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20x4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 레드불링. (7/20)

7. 20x4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 레드불링.

트랙 길이 4.318km, 레이스 랩 71, 레이스 거리 306.452km, 높이 변화 ±63.5M, 랩 레코드 1:54.619

통산 두 번째 포디움에 오른 에단은 시상식에서 터트린 샴페인으로 머리를 적시고 기자 회견장으로 들어섰다. 린드베르그 팀의 기자 회견은 날이 갈수록 취재의 열기가 더해지고 있었다.

포뮬러 원에 처음 입성한 신생 팀이 첫해에 거둔 컨스트럭터 팀 순위는 4위. 린드베르그에 매각 직전까지 9위와 10위를 왔다 갔다 하던 헤인즈의 믿을 수 없는 성장이기도 했다. 중상위권을 굳히는 성적과 지금껏 실력을 숨겨 온 것만 같이 날아다니는 에단의 드라이빙 실력은 나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플래시가 적응되지 않아 눈에 힘을 주고 있던 에단은 연이은 질문을 듣고 있던 중이었다. 나올 것으로 예상했던 질문이 나왔다.

“에단. 이번 시즌의 실력은 이전까지의 부진을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인데요. 가장 도움이 되었던 건 무엇일까요.”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대로 말을 꺼내려던 에단은 조금 말을 바꾸었다. 아주 조금만. 이렇게 답변한다면 오늘은 어떤 문자가 올지. 이제는 궁금하기도 하다. 에단은 거대한 생물체의 눈동자 같은 카메라를 응시하며 대답을 내놓았다.

“지금까지의 연습도 물론 좋은 성적을 내는 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무엇보다 제게 맞는 레이스 카를 공급해 주는 팀에게 가장 감사하죠.”

그리고 다음 말은 진심이었지만 그래서 더 내뱉기가 어려웠다. 에단은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끌어모아 렌즈들의 어느 사이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원을 아끼지 않는 팀 오너에게도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의 축하 파티는 피트에서 한 번 더 샴페인을 흔들어 따는 정도로 짧게 끝났다. 당사자인 에단이 다음 날 독일에서 린드베르그 모터스의 행사에 참여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팀 빌딩 앞에 준비된 세단 뒷좌석에 앉은 에단은 피로로 녹아내릴 듯한 등줄기를 이완시키며 깊게 기대앉았다.

어두운 오스트리아의 밤거리가 지나가는 차창 밖은 큰 흥미가 일지 않았다. 에단은 휴대폰을 들어 기계적으로 린드베르그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포뮬러 원의 팀 이름이기도 하지만 세간에는 다국적 기업이자 가문의 이름으로서 더 널리 통용되는 이름이기에 기사의 분야가 가지각색이었다.

그중 포뮬러 원의 기사를 골라 제목만 눈에 담던 에단은 의도치 않게 지난 루크의 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미 출장 중이었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미국의 핵심 도시 다섯 곳을 들른 뒤 멕시코로 넘어가는 일정이다. 다섯 개의 대륙을 돌아다니는 그랑프리 못지않은 스케줄이었다.

눈을 감으려던 순간,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또 누군가의 인사말이겠지 무심코 넘기려던 눈동자가 다시 돌아갔다. 에단은 눈동자를 굴려 운전석 옆 조수석에 앉은 조지를 한 번 응시했다. 틀어 둔 노래 박자에 맞추어 흔들리는 머리통이 보였다.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누른 뒤, 방심하지 않고 귓가에 바싹 붙여 하는 말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다.

- 에단?

“예.”

- 인터뷰 봤어요.

“네.”

- 무슨 일이에요?

“사실이니까요.”

눈꺼풀을 느슨히 하자 시야가 좁아진 와중에 흔들림 없는 차의 주행은 침대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그 아늑함에 파고들듯 등을 조금 더 구부린 에단이 낮게 속삭였다.

“내 피드백대로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차를 조정해 줄 줄은 몰랐거든요.”

-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죠. 그런데 그전에는 원하는 대로 안 해 줬어요?

그러니까. 그 절대적인 신뢰가 도대체 믿기지 않는다는 거다. 그 순간 차가 약간의 커브를 돌며 신호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울리는 경적 소리가 두꺼운 차 문 너머로 들렸다.

약간 흔들렸던 균형을 잡는 사이 루크는 그 소리를 용케 캐치한 듯 물었다.

- 어디 가요?

“당신 회사 행사요.”

- 무슨 행사더라.

“가서 손 흔들어 주고 공도에서 차를 몰아 한 바퀴 돌아 달라고 하더군요.”

- 어디서요.

“독일이요. 어디인지는 들었는데 잊어버렸네요.”

- 그래?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했습니까.”

인터뷰에서 언급 한번 했다고 전화가 곧바로 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바쁜 일정을 소화 중인 줄도 몰랐고. 에단이 마주한 루크의 모습은 대부분 한가한 귀족의 하루 같아 보였다.

- 할 말이 있긴 했는데. 보고 말할까 싶네.

“뭔데요.”

- 아주 중요한 일이요.

말하는 어투를 보니 어째 그리 중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딥니까.”

- 방금 독일에 도착했어요. 내일은 본사로 나갈 일이 있어서.

“그 회사 본사가 정확히 어딘데요?”

도무지 검색을 할 때마다 본사랍시고 나오는 위치가 한둘이 아니었기에 되물은 것이었다. 루크는 지난날의 과오를 잊은 듯 담백하게 물어 왔다.

- 괜찮으면 만날래요? 오늘 그랑프리 성적 축하도 할 겸.

루크의 만나겠냐는 제안에 동의했지만, 에단이 생각한 만남의 과정과 현실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통화를 끊고 공항에 도착한 그는 준비된 직원들이 실어 나르는 가방을 눈으로만 확인한 뒤 빈손으로 퍼스트 좌석에 탑승해 독일로 출발했다.

짧은 비행 후 안내하는 대로 공항의 게이트를 빠져나간 에단은 저 멀리 헤드라이트를 짧게 비춘 뒤 다가오는 육중한 차체를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익히 보아 눈에 익었던 그 롤스로이스였다.

차마다 고유의 색을 주문 제작 할 수 있는 롤스로이스를 이렇게 똑같은 크림색으로 바른 인간이 또 있을까. 있다면 그게 더 신기할 일이다. 시선을 모으며 앞에 멈춰 선 차의 조수석이 열린 후, 코가 높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중년 남성이 내렸다. 정중히 인사해 보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에단 한?”

“네.”

“보스께서 보낸 차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래 보이네요.”

“굳이 매니저와 함께 오실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조지는 어디서 묵게 되는 겁니까. 내일 아침 행사에 같이 가려면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좋을 텐데요.”

“행사는 보스께서 다른 드라이버께 연락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드라이버요?”

“린드베르그의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은 린드베르그 레이싱의 두 드라이버 중 누구든 가능하니까요.”

“리암이 갑자기 불러들인다고 순순히 올 인간이 아닐걸요.”

“그 점은 보스께서 이미 해결하셨습니다. 타시면 매니저분을 안내할 사람도 곧 올 겁니다.”

“그럼 난 정말 행사 참여를 안 해도 된다는 거예요?”

“혹시 참여를 원하신다면 보스께 다시 말씀드릴까요.”

“아니요. 잠깐만요. 뭐, 리암이 정말 간다고 했다면 그걸 다시 불러들이는 게 예의 없는 짓거리겠죠.”

애초에 참여하고 싶어 안달이 난 행사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시뮬레이터라도 한 번 더 타고 데이터를 더 받아 보는 게 낫지.

하지만 이렇게 목전에서 일정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행동은 선뜻 받아들이기에 거부감이 든다. ‘잠깐 볼래요?’라는 가벼운 권유에 응했을 뿐인데.

후회해 봐야 이미 늦은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제안을 받았길래 대신하는 자리를 리암이 수락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연락해 내가 참여할 테니 돌아가라는 말 따위를 한다면 더 이상 호의적인 관계는 어려울 게 뻔했다. 게다가 리암은 이미 에단을 슬슬 경계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어지던 생각을 끊어 내며 에단이 조지를 돌아보았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몰라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던 조지가 에단에게 물었다.

“진짜야?”

“나도 몰랐어. 잠깐 보지 않겠냐고 하길래 지금 잠깐이나 내일 볼 줄 알고 알겠다고 한 거거든. 일정을 아예 바꿔 버릴 줄은 몰랐네.”

“저런.”

조지도 알 만하다는 듯 짧은 감탄사를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인 에단은 뒷좌석이 열린 채 지나치게 오래 서 있는 롤스로이스의 주변을 둘러 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중 누군가는 알아본 모양인지 휴대폰을 들어 이쪽을 찍으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된 거 나는 가 봐야 할 거 같네.”

“그런 거 같다.”

“내 참. 푹 쉬고 내일 연락해.”

“그럼 우리 내일 일정은 아예 비워진 거야?”

“지금 가서 물어봐야지.”

조지에게서 가방을 건네받은 에단은 그것을 다시 넘겨준 뒤 롤스로이스의 뒷좌석에 앉았다. 푹신한 시트의 감촉은 온몸을 조여 속도만을 집중한 포뮬러 원의 레이스 카와는 정반대의 감상을 주었다. 더없이 안락하고 고요할 뿐이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체의 배기음을 즐기며 에단은 눈을 감은 뒤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집으로 갑니다.”

그 집도 어디 한둘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알아 봤자 쓸데가 없을 것 같아 질문을 그만두었다. 차는 독일 거리의 길쭉한 회색 가로등이 점점이 밝힌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

어둠에 잠겼지만 거대함이 짐작되는 정문을 통과한 차는 너른 정원의 잔디를 달려 자그마한 분수까지 돌고 나서야 멈춰섰다. 바깥 정경을 본 에단은 홀로 생각했다. 이 정도의 저택은 보통 기부되거나 관광지로 쓰여 입장료를 받아먹지 않나?

무려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너른 부지에 비해 저택은 다소 소박한 3층으로 이루어졌다. 현관이 가운데에 크게 나 있고 양옆으로 창이 줄지어 늘어진 푸른 지붕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지나오던 거리에 흔히 보이던 상아색 벽과 검붉은색의 지붕과는 다른 색채가 고아함을 자아냈다. 쏠리는 시선을 앞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안내를 따라 들어간 에단은 여느 호텔의 로비 같은 홀을 지나 계단을 올라갔다. 발소리가 울리는 복도의 가장 끝 방. 아치형에 가까운 문을 두드린 비서는 안쪽의 대답을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양옆으로 열린 문의 안쪽은 널찍했다. 문의 맞은편, 벽 전체를 차지하다시피 한 거대한 유리창 앞에 서 있던 루크는 아직 통화 중이었다. 바깥으로부터 들어온 가로등의 빛 때문에 창틀의 드문드문한 무늬가 그의 금발과 너른 어깨 위로 번져 가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 느리게 깜빡이던 눈꺼풀의 움직임이 멈추고 짙은 명암의 푸른 눈동자가 문 안으로 들어온 에단을 길게 응시했다. 문 쪽을 향해 잠깐 손짓을 해 보인 그는 목소리를 줄이지 않은 채 통화를 계속했다.

“그렇게 해. 그래. 이제부터는 전화하지 마. 해도 되는데 안 받을 거야. 글쎄. 내일 언젠가는 받겠지. 좋은 시간 되고.”

비서가 나가는 동안 진행되는 통화는 얼핏 들어도 상대에게는 별로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지 않은 대화로 마무리되었다. 짐은 어디로 옮겨진 거지? 확인하려 비서의 뒤를 따라 나가려 했지만 그사이 통화를 마친 루크가 긴 팔을 뻗어 다시 손짓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어느 누가 행사를 취소해 준 덕분이죠.”

“그거 가고 싶었어요? 몰랐네.”

에단은 맞은편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당당한 루크의 태도에 기가 막혔다.

물론 레이스가 끝나자마자 동원되어 하루 내 입꼬리가 경련하도록 웃어야 하는 행사가 좋을 리 없었다. 부정하기에는 너무 명확한 진실이었기에 에단은 순순히 긍정을 내비쳤다.

“좋긴 한데 리암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겠네요.”

“어려울 거 없던데요. 린드베르그의 행사를 대신 참여하지 않겠냐 물었더니 굉장히 좋은 자리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수락하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좋은 일이고요.”

오히려 퍼스트 드라이버인 자신 대신 린드베르그의 행사에 에단이 얼굴을 비치는 상황에 더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안심이었다.

퍼스트 드라이버로서의 입지를 다지던 리암은 요즘 에단에게 불편함을 어필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같은 팀이지만 결국은 경쟁자인 입장이기에 에단은 그런 태도를 그저 두고 보고 있었다. 포뮬러 원에서 팀메이트란 원래 그 정도가 최선인 관계였다.

루크는 창틀에 놓여 있던 샴페인 병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더니 입구를 땄다. 싱그러운 탄산과 과일의 풋내가 알코올 내음과 함께 잔잔하게 공기에 퍼져 나갔다. 에단은 잔에 따라 건네지는 샴페인을 가볍게 한 모금 넘겼다. 더위가 번져 가기 시작하는 밤공기가 이마를 스치는 밤이었다.

풀 내음이 나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샴페인이나 마시는 지금이 행사보다야 확실히 낫다. 한 모금씩 넘길 때마다 눈에 띄게 눈매가 물러지는 에단을 응시하던 루크도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오늘 그가 보러 오지 않은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의 포디움에서 축하를 위해 터트렸던 샴페인과 같은 종류였다.

루크의 손에 가린 라벨을 확인하기 전 맛으로 샴페인의 종류를 눈치챈 에단이 눈을 치켜떴다.

“이거 알고 준비해 뒀어요?”

선선한 의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루크는 큰 의도가 없어 보인다. 에단은 그 사실을 다시 되새겼다.

별거 아니다. 저놈에게는 롤스로이스를 굴려 사람을 마중 나가라 보내는 것도, 남의 포디움에서 쓰인 샴페인을 준비하는 것도 별거 아닌 일이었을 것이다. 그저 준비해 둬, 라는 말 한마디로 이루어진 준비일 뿐일 거다. 어쩌면 유능한 비서가 알아서 맞추어 준비해 둔 것일 수도 있다.

괜히 길어진 생각을 가볍게 하기 위해 짧게 깎인 잔디를 노려보던 에단은 눈알이 뻐근해질 지경이 되어서야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레이스와 포디움, 셀러브레이션 행사까지. 빡빡한 일정을 거친 머릿속이 느릿하게 굴러간다. 샴페인 잔을 잡고 있는 손 모양이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다. 잔의 늘씬한 손잡이를 놓았다가 재차 잡는 움직임을 보던 루크는 픽 웃어 보였다. 우아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미소였다.

“그거 정말 가고 싶었어요?”

“조금요.”

“귀찮아하는 거 같길래 취소해 줬더니.”

그런 행사에 참여해 본 적이 없어 조금 궁금한 정도였다, 라는 대답을 하려 벌렸던 입술이 다물렸다. 테이블의 아래, 약간 벌려 앉아 있었던 왼발에 무게가 실린 것을 느껴진다. 실수치고는 길게 머물렀던 발끝이 발등을 눌러 올라갔다. 루크는 테이블 아래 사정 따위는 모른다는 듯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 것보다는 이게 낫지 않아요?”

“…….”

“나는 그렇더라고.”

드러난 발목에 슬며시 힘을 주어 누르던 발이 바지를 걷어 정강이의 늘씬한 부분을 건드렸다. 분위기 환기를 위한 가벼운 잡담 따위를 생각하던 에단은 기가 막혀 테이블의 판판한 평면을 내려 보았다. 그 아래의 사정이 훤히 보이기라도 하듯.

쟁반 위를 구르듯 배회하던 생각은 바닥이 기울듯 한쪽으로 치우친다. 한 번 몸을 섞은 사이는 이렇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첫 시작이 사고였다 해도 말과 논리보다도 기분에 좌지우지되기 쉽다.

풍성한 속눈썹이 느리게 까딱이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응시하던 에단은 무덤덤한 얼굴 그대로 굽혔던 무릎을 펴 발끝을 세웠다. 더듬어 닿는 허벅지의 안쪽을 느리게 쓸어 올리자 루크의 나른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루크는 손을 뻗어 에단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순순히 고개를 들어 젖히면서도 에단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손을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매를 조금 찡그렸다. 언제나 먼저 상대의 목덜미를 붙잡고 리드하던 손이 오늘은 어디로 가야 할지 어색했다.

방황하는 눈동자를 응시하며 루크는 입술을 가볍게 내렸다. 경계가 선명한 윗입술에 한 번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내리고, 그다음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움직인 입술을 입꼬리 부근에 가볍게 맞닿게 하고는 다시 떨어졌다.

다시 한번.

굳었다가, 약한 경련을 일으켰던 눈 아래의 움직임에 입술을 눌렀다. 루크는 시시각각 눈앞에서 잔물결처럼 번져 나가는 에단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려져 있던 입술을 지그시 보던 그는 잔에 남은 샴페인을 단숨에 입 안에 머금었다.

입술을 깨물듯 깊게 머금고 맞춘 뒤 입 안의 미지근해진 액체를 넘겨주었다. 제 입 안을 적시는 샴페인을 무심결에 받아 넘긴 에단이 눈을 찌푸리자 그 위에도 입 맞춘 루크가 짙은 미소와 함께 귓가에 속삭였다.

“2위 축하해요.”

간격이 짧아지던 키스의 마지막, 입술을 열고 깊게 파고들기 전 루크가 한쪽 눈을 가볍게 깜빡이며 남긴 속삭임이었다.

마치 샴페인의 기포와 같이 가벼운 페팅이었다. 등을 대고 누운 에단은 커튼을 내려 어둑하게 보이는 루크의 실루엣을 집요하게 훑었다. 큰 손바닥이 두 개의 성기를 붙잡고 문지르는 모습은 흐릿했지만 대신 찌걱거리는 청각적 자극이 대단했다. 신음을 뱉을 때마다 마주 댄 입술 때문에 혀가 문질러졌다. 혀의 끄트머리만을 가볍게 빨고 떨어지는 키스는 성감을 수직으로 끌어올린다.

딱 기분 좋은 정도의 섹스였다. 질척하게 얽힌 혀는 연약한 부분을 쑤셨고 흔들린 성기가 흥분을 흠뻑 뱉어 내기를 반복하던, 그 시간이 서너 시간은 족히 넘었다는 것이 문제긴 했다.

더는 쥐어짜 나올 것조차 없을 것 같은 성기의 말랑한 심지를 루크의 성기가 쿡쿡 찔러 오고 있었다. 그것을 달래 주기 위해 제 것을 놓아두고 손바닥 안에 쥐어 움직여 주던 에단은 피곤으로 떨어진 고개를 베개에 고정해 겨우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거의 감긴 시야의 가느다란 틈으로 두꺼운 가슴이 보인다. 근육을 가늘고 길게 붙여 마른 근육만을 만들어 내는 드라이버들 사이에서는 보기 어려운 체형이었다.

제 손의 움직임에 따라 꿈틀거리는 복근과 흉근을 지켜보던 에단은 다시 깜빡 감기는 눈을 부릅떴다. 짙은 새벽의 냄새에는 정사의 냄새가 흠뻑 배 있었다. 그 감각조차도 느리게 달라붙는다.

거의 잠에 빠져들어 무아지경으로 흔들고 있는 에단의 손을 벗어난 성기가 질척한 아랫배의 배꼽 부근에 귀두를 파묻듯 문질러졌다. 루크는 더 허리를 숙였다. 입술을 벌리고, 혀를 잡아채듯 얽어 질척하게 섞는 키스에 에단은 간신히 응했다.

그 와중에도 착실하게 올라온 손이 어깨를 더듬고, 성감을 돋아 주려 가슴팍을 어루만지는 거친 손길에 실실 웃던 그가 물었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진 않아도 돼요.”

“나만 즐기는 건 무책임하잖아.”

“그렇게 생각 안 해.”

그 말과 함께 루크는 허리를 움직여 넓게 벌려진 허벅지의 안쪽을 쑤석였다. 마찰될 일이 별로 없는 안쪽의 부드러운 살갗에, 핏줄이 돋아 단단해진 성기를 깊게 파묻어 비벼 온다. 삽입에 가까운 행동에 허벅지 안쪽이 델 듯 뜨거워졌다.

에단은 손을 뻗어 루크의 뒷머리를 그러쥐듯 가볍게 쥐었다가 이내 손에 힘을 빼 내었다. 이것을 그냥 두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루크는 그 눈동자에 가볍게 키스하며 눈을 맞췄다. 어둠 속에서도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선명했다.

“에단. 나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요.”

“왜 그렇게 열심히 해요?”

“……뭘? 이 짓을?”

“하하. 아니. 레이스요.”

기껏해야 성적 취향이나 개인적인 걸 물을 줄 알았던 에단은 눈을 치켜떴다. 핏줄이 잔뜩 불거진 성기를 비벼 대며 질문하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초점이 돌아온 어두운 눈동자를 마주하며 루크는 입술을 매끄러운 광대 부근에 문질렀다. 진지하게 물은 주제에 푸스스 흩어지는 웃음으로 감정마저 흩어 버리는 것처럼 굴며 상체의 무게를 마저 실었다. 묵직한 흉근에 짓눌리는 게 마치 전복된 레이스 카에 타고 있는 것만 같다.

그 와중에도 몸을 붙여 오자 잔뜩 선 젖꼭지가 마주 비벼지며 성감을 돋우고 있었다. 어금니를 사리무느라 턱에 들어간 힘을 의식적으로 풀어 내며 에단이 말했다.

“무슨 질문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흣.”

“그렇게까지 달리는 이유가 뭘까 싶어서.”

드라이버에게 그렇게까지 달릴 이유가 뭐냐니. 무슨 질문인가 싶지만 의외로 인터뷰 때 연례 행사처럼 돌아오곤 하는 질문이었다. 다양한 변형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팀 오너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2등을 축하한다는 핑계로 만나서 페팅을 하는 중인 오너가 물을 질문은 더더욱 아니지 않나.

에단은 현재 저와 알몸을 비비고 있는 이의 지위를 다시 떠올리자마자 옅은 두통을 느꼈다. 맞다. 루크 린드베르그.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의 오너.

현실로 낚아채진 생각에 에단의 눈빛에 초점이 잡혔다. 가물가물한 빛을 읽은 듯 루크는 물결치듯 눈매를 휘어 웃음기를 머금은 채 조금 말랑해진 에단의 성기를 함께 쥐어 흔들었다. 길게 뻗어진 목덜미를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깊은 자국을 만드는 것만 같은 시선이었다.

***

헝가리 그랑프리-부다페스트 헝가로링.

트랙 길이 4.381km, 레이스 랩 70, 레이스 거리 306.630km, 높이 변화 ±34.7m, 랩 레코드 1:16.627

헝가리 그랑프리가 열린 일요일은 하늘이 활짝 열린 듯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씨였다. 50퍼센트의 강수 확률을 비웃듯 화창했고 온도가 65도를 넘어선 트랙에 바짝 붙어 레이스를 달린 드라이버들은 땀에 흠뻑 젖어 흐물흐물해진 채로 레이스를 마쳤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레이싱 슈트의 지퍼를 내려 양팔을 빼낸 에단은 쫙 들러붙은 오버롤을 들춘 뒤 두 통째 이온 음료를 비우고 있었다. 처음 받은 물병은 거꾸로 들어 정수리에 그대로 쏟아부어 버렸다. 덕분에 축 처져 머리카락이 엉겨 붙었지만 반질반질한 목덜미는 대충 문질러 닦자마자 금방 물기가 말랐다.

에단은 가까이 다가온 카메라를 보고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단 오늘 레이스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지난번보다는 조금 아쉬웠지만요. 바지 보드 오른쪽 사이드가 아슬아슬하다 싶더니 결국 못 버티더군요.”

“어쩔 수 없죠.”

오늘 6번째 순서로 체커기를 받은 그는 개러지에서 피트 크루들의 손놀림으로 하나씩 해체되어 가는 하얀 색의 레이스 카를 바라보며 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얼굴을 잠시 클로즈업으로 잡던 리포터가 프레임 밖으로 벗어나며 물었다.

“오늘 팀 라디오에 대해서 전해 들었나요?”

“내 라디오는 별문제 없지 않았어요? 내가 놓친 게 있었나요.”

“리암이 지속적으로 당신이 비키게 해 달라고 요청했었어요.”

“그랬어요?”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커뮤니케이션 담당자가 미처 말리기 전에 리포터는 재빠르게 질문했다. 에단의 팀메이트인 리암 안토니에는 오늘 에단의 뒤를 줄곧 달리다가 마지막 랩에서 맥라렌의 루키에게 제쳐져 8번째 순서로 체커기를 받았었다.

답변을 기다리는 카메라의 렌즈가 턱 밑을 찌르기라도 할 듯 집요하게 들이밀어 온다. 에단은 그 의도를 짐작하고는 빤히 응시하다가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글쎄요. 그런 오더는 전달받지 못해서 몰랐네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내가 비켜 줘야 할 만큼 느렸다면 팀 오더가 이미 비키라고 했겠죠. 하지만 그런 오더는 나오지 않았고. 네. 그래서 앞만 보고 달렸을 뿐입니다.”

“에단!”

다소 높은 남성의 목소리가 에단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다. 가까이 다가온 크리스는 에단의 곁에 서 카메라의 익숙하게 뒤통수로 가리며 마주 보았다. 처음 만난 순간보다 만성 피로에서 한 발짝을 겨우 벗어난 낯짝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한결 나은 안색을 보이고 있었다.

신경질적인 눈매를 해 보인 크리스가 입 모양만으로 에단에게 말했다. 더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이제 들어가죠.

크리스의 뒤를 따라가는 에단에게 리포터는 손을 내밀었다.

“오늘 순위 축하해요.”

인사말에 에단 역시 내민 손을 가볍게 치듯 부딪쳐 보이고는 개러지의 뒤편으로 빠져나갔다. 뒤따라가던 에단이 크리스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구해 주러 오지 않아도 돼요. 앞으로는 그냥 넘길게요.”

“그런 건 별 신경 안 써요. 에단을 부를 겸 달려온 것뿐이지.”

“조지가 찾아요?”

“우리 보스요. 할 말도 있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러운 안내가 어이없었지만 잠깐 뒤돌아본 크리스의 표정은 태연해서 뭐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당연히 약속이 잡혀 있는 것으로 믿는 것 같았다.

“아 참. 오늘 레이스 좋았어요. 48랩에서 빌어먹을 바지 보드만 제대로 붙어 있었어도 더 나았을 텐데요.”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축하해요. 연속 포인트권이잖아요.”

진심 어린 축하에 에단도 가벼운 미소와 함께 주먹을 쥐어 크리스와 맞부딪쳤다.

“전할 말은요?”

“에단의 가문에서 지속적으로 접촉을 해 오네요. 알고 있었어요?”

“아하.”

설마 그럴 일이 있겠냐 싶었지만 이런 날이 오기도 하는 모양이다. 크리스는 에단의 표정을 확인하고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단과의 만남을 우리 쪽으로 요청하던데 피하고 있던 거 맞죠?”

“어떻게 알았어요.”

“에단이 만나 준다면 우리 쪽에 이런 걸 요청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하긴. 팀에까지 연락을 넣을 줄은 몰랐어요. 확실하게 말해 둘게요.”

“들리는 말로는 자기들 와이너리 라벨에 에단의 이름을 넣겠다고 요청하려는 거 같아요.”

“와인은 무슨. 어이가 없네.”

“원래 없었어요? 가문의 아주 유서 깊은 와이너리로 품질도 좋다며 침을 튀기던데요.”

“뒤뜰에 시들어 빠진 포도나무나 있을걸요.”

“오케이. 안 해 주면 재정 상황이 어려워서 에단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인터뷰와 책을 팔아먹을 수밖에 없다고 하던데요. 이건 어떻게 할까요.”

“팀이 원하는 대로 해요.”

그 말을 들은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권유했다.

“에단 편할 대로 해요. 우리 팀이 그런 것도 관여했었어요?”

“더한 것도 관여하던데요.”

진심 어린 반응을 보고도 크리스는 그저 농담으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어쨌든 알았어요. 한마디도 안 나오게 처리해 줄게요.”

인터뷰도, 팀 회의도 끝나 모두가 퇴근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몇 번의 왁자지껄한 인사를 더 거친 뒤, 주차장의 한가운데에 거대한 몸집으로 가로누워 있다시피 대강 주차된 롤스로이스가 보였다. 크림색의 그 당당한 자태를 빤히 바라보던 에단은 열린 뒷문을 향해 다가갔다. 고개를 약간 숙여 탄 뒷좌석에 똑바로 앉기도 전에 허리에 감기는 손을 느낀 에단이 정색했다.

“문도 안 닫혔는데 뭐 하는 겁니까.”

“이제 닫혔네요.”

루크는 개의치 않으며 물었다.

“오늘은 뭐 축하하면 돼요?”

“축하할 거 없으니까 저리 비켜요.”

“저런. 그럼 위로나 하는 걸로.”

능청스러운 어조가 기가 막혔던 에단은 결국 실없는 미소를 보이고야 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