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20x4 멕시코 그랑프리 - 에르마노스 로드리게스 서킷. (13/20)

13. 20x4 멕시코 그랑프리 - 에르마노스 로드리게스 서킷.

트랙 길이 4.313km, 레이스 랩 71랩, 레이스 거리 305.584km, 14개의 코너, 랩 레코드 1:17.124, 해발 2200m 고도의 서킷.

요즘 사라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있었다. 자신의 바람의 가능성을 점치며 그런 일이 있을 경우 저를 고소하겠다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하는 보스의 새로운 연애라든가. 세상에. 사라는 이 대목에서 잠깐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분노했다.

“지금껏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그런 가정이나 하면서 고소한다는 협박을 할 수 있지?”

그런데 또 생각해 보니 이번에는 그렇게나 제정신이 아닌 만큼 연애가 오래갈 거 같기도 해서……. 그런 식으로 환기하면 또 괜찮다.

요즘 뜸했지만 그녀의 한때 단골 업무 중 하나는 보스의 새 연인, 아니 파트너에게 계약서 사인받아 내기였었다. 그때에 비하면. 뭐 좋다. 다들 어찌나 원하는 건 많고 비밀 유지 조항은 빼려고 난리를 쳤었는지. 그 일을 또 겪는 것보다는 나으니 긍정적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무려 계약서에 사인을 받지도 않았다. 그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니 루크는 얄밉도록 반질반질한 얼굴로 조그마한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홀짝이며 말했다.

‘나보다 더 비밀 유지가 중요한 사람이라 괜찮을 거 같아’라고. 웃기지도 않은 이유였다.

음……. 보스의 연애가 예상 지속 기간인 1년보다 조금 더 늘어나려면 일단 자기 마음을 눈치채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았다. 에단을 말할 때 스스로의 표정도 살피고. 요즘 틈만 나면 에단의 소식을 검색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돌아보고. 자꾸 레이스 카에서 내려 헬멧을 벗는 순간을 슬로 모션으로 늘려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고 말이다.

그리고 자꾸 이렇게 그랑프리에 맞추어 일정을 말도 안 되게 조정하려 들지 말고……. 앞으로 남은 일정은 멕시코, 아부다비, 중국, 일본, 이런 쪽이다. 유럽이나 미국은 어떻게 끼워 맞추었어도 이젠 한계였다. 사라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책상 가득히 늘어놓은 일정표를 노려보았다.

어떻게든 일정을 끼워 맞추고, 기적을 만들어 그랑프리 위크의 주말에 참석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도 이제는 불가능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누구나 알다시피 멕시코와 중국을 왕복하는 데 드는 시간 손실이 어마어마하다.

골몰하던 끝에 시각화라도 하면 일정을 짜 맞추는 데 조금 나을까 싶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린드베르그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대륙은 멀고 하루는 24시간이다. 그리고 일주일은 모두 공평하게 7일이지.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러니까. 루크 린드베르그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린드베르그 시스템의 일정을 노려보던 사라가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단축 번호로 누르자 루크는 길고 긴 신호음 끝에 겨우 전화를 받았다.

- 왜?

“멕시코는 정말 안 돼요, 보스. 정말로요.”

- 바꿔 봐. 할 수 있는 거 알아.

“이게 말이 안 된다구요. 린드베르그 시스템에 이제 정말 얼굴을 비치셔야 돼요. 연초에 달달 볶으셨던 AI 체제가 나왔으니 빨리 보고 의견을 주셔야 미들웨어와 결합할지 말지를 결정해서 하반기에 테스트하고, 3개년 계획 세우신 게 누구였죠, 루크?”

- 그거 누구야?

“당신입니다. 작년 12월의 당신이요!”

- 그래?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

“그럴 거면 그냥 임원 회의 결과 전달만 받으시고 끝내세요!”

- 그건 좀.

루크는 회의실에 늘어져 있거나 늦게 나오기는 해도 등장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집무실이건 현장이건 제 눈으로만 보아야 허가를 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정말, 정말 믿기지 않게도 루크는 의외로 일을 자세히 돌아보는 편이었고 제 손안에서 완벽하게 돌아감을 파악해야 하는 상사였다. 정말 아무도 믿지 않지만…….

됐다. 이제 다 필요 없다. 나도 모르겠다. 사라는 마음을 깔끔하게 정리하며 일정을 짜기 위해 프린트했던 종이들을 싹싹 긁어모았다.

“저도 이제 몰라요. 마음대로 하세요.”

- 주중에 다녀오게 만들어 봐.

“그 주중에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저는 모르겠어요. 잠깐만요.”

그 와중에 온 전화를 당겨 받으며 사라는 남은 한쪽 귀에 수화기를 가져다 댔다.

“린드베르그 오토메이션의 사라 올슨입니다. 보스는 지금 부재중인데요.”

길게 이어지는 보고를 듣던 그녀는 바로 루크에게 외쳤다.

“보스. 어디세요? 헬기 보낼게요.”

- 모나코야. 내가 알아서 갈게.

“들으셨어요?”

- 방금.

그다음 전화는 바로 끊겼다. 모나코라. 아마도 에단을 보러 갔던 거 같았다. 누구는 일정 짜느라 이렇게 고생 중인데 자기는 그 와중에 데이트라 이거지. 그렇게 가 봤자 에단도 트레이닝과 일정이 있기 때문에 고작 반나절이나 볼 수 있을까 모를 일일 텐데.

사라는 한숨을 내쉬며 모니터를 켰다. 그사이 전달된 링크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가장 상단에 위치한 링크를 누른 사라는 화마가 넘실거리는 공장의 지붕을 보며 참담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저긴 대체 왜 저런 걸까.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테이블 위 터치 패드를 꾹꾹 누르던 그녀가 물었다.

“이유가 뭐예요? 대충이라도요.”

- 아무래도 린드베르그 에너지에서 들여온 윤활유 쪽이 문제였던 거 같아요. 좀 더 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현장의 1차 의견은 그렇습니다.

“빌어먹을 제레미!”

미쳐 내선이 끊기기 전이었지만 사라는 욕설을 숨기지 않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에는 업무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수신자를 보자마자 사라는 의자 옆에 걸어 두었던 가방과 외투를 낚아채며 달려 나갔다.

“크리스. 네. 이번에는 폴란드네요. 네. 린드베르그 에너지가 폴란드 산업 규격을 지켰는지부터 체크해 주세요. 글쎄요. 보스도 이번에는 가만 안 있을걸요. 추모식을 써먹었던 게 고작 한 달 전인데요.”

***

매캐한 연기는 다행히 가느다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면으로 새빨간 화염과 핵폭발을 방불케 하는 광경을 보았던 루크는 너른 공장 부지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다행히 공장은 안전 규제를 확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거액의 법인세를 꼬박꼬박 납부한 보람대로 폴란드 소방관들 역시 재빠르게 달려와 화재를 진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잿더미가 되어 한가운데가 푹 꺼진 라인이 스스로 재를 툭툭 털고 일어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이미 머리에 쑤셔 넣었지만 혹시 틀린 게 있을까 싶었던 루크는 뒤에 선 크리스에게 물었다.

“피해 규모는?”

“3라인은 전소되었고 가까이 있던 2, 4라인은 점검을 위해 가동을 중지했어. 아무리 빠르게 테스트하고 돌려도 시간이 일주일은 필요할 거야.”

“3라인 전손인데 일정은 맞출 수 있겠어?”

“안 그래도 그걸로 사방에서 문의가 들어오는데…….”

“밀려?”

“밀리지.”

“얼마나.”

“최소 한두 달 정도는.”

“지연 손실은.”

“30일당 3퍼센트의 판매가 디스카운트로 책정되어 있어.”

“그나마 낫네.”

하지만 몇백억 달러 규모의 매출에서 3퍼센트는 거대한 손실이다.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루크의 대답에 크리스 역시 화재 현장을 향해 참담한 심정을 드러냈다.

“이럴 줄 알고 디스카운트 특약을 힘내서 조정했던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사라는 지금 어디 있어.”

“폴란드 환경부 장관과 산업부 등등 상대하다가 이제는 언론 체크 중일 거야. 불러올까?”

“아니야. 한가해지면 오라고 해.”

턱을 매만지던 루크는 깊은 아이홀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눈살이 심히 찌푸려지도록 문지른 다음 다시 뜨인 눈동자는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한가해지고 오라고 하면 내년에 오려나?”

“그럴지도 모르지.”

“빈터는.”

“린드베르그 에너지. 곧 도착하겠네.”

“제레미 주먹으로 한 대 갈기고 오라고 해.”

“정말 그럴까?”

“진짜야. 말해.”

“그럴게.”

“그리고 윤활유 배합 수치 공개해.”

“제대로 욕먹을걸.”

“괜찮아. 던져 줘.”

입꼬리부터 끌려 올라가는 미소가 살벌했다.

“설마 한 달도 안 돼서 또 자선 사업 기사를 끌어 올리지는 못하겠지. 고개 숙이라고 해. 환경 단체한테나 폴란드한테나 어디든.”

“알았어.”

단호한 태도에 크리스는 다른 말 없이 긍정했다. 공장의 폭발로 한껏 곤두선 루크의 심기가 고스란히 보였다. 온갖 안전 규제에 대한 재점검이 요구될 것이며 시선도 집중될 것이 뻔하다. 아무리 짧은 비행일지라도 공항마다 언론사가 몰려들 테고, 그 와중에 어디 호텔이라도 드나들다가 사진이 찍혀 노출될 가능성도 높아졌고.

하지만 지금의 루크는 그런 사안을 감안해도 과하게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다른 뭔가가 있는 거 같은데…….

달려오느라 내팽개치고 온 이슈들을 복잡한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내던 크리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루크가 불쾌해할 만한 다른 이슈는 생각나지 않았다. 늘 그렇듯 관세와의 전쟁이었고 규제와의 다툼이 그의 업무였다. 그 외에 파파라치에 대한 루크의 질문이 한 번 있었고. 하지만 루크는 원래 매월 정기적으로 파파라치에 대해 묻곤 했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크리스의 눈동자가 멈췄다. 설마 연애가 잘 안 되기라도 하는 걸까. 슬쩍 시선을 던지니 루크는 재킷의 안쪽 포켓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있었다. 제레미 린드베르그. 제 혈육의 이름이 뜬 전화를 거리낌 없이 수신 거부한 루크는 휴대폰을 다시 재킷 안쪽에 넣었다.

행동 하나마다 따라오는 시선에 루크가 물었다.

“왜.”

“네 형님에게 지나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나만의 생각이니까 상관 안 해도 돼.”

“상관하라고 해도 안 할 거야.”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무언가, 알지는 못하겠지만 제레미가 불편한 심기를 정통으로 직격한 것이 분명했다. 루크의 꿈틀거리는 관자놀이를 본 크리스는 입을 닫고 체크할 연락이 있는 척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사라와 빈터, 그리고 크리스는 루크의 신변에 특이 사항이 있으면 곧바로 서로에게 정보를 알려 주는 편이었다. 그들에게서 딱히 루크의 기분에 대해 연락 온 문자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건가?

“피해 금액 정확하게 산정해서 알려 줘.”

“오늘 안에 정리해서 올리라고 할게.”

묵묵히 서 있던 루크는 그 말과 함께 마지막으로 공장의 꼴을 눈에 담은 뒤 돌아섰다. 그 뒤를 무심코 따르려던 크리스는 빠른 걸음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뒤쫓지 않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루크 곁에 있지 않아도 할 일은 온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는 반대로 돌아 조금 멀찍이 떨어진 비서진들에게 지시했다.

“최대한 인명 피해 없음을 강조해서 언론에 보도해요. 피해 규모 같은 건 아직 추산하기 어렵다고 하고. 윤활유 문제라는 언급은 미리 흘려도 괜찮아요. 대신 윤활유 문제로 추정된다고만 하지 더 이상의 정보는 절대 언급하지 마요.”

루크는 모두 언급해도 된다고 했지만 아직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두는 정도의 융통성이 발휘되었다. 라인 저 멀리 아우성치며 사진을 찍고 있는 기자들에게 향하는 비서진을 보며 크리스는 품 안의 볼펜을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렸다.

분명히 뭔가 더 있는데 말이지.

오랜 시간 스포트라이트에 시달린 눈동자가 잔상을 남겼다. 창밖 먼 곳을 무료한 시선을 응시하던 루크는 재킷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 뒤 다양한 번호로 제레미에게서 몇 번의 연락이 이어졌지만 모두 차단했다.

이제는 받아야 할 연락만이 울린다. 상대를 확인한 루크는 전화를 받아 짧게 말했다.

“어때요.”

-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그래요. 뒤처리 잘해 둬요.”

- 메모리 카드는 파기했고 혹시 들어오는 사진 없는지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푸른 시선이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시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후 4시 26분. 머릿속에서 멕시코시티와의 시차가 자동으로 계산된다. 그쪽은 아마 아침일 거다. 괜히 레이스에 영향을 줄까 싶어 잠깐 손가락이 멈췄다.

아닌가. 신경 쓰이는 쪽이 더 방해가 될까. 방황하던 손가락이 결국 움직이고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아침의 일정이 뭐더라. 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하고 시작하겠지. 고민이 이어질 무렵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홀로 있는 것은 아닌지 주변의 소음이 함께 들렸다.

“뭐 해요.”

- 식사 중이었죠. 사고는 괜찮아요?

“그럭저럭. 나 없는 멕시코는 어때요.”

- 날씨가 좋네요.

“그건 다행이네.”

그쪽이라도 좋은 일이 있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 잠깐만. 진동은 어제 체크했어요. 고마워요.

예상대로 바쁜 와중에 전화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다른 이와 대화하느라 멀리 들리는 목소리가 더없이 심각하다. 잠시 후 에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미안해요. 잠깐 대답할 게 있었어요.

“바쁜 거 같으니 용건만 말할게요.”

- 무슨 용건?

“모나코에서 파파라치. 제레미가 맞았어요.”

“…….”

돌아가는 집안 꼴이 퍽 흥미로운지 에단은 잠시간 대답이 없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연락했어요. 다 잡았고 설사 남았다고 해도 팔아먹으려는 건 아니라고 말해 주려고요. 그냥 가지고만 있을 생각일 겁니다.”

- 왜 그걸 가지고 있으려는데?

“내게서 얻고 싶은 게 있을 때 써먹으려 했을 거예요. 그런 거 서로 한두 개씩 수집하는 게 우리 집안 사람들 취미거든.”

- 괜찮아요?

집안 꼴이 제정신이냐는 말이나 들을 줄 알았던 루크는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내가 듣기는 민망한 말이네. 나랑 같은 성 쓰는 인간이 저지른 짓거리라서.”

- 그러니까 더 괜찮냐고 하는 거잖아요.

“괜찮아요. 나도 제레미 불륜 사진이나 찍어서 간직할 거니까.”

- 안 괜찮네.

“매일 한 장씩 찍어다 침대맡에 두고 자려고. 어때요.”

- 웬만하면 그러지 말죠.

“왜. 그런 짓거리는 나랑 어울리지 않아서?”

- 악몽 꿀 거 같으니까 집어치우라는 거지. 그런 게 머리맡에 있으면 잠이나 설칠 거 같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 봐요.

“그런가.”

- 당신은 몰라도 난 설칠 거 같아.

“아. 맞다.”

- 뭐가.

“우리 같은 침대 써야 되지.”

-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은 그럴 수도 있겠죠.

높낮이 하나 달라지지 않은 어조로 목소리가 태연한 척 말한다. 루크는 휴대폰 너머 상대의 숨소리를 들으며 빙긋 미소 지었다. 부러 다른 말을 하지 않자 화제를 돌리려는 노력이 가상하게도 들려왔다.

- 어쨌든 복수할 방법은 다른 걸로 찾아 봐요.

“내가 제레미 데려올 테니까 그때 파파라치 팔 꺾은 것처럼 꺾을래요? 나 완전 반했잖아.”

- 법적 문제만 없다면 그게 낫겠네.

“머리맡에 붙은 불륜 사진 따위보다는?”

- 그래요. 그것보다는.

“맞아. 나도 제레미가 느끼한 표정으로 있는 사진 같은 거 보면 토할지도 몰라.”

- 그렇다니까.

“직접 어딘가를 패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어 주자고.”

- 그래도 되는 거 맞죠?

“법적으로 패는 것보다는 좋아할 겁니다.”

- 그렇다면 뭐.

변명과 수습, 그런 것들이 즐비한 기자 회견장을 뒤로한 채 원초적인 상상을 음미하던 루크는 눈을 감았다. 모나코의 레스토랑에서 벌떡 일어나 테이블 사이를 달려가던 에단의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지막 테이블은 훌쩍 뛰어넘더니 도망가던 파파라치의 목에 팔을 휘감아 꺾어 버리던 그 순간을.

마침 볕도 좋았고 바람도 딱 좋은 아름다운 항구의 배경이었지. 그리고 비명을 지르던 남자의 목소리와 떨어진 카메라가 부서지는 소리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하지만 앞으로 싸울 일이 있으면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붙잡히면 끝이다. 괜히 드는 불안감을 마음속에 단단히 새기며 루크는 다시 눈을 떴다.

“그거 전해 주려고 전화했어요. 신경 쓸까 봐.”

- 내 걱정 말고 그쪽 일부터 신경 써요. 사고는 괜찮죠? 인명 피해는 없다던데.

“아직은. 다친 사람이 있긴 한데 합의도 잘 마무리될 거 같다네요.”

- 다행이네요.

“데이트 그따위로 끝내고 온 것도 잘한 것 같지는 않아서. 생각이 났어요.”

아주 환상적인 마무리였지. 파파라치를 붙잡아 팔을 꺾은 뒤 다른 놈이 있는지 심문하기 위해 끌고 가다가 폭발 사고의 소식을 듣자마자 헤어진 차였다.

“가서 다른 드라이버들 애인처럼 피트에서 두 손 모아 바라봐 주는 것도 못 한 게 마음에 걸렸고.”

- 정말 안 어울리니까 하지 마요.

“하긴, 난 더 멋있는 게 어울리지.”

- 차라리 그게 낫겠네.

“오늘 레이스 잘해요.”

- 그쪽도 잘 마무리될 겁니다.

“응. 끊어요. 뒤에서 애타게 부르네.”

짧게 용건만 말하려던 통화는 벌써 5분을 훌쩍 넘겼다.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루크는 뻑뻑한 눈을 바로 떴다. 차음 기능이 굉장한 기자 회견장의 문 너머로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자잘한 소음이 연이어 이어진다. 그 문이 빼꼼 열리며 사라가 눈을 반만 내놓았다.

“보스. 이제 다시 올라가셔야 해요.”

“그래.”

“질의 미리 체크해서 남겨 뒀어요.”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발을 디디자 인간과 조명이 만들어 낸 인위적인 열기가 얼굴을 훅 간질였다. 멕시코시티도 이렇게 더울까. 고산 지대이니 여기보다는 낫겠지. 거기까지가 할애할 수 있는 마지막 생각의 여유였다.

스포트라이트를 향해 더없이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인 루크는 반대로 어깨를 단단히 편 자세로 기자 회견을 마무리했다. 그 뒤 길고 긴 질의와 설계 도면의 점검이 이어지고, 안전 프로세스를 제대로 지켰는지 CCTV를 돌려 재점검을 하던 중이었다. 사라가 곁으로 살며시 다가왔다.

“보스.”

“응.”

2배속으로 녹화 화면이 돌아가는 여러 모니터에서 루크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멕시코시티 그랑프리 결과 나왔어요.”

“어땠어.”

“리암은 8위이고……. 에단은 리타이어요.”

“왜. 이번엔 타이어 문제래?”

“레이스 카의 문제였고요. 병원이래요.”

루크는 어떤 대꾸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모니터의 창백한 빛이 반만 잠긴 표정은 예상보다 평온했다.

“별일 아닐 거잖아.”

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진실이 어떻든 그렇게 대답해야만 할 것 같았다.

***

독일 남부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한 콘스탄체 병원의 중증 외상 센터는 1층 홀의 이름을 본따 린드베르그 외상 센터로 통칭되곤 했다. 엘라 노드네스의 사망 이후 슬픔에 잠겼던 로버트 린드베르그가 2,000만 달러를 기부하면서 세워진 외상 센터였다. 그날 이후 최첨단 인텔리전트 기능을 도입한 외상 센터는 완전히 탈바꿈되어 세계적으로 중증 외상 분야에서 5위 안에 손꼽히고 있었다.

노련한 사업가인 로버트 린드베르그는 루크의 얼굴을 언론에 팔아먹는 것만으로 여론을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센터의 공사가 착공되던 그날, 그는 2,000만 달러의 지원으로 단 한 명의 중증 외상자를 더 살릴 수 있다면 마음의 짐이 덜어질 것이라는 연설을 고개를 떨구며 읊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시작된 인연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다양한 의학적 소견 제공과 연간 연구 개발 비용의 기부 등등. 그 덕분에 루크 린드베르그는 멕시코 그랑프리 이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귀국한 에단을 세계 정상급 외상 센터에 대기 없이 꽂아 넣을 수 있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병원 입구 바로 앞에 차를 세워 내린 루크는 얕은 계단을 거침없이 올라갔다. 홀을 가로질러 위층으로 곧바로 오르자 남자 의사 하나가 그를 맞이했다. 억센 수염을 단정히 자른 남자는 갈색 뿔테 너머로 피곤에 익숙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보았던 주치의 중 하나였다.

“오랜만이에요, 루크.”

“에단은?”

“아까 들어와서 한참 실랑이하다가 검사 중이에요. 저기 토모세라피 검사실로 가면 됩니다.”

곧바로 다가가는 그의 걸음에 남자 의사가 따라붙었다. 물을 질문이 뻔해서 루크는 파리를 내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트라우마 괜찮습니다. 후유증도 없고요.”

“그래도…….”

“전혀 없다니까. 내 트라우마는 사고 때문이 아니라 그 사고를 내 앞에서 이십 년째 읊고 있는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남은 겁니다. 닥터 마가렛. 오랜만이에요.”

문이 열린 최첨단 검사실 안은 병원에 걸맞지 않은 분위기였다. 외벽 전면을 유리로 마감해 바깥에 보이는 검사실은 병원 앞 야트막한 숲과 산책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닥터 마가렛은 온몸에 패치를 주렁주렁 매달고 줄에 연결된 채 걸음을 걷는 에단의 곁에 팔짱을 끼고 서 있다가 루크를 돌아보았다.

“상담을 안 오니 오랜만인 거죠.”

“졸업한 지가 언젠데. 병원 좋네요.”

“덕분이죠. 올해 연구비는 여기 썼거든요.”

“그러게. 나 모르는 새 병원이 아니라 호텔로 업종 변경한 줄 알았잖아.”

“멋지죠? 루크 당신이 여길 다닐 때 했던 말을 듣고 벼르던 리모델링이었어요.”

“내가 뭐라고 했었는데?”

“이따위 멋대가리 없는 곳에 갇혀 있다가는 없는 병도 생길 거라고 했었어요.”

“내가 틀린 말 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에단, 여기 원래 회색 벽에 감옥같이 생겨 먹은 곳이었어. 지금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말 시키면 안 돼요. 아직 검사 중이에요.”

어쩐지 에단은 할 말이 많아 보임에도 입을 꾹 다물고는 느린 트레드밀 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헐벗은 상체에 주렁주렁 매달린 패치를 보고 웃던 루크의 안면 근육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굳었다. 검은색의 패치 아래 가려진 피부가 검푸르게 변해 있었다.

그는 사고의 흔적을 노려보았다. 왼 팔뚝과 패치 아래 언뜻 보이는 왼 갈비뼈. 그리고 그 아래 보이는 살갗마저도.

닥터 마가렛은 기록이 뽑혀 나온 차트를 확인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받은 중력 가속도가 24G였다는데 운이 좋네요. 이제 정말 안전한 차를 만드나 보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검사 중에는 말하면 안 된다니까요.”

닥터에게 말이 가로막힌 에단의 입이 벙긋거렸다. 입을 벌리자 아랫입술의 끄트머리가 찢겨 나가 붉어진 색이 그제야 보인다. 루크의 새파란 시선이 이번에는 거기 꽂혔다. 제 뺨 부근에 꽂힌 시선을 인식한 에단이 루크를 바라보았다. 더없이 융통성 없는 표정은 전신에 상처를 주렁주렁 달고도 묵묵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먼저 쏘아보던 이가 결국 눈을 돌렸다. 목에 바짝 힘줄이 두드러지도록 고개를 쳐들었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루크의 불편한 심기를 느낀 에단은 검사하는 데 소모한 시간을 따지는 대신 병원을 함께 나섰다. 병원이 아니라 호텔로 업종을 변경했냐는 말이 부족하지 않도록 화려한 홀의 한가운데에 안절부절못한 채 앉아 있던 조지가 벌떡 일어났다. 조지는 반색하며 일어나다가 곁에 나란히 선 루크를 보고는 눈이 커졌다.

“아, 어……. 오신 걸 몰랐습니다. 안녕하세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횡설수설하는 조지를 보고 에단이 중얼거렸다.

“돌아가서 쉬겠다는 나를 억지로 검사실에 넣었으니 직접 보러 오셔야지. 안 그래?”

“에단! 아, 아닙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이죠.”

루크는 조지의 인사에도 간단한 대꾸만을 한 뒤 시선을 돌렸다. 에단은 그런 루크를 향해 살짝 턱짓해 보이며 조지에게 말했다.

“먼저 가. 나는 팀 관련해서 이야기할 게 있어. 나중에 따로 갈게.”

“몸도 불편한데 내가 데려다줘야지. 기다릴게. 이야기하고 와.”

천장의 샹들리에를 쏘듯이 바라보고 있던 루크가 그 순간 대뜸 대꾸했다.

“내가 불편하게 보내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안 좋지도 않아요.”

“안 그렇다고? 그럼 그 멍 자국은 멕시코 기념 문신인가 보지.”

빈정거리는 루크의 말에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조지의 턱이 들린 그대로 멈췄다. 에단의 표정도 심상찮았다. 가늘어지던 눈이 꾹 감았다 뜬 그가 차분히 일렀다.

“지금 멍이 번져서 이렇지 당일에는 별거 아니었어요.”

“몸의 왼쪽이 모조리 그 꼴인데 별거 아니라는 말이 쉽네요. 무슨 사고였길래 이렇게 된 겁니까?”

“받아 봤다면서요?”

“봤지. 안 되는 틈으로 기어코 끼어들어 추월하려다가 스핀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고 방호벽에 차가 박히는 거.”

“그럼 두 발로 걸어 나온 것도 봤겠네요.”

“실려 나왔으면 검사로 안 끝났어요. 당장 입원이야.”

“적당히 합시다. 여기 끌려와서 검사받는다는 이야기에 도는 소문 못 들었어요? 골절이네, 다음 그랑프리에는 참석이 불투명하네 난리도 아닌 거.”

“그래요?”

“그래. 나 대신 탈 리저브 드라이버1) 이력을 읊느라 신난 꼴을 내가 직접 보여 줘야겠어?”

루크는 리저브 드라이버라는 단어 자체를 처음 듣는 게 분명한 반응이었다. 그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도는 것을 본 에단은 오른손을 마치 멱살이라도 잡을 듯 치켜들었다가 주먹을 꾹 쥐고 내렸다. 대신 완전히 힘을 빼도록 손을 올려 조지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보다시피 우리 소유주께서 할 말이 많으신 거 같으니까 먼저 가.”

“음……. 그래도 혹시 운전할 일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알아서 보낸다니까요.”

조지가 답한 사람은 에단이었는데 대꾸한 것은 영문 모를 화가 나 있는 루크였다. 조지는 그 기묘한 대치를 힐끔거리고는 물었다.

“나 진짜 가?”

“응. 가. 괜찮아. 정말로.”

“그럼……, 가 보겠습니다. 에단, 가서 푹 쉬어. 혹시라도 불편해지면 꼭 연락해. 괜찮으니까.”

조지는 에단의 심상찮은 표정을 보면서도 결국 몸을 돌렸다. 가면서도 걱정스러웠다. 이대로 가도 되는 걸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콘스탄체 병원은 린드베르그의 개인 병원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확실하게 통제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쓰는 모양인지 두 사람은 남들이 듣지 못하게 상박이 스칠 만큼 가깝게 붙어 대화하는 중이었다. 뒷모습을 보이고 있던 에단이 결국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짚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주시하던 소유주의 시선이 멈춰 선 조지에게 꽂혔다. 심기 불편한 그 시선에 뜨끔한 조지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보니 두 사람도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시선으로 집요하게 쫓던 조지는 어느새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허겁지겁 주머니에서 끄집어냈다.

거의 하는 일 없이 모든 것을 일임하던 에이전시는 에단의 주가가 올라가면서 이제야 일 비스름한 것을 한 가지씩 물어 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린드베르그에서 붙여 준 신경질적인 변호사가 에단의 일을 봐주는 것을 신경 쓴 기색이 역력했다.

조지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묵직한 소리를 만들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 조지. 에단 검사 결과 괜찮아요?

“네. 별건 아닌데 우리 팀 오너의 걱정이 많아서 그런 것뿐입니다. 알잖아요. 오너가 에단을 얼마나 아끼는지.”

에단이 들으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았지만, 곁에 없으니 조지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조지의 말에 에이전시는 일말의 의심도 보이지 않았다.

- 기자들은 지금 어디가 다쳤네, 후유증이 있네, 뇌에 충격이 갔네 등등 난리예요. 린드베르그 팀 리저브 드라이버 이력 지껄이는 꼴도 더는 못 봐주겠고요. 다음 그랑프리도 확실히 출전할 수 있는 걸로 기사 내도 되겠죠?

“네. 그렇게 해도 됩니다. 멀쩡하게 검사받았어요.”

- 혹시, 린드베르그 소유주가 리저브 드라이버를 한번 내보내 보려고 에단을 일부러 쉬게 하는 건 아니죠?

“일단 방금 전에 만났을 때는 자기 팀 리저브 드라이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어요.”

- 그럼 다행이고요. 아 참, 린드베르그와 재계약 이야기는 아직 없나요?

“그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지금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네요.”

- 재계약은 거의 뻔하다는 분위기인데 조건을 조율하느라 계약서에 사인을 안 하는 건지 확실하게 말해 줘요. 다른 팀 오퍼에 대답해야 하니까요.

“어때요. 올해는 어디에서 제안 왔어요?”

- 올해는 시트가 나는 팀이 거의 없어요. 자우버에서 연락이 오기는 왔는데 그냥 찔러 보는 느낌이 강해요. 린드베르그에서 재계약하지 않겠냐 하고 자기들이 먼저 말하면서 이미 F2 챔피언 라인을 물색하고 있더라고요. 르노도 관심이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에단이 거절할 거라고 보고 2년 전 은퇴한 자크에게 연락했다는 말이 벌써 돌아요.

“올해는 계약이 끝나거나 은퇴하는 드라이버들이 별로 없네요.”

- 에단도 그럴 거잖아요.

“그렇죠.”

확신을 구하는 에이전시의 말에 조지 역시 순순히 긍정했다. 소유주의 기세가 심상치는 않았지만 그게 에단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거나, 혹은 다른 드라이버로 갈아 버릴 기세로 보이지는 않았다.

조금 설명이 어렵기는 한데, 어쨌든 결코 에단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좋아하기는 아주 좋아하는 것이 확실했다. 제멋대로라 그렇지. 생각해 보면 계약하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참 한결같은 태도였다.

“린드베르그 재계약 여부 확인하면 바로 알려 줄게요.”

- 우리도 큰 걱정을 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오피셜로 발표해야 하니까요. 그보다 걱정이었던 건 에단의 몸 상태였는데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정말 괜찮아요. 지금도 자기 발로 잘 걷고 있고…….”

소유주와 아주 열심히 말다툼을 하고 있는 거 같으니까. 저 멀리, 주차장도 아닌 곳에 난데없이 서 있는 롤스로이스의 곁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의 등이 보인다. 조지는 무심코 고개를 쭉 빼 두 사람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 조지?

“네. 정말 괜찮아요. 정말로. 곧 연락 줄 수 있을 거예요.”

-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전화가 끊김과 동시에 롤스로이스의 문이 열리고 에단이 루크를 밀어 넣다시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왼팔은 안 쓰는 게 좋을 텐데.

그 생각을 똑같이 했는지 밀쳐지던 루크가 생각보다 순순히 차에 탄다. 문이 닫히고, 큰 곡선을 그리듯 병원 앞을 선회한 크림색 롤스로이스가 조지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짙은 선팅 때문에 내부에는 어떠한 실루엣도 보이질 않았다.

주차된 차를 가지러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려던 조지는 뒷덜미를 홀로 긁적거렸다. 그랑프리를 말아먹은 것에 화나 달려온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아닐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조지는 그 생각에 쓸데없이 골몰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양 뺨을 손바닥으로 짝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불편한 심기 그대로 생각에 잠긴 루크를 옆에 두고 에단은 신선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뭐랄까. 워낙 위험한 스포츠이기 때문일까. F1의 사람들은 웬만한 사고와 부상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축소해 이야기하거나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편이 드라이버의 정신 건강에도 훨씬 유리하기도 했다.

방호벽에 부딪쳐 콕핏 내부의 중력 가속도에 휘말린 경상 정도는 가벼운 것이었다. 실제로 멍이야 몇 번이고 들었다 빠지기를 반복했었고. 루크 린드베르그가 아직 제게 관심을 갖기 전 몇 번이고 말이다.

어쨌든 에단에게는 아주 신선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듯한 루크의 옆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을 성미가 못 되었다. 그래서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루크, 당신이 사고에 대해 예민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건 알아요.”

“나라서 그런 게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F1에서 이 정도는 뭐랄까. 언론 반응을 보면 알겠지만 이렇게 유난 떠니까 내가 무슨 대단한 문제라도 생긴 줄 알잖아요. 그냥 가벼운 접촉일 뿐이라고요.”

“레이스 카가 반파되어서 완전히 다시 만들고 있는 접촉이었죠.”

“내가 진심으로 미안한 게 있다면 그거 하나죠.”

“왜 그게 더 중요해?”

“차를 그렇게 반파시킨 게 미안할 뿐이고 난 아무 문제 없어요. 정말로.”

“차체가 낮아서 방호벽 아래 끼었었잖아. 빠져나오는 데도 한참 걸렸었다고 들었는데? 콕핏이 완전히 드러나서 고작 철판 한 장만 우그러졌으면 당신 몸에 직접적인 충격이 왔을 거라며.”

사고 수습 과정을 꽤 정확하게 아는 발언이었다. 역시 봤군. 아니, 본 정도가 아니라 수없이 돌려 봐 외운 수준이다.

에단은 한숨과 함께 머뭇거리다가 결국 손을 얹었다. 곁에 앉은 루크의 허벅지 위, 힘줄이 도드라진 손등 위로.

“그리고 그 철판 한 장이 기술의 핵심이죠.”

“…….”

힘이 들어간 손등을 어색하게 어루만지며 에단은 고민했다. 고작 이 정도 사고로 이래서는 안 된다. 이 정도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기만 하다. 레이스에 대한 열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 교통사고의 트라우마까지 있는 사람이 내 연인이라니. 심지어 한 품에 안아 달래 주거나 뭔가… 그런 로맨틱한 짓을 어떤 각도로 해야 할지조차 도무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가지각색의 마음이 섞여 루크의 곧은 어깨를 보고 있던 에단은 결국 시트에 손을 짚어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붙여 앉았다. 닿을 정도로 가깝게 붙자 근육이 불거져 단단해진 허벅지가 느껴진다. 그 위에 올려진 손등을 다시 한번 꽉 붙잡으며 에단이 불렀다.

“루크.”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불러요.”

“나 좀 봐요.”

그리고 고개가 돌아오는 순간에 맞춰 다른 손이 루크의 목을 쓸어내렸다. 에단은 제 턱을 들고 그의 입술에 가볍게 맞붙였다.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이 문질러졌다. 상대는 잠시간 가만히 있었다. 그다음 숨결을 가만히 들이키는 코끝을 문지르고, 루크의 입술이 찢긴 아랫입술의 가장자리에 닿았다.

“콕핏 안은 무사했다면서 여긴 왜 이런 거야?”

“내가 순간 입술을 잘못 씹어서 그랬어.”

“그러고도 괜찮다고.”

“괜찮았어요. 린드베르그의 레이스 카. 정말 안전하더라고.”

의도와 달리 루크는 그 말에 어떠한 편안도, 감동도 느끼지 않았다. 대신 가슴속 비무장 지대의 지뢰가 눌리기라도 한 듯 순간 선득함을 느꼈다. 그 감정의 동요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입술을 다시 맞대었다 떼어 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우아하고 올곧았던 드라이버는 그 새까만 동공을 들어 루크를 직시했다. 결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의지로 단단한 입술이 벌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껏 운이 좋았던 거지. 신생 팀의 레이스 카로 용케 큰 사고 없이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싶었거든.”

“그게 지금 할 말입니까?”

“F1은 원래 그래.”

“…….”

“그러니까 나를 믿어 줘야 해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애초에 한 번에 수긍할 것이라는 기대조차 없었지만 또 이렇게 솔직하게 반발할 줄도 몰랐다.

“그래도 믿어요. 내가 늘 괜찮을 거라고 믿어야 돼. 그런 사람만 같이 있을 수 있거든요.”

“안 그러면?”

“나도 사람인지라 옆에서 흔들리는 걸 보면 같이 흔들려.”

곁에 두지 못하겠다는 거냐, 그런 의미인 줄 알고 빈정거리려던 루크의 말이 뚝 멎었다.

“그리고 레이싱에서 그 찰나의 흔들림이 한 커브마다 순위를 떨군단 말이야.”

그리고 사고도 만들어 내겠지. 루크는 목 끝까지 올라왔던 그 말을 애써 목구멍 아래로 짓눌렀다.

에단은 한껏 심란해 보이는 루크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러니까 날 믿어 줘요. 진심으로.”

그리고 무슨 대답이 나올지 알겠다는 듯 에단은 말을 듣지 않고 입을 다시 맞춰 왔다. 목에 감겨 온 팔과 입 안을 헤집어 오는 혀끝은 생생한 생의 감각이다. 그런 생각이 불쑥 떠올라서 루크는 눈을 감았다. 어떤 감정이건 들키기 전에 차라리 보이지 않는 것이 나으리라.

***

도착한 곳은 저택보다 고성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여긴 또 어디인가 싶었지만 루크는 제 저택이 몇 개인 것에 딱히 이유가 필요하다 생각지 않을 거 같았다. 그래서 에단은 질문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대체 뭐에 쓰는 곳이냐는 질문이 불쑥 나오려 들 만큼 저택은 넓고 시대를 비껴간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믿어 달라는 말에 한껏 심란한 표정을 숨기지 않길래 저녁에 식사나 잡담 같은 건전한 일이나 할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루크는 그날따라 더욱더 집요하게 굴었다. 동시에 손에 쥐면 녹을 솜사탕을 다루는 양 한없이 부드럽게 굴기도 했다. 에단이 파고드는 감각에 익숙해질 때까지 한껏 천천히 움직이기도 했고 손목을 그러잡는 손짓 하나도 느릿했다.

그렇게 새벽까지 마주 본 채 느긋한 섹스를 계속했다.

진이 빠져 부드러워진 몸의 안쪽 끝까지 들어왔던 뭉툭한 열기가 고스란히 남은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껏 피우는 어리광을 달래 주는 느낌으로 새벽녘까지 괴롭혀졌다. 덕분에 에단은 비몽사몽 와중에 곁의 침대에서 일어나는 인기척을 느끼고도 죽은 듯이 누워 있을 수 있었다. 묵직한 발걸음이 침대가에서 멀어져 방을 나가는 것도 듣고만 있다가 눈을 떴다. 눈을 떠도 침대에 푹 잠긴 듯한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그래. 연결해 봐.”

문소리가 얕게 들리고 인기척은 완전히 멀어졌다. 에단은 엎드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짧은 사이 잠이 들었었는지 몸은 조금이나마 가뿐해져 있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새 소리를 듣고 다시 혼곤해지는 정신을 잡아챈 에단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서넛은 뒹굴어도 거뜬할 크기의 침대다. 그 크기를 새삼 느끼며 기어 나와 반사적으로 기지개를 켜려다 왼 어깨의 뻐근함에 멈칫했다.

대신 둔중한 아픔이 느껴지는 허리 부근을 지그시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던져져 있던 끈을 주워 가운을 제멋대로 묶은 뒤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의 정원은 자로 잰 듯 구획이 지어져 있었다. 그 너머로 한 치의 티끌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잔디밭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어제 차가 달렸던 풍경을 보던 에단은 기가 막혔다. 어제 지나칠 때는 그저 연못인가 했더니 저건 호수라고 불러야 마땅한 크기였다. 그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고 밖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다시 폈다.

창 옆에는 여느 박물관 진열장에나 있을 법한 괘종시계가 걸려 소리 없이 추를 흔들고 있었다. 가리킨 시간을 본 그는 믿기지 않아 분침을 노려보았다. 오후 1시. 시즌 중 이 시간이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주니어 시절이나, 아니면……. 언제인지조차 까마득해 기억도 나질 않는다.

오전 시간을 완전히 날렸다는 뜻이다.

“어디 구석에 홈 짐 정도는 있겠지.”

에단은 혼잣말과 함께 재활 프로그램을 떠올리며 왼손의 악력을 점검하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곳에 체육관이건, 트레이닝 센터건, 혹은 그 무엇이건. 없는 건 없을 것 같다.

그 순간 침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에단은 가운 안으로 손을 넣어 뻐근한 왼쪽 갈비뼈를 부근을 어루만지며 뒤돌았다.

“여기 홈 짐은 어디…….”

그리고 당연히 들어올 거라 생각했던 사람 대신 마주친 낯선 여자에 에단은 움직임을 그대로 멈췄다. 키가 큰 중년의 여자는 어떤 표정도 없이 에단을 마주 보고 있었다. 미소를 띤 것 같기도 했는데 솔직히 불확실했다.

회색의 눈동자가 향한 곳에 뜨끔한 에단은 가슴팍을 만지작거리던 손길 그대로 가운을 당겨 몸을 꽁꽁 감쌌다. 서늘한 방 안의 온도가 몇 도는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다행히 그 분위기를 수습하기 직전에 문간에 루크가 불쑥 나타났다. 중년의 여자와 독일어로 대화를 나누는 그의 억양이 딱딱하게 들렸지만, 개의치 않고 대화하는 여자를 보니 오히려 이 어투가 루크의 평소 억양인 듯했다. 가끔 쓰는 언어마다 억양이 다른 이들이 있었다.

못 알아듣는 척 바라만 보았으나 사실 절반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섞여 있었다. 유럽을 기반으로 다양한 국가와 인종이 모이니 대화는 영어가 절반, 각자의 언어가 절반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반만 잘린 대화는 완벽한 이해가 불가능한 법이다. 대충 대화 주제만을 짐작한 에단은 두 사람이 아니라 공연히 문간 옆 둥근 테이블에 올려진 꽃병과 싱싱한 장미 따위에 관심이 있는 척 노려보고 있었다.

보고 있으니 궁금해졌다. 저 장미는 어제부터 꽂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오늘 아침에 갈아 끼워진 것일까. 지난밤부터 자리에 있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싱싱해 보였다…….

[왜… …들어온 거야?]

[…정리를… 생각했어요.]

[괴롭히지 마.]

아니다. 좋게 생각하자. 어젯밤 바로 꺾어다 꽂아 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헐벗은 채로 무릎 아래 부근에만 겨우 이불이 걸쳐 있었던 아까를 생각하면, 누군가가 들어왔을 리 없다고 여기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예민해… 하지 마.]

[파파라치…… 들었어요.]

[그렇지 않더라도.]

여자의 다음 대답은 길지만 에단이 아는 단어로 대부분이 이루어져 있었다.

[당신이 만나는 사람 중 제가 얼굴을 보면 안 될 사람이 있을 줄 몰랐네요.]

약간의 의역이 있을 수 있었지만 대충 그런 의미가 분명했다. 불확실하더라도 90퍼센트 정도 뉘앙스도 맞을 거다. 더 이상 꽃을 노려보고 있을 수도 없어 에단은 가운 자락을 다시 단단히 여미는 척 만지작거렸다.

움직임에 두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여자는 에단에게 처음 보았던 순간보다 조금 더 다정한 미소를 보이곤 고개를 모로 돌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루크와 몇 마디 더 나누는 발음은 멀어질수록 불분명해져서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침대에 주저앉은 에단은 옷깃을 소심하게 펄럭였다. 아침부터 민망하다.

돌아온 루크는 그새 차이나 카라 셔츠에 포멀한 팬츠를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회의에 참석하고 왔다 해도 믿을 모습이었다.

한껏 흐트러진 에단의 차림새를 꼼꼼히 훑어보던 루크가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날 좋은데 식사는 밖에서 하죠.”

“그것보다는 홈 짐 같은 곳 없습니까.”

“그런 건 없는데.”

“뭐라고 부르건 운동 기구 있는 공간 어디든지. 있죠?”

확신을 갖고 묻자 루크는 결국 순순히 시인했다.

“거창하진 않고 운동 기구를 몇 개 가져다 둔 공간일 뿐이에요.”

“어디 있어요.”

“2층 끝 리딩 룸 옆에. 점심 먹고 나면 안내해 줄게요.”

리딩 룸은 또 무슨 용도일까. 궁금했지만 별안간 모르는 것이 또 나올 것 같아서 에단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곁을 어슬렁거리다가 가벼운 옷가지를 직접 들고 와 건네주던 루크가 다시 한번 제안했다.

“트레이닝은 말리지 않겠지만 뭐라도 먹고 하죠. 그편이 몸에도 더 좋잖아요.”

어깨를 으쓱한 에단도 거절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몸을 풀고 트레이닝을 시작하기도 전에 허기가 질 게 뻔했다.

다행히 식사 자리는 낯선 것을 제외하면 조촐했다. 사람의 어깨높이를 거뜬히 넘는 장미 덩굴 정원의 한가운데로 안내하길래 대체 뭘 하려나 긴장했더니 나온 것은 네모난 정원 테이블이었다.

거기에는 이미 세팅된 식기가 있었다. 마주 앉은 채로 접시를 내려보고 있으려니 따라오던 사람이 식사를 내어 주었다.

식사도 단순했다. 닭 가슴살이 끼워진 샌드위치, 구운 연어, 차가운 치즈샐러드 등등. 전반적으로 에단의 식단을 고려한 식사임이 분명했다.

묵직하게 잡히는 은색 나이프를 들어 연어를 쓱쓱 썰어 내자 짙은 연분홍색 살 사이마다 옅게 지방이 낀 결이 보였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군침을 돌게 했다. 크게 썰어 한 입을 먹는 것을 보고서야 루크도 식사를 시작했다.

“아까 무슨 이야기 했어요?”

“이야기?”

“들어온 여자요. 누구예요?”

“아. 설명하는 걸 깜빡했네. 마르텔이에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생각하는 대로 설명해 봐요.”

“유모였어요.”

낯설긴 하지만 태어나서 난생처음 듣는 단어는 아니었다. 에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뭔가 그런 사람일 것 같았어요.”

“지금은 빈터랑 같이 내 이것저것을 봐주는데 보통 내가 머무르는 저택에 먼저 와 있곤 해요. 요즘에는 대부분 여기 있고.”

“여기서 대부분 지내요?”

“그나마.”

“혹시 싶어 묻는 건데 여기 다른 가족들은 없죠?”

“전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대충 어딘가 있겠죠. 물으면 알려 줄 텐데 물어보질 않아서 모르겠네.”

“음.”

“왜. 궁금해요?”

“아니. 마주칠까 봐.”

“그 정도로 예의 없는 사람들은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미리 연락하지 않으면 방문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예의 바르지만 파파라치 사진 정도는 간직하려 드는 가족인가 보군.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에단은 단순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가장 편했다. 루크가 하는 행동도. 가끔 그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말이다.

가벼운 손놀림으로 샐러드를 뒤적이던 루크는 별안간 눈을 들었다.

“갑자기 왜. 만나고 싶어요?”

“마주칠까 봐 그렇다니까. 방금처럼 들어오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마르텔에게 이야기했어요. 에단이 있을 때는 들어오지 말라고. 다 자기 눈으로 보고 저택을 관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주의해 달라고.”

그러니까 나를 대체 뭐라고 설명하면서 그렇게 말했냐 묻고 싶었지만 세련되게 캐낼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에단은 한입 가득 샌드위치를 우물거리기만 했다. 비죽이 나왔다가 들어간 입술을 뻔히 본 루크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왜요.”

“아니에요. 앞으로 주의하면 됐어요.”

“독일어 할 줄 알아요?”

“모른다고 하는 게 맞을걸요.”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루크는 완전히 이해한 것만 같은 낯을 했다. 단어 절반 정도는 알아듣고 문맥과 뉘앙스를 짐작하지만 가끔 치명적인 실수가 섞인 해석을 하는. 그런 설명하기 어려운 수준의 외국어 실력에 대해서 말이다.

무슨 근거로 루크가 안다고 파악했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지만……. 왜인지 그런 것만 같았다. 요즘은 그가 하려는 말을 대충 알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에단은 샌드위치 바구니 쪽으로 손을 뻗었다. 루크는 자기 쪽에 조금 더 가깝게 있었던 바구니를 끝까지 밀어 그의 앞에 두었다.

사양하지 않고 아직 온기가 남은 신선한 샌드위치를 덥석 물며 에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미가 엄청 크네요.”

“오래되었거든요.”

“이 저택이 세워졌을 때부터 있었어요?”

“그 정도는 아니고. 내가 태어난 해 심었다던가.”

“무슨 장미인지 알아요?”

“글쎄. 어머니가 좋아하셨다는 것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 무슨 종인지 들은 적은 없는 거 같네.”

그 말에 에단은 내려 두었던 휴대폰을 들어 골몰했다. 장미를 검색해 보고 싶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검색해야 할지 요원했다. 송이가 크고 잎이 많으며 가운데는 자글자글한…….

설명을 하나하나 구글 창에 써넣던 에단은 결국 포기하고 사진이나 한 장 찍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겠지 생각하면서. 기름 냄새나 풍기는 미캐닉들이 과연 이걸 알아볼까 싶은 의구심도 들기는 했지만.

오후의 볕이 온 사방에 공평하게 내리쬐는 한낮이었다. 시원한 공기로 서늘해진 피부를 데우는 볕 아래 손바닥을 펴 보았던 에단은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금발 위로 잘게 부스러지는 한낮의 볕이 찬란했다.

눈을 내려 휴대폰으로 들어온 연락을 보고 있던 루크는 그 시선을 느끼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뒤집어 덮어 두었다. 에단은 개의치 말라는 의미로 고갯짓했다.

“하던 거 계속해요.”

“그럼 당신은 뭐 하게.”

“그냥 보고 있겠죠.”

“보고만 있기에는 좀 아깝지 않아요?”

“아니. 보고 있는 정도가 딱 좋아.”

푸스스 흩어질 듯한 웃음소리를 흘린 루크가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비딱한 각도와 달리 미소는 한 점 구김 없었다.

“좋아요?”

“좋죠. 현실 같지가 않아서 문제긴 하지만.”

계절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지만 장미 정원에는 시든 이파리 하나 굴러다니지 않고 모든 것이 싱그러웠다. 가져다준 음식은 입에 모조리 맞았고 눈앞의 사람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그 덕분에 한없이 이렇게 늘어져 있는 중이었고.

“현실 같지 않다는 건 뭔데요.”

“새벽부터 트레이닝하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거든.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거나 하여튼, 이렇게 한가롭게 여유나 느끼고 있을 건 아닌 거 같다는 거죠.”

“내일 바로 트레이닝 가겠다고 말했다면서요.”

“일정이니까.”

물러설 여지가 보이지 않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루크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지금 이러고 있는 게 싫은 건 아닌 거죠?”

“굉장히 좋아요. 공기도 좋고 여유롭고. 솔직히 말하면 사람들이 황송하도록 손발을 맞춰 주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죠.”

“그럼 왜 벌써 가요.”

“아직 이럴 때가 아니니까요. 할 일이 있는 것뿐이에요. 싫다는 게 아니라.”

“언제쯤 한가한 거야?”

“크리스마스쯤에. 새해가 시작되면 다시 테스트로 바쁘겠지만.”

12월 25일부터 31일까지. 일수를 자신이 착각한 건가 싶어 손수 세어 보던 루크가 헛웃음과 함께 다시 질문했다.

“그래요. 그럼, 할 일이 다 끝난다면 어때요. 드라이버로서 모든 게 끝나고. 이렇게 여생이나 느긋하게 보낸다면.”

“좋겠죠. 그럴 여유가 없이 어느 팀이든 갈 거 같지만.”

“은퇴해도?”

“고문이건 코치건 갈 자리는 많으니까요.”

“계속 탄다는 건 아니었네. 그럼 됐어요.”

“탈 만큼 다 탄 다음이면 그렇게 되겠죠. 아마도.”

“그게 몇 년쯤 되면 마무리될 거 같아?”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어느 식으로든 악착같이 붙어 있을 생각을 했지 마무리라니. 그런 아름다운 마지막은 아직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골몰하는 에단의 고민이 길어지자 루크가 먼저 되물었다.

“레이싱 테마파크. 이런 건 어때요.”

“된다면 좋겠네.”

“좋다는 거죠?”

“좋다기보다는 사실 웃겨. 대체 무슨 테마파크인 거지?”

“트랙이 있고 레이스 카가 있는 거죠. 방문한 사람들이 체험할 수도 있고.”

“진짜 레이스 카를?”

“그보다는 느린 걸 가져다 놔야겠죠?”

“고카트 같은 걸 말하나 보네. 좋아요. 그리고.”

“기념관이 있는 거죠. 에단 한. 태어난 곳부터 그의 경력. 은퇴까지.”

“엄청나네.”

“드라이버들 그런 거 없어요?”

“7연속 세계 챔피언을 한 경우에나 있을걸.”

“7번이나 세계 챔피언을 할 정도로 오래 탄 드라이버가 있단 말이야?”

기겁하는 루크를 마주하는 에단의 눈빛이 심상찮았다. 마치 그것도 모르냐는 것처럼. 루크는 재빠르게 테마파크로 다시 주제를 바꾸었다. 질색하는 어투였지만 저 정도면 부정은 아니었다.

“그래요. 테마파크. 좋아.”

루크는 고개를 홀로 끄덕이며 이번에는 샐러드 접시를 에단의 앞으로 좀 더 밀었다. 식사보다 트레이닝할 장소부터 찾던 것과 달리 에단은 꽤 잘 먹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푸른 시선이 좀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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