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20x4 독일 그랑프리. 호켄하임 링.
트랙 길이 4.574km, 레이스 랩 67랩, 레이스 거리 306.458km, 코너 수 13, 랩 레코드 1:13.573
평생 레이스에만 골몰했던 에단은 요즘 다른 취미를 찾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 싶다고 했더니 처음 추천받은 명상과 요가는 실패였다. 도무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경 줄을 툭툭 건드리는 미디어 매체들의 창의적인 기사와 인터뷰, 그리고 그 분위기를 그대로 본따 둔 듯한 미묘한 팀의 분위기까지. 그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눈을 감고 집중하던 그는 루크의 얼굴마저 떠오르자 의욕이 한풀 꺾여 명상을 때려치웠다.
그다음 심해 다이빙을 추천받았고 혼자 떠올린 것은 스카이다이빙이었다. 두 가지 모두 시즌 중에는 시간이 되지 않아서, 혹은 무슨 일이 생기면 레이스 카 시트에 앉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까 생각도 접어 두었다. 안 그래도 포뮬러 원의 모든 이목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시트에 앉을 자격이 있는지 논하고 있는 이 와중에 다리라도 부러져 자발적으로 시트를 떠나는 일 따위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에단은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손가락질하던 어느 인물을 생각하면 가슴속이 뜨겁게 달아오르곤 했다. 그의 인생에서 20대의 레이스 카가 한 번에 들이닥치는 첫 커브보다 가슴 떨리는 것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건만. 역시 인생은 모르는 일이다.
실력을 아낄 필요 없다는 첫 번째 빈정거림을 시작으로(에단은 빈정거림이 분명하다고 이미 판단을 내린 지 오래였다.) 두 번째 바레인의 사키르에서의 레이스가 끝난 뒤 도착한 문자는 더욱 가관이었다.
순위를 양보해 줄 여유가 있나 봐요?
그날 앞 차의 스핀에 휘말려 한참 처진 순위는 완주했음에도 13위였다.
그리고 오늘. 독일 그랑프리 당일. 에단은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한 번만 더 리타이어 하면 이제 무슨 연락이 올지. 하지만 또다시 성적이 시원찮다면 루크의 문자보다도 언론 기사가 더욱 창의적인 비난으로 발전할 게 뻔했다.
경기장 인근의 호텔에서 나온 에단은 조지가 운전하는 차의 옆 좌석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아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시가지의 단조로운 모습에서 눈을 뗀 에단이 휴대폰을 들었다. 그 기색을 눈치챈 조지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에단. 팀에서 SNS는 허락받고 하라고 했어.”
“내가 뭐 쓰려는 게 아니라 기사만 볼 거야.”
“그것도 좀 그래.”
아침이라 아직 부기가 빠지지 않은 조지의 동그란 뺨을 보던 에단이 눈동자를 내렸다.
“괜찮아. 대충 예상되니까.”
그렇게 들어간 사이트의 굵은 글씨 중 중간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에단 한, 언제까지 태업할 것인가.’
에단은 다른 말 없이 그 제목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조지는 입을 꾹 다물었고 차 안의 공기가 한층 적막해졌다.
에단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기사를 슥슥 내렸다. 신생 레이싱 팀에서의 도전. 리암 안토니에 인터뷰. 린드베르그 레이싱의 테크니컬 디렉터 론 채프먼의 인터뷰. 2연속 우승을 놓친 페라리. 독주가 드디어 끝나 가는가.
기사의 알파벳은 검은 망막에 맺힌 채 흘러가기만 했다. 달리던 차가 감속할 때까지. 브레이크 타이밍에 몸이 밀린 그는 눈을 들어 전방을 살폈다. 서킷으로 들어가는 차들이 줄지어 가다가 갈라지기를 반복했다.
서킷 내부 도로를 달린 차는 패덕 게이트의 입구 가까운 곳에 주차되었다. 대개 같은 팀의 차들은 비슷한 곳에 주차되기 마련이었고 오늘도 평소와 같았다. 팀 감독의 벤츠, 레이스 엔지니어의 폭스바겐 등. 주변의 눈에 익은 차들을 무심코 지나치려던 그는 광택이 흐르는 긴 크림색의 보닛에 시선을 빼앗겼다.
오전의 볕이 고여 유연한 차체 위를 흐르는 광택이 범상치 않았다. 그런 롤스로이스에게 시선을 빼앗긴 이는 에단과 조지뿐만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이들 모두가 한 번씩 이쪽을 다시 돌아본다. 날렵해 보이는 각양각색의 슈퍼카와 튜닝 차가 즐비한 F1에서도 롤스로이스 팬텀은 보기 드문 차종임이 분명했다.
이걸 끌고 올 만한 사람이 이 팀에 있었나. 다른 팀 사람인데 이쪽에 그냥 주차한 건가? 추측하며 몸을 돌린 에단은 하늘색의 팀 점퍼에 양손을 찔러 넣다가 순간 떠오른 가정에 눈매를 꿈틀했다.
“조지.”
“응.”
“오늘 그 자식 와?”
그 자식이라는 표현에 조지는 단 한 치의 의심 없이 누구인지 이해했다.
“확인해 볼까?”
“곧 알 수 있겠지.”
게이트 너머 팀 빌딩을 하나씩 지나쳤다. 레드. 그린. 화이트. 각각의 팀 컬러를 바른 팀 빌딩과 피트 사이를 지나가던 에단은 하늘색으로 색을 칠해 둔 린드베르그 레이싱 팀 빌딩의 꼭대기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떨궜다. 그 앞에 서 있는, 남들보다 머리 하나쯤 불쑥 솟은 금발의 남성을 보고 입꼬리를 실룩였다. 그렇지. 에단은 그제야 낯선 롤스로이스를 보자마자 들었던 불길한 예감을 결론지었다.
그럴 것 같았다. 루크 린드베르그가 아니면 그런 차를 끌고 나타날 만한 후보가 없다.
재빠르게 선수 대기실이 아닌 피트로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무슨 기척을 느낀 것인지 감독과 대화 중이던 루크가 뒤를 휙 돌았다. 에단은 제가 노려본 걸 느끼기라도 했나 싶어 조금 놀랐다.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뺄 기색이 보이지 않는 드라이버를 향해 루크가 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에단. 오늘도 탈락하는 건 아니죠?”
순간 에단의 머릿속에는 성큼 다가가 멱살을 잡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기사 타이틀이 굵은 글씨로 흘러갔다. 에단 한, 팀 오너와 불화까지. 남은 것은 정말 실력뿐인가.
***
본선이 치러지는 일요일의 날씨는 흐리다 못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낮은 기온은 하강 곡선을 그렸고 트랙의 온도 역시 타이어의 최고 성능을 내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하나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서킷을 적시자 미캐닉들은 더욱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속도가 떨어져도 웨트 타이어를 장착시킬지, 아니면 초반에 뿌리는 가벼운 비에 적당한 인터미디어 타이어를 장착할 것인지 연신 떠드는 엔지니어들의 한 발짝 뒤에 선 루크는 팔짱을 낀 채 피트의 벽에 기대서 있었다. 헤드셋에서 들리는 정보와 장내 방송은 이제 반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점퍼 위에 가벼운 스카프까지 둘러 단단히 무장한 사라가 루크의 짙은 미소를 눈치채고는 재빠르게 설명했다.
“비 올 때 쓰는 웨트 타이어는 느리거든요. 비가 조금 올 거라고 가정하고 반쯤 마른 노면에 쓰는 인터미디어 타이어를 장착하면 미끄러질 확률이 높아지고요.”
“우리는 어쩔 거래?”
“아까 팀 회의를 들어 보니 다르게 갈 거 같아요. 리암은 웨트 타이어. 에단은 인터미디어 타이어를 장착시킨다네요.”
“두 사람 차 세팅도 다르다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타이어 보관 창고 뒤쪽에서 드라이버들이 걸어 들어왔다. 늘씬한 체형을 꽤나 두툼하게 보이도록 하는 슈트가 콕핏 안으로 사라지고, 드라이버들은 동그란 헬멧을 쓴 머리만을 콕핏 위로 내밀고 있었다.
요란한 시동과 함께 레이스 카가 피트 레인을 통과해 나아가는 뒤꽁무니를 보며 루크는 빗속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곁에 선 사라는 손짓으로 밀어 냈다.
“안 따라와도 돼.”
“저 그럼 안에 들어가 있어도 될까요?”
“응. 코코아라도 마시고 있어.”
추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그녀는 어린애 대하듯 놀리는 어투에도 별 대꾸 없이 피트 뒤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꽤 굵은 빗방울이 듬성듬성 떨어지는 피트 레인을 지나 건너편의 피트 월로 다가간 루크가 다시 자리를 지켜 섰다. 일곱 개의 자리 중 가장 왼쪽에 섰을 뿐인데 우연찮게 에단의 엔지니어의 곁에 서게 되었다.
움찔한 기색을 보이는 그에게 루크가 눈짓하며 짧게 말했다.
“집중해요.”
“네.”
그 말에 집중력을 그러모으듯 짧게 머리를 흔든 딘이 다시 화면을 보았다. 그래도 두 번째 보는 덕분에 루크도 대강 몇 개의 화면은 알아볼 수 있었다. 서킷을 달리는 모든 차들이 색색의 점으로 표시되었고. 그 옆에는 랩 타임. 메인 중계 카메라. 그리고 저 너머는 날씨 레이더인 것이 분명했다. 비구름은 옅은 색으로 뭉쳐 반쯤 서킷에 걸쳐 있는 형태였다.
귀청이 터질듯한 소음과 함께 한 번의 포메이션 랩이 진행되고 피트 월 너머 모든 차들이 도열을 마쳤다. 이제 시작이다. 모두의 숨소리가 가라앉고 피트 월의 천장을 두드리는 물방울 소리마저 조용해지는 것 같은 순간이 지나고.
사방을 찢는 굉음이 울렸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는 레이싱 카들이 피트 월 뒤쪽의 철창 너머로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루크는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에도 무표정하게 화면을 응시했다. 오늘 리암 안토니에의 출발 그리드는 여섯 번째, 에단은 아홉 번째 위치에 있었다. 첫 번째 코너와 직선 주로를 지나자마자 장내 방송의 목소리가 높았다.
“6번 코너에서 스핀! 알파 타우리의 레오가 스핀하면서 뒤따르던 르노가 함께 말려듭니다!”
“그래블 지역으로 넘어갔는데요! 후진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요!”
탈락을 연신 떠드는 장내 방송의 열기가 높았다. 그 와중에 리암 안토니에와 에단은 아직 용케 사고에 휩쓸리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딘의 통신이 연신 이어졌다.
“미끄러워? 날씨는 아직 종잡을 수가 없어.”
몇 마디를 더 주고받던 딘이 감독과 수석 레이스 엔지니어에게 의견을 전달했다.
“에단은 세이프티 카가 떴으니 웨트 타이어로 교체하는 게 좋을 거 같다고 하는데요.”
“음.”
끄트머리에 앉아 잠시 말을 않던 감독이 의견을 전달했다.
“강수량이 더 늘어날지 줄어들지 아직 반반에 가까운 확률이야. 에단은 인터미디어로 계속 달리도록 해.”
“하지만 구름이 심상치 않은데요.”
“리암이 이미 웨트로 달리고 있잖아.”
“……알겠습니다.”
딘은 감독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 짧은 지시를 전달했다.
“에단. 팀은 인터미디어로 좀 더 버텨 보자는 입장이야.”
거기에 에단 역시 짧은 답변만을 뱉었다.
- 알았어.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나왔던 세이프티 카가 들어가자 다시 고속의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루크는 달리는 차 후미에서 뿌려지는 스프레이 같은 물보라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뭐가 보여서 달리는 거지. 설마 저 의견도 제대로 전달 못 하는 레이스 엔지니어의 말만 믿고 달려드는 건가?
하긴. 달려야지. 달려서 증명해야지. 사백만 달러의 가치를. 애초에 그것을 주문했던 것이 자신이었다.
그 주문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광경을 보고 있는데도 기분이 더러운 이유는 뭘까. 루크는 왼쪽 눈을 과하게 찡그린 뒤 다시 화면을 살폈다. 피트에 들어왔다 나가느라 뒤를 지나가는 레이스 카의 물보라가 등을 적시는 것을 느끼면서도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피트 월의 끄트머리에 서서 화면을 지켜보았다. 10랩에 막 접어든 에단이 다시 말했다.
- 빗줄기가 심상치 않아. 트랙 상태가 더 안 좋아질거야.
이 순간까지도 빗방울은 여전했다. 통신을 들은 감독이 결국 고집을 꺾고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웨트 타이어로의 교체가 확정되었다.
“에단. 박스. 박스. 들어와.”
딘의 다급한 부름이 울리자마자 짧은 대답이 들렸다. 그리고 다음 커브였다. 에단의 레이스 카에 달린 카메라가 비추던 시야가 흔들린다. 균형을 잃고 쭈욱 미끄러지는 차체는 결국 방호벽의 한가운데에 속력을 잃은 채 처박혔다. 장내 방송이 다시 한번 통탄의 목소리로 외쳤다.
“아아! 린드베르그의 에단! 타이어 교체가 드디어 떨어졌는데 아쉽습니다! 인터미디어 타이어로 꽤 오래 버텼어요!”
순간 피트 월이 고요해졌다. 연달아 부르는 딘의 목소리 너머로 에단의 목소리가 바로 잡혔다.
- 미안해.
“괜찮아?”
- 모두 미안해요.
목에 무언가가 턱 걸리기라도 흐릿한 목소리였다. 그 라디오를 들은 딘이 쾌활한 척 대답했다.
“아니야. 괜찮으면 됐어.”
괜찮으면 되기는. 아무리 봐도 전략이 이상했잖아.
구매 전 크게 관심이 없었다지만 부연 설명 해 주는 이들 덕분에 이제는 루크도 어느 정도 돌아가는 눈치로 경기를 해석할 수 있었다. 글쎄, 자신이 보지 못했던 두 번의 레이스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오늘 눈 앞에 펼쳐진 레이스는 명백하게 팀 전략의 실패였다. 에단과 에단의 엔지니어는 타이어 교체를 요구했고 감독은 확률에 기대 도박을 건, 완벽한 실패 말이다.
꾸물거리듯 기어 나온 에단이 방호벽 너머 마샬들의 인도에 따라 차에 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헤드셋을 벗고 달려 나간 딘의 등을 오래도록 보던 루크는 빈 의자에 대신해 앉았다.
엉덩이를 끄트머리에 걸치고 긴 다리를 약간 굽혀 자리한 그는 눈 앞에 펼쳐진 모니터들과 알 수 없는 데이터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곁에 자리한 리암의 레이스 엔지니어의 팔을 슬쩍 건드렸다. 엔지니어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곁을 흘끔 보았다. 그 와중에도 모니터와 라디오 교신을 확인하는 것은 아주 훌륭한 자세였다.
“끝에 감독에게 전해요.”
“네?”
“나는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 완주를 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바로 대답하지 않자, 전하라니까? 하고 턱짓하는 루크의 시선을 마주한 리암의 레이스 엔지니어는 경악한 채로 입을 벌린 채 달싹였다. 하지만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푸른 눈동자는 다른 곳을 향할 기색이 전혀 없다.
결국 그 압박을 못 이겨 곁의 수석 레이스 엔지니어에게 전달했다.
“방금… 들었죠? 감독님께 전하라는데요.”
***
에단은 푹 젖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보며 메디컬 센터를 나왔다. 충격으로 울린 어깨가 뻐근했다. 내일이면 충돌을 감내한 몸의 오른쪽이 모조리 멍들겠지. 당연한 수순이었다. 레이스 카가 아작 났으니 그 안에 타고 있었던 드라이버의 몸도 아작 나는 것은.
꼴 좋네. 누가 사진이라도 찍어 가면 보기 좋겠어. 세 번째 레이스도 말아먹은 에단 한. 실력 발휘는 대체 언제?
기사 타이틀을 미리 지어내며 자조적인 미소를 짓던 에단은 앞에 짙은 가죽색의 구두코를 보고 눈을 들었다.
가벼운 움직임만으로도 시야가 빙그르르 돈다. 고막의 울림이 더욱 심해져 눈을 찌푸렸다가 편 순간, 그의 눈앞에 명백하게 길을 가로막은 루크의 매끈한 얼굴이 보였다. 진지한지 장난스러운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의 그 말이다.
그 입술이 무슨 말을 지껄일 듯 움직이는 것을 보고 에단이 먼저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 들으러 온 거 아니에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뻐근한 몸보다도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건 결국 또다시 리타이어 했다는 현실이었다. 타이어가 빌어먹게 안 맞았든, 앞 차량의 파편을 잘못 밟아 미끄러졌든, 결과는 어쨌든 리타이어다.
리타이어 한 주제에 설마 제가 바득바득 기어오르기라도 할 줄 알았을까. 부서진 레이스 카와 몸뚱어리처럼 어딘가 금이 가 버린 것인지 에단은 줄줄 새어 나오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차피 모험용으로 써먹으려고 나와 계약했던 거 알아요. 안전할 필요도, 안정적일 필요도 없지만 완주는 해야 하는 것도 아는데. 하. 알면서도 자꾸 핑계가 있을 때마다 리타이어 해서 죄송합니다.”
그 말이 꽤 뜻밖인 듯 루크는 고개를 한 번 기울였다가 선선히 말했다.
“팀이 타이어를 잘못 고른 거 같던데 뭐 어때요.”
“그리고 리타이어죠.”
무슨 일인지 꽤나 말이 통하는 상대처럼 구는데… 의심과 함께 미간을 좁히는 에단의 표정에 루크는 약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도 3연속 리타이어가 아닌 게 어디예요. 지난번에는 다 달렸다면서요.”
“…….”
“이게 아닌가.”
그럼 맞겠냐, 이 개자식아. 이 말이 에단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은 기도 안 차서였다. 대답 대신 젖은 눈꺼풀의 잔 떨림을 본 루크는 뺨을 긁적였다.
“오늘은 다른 팀 다섯 명도 리타이어 했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
“그만큼 어려웠다는 거니까…….”
축축하고 무거운 빗소리만이 두 사람의 발치를 적셨다. 저 너머 피트에서 개러지로 차를 끌어내는 미캐닉들의 소음조차도 멀었다.
루크는 에단을 마주하면 장난처럼 이번 리타이어에 대해 한두 마디를 던진 뒤 다음을 격려할 생각이었다. 분명히 그런 생각이었건만….
직접 마주친 에단은 그 격전을 지나 눈가의 핏줄이 터진 주제에 푹 젖은 머리카락이 들러붙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 몸을 두르고 있던 레이싱 슈트의 지퍼마저 끌어 내려 헐렁한 어깨를 보니 부쩍 마른 것도 눈에 들어왔다. 그 위를 흐른 빗방울이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거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 대뜸 듣게 된 말이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오늘은 이러고 싶지 않았다. 타이어 탓이라는 말도 안 통하고. 제가 늘어놓은 조금 멍청한 위로들도 안 먹히는 것 같고(루크도 방금 전 제가 뱉은 말들이 굉장히 멍청해 보인다는 것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제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대화와 맞은편에 선 채 희게 질려 가는 드라이버를 보며 루크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루크는 짧게 신음성을 내뱉은 뒤 우스갯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난 이럴 땐 미안하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서비스를 챙겨 준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 말을 여느 장난처럼 짜증으로 되받아칠 걸 기대하며 루크의 눈꺼풀이 깜빡였다. 에단의 새까만 눈동자가 갖가지 감정으로 반들거린다. 그래. 기운 빠져 있는 모습보다는 차라리 이쪽이 낫다.
핏기가 가신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린 에단의 고개가 약간 젖혀졌다.
“그럼 따라오든가.”
“…….”
순간 말문이 막힌 루크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새파란 눈을 한참이고 노려보던 에단은 옅은 한숨을 내쉰 뒤 그의 팔 부근을 툭 치며 스쳐 지나갔다.
“제발 작작 해라.”
에단의 뒷모습이 멀어져 갔다. 지나가면서 뭔가 뒤쪽으로 손이 움직인 것 같았는데 무슨 날벌레를 내쫓듯 움직인 것 같기도 했고.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분간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의도는 명백해 보였다. 꺼져, 혹은 비켜와 같은 종류의 제스처.
푹 젖은 등이 다시 한번 폭우에 젖어 들었다. 루크는 멀어지는 에단의 뒷모습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
똑똑. 문을 두드리고도 인내심 있게 기다리던 루크가 다시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똑똑. 이번에도 조용하길래 다시 한번 주먹을 굳게 쥐고 문을 두드렸다. 쿵쿵. 그래도 열리지 않는다면 더 세게 두드릴 생각이었지만 이번에는 거칠게 문이 열렸다.
얼굴이 반쯤 보일 정도의 틈만 만들어 낸 에단에게서는 더 이상 연료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대신 짜증스러운 태도로 젖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문을 열었다. 흰 티셔츠와 검은색의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이었다. 에단은 편안한 차림과 정반대의 불편한 표정으로 루크를 맞이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입니까.”
“내가 잘못했어요.”
루크는 기회가 주어지자마자 사과했다. 혹 자신이 또 말을 잘못 꺼내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에단은 기분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왈칵 성을 냈다.
“뭘 또 잘못했어? 카메라에 대고 저 자식 삼 연속 리타이어 안 한 게 기적이다 이런 말이라도 지껄였나 보지?”
“아니, 앞으로 그런 문자도 안 보낼게요.”
“왜. 편하게 계속 보내요. 여기 당신 팀이잖아.”
“그 문자. 나는 진짜 당신 실력을 믿어서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답장을 안 보내?”
“너 같으면 그딴 문자에 답장을 보내고 싶겠어?”
“나는 답장이 오면 계속 이야기할 생각으로 보낸 거였는데 당신이 답장을 안 보내니까 그런 말만 지껄인 게 되어 버렸잖아.”
“하.”
기도 안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친 에단이 문을 닫으려 했다. 얼굴이 겨우 절반 보이는 문의 간격이 더 좁아지려 하자 그 사이로 구두의 앞코를 다급하게 끼워 넣은 루크가 시뮬레이션했던 사과의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이번에는 무려 검사도 받고 왔다.
“그리고 팀에 전략 제대로 짜라고 말했어요. 아까 타이어 전략 때문에 당신이 못 탄 거 같다는 말은 진짜입니다. 그 전 기록 좋았잖아요.”
“못 알아보는 거 아니까 됐습니다.”
“오늘 패스티스트 랩 타임은 당신이 가져간 거 들었어요?”
“그건.”
“그 기록 뒤로는 비 때문에 다 같이 느려져서 안 깨졌다고 말하려는 거죠? 어쨌든 내가 부탁했던 대로 제대로 밟고 있다는 거 알아요.”
“됐어요. 애초에 그런 생각으로 날 데려온 거였던 거 압니다.”
“내가 언제 무슨 생각을 하고 데려온 건지 알려 줄래요?”
“리암이 안정적으로 달리면 나는 도박이라며. 그럼 둘이 전략을 다르게 짜는 거지. 내 쪽을 좀 더 도박에 걸도록. 아닙니까?”
“그게 그런 뜻이 되는 줄 몰랐어. 정말로.”
에단은 좁혔던 미간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팀의 운명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지난해 아부다비 레이스가 끝나고 레오가 절절히 내뱉었던 저주가 그대로 실현되는 것 같다고 생각한 날도 있었다.
세컨드 드라이버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는 팀 감독. 밸런스를 조정하느라 매 레이스마다 적응을 새로 해야 하는 레이스 카.
이 와중에 놀랍게도 매번 밸런스를 잡아 다운 포스12)를 선보이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대단하기도 했다. 컨스트럭터 팀으로서 엔진 제조에 집착하던 헤인즈의 고민을 단박에 결론 내려 준 눈앞의 새 오너 덕분이었다.
그래. 그리고 되는대로 지껄여 사람을 미쳐 버리게 만든 뒤 사과는 이상하게 상식적인 루크까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요즘 에단의 속을 가장 들쑤셔 놓는 것 중 하나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세컨드 드라이버 취급으로 바닥을 구른 게 몇 년이고 성적 비교가 몇 년인데, 이상하리만치 루크가 들쑤시는 말마다 속에서 열이 발화하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지껄이는 게 더욱 화가 나는 걸까?
아니다 그만하자. 에단 스스로도 오늘따라 과민 반응인 것을 알았다. 열을 식히기 위해 눈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던 그가 거칠게 문지른 뒤 손을 내렸다. 마음을 한껏 심란하게 하는 루크를 완전히 쫓아내기 위해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까 가요. 솔직한 사과도 고맙고. 그래요. 다 알았으니까 이만 가 봐요. 난 좀 쉬어야겠으니까.”
“전혀 알았다는 표정이 아니잖아요.”
“아니. 알았다니까. 좋아요.”
“좋은 표정도 아니잖아. 그런 표정인데 내가 어떻게 갑니까.”
“그래. 이렇게 된 김에 말하는데 그런 식으로 하는 말도 그만하지?”
“어떤 거요.”
“생각도 없으면서 자꾸 이상하게 떠보는 거 말입니다. 서비스? 심심하면 다른 사람에게 가 봐요. 자꾸 귀찮게 하지 말고. 그러다가 누가 듣고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이미 그런 일이 생기기라도 한 듯 비스듬히 문가에 기대 노려보는 에단의 눈매가 흉흉했다.
거기에도 순순히 사과할 줄 알았건만 루크는 뜻밖에 시간을 끈 뒤 대답했다.
“그건 안 되겠는데.”
“이 와중에 그따위 말장난은 계속하겠다는 거야?”
“그게 왜 장난일 거라고만 생각하지.”
“…….”
“아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어쩌려고 했어요. 정말 여기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루크는 눈동자를 슬쩍 내리깔며 눈앞의 남자에게 몸을 좀 더 기울였다.
루크의 생각을 가늠하려는 듯 시선을 피하지 않는 에단의 속눈썹은 촘촘하고 길었다. 아까 젖은 채로 빗속을 돌아다닐 때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더더욱.
표정이 드문 편인 얼굴은 꽤 남자다운 선으로 맺혔음에도 굴곡이 부드러워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붉은 기가 보이는 귓불과 둥글게 떨어지는 광대. 눈시울이 긴 눈매를 이루는 선이나 입술 산이 융기한 선과 같은 부분이. 긴 목과 반듯한 쇄골. 비율 좋은 몸과 길게 빠진 신체까지.
미끄러지는 상대의 눈동자를 따라 함께 시선을 내리던 에단이 눈매를 좁혔다. 시선은 혼란으로 한껏 흔들렸다.
“그 소리들이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고?”
“나도 어색해서 자꾸 헛소리를 지껄였는데 이제 잘해 볼게요. 미안해요.”
“아니, 잠깐만… 뭘 잘하겠다는 거야.”
“뭐든 내가 잘해 보겠다고.”
“아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제발.”
“그렇게 질색하는 이유 나도 알아. 알겠는데… 나도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거든? 내가 당신에게만 그렇지 원래는 젠틀하다는 말도 좀 듣는 편이에요.”
“그럴 리가.”
“진짜야. 그런데 자꾸 당신한테는 실수를 하네. 멍청한 짓도 많이 하고.”
“…….”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나도.”
그 와중에 멍청한 짓인 건 알고 있었구나. 에단은 뭐라고 반박해 봤자 말이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팔을 내저었다. 말을 할수록 머릿속이 헝클어지는 기분이었다.
“됐으니까 가요.”
“오늘 힘들었을 테니 푹 쉬어요. 유럽 일정 중 시간 맞으면 또 구경 올게요.”
부드럽게 맺는 남자의 태도에 에단이 고개를 저었다. 반만 열어 두었던 문을 활짝 열기도 했다. 확실한 의사 표현을 위해서.
“난 그런 거 아니니까 안 와도 됩니다.”
“좀 더 생각해 봐요.”
“아니라고.”
“다음 레이스가 이 주 후라던데. 마침 다른 레이스보다 시간이 남으니 생각해 보기 좋겠네요. 갈게요. 푹 쉬고.”
거절에도 담백하게 웃어 보인 루크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직접 호텔 문을 닫아 주기까지 했다. 굳건히 닫힌 호텔 문 너머, 멀어지는 둔중한 발걸음 소리를 듣고도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에단이 이를 사려 물었다. 뿌득하는 소리가 턱을 따라 귓전을 울렸다.
사과를 하러 왔다더니 속을 더 뒤집어 놓고 간 꼴이었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
자선 파티나 다른 일정을 잡지 않았던 에단은 다음 날 일찍 공항으로 향했다. 밤새 잠 못 이룬 게 뻔한 안색을 본 조지가 출국 수속을 마친 뒤 곁으로 다가와 에단의 어깨를 툭 쳤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 미동 없이 눈을 감고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움직였다.
“잠 못 잤어?”
“조금.”
“이번 리타이어는 다들 그럴 만했다는 반응이야. 어제 팀 회의에서도 말 나왔잖아. 좀 더 전략에 주의하겠다고.”
“그거 때문만은 아니고.”
“그래.”
다 안다는 듯 옆에 앉아 어깨를 짚어 오는 조지의 손을 느끼며 에단은 다시 눈을 감았다. 손에 들고 있던 볼캡을 푹 눌러쓰기도 했다. 캡의 그늘 아래로 보이는 마른 뺨과 핏기 가신 피부를 보던 조지는 한숨을 푹 내뱉고는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게 그런 인터뷰는 왜 해 가지고 아침부터 팀 분위기가 이런지.”
“무슨 인터뷰?”
“그거, 본 거 아니었어?”
“그거?”
왼쪽 눈만을 살며시 든 에단의 눈동자가 캡 아래의 그림자에서도 흉흉하게 반짝였다. 조지가 떨떠름한 어투로 반문했다.
“그 인터뷰 본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무슨 인터뷰.”
“우리 팀 오너.”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무섭게 에단은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휴대폰을 열어 만지작거렸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포털에 접속하자마자 상단 두 번째에 위치한 기사는 맨 위의 어제 그랑프리 우승자와 우승 팀을 알리는 기사의 제목과 똑같은 크기, 똑같은 폰트로 쓰여 있었다.
‘루크 린드베르그, 우리 팀의 목표는 우승뿐이다.’
그 기사의 옆에는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각 팀의 점수와 드라이버들의 점수를 친절하게 표로 보여 주며 등수도 매겨 두었다. 무려 한 페이지를 모조리 할애한 대단한 기사였다.
차마 믿을 수 없는 기사를 끝까지 다 읽고야 만 에단이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