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20x4 벨기에 그랑프리. 스파-프랑코샹 서킷. (10/20)

10. 20x4 벨기에 그랑프리. 스파-프랑코샹 서킷.

트랙 길이 7.004km, 레이스 랩 44랩, 레이스 거리 308.052km, 높이 변화 ±102.2M, 코너 개수 19, 랩 레코드 1:46.345.

당신 비서가 준 리스트 뭡니까.

마음에 드는 거 없어요?

당신 비서가 정부를 들인 노인네 같은 소리를 전해 주던데요. 루크 린드베르그와 교제하는 건 복권에 세 번 당첨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죠! 축하해요! 라면서 문을 두드렸다고.

물어볼게요.

.

.

.

리스트에 원하는 게 없었어요? 말하면 따로 준비해 줄게요.

그만두죠.

대화를 그만두자는 것인지, 아니면 이 관계 자체를 그만두자는 것인지 분간 가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주저 없이 문자의 전송 버튼을 누른 뒤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애초에 그의 마음을 투명하게 반영한 의도 자체도 그랬다. 루크와의 이… 말도 안 되는 짓에 약간의 회의감마저 든 것이 사실이었다. 오늘 아침 대뜸 호텔방 문을 두드리던 사라를 마주한 순간부터 그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훅 하고 한숨을 내뱉은 에단이 빨리 걷자 발맞추어 함께 걷는 팀 크루들의 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그중 조지가 곁을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별일 없어. 팀은 어때.”

“괜찮아. 리암은 늘 그렇고.”

“별일 없는 거 맞네.”

서머 브레이크가 끝나고 오늘 아침 회의실로 들어가는 길에 마주친 리암은 영국 그랑프리에서의 충돌 같은 건 깨끗이 잊은 것처럼 굴었다. 다만 에단의 존재마저도 깨끗하게 잊은 것처럼 구는게 문제였다.

에단 역시 그 반응 그대로 응수하며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리암은 대신 팀 회의에서 좀 더 정중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레이스 카에 대한 피드백을 요구했다. 차의 속도는 빠르지만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감독은 다음 업그레이드에 그의 의견을 더욱 반영하겠다는 답변과 함께 이미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그리고 뜻밖의 말도 했었는데.

“일단 지금 성적이 잘 나오고 있으니까 내 입장에서는 지금의 레이스 카 개발 방향이 크게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

라는 발언과 함께 에단에게 눈길을 준 것이었다. 스치듯 준 것이 아니라 아예 도장을 눌러 찍듯 정확한 시선이었다. 다음 피드백을 준비하고 있던 에단은 감독의 영문 모를 반응에 별다른 말 없이 마이크를 조정하기만 했다.

리암은 그 꼴을 보고도 일단은 다른 항의 없이 물러났다. 뒤에서는 앞으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떠들고 다니는 것 같았지만 그것까지 하나하나 에단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리암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는 게 걱정되기는 해.”

조지의 한껏 우려 섞인 말이 새롭다는 듯 돌아본 에단이 응수했다.

“나는 궁금해.”

“정말?”

“어떻게 가만히 있지 않을지 말이야. 나도 배워서 나중에 써먹게.”

조지는 장난인 줄 알았는지 웃었지만 에단은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리암의 행보를 주시하는 중이었다. 지금이야 팀이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우호적이지만 인생은 모를 일이다.

벨기에의 아르덴 숲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스파 프랑코샹은 높고 촘촘하게 심어진 나무와 야트막한 언덕,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저 멀리 보이는 손꼽히는 풍광의 서킷이었다. 정작 레이스 중에는 풍광 따위에 낭비할 시야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서킷을 걸을 때에나 공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평균 속도 200km 후반의 고속 서킷. 웬만한 커브마저도 브레이크 없이 풀 스로틀로 통과해야만 간신히 F1 드라이버의 기본 조건을 갖추었다고 평가받는 초고속 서킷이었다.

“팀 반응 같은 거 신경 쓸 것 없이 레이스에만 집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에단의 혼잣말에 조지가 과민 반응했다.

“누가 누한테 뭐라고 했어?”

“아니. 리암을 보고 든 생각이야. 내가 늘 그랬었잖아.”

에단은 어깨를 으쓱하며 서킷을 마저 걸었다. 조지가 일정을 읊으며 이것저것을 이야기하다가 결국 그 주제까지 다다르고야 말았다.

“우리 팀 오너 비서가 아침에 네 방에 방문했다며. 그 여자 비서.”

“사라?”

“이름도 알아?”

새롭다는 듯 묻는 조지의 반응에 에단은 무심코 반응했던 태도 그대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들어서 대충 알지.”

“하긴. 그런데 갑자기 아침부터 무슨 일이었대?”

그때 작게 꿈틀거린 눈썹을 조지는 놓치지 않았다. 표정 없이 무덤덤함을 가장하는 에단을 보고 조지가 푹 한숨을 쉬었다.

“속도 모르는 리암 쪽 인간들은 네가 편애를 받네 어쩌네 지껄이고 있어. 상식적으로 휴가 내내 팀 오너와 함께 보낸 시간이 즐거웠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 관계를 조지에게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요즘 가진 고민 중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레이스 외에 신경 쓸 것 중 이런 것까지 더해질 줄이야.

잠깐 만나다 말 관계라면 말을 하지 않는 게 낫지만… 조금만 부주의하거나, 특히 루크가 조금이라도 실수한다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 것만 같았다.

아침만 해도 그랬다. 복도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지. 양팔을 벌린 채 환하게 웃으며 외치던 그 목소리라니. 특히 조지가 들었다면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늘 주변인들에게 우리라고 좋아서 팀 오너를 자꾸 만나겠냐며 항변 중인 소심한 조지인데 말이다.

피트 워킹을 마치고 피트로 들어가는 바로 앞에서 에단은 조지의 어깨에 손을 툭 올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항상 고마워.”

“알아.”

조지는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마치 네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가볍게 웃어 보인 뒤 평정을 찾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단은 조금 씁쓸해졌다. 네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런 게 아닐 거야. 너는 상상도 못 한 이유일걸.

린드베르그 레이싱의 개러지로 들어오자 먼저 도착한 리암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의 뒤에 따라붙은 레이스 엔지니어가 말을 건넨다.

“리암. 지난 그랑프리는 아까웠어.”

“아까웠다는 말 좀 그만해. 지긋지긋하니까.”

꾹꾹 눌렀던 분노가 폭발하기라도 했는지 리암은 수건을 집어 던지더니 개러지를 나가 버렸다.

***

토요일. 예선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에단은 피드백을 받느라 한동안 붙잡혀 정신이 팔렸었다. 그리고 돌아온 호텔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광경에는 할 말을 잊었다. 마치 제 침대인 양 걸터앉아 있던 루크가 빙긋이 웃음 지으며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도착했다는 말을 전혀 들은 적이 없었기에 에단은 제가 보는 사람이 정말 루크가 맞는지 잠시 멈춰 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앉아도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큰 체격과 넓은 어깨에 얹힌 조각 같은 얼굴까지. 다른 이로 의심하려 해도 쉽지 않은 외양이다. 루크는 생각에 잠겨 무뚝뚝하게 입을 다문 에단의 몫까지 활짝 웃었다.

“그 표정 굉장히 신선하네.”

“무슨 표정이었는데요.”

“이게 뭐야, 라는 표정. 좀 더 반가워해야죠. 연인 사이에 너무한 거 아닌가.”

“놀랐으니까 그렇죠.”

하긴, 듣고 보니 놀란 표정만 짓기에는 조금 미안했다. 생각 후 어색하게 웃어 보인 에단은 곧 루크가 터질 듯 광대를 들썩이는 것을 외면하며 문을 닫았다. 웃으라고 할 땐 언제고 비웃냐고 따지기에는 자신의 안면 근육이 어떤 모양을 만들어 냈을지 안 봐도 뻔했다.

제대로 닫힌 건지 문을 눌러 확인하는 사이 가까워지는 인기척에 순간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던 에단의 목덜미가 굳었다.

그럼에도 피하지 않는 어깨를 바라보던 루크는 양팔을 뻗어 허리를 감아 안았다. 단단한 허리가 팔 안에 들어차도록 끌어안고는 코를 박아 뒷덜미를 가린 옷깃을 끌어 내렸다.

뒷머리 아래 희고 매끈한 뒷덜미가 늘 눈에 밟혔다. 레이스가 끝나고 헬멧을 벗은 뒤 보이는 흰 살갗이나, 혹은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는 무방비하게 돌아다니는 순간. 거기 물을 끼얹거나 가지런한 손가락이 쓸어내리거나 하는 등등의 순간들이 말이다. 에단은 뒷덜미에 들러붙은 입술의 감촉에 조금 눈을 찌푸리며 목을 움츠렸다.

“아직 땀 냄새 나니까 비켜요.”

“그런가?”

하지 말라고 하니 더욱 코를 박아 체취를 들이마시느라 팽팽히 부푼 흉곽이 에단의 등을 압박했다. 콧대가 문질러지고 이마가 뒷머리를 짓누르는 느낌에 에단은 고개를 조금 돌리려다가 말았다. 이제 알아서 떨어지겠지. 하지만 루크는 에단의 예상보다도 지분거리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마주쳐 왔다.

“당신 체취가 별로 짙지 않아서 모르겠어.”

“코가 잘못된 건 아니고?”

“진짜야.”

“나는 느껴지니까 저리 비켜요.”

“난 괜찮아.”

“내가 안 괜찮다고.”

땀에 푹 젖었다 하기에는 보송하기만 한 목덜미를 보던 루크는 결국 몸을 돌린 에단에게 손목이 붙잡혔다. 팔에 힘을 주어 흔들어 보았지만 어림없었다. 단단하게 틀어쥔 에단의 손가락 마디를 유심히 보던 루크가 다시 팔을 흔들었다. 에단은 어림도 없다는 듯 힘을 주어 버텼다.

루크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여기서 굳이 힘겨루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루크는 항복의 의미로 손바닥을 보였다.

“손목 부러지겠네. 항복.”

“씻고 오기 전까지 가만히 있기로 약속하면 놓을게요.”

“알았어요. 침대에 얌전히 있을게.”

감긴 손이 떨어져 나가자 루크의 손목에는 붉은 자국이 남았다. 그 손목의 자국을 다른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색을 내던 루크가 침대로 뒷걸음질했다. 그사이 재빠르게 욕실로 들어가려던 에단은 문을 열자마자 우뚝 서더니 갑자기 뒤를 돌아 소리쳤다.

“아니, 이게 아니잖아. 대체 남의 방에는 왜 멋대로 들어와 있는 거야?”

“우리가 남은 아니잖아.”

“그 목소리 방문 밖에서 한 마디라도 들리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어떻게 가만 안 둘 거야?”

“나가요.”

“알았어. 얌전히 있을게요.”

루크는 다시 에단이 처음 들어왔을 때 마주한 그 자세와 흡사하게 침대가에 걸터앉은 뒤 양손을 들어 올린다. 항복 같았지만 그 자리가 당연히 제 자리인 양 표정만큼은 더없이 당당했다.

쫓아내려 해 봤자 씻는 시간만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에단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반쯤 열어 두었지만 샤워 부스는 안쪽에 위치해 보이는 게 없었다. 긴 목을 쭉 빼고 안을 들여다보려던 루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발끝을 까딱였다.

들어오라고 열어 둔 걸까? 아닐 것 같기는 하지만 혹시 모르지. 볼 안쪽의 점막을 혀로 훑는 순간이었다. 안에서 챡챡 발소리가 들리더니 헐렁한 트레이닝팬츠를 아래 느슨하게 걸치고 나온 에단은 티셔츠를 그냥 들고 나왔다.

침대에 아직 앉아 있는 루크에게 한 번 눈길을 던진 그는 양팔을 먼저 끼워 팔을 들어 올리더니 머리를 집어넣었다. 늘씬하게 길어지는 복근과 가슴 근육이 꿈틀거리는 정경이 순식간에 얇은 티셔츠 아래로 가려진다. 그리고 눈썹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툭툭 털어 낸다.

무슨… 쇼 같네. 루크가 짧게 지나간 살갗의 향연을 머릿속으로 찬찬히 되짚는 동안 에단은 바빴다. 젖은 머리를 마저 닦던 수건을 바닥으로 휙 던지더니 침대 가까이 섰다.

“빨리 나왔네요.”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무슨 짓은 지금 하고 싶지.”

루크는 앞에 선 실루엣을 찬찬히 훑으며 눈을 들었다.

“몸매 하나는 정말…….”

“하.”

“그런 말 자주 들었죠.”

“이렇게 노골적으로 보는 사람은 처음이야.”

“그럼. 은밀하게 본 사람은 누구야?”

“나 그런 이야기 하는 거 안 좋아해.”

“난 궁금해.”

“오늘은 자꾸 그렇게 들쑤셔도 나 말 길게 안 할 거예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레이스 전날의 드라이버는 예민하거든. 아직 당신 비서가 이건 안 말해 줬나? 안 말해 줬으면 오늘부터 기억해요.”

“아. 예민해서 그렇게 대답했던 거야?”

“대체 뭘.”

영문 모를 대화에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인상을 구기던 에단은 빙긋 웃으며 올려다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손을 멈췄다. 그래. 이렇게 말도 없이 찾아온 사람이 하나 더 있었지. 그쪽은 그나마 문 앞에 서 있기라도 했었다.

“리스트에 마음에 드는 게 없었으면 말해 줘요. 준비해 둘게.”

“그래. 대체 그 멘트는 뭡니까? 루크 린드베르그를 만나는 건 복권에 세 번 당첨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죠, 라고 했다고.”

“나도 사라가 그렇게 말하는 줄은 몰랐어요.”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하지 말라고 해.”

“이젠 사라가 싫어졌겠네.”

“무슨 소리……. 아. 그건 그냥 비유였다니까.”

루크는 에단의 티셔츠 밑단을 가볍게 쥐었다. 아주 가볍게, 또 손목이 내팽개쳐지지 않도록. 큰 손에 어울리지 않게 꼼지락거리며 옷깃을 끌어당기는 헛짓거리를 뻔히 보고 있자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허리를 순순히 수그려 주었다. 어느 정도 내려온 뒤 남은 거리는 루크가 직접 몸을 일으켜 입술을 마주 댔다.

촉촉한 마찰음이 울리도록 입을 맞추고 떨어지는 루크의 얼굴을 에단은 어이없는 눈길로 응시했다.

“그럼 뭐라고 말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말 아무거나 하는 줄 알았지.”

“다들 말없이 골랐나 보네.”

“우리 그 말은 그만하자면서요.”

“계속 말해 봐. 재밌네.”

“그만.”

“내가 문 안 열어 주니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에단! 다르게 말해 줄까요? 빌보드 1위나 다름없는 행운 어때요! 하면서 종알거렸다고.”

“그건 나도 좀 민망하네.”

말하며 콧잔등을 약간 구기고 눈을 찡그리는 표정이 믿을 수 없게 인간적이었다. 에단은 기가 막혔던 마음이 풀리려는 기미를 느끼고 일부러 얼굴을 굳혔다. 물어볼 것이 이것뿐만은 아니었으므로.

“그래서. 그 리스트는 뭐냐니까.”

“별건 아니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작은 편의랄까. 열어 보지도 않았죠?”

“몰라. 뭔데.”

“대충. 호텔이나 백화점. 차. 뭐 그런 것들. 전혀 관심 없어 보이네. 몰라도 돼요.”

설마 했던 예상 그대로인 목록에 에단은 기가 차 피식 웃었다. 이 왕자님을 어쩌면 좋을까. 한 해의 대부분을 서커스단처럼 비행기와 탈것에 실려 돌아다니고 겨울이 되면 팩토리에 끌려가 다음 해 레이스 규정에 맞춘 차를 테스트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삶이다. 그런 걸 써먹을 날이 있을 리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는 건 못 가져다줄걸.”

“그렇게 말하니까 도전 의식이 생기네. 뭐예요.”

“내일 출발할 때 내 앞에 있는 레이스 카들 모조리 치워 놔요.”

자신만만하게 못 가져다줄 거라고 할 때부터 예상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루크는 당당하게 말하는 에단의 옷깃을 다시 당겨 입을 맞췄다. 입술은 방금 전 샤워를 한 탓인지, 아니면 오늘 하루 내 지글거리는 노면에 달라붙어 달린 열기가 가시지 않은 탓인지 따끈했다.

입술을 마주 대면서도 못마땅한 기색을 지우지 않는 검은 눈매를 엄지로 문질러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각도를 틀어 다시 입술을 겹쳤다.

숨결을 핥듯 가벼운 키스가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엉켜 들었다. 가쁘게 내뱉던 숨이 삼켜지고 천천히 입 안을 핥아 오자 에단은 루크의 너른 어깨를 밀어 넘어뜨렸다.

거구가 넘어지고 그 위에 에단의 무게마저 겹쳐 올라타자 푹 꺼진 침대의 시트가 흔들렸다. 입술을 떼고 눈살을 미약하게 찌푸린 에단은 양팔을 겹쳐 티셔츠의 아랫단을 잡더니 다시 머리 위로 벗어 던졌다. 루크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전날에는 안 된다더니?”

“지금부터 30분만 할 거야. 끝까지 안 할 거고.”

“잘도 그러겠네.”

에단은 루크의 넥타이를 휙 잡아채며 낮게 뇌까렸다.

“갖고 싶은 거 말하랬지? 일단 입 좀 다물어요.”

벨기에 스파 프랑코샹의 레이싱 데이는 아침부터 찌를듯한 태양이 작열했다. 스타트를 끊은 뒤 자잘한 사고로 한 두 번 레이스가 늦어질 뿐 끝없이 고속으로 돌고 있는 레이스 카들의 굉음이 환호성과 어우러져 숲을 뒤흔든다.

오늘은 피트 월에 달라붙지 않고 어느 코너의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루크는 굉음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자 뒷줄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루크의 의중을 물었다.

“귀마개 드릴까요?”

“아직은 괜찮아.”

그 대답을 하면서도 루크는 가늘게 뜬 눈을 지나가는 레이스 카들에 고정했다.

눈앞을 지나치는 순간에 색으로 겨우 구별되는 속도였다. 시속 280km 정도라고 했지. 그딴 속도로 커브를 도는 오픈카에 사람을 앉힌 스포츠를 보고 있다니. 내가 미친 걸까.

다시 한번 레이스 카의 굉음이 울리자 골이 울리는 느낌에 루크는 참지 않고 눈을 찡그렸다. 제대로 볼까 싶은 충동적인 마음에 자리 잡았건만 역시 지루할 뿐이다. 차라리 돌아가서 모니터로 보는 게 낫겠군. 거기까지 생각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잠깐 자리를 비웠던 사라가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온 그녀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보스 요즘 누구랑 그렇게 연락해요?”

“지금은 안 해.”

“말만 그러시면서 항상 휴대폰 들고 있는 거 아시죠.”

사라의 대꾸에 루크는 눈짓으로 벌써 한 바퀴를 돌고 돌아와 요란스레 커브를 도는 레이스 카를 눈짓했다.

“저기 타고 있는데 어떻게 문자 하겠어. 할 수 있나?”

“할 수 있을 리가요.”

“나도 알아.”

그럼 아는 걸 왜 물어보신 걸까요. 사라가 속으로 이렇게 투덜거리는 사이 루크는 휴대폰을 미련 없이 재킷의 안쪽 포켓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뱅뱅 맴도는 레이스 카를 노려보았다. 흥미 있다고 하기보다는 대단히, 대단히 원한이 많아 보이는 눈빛이었다.

“저거 안전한 거 맞아?”

“몇 년 동안 사망 사고는 없었어요. 그래도 대단하네요. 저 속도로 달리는데 저렇게 매끄러운 커브라니. 에단 3위래요. 대단해요.”

“그렇지.”

얼씨구. 이제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무슨 이유인지 제가 더 어깨를 넓게 편 보스의 모습에 사라는 헛웃음을 참느라 숨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게 우스꽝스러워진 사라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루크가 자신의 진심을 고백했다.

“나 이런 말 하는 거 유치한 거 알지만, 유명 인사의 숨겨진 연인이라는 거 굉장히 짜릿한 거 같아.”

“정말 그래 보이시네요.”

“그것도 올해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잖아. 정말 설레.”

“네. 저희랑 협업 중인 GM에서 에단에게 광고를 문의했다는 말이 있어요. 리샤드 밀 캠페인에 아르마니 이야기도 있고. 더 자랑스러워하셔도 될 거 같아요.”

“네가 봐도 그렇지?”

“네. 설레네요, 참.”

대답과 함께 방금 지나간 레이스 카의 바람에 흔들거리는 옆머리를 야무지게 귀 뒤로 넘긴 순간이었다. 루크의 뚫어져라 보는 눈빛이 심상찮아 사라는 절로 자신의 옷매무시를 훑어보았다. 옷매무시에는 문제가 없다. 뭐 떨어트린 것도 없고. 방금 전 제 애인을 한껏 자랑하는 말에도 장단을 맞추어 주었고…….

“왜 그렇게 보세요?”

“그렇다고 해서 에단이랑 바람피우면 안 돼.”

“그게 지금 무슨 말이에요!”

“에단이랑 바람피워서 남편이 고소하면 난 남편 편 들어 줄 거야.”

“제 남편이 뭐 하는 사람이고 어느 회사 다니는지도 모르면서.”

“알아. 골드만삭스 PB잖아.”

그 대답은 단 한 순간도 기대했던 적이 없을 만큼 정확해서 사라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도무지, 드디어 자신의 개인 정보에 일말이라도 관심이 생긴 것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그 사유가 고작 자신의 게이 애인과 바람이 날 것이라는 괴상망측한 상상 때문인 것에 대해 슬퍼해야 할지.

루크는 얼빠진 사라의 눈앞에 집게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명심하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리고 볼일을 다 마치기라도 했는지 일어나 관중들 사이 좁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가 막혀 가만히 있다가 그 뒤를 따라가며 맹렬하게 외쳤다. 그 와중에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는 주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전 게이한테 관심 없어요!”

“원래 게이 아니었으니까 바이 아닐까. 나랑 만나기 전에 인기 많았어.”

“바이도요! 세상의 절반이 경쟁자인 것도 귀찮은데 온 세상이 경쟁자라니. 아니, 애초에 저는 보스랑 취향이 다르거든요?”

“내 취향이 어떤데?”

“사실 보스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제 취향은 확실해요. 전 다정한 사람이 좋단 말이에요.”

“에단 꽤 다정해.”

“무뚝뚝해 보이던데요. 제가 지난번에 호텔방 앞까지 찾아갔는데 문도 안 열어 줬어요.”

“나한테는 안 그래. 날아가는 새도 잡아다 달라고 하면 잡아다 준다고 했어.”

“저에게는 안 그러는 걸 보니 절대 바람 안 피우겠다. 그렇죠?”

앞서가던 루크가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서 사라는 하마터면 그 등 뒤에 코를 박을 뻔했다. 바짝 열이 올라 대꾸하던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도는 보스에게 시선을 고정하느라 턱을 쳐들었다.

“전 당당해요. 보스가 먼저 나더러 자기 애인이랑 바람피우지 말랬잖아요.”

“알았어.”

“그럼 왜 그렇게 저를 보는 거예요?”

“사라.”

“네.”

“에단 그만 놀리고 잘해 줘.”

“네? 진짜 기가 막혀서. 방금 전까지는 바람피우지 말랬으면서!”

“그건 그거고.”

“그리고 전 항상 에단에게 잘해 줬는데요?”

“더 잘해 달라는 거야.”

이 이상 잘해 달라는 건 도대체 어떤 뜻일까. 대답을 기다렸지만 루크도 뭐라 설명할지 어려웠는지 양 손을 몇 번 헛손질처럼 움직이다가 포기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차 불러. 나 걷기 싫어.”

“……기다리세요.”

팀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서킷의 반 바퀴를 돌아야만 했다. 이 와중에 시키는 일은 해야 하는 사라가 이를 득득 갈며 차를 불렀고 그들 일행은 잠시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심장을 울리는 엔진 소리가 날카롭게 다시 한번 서킷을 뒤흔들어 울린다.

그 경기에서 눈을 떼지 않는 루크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사라는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 레이스 카들이 모조리 커브를 지나간 뒤에야 푸른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왜?”

“보스. 이번에는 진심이신가 보네요.”

“그렇다기보다는… 예민하다잖아. 드라이버들은.”

그 사이 카트가 도착했다. 올라탄 루크의 맞은편에 앉는 사라의 표정은 전혀 수긍한 표정이 아니었다.

“글쎄요 보스. 과거에 만났던 모델이나 가수도, 사업가 등등. 그중 예민하지 않았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걸요.”

“그래서? 할 말 있어?”

“아니요. 앞으로 보스 대하듯 할게요. 꼭.”

일부러 비꼬듯 대답했더니 루크는 그 대답이 퍽 만족스럽지 못한지 다시 당부를 받아 내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이번 보스의 연인은 꽤나 오래 보게 될 모양이었다. 이 계절은 거뜬히 넘길 것 같고. 어쩌면 올해도. 기적적으로 그다음 해도……? 날짜를 가늠하던 사라는 루크의 눈을 피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크리스에게도 경고를 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사심을 담아 휴대폰의 액정을 꾹꾹 눌러 문자를 남겼다.

보스가 에단에게 잘해 주래.

갑자기 무슨 말이야.

자기 대하듯이 잘해 달라고 했어.

왜?

직접 물어봐 줘요. 꼭.

소소한 복수를 해 봤자 딱히 통쾌한 것 같지도 않았다. 피트로 돌아온 뒤 다행히 별 사고 없이 끝난 오늘의 경기에서 에단은 4위를 차지했다. 시상대 가까이 멈춰 선 차들을 향해 발걸음을 돌린 루크의 뒤를 사라도 열심히 쫓아갔다.

에단은 헬멧을 벗고는 몸무게를 재더니 리포터에게 붙잡혀 인터뷰를 잠시 하는 중이었다. 아쉬워하는 여자 리포터의 밝은 미소에 화답하듯 에단도 짧은 미소를 띤 뒤 간단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런 에단을 맞이하는 루크의 양팔은 팔짱을 낀 채로 한껏 좁아진 마음을 표현했다.

“방금 그 눈웃음 뭡니까.”

“내가 언제요.”

“인터뷰할 때. 리포터에게.”

“에티켓 몰라요? 사람이 웃으며 말을 걸면 웃으며 화답하라는.”

“난 그런 거 배운 적 없어. 웃고 싶으면 웃고 웃기 싫으면 안 웃는 거지.”

에단은 어쩐지… 라는 말이 환청처럼 들릴 법한 표정을 짓더니 뒤돌며 손을 흔들었다.

“잠깐 들어갔다 올 테니 가만히 있어요.”

“응.”

“아무 인터뷰나 하지 말고. 누가 물어봐도 그냥 피해요.”

“그건 내가 잘하지.”

마치 놀이공원을 잘못 돌아다니는 어린아이에게 주의를 주듯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나하나 꼽고 나서야 에단은 자리를 떴다. 그 말을 고스란히 듣는 루크를 본 사라의 시선이 기묘해졌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아니에요. 좋으시면 좋죠.”

“난 늘 좋았어.”

“특히 더 좋으신 거 같아서요. 그래요……. 연애를 안 하는 것보다는 낫죠.”

“내 연애까지 걱정해 주는 줄은 몰랐네.”

“하긴,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은 연애라고 하기도 좀 그렇긴 해요.”

“지금은 뭐 달라?”

이번은 장난이 아니라 정말 순수한 질문 같았다. 그런 보스의 표정을 본 사라는 오늘 중 제일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휙 돌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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