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20x4 영국 그랑프리 - 실버스톤 서킷.
트랙 길이 5.891km, 레이스 랩 52, 레이스 거리 306.198km, 높이 변화 ±11.3M, 랩 레코드 1:27.097
목요일. 오전에는 팀과 함께 연습 주행 전 트랙을 돌아 보는 트랙 워킹이 있었다. 에단은 인이 박이도록 외운 실버스톤의 트랙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머릿속으로 브레이크 포인트를 계산했다.
포뮬러 원에 있어 결코 빠질 수 없는 트랙. 벨기에의 스파 프랑코샹이나 이탈리아의 몬차만큼은 아니더라도 실버스톤은 10여 개 이상의 코너에서 225km 이상의 속력을 내어 공략해야만 하는 고속 서킷이었다. 풀 스로틀로 통과해야 하는 곳도 상당하다.
첫 커브인 애비를 풀 스로틀로 달리고 빌리지에서 첫 브레이크를 밟은 뒤 루프에서 가속, 캅스와 마곳에서 잠시 감속, 행어 스트레이트에서 최고속. 각각의 코너마다 붙은 이름을 되뇌며 직접 한 바퀴를 걸은 뒤 피로가 누적된 몸의 상태를 다시 한번 체크했다. 삼 주의 여름휴가 전, 마지막 레이스였다.
이때쯤 되면 모든 드라이버들의 체력은 한계치에 근접해 있기 마련이었다. 그 점을 이미 알고 있던 조지는 말수가 더욱 적어진 에단의 곁을 묵묵히 따르기만 했다. 대신 딘이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에단.”
“응.”
“들었어?”
“뭘.”
“요즘 리암이 자꾸 징징거린다는 거.”
“알아.”
“좀 심각한가 봐. 레이스 엔지니어가 아까 나한테까지 짜증 내면서 지나가더라.”
“뭐가 그렇게 짜증 난대?”
“네 위주로만 우리 팀이 돌아간다고.”
강렬한 볕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려던 에단은 눈매를 가리기 전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딘을 바라본 뒤 새까만 선글라스의 알 너머로 눈빛을 감추었다. 잘생긴 하관을 강조하기에 좋은 모습이었다. 딘은 얕게 휘파람을 불며 작게 속닥거렸다.
“요즘 레이스 카의 세팅이 네게 유리하다고 그래. 그쪽에서는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 초반에는 모조리 리암에게 세팅을 맞추어 주었었잖아. 그렇다고 요즘 개발을 다 네 쪽으로만 몰아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드라이버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냥 모르는 척해 줘.”
그것이 사실이든 피해망상에 불과하든 간에 다들 그랬다. 저 멀리 거리를 두고 걷고 있는 리암과 매니저, 레이스 엔지니어를 한 번 눈에 담은 에단은 관중석의 몇몇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피트로 돌아왔다. 그에게 별 의미 없다 해도 국적이 영국으로 기록되어 있긴 하니 나름의 홈 그랑프리였다.
기대를 떠드는 언론과 팬들의 평가. 그리고 이제는 팀메이트의 견제까지 더해진 모양이다. 각각의 흐름이 휩쓸고 있었지만 에단은 꽤 무덤덤하게 그런 변화들을 넘기고 있었다. 실감 나지 않아 변화에 더욱 둔감하기도 했다.
불만 가득했던 이전 팀에서 보내던 나날이나 지금이나 에단의 마음가짐은 단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다. 그때에도 최선을 다했고 지금도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이렇게까지 현실을 바꾼 것일까. 올해 가만두지 않겠다던 이전 팀 알파 타우리의 레오는 단 한 번도 10위권 안에 들어오지 못해 포인트를 따지 못했다. 절대 강자였던 페라리는 왕좌에서 물러나기 시작한다.
맥라렌, 벤츠, 레드불, 각각의 강팀이 각축전을 벌이는 와중에 헤인즈의 명맥을 이어받은 린드베르그 레이싱마저 10포인트 내로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의 강자로서 언급되고 있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혼란스럽고 환상적인 시즌이었다.
이번에도 어디 왕족이나 영화배우라도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한산해야 할 피트가 벌써부터 북적이고 있었다. 꼭 저를 닮은 금발의 장신 남성과 함께한 루크의 웃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 같다. 그 모습을 저도 모르게 보고 있던 에단은 의식적으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굳이 바라보지 않으려 해도 루크가 있는 곳은 공기의 빛무리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모든 시선이 그곳으로 향한다.
레이스 카에 매달린 미캐닉들을 보던 에단의 시선도 다시 돌아갔다. 마음가짐도, 노력도, 단 하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건만. 팀 하나가 바뀌었다고,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루크의 관심이 쏠린 것만으로도 불리하던 상황이 이렇게나 공평하게 바뀌다니.
심지어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 묻는 놈 때문에 말이지. 에단은 그것이 아이러니해서 팔짱을 낀 채 오래도록 루크를 보고 있었다. 시선을 하나 느끼지 않는 것만 같던 루크는 잠시 뒤 대화를 마치더니 에단을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팔짱을 끼고 기둥에 기대서 있던 에단은 곁에 나란히 선 그를 보고 선글라스를 벗을까 하다가 저쪽에서 사진을 찍는 기자를 보고 그만두었다. 표정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 같았다.
소란 속에서 겨우 귓가에 들릴 만한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어때요?”
“아직 안 달려 봐서 모르죠.”
“이번 그랑프리는 축하로 마무리되면 좋겠네요.”
“축하건 아니건 별 신경 안 쓰잖아요.”
“그렇긴 해요. 난 그때 풀 죽은 것도 꽤 괜찮았어요.”
“대체 누가 풀 죽었었다는 거지?”
“내 포뮬러 원 레이싱 팀의 드라이버가.”
에단이 루크를 노려보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다. 다행히 더 가까이에서 사진이 찍히기 전에 지나가던 딘이 에단에게 확인해야 할 데이터를 넘겨주었고, 그렇게 두 사람의 길게 이어지던 시선을 끊어 냈다.
에단은 토요일 퀄리파잉. 예선에서 세 번째 그리드를 차지했다. 레이스 데이인 일요일. 날은 화창했다.
북적한 인파들을 마주한 에단은 선글라스를 벗어 인사에 화답하며 작년의 실버스톤을 떠올렸다. 영국에 꼭 어울리는 우중충한 빗줄기가 연신 트랙을 때리던 그때를. 올해는 그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맑고 화창하기만 하다.
퍼레이드 카를 타고 트랙을 돌며 팬들의 인사에 연신 화답하던 중 가벼운 인터뷰를 진행했다. 퍼레이드 카가 멈추고, 먼저 뛰어내린 리암이 린드베르그 레이싱의 피트를 향해 홀로 걸어간다. 긴장으로 꼿꼿이 선 등줄기에 카메라의 렌즈가 오래 달라붙는 것을 바라보던 에단도 그 뒤를 따랐다.
리암의 신경질은 극에 달해 있었다. 브리핑을 위해 다가온 듯한 레이스 엔지니어의 말에도 짧게 대답하며 안쪽으로 걸 보고 있던 에단의 곁으로 팀 감독이 다가왔다. 그는 들고 있던 차가운 탄산수를 에단에게 건네며 말했다.
“오늘 컨디션 어때.”
“그럭저럭 괜찮아요.”
에단은 늘 솔직하게 피드백을 진행하곤 했다. 그 꾸밈없는 대답을 들은 감독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려다 말았다.
“너라도 컨디션이 좋아야 해.”
“리암은 왜 저래요?”
“레이스 카에 불만이 좀 있는 것 같아. 최대한 세팅을 조정해 주었는데도 이번 업그레이드 때문에 차가 너무 예민하다고 난리야. 넌 어때.”
“저는 좋아요.”
이번 업그레이드는 온전히 리암만을 위한 것이 아닌 공평한 의견을 반영한 뒤 진행된 첫 대규모 업그레이드였다. 조금만 밟아도 예민하게 나가고 스티어링 휠을 약간만 틀어도 바로 방향을 옮기는 레이스 카가 에단의 스타일에 딱 맞았다. 계산보다 몸의 감각이 우선적으로 나가는 드라이빙에 적합하다.
거기에 대한 리암의 불만을 익히 전해 들은 바 있는 에단은 톡 쏘는 탄산수를 넘기며 감독의 걱정을 흘려듣던 중이었다.
“왜 컨디션이 안 좋아. 잠을 못 잤어?”
“그냥……. 그래요.”
“그냥?”
“한 번쯤은 리타이어 할 때도 되었다 싶어서요.”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예민하니까 잘 나가는데 그만큼 위험한 것도 맞잖아요.”
“지금 세팅 바꿔?”
“아니. 그건 아니죠.”
에단은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그저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지 자신의 감각이 떨어졌거나 실력의 공백이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지나치게 잘 풀린다 싶어 한 번쯤은 문제가 생길 법도 하다는 것이었지.
그간 리타이어를 너무 해서 익숙해진 것일까. 괜한 소리를 했다 생각한 에단은 먼저 자리 잡은 레이스 카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피트의 그늘을 벗어났다. 그 뒤로 매니저 조지와 아직 잔소리를 다 하지 못한 감독이 따라붙었다.
트랙을 울리는 함성과 기계음의 요란한 소음 속에서 에단은 문득 놓친 것을 떠올리며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여전히 눈을 어른거리던 금발은 보이지 않는다. 패덕 클럽에라도 올라가 있는 걸까. 피트의 위, 전면 유리로 넓게 자리를 마련한 VIP석을 힐끔 돌아본 에단은 다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머신에게 다가갔다.
그랑프리 시작 전 예열을 위해 한 랩을 돈 에단의 레이스 카는 세 번째 그리드에 자리했다.
다섯 개의 붉은 등이 켜진 바로 그 순간, 우렁찬 엔진 소리가 사람들의 함성을 묻어 버릴 듯 트랙을 울리며 스무 대의 머신이 동시에 출발했다. 그중에서도 찰나와 같은 시간에 빠르게 출발한 에단의 레이스 카가 앞선 두 대 사이를 빠르게 파고들어 첫 커브를 돌았다. 첫 커브 애비를 풀 스로틀로 파고드는 에단의 귓전에 피트 월의 외침이 파고들었다.
- 잘했어 에단! 그대로 밀어붙여!
두 번째 그리드에서 출발했던 벤츠의 머신이 휠 투 휠에 가깝게 붙었다가 세 번째 커브에서 결국 밀려난다. 트랙 밖 그래블 지역으로 조금 밀려난 머신의 바퀴에서 이는 굉음을 듣고도 에단은 더욱 가속을 밟았다.
그의 앞에는 단 한 대의 레이스 카밖에 남지 않았다. 페라리의 붉은 후미는 가까워질 듯, 멀어질 듯 계속해서 간격을 유지해 나간다. 아무리 처져도 페라리는 페라리. 쉽게 자리를 내어 주지 않는 페라리의 뒤를 쫓아 직선 주로에서 간신히 간격을 유지해 나가는 에단의 귀에 딘의 외침이 들렸다.
- 일단 거리 벌어지지 않게 따라가. 페라리 팀 라디오에 진동이 있다고 불평했어.
“알았어.”
짧게 긍정했지만 그저 페라리의 레이스 카를 따라가는 것마저도 고된 일이었다. 고착화된 순위가 스무 랩가량 이어졌다. 후미에 바짝 따라붙은 레이스 카의 추월을 막아선 것이 세 번이었다. 한 바퀴를 더 돌아 슬슬 피트인 해 타이어를 교체하는 레이스 카들이 늘어나던 찰나, 부름을 기다리고 있던 에단의 귓전에 딘이 소식을 알려 왔다.
- 다른 팀들이 먼저 타이어를 교체해서 지금 뒤에 리암이야.
“그래?”
징징거리던 것치고는 잘 적응한 모양이군. 다시 한번 기어를 바꾸며 스티어링 휠을 돌리는데 다시 딘의 지시가 들렸다.
- 이번 랩에서 타이어를 다 쓰고 피트 인 들어와.
“알았어.”
그렇다면 좀 더 가속을 올려도 될 것이었다. 타이밍을 보며 아끼던 타이어를 마저 소모할 생각으로 커브를 저속으로 돌아 나가던 중이었다. 이어질 직선 주로에서 풀 스피드를 내려던 순간, 갑자기 에단은 앞으로 훅 밀리는 느낌과 함께 위로 솟구쳤다. 레이스 카의 후방이 붕 뜨는 감각에 밀려 몸이 앞으로 쏠린다. 동시에 시야가 흔들리며 믿을 수 없는 굉음이 후미에서 울린다.
시야가 뒤흔들리고 레이스 카는 순식간에 직선 주로의 직전 자갈이 깔린 그래블 지역으로 밀어붙여졌다. 트랙 밖, 자갈에 프론트 윙이 처박힌 채 고개를 숙인 에단은 겨우 몸을 가누게 되자마자 소리쳤다.
“대체 뭐야!”
- 에단, 괜찮아?
“지금 무슨 일이야?”
- 제기랄. 뒤에, 리암이 그만, 아마 너를 추월할 생각이었던 거 같아.
“미친 자식! 나에게 비키라는 팀 오더가 있었어?”
- 아니. 그렇진 않았어.
혹시라도 팀 라디오의 감독이라든가 누군가의 지시가 먹통이 되어, 내 고막이 그 소리를 못 들어 먹기라도 한 것이냐 외치는 에단에게 딘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 아마 리암이 자발적으로 추월하려고 했던 거 같아.
“빌어먹을. 미친 자식.”
- 일단, 괜찮아?
“괜찮아.”
다시 한번 스로틀 패들을 힘껏 밟아 보았지만 먼지를 날리며 레이스 카는 헛돌기만 한다. 발을 까딱거리던 에단은 천천히 힘을 풀고 한숨을 내뱉었다. Shit. 거친 발음과 함께 욕설을 내뱉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거라는 걸 알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스티어링 휠을 뽑아내고, 목을 고정하고 있던 한스를 벗어 낸 뒤 양팔로 머신을 붙잡아 고정하고는 상체를 들어 올렸다. 쑥 빠져나온 그의 곁으로 사고로 인해 저속 주행하는 레이스 카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굉음이 자신을 스쳐 멀리 트랙을 향해 나아간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리타이어의 기분은 엿 같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환호인지 아우성인지 모를 함성을 지르는 관객석을 향해 손을 대충 흔들어 보인 뒤, 걸터앉아 있던 에단은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오는 스튜어드의 손짓에 따라 풀썩 뛰어내렸다.
멀리에서 자신을 잡는 카메라들이 줄지어 눈동자처럼 따라붙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에단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뒤에 처박힌 리암의 머신을 노려보았다. 이미 자리를 비운 리암의 뒷모습이 저 멀리, 방호벽 너머로 멀어진다. 그 뒷모습을 노려보던 그는 이를 악물고는 뒤를 쫓았다.
저 개자식이. 뒤에서 먼저 처박아 놓고는 확인도 안 하고 돌아가?
“한 팀이라는 생각은 대가리가 너무 좁아서 들어갈 틈이 없었나?”
에단이 씩씩대며 저 멀리 멀어지는 리암의 뒤를 쫓는 동안 관객석에서는 격려의 박수와 함성이 연이어 쏟아졌다. 린드베르그 레이싱의 동반 리타이어에 축배를 드는 이도 있겠지만 어쨌든.
타 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들의 앞을 지나 마침내 팀의 피트에 들어왔을 때였다. 헬멧을 벗고 감독과 이야기하던 리암의 앞 문장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하는 말만큼은 똑똑히 들렸다.
“그 순간에는 내가 더 빨랐잖아요.”
“리암. 하지만 난 분명히 팀 오더로 허락하지 않았어.”
“난 추월할 수 있었어. 공간을 내주지 않은 건 에단이었다고.”
에단은 헬멧을 거칠게 벗어 던지며 리암의 뒤로 다가갔다. 일그러지는 에단의 얼굴을 본 조지와 팀 크루들이 먼저 달려들어 양팔을 붙잡은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멈출 수 있었다.
“내 뒤꽁무니나 겨우 따라오던 주제에 추월? 헛소리 지껄이지 마. 개자식아!”
고함을 내지르는 모습이 온 사방의 시선과 멀리 달려오던 리포터들의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다급하게 길을 막아선 크루들이 허겁지겁 가림막을 치던 순간, 뒤돌아선 리암의 핏발 선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언론에 비추었다. 여름휴가 직전 대중에게 마지막으로 노출된 린드베르그 레이싱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