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20x4년 1월. 윈체스터. 린드베르그 팩토리.
아부다비의 마지막 레이스를 끝으로 완전히 린드베르그 레이싱으로 이적한 해의 1월. 에단은 새로운 본사에 얼굴을 비친 뒤 근방의 팩토리로 향했다. 콕핏과 레이싱 슈트를 맞춤으로 제작하고 자잘한 수치를 재기 위해서 팩토리에 방문하는 일정이 필수적이었다.
헤인즈 건물을 인수한 린드베르그 레이싱의 팩토리는 영국 남동부의 윈체스터에 그대로 위치한 상태였다. 새 칠을 한 티가 나는 반짝반짝한 건물로 들어가 또 수없이 많은 이들과 인사를 했다. 그 뒤에야 치수를 잴 수 있었다.
치수를 재느라 팔을 뻗고 턱을 치켜들던 에단은 잠깐 생각했다. 설마 이 치수도 루크 린드베르그에게 그대로 전해질까.
그런 생각에 골몰하다 넘어간 다음 일정은 완성된 레이스 카의 섀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크래시 테스트를 통과한 보디 워크는 공기 역학과 미학이 함께 적용된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달리기 전까지는 성능을 확신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던 에단의 곁에 한 엔지니어가 다가왔다. 호감형의 미소를 지어 보이는 이는 색이 짙은 블론드 헤어와 갈색 눈을 가진 키가 큰 남자였다.
“치수 봤는데 비율이 좋던데요. 모델 해도 되겠어요.”
체구가 작은 편인 레이싱 드라이버들 중에서는 큰 키라지만 낯간지러운 칭찬이었다. 붙임성 있는 태도에도 에단이 물끄러미 보기만 하자 엔지니어는 손을 내밀며 자기소개를 덧붙였다.
“딘 쿠퍼예요. 당신 레이스 엔지니어죠.”
“아. 이야기 들었어요.”
에단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환대를 보이며 악수했다. 레이스 엔지니어는 레이스 내내 라디오를 통해 소통하며 가장 많은 교류를 할 사람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건 잘 지내는 편이 좋았다.
다행히 남자는 에단이 물었어야 할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드레스덴 공대에서 항공 우주 공학을 공부하다가 인턴십을 거쳐서 왔어요. 모터스포츠 팀이라면 닥치는 대로 지원했었죠. 포뮬러 2, 포뮬러 E, WEC, European Le Mans Series(ELMS)…… 나중에는 FIA와 공식 물류 파트너사에까지 이력서를 보냈다니까요. 그중 헤인즈가 불러 줬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죠. 포뮬러 원이라니.”
“나도 그랬어요.”
“2년 동안 팩토리에 출퇴근하면서 해가 떠 있는 걸 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어요. 포뮬러 원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헤인즈가 망한다는 거예요. 드라이버들이 이적할 때 이전 레이스 엔지니어들이 다 같이 나가서 자리가 비긴 했지만 내 차례는 안 올 줄 알았어요. 에단도 자기 레이스 엔지니어를 데려올 줄 알았거든요. 어쨌든, 덕분에 내가 레이스 엔지니어예요. 잘 부탁해요.”
“에단 입니다. 포뮬러 원 드라이버이고.”
에단은 딘처럼 자신을 수식할 말을 좀 더 찾으려다가 결국 설명을 짧게 마무리했다.
“뭐라도 더 설명해 주고 싶어도 운전밖에 한 게 없네요.”
“그게 당신의 업적이죠. F2 챔피언. 알파 타우리의 암흑기 같은 건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이제 린드베르그에서 새 업적을 시작할 테니까.”
멋들어지게 포장해 주었지만 에단은 가끔 묘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드라이브를 제외하면 별반 손에 남는 것이 없는 인생 같았다.
하긴, 이렇게 인생을 바쳐도 어려운 게 챔피언이니까. 그런 생각을 모르는 딘은 쾌활한 목소리로 섀시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엔지니어들 분위기 봤어요?”
“봤어요.”
“어때요?”
“좋다고는 못 하겠네요.”
“헤인즈와 린드베르그 엔지니어들이 계속 저렇게 반목하면 우리 2월 테스트 드라이빙 때 레이스 카를 못 몰고 나갈지도 몰라요.”
잠깐 방문한 정도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정도면 실제는 더 심각할 게 뻔하다. 거기에 더해진 레이스 엔지니어의 확신에도 에단은 심드렁했다.
그래도 이렇게 엉망진창인 와중에 기적적으로 나오는 것이 레이스 카였다. 애초에 희망차고 화기애애한 팀 분위기를 본 기억이 없기도 했다.
“그 전까지 어떻게든 합의하겠죠.”
“나도 그걸 바라는데 분위기가 진짜 안 좋거든요. 린드베르그는 왜 갑자기 포뮬러 원을 한다는 건지 혹시 알아요? 안 어울리잖아요.”
“지금은 전기 차 위주이지만 그래도 자동차 제조 회사니까. 레드불 같은 음료수 회사 팀도 있는데 뭐 어때요.”
그 대답에 딘은 순간 멋쩍은 미소를 보였다.
“아 참. 에단은 우리 팀 소유주와 아는 사이라면서요.”
“아니요. 전혀.”
곧바로 내뱉어진 대답은 아닌 정도가 아니라 강력한 부정이었다. 딘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우리 팀 소유주가 에단과 계약하는 데 꽤 공들였었다고 들었거든요. 그럼 팬인가?”
“그것도 절대 아닐걸요. 계약할 때 얼굴 몇 번 보기만 했어요.”
“얼굴을 보여 주기라도 했네요. 그 소유주 여기는 한 번도 안 왔어요. 회사 사람들만 와서 이미 다 제작된 섀시 밸런스나 망치고 있지. 물론 린드베르그에 인수된 건 맞지만 헤인즈가 이미 1년 전부터 준비해 왔던 레이스 카를 이제 와 수정하려 드니 난리죠.”
“어떻게 되든 잘 달리기만 해 주면 소원이 없겠네요.”
“그게 제일 어렵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이만여 개의 부품 중 대부분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하는 레이스 카의 밸런스를 완벽하게 잡아내는 것은 상위 세 개 팀 정도가 가능한 일이었다. 나머지는 운에 따른 안정성을 가지고 들쑥날쑥한 기록을 냈고 하위 팀들은 그들로부터 한 바퀴가 처지지 않도록 쫓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말수가 적은 에단을 대신하듯 계속 말을 이어 나가던 딘이 시계를 살피더니 물었다.
“온 김에 식사하고 가요. 식단 조절해야 하나?”
“코치에게 물어볼게요.”
“진짜 다 허락받아요? 좋은 드라이버네요.”
칭찬하는 게 분명했지만 에단은 왜인지 변명의 필요성을 느껴 짧게 덧붙였다.
“이것도 계약이라서.”
“장난 아니네요.”
“그러니까요.”
장난스러운 딘의 어투에도 에단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 생각보다 보고가 영 귀찮은 탓이었다.
에단은 식당 쪽으로 향하며 메뉴를 하나하나 기록해 전송했다. 딘의 말에 따르면 팩토리에 얼굴 한번 안 비치었다는 루크가 오늘따라 답장을 바로 보냈다.
“……?”
점심 식단이 괜찮은지 물었더니 온 답장은 사진 한 장이었다. 동그란 접시 위에는 스테이크와 스테이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가니시가 둘려 있었다.
뭐 어쩌라는 걸까. 좋은 식사라고 박수갈채라도 보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답장을 포기했다. 어쨌든 별말이 없었으니 식단에 참견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딘은 깨끗한 복도를 걸으며 계속 이야깃거리를 늘어놓았다.
“사실 에단이 오면 물어보고 싶었어요. 어떤 사람이냐고. 그 대단하신 우리 팀 오너를 만나 본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글쎄요. 나도 잘 몰라요.”
“그래도 보긴 했으니까.”
어떤 사람이냐……. 글쎄. 에단도 요즘 루크 린드베르그에 대한 판단을 고민하던 중이었다. 계약 전까지 이상한 소리를 곧잘 지껄이던 루크는 코치를 통해 보고받는 것이 귀찮으니 직접 연락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 말에 따라 성실하게 일정을 알린 지 꽤 되었다. 어느 문자에는 답이 없고 어느 문자에는 가끔 저렇게 뜬금없는 답장이 오곤 했다.
팩토리 안의 기온도 약간 싸늘하다 여겼지만 문을 열고 나가자 차가운 바람이 콧잔등을 훅 스쳐 지나갔다. 집업의 지퍼를 쭉 올리고 목을 움츠려 윗입술 위까지 묻은 채 걸으며 에단이 대답했다.
“나도 다음 레이스 카 공개 행사까지는 보고 결정하려고요.”
“무슨 결정을요?”
“괜찮은 사람인지 이상한 사람인지.”
다음 주 레이스 카 공개 행사에서도 헛소리를 지껄일까. 그게 아니라면 장난이 과한 정도의 정상인으로 제 판단을 바꾸어도 될 것 같았다.
***
20x4 2월 첫째 주. 린드베르그 테크놀로지 센터.
에단이 처음 방문했을 때 감탄했던 넓은 잔디밭과 로비는 기자와 언론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모양이었다. 먹구름이 낀 흐린 하늘이었지만 기자들이 커다란 카메라를 어깨에 지고 건물과 주위의 풍경을 연신 찍고 있었다. 조지가 운전대를 잡았기 때문에 그들의 표정을 살피는 게 쉬웠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차 속에서도 주차를 지시하던 직원은 에단이 탄 차도 멈추게 했다. 고개를 숙이더니 얼굴을 확인한 직원이 다른 이들과 다른 방향을 지시했다.
“관계자는 지하 1층에 주차하시면 됩니다. 자리가 준비되어 있을 거예요.”
붐비는 지상과 달리 지하 1층의 주차장에는 군데군데 비어 있는 자리가 있었다. 조지는 연두색의 날렵하게 생긴 스포츠카 옆에 주차했다. 연두색 스포츠카는 리암 안토니에가 가끔 레이스가 있는 날 끌고 오는 차였기에 쉽게 알아보았다.
도착하면 바로 레이싱 슈트로 갈아입을 거라 들었지만 에단은 지난번의 교훈에 힘입어 투피스의 정장 위에 모직 코트를 갖춰 입었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이들의 옷차림을 보자마자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홀의 대기실 쪽으로 돌아들어갔다. 행사를 준비 중인지 낮은 소음과 셔터 소리가 간간이 울리고 있었다. 그쪽을 잠깐 돌아보는데 대기실 안에서 나오는 이가 있었다.
에단이 약간 비켜서자 이미 레이싱 슈트를 갖춰 입은 남자가 나왔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와 태양 빛에 피부가 약간 그을린 키가 작은 남자였다. 남자는 나오다가 에단을 보고 반색했다.
“에단. 오랜만이네.”
“그러게. 휴가 어땠어?”
“어제까지 멕시코에 있었어. 거긴 천국이야.”
리암 안토니에와는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 중상위권에서 탄탄한 입지를 굳히고 있던 리암의 팀과 별 볼 일 없는 에단의 팀은 라이벌로 여겨지지 않았고 충돌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적당한 예의를 지켜 어울리거나 서로 인사를 하며 지냈다. 그러니 굳이 말하면 괜찮은 축에 속하리라. 먼저 옷을 갈아입은 리암은 잠시 할 통화가 있다며 에단의 옆으로 빠져나갔다.
대기실에서 받은 레이싱 슈트는 흰 바탕에 하늘색과 검은색으로 소매나 목깃 부근이 처리되어 있었다. 목깃 부근과 가슴팍에 스폰서 배지와 후원사의 브랜드들이 빼곡했다. 유럽 전역을 누비는 물류사와 은행, 에너지사의 이름 중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 것은 역시 린드베르그의 이름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에단은 다시 옆 대기실로 안내되었다. 대기실에는 소파가 몇 개 놓여 있었고 사람들이 바쁘게 드나들었다. 홍보 담당자를 스쳐 막 들어왔던 그의 레이스 엔지니어인 딘이 유쾌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에단도 웃음 비스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인사했다.
“오늘 어때요.”
“난리예요.”
“뭐가 그렇게 문젠데요.”
“엔진 부서는 어떻게 합의를 봤는데 섀시 부서는 합의 볼 생각을 안 하네요. 사이드 포드 가지고 밤낮으로 싸우고 있어요.”
“안 그래도 매번 테스트마다 다르게 가지고 나오더라고요.”
“오늘은 일단 저렇게 레이스 카를 공개하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달라질걸요.”
딘은 진심인지 장난인지 모를 태도로 낮게 속삭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걸려 온 전화를 확인하더니 눈썹을 크게 꿈틀거렸다.
“또 연락 왔네. 이따 봐요, 에단.”
딘이 나간 뒤 에단의 곁을 지키고 있던 조지도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대기실을 나갔다.
그리고 다시 문이 열렸을 때, 이번에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금발의 남자는 옆에 따라오던 중년의 비서가 하던 말을 끊어 내고 있었다.
“그건 생각할 필요도 없어. 다시 협상하라고 해.”
짙은 푸른색의 정장은 남자의 눈 색깔과 비슷했지만 어두운 톤이었다. 잘 어울렸다. 푸른색의 정장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화사한 얼굴과 금발을 살려 주는 데에도 제격인 컬러였다.
투 버튼 재킷의 단추를 하나 풀며 자리에 앉던 루크는 옆에 앉은 에단 쪽으로 몸을 자연스럽게 돌리며 다리를 꼬았다. 에단이 어떤 식으로 인사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 짧은 순간 루크는 눈동자를 위아래로 굴리며 싱긋 웃었다.
“내가 사 준 옷 입고 있으니까 마음에 드네요.”
꽤 괜찮은 인사말을 떠올리려던 에단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말을 꼭 그렇게 하는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맞잖아요. 내 팀에 내가 맞춰 준 옷.”
“그래요. 그렇다고 합시다.”
“우리 계약서 찍고 오랜만에 보네요. 어떻게 지냈어요?”
“매일 보고했잖습니까.”
“아. 그랬지.”
대답하는 폼을 보니 매일 일정을 보고하라고 한 주제에 그리 열심히 들여다본 것 같지도 않았다.
“많이 바쁜가 보네요.”
“짜증 날 정도로 바빠요. 우리 갑자기 미국 남동부에 공장 하나 짓기로 했거든요. 그러면 관세 면제해 준다길래.”
기껏해야 트레이닝과 테스트 드라이빙 정도를 하고 있던 자신이 굉장히 한가하게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루크는 곧 나가야 할 문 바깥의 소란에 한 번 시선을 주었다가 씨익 웃었다.
“이런 자리 오랜만이라 긴장되네. 어때요.”
“조금요.”
“나도. 나 손 좀 잡아 줄래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냐는 감정을 담아 노려보는 에단의 시선에 루크가 작게 웃었다.
“그거 알아요?”
“뭘요.”
“그런 표정 지을 때마다 왼쪽 눈꼬리가 먼저 위로 치솟는 거.”
“알려 줘서 참 고맙네.”
그게 뭐가 그렇게 웃긴지 한껏 웃다가 어깨를 들썩이는 루크를 보며 에단은 마음속 판단을 확고히 했다. 역시 미친놈이었다고.
그런 반응에 개의치 않고 웃던 루크가 다시 물었다.
“그렇게 매일 보고한 거 말고 재미있는 거 없어요?”
“매일 재밌죠.”
“어떤 게요.”
“트레이닝하면서 테스트 중이니까요. 팩토리도 들르고.”
“그게 재밌나.”
“그쪽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과 비슷할걸요.”
“나는 안 좋아해. 확실히 말할 수 있어.”
그 순간 직원 하나가 들어와 루크에게 다가왔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루크는 우묵하게 들어간 양 눈가를 엄지와 검지로 누른 뒤 홀의 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나 박수만 치면 돼?”
“박수는 다른 사람들이 칠 테니 그냥 웃으시면 됩니다. 차량 공개되고 식 종료되면 바로 퇴장 안내드리겠습니다.”
재킷 버튼을 다시 잠그며 걸어 나가려던 루크가 멈춰 서더니 우아한 폼으로 고개를 약간 젖혔다.
“무슨 일 있으면 알려 줘요.”
“어차피 보고받잖아요.”
“그런 거 말고 이상하게 돌아가는 일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거. 그런 일들 있잖아요. 내가 좀 바빠서 F1에 신경을 못 쓰고 있거든. 알았죠?”
그리고 루크는 대답도 듣지 않고 곧바로 열린 문을 향해 나아갔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가는 무대를 향해 서슴없이 나가는 뒷모습이 사라지고 문이 닫혔다. 떨리네 어쩌네 하는 말은 역시 우스갯소리였던 게 뻔했다. 에단은 가볍게 쥐고 있던 손을 쫙 폈다가 다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뒷문이 열리며 리암과 사람들 몇이 들어왔다. 지시에 따라 리암과 에단이 나란히 섰고 딘은 에단의 뒤에 서서 대기했다. 딘이 뒤에서 속삭이듯 에단에게 말을 걸었다.
“에단. 방금 여기 팀 오너 있다 나갔다면서요.”
“그랬죠.”
“뭐래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뭐 어려운 이야기 했어요?”
무슨 일 있으면 알려 달라니. 그래. 어려운 소리가 맞았다. 그런 두루뭉술한 말을 지껄이고 나가 버리면 들은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다행히 딘이 다시 묻기 전에 드라이버를 소개하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리암이 먼저 나가고 뒤따라 나가는 에단의 시야가 연이어 터지는 플래시로 희게 변했다.
***
20x4 2월 말. 프리시즌 테스트. 바르셀로나-카탈루냐 서킷
10개의 팀이 제작한 20대의 레이스 카를 테스트하기 위한 테스트 주간이 밝았다. 레이스 카 공개부터 불이 붙던 취재 경쟁은 공식 레이스와 다를 것 없는 열기로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서킷에 모여들고 있었다.
겨울이라 해도 온난한 기후인 카탈루냐 서킷은 겨우내 팩토리 개러지에서 준비된 레이스 카의 주행 데이터를 뽑기에 적절한 기온을 보이고 있었다.
테스트의 첫날. 비는 오지 않았고 날은 맑았다. 바람마저 멈춘 잔잔한 날이었다. 지난해의 챔피언을 차지한 팀도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이 순간. 여느 팀 못지않게 기자와 언론이 모여든 피트는 뜻밖에 린드베르그 레이싱이었다.
흰 바탕에 하늘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레이스 카의 섀시가 스폰서 브랜드를 여기저기에 박은 뒤 조립을 앞두어야 했었다. 분명 그래야만 했다.
들리던 소문의 결말을 두 눈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에단은 결국 드라이버 대기실의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모터 홈의 계단을 턱턱 내려가는 사이 저 멀리서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이 마이크를 내밀며 개떼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에단은 실수로라도 대답할까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럴 때 헬멧이라도 뒤집어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올해 들어 남부럽지 않게 받고 있는 플래시 세례가 다시 한번 에단의 얼굴 측면에서 펑펑 터지기 시작했다.
“에단. 린드베르그 레이싱은 오늘 테스트 드라이브를 진행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나요?”
“신생 팀이라고 해도 큰 실수인데 이제 막 이적한 드라이버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작 팩토리에서 기존 엔지니어들과 이번 린드베르그에서 온 엔지니어들 사이에 불화가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에단. 드라이버로서 이러한 레이스 카에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제기랄. 내가 대변인이나 홍보 담당자인 줄 아나. 들끓는 질문에 한마디 내뱉으려던 에단은 그냥 입을 꾹 다물고 피트 개러지를 향해 몇 발짝을 더 걸어 보려 했다. 기자들이 길을 내어 주었다면 그럴 수 있었겠지만 완강하게 달라붙는 사람의 벽은 겹겹이 두꺼워지기만 하고 있었다. 린드베르그의 홍보 팀과 지나가던 피트 크루들이 뒤늦게 달려왔지만 밀어 내기엔 역부족으로 보였다.
에단은 결국 걸음을 멈췄다. 그냥 드라이버 대기실에 있을 걸 그랬나. 리암은 안 나온 건가? 제가 뛰쳐나온 모터 홈을 괜스레 돌아보던 에단이 결국 가장 가까이 다가온 마이크를 당기며 정면을 응시했다.
“아까 주셨던 질문 중 하나에만 답변하죠. 제작 일정이 조금 빠듯했던 것뿐이고 내일부터는 테스트 드라이브를 진행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고 있습니다.”
“어떤 믿음이죠?”
레이스 카에 믿음을 가질 수 있냐는 질문에 대답했더니 이번에는 또 어떤 믿음이냐 집요하게 파고들어 온다. 에단은 괜히 입을 열었다는 생각과 함께 제 팔을 잡아끄는 어느 직원의 뒤를 쫓아 피트로 들어갔다. 이왕 나온 거 도대체 레이스 카가 어떻게 조립될 꼴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억세게 사람들을 밀치고 에단을 구출해 낸 직원이 다행히 그를 피트의 입구까지 밀어 넣어 주었다. 손에 데이터를 들고 있어야 할 그의 레이싱 엔지니어 딘은 빈손으로 팔짱을 낀 채 에단을 맞이했다.
그래도 헤드셋이라도 쓰고 있는 게 어디냐 싶은 모습이었다. 그의 뒤로 번드르르한 섀시를 얹은 레이스 카에 미캐닉들이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에단은 까딱 인사해 보이며 뒤를 눈짓했다.
“어때?”
“오늘은 글렀지. 부품을 이제 갈고 있다니까.”
“어디가 문제야.”
“브레이크 덕트. 팩토리에서 엔지니어들이 한판 붙더니 마지막까지 디자인 수용을 안 했어. 미친놈들.”
“내일은 달릴 수 있을 거 같아?”
“아. 그게.”
온통 팀 사람들이 대부분인 피트 한복판에서 딘은 목소리를 한껏 깔았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게… 그렇지. 이번 덕트를 합의 봐서 다이내믹 쪽이 받아들여 장착한다면 될지도 몰라.”
“무슨 개소리야 그게.”
“자기들 다이내믹 데이터에 방해된다고 덕트 더 줄이라고 난리래. 미친놈들. 이제 갈 데까지 간다 이건가?”
“감독이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안 해?”
“감독이 지금 팩토리로 가서 한판 하려는 모양인데 화합이 안 되나 봐. 오너가 관심 없어서 좋다 싶었더니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그 순간 피트 뒤로 들어오는 기자를 본 딘이 에단을 잡아채 피트의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그 팔에 끌려 몸을 숨기면서도 에단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제기랄. 빌어먹을. 관심이 없어도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 그동안 돈만 넣고 관심을 끊은 놈들이 없어서 몰랐지.
이런 정신 나간 사고가 발생한 줄도 모르는 건 아닐거다. 바빠서 신경을 못 쓴다던 마지막 말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레이싱 슈트를 더듬거렸다. 그의 휴대폰은 안에서 갈아입은 평상복의 주머니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
20x4 2월 말. 조지아.
빌어먹을 인맥. 빌어먹을 커넥션. 미국에서 루크가 가장 많이 중얼거린 말 중 하나였을 것이다. 파티가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 말을 들은 빈터는 그저 허허 웃었지만 사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유럽에서 가장 질긴 혈통을 타고난 보스가 하실 말씀은 아닌 거 같아요.”
“그러면 뭐 해. 여기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데.”
“저 사이에 바로 끼어들 자리를 만든 것 자체가 보스의 인맥과 커넥션을 설명하는 훌륭한 예시죠. 대체 뭐가 불만이신 거예요?”
“내 저택으로 부를 수 없는 게 귀찮아.”
“아하. 그러시구나.”
사라는 보스의 대답에 아주 무성의하게 대답한 뒤 일정을 체크하며 졸린 눈을 비볐다. 널따란 리무진에 둘러앉은 세 명 중 일정을 체크하고 있던 그녀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연신 태블릿 피시를 통해 들어오는 연락을 확인하던 그녀는 저 멀고 먼 대서양 너머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서킷. 오늘이 테스트 드라이브 첫날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체되는 린드베르그 레이싱. 프리시즌 테스트 1일 차 오전 세션 소화 불가 의사를 밝혀…….
“보스. 지금 보고할까요?”
“정말 급하거나 내가 손댈 수 있는 것만.”
“음……. 그럼 오늘은 그냥 넘길게요. 내일 아침에 빈터가 브리핑할 거예요.”
“그래.”
사라의 손가락이 움직이자 전해진 소식은 내일의 일정으로 넘어갔다. 연미복에 가까운 슈트를 차려입은 루크는 꽉 졸린 목의 타이와 번들거리는 공단 재질로 감싸인 자신의 모습을 끔찍하게 여기는 것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어서 돌아가 옷을 벗어 던질 의지뿐인 사람을 붙잡아 이미 늦어진 테스트 레이스를 굳이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여기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요즘의 루크는 아예 그쪽에 신경을 끊은 것 같기도 했다. 대신 이곳 미국 남동부 조지아주의 팩토리 착공을 어디까지 진행할 것인지가 최대의 관심사 같았다. 자신이 점찍었던 레이싱 드라이버와 계약하는 데 열을 올렸던 그 순간을 한때의 추억으로 제쳐 둔 사람처럼
그래도 간간이 문자는 하시는 거 같던데. 역시 지금 말해야 하나. 골몰하던 사라의 신경이 작게 진동하는 휴대폰 소음으로 기울었다.
루크는 자동차 시트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휴대폰의 진동을 바라만 보았다. 액정에는 눈에 잘 익지 않은 번호가 떠 있었다.
아예 처음 보는 번호는 아니었다. 먼저 걸려 온 적이 전혀 없어서 눈에 잘 익지 않은 것뿐이었다. 루크는 휴대폰을 들어 귓가에 가져갔다. 적막이 길어지자 상대가 먼저 물었다.
-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요?”
- 내가 누군지는 알죠?
“모르면 차단하고 비서들한테 넘겼겠지. 웬일이에요. 전화는 처음이지 않나.”
- 일 생기면 연락하라고 했었죠.
“그랬지. 무슨 일 있어요?”
- 오늘 테스트 드라이브를 해야 하는데 차가 완성이 안 되었어요. 오늘까지만 그런 상태면 참아 보려 했는데 내일도 간당간당하다잖아요.
루크는 순간 휴대폰을 내리며 사라에게 입 모양으로 물었다. 테스트 드라이브가 뭐야? 이어지던 통화를 유추하던 사라가 눈치를 보다가 속삭였다.
“올해 쓸 레이스 카 테스트하는 거요. 일주일 동안 하는 거래요.”
“아. 그래……. 그게. 잠깐만.”
이번에는 루크의 눈이 곁에 앉은 빈터를 향했다.
“제레미에게 전화해 봐.”
지시를 재빠르게 이행한 빈터의 휴대폰을 받아 든 루크가 남은 왼쪽 귀에 가져다 대었다. 빈터? 하고 묻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대고 그가 재빠르게 용건을 물었다.
“제레미. 테스트 드라이브에 대해 아는 거 있어?”
- 루크? 그래. 그거 무슨 일이야? 온통 그 이야기뿐이야.
“큰 문제인가 보네.”
- 웃기지도 않는 일이지. 레이스는커녕 끌고 나올 레이스 카를 만들지도 못했다는 거잖아!
“그 정도야?”
제 형의 반응으로 일의 경중을 결정한 루크가 다시 빈터에게 전화를 넘겼다. 정중하게 루크의 용건을 부가 설명 하는 빈터의 목소리보다 소리 높여 루크가 대답했다.
“나 미국이라 아직 못 봤어요. 그거 어떻게 해야 돼요?”
- 레이스 카가 나와야죠.
“왜 안 나온 거지?”
- 당신네 회사에서 온 엔지니어들과 여기 엔지니어들이 한판 해서라던데요.
“음……. 최악이군. 누가 제일 문제인 거야.”
그 여유로운 목소리에 기어코 에단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 당신이 얼굴은 안 비치고 에어로다이내믹 데이터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 린드베르그에서 온 엔지니어들이 의견을 안 굽힌다잖아.
“그럼 걔들이 문제인 건가?”
- 내 생각에는 당신이 제일 문제야!
“그럼 나를 자르나? 그건 안 될 일이고. 해결해 봅시다.”
일단 말은 내뱉었지만 루크도 머리를 굴려야 했다. 샴페인을 연거푸 받은 뇌가 쉽사리 돌아가지 않아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하나. 레이스 카가 안 나왔고, 엔지니어들끼리 불화라. 화해를 시키면 되려나?
루크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벽이라도 되는 양 에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도 꽤 긴 정적 끝에, 루크는 스친 듯 들린 소리에 놀리듯 중얼거렸다.
“울어요?”
- …….
“진짜 그런 거 아니죠?”
- 기가 막혀서 대답을 안 한 겁니다.
대답하는 목소리는 오해하기에 충분하도록 느리고 먹먹했다. 루크는 조금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하며 허리를 바로 폈다. 마치 그 맞은편에 에단이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 최선을 다한 차를 주겠다면서요.
“내가 고의로 그런 건 아니야.”
- 빌어먹을 알파 타우리도 레이스 카는 제때 가져다줬단 말입니다.
“지금 거기랑 날 비교하는 겁니까? 너무하네.”
- ……그래요. 빌어먹을. 마음대로 생각해.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루크는 눈을 조금 치켜뜬 뒤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전에도 에단이 먼저 끊지 않았나?
그의 시선이 조지아의 도로를 달리고 있는 리무진의 밖을 향했다. 가장 어두운 순간의 정점을 지나고 있는 하늘이 새까맣다. 그는 눈을 굴려 드물게 눈치를 보는 듯 웃고 있는 사라에게 물었다.
“보고 왜 안 했어?”
“방금 손댈 수 있는 거나 정말 급한 거만 하라고 하셔서요. 이미 테스트 드라이브 오늘은 못 했고 내일 할 거라고 발표했대요.”
“말로는 내일도 어려울 거 같대.”
“진짜요? 누굴 잘라야 되지?”
당신이 제일 문제라던 목소리가 어쩐지 귓전을 계속 웅웅 울리는 것만 같았다. 피로 때문인 게 분명했다. 루크는 몸을 기울여 운전석과 연결된 앞의 칸막이를 열고 말했다.
“공항으로 가.”
***
테스트 드라이브 3일 차.
날씨는 지중해성 날씨임을 감안해도 훈풍이 불었다. 볕도 적당했다.
점퍼를 목 끝까지 여미고 나왔던 에단은 따뜻한 날씨에 지퍼를 다시 내리며 피트 뒤의 공터를 가로질러 걸었다. 어슬렁거리는 기자들이 보였지만 홍보 팀이 통제하여 저 너머에서 시끄러울 뿐이다.
할 일이 밀린 미캐닉들은 에단의 곁을 스쳐 급한 걸음으로 지나간다. 첫날과 둘째 날 개판이었던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순조로운 분위기였다. 이상할 정도로 말이다. 마치 정상인 척, 순조로운 척 모두가 안간힘을 쓰는 것만 같은 평화다.
그 원인을 전해 듣고도 믿기지 않았던 그는 긴 목을 빼 주변을 둘러보다가 피트 쪽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통로의 앞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의 편의를 개의치 않고 기대선 장신의 남자가 있었다.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눈가를 약간 찌푸린 옆얼굴이 선명한 이목구비를 드러낸다. 이른 훈풍이 이마에서 콧대로 이어지는 미간 사이를 훑고 지나갔는지 얕게 헝클어진 금발이 드리워졌다.
그 모습에 에단의 시선이 머문 이유는 마주칠 순간의 인사말을 고민한 까닭이었다. 오랜만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보다 좀 더 거리감을 둔 인사말을 건네야 할지.
그 순간 허공을 응시하던 루크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에단의 새까만 동공을 마주 본 그는 눈꼬리가 살짝 휠 만큼 깊은 미소와 함께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오랜만이네요.”
지금껏 루크가 지었던 표정 중 가장 호의적인 표정으로 보였다.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느라 여전히 무표정한 낯을 마주한 루크가 입술을 비죽였다.
“불만인 건 알겠는데 그래서 바로 달려왔잖아요.”
“압니다.”
“그러니까 표정 좀 풀지.”
“아…….”
제 얼굴에 손을 올려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던 에단이 대답했다.
“표정은 원래 이래요. 불만이 있거나 그런 게 아니라.”
“원래 그렇게 딱딱한 표정이라고?”
“예.”
게다가 루크에게서 순순히 사과의 말을 들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놀란 것도 있었고. 물끄러미 보던 에단이 고개를 숙인 뒤 그의 곁을 스쳐 들어가려 했다.
루크는 할 일이 딱히 없는지 그런 에단의 곁에 따라붙었다. 쌓아 둔 타이어 사이를 지나는 동안 낮은 목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나에게 뭐 또 보고할 건 없어요?”
“이미 팩토리 뒤집어 놓았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러진 않았어요.”
“몇 명더러 진짜 집에 가라고 했다면서요.”
“말만 그런 거죠.”
“어쨌든. 팀의 다른 문제는 저보다 다른 엔지니어나 팀원들이 더 잘 알 겁니다.”
“따로 전해 들었어요.”
“그럼 왜 묻는 겁니까.”
“우리 다른 거 있잖아요. 당신 사생활.”
크게 뜨인 에단의 눈매가 자신을 훑어보자 루크는 입꼬리를 더욱 올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응. 그런 거.”
“없습니다.”
“진짜?”
“없다니까.”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당신에게 아무 일이 없다는 게.”
에단이 결국 짜증을 담고 노려보자 그 잠깐 사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팀 오너는 이미 멀어져 준비된 레이스 카로 다가간다. 에단은 성큼 멀어지는 그의 널따란 등을 보며 혼자 생각했다. 역시 레이스 카로 한 번만, 딱 한 번만 들이받아 버리고 싶다. 포뮬러 원 규정 중에 팀 오너를 밀어 버리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던 걸로 아는데…….
***
프리시즌 테스트 3일 차 오전의 햇살은 쾌청했고 기온과 습도도 적당했다. 불어오는 바람은 남동풍으로 미약한 편이었기에 섀시 위를 흐르는 공기의 데이터도 적절하게 얻을 것으로 보였다.
다행인 일이었다. 팩토리 엔지니어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 데이터도 부디 손에 넣길. 에단은 이런 생각과 함께 이어폰을 꽂은 뒤 방염 천을 쓰고 그 위에 헬멧을 마저 썼다.
맞춤으로 제작해 온몸이 꼭 맞아 드는 콕핏과 머리를 죄어 오는 헬멧까지. 주변의 소음이 잦아든 중심에서 에단은 자신의 몸이 오로지 앞으로 쏘아져 나가기 위한 도구로만 느껴졌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약간 숨이 가빠 오는 압박감을 느끼며 스티어링 휠을 쥔 그는 오로지 눈앞의 한 점만을 집중했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미캐닉도, 팀 크루들도. 마지막으로 팔짱을 낀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루크의 모습마저 지워지며 오로지 한 점만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이 헬멧 안에서 차분히 굳어 갔다.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쏘아져 나가는 레이스 카의 뒤꽁무니를 보던 루크가 피트 레인을 가로질러 피트 월로 다가갔다. 다양한 진행 상황이 피트 월의 화면에 가득했다. 서킷의 상황과 날씨를 체크하는 화면. 레이스 카로부터 즉각적으로 전달되어 오는 데이터의 그래프까지.
이미 열 몇 바퀴를 돈 리암의 데이터를 노려보던 루크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에단의 레이스 엔지니어가 화면을 확인하며 연신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리어 그립? 데이터상으로는 양호해. 다시 체크해 볼게.”
피트 월 너머 서킷을 달리는 머신의 요란한 엔진음이 연달아 울렸다. 지축을 울리며 서킷을 진동시키는 그 소리에 루크는 왼쪽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에단의 레이싱 엔지니어가 하는 말을 들어 보려 집중했다. 안 그래도 못 알아듣는 말은 소음이 섞이자 더욱 이해가 어려웠다.
그런 루크의 표정을 보고 다가온 감독이 부연 설명을 곁들였다.
“원래 프리시즌 테스트에는 성능이 크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데이터를 통해 밸런스를 맞춰 나가는 과정이죠.”
“그래요.”
루크의 탐탁잖은 표정을 성능에 대한 불만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변명 없이 루크는 연이어 이어지는 레이스 엔지니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 섹터 랩 타임은 23.8초야. 100랩 정도 돌아 보자고. 알았어.”
아무리 집중한다 해도 제 곁에 붙어 팔짱을 낀 팀 소유주를 무시할 만큼 신경 줄이 두껍기에는 아직 딘의 경험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무시할 만한 존재감도 아니었고. 딘은 눈을 끔뻑이며 피트 월 화면에 고정했던 눈동자를 약간 왼쪽으로 굴렸다.
마침 이해하지 못할 데이터를 보는 대신 딘의 움직이는 입 모양을 빤히 보고 있던 루크의 파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루크는 눈살을 찌푸리며 턱짓으로 지시했다. 마치 똑바로 집중하라는 듯한 제스처 같았다. 지금 제가 집중을 못 하는 게 대체 누구 때문일까요? 라는 말은 속으로만 삼키고 딘이 다시 눈알을 제자리로 굴렸다. 헤드셋 너머로 들린 에단의 목소리 때문이기도 했다.
- 언더스티어가 너무 심해.
“밸런스가 안 맞는 거 같아?”
- 아직 모르겠어. 좀 더 달려 볼게.
“다음 시케인 코너에서는 조금 감속해 봐. 계속 체크 중이야.”
뒤통수와 귀 사이. 그 어느 부근이 뚫릴 듯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에 딘은 양손을 모아 맞잡다가 다시 풀기를 반복했다. 무슨 꼬투리라도 잡을 사람처럼 노려보는 이유가 대체 뭘까.
간간이 들려오는 리암의 소식에 루크가 관심을 보이는 순간은 아주 잠시였다. 곧이어 다시 곱지 않은 시선이 돌아오기를 몇 번.
해가 중천을 지나 점차 반대의 각도로 기울어지는 시간 동안 딘은 마음속으로 혼자만의 결론을 굳혀 갔다. 친한 사이냐 물었을 때 흔치 않게 곤란한 표정을 지었던 에단의 표정이 이 때문이었을까.
무엇이든 트집을 잡으려는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면 도무지 설명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리암의 데이터를 보는 순간에는 별다르지 않은 표정이 에단의 텔레메트리10)를 보는 순간만큼은 저렇게나 굳어진단 말인가.
그래서 계약도 질질 끌고 언론이 제멋대로 말하도록 던져두었던 것일까. 작년의 사정을 대충 귀동냥으로 전해 들었던 딘의 착각은 에단이 랩 수를 더해 갈수록 깊어만 갔다.
그때 코너를 돌던 레이스 카가 크게 흔들리는 것이 메인 카메라에 잡혔다. 동시에 레이스 카에 부착된 온 보드 카메라에 보이는 세상의 시야도 뒤흔들린다.
커브를 돌며 연석을 깊게 타던 레이스 카는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옆의 자갈밭으로 처박혔다. 다행히 충돌은 없었다. 지직거리는 소리 뒤 에단의 목소리가 바로 들렸다.
- 미안.
“괜찮아?”
- 응. 순간 타이어 그립이 없었어.
에단이 소화한 랩을 확인한 딘이 단호한 어투로 대답했다. 등 뒤를 의식한 말이기도 했다.
“130랩 넘게 소화했어. 거리로 치면 600km가 넘었다고. 네 잘못이 아니야.”
- 데이터는?
“충분해. 안 그래도 들어오라고 할 생각이었어.”
- 그렇다면 다행이고.
딘은 그 와중에 처음 호흡을 맞춰 본 에단의 스타일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말이 많지 않으므로 이쪽이 더 신경 써서 질문해야 하는 편이군.
이어서 통신을 마무리하며 자갈밭에서 후진에 어려움을 겪는 레이스 카를 수습하러 달려가는 이들을 화면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왼쪽의 눈치를 살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돈 대는 놈들이 성적에 혈안이 된 건 알았지만 사고가 난 화면을 보면서도 저렇게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을 일인가. 루크는 더할 나위 없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은 겁니까?”
“네. 다행히 충돌하지 않고 중심을 잃어 스핀한 거니까요. 130랩이나 돌았고 순간 중력 가속도가 열 배쯤 느껴졌겠지만 괜찮을 겁니다.”
딘에게서 옮겨 간 시선은 화면이 뚫어질 듯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턱을 단단하게 굳힌 루크가 몸을 돌렸다. 피트 레인을 가로질러 멀어지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딘이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레이스 카에서 빠져나와 트랙의 바깥으로 걸어 나오는 에단의 모습도 카메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
첫날 테스트에도 참가하지 못했던 레이스 카가 이 정도의 성능을 보일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분위기가 다소 부드러워진 팀 회의를 마친 뒤 오늘의 주행을 언급하던 딘도 그 점에 동의했다.
“정말 다행이야. 나는 우리가 오늘 테스트를 한 것 자체가 기적으로 여겨져.”
“그래도 개발 테스트 때 주행해 보면 꽤 괜찮았잖아.”
“그렇긴 한데 너무 들쑥날쑥했으니까. 어쨌든, 내일은 좀 더 달려 보자고. 수고했어. 푹 쉬어.”
푹 쉬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데이터를 잔뜩 옆구리에 낀 딘이 멀어지고 에단은 곧바로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들어오는 순간부터 묵직하게 어깨를 누르는 옷들을 하나하나 벗어 던진 그는 샤워 부스로 들어가 물을 왈칵 틀었다. 두피를 적신 물줄기가 후끈하게 덥혀진 체온을 순식간에 내리며 얼굴과 목덜미를 따라 흘러내린다.
기록에 중점을 두고 달린 게 아니라지만 팀메이트가 5위의 기록을 가진 날 자신은 9위의 기록을 가졌다는 게 기분 좋은 일일 수는 없었다. 특히 마지막을 사고로 마무리한 경우에는 더더욱. 하지 못했을 때는 하고 싶어 안달 나던 프리시즌 테스트이건만 막상 결과를 보니 마음이 다른 의미로 무거워지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더 이상은 레이스 카의 핑계도, 다른 드라이버 때문에 자신이 희생된다는 핑계도 댈 수 없다. 오늘의 결과는 오롯이 자신의 실력이다.
한참 뒤 샤워 가운을 걸치고 나온 에단은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는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알맞은 간격으로 벌렸다. 레이스 카를 조종하는 스티어링 휠을 쥐기에 딱 알맞은 간격이었다.
눈을 반쯤 감은 에단은 아까 균형을 잃고 스핀했던 2섹터의 주행을 다시 복기했다. 직선 주로. 8번 커브. 9번 커브. 그리고 10번.
그때의 진동과 차체를 통해 전달되던 타이어의 감각에 몰입하려던 순간, 호텔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몰입감은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감았던 눈을 바로 뜬 에단이 문 쪽으로 다가갔다. 조지이거나, 혹은 팀의 누군가이거나. 오늘 테스트에 대해 더 말하고 싶은 딘일 수도 있다. 그런 추측을 하느라 누구인지 묻지 않고 문을 열었다.
불쑥 열린 문틈으로 보인 턱 끄트머리에 에단은 시선을 조금 더 위로 올렸다. 가까이 서면 예상보다 키가 큰 편인 루크가 반쯤 연 문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에단이 생경하게 마주한 만큼 루크도 방 안에 있던 이의 차림이 뜻밖이었다. 그의 시선이 사선으로 깊게 파인 가운의 사이로 떨어졌다가 별안간 정신을 차린 듯 길쭉한 목을 따라 올라왔다.
혈색으로 조금 상기된 얼굴색과 탁해진 눈빛, 젖은 기색이 완연한 검은 머리카락까지.
루크는 잠깐 타이밍을 놓쳤다가 눈매를 살짝 휘며 예의 바르게 물었다.
“쉬는 중인데 내가 방해했어요?”
“아니요. 테스트를 복기 중이었으니 괜찮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문간에 세워 두어도 될지. 에단은 자신의 차림새를 멋쩍게 내려다보다가 결국 룸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비켜섰다. 루크는 문간에 기대 오른 다리에 중심을 약간 옮긴 채로 고개를 수그렸다.
“아까 사고.”
“네. 그건.”
“그것도 내 잘못은 아니죠?”
“그렇진 않죠.”
“그럼.”
“있을 수 있는 차체의 밸런스 문제죠. 그리고 아직 새 레이스 카에 적응하는 중이기도 하고요.”
“리암 그 친구는 사고 안 내던데요.”
어떤 성격 좋은 드라이버라 해도 프리시즌 테스트 첫날 스핀을 한 이상 저 말을 듣고 곱게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에단은 본인이 그렇게 좋은 성격이라 여기지도 않았다. 루크와 다른 각도로 삐딱해진 에단의 입이 열렸다.
“일단, 진동이 너무 심해요. 엔지니어들이 마지막까지 다투다가 부품을 조립해서 그런지 밸런스가 조금씩 안 맞는단 말입니다. 바지 보드, 노즈, 프론트 윙. 리어 윙. 그 외 자잘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서 테스트를 하는 건데……. 미스 파이어로 엔진 출력도 중간에 한 번 부족했었는데 그건 알아요? 아니, 내 말을 알아듣기는 하나?”
“아니.”
당당하게 대답한 루크가 미간을 좁혔다.
“다음부터는 누구든 끼고 올 생각이야. 젠장.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그러면 그렇지. 에단은 순간 웃을 뻔했던 입술에 힘을 주어 참아 냈다. 이 남자에게 질질 끌려와 피트를 활보하고 다닐 비서가 누구일지 몰라도 에단은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루크는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아도 꽤나 피곤하게 만드는 편이었다. 그게 무슨 일을 시켜서든, 혹은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곤두서게 하기 때문이든.
사고에 대해 더 캐물을 줄 알았던 루크는 좁힌 미간을 약간 펴며 굽혔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럼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다는 거죠?”
“아마도요. 이제 데이터를 토대로 엔지니어와 미캐닉들이 새로 세팅하겠죠.”
“그럼 됐네. 갈게요.”
“뭐야. 그게 답니까?”
“가기 전에 물어보러 온 거였어요. 또 내 잘못은 없나.”
“어디 가는데요.”
“조지아. 잠깐 온 거라 당분간 못 와요. 또 공장이나 어디서 싸우면 이야기 전해 줘요.”
쓸데없이 개인적인 질문이었지만 루크는 순순히 제 행선지를 알려 주었다. 바쁘다더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문제가 있다는 말에 바로 달려와 싸움을 찢어 준 소유주였다. 갈등의 해결과 봉합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싸움을 뜯어말리고 의견을 묵살해 버린 것 뿐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자기 소유의 팀을 자기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만든 것일 뿐이지만……. 말하는 것이 옳은지 확신을 할 수는 없었지만 간다니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에단의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고마워요.”
돌아서려던 루크는 그 말에 조금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에단을 마주 보았다. 이번에도 자신의 표정이 문제인가 싶었던 에단은 손을 들어 제 뺨을 한 번 더듬거렸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다는 특징은 서킷 위에서 어떤 모욕을 받아도 그를 보호해 왔지만 이런 경우에는 하등 쓸모가 없었다. 다시 한번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와 줘서 고마웠다고요. 진심이에요.”
“내가 할 일이라면서.”
“귀찮아한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루크는 그 말에 입꼬리를 조금 당겨 웃으며 홀로 생각했다. 비난인지 칭찬인지 원.
“그렇게까지 귀찮아하진 않아요. 모터스포츠를 즐기는 내 모습을 다들 지켜볼 텐데 모양 빠지게 뒤에 처져 달릴 순 없다니까.”
“어떤 이유건… 어떻게든 해결해 주러 온 게 고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귀찮아한다고 비난하려던 게 아니라요.”
“알았어요.”
“진심이에요.”
“알았다니까요.”
“그래요. 알았으면… 이만 가 봐요.”
친절하게 복도의 갈 방향을 안내해 주는 에단의 손끝을 물끄러미 보던 루크는 정반대로 손을 불쑥 뻗었다. 갑자기 다가온 손은 헐렁하게 묶여 가슴팍이 조금 드러난 에단의 샤워 가운 깃을 당겼다. 순식간에 가슴팍이 가려졌다.
갑자기 스친 손톱의 감촉에 소름이 일었다. 에단은 순간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반응도 못 했다. 루크는 좁아진 샤워 가운의 틈을 보며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갈게요. 조신하게 있어요.”
“……말없이 갈 순 없습니까?”
“성적 받아 볼 테니까 잘해요. 진짜야. 보고도 꼬박꼬박 하고.”
몸을 돌린 루크의 멀어지는 구둣발 소리가 호텔을 울렸다. 그 뒷모습이 복도의 끝에 다다르기 전, 에단은 문을 당겨 닫았다. 루크가 여며 준 샤워 가운의 앞섶을 다시 열어젖힌 에단은 낯선 어색함에 홧홧한 목덜미를 연신 쓸며 방 안으로 돌아갔다. 방 안이 쓸데없이 더웠다.
***
프리시즌 테스트의 최종 결과는 이후 조지아로 전달되었다. 큰일이 있을 때에만 전달하라고 했더니 이후 문제 없이 진행된 테스트 결과는 루크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어느 날 아침 침대가에서 꾸물거리며 일어나 커피를 받아 마시던 중 보고서 한 장으로 요약되어 올라왔다.
F1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이도 한눈에 알아보도록 친절하게 정식 명칭으로 설명된 테스트 결과를 읽던 루크가 앞에 선 크리스에게 물었다.
“우리 1위 했었어?”
“에단 5일 차에 1위 한 번 했다던데. 대단하지.”
“그 외에는 성적이 왜 이래?”
“진짜 한 방만 있는 모양이야. 다른 날은 좀 들쑥날쑥하더라.”
8위. 10위. 7위. 에단의 성적과 또 다른 드라이버인 리암 안토니에의 안정적인 성적을 본 루크가 보고서를 다시 넘겼다. 정말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의 사고를 겪고 루크의 왕복 스케줄을 잡았던 비서진은 그 뒤 정기적으로 F1 레이싱 팀에 대한 보고를 꼬박꼬박 올렸다. 언론의 반응과 프리시즌 테스트 종료 후 전문가들의 의견을 간추린 보고서 등. 루크는 대부분 보고를 건성으로 넘겼으나 완전히 지나치는 법은 없었다.
드디어 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대대적인 보상 범위를 돌아보기 위해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던 어느 한낮이었다. 차체가 긴 리무진에 타고 있던 루크는 내부에 설치된 모니터로 호주 그랑프리의 중계를 뒤늦게 보고 있었다. 린드베르그 레이싱의 공식 기자 회견장에서 오가는 질문들은 사전에 조율된 것이었지만 거기에 약간의 변주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방금과 같이.
“에단. 올해의 목표를 물어봐도 될까요? 린드베르그의 이적과 프리시즌 테스트의 굴곡 있는 성적으로 인해 많은 팬들의 예측이 중구난방으로 갈리고 있어요.”
“그중 가장 좋은 예측치가 제 목표죠.”
표정이 그리 다양하지 못한 에단의 특징이 이런 기자 회견에서는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루크의 시선을 본 사라가 물었다.
“기자들 인터뷰 질문 좀 더 잡을까요?”
“됐어. 저 정도는.”
루크는 시선을 거두어 자신의 무릎에 올려진 태블릿 피시로 관심을 돌렸다.
“보스 이야기 나오는 것만 잡을까요?”
“알아서 해.”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호한 태도였다. 사라는 아직 내려지지 않은 판단을 보류하며 쥐고 있던 휴대폰에 온 연락을 확인했다. 조지아 주지사의 연락이었다. 휴대폰이 세 번 울리기 전 재빠르게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녀가 통화 버튼을 누르며 업무를 시작했다.
***
20x4 호주 그랑프리 - 앨버트 파크 서킷.
트랙 길이 5.303km, 레이스 랩 58랩, 레이스 거리 306.124km, 코너 개수 16 랩 레코드11) 1:23.123, 앨버트 파크 호수를 둘러싼 레이아웃.
올해 포뮬러 원의 개막전이었던 호주 그랑프리의 소식을 루크가 전달받은 것은 호주 그랑프리의 챔피언이 결정된 지 하루가 지난 후였다. 루크에게 그랑프리의 결과가 뒤늦게 전달된 이유는 다양했다. 일단 시차가 맞지 않았고 호주 그랑프리 당일은 GM과 린드베르그의 합작 법인이 조지아 애틀랜타 인근에서 배터리 생산 공장의 기공식을 연 날이었다. 그런 좋은 날 보고하기에 좋은 성적이 아닌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어 주었다.
기공식의 뒤치다꺼리마저 마친 다음 날 오전, 선선한 공기를 즐기고자 호텔 레스토랑의 테라스에서 조식을 기다리고 있던 루크는 왼 팔꿈치를 테이블에 기대 턱을 받친 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집안의 소식을 전해 주었던 빈터는 방금 전 자리를 비웠고 회사 일을 가지고 올 사라는 늦을 거라는 말을 미리 전해 두었다. 오전 10시쯤 올라오라고 했으니 이제 딱 올 시간이기는 했다.
그의 시선이 무심코 왼손에 채워져 있던 은색의 손목시계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푸른 다이얼 위를 돌아가는 정교한 초침 중 하나가 12에 닿기 직전, 모두 비운 주변 테이블 사이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테라스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들렸다.
맞은편의 의자를 빼서 앉는 사라를 루크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늦으면 월급에서 까려고 했는데.”
“그러실 거 같아서 절대로 안 늦잖아요.”
“어쩐지.”
가볍게 대꾸한 루크가 보고서를 넘겨받았다. 설렁설렁 넘어가는 보고서의 페이지를 본 사라가 설명을 덧붙였다.
“주지사는 3 팩토리까지 착공을 확실히 해 주기를 원하더라고요. 확정해 주기만 하면 상무부 장관과 함께 상하원에 확실하게 힘을 써 주겠다고 연락 왔어요.”
“우리 1 팩토리 착공 일정이 어떻게 돼?”
“3년 안에 완공해서 그 해 말에 양산에 들어가는 일정이라고 해뒀어요.”
“조금 당긴다고 말만 해 놓고 3 팩토리 부지 미리 준비하면서 의사 전달해 둬. 합작 법인에 이미 26억 달러를 부었는데 설마 도망가겠냐고. 그쪽도 성의를 보여야지.”
“그렇게 할게요.”
“GM에도 그렇게 말해 두고.”
“네. 보도 자료는 알아서 할까요?”
“나 말고 크리스랑 같이 확인한 다음 발표해.”
“본사 쪽에는 독일의 주요 소재와 부품을 미국으로 수출하는 발판이 될 거라고 보도하고 미국 쪽에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추후 미국이 전기 차 시장의 격전지가 될 것이라는 보도로 돌려 둘게요.”
군더더기 없는 지시를 체크하던 사라는 건성으로 넘어가던 페이지가 갑자기 멈춘 것을 보았다. 뒤쪽에 무슨 보고를 붙여 두었더라? 사라가 미처 기억을 떠올리기 전에 루크가 물었다.
“우리 졌어?”
“네?”
“호주 그랑프리.”
“아. 그랑프리. 맞아요. 착공식 날이라 따로 말씀 못 드렸어요.”
“응. 우리 예선은 5위, 8위였고.”
“그때까지는 언론 반응 좋았어요. 프리시즌 테스트 때 섀시로 마지막까지 갈등이 있었던 이유가 더 좋은 레이스 카의 밸런스를 위한 첨예한 대립이었다고 기사가 나와 주기도 했구요.”
“둘 다 리타이어 하고 나서는 뭐래.”
“새로운 팀의 혹독한 데뷔전. 그런 식이죠.”
“에단은 8랩에. 리암 안토니에는 28랩에서. 예선은 잘했다면서 왜 이러는 거야?”
“예선은 차 간 간격이 좀 넓은 편인데 본선은 스무 대가 다 같이 출발하니까요. 에단 한은 앞 차를 제치려고 했는데 다른 차 뒷바퀴에 프론트 윙이 날아갔대요. 리암 안토니에는 브레이크 결함이요.”
“이것도 내가 신경 안 쓴 탓일까?”
“글쎄요. 이번에는 그렇지 않은 거 같아요.”
사라의 대답을 들은 루크는 테이블 위에 뒤집어 두었던 휴대폰을 들고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연락 중인 루크를 잠시 기다리던 사라는 혹시 하는 생각에 질문했다.
“보스. 누구에게 문자 하는 거예요?”
“에단.”
“뭐라고 하셨어요?”
“일부러 실력을 아낄 필요는 없다고 했어.”
“아하.”
사라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실력이 안 좋다고 대뜸 쪼아 대는 팀 오너보다는 저렇게 우스갯소리인 양 말하며 넘어가는 오너가 당연히 낫기야 하겠지만.
“이미 온 언론이 까고 있는데 보스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뭐라고들 하는데?”
“값어치를 못 하네. 시트를 뭘로 샀느냐 등등… 많죠. 그런데 보스 왜 에단만 그렇게 괴롭혀요?”
“내가 괴롭히긴 언제 괴롭혔어.”
“지금도 문자로 괴롭히셨잖아요.”
“괴롭힌 거라니.”
루크는 그 말이 대단히도 억울한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실력을 아끼지 말고 달리라는 뜻이야. 에단 잘 탄다며. 안 그래?”
“정말요?”
“응.”
“보통 사람은 그걸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걸요. 그리고 리암 안토니에에게는 절대 문자 안 하시잖아요.”
“그 사람 번호는 몰라.”
“아. 그러시구나.”
사라는 알려 드려요? 하고 질문하려다가 또 한 명의 드라이버가 컨디션 난조를 겪을까 걱정되어 그만두었다. 루크가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