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0x4 모나코 그랑프리 – 모나코 서킷. (1)
트랙 길이 3.337km, 레이스 랩 78랩, 레이스 거리 260.286km, 코너 개수 19, 랩 레코드 1:14.376
‘린드베르그 팀의 가장 큰 문제는 팀 오너.’
아침 보고에서 취합되어 온 언론 보도 자료를 보던 중 눈을 사로잡는 제목에 사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클릭 유도를 위해 제목만 이렇게 쓴 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 커뮤니케이션 팀이 멍청하게 걸러 내지 못하고 낚인 거고.
하지만 린드베르그의 커뮤니케이션 팀은 받는 연봉만큼 성실하게 일해 왔음을 기사 내용으로 증명했다.
‘전통적 F1의 팩토리 팀이자 섀시 제조의 명가이던 헤인즈. 새로운 소유주의 지휘 아래 갈피를 잃고 있다’로 시작되는 내용은 어느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드라이버의 측근의 제보로 쓰인 기사라고 되어 있었다. 레이스 카의 밸런스가 맞지 않아 고전 중이며 그 탓에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어느 드라이버.
이 정도면 이름을 써 두는 게 차라리 떳떳하지 않을까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별 신경 쓸 것도 없는 조그마한 언론사의 이름에 고민하던 사라는 결국 아침 보고의 가장 뒷장에 기사를 포함해 두었다. 어젯밤 미국에서 돌아온 루크의 오늘 출근 시간은 미정이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오늘 보고는 빈터에게 따로 전해 달라고 부탁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리며 그녀의 보스가 느긋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가는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간 남색 슈트를 입고 금발을 반만 쓸어 넘긴 루크는 오늘도 여느 회사 대표라기보다는 랄프 로렌 메인 모델에 딱 맞는 모습이었다. 그는 인사해 보이는 사라를 손짓해 불렀다.
“회의실로 들어와. 빈터도 오면 같이 보고해.”
곧이어 들어온 루크의 개인 비서를 따라 들어간 그녀는 루크의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여독이 보이지 않는 말끔한 얼굴을 한 그는 양팔을 팔걸이에 기대 의자의 등받이를 한껏 젖힌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등진 유리창으로부터 쏟아진 햇볕이 그의 머리카락 끝에 빛으로 맺어지고 있었다. 음. 역시 랄프 로렌 화보 같아. 사라가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루크의 질문은 빈터를 먼저 향했다.
“별일 없었어?”
“큰일은 없었습니다. 계시지 않는 동안 필요한 인사나 선물은 처리해 두었습니다. 마침 초대받은 일정 중 레이스 위크와 맞물리는 약속들이 있어 보류해 두었고요.”
“언젠데?”
“다음 주 모나코 레이스입니다.”
“그리고 다른 건?”
“어떤 걸 말씀이신지.”
“아니야. 됐어. 회사는.”
사라는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자 차분히 보고를 읊었다. EU의 기후 협약과 법인세가 변동되는 국가의 세액 처리. 특허 상황. 그리고…….
그저 책상 위에 올려 둘 생각이었던 보고를 사라가 읊는 동안 평온하던 루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젖힌 몸을 바로 해 앉은 그의 표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기도 했고, 혹은.
“어떻게 에단이 나에게 이럴 수 있지?”
그 깊은 상심이 도대체 연기 같지 않아서 사라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헛기침을 하며 왼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녀의 왼편에 앉아 있던 빈터는 품위 있는 제스처로 커피의 향을 음미하듯 코를 한 번 움직이고는.
“허허.”
하는 웃음만으로 마무리했다. 어린 시절부터 루크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던 빈터도 이번만큼은 쉽사리 편을 들지 않는다. 계약할 때부터 스폰서 있냐고 물어서 들쑤셔 놓더니 결과가 안 좋으면 꼬박꼬박 연락하고, 위로랍시고 던지는 문자는 길길이 날뛸 내용뿐인 데다가 시즌에 집중해야 할 선수에게 이상한 말까지 해 뒀다.
사라는 홀로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탄식했다. 웬일로 자기가 사과할 말을 검사받아 가는가 싶더니 그다음 하고 온 대화가 더 막무가내였다. 그리고 다음 날 이번 시즌에서 우승을 기대한다고 인터뷰까지. 대단하다, 대단해.
이 자리에서 그런 불쌍한 에단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은 자신뿐이라 믿은 사라가 신중한 의견을 내놓았다.
“일단, 언론사가 뭘 모르는 거 같으니 법무 팀에 이야기해 둘게요. 보스 이름을 함부로 올리는 데는 오랜만이라 신선하네요.”
“이거 정말 에단이야?”
“뜬소문일 거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에요.”
“물어볼까?”
의문형이었지만 맞은편의 두 사람에게 물어보았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전해 듣기만 하고 가지 못한 두 번의 그랑프리 동안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은 꽤 좋은 결과를 내고 있었다. 리암 안토니에 5위. 에단 한 8위. 그리고 지난주에는 리암 안토니에가 6위를 기록한 레이스에서 에단 한이 5위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먼 미국까지 전달되어 왔었다.
뉴욕에서 자선 파티에 참여 중 인사말로 줄곧 전해 들었던 소식이었다. ‘린드베르그 팀이 이번에 컨스트럭터 6위를 달성했다면서요.’ ‘두 드라이버 모두 포인트권이었다고 들었어요. 축하합니다.’ 루크는 그때마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일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물어볼까요?”
“내가 직접 물어볼게.”
그리고 루크는 건성으로 쥐고 있던 휴대폰을 제대로 쥐더니 문자를 찍기 시작했다. 가릴 생각도 없어 보이는 그 문자를 곁눈질로 힐끔 훑어보던 사라는 결국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제 술을 마셔도 괜찮냐는 에단의 질문에 루크는 와인 한 병까지는 괜찮으나 다른 사람과 함께 마시는 것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에단은 같잖은 소리 지껄이지 말라며 문자로 성을 냈고 루크는 단호했다. 계약 내용이야. 나는 안 된다고 했어.
그리고 지금 루크는 에단에게 자신에 대한 말을 언론에 흘렸는지 묻는 것을 휴대폰을 들자마자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출근 전 에단에게 모나코에 언제 도착하냐는 질문을 했던 모양이었다.
답장이 아직 오지 않았건만 루크는 문자를 재차 보냈다. 모나코에서 파티는 절대 안 돼. 난 허락 안 해. 그렇다고 내가 빌려준 호텔에서 다른 놈이랑 뒹구는 것도 안 돼.
지금껏 오지 않았던 에단의 답장이 빠르게 도착했다. 꺼지라고.
역시 뒤에서 음험하게 이런 인터뷰를 할 거 같진 않다. 보기만 해도 눈꼴신 문자를 지그시 훔쳐보던 사라는 루크가 갑자기 고개를 들자 재빠르게 눈동자를 돌렸다. 다행히 그의 시선은 빈터를 향했다.
“빈터. 나 요트 어디다 뒀어?”
“한 대는 모나코에 미리 보내 두었습니다.”
“이번 주말 괜찮아? 요트에서 같이 레이스 보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이번 토요일이 부인과의 결혼기념일이라서요.”
정중하게 사양하는 빈터의 대답을 들은 루크가 짧게 탄식하며 웃었다.
“그럼 가야지.”
“네. 일요일에는 건너가겠습니다.”
“바쁘면 일요일에도 오지 마. 사라는? 안 되면 크리스 부를게.”
“지금 조지아주의 법리 해석으로 제일 바쁜 법무 팀의 크리스 말씀하시는 거 맞죠?”
“다른 크리스가 또 있나.”
루크는 제 눈짓 하나면 달려올 천 명의 후보를 두고도 가장 바쁜 사람을 불러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곰곰이 주말을 떠올려 보았다. 남편과의 만남도 좋지만 무려 모나코 몬테카를로의 F1 레이싱 주간이다. 세계 유명 인사와 왕족들이 집결하는 최고의 파티 기간. 게다가 루크의 요트라면 지난번 지중해에서 보았던 갑판에 수영장을 설치해 둔 4층짜리 요트일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의 대형 호화 요트에서 파티라니. 사람들 사이에 부대꼈던 영국 그랑프리와는 차원이 다를 게 뻔했다.
“남편에게 이야기할게요. 이번 주말은 못 만날 거 같다고.”
“아.”
“또 잊어버리셨죠?”
“아니야.”
드물게 환한 미소를 보인 루크가 덧붙였다.
“남편도 데려와. 같이 칵테일 마셔.”
“정말요?”
“응. 밤에는 따로 놀아도 돼.”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사라는 기쁜 목소리로 주말 레스토랑 예약을 취소하기 위해 전화를 시작했다. 그 분주한 모습을 보던 루크도 내려 두었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만두었다. 문자를 남기는 것보다는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게 빠를 것 같다.
몬테카를로의 햇살 아래 지중해의 물가를 거닐 에단을 생각하던 루크는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며 왼손에 턱을 괴었다. 그런데 정말 저런 인터뷰를 한 건 아니겠지?
***
성공은 결코 벼락같은 우연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조금씩 보였던 그 징조는 생각해 보면 시즌 초반부터 확실했다. 덕트를 뒤늦게 가져왔지만 프리 시즌 테스트 중 1위를 기록했던 에단. 리타이어 하기 전까지는 패스티스트 랩 타임을 기록했던 성적. 리암 안토니에의 지속적인 포인트권 성적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페어타이어 취급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젠 조금 비싼 스페어타이어 취급을 받는 정도랄까. 팀 회의에서 무슨 이유인지 감독은 지난 그랑프리 내내 당당했던 지시에서 조금 부드러운 어투가 되어 있었다.
“아직 데이터가 부족하니까 에단이 연습 주행에서 이번 업그레이드 중 리어와 바지 보드를 먼저 반영하고 달려 보는 건 어때?”
예상치 못했던 청유형의 질문이었다. 모여든 시선에 에단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팀을 훑어본 뒤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에단의 데이터를 확인하면 바로 셋업을 맞추는 걸로 하자고.”
그래도 다행히 본 레이스에서는 리암과 전략이 비슷하게 진행될 것으로 팀 회의는 마무리되어 간다. 두 사람의 주행 스타일에 맞추어 전략이 조정될 수는 있어도 그 외에는 상황에 맞는 전략을 약속했다.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번 모나코는 화창하다니 천만다행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으리라.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고 지나가는 딘에게 일부러 웃어 보이던 에단은 어색한 표정을 갈무리했다. 주행 중 수집된 텔레메트리 데이터를 바탕으로 프리시즌 테스트부터 서로의 갈등이었던 덕트는 다행히 조정을 이루어 냈다. 그리고 프론트 윙과 리어 윙의 미세한 각도의 조절, 마지막으로 플로어 업그레이드까지.
피트에서 새 리어 윙을 끼운 레이스 카의 물이 오른 모양인지 목요일과 금요일의 연습 주행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풀 스피드로 메인 스트레이트를 내달리던 에단은 이어지는 1번의 급커브에서 최대한 늦게 브레이크를 밟아 큰 원을 그리며 커브를 통과했다.
방호벽과 레이스 카의 간격이 불과 몇 센티도 되지 않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좁혀 들어갔다. 그 상태에서 통제력을 잃지 않고 2번, 3번, 4번을 연달아 커브를 통과하는 레이스 카는 마치 제가 갈 길이 입력된 것처럼 머리를 먼저 들이미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지난 회의, 레이싱에 방해가 되지 않는 편이 좋다는 에단의 피드백대로 팀 라디오는 최대한 간결한 정보를 전하기로 약속했다. 딘이 피트 월에서 주행을 면밀히 살피다가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차는 어때.”
- 리어 레프트 쪽 접지력이 약간 부족해.
“오케이.”
레이스 카는 그 말이 무색하도록 안정된 다운 포스로 커브를 돌아나갔다.
오후에 이어진 연습 주행에서도 에단과 리암의 랩 타임은 계속해서 경신되었다. 5위와 3위. 결과를 들고 이후 마지막 피드백마저 마친 에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석 레이스 엔지니어가 그의 곁을 지나가며 짧게 어깨를 두드리기도 했다.
“오늘 좋았어.”
헤드셋을 벗던 에단은 그 말에 마주 응수하며 팀 크루들에게 인사했다. 지난 독일 그랑프리 이후, 에단은 이제야 편안한 마음으로 팀 크루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어떤 이유, 어떤 핑계가 있더라도 포뮬러 원 드라이버는 오직 성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존재였다. 그 기록을 연속으로 포인트권으로 남기고 나서야 에단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팀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후련한 기분으로 호텔로 돌아와 짧은 샤워를 마친 에단은 창밖의 풍경에 잠시간 넋을 빼앗겼다. 선수와 팀뿐만 아니라 포뮬러 원의 거대 스폰서가 모조리 몰려들어 몬테카를로를 축제로 수놓는 밤이었다. 그로 인해 분주한 이들이 한가득하겠지만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파티가 없었던 에단은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호텔 룸을 나섰다.
오래된 호텔의 복도는 마치 회랑과 같이 길고 금색의 샹들리에가 고풍스러웠다. 공간 낭비가 심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3층에서 내려온 에단은 온통 떠들썩한 몬테카를로에 비해 한적한 호텔 로비를 둘러보았다.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의 오너인 루크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나코의 호텔을 통째로 포뮬러 원 팀에게 내어 주었고 관계자 외의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하기까지 했다. 모나코 레이싱 주간마다 모나코에 머물렀지만 궁이 한눈에 조망되고 길 너머에는 요트가 정박해 있는 이런 중심지에 묵은 적은 없었다. 갈 곳을 몰라 두리번거리자 지나치던 누군가가 에단에게 익숙하게 눈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파티 가?”
“됐어요.”
“괜찮아. 리암은 벌써 뛰쳐나갔는걸.”
“그렇겠죠.”
프랑스인의 느긋한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리암은 레이스 전날에도 여기저기를 쏘다니고는 자정 전에 호텔 룸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그와 달리 일상을 꼬박꼬박 루크에게 보고하고 있는 에단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코치는 드문드문 일상을 묻는가 싶더니 그 업무를 아예 루크에게 넘겨 버린 것인지 직접적인 문자가 요즘 들어 끊임없이 이어졌다. 몇 시에 잤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호텔방으로 들어왔는지까지…….
요즘은 십 대 소년들도 제 거처를 말하지 않고 애인의 집에서 뒹굴기 마련인데 이 나이 먹고 하는 일마다 낱낱이 보고하는 것은 꽤나 모양 빠지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하기에는 빌어먹을 계약서의 조항이 마음에 걸렸고.
하지만 파티에 가지 않더라도 오늘은 호텔 룸 안에 틀어박혀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연속 포인트권과 좋은 기록. 에단은 이제야 제 짐을 내려놓은 듯 숨통이 트였다. 그와 동시에 팽팽하게 당겨진 이 신경 줄을 아예 잘라 버릴 무언가가 필요했다. 신체적 극한으로 몰린 탈력감이거나. 혹은 전혀 다른 종류의 정신적 교류. 그 무엇이라도 신경을 분산시킬 곳이 필요하다.
조지를 부를까 했던 에단은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을 재킷의 주머니에 쑤셔 넣고 호텔의 2층의 라운지의 테라스 부근으로 나아갔다. 바람이나 쐴 생각이었다.
테라스로 가는 동안 몇몇 사람들을 마주쳤다. 팀 감독. 그의 레이스 엔지니어인 딘. 기자. 그리고 팀의 미캐닉들과 크루들까지. 그들은 라운지에 차려진 테이블 사이를 연신 돌아다니며 에단에게 잔을 권했다.
“이번에도 기대할게, 에단.”
그 말에 에단은 가볍게 응수했다.
“그래야지. 이제 겨우 연봉만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걸.”
“그 기사 꽤 과감하던데?”
“무슨 기사?”
“팀의 문젯거리.”
루크를 원색적으로 비난한 그 기사를 에단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에단은 수십 번을 되풀이한 반박을 쓸쓸히 다시 입에 올렸다.
“그거 나 아니라니까.”
“에이. 뭐 어때.”
반박을 전혀 들어 먹을 생각이 없는지 미캐닉은 휘파람을 불며 낄낄거렸다. 아니라고 아무리 부정해도 모두가 에단이 그 비난 가득한 인터뷰를 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한껏 좋았던 기분이 한풀 수그러든다.
성적에 불만이 있는 드라이버라고 하니 모두 당연히 나라고 여기는 모양이지. 이제는 변명조차 때려치우고 싶었다. 멋대로 믿을 거면 쓸데없이 왜 묻는 걸까.
에단은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꾹꾹 눌렀다. 와인 마십니다. 그리고 답장을 보지 않고 잔을 곧바로 받아 들었다. 몇 잔을 거절 없이 들이켜자 뺨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끼쳐 오른 술기운이 더워 자리를 피했다. 중간중간 린드베르그와의 관계로 초대받은 몇몇 인사들도 보였다. 더러는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이들도 있어 대충 건배를 나누고 인사를 받았다.
점잖은 척 웃음을 지어 보이는 이도 있었고 꽤 흥분한 듯 연신 무슨 말을 떠드는 이도 있었다. 대충 덴마크나 네덜란드 어디 사람인 것 같았다. 상대의 떠드는 말을 듣고 있자니 다행히 조지가 다가와 에단의 팔을 끌어내 주었다. 함께 걷는 조지도 오는 동안 꽤 사람들을 만났는지 들뜬 기색이었다.
“술 많이 마셨어?”
“일부러 마셨어. 푹 자려고.”
“이젠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거 같다. 엄청 빨갛네.”
“그러려고. 이젠 바람이나 쐬어야지.”
오래되어 보이도록 처리를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오래된 것인지 가늠되지 않는 흰 대리석 난간은 군데군데 실금이 간 채로 단단히 사람들을 지탱하고 있었다. 에단 역시 그 위에 팔을 올린 순간, 조지는 어느 누군가를 보며 반색했다.
“에단. 너 스폰서 이야기 나오는 곳 있거든. 좀 더 확실해지면 알려 줄게.”
“그래. 다녀와.”
별 기대는 생기지 않았지만 조지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것을 보자 에단은 차마 찬물을 끼얹을 수 없었다. 대신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자 조지는 잽싸게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에단은 큰 감흥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후의 금빛 햇살이 녹아나는 모나코의 몬테카를로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빛나는 것만 같았다. 지중해로부터 밀려온 파도의 포말과 그 파도가 밀어 내는 요트마다 실린 샴페인의 색깔도. 오래된 호텔과 그 위를 성벽처럼 막아선 산등성이까지.
토요일의 예선을 앞두고도 마음이 편안한 것이 얼마 만이던가.
늘 성적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일까. 온 유럽의 부호들이 모여들어 파티를 즐긴다는 몬테카를로의 레이스 위크를 매년 겪어 왔음에도 이렇다 할 들뜸을 느껴 볼 기회가 없었다. 오로지 그 주변을 겉돌며 초조함에 목말라 있었을 뿐. 에단은 새삼 아래의 정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느낌이었구나.”
저 너머 정박한 어느 배의 갑판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꼬리가 길게 이어지던 불꽃은 하늘의 붉은빛보다도 산란하는 폭죽으로 터진다. 사람들의 박수와 함성이 아래에서 터졌다.
난간에 기대 있던 에단은 아래층의 수영장에서 위를 뚫어져라 향하는 시선을 마주 보았다.
늘씬한 몸에 붉은색의 비키니를 걸친 여자는 라틴계 혼혈 같았다. 그녀는 방금 받아 든 샴페인 잔을 그를 향해 들어 올리며 한쪽 눈을 살며시 찡긋거렸다. 에단은 눈썹을 한 번 들어 올렸다가 곁에 내려 두었던 잔을 들어 허공에 흔들었다. 여자는 샴페인 잔에 입술을 대면서도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에단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여자의 웃음소리가 똑똑히 들려온다. 수영장 플로어 쪽의 음악보다도 선명한 목소리였다.
자세를 바꾸며 무심코 오른쪽으로 무게 중심을 바꾸려던 순간이었다. 그가 내려 둔 잔 가까운 곳에 새로운 칵테일이 놓였다. 그 기척에 몸을 물리려던 순간, 시원한 바닷바람보다도 청량한 향수와 더운 체향이 끼쳐 온다. 그 온도는 에단의 귓불 조금 가까운 곳에 숨을 불어 넣고는 속삭였다.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좋은 시간 보내고 있네요.”
갑작스러운 접촉이었지만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에단은 놀란 감정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곁을 돌아보았다. 천진한 양 웃고 있는 얼굴이 이젠 익숙했다. 도무지 익숙해질 것 같지 않던 얼굴인데도.
“언제 왔습니까?”
“방금 전에요.”
팔꿈치를 난간에 기대 허리를 약간 굽힌 루크의 얼굴과 찬란한 금발이 몬테카를로의 노을빛에 젖어 간다. 방금 에단이 했던 것처럼 잔을 허공에 부딪치는 시늉을 해 보인 그는 홀로 샴페인을 마시고는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나는 와인만 마신다고 보고 받았는데요.”
“와인만 마시고 있었잖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곧 뒹굴러 갈 것 같길래.”
하며 눈썹을 내려 아래를 눈짓하는 태도가 숫제 무슨 잘못이라도 했다는 양 당당했다. 그런 루크를 노려보던 에단은 취기가 올라 눈을 비볐다. 루크는 들고 온 샴페인을 가볍게 한 모금 넘기며 주제를 돌렸다.
“기사 아주 잘 봤어요. 다 내 탓이라는 그 기사.”
“아, 그건. 안 그래도 직접 말하려고 했습니다.”
“왜요. 직접 얼굴 보고 비난하게?”
“그게 아니라. 내가 아니라고요.”
“누구나 들키면 그렇게 거짓말을 하더라고. 그리고 우리 계약서가 좀 깐깐하게 쓰여 있기도 하잖아요. 뭐든 안 좋게 이야기하면 위약금이 얼마였더라?”
빙긋 웃으며 놀리는 어조가 분명했지만 상대가 그럴 능력이 충분한 루크 린드베르그라면 누구나 기분이 썩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리라. 에단은 아까부터 꿈틀거리던 자조감이 마음의 거스러미처럼 걸리적거렸다. 과하게 불쾌해진 기분을 숨기기 위해 지나가던 서버에게서 잔을 받아 다시 입을 대었다. 전혀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수가 없어진 에단의 반응에 루크가 몸을 기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가느다란 잔을 들고 한 모금을 입 안에 굴려 들이켠 에단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 보네요.”
“뭐가요.”
“불만이 있고 성적이 저조한 드라이버. 당연히 나라고 생각하는 거.”
“…….”
루크는 순간 허를 찔린 듯 입술을 달싹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낭패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홀로 푹 한숨을 쉬더니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흐트러지고 바람에 흩날린 머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사한 모양으로 이마 위에 엉켜 든다.
역광 때문인지 과한 애수에 젖은 표정이었기에 에단이 황망히 되물었다.
“자기가 말해 놓고 왜 그런 표정으로 봅니까.”
“내가 또 실수했구나 싶어서 그렇지.”
“됐으니까 위약금 청구는 조지에게 알려 줘요. 내 연봉에서 알아서 까든가.”
“방금 그런 뜻 아니었던 거 알잖아요.”
“됐습니다. 억울하면 내가 잘 타야지.”
“당신 놀릴 생각에 내가 과하게 들떴던 거지. 나 알잖아요.”
“잘 알죠.”
“그래요. 내 맘 알지?”
“놀리는 거라고 해서 안 믿었다는 게 아닌 것도 알고.”
다시 말이 없어진 루크의 표정을 본 에단은 이제 뒷수습까지 맡게 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됐으니까 위약금이나 불러요.”
“정말 받을 생각은 없었다니까.”
“그럼 말을 왜 꺼내.”
“성의를 다해서 날 설득해 주는 걸 보고 싶었던 거죠.”
“별걸 다 보고 싶어 하네.”
“거기 정신이 팔려서 그렇게 생각할 줄 몰랐던 거야. 그러니까 마음 풀어요.”
나긋나긋한 어투로 설득해 오는 말이 낯간지러웠다. 에단은 별안간 오른 술기운을 가라앉히려 콧잔등 부근을 사정없이 문질렀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도 부쩍 더워진 것만 같았다.
“설득하면. 넘어와 주기는 하게요?”
“그러려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몸짓을 에단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칼이 흐트러진 흰 이마를 쓱쓱 문질렀다.
“그래서 뭐 하게요. 위약금으로 돈이나 벌지.”
“글쎄. 왜일까.”
에단은 불가항력으로 떠올린 모습은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아주던 루크의 모습이었다.
“요즘 에단 성적이 꽤 좋았잖아요. 이러다가 보너스도 받아 가겠던데.”
“덕분입니다.”
“맞아요. 내 덕분이지. 엔지니어들이 뭘 그렇게 개발하는지 시즌 시작하고 천만 유로쯤 더 타 갔더라고.”
성적 이야기에 조금 당당해졌던 에단은 어깨를 폈다가 금액을 듣고 다시 막막해졌다. 천만 유로. 거기서 조금만 더 보태면 최하위 팀의 연간 운영비도 나올 기세다. 어쩐지 매주 새로운 부품을 가져다가 가감 없이 잘 끼워 보고 새로 뜯어내더라. 오늘 연습 주행에서도 그렇고.
미묘하게 처진 어깨를 본 루크는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다시 무게를 잡아 보았다.
“코치에게 보고하는 것도 잘 받아 보고 있어요.”
“계약서대로 이행하는 중이죠.”
“그런 줄 알고 가볍게 묻는 것마다 알겠다고 했더니 나에게 보고도 없이 놀아나고 있고. 조금 실망이네.”
“그럴 생각 없었다니까요. 그리고 놀아나기는 뭘 놀아났다고 그러는 겁니까.”
“나 없었으면 당장이라도 내려갈 기세였잖아요. 안 그래?”
“아니라니까요.”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잠을 잘 못 잔다며.”
“레이스 주간에는 원래 그래요.”
더없이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건만 불면에 시달리는 밤은 에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날은 알코올과 따뜻한 품을 찾아 기어드는 드라이버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잘 자려나.”
“십 대 애들처럼 붙잡고 있는 내 자유를 놔주면 될 거 같은데요.”
“음주는 내가 그렇게까지 뭐라고 한 적이 없고… 아래로 내려갈 자유?”
“그래요. 그거.”
“흐음……. 내가 생각해 보라고 했잖습니까.”
“뭘요.”
“나.”
이번에는 다른 의미의 침묵이 찾아왔다. 에단은 입술을 꾹 다물고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수영장가에 아까 손짓했던 여자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 하긴, 이제 와 찾기에는 너무 안중에도 없이 대화했다.
왜인지 속절없이 말려들고 있는 것만 같다.
“처음에는 그냥 농담이었잖아요.”
“아닌 거 알았잖아요. 내가 계속 연락했잖아.”
“굉장히 할 일이 없는 줄 알았지.”
에단은 고개를 젖혀 몬테카를로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하나 없는 하늘은 어둠이 짙어지기만 한다.
“오늘 밤은 내버려 두라고 해 봤자, 허락할 생각 없죠?”
“으음. 정 그렇다면…….”
가증스러운 태도로 골몰하는 척하던 루크는 제 검지를 치켜들며 까딱였다.
“내가 딱 한 명은 허락해 줄게요.”
그와 함께 보인 진득한 미소에 시선을 빼앗겼다. 흔들리는 손가락을 미끼인 양 드리운 루크를 보던 에단은 더할 나위 없이 심란한 기분이 될 뿐이다.
아랫입술을 더 내밀어 훅 숨을 내뱉었다. 입김이 검은 머리카락을 나풀거리게 했다.
“허락 안 한다는 거네. 먼저 올라가 볼게요.”
그 대답에 루크의 팔이 잠시 갈 길을 막았다. 노을의 빛이 스러져 서로의 얼굴이 어둠에 익어 가는 그 잠시간의 시간 동안 에단은 상대의 진득한 시선을 완전히 끊어 내지 못했다.
“내가 있잖아. 이래 보여도 승산 없는 사업은 손도 안 댄다는 말을 듣거든요.”
“좋겠네요.”
“그런데 내가 당신에게 계속 이러는 걸 보면.”
루크는 여전히 의문이 설핏 서린 눈매로 조심스럽게 에단의 팔목 위, 팔의 중간을 가볍게 쥐었다. 언제라도 뿌리칠 수 있도록 가벼운 손놀림으로.
“승산이 없진 않은 거 같은데.”
“이번에는 틀렸나 보죠.”
“그것도 아니야.”
남자는 손쉽게 상대의 마음을 단정형으로 대답하고.
“내가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
체온이 남을 정도로만 느릿하게 팔의 안쪽을 엄지로 문지르고는 떨어졌다.
“다른 것 때문이겠죠?”
살풋 접힌 눈매를 해 보이며 길을 내어 준 루크의 표정은 더없이 천진하게 보이기만 했다.
“그것도 내가 알아내 볼게요. 잘 자요.”
***
예선. 퀄리파잉의 날에는 하늘이 높고 아침부터 불었던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레이스를 펼치기에는 최적의 날씨다. 현대 서킷의 조건에는 맞지 않는 구도심의 구불구불한 시가지 서킷을 달려야 할 스무 명의 선수 중 한 명인 에단은 아침부터 호텔의 조식 대신 탄산수를 뜯어 병째로 들이켰다. 잠은 설쳤고 속은 울렁거렸다.
그의 저조한 기분을 느낀 팀 크루들이 가벼운 인사말만을 남기며 슬쩍 스쳐 지나갔다. 로비에서부터 음료와 수건을 챙겨 따라붙던 조지도 차의 조수석에 앉자마자 눈을 감아 버린 에단을 넌지시 보며 속삭이듯 물었다.
“컨디션 많이 나빠?”
“괜찮아.”
“잠 못 잤어?”
“어.”
“어제 술 마시고 바로 올라가더니 뭐 했어.”
“그냥 혼자 틀어박혔어.”
“왜.”
“그냥.”
에단은 이어폰을 끼며 다시 눈을 내리감았다. 어차피 피트까지는 몇 분 걸리지도 않을 거리였지만 그 잠시간만이라도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했다. 그곳에 도착하면 패독을 헤집고 다니거나, 혹은 아는 것도 없으면서 피트 월을 큰 덩치로 어슬렁거릴 루크가 보일 게 뻔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에단의 왼눈이 경련하듯 찌푸려졌다가 다시 속눈썹을 가지런히 내리감았다.
왜 안 되냐고? 뻔한 이유이지 않은가. 당신은 팀의 오너이자 최대 스폰서이고, 나는 그런 당신의 팀에서 여전히 이해할 수 없이 높은 연봉을 받았다는 평가를 듣는 중이니까. 여기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정말 단어 그대로 스폰서가 되지 않는가. 빌어먹을.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나 보다 하고 지나갈 것이지 왜 이렇게까지…. 그래, 그 얼굴이 먹히지 않으니 끈질기게 궁금해할 법도 하지만.
“에단.”
“왜.”
잘못 흘러갈 뻔했던 생각을 끊어 준 조지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 에단은 눈을 슬쩍 뜨며 대답하는 성의를 보였다.
“어제 우리 오너랑 잠깐 이야기했었다며.”
“아주 잠깐.”
“그래도. 무슨 이야기 했어?”
“잘하라는 말이나 했지.”
“이번에는 사이가 좋아서 다행이야.”
그 사이가 앞으로 그런 쪽으로 좋아도 될까? 에단은 그냥 모든 것을 놓고 그따위 소리나 지껄이고 싶은 마음을 꾹꾹 억눌렀다.
피트로 나오니 날은 더욱 화창했다. 확인하지 않아도 강수 확률은 제로에 수렴하리라. 팀 빌딩에 도착한 에단은 레이싱 슈트로 갈아입은 뒤 따라붙는 치프 미캐닉을 뒤에 달고 피트 개러지로 나아갔다.
“어제 피드백대로 오늘 좌석에 무게를 조금 실었어.”
“고마워요.”
“무게 추를 늘린 건 좋지만 자꾸 살 빠지는 거 아냐? 몸 관리 잘해.”
“그러려고요.”
이어폰을 끼우고 방염 천을 뒤집어쓴 에단이 헬멧을 쓰려 턱을 약간 위로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피트의 입구 앞 키가 큰 남자 하나가 볕을 등에 한껏 이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검은 선글라스로 시선이 차단되었지만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루크가 곁에 선 남자에게서 무슨 말을 듣는 것인지 시선을 조금 돌리자 에단은 자신의 몸을 레이스 카의 좁은 콕핏에 딱 맞추며 앉았다. 이제야 편해졌다. 그다음 정신을 오롯이 한 점에 집중시키는 것은 차라리 수월했다.
스티어링 휠을 조작하는 대로 나아가는 레이스 카는 어제보다 조금 뒤가 묵직했고 그만큼 무게 중심이 잡힌 느낌이었다.
바닥에 유려한 곡선을 그리듯 지나가는 두 대의 레이스 카가 달려 나갔다. 굉음을 내뱉는 레이스 카를 오래도록 보던 루크의 시선이 멀어졌다.
퀄리파잉의 결과는 P3, P4, 에단이 3위. 리암이 4위였다. 아슬아슬한 브레이킹을 연달아 밟은 쾌거로 깜빡이던 두 사람의 등수 표가 상단으로 한 칸씩 올라갈 때마다 피트의 수군거림도 함께 올라갔다.
레이스 데이.
소란스러웠던 정식 기자 회견을 마친 뒤 건물을 나오는 에단을 따라나서며 조지는 전달받은 오늘의 데이터를 읊고 있었다. 풍량, 풍향, 기온, 습도, 노면의 온도까지.
정보를 흘려듣던 에단은 50도를 넘어선 노면 온도에 얼굴을 찌푸렸다. 낮은 머신의 차체는 노면에 거의 붙어 달리다시피 했고 100도를 넘나드는 타이어와 가까이 위치한 드라이버의 몸이 익어 버리기에 딱 좋은 날이다.
“끝내주는 날씨네.”
한 무리의 기자들이 피트의 입구를 지나치고 있었다. 에단은 한껏 사교성을 발휘해 그들의 카메라에 손을 들어 보였다. 스페인어, 프랑스어, 핀란드어, 단어로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들이 사방에 산란한다.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기대 중이다’, ‘퍼스트 드라이버를 노릴 것인가’와 같은,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았던 주목이었다. 에단은 어색한 표정을 숨기려 더욱 굳어진 얼굴로 피트를 향했다.
바쁘게 돌아다니던 딘이 마중 나와 오늘 전략에 대해 읊던 중이었다. 에단은 피트 레인의 옆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에게 잠깐 시선을 빼앗겼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유명인임이 분명했다. 수행원으로 보이는 이와 곁에 함께한 검은 머리의 미인까지. 누군지 쉽게 떠오르지 않아 잠시 골몰한 순간 딘이 그쪽을 보고 작게 속삭였다.
“모나코 공국 왕자래.”
“우리 팀에는 무슨 일이야?”
“루크 린드베르그랑 같이 왔어. 덕분에 무슨 영화배우나 스포츠 선수들도 드나드는 중이야. 저기, 저 여자는 작년 윔블던 여자 챔피언.”
“아. 알아.”
팔이 단단해 보이고 튼튼하게 쭉 빠진, 신장이 큰 여자는 리암과 연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가볍게 팔을 터치하는 손짓이 심상찮다. 그런 테니스 챔피언의 뒤편에서 루크는 에단을 직시하고 있었다.
흰 셔츠와 발목이 약간 드러나는 코튼 팬츠를 입고 가죽 구두를 신은 루크는 높은 의자의 발걸이에 한쪽 다리를 걸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여유롭게 손을 들어 보이는 모습은 마치 할리우드 배우와 같아 보였다.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그의 인사에 화답한 에단은 혹시라도 어느 이름 모를 유명 인사가 다가와 말을 걸까 봐 레이스 카를 향해 곧장 다가갔다. 그사이 저 멀리서부터 들러붙은 시선이 뺨부터 귀 뒤와 목덜미, 등짝으로 내려와 훑는 것이 느껴졌다. 선글라스 너머에서도.
“그리고 퍼포먼스 팀에서 혹시 피드백할 거리 있냐고 물었어. 머신 말고 팀 전반의 어떤 것이든.”
“그래?”
머신은 더할 나위 없이 예민해서 에단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도 굳이 피드백할 거리를 찾는다면……. 하지만 팀 오너가 제 팀을 활보하고 드라이버 뚫어져라 보는 것에 대해 무슨 제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없어.”
짧게 대답 후 방염 천을 뒤집어쓰며 마이크의 연결을 확인한 에단은 헬멧마저 눌러 쓰고는 콕핏의 좁은 틈에 앉았다. 레이스 카는 밟는 대로 예민하게 나아가는 대신 그립을 잡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립을 컨트롤 하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기에 에단은 피트 레인을 빠르게 지나쳐 가며 생각했다. 그래, 이런 차를 가져다주는데 저깟 눈빛쯤이야.
사방은 소란 속에 고요했다. 레이스 카가 그리드마다 예선의 순서대로 도열하고 시범 주행 뒤 다섯 개의 레드 라이트가 꺼지는 순간. 그때부터의 레이스는 에단의 머릿속에 똑똑이 기억되었다.
하나씩 켜진 붉은 등이 모조리 점멸하던 그 순간, 본능처럼 힘껏 페달을 밟은 에단은 자신의 스타트가 매우 손꼽힐 만한 날임을 깨달았다. 스타팅에서 밀린 앞 레이스 카가 그의 곁으로 조금씩 처지는 것을 느꼈다.
긴 스트레이트 이후 하드 브레이킹 구간인 1번 코너에 먼저 프론트 윙을 들이밀었다. 들릴 리 없는 함성이 그의 귓전을 울리는 것만 같았다. 순간 머신의 굉음이 사방을 울리며 딘의 라디오가 날카롭게 정신을 파고들었다.
- 잘했어! 에단! 일단 지금에 집중해.
마치 1초마저도 수백의 조각으로 쪼개져 느리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착각 속에서 에단은 수백 수천 번의 연습으로 익힌 감각에 몸을 내맡겼다.
그런 날이 간혹 있었다. 머리보다 본능이 레코드 라인을 예견한 것처럼 몸이 움직이는 그런 날. 작년의 그 형편없는 머신을 끌고도 연이은 추월을 만들어 냈었던 프랑스 폴 리카르의 그날처럼.
신음과 환호성이 피트를 울리는 레이스가 30랩에 접어들었을 때, 항구를 낀 도로의 열 번째 커브에서 역전을 노리는 레이스 카의 질주가 바로 곁에 느껴졌다. 에단은 아웃라인을 길게 돌며 레코드 라인을 밟아 나갔다.
제 자리를 차지할 듯 가까이 다가오는 차의 굉음을 느꼈지만 그는 곁눈질조차 하지 않고 눈앞에 집중했다. 서로의 바퀴가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덜컹거리는 것을 느꼈다. 예민하게 튀어 오른 차체를 컨트롤하며 가속했다. 불길한 마찰음이 차체를 할퀴고 지나갔다.
- 괜찮아?
“응.”
짧게 대답한 에단은 상대의 안부를 다시 물었다.
“브라운은?”
전해 들었던 순위와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섀시의 색을 보고 묻자 딘이 다행스러운 대답을 남겼다.
-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야.
휠 투 휠에 가깝게 붙었던 레이스 카는 연석의 덜컹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차체가 부서지는 굉음을 뒤로하며 에단은 다시 능숙하게 커브를 탔다. 바다와 다시 가까워지고. 뱀과 닮은 커브를 기어 내려가 항구와 한없이 가까운 질주. 그리고 마지막 랩에 접어든 순간이었다.
“타이어 모두 쓸게.”
오케이가 떨어지기도 전에 타이어의 그립을 최대한으로 잡으며 에단의 레이스 카가 쏘아져 나갔다. 머신은 마치 빨려 들어가듯 터널을 가로질렀고 구불구불한 길을 타고 올라갔다. 바람을 타고 흐르는듯한 속도를 내는 내내 팀의 라디오가 전해졌다.
- 그래. 밟아! 최대한 밀어붙여!
지난한 레이스의 끝, 흔들리는 체커기 앞에는 오직 한 대의 차만이 그를 앞서 있었다. 단 한 대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면…….
결승선을 통과한 뒤 쏟아지는 함성 너머로 맥이 풀린 레이스 카의 속도가 줄었다. 귓가에는 함성만큼이나 뜨거운 팀 라디오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 에단! 2등이야! 첫 포디움이라고!
“……그래. 그러네.”
- 정말 대단했어. 완벽했다고.
“모두 고마워. 다들. 정말. 고마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에단은 전신의 기력을 쥐어짜야만 했다. 마치 레이스 카와 몸이 하나가 되어 눌어붙기라도 한 듯한 감각이었다. 감독의 격려에는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다음 순간, 팀 크루들과는 다른 음조의 낮은 목소리가 에단의 귓가를 간질였다.
- 축하해요.
바로 대답하지 못했던 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목울대를 울려 대답하는 에단의 목소리가 그저 신음 소리 같아 루크가 재차 물었다.
- 괜찮아요?
“네. 아주 좋죠.”
- 다행이네요. 팀 사람들 다들 헤드셋 던지고 달려가던데 혹시 어디 가는 건지 알아요?
그 물음을 듣는 순간이 왜 가장 실감 났을까. 에단은 전신을 휩쓴 가벼운 전율로 손가락을 구부렸다. 린드베르그 팀의 첫 시즌, 첫 포디움이었다. 그러니 시상대로 먼저 달려간 크루들의 방향을 모를 수밖에.
“시상대로 당장 달려와요.”
그는 알까. F1에 참여한 첫해 포디움을 드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 역사적인 순간. 시상대 아래 2라는 숫자의 표지판이 에단의 자리였다.
힘이 잔뜩 들어가 얼얼한 어깨에 힘을 주어 차체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좁은 콕핏에 가두어졌던 열기를 떨치고 일어난 그는 떨리는 손으로 헬멧을 벗었다. 함성과 함께 바리케이드 너머 압사당할 듯 밀어닥치는 팀원들의 옷은 세 가지 색이었다. 붉은색, 검은색, 그리고 흰색까지.
“에단! 에단!”
함성 사이로 이름이 들리는 쪽에 고개를 돌리니 바닷바람이 이마의 열기를 훔쳐 주었다. 얼떨떨한 에단의 곁으로 오늘의 챔피언인 메르세데스의 헤센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헤센은 얼빠진 얼굴의 에단을 보며 웃었다.
“축하해.”
“고마워. 너도 오늘 대단했어.”
“나를 추월하겠다고 그렇게 죽어라 쫓아올 줄은 몰랐어. 위협적이었다고.”
한쪽 눈을 슬쩍 윙크하듯 깜빡이며 하는 말에 에단은 웃음을 터트렸다. 헤센이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시상대를 향한 계단을 올랐다. 시야가 높아지고 바닥이 그들의 발밑으로 내려갔다. 도시는 함성과 깃발로 나부끼고 있었다.
“앞으로 자주 오를 자리이니까 그렇게 너무 얼빠져 있지 마.”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격려였다. 에단은 뺨을 손바닥으로 몇 차례 문지르고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의 팀, 린드베르그의 깃발과 그 아래 팀 크루들에게 손을 들었다. 그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치밀어 오른 그 순간. 사람들의 맨 뒷줄 조금 떨어진 데에서 고개를 들고 시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선글라스 아래의 입매가 가는 호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 멀리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에단은 웃음을 참지 못한 채 그를 향해서도 손을 흔들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루크는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접었다 펴듯 인사하며 화답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 시상대에 올랐다.
세상의 환호가 쏟아지는 자리였다.
2위의 에단. 5위의 리암. 팀의 순위를 중상위로 굳히기에 완벽한 성적이었다. 그리고 에단의 이름을 알리기에도 완벽한 순위다.
에단은 자신이 시상대를 한 계단씩 내려올 때마다 세상이 바뀌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첫 계단을 내려올 때 플래시가 터졌고 두 번째 계단을 내려오자 어디에선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마지막 계단을 밟자 질문이 쏟아졌고 조지가 그들 사이로 갈 길을 인도했다. 그사이 목청껏 외친 질문이 있었다.
“린드베르그의 퍼스트 드라이버보다 드라이버 챔피언십 순위가 높아졌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에단?”
답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탓에 무뚝뚝한 눈매로 렌즈를 응시하는 사진이 그 찰나 찍혔다.
기자 회견장에는 사람이 더 많았다. 홍보 팀이 미리 거른 덕분에 화기애애한 질문이 자리를 꽉 채운 기자들 사이에서 이어졌다. 장난스러운 질문은 지금까지의 기자 회견 중 가장 호의적인 분위기였다.
“에단. 오늘 드디어 본 실력을 보인 겁니까?”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을 때 청중 사이에 약간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감 있는 인터뷰를 진행해 달라 부탁받았기에 에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요. 조금 더 늦었으면 지각일 뻔했죠. 아슬아슬했던 거 압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후 몇 번의 사진이 찍혔는지 일일이 셀 수도 없었다. 팀 크루들과 단체 사진. P2라는 글자와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진 팻말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고 개개인과의 사진을 남기고……. 끝도 없는 축하가 이어졌다.
아까 그 테니스 챔피언과 어느 왕실 사람들이라는 이들의 축하 인사를 받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런 이들이 너무 많아 대충 지구상의 모든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 인사한 것 같았다.
***
트랙을 떠나 도착한 호텔 로비에는 시상대에서 터트렸던 샴페인이 상자째 배달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축하와 함께 권해지는 잔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팀메이트인 리암도 다가와 연약한 와인 잔의 끄트머리를 부딪쳤다. 완주를 마친 드라이버의 얼굴은 한결 후련해 보였다.
“축하해. 오늘은 너의 날이니까 즐기라고.”
“고마워. 하지만 조금만 더 즐겼다가는 이대로 누워 버릴 것 같아.”
레이스 카에서 내릴 때부터 후들거렸던 다리는 언제 힘이 풀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하며 에단이 대답하자 리암이 물었다.
“몇 잔째야?”
“오늘 돈 랩 숫자를 넘었을지도 몰라.”
“저런.”
잠시 딱한 듯 바라보았던 리암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도 좋잖아. 안 그래?”
그다음 리암은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혼자 고개를 흔들더니 웃어 보인다. 에단 무슨 말이든 이어가려다가 갑자기 불쑥 끼어든 노신사가 악수를 청하는 바람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번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한껏 굳은 표정으로 악수를 할 수밖에.
그때 다행히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사라가 두 사람의 사이를 예의 바르게 비집고 들어왔다.
“어머. 안녕하세요. 체인스워드 공.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네. 이쪽이 저희 보스가 직접 후원했던 에단이에요. 오늘 2위로 포인트 피니시를 해서 포디움에 올랐죠.”
그리고 사라가 마치 복화술과 같이 에단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무슨 귀족이고 어떤 자선 사업을 하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였다.
에단이 알아들은 척 있는 힘껏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노신사는 말이 통했다 생각했는지 환한 얼굴로 연신 무어라 떠들었다. F1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은 진심인 것 같아 에단도 마지막 순간에는 웃어 보일 수 있었다.
한껏 환희를 보이던 노신사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이의 부축을 받아 떠나갔다. 리암은 이미 곁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 빈자리에 사라가 들고 있던 샴페인 잔 두 개 중 하나를 에단에게 건네며 가까이 다가왔다. 에단은 이제 머릿속마저 샴페인으로 출렁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녀의 환한 미소를 보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에단. 오늘 축하해요!”
“고마워요.”
“덕분에 즐거운 레이스 위크네요. 아. 처음에는 크리스가 왜 그렇게 포뮬러 원에 열광하는지 몰랐는데 너무 좋아요. 다들 1등을 하겠다고 기어코 앞지르는 그 모습. 너무 멋졌어요!”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요.”
“보스도 요즘 포뮬러 원에 관심이 생긴 거 같아요. 이거 정말이에요.”
좋지도, 그렇다고 대놓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이지도 않는 흰 낯이 호텔의 화려한 샹들리에 빛에 물들어 간다. 에단의 표정을 신기하게 보던 사라가 높은 목소리로 웃었다.
“확실히 신선하네요. 이래서 보스가 에단을 자꾸 괴롭히는 걸까요?”
“뭐가 신선한지 알려 줬으면 좋겠네요.”
“왜요?”
“고쳐야죠.”
“바로 그 점이요. 다들 보스가 오면 어떻게든 환대하고 반기려 안달을 한단 말이죠. 이렇게 솔직하게 귀찮아하는 건 에단밖에 없을걸요.”
“귀찮은 건 아닙니다.”
“그럼요?”
순수하게 반짝거리는 사라의 눈동자가 어느 조명보다도 반짝거렸다. 그 기대감에 힘입은 술기운이 에단의 입을 움직이게 하고야 말았다. 아무리 살가운 태도를 보인다 해도 루크의 사람이라는 것을 뻔히 인식하면서도.
“그냥, 가끔 불편한 부분도 있는 것뿐이죠.”
“그런데 솔직히 우리 보스가 좀 괴롭히기는 해도 올 때마다 문제를 해결해 주잖아요.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다시 말하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나타난다는 게 되기도 하잖아요.”
“오. 그건 완전히 새로운 관점이네요. 문제가 있을 때만 나타나는 사람이라.”
사라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이었다. 에단은 그녀의 나풀거리는 머리카락 너머로 한 사람의 뒷모습을 무심코 응시했다.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남녀 한 쌍이었다. 에단은 표현력이 그리 좋지 못해 그렇게 상투적인 표현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남자의 흰 셔츠의 깃이 나부끼도록 해안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 테라스 너머 조용한 밤 항구를 배경으로 서 있던 남자는 곁에 선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즐거운 이야기 중이었다. 길게 웨이브 진 머리를 나부끼는 미인은 키가 꽤 큰 편으로 루크와 눈높이가 잘 맞았다.
루크의 손가락이 웨이브 진 여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에 걸고 빙글 돌린다. 더할 나위 없이 보기 좋은 광경이건만 그 꼴이 거슬리다 못해 명치 부근이 묵직해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에단은 샴페인을 한잔 더 들이켜고는 눈을 돌렸다.
그래. 누구는 개 목걸이라도 목에 걸어 둔 양 사사건건 일상을 감시하는 주제에 즐기고 있는 꼴을 보면 누구라도 화가 날 수 있지. 그런 거다. 합리화하자마자 느슨해진 정신 줄을 잡아채지 못한 채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이제 보니 문제를 해결하러 온 게 아니라 자기 수작질할 자리를 찾아온 것 같기도 하네요.”
“음. 그건 F1 드라이버에게서 듣기 굉장히 신선한 발언이네요. F1 드라이버뿐만은 아니고. 알죠? 원래 운동선수들이 좀 그렇잖아요.”
“난 올해 결백합니다만. 어느 누구 덕분에 말이죠.”
저 너머에서 자기는 남녀 가리지 않고 껄떡거리는 고상한 미남이 걸어 준 계약 조건 덕분이었다. 에단의 싸늘한 대꾸를 듣던 사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카로운 시선을 따라 몸을 돌렸다.
“그런데 누가 수작을 부린다는 거예요? 우리 보스가요?”
하며 에단이 뚫어질 듯 노려보는 방향에 함께 시선을 준 순간이었다. 그녀는 약간의 침음성을 흘리며 입을 작게 오므렸다.
“에단. 지금 보스 맞은편에 있는 여자 말하는 거죠.”
“지금은 저 여자분이죠. 이전에는 누구였는지 모르겠지만.”
“저 여자분. 잘 보면 보스랑 좀 닮지 않았어요?”
“글쎄요.”
그딴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라는 거친 언사를 억누른 에단은 순간 샴페인 잔으로 돌리려던 시선 그대로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불길한 기분이 엄습한다.
사라는 이상하리만치 의미심장한 웃음을 달고는 샴페인 잔의 얇은 끄트머리에 입술을 대고 있던 중이었다. 그 히죽이는 미소가 투명한 유리 너머로 뻔히 비치어 보인다.
“어머.”
에단은 그녀의 미소를 애써 무시하며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뭐가 아니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음. 일단 저분은 보스와 같은 성을 쓰는 데다가 지나치게 가깝기까지 하거든요. 저분 모르세요? 베르테 린드베르그. 나름대로 유명 인사인데. 아. 맞다. 처음에 보스가 여자인 줄 알았다고 했었지.”
“알았습니다. 내가 더 알 일은 아니겠죠.”
“아니에요. 확실히 설명해 줄게요! 보스가 알면 슬퍼할지도 모르잖아요. 아니다. 즐거워하려나?”
“즐거워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으니까 우리 그만하죠.”
“그래도 다행이에요. 저는 우리 보스만 에단을 줄기차게 괴롭히는 건 줄 알고 걱정했었거든요! 그래도 오해를 하고 노려볼 정도의 마음은 있었네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네네.”
히죽, 하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사라의 입꼬리가 다시 삐죽인 순간 에단은 숫제 애원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하필 그 순간 용건이 끝났는지 루크의 맞은편 여자가 뒤돌아 멀어진다. 그녀가 멀어지자마자 정확한 발걸음으로 가까워지는 루크를 보며 에단이 사라를 향해 다급하게 눈짓했다. 어림도 없어 보이는 사라의 표정에 입술을 작게 움직여 당부도 했다.
“이상한 말 전하지 마요.”
“글쎄요. 어떡하지?”
아리송한 대답을 내뱉는 작은 여자를 쥐고 흔들 수도 없던 에단만 초조해졌다. 확답을 받기 전 이미 다가온 루크는 두 사람의 가까운 거리를 보며 물었다.
“무슨 대화 중이었어?”
“그게 있잖아요.”
“제발.”
곧바로 입을 열었던 사라는 사정하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입 모양을 조금 동그랗게 모았다가 다시 움직였다.
“보스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무슨 이야기.”
“보스는 문제가 있을 때만 나타나는 사람이래요.”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평가에 루크는 눈썹을 한 번 모았다 풀었다. 에단은 피로가 한껏 더해진 기분이 되어 대꾸했다. 그 말은 아예 잊고 있었다.
“그걸 그렇게 말하면 어떡합니까.”
“짧게 말하면 그렇잖아요? 전 가 볼게요. 좋은 밤 되세요.”
“응. 재밌게 놀아.”
사라는 담백할 수 있던 마지막 인사를 묘한 뉘앙스로 남기며 사라졌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자 루크는 에단을 향해 빈 테라스를 눈짓했다. 변명 때문이라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로 한 이야기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도 또 뭐가 잘못 전해진 겁니까.”
“다들 당신에게서 무엇이라도 얻어 내려 환심을 사려고 안달이라길래 한 소리였습니다.”
“그게 왜 그렇게 말이 되지?”
“당신이 올 무렵엔 무언가 문제가 있어서 당신이 필요하다는 말인데……. 아니, 그만둘게요.”
에단은 이제 아무래도 좋을 것이라는 기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째 이 남자 앞에서는 무슨 변명을 할수록 더욱 멍청한 꼴만 되곤 한다.
목덜미를 멋쩍은 태도로 쓸어내리는 모습에 루크는 진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테라스 난간 그 아래를 굽어보았다. 아래의 수영장은 하나씩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음악은 점점 더 심장 박동과 비슷한 템포가 되어 간다.
선글라스를 조금 내려 높은 코끝에 걸친 모습이 어디 지중해에 요트라도 띄워 놓고 인생을 허비하는 한가로운 한량 같았다. 루크는 그에 어울리게 가벼운 어조로 대뜸 말했다.
“축하해요.”
“지금 내 변명은 들은 겁니까?”
“들었어요. 무슨 문제가 생겨야만 내가 오는 게 섭섭했다는 거잖아.”
“그렇게 꼬아서 생각하는 것도 대단한 재능이네. 그래요. 그렇게 생각해요. 축하는 고맙고.”
“앞으로는 무슨 일만 있을 때 오는 게 아니라 곧잘 와 보도록 할게요.”
사라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에단은 팀의 오너가 드디어 자신의 팀에 관심이 생긴 것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싱숭생숭한 마음이 되었다.
오너가 관심을 가지고 예산을 퍼붓는 건 좋지만 돌아다니는 루크가 한마디씩 던지는 말에 집중력이 상실되는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성공을 향해 가는 길에는 수많은 고난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고난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에단은 그 답을 찾으려는 듯 지상의 조명에 가리어진 하늘의 총총한 별을 응시하다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안 그래도 당신 비서가 방금 말하더군요. F1에 관심이 조금 생겼다면서요.”
“사라가 그래요?”
마치 부정할 듯 의문형으로 묻던 루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다.
“그랬죠.”
“왜 벌써 과거형입니까.”
“완주가 생각보다 위험한 거였구나 싶어서요.”
“오늘은 사고 없이 잘 끝난 편이죠.”
“하지만 사고가 날 수도 있었잖습니까. 마지막에 바퀴가 다 닳아 터진 거 봤어요.”
“레이스 중에 안 터졌으면 된 거죠.”
“혹시 터졌다면요.”
“안 터졌잖습니까.”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기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터지더라도, 레이스 카가 멈추더라도 그때는 결승선을 넘어 체커기를 받은 후일 것이라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 담대한 태도를 보던 루크는 한숨을 내쉬며 주제를 돌렸다.
“그래요. 그렇게 2등 차지한 것 정말 축하하고. 대단한 업적이라고 하더군요. F1의 신생 팀이 첫해에 시상식에 오르는 건.”
“이해해 주니 좋긴 하네요.”
“뭐 갖고 싶은 거 있어요?”
“갑자기 왜요.”
“포상이 있어야 할 거 같다길래.”
루크는 매끈한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에단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약간 들이밀었다.
“소원 있어요?”
“있죠.”
“어떤 거.”
“그런 식으로 그만 봤으면 좋겠네요.”
하다못해 레이스 카에 돈이라도 더 부어 달라고 할 줄 알았건만 예상 밖의 소원이었다. 매끈한 미소를 짓고 있던 루크의 표정에 장난기가 스쳤다.
“그런 식이 어떤 건데요?”
묻는 말에 에단은 말려들지 않으려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루크와의 대화는 원하는 대로 흘러갔던 적이 없다.
“왜요. 넘어올까 봐?”
담백하게 내뱉는 말과 다르게 루크의 기울어진 얼굴은 조명을 한껏 받아 섬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 매력을 아는 것이 분명한 모습이다.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이상하리만치 폐가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에단은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명치께가 뻐근하게 아프기만 하다. 마치 급커브의 순간 중력 가속도에 온몸이 짓눌리고야 만 것처럼.
그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던 루크의 촘촘한 속눈썹이 나붓거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의 깜빡임 끝에 그는 상체를 조금 더 기울였다. 어깨가 틈 없이 맞닿았다. 이번에는 폐가 중력 가속도에 짓눌린 듯 숨이 부족했다.
그 이상 반응을 본 루크가 불쑥 손을 뻗었다.
“에단.”
향하는 방향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에단은 그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휙 밀어 내듯 치워 버렸다. 쳐 내진 손을 허공에 잠시 그대로 둔 루크의 얼굴이 일순간 굳었지만 그 자취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매끈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는 밀쳐진 자신의 손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그렇게까지 싫어요?”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그렇잖습니까.”
“……그래요. 이것도 내 잘못인가 보지.”
두 사람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경직된 분위기 사이에서 루크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에단이 내려 둔 샴페인 잔에 가볍게 제 잔을 부딪치더니 권유 없이 황금빛의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예의 바른 인사말을 남겼다.
“오늘 축하는 진심이에요. 좋은 시간 보내요.”
가는 건가? 마지막 인사말에 에단은 물끄러미 보던 눈초리를 떼어 낼 수 없었다. 너른 등을 보이며 멀어지려던 루크가 뒤돌아 말을 남기기는 했다.
“진짜 소원 있으면 전해 주고.”
몇 걸음을 나아간 그의 모습은 곧 벌 떼처럼 달려드는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소원대로 자유로워졌지만 무언가 잡친 기분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결국 초조함에 잠식되었던 에단은 이후 접근한 몇몇 이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아들이다가 홀의 가장자리에서 머뭇거렸다.
루크를 찾는 것은 쉬웠다. 그가 있는 곳은 공기의 흐름마저 그를 중심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어수선한 분위기의 사이. 쏠린 이목을 즐기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해 보인다.
다가가려던 에단은 결국 그의 시선이 스치지 않도록 자신에게 인사하는 이들을 마주했다. 몇 번이고 인사를 거듭할수록 저 앞에 나서서 자연스레 그의 시선을 끌고 말을 이어 나갈 자신이 없어졌다.
결국 홀을 벗어나 객실로 올라왔다. 객실로 돌아와 차가운 물 아래 정신을 놓고 있기를 한참. 발을 질질 끌며 욕실을 나올 때쯤에는 발바닥에 감각이 없을 지경이었다.
에단은 빙빙 도는 머릿속으로 하루를 다시 곱씹었다. 등수를 치고 나갔던 그 순간의 감각은 헬멧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몸을 짓누르던 중력 가속도마저 생생하게 재현되어 몸을 짓누른다.
시상식, 끊임없던 스포트라이트, 질문과 관심, 축하. 아 맞다. 축하.
휴대폰을 꾸물거리며 꺼낸 에단은 피식 피어오른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부재중 전화는 백 통에 달했고 문자함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모두에게 어떻게든 답을 해야 할까. 해 본 적 없는 고민이었다.
뒤돌아 풀썩 무릎을 꺾어 침대에 누운 에단은 휴대폰을 들어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늘 걱정부터 쏟아 내던 어머니마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전화가 끊기고 이내 맥없이 옆으로 던지다시피 하며 휴대폰을 놓았다. 파티. 그리고…….
그리고…….
이 믿을 수 없는 기분의 상승 곡선을 살짝 꺾어 내는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정제된 애티튜드를 연기하듯 웃으며 멀어졌던 루크의 널찍한 등 말이다.
피로가 가득했던 눈을 치켜뜨며 천장을 노려본 에단이 홀로 생각했다.
변명을 해야 할까? 그런 의미로 표정이 굳은 건 아니었다고. 그렇게까지 쳐 낼 생각도 아니었고.
그는 다시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럼 뭐라고 할 건데. 빌어먹을.
아니. 그래도 팀 오너에게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역시…….
“아…, 젠장.”
길어지는 생각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자 에단은 손바닥으로 눈꺼풀 위를 덮어 버렸다. 그대로 수마에 젖어 든 몸이 수면의 상태로 굴러떨어지기 직전까지 마음이 저울질을 계속한다.
차라리 가서 속 시원하게 사과하는 것이 나을까.
똑똑, 하는 작은 소리를 캐치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에단은 무거운 팔을 눈꺼풀에서 내렸지만 혹시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다시 눈을 감으려 했다. 다시 한번 분명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목소리도.
‘에단.’
방금 전까지 그의 정신을 제멋대로 패대기치던 이의 목소리였기에 에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다가 잠깐 몸에 힘이 빠져 휘청거리기도 했다. 어쨌든 착실하게 룸을 가로질러 걸어가 문을 열었다.
루크는 샹들리에의 조명마저 흡수한 듯 피부에서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를 마주하니 에단은 다시 말문이 막혔다. 루크는 졸음에 한껏 겨운 에단의 얼굴을 살폈다.
“자고 있었습니까.”
“거의 잠들 뻔했죠.”
“그렇다면 미안한 일인데 내가 하나 확인할 게 있어서.”
루크가 무게를 실은 다리를 바꾸며 한 손을 문에 올렸다.
“방금 사라에게서 들었는데요.”
“……아, 제기랄. 잠깐만요.”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터지는 탄식에도 루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해했다면서요. 나랑 베르텔의 사이를.”
성공을 향한 고난에 이런 것까지 있을 줄은 정말이지 몰랐지. 에단은 얼굴을 구기듯 비비다가 정중하게 아까의 오해를 사과했다.
“네. 오해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했던 거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그래. 사과를 받아야겠어요. 내가 아무 데나 수작 부리고 다닌다며 화냈다면서요.”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습니다만.”
“날 가만 안 둘 거 같은 표정이었다던데?”
그 말을 하는 얼굴이 지나치게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에단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손을 쳐 냈을 때는 그렇게 싸한 태도로 돌아서더니, 동생과의 사이를 오해하고 사람을 수작질이나 걸고 다니는 인간 취급 한 데에는 왜 저렇게 빙글거리는 얼굴일까.
“그래요. 그런 반응을 남기게 되어 진심으로 죄송하네요.”
“그게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글쎄요. 나에게는 남의 얼굴도 보지 말라는 개소리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생각하니 짜증이 조금 났나 보죠.”
“정말 그거예요?”
“예.”
무뚝뚝한 단정에 루크는 상체를 조금 더 기울였다.
“사라가 이 말을 전해 줄 때 다행이라며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르죠.”
“왜요?”
“그녀는 내가 당신을 일방적으로 괴롭힌다고 생각했었거든.”
기울어진 자세에 서로의 거리는 그림자가 겹쳐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에단은 얼굴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참 억울해.”
퍽이나 억울하겠다. 눈꼬리를 느슨하게 늘어뜨린 루크를 에단은 차라리 마음껏 노려보았다. 폐가 짜부라질 것만 같은 기분만 억누르면 노려보는 게 차라리 후련하다.
이제는 자포자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아주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손을 들어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헤집어지고 이마를 간질이도록 헝클어져도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도무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이게 무슨 증상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에단은 더 이상 남자는 불가능하다는 암시가 통하지 않는 자신에게 새로이 중얼거렸다.
“젠장. 레이스의 다음 날 이러는 건 미친 짓이야. 제기랄.”
“응?”
에단. 한껏 들떠 감정에 휩쓸리는 게 좋은 끝으로 남을 리 없다는 거 알잖아. 빌어먹을.
하지만.
삶은 늘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 누가 알았을까. 에단 한이 모나코 레이스의 포디움에 오르고 챔피언십 점수로 상위권에 오를 것이라는 걸. 그 순간을 만끽하며 기자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파티의 한가운데 설 날이 올 줄이야. 팀 오너와 이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이 순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든 시간은 느리고 착실하게 양옆으로 흘러 지나간다. 간혹 빠르게 흐르기도 했다. 마치 레이스 카를 타고 고속의 질주를 하는 것처럼.
그리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루크의 마음 역시 어느 순간 자신을 지나쳐 흘러가리라.
그런 생각으로 에단은 푸른 눈을 응시했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인생 중 찰나일 뿐일 텐데. 그 잠깐에 지나치게 의미 부여나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과민 반응을 보이느라…… 지금을 즐기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 단단한 눈매가 이지러지는 순간, 물렁해지는 입매의 모양이 어둑한 샹들리에 빛 아래에 은은하게 형태를 그려 내었다.
루크는 지그시 웃어 보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딱딱한 문틀 위, 오늘 레이스 내내 단단한 힘이 들어갔던 손가락의 마디를 기어 올라간 손바닥이 마른 손등의 부드러운 살갗을 쓸어 올렸다.
터져 나갈 듯 붉어지는 얼굴을 마주 보던 그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흠뻑 웃었다.
“나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진짜 넘어왔어요?”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