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20x4 싱가포르 그랑프리 - 마리나 베이 스트리트 서킷. (14/20)

14. 20x4 싱가포르 그랑프리 - 마리나 베이 스트리트 서킷.

트랙 길이 5.073km, 레이스 랩 61랩, 레이스 거리 309.316km, 랩 레코드 1:45.599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주변 도심을 둘러 건설된 시가지 서킷은 화려한 조명 아래 달리는 나이트 레이스였다. 트랙 폭이 좁고 노면이 고르지 않음에도 7단으로 통과해 시속 300km의 최고 속도를 발휘해야 하는 레이스는 연일 최다 관람객 수를 경신하곤 한다.

그리고 작년 이 축제의 한가운데에서 린드베르그 레이싱으로 이적이 발표되었던 에단에게 모두의 이목이 다시 한번 집중되고 있었다.

올해 드라이버 순위는 5위. 뚜렷한 드라이버 챔피언이 아직 윤곽을 드러내지 않아 1위부터 5위까지 순위가 점수 차가 매우 조밀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순위를 끌어올리게도 곤두박질치게도 할 수 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레이스 전날 예선에서 벌어진 사고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기자들이 터트리는 플래시는 마치 할리우드의 시상식을 방불케 할 만큼 눈부셨다. 루크는 그들의 앞에 서기 전부터 경직되어 있던 린드베르그 레이싱 감독의 얼굴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딱딱하게 굳어 곁에 서 있던 얼굴은 플래시에 압도된 듯 더욱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발언권을 얻은 기자가 바로 질문했다.

“린드베르그 레이싱의 에단이 폴 포지션을 차지했는데요. 축하할 일이지만 섹터 3에서 벌어진 크래시로 레이스 카의 파손이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내일 레이스에 지장이 없을까요.”

“지금 모든 미캐닉들이 달려들어 최선을 다해 수리 중입니다.”

“차량 결함일까요. 아니면 드라이버의 컨트롤 실수였을까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레이스 카를 수리하는 데에 먼저 매달리고 있습니다.”

“내일 폴 포지션으로 에단이 레이스를 치르고 3등 안에 들어 포디움에 오른다면 드라이버 순위도 3위 안까지 예측할 수 있다는 건 알고 계셨죠?”

“여기 계시는 어느 누구보다도 저희 팀이 가장 잘 알고 있었죠.”

“내일 기권인 경우에는 7위까지 순위 하락이 예상되는 것도 아마 아실 겁니다.”

“그럴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

“에단의 강점은 고속 서킷에서 발휘된다는 평이 많습니다. 좁고 까다로운 시가지 서킷에서 지나치게 속도를 올렸다는 평가가 지배적인데 팀은 어떻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글쎄요. 드라이버는 늘 최고를 위해 달려야 하는 이들이니까요. 이런 점이 에단을 이 자리까지 올려 준 거겠죠.”

“에단이 지난 그랑프리에서 겪었던 사고의 영향이 이번 사고에 있었을까요?”

“그 영향은 결코 아니라고 대답드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 질문 하나만 받겠습니다.”

마지막 질문의 발언권을 얻어 낸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자의 제스처를 본 루크가 콧잔등을 일그러뜨렸다. 일어나느라 시간을 끌고 주변을 둘러보는 자신만만한 모습은 자신의 질문이 핵심을 찌를 것이라 장담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지금 이 타이밍에서 저런 인물이 장담하는 질문이란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에 우호적인 내용이 아닐 게 뻔했다.

“우리 모두가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의 퍼스트 드라이버가 누구인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등록은 리암 안토니에로 되어 있지만 이번 시즌이 진행됨에 따라 에단 한에게 더욱 무게와 기대가 주어지고 있는 걸 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난 그랑프리부터 이번 퀄리파잉의 리타이어까지 에단은 기대가 주어질 때마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F2의 챔피언이었던 경력으로 F1의 루키가 되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자마자 바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던 것처럼요. 에단에게 린드베르그 레이싱의 미래를 걸 퍼스트 드라이버의 자질이 있을까요?”

“그건 의미 없는 질문이네요. 린드베르그 레이싱은 어느 드라이버에게 더 무게를 두지 않고 리암과 에단 모두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에단이 오늘 퀄리파잉에서 크래시를 겪었지만 리암이 5위로 퀄리파잉을 마쳤고 내일 본선 레이스에 진출할 겁니다. 두 사람 모두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고 있고요. 질문은 여기까지 받겠습니다.”

웅성거림 사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 기자를 향해 루크가 눈짓했다.

“누구야?”

“어디 기자인지 알아 올까요.”

“응. 앞으로 이런 자리 오기 어렵게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고.”

그리고 그 잠깐 사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내려온 감독을 양팔 벌려 맞이했다.

“론. 수고했어요. 그런데 혹시 커뮤니케이션 다시 배워 볼 생각 없어요? 내가 괜찮은 사람을 한 명 알거든요. 원하면 소개해 줄게요.”

루크의 당당한 제안에 감독은 기자들을 마주할 때보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팀 빌딩으로 가기 전 도대체 레이스 카가 도대체 어떤 꼴인지 궁금했던 루크는 잠깐 피트에 들렀다. 적어도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엔지니어가 한 대의 레이스 카에 매달려 있었다. 그사이 업그레이드를 열심히 했는지 레이스 카는 그의 기억과 약간 다른 도색이 되어 있었고 지금은 산산조각으로 분해되어 있었다.

수리를 위해 일부러 분해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충돌로 인한 손상도 지금의 산산조각에 큰 기여를 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특히 앞쪽 왼쪽 바퀴가 달려 있는 꼴이 말이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고개를 쭉 빼 어깨 건너로 넘어 보던 루크가 결국 손가락질하며 감독에게 외쳤다.

“이거 지금 테이프로 붙이는 겁니까?”

“원래 이렇게 합니다. 안전에 중요한 부속품은 아니니까요.”

“진짜? 그럼 저기 붙이고 있는 접착제도 그렇게 특수한 건 아니겠네요. 이게 진짜 괜찮다고?”

“접촉 사고만 안 나면 무사합니다.”

그래? 만약 사고가 난다면? 이어서 내뱉으려던 질문은 피트 앞에 가림막을 쳐 가려 둔 위로 카메라의 렌즈가 불쑥 올라오자 달려가는 미캐닉의 고함에 파묻혔다. 온갖 욕설이 난무하는 꼴을 지켜보던 그는 마치 조립식 장난감처럼 분해된 레이스 카를 노려보았다.

속도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레이스 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고철로 지탱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 고철을 이루어 낸 소재가 공학의 첨단을 달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드릴 돌아가는 소리와 고함을 견디다 못한 루크는 피트를 빠져나와 팀 빌딩으로 돌아갔다. 드라이버 대기실 앞에 얼쩡거리는 에단의 매니저를 마주한 루크가 문을 손가락질했다.

“여기 있습니까?”

“네. 그렇기는 합니다만…….”

“합니다만?”

“지금 에단의 상태가 많이 안 좋거든요.”

“그럼 당장 병원으로 가야지. 지금 기자들 때문에 여기 있는 겁니까?”

덥석 문고리에 올라온 손을 본 조지가 기겁해서 변명했다.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폴 포지션인데 리타이어 위기이니까요. 예민하기도 하고 기분이 아주 안 좋다는 뜻입니다.”

“그건 다행이네.”

그리고 문을 바로 열 듯 움직이는 루크의 팔을 본 조지가 기겁하며 붙잡았다.

“안 돼요. 지금은.”

“왜요.”

“지금 기분이 아주 안 좋다니까요.”

“그래서 들어가서 위로하겠다는 건데. 뭐 불만 있습니까?”

뻔뻔스러운 얼굴을 본 조지의 미간은 찌푸려지다 못해 눈썹이 서로 달라붙을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반응에 조지가 손을 휘저으며 재차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다시 설명드리자면, 내일 폴 포지션으로 본 레이스에 나서서 성적이 좋으면 올해 챔피언도 노릴 수 있는 상황인데, 지금 레이스 카가 내일 출전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태라니까요.”

“그러니까. 들어가서 위로하겠다고. 우리 대화가 안 되는 것 같은데 나가서 머리 좀 식히고 오는 게 어때요.”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머리 식히고 와요.”

대답을 듣고도 재차 말하는 루크의 손이 오히려 조지의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먼 복도를 가리키기까지 했다. 루크의 손끝에 조지의 시선이 절로 따라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뻔뻔한 얼굴을 마주 본다. 동그란 조지의 얼굴이 그려 내는 경악에도 루크는 흔들리지 않는 미소를 보이며 다시 한번 부드럽게 권유했다.

“나가서 머리 식히고 와요. 빨리.”

“그… 그게……. 에단은 그러니까 말이죠.”

“대화가 전혀 안 되네. 들어갈게요.”

이번에는 조지의 만류보다도 재빠르게 문을 열고 들어간 루크가 문을 닫았다. 닫으며 잠금장치를 꾹 눌러 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부는 창틀 아래까지 블라인드를 내려 뒀으면서 불도 켜지 않았다. 어두웠다. 기자의 카메라를 피하기에는 현명한 방법이었다. 간신히 새어 드는 볕에 의지해 좁은 룸 안의 실루엣이 보였다.

에단은 뻔히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방구석의 소파에 주저앉아 땅을 보고 있었다. 양 허벅지에 걸치듯 두었던 팔 중 왼팔을 들어 제 이마를 짚어 낸 것이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잠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크의 시선이 에단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살폈다. 누워 있지도 않고 어디 하나 부러진 곳도 보이지 않는다.

겨우 끼워 맞춘 일정대로 싱가포르의 창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랜딩하자마자 들은 것이 퀄리파잉에서 에단이 1위의 기록을 내어 본선의 폴 포지션을 차지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마리나 베이 그랑프리 트랙에 도착할 무렵에는 에단의 레이스 카가 사고로 파손되었다는 소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드라이버의 건강 상태에는 문제가 없었고 레이스 카에서 내리는 사진도 똑똑히 받아 보았지만 소식을 전해 듣는 것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주먹을 풀어 내며 루크는 한 걸음씩 에단에게 다가갔다.

이마를 짚은 에단의 발치에 서, 수그린 목덜미를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물었다.

“나 나갈까?”

“아니.”

뜻밖에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이마를 짚고 있던 에단은 머리를 넘겨 마구 헝클어뜨리더니 고개를 들어 루크를 쏘아보았다. 무슨 소리냐는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보다 조금 격정적이고 짜증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꺼지라는 게 아니면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해 줄까.”

“뭘 해 주게요.”

“뭐든.”

“……이리 와요.”

제 옆을 건성으로 눈짓하는 모습에 루크는 낮은 소파에 잠기듯 앉았다. 엉덩이를 떼어 조금 거리를 두고 앉는가 싶던 에단이 몸을 휙 돌렸다. 털썩 드러눕는 에단의 뒤통수가 닿는 순간 루크는 일순간 허벅지를 굳혔다.

긴장으로 딱딱해진 기색이 느껴질 텐데 에단은 눈꺼풀을 내리감은 채 몸을 비키지 않았다. 소파 등받이 위 납작하게 눌려 내려진 블라인드 살 사이로 가늘게 스며드는 볕이 얼굴에 드리워진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루크는 힘이 잔뜩 들어간 허벅지의 긴장을 천천히 풀었다. 에단이 느끼지 못하도록.

사실 눈을 감고 남의 허벅지를 제멋대로 차지한 이는 그런 것을 신경 쓸 틈이 없어 보였다. 눈을 감고도 한껏 심란해 보이던 에단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미안해요.”

“어떤 게?”

“리타이어.”

“최선을 다해 고치고 있잖아요.”

“알아. 안 된다는 거.”

아랫입술을 윗니로 짓씹자 터질 듯 붉어지는 것이 한순간이었다. 말릴까 싶어 루크의 손이 움찔거리자마자 에단은 다행히 빠르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프론트 윙만 날아간 거면 모르겠지만 바지 보드도 완전히 날아갔고. 타이어도 밀렸어. 중심축이 흔들렸을 거야. 느껴졌어.”

“그랬어?”

“빌어먹을. 제일 열받는 건…….”

이 순간 위로 훅 바람을 불자 이마 위에 헝클어져 있던 앞머리가 팔락이듯 흩날렸다.

“날씨나 다른 문제가 아니라는 거야. 순간 컨트롤을 잃었어. 다 내 잘못이야.”

“난 레이스 카가 컨트롤을 벗어났다고 들었어.”

“그게 내 잘못인 거지.”

“레이스 카의 문제일 수도 있고.”

그 대답에 눈을 뜬 에단은 명료한 시선으로 루크를 오래도록 쏘아봤다. 위로하고자 한 말이었는데 다른 의미로 기운을 북돋아 준 것은 맞는 것 같았다. 편을 들어 줘도 화를 내니 루크는 가끔 드라이버라는 생물체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비난해. 그게 더 편해.”

“솔직할 수는 있는데 비난할 말은 없어.”

“그럼 솔직하기라도 해 봐.”

“안 다쳐서 다행이네.”

“…….”

“그게 다야.”

루크는 손을 들어 이마 위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검지로 치워 냈다. 에단은 아무리 쏘아보아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그를 마주 보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잘게 떨리는 눈꺼풀과 막막해 보이는 표정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오래도록 이어진 눈초리를 드디어 못 견디겠는지 에단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앉아 몸을 틀어서는 루크를 마주 응시했다.

루크는 그 시선에 별말 없이 상대의 흰 티셔츠의 밑단에 손을 밀어 넣었다. 헐렁한 옷깃을 들어 올리자 왼 갈비뼈와 장골 위의 매끈한 복근이 촘촘한 햇볕 아래 드러났다.

드러난 피부가 손바닥 아래 감추어졌다. 이제야 멍이 빠져 가는 자리에 얼룩덜룩한 색이 번져 간다.

엄지로 그 자리를 꾹 눌러 보던 힘이 강해졌다. 갈비뼈를 휠 듯 꾹 누르던 손가락은 에단이 눈썹을 움찔하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신 기어 올라간 손이 옷을 걷어 올렸다. 점검하듯 이어지던 손끝은 얕게 융기한 흉근의 언저리를 겉돌다가 가슴 가운데의 돌기를 문질렀다.

별말 없이 입매를 굳힐 뿐인 얼굴을 보고 손가락이 더욱 대범해졌다. 덧그려 굴릴 때마다 알맞게 강도를 더해 가는 돌기를 내려다본 에단의 표정에는 다양한 감정이 깃들었다. 어이없어 보이기도 했고 약간 웃음을 눌러 참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그런 다채로운 감정을 느껴도 되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게.”

“…….”

거기에도 별말이 없었다. 어딘가 부루퉁한 것 같은 에단의 표정을 보기 위해 루크가 조금 더 몸을 가까이 했다. 뺨을 비빌 듯 얼굴을 가까이 했다가 슬쩍 입술이 맞부딪치도록 문질렀다.

무슨 말이든 할 듯 굼질거렸던 입술이 선처럼 작은 틈을 두고 다시 다물렸다. 그 사이 새어 나오는 숨결에 입 맞추듯 가벼운 접촉을 하던 루크는 후 하고 바람을 작게 불었다. 간지러움에 무심코 웃었던 에단의 얼굴이 다시 웃음기를 잃어 갔다.

“잠깐만…….”

“왜.”

“레이스 카는 때려 부숴 놓은 주제에 여기서 이래도 되는지 갑자기 자괴감이 들어서 그래.”

그 말대로 고뇌가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오늘따라 제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눈꼬리 하나, 입술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신기했다. 루크는 입술을 가벼이 맞추다가 손끝을 더욱 힘주어 올렸다.

상의는 어깨에 걸쳐지다시피 했고 가슴을 쥐어 오는 순간마다 에단은 섞고 있던 혀를 멈췄다. 혀뿌리를 그 순간마다 살살 핥아 내며 손을 대범하게 움직였다. 가슴을 세게 쥐었다가 등으로 넘어간 손바닥이 등허리를 문지르며 다시 앞으로 넘어온다.

슬쩍 눈을 뜨자 에단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꾹 감겨 자잘한 떨림이 보이는 눈가를 응시하던 루크도 눈을 슬쩍 감았다.

그러고도 커다란 손바닥은 갈비뼈 부근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

억지로 끼워 맞춘 일정이라 해도 루크 린드베르그가 싱가포르에서 할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쉬웠다. 싱가포르에서 치러질 린드베르그 레이싱의 그랑프리 참관을 시작으로 이어질 일정을 따라 일본, 그리고 세계 자동차 시장의 선두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을 순회하는 일정이었다. 거기에 빡빡한 싱가포르의 규제를 기준으로 전기 차 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겠다는 목표가 거창하게 달라붙었다.

그러한 공식 발표에 힘입어 연이은 교류와 포럼을 거치니 정작 목표였던 F1 싱가포르 그랑프리는 종료되었고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은 짐을 싸 다음 개최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에단 역시 그 팀의 일원으로서 호텔을 떠난 게 1시간 전이었다.

사람 하나가 나간 자리만큼 헝클어져 있는 침대를 바라보던 루크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핑계를 만들라고 지시를 내린 것은 맞지만 앞으로의 일정이 만만찮았다. 사라가 복수를 한 것이 분명했다.

“이건 좀 너무한데.”

가장 빠른 일정은 5시간 뒤 이른 아침부터 이어졌다. 모니터에 떠오른 시간을 손가락으로 튕기듯 툭 쳐 낸 루크가 그 너머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야경으로 시선을 넘겼다. 적도의 열기가 어른거리는 것만 같은 마리나 샌즈 베이의 야경이 맞은편으로 보이고 있었다.

싱가포르 정부 주도하에 세워진 마천루 맞은편, 자본의 정점을 찌를 듯 세워진 월드 와이드 체인 호텔 최상층부는 적막조차 숨죽인 듯 고요했다. 그 고요를 깬 휴대폰 소리가 울렸다. 무료하게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루크는 휴대폰을 가볍게 건드렸다. 시차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보스. 아까 지시하신 대로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에 전달했어요.

“뭐래?”

- 감독이 만남을 요청하던데요. 잠시 연락만이라도 가능하냐고 물었어요.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래서 일부러 출국 후 전달하라고 한 것이기도 했고.

“출국한 거 아니었어?”

- 다음 개최지에서요.

“어디더라.”

- 일본이요.

“나 보기 전까지 일단은 내 말대로 해야겠네.”

- 보스께서 연락도 안 받아 주신다면요.

“바쁘다고 해.”

- 알겠어요.

“실제로도 바빠. 일정 이게 뭐야. 나 동아시아에 오기만 손꼽아 기다렸나 봐.”

- 당연하죠. 저희가 몇 번이나 말했었는데 보스가 다 무시하셨었잖아요.

일정을 노려보던 루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도 목소리는 가벼웠다.

“이 정도 일정이면 감독이랑 말할 시간도 없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겠어.”

- 그런 식으로 전해 둘게요.

“응. 오토 메이커부터 정부 관계자까지 모조리 만나느라 바쁘다고 해.”

전화가 끊기고 루크는 바라보고 있던 모니터의 보고서 옆 너른 여백에 띄워져 있는 스포츠 기사를 바라보았다. 트랙처럼 검은 배경에 붉은 테두리가 둘린 포뮬러 원 전용 페이지였다.

손가락을 움직여 정지한 모니터의 영상을 재생시켰다. 굉음이 순식간에 울렸다. 동영상에는 에단이 이번 싱가포르 그랑프리에서 리타이어 하던 순간이 담겨 있었다. 균형을 잃은 레이스 카가 사정없이 코너에 처박히자 관중석의 들썩거림이 파문처럼 퍼져 나간다. 해설자의 목소리도 급박했다.

“에단! 대형 사고입니다!”

움직임이 한참 없던 레이스 카는 허겁지겁 달려온 마샬이 들여다보자 그제야 콕핏 부근에서 움직임이 보인다. 느릿하게 인영이 솟아오르고 다리가 길게 움직여 땅을 디딘다. 허리를 편 뒤 픽 고꾸라질 듯 어지러웠던 에단은 꿋꿋이 서서는 손을 흔든다. 마치 괜찮다는 듯이. 문제가 없다는 듯.

저러니까 그랬지. 당일에 그저 어디에 쓸렸다고 주장한, 불그스름한 자국만 남은 자리들이 있었다. 왼쪽 허벅지 바깥쪽과 엉덩이 인근, 그리고 등허리까지.

어차피 숨겨지지도 않을 걸 왜 거짓말을 했을까. 하루가 지나 푸르스름하게 멍이 올라온 몸을 감추겠다며 방 안에서도 꿋꿋이 티셔츠와 트레이닝팬츠를 입고 있던 에단은 방금 전까지 침대맡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저 미친 레이스 카를 타겠다고 다시 떠나갔다.

야경마저 사그라드는 싱가포르의 새벽, 축제의 잔열이 스러지는 것만 같은 허공에 오래도록 눈을 두었던 루크가 눈을 꾹 감았다. 옅은 두통이 연이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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