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20x4 미국 그랑프리 - 텍사스 오스틴. (1)
트랙 길이 5.513km, 레이스 랩 56랩, 레이스 거리 308.405km, 20개의 코너, 높이 변화 ±30.9M, 랩 레코드 1:36.169
펑 터지는 폭음에 잇따라 에어쇼를 방불케 하는 비행기의 행렬이 하늘을 가른다. 그 요란한 소리에 인터뷰는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연기의 궤적으로 갈라진 하늘을 무심코 바라보던 에단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그들과 리포터가 서 있는 퍼레이드 카 뒤로 일사불란한 치어리딩이 뒤따르고 있었다.
사람의 양 다리에 팔을 걸어 훌쩍 던져 올리는 아슬아슬한 곡예로부터 간신히 시선을 떼어 내고 나서야 정면의 카메라를 응시했다. 리포터는 이미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방금 무슨 질문이었죠?”
“질문한 타이밍이 안 좋았네요.”
“네. 비행기에 치어리딩까지. 활기차고 보기 좋네요.”
“마치 에단의 올해 성과를 축하하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팀의 성과이기도 하죠.”
한 대의 퍼레이드 카에는 두 명의 팀 드라이버가 함께 탑승 중이었다. 먼저 인터뷰를 끝마쳤던 리암은 마침 관중석에서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는 자신의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 중이었다. 프랑스 국기를 흔드는 열성적인 반응을 눈에 담은 에단이 다시 인터뷰에 집중했다.
“이번 시즌 드라이버 순위 4위에 올랐어요. 어떤 변화가 에단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을까요.”
“너무 다양해서 하나를 꼽기는 어려울 거 같네요.”
“그럼 전부 말해 주세요. 우리 모두 궁금해하고 있거든요.”
“정말요? 하하. 일단은 팀의 변화가 있죠. 우리는 계속 의견을 나누고 있어요. 정말 끊임없이요. 그렇게 좋은 밸런스와 레이스 카가 나왔고. 개인의 변화도 있고요.”
“개인적인 변화는 어떤 게 있었을까요.”
뒤늦게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다가 린드베르그 팀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돌고 있는 것을 요즘에야 알게 되었다. 그게 긍정적인 방향이든 안 좋은 방향이든 말이다. 그래서 당연히 팀에 대해 더 캐물을 줄 알고 늘어놓은 말이었는데 뜻밖에 리포터가 반문한 것은 개인의 변화였다. 에단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일단…, 새로운 팀으로 왔으니까요. 새 환경에 맞추어 올해는 본 적 없는 새로운 성적을 보여 드리겠다 결심했었어요.”
“그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거 같네요.”
“다행인 일이죠. 물론 지켜보시는 많은 분들도 답답했겠지만 제가 가장 답답했거든요.”
“그랬을 거예요. F2 챔피언 출신에게는 특히 가혹한 시간이었을 거예요.”
“포뮬러 원의 모든 드라이버가 겪을 수 있는 순간이죠. 다들 챔피언 출신이잖아요.”
“맞아요. 모두가 최고였죠.”
“그렇다 보니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때라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죠. 이겨 내는 수밖에.”
그러니까 그렇게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고. 부디 다음에는 같잖은 실력으로 추월 따위를 노리지 말라고 리암에게 남기는 조언이기도 했다. 그 반응을 굳이 살필 필요는 없었기에 곁눈질 한번 던지지 않고 에단은 똑바르게 카메라를 응시했다.
대신 짓궂은 표정으로 리암과 에단을 번갈아 보던 리포터는 기대를 접은 듯 마무리 멘트를 했다. 5.5km에 달하는 트랙의 한 바퀴가 거의 끝나 피니시 라인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에단. 지금의 드라이버 순위에는 만족하나요? 20명의 포뮬러 원 드라이버 중 4위죠.”
“올해 드라이버 챔피언십은 1위부터 격차가 몇 포인트밖에 안 되죠. 굉장히 치열한 한 해이고,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 상황에서 만족하고 멈추는 F1 드라이버는 없을걸요. 가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순위를 끌어올릴 생각입니다.”
“멋진 인터뷰였습니다. 응원할게요, 에단.”
갈색 머리칼의 리포터는 매력적인 미소와 함께 악수를 청했다. 부드러운 손이 악수를 오래 이어 갔지만 손을 놓는 그 순간까지 에단의 정신은 다른 데에 팔려 있었다.
일단, 방금 했던 인터뷰의 대답을 다시 점검해야 했다. 혹시 실수한 게 있지 않을지. 저도 모르게 내비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을지 계산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턱 끝을 간질이는 거대한 꽃목걸이도 벗어 던져 버리고 말이다.
그 덕분에 먼저 내려 꽃목걸이를 잡아 뜯은 리암이 지껄인 소리에도 별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고마운 게 아주 많겠지.’ 하며 중얼거리던 말은 귓가를 스치는 환호성과 다를 것 없이 스러진다. 에단은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리암의 어깨 너머 피트에서부터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배경이 바뀌어서일까. 새삼스러운 눈으로 루크를 훑었다. 앞면이 깊게 포개진 형태의 핀 스프라이트 재킷을 갖춰 입고 금발을 풍성하게 넘긴 모습은 아메리칸드림을 제대로 이룬 사업가 같았다. 한 점 그늘 없는 햇살 같은 모습을 마주하자 핏발이 서도록 에단을 노려보던 리암도 표정을 가다듬었다. 루크는 먼저 마주한 리암과 악수했다.
“좋은 날이네요.”
“좋은 날이 되도록 노력해야죠. 레이스 준비 때문에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로 멀어지는 리암의 등을 루크가 엄지로 손가락질하며 에단에게 말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혼자 저러는 거야.”
“성적 때문에 예민할 겁니다.”
“그래? 안됐네. 퍼레이드는 어때요. 재미있어 보이던데.”
“퍼레이드 하는 드라이버들에게 꽃목걸이 걸어 주라고 제안한 거 당신이라며. 진짜야?”
“내가 기획한 건 아니고 어쩌냐고 묻길래 괜찮다고 한 거예요. 축제 같고 보기 좋잖아.”
됐다. 올해 드라이버 순위 1위인 헤센이 뭐 씹은 표정으로 퍼레이드 카에 올라타 있는 것을 본 순간부터 포기한 일이었다.
에단은 루크와 나란히 걸으며 주변의 시선을 새삼 돌아보았다. 단순히 팀 오너와 드라이버의 사이라고 하기에는 가까이 붙어 다니는 모습임이 확실하다. 그게 뭐가 문제 될 것이 있겠냐마는…….
햇살이 꽤 거센지 포켓에 꽂아 두었던 선글라스를 쓴 루크가 물었다.
“인터뷰 뭐 했어요.”
“뻔하죠. 미국 그랑프리는 자신이 있는지. 올해의 성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성적 마음에 들어요?”
“괜찮은데 아직 부족하죠.”
12위와 13위를 전전하던 작년과 비교하면 당연히 낫다. 그래도 에단은 오로지 위를 보고 싶었다. 위가 있는데 바닥을 왜 봐야 하지. 그런 놈들은 모조리 은퇴를 해야 하는 곳이다.
뻔뻔해 보일 것을 각오하고 한 대답이었는데 루크는 말꼬리를 잡지 않고 순순히 수긍했다.
“그렇겠죠. 꼴찌일 때도 1등만 바라봤는데 오죽하겠어.”
“지나간 일이니까 그때 이야기 꺼내도 내가 넘어가 주는 줄 알아요.”
“나도 지나간 일이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말했어요? 여전히 1등을 노린다.”
“비슷하게 말했죠. 아마 인터뷰 문제 될 건 없을 겁니다. 내 개인적인 걸 묻길래 그쪽으로 대답했어요.”
“개인적인 어떤 것?”
“작년과 다른 각오 같은 것들.”
“달라진 게 있어요? 내가 보기에는 그대로인데. 리암 저 친구는 좀 달라진 거 같지만.”
“여유가 없어서 그러니까 내버려 둬요.”
작년과 달라진 마음가짐……. 그중 한 파편이 에단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에단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루크를 바라보았다.
뭐랄까. 지금까지 에단에게 있어 레이스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같잖은 차별을 겪게 하던 이복형제들을 앞질러 나갔던 때. 그 순간 빛이 나던 아버지의 눈동자를. 관심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달리던 그 시절 말이다.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지만.
에단은 지난밤 오랜만에 휴대폰을 켜고 갖가지 사이트와 SNS의 여론을 살폈다. 저녁의 트레이닝마저 간단히 마치고 여론 파악에 골몰했던 그는 생각보다 다양한 반응들을 노려보았다.
‘화학 연료를 태워 폭발적인 배기음을 만들어 내는 F1에 감히 그 대척점이나 다를 것 없는 전기 차 회사 린드베르그라니.’
안 그래도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개정되어 가는 F1 레이스 카의 제작 규정에 불만을 품은 팬들의 반감이 대단했다.
근본도 없는. 대체 무슨 근본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그 와중에 성적이 좋은 게 더 기분 나쁘단다. F1에 참석할 자격이 없는 게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그렇게 치면 음료수 회사인 레드불이 레이싱에 참여하고 있는 건 어디 자격이 있나 싶다만.
그 와중에 명예 훼손으로 고소라도 당할까 걱정했는지 미묘하게 비꼬아진 발언들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숨은 칼날이 푹푹 파고든다.
‘이번에도 홍보 포스터거리를 찾아온 거 아냐?’
다행인 점은 초반의 비난이 눈에 띄게 나아지는 성적에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근래에 올수록 몇몇 발작적인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F1의 팀으로서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는데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리다. 한동안 멈춰 있던 에단의 손가락이 몇 번이고 움찔거렸다. 모두의 생각은 틀렸다. 루크가 포뮬러 원 팀을 구매한 건 당신들이 생각한 그런 대단한 이유나 엄청난 음모가 아니다. 충동적으로 포뮬러 원에 관심이 생겼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진심이 되었을 수도 있고.
그리고 바로 이런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어느 한 사람의 충동적이고도 절박한 도전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멘트를 쓰자마자 늘 격무에 시달려 보이는 크리스를 마주할 것만 같았다. 설득력 있는 문장을 만드느라 골몰하던 에단은 결국 포기하고 휴대폰을 치워 버렸었다.
잠시 어젯 밤의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그의 정신을 루크가 일깨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긴장돼서 그러나? 예민한 거면 들어가서 쉬어요. 난 혼자 외롭게 돌아다니고 있을게.”
도무지 들어가라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 소리다. 편을 들어 주려던 마음이 단숨에 희석되는 것을 느끼며 에단이 대꾸했다.
“15분 후에는 들어갈 겁니다. 몸 풀고 준비해야 돼요.”
“면회 시간에만 만나는 기분이야. 로맨틱한데.”
“무슨 면회 시간.”
“교도소 같은 거라던가.”
“지난주에 본 그 영화 때문이죠.”
“감명 깊지 않았어요?”
꼭 본인은 별로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숟가락으로 교도소 바닥을 15년간 파 탈옥하는 식의 노력으로 똘똘 뭉친 스토리를 좋아하곤 했다. 특이한 취향이지. 다리를 겹친 채 같이 보았던 영화를 상기하던 에단은 주먹을 꾹 쥐어 루크에게 내밀었다.
“우승 가져다줄게요.”
“왜요. 갑자기 의욕이 샘솟아?”
내가 우승을 해야 너에 대해 지껄이는 그 같잖은 소리들이 가라앉겠지. 작년과 다른 개인의 변화…….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레이스를 하던 마음에 다른 생각이 싹을 텄다.
아직 그 비중이 아주 무겁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어렴풋이 커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 복잡한 마음까지 알 수 없는 루크 역시 주먹을 들어 에단과 손을 맞부딪쳐 주었다.
말이 15분의 여유이지 중간에 찾아온 엔지니어와 의견을 나누느라 그 15분 동안 루크와 나눈 대화는 온전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크리스가 다가왔다. 지적으로 보이는 금테 안경을 신경질적으로 앞 포켓에 접어 넣으며 두 사람 앞에 섰다.
크리스는 에단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일말의 미소를 보였다.
“에단. 오늘 레이스 응원할게요.”
“고마워요. 리암은 대기실에 있을 겁니다.”
크리스가 자신보다 리암을 더 응원하고 있음을 알아 해 준 말이었다.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피곤이 한층 짙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먼저 보고 왔어요. 보스. 잠깐 보고할 게 있어.”
“급한 일이야?”
“조금.”
“그럼 나중에. 나 에단 옷 갈아입는 거 봐야 해.”
“그만하고 따라오시죠.”
잇새로 내뱉는 말이 얼마나 나지막했는지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
“왜.”
“기사 봤어?”
“무슨 기사.”
“방금 나온 포뮬러 원 기사.”
“읽어 줘.”
“꽤 길어.”
“읽어.”
감독이 없는 빈 감독실 의자에 앉은 채로 루크는 빙글 몸을 돌렸다. 육중한 무게를 싣고도 한 바퀴를 매끄럽게 돈 의자가 다시 정면을 마주하자 크리스는 결국 기사를 직접 입으로 읽었다.
방금 전까지 햇살같이 웃고 있었던 루크는 이제 햇살이 닿는 것마저 귀찮다는 듯 그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콧잔등 위로 느슨하게 미끄러진 선글라스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는 동안 크리스는 2배속에 가까운 빠르기로 기사를 읊었다.
“요약하자면 익명의 드라이버 제보로 구성된 기사야. 린드베르그 팀의 문제점이라는데 내부 사정을 꽤 아는 듯 지껄여 놨어.”
“전에도 그런 건 있었어.”
“이번에는 진짜 같아.”
“뭐라는데.”
“익명을 요구한 한 드라이버의 측근은 린드베르그의 내부 문제에 목소리를 높였다. 린드베르그는 대단해 보입니다. F1의 입성 첫해에 포디움에 오르고 팀 순위인 컨스트럭터 순위가 3위. 환상적인 출발이지만 겉만 번드르르할 뿐입니다. 내부는 곪아 가고 있어요. 린드베르그는 지나치게 편향적입니다. 레이스 카의 개발이 지나치게 한 드라이버의 의견만을 반영하고 있어요. 그 뒤에 어쩌고저쩌고. 팀 오너가 선택한 드라이버의 목소리에만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긴 린드베르그의 왕국이니까요. 연초 스페인을 떠올려 봐요. 차가 성에 차지 않는다고 프리시즌 테스트에 나오지 않으려 들었던 팀을 어쩌겠어요.”
“차가 그래서 뭐 어떻다는 거야?”
“이 인터뷰이의 말에 따르면 빠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예민해서 몰기가 어렵대.”
“네 생각은.”
“우리 팀 레이스 카가 다루기 어려운 건 사실이야. 그런 쪽으로 업그레이드가 되어 가고 있고. 하지만 이건 이 인터뷰가 지껄인 것처럼 에단의 의견만을 반영해서는 아니야. 애초에 헤인즈는 공기 역학의 강자였고 우리도 공기 역학 데이터를 얻는 게 목적이었어. 그로 인해 날씨에, 컨트롤에 예민한 차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건 팀의 특성인 거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 정도면 컨트롤 범위 내야. 무엇보다 에단은 멀쩡하게 잘만 몰고 있는데 자기 드라이빙 실력이 떨어지는 걸 이런 식으로 지껄이다니.”
이미 누구의 인터뷰인지 단정 짓는 어투였다. 분개하느라 얼굴이 벌게진 크리스의 흥분을 지켜보던 루크는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가 그만두었다. 의도치 않게 에단을 오해했던 지난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단번에 지목하면 리암도 그걸 따지고 들려나. 하지만 리암의 기분은 자신이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과거가 떠올랐던 덕분에 루크는 꽤 괜찮은 기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반응은 어때?”
“전부 처리 중이야.”
“뭐라는데.”
“F1에 대해 뭘 알겠냐, 전자 기기나 만들던 회사가, 등등. 보지 마.”
“그래. 리암은 뭐래. 이미 물어봤지?”
“자기는 아니라는데. 이 인터뷰를 한 팀의 다른 사람 눈에도 이렇게 보이나 보죠. 하는 말이나 지껄이고 있어. 겁이 없던데.”
“네가 보기에는 어때.”
“거짓말이야.”
법망을 피하는 사기꾼과 말만 번드르르한 사업가들을 밤낮으로 상대한 크리스에게 직선적인 성격의 운동선수는 아무리 음습하다 해도 바닥이 투명하게 보이는 수준이었다. 의심의 여지조차 없는 그 대답에 루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아서 처리해. 이렇게까지 보고할 건 아니잖아.”
“그러려고 했지. 너 그런데 이번과 똑같은 경우 한 번 넘어갔다고 들었어.”
“내가?”
“에단. 이 익명 인터뷰 리암이 처음 한 게 아니라고 들었어.”
“아. 맞아. 에단은 진짜 아니야.”
“그래. 그 친구는 진짜 아닐 거야. 하지만 생각해 봐. 남들 눈에는 같은 수법을 쓴 거잖아. 상반기에 에단이 자기가 가진 팀의 불만을 익명의 인터뷰로 흘렸어. 잘 넘어갔어. 팀은 아주 따뜻하게 그 불만을 감싸 안아 주고 피드백해 주었어. 그리고 하반기가 됐지. 이번에는 리암이 팀의 불만을 익명의 인터뷰로 흘렸어. 리암을 가만두지 않아. 고소를 진행해.”
“뭐가 문제야.”
“그렇게 하면 진짜 차별로 보이는 거야. 그래서 물으려고 왔어. 어떻게 할지.”
“에단은 진짜 아니었다니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잖아. 왜 바보같이 굴어.”
물론 루크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크리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만 모르는 척하고 싶었을 뿐이지.
“말이 심하네.”
“일단 둘 다 고소하고 에단 벌금은 네가 알아서 내주는 걸로 하자.”
“으음…….”
“에단과 무슨 사이인지는 이미 들어서 잘 알았고, 네가 알아서 달래 줘.”
선글라스를 마저 벗어 낸 루크는 다시 한번 의자를 빙글 돌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곧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크리스는 신경질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은 채 벼르던 말을 쏟아 냈다.
“그리고 제발 숨겨라. 지금 편견이 숨겨 주고 있는 수준이야. 네가 과거 만났던 사람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남자가 끼어 있었다? 바로 그 기사부터 터졌어. 리암의 인터뷰 뉘앙스도 뭔가 그래.”
“그건 잘 막아 봐.”
“이건 네가 문제가 아니야. 알지?”
“알아.”
“물론 네 이미지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에단은… 절대 안 돼. 절대. 팀 오너와 그런 사이다? 이건 진실이 어떤 것이건 아무도 관심 없어. 모두 몰려들어서 물어뜯겠지. 실제로 연봉도 백업도 장난 아니게 해 주고 있잖아.”
“알았어.”
“그래서 어떻게 할까. 빨리 말해 줘.”
다시 시작된 재촉에 루크는 손아귀에 쥔 선글라스를 마디가 틀어지도록 꾹 쥐었다. 그 다음 시선을 내리깔았다. 크리스는 다시 한번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물론 크리스는 F1을 굉장히 사랑했다. 1주에서 2주 간격으로 벌어지는 스포츠는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 않았고 짧은 시간에 카타르시스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이번 시즌은 절대적인 챔피언이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고 루키들이 빛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경쟁과 예측 불허의 스포츠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시즌을 맞이하게 해 준 에단에게 더없이 감사한 마음도 물론 있다.
하지만 명백한 길이 보인다. 크리스는 당장 대답이 나오지 않는 루크의 얼굴을 쏘아보듯 바라보며 생각했다.
쉽잖아. 어서 말해. 익명의 기사는 모조리 응징을 해라. 에단도. 리암도. 그리고 경기장에 발걸음을 덜하면 되잖아. 심지어 에단에게는 미리 말을 해 두면 될 것이다. 고소를 진행할 것이나 벌금은 내주겠다. 그렇게 하면 되잖아. 너 돈 많잖아. 대체 왜.
루크는 툭 건드리면 안구가 굴러떨어질 듯 눈을 부릅뜨고 있는 크리스의 꼴에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그 웃음에 크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빨리 알았다고 해. 둘 다 진행하고 앞으로 그랑프리에는 오지 않겠다. 그리고 네 연인은 알아서 어디 좋은 호텔이나 데려가서 설명하라고. 내가 고소를 하겠지만 그 벌금 따위는 내가 내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하면 되잖아.”
“그런데 그거 이미 이야기 끝났어.”
“뭘?”
“그 기사. 에단이 아니라고 해서 그렇게 믿기로 했단 말이야.”
“너 지금 장난해? 그냥 안 믿는 척만 하자니까?”
“온 세상이 안 믿었다고 그때 얼마나 풀 죽었는지 몰라.”
“뭐……?”
“그래서 믿어 주기로 했어.”
크리스의 입이 다시 크게 벌어진 순간 루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일단 오늘 그랑프리 끝나고 이야기해.”
“미치겠네. 정말.”
“진정해.”
“내가 아직 다 안 읽었는데 이거 알아 둬. 리암이 너 그 사건도 건드렸어. 오너의 의사가 중요하지만 절대적일 수 없어요. 드라이버는 목숨을 걸고 레이스 카를 타고 있습니다. 레이스 카를 믿을 수 없다면 제 실력을 낼 수도 없어요. 오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이후 길게 이어지는 기사를 듣고도 루크는 심드렁했다.
“그랬겠지. 단골 주제잖아.”
“이번에 넘어가면 은근히 이 이야기 꺼내는 기사들 앞으로 걷잡을 수 없을 거다.”
“몇 년째인지 대단해. 일단 나가자고. 시작한다잖아.”
경기 시작 전 15분을 알리는 방송보다 거센 엔진 소리가 무르익고 있었다. 길은 뻔히 보인다. 하지만 루크는 결정을 미루며 문을 열고 나갔다. 적어도 2시간가량은 머리를 식힌 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예선 2위. 두 번째 스타트였지만 두 대씩 정렬되어 시작하는 F1의 특성상 첫 번째 줄의 스타트였다. 그리고 이번 트랙은 두 번째 스타팅 그리드가 첫 번째 코너를 접어들 때 더욱 유리하다는 평가를 듣곤 했었다.
최전방에 나란히 선 두 대의 차. 페라리와 린드베르그의 레이스 카가 화면에 비추자 루크의 옆에 앉아 있던 한 미국인 사업가가 말을 걸어왔다. 자율 주행 사업을 하는 회사의 대표인 것까지는 기억했지만 그 이상의 기억은 나지 않는 흔하게 생긴 백인 남자였다. 누군가 알려 줘야만 아슬아슬하게 기억이 떠오를 그런 사람 말이다.
“루크. 축하합니다. F1 진출의 첫해라고는 믿기지 않는 성적이에요.”
“감사합니다. 드라이버들이 최선을 다해 준 덕분이죠.”
정말 그 말 그대로였다. 에단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너무 최선을 다해서 문제였다. 자기 혼자 요즈음 무슨 결심을 했는지 마치 순교자같은 표정으로 선언하기까지 했다. 본선의 출발 순위를 정하는 예선 전날에도 결코, 절대로 손을 대지 않겠다고. 루크의 얼굴을 보지도 않겠다고…….
내가 섹시하게 생긴 게 죄는 아니잖아! 하고 루크가 반발했지만 에단은 호텔 문을 열어 주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레이스가 끝나면 그 귀한 얼굴과 몸뚱이를 바로 까 볼 생각이었다. 몇 번째 순위든 상관없었다.
한참 조지아주에 벌려 둔 일이 많았기에 미국 그랑프리를 구경하러 온 이들이 많았다. 그들의 사이에 끼어 1등석이나 다름없는 피트 위 박스석에 앉은 루크는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구두 안 발가락을 까딱거렸다. 붉은 불이 하나씩 켜진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동시에 점멸했다.
거의 동시에 튀어 나간 것 같았지만 에단의 레이스 카가 프론트 윙을 조금 더 앞으로 들이밀었다. 방송용 화면을 뚫어지게 보는 루크의 눈동자가 오른쪽 하단을 응시했다.
스타팅 반응 속도. 페라리의 어느 놈은 0.33초의 반응 속도를 보였지만 에단은 0.3초의 반응 속도였다. 좋았어. 질끈 쥐어지는 주먹을 허벅지 아래로 내리며 초조하게 코너를 빠져나가는 페라리의 레이스 카와 에단을 지켜보았다. 3번, 4번 코너를 지나 질주하는 동안에도 두 대의 레이스 카가 나란했다. 그 뒤에 3위와 4위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바짝 붙다가 뒤를 들이받기라도 하면 가만 안 둔다. 제발. 저리 꺼져. 목울대 아래로 소리 없는 외침을 집어삼키던 루크는 숨마저 멈춘 채 화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그리고 드디어 15번째 커브. 코너 안쪽을 에단이 먼저 파고들었다!
“휠 투 휠! 페라리의 마르코가 결국 코너의 안쪽을 내어 주며 2위로 밀려납니다! 린드베르그! 선두를 리드합니다!”
그 순간 박스석 안의 술렁임도, 관중석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루크는 뚫어질 듯 화면만을 노려보았다.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그 뒤 한 번 더 바짝 달라붙는 페라리의 추격이 코너의 안쪽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에단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페라리가 파고들려는 라인을 크로스해 방해한다.
그다음 아웃으로 코너를 길게 돌아 다시 한번 선두를 지켜 냈다. 그 과정에서 두 레이스 카의 접촉이 있었다. 차체의 진동을 느낀 페라리의 드라이버가 내뱉는 욕설이 적나라하게 방송에 내보내진다.
“미친! 너무 위험하잖아!”
- 항의할게. 페이스를 유지해.
페라리 드라이버를 달래는 레이스 엔지니어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루크가 뇌까렸다.
“위험하면 저리 꺼져, 제발.”
다행히 페라리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렇게 순위를 유지한 채 격차가 벌어진다. 페라리의 드라이버는 몇 번이고 충돌 때문에 프론트 윙이 불안정하다고 징징대고 있었다.
아직 긴장을 풀지 못한 루크에게 누군가가 외쳤다.
“린드베르그가 1위네요. 축하합니다!”
마치 건배라도 할 듯 성급하게 건네진 인사를 돌아보지 않은 채 루크는 화면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완주하고 나면 축하하죠.”
끌어올려지던 분위기는 어색하게 가라앉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에단은 간간이 중계에 잡혀도 내보낼 게 없을 정도로 말없이 레이스에 집중하고 있었다. 간헐적인 숨소리가 간신히 잡히는 수준이다. 그 호흡과 같이 숨을 쉬며 루크도 레이스에 몰두했다.
첫 번째 피트인. 린드베르그 팀의 타이어 교체 속도는 2.5초였다. 누군가의 성급한 박수가 다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 피트인. 2.4초. 이번에는 동조하는 박수가 더욱 커져 갔다. 루크도 반사적으로 박수를 치려 손을 들었다가 간신히 주먹을 쥐어 천천히 허벅지 위에 내렸다. 이제 단 15랩만이 남았다…….
어떤 덜떨어진 놈 하나가 혼자 커브를 돌다 스핀한 순간,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모든 드라이버가 감속을 해야 할까 숨죽였지만 다행히 레이스는 신속하게 재개되었다. 그 외의 자잘한 충돌은 다행히 레이스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3랩. 이제는 중계마저 성급하게 에단의 승리를 예견한다. 그간의 성적이 하나씩 자막으로 띄워진다. 과거 F2 챔피언. 올해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첫 포디움을 2위로 달성. 그리고 이번이 첫 번째 그랑프리 우승이 될 수 있음을.
파이널 랩. 타이어를 아끼지 말라는 딘의 라디오는 이미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루크는 다시 한번 발을 까딱였다.
이제 마지막 커브. 마지막 스트레이트! 이미 피트 아래의 팀 크루들은 피트 월로 달려가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관중석의 아낌없는 함성도 나부낀다.
체커드 플래그! 쏜살같이 쏘아 지나가는 하얀 색의 레이스 카가 피니시 라인을 지나자 경기의 종료를 알리는 체커드 플래그가 나부낀다. 곁에 다가와 앉은 한 남자가 얼떨떨한 루크의 어깨를 붙잡고 환희했다.
“루크. 우승이에요!”
“그러네요.”
GM의 어떤 직책이었던가. 그런 남자가 과감히 어깨를 두드리며 옆에 앉는 것과 동시에 모든 이들이 다가와 박수를 친다. 뒤따르는 레이스 카들이 연달아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는 굉음과 박수 소리. 환호까지. 사방을 울리는 환호 속에서 루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중얼거렸다.
“그래요, 우승이네요. 조금 믿기지는 않지만.”
“첫해에 우승이라니. 이런 역사가 있었던가?”
그런 기록과 성과는 여전히 루크에게 와닿지 않는다. 대신 중계에서 들리는 에단의 환호가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드디어 감속한 레이스 카가 피트 레인을 지나가는 것이 발밑으로 보인다. 그걸 본 루크는 이제야 숨을 제대로 내쉬었다. 근 2시간가량 폐를 답답하게 쥐어짜 내는 것만 같던 긴장이 이제야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루크는 연달아 박수를 치며 저릿한 손바닥을 느꼈다. 아니, 손바닥보다도 심장이 더 아프다. 오늘의 에단은…. 정말이지 뭐랄까.
“뭐가 없는 사람처럼 달리네.”
그 무엇도. 뒤에 남겨진 것 따위는 모조리 잊어버린 사람처럼. 레이스 카에서 뛰어내린 에단과 팀의 환호는 더욱 커져 간다. 물론 기쁘다. 어디 감정이 잘못된 사람이 아니고서야 루크도 당연히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걱정으로 졸아들어 터져 버릴 뻔했던 심장의 지끈거림이 더해지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엔도르핀과 불안감이 한데 뒤엉켜 엉망이 된 머릿속을 함성이 뒤흔들던 순간. 루크는 갑자기 제 어깨를 돌리더니 거세게 끌어안으며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는 이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밀어 내고 보니 크리스였다.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고!”
“그래.”
“빌어먹을 기사 따위! 알 게 뭐야! 우리는 옳았어! 옳았다고! 루크, 알아?”
“알았어. 알았다고.”
“엿이나 처먹으라지. Fucking! 뒈져 버려!”
핏발이 선 눈으로 승리를 외치는지 욕설을 그저 뱉기 위함인지 모를 크리스의 흥분을 밀치며 루크는 사람들 틈을 헤쳤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았다. 포디움. 그랑프리의 우승자가 설 그 시상대 아래로 달려가야 했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