 기대할게요.”

악수를 마지막으로 몸을 빼내자 맞은편에는 한 무리의 인파가 다가오고 있었다. 헤센의 등 뒤에 따라오는 카메라의 스포트라이트는 마치 물고기 떼의 반짝거리는 비늘 같았다. 맨 앞에 선 헤센은 마주친 에단을 보더니 오른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마치 거기 가만히 있으라는 것 같았다. 헤센은 들이민 마이크에 대고 먼저 질문했다.

“제 인터뷰 끝났나요?”

“예. 더 할 말이 없다면요. 아부다비 그랑프리의 우승을 축하해요, 헤센.”

“고마워요.”

손을 흔들어 보인 헤센은 한 겹의 바운더리를 뚫고 에단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란히 선 에단의 어깨에 팔을 올려 어깨동무를 했다. 피로로 온몸이 무거운 와중에 팔의 무게가 얹어지니 죽을 맛이었지만 에단은 잠자코 헤센의 어깨동무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합류를 지켜보던 기자들이 다시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헤센은 터지는 플래시를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이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에단을 향해 조금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어때. 나에게 할 말 없어?”

“미안해.”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어깨를 옥죄지 않아도 사과할 예정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더해졌지만 에단은 그 역시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도 손을 들어 보일까 하다가 둘 다 손을 흔들고 있는 꼴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보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속도를 나란히 맞추어 가는 두 사람의 옆으로 사람들의 긴 꼬리가 이어졌다. 그들에게 들릴 듯 말 듯 목소리를 낮춘 헤센이 짜증을 숨기지 않고 속삭였다.

“좋아. 아까 첫 랩에서의 미친 주행은 대체 뭐였는지 설명해 봐.”

“지금 머신 세팅이 브레이크를 잡으면 바로 가속이 안 돼서 그랬어.”

“아하. 그래서 브레이크도 없이 코너를 빠져나가다가 날 밀어 낼 뻔했다는 거군.”

“다음에는 다른 놈 밀어 낼게. 페라리라든가.”

“내가 그런 대답을 듣자고 따지는 줄 알아?”

“음……. 다음에는 조금 더 주의해서 추월할게.”

실소하는 에단을 쏘아보던 헤센이 결국 팔에 우악스럽게 힘을 주었다. 푹 허리가 꺾인 에단이 안간힘을 쓰며 헤센의 팔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이 카메라에 잡혔다. 두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까지 함께 왔다. 목을 감듯 팔을 옥죄어 오는 헤센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밀어 내며 에단이 외쳤다.

“알았어, 알았다고. 다음 레이스에서는 네 옆으로 죽어도 안 갈게.”

“내가 지금 그 말을 듣자고 온 게 아니잖아.”

“그럼. 다른 할 말이라도 있어?”

“에단. 너 레이트 브레이킹. 언제까지 그럴 생각이야?”

결국 헤센은 쉽게 꺼낼 수 없던 질문을 언급하고야 말았다. 이미 기자들이 수도 없이 떠들었으며, F1 팬들은 에단의 거친 드라이브에 분노와 열광을 보내는 중이었다.

애초에 드라이브 스타일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서로의 주행에 대해 말을 얹지 않는 것이 드라이버끼리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이미 F1의 시트를 차지하고 있는 데에서 그들은 세계의 최정상에 서 있는 것이므로.

대답하는 에단의 표정은 아직 덤덤했지만 대답도 그럴 수는 없었다.

“우리 사이에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래, 아니지. 그건 맞아.”

결국 헤센마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 트레일러의 문이 벌컥 열렸다.

트레일러의 문간을 꽉 채우고 선 남자는 내려오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처음 마주치는 얼굴이었지만 헤센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화사한 금발 아래 그늘진 얼굴은 어두운 조명 덕분에 소문보다 음울해 보였다.

무례하리만치 빤히 쏟아지는 시선을 마주한 헤센은 눈썹을 크게 들썩였다가 뒤늦게 에단의 어깨에 걸치고 있던 팔을 풀었다.

떨어져 나간 헤센의 팔을 여전히 응시하던 루크가 입을 열었다.

“루크 린드베르그입니다. 이 팀의 무언가를 맡고 있죠.”

지나치게 건성인 자기소개였다. 기가 찼던 헤센이 그대로 맞받아쳤다.

“헤센입니다. 뭐, 아시죠? 에단에게서 이야기 들었어요.”

루크는 그 말에도 별 반응 없이 곁에 선 에단에게 천천히 손짓했다.

“우리 팀 드라이버의 드라이브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테니 그쪽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에단. 말해 봐. 너 덕분에 죽을 뻔했던 내가 저 말에 지금 뭐라고 반응해야 할까?”

헤센은 상대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곁의 에단에게 물었다. 속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참아 내느라 어금니를 세게 물고 있던 에단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헤센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원래 저러니까 마음 쓰지 마. 오늘은 미안했어. 그건 진심이야.”

에단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퉁퉁 가볍게 울리는 계단을 밟아 올라간다. 팀 오너를 거의 물어뜯을 듯 노려보는 에단의 눈빛이 신경 쓰여 헤센은 문이 닫히고도 잠시 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그를 데리러 온 이들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에단은 물론 루크를 마주치는 어느 순간에 대해 줄곧 상상하곤 했었다. 그랑프리 서킷에서, 혹은 예상치 못한 어느 자리에서라도 마주치는 순간에 대해서 몇 번이고 상상해 봤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고 좁은 데다 사방이 막혀 있는 공간에서 볼 줄은 몰랐다.

루크를 바라보던 에단은 꽉 막힌 듯한 목 너머로 힘겹게 침을 삼켰다. 루크는 자신의 것인 양 감독이 앉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에단도 그 맞은편에 마주 앉았다.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모양만큼은 과거의 어떤 것도 상관없이 초연해 보였다. 그래서 에단 역시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을 끌어모아 입가를 굳혔다. 그리고 공연히 빈 트레일러의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감독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곧 올 겁니다.”

질문에 대답하며 천천히 왼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던 루크는 다시 그 손을 의자의 팔걸이에 내려 두며 삐딱했던 자세를 바로 해 앉았다. 그러고도 양손이 갈 곳을 아직 정하지 못한 듯 움직임을 멈췄다가 양 허벅지 위에 올라갔다. 상체를 바로 세운 루크의 시선이 올곧게 쏟아졌다.

“아까 그 드라이버에게 했던 말은 진짜입니다.”

“팀의 무언가라고 했던 말 말입니까.”

“그다음이요.”

부러 삐딱하게 말한 것이었지만 루크는 입술 사이로 희미한 숨을 뱉어 낸 뒤 말을 계속했다.

“그랑프리를 다 보지는 못하고 요약으로 봤습니다.”

“마지막 포디움까지 봤어요? 오늘 3위 기록한 거.”

“봤습니다.”

“그걸 먼저 축하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당신이 우리 팀의 무언가라면.”

“축하해요.”

그 축하는 지나치게 형식적이어서 다음 대화를 위해 거쳐 가는 것일 뿐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서 그다음 하고 싶은 말은 뭡니까.”

“주행이 아주 위험해 보이던데요.”

“레이스 카를 그따위로 준다면 난 절대 브레이크를 밟을 수가 없죠. 헤센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

루크는 짧은 설전 끝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은 어울리지 않게 무력해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다루는 것이 익숙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어쨌든 비집고 쑤셔 넣을 수 있는 어떤 연약한 틈이 보였다는 뜻이었다.

“당신이 밟으라고 했었잖아.”

이채를 띠었다가 가늘어진 눈매는 기억을 단숨에 헤집어 그 말의 단서를 끄집어낸 것이 분명했다. 에단은 사이에 둔 티 테이블에 손을 짚으며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밟으라고 했었잖아요. 한 바퀴라도 더 굴러가고 멈추라며.”

“에단.”

“계약 때 분명 그렇게 말했잖아. 내게 멀쩡한 레이스 카를 가져다주겠다며.”

“안전하고 멀쩡한 레이스 카가 되어야겠죠.”

“Fuck. 포뮬러 원에 그런 게 대체 어디 있어?”

“에단.”

욕설을 지껄였음에도 달래는 목소리의 음조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에단이 가장 환장하는 점은 그 목소리로부터 끄집어내지는 기억의 가짓수가 꽤 된다는 점이었다. 계약서에 사인할 때. 멀쩡한 차를 가져다주겠다고 했던 순간. 테스트 차량이 완성되지 못했다고 했더니 스페인까지 달려왔던 그날. 빗물에 잠겨 리타이어를 했다가 메디컬 센터 앞에서 마주쳤던 날이나.

침대맡에서.

혹은 전용 트랙의 이야기를 꺼내던 그 순간도.

그것이 바로 에단이 바로 말을 잇지 못한 이유였다. 그리고 울컥거리는 감정을 더 이상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기폭제이기도 했다.

뿌득 소리가 나도록 티 테이블을 강하게 쥔 에단이 뇌까렸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네가 계약 연장도 안 해 주면 나는 더 이상 이따위 드라이브도 보이지 못할 테니까. 이제 속이 시원해?”

“린드베르그 레이싱과 내년 계약 안 할 겁니까?”

“팀이 아직 내게 계약서를 제시하지 않았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제발, 네가 한 짓거리부터 생각하고 말을 해!”

에단은 헐떡이며 말했다. 얼결에 쏟아져 나오기는 했지만 스스로의 입으로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루크의 앞에서는 더더욱.

격렬한 분노를 품은 눈빛은 오래 마주하던 루크는 눈을 내리감았다. 마주할수록 속이 휘저어지는 기분이었다. 휘저어진 속은 너덜너덜해진다. 그럴수록 애써 외면하던 현실이 코앞에 들이밀어진다. 화해는 웃기지도 않는 일 같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에단은 너보다도 포뮬러 원을 더 중요하게 여기니까.’

스스로 도출해 낸 답은 가슴에 담아 둔 말이 넘쳐흐르도록 충동을 부채질한다. 루크는 테이블을 움켜쥐어 희게 질린 에단의 손마디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믿지 않을 것 같지만. 정말 그 모든 건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계약이 늦어지던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계약 조건을 조율 중이었고.”

“그래. 알아, 다 안다고. 당신 혼자 생각하다가 그렇게 된 거겠죠. 내 안전이 걱정된답시고 혼자 생각하다가 출력을 낮춘 거랑 뭐가 다르겠어.”

테이블을 밀치고 일어난 에단은 기력을 쏟아 낸 듯 지쳐 보였다. 그 때문인지 쏘아붙이는 마지막 말은 뭉툭하고 한없이 무르게만 느껴졌다.

“그게 더 열받는다는 거야. 나를 위한다면서 내가 원치 않은 일을 저지른 게 몇 개째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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