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러시아 그랑프리 - 소치 오토드롬 서킷. (16/20)

16. 러시아 그랑프리 - 소치 오토드롬 서킷.

트랙 길이 5.848km, 레이스 랩 53랩, 레이스 거리 309.944km, 18개의 코너, 랩 레코드 1:35.234

러시아라는 나라에 걸맞지 않게 소치는 수도로부터 한참 떨어져 날씨가 온난했다. 그 사실을 매번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에단은 머무르는 내내 불현듯 기시감이 들곤 했다.

온난한 날씨만큼 레이싱이 잘 풀렸다면 좋았겠지만 수월치 않았다. 예선 퀄리파잉이 종료되고 8위라는 성적을 받아 든 에단은 이를 갈며 레이스 카에서 내렸다. 헬멧을 벗고 흐른 땀을 닦아 낸 그는 레이스 카를 노려보았다. 달려든 미캐닉들의 손에 옮겨지는 흰색의 우아한 리버리를 걷어차기라도 할 듯 기세가 흉흉했다.

트레이너가 내민 물을 들이켜는 그의 곁으로 딘이 다가왔다. 그새 프린트된 텔레메트리 데이터를 불쑥 내밀자 에단이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섹터 2에서 퍼플 찍었어. 알지?”

서킷은 세 개의 섹터로 나누어져 각 섹터의 기록을 측정했다. 퍼플은 드라이버 중 가장 빠른 속도였다는 표식이었다. 입술에 맺힌 물기를 닦아 낸 에단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리고 섹터 3에서 망했지.”

“브레이크를 너무 늦게 밟았어. 풀 스로틀도 심해. 거의 7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잖아. 물론 네가 원래 레이트 브레이킹과 풀 스로틀을 주로 쓰는 건 잘 알아. 하지만 타이어 소모가 너무 심해.”

“저 빌어먹을…….”

딘의 말을 끊으며 왈칵 성을 내었던 에단은 손가락질하던 손을 간신히 내렸다. 우아한 차체는 그대로 내일의 본선까지 손 하나 댈 수 없는 구역으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갈 곳 없이 허공에서 헤매던 손은 애꿎은 머리만 쓸어 넘겼다.

“지금 세팅에서는 브레이킹을 늦게 하는 방법밖에 없어. 코너에서 한 번 감속을 하면 다시 가속이 붙는데 한세월이야. 가속 반응 속도가 쓰레기라고.”

“알고 있어, 무슨 말인지.”

“어제 연습 주행 끝나고 난 분명히 말했어. 속도가 너무 안 난다고. 그리고 그대로잖아.”

“다시 이야기해 볼게.”

“이번 세팅은 이미 끝났잖아. 내일 본선까지 저대로 있다가 출전해야 하는데 뭘 어떻게 하겠어?”

“다음 세팅이라도 내가 강력하게 말해 볼게.”

요란한 휠건 소리를 뚫고 들리는 목소리에 미캐닉들의 힐끔거림이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딘은 에단의 어깨를 도닥이듯 감싸며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몸을 바싹 붙였다. 귓가에 간신히 들릴 만큼 목소리를 낮추고서야 속삭였다.

“나도 감독님께 항의했어. 이번 업그레이드는 속도가 지나치게 떨어진 거 아니냐고.”

“뭐래?”

“그게 있잖아. 감독님이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무슨 소리야. 엔지니어들끼리 또 싸웠어?”

이번에는 직접 뛰어 들어가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를 본 딘이 급하게 대답했다.

“나도 자세히는 아직 모르겠어. 일단 내일 본선이 끝나고 확실해지면 알려 줄게.”

“내일은 저 꼬락서니인 레이스 카를 끌고 나가고?”

“섹터 2는 진짜 환상적이었어. 물 흐르듯 빠져나가는 걸 보고 우리 모두 숨이 멈추는 줄 알았다고. 하지만 에단, 제발. 그런 식의 레이싱은 한번 삐끗하는 순간 끝장이야. 고속으로 계속 흐름을 타는 건 위험이 너무 커.”

“레이스 카 세팅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면 생각해 볼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딘이 에단의 등을 툭툭 두드린 뒤 멀어졌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괜스레 노려보던 에단은 몇 번이고 눈가를 문질러 자신의 기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만하자. 처음도 아니잖아. 이럴 수도 있는 거지.”

사실 지금껏 신생 팀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기적적인 세팅이 나왔던 거다. 알고 있다. 안정성, 속도. 두 가지를 모두 잡아 내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그래, 다 내 잘못이다. 결국 원인을 자신에게 돌린 에단은 목에 걸고 있던 물수건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트레이너를 찾아가 몸을 풀어야 하는 걸 알았지만 도무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2층의 대기실에 틀어박히려던 에단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인물을 보며 얼굴을 사정없이 구겼다. 가관이군. 아주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이 와중에 가장 보기 싫은 얼굴을 마주치니 기분이 환상적이다.

마주친 리암은 오늘만큼은 비켜 가지 않고 맞은편에 멈춰 섰다. 저열한 우월감이 번져 가는 표정이 참 솔직했다. 그런 얼굴을 마주하며 에단은 차라리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축하할 테니까 저리 비켜.”

“내가 한 가지 전해 줘도 될까?”

“필요 없어.”

에단의 짜증스러운 대답에도 리암은 그것참 유감이라는 듯 혀를 찼다. 그 제스처가 분노를 더욱 충동질했다.

더러워서 그만두고 말지. 이런 생각과 함께 무시하고 비켜서 지나치려는 에단의 앞으로 길쭉한 팔이 뻗어졌다. 그 팔을 따라 올라가던 에단의 시선이 결국 리암과 마주쳤다.

에단은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벽 쪽으로 집어 던졌다.

“좋아. 오늘 끝내자. 오늘 한판 붙어서 진 놈은 앞으로 서킷에 나가지도 말자고. 됐어?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넌 네가 옳다고 생각하지?”

가당치도 않은 시비에 에단은 도저히 웃을 기분이 아님에도 웃음이 나왔다.

“나한테 열받으면 그렇게 말하자고 레오랑 합의라도 봤어?”

“아직도 네가 맞았다고 생각해? 네가 그렇게 비위 맞춰 대던 팀 오너마저 결국 내가 말한 대로 세팅을 지시한 이 상황에서 말이야.”

“무슨 말이야, 그게.”

새로이 치켜 올라간 눈매를 노려보던 리암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환희가 번져 나갔다.

“몰라?”

“뭘.”

“진짜 모르는 거야, 아님 모르는 척하는 거야?”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비켜. 시간 낭비 말고.”

“오너가 속도 늦추고 안정성 높이라고 감독에게 직접 지시한 거. 몰라?”

“……무슨 개소리야, 그건.”

“하. 몰라? 정말?”

연이어 되묻던 리암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지만 에단은 그 꼬락서니를 마주하고도 모멸감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으니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엉켰다. 루크가 지시했다고? 속도를 낮추라고?

한참 웃던 리암이 실소를 흘리며 눈을 치떴다.

“처음에 그놈 뒤를 어떻게 빨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위 좀 맞춘다고 다 될 줄 알았어?”

“…….”

“정신 차려. 그렇게 레이스 카를 때려 부수고 영웅이 되면 박수라도 칠 줄 알았냐고. 에단.”

“영국에서 때려 부순 건 너였고 말이지.”

“하. 정신 차리고 재계약부터 따내. 아직 재계약도 못 했잖아? 난 2년짜리 계약이지만.”

그 뒤 지껄이는 몇몇 헛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니. 지금 그딴 게 문제가 아니다.

에단은 하마터면 날파리를 내쫓듯 손을 휘저을 뻔했다. 생각에 방해되는 리암의 지껄임을 흘리며 그는 홀로 생각했다. 루크가 속도를 낮추라고 했다고.

냉기가 스며들 듯 차가워진 머릿속에서 어떤 판단이 선다.

“알잖아. 다들 말은 번드르르하지만 결국은 아니라는 걸. 예산을 작작 가져다 썼어야지.”

그것도 아니다. 시즌 내 느끼던 중압감을 벗어던진 리암은 킬킬거리며 되는 대로 말을 지껄여 댔다. 상기된 얼굴빛과 눈빛을 보니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에단은 무심코 한 대 후려치게 될까 봐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어때. 팀의 개발 방향이 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기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그런데 다들 나에게만 그따위 소리를 지껄여 댔지.”

“작작 해.”

“나더러 작작 하라고?”

“그래. 이 팀에 오기 전까지 르노에서 곱게 키워졌던 네 징징거림 따위 내가 알 바 아니니까 좀 닥쳐 봐.”

다시 심상찮아지는 숨소리도 알 바 아니었다. 에단은 창백한 안색으로 홀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나를 안 믿었다는 거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비뚜름해진 미소는 비열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불유쾌한 숨결이 느껴지도록 바짝 얼굴을 가져다 댄 리암이 빈정거렸다.

“널 믿어? 대체 왜? 네 작년 드라이버 순위가 몇 위였는지 기억은 하고 있는 거지?”

하하하, 하고 퍼지는 웃음소리가 귓전을 두드릴 정도로 가깝다. 에단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곧장 리암의 멱살을 움켜쥐고 몸을 당겼다. 붉게 달아오르던 얼굴이 바로 코앞까지 가까워진다. 순간 얼이 빠진 리암의 얼굴을 노려보던 에단이 이를 갈았다.

“차가 빨라서 감당 못 한다고 징징거리는 게 드라이버가 할 짓이야?”

“뭐?”

“대답해 봐. 잔뜩 징징대서 느려진 차로 고작 시상대 근처만 얼쩡거리는 게 F1 드라이버가 할 짓이냐고 물었잖아.”

“그럼 어디 처박기나 하는 머신이 옳다는 거야? 속도가 나면 다냐고!”

“그래.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도 포디움 근처나 맴도는 레이스 카로 어디 한번 잘해 봐. 응?”

푸들거리는 입술을 악다문 리암의 얼굴이 희게 질려 갔다. 왁자지껄하게 몰려오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온다. 손을 떨친 에단은 거친 걸음으로 지나가다가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며 손가락질했다.

“인터뷰로 남의 과거 후벼파는 개짓거리도 그만두고.”

***

“에단. 아슬아슬한 브레이킹이었습니다.”

“리타이어는 면했지만 네 바퀴가 모두 라인 밖으로 나갔나요?”

“레이스 컨트롤에서 조사 후 페널티를 적용할 예정입니다.”

다행히 간발의 차로 페널티가 적용되지 않았다는 자막이 떴다. 항변하는 다른 팀의 외침 속에서 영상을 응시하던 루크는 결국 쓰고 있던 엷은 은테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린드베르그의 흰 레이스 카는 직선에서 조금 처지는 속도를 무시무시한 코너링 스피드로 연신 만회한다. 그 과정에서 다른 머신과 닿을 듯 닿지 않는 기적적인 간격이 연속으로 클로즈업 되어 카메라에 잡힌다. 그만큼 해설자들의 언급도 잦았다.

“부족한 속도를 코너에서 감속을 줄여 만회하네요.”

“하지만 한계에 도달할 겁니다. 타이어도, 다른 팀의 항의도요.”

마치 그 해설을 보조하기라도 하는 듯, 기어코 코너 안쪽으로 파고든 에단의 레이스 카에게 순위를 내어 준 페라리의 드라이버가 연신 욕설을 내뱉는 목소리가 방송되었다. 그와 함께 페라리의 팀 분위기를 비추기 위해 영상은 잠시 서킷이 아닌 붉은색을 떼지어 입은 이들을 송출했다. 그들의 험한 말이 기계음 처리되어 방영되는 것을 듣던 루크는 한쪽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쯧.”

연신 심각한 표정으로 지껄이는 인간들을 모조리 보여 주고 나서야 화면은 다시 그랑프리 진행 상황을 비춘다. 다행히 두 랩만이 남았다. 슬로 화면이 에단을 태운 레이스 카의 타이어 상황을 비춘다.

“타이어가 한계예요, 에단.”

“기대할 것은 기적뿐입니다. 이제 와 피트 인을 할 수도 없어요.”

피가 마르는 1분 30초가량이 두 번 지났다. 메르세데스의 레이스 카가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다. 두 번째. 맥라렌의 주황색 레이스 카가 결승선을 통과한다. 그리고 그다음 에단이었다. 빛처럼 빠르게 결승선을 통과한 에단의 레이스 카가 감속을 하고야 루크는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에단. 포디움에 올라갑니다!”

“원 스톱 전략이 통할 줄이야. 대단합니다.”

에단의 업적을 칭찬하는 해설자의 멘트가 이어졌지만 포디움이고 뭐고 볼 기분이 아니었다. 레이스 카에서 간신히 빠져나오는 에단의 몸놀림이 둔하다. 루크는 그 모습을 노려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여 영상을 종료했다. 순식간에 객실은 적막에 잠겼다.

“위험한 레이스를 하면 중도 탈락시키는 규칙은 없나.”

레이싱 영상의 화창한 날씨와 달리 저녁부터 소치에는 음울한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툭툭 묵직하게 울리는 빗소리가 창가를 두드린다.

이제야 이렇게 비가 와서 다행이다. 에단이 저렇게 이를 악물어 타이어를 바꾸지 않고 주행하는데 비가 왔다면. 신경을 날카롭게 찌르는 상상을 끊어 내기 위해 루크는 손바닥으로 눈꺼풀을 덮어 눈을 감았다.

창가를 두드리는 물방울 소리가 점점 짙어지건만 인기척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마주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차라리 에단이 오늘 밤만큼은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마음속에 움트는 것을 느끼며 손끝만 까딱이던 루크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스툴에 올려 두었던 발을 내려 바닥을 디뎠다. 등받이가 긴 윙 체어에 기대어 있던 몸도 천천히 일으켰다. 재킷을 손아귀에 쥐고 여전히 텅 빈 호텔 룸 안을 마지막으로 눈 안에 담던 순간이었다.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호텔 문이 밀어젖혀진다.

룸 안의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는 에단의 검은 눈동자는 빗물을 머금은 양 눅눅하다. 그 새까만 눈동자를 응시하던 루크의 눈동자가 전신을 훑어 내렸다. 붉어진 눈시울과 헝클어진 머리칼이 흠뻑 젖은 모양새라 가슴에 답답하게 맴돌던 말보다 다른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비 맞았어요?”

“샴페인이죠.”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인지 대답이 늦었다. 에단은 여상한 태도로 제 머리칼을 툭툭 털어 내며 문을 마저 닫았다. 비틀거릴 것 같았지만 똑바른 걸음이 호텔 룸 안을 가로지른다.

젖어서 몸에 들러붙어 실루엣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셔츠를 쥐어뜯듯 벗는 그의 걸음이 루크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발치의 스툴을 스쳐 지나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태도였다.

맨 윗단추를 끌러 낸 손가락을 두 번째 단추에 걸며 에단은 루크를 무감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잠시간 그러고 있다가 등을 돌렸다. 젖은 셔츠 깃이 끌러 내려진 등 근육이 팔을 따라 섬세하게 움직인다. 루크는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벗어서 손아귀에 둘둘 말린 젖은 셔츠가 별안간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와 함께 에단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억눌린 숨을 몰아쉬느라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안 나갑니까?”

“문자 못 봤어요?”

되레 차분히 묻는 질문에 에단의 아랫입술이 잘근 씹혔다.

“봤다면.”

“그런 거치고 너무 늦었네요.”

“시상대에 오른 드라이버치고는 빨리 올라온 거죠.”

마주 서 분노를 고스란히 맞이하던 루크는 고개를 숙이며 왼손을 들었다. 왼쪽 손목에 감긴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새벽 3시를 지나고 있었다. 에단의 내뱉는 숨마다 날연한 기색이 느껴지는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일의 시간을 비워 내기 위해 일정을 비틀고 쥐어 짜냈던 루크 역시 다를 바 없었다. 두 사람 모두 피로감을 역력하게 느낄 시간임에도 에단의 기세가 폭발적인 것은 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내가 어떻게든 이 자리를 피해 침대나 파고들고 싶은 건 받아야 할 비난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홀로 자조하던 루크는 차라리 의연히 어깨를 폈다. 그 꼴을 보던 에단이 기가 막혀 뇌까렸다.

“뭡니까, 그 표정.”

“하고 싶은 말은 뭐든 해요.”

“이 방에서 꺼져.”

“그런 말은 말고.”

“그럼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에단은 결국 화를 터뜨렸다. 놀람과 의심, 온갖 불유쾌한 감정이 엉킨 검은 눈동자가 탁하다. 그 감정의 끄트머리에 새로이 몸집을 불린 것은 명백한 실망이었다.

한 걸음 가까워진 이를 마주하며 루크는 침을 삼켰다. 각오하기는 했지만 예상한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공기는 후덥지근하게만 느껴졌고 들이쉬는 숨마저 명치 부근을 첨예하게 찌르는 것만 같았다.

“절대 속도가 안 나게 만들라고 했다며.”

“…뭐라고 변명해도 결론은 그렇게 되겠죠.”

“미안하다는 자각은 있는 겁니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까지 아무 말 없이 기다렸고.”

“그게 다야?”

“그리고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그대로 들을 생각이고.”

“그다음은.”

“…….”

“뭐. 화해의 섹스라도 할 거라고 예상하는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

“그럼.”

“당신의 화를 다 받고 나면…….”

변명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루크는 긴장으로 바짝 당겨진 목울대를 힘겹게 움직인 뒤 말을 이었다.

“여전히 당신의 화가 풀리지 않는다면 나가겠죠.”

“그리고?”

“기다리고…….”

“아아.”

감탄을 위장해 빈정거림을 담은 음조가 낯설었다.

“기다리고 나면 내가 이해하고. 고작 그 정도로 이 일이 마무리될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렇게까지는 이야기 안 했습니다.”

“감독에게 들었어. 절대로.”

다시 한 발 다가온 에단의 손이 치켜올려졌다. 검지에 힘을 주어 밀어 내는 손가락이 루크의 가슴팍을 찌른다.

“죽어도. 엔진 출력 다 내지 말라고 했다며.”

“……사고가 많았잖습니까.”

“그러니까.”

가슴팍을 밀어 낼 줄 알았던 손가락이 이번에는 옷깃에 감겼다. 바싹 틀어쥔 멱살을 당기며 에단이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입맞춤의 순간과 같은 각도로 근접까지 숨결이 다가왔다.

“잘했다는 거야?”

“잘했다는 건 아니죠. 응당 당신이 화낼 만한 일이고.”

“하지만 옳은 일이었으니 내 분노는 감내할 만하다 이거잖아. 순교자 같은 표정으로.”

옷깃을 놓은 에단의 손이 루크의 뺨을 감쌌다. 양손을 들어 얼굴을 당기고 손바닥으로 살결을 어루만지는 손짓이 거칠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루크의 목 근육이 경직되었다. 손바닥 안에 고인 알코올 내음이 흠뻑 비강을 적신다. 굳은살이 박인 그 손바닥 안에 입 맞추고 비탄에 젖은 눈동자를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옴짝달싹도 할 수 없다.

그런 루크의 얼굴을, 턱 부근을 몇 번이고 우러르듯 바라보던 에단의 초점이 흐려졌다.

이 새벽까지 기다리느라 흰자위는 불그스름했고 표정은 곤란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드물게 변명을 지껄이지 못하는 입술도. 가장자리가 물색에 가까운 푸른 눈동자를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미안해하면서 대체 왜 그랬을까.

왜 믿지 못한 거야.

“믿어 달라고 했잖아.”

“에단.”

“나는, 당신이 이해한 줄 알았어.”

“얼마나 이 일을 진심으로 여기는지 잘 알고 있어요. 다만…….”

“다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어.”

“대체 뭐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레이스 카를 계속 탈 수 있다고.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안전해져도 된다고요.”

“아니, 넌 지금 아무것도 몰라. 빌어먹을.”

분노는 절절한 방식으로 토해 내졌다. 왼 손바닥은 그대로 붙인 채 오른손으로 제 가슴을 내려친 에단이 사납게 외쳤다.

“넌 내가 싣고 달리던 내 인생뿐만 아니라! 거기 실었던 의미까지 무시한 거야.”

“…….”

“우승해서 네게 좋은 것만 보여주겠다고 했던 내 멍청한 마음까지도.”

“……그 말. 기억하고 있었어?”

목구멍이 지나치게 조여들어 나온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우승의 그날 에단의 입에서 나왔던 그 고백을 루크도 기억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은밀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나머지 에단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냐고 물어도 다시 알려 주지 않은 고백이었다. 그 말을 에단은 똑똑히 제 입으로 읊었다.

“그 말은 굉장히 충동적이었지만 말이야.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어.”

“나도 알아요.”

“지금은 모르겠지만.”

“잠깐, 에단. 상심은 알겠어. 하지만 나도 진심이었어요. 진심으로 걱정해서 속도를 늦추자고 한 거야.”

“그러니까, 아직도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 거죠.”

사납게 귓전을 어루만지고, 관자놀이를 감싼 손가락이 루크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한 치도 비켜 나갈 기회를 주지 않으며 에단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난 우리가 무언가 통했다고 생각했었어.”

“맞아요.”

“아니. 아니야.”

“지금 이 하나로 과거까지 모조리 부정할 필요는 없잖아.”

“헤어지면 다 잊는 편이라고 했었지.”

“……잠깐만. 에단.”

“나도 잊어요.”

루크는 순간 숨 쉬는 것을 잊었다. 머리통을 감싼 어딘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감각이 비현실적이었다.

“다 잊어. 알았지?”

그 뒤 손을 휙 뿌리친 에단은 욕실로 홀로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무슨 말이든 해 보려 했지만 손목을 붙잡는 순간 노려보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루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기회는 그게 전부였다. 잠시 걸음을 멈췄던 에단의 몸이 욕실 안으로 들어가고, 한참 후에야 물소리가 울렸다. 차마 그 문을 열지는 못하고 배회하다가 샤워가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결국 객실을 나왔다.

어떻게든 시원한 공기를 들이켜야 생각도 자라날 것만 같았다. 객실을 나와 호텔의 복도 끝 가장 먼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선 그는 망연한 시선을 들어 엘리베이터가 멈춘 층수를 바라보았다.

대시 보드를 조작하지 않고, 로비 층에 서 변동하지 않는 숫자를 망연히 바라보기를 한참.

그러니까…….

날숨을 내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차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

간밤의 폭우는 잦아들었지만 지끈거리는 두통이 도무지 가시지 않았다. 서버가 따라 준 물을 비워 낸 것이 이미 두 번째였기에 에단은 머리를 헝클이며 테라스 아래 거리를 바라보았다. 약속에 조금 늦겠다고 한 이가 도착하지 않는 사이 하늘의 정중앙을 지난 태양이 뜨겁게 정수리에 내리쬔다.

레스토랑의 아래 지나가는 차들을 무심결에 훑다 보니 시선을 사로잡은 차체가 있었다. 크기도, 높이도 전혀 다르지만 크림색의 도색만큼은 비슷해서 시선이 오래 머물고야 만다.

따뜻하게 데워진 머리칼을 습관적으로 만지던 에단의 손놀림이 잦아들었다. 천천히 멀어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노려본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비어 있던 맞은편에 스리피스의 갈색 정장을 갖춰 입은 장년의 백인 남자가 의자를 빼며 앉았다. 정신이 팔려 있던 에단은 뒤늦게 남자를 맞이했다.

“오셨네요.”

“늦어서 미안해. 무려 그랑프리 챔피언을 기다리게 하다니.”

“우승은 고작 한 번밖에 안 했어요.”

치켜세워 주는 오래된 후원자의 멘트에 에단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악수했다.

“어제는 3위였다며.”

“네. 덕분에 아직도 머리가 아프네요.”

“어디 부딪힌 거야?”

“숙취요. 어제 새벽까지 파티였어요.”

그리고 숙취보다도 골치 아픈 일을 저지른 덕분이다. 새벽의 잔상이 다시 떠오르려 하자 에단은 휴대폰을 테이블 아래로 아예 치워 버렸다. 늘 하던 보고는 집어치웠고 루크에게서도 아직 연락은 없다. 마치 자신은 여전히 당당하다는 듯이.

답답한 기분을 애써 감내하느라 짙은 미소를 지어 보인 에단은 온 힘을 다해 상대에게 집중했다.

“메뉴는 적당히 주문해 뒀어요.”

“고마워. 이 나이쯤 되면 고르는 것도 귀찮아지거든.”

손을 닦던 냅킨을 내려 둔 남자는 너스레를 떨었다.

남자는 오래전 드라이버이자 아버지의 친우였다. 리처드 힐. F2까지가 드라이버 커리어의 최고치였던 그는 일찍이 사업으로 전향해 자동차 회사의 후원 및 스폰서를 담당하고 있었다. 오토 메이커이긴 하지만 영국과 유럽의 자동차 점유율 중 하위를 밑도는 소형차를 주력으로 하고 있었고 큰 금액의 스폰서도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은 그런 작은 스폰서 자금들 덕분에 제 손으로 갚아 나갈 수 있는 수준의 부채만을 질 수 있었다.

서버가 음식을 내며 와인을 오픈하자 에단은 저도 모르게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리처드가 그 표정을 보며 잔을 들었다.

“건배만 해 줘.”

“죄송해요. 속이 워낙 안 좋아서.”

“원래 술을 잘 못했잖아.”

“마실 때는 마셔요.”

“그래.”

“정말요. 어제 많이 마셔서 그래요.”

투덜거리는 말을 듣고도 중년의 남자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며 허허 웃음만 지었다. 에단은 변명을 포기하고는 먼저 나온 수프만을 들이켰다.

1년에 한 번씩 보는 얼굴이었기에 이야깃거리는 늘 정해져 있었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다. 올해도 어머니에 대한 질문에 에단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여전하시죠.”

“어떤 의미로.”

“여전히 제가 레이스 카를 타는 걸 마음에 안 들어 하시고 건강하세요.”

“정말 여전하네.”

“요즘 오히려 가끔 전화하세요. 자꾸 화면에 보이는데 위험한 거 아니냐고.”

“그래서 뭐라고 했어?”

“원래도 똑같이 위험했는데 그동안은 화면에 못 잡혀서 모르셨던 거라고 말씀드렸어요.”

시니컬한 대답과 함께 흰 살 생선을 잘게 부서지도록 써는 에단의 모습에 리처드가 웃다 못해 기침을 쿨럭거렸다. 개의치 않은 에단이 생선을 마저 부수자 눈물까지 맺힌 눈가를 닦은 리처드가 와인으로 입가심했다.

“걱정했는데 다행히 괜찮은 것 같구나.”

“부상을요?”

“이목이 집중된 너를 걱정한 거지. 마이클은 포뮬러 원에 들어간 순간부터 모든 것에 긴장하고 압박감을 느꼈어. 성적, 사람들의 시선, 인기. 그날의 레이스. 그 모든 것에.”

“포뮬러 원에 들어온 지도 조금 지났으니까요.”

“지금까지는. 이렇게 말하기 좀 그렇지만 스포트라이트에서 약간 비켜나 있었잖니.”

“굉장히 따뜻하게 말씀해 주시네요. 정확하게 말하면 무대 아래 굴러떨어져 있던 거나 다름없었죠.”

“이젠 정중앙에 설 거야.”

1년 동안 가지각색의 찬사를 들었지만 이런 종류의 말을 받아치는 데는 아직 능숙해지지 못했다. 에단은 입술을 조금 오므렸다가 못 들은 척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처드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재킷의 안쪽에 접어 두었던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에단은 제 쪽을 향한 봉투를 받아 들며 의아하게 물었다.

“뭐예요?”

“내년부터 스폰서 금액을 늘리기로 했어. 그래 봤자 삼백만 달러 정도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구나. 레이스에서 타이어 한 짝 정도는 더 살 수 있겠지.”

갑자기 치솟은 후원 금액에 에단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렇게까지 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정말로요.”

“우리는 린드베르그에 비해 푼돈이라 이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아시잖아요.”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날 듯 들썩이는 에단의 어깨를 보고 리처드가 재빨리 만류했다.

“알아. 농담이야. 그런데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돼. 순조롭게 결재받고 왔어. 그동안 오십만 달러로 네 스폰서 중 상위를 차지하고 있던 게 운이 좋았던 거지. 이제 맨 위에 올리지는 못하겠지만 어디 구석에 이름만이라도 올리게 해 줘.”

“그 오십만 달러가 아니었으면 전 F1 드라이버는커녕 레이스 카 정비를 겨우 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을걸요.”

“그럴 리가. 넌 재능이 있었어.”

“상위 카테고리로 올수록 재능 없는 드라이버는 없어요. 포뮬러 원은 더더욱 그렇죠.”

재능과 돈 그리고 운까지.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만 지켜 낼 수 있는 자리이다. 고작 재능 하나 가지고 칭찬받기에는 우스운 일이라 에단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리처드도 단호했다.

“아니야. 마이클이 늘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버지가요?”

“그래.”

“글쎄요. 별말씀 없으셨을 거 같은데요.”

“리처드. 에단은 내 꿈을 이루어 줄 애가 아니야. 내 꿈을 앞질러 나갈 아이지.”

엄숙한 척 목을 가다듬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처음. 정말이지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쉽사리 믿기지 않아 에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리처드는 그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턱가를 쓸며 회상에 잠겼다.

“네 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별로 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네 말대로 다들 재능이 넘치니까 혹시라도 네가 소홀할까 싶어 그랬던 거 같아. 난 그런 교육법에 찬성하는 편이 아니지만 마이클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어쩔 수 없지. 난 포뮬러 원에 가 본 적도 없는걸.”

“진짜예요? 그런 말씀을 하셨을 줄은 정말 몰랐네요.”

“나에게도 많이 내비치지는 않았어. 가끔 맥주를 잔뜩 마시면 지껄이곤 했지. 더 이상 눌러 왔던 기대감을 감출 수 없다는 듯이 말이야.”

자신과, 그리고 친우의 전성기를 더듬듯 먼 곳을 바라보던 리처드는 다가와 스테이크를 내어 주는 서버의 기척에 자세를 바로 했다.

“어쨌든. 마이클은 네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어. 그것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만 않았으면 너에게 쓴소리를 했던 만큼 좋은 말도 많이 해 줬을 거다.”

“그러셨을까요.”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저 격려를 위해 이런 말을 지어낼 이가 아니었기에 에단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도 네 실력을 믿던걸.”

갑자기 나온 배다른 형제의 이름에 에단은 사정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건 자기가 팔 샴페인을 포디움 세리머니 때 뿌려 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윌리엄이 그랬어?”

“네. 여름휴가 때 한번 보자고 했었는데 안 봤더니 나중에는 서킷까지 찾아와서 그 소리를 지껄이더라고요.”

“꽤나 널 믿는 거 같았는데 그런 속사정이 있었구나.”

기가 막혀 다시 웃던 리처드는 스테이크를 얇게 써는 에단의 손짓에 맞춰 식사를 재개했다. 에단은 골몰하다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래도 스폰서 금액을 굳이 늘리시진 않아도 돼요.”

“린드베르그가 스폰서로 뒤에 서니 이제 이 정도 금액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구나.”

장난이 분명한,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건네진 말에 자꾸 나오는 린드베르그라는 말을 쉬이 넘길 수 없는 것은 오직 에단의 문제였다.

방심하고 있다가 다시 들은 그 이름에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유별나게 굳어 버린 반응이 심상치 않아 리처드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무슨 문제 있어?”

“문제요…….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그래요.”

“물론 F1에 다양한 문제가 있는 건 알고 있어.”

“그렇죠.”

“그래도 그 정도면 꽤 괜찮은 팀이라고 생각했지. 올해 네 성적이 오를 수 있는 레이스 카를 줬고 개발비도 아낌없이 투자한다고 들었거든.”

“그건 그런데요.”

“그럼?”

여기에서 말을 멈춘다면 리처드는 그저 그런 사정이 있나 보구나 하고 신사답게 넘어갈 수 있는 이라는 걸 안다. 리처드는 아버지의 친우들 중에서도 가장 귀족적인 이였고, 갑작스레 사생아처럼 등장한 데다 타 인종의 피가 섞인 친우의 막내아들마저도 한 명의 어엿한 신사로 대접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홀로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감정을 품은 게 바로 몇 시간 전이었기 때문일까. 에단은 맥없이 풀려나오는 소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팀이… 제가 사고 좀 났다고 속력을 줄여서… 사실 어제 포디움에 3등으로 오르기 전까지 제가 몇 개의 그랑프리를 말아먹었거든요. 아세요?”

“알고는 있었지.”

“네. 그래서 오너가 레이스 카의 속력을 줄였어요. 이런 빌어먹을. 아버지가 저를 믿으셨다는 말도 믿기지 않는데 그건 그렇다 치고, 윌리엄까지 저런 정신 나간 이유 때문에라도 제가 빨리 달리기를 원하는데 팀이 속도를 늦췄다고요. 덕분에 전 브레이크를 안 밟고 경기를 치르는 기적을 일으켜야 하죠.”

“그런 이유라면… 이번 성적을 보았으니 차를 개발할 때 다시 속도를 높이는 데에 치중하지 않겠니?”

“안 그러겠대요.”

“감독에게 말해 봤어?”

“팀 오너가… 감독에게 말했대요. 절대. 기필코 속도를 올려서 안정성을 해치지 말라고.”

“아하.”

“젠장. 윌리엄도 믿는데 그 자식이 안 믿을 줄이야. 어떻게 이럴 수 있죠?”

“그 자식? 감독?”

“아니요.”

“팀 오너 말하는 거니? 린드베르그의 젊은 오너 말이야.”

“잘 아시네요.”

“어쩌다 보니 사업하는 이들은 알고 있게 되었지.”

방금 전까지 마다하던 와인 잔을 스스로 집어 든 에단은 얕게 따라진 와인을 단숨에 마셨다. 뒤늦게 눈살을 찌푸리고도 기어코 삼키는 목울대를 지켜보던 리처드는 에단이 진정하도록 잠시간의 시간을 가진 뒤 입을 열었다.

“그, 뭐랄까. 굉장히 친한 친구가 되었나 보구나.”

“제가요? 그 자식이랑요?”

“말하는 걸 보니 그런 거 같은데.”

“네. 그게 좀, 그냥 어쩌다 알고 지내는 사이이긴 해요.”

이렇게 열을 내 놓고 단 한 톨도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되니 순순히 시인했다. 리처드는 연신 턱 밑을 쓰다듬으며 할 말을 골랐다.

“네가 이렇게 화내는 건 윌리엄이 네 고카트 바퀴를 뽑아 숨긴 후로 처음 보는 것 같은걸.”

“그래요?”

“고카트 우승 상금이 터무니없이 적어서 드라이버로 활동하는 데에는 일절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았을 때와 비슷하기도 해.”

“하하.”

“그래서. 말해 봤어?”

“네. 어제요. 술도 마셨겠다 말을 꺼내다가, 제가 좀 과하게 화를 내기는 했어요.”

“뭐라고 했는데.”

“다 때려치우자고 했어요.”

“그건…….”

차마 편을 들어 주지 못하는 리처드의 반응을 눈앞에 두자 에단의 마음이 더욱 참담해졌다. 숨 쉬는 것마저 잊은 것 같았던 고요한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알아요. 실수한 거. 그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어요. 순간 화가 나서 말이 잘못 나온 거예요.”

“네가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서 별로 믿기지 않는구나. 너를 안 믿은 게 그렇게 화가 났어?”

“저는 드라이버예요. 절 믿지 않아 발목을 잡는 이를 주변에 둘 수 없어요.”

“이제 우승도 했으니 조금은 숨을 돌려도 되지 않을까.”

“글쎄요. 챔피언십 우승이 아니면 아직 숨을 돌릴 때는 아니니까요.”

“높은 목표구나.”

“높은 목표를 꿈꾸어야 근처라도 맴돌 수 있죠.”

“…….”

“알아요. 터무니없는 목표인 거. 하지만 최고를 설정하고 달려들어야.”

깍지 끼고 있던 손 중 오른손을 들어 이마 위, 어느 정도의 높이에 손날을 세워 표시하듯 가리켰다.

“그 근처라도 겨우 닿는 법이죠. 그게 제 방법이었어요.”

“그래. 그렇다면 뭐.”

그것이 에단이 바닥부터 기어올라 포뮬러 원의 핵심 드라이버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도와준 마음가짐이라면 그 역시 정답이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리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화가 난다면 내야지.”

“맞아요. 그래서 화를 냈는데……. 그랬죠. 바로 몇 시간 전에.”

“그런 것치고는 아직 불만이 많아 보이는데?”

글쎄. 연인의 머리를 부여잡고 이제 나에 대해 다 잊으라고 외치고 돌아서 버린 이상으로 뭘 할 수 있겠냐마는…….

그 말은 너무한 게 맞다. 알고 있다. 실수이고 사과도 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이런 식으로 끝낼 생각 따위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눈을 내리깐 채 감내하던 루크의 꼴은 제가 무슨 핍박받는 수도승 같은 고고한 꼬락서니였단 말이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너의 분노는 내가 너른 마음으로 품어 주겠다.

심지어 자신에게 한 번의 말조차 하지 않고 저지른 일이었다. 물론 말했다면 죽어도 안 된다고 반대했겠지만. 덕분에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리암의 비웃음이나 샀다.

다시 치솟는 화 때문에 관자놀이의 맥박이 느껴질 지경이라 에단은 그 부근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찬찬히 중얼거렸다. 마치 걸러 내지 못한 분노가 혈관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리처드는 제 감정을 어쩔 줄 모르는 에단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한 일이건 모를 일이건 말해 봐.”

“……안전한 레이스 카가 저를 위한 일이랍시고 했단 말이죠.”

“그래?”

“자기가 다 맞다 이거예요. 나를 위한답시고 자신은 단 하나도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의도가 좋으면 다 좋은 일일까요? 그렇게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 멋대로… 내 의사 따위는 단 하나도!”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던 에단은 제풀에 지쳤다. 그래. 이게 문제였다. 지금껏 걸리적거리는 이 포인트를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억눌러 두었었다.

그 자식은 제가 다 맞다 이거지.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아끼고 멋대로 할 뿐. 상대의 마음 따위는.

“네. 그래서 화를 냈어요. 냈는데 조금 과했던 거 같기도 하단 말이죠. 그게 짜증이 나요.”

“그건 좀 더 설명이 필요하겠는데.”

“아저씨도 아시죠. 루크 린드베르그의 사고.”

“아. 알지. 하필 오토 메이커사의 가족이 자사의 차를 타고 주행하는 중에 난 큰 사고였으니까.”

“그래요. 그래서 저 방어적인… 속도를 낮춰서 방어적으로 나오는 저 모습을 이해하려는, 이해를 끼워 맞추려는 순간 더 화가 나고. 저도 모르겠네요. 지금 이게 뭐 하는 짓거리인지.”

그리고 다시 와인 잔을 들었지만 다행히 아직 서버가 테이블의 사정을 보지 못해 와인 잔은 비어 있었다. 빈 잔을 무심코 들었다가 내려 두고는 초조하게 테이블보를 쥐는 에단의 모습을 생소하게 바라보던 리처드가 대신 자신의 와인 잔을 들고 홀짝였다.

그리고 도무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던 리처드는 차라리 관조를 택했다. 쉽사리 말을 끼워 넣을 수 없는 감정임을 알았다.

그래서 가장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 본다. 일단, 이렇게까지 화가 났음에도 상대를 걱정하는 걸 보면 굉장히 친밀한 사이가 된 것 같기도 했으니까. 조금 이상해 보일 정도로 친밀해 보이지만…….

“설령 사이가 안 좋아지더라도 모든 게 달라지진 않을 거 아니니. 그 역시 F1에 꽤 관심이 있는 거 같던데.”

글쎄……. 어쩌면 제 가치를 지나치게 높게 측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떠오른 생각에 에단은 짐짓 아닌 척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뒤 딴청을 부렸다. 아무래도…… 자신과 나름 그런 관계라고 돈을 퍼부었던 것 같은데 완전히 흥미가 가신다면 이 투자 역시 요원할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재계약 계약서는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이건 리암의 말이 정확했다.

에이전시와 주변 사람들 모두 린드베르그와의 재계약은 이미 따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보고 있지만 이게 자신의 일이 되면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가 없다. 이보다 상위 팀은 내년에 은퇴할 드라이버가 없을 예정이며, 하위 팀과의 계약은 들어올 때부터 흐지부지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어차피 재계약을 할 게 아니냐고.

관계가 어그러진 것이 계약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아직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해 봤자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그렇게 하려고요.”

그 말 그대로였다. 걱정을 해도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일단은 머리를 비워야 했다. 비울 수밖에 없다. 쓴웃음이 지어졌다. 이것마저도 자신은 루크의 판단을 기다려야만 한다.

에단은 마지막 차례로 나온 자그마한 디저트를 노려보다가 포크를 거칠게 쑤셔 박았다.

***

탕. 탕. 탕. 일정한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쳐 다시 손아귀 안으로 빨려드는 공의 소음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길게 이어지는 랠리를 견디다 못한 사라의 눈동자가 결국 옆으로 굴렀다.

오늘 스케줄을 비우라 사람을 들들 볶아 댔었던 그녀의 보스는 소원대로 오늘을 비워 주었음에도 오전 느지막이 들어와서는 무료한 표정으로 제 옆에 앉아서는 공이나 던지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무슨 일이 있느냐, 이럴 거면 오전을 대체 왜 비워 달라고 한 것이냐 따졌겠지만 어떠한 본능이 머릿속에 적색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적색 신호를 무시하기 위해 그녀는 루크가 여기에 있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를 생각 중이었다. 에단이 어제 기적적으로 포디움에 올랐으니 인터뷰가 추가로 잡혔을지 모른다.

아니면 팀의 회의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트레이닝이 추가되었거나. 부디 그런 것이기를 바란다.

루크는 오후의 일정이 있는 사람치고 지나치게 무료한 표정이었다. 리클라이너에 길게 기대앉아 오른팔만을 움직여 공을 튀긴다. 공은 에단이 가끔 트레이닝을 할 때 벽에 던지던 물건이었다.

새파란 색의 공 세 개를 던지던 제 연인은 어디에 두었는지 루크는 손목의 스냅만을 이용해 공을 벽에 던졌다 받아 내기를 반복했다.

탕, 하는 소리가 일순간 거세게 울렸다. 각도를 비켜 간 공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호텔 룸 한가운데로 떨어진다. 부드러운 카펫 위로 떨어진 공이 멈추자마자 그녀는 재빠르게 질문했다.

“보스. 크리스가 대신 들어간 IDT 인수 추진 미팅 안건은 확인하셨죠?”

“확인했어. 그대로 해.”

“정말 확인하신 거 맞죠?”

“Lot 융합 플랫폼 설계와 AI 기반 빅 데이터.”

“네. 맞아요.”

그럼 확인했다는 체크를 해 주시지, 라는 말을 홀로 삭인 그녀가 다시 노트북 패널을 노려보았다.

달칵거리는 마우스 클릭 소리만이 울리던 호텔 룸의 문이 열렸다. 회의에 참석하느라 크리스는 타이를 제대로 매고 클래식한 둥근 금테 안경을 콧잔등에 걸치고 있었다. 사라의 곁에 앉아 있는 루크를 보고는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바쁘다면서 나만 들여보내더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안 바빠졌어.”

“왜.”

“알아서 뭐 하게.”

“뭐?”

반문하는 크리스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장이라도 말을 쏟아 내기 전 안경을 치켜올렸던 크리스의 눈에 어깨를 달싹이는 사라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크리스를 향해 입 모양만을 천천히 움직였다.

건드리지 말아요. 평소라면 편을 들어 주고도 남았을 그녀의 반응이 심상찮은 것을 깨닫자 크리스는 막 벌렸던 입을 간신히 다물었다. 그리고 찬찬히 눈을 내렸다.

네이비 컬러의 라펠 슈트와 셔츠, 타이, 몽크 스트랩 슈즈와 정사각형 다이얼 워치까지.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양새로 앉은 루크는 시선을 허공에 둔 채 한쪽 다리를 의자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뭐랄까. 권태라는 감정을 형상화한 양 무감각해 보였다.

크리스는 고갯짓을 굳이 숨기지 않고 사라에게 물었다.

“왜 저래?”

“그건 저도 몰라요.”

대답한 그녀는 다시 입 모양만으로 덧붙였다. ‘아직은 몰라요.’ 무언가 짚이는 게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루크를 지나쳐 사라에게 다가간 크리스가 서류를 올려 두며 물었다.

“아. 린드베르그 레이싱 감독이 우리 보스 한번 보고 싶다는데 그거 뭐라고 답해?”

“그냥 바쁘다고 해 주세요. 없다고 해도 되고요.”

눈앞에 뻔히 있는 사람을 없다고 하라는 말에도 크리스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루크는 이런 때가 가끔 있었다. 모든 의욕을 거세당하기라도 한 듯 어떠한 반응도, 대꾸도 없는 순간이. 그래도 요즘은 포뮬러 원이나 이거저거 헤집고 다니면서 꽤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나 싶었는데 다시 병이 도진 모양이었다.

사라에게 다가왔던 길 그대로 돌아 나가려던 크리스는 무릎에 걸리적거리는 감촉에 시선을 내렸다. 긴 다리를 뻗어 갈 길을 가로막은 루크는 천천히 허리를 세워 앉더니 물었다.

“어디 있어?”

“누구.”

“레이싱 팀 감독.”

“아래 서성거리고 있더라.”

“할 말 있으면 지금 올라오라고 해.”

무료한 표정과 달리 선선히 나온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크리스는 바로 대꾸하지 않고 아래에서 시간을 때우던 감독의 얼굴을 떠올렸다. 꽤나 결연한 표정으로 죽치고 앉아 있었지만 루크가 이래서야. 그로서는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

하지만 굳이 그 말을 꺼내지 않은 크리스는 성실하게 감독을 불러들인 뒤 룸을 나갔다.

그로부터 5분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인기척이 룸 안으로 들어섰다. 감독은 사라에게 먼저 인사해 보이고 루크를 바라보았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 태도에도 감독은 개의치 않았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었다. 얼굴이라도 마주한 게 다행이지.

비서의 안내대로 맞은편에 앉은 감독은 짧게 심호흡을 내뱉더니 결연한 표정이 되어 아래에서 내내 되풀이하던 말을 꺼냈다.

“이번 시즌 저희 레이스 카에 대해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해 봐요.”

“저 역시 올해에 모든 것을 걸어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요. 감독님 원래 리암 편 아니었어요?”

아무렇지 않게 건네지는 말에 반박하려던 감독은 심중을 꿰뚫어 보는 푸른 눈동자에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래도 그간의 대화로 나름의 학습이 되었기에 오히려 어깨를 펴며 의연한 척을 했다. 대꾸하느니 휘말리지 않고 그저 자기 할 말을 하는 것이 루크 린드베르그를 대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컨트롤이 어렵다고 해도 출력을 최대한으로 내는 세팅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컨트롤을 잃으면 탈락이잖습니까.”

“에단의 집중력이 대단합니다. 리암은 조금 어려움을 겪겠지만 그래도 최고의 성적을 낼 수 있는 드라이버가 있다면 그 드라이버를 밀어주는 게 옳은 일이죠.”

그 말을 늘어놓는 감독의 얼굴에는 일말의 주저도, 고민도 비치지 않는다. 어제의 에단처럼.

위험하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걸 무시할 수 있는 거지. 루크는 도무지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의 문자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 휴대폰을 손아귀가 저릿할 정도로 꾹 쥐어 본다.

“그렇군요.”

“그러면 세팅을.”

“그래서요.”

반색하는 말을 자른 그는 응시하는 시선을 굽히지 않았다.

“감독님의 의견이 바뀐 게 내 의사 결정을 달라지게 할 이유가 될까요?”

바로 대꾸하지 못하는 감독을 마주 보며 루크는 답답한 가슴 부근을 문질렀다. 글쎄. 어제 제 멱살을 잡은 연인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았는데 고작 감독의 의견 따위야.

이 정도로 설득이 되진 않는다. 해 주고 싶긴 한데. 동시에 결코 해주고 싶지 않다. 이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차라리 한쪽으로 기울었으면 좋겠다. 루크 역시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생각에 골몰했던 에단이 적요를 알아차리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주변은 어느새 당연히 들려야 할 기계음마저 멈춰 있었다. 턱 밑의 땀을 닦으며 손을 뗀 그가 일어서자 함께 있던 세 명의 미캐닉들의 손도 멈췄다. 그중 한 명이 옅게 깔린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에단. 이제 들어가게?”

“지금 몇 시지?”

“9시.”

“10시인 줄 알았는데 아직 아니네. 먼저 들어가요.”

상냥하게 대답한 에단이 서스펜션을 들여다보기 위해 자세를 낮춰 고개를 꺾는 것을 보며 모두가 다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서스펜션 아래로 그들이 다시 자리에 앉는 것을 본 에단이 고개를 들고 손짓했다.

“먼저 들어가라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들어가. 이건 우리가 할 일이라니까. 드라이버는 가서 컨디션 조절이나 해.”

“이거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어요.”

이제는 연인으로서 쓸데없는 일상 보고를 할 필요도 없어졌다. 계약서에 명시된 것 때문에 한두 번은 보내야 할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지만. 다시 떠오르는 상념에 에단이 이를 악물어 생각을 바꾸었다.

그런 그를 보던 미캐닉이 제안했다.

“그러면 차라리 바깥바람이라도 쐬든가.”

“아까 낮에 나갔다 왔어요.”

“여자 친구?”

“스폰서.”

“루크 린드베르그?”

예상치 못한 순간 불쑥 끼어든 이름에 에단은 다시 한번 이를 악물어야 했다. 틈만 나면 끼어드는 생각을 지우면 뭐 하는가. 주변에서 무슨 일만 생기면 루크의 이름부터 꺼내는 것을.

“아뇨. 어릴 때부터 후원해 줬던 아버지 친구분이요.”

태연하게 대답하기 위해 목에 힘을 주느라 목소리가 조금 엇나갔다. 이를 눈치챈 다른 이가 고갯짓했다.

“그 인간 여름휴가 때도 너 불러낸다며?”

“또 그러진 않겠죠.”

이젠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그런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미캐닉이 멋대로 지껄였다.

“글쎄. 그런 놈들은 남이 어떻든 관심이 없어. 자기 기분이 우선이지.”

넌 나를 위해 했다고 해. 그 머릿속에 자기가 포기하는 법 따위는 모르지.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어젯밤부터 제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을 미캐닉이 그대로 읽은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느낌이 달라서 에단은 쉽사리 긍정하지 못했다.

“그렇게까지 멋대로 굴지는 않아요.”

그저 이 대화를 넘기기 위해 편을 들어준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모르는 미캐닉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아까 감독이 우리 오너 만나러 간 거 들었어?”

“몰라요.”

“감독 말로는 죽어도 네 말 들어 주지 말라고 했다던데.”

“그 개자식을 진짜……!”

마침 손에 걸린 부품을 강하게 잡아당기려던 에단의 팔에 미캐닉이 재빠르게 매달렸다.

“그거 조심해!”

“아. 젠장. 미안해요.”

“거기 뜯으면 재조립 한참 걸려. 오늘 못 들어갈 각오 해야 돼. 여기까지만 하자.”

“……그래요. 역시 그렇겠죠.”

“자. 원하는 만큼 해체해 줬잖아. 뭘 보고 싶은 거야.”

“글쎄요. 전부?”

어차피 미캐닉들만큼 레이스 카에 대해 알 수는 없었지만 한 번이라도 속 시원하게 보고 싶었다. 어떤 요소를 더하고 어떤 요소를 빼야 조금이나마 더 나갈 수 있을지. 그래 봤자 이미 개발된 부품을 갈아 끼워 볼 궁리밖에 할 수 없지만.

이제 와 개발을 독촉하기에는 벌써 11월. 고작 3개의 그랑프리만이 남아 있다. 이미 내년 레이스 카 개발에 집중하며 올해 레이스를 포기하다시피 하는 팀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더 이상의 개선점을 찾으려 드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지나친 욕심이 맞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팔짱을 낀 그가 레이스 카의 정면에 서 뼈대를 드러낸 현대 기계 공학의 정점을 노려보았다.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었던 포인트를 하나씩 다시 되짚었다.

“서스펜션은 이미 가볍고.”

“그래.”

“노즈도 이미 한계만큼 짧아졌고.”

“그렇지.”

“프론트 윙의 각도도 더 눕힐 수 없고. 리어 윙의 변형도 더 이상은 어렵고.”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가며 꼽는 특징을 듣고 있던 덥수룩한 수염의 미캐닉이 말을 거들었다.

“그래. 그걸 다 눈으로 확인하니 이제 속이 시원하냐. 너 때문에 수석 엔지니어가 아까 문간에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는지 알아?”

“왜요. 그냥 들어오지.”

“네놈에게 잡혔다가 자기도 같이 뜯게 될까 봐 도망간 거잖아. 이 자식아.”

“뭐 어때요. 이젠 더 뜯을 것도 없는걸.”

이젠 정말 더 볼 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 답답함은 어떻게 해소해야 할 것인가.

엔진이라도 뜯어 봐야 하나. 골몰하며 레이스 카의 옆으로 다가가 정교한 부품으로 짜인 엔진을 하염없이 노려보았다. 아예 무릎을 구부려 앉은 자세로 한참이고 들여다보는 눈빛이 심상찮아 미캐닉들이 서로를 돌아본 뒤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에단. 엔진은 안 되는 거 알지?”

“알아요.”

전혀 알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었지만 대답만큼은 바로 나왔다.

레이스 카를 밝히는 공업용 조명보다 형형한 눈빛으로 엔진을 쏘아보던 에단은 결국 버티던 힘을 빼고는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윤활유가 범벅인 손을 쓱쓱 닦더니 되는 대로 머리를 벅벅 문지르던 그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기적을 만들고 있었던 거였네요, 우리는.”

“기자들이 몇 번이고 떠들었잖아. 이건 기적이었어. 그 속도에서 낼 수 있는 아슬아슬한 타이어 그립을 네가 기적적으로 잡았던 거지. 더 이상은 레이스 카도 한계야.”

“속도를 줄이는 게 옳았다는 거죠.”

“감독은 너의 성적이 워낙 잘 나왔으니 팀 오너에게 말하러 간 거지. 우리 중에서도 몇 명은 그 괴물 같은 속도보다 지금의 밸런스가 낫다는 의견이야.”

드디어 그만둘 생각인가. 기대감에 부풀었던 세 명의 미캐닉은 그다음 비딱하게 고개를 튼 채 입꼬리를 비트는 반응에 희망의 불씨를 꺼뜨렸다.

“그런데 우리가 원래 이해되는 레이스 카를 만들지는 않잖아요.”

“그걸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냐.”

“되는 데까지 타고나면 그걸 치운 다음 내년에 새 레이스 카를 타는 거지. 그 레이스 카도 왜 그런 속도가 나는지 이해는 잘 안 되지만. 그렇잖아요?”

“딘은 요즘 네 주행 걱정 때문에 피트월에 앉을 때마다 기도하고 앉는다더라. 알아?”

“그건 좀 미안하네요.”

“미안하면 브레이크를 자주 밟아. 제발.”

하지만 이 레이스 카를 타서는 도무지 브레이크 밟을 틈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안정적이다 보니 레이트 브레이킹을 한계까지 해도 충분히 버티다가 방향을 꺾어 준단 말이지. 굳이 이 말을 꺼내지 않는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모두의 말대로 레이스 카에서 더 이상 손댈 수 있는 곳은 없다.

이미 무리가 가고 있는 얇은 서스펜션을 몇 번이고 손으로 부드럽게 매만지던 에단이 결국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가요, 라는 짧은 말에 미캐닉들 역시 짐을 챙겼다. 그들을 앞서 보내고 마지막까지 레이스 카를 노려보던 에단도 결국 등을 돌렸다. 조명이 꺼지고 새까만 어둠이 골조를 드러낸 레이스 카 위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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