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20x4 SUMMER BREAK. (9/20)

9. 20x4 SUMMER BREAK.

8월 한여름 뙤약볕을 뚫었건만 남부 지중해 연안의 바람은 믿을 수 없이 시원했다. 그 바람이 검은 머리칼을 흐트러뜨린다. 실버스톤 그랑프리가 끝나고 런던에서의 일정 몇 가지를 끝낸 에단이 곧장 날아온 도시는 사이프러스, 그리스어로는 키프러스의 라르나카라고 들었다.

시즌 중 딘이 지나가듯 던진 제안 덕분에 알게 된 지명이었다. 딘이 직접 요리해 줄 수 있다고 자랑하는 무사카나 에메랄드빛 해안에 대한 설명보다도 그리스 옆 한적한 나라라는 묘사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직 린드베르그 레이싱의 레이스 카를 타고 제대로 된 성적을 보여 주기 직전이었기에 한껏 심란하던 때였다. 그때까지 어떤 계획도, 돌아갈 곳도 마땅치 않았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결과 에단은 어젯밤 라르나카 해변 끄트머리 절벽 부근에 놓인 한 가정집에 짐을 풀었다.

조지는 자신의 가족에게 잠시 들렀다가 내일 도착할 예정이었고 딘이 친분을 이어 가고 있던 드라이버 한 명이 늦은 시간 도착했다. 이제 스물세 살, 갈색 곱슬머리를 한 키가 작은 드라이버는 올해 처음 F1 드라이버가 된 르노 소속의 요하임이었다.

작년에 헤인즈의 리저브 드라이버로 한 시즌을 보낸 덕분에 딘과 친분이 있다는 소개를 들었다. 며칠을 묵으러 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작은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온 드라이버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에단과 연신 악수하며 활짝 웃었다.

“실버스톤에서 고마웠어요. 아, 그런 뜻으로 고맙다는 건 아니고. 리암 안토니에가 그런 일을 벌인 덕분에 경기가 꼬였잖아요. 덕분에 처음 포디움에 올라 봤어요.”

“봤어요. 축하해요.”

“절대 기분 나쁘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 사고가 아니었으면 난 올해 포디움은 어렵겠다 싶었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죠?”

거기에 장난스러운 눈짓까지 더한 드라이버는 한껏 악수를 나누더니 딘에게는 몸을 부딪쳐 가며 요란스레 포옹했다. 짐을 풀겠다 안쪽으로 허락 없이 성큼 들어간 드라이버의 뒤에서 패잔병처럼 서 있던 딘은 미안한 감정을 담뿍 담아 에단에게 말했다.

“저 녀석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니야. 절대로. 조금 철이 없을 뿐이야. 자꾸 보면 귀여울 때도 있어.”

“그런 거 같네.”

작년 한 시즌 내내 의도한 게 아니라며 자신의 성질을 긁어 대던 레오에 비하면 저 정도는 귀여운 게 맞았다. 에단은 픽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다음 미소가 흐려지기는 했다.

그날의 결과에 대해 루크는 아직도 별말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며칠째 어떠한 연락도 없다. 마치 증발해 버린 것처럼. 분명 실버스톤 그랑프리의 결과와 논란을 전해 들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꼴도 보기 싫어졌을 수 있지. 직접 방문했건만 팀메이트끼리 앞뒤로 박아 리타이어한 경기 따위를 보았는데 무슨 연락이 하고 싶을까. 당분간 연락할 기분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이게 나을지도 모르지. 에단은 그렇게 생각을 밀어 내며 어둠에 잠겨 가는 지중해의 흐릿한 경계를 노려보았다.

다음 날 아침은 도무지 어쩔 줄 모를 정도로 한가했다. 휴가의 첫날. 바닷새가 떠도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이 일과였고 딘은 회심의 실력을 발휘했다며 무사카를 오븐에서 꺼냈다.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자니 난간에 가까이 서서 자신의 사진을 찍는 데 심취해 있었던 요하임이 다가왔다.

거리감을 훅 붙여 제 옆에 얼굴을 가까이 붙인 요하임의 전면 카메라에 두 사람의 얼굴이 담겼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져 어색한 표정을 짓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요하임은 휴대폰을 한참 보더니 여기 빛이 좋네, 라고 중얼거리며 에단에게 물었다.

“이거 올려도 되죠?”

“글쎄.”

“안 돼요?”

“팀이 SNS 자제하라고 했었거든.”

“이런 것까지 올리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을걸요.”

하긴. 말실수할 만한 일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지 아예 전면적인 사용을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사진만 나온 것이지 자신의 SNS 계정도 아니었고……. 물어볼까 싶어 휴대폰에 눈길을 주었던 에단은 생각을 단념한 뒤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 사람이 모여 앉자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F1의 주제가 이어지게 되었다. 요하임과 딘이 리암의 무리했던 추월 시도를 한껏 욕하는 동안 에단은 무사카를 묵묵하게 퍼먹었다. 그리스 전통 요리라는 무사카는 라자냐와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지만 맛이 좋았다.

한껏 맑은 날이었다. 귀를 찢을 듯한 굉음과 타이어 내음 같은 것은 전혀 연상되지 않는 멋진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고. 두 사람이 한껏 떠드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던 에단의 어깨에 갑자기 딘의 손이 올라왔다.

“에단. 네가 참아.”

에단은 잠시 지중해의 해안선을 보던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이야기인지 주의 깊게 듣지 않아 대꾸하기 어려웠다. 한 입 크게 무사카를 입 안에 밀어 넣고 우물거리던 딘은 짙푸른 바다보다 깊은 동공 안의 기색을 읽고 음식을 삼킨 뒤 다시 덧붙였다.

“네가 져 주라는 게 아니라, 리암이 몸이 달아서 그러는 거니 물러나서 우리 경기에 집중하자는 거야. 올해 드라이버 챔피언십 랭킹도 이미 뒤집혔잖아.”

“실버스톤 그랑프리 덕분에 함께 내려가기도 했고 말이야.”

“아, 그건 그랬지. 하지만 우리 사고 때문에 그날 순위는 죄다 엉망진창이 되었어. 한 순위 나란히 떨어진 것뿐이야.”

“정말 다행이다.”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에게 닥친 불행만큼은 아니지만 그날 다른 팀들에게 닥친 불행도 충분히 거대한 크기였다. 에단과 리암의 사고 잔해가 남은 트랙은 기어코 선두를 달리던 페라리와 벤츠의 레이스 카를 부딪치게 만들었고 그 후는 엉망진창이었다. 그간 성적이 부진했던 애스턴 마틴과 르노가 어부지리로 포디움에 오르며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모양이었다.

리암의 멱살을 잡으러 달려들었다가 팀 빌딩으로 끌려갔던 에단은 경기가 모두 끝난 저녁에야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안 그래도 그날 저녁에 헤센이 연락했어.”

“메르세데스의? 뭐라고 해?”

“내가 끼어들 새가 없이 리암 욕을 하길래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더라.”

“그럴 만했어.”

“그래도 가는 길에 페라리도 같이 끌고 들어가서 천만다행이지. 자기 혼자 리타이어 했으면 헤센도 린드베르그 레이싱 피트로 달려왔을걸.”

“볼만했겠네.”

요하임의 이죽거림을 들은 에단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헤센이 없었어도 그날 우리 팀은 충분히 볼만한 꼴이었어.”

치달은 리암과 에단의 갈등은 다행히 여름휴가에 접어들어 반강제적으로 소강된 상태였다. 물밑에서 뭐라고 소문이 도는지는 크게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물밑이라는 게 존재할 만큼 숨겨진 거대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흔한 갈등이었다. 퍼스트 드라이버와 세컨드 드라이버의 알력 갈등이란. 드라이버의 기량은 레이스 카의 성능에 크게 좌우되는 편이었고 막상 계약하고 보니 이전 시즌의 성적과 달리 세컨드 드라이버가 새로운 두각을 나타내는 일도 비일비재하곤 했다.

요하임은 두 사람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말을 건넸다.

“리암이 대우를 확실히 해 주지 않으면 내후년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나왔다던데.”

“리암 계약이 2년짜리였던가?”

딘은 코웃음 치며 에단에게 물었다.

“그럴 거 같아?”

“어떨 거 같아.”

“난 아니라고 봐. 리암의 몸값을 맞춰 줄 만한 팀은 없을걸. 지금도 딱히 리암을 무시하는 게 아니잖아. 다만… 자기 성적이 나오지 않으니까 스스로 초조해서 저러는 거지.”

“그렇겠지. 린드베르그가 무식하게 투입하는 예산만큼이나 드라이버 연봉도 퍼 준 편이었잖아.”

무엇보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이 그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였기에 에단은 이런 상황을 잘 알았다. 세간에 알려진 리암의 연봉 역시 성적이 반영되었다 해도 꽤 높은 편이었고. 명백하게 기록으로 남은 액수를 기분의 문제로 언제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 팀이 오너가 선호하는 드라이버만 밀어준다고 말하고 다닌다네.”

“어때 딘. 네가 보기에도 그래? 객관적으로 봐서.”

애초에 자신의 레이스 엔지니어에게 묻는 것 자체가 객관성을 무시한 질문이었지만 딘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팀은 퍼스트와 세컨드 구분 없이 무식하게 예산을 때려 넣는 편이지. 리암도 알 거야. 자기 레이스 카의 업그레이드만 밀리는 것도 아니고 둘이 공평하게 퍼포먼스 팀에서 피드백해서 업그레이드해 주고 있잖아. 하지만,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퍼스트 드라이버 대접을 더 해 달라는 건데.”

“내가 시험 주행으로 달리고 그 데이터까지 자기 업그레이드에 도움이 되도록?”

“팀 오너가 그렇게까지는 안 하겠다고 명백하게 의사 표현을 했어. 그 정도를 가지고 불만을 갖는 건 욕심이지. 내게 네 레이스 엔지니어라서가 아니라 이 사안에 대해서는 다들 회의적으로 리암을 보고 있다고.”

가까운 사이라지만 타 팀의 드라이버를 앉혀 놓고 할 말은 아니다 싶어 에단이 한 번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요하임은 뭐 어떠냐는 듯 시시덕거리며 휴대폰을 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듣는 상대마저 딱히 문젯거리로 여기지 않는 지금의 대화를 들으며 에단은 음식을 한 번 더 푹 떠먹었다. 라자냐보다 조금 더 고소하고 풍미가 확실한 것 같기는 했다.

“그런 말을 대놓고 했던 건 몰랐어.”

“나도 나중에 감독에게 전해 들었었어. 알다시피 난 네가 리타이어 하자마자 상태를 보러 갔었으니까.”

“정확히 뭐라고 했었는지 알아?”

“내 자리에 앉더니 리암의 레이스 엔지니어에게 말하더래. 나는 두 사람 다 완주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옆으로 한 명씩 전달하라고. 모두의 귀에 이미 똑똑히 들렸는데도 말이지.”

그런 말을 해 놓고 메디컬 센터로 와서는 이상한 소리나 지껄였던 거다. 그날 있었던 설전을 떠올리느라 에단의 미간이 조금 좁혀들어 갔을 때, 요하임이 별안간 중얼거렸다.

“더러운 부르주아들.”

혹시 게임에 정신이 팔려 한 말인가 싶어 에단은 무시했지만 딘이 코웃음 쳤다.

“에단. 속지 마. 이 녀석 집안도 이탈리아의 부호 순위 몇백 번쯤에 이름을 올리고 있을걸.”

“이탈리아 부호 순위라는 건 진짜들이 죄다 도망갈 때 도망도 못 가고 남아서 세금을 내는 멍청이들의 명단이라는 뜻이야.”

“네네. 생일마다 기념 와인이 생산되는 도련님.”

“나는 와인 안 좋아해!”

발끈하는 요하임의 반응에도 딘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 대화를 들으며 에단은 실없이 웃었다.

그나마 그가 데뷔하던 몇 년 전은 굉장히 운이 좋았다. 그래서 실력과 박박 긁어모은 작은 스폰서로 하위 팀이나마 F1에 입성할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포뮬러 원의 시트를 원하는 이들은 넘쳐 나고 자리는 단 20개뿐이다. 팀에 스폰서로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드라이버가 아니면 기대조차 갖기 어렵다.

가끔은 F1의 시트를 차지하고 달리는 것 자체가 꿈만 같을 때가 있었다. 린드베르그 레이싱이라는 팀다운 팀에 소속되어 있고 한 해의 그랑프리 중 절반을 치러 낸 뒤 여름휴가에 와 있는 이 모든 현실이 말이다.

한껏 놀림을 받던 요하임은 제 콧잔등을 구기더니 대꾸했다.

“우린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다국적 기업 가문들은 하는 짓거리가 차원이 다르다고. 특히 린드베르그는 좀 그래. 제 어머니의 죽음을 매년 팔아 장사하는 짓거리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나도 그건 그래. 처음 린드베르그가 우리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불편하기는 했는데 뭐 어쩌겠어. 그리고 생각보다 꽤 진심으로 투자해 주고 있잖아.”

영문 모를 요하임의 말에 순순히 동조하는 딘의 태도를 본 에단의 시선이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린드베르그 가문의 사고. 몰라?”

“몰라. 어떤 일인데?”

“20년 됐나? 그래도 워낙 유명했어야지. 진짜 몰라?”

“20년 전이면 한국에서 절반, 영국 카트장에서 인생의 절반을 보낼 때네. 나머지 시간은 비행기에서 보내고.”

“아하.”

서로 대화 없이도 말이 통하던 딘과 요하임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네가 먼저 말해, 라며 떠넘기는 요하임을 대신해 딘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우리도 어릴 때라 기억은 안 나지만 유명한 사고야. 그 당시 린드베르그의 차가 주행 중 사고가 나서 우리 오너만 살아남고 어머니는 사망한 사고. 정말 몰라?”

“그것 때문에 여기 오너는 트라우마로 운전 못 한다는 소문도 있잖아.”

요하임의 첨언까지, 둘 다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크게 뜨인 에단의 눈을 본 딘은 찝찝한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게 사고도 사고인데 그 후 폭락한 주가랑 판매량을 회복하려고 린드베르그가 낸 광고가 좀 그랬었거든. 당시 루크 린드베르그가 어머니 사진을 들고 관 뒤를 따라 걷던 사진까지 유럽 전역에 홍보 포스터로 써먹었고.”

“대체 그걸 뭐에 써먹어?”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완벽한 차를 만들겠습니다. 이런 문구였을걸. 그걸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여한 아들 얼굴을 박아다가 낸 거야. 그 당시 장난 아니게 논란이었어. 그 후 차가 정말 무식하게 튼튼하게 나와서 그나마 잠잠해졌지만. 그래, 웃대가리들은 그게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까지 하는 건 좀 그래. 세상에서 가장 돈에 혈안 된 포뮬러 원에 있으면서 그런 걸 싫어하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지금도 그걸 팔아먹으러 갔잖아, 너희 오너. 무슨 문제 생기자마자 또 어머니 추모식 열었다면서?”

끼어든 요하임의 말을 듣던 에단의 미간이 더 이상 좁아지는 것조차 멈췄다.

그래서 그랬던 모양이다. 비공식적으로 계약을 논의하러 가기 위해 방문했던 그날. 루크가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을 꺼린다는 사라의 말이. 그리고 자신이 루크를 모른다 했을 때 한껏 이상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던 그녀의 솔직한 표정까지도.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먼 거리를 질주한 것처럼 홀연히 숨이 막혔다.

***

덴마크 라네르스. 메모리얼 파크.

무생물의 것도 ‘시선’이라고 친다면, 이보다 더 집요한 것이 과연 있을까. 카메라의 동그란 렌즈가 뺨을 찌를 듯 가까이 다가온다.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루크는 반질한 대리석에 예리하게 새겨진 이름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핥듯이 훑어 내린 카메라가 옆으로 옮겨 가고도 그는 잠잠한 표정을 유지했다. 주시하는 것이 곁의 카메라 하나뿐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해마다 어머니의 죽음을 되새김질하는 추모식을 없애겠다 결심한 지 스무 해가 되었건만 그는 여전히 카메라 앞에서 슬픈 표정으로 헌화를 해야 했다. 이제는 어느 각도로 찍어야 슬픔이 더욱 돋보이는지 알아 버리기도 했다.

하루 종일 얼굴을 클로즈업해 잡아 내던 카메라가 드디어 다른 먹잇감을 찾아 사라진다. 주변을 향해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루크는 지긋지긋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라네르스시의 시장과 덴마크 왕실의 몇몇 인사들. 생전 어머니와 친분이 있었던 중년의 여성들이 보인다.

그런 루크의 시야에 저 멀리 여전히 슬픔에 잠긴 표정으로 쌓인 헌화를 응시하는 한 남성이 잡힌다. 굳건한 다리로 땅을 디디고 검게 칠해진 지팡이를 억세게 손에 쥔 남자는 드문드문 섞인 흰 머리를 넘긴 장신이었다. 얕게 진 눈가의 주름이 짙어지도록 슬픔을 표현하는 아버지의 옆모습에 그의 시선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지난달 오스트리아 오페라단의 프리마 돈나와 염문 기사가 나던 순간의 당당함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그래도 루크는 생각했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어머니의 죽음 후 만나는 연인은 단 한 번도 육 개월을 넘지 못했고 생전 어머니가 진행했던 자선 사업은 해마다 규모를 불려 간다. 기록도 추모도 오직 그녀만을 위해 남겨지고 있었다.

비록 그 자선 행사가 이번처럼 회사의 위기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한 장치일지라도, 그녀의 사망 직전에 이미 별거를 하고 있었고 언론의 발표가 임박한 상황이었다 해도. 어쩌면.

루크는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그의 아버지인 로버트 린드베르그의 삶에서는 오직 그만큼의 사랑이 인생에 허락된 최대치였을 것이라고. 본래 그런 인간일 뿐이니 경멸하지도, 안타까이 여길 것도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이어지던 상념은 거리감을 훅 좁혀 들어오는 어느 중년의 여성 때문에 멈춰졌다. 루크는 익숙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곁을 돌아보았다. 오늘 참석한 대다수의 여성들처럼 트위드 투피스를 입은 여자가 그의 앞에 섰다. 생전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겨졌던 영국의 멀고 먼 왕족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미소 지은 입가에 주름이 옅게 패었다.

“오랜만이구나 루크. 실버스톤에서 오는 길이라며?”

“잠시 들렀던 것뿐이죠.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인.”

그리고 어머니의 사망 직후, 파경에 가까웠던 린드베르그가의 속사정을 가십지에 팔아먹기 직전에 린드베르그에서 더한 금액을 받고 입을 다문 여자이기도 했다.

오늘도 용돈벌이나 하러 온 모양인가 보지. 그런 생각을 구석으로 치워 버리며 루크는 기꺼이 그녀를 맞이했다.

“우리 아들이 너를 보았다고 하더구나. 한번 들르지 그랬어. 네 어머니와 함께 왔었던 서리의 별장에 마침 꽃이 한창이거든.”

“일정이 되면 찾아뵙겠습니다.”

루크는 정중한 손짓으로 눈앞의 손등 위에 입술 가까이 했다가 떼어 냈다. F1의 경기는 한 나라에서 한 번만을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면서.

기회를 잡은 양 자신의 아들이 시작한 사업을 늘어놓는 부인의 목소리가 흐른다. 부인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번에 사고를 친 제레미가 들어줘야 할 몫이었다.

다만 멀리에서 찍힌다면 좋은 그림이 될 것을 안다. 루크는 의례적인 환한 미소를 띠며 자리를 지켰다.

자선 사업에 끼워 넣은 추모가 끝나고 뙤약볕을 피해 그늘로 들어온 그는 손을 들어 타이를 풀어냈다. 격식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타이를 손아귀에 바짝 쥔 뒤 셔츠의 버튼도 하나 풀었다. 긴 목이 젖혀졌다 바로 세워지는 장면은 흠잡을 데 없이 의연한 만큼 무료한 기색이 역력했다.

곁에 선 사라는 아무 말 없이 품 안의 가방을 끌어안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그녀의 눈에 루크보다 조금 키가 작고 단단한 인상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일부러 환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다가온 제레미는 소탈한 태도로 사라의 인사를 받아넘긴 뒤 그녀를 뒤로 물렸다. 그리고 차가운 대리석 벽에 기대선 루크의 시선을 온전히 받았다. 싱긋 웃는 미소가 환했다.

“수고했어.”

“하.”

탄식으로 말문을 연 루크가 뇌까렸다.

“이게 누구야. 같잖은 동정 좀 그만 받으려고 포뮬러 원까지 인수한 내 노력을 짓밟은 제레미네.”

“미안해.”

“미안하긴 해? 매년 이러다 우리 유소년층이 아니라 성인 교육도 지원하겠어.”

“하지만 이게 가장 반응이 좋잖아. 가장 잘하는 거면서 왜 그래.”

늘 쏟아지는 찬탄과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비난 속에서 살아온 루크를 바라보는 제레미의 시선은 오히려 올곧았다.

너는 늘 그래 왔잖아. 그렇게 살아갈 거잖아. 그 순수한 확신에 스미는 경멸을 숨길 수가 없었다. 루크는 가족에게 적절치 못한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 달 전. 발트해를 지나던 린드베르그 에너지의 유조선이 좌초되면서 원유 유출 사고가 발생했다. 기준을 준수하였는지 각국의 환경 단체와 정부 기관이 달려들어 물어뜯기 직전, 제레미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의 어머니였던 엘라 노드네스의 생전 자선 사업이 아직 린드베르그의 지원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장문의 기사가 연이어 쓰였다.

유소년층의 교육에 힘쓴 그 자선 사업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북유럽의 공교육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조명한 기사는 마무리까지 완벽했다. 올해부터 지원 대상이 확대된 자선 사업의 기념식이 그녀의 추모식과 함께 진행될 것이라는 정보가 실려 있었다.

그 행사의 참석자 명단에는 매우 당연하게도 루크의 이름이 함께 실려 있었다. 어머니를 잃은 불운한 사고로부터 홀로 살아남은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한번 유럽의 사교계를 휩쓸었고, 덕분에 제 이름을 올리지 말라 선언할 기회도 갖지 못했던 루크는 기사로 이 사실을 접하자마자 자리를 떴다. 실버스톤의 레이스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뒤였다.

언론과 한껏 차려입은 사교계 및 왕실의 먼 인사들이 돌아다니는 공원을 바라보는 루크의 눈동자가 먼바다를 헤매듯 움직인다. 그 옆모습을 바라보던 제레미는 곁에 나란히 서 낮게 속삭였다.

“이해해 줘.”

“나더러 이 짓거리를 이해하라고?”

“이 나라는 어머니가 그렇게 되신 뒤로 네게 무슨 빚이라도 진 것처럼 굴잖아.”

그렇게 짜인 프레임 안에 갇혀 동정과 감성을 팔아먹은 것이 몇 년이던가. 그리고 린드베르그는 언제까지 그것을 이용할 생각인 걸까. 자신은 정작 중요한 순간, 자신의 불행으로부터 자아낸 호의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자신의 해법 역시 현재 제레미의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 뻔하다. 그 사실을 매번 새로이 깨닫기에 이 행사가 더욱 역겹게 느껴지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그날의 사고에 대해서 기자들은 또 어떤 추측을 지껄일까. 연상되는 미래에 루크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런 기분을 달래기 위해 제레미가 제안했다.

“이번 여름휴가는 어디서 보낼 생각이야.”

“알아서 뭐 하게.”

“별일 없으면 같이 갈래?”

“내가 가족 휴가에 끼어서 뭐 해.”

“내일 나 혼자 이탈리아로 갈 거야. 난 요즘 이탈리아 애들이 좋더라.”

선선한 바람이 루크의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소식이건 이득이건, 뭐라도 건져 보겠다 엉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시선은 그들과 다를 것 없는 자신의 형을 응시했다. 힐난도, 비난도 없이 무덤덤한 시선이 쏘아졌다. 제레미는 어깨를 얕게 으쓱해 보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소피아도 따로 휴가 갈 거니까 그렇게 보지 마.”

제레미는 손목에 감긴 시계를 확인한 뒤 루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치료 잘 받고. 생각 있으면 와.”

“…….”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며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루크는 가볍게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불어 올렸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사라가 그 반응에 재빨리 다가왔다.

“왜 그러세요.”

“린드베르그 에너지 건드릴 만한 거 있어?”

“플랜트나 소소하게 법규 어긴 것들부터 건드리면 환경 단체들이 들고 일어날 것까지 몇 가지 있죠. 요즘 꽤 머리 아플 거예요.”

“그래서 돌아 버렸나 보네.”

신경 쓰이는 게 많아 할 말과 못 할 말을 분간도 못 하는 모양이지. 크게 숨을 들이쉰 루크의 가슴이 훅 부풀었다 꺼졌다. 일을 만든 장본인이 자리를 떠났으니 루크도 더 이상의 인내할 이유 따위는 없다. 다시 따라붙는 카메라를 피해 몸을 돌렸다.

생전 어머니의 사진이 드문드문 붙은 작은 추모관으로 몸을 피한 그는 시간을 확인한 후 사라에게 넌지시 말했다.

“이제 가도 돼.”

사라 역시 갑작스럽게 잡힌 추모 행사 때문에 진작 떠났을 여름휴가를 아직 출발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떠날 줄 알았던 사라는 뜻밖에 머뭇거리며 루크의 곁을 몇 걸음 더 따랐다.

“여름휴가 어디로 가실 거예요?”

“글쎄.”

“그 일정까지만 체크하고 갈게요.”

“바로 달려갈 줄 알았더니.”

“이게 제 일이니까요.”

생긋 웃으며 대답하는 그녀의 반응에 루크가 피식 웃으며 빛바랜 사진들의 곁을 지나갔다. 자신마저 모르는 어머니의 어린 모습에 가까워질수록 입구도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날 동정하는 건 내 사고를 곱씹는 사람만으로도 충분해.”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야?”

“네, 전혀. 손톱만큼도. 절대요.”

“정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가 보스를 동정할 수는 없죠. 보스가 가진 게 얼마나 많은지 뻔히 아는데요.”

양손을 교차해 거부하는 격렬한 반응을 지켜보던 루크는 천천히 시계를 확인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되도록 사람이 없는 곳이면 좋겠는데. 장소를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약간 삐뚜름하게 기울여야 했다. 여름휴가를 어디에서 어떻게 지낼지 고민하는 건 난생처음 있는 일인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매년 여름휴가 때 뭘 했더라.”

“대부분 그때 만나던 사람들과 보내셨잖아요.”

“그랬나?”

어쩐지 일정을 딱히 잡아 본 기억이 없다 싶었다. 사라가 이왕 주제가 나온 김에 좀 더 은근한 목소리로 질문을 걸었다.

“그런데 보스.”

“응.”

“요즘에는 연애 안 해요?”

“갑자기 왜.”

“아니. 그냥요. 늘 누가 있기는 하셨잖아요. 아니면 만나는 중인데 제가 모르거나.”

반짝이는 눈동자를 뻔히 바라보던 그 기대를 배신하며 루크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귀찮아.”

“어머. 그거 좀 위험한 거 아니에요?”

“뭐가.”

“흐음. 아니에요.”

“다음 포뮬러 원 레이스는 어디야?”

“지금 서머 브레이크예요.”

이미 지난주에 보고했던 일이었지만 그 당시 보스의 큰 감명 없는 표정을 보았을 때 잊어버렸을 것이라 이미 예측했던 일이었다.

“얼마나.”

“삼 주요. 20일 정도 남았네요.”

넉넉하다면 넉넉한 시간이었다. 루크는 충동적으로 재킷 안쪽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쥐며 사라에게 다시 한번 눈짓했다. 추모관의 열린 문 바깥이었다.

명백한 마지막 인사였다. 사라는 그 순간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제자리에 서 공손히 인사한 뒤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아간다.

서늘한 공기와 달리 햇볕이 한껏 몸을 휘감는 날씨였다. 추모관 앞에 서 있던 기사에게 계속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린 그녀는 군데군데 숨어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파파라치와 기자들을 휙 휙 둘러보았다. 사방이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다. 그들을 향해 눈을 흘긴 뒤 남은 경호원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사진과 언론 노출은 이제 그만할게요. 모두 잡아 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루크는 추모관의 가장 큰 사진 앞에 서 있었다. 품에 안긴 어린 루크가 파파라치의 플래시를 피해 고개를 돌리자 어머니가 그의 눈을 가려 주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앞에 반듯이 서 휴대폰을 꺼내 드는 남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사라는 자신의 늦은 여름휴가를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라는 자신의 보스를 꽤나 좋아했지만 그가 그어 둔 명백한 선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그 덕분에 몇 년 동안 비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빈 추모관의 사진 앞에서 루크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치료를 입에 올린 제레미의 말 대로 루크는 자신의 인생에 문제가 되리만치 깊게 아로새겨진 순간을 바라보았다. 루크는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문제의 이유를 캐내고자 얼마나 많은 상담과 치료를 거쳤던가. 수없이 상기해 지루하다 못해 지긋지긋하게 느껴진 자신에게 환멸까지 느껴 놓고 왜. 아직도 어느 날, 어느 순간에는 운전대를 잡을 수 없는 건지.

후회일까.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눅눅하게 기분을 좀먹어 간다. 하릴없이 서 있던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손안에 들어오는 사각의 액정을 바라보던 루크는 잠시 고민했다.

뭐랄까. 다른 이가 떠오르지 않는 것뿐이다.

***

레이스 위크 중 8월 삼 주 간의 서머 브레이크는 가쁘게 달려오던 시즌을 한숨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잦은 시차 극복과 규칙적인 트레이닝을 거쳤던 몸뚱이는 휴가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에단은 결국 포기하고 둘째 날 아침부터 홀로 일어나 가벼운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아닌 척하던 요하임도 그런 것이 뻔히 보였다. 다만 저녁에 웨이트 트레이닝 위주로 훈련을 진행하는 것 같았다. 그와 달리 아침 시간을 활용하는 습관이 든 에단은 모두가 잠들어 조용한 집을 나와 해변에서 조깅하기 시작했다.

하나둘 돌아다니는 관광객들 사이 드문드문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지만 악수나 가벼운 인사를 청할 뿐 러닝을 크게 방해하는 이는 없었다. 덕분에 머릿속을 비워 낼 수 있었다.

그리스어와 영어가 혼용된 상점들은 에단이 해변의 끄트머리에 도착해 지중해의 수평선을 보고 돌아올 때가 되어서야 느긋하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정오의 태양이 정수리를 태울듯 비출 때쯤이 되어야 한가로이 돌아다니는 관광객이 늘어나곤 했다.

사이프러스의 고대 도시며 유적을 다녀왔는지 팸플릿을 꺼내 햇볕을 가리는 이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는 신화가 내려오는 도시이니만큼 유적이 넘쳐 난다는 정보를 전해 들었었으나 에단은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저 한적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다.

파라솔과 선베드가 펼쳐진 장관을 지나 절벽 가까이에 다가간 에단은 바위의 끄트머리에 단단히 발을 디뎌 자리 잡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강렬한 빛에 선글라스를 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헐벗은 채 다이빙을 시도하는 청년들 서너 명만이 에메랄드빛 바다로 몸을 풍덩 떨군다.

그 유유자적한 광경을 지켜보던 에단은 햇볕에 따가운 기가 느껴지는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휴대폰을 쥐었다. 지켜보는 것은 하늘뿐인 이 순간. 그는 천천히 휴대폰에 검색어를 눌렀다.

루크 린드베르그. 짧은 단어를 검색하자 정보가 끝없이 토해 내어진다. 머리를 깔끔히 넘기고 대외적 표정을 지어 보인 루크의 얼굴을 작은 화면으로 살피느라 에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부분이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의 레이스 카 첫 공개 날과 비슷한 차림과 표정이었다.

그날 긴장되니 손을 잡아 달라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에단은 얼핏 인상을 구겼다가 웃어 버리고야 말았다.

“진짜 웃기지도 않은 소리였네.”

비슷해 보이는 행사의 참석 경력이 셀 수 없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끌어 올려졌던 입꼬리가 내려가고. 에단은 띄엄띄엄 손가락을 움직여 이름을 완성해 냈다.

엘라 노드네스.

조금은 화질이 떨어진, 그래서 더욱 고전적으로 보이는 금발 미인의 사진이 연이어 이어진다. 눈매도 비슷하지만 웃는 순간의 입꼬리가 특히 닮았다. 젊음의 어느 시점에서 멈추어 버린 여인의 사진을 보던 에단은 손가락을 천천히 내렸다. 그날의 사건에 대해 상세히 기록된 글이 남아 있었다.

덴마크 출생. 현 덴마크 국왕의 고모의 셋째 딸인 그녀는 프린세스의 칭호를 받기에 먼 혈통이었지만 인기만큼은 그 이상이었다. 유럽 사교계를 풍미한 유명 인사였고 로버트 린드베르그와 운명 같은 연애 후 고작 3개월 만에 결혼을 발표. 두 아들을 낳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루크를 데리고 덴마크를 방문하던 중 빗길에 미끄러진 차가 가드레일을 뚫고 낮은 절벽 아래로 추락. 그날 사고로 운전석에 타고 있던 그녀는 즉사. 그녀의 둘째 아들만이 기적적으로 경상을 입고 구조되었다고 한다. 10살의 나이였다.

빛바랜 사진으로 남은 그녀의 장례식을 보던 에단의 눈썹이 경직되었다. 어머니의 관을 따르는 루크의 한 꺼풀 벗겨진 듯한 낯선 표정이 긴 시간을 넘어 마음을 갉아먹으려 든다.

아득한 슬픔에 휩쓸리고도 이해하지 못한 눈망울에 그득 담긴 감정과 희게 질린 낯빛은 새까만 정장과 대조되어 더욱 짙푸른 자국을 남겼다.

에단은 문득 떠올렸다. 루크의 다양한 슈트 중 새까만 정장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딱히 그런 이유일 것이라 여겨지지는 않았다. 아마 그저 우연일 것이다. 그저 금발과 푸른 눈의 색채가 다른 색에 더욱 돋보이므로 검은색을 쓰지 않았던 것이겠지.

그 순간 휴대폰이 긴 진동을 시작했다. 조지나 딘일 거라 생각했던 연락의 출처가 루크인 것을 본 에단은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마치 해선 안 될 짓을 들킨 것만 같았고, 불안감에 휴대폰을 한 번 뒤집어 보기도 했다. 설마 검색어 추적이라도 되는 걸까……. 지금 자기를 검색하는 것을 알고 주의를 주려 연락하는 것일까.

그 누구도 없는 주변을 공연히 둘러본 에단은 오랜 시간을 끈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 와중에 전화는 용케 끊기지 않고 계속 울리고 있었다.

- 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

“걷던 중이었습니다.”

- 어딜요?

“바닷가요.”

- 여름휴가인가 보네요.

“이 시기는 다들 그렇죠.”

그리고 당신도 그렇지 않으냐. 되물으려던 에단은 딘이 전해 주었던 루크의 일정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모든 이들이 입 모아 힐난하는 추모식에 참석한 것이 대충 오늘쯤이었을 것이라 추측되었다.

평소보다도 말수가 없어진 에단에게 루크가 대뜸 물었다.

- 그날 이겼어요?

“뭘요?”

- 실버스톤에서 리암과 한판 붙은 날. 이겼냐고요. 전해 듣기는 했는데 결과를 알려 주는 사람은 없길래.

“진짜 한판 붙지는 않았어요.”

- 붙을 것처럼 달려들었다던데요.

“주변에서 뜯어말려 준 덕분에 다행히 실수는 면했죠.”

- 아쉽네.

“죄송합니다.”

- 응? 뭐가.

“물의를 일으켜서요.”

- 듣고 생각해 봤는데 그건 딱히 계약 위반이 아니니 괜찮아요.

팀으로부터 별 비난이 없을 때부터 예상했었지만 그 이상으로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안심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양 에단은 가벼워지는 마음에 안도했다. 덕분에 앞에 했던 질문에 대해서도 홀가분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진 것 같지는 않네요.”

- 그래요? 다행이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넘길게요.”

- 당신은 어디서든 질 생각이 없는 거 같네요. 경기든, 뭐든.

“최선을 다해서 밟으라면서요.”

- 맞다. 내가 그랬었지.

전화는 마치 대서양 너머의 먼 곳에서 걸려 오기라도 한 듯 약간의 시차를 두고 대답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따라 느릿한 루크의 말을 정확히 듣기 위해 에단이 휴대폰을 고쳐 쥐는 순간, 너머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남은 휴가 동안 뭐 해요?

“글쎄요.”

집에 있거나, 혹은 몇 년 만에 저를 부르는 친부의 가문을 한 번 들러는 볼 것인가. 제발 그 입 좀 닥치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포도나무 따위가 대체 어디 있냐고 말이지. 저울질하던 마음을 숨기며 에단이 무료하게 대답했다. 잠깐 휴가를 함께 할 수도 있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지만 역시 어색하다.

자신과 똑같이 생각할 것이라 여겼던 남자가 물었다.

- 이쪽으로 올래요?

“……거기가 어딘데요.”

- 지금은 덴마크인데 여기 있을 건 아니고.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습니까?

“어디든 되는 겁니까? 남극이라든가.”

- 거기는 좀 곤란하지. 스페인이나 스위스 정도면 제일 좋겠는데.

“스위스가 낫겠네요.”

- 자연이 좋아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 그럼.

“올해 거기서 그랑프리가 열리지 않았으니까요.”

- 아하.

그저 비행기에 실렸다 내려 그랑프리에 참석할 뿐이지만 그래도 휴가 중에는 가 보지 않은 곳이 더 마음 내키는 편이었다.

“휴가 계획 없었어요?”

- 딱히.

“친구 진짜 없나 보네.”

당연히 아닐 것이라 여겨 한 말이었는데 거기에 루크가 선선히 대답했다.

- 있기는 한데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가끔 팔아먹길래.

“아……. 나는 안 그럴 거 같아요?”

- 시트 중요하잖아요.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기대한 적 없던 믿음을 받으니 쓸데없이 배신해 주고 싶었다.

“이런 건 또 믿어 주네.”

- 올 거예요?

“그러죠.”

- 어디서 오는지 알려 주면 사람 보낼게요.

대뜸 마무리된 대화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에단은 끊겨 버린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다가 뺨을 때리는 강한 바람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마침 좋은 핑계가 될 것 같았다. 시간을 내려 해도 팀 오너가 보자 했으니 별수 있겠냐. 가문에는 그렇게 한마디만 전해 두면 될 것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해변을 다시 걷는 에단은 무의식중에 손가락을 쥐었다가 폈다. 그리고 그 행동을 반복했다. 그리고 또다시.

해변을 꽤 오래 걷던 에단은 저도 모르게 되풀이하고 있던 행동을 인식하고 오른손 주먹을 꾹 쥐었다. 움직임을 차단하자 이유 모를 초조함이 울컥 도드라지는 것을 느꼈다.

웃음으로 그 감정을 누그러뜨리려 노력한 그는 가볍게 걸으며 생각의 무게를 덜어 내려 노력했다. 그냥, 몇 번 몸을 맞댄 것뿐이다. 그러고도 얼굴을 다시 마주하는 사람이 처음인 것도 아니고.

비어 있으리라 여겼던 집에는 딘이 홀로 남아 소파에 누워 노닥거리고 있었다. 소파에 팔걸이에 걸어 두었던 얇은 재킷이 그의 다리에 눌려 있었다. 그것을 가볍게 낚아채 들려 하자 딘이 다리를 들며 짧게 중얼거렸다.

“미안.”

“괜찮아.”

“다시 나갈 거야? 오늘 저녁은 같이 먹자.”

“그럴 거야.”

“내일 어디로 간다고 했지? 영국?”

에단은 그 순간 딘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재킷에 팔을 끼우며 말했다. 숨겨 봤자 왜인지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방금 우리 오너에게서 연락 왔어. 잠깐 얼굴 보자고.”

“회사가? 아니면 진짜 오너?”

“루크 린드베르그.”

생각보다 딘은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손에 들고 있던 데이터를 내동댕이쳤다. 그 요란스러운 소리를 듣고도 얼굴을 피할 수는 없었기에 에단은 딘의 얼굴을 주춤거리며 마주 보았다. 무덤덤함을 위장한 얼굴을 본 딘은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하긴, 너도 불편하겠지.”

“그렇게까지는 아니야.”

“에단, 너 재킷 거꾸로 입었어.”

그 말에 에단은 시선을 약간 내려 뻣뻣하게 느껴지는 팔 부근을 바라보았다. 솔기가 보이는 소매를 보고는 천천히 옷을 벗어 내는 동안, 딘은 혀를 차며 다시 데이터를 집어 들었다.

“그래도 휴가 중이니 금방 놔줄 거야. 그 정도 상식은 있겠지.”

두 사람이 남은 휴가를 같이 보낼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않은 어투였다. 에단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며 몸을 휙 돌렸다.

***

스위스 아델보덴. 서머 브레이크 2주 차.

베른 공항을 나오자마자 게이트 바로 앞에 서 있는 세단을 본 것은 그저 우연이었다. 하지만 처음 본 차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인 것은 아무리 봐도 우연처럼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이를 향한 인사일지 몰라 둘러보았지만 주변에는 바쁘게 발을 옮기는 이들뿐이었다. 에단은 터벅터벅 발을 옮겨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는 낯선 백인 남자 앞에 섰다. 남자의 발음은 영어의 교본으로 쓰여도 될 만큼 완벽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단 한. 보스께서 보내셨습니다.”

“그 보스가 루크 린드베르그 맞죠?”

“예.”

차를 보냈는데 굳이 따로 가겠다 할 이유는 없었다. 남자에 손에 순순히 캐리어를 넘겨준 에단은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어젯밤 잠을 설친 뒤 연이은 이동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있던 차에 마침 잘된 일이었다.

레이스 카와 다르게 완벽한 승차감을 자랑하는 차는 작은 흔들림마저도 부드럽게 전달한다. 에단은 창가에 팔을 기대어 깨끗한 스위스의 풍경을 바라보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오는 동안 되짚어 보아도 딱히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물론 층층이 포개어진 마음 중 몇 겹은 쉽게 들춰 볼 수 있었다. 늘 무슨 심산인지 모를 웃음을 띠던 루크가 어쩌면 슬픔에 젖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딘과 요하임이 꺼냈던 이야기 속 냉정하고 돈을 위해 자신의 불행한 과거마저 팔아치우는 면모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으며…….

그리고 이 와중에 자신이 대단히 속물적이고 답도 없는 인간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알프스 산봉우리의 높고 첨예한 만년설을 바라보며 무심코 생각했기 때문이다.

섹스하려나.

일단 에단은 이 흐름을 막아 보려 했다. 앞선 두 가지, 상대의 기분이나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사건 등 심각한 현실과는 전혀 결이 맞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의도와 달리, 한번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흘러간 대로 둔 생각이 범람한다.

낯선 경험이었고, 자극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정서적으로도. 에단은 이 납득 속에서 자신에게 스스로 면죄부를 주었다.

어쩔 수 없었다. 루크가 처음이었다. 자신을 그저 갈아치울 스페어타이어 취급이 아니라 온전히 한 명의 드라이버로 대하는 것은. 하는 말은 성격이 원래 그래 먹었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그런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믿음이 첫 번째. 긴 눈매의 끄트머리는 가끔 섹시하게 느껴지곤 했으며 그 와중에 한 번 외면하면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 듯 선을 그어 낸다. 그래서 완전히 돌아서지 못하고 사람을 맴돌게 만든다. 남자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도무지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는 심지어 한 번도 손대어 보지 않았을 것 같은 남자의 성기를 쥐어 주무르는 데에도 거침없었다. 어둡던 호텔방 안, 제 다리 사이에 앉아 샅을 간지럽히며 올라오던 손놀림이 떠올랐다. 팽팽한 아랫배를 더듬다 핏줄마저 부드러운 손끝으로 문지르던 감각이 문득 치민다. 어둠에 좁아진 동공이 날카롭게 저미듯 바라보던 눈길까지.

알코올에 젖어 잊혔던 기억마저 새삼 일깨워지자 에단은 다리를 자연스럽게 꼬았다 푼 뒤 등을 젖혔다.

“젠장.”

“불편한 점 있으십니까.”

“아니요. 혼잣말이에요.”

운전하며 기사가 에단의 말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아 에단은 그에 대해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시 남자가 운전에 집중하고 나서야 자세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이래서야 몸이 달아 한걸음에 달려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성욕이라 해도 레이스 후 치솟은 아드레날린의 해소가 가장 우선이었던 과거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그사이 깨끗한 도시를 가로지른 차는 한적한 스위스의 휴양지 사이를 달려가고 있었다. 아델보덴의 시가지를 지나 차는 산 중턱으로 더욱 접어들었다. 안 그래도 한가로워 보이던 광경은 이제 적막하기까지 하다.

차는 앞 공터에 큰 궤적을 그린 뒤 멈춰 섰다. 건물은 건축학적으로 대단한 의미를 가졌을 것 같이 생긴 단층의 넓은 건물이었다. 오로지 콘크리트로 빚어 만든 것 같은 건물의 옆면으로 돌아가자 큰 입구가 있었다. 에단은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일자의 넓은 공간이었다. 입구의 오른쪽에는 절벽 아래 너른 스위스의 들판과 만년설이 걸린 산맥의 깎아지른 면을 통창으로 조망하도록 해 두었다. 그쪽으로 자꾸 향하는 시선을 다시 앞으로 한 뒤 복도를 따라 더욱 안쪽으로 들어갔다.

공간의 가장 안쪽에 루크가 덩그러니 놓인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뻗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투명한 유리컵에 꽂힌 스틱을 빙글 돌리다가 멈췄다. 얼음이 달각거리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안녕.”

예상보다 친근한 인사였다. 눈꼬리가 가볍게 휘는 루크의 눈매도 그대로다. 딱히 슬플 것도, 별날 것도 없는 평소와 비슷한 분위기. 따라서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에단은 홀로 안도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마음에 대한 자각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어떤 이유이건 결국 자신이 꽤나 루크의 기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무슨 일로 불렀어요?”

“오자마자 용건부터 찾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아 에단은 순순히 자리에 앉으며 다시 물었다.

“잘 지냈어요?”

“글쎄요.”

에단의 얼굴을 빤히 보던 루크는 컵에 비스듬하게 꽂힌 스틱처럼 얼굴이 기울였다가 바로 세웠다.

“별로 좋은 일은 없었어요.”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리는 순수한 표정을 마주하며 에단은 제 질문을 조금 후회했다. 진심이었건 써먹기 위한 수단이건, 어쨌든 어머니의 죽음을 되새긴 후 돌아온 이가 아니었던가.

이야기를 꺼내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 옳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추가 그렇게 기울자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에단은 무덤덤하게 했다.

“왜 불렀어요?”

“그러는 에단은 그… 어디더라? 그 그리스 구석에는 왜 있었던 겁니까?”

“여름휴가였으니까요.”

“나도 그래서 부른 것뿐이에요. 기분 전환 할 겸. 당연한 거 아닌가.”

“기분 전환이요.”

글쎄. 가벼운 분위기를 만들거나 즐거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자신의 특기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뜻 모를 웃음으로 빙글거리는 루크를 마주하며 고민했다.

기분 전환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트랙을 걷거나 팩토리에서 만들어지는 내년 레이스 카를 보는 게 이 남자의 기분 전환거리가 아니라는 건 묻지 않아도 아주 잘 알겠다.

그래도 마침 오늘 날씨는 좋았고 스위스의 풍경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이었다. 넓게 낸 통창 너머 비현실적인 초록 잔디와 높은 산맥. 그 틈으로 어깨를 디밀 듯 삐죽 보이는 설산의 풍경을 응시하던 에단이 제안했다.

“드라이브나 갈래요?”

“신기하네요.”

“뭐가요.”

“항상 타는 게 차인데 드라이브가 기분 전환이 된다는 게.”

“괜찮은 편이죠.”

사실은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했다. 가벼운 말을 건네거나 어떤 진심을 전하거나. 그런 것보다도 훨씬 자신 있는 일이다. 그래서 다시 권했다.

“나가죠. 드라이브하기 좋아 보이던데.”

제안을 하고 나서야 에단은 제가 가방 하나만 덜렁 들고 온 처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서 드라이브를 하려면 루크가 가지고 있는 차를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

“당신이 차를 빌려줘야 하긴 하겠지만요…….”

그런 원맨쇼를 보고 있던 루크는 희한하다는 듯 웃다가 가볍게 양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래요. 그런데 난 운전하기 싫어요.”

“제가 하죠. 차는 있습니까?”

“여기 뭐가 있더라. 내려가서 한번 봐요.”

지하의 너른 차고에는 고른다는 말이 무색하도록 두 대의 차밖에 없었다. 그 두 대 모두가 어디 내놓아도 부족한 차종은 아니긴 했다. 차체가 일반 규격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길쭉한 리무진과 벤틀리였다. 선택지가 이것뿐이라면 벤틀리를 고르는 것이 맞았다.

다만 벤틀리의 도색을 노려보던 에단은 절로 좁혀지려는 미간을 애써 폈다. 남의 차에 함부로 말을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다.

하지만 차고에 주차된 벤틀리를 운전해 나오던 중 곁에 안전벨트를 얌전히 차고 조수석에 앉은 루크에게 묻고야 말았다.

“이거 도색은 대체 누가 한 겁니까?”

“글쎄요. 처음부터 이 색이었을걸요.”

“그러니까 이 색을 처음 고른 게 누구냐는 거죠.”

“그것도 아마 나일걸? 왜요.”

“아니에요.”

본인의 취향이 이렇다라…. 그래. 은색 반짝이 도색이 어느 조명 아래에서는 굉장히 고급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핸들 너머 보닛이 햇볕을 받아 마치 은박지처럼 반짝거리는 것을 본 에단은 결국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내가 벤틀리면 자기 꼴을 보고 눈물을 흘렸을 거라고.

도무지 취향에 맞지 않는 도색과 달리 차의 승차감은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늘 노면의 상태를 온몸으로 느끼며 달리는 포뮬러 원의 레이스 카와 비교한다면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특히 뛰어난 것이 맞았다.

주변 풍광을 즐기기 위해 좁은 이차선 도로를 천천히 달리던 에단은 앞에 맞이한 소 떼를 보고는 잠시 정차했다. 목에 육중한 은색 종을 단 소 여러 마리가 끌고 가는 이의 인도에 따라 천천히 길을 건너고 있었다.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그는 힐끔 눈을 돌려 루크의 얼굴을 확인했다. 루크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차창 밖의 길을 내다보고 있었다. 높은 지대를 오르고 있는 탓에 깎아내리는 듯한 절벽이 그 아래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 아래를 한없이 바라보던 루크가 새삼스러운 말을 했다.

“에단. 진짜 운전 잘하네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황당했다. 세계에서 가장 운전을 잘하는 스무 명만이 모여서 하는 포뮬러 원 경기이니 그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여기에는 겸손이고 뭐고 발휘될 새가 없었다.

루크는 에단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다시 절벽 아래를 힐끔 보더니 뒷머리마저 시트에 기대어 앉았다. 말뿐이 아니라 진심으로 편안함이 느껴지는 자세였다.

“정말 잘하길래 하는 말이에요. 다들 잘한다더니 영 시원찮았거든. 이렇게 절벽이 가까이 있는데 절대 안 떨어질 거 같은 느낌인 게 신기하네.”

“안 떨어지는 게 당연하죠.”

에단은 무심히 대답하고 멀어지는 소 떼의 뒤꽁무니를 보고는 천천히 액셀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출발하던 순간 생각났다. 루크가 겪었던 사고에 대한 짤막했던 설명을.

할 말이 없어져 핸들을 꽉 쥐었던 에단은 가속을 더욱 섬세하게 조절하며 천천히 차를 몰았다.

그리 높은 데까지는 올라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에는 편안하게 앉아 있다지만 절벽에서 차가 떨어져 사고가 났던 이를 기분 전환 하자고 산길 드라이브에 데려오다니. 왜 이걸 미처 생각해 내지 못했었을까.

정작 그 당사자는 멀끔한 얼굴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에단은 자신의 시선을 그가 느끼기 전에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연이어 올라가던 차들은 훨씬 더 높은 곳으로도 올라가는 것 같았지만 에단은 첫 산맥을 오르자마자 산장 앞 공터에 차를 멈추었다. 시동을 끄고 곁을 괜스레 의식했지만 루크는 안전벨트를 풀고 눈썹 부근을 긁적이고 있을 뿐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며 이런 말도 한마디 덧붙였다.

“우와. 굉장히 높이 왔네요.”

그 목소리에 어떠한 감흥도 없다는 건 지나가는 소 떼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단은 침묵으로 대응했다.

공터에 차를 주차한 두 사람은 통나무로 벽을 쌓고 세모꼴의 지붕을 올린 산장의 앞 난간 가까이 다가갔다. 새파란 하늘 가운데에 선을 내리그은 것만 같은 가파른 산맥과 그 아래 펼쳐진 초원의 풍경이 한가로웠다.

나무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 무료하게 바라보는 루크에게 에단은 사람들이 북적한 건물의 안쪽을 눈짓했다.

“커피 마실래요?”

“그러죠.”

“뭐 마실래요.”

“글쎄요. 뭐든 괜찮아요.”

말만 그렇지 턱을 짚으며 고심하는 옆 모습은 이 세상에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 보였다.

“에스프레소가 마시고 싶은데……. 지금 마시기엔 너무 진하니까 에스프레소에 우유 두 스푼 정도만 부탁할게요.”

“뭐든 괜찮다며?”

“안 돼요?”

그 순간 눈꺼풀을 내린 표정을 본 에단은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마음대로 해요. 두 스푼만?”

“우유를 먼저 바닥에 깔고 위에 샷 올려 줘야 돼요. 알았죠?”

“알았어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에단은 홀로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까다로운 주문이었지만 카페 직원은 다행히 밝은 웃음과 함께 커피를 내어 주었다. 그동안 힐끔거리는 시선을 느낀 에단은 일부러 모르는 척 건물의 구석 따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커피를 받아 들자마자 재빠르게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와 보니 루크는 자리에 없었다. 대신 저 멀리 난간의 끄트머리, 사람이 적은 쪽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양팔을 모아 나무 난간에 느슨하게 걸친 채 허리를 조금 굽혀 아래를 보고 있었다. 그 구석까지 몇 명의 시선이 향하고 있었다.

유명한 관광지답게 들리는 언어는 각양각색이었다. 사이사이 들리는 단어들은 대충 칭찬이었다. 모르는 척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다가간 에단은 커피를 불쑥 내밀며 물었다.

“뭐 볼 거 있어요?”

“저기 새가 있길래.”

푸른 시선이 향하는 먼 곳을 바라보자 펼친 날개가 유난히 길고 큰 새가 있었다. 유유히 유영하는 그 자태를 보는 사이 루크는 받아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흘리듯 물었다.

“무슨 새인지 알아요?”

“글쎄요.”

“궁금하네.”

별걸 다 궁금해한다는 생각을 숨길 수 없었었다. 에단의 시선에도 루크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가증스러운 모습도 이젠 익숙하다.

에단은 제자리에서 선회하던 새의 뒤꽁무니를 한참이고 노려보았다.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지더니 어느 순간 가파른 절벽의 너머로 점이 되어 사라진다.

노려본다고 알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도무지 검색어를 무엇이라 써야 할지 모르겠다. 대충… 독수리의 종류 중 하나가 아닐까?

독수리. 검색하니 나오는 종류가 너무 많았다. 에단은 절망했다. 지역을 넣어야 할까. 스위스 독수리……. 독수리처럼 날아올랐다는 패러 글라이딩의 이야기가 맨 위에 뜬다. 이번에는 산맥의 이름을 넣어 이리저리 검색 방법을 골몰했다.

들린 바람 소리가 처음에는 정말 바람 소리인 줄만 알았다. 다시 한번 그 소리가 들렸을 때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루크는 갑자기 입에 커피 잔을 물고 있었다. 그래 봤자 바들거리는 입꼬리를 숨길 수는 없었다.

꿈틀거리는 배신감을 꾹 누르며 에단은 애써 상냥하게 물었다.

“왜요. 궁금하다며.”

“크흠. 에단. 오늘따라 되게 뭐랄까. 다정하네요.”

“난 원래 다정했어.”

“오늘따라 더. 그걸 진짜 찾아 줄 줄은 몰랐네. 뭐 쓸데없는 걸 궁금해하냐고 할 줄 알았더니.”

“팀 오너잖아요.”

“그동안은 아니었나?”

스치는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만큼이나 가벼운 손짓으로 손가락이 하나씩 접혀들어 갔다.

“처음 만났을 때, 계약서를 쓸 때도, 서킷에서도.”

“알았으니까 그만해.”

“그런데 왜 갑자기 나한테 잘해 주는 거지.”

“…….”

“왜 더 높이 올라가려다 여기에서 멈춘 건지도 궁금하고.”

손가락이 하나 더 접혔다. 중간은커녕 산맥의 시작인 이곳의 전망대에서, 전망을 둘러본 이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새로운 이가 줄곧 밀려들고 있었다.

새로운 사람이 수혈되는 만큼 시선도 하나씩 들러붙었다가 멀어진다. 그 시선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주던 루크가 대뜸 물었다.

“봤어요?”

“…….”

처음에는 안 봤다고 하려 했지만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묻는 티가 여실했다. 이번에는 에단이 커피 잔을 앞니로 물었다. 결국 커피 잔을 손에 들며 맥없이 수긍했다.

“티 납니까.”

“매우.”

손쉬운 항복 선언이 즐거운 듯 루크는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거기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뭘 봤길래 그래요?”

“이번 기사요.”

“자선 행사랑 추모식?”

“네.”

“하긴. 열심히 기사 냈겠지.”

“과하게 의식해서 미안합니다.”

“뭐 어때요. 다들 구경하라고 한 행사인걸.”

“의식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죠?”

에단은 줄곧 생각했었다. 루크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있다면 편안함 때문이 아닐까 하고. 어떤 특별함, 혹은 감정적 교류. 그런 게 아니라 거리가 있는 타인이기에 차라리 느껴지는 편안함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딱히 특별할 것도, 친밀할 것도 없는 자신을 그 먼 곳에서부터 이곳까지 불러들이고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출발하기 전 이제는 알게 되었다고 고백이라도 해야 했던 걸까. 비행기를 타고 나서야 들었던 생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마주하자마자 편하게 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과하게 신경을 써 불편하게 만든 꼴이었다.

에단의 우묵한 눈매를 지켜보던 루크는 빙긋이 웃으며 가볍게 마주 쥐고 있던 양손의 깍지를 꽉 쥐었다.

“내가 상심했을 거라고 생각해 주는 겁니까?”

“그렇지 않나?”

“음. 맞아요.”

그는 킥킥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약간 기울였다. 높은 콧대를 에단의 긴 어깨에 문지르듯 가벼운 접촉을 하고 바로 떨어졌다. 에단은 순간 솜털이 이는 것과 같은 기묘한 감각에 잠시 손을 굳혔다.

“그럼 위로를 해 주지 그랬어.”

“큰 사고가 났던 적이 한 번 있었거든요.”

“언제?”

“몇 년 전이에요. 이젠 괜찮아졌고.”

다 마신 커피 잔을 내려 둔 왼팔을 에단이 내려 보았다. 한때 이 팔의 모든 뼈가 어긋나 검푸른색으로만 뒤덮인 적이 있었다.

“다른 생각 좀 해 볼까 싶으면 위로받는 게 지긋지긋하더라고.”

잊으려 해도 발목을 붙잡듯 사고를 떠올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진절머리 났었다. 그중에서도, 떨쳐 내지 못하고 그들의 시선을 받을 만한 트라우마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신이 가장 진절머리 났다.

“그러지 않을까 싶었어요. 다들 그 사건을 말하길래요. 그냥 내 가정이기는 했지만.”

“원래는 그러는 거 별로 안 좋아했는데 좋네요. 편하고.”

“편하다고요?”

무엇 하나 편하게 해 준 게 없는 것 같아 에단은 대번에 눈썹을 구겼다. 그 낱낱이 드러나는 감정이 오늘따라 모두 잡힐 듯 보여서 루크는 그것이 꽤나 신기했다.

늘 다양한 색의 시선에서 감정을 읽어 내는 게 익숙했지만 에단은 시선이 솔직한 것에 비해 하는 말은 다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루크는 가끔 제가 에단의 속마음을 잘못 읽었나 헷갈리기도 했다.

“빈터도 내가 궁금해한다고 해서 이미 날아간 새 이름 따위를 찾아 주려 들진 않을걸.”

“그만 말하지 그거.”

“왜요. 난 좋은데.”

“그래. 기분 좋았으면 됐죠. 이미 기분이 좋아서 내 웃긴 짓들은 하나도 필요 없었던 거 같지만.”

“음. 아니에요. 안 좋았던 거 맞아요. 가라앉기도 했었고. 그게 맞는데 말이지.”

지나가는 소와 같은 속도로 기어가는 드라이브도, 사람이 넘쳐 나는 관광지에서 커스터마이징을 한 커피를 가져다 달라는 생떼도. 지나간 새의 이름을 알려 달라는 말까지. 그 말 하나하나에 대답해 주는 에단을 보느라 잊어버린 것이 맞았다. 분명히.

“기분 전환이 됐네요. 덕분에.”

“한 게 뭐 있다고. 고작 여기 오는 거 운전해서 커피나 갖다준걸요.”

퉁명스러운 듯 내뱉지만 말랑한 귓불의 혈색이 은은했다. 루크는 그 은근한 색을 보고 있었다. 예상보다도 칭찬에 약하네. 전부터 느낀 바지만 오늘 그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 아래 길게 떨어지는 목선과 풀어 둔 셔츠 깃 너머의 빗장뼈를 보는 시선이 짙어졌다.

“진짜 고마웠어요. 드라이브도 이것도.”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고.”

“이따 저녁에는 내 식으로 기분 전환 할래요?”

***

천천히 떨어지던 해가 산맥 너머로 자취를 감추기 전 붉은 석양이 타오른다. 방 안에 흩뿌려진 노을은 다리 사이 고개를 숙인 루크의 등 위를 흘러내렸다.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꿈질거리는 등 근육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에단은 말단에 몰리는 자극적인 쾌감에 왼쪽 눈을 찌푸렸다. 눈을 들어 그 모습을 본 루크가 혀를 길게 빼었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찰로 평소보다 붉어진 입술이 번들거리는 모습이 선정적이었다. 에단은 다시 한번 경련하듯 왼쪽 눈을 찡그렸다가 바로 떴다. 과한 시각적 자극에 아랫배가 움푹 조여들었다.

침대 곁 협탁에는 기포가 거의 가신 황금색 샴페인이 잔의 바닥에 남아 있었다. 곁에 보이는 병은 하나지만 다 마시고 밀어 떨어트린 병이 아래 하나 더 있었다. 드라이브에서 돌아와 허기진 채로 들이켠 샴페인 취기가 전신에 감돈다. 덕분에 욕망을 드러내는 데 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미세한 표정 변화를 살피던 루크는 목울대를 울리며 다시 고개를 약간 수그렸다. 체온이 올라 짙어진 살 내음을 따라 부드러운 살갗에 코를 묻던 그가 물었다.

“여기 제모는 왜 했어요?”

“왜일 거 같아요.”

“공기 저항 때문인가.”

“거기 공기 통할 일이 뭐가 있…….”

비식거리며 대답하던 에단은 혀를 씹을 뻔한 순간 입을 다물었다. 단단하게 선 기둥 아래 음낭을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내렸던 루크가 혀를 내어 길게 선 허벅지 안쪽 근육을 훑었다. 그러곤 더 아래로 입술을 눌러 내려간다. 에단은 의식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자잘한 접촉이 길어질수록 폐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부풀어 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급격하게 달아오르는 쾌감에 애써 다른 것을 생각하려 노력도 했다. 하지만 끄떡이는 성기는 이제 루크의 얼굴을 가려 콧대에 비벼질 정도로 기립해 가고 있었다.

‘용케 공기 저항이라는 말을 아네’ 따위의 생각을 하던 중 아래의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매에는 웃음기가 깃들어 있었다.

“매너가 영 별로네.”

“내가 뭘요.”

“방금 다른 생각 했잖아.”

이미 에단의 머리통을 털어 보기라도 한 듯 단정적으로 말한 루크는 이를 세워 허벅지의 연한 살갗에 불그스름한 자국을 만들었다. 살갗이 땅기는 느낌에 아랫배를 잘게 떨던 에단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안 그랬어.”

“그래요?”

한낱 시선조차 긁어모은 루크는 여상하게 대답한 뒤 상체를 일으켰다. 무릎 뒤 오금을 쥐어 다리를 들어 올린 그는 오른 무릎에 입을 맞추었다. 느슨하게 여민 가운이 벌어지더니 불그스름하게 단단해진 귀두가 언뜻 보였다. 가운에 덮어져 더욱 부피가 커 보이는 성기를 보며 에단은 무심코 말을 흘렸다.

“혹시 그쪽 회사에서 무기도 만듭니까?”

“몇 가지는요.”

“그거나 다를 게 없어 보이네.”

“좋은 뜻으로 받아들일게요.”

싱긋 웃어 보인 루크가 천천히 바로 누워 오른 다리를 구부려 세웠다. 가운 자락이 들춰지며 반쯤 기립한 성기가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에단은 조금 심란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받아먹은 게 있으니 내뺄 수는 없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길게 뻗어진 허벅지 위를 짚어 몸을 넘긴 에단이 더욱 넓게 벌려진 루크의 다리 사이에 꿇어앉았다. 이젠 거의 벗은 거나 다름없는 가운의 끈을 풀어 양옆으로 젖혀 내자 위에서 가벼이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작게 오므라든 루크의 입술을 한 번 노려본 에단은 아랫배부터 근육으로 조여든 하체를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결국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뜨거운 표피 아래의 맥동이 손바닥 안에 들러붙는 것만 같았다. 입을 작게 벌려 가늠해 보다가 결국 턱뼈가 얼얼하도록 입을 열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고도 입술에 맨들한 살갗이 걸려 더욱 입을 벌려야만 했다.

아까 오르내리던 고갯짓을 서툴게 따라 하던 중 혀를 누르고 치달아 오는 성기가 이에 걸렸다. 에단은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올렸다. 성긴 체모와 판판하게 조각난 복근 위로 숨을 몰아쉬었다가 내쉬며 느른하게 몸을 젖힌 루크의 턱이 보였다. 힘을 주었는지 단단하게 굳었다가 풀린 그의 눈매는 조금 붉어져 있었다.

욕망을 숨기지 않으며 긴 팔을 뻗은 루크는 에단의 이마 위를 더듬었다. 체온이 닿자 진땀에 젖어 축축한 감각이 느껴졌다. 기둥의 윗부분을 문 채 혀를 굴려 아래를 문지르자 그 서툰 놀림에도 루크는 날숨을 내쉬고 있었다.

유럽 여느 성당의 조각 같은 얼굴이 욕망으로 느슨해져 가는 기색을 낱낱이 읽으며, 에단은 입 안의 묵직한 귀두를 혀로 밀어 내어 뱉었다. 입 안에 감도는 탁한 맛에 약간 콧잔등을 구긴 에단이 혼잣말을 뱉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잘했나.”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거 아니야?”

축축한 앞머리부터 정수리까지 헤집던 손이 미끄러져 내려와 에단의 왼뺨을 기대듯 붙잡았다. 그리고 완연히 선 성기의 기둥을 부드럽게 오른뺨에 대자, 에단은 눈을 찡그리며 목덜미를 굳혔다.

“내가 빨아 준 거에 한참 못 미치는데 이거라도 허락해 줘요.”

갸름한 뺨과 둥근 광대까지 오가는 귀두 갓과 핏줄의 감각에 에단은 눈을 구기면서도 묵묵히 입술을 사리물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제 아래를 한참 빨아 주었던 것에는 미치질 못한 탓이었다.

귀밑 턱을 감싸 쥔 손아귀가 점점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며 에단은 눈꺼풀에 더욱 힘을 주어 위를 노려보았다. 그 흉흉한 시선을 마주한 루크는 입꼬리를 비죽이 올리며 허리 짓을 더했다. 다물린 잇새에 파고든 엄지를 힘주어 깨문 일순간 루크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잘근 씹는 잇새를 보는 긴 눈매는 그 안을 파고들 것처럼 날카로웠다.

사정의 직전에서 멈춘 듯 루크의 얼굴은 군데군데 열이 올라 있었다. 꾹 깨물린 엄지를 잇새에서 빼낸 그가 몸을 일으켰다. 무겁게 처진 성기가 무게를 따라 끄떡이며 에단의 단단한 턱을 스쳤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영문을 모르던 에단은 밀쳐진 대로 침대에 반쯤 누웠다. 경직된 뒷덜미를 감싸 제게 얼굴을 고정한 루크가 짙게 웃었다. 푸른 동공을 한없이 응시하던 에단은 괜한 불안감에 눈매를 사납게 구겼다.

“한참 못 미친다며?”

“아닌 거 같네.”

목덜미를 매만지다가 미끄러진 손이 턱을 붙잡았다. 턱을 당기고 제 고개를 수그린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다. 팽팽하고 매끄러운 살갗이 잇새에 물리는 순간, 에단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려 맞이했다가 뒤늦게 혀를 물렸다. 하지만 젖은 감촉이 몰려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굳은 혀를 슬쩍 핥아 올린 루크는 장난스럽게 간격을 떼었다가 거듭 입을 맞추었다. 그 입맞춤이 거듭될 때마다 에단의 머릿속에는 공백이 모스 부호처럼 이어졌다. 혀도 성감대인 건 알았지만 뭐랄까, 지금까지의 접촉과는 전혀 다른 온기가 벌어진 입 안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엉킨 혀에 숨결이 닿게 한 뒤 입술을 내린 루크는 턱 끝에서부터 잘게 입을 맞추어 내렸다. 목덜미와 긴 목선을 지나 판판하게 벌어진 가슴의 가운데를 핥아 내려갔다. 에단은 제 아래로 움직이는 루크의 앞머리 때문에 가슴팍의 간지러움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샅샅이 핥아 뺨을 문지르며 미끄러져 내리는 움직임마다 두꺼운 어깨 근육이 물결치고 있었다.

아랫배를 핥아 내려간 그가 사타구니까지 거리낌 없이 핥아 내는 모습을 보며 안구에 열이 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에단이 심호흡과 함께 기대감으로 기립한 성기를 차라리 제 손으로 쥐어 버렸다. 루크가 다시 눈을 올렸다.

“그래서, 이거 왜 제모한 거예요?”

“맞춰 봐요.”

“글쎄.”

고개를 갸웃거리는 대로 에단의 허벅지 안쪽으로 부드러운 금발이 문질러졌다.

“이 짓 하기 좋으라고?”

음낭의 아래, 회음에 입술을 쪼듯이 맞춘 숨결이 더욱 내려갔을 때, 흥분으로 바짝 조인 숨을 멈춘 에단은 순간 다리를 움츠렸다. 접히는 무릎을 강하게 쥔 루크가 체중을 실어 매트 위로 남은 다리를 짓눌렀다.

“이게, 무슨.”

대꾸 없이 길게 핥은 혀가 안을 파고드는 뭉클한 감촉에 더욱 놀라 다리를 오므리자 그 사이에 파고든 얼굴이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태에서 다물린 구멍을 핥아 내는 감각에 에단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물론 씻고 누웠다지만 거길 대체 왜? 하고 생각하는 순간 고간을 부드럽게 눌러 더욱 다리를 벌린 루크의 손가락이 구멍을 천천히 덧그리듯 매만지고 있었다.

다시 음낭 부근의 살갗을 입술로 가볍게 머금었다가 놓는 야릇한 입놀림이 반복된다. 귀 끝까지 붉게 타오른 얼굴을 올려 보며 루크가 싱긋 웃었다.

“진짜 그건 아니죠?”

“공기 저항보다는 차라리 신빙성 있네.”

“아. 정말?”

검지로 성기를 툭 튕기듯 만지던 루크는 다시 입을 벌려 모양 좋게 기립한 성기를 빨아 올렸다. 죽죽 삼켜 대는 강렬한 입 안의 압력에 온 힘이 몸의 중심으로 몰리는 것을 느끼며 에단은 허리를 움찔댔다. 쓰읍, 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밑동을 손끝으로 간질이기까지 하니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잠깐, 그만…, 큭…….”

몸부림에도 개의치 않던 루크는 심상찮게 허벅지의 근육이 푸들거리는 감각을 느끼고는 귀두를 뱉어 낸 뒤 손바닥으로 가볍게 마찰하듯 굴려 주었다. 정액이 핏핏 새는 감각이 손안을 때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넓적하게 문지르니 진한 풋내가 은은하게 퍼진다. 반들반들해진 아랫배의 판판한 면을 문지르던 커다란 손바닥의 감촉은 다물린 엉덩이 사이까지 문질렀다.

사정의 나른함에 젖어 들면서도 혼란스러운 표정이 된 에단은 높은 베개에 간신히 머리를 기대 누우며 물었다.

“그쪽은 이러고 있는 게 굉장히 익숙하네요.”

“뭐가? 섹스?”

“섹스도 섹스인데. 남자와 이러고 있는 게.”

“뭐, 별로 다를 건 없네요.”

루크는 몸을 일으키고는 기울어진 에단의 고개를 바로 해 주려는 듯 턱을 가볍게 쥐어 당겼다. 그리고 마치 실수인 양, 정액이 묻어난 엄지를 잇새에 지그시 문질렀다. 혀끝에 느껴지는 텁텁한 맛에 에단의 눈이 찌푸려졌다. 눈꺼풀에 반쯤 잠긴 새까만 눈동자를 응시하던 루크가 웃었다.

“괜찮지 않아?”

“난 별로.”

“글쎄. 난 입맛에 맞는 거 같은데.”

믿기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며 명치 부근을 손바닥으로 밀어 낸 루크는 팔을 뻗어 잔에 남은 샴페인을 한입에 머금어 넘겼다. 에단 역시 넘겨준 샴페인 잔을 들어 단숨에 삼켰다. 나른하던 기분은 이제 약간의 어지러움을 동반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루크가 다시 다리 사이로 자리 잡는 것을 보고, 에단은 혼란이 한껏 가중되었다.

루크는 거리낌 없이 사람을 물고 빨았고 손을 움직였다. 또렷한 입술 안으로 다시 자신의 성기가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에단은 눈을 찡그렸다가 결국 뒤통수를 베개에 문지르며 몸을 젖혔다. 대충 생각나는 욕설로 아무거나 지껄였는데 어느 나라 말이었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눈앞이 희게 튀었고 지금 여기가 어디인가 현실감마저 흐릿해진다. Shit, 하고 내뱉은 에단이 급히 팔을 뻗어 만류하려 한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입 안에 어느 정도 흘려 낸 것이 분명했다.

제 입술을 적신 흰 액을 슬쩍 밀어 내는 붉은 혓바닥이 선명하다. 그리고 다시. 연이은 사정이 몇 번이고 이어졌을 때, 곤죽이 되다 못해 물렁해진 뒷머리를 베개에 문지르며 에단은 고개를 젖혔다. 높은 천장의 아득함만큼이나 아득한 심정이 치받는다.

루크가 그저 봉사나 하자고 이렇게 진이 빠지도록 제 것을 물고 빨아 줄 리가 없지. 그것을 증명하듯 정액을 치워 내는 손날은 자꾸만 아래를 파고들고 손가락이 푹 젖은 구멍을 덧그리며 파고든다. 비키라고 발을 들어 밀어 내 보았지만.

“쉬이.”

하며 웃음 섞인 눈짓을 해 보인 그는 콧날로 음낭을 밀어 내며 아래를 핥아 낼뿐이었다. 손가락과 혀가 번갈아 드나든 밑이 움찔거리며 풀리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내벽을 만져 보는 움직임에 에단은 잇새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저리… 꺼져.”

“좋잖아요.”

“뭐 하려는지 다 아니까 꺼지라고.”

“알겠어요? 그럼 쉽네.”

쉽긴 뭐가 쉽냐고, 밀쳐 내려던 순간 가벼운 절정이 다시 한번 아랫도리를 덮친다. 그 순간 안에 들어온 손가락 두 개가 벌려지며 찬 공기가 들어서는 감각이 몸서리쳐진다.

진이 빠져 늘어진 그의 몸을 당기며, 루크가 일어나 앉았다. 거대한 성기는 선액을 뚝뚝 흘리며 아랫배부터 문질러 올라온다. 명치께를 문지른 성기가, 턱 끝을 건드리고. 에단의 잇새에 닿았다. 벌려진 말랑한 입술을 누르며 푹 젖어 물컹해진 눈꼬리를 내려다본 루크가 피식 웃었다.

“네 번 쌌잖아.”

“…….”

“나도 네 번 싸게 해 줘요.”

“…….”

“응?”

가슴팍에 깊숙이 무게를 싣다시피 걸터앉은 남자의 무게가 비현실적이었다. 사납게 노려보는 눈매를 더없이 다정하게 내려다보던 루크는 갸름한 뺨을 손바닥 안에 굴리다가 다물린 이 사이를 엄지로 다시 벌리고 들었다.

탱탱하게 선 성기의 귀두를 아래로 내리고, 기어코 먹이려 드는 것의 부피를 내리깔아 본 에단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아무리 보아도 도무지 입 안에 담을 수가 없는 크기였다. 목구멍까지 턱 막힐 것 같다…….

불안한 기색을 읽은 루크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매만지며 채근했다. 더없이 달짝지근한 목소리였다.

“괜찮아요.”

“너야 괜찮겠지.”

“목구멍까지 잘 열면 되지 않을까?”

턱 끝을 간질이던 손가락이 그 아래 단단한 목젖과 긴 목선을 더듬어 내렸다가 오른다. 그사이 무게를 실어 허벅지를 조금 낮춘 만큼 성기가 입 안을 파고들었다.

입술이 팽팽해지도록 동그랗게 벌어지고, 에단의 눈가가 벌게졌다. 밀쳐 내려 해도 무게로 어깨를 짓눌러 쉽지 않았다. 지글지글 끓는 듯한 체온이 혀를 짓누르고 어금니를 긁으면서도 더, 더, 안으로 짓누르고 들어왔다.

숨통이 막힐 듯 목구멍을 깔짝거리는 순간, 에단은 산소가 부족한 시야 앞에 희게 보이는 위를 보았다. 루크 역시 가슴팍부터 얼굴 군데군데가 벌겋다. 좋아 죽는 건지, 저도 고통스러운지 모르도록 눈가를 찌푸린 채.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뿌리치려던 순간, 때려 박히는 듯 밀려 들어오던 성기가 빠져나갔다. 콜록콜록. 에단은 거친 기침을 하며 가슴팍을 들썩거렸다. 늑골을 짓누르고 있던 루크는 천천히 무게를 무르며 옆으로 비켜 주었다. 발작적으로 기침을 뱉어 내던 에단이 성을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미쳤어?”

“미치다니.”

“죽이려던 게 아니고서야 지금, 이게.”

“내가 해 준 대로 하려던 것뿐이잖아요.”

여전히 거대하게 아래를 부풀린 주제에 루크는 퍽 아쉽기라도 한 듯 상심한 태도였다. 기가 막혀 어깨를 밀치자 루크는 그 손마저 부드럽게 깍지 껴 내려 쥐었다. 손아귀에 빨려 들어간 자신의 손을 노려보는 에단이 루크의 다시 몸을 밀쳤다.

“손으로 해 줄 테니까 벌려.”

“아까 그렇게 해서는 오늘 밤이 다 가도 어려울걸.”

가당치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루크는 어디 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해 보죠. 대신 손으로 사정하지 못하면 어디든 대 주는 겁니다.”

착실히 쌓여 가는 조건에 에단은 이물감이 느껴지는 목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다가가 앉았다. 다리를 얽어 마주 앉은 뒤 손바닥으로 감싸 거대한 성기를 쥐어 흔들었다. 루크는 광대를 조금 실룩일 뿐 눈을 아래로 굴리며 조언했다.

좀 더 아래로. 응. 그래요. 적셔서. 침을 묻혀 봐요. 그렇게. 입 안에 물고.

시키는 대로 양 뺨이 불룩하도록 입에 물어 보기도 하고 팔을 흔들었지만 루크는 얼굴이 미미하게 붉어질 뿐 몸부림치는 사정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판판한 아랫배의 불거진 정맥을 보면 참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노려보던 에단이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놀아났으면 이딴 건 간지럽지도 않아?”

“아. 또 나한테만 그런다.”

피식 웃는 얼굴은 가까스로 올랐던 성감마저도 가라앉는 듯 가볍기만 했다. 그래도 귀 끝도 붉어지고 나름 느끼는 거 같은데.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이거 병 아니야?

가슴이 마주 문질러지도록 상체를 가깝게 기울인 루크가 입술을 가까운 곳에 가져와 중얼거렸다.

“섹스를 거기로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다음 답싹 입술을 붙여 잇새를 가르고 들어온 혀에 느릿해졌던 손을 에단이 다시 움직였다. 아래에서 축축한 소리가 울리는 동안, 두 사람은 몇 번이고 혀를 섞었다. 완전히 단단해진 성기는 몇 번 파정할 듯 굼질거리기는 했지만 기어코 참아낸다. 손목이 뻐근할 지경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혀를 섞던 것을 멈추었다. 루크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엄살을 부렸다.

“아. 쌀 뻔했네.”

“꺼져.”

“꺼지라니. 이제 내 차례인데.”

그래. 어디 마음대로 해라. 에단은 어차피 할 것, 그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어디 죽지는 않겠지. 저 빌어먹을…….

하는 생각을 뻔히 읽은 루크가 에단을 다시 밀쳐 눕히며 그 위에 올라탔다. 양 오금을 벌려 위로 당기며, 발갛게 움질거리는 엉덩이 사이로 성기를 느긋하게 움직이며 에단과 상체를 포개어 겹쳤다. 단단하게 뭉쳐진 유두가 힘이 들어간 흉근에 짓눌리자 에단은 밭은 숨을 내뱉었다. 그 숨결이 스칠 만큼 가까이 다가온 루크의 푸른 눈동자는 물기로 번들거렸다.

“이번에는 아래로 해 볼게요.”

“너는 안 대 줬잖아.”

“대신 입으로 해 줬잖아요. 당신은 못 했고.”

잔뜩 물고 빨아 타액이 번들거리는 입술이 가까웠다. 가운데가 부푼 붉은 입술을 바라보며 에단은 굴러가지 않는 머리로 그 이유를 생각하다 급격한 흥분이 몰려왔다. 가슴팍을 지그시 짚어 오는 마디 굵은 손을 보며 에단은 비어져 나오는 헛웃음을 목울대 안으로 구겨 넣었다.

“입도 안 되는데 아래가 될 거 같아?”

“음. 될걸요. 아까 생각보다 말랑하더라고요.”

귓속에 들어온 말을 이해한 머릿속에 불길이 일 것만 같았다. 오른 허벅지를 깔고 앉아 왼 허벅지를 밀치듯 벌린 루크가 허벅지 안쪽을 흐린 손길로 더듬었을 때, 에단은 잠시 깜빡이는 정신을 붙잡지 못하고 순간 눈을 감았다.

잠깐 정신이 흐려진 순간, 아래의 차가운 감촉에 다리가 움찔댔다. 길쭉한 젤 통을 내던진 루크의 허리가 움직이자 격통이 훅 치밀고 올라왔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상체를 조금 기운 루크의 몸이 더욱 가까워졌다. 벌려진 안쪽 허벅지부터의 근육이 땅땅하게 땅겨져 길게 늘려지는 것을 느끼며 에단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되기는……!”

“하. 잠깐만요. 잠깐만.”

“비켜, 씨…….”

“입보다는 괜찮지 않아?”

“그러는 너는.”

이 짓거리를 하며 좋은 거냐, 라고 물으려다가 쾌감이 뚝뚝 뭉쳐 떨어지는 눈동자와 비죽이 올라간 입꼬리의 미소를 보며 에단은 말을 그만두었다. 밀어 내려던 손은 그대로 붙잡혀 손등부터 손마디, 손끝까지 입술이 굴려진다.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을 대하듯 간지러운 애무에 에단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원래, 그래?”

“뭐가.”

말을 하는 사이 달궈진 쇠몽둥이 같은 것이 아래로 더욱 진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형태가 완전히 뭉개져 버릴 것만 같은 기묘한 압박감이 안을 채워 온다.

그 압박감을 떨쳐 내려 허리를 흔들어 움직이려 할 때마다 루크는 몸을 더욱 붙여 밀착했다. 밀어 내는 손을 깍지 껴 붙잡으면서. 문짝만 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살가운 태도에 에단은 사리물고 있던 어금니를 떨어트리며 다시 물었다.

“이렇게 낯 간지럽게…, 흐읍, 하냐고.”

“하하.”

낮게 웃는 웃음소리와 함께 몸이 이어져 배 속이 울리는 것을 느낀 에단이 이를 꽉 물었다.

“아마 아닐걸요.”

“그럼 왜.”

“당신이 내게 얼마나 맞춰 주고 있는지 아니까. 나도 최선을 다해야지.”

욕심껏 들이밀었던 성기는 허벅지 사이 틈을 만들며 조금 물러졌다. 뭉툭한 귀두의 끝이 빠져나가자 한껏 벌어졌던 입구가 다시 다물리고, 그 틈을 다시 느긋하게 문질러 밀고 들어가는 성기가 이번에는 각도를 찾아 들이쳤다.

순간 아랫배에 찾아온 격통에 아랫니를 짓씹으며 목에 핏대를 세운 에단이 생각했다. 빌어먹을. 저 자식과 뒹굴자고 이 짓거리까지 해야 하다니. 애초에 마주 비비는 걸로 끝낼 일 아니었던가.

“윽, 흑.”

“에단, 잠깐만. 괜찮아질 거야.”

“네가 해 보고 말해…!”

“진짜 잘해 줄게요. 정말로.”

허리를 눌러 근육으로 판판한 아랫배를 꿰뚫어 가는 루크는 눈빛과 전혀 다른 밀어를 연신 달콤하게 속삭였다. 나 믿죠? 진짜 잘해 줄게요. 지금까지 항상 잘해 줬잖아.

깔려 있는 이는 죽을 지경이었다. 머리는 연신 어지러웠고 시야는 흔들렸다. 시야가 흔들리는 박자와 아래를 꿰뚫는 감각이 엇박으로 엉망인 이유가 제가 지금 너무 정신이 없어서인지, 다정한 말과는 달리 아래는 제멋대로 굴고 있어서인지 가늠이 안 되었다.

그 와중에 딱딱한 억양이라고는 모조리 죽인 달콤한 밀어가 머릿속부터 명치께까지 진창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중에는 자꾸 달라붙는 말이 귀찮아서.

“흐, 읏. 알았으니까…. 빨리, 끝내.”

“빨리 안 끝내려고 이러는 거잖아.”

그 말과 다르게 오가는 허리 짓은 조금 더 빨라졌다. 안을 쪼갤 듯 들어오는 성기가 벅차서 에단은 중간부터인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여 손가락을 더듬어 내려갔다. 반쯤 서 흔들리는 제 성기를 쥐어흔들다가 성기가 들이닥칠 때마다 불룩하게 붓는 것만 같은 밑에 손가락을 내렸다.

믿을 수 없게 벌어진 밑으로 굼질거리며 박혀 오는 성기의 밑동을 더듬자 위에서 옅은 탄성이 터졌다. 낮은 숨과 함께 눈매를 한껏 찡그린 루크의 뺨이 마주 비벼졌다. 그런 로맨틱한 이유가 아니었던 에단이 잇새로 씹듯이 내뱉었다.

“그, 흣…, 으. 떨어져, 좀……!”

“만져 주길래 그랬어.”

“거기서, 더, 흣, 박으면……. 후…, 죽여 버릴 줄 알아.”

“아. 그런 거였어?”

“그게 아니면. 읏,”

“알았어요. 단단히 잡아 줘.”

엄지와 검지로 붙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손가락을 모두 동원해 루크의 굵은 성기의 밑동을 붙잡아야 했다. 오히려 박히는 깊이를 제어할 것이 생기자 루크는 더욱 힘을 주어 허리를 내렸다. 손으로 만든 고리를 짓누르며 억센 음모가 손샅 사이를 간지럽히는 감각마저 늘었다. 에단은 입을 크게 벌렸다가 이를 꽉 물며 몸을 경직시켰다.

안의 내벽이 좁게 들러붙어 올라오는 고통에도 루크는 태연히 웃으며 붉게 달아오른 귓불을 입 안에 넣고 씹었다. 쪽 하고 들러붙는 입술의 소리가 귓바퀴를 크게 울렸을 때, 에단은 쑥 뽑힌 성기를 뒤늦게 느꼈다. 툭 툭 떨어지는 정액의 내음이 물씬 풍긴다.

밑을 보니 울컥 솟고 있는 정액이 온 아래를 마킹하듯 흩뿌려지고 있었다. 아랫배부터 곧게 선 제 성기에 벌름대는 요도구를 문지르더니 손등으로 반쯤 가려진 회음과 열상으로 벌름거리는 입구에까지 대고 정액을 싸 젖힌다. 절정이 얕게 밀려드는 감각에 에단은 몸서리치며 허리를 위로 약간 물렸다.

정액이 조금 머금어져 있던 구멍에서 울컥 쏟아 내리는 것을 보며 루크는 다시 두둑하게 성기를 부풀려 나갔다. 한껏 벌려져 있던 왼 다리를 들어 루크의 단단한 아랫배를 밀어 내 버린 에단이 몸을 모로 눕히며 마지막 경고를 했다.

“더 이상 하면.”

“죽여 버린다고?”

“내가 죽을 거 같아.”

“더 무섭네.”

모로 눕혀진 몸 위로 드리워진 체온은 다행히 웅크린 어깨의 가장 윗부분을 쪼듯 입 맞출 뿐이었다. 에단은 혼곤한 정신에 눈을 감았다. 잠이 들려 할 때마다 엉덩이에 단단히 물려지는 성기나 손아귀를 가져가 제 성기를 문질러 대는 루크의 행동에 가끔 흐리멍덩한 눈을 떴다. 다행히 그 이상의 접촉은 없었기에 에단은 가물거리는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따뜻한 온수가 전신에 감긴 듯 안온한 감각 사이로 깃털 같은 쾌감이 심장을 간지럽게 군다.

턱을 쥐어 혀 끝을 간지럽히는 키스가 불편해 고개를 돌리자, 따라붙은 입술이 속삭였다.

“내일 뭐 할까요.”

“……갑자기 그건 왜.”

“아침마다 뭐 했었어요?”

“러닝.”

“패스.”

물을 때는 언제고 잘라 내는 목소리가 단호했다. 에단은 졸린 와중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피식거리면서도 눈을 치켜뜨자 루크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잠시 생각하는지 기울인 이마에서 금발이 흐드러지게 흘러내린다. 귓가에 감미로운 목소리가 감겨든다.

“내일 아침에 테니스 어때요.”

‘러닝과 다를 게 대체 뭐야.’라는 말을 마저 뱉지 못하고 고개를 시트에 묻은 에단은 눈꺼풀을 다시 뜨지 못했다.

***

땅-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연두색의 공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포물선을 그려 푸른 하늘을 날아 떨어진 공은 루크가 휘두른 라켓에 맞아 다시 한번 솟아올랐다. 이번에는 오른쪽 끝을 파고드는 것이 뻔히 보였다.

왼발로 바닥을 박차고 달려 나간 에단이 오른팔을 힘껏 휘둘렀다. 탕, 하고 라켓의 끄트머리에 묵직하게 맞은 공이 아슬아슬하게 넘어간다. 손끝의 희열이 무색하도록 그다음. 가볍게 넘어온 공이 코트의 왼쪽 맨 끝으로 가 통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에단은 그 공을 노려보며 라켓을 꾹 쥐었을 뿐이었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심판이 네트 옆에서 큰 목소리로 루크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렇게 크게 외치지 않아도 결과를 안다며 한마디 해 주고 싶었다.

에단은 다가와 내밀어진 손을 네트 위로 맞잡았다. 큼직한 손바닥에는 열기가 그득 고여 있었다.

“테니스 잘하네요.”

“그쪽이야말로.”

에단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매번 코트의 끝과 끝을 질주하게 하는 솜씨가 기가 막혔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어젯밤 별일을 겪은 제 몸 상태는 좋다고 할 수도 없다.

그 점이 바로 이 경기에서 가장 공평하지 않은 점이었지만… 굳이 그것을 지적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대하는 게 낫다. 경기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게 중심을 낮출 때마다 느껴지는 둔통에 에단은 생각해봤다. 혹시라도 어젯밤 한 번 뒹굴었던 걸로 루크가 자신을 소중한 레이디처럼 대했으면… 그 순간 라켓이 맞춘 것은 공이 아니라 사람일 뻔했다.

하지만 역시 어젯밤 그 잠자리만 아니었다면 이런 공놀이 따위는.

자신의 승률을 가늠하던 에단이 손가락을 부러뜨릴 듯 강하게 마주 잡았다. 루크는 피식 웃으며 오히려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마치 항복이라도 하는 양.

되는 대로 힘을 주었던 에단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붙잡힌 루크의 손을 놔주었다. 마디마다 희게 질렸던 손에 이제야 피가 돈다.

“미안해요.”

별로 미안해 보이지 않는 어조의 사과에도 루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기였으니 진 게 분할 수도 있죠. 이해해요.”

“이게 언제 내기였어?”

“아까 말했잖아요.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는 거 어때요? 라고.”

1세트의 첫 서브를 넣기 직전 루크가 한 말이었다. 거기에 무슨 대답을 하기 전에 자기가 냅다 서브를 때렸던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내기야.”

“기분 나쁘면 없던 걸로 하고요.”

“기분 나쁠 일이 뭐가 있는데?”

“에단이 졌으니까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라켓을 내려 두며 루크의 어깨를 툭 밀어 낸 에단이 먼저 코트를 벗어났다. 걷다가 거대한 그늘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따라오는 루크를 힐끔 보며 물었다.

“소원이 뭔데?”

“기분 전환이요.”

어제와 산 중턱에서 했던 말과 같은 말이다. 설마 싶어 노려보자 이번에는 루크가 에단의 어깨를 툭 치고는 다시 앞서나갔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다.

테니스에 이어 남은 기력을 섹스에 모조리 털어 낸 몸은 다음 날 아침 찬란한 스위스의 햇살을 받으며 늘어져 있었다.

에단은 눈동자를 굴려 자신의 헐벗은 몸을 보고는 대충 손을 움직여 아랫도리만을 시트로 가린 채 다시 눈을 감았다. 부주의하게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침대 곁을 지나치지만 않았다면 수면으로 빠져들기에 충분한 피로였다. 정신과 육체의 모든 피로가 누적된. 그것도 하루가 아닌 이틀 차의.

침대맡에서 물씬한 비누 내음이 풍겼다.

오늘도 가운을 열어젖힌 채 스트립쇼를 하는 거나 다름없이 걸어온 루크는 에단을 향해 물을 한 잔 내밀었다. 밀어 낼까 하다가 물을 보자 타들어 가다 못해 들러붙은 것만 같은 목구멍이 느껴졌다.

몸을 조금 일으켜 물잔을 받아 들었다. 에단은 저 커다란 덩치가 눕는 데도 흔들림 하나 없는 침대 매트리스에 감탄하며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루크가 물었다.

“오늘은 뭘 할까요.”

“별장 주인이 알아야죠.”

“그럼…….”

물방울이 묻은 입가를 제 손으로 훑어 주던 루크가 말했다.

“이 짓이나 계속할까요.”

“꺼져.”

까딱일 기력 하나 없는 손을 저은 뒤 에단은 머리 뒤로 팔을 괴어 자세를 바꾸었다. 포뮬러 원 드라이버가 되기로 결심하고 고카트를 탔던 네 살부터 이렇게 늘어져 지내 본 역사가 없었다. 마치 침대가 몸을 아래로 잡아채는 것만 같다.

더 이상 방만할 수 없게 몸을 늘어뜨린 채 에단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바로 했다. 그 몸짓을 따라 목선이 유연하게 길어지며 가슴팍이 한 번 벌어졌다가 다시 반듯해진다. 루크는 그 몸짓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곧은 어깨와 길쭉한 골격 사이마다 얇게 들어찬 근육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형을 이루고 있었다.

입 안이 빠듯하게 당기는 것을 감내하며 루크가 잠자코 있는 사이 에단이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기껏 사람을 부르길래 뭐 할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있었죠. 내 사백만 달러짜리 드라이버가 이 휴가를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했거든.”

“더 비싼 리암부터 신경 쓰는 게 어때.”

루크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는 것보다는 흘려듣는 의도가 명백한 태도였다. 대신 가슴팍을 가로지르듯 손가락을 그어 올렸다. 눈가를 간질이고 있던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긴 뒤 내려갔다.

손을 뻗어 치우려 해도 눈가에서 재빠르게 내려간 손가락이 이번에는 턱 밑으로 내려간다. 쇄골을 간지럽히고, 가슴팍을 다시 덧그리는 손장난에 에단은 실없이 지어지는 웃음을 잇새로 눌렀다.

“그만. 치워. 간지러워.”

“그래요. 그만.”

“치우라니까.”

“가만있으라면서요.”

그리고는 가슴팍을 꾹 누르는 손가락을 고집스레 버티는 것이었다. 그 뻔뻔한 손목은 팔씨름을 하듯 힘겨루기를 하고 나서야 살갗에서 떨어졌다.

내쳐진 자신의 손을 보던 루크는 풀 죽은 척 느슨한 눈매를 내리깔았다. 마치 대영 박물관에 진열된 조각상과 같이 근사한 외양으로 제법 처연한 모양새를 잘 구현해 내는 모습에 에단은 할 말을 잃었다.

“당신 참…….”

“왜요.”

“아니야.”

“생각한 대로 편하게 말해요.”

바로 이런 점이 종잡을 수 없다. 어느 순간은 가늠할 수 없게 살갑고, 그러다 훌쩍 떠나면 연락 하나 없다. 제멋대로 거리를 늘리고 줄이는 태도가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느 사람보다도 능숙하고 거리낌 없다. 마치 상대의 마음과 감정 따위는 자신의 삶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더더욱 응하면 안 될 것만 같았고, 반대로 가벼이 만나는 데에 있어 마음의 짐이 덜어지기도 했다. 그래. 그런 감정이다. 에단은 애매모호한 감정의 실체를 드디어 깨달았다.

헐벗은 루크의 단단한 어깨에서부터 시선을 미끄러트리며 생각했다. 루크 린드베르그. 팀의 오너. 유럽 사교계의 유명 인사이자 몇몇 전 연인들은 진저리 치며 개자식이라고 일컫는다는. 뒤의 정보는 딘이 전해 준 것이었으므로 아직 검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자신과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 인물임에는 확실하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겠고.

“정말 왜 불렀던 겁니까. 이러자고?”

“이럴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팽팽한 피부의 아래 늑골을 슬쩍 건드려 보던 손이 찍어 내리는 팔꿈치에 눌렸다.

치워진 손이 다시 꾸물꾸물 올라올 기미가 보였다. 쳐 낼 기회를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던 에단은 순간 물어 오는 질문에 타이밍을 놓쳤다.

“에단. 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갑자기?”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질펀하게 뒹굴었던 침대 위에서 상대에게 듣기에는 조금 어색한 질문 아닌가. 이건 또 무슨 의도일까. 뺨을 긁적이던 에단은 순순히 내뱉으려던 속내를 일부러 꼬았다.

“지적인 스타일이요. 자기 일에는 늘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사람.”

“뭐 그런 스타일을 좋아해요.”

“당신 비서 같은 사람이나.”

“사라?”

에단도 그저 떠오른 대로 지껄인 것뿐이었다. 주변에 지적이라 칭할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은 덕분이었다. 대답하고 나니 변명해야 할 것 같았다.

루크는 퍽 애석한 일이라는 듯 눈썹을 눕히며 대답했다.

“사라는 결혼했어요.”

“알아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

“승산 없을걸요. 주말마다 남편에게 달려가던데.”

“알았다니까?”

“사라의 남편이 당신을 고소하면 난 전심전력을 다해 도울 거야.”

“그냥 예시라고. 예시 몰라?”

시답잖은 이야기는 상상 이상으로 길어졌다. 루크는 몇 번이고 자신의 비서에 대한 정보를 쏟아 내더니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안 할래요?”

에단이 이 별장에 온 뒤 들은 말 중 가장 상식적인 말이었다. 늘어져 있던 그는 급격한 허기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시간이라고 부를 만한 시간을 보낸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저 에너지가 떨어지면 가져다 먹은 정도의 허기 해결이 전부였지.

길게 뻗어진 복도를 걸어 나가니 나온 식당에는 이미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열댓 명이 앉을 만한 식탁에 루크와 단둘이 마주 앉은 에단은 접시에 나와 있는 빵을 하나 씹어 보았다. 아직 미약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버터를 발라 마저 씹으며 물었다.

“누가 왔다 갔나 보네요.”

“계속 드나들었죠.”

“계속?”

올라간 말꼬리만큼 눈초리가 올라갔건만 루크는 태연하기만 했다.

“내가 가져다줬던 빵을 데운 사람이 있겠죠?”

“그 손은 직접 데울 줄을 몰라?”

“아는데 다들 내게 기회를 안 주더라고.”

빵을 크게 씹으며 덧붙이는 말에 에단은 황망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별장의 티끌 하나 없는 청결함이 갑자기 심상찮게 보인다.

빵을 방금 집어 들었던 접시의 옆을 주시했다. 새까만 대리석의 반질반질한 면 위로 자잘한 빵가루가 무수히 흩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주변의 먼지 하나 없는 비정상적인 깔끔함. 바닥에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청결함과……. 그렇다면 방을 청소하거나 시트를 치운 것도…….

새까만 속눈썹이 팔락이더니 눈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더욱 사나워진 표정에도 상대는 태연하기만 했다.

“어디다 이야기할 사람은 없어요.”

“그래도.”

“그들이 쓴 계약서 볼래요? 무슨 말이라도 지껄이면 어떻게 되는지.”

상대가 개의치 않고 빵에 버터나 듬뿍 올려 먹는 모습을 마주하고 있으니 의욕이 꺾일 수밖에 없었다. 에단도 결국 빵을 따라 찢어 버터를 한 면에 듬뿍 발랐다. 입 안에 구겨 넣으며 생각했다. 하긴. 이만한 규모를 관리하는 직원 하나 없는 게 더 말이 안 될 일이었다. 다만.

“인기척이 하나도 없길래 몰랐죠. 하긴. 드나드는 사람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

“평소보다 줄인 건 맞아요. 휴가 때는 사람 보는 게 귀찮아서.”

에단은 그 말에 홀로 생각했다. 나는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홀로 콧잔등을 멋쩍게 긁적이다가 그만두었다.

루크는 눈이 마주치자 윗입술에 약간 묻은 버터를 붉은 혀로 핥아 내며 씨익 웃었다. 묵묵히 빵을 씹다가 그 모습을 본 에단은 고개를 조금 돌렸다. 뚜렷한 의도를 가진 저런 플러팅을 볼 때마다 여전히 적응되질 않는다.

입 안에 다시 빵을 밀어 넣으며 주제를 바꾸려 했다. 식당의 커다란 창 밖 넓고 광활한 들판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은 나가기 귀찮은데.”

“여기 있죠. 볼만한 게 몇 개 있을 겁니다. 인터넷도 연결되어 있고.”

“볼만한 거 어떤 거요.”

“영상이나 뭐든지. 영화관이랑 비슷하게 해 뒀거든요. 먹고 가 보죠.”

영화관처럼 해 두었다는 말은 과장된 설명이 아니었다. 조도가 낮은 어두컴컴한 미디어실로 들어간 에단은 가르쳐 주는 대로 벽의 터치 패드를 조작해 영상을 켰다. 그 와중에 등 뒤로 다가온 루크는 가슴이 닿을 것처럼 지나치게 가깝게 섰다. 몸을 완전히 겹친 후로 루크는 거리감이라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에단은 왠지 지는 것 같아 의식하지 않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버튼 말고. 여기.”

오른쪽 귓불을 간질이는 숨결이 더욱 깊어졌다. 손등 위 힘줄을 쓸어 올린 손가락이 마디 사이로 파고들며 버튼을 꾹 누른다. 숨을 꾹 들이켰던 에단은 뒤에서 손가락으로 쓸어 올린 자리를 거푸 쓸어내린 뒤 자리로 먼저 가 버렸다.

구비되어 있는 영화 리스트를 한참 보던 에단이 플레이한 것은 과거 포뮬러 원 챔피언의 다큐멘터리 영상이었다. 대체 뭘 고를까 싶어 팔꿈치에 머리를 괸 채 바라보고 있던 루크는 상영되는 영상에 기가 막혔다. 그러면 그렇지. 에단은 자신을 보며 피식거리는 것을 뻔히 보고도 반응하지 않고 차분하게 자리에 앉았다.

하나의 선을 따라 그어 가듯 연이어 커브를 돌던 레이스 카 중 한 대가 추월을 시도하다가 바퀴가 스친다. 그대로 함께 서킷을 이탈해 방호벽에 처박히는 것을 보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에단은 무심코 옆을 보았다.

옆에 앉은 루크가 제 얼굴을 흥미로운 레이스처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조금 멋쩍은 기분에 에단은 얼굴을 한 번 손바닥으로 문지른 뒤 물었다.

“왜 그렇게 봅니까.”

“안 무서워요?”

“뭐가요.”

“사고.”

“몇 번째 받는 질문인지 모르겠네.”

“몇 번쯤인데?”

“방금 백 번은 확실히 채웠을걸요.”

“그래서. 대답은?”

“무서우면 그날 당장 은퇴나 해야죠.”

“정말?”

“아직은 아니지만.”

에단은 아까 가져온 감자칩을 씹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공포가 단 한 순간도 엄습하지 않는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다. 미친놈처럼 달려드는 레이스 카와 바퀴가 라인에서 엇나가자마자 들이닥치는 방호벽까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리타이어를 하고, 충돌을 하는 때에도 한 바퀴라도 더 굴려 프론트 윙이 피니쉬 라인을 어떻게 먼저 돌파하게 할지 궁리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직 한참 멀었다.

에단의 순순한 대답을 들은 루크는 홀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짱을 끼고 앉았다. 사고 장면이 불편한 건가 싶었지만 이제 와 배려하기에는 이미 서킷에 와 몇 번이고 차가 처박는 것을 보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 기색을 눈치챈 듯 루크가 말했다.

“사고 좀 본다고 내가 갑자기 이상하게 굴진 않아. 내가 거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 프로그램이 몇 개인지 상상도 못 할걸.”

“그래도 불편하면 말해요.”

“내 트라우마는 사고 때문이 아니라 그 사고를 계속 내 앞에서 지껄이는 놈들 때문에 생긴 거라 괜찮아요.”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공연히 더 묻는 것이 실례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던 에단은 루크의 손을 덥석 잡아 한번 꽉 잡았다가 놓은 뒤 영상을 바라보았다. 그다음 루크는 에단의 귓불이 달아오를 때까지 집요하게 얼굴만을 응시했다.

영상이 종료된 뒤 에단은 아직 낯선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 보았다. 제대로 연도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 영상은 1990년에서 멈추었다. 최대한 보존되었음에도 노이즈가 낀 흐릿한 그랑프리의 경기가 플레이되었다.

곁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루크가 물었다.

“이런 구닥다리 영상에서도 배울 게 있습니까?”

“배울 건 별로 없죠.”

“그럼 왜 봐요.”

“그냥……. 아버지도 볼 겸 틀어 보는 거죠.”

루크는 짧은 침묵 뒤에 팔짱을 풀고 영상을 응시했다. 어느 더운 여름날인지 영상 속의 남자들은 소매통이 큰 반소매 티셔츠가 대부분이었고 간혹 웃통을 벗은 관객도 보인다.

침묵의 이유를 눈치챈 에단이 뒤늦게 덧붙였다.

“큰 의미를 갖고 보는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그럼 왜 보는 겁니까.”

“당신이 물으니까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때마침 출발 신호를 받고 떼 지어 출발하는 레이스의 스타트 장면에 잠시 시선이 팔렸던 에단이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왜 레이스를 시작했는지.”

랩 타임을 기록하며 한 바퀴를 돈 레이스 카들은 다시 똑같은 서킷을 달려 질주한다. 쉽사리 나오지 않는 대답을 루크가 예상으로 덧붙였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나 보네요.”

“별로. 기억이라고는 집에 가고 싶다는 나를 번쩍 들어 고카트에 태우던 것밖에 기억이 안 나는걸요.”

“집에 가고 싶다면서 왜 끝까지 탔어요.”

“형제 중 내가 가장 잘 탔거든.”

“아하.”

“아버지를 동경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빌어먹을 형 놈들보다 내가 제일 잘 탔어요. 그놈들이 나보다 늦게 결승선을 통과해 악다구니를 쓰는 꼴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렇게 계속 이겨 먹은 것뿐이죠.”

“귀엽네.”

“그때 그 꼴을 봤으면 절대 그런 말은 절대 안 나올걸. 재능이 가장 나으니 아버지는 자기가 가졌던 배경을 그대로 내게 물려준 것뿐이죠. 그냥 그게 다예요.”

“그래도 사이가 좋았던 거 같은데요. 이렇게 영상에서 눈을 못 떼는 걸 보면.”

“그쪽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아 사업을 물려받았나 보죠.”

순간 허를 찌른 질문에 대답은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코너를 통과하는 레이스 카에 정신이 팔렸던 에단은 길어지는 침묵에 시선을 온전히 떼어 내 곁을 돌아보았다.

허벅지 위에 올려진 커다랗고 긴 손 위로 힘줄이 짙게 솟았다가 일순간 사라진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

단정하게 깎인 손톱이 톡톡 허벅지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갑자기 조용해진 루크를 살피느라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에단이 물었다.

“왜 그래요.”

“그냥.”

골몰하던 루크는 생각을 짧게 마무리한 뒤 싱긋 웃었다.

“워낙 좋아하길래 특별한 이유가 있는 줄 알았죠.”

“세상 모든 일에는 대부분 이유가 없어요.”

“그럼 왜 하는데요.”

“그냥 하는 거죠.”

에단은 셀 수 없이 보아 섹터의 기록마저 암기한 트랙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같은 트랙을 수십 번 도는 것처럼 그냥 하는 겁니다. 그게 전부예요.”

“그런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나.”

“글쎄요. 이미 하고 있어서 모르겠네요.”

아버지와의 사이가 별로였다 말한 에단은 시선을 돌렸다. 소년 같은 눈동자로 흐릿한 화질의 경기만을 그때부터 쉼 없이 바라보았다. 창백한 어둠 속에서도 생기로 깜빡이는 눈꺼풀을 루크는 오래도록 응시했다.

영상이 끝난 뒤 그날 내내 주제는 레이싱에 대한 것이었다. 루크가 가끔 자신의 무식을 가감 없이 뽐낸 덕분에 설명하던 에단의 말이 길어져 하루를 꽉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느새 사람이 다녀갔는지 모를 주방에 차려진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와 함께 와인을 마실 때까지도 루크는 성실한 팀의 오너인 양 에단이 레이스 카에 대해 늘어놓는 의견을 듣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말했다.

“결국 종합해 보면 린드베르그에서 보낸 엔지니어들은 구제 불능에 이해도도 떨어져서 차의 개발을 막고 있다는 뜻이네?”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어?”

“말이 그렇잖아.”

“물론 밸런스를 맞추는 데 엔지니어 사이의 불화만이 문제는 아니죠. 일단 지금은 어떻게든 의견이 합치될 때마다 좋은 쪽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삐끗할까 걱정된다는 것뿐이에요. 물론 문제는 타이어에도 있고 날씨에도 있고. 가끔은 나에게도 있고.”

“자기도 넣어 주는 거야?”

“뺄 순 없죠.”

“생각해 보니 몸 관리는 잘하고 있어요?”

루크는 떳떳하게 시선을 드러내며 에단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받아 보잖아요.”

“나 휴가에는 안 받아 봤잖아. 코치에게 보고한 거 없으면서.”

“뭐. 보다시피 이렇습니다만.”

“음? 나는 잘 모르겠는데.”

에단이 양팔을 벌려 건성으로 가슴을 쭉 폈다가 마는 제스처를 보고 루크는 천연덕스레 고개를 갸웃거렸다.

“벗어 봐요.”

얇은 유리잔이 입가에서 떼어지고 나온 발언에 에단은 순간 그를 빤히 응시했다. 직선적으로 꽂혀 드는 검은 시선에도 루크는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외설이라곤 보이지 않는 푸른 눈동자에 에단이 도리어 머쓱해졌다.

“벗어 보라고요. 시즌 초반보다 근육이 좀 빠진 것 같던데.”

“계속 봤잖아.”

“계속 안 보였죠. 어두워서.”

지금의 표정은 매일 재는 자신의 신체 정보를 모조리 받아 볼 것이라던 첫 미팅에서의 표정과 똑같았다. 그때도 저렇게나 상식적이고 신념을 가진 표정으로 온갖 인권 침해적인 조건을 줄줄 내뱉었었다. 에단은 자신의 신체 치수를 떠올리며 느린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래도 이번 휴가 들어서는 조금 괜찮아졌어요.”

“시즌 초기에 비해서는 줄어들지 않았나.”

실제로 줄어든 1, 2kg에 대한 지적이 들어오자 에단은 할 말이 없어졌다. 기어코 보아야 성에 차겠다는 표정이다.

그런 생각에 쐐기를 박듯 루크는 싱긋 웃어 보였다.

“내가 사백만 달러를 지원한 몸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할 수 있잖아요.”

그래, 끝장을 보겠다는 거지. 그의 시선 앞에 전시되듯 천천히 몸을 일으킨 에단은 의자의 팔걸이에 한쪽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코튼 셔츠의 밑단을 양팔로 교차해 잡아 천천히 끌어 올렸다. 얼굴을 쓸고 올라가는 천의 부드러운 감각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자 벗은 상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이제 와 부끄러움 타기에는 뭘 알고 묻기도 하는 데다 무엇보다 며칠 내내 보여 주기도 했고…….

애초에 드라이버의 수치는 공공재나 다름없었다. 매일 트레이너가 벗은 몸을 보며 체크했고 그 치수는 운전석 제작과 레이싱 슈트 제작에 쓰인 뒤 사방에 공개되어 공식 자료로 쓰였다. 커뮤니티며 F1 팬들은 심심하면 그의 평상복과 레이스복 사진을 전신이 나오도록 비교해 신체적 조건에 대해 말을 더하곤 했다. 팔다리가 긴 편이다. 목 근육을 좀 더 길러야 한다. 그 외에도 더울 때에는 윗옷을 벗고 러닝하는 등 제 몸을 굴리는 데에 별 감흥이 없다 여겼었건만.

자신을 여전히 직시하고 있는 눈동자를 마주한 에단은 가볍게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쓸데없는 긴장이 올라왔다. 그 긴장을 풀기 위해 입꼬리를 씰룩이는 것을 본 루크도 비슷한 웃음을 지어 보이려는 것 같았다. 이전보다 팽팽하게 입술이 당기는 미소였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루크가 다가왔다. 천천히. 오면서 플로어 스탠드를 끌어다 가까이 두기까지 했다. 조명 아래 드러난 드라이버의 완벽한 몸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넓은 어깨를 덮듯이 손을 올린 루크는 손끝으로 가만히 목선을 더듬어 내렸다.

“목이 가는 게 조금 아쉽다고 하던데. 난 잘 모르겠네.”

“그런 건 어디서 봤어요?”

“어디에선가.”

팬들이 약점이라 지적하는 가느다란 목선과 판판하게 어깨를 감싼 승모근을 쓸어내린 손이 날개뼈를 감싼 등 근육의 윤곽을 눌렀다.

다시 돌아 올라붙은 흉근까지 건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대흉근의 가운데에 도드라진 돌기는 연한 붉은색이었다.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가 그 옆에 남은 잇자국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시선이 다시 미끄러졌다. 푹 패어 복근을 드러낸 배와 옆구리의 길고 늘씬한 선을 본 루크가 혀를 찼다.

“확실히 살이 내린 것 같은데.”

“서스펜션 중심축을 맞추려면 더 가벼워지는 게 좋다고 했어요.”

“이미 다른 드라이버들보다 슬림한 편이잖아요.”

피트 개러지에 올 때마다 긁어 대는 소리로 엔지니어들과 팀 크루들의 속을 뒤엎던 것 치고는 굉장히 옳은 해석이었다. 이 자식은 왜 이런 것만 잘 알지? 노려보자 아래까지 미끄러졌던 눈동자가 올라오고 다정히 눈을 맞춘 루크가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에단은 머리카락 아래로 말랑해 보이는 귓바퀴가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전혀 어울리지 않도록.

“아래도 벗어 봐요.”

“아래는 왜.”

“허벅지와 엉덩이가 조금 약해 보인다는 말을 봤거든요.”

“그건 또 어디서 본 거야.”

에단은 순간 잊고 있던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손을 내렸다. 루크는 여전히 사무적인 표정이었다.

빌어먹을. 그래 다 봐라. 다 보고 평가해라, 네 사백만 달러. 그런 로맨틱하지 않은 생각을 일부러 되뇌며 손을 내렸다.

엉덩이 아래로 끌어 내린 회색의 트레이닝복은 부드럽게 허벅지를 통과해 긴 종아리 아래로 떨어졌다. 뭉쳐 쌓인 바지에서 발목을 끄집어낼 때, 루크는 에단의 팔을 붙잡아 옆으로 끌어냈다.

그는 거침없이 미끄러뜨리던 눈매를 검은 드로어즈에서 오래도록 머무르게 했다. 하필 성기의 윤곽이 드러나도록 팽팽한 것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에단이 입을 벌리기 직전 무례하도록 응시하던 시선이 허벅지의 기다란 근육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꽉 짜인 무릎과 그 아래의 긴 종아리에서 가늘어지는 발목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다. 미끄러지는 시선에 발끝이 간질거리는 것 같던 에단이 잇새로 중얼거렸다.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루크는 허리를 숙여 정수리만이 보이는 자세였다.

“다리가 길어서 그렇지 근육 자체는 잘 붙어 있는 것 같네요.”

루크는 뒤로 돌았고 허리를 폈든 무엇을 했든 옷 스치는 소리가 조금 들렸다. 어떤 움직임인지 알 수 없었다. 에단은 목울대를 잠시 울리고는 앞을 빤히 응시했다. 테이블에는 이미 빈 와인 한 병과 거의 바닥을 드러낸 투명한 와인 잔이 보였다. 그 글라스의 반짝거림을 응시하며 그는 홀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알코올 때문이다. 알코올 때문인 거다. 공연히 달아오르는 제 얼굴을 느낀 에단은 훅 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저 빌어먹을 얼굴 때문도 있겠지. 도무지 제 인생에서 이렇게 성감이 쉽게 차오른 적이 없었던 에단은 이 모든 것을 시즌 중의 빌어먹을 금욕과 알코올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저 빌어먹을 얼굴도.

조금씩 발갛게 달아오르던 등을 바라본 루크가 다시 앞으로 돌아섰다. 그의 기대 이상으로 에단의 얼굴엔 군데군데 붉은 열이 들어 있었다. 그 와중에 꼿꼿한 표정을 보던 루크는 진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즐거울 수가 없었다. 아마 올 한 해 중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여실히 드러나는 흥분의 증거인 눈가를 응시하며 루크가 바짝 다가섰다. 서로의 체향이 훅 가까워졌다.

“에단.”

“네.”

“내가 물었던 거 있잖아요.”

“뭐더라.”

“제모 왜 하냐고요.”

그의 손가락이 드로어즈의 팽팽한 밴드를 슬쩍 긁듯이 움직였다. 에단은 그 이야기가 왜 또 나오는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루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냥 공기 저항 때문이라고 해 줘요.”

“대체 거기에 공기가 통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래도.”

실룩이는 광대를 가까이서 보던 루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제 앞에 헐벗은 남자의 시야에 잡히도록. 아주 천천히. 미끄러뜨린 손으로 쇄골 부근부터 복근을 지나 다시 드로어즈의 밴드에 걸렸을 때, 에단이 작은 걸음을 뒤로 벌렸다.

“다른 이유가 있으면 차라리 말을 하지 마.”

그 순간 뒤에 있던 의자에 엉덩이가 채었다. 멈춘 걸음만큼 다가온 루크의 손가락이 팽팽히 당겨진 드로어즈의 밴드 사이에 들어갔다. 안에서 천에 억눌린 채 젖어 있었던 귀두의 반질거리는 부분이 손끝에 걸렸다. 축축해진 매끄러운 살갗을 손가락 끝으로 돌리며 루크의 웃음이 짙어졌다.

“시즌 중에 보고 잘 받아 봤어요.”

“그랬겠지.”

“진짜로 하나하나 허락받는 게 꽤 귀여웠어.”

무슨 변명이든 하려는 듯 벌어진 입술 안에 흥건히 고인 타액을 본 루크의 남은 한 손이 에단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모든 이들이 레이싱에 어울리기보다는 모델에 더욱 어울린다 평가하는 목을 두꺼운 손으로 감싼 그가 고개의 각도를 돌렸다. 맞물리기 직전 다물리려던 입술을 열어젖힌 루크가 힘껏 혀를 쑤셔 넣었다.

다급히 들이쉬려던 숨통이 막힌 에단의 몸이 휘청거리자 혀를 마음껏 쑤셔 안을 문질렀다. 체향보다도 다디단 타액을 들이마시며 한껏 물고 빨던 순간, 루크는 허락이 없었다는 것을 간신히 떠올렸다.

하지만 제 눈앞에 들이 밀어진 광경을 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딴 건 필요 없었다. 눈가를 경련하듯 떨며 제 박자에 맞추어 혀를 섞는 움직임을 느끼며 더더욱 그 사실을 실감했다.

혀를 빠는 동안 엉덩이 아래로 끌려 내려간 드로어즈가 허벅지의 중간에 걸렸다. 제모된 성기와 음낭을 마구잡이로 훑어 오는 손길에 에단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고통과 익숙지 않은 성감이 고양되던 찰나에 휘청이던 몸이 넘어졌다. 뒤로 넘어가기 직전 감싸 안은 등 덕분에 큰 부딪침은 없었다.

부드러운 카펫의 천이 등 뒤에 문질러지는 것을 느끼며 에단은 허리를 흔들었다. 끈질기게 달라붙어 오던 손가락이 성기를 휘감아 흔들기 시작했을 때, 그제야 입술이 떨어졌다.

한쪽 다리를 깔고 앉은 루크는 다물린 입술에서 기어코 신음을 듣겠다는 의지로 곧게 선 성기를 흔들었다.

“우리 팀의 드라이버는 이렇게 완벽하니 문제는 다 엔지니어들 때문이겠지. 좋아요. 다 수용할게요.”

“읏, 흐…….”

“이건 상이라고 생각하고.”

“빌어먹을, 이딴 게 상이라고.”

“맞다. 부드럽게 해야지.”

다시 한번 입술이 바싹 닿을 듯 가까워진 얼굴에 에단이 숨을 훅 들이켰다. 루크는 그저 코끝이 닿도록 얼굴을 바짝 대고는 제 눈동자를 상대의 머릿속에 박아 넣을 듯 응시했다. 번들거리는 푸른 눈동자의 어둠이 깊었다.

뜨거운 입술의 표피가 광대 옆을 지나 귓바퀴를 물어뜯었다. 위아래를 간질이는 감각에 몸을 움츠리려 하자 루크는 아예 제 위를 덮듯이 깔고 엎드려왔다. 아래의 박자는 더 빨라지고 에단의 귓가에는 젖은 소리가 울렸다. 뇌가 녹아나는 듯한 쾌감이었다.

“하, 아…, 으……!”

“난 내 사백만 달러를 확인할 생각밖에 없었는데.”

“거짓, 말……. 마.”

“먼저 여길 세운 게 지금 누구야. 응?”

“네가 먼저, 빤히 봤잖아.”

“아.”

그 항의에 대답하던 루크의 목소리가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젖는 거야?”

그 말에 에단의 얼굴이 터져 나갈 듯 붉어졌다. 당신이 그렇게 보니까……!

“역시 운동선수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하며 푹 한숨을 쉬어 낸 루크의 입술이 목선을 따라 잘게 미끄러져 갔다. 그 움직임을 피해 발뒤꿈치에 한껏 힘을 준 몸이 밀려갔다. 다시 따라붙고, 그렇게 창가 아래 벽에 등을 대고 앉다시피 한 에단의 허벅지를 한껏 벌리며 루크가 다시 자리를 잡아 앉았다. 제 가슴을 빨아 당기는 애무에 깔린 이의 허리가 경련했다.

“아! 흐, 읏…….”

“그냥 즐겨요. 시즌 내내 섹스도 안 했다며.”

가슴 돌기를 한껏 빨아당긴 뒤 혀를 굴리던 루크는 제 높은 콧대를 가슴에 뭉개며 남은 한 손을 뻗어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드로어즈를 내리기도 전에 꺼떡이는 성기는 맑은 물을 흘리며 바짝 서 있었다. 흉흉하게 달아오른 불그스름한 귀두를 본 에단은 이를 악물었다가 다시 놓았다. 바닥을 지탱하고 있던 손을 뻗으며.

“이리 내놔요.”

“뭘?”

“그 빌어먹을… 거.”

“빌어먹을 거라니. 한껏 만져 주고 있는 사람 섭섭하게.”

“제기랄. 이게 무슨 크기야?”

허리를 붙여 오자 맨살이 서로 맞닿았다. 음모 사이를 헤치고 나온 것을 에단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붙잡았다. 손아귀에 쩍 감기는 듯했다.

“읍, 흐……. 읏.”

입술을 다시 깊게 겹친 루크가 성기를 힘 있게 쥐고 허리를 흔들었다. 바짝 붙은 허리에서 쩍쩍 젖은 소리가 울린 순간, 에단은 아프게 뭉쳐 오던 제 배 속의 사정감을 참지 못했다. 몇 발을 튄 정액이 두 사람 사이를 울컥 적셔 나갔다. 허리를 굳히며 덜덜 떠는 것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던 루크는 제 허리를 추어올렸다.

막 사정해 부드러워진 몸을 더욱 벌리며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성기가 마구잡이로 허벅지 안쪽과 음낭 아래를 짓쑤셨다. 에단은 신음도 제대로 뱉지 못하며 울음소리같은 것을 냈다.

“아. 으, 흐……. 잠깐, 만……. 으흣.”

“혹시 전에도 이랬던 놈 있어요?”

그때 심을 잃고 말랑해진 음낭을 주무르던 손이 회음부를 긁으며 내려갔다. 축축하게 젖은 궤적대로 움직이는 손가락과 복근 위로 문질러지는 성기에 신음하던 에단이 외쳤다.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럴 수도 있지.”

“이딴 생각 당신 아니면 아무도 안 해.”

글쎄. 꾸준히 제안이 들어가던 그런 종류의 스폰서들이 다 이따위 생각을 했을 텐데 왜 이렇게 구는 걸까. 당혹이 어리는 눈매를 본 루크는 그 눈꼬리에 키스하며 뒤통수가 뻐근해졌다. 구를 대로 굴러먹는 바닥인 걸 뻔히 아는데 그 와중에 아니라고. 제 밑을 긁어내리는 손가락에 초조한지 몸을 뒤트는 것을 느낀 루크가 다시 엄지와 중지를 동그랗게 말아서는 그 사이로 에단의 성기를 끼워 흔들어 주었다.

앞으로 한참을 더 달래 주고 말랑해져야 겨우 몸이 열린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움직이던 손장난이 제자리를 찾아 갔다고 생각했는지 끊기던 에단의 호흡이 다시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초조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아래의 딱딱한 몸을 짓누르던 루크가 속삭였다.

“손에 힘주고 흔들어 봐요. 응. 그렇게.”

“뽑아… 버리기 전에. 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착실히 손을 움직이는 범위가 넓어졌다. 서투른 손짓인데도 사정이 너무 쉬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문지르던 성기를 배꼽 밑에 꾹 눌러 낸 루크는 그 위로 울컥 정액을 쏟아 냈다. 풋내가 더욱 짙어졌다. 뒤섞인 체향과 풋내를 크게 들이마시며 그는 본능대로 허리를 움직였다.

축축한 소리가 다시 울리고 한껏 벌어진 다리를 움직이던 허벅지 안쪽이 루크의 허리에 길게 문질러졌다. 그곳마저 젖어 미끄러웠다. 제 다리를 어떻게 할 줄 몰라하는 걸 눈치챈 루크가 몸을 더욱더 깊게 눌렀다. 제 위로 실린 무게를 받아 낸 에단의 고개가 조금 틀어졌다. 연이은 사정으로 빠진 기운보다도 손가락이 더듬는 부위가 문제였다.

“흣, 빼라니까.”

“여기 더 좋잖아요.”

안을 긁듯 손가락을 조금 굽혀 눌러 주는 지점에 에단이 허리를 뒤틀었다. 늘씬한 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잠시 상체를 들었던 루크는 도무지 죽지 않는 성기를 상대의 허벅지에 길게 문지르며 입술을 핥았다.

연이은 사정으로 정액이 범벅된 밑, 아까부터 달래고 사정해 넣은 손가락이 이미 세 개째였다. 한껏 벌린 다리 사이를 저의 긴 손가락이 연이어 들어가는 데에도.

“꼭 오늘도 해야겠어?”

여전히 거부감이 어린 눈빛이 번갈아 제 사타구니와 아래를 본다. 자세가 불편해서 더 싫은가. 루크는 딱딱한 바닥을 뒹굴던 에단을 끌어안아다가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공들여 움직였다.

엉겨 붙는 움직임은 새벽이 되도록 계속되었다. 퉁퉁 불도록 빨았던 입술을 다시 핥으며 루크는 허리를 움직였다. 그 사이 루크도 두 번의 사정을 했다. 두 번 사정하고도 이렇게 남의 몸에 처박고 싶어질 줄은 몰랐지만.

아래를 질꺽이는 손가락에 허옇게 엉겨 붙은 정액은 모조리 쑤셔 넣었다. 정액을 묻혀 깊게 쑤셨으니 안쪽마저 벌건 와중에 체액으로 범벅일 것이 뻔했다.

천천히 손가락을 뽑아내자 붉게 벌어져 뻐끔거리는 와중에 희게 엉긴 정액이 밀려 나온다. 빌어먹을. 초조한 욕설을 내뱉으며 루크는 에단의 눈앞에 제 긴 손가락을 보여 주었다.

“보여요?”

마디마다 희게 엉킨 자국을 본 에단이 더 붉어질 데 없이 얼굴을 붉히며 씹어 뱉듯 중얼거렸다.

“눈이 있으면 보이겠지.”

“이미 다 녹여 놨는데 허락해 줘요. 응?”

“……하.”

그 뒤는 또 한국어로 욕설을 내뱉는 거 같았다. 루크는 젖은 손가락으로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덧그리며 만지다가 그 위를 쪽 하고 핥듯이 빨았다. 제 정액마저 빨아 먹는 외설에 기가 막히는지 입술이 닿았던 부분을 이로 씹어 내던 에단이 결국 앓듯이 대답했다.

“다치면 안 돼. 이제 휴가 끝이야.”

“이미 다 풀렸다니까.”

밑을 치대던 거대한 기둥이 제 자리를 잡듯 엉덩이 살을 벌려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적나라한 느낌에 에단이 순간 당황했다. 술기운이 다 가셔 더욱 버겁게 느껴졌다.

“잠깐, 읏, 이. 아……, 흑.”

벌어진 틈을 노리고 밀려 들어온 성기가 두꺼운 부분을 통과하며 예민한 내벽을 쑥 긁어 나갔다. 손가락이 건드리던 부분 위를 밀어붙이는 느낌에 에단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꽉 조여 울렁이는 안을 느낀 루크도 얼굴을 찌푸리며 에단의 팔을 붙들었다.

“에단. 잠깐만, 힘 좀…….”

“네가 해 봐. 이, 읏.”

“살살 하고 있잖아.”

이 빌어먹을 크기에서 살살이라는 개념이 적용되려면 아예 넣지 않고 페팅으로 끝나야 했던 것이었다. 에단은 기어코 제 몸 안에 재차 들어온 타인의 낯선 열기에 입을 뻐끔대듯 벌렸다. 그 위에 잘게 키스하듯 움직인 이의 허리가 다시 한번 길게 움직였다.

퍽, 하고 치받듯 허리를 움직인 루크는 발발 떨리는 몸을 붙잡고 다시 몸을 물렸다. 그와 함께 판판한 뱃가죽이 쑥 내려가는 것을 본 푸른 눈동자에 어떤 희열이 스쳤다.

성기를 완연히 물리고 나서야 다시 엉겨 붙어 오는 몸을 추슬러 안으며 루크가 귓가에 속삭였다.

“살살 할게요. 정말.”

그 말과 함께 다시 밀려드는 성기에 에단이 말을 잇지 못했다. 수십 번을 오가던 성기가 드디어 껄떡이며 안에 길을 냈다. 마주 닿은 가슴이 세차게 문질러지는 감각을 느끼며 에단의 머릿속에 폭죽이 튀었다. 아니, 배 속에. 그것도 아니면 어딘가 분명 터져 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 읏. 흐. 빌어먹을. 아. 아……!”

“이제, 괜찮지?”

“흐읏, 으. 윽, 흐.”

들은 적 없는 신음이 섞이는 것을 느끼며 루크는 눈을 감고 제 허리를 빠르게 추어올렸다. 난데없는 쾌감이었다. 꽉 조이며 밀어 내기만 하던 내벽이 길을 트더니 체념한 듯 성기를 빨아올리는 감각이 뇌를 뒤흔들었다. 마치 당장 싸고 나가라는 것처럼 작정해 빨아들이는 감각이었다.

조금만 더, 더. 한참을 뒤흔들고 물고 빨고 한끝에 겨우 사정감을 해방하며 아래를 짓쳐 눌렀을 때, 그의 눈앞에는 달달 떨며 눈가를 적신 에단의 이지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소리를 지껄여도 무덤덤하던 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모습이 더욱 자극적이었다.

안에서 끄덕이며 파헤치던 성기가 조금이나마 용적을 줄이고 그만큼 정액을 길게 싸질러 댔다. 새로이 길이 트이듯 꾸물거리며 들어오는 점액질의 느낌에 에단은 몸을 떨며 웅크리려 했다. 그런 상체를 덮듯이 다시 안아 오고, 근육질의 어깨에 턱을 댄 에단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빼.”

“알았어요.”

대답을 했으면 움직일 것이지 안에서 다시 부푸는 성기는 제 끄트머리를 여전히 에단의 내장 안 깊은 곳에 처박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꿈질거리는 성기를 느끼며 에단은 잇새로 욕설을 내뱉었다. Shit. 이어 중얼거리는 말은 발음이 뭉개져 루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했다. 그러면서 실린 무게에 다시 한번 아래에서 부스럭대는 몸을 붙잡았다.

“뭐라고?”

“이래 놓고 내일……. 근 손실 그런 거 지껄이지 말라고.”

그 와중에 그걸 따질 여유가 있는 것이 퍽 귀여워 루크는 눈꺼풀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떼었다. 땀으로 젖은 이마를 가로질러 검은 머리칼이 길게 달라붙어 있는 모양새가 엉망이었다.

“내가 손실 낸 건 따지지 않을게요. 마음껏 싸.”

그 말과 함께 에단의 성기가 다시 곧추서도록 루크의 손아귀 안에 쥐어졌다. 다물렸던 입술이 다시 벌어져 신음을 뱉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 섹스는 세 번째에서 멈췄다. 바닥을 구르다가 루크가 테이블을 건드려 와인 잔이 떨어질 뻔한 것을 에단이 발등으로 걷어차다가 깨져 버린 덕분이었다. 파삭 하는 연약한 소리와 함께 떨어진 유리 조각을 보느라 무릎 아래 팔을 걸던 루크의 시선이 돌아갔다. 와인 줄기가 흐르는 발끝을 보며 루크가 붙잡아 핥으려던 순간, 에단이 외쳤다.

“미쳤어? 저리 비켜.”

“뭐 어때요.”

“비키라고. 위험하잖아.”

루크는 옴짝달싹 못 하는 에단을 깔아 보고는 씩 웃으며 혀끝을 내밀었다. 발가락의 끄트머리에 맺힌 붉은 와인 방울이 아슬아슬하게 혀끝을 적시며 사라진다. 발가락 사이 느껴지는 형용할 수 없는 부드러운 감각에 에단이 몸을 옴죽거렸다. 성기를 반쯤 물고 있는 아래가 바싹 조여드는 감각에 루크도 가만히 눈을 찌푸렸다.

“비킬 테니까 그만 조여요.”

“네가 한번 해 보고 지껄여.”

길게 몸에 들어가 있던 성기가 안을 긁으며 빠져나오자 부드럽게 조이는 내벽의 감각이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루크는 허리를 물리며 본능적으로 입맛을 다셨다.

색색 숨을 내뱉을 때마다 맨들한 사타구니 아래 보이는 구멍이 외설적으로 움찔거린다. 지금이 딱 좋았다. 처음의 삽입은 당연히 뻑뻑했고 두어 번은 해야 안에서 치대기 딱 좋은 정도로 내벽이 풀린다는 걸 알았다. 물컹하게 풀린 내벽이 쑤시면 옴죽 빨아들이고 빠져나갈 때는 달라붙는 감각이 따라오는. 반항한 끝에 길든 몸이 쑤셔지는 쾌감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순간 말이다.

아쉬운 마음에 손바닥으로 허벅지의 안쪽을 쓸어 크게 벌렸다. 판판한 아랫배에 핏줄이 얕게 섰다가 가라앉는 그 위까지 쓸어올린 손이 지그시 압박했다. 여기까지 딱. 좋았는데.

눈을 내리깐 루크가 혀를 차며 결국 에단의 몸을 왼쪽으로 돌려 끌어안았다. 다리를 움직이고, 일어나는 것을 도와 품 안에 안은 뒤 바닥을 살폈다.

“오른발 그대로 떼요. 내 발등 위에 올려.”

“너나 비켜.”

“사백만 달러짜리 몸을 두고 그럴 수는 없지.”

“정식으로 따지면 그쪽 몸값이 더 비싸잖아.”

불퉁한 눈으로 노려보는 에단의 시선에 루크는 큭큭 웃으며 윗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내년에 몸값 올려 줄게요.”

“나 아직 재계약한다고 안 했어.”

“안 해 줄 거야?”

루크는 무슨 말에도 개의치 않고 에단의 허리에 단단히 팔을 감은 뒤 다시 발밑을 살폈다. 사방으로 산란한 조각이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젖은 가슴이 문질러지며 사타구니가 스쳤다. 발기가 풀리지 않은 성기가 아랫배를 쿡쿡 찌르는 감각이 어색해 에단은 팔을 밀어 내려 했다. 하지만 루크는 아래를 살피느라 에단의 발버둥을 더욱 단단히 붙잡기만 했다.

팔을 바짝 당겨 허리를 감고, 나머지 팔은 손아귀에 붙잡아 버렸다. 밀어 버릴까 하다가 진짜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에단은 눈을 질끈 감고 루크의 발등에 마저 한 발마저 올렸다. 어깨에 이마를 박자 진하게 뒤엉킨 체향이 훅 풍긴다.

기진한 나머지 에단은 내내 묻고 싶었던 질문을 저항감 없이 내뱉어 버렸다.

“루크.”

“응?”

“그런 일이 있었는데… 포뮬러 원 팀은 왜 산 겁니까?”

운전도 못 하는 주제에. 루크는 여전히 바닥에 집중한 채 입술만을 움직여 대답했다.

“가끔은 극복하고 싶어지기도 하거든.”

***

짧은 여름휴가의 막바지는 밤낮의 구분마저 사라지자 더욱 빠르게 지나갔다. 지붕처럼 드리워진 알프스의 산맥과 장엄한 광경이 이제 겨우 눈에 익을 무렵, 에단은 어느 날 아침 돌연 자신의 캐리어가 처음 보는 검은색의 캐리어와 함께 나란히 거실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광경을 보았다.

그 역시 남이 짜 주는 스케줄과 관리가 익숙한 편이었지만 도무지 루크의 사람들에는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들은 도무지 언제 드나들었는지 모르게 별장을 드나들었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이외에 자신의 존재를 일절 알리는 적이 없었다.

하지만 캐리어와 개인 물건에 손대도 되는지 묻는 정도의 접촉조차 없을 줄이야. 그렇게 생각이 시작되면 어쩔 수 없는 거부감이 든다. 청소가 몰래 이루어진다면 매일 난장판이 되었던 침대 시트라든가 그런 것들은? 콘돔이나 젤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모품이 채워지는 일들에 대해서도.

에단은 차마 상기하고 싶지 않아서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미리 물어봤다고 해서 이 집의 주인이 룰을 바꿨을 리는 없을 것 같으니.

샤워를 더 늦게 마친 루크가 이제야 거실로 걸어 나왔다. 에단이 발치에 놓인 캐리어를 말없이 발끝으로 밀었다. 도르륵 굴러가는 캐리어의 움직임을 따라 보던 루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벨기에 가야 된다면서요.”

“그렇긴 하죠.”

안 그래도 딘이 어제 문자로 신신당부를 해 왔었다.

어디로 갔는지 내 문자에 답장 하나 없어도 이젠 돌아와야 해. 알지? 스파에서 보자.

볼 거지?

팀 회의에는 참석할 거지, 에단?

너 납치된 거야?

무슨 일 있는 거면 아무거나 눌러서 답장만 보내.

벨기에의 고속 서킷 스파 프랑코샹은 에단이 이번 휴가 틈틈이 영상을 보며 머릿속으로 주행 시뮬레이션을 수없이 돌렸던 곳이기도 했다. 그만큼 좋아하는 곳이기도 했다.

조지에게서 전송받은 비행기 표를 확인하던 에단이 눈짓했다.

“당신도 가요?”

“여기 혼자 있기는 재미없어요.”

“그래 보이긴 해요.”

“비서들이 슬슬 시끄럽기도 하고. 레이스 날 봐요.”

“올 겁니까?”

“시간이 되길래.”

“그래요. 스파에서 봐요.”

에단은 자연스럽게 악수를 청했다. 내밀어진 손을 골똘히 보던 루크도 결국 악수에 응했다. 손을 내리려던 에단은 붙잡힌 손을 놓지 않고 여전히 생각에 골몰한 루크의 얼굴을 바라보며 설마 싶어 말했다.

“또 실력 발휘 똑바로 하라느니 그런 말을 할 생각이면 집어치워요.”

“나를 뭘로 보는 겁니까.”

“문자 다시 보여 줘?”

“그건 그런 뜻이 아니었다니까. 어쨌든. 그게 아니라…….”

붙잡은 손의 엄지 위를 느긋하게 문지르던 루크가 가볍게 마주 웃으며 물었다.

“에단. 우리 만날래요?”

“……지금 만나고 있잖아요.”

“이런 거 말고.”

이번에는 더 할 말이 없어졌다.

“…….”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아니, 그게…….”

갸웃 기울어진 루크의 얼굴을 마주한 에단은 기가 차서 대답했다.

“그럴 만하잖아요. 대체 뭘……. 언제부터?”

“당신이 본 그대로. 마음에 들었다니까요. 난 꽤 괜찮았는데. 당신도 그렇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뭐가. 아. 그래……. 그랬죠.”

그래. 마음에 들기야 했지. 그게 어떤 의미건. 에단은 이 종잡을 수 없는 고백을 눈앞에 두고 문득 모나코에서의 첫날을 떠올렸다.

어차피 지나갈. 가벼운 마음의 한때일 뿐. 고작 그런 감정을 두고 진지하게 무언가를 물어보려는 자신이 웃겼다. 그런 생각에 에단은 한 번 웃음을 흘렸다가 의심스레 직시하는 푸른 시선 앞에 입매를 가다듬었다. 어떤 마음이건, 어쨌든 만남을 제안한 사람의 눈앞에서 실없는 웃음을 짓는 행동이 무례하다는 인식은 확실히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때 루크는 꽤 괜찮은 상대였다. 제 입으로 미인이라 지껄이는 말에 큰 반박을 하기 어려운 데다 함께 있으면 즐거웠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곤 했다. 가벼운 장난을 걸어 오면 다른 일을 잊을 수 있었고 잠자리에서는 도무지 본 적 없는 짓거리를 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평소 귀찮게 구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리고 키가 크고 훤칠하며 깎아내린 듯한 골격이 아름다운 남자이기도 했다. 짓누르며 올라올 때에는 묵직한 무게에 몸이 시트 아래로 내리박히는 것만 같은 감각을 주기도 했다. 명백한 남성이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붙잡고 있는 손의 마디가 굵은, 불거진 손목뼈와 손아귀의 힘이 분명한 남자임을 인식시켜 주는.

아니다. 그런 건 상관없었다. 스스로의 개방적인 면모에 새삼 놀라면서도 에단은 다시 생각을 가벼이 했다. 루크와 마찬가지로 생각하자. 그저 흥미 위주의 머리를 굴리지 않은. 만남으로서, 자극으로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오직 지금의 마음이 가는 그대로.

그렇다면 크게 거리낄 게 없었다. 섹스 파트너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상대도 애초에 그 정도의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겠지.

“경기 전에는 섹스할 생각 없습니다.”

“모나코에서 전날 상대를 찾던 건 어디 누구였더라.”

“그건 여자였잖아. 당신 같은 덩치를 상대하다가 다리가 잘못 깔리기라도 하면 브레이크 타이밍이 빗나갈지도 모른다고.”

“그럼 경기가 끝나고는 괜찮다는 거죠?”

“보통 그렇죠.”

어쩌다 보니 대뜸 섹스할 날부터 정한 꼴이 되었다. 이게 맞는 걸까. 에단은 한껏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아마 조지일 것이었다.

풀린 손을 거두자 루크가 양팔을 벌렸다. 가벼운 포옹을 할 듯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웃어 보인 에단은 주먹을 쥐어 루크의 손을 한 번 툭 쳤다.

“잘 부탁해요.”

연인으로서의 인사라기보다는 전장을 함께 나가는 동료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은 태도였다. 얼떨결에 주먹을 쥐어 부딪쳤던 루크는 얼빠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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