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영국 – 실버스톤 서킷.
경기가 있는 레이스 위크 중 본선이 치러지는 일요일. 실버스톤에는 최소 20만 명의 인파가 집결할 것이라는 예상이 연일 방송되곤 했다. 그 인파의 한 중심이 될 줄 몰랐던 사라는 스탠드석의 한가운데에 앉아 연신 열이 오른 얼굴을 부채질했다. 이게 다 곁에서 선글라스를 낀 채 앉아 있는 보스 덕분이었다.
루크는 레이스 위크 목요일에 별안간 사라의 책상을 똑똑 두드리더니 물었다.
‘실버스톤 본선 레이스가 언제야?’
‘금요일까지 연습 주행이고 토요일은 예선이니까 일요일이겠네요.’
‘그럼 일요일 자리로 구해 줘. 그랜드 스탠드석이 가장 좋은 자리라고 제레미가 말하던데.’
‘하필이면 그걸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바로 아래 출발을 위해 서 있는 레이스 카들이 보이고 그 너머 팀별 전략을 전달하는 피트 월7), 그리고 그 너머 각 팀의 피트 안까지 훤히 보이는 그랜드 스탠드석은 분명 가장 좋은 자리가 맞았다. 죄다 모르면서 하필 그것만큼은 정확하게 알고 지시하는 이유가 뭘까. 사라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었다.
‘그런데 보스……, 영국이 포뮬러 원에 미친 나라인 건 아시죠?’
‘그래?’
‘실버스톤 레이스 당일에 그 근처 트랙에서 레이스 카 엔진 소리라도 듣겠다고 모여드는 인파가 최소 20만 명이라잖아요. 중계로 보세요!’
‘눈으로 보고 싶어.’
‘그러면 차라리 VIP 입장권을 구해 올게요. 피트 위층 패덕에서 보세요.’
‘인수 발표도 안 났는데 벌써 소문 돈다잖아. 귀찮을 게 뻔해.’
참으로 그럴싸한 이유였지만, 일반적인 루트로 3일 전 그랜드 스탠드석을 구해야 하는 사라에게는 기가 막힌 일이었다.
루크는 그 후 당연히 지시대로 이행될 것이라는 듯 진행 상황을 묻지 않았고, 사라는 휴대폰에 불이 나도록 연락해 암표를 구해야 했다. 게다가 무려 세 장의 표를 구해 내는 데 성공했다. 자신이야 상관없지만 루크 린드베르그를 경호원도 없이 그 인파의 한가운데에 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렇게 기적적으로 구한 세 장의 표를 가지고 입장한 세 사람은 지금 그랜드 스탠드석의 한가운데의 열기 안에 갇혀 있는 중이었다. 흐린 하늘은 곧이라도 비바람을 뿌릴 것처럼 흐리기만 했다. 루크는 스탠드석 위의 가림막 너머 드러난 하늘을 노려보다가 한마디 했다.
“오늘도 영국의 날씨는 빌어먹을 환영을 해 주는군.”
그 말에 화답하듯 천둥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그와 비슷하게 우르릉거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레이스 카가 한 대씩 맞은편 피트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주변에서 열화와 같은 함성이 들끓었다.
장내 방송의 억양도 점차 딱딱한 발음이 도드라지도록 강해지고 있었다.
“레이스 시작까지 30분 남았습니다. 오늘의 실버스톤의 날씨는 최고네요.”
“정말 웃기지도 않아.”
사라는 어림도 없다는 듯 혼자 중얼거렸다.
팸플릿과 중계 라이브를 켜 둔 태블릿 피시를 품에 가득 안은 사라는 헐렁한 청바지와 흰 셔츠를 입고 루크의 왼편에 앉아 있었다. 루크의 오른편에는 사라가 기어코 끼워 넣은 경호원이 함께했다. 거의 2m에 육박하는 키를 가진 거대한 체격의 경호원은 사방의 열기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듯 무뚝뚝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가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던 팸플릿을 흐트러뜨렸다. 대충 그러모으며 사라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루크가 몸을 기울여 말했다.
“그렇게 구하기 어려운 실버스톤 레이스 표라면 와서 좋은 거 아니야? 나 같은 상사가 어디 있겠어.”
“보스. 저 결혼했고 주말에만 남편 보는 거 기억하시죠?”
그 말에 루크는 잠깐 말을 하지 않았다가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당연하지. 작년에 결혼했잖아.”
“재작년이에요!”
“그랬나?”
“또 잊어버리셨죠.”
사라는 루크를 노려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 빌어먹을 보스는 지나치게 비상한 머리를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자신이 관심 있는 것 이외에는 모조리 잊어버리는 굉장히 편리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아마 지독한 자기중심적 사고 때문일 것이라는 게 주변 사람들의 평가였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던 몇 가지 사건을 거쳐 사라는 이제 루크의 이런 태도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게 된 지 꽤 되었다. 일단 한번 알려 주면 1, 2주 정도는 기억하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보상이 확실한 덕분이었다.
“평일 중 알아서 쉬어. 보너스 챙겨 줄게.”
“넉넉하게 넣어 주세요. 꼭.”
선글라스를 내리고 장난스럽게 윙크하는 루크의 말에 사라는 쐐기를 박았다.
그녀는 부채질을 멈추며 출발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건너편의 피트를 바라보았다. 포뮬러 원 실버스톤 그랑프리에 참가하는 열 개의 팀 피트는 레이스를 준비하며 각기의 분주함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 위 VIP들을 위한 박스석이었다. 전면 유리로 트랙을 향한 뷰를 시원하게 터놓았고 에어컨을 가동 중인 것이 보였다. 비가 올 듯 한껏 습도를 머금은 미지근한 날씨에 사람들과 섞여 있으려니 사라는 치솟는 불쾌지수를 참기 어려웠다.
정말. 이미 소문 난 인수를 뭐 그리 숨기겠다고 여기서 고생인지. 참지 못하고 자신의 보스를 흘겨보는 순간 레이스 카가 출발선 앞에 차례로 멈춘다. 루크도 넌지시 그곳에 시선을 주며 하얀색 피케 셔츠의 윗단추 하나를 풀었다.
사라의 손가락이 저 멀리 향했다.
“오늘 본선 출발 자리는 어제 예선인 퀄리파잉의 성적으로 결정돼요. 다섯 번째 그리드8)에서 출발하는 검은색 레이스 카가 리암 안토니에. 프랑스계 드라이버이고 저희와 계약을 논의 중이에요. 그리고 곧 미팅할 에단 한은 열세 번째 출발이네요.”
“정말 괜찮은 드라이버인 거 맞아?”
“들리는 말에 의하면 또 레이스 카 업그레이드 때문에 예선 때 고전했대요.”
루크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만 얕게 끄덕였다. 매번 좋지 않은 결과의 어디까지 차의 핑계를 댈 수 있을 것인가.
한참 귀가 먹먹하도록 주행하는 레이스 카들의 소음과 고무 타는 내음이 사방을 훑고 지나갔다. 바람이 불기 전까지 가시지 않는 내음에도 개의치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이들 사이에서 루크는 베이지색 코튼 팬츠로 감싼 다리를 한 번 접었다가 풀었다. 스탠드석의 자리는 그의 큰 덩치가 끼어 있기에는 다소 좁은 감이 있었다.
15분. 10분. 시시각각 가까워져 오는 레이싱 시작 시간에 맞춰 이곳은 열기의 도가니였다. 루크가 제 뒷자리에서 악을 쓰는 젊은 남자의 고함에 슬쩍 눈가를 찌푸린 순간, 더 큰 소음이 고막을 때렸다. 시작을 알리는 장내 방송이었다.
“2022년 월드 포뮬러 챔피언십. 열 번째 서킷은 이곳 영국의 실버스톤입니다!”
“이날을 기다려 왔어요. 실버스톤의 영혼. 역사. 그 모든 것이 살아 숨 쉬는 이 서킷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릅니다.”
한껏 분위기를 고조하는 빠른 방송에 숫제 주변은 아우성을 쳤다. 선두의 일반 차를 따라 모든 레이스 카들이 한 바퀴 시범 주행을 하던 중이었다.
서킷의 노면에 툭툭 번져 가는 얼룩은 착각이 아니었다. 각 피트와 자동차와 통신을 하기 위한 피트 월이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물방울은 끝내 묵직한 대기를 뚫고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예고되었던 비가 내리네요.”
“비가 내리면 서킷의 운명은 바뀝니다. 오늘의 운명은 누구를 향하게 될까요!”
“비가 내리면 결과가 많이 바뀐대요. 미끄러지기도 하고 사고도 잦으니까요.”
“그렇게 사고가 많아?”
“다들 세계 정상의 드라이버들이니 큰 사고는 없어요. 트랙 밖으로 나가거나 방호벽에 부딪치는 정도니 걱정 마세요.”
“그래.”
짧은 반응을 보인 루크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사방이 조용해졌다. 출발 직전. 모든 레이스 카가 예선의 순위에 따라 이 열로 늘어선다. 초록기가 레이스 카의 맨 뒤에서 흔들리고 출발 신호를 위한 빨간 불이 하나씩 켜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모두 켜진 붉은 빛이 일제히 점멸하는 순간, 지금까지와 비교할 데 없는 거대한 소음이 경기장을 덮쳤다.
“지금 출발합니다! 선두에 토니! 아니, 엔조가 치고 나갑니다. 첫 코너를 접어드는 순간, 두 대가 충돌합니다!”
비 때문이라 해도 지나치게 이른 사고였다. 해일 같은 함성에 눈을 찌푸렸던 루크는 연이은 굉음과 함께 펼쳐지는 광경을 선글라스 너머로 바라보았다.
코너를 향해 꺾던 레이스 카들 중 두 대가 서로 부딪치더니 길게 스핀해 뒤따르는 레이스 카를 덮쳐 드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부서진 차체가 허공을 향해 튀어 오르는 장면이 슬로 모션처럼 펼쳐졌다.
***
첫 코너부터 큰 충돌이 있었던 레이스는 세 바퀴를 천천히 돈 후에야 재개되었다. 그때부터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레이스 카 뒤로 물보라가 일기 시작했다. 그 물보라를 뚫고 끊임없이 꼬리를 무는 차들의 질주가 연이어 이어졌다.
비바람 덕분에 가끔 들이닥치는 물방울을 뺨에서 닦아 내며 루크는 선글라스를 접어 위 포켓 주머니에 꽂았다. 곁에서 말없이 고개만 좌우로 움직이던 사라도 혼잣말처럼 감상을 내뱉었다.
“영상으로 보던 것보다 빠르네요. 곧 마지막 랩이에요.”
“순위는?”
“리암 안토니에는 3위와 4위를 다투고 있어요.”
“에단 한은?”
그 역시 알면서도 되물은 것이었다. 혹시 자신이 조금이라도 순위를 잘못 알고 있을까 싶어서. 사라 역시 전광판과 중계를 확인하고는 냉담한 어투로 말했다.
“12위요. 다섯 대가 리타이어 했으니 뒤에서 3, 4위를 다투고 있네요.”
물방울조차 뒤흔드는 함성이 이어졌다. 체크 깃발이 흔들리고 물보라에 희게 윤곽이 보이는 레이스 카가 결승선을 통과했다.
“헤센! 메르세데스의 헤센이 실버스톤 그랑프리의 챔피언입니다!”
그다음. 다음. 루크가 오늘 주시하기 위해 왔던 레이스 카 중 한 대는 세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해 포디움에 올랐다. 다행인 일이었다. 한 대라도 온 보람이 있군. 그리고 나머지 한 대는…….
선두와 한 바퀴가 넘게 처진 12위가 결승선을 통과했다. 장내 방송은 연이어 들어오는 레이스 카들을 짤막한 감상으로 들려주었다.
“에단 한. 오늘 멋진 경기를 치렀습니다.”
“팀의 타이어 전략이 실패한 것으로 봐야겠죠.”
루크는 그 방송을 귀담아들으며 각양각색의 머리색 너머 트랙을 주시했다. 레이스 카는 결승선을 지나 한 바퀴를 돌고 다시 피트 레인으로 접어들고서야 멈춘다. 일위부터 순위 팻말 앞에 차례로 멈춰 선 모습이 거의 멈춘 부슬비 너머로 보인다. 1위, 2위, 3위. 그리고 줄지어 이어진 레이스 카를 비추던 카메라가 에단 한에게 잠시 멈추었다.
“타이어도 그렇지만 파손된 프론트 윙으로 리타이어 하지 않고 완주한 것이 대단합니다.”
전광판에 비친 레이스 카는 너덜거리는 차의 앞부분을 매달며 달리다가 힘겹게 멈춰 섰다. 잠시 뒤 흠뻑 젖은 늘씬한 체형의 드라이버가 좁은 좌석에서 일어서는 것이 비친다. 땅에 내려온 남자는 제 헬멧을 벗어 내고는 두상을 감싼 흰 천마저 벗어 손아귀에 쥔다.
손을 들어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걷어 내자 곧은 이마와 반듯한 콧대가 드러났다. 헬멧 덕분인지 매끈한 피붓결이 희게 보였다. 광대부터 흘러내려 입술의 굴곡에 맺힌 물방울을 문지른 뒤 다시 머리를 쓸어 올린 그는 시상대를 응시한다. 마침 카메라가 그 모습을 정면으로 비추었기 때문에 강렬한 눈매를 직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돌아서는 드라이버의 뒷모습을 오래 비추던 카메라 역시 곧이어 돌아간다.
비스듬히 앉아 있던 루크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했다. 실없는 웃음에 시선이 모이자 그는 미소를 갈무리하며 대꾸했다.
“웃기잖아.”
“뭐가요?”
“12위가 1위를 노리고 있다는 게.”
글쎄, 뭐가 그렇게 미련이 돋는 걸까. 미련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의 가능성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에단이 자신의 레이스 카를 댄 가장 끄트머리와 시상대 사이, 빽빽하게 서 있는 레이스 카의 그 어느 드라이버도 저만큼 열렬한 열망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의 일행을 제외하고는 모든 관객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루크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따라 일어난 사라가 반색했다.
“저희 이제 가요?”
사람이 몰리는 시상대가 아닌 반대쪽을 응시하던 루크는 다른 질문을 했다.
“저기 한번 들렀다 갈 수 있나?”
“연락해 볼게요.”
특권을 활용하는 일은 그녀의 보스가 지시하는 것들 중 가장 쉬웠다. 사라는 두 번의 짧은 전화 통화 끝에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패덕 입구에 에스코트 요원을 보내 두겠다고 하네요. 헤인즈로 갈까요?”
“지금 가면 볼 게 있으려나. 성적도 안 좋잖아.”
“글쎄요. 이제 곧 시상식이래요. 3등 안에 들지 않은 드라이버들과 레이스 카가 모두 피트로 돌아갈 테니까 그거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럴까.”
“그런데 정말 어떤 걸 보시게요? 확인할 거 있으면 미리 준비해 두라고 할게요.”
그 질문에 루크는 특별한 대꾸를 하지 않았다.
빗속에서 분투하는 포뮬러 원 레이스를 본 것만으로 무언가 새로운 감흥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뭐랄까. 루크는 불명확한 생각 속에서 경호원이 터 준 길을 따라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모두가 시상대를 향해 환호하는 순간이었다.
패덕에 도착하자 두 명의 에스코트 요원은 자신의 몸집보다도 거대한 검은색의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들을 마주하고 나서야 루크는 뒤늦게 생각했다. 시상식의 리암 안토니에를 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레이스가 끝난 피트의 뒤는 소란스러운 와중에 짐을 싸는 이들 때문에 어수선할 뿐 딱히 재미있을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비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쳐 우산은 안 쓰느니만 못한 것이 되고 있었다.
기름 냄새와 타이어 탄 내음이 물씬 풍기는 광경을 무감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레이스 카를 끌어내고 해체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레이스 엔지니어들과 인터뷰를 위해 움직이는 기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카메라를 감싸거나 외투로 머리를 감싼 채 달려가다가도 루크 일행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그가 지나간 뒤에 대놓고 턱짓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 분위기를 읽은 사라는 기가 막혀 말했다.
“어차피 이렇게 올 거면 뭐 하러 스탠드석을 가신 거예요.”
“그래서 조용히 다니고 있잖아. 모자도 썼고.”
“보스는 그냥 눈에 띄잖아요.”
태생부터 단련된 애티튜드가 더해진 장신의 미남은 어딜 가도 시선을 끄는 편이었다. 그 존재감을 가장 잘 알고 이용하는 것이 바로 본인이었고.
시선을 모으며 사람들 사이를 걷던 그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캠핑카 같은 트레일러 중 간혹 사람의 얼굴이 프린트된 것들이 있었다. 그중 초록색으로 천장을 칠해 둔 트레일러의 넓은 면에는 에단 한의 얼굴이 흑백으로 프린트되어 있었다. 약간 비스듬히 서 정면을 응시한 자화상 같은 모습이었다.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한 루크는 이력서랍시고 내민 사진보다 이쪽에 차라리 한 표를 주었다.
걸음을 더하자 초록색으로 프린트된 피트의 뒤편이 나왔다. 알파 타우리. 그 이름을 보던 루크는 아래 벽에 기대서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빗방울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피트의 뒤편, 에단은 이어폰을 귀에 끼고는 팔짱을 낀 채였다.
젖은 물기를 제대로 닦지 않았는지 검은 머리칼과 눈망울이 아직 젖어 있었다. 루크는 그 앞에 멈춰 섰다. 사진보다 차가운 인상의 에단은 지친 것 같기도 했고 희게 질린 것 같기도 했다. 걸레짝이 된 타이어와 질질 끌리는 프론트 윙을 끌고 52바퀴를 돌았던 드라이버답지 않게 그는 대단히 무력해 보였다.
루크는 그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질퍽한 대기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겹쳤다.
흥미 어린 시선을 감추지 않던 루크는 다가서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범람하듯 쏟아지는 빗줄기에 얼굴이 흠뻑 젖는다.
내민손을 응시하던 드라이버가 이윽고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에단 한.”
“…….”
“팬입니다.”
에단은 그 말에도 왼 눈썹을 꿈틀할 뿐이었다. 그러곤 눈앞에 선 루크를 찬찬히 응시했다. 모자로 가려진 시선의 아래, 입꼬리의 모양을 고스란히 읽어 낸 후에는 머리를 새로 적신 빗물을 털어 내며 입을 열었다.
“하.”
한숨과 함께 타 버린 심지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움직였다.
“웃기지 말고 꺼져.”
그리고 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젖혀 우중충한 하늘을 보던 에단은 눈을 감아 버렸다. 눈앞의 어느 것도 신경 쓰지 않으려는 듯.
닫힌 눈꺼풀의 가지런한 속눈썹을 보던 루크는 허공에 내민 손을 거두며 피식 웃었다. 눈치 빠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뒤 시선이 흐르듯 지나치고 걸음이 멀어졌다.
이어서 열 개의 팀을 그저 눈에 담기만 했다. 인수할 예정인 헤인즈의 피트 뒤편에서 잠시간 묵묵히 머무르다가, 다시 몸을 돌리며 사라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저희 드라이버 후보를 바꿀까요?”
아까의 만남을 상기한 사라의 물음에 루크는 이제 멀어진 녹색의 알파 타우리를 등지며 대답했다.
“우리 차가 저거보단 나을 거잖아.”
“아마도요.”
“그럼 됐어.”
글쎄.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열렬한 눈빛이라 그런가. 그간 가슴에 응고되어 있던 단단한 권태감이 물렁해지는 기분이기도 했다.
각 피트의 미캐닉들은 기계 위에 방수포를 씌우는 등 움직임이 분주했다. 제가 보기엔 별 소용없는 짓 같았다. 에스코트 요원이 펼친 커다란 우산의 아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루크가 바지의 양 주머니에 손을 가볍게 쑤셔 넣으며 물었다.
“미팅이 언제더라.”
“수요일이요.”
“주말로 미루고 중간에 파티 어때.”
“저 이번에는 같이 안 갈 거예요.”
“응. 이번 건 빈터에게 말해.”
자신의 거절이 선선히 받아들여지고 나서야 사라는 휴대폰을 꺼내 일정을 체크했다.
“어떤 파티 가시게요?”
“피렐리 자선 파티.”
피렐리는 포뮬러 원 레이스에 쓰이는 공식 타이어 스폰서 회사의 이름이었다. 실버스톤 그랑프리의 애프터 파티 중 하나인 이름을 듣자 사라는 어이없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눈에 안 띄려고 스탠드석을 가신 의미가 정말 없잖아요. 공식 타이어 스폰서의 자선 파티에 참가하시면 빼도 박도 못하겠는데요.”
“눈에 안 띄게 구석으로 자리 마련해 봐.”
그리고 루크는 뒤를 엄지로 대충 손가락질했다.
“드라이버들도 초대장 정도는 받았겠지?”
“확인해 볼게요.”
***
실버스톤 서킷에서 호텔로 돌아온 저녁. 사라는 에단의 개인 매니저에게 전화를 했다가 다섯 번째 이어지는 통화 연결음을 듣자마자 뚝 끊어 버린 뒤 혼잣말했다.
“나는 분명히 전화를 했어. 전화를 했는데 매니저가 받지 않은 거야. 그리고 당장 내일 파티에 참석해 달라는 건 아주 급한 부탁이니 당사자에게 직접 연락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완벽한 합리화가 완성되자마자 그녀는 연락처를 찾아 에단 한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재빠르게 눌렀다.
억만장자가 함께하는 사업과 유럽의 유명 인사를 마주하는 데 시큰둥해진 지 오래였지만 보스가 이상한 관심을 보이는 대상과 통화하는 일은 흥미로웠다. 심지어 매력적인 남성인 데다가 F1 드라이버이기까지 하다면 그 흥미는 비할 데 없이 높아지는 법이다.
전화는 한차례 긴 통화 연결음이 끝나도록 받지 않았다. 잠시 통화를 종료했다가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날 그런 관심이 아닌 척 마지막에 얼버무렸지만 루크는 스스로 알고 있을까. 자신이 관심 없으면 조카의 숫자조차 둘인지 셋인지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라는 걸. 아마 그조차도 잊고 있을 거다.
그녀의 콧노래가 끊길 무렵 통화 연결음도 끊겼다. 사라는 귓가에 휴대폰을 가까이 대며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에단 한 맞나요?”
- 누구시죠?
낮은 톤의 목소리가 휴대폰의 조악한 음질 너머로 선명하게 들린다. 영국 영어의 딱딱한 악센트가 부드럽게 들리는 음성에 그녀는 혼자 매긴 평가를 기억 속에 남겨 두었다.
“린드베르그사 대표의 비서 사라 올슨이에요. 저희 이야기는 매니저를 통해 전달 받으신 적이 있을 거 같은데요.”
- ……아하. 네. 반갑습니다.
남자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가 반가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린드베르그의 연락을 받으면 다들 기쁨을 못 감추는데 이 업계는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홀로 생각하던 그녀는 그 이유를 하나 떠올렸다. 혹시 스폰서를 물었던 일 때문인가.
그녀의 보스는 눈치껏 하라고 했지만 도무지 이런 일을 눈치껏 전달할 방법이 없던 사라는 ‘그쪽 스폰서도 받아요? 공식적인 일 말고. 무슨 말인지 알죠?’ 하고 솔직하게 질문을 전달해 두었었다.
여타 스포츠가 모두 돈을 필요로 한다지만 포뮬러 원은 차원이 다른 액수의 금액이 필요하다. 자본의 첨단. 돈을 태워 바퀴를 굴린다는 스포츠의 선수치고 스폰서 이야기 한번 건넸다고 껄끄러워하는 반응이 꽤 신선했다. 그녀는 환심을 사기 위해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이 전혀 없는 기색의 상대방에게 용건을 읊어 주었다.
“월요일의 자선 파티에 참석해 줬으면 좋겠어요. 런던에서 있을 피렐리의 애프터 파티요.”
- 무슨 일입니까. 수요일에 계약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요.
“보스가 거기서 잠깐 얼굴을 봤으면 한다네요.”
계약 전 얼굴을 보자는데 설마 거절할 이는 없으리라. 하지만 사라의 예상보다 에단의 대답은 금방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대답했다.
- 초대장이 어디 있는지 찾아 봐야겠네요.
“못 찾아도 괜찮아요. 우리가 미리 말해 둘게요.”
사라는 웨이브가 풀린 왼쪽 머리를 손가락으로 습관적으로 꼬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당신 매니저인 조지에게 연락을 좀 더 신경 써 달라고 부탁해 줬으면 해요. 이 사안도 조지에게 연락하려 했는데 전화를 안 받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연락드린 거예요.”
- 매니저가 모든 일을 맡고 있어서 바쁜 편입니다. 당부해 두겠지만 혹시 연락이 안 된다면 제게 직접 연락 주세요.
“그래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내일 자선 파티에 늦지 말아 주세요.”
- 늦은 밤 수고 많네요. 좋은 밤 돼요.
에단은 전화를 받은 짧은 사이 지친 듯한 목소리로 통화를 끊었다. 사라는 끊어진 휴대폰을 잠시 보고는 내려놓았다. 정석적이지만 그래서 마음에 드는 인사말이었다.
***
피렐리의 파티는 런던의 유서 깊은 호텔 중 하나에서 진행되었다. 다시 말하면 유서 깊은 만큼 규모는 작고 실내 장식은 고전적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런던 외곽임에도 불구하고 도심의 그 많던 차량이 모조리 호텔 앞에 줄지어 늘어선 것만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문을 거쳐 잔디가 깔린 정원과 조각상 사이를 달린 긴 리무진에서 두 사람이 내렸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겠다며 가 버린 사라를 대신해 빈터가 루크의 곁에서 함께하고 있었다.
큰 격식을 차리지 않은 짙은 회색의 스리피스 슈트 차림에 행커치프를 꽂은 루크는 쏠린 시선 사이에서 가볍게 눈인사를 해 보이며 계단을 올랐다.
그가 초대장을 보이고 입장함과 동시에 홀의 시선이 쏠렸다. 그 시선을 가리듯 조금 앞으로 서며 빈터가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의사를 표현하듯 루크는 단호한 걸음으로 홀 중앙을 가로질러 붉은 융단을 깔아 둔 계단을 올랐다. 홀의 소란스러움 사이 다양한 언어들이 섞여 있었다. 그중 몇 가지는 대강의 단어로 알아듣던 루크가 대외용 미소를 보이며 속삭였다.
“사람이 적다더니 의외네.”
“보스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팀마다 감독이며 한 명씩 사람을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따라온 사람까지 하면 꽤 되지 않을까요.”
“포뮬러 원 팀 사는 사람 처음 본대?”
“새 팀이 참가하는 건 4년 만이라고 합니다.”
“그럼 구경할 만하네.”
루크는 그들의 관심을 선선히 수긍하며 대외용 미소를 유지했다.
올라온 2층은 아래층보다 사람이 덜했지만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순간 루크의 가까이에서 빈터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일정을 설명했다.
“FIA 회장을 먼저 뵙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피렐리 홍보 담당자와 같이 있다고 합니다. 그다음 F1 중계권을 가진 FOM 측 사람을 만나 보고 다른 팀 사람들과 인사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팀이 몇 개더라.”
“아홉 팀이죠.”
“많네.”
왼팔을 들어 올린 그는 소매 아래로 드러난 녹판의 금색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에단은 언제 봐?”
“8시 45분부터 10분 동안 뵙자고 약속했습니다. 2층으로 바로 오라고 다시 일러두겠습니다.”
“그래.”
더 이상 두 사람만의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정면에 길을 터 주듯 사람들이 물러난 사이로 백발의 대부분인 백인 남성 한 명이 있었다. 마이클 코넬리. FIA 회장입니다. 하고 속삭이는 빈터의 말을 듣자마자 루크가 환히 웃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나 저 사람이랑 안 맞을 거 같아.’
웃음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발언을 속삭인 루크가 그들의 환대를 받으며 섞여 들었다.
***
회장급은 10분, 팀 감독은 5분. 그보다 직급이 낮은 대리인의 경우 3분가량. 빈터의 완급 조절에 따라 쉼 없이 악수하고 다니던 루크가 드디어 숨을 돌린 순간이었다. 다음 인도가 없자 따라붙는 몇 개의 눈을 피해 구석으로 다가갔다. 사람이 없는 창가에 자리 잡은 루크는 대리석 난간에 팔을 한쪽 올려놓고는 상체를 조금 기울여 바깥을 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호텔의 입구가 훤히 보였다.
“이제 시간 됐나?”
“아까 도착했다고 합니다. 데리고 올까요.”
“길 잃지 않게 바로 데리고 와.”
빈터는 허리가 구부정하도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사라졌다.
개떼처럼 덤벼들던 사람들은 한 바퀴의 순회공연 후 명백한 거절의 몸짓을 보이는 루크에게 곧장 다가오지 않았다. 간혹 그의 앞을 서성거리며 눈길을 던지기는 했어도. 루크는 그 순간 아예 등을 보이고는 호텔 창밖 길 너머의 상업 건물에 시선을 던졌다. 건물의 외벽에는 어느 라틴계 가수의 광고판이 걸려 있었다.
그을린 피부와 갈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미인의 포스터였다. 미모에 감탄할 수도 있었지만 루크는 전혀 다른 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에단 한. 자신이 광고 포스터를 보고 F1 팀 인수를 결심하게 만든, 뜻밖의 시작점이 되어 준 그를.
반쯤 충동적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검토해 보니 생각보다 꽤 괜찮은 사업이었다. 이번에 부족해진 신뢰와 정통성을 쌓기에도 괜찮았고, 세계 3대 스포츠이니만큼 광고 효과도 남다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었다. 쌓아 둔 기술도 이쪽에 써먹기에 괜찮은 것들이었고.
마침 심심하기도 했으니 이만한 일이 어디 있을까. 사실은 지독하게 심심한 덕분에 벌인 일이기도 했다.
오늘은 어떤 눈빛이려나. 재미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대리석 난간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들어 턱 끝을 만지작거리던 루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노인을 보고 몸을 휙 돌렸다. 아무래도 좀 더 구석으로 도망쳐야 할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왼쪽 끄트머리 구석이 눈에 띄었다. 연식을 알 수 없는 커다란 갑옷이 흰 대리석 기둥 옆에 세워져 남의 시선으로부터 단절되기에 좋아 보였다. 단호한 걸음이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했건만 막 갑옷을 돌기 전, 루크는 그 너머 보이는 누군가의 뒷모습에 발걸음을 멈췄다.
홀을 등진 남자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칼 아래 동그랗게 드러난 귓바퀴가 보인다. 뜻밖에 익숙한 얼굴이었다.
홀을 등진 채 에단은 연신 무슨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말을 듣기 위해 슬쩍 귀를 기울였던 루크는 치미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가를 단단히 해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단 한입니다……. 아니, 차라리.”
혼잣말을 끝낸 그는 맨 벽을 응시하며 다시 오른손을 올린다. 손가락의 끄트머리에 샹들리에의 빛이 어렸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에단 한입니다.”
악수를 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도전을 하는 것인지, 허공을 향해 손날을 푹 찔러 넣은 채로 멈춘 에단은 다시 골몰하는 표정이 되어 간다. 연회장 구석마다 진열된 석고상처럼 굳은 판판한 등이 곧았다.
고개를 수그려 드러난 목덜미 위를 매끄럽게 흐르는 샹들리에의 빛을 보던 루크는 천천히 손을 들어 갑옷의 갑주 부근을 툭 튕겼다.
놀랄 만큼 빠른 반사 신경으로 돌아선 에단을 마주 보던 루크의 눈동자가 무의식중에 미끄러져 내려갔다. 늘 레이싱 슈트에 가려 제대로 보지 못한 신체가 눈앞에 있었다. 검은 구두 위로 언뜻 보이는 발목이 꽤 가늘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선은 슈트 팬츠에 가려지면서도 곧게 위로 올라갔다.
긴 종아리와 허벅지를 지나 올라가던 시선은 검은 재킷이 여며진 상체로 올라갔다. 드라이버답게 길게 단련한 근육이 붙은 신체는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좋았다. 곧은 어깨와 긴 목선까지. 그리고 작은 머리통에 어울리는 반듯한 이목구비를 모조리 훑었을 때, 루크는 저를 빤히 응시하는 에단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눈동자는 어두운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어서인지 동공이 확장된 채였다.
오늘도 루크는 그 새까만 어둠 속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례하도록 훑어보던 시선을 갈무리하며 손을 내밀었다. 뺨의 보조개가 약간 파였다가 다시 판판해질 정도로 짙은 미소도 함께였다.
“에단 한?”
“예. 누구시죠.”
루크의 내민 손을 본 에단이 반사적으로 손을 맞잡았다. 손바닥과 마디마다 박인 굳은살의 감촉이 느껴졌다. 정맥이 가로지른 손등을 보던 루크는 손의 각도를 약간 틀어 불거진 손목뼈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아주 짧은 찰나였다.
손등은 늘 장갑을 껴서 그런지 부드러운 편이었다. 살갗의 느낌이 손가락 아래를 빠져나간다. 루크는 자연스럽게 그 손목을 주제에 올렸다.
“핸들을 잡느라 운동 많이 하나 보네요.”
“그런 편이죠. 그런데 누구시죠.”
“내가 오늘 당신이 만날 사람입니다.”
“……린드베르그의 대표요?”
“맞아요. 내가 린드베르그 오토메이션 대표입니다.”
확신을 주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에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에단에게 할애한 시간 10분은 자동차 협회 회장 혹은 중계권을 독점 소유한 매니지먼트의 담당자만큼이나 비중 있는 시간이었다. 그만큼 재미있으면 좋겠는데.
루크의 그런 기대를 모르는 에단은 한껏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루크는 에단과 비슷한 복장을 입은 웨이터에게서 샴페인 두 잔을 받아 한 잔을 넘겨주었다. 얇은 잔을 들어 기포가 톡톡 올라오는 샴페인으로 입가를 적신 에단은 정신을 빼 놓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관찰하느라 루크가 말을 않자 아예 자기만의 생각을 중얼거리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기도 했다.
루크의 입장에서는 꽤 신선한 태도였다. 늘 환심을 사겠다 온갖 말을 떠들어 대는 경우가 줄을 이었지, 이런 건 또 처음이라. 그래서 샴페인을 음미하며 마음껏 그 침묵을 누리던 중이었다.
창문을 통해 불어온 바람이 헝클어뜨린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루크가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단.”
“네.”
“내게 뭐 할 말 있어요?”
“아닙니다.”
“아니면 불만이 있는 건가?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루크의 말에 무슨 말이든 꺼내려 드는 에단의 입술이 벌어졌다. 루크는 그 모습을 관대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라는 듯이. 하지만 제풀에 지친 듯 에단은 결국 샴페인을 입 안 가득 머금어 삼키더니 자포자기처럼 말하기를.
“제가 조금 착각을 했습니다.”
“무슨 착각이요.”
“스폰서를 물어보셨다고 하길래 저는, 금발의…. 미인일 줄 알았죠.”
“응?”
루크가 목을 울려 반문하자 에단은 물끄러미 보던 시선을 티가 나도록 다른 곳으로 돌렸다. 비스듬히 기울인 옆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상대가 이야기해주지 않으니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채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대충 감을 잡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웃음이 비죽이 튀어나온 루크는 아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입가를 매만졌다.
“나는 미인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쪽의 스폰서를 물었다고 해서… 아닙니다. 무언가 잘못 전해진 거겠죠. 죄송합니다.”
그쪽 스폰서를 물은 것 자체가 어떤 제안이라 여겼던 모양이었다. 하하하. 결국 소리 내며 웃어 대는 상대를 보며 에단은 굉장히 복잡한 표정이 된 채로 귀 끝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계속 웃던 루크는 팔짱을 끼며 상체를 조금 기울여 그쪽으로 가까이 했다.
“나도 미인은 맞지 않습니까.”
“글쎄요.”
“음? 아니야? 미인이 아니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렇겠죠. 미인이라고 굳이 칭한다면… 그렇기는 하죠.”
“영 시원찮은 반응인데요.”
“어쩔 수 없잖습니까.”
하고 다시 떨떠름한 표정이 된 에단은 이제 자신의 진심도 밝혔겠다 미미하게 찌푸린 미간을 숨기지 않았다. 그 솔직한 반응을 지켜본 루크는 더욱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고작 인사를 왜 그렇게 연습 중인가 했더니 이렇게 솔직하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감정 표현에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굴을 굳히는 게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짐작대로 에단은 표정 관리를 포기한 것 같았다. 차라리 시선을 피하려는 듯 손목시계를 본다.
팔을 움직이느라 소매가 당겨져 드러난 손목을 본 루크는 홀로 상상했다. 저 손목을 가까이 당겨 쥐고 안쪽 살갗에 엄지를 문지르면 어떻게 될까. 스폰서를 물었다는 말에 당연히 여성일 거라 생각하는 저 고지식한 미남의 반응이 궁금하다. 하지만 그 전에 가벼운 오해는 바로잡아야 할 것 같았다.
“묻기는 했는데 그런 이유로 물어본 건 아니었습니다.”
“예?”
“난 그냥 묻기만 했습니다. 있나 궁금해서.”
“그럼…….”
“이 업계는 물어보기만 하면 다 그런 뜻으로 알아들어요?”
빙긋 웃는 루크의 미소는 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놀림을 받는 이에게는 그리 단순하게 해석될 말이 아니었다.
에단은 순간 움직임을 정지한 채로 눈을 깜빡였다. 점점 희게 질려 오는 얼굴과 달리 귀 끝이 다시 달아오르는 모습이 볼만했다. 빤히 구경하는 것을 알아챈 에단은 거친 손놀림으로 제 귓가를 한 번 거칠게 쓸고는 이를 뿌득 갈았다. 조지. 돌아가면 가만 안 둔다. 이런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똑똑히 들리기도 했다.
“조지가 누군데요.”
“제 매니저인데… 아니, 죄송합니다.”
그 순진한 태도에 루크의 몸이 조금 기운 순간이었다. 은밀한 말을 속삭일 듯 가까워진 두 사람의 사이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뾰족한 발소리였다.
누군가 샴페인이라도 따라 주러 온 것일까. 몸이 기운 채로 시선을 돌렸던 루크는 들이닥친 사람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곳에는 분홍빛 이브닝드레스 차림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루크보다 옅은 빛깔의 금발을 틀어 올린 그녀는 생긋 웃어 보이며 인사했다.
“어머. 여기서 마주칠 줄 몰랐어요. 오랜만이에요, 루크.”
“그래요?”
누구더라. 재빨리 머리를 굴려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매한 루크의 반응을 환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듯 여자는 환히 웃을 뿐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지난번 뉴욕에서 그렇게 헤어져서 아쉬웠거든요.”
“그랬던가요.”
가까워질 의사를 명백히 보이지 않는 태도에 미소가 약간 흔들렸던 여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 입술을 팽팽히 끌어당기며 웃었다.
“당신 비서가 불러서 어쩔 수 없이 일찍 나갔잖아요.”
에단과의 틈 사이를 파고들 듯 가까이 선 여자의 작은 얼굴에서 시선을 미끄러뜨린 루크가 좀 더 뒤를 바라보았다. 이제 돌아와 그의 곁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할 빈터는 어디 간 건지 보이질 않는다. 아직도 에단을 찾아 헤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기억해 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루크는 한껏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생각했다.
‘이름이 뭐더라.’
캐롤라인. 리안, 크리스틴?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폐기되는 기억이 올해 들어 처음으로 짜증스러웠다. 새파랗게 잊어버린 경우보다 이쪽이 더 피곤했다.
살갑게 몸을 붙여 오는 여자에게서 멀어지려 루크는 반걸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옆으로 팔을 뻗어 에단을 붙잡은 뒤 속삭였다.
“나 좀 구해 줘요.”
하지만 간절한 시선을 마주하고도 에단은 마치 지금이 기회라는 듯 자신의 잔을 들고 물러섰다. 여전히 귓가가 붉은 채였다.
“제가 비켜 드려야 할 거 같네요. 좋은 시간 되세요.”
그 말과 함께 루크가 붙든 소매를 뿌리치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
2층에서 1층 홀까지 도망치듯 내려온 에단은 달아오른 귀 끝을 감추듯이 문지르며 홀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그 와중 눈에 들어온 것은 연회장 구석에 가득 차려 둔 음식과 술이었다. 지금 그의 목적이었다. 시즌 중에는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 자제했던 알코올이 그렇게 간절할 수 없었다. 레오에게 제쳐진 그 거지 같은 날에도 결코 과음만은 피했던 결심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홀리듯 다가가 채워진 와인 잔 중 하나를 들었다. 한 잔을 시원하게 원샷하고 빈 잔을 내려 두자 이번에는 곁에서 레드와인을 따라 주는 것이 보였다. 서버가 채워 준 와인 잔을 들고 벌컥거리듯 입 안에 머금자 빈속에 술기운이 순식간에 피어오른다.
위장부터 뜨끈하게 데우며 온몸을 이완시킬 듯 퍼져 나가는 열기를 느끼며 꽉 조였던 타이를 느슨히 한 순간이었다. 에단의 어깨에 올라온 손이 있었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감독님.”
“에단. 여긴 어쩐 일이야.”
“잠깐 들렀습니다.”
“자주 들러. 이런 자리에서 얼굴을 서로 봐 두는 것도 중요하지.”
곱슬거리는 수염을 기른 남자를 감독님이라 부르기는 했지만 에단 팀의 감독은 아니었다. 전 시즌 컨스트럭터 챔피언이자 현 시즌 2위를 달리고 있는 페라리 팀의 감독은 쥐고 있던 와인을 눈높이까지 올리더니 까딱해 보였다. 에단도 손을 올려 가볍게 잔을 맞부딪쳤다.
“감독님은 무슨 일이십니까?”
“나야 뭐 일이지. 헤인즈를 인수한다는 쪽이 갑자기 참석한다길래. 봤어?”
“네. 뭐……. 보기는 했습니다.”
본 것뿐만 아니라 마주쳐 이야기도 했기 때문에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에단의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감독은 루크 린드베르그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였어. 역시 이런 데보다는 사교계가 훨씬 어울릴 얼굴이지 않아?”
“글쎄요.”
대충 대답하는 에단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 것을 본 감독이 혀를 찼다.
“얼굴이 붉네. 조심해.”
“갑자기 마셔서 그렇지 많이 마신 건 아닙니다.”
“그래. 요즘 내가 레이스 지켜보고 있는 건 알아?”
“지켜보실 때 더 잘했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자네야 늘 열심히 하지.”
그러더니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 이야기였다면 에단도 함께 웃어넘기며 유감을 표현했겠지만 자기 일이다 보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주니어 드라이버 시절 가까웠던 감독이지만 F1 팀에 오니 범접할 수 없는 벽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오늘따라 그 벽이 더욱 막막하게 여겨지기만 했다. 기분은 더욱더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할 말을 궁리하던 에단은 감독의 뒤에서 눈치껏 환담을 나누는 척하는 사람들의 기척을 느꼈다. 이쪽의 대화가 끝나면 감독에게 바로 말을 걸 생각인 것이 뻔히 보였다. 자신이 아니어도 비위 맞춰 줄 사람이 한가득한 것을 확인한 그는 감독을 향해 눈인사를 보이며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마침 가슴팍 가까운 곳에 있는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저는 전화가 와서 가 봐야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감독님.”
“그래. 다음 레이스에서는 더 좋은 모습 보여 줘.”
에단이 길게 말할 의사가 없음을 눈치챈 감독은 큰 미련 없이 돌아섰다. 시선이 돌아가자마자 에단은 재킷 안주머니에 쑤셔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연락처를 확인한 손이 다급하게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홀의 구석으로 움직였다.
“조지.”
- 혹시 아직 이야기 나누는 중이면 끊어도 돼. 부재중 전화만 남겨 두려고 했어.
“이야기 끝났어.”
- 벌써?
“아마도.”
- 어땠어.
“조지. 오늘 나 보자고 한 린드베르그 대표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어?”
- 알지. 루크 린드베르그. 32세. 독일계 아버지에게서 자본의 돈줄을, 덴마크계 어머니에게서 왕실의 핏줄을 타고난 남자. 린드베르그 코퍼레이션의 두 축 중 오토메이션 사업을 가져간 젊은 대표잖아. 가끔 미디어에 노출된 적도 있었어.
“그래. 다 알고 있었구나.”
- 내가 안 말했었나?
“빌어먹을. 너는 다 알고 있었다 이 말이지.”
드물게 욕설을 내뱉는 에단의 어투에 조지의 목소리가 덩달아 커졌다.
- 무슨 일 있어?
“너는 돌아가면 내가 가만 안 둘 줄 알아.”
욕설을 나직하게 뱉은 에단은 심호흡을 연거푸 하며 얼굴의 열을 내리려 노력했다. 빌어먹을. 그냥 묻기만 했던 모양인데 그걸 그런 의도라고 전해 주는 매니저라니. 어쩌다 이딴 일이 벌어진 걸까? 어차피 거절할 생각으로 왔다지만 그래도 이건 이만저만한 실수가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 묻는 조지의 목소리를 무시한 에단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었다.
아니다. 이번에는 자신도 너무 안일했다. 누구인지 검색이라도 해 보고 올걸. 검색을 한 뒤 이 남자가 정말 나에게 스폰서 따위를 제안했다고? 하는 의문을 한 번이라도 가졌다면.
아니, 애초에 그 얼굴을 보자마자 그따위 제안은 의사소통 문제 때문이었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다!
방금 전 페라리 감독이 했던 말이 가슴에 사무칠 지경이었다. 이런 자리에 들러 얼굴을 봐 두는 것도 좋지. 그래. 그 말이 맞았다. 오늘 돌아가면 인터넷에 접속해 F1 관계자들의 얼굴을 모조리 확인해 볼 결심도 했다. 레이싱에만 골몰하느라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오늘의 실수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정도가 아니었다.
나가 죽을까. 에단은 술에 취해서인지 앞날이 깜깜해서인지 모를 어지러움을 느끼며 홀 가장자리 기둥에 등을 대고 서서 와인을 홀짝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을 꾹 감자 아까 2층에서 보았던 이의 강렬한 인상이 떠오른다. 키가 큰 금발의 미남은 낮은 난간에 허리 부근을 기댄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에단은 샹들리에 하나 없는 구석에서 마주한 것치고 무언가 지나치게 빛이 난다고 생각했다.
아까 조지의 설명대로 자본이 만들어 낸 빛무리 사이에 서 있던 남자는 무언가를 타고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것이 자본에서 온 것이건, 모계에서 온 어떤 인종의 가장 고귀한 혈통이건 간에.
그 순간을 떠올리느라 오래도록 감고 있던 눈을 뜬 무렵, 에단은 제 앞에 보이는 것이 아직 머릿속에서 그려 내는 환상인지 고민했다. 바로 움직이지 않길래 약간 멍한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미간을 좁히자 눈앞의 환영이 입꼬리를 실룩 움직였다.
“이제는 표정을 아예 안 가리네요.”
“여긴 왜 내려오셨습니까?”
“난 여기 내려오면 안 되나.”
반문하는 루크는 그사이 손에 레드와인을 채운 잔도 하나 들고 있었다. 그 잔을 살짝 흔들며 보이는 미소가 짙었다.
“아직 10분이 다 안 지났었거든요.”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리에 대꾸하려던 에단은 또 무슨 실수를 할까 싶어 차라리 제 할 말이나 하는 걸 택했다.
“아까 그분과 함께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오늘 만나기로 한 건 당신이지 위에 있던 그 여자가 아니었거든요. 이름이 샬롯이었나. 어쨌든.”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10분은 또 뭐고.
루크는 에단이 기대어 있던 기둥의 뒤편으로 성큼 들어가 손짓을 했다.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지만 일단 변명은 해야 했다. 나 역시 스폰서를 제안하는 거라면 거절하러 온 것뿐이다. 오직 드라이버 계약에만 관심이 있다고. 그렇게 변명하고 싶건만.
휘장처럼 드리워진 커튼의 옆쪽으로 에단도 따라 몸을 돌리며 암담한 심정이 되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변명을 해야 할까. 매니저가 그렇게나 멍청하다고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니면 내가 멍청하다는 설명부터 해야 할지.
구석은 아까 위층에서처럼 완전히 독립된 공간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구석이었다. 그 어둠 속에 기대선 루크는 푸른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왜 그대로 나갔습니까.”
“아까 그분과 더 있을 줄 알았다니까요.”
“그럼 질문을 바꿀게요. 왜 그렇게 뻣뻣하게 굳어서 나간 겁니까. 술도 갑자기 퍼마신 안색이고.”
순간 말문이 막힌 동안 루크는 능청스럽게 제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뻗어 에단이 들고 있는 빈 잔에 부딪쳤다. 챙, 하는 경쾌한 유리 소리가 울리자 상대는 와인을 쭉 마셨다. 목울대가 오르내리는 모양새를 보던 에단은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술기운이 올라온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까 감독 앞에서 잘만 다물고 있던 입이 이렇게 고삐 풀린 양 지껄일 리 없었다.
“일단. 사과드리겠습니다. 저는 매니저가 그렇게 말을 전해서 그런 의도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매니저가 그쪽 스폰서가 있냐고 물었었다고 전했거든요.”
“계약 전에 궁금해서 그쪽 스폰서가 있냐고 물은 건데 묻기만 해도 제안으로 받아들여요, 이 바닥은? 내가 진짜 몰라서 그래요. 이 업계만의 비밀스러운 소통법인가.”
“그게 아니라… 그전에도 그런 식으로 제안이 들어온 적이 있어서 그런 것뿐일 겁니다.”
“그런 쪽으로 인기 많은가 봐요.”
“아니요. 전혀.”
다시 술을 홀짝이며 하는 루크의 말에 에단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말을 말자, 그냥. 입매를 단단히 굳힌 뒤 다물어 버린 모습을 보고 루크가 술잔을 창가에 아무렇게나 내려 두며 물었다.
“그런 의도인 줄 알고도 온 거면 생각은 있는 겁니까?”
“거절할 생각이었다니까요.”
“미인인 줄 알고 왔다면서요. 방금 샬롯을 보고 경쟁자라도 만난 양 도망친 게 누군데.”
“아니. 경쟁자는 대체 누가 경쟁자라는 겁니까? 두 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나를 3년 전에 잠깐 만났대요. 비서가 말해 주기 전까지는 이름도 기억이 안 났는데 어떻게 행복해지겠어.”
“꽤 좋은 사이인 거 같던데요.”
“이름도 겨우 기억했다니까. 갑자기 궁금하네요. 당신은 3년 전에 두세 번 봤던 사람 이름이 기억납니까?”
그 순간 에단은 제가 3년 전 만났던 누군가를 떠올리며 반박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빌어먹을 알코올 기운은 도움 되는 게 없이 기껏 찾아낸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 뿐이었다. 제기랄. 대체 누굴 만났더라. 애초에 그때 진지한 관계가 있기는 했었나?
한 해 최소 스무 번의 경기를 치르기 위해 5대륙을 떠돌아다니는 처지였다. 발붙이고 있는 곳이 없으니 안정적인 관계를 가지려 해도 쉽지 않았다. 적당히 알고 지내다가 멀어지는 관계뿐…….
휘말린 나머지 별생각을 다 하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는 척 입을 가리는 루크를 보고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심지를 당긴 듯 머릿속이 뜨거웠다.
“제가 실수한 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만 언급하시죠.”
“왜요. 위에서 생각해 봤는데 괜찮을 거 같거든. 나 누구 쫓아 나온 거 몇 년 만일 겁니다. 처음일 수도 있고.”
“제가 보기에는 대표님도 별로 그런 쪽 취향은 아니실 거 같은데요.”
“왜 그렇게 확신하지.”
“방금 여성분이셨잖습니까. 그리고 보기에도 영 아니실 것 같은데요.”
“그래 보여요?”
“예. 남자는. 전혀.”
라는 말까지 지껄이고 나니 에단은 자신의 얼굴이 군데군데 붉어지는 이유가 알코올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는 자신의 꼴이 점점 걷잡을 수 없이 꼴사납게 느껴졌다. 그래서 입을 단단히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말을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횡설수설하다가 이내 조용해진 에단을 구경하느라 루크의 뺨에 잔잔한 보조개가 파였다. 보조개는 어떤 웃음에서는 보이고 어느 순간에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기도 했다.
“그래요? 나만큼 개방적인 사람이 어딨어. 전기 차 팔다가 내연 기관차 스포츠에 도전하는 이런 오픈 마인드가 흔치는 않을걸.”
“그러게요. 포뮬러-e로 가지 않고 왜 갑자기 포뮬러 원입니까?”
“재밌잖아요.”
뭇사람들이 수많은 추측을 내놓았건만 루크는 단 한 단어로 이유를 일축했다. 그의 푸른 시선이 에단의 머리 위, 홀을 한 번 살핀 뒤 상대를 똑바르게 응시했다.
“사실 아까 확인하려다 못 한 게 있거든요.”
“뭡니까.”
“가까이 와 봐요.”
이미 사각지대이건만 뭘 더 주의하겠다는 것인지. 에단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거리를 줄였다. 뭔가 중요한 말이라도 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남들이 들으면 안 되는 아주 대단한 무언가를. 인수할 팀에 대해서거나 혹은 아무거나.
상대가 가까워지자 루크는 불쑥 손을 올렸다. 어깨 위를 기어 올라오고 손가락이 목뒤를 감싸 받치는 순간까지도 에단은 무슨 일이 있으려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저 뭐 묻기라도 했나 보지 할 뿐.
조금 숙인 루크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드라진 눈썹 뼈 아래의 눈매와 깜빡이는 속눈썹이 얼마나 촘촘한지 알게 되었을 때에도. 하도 그런 소리를 지껄여 대서 내가 무언가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귀를 가까이 가져와 이야기하려는 것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가슴속에 무언가가 응축되고 있는 이 기분은… 그저 당혹스러움일 뿐일 거라고.
똑바로 바라보던 루크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어찌나 가까웠는지 숨결은 콧잔등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인 기척은 광대 부근까지 간질거리게 했다.
그리고 눈을 마주보며 얼굴을 약간 더 기울였다. 바짝 선 솜털에 살갗이 닿은 것만 같았다…….
에단은 결국 숨을 들이켜며 팔을 들어 밀쳤다.
가슴팍에 부딪치자 퍽 소리가 나도록 강한 힘이었다. 꽤 아플 텐데도 아랫입술을 슬쩍 핥던 루크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에단은 기가 막혀 소리를 꾹 눌러 참으며 폭소하는 루크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웃음이 겨우 잠잠해지고 나서야 속삭이듯 놀리는 어조가 똑똑히 들렸다.
“내가 키스할 줄 알았어요?”
그 상황에서 치솟은 열기 덕분에 술기운은 순식간에 증발했다. 대신 명료한 욕설이 떠올랐다. 에단은 생각보다도 빠른 말을 씹어뱉듯 외쳤다.
“두 번 다시 연락하면 차로 쳐 버릴 줄 알아. 알았어?”
홀의 사람들을 밀치며 나가던 그는 입구를 나서서도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누군가가 아는 척하며 손을 흔들었던 것 같기도 했지만 눈가에 불이 날 듯한 에단에게 그런 게 보일 리 없었다.
호텔의 계단을 두세 개씩 달리듯 내려가던 그는 기가 막혀 조지에게 문자를 남겼다. 분노로 문자를 치는 손끝이 덜덜 떨렸다.
린드베르그는 아닌 거 같으니까 다른 팀이나 알아봐.
***
이미 구천만 달러를 쓰기로 한 놀이에 돈을 더 얹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집무실에 빈둥거리며 앉아 있던 어느 날, 루크는 수화기를 들어 물어볼까 하다가 직접 밖으로 나왔다.
그의 집무실 앞에는 두 개의 책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지난주, 린드베르그가 포뮬러 원 팀 중 헤인즈를 컨소시엄 형태로 인수한다는 보도가 일제히 풀렸고 언론은 연일 이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대중 매체는 일주일간의 보도 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포뮬러 원 업계의 매체들은 쉬지 않고 이 사건을 떠드는 중이었다. 그것이 환영의 의미든 뭐든 간에.
키보드 위에서 손을 날듯이 움직이며 업무를 처리하던 사라가 눈만 힐긋 들어 루크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대신 상대적으로 한가하게 보이던 빈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크도 말을 시켰다가는 일이 꼬일 것만 같은 사라 대신 빈터의 책상 위에 엉덩이를 반쯤 걸쳐 걸터앉았다. 빈터는 바로 반응했다.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에단 한, 지금 연봉이 얼마야?”
“계약서를 완전히 입수한 것은 아니지만 오십만 달러라고 합니다. 옵션 포함해서요.”
“그런데 왜 내 제안을 무시하는 거지?”
성적이 시원찮은데도 네 배를 올린 이백만 달러와 옵션을 따로 설정해 불렀건만 에단 한은 짧은 답변만을 보내왔다. 린드베르그와는 계약하지 않겠습니다.
“이 업계는 진짜 왜 이렇게 사람 할 일 많게 만드는지 모르겠어. 안 그래?”
루크는 혼잣말을 하다가 사라가 손을 멈춘 순간 재빠르게 물었다.
“사라. 그때 내가 스폰서 물어보라고 한 거 뭐라고 질문했어?”
“‘그쪽 스폰서도 받아요? 공식적인 일 말고. 무슨 말인지 알죠?’라고 질문했었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야. 별것도 아닌 질문이네.”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그다지 모욕적인 발언 같지도 않았다. 질문만 했는데 그것도 잘못인가. 굳이 따지자면 오해한 쪽이 잘못이지.
그런 루크의 사고방식 속에서, 제멋대로 오해한 쪽을 조금 놀렸을 뿐인 자신은 더더욱 죄가 없었다. 더욱이 나중에는 그 오해대로 넘어가 줄 생각마저 있었건만. 억울하기 짝이 없다.
생각하다가 피식 웃음을 흘리던 루크가 손가락을 튕기며 지시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봐. 사백만 달러로.”
“네? 너무 비싼데요?”
“옵션 포함으로 해서. 분할 지급에 성적 안 나오면 중간에 자르는 걸로 하면 되잖아.”
“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 보자고.”
반박하려던 사라는 상냥한 미소를 띤 루크를 보고는 얌전히 고개를 수그렸다. 타닥타닥. 다시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루크는 개운한 마음이 되어 집무실로 들어갔다. 사백만 달러면 제가 어쩌겠어. 그래야 정상이지.
***
마지막 연봉 제안에 대한 답변이 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였다. 막 점심시간이 지났지만 제멋대로 퇴근 시간을 가늠하던 루크가 옆에 걸어 두었던 얇은 리넨 재킷을 손에 쥐었던 순간이었다. 그의 정면 저 멀리 굳게 닫힌 집무실의 문 너머로 작은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그걸 듣고 잠시 루크의 눈이 집무실 문에 머물렀다 떨어졌다.
그의 예감대로 집무실 책상 위 스피커가 울렸다. 버튼을 누르자 빈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보스. 에단 한에게서 직접 연락 왔습니다. 연락 가능하시냐고 묻는데요.
“연결해.”
- 네.
연결을 위해 종료 버튼을 누른 뒤 루크는 우두커니 서서 다시 불빛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버튼을 누르고도 상대에게서 무슨 말이 없자 루크가 먼저 물었다.
“왜요.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말라고 할 생각으로 연락했습니까?”
그 이유가 아닐 것 같았지만 괜히 그렇게 말해 보았다. 주변은 간간이 들리는 레이스 카 소음과 타이어를 바꿔 끼우는 드르륵거리는 소음이 울리고 있었다. 어디 있는지 뻔히 알 수 있는 배경음이었다.
- 그렇다기보다는.
어딘가로 들어갔는지 외부 소음의 단절과 함께 문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 당신 비서가 무슨 마피아 같은 소리를 하던데요.
“뭐라고 하던가요.”
-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일 거라고요.
“그건 내가 한 말이었어요. 마음에 들어요?”
- 아니요.
빈말로도 그렇다고 못 하는 상대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양 루크는 책상 위의 불빛을 지그시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원래 제안 같은 걸 하는데 재능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하는 거 아닌가.
에단은 무언가 할 말을 삼키는 듯 앓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물었다. 영국식의 반듯한 억양이 조금 빠른 말을 하느라 딱딱한 느낌을 자아냈다.
- 정말 궁금해서 질문하는 건데요. 내게 400만 달러나 부른 이유가 뭡니까. 내 몸값은 뻔히 알 텐데.
“그래서 200만 달러를 불렀는데 그쪽이 거절했잖아.”
- 그러니까. 애초에 200만 달러부터 궁금했던 겁니다.
이 말을 꺼내기 위해 상대가 얼마나 속을 썩이고 고심했을지 빤히 보일 듯한 목소리였다. 그렇지. 그럴 만했다. 현 연봉 50만 달러에서 네 배를 곱하고. 거기서 다시 두 배를 곱한 금액이 나오면 궁금해질 수 있는 법이지.
하지만 루크는 그 돈을 덥석 물지 않는 사람이 더더욱 궁금했다.
“지금 필요한 돈이지 않아요? 내가 친절하게 소득세 뗀 다음 부채 상환할 거 생각해서 제안해 준 금액인데.”
- 내 뒷조사라도 한 겁니까?
“협상의 기본은 상대가 필요로 하는 걸 알아내는 거지. 그런 의미로 한 거니까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마요.”
- 아. 더 이상 못 해 먹겠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그렇다고 하면 올 겁니까?”
- 웃기는 소리 집어치우고.
“시험해 보니까 될 거 같기도 하더라고.”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착각이 아닌가. 아무래도 전화 회선을 더 좋은 걸로 바꾸어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과 함께 전화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는 동안에도 상대에게서 다른 말이 없었으므로 루크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그건 서비스 정도로 생각한 거고.”
잠시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숨소리가 옅게 색색대는 소리를 들으니 앞에서 했으면 한 대 맞았을 것 같았다. 그래도 전화는 용케 끊기지 않는다.
루크는 들고 있던 재킷을 천천히 집무실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화면이 꺼졌던 컴퓨터의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모니터가 환해지고 다시 한번 누르자 방금 전 보고 있었던 영상이 재생되었다. 사라가 읊었던 과거 에단의 경력 중 남은 영상들을 모아 이어 붙인 것이었다.
모니터 너머 생동감 넘치는 레이싱 엔진의 울음소리가 길게 울렸다.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는 붉은 레이스 카의 모습은 에단이 과거 우승했다는 F2의 기록이었다. 폭죽이 터지는 엔딩의 순간이 모니터 너머에서 펼쳐진다.
“과거 영상들을 봤습니다. 우승 경력들, 커브마다 집요하게 파고들어 추월하는 장면도 봤고. 꽤 잘 달라붙더라고요. 그러다가 부딪쳐서 처박히는 것도 몇 개 보긴 했지만.”
우승한 에단 한이 레이스 카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편집된 다음 영상이 모니터에서 재생되었다. 한 커브에서 앞 레이스 카 안쪽으로 있는 힘껏 파고들다가 휠 투 휠로 부딪쳐 스핀하며 트랙 밖으로 튕겨 나가는 모습이었다.
루크는 그 장면을 보다가 눈가를 움찔했다. 그다음은 아웃라인을 잡아 돌다가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방호벽에 처박히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에단의 이름을 한참 부르고 나서야 간신히 대답하는 실낱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용케 살아남았군 싶은 사고 영상이었다.
“진짜 실력 때문이에요. 물론 지금 실력은 별로인 거 알겠거든. 지난주에도 경기 있었다면서요. 몇 등 했어요?”
- 11등이었습니다.
20명 중에 11등. 도무지 잘한 건지 모르겠네. 이번에도 또 무슨 사고가 있었다든가 하겠지. 루크는 허리를 굽히고 있느라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포뮬러 원 경기도 봤어요. 리타이어가 많아서 별로 시간도 안 걸리던데. 어쨌든. 사유가 대부분 프론트 윙 문제. 브레이크 접지 불량. 시동 꺼짐. 이렇길래 한번 도박해 보겠다 싶은 겁니다. 어차피 우리 외에는 지금 옮겨 갈 만한 팀도 없잖습니까. 그리고 그쪽도 정보 다 돌죠? 우리가 리암 안토니에인지 누구 계약 직전인 거.”
- 들었습니다.
“그 친구가 안정적으로 쭉 달리는 스타일이라길래. 시상대는 간당간당하게 서는 정도고. 그래서 밀어붙이는 드라이버가 하나 있었으면 해서. 내가 안전 운전 캠페인이나 찍으려고 포뮬러 원을 산 건 아니니까요. 한 명이 안정적 운행을 하면 다른 한 명은 쭉쭉 밟아 주고 제쳐 줘야 재밌을 텐데 밟아 줄 드라이버 중에 후보가 별로 없어서.”
- 정말 그게 다입니까?
“그래요. 그러니까 그만 튕기고 와 봐요. 꼴찌 팀은 40만 달러를 부르고 당신 팀은 동결이나 들먹거리는데 내가 지금 이 연봉을 부르고도 경쟁해야겠어?”
- ……그래도. 아, 이해가 안 되는데요. 젠장.
“어떤 게요.”
- 연봉 금액을 그 정도 쳐 주는 것부터가 뭔가 아닌 거 같다는 거죠.
“와서 계약서 보면 그렇게 생각 안 할 겁니다. 내가 옵션을 아주 많이 넣어 두라고 법무 팀에 말해 뒀었거든.”
- 무슨 옵션입니까?
“와서 한번 확인해 볼래요?”
- …….
“보면 알 겁니다. 왜 내가 이렇게 연봉을 많이 불렀는지.”
- 그 정도입니까?
“에단.”
루크의 짧은 부름에 전화 너머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답답한 게 싫거든요.”
- 하아.
“그런데 당신은 딱 그 돈만 쥐여 주면 내가 원하는 대로 미친놈처럼 밟을 거 같단 말이지.”
- …….
“그렇게 계산하면 당신이 제일 싸.”
통화 너머의 목소리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 그렇게 말하니까 차라리 믿어지네.
“진심이니까요.”
- 계약서 미리 확인해 볼 수 있습니까.
“유출되는 거 싫어서 오면 보여 준다던데. 변호사 데리고 와요.”
거기서 한껏 뜸을 들이던 에단이 결국 미끼를 물었다.
- 그래요. 그럼, 언제 괜찮습니까.
“나 이번 주는 바쁘고 다음 주에 와 봐요.”
- 일정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그리고 그 제안에는 대답 안 해요?”
- 무슨 제안 말하는 거죠.
“난 그 스폰서도 괜찮은…….”
- 제발 닥쳐요.
거친 대답과 함께 전화는 그대로 끊겼다. 혀를 차던 루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포뮬러 원 드라이버 아니라고 할까 봐 끝까지 밟다가 브레이크 잡는 게 수준급이네.”
루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던져두었던 재킷을 다시 집었다. 에단에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그가 어디까지 밟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어디까지 발버둥 쳐 도달할 수 있을까.
대체 왜?
여전히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온 집무실의 앞. 사라는 무슨 일인지 자리를 비웠고 방금 전 전화를 연결해 준 빈터만이 집무실 앞 책상을 지키고 있었다. 일어나 인사하는 빈터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루크가 물었다.
“나 오늘 저녁 약속 있어?”
“저녁에 형님이신 제레미와 약속이 잡혀 있으십니다.”
“자주 보는 얼굴을 왜 또 보자는 거야?”
“예상으로는 저희 F1 팀 드라이버를 한 명 추천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자리 다 찼으니까 혼자 오라고 해.”
단호한 대답에 빈터는 계약이 아직 진행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는 대신 바로 전화를 들었다.
***
에단이 레이스 다음 날 조지로부터 전달받은 주소는 짤막했다. 확인해 보니 어느 빌딩의 위치를 나타냈을 뿐이지 그중 몇 층이라는 세부적인 정보는 없었다. 가면 안내를 하려는 모양이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기에 에단은 휴대폰을 끄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등의 물기가 호텔의 침대 시트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지만 몸을 일으킬 기력이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힘들어 휴대폰을 내려놓은 것도 있었다.
날이 맑으면 내부 온도가 50도를 넘나드는 콕핏9)에서 한 시간 반 이상을 몇 배의 중력에 시달린 몸은 물먹은 솜인 양 늘어지고 있었다. 수분이 쫙 빠지고 칼로리가 날아간 몸은 심하면 한 번의 레이스로 한 사이즈 정도는 우습게 줄어들기도 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숨을 고르게 내뱉도록 노력하며 그는 샤워 가운만 걸친 차림새로 눈을 감았다.
격렬한 레이스로 달궈진 두뇌는 꿈속에서도 주행은 연이어 이어 가고 있었다. 그리드에서 출발해 스타트 라인을 지나고 열일곱 개의 코스를 지나 직선 구간을 질주하는 순간. 바퀴가 맞닿을 듯 가까운 그 순간의 브레이크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듯해 에단은 다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충돌의 직전 깨어난 정신은 그의 몸이 어디 있는지를 깨닫고서야 안도했다. 이어서 경직되었던 뒷덜미가 이완되며 팽팽하게 힘이 들어갔던 상체의 근육이 풀렸다.
역시 그 코너에서는 밀려나는 게 아니었다. 다음에는 차라리 박아 버리든가 해야지. 꿈속에서 복기되던 레이스를 떠올리던 에단은 엎드려 머리를 처박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미련을 떨치기 위해.
이런 자신에게 원하는 대로 밟으라니, 이보다 떨리는 말이 있을까.
***
레이스 주간 동안 이탈리아의 고속 서킷을 달렸던 에단은 다음 날 곧바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로 향했다. 짧은 비행인지라 경비행기와 맞먹는 조그마한 비행기에 탑승했더니 내내 난기류를 만난 듯 흔들리기 일쑤였다. 그 난장판에도 이어폰을 꽂고 잠에 빠져들었던 에단은 비행기가 멈추고 나서야 조지 덕분에 깨어났다. 조지는 창백한 안색으로 짐을 챙기며 에단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 와중에 잠을 자는 건지 신기해.”
“난기류보다는 F1이 더 위험하니까. 실제로 우리 사망 확률이 더 높지 않나.”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사실인걸.”
조지의 위협적이지 않은 경고를 맞받아친 에단이 픽 웃었다.
베를린이 아니니 별 기대 하지 않았던 공항의 규모가 제법 되었다. 수많은 비행기가 착륙과 이륙을 반복하는 아래로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며 걸어 나왔다.
게이트 밖으로 나와 조지는 공항버스와 차량이 쌩쌩 지나치는 공항 앞 도로를 초조하게 돌아보았다. 느긋하게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조지가 생각보다 빨리 일행을 찾았다.
“릭! 이쪽이야.”
에단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내리고 조지가 이끄는 대로 다가갔다. 릭이라고 불린 남자는 조지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지만 금테 안경을 쓴 모습이 꽤 무게를 주려 노력한 것 같았다. 그 노력대로 애늙은이처럼 보이는 변호사가 악수했다.
“릭 브랜든입니다. 에단 한. 늘 F1을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습니다.”
“응원하고 있다니 더 부담스러운데요.”
그 대답은 빈말이 아니었다. 에단은 제 순위를 알고 있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변명을 해야 할지, 입을 다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웬만한 계약서는 조지가 볼 줄 알았지만 이번 상대는 린드베르그 법무 팀이었고 사백만 달러짜리 계약서였다. 옵션도 따로 계산해야 하고, 대표가 자기 입으로 조항이 많다 시인할 정도면 조지만 보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서 따로 변호사를 고용했다.
스포츠 에이전시의 대변 경험이 있다는 릭은 자신이 끌고 온 각진 승용차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에단과 조지가 뒷좌석에 타자마자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릭이 핸들을 돌려 공항을 빠져나가며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세상에서 운전을 가장 잘하는 스무 명 중 한 명을 뒤에 태우고 운전하려니 긴장되네요.”
“운전 잘하는데요. 나 대신 나가도 충분하겠어요.”
“영광으로 알고 있을게요.”
릭은 잡담 한두 마디를 나눈 뒤 대화의 포커스를 조지에게로 옮겼다. 에단은 자신의 턱을 쓸어내리며 지금 짓고 있을 표정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 사교적인 표정은 아니리라.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은 모욕적인 순간마다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그 외의 모든 상황에서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차의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에단이 잠깐 드러난 초원과 울창한 숲에 눈길을 주었을 때였다. 릭이 말했다.
“덕분에 린드베르그 테크놀로지 센터에 들어가 보네요.”
“들어가기 어려운가 봐요?”
“그런 편이죠. 근사한 곳이기도 하고요. 직접 보시면 아실 겁니다.”
차는 도심에 접어드는가 싶더니 약간 옆으로 빠지는 도로를 탔다. 옆을 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정면을 응시했을 때, 에단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보이는 전방의 거대한 건물에 시선을 빼앗겼다. 거대한 원형의 타워는 아직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는데도 언덕 위에 우뚝 세워진 모습이 마치.
“테크놀로지 센터라더니 천문학이라도 연구하는 것 같은 모양이네요.”
“저 기업 어딘가에 천문대도 가지고 있을걸요. 북유럽 쪽이었나.”
그저 순수한 감상이었을 뿐인데 그게 또 맞을 줄은 몰랐다. 에단은 혹시 말실수를 할까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접어드는 넓은 도로에서는 몇 대의 차가 함께 센터를 향해 접근해 갔다. 문이 열리고, 높은 담장을 거치고 진입한 잔디밭은 돌멩이 하나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건물 앞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 분명한 거대한 호수를 돌아 정문에 차를 대었다.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입구를 들어올 때와 같이 다시 용건을 이야기해야 했다.
“오늘 대표님을 보러 온 에단 한입니다.”
“여기서 내리시면 됩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의 거대한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원형의 센터 1층은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약간 울릴 정도로 높은 돔 형태의 천장을 가지고 있었다.
안내받은 대로 이미 1층에 대기 중인 엘리베이터를 올라타자 투명한 벽의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치솟았다. 뻥 뚫린 로비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몇 개의 층을 더 올라간 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고 질문할 필요 없이 검은 바지와 연분홍색의 셔츠를 입은 여자가 환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어떤 질문도 필요 없이 모든 이들이 맞물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수만 개의 부품이 연계되어 움직이는 레이스 카처럼.
에단은 자신의 세상이 아닌 것 같은 느낌으로 매끈한 바닥을 걸었다. 계약서를 볼 뿐이니 편한 차림으로 오라는 말에 진짜 편하게 온 자신의 옷차림이 반질반질한 바닥에 비쳐 보이자 민망함에 얼굴을 구겼다. 조지와 변호사만이라도 정장 차림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회의실은 원형인 건물의 특성상 창 부근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흰 테이블이 길게 놓인 한편에는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중 키가 작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들어온 일행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사라 올슨이에요. 루크 린드베르그의 직속 비서 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닉, 조지, 에단 한 맞죠?”
“네.”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 에단 한.”
차례로 악수를 한 뒤 자신의 손을 맞잡고 힘차게 흔드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에단이 기억을 떠올렸다.
“전에 연락 주셨었죠.”
“맞아요. 기억하네요? 우리 보스는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다시 제자리에 돌아가던 여자가 휴대폰을 꺼내 꾹 누르더니 말했다.
“보스. 이제 들어오세요.”
하는 말을 들어 보니 루크 린드베르그를 부르는 모양이었다. 맞은편 맨 왼쪽 자리 중 하나에 앉는 에단에게 사라가 다시 상냥하게 일러 주었다.
“바로 화상 회의를 종료하고 오실 테니 1분 30초 정도 걸릴 거예요.”
초 단위까지 말한 시간이 정말 맞을지 궁금했던 에단은 사람들의 머리 위 벽에 걸린 시계를 응시했다. 3시 24분. 놀랍게도 25분이 되고 몇 초가 더 흐른 뒤 에단과 일행이 들어온 반대편의 문이 열렸다.
루크는 셔츠에 넥타이를 맨 채였지만 생각보다 편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혹시 저쪽도 각을 잡고 재킷의 단추 하나까지 모조리 잠그고 들어오면 어떡하나, 고민하고 있었던 에단은 이유 모를 안도를 했다. 한 명씩 악수하던 루크가 에단의 손을 맞잡는 순간 이죽거리듯 웃으며 말했다.
“다들 인사했어? 이쪽이 에단 한. 내 이번 포뮬러 원 팀 구매 중 가장 날 괴롭힌 사람이야.”
“그럴 리가 있습니까.”
말 같지도 않은 농담에 에단이 정색하며 말했다. 손을 놓으며 맞은편에 앉던 루크가 곧바로 반박했다.
“진짜야. 헤인즈는 한 번에 팔았고 리암 그 친구는 두 번 접촉하자마자 계약서에 도장 찍었을걸?”
이 사람들은 왜 자기 보스 농담에 웃질 않는 걸까. 그런 생각과 함께 맞은편 사람들을 응시하는 에단을 대신해서 닉이 헛기침을 했다. 시작을 알리는 제스처였다.
법무 팀 직원 두 명이 내미는 계약서는 페이지 수가 상당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 계약서는 기상천외한 예외 조항이 뒤에 수두룩하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에단은 자신이 포뮬러 원에 오랜 시간 몸담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예외 조항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을 검토하던 릭조차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에단. 어떻게 생각해요?”
하고 결국 물었을 정도니까. 법적 지식이 부족한 에단에게 최대한 말을 하지 말고 무게를 잡으라던 조언과 정반대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릭을 탓할 것은 아니었기에 에단은 자신에게 내민 계약서를 다시 한번 찬찬히 훑었다.
기본 조건만 보면 준수하기 그지없는 계약서였다. 연봉 사백만 달러. 옵션 이백만 달러. 옵션에 이적에 대한 가정은 없었고 성적에 대한 것뿐이었다. 팀끼리 소속 드라이버의 등수에 따라 주어지는 포인트를 놓고 겨루는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 3위를 차지할 경우 백만 달러를 추가 지급. 나머지 백만 달러는 에단 한의 개인 성적인 드라이버 챔피언십에서 5위 안에 들 경우 추가 지급. 그리고 린드베르그 팀 드라이버로서 참석해야 할 통상의 범위 내 행사들까지.
하지만 그다음. 연봉은 삼 분할 되어 지급되며 조건을 지키지 못했을 시 지급이 중지될 수 있다. 그에 따른 예외 조항의 인권 침해적인 다양한 문장들을 짚으며 에단이 하나씩 읊어 내려갔다.
“개인 SNS에 게시물을 게시 전 홍보 팀을 통해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함.”
“저희는 올해 포뮬러 원의 신생 팀이고 전기 차에 집중했었기 때문에 기존 팬들의 눈초리가 곱지 않아요. 브랜드 관리를 위해 필요한 조항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희 보스는 과거 다양한 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시거든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습니다.”
에단을 한껏 반겼던 사라는 일이 시작되자마자 연신 딱딱한 어투였다. 심지어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준 에단에게도 미소를 보이지 않고는 빤히 보고만 있었다. 그 순간을 거들어 준 것은 루크였다.
“진짜일걸. 나 만나기 전까지 여자인 줄 알았대.”
“네? 어떻게 그래요?”
“뉴스를 잘 안 본다네.”
사라의 높은 목소리에 얼굴이 화끈거린 에단은 그 주의를 흩으려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조항을 읊었다.
“흡연 금지. 식단 및 훈련 프로그램은 린드베르그가 지정한 코치를 절대적으로 따른다.”
“지금은 팀에서 지원한 기본적인 트레이너만 한 명 있는 걸로 아는데요.”
“그렇긴 하죠.”
“드라이버의 성적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퍼포먼스를 향상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시즌 동안 모든 행동을 보고해야 하며……. 대체 뭘 보고한다는 겁니까?”
그 말에는 지켜보고 있던 루크가 끼어들었다.
“신체 수치부터 일상까지 전부요. 퍼포먼스를 위해서는 몸 관리를 해야죠. 듣자 하니 선수들이 술이며 애프터 파티마다 꽤 행복하게 지낸다던데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은 아니거든요. 내가 투자한 만큼 에단도 시즌 동안 레이스에 전력을 다해 줬으면 합니다.”
조지와 릭의 시선이 뺨을 간질거리게 했지만 에단은 차라리 현실적이라고 느껴졌다. 그렇지. 이 정도의 조항이 아니고서야 오십만 달러에서 더 후려치는 조건마저 나오는 자신을 여덟 배 뻥튀기해 부를 이유가 없었다.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만큼 연봉을 부른 거라는 루크의 말이 차라리 현실적이다.
“그래요, 그러면 저도 시즌 중 컨디션 유지를 위해 물어봐야겠네요. 통상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행사의 범위는 어떤 겁니까.”
“기업 이름을 건 행사는 당연히 참여하는데 내 개인적인 부름에도 조금은 응해줬으면 합니다. 내가 F1 팀을 사서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그게 어느 정도입니까?”
“우리 아버지 생일 파티나 내 여름휴가라든가. 어쩌다가 와인 파티를 열면 와서 와인병도 따 주고……. 아냐, 농담이에요.”
찬찬히 일그러지는 얼굴을 마주하며 루크가 결국 손을 내저었다.
“나도 성적이 우선이라니까. 통상적 범위 내입니다. 믿어요. 나 벌써 팀도 샀고 대대적으로 공표도 했잖습니까. 모터스포츠를 즐기는 내 모습을 온 세상이 지켜볼 텐데 모양 빠지게 뒤에 처져 달릴 순 없잖아요. 물러설 데가 없다고.”
“그러면, 좋아요. 식단, 퍼포먼스 코치, 다 좋은데 제 사생활이 대체 어디까지 보고되는 겁니까?”
“코치에게 매일 보고하고 내가 궁금할 때 물으면 시즌 중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는 답변이 올라올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어디까지냐는 거죠.”
잠깐 고심하던 루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연히 대답했다.
“음. 자기 위로 같은 것도?”
“미친 거 아니야?”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모여들었다. 린드베르그 법무 팀의 엄격한 눈길마저 욕설을 한 상대 대신 자신들의 보스를 향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루크는 원래 숱한 주목 속에 살아왔기에, 이 정도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할 말을 계속했다.
“레이스 성적에 그런 것도 영향이 가잖아요. 그래서 연인 여부나 스폰서를 물어봤던 겁니다. 나 우리 팀 코치로 섭외한 사람에게 다 들었다니까. 얼마나 즐겁게 레이싱 선수들이 놀면서 시즌을 보내는지.”
그 순간 사라는 파들거리는 눈꺼풀을 손가락을 세워 꾹꾹 누르곤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한 어투가 되어 있었다.
“방금 그 발언은 보스께서 아주 극단적인 상황을 예시로 하신 것이고요……. 네. 그럴 일은… 아마 없으실 거라고 봅니다. 그렇죠?”
“성적이 좋다면.”
“없으셔야 합니다.”
냉정하게 루크의 말을 받아친 그녀가 에단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오늘 이 모임은 비공식적인 자리인 만큼 문제를 제기하시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솔직하게 이야기하고자 비공식으로 뵌 것 아니겠어요?”
“그래요. 그렇겠지.”
그 덕분에 에단도 편하게 욕설을 지껄일 수 있었다. 탐탁지 않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회의실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패는 모두 까발려졌고 이제 선택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에단은 다시 한번 눈앞의 계약서를 노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옵션이 줄줄이 붙었지만 계약서 자체에는 깔끔하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연봉의 3분할 지급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으나, 이미 3분할 된 금액조차 지금의 연봉보다도 배가 많았다.
굉장히 많은 제한이 있지만 원래 시즌이 되면 술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담배는 프리 시즌에만 입에 댔다. 식단과 퍼포먼스 전반을 위한 코치 지원. 이것은 도움이 되리라.
그리고 사사건건 보고라니. 거슬리지만… 아주 그의 신경에 거슬리지만, 굳이 따지자면 루크의 말이 틀린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이 연봉을 주는데 질펀하게 놀아나는 꼴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차라리 합리적이지……. 그렇지만 저 인간은 멀쩡하게 생긴 주제에 대체 왜 저딴 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어느 의미로 보면 세상은 참으로 공평하기도 했다.
자신을 힐끔 돌아보는 시선이 간혹 느껴져도 에단은 심드렁하게 계약서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주위에서 우려하는 것만큼 아주 기분이 나쁠 것도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긴 적막 끝에 무심코 맞은편을 바라보자 루크는 눈꼬리에 옅은 미소를 보인다. 그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에단은 모를 기분이 되어 다시 계약서로 시선을 내렸다.
루크 린드베르그는 여러모로 에단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행동마다 거리낌이 없고 타인과의 거리감은 자신이 정해 제멋대로 치고 빠진다. 당당한 제스처. 샴페인의 포말이 터지는 것만 같은 웃음소리. 나른하게 감아올리는 억양까지.
정말이지 여러모로 익숙하지 않다.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부류라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VIP 중의 VIP. 세상의 굴곡이라고는 모르는 화사함이랄까.
하지만 패독을 드나드는 다른 VIP들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 사실이었다. 일단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솔직한 태도이기도 했고.
“대신 이거만 지키면 당신에게 최고의 차를 주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전력을 다해서 달릴 수 있는 차로 말이죠.”
그래. 저 태도였다. 정말 속도를 위해 달리라는, 오직 달리기만 잘하라는 독려가 지나치게 달콤하다.
동요를 눈치챈 것인지 조지의 몸이 약간 기울어져 가까워졌다.
“에단. 그래도 잘 생각해 봐.”
“내가 왜 여기랑 계약 안 한다고 했던 건지 이제야 알았나 보네.”
“하하.”
조지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동안 말은 안 해도 왜 린드베르그와 계약하지 않냐 끙끙거리던 모습을 생각하면 긍정이라 여겨도 문제없는 태도였다.
지나치게 노려본 탓에 활자의 윤곽이 눈에 박힐 지경이었다. 릭에게 에단이 재차 물었다.
“릭. 계약 자체는 괜찮다고 했죠.”
“네. 아주 깔끔한 계약서입니다. 특이한 옵션이 조금 많기는 하지만…….”
“그래요.”
에단은 다시 한번 흰 종이에 기록된 글씨들을 바라보았다. 연봉. 그래. 이 연봉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다. 세금으로 납부할 금액이 45퍼센트에 육박하지만 그래도 남은 금액이면 저택의 저당 잡힌 금액을 갚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남은 신용 대출 금액도. 에단은 속으로 셈하며 또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연봉에 혹하지 않았다는 말은 당연히 거짓말이다. 그리고.
집중해야 하는 순간이건만 에단의 마음은 자꾸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지난번 연락에서 그가 읊은 자신의 이력을 다시 곱씹게 된다. 과거의 우승들. 그랬지. 그랬던 때가 있었다.
저조차 잊고 있었던 과거였다. 그 후 F1 레이싱에서 리타이어가 어떤 결함으로 이루어졌었는지 정확하게 읊는 그 목소리가. 그리고 밟는 드라이버가 필요하다는 설명까지.
마음껏 밟을 수만 있다면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래, 밟는 대로 나가는 차만 주면 된다. 그럴 수만 있다면… 예외 조항의 대부분이 분명 레이스에 방해될 만한 것들을 거세한 것이니까. 그래. 그렇게 1년만 생각해 보도록 하자.
만지작거리던 계약서를 내려 둔 에단이 루크를 직시했다.
“지난번 통화에서 말씀하셨던 대로 무조건 이기면 되는 겁니까.”
“당연히 그걸 원하죠.”
“그래도 혹시 차를 망가뜨리지 않는 걸 원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한 대에 팔백만 유로를 가뿐히 넘는 포뮬러 원 레이스 카이기에 가끔 성적을 내는 것보다 차라리 보존되는 것을 원하는 소유주들이 있었다. 그걸 염두에 둔 질문이었건만 루크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단. 내가 이걸 쓰려다가 모두 말려서 못 했거든요.”
“뭡니까.”
자위 횟수마저 보고받고 싶다는 미친놈에게서 더 이상 놀랄 게 있을까 싶었다. 그는 상체를 기울이며 넓은 테이블 위에 손을 뻗었다. 똑똑. 흰 테이블을 묵직하게 두드리며 시선을 사로잡은 루크가 또렷하게 말했다.
“무조건 밟아요.”
“알았어요.”
“죽을 것 같아도 밟으란 말입니다. 무조건 바퀴가 한 바퀴라도 더 굴러가고 멈추는 거예요. 알았죠?”
에단은 그 순간 푸른 눈동자가 또렷하게 자신을 향해 주문하는 바를 명백하게 인식했다.
그래. 이거였다. 이런 어이없는 제안을 받고도 결국 이 슈투트가르트까지 달려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드라이버는 달려야 하는 존재다. 거듭되어 삶이자 신념이 되어 버린 업이었다. 환호 속을 달리고 격전을 향해 내질러 밟는, 그로 인한 결과만이 오직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고작 지금의 테스트 드라이버 같은 취급이나 받는 게 아니라. 전략 실패. 엔진 불량, 브레이크 불량, 타이어 접지력 문제, 하나하나 손꼽을 수 있는 그따위 거지 같은 사고들이 아니라.
그런 삶에 걸맞은 자리를 준다는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계약서를 짚은 손에 느껴지는 전율에 주먹을 쥐자 계약서가 꾸깃 구겨진다. 조지가 끼어들 듯 눈치를 보는 것을 느꼈다. 오랜 친우의 주근깨 가득한 뺨이 실룩거리는 것을 힐끔 본 에단이 대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 그렇다고 진짜 죽지는 말고. 내 말 알죠?”
루크는 마지막에 잊은 메모를 덧붙이듯 말하며 싱긋 웃었다.
계약의 마무리. 양측의 변호사가 달려들어 옵션의 하나까지 마지막 조율을 하는 사이 루크가 슬쩍 물었다.
“그런데 에단.”
“예.”
“그 제안은 정말 안 받아들일 겁니까?”
에단은 대충 웃어 보인 뒤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나오자 바깥은 노을이 져 가는 늦은 오후였다. 하늘을 물들인 불길은 지평선 인근으로 차츰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다.
릭이 다시 운전대를 잡은 차는 테크놀로지 센터의 거대한 정문 앞을 통과하기 위해 멈춰 섰다. 몇 대의 차가 늘어선 맨 끝에 자리 잡아 느릿하게 나아간다. 뒷좌석에 앉은 에단은 그런 차의 흐름을 바라보다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내내 타이밍을 못 잡고 기색을 살피던 조지가 결국 물었다.
“에단.”
“왜.”
“괜찮겠어?”
“뭐가.”
“계약서 말이야.”
“다 끝났잖아.”
에단은 부름에 슬쩍 떴던 눈을 다시 감으며 무감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도…….”
“조지.”
“응.”
“내가 고카트를 탄 게 몇 살이더라. 대충. 우리 처음 알았을 때.”
“그때 알았다고 해도 되나? 너 말도 없이 카트만 타다가 돌아갔잖아.”
“어쨌든.”
“그래. 그때라고 치자.”
“난 그때부터 레이스만 했잖아.”
“알아.”
“해가 지나고. 매년을 그렇게.”
“응. 내가 그만두고도 넌 계속 달렸지.”
조지는 그 시절 고카트를 졸업하고 F3으로 나아가기 전 레이스를 포기했다. 그랑프리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레이스 카는 감당할 수 있는 속도의 수준을 넘어섰고 조지는 자신이 멈춰 서야 할 순간을 깨달았다.
대신 에단의 레이스가 있는 날마다 트랙을 방문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에단의 일을 도맡아 에이전시까지 연결되었다.
조지의 레이스 카가 멈춘 뒤에도 에단의 레이스 카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계속해서. 어떤 커브가 나와도. 오르막과 내리막을 마주해도 앞을 보고 달려왔을 뿐이었다.
인제 와서 멈추고 이 자리가 내 한계다, 그렇게 금을 그으면 남는 것이 무엇일까. 불면의 밤 끝자락마다 불쑥 들었던 생각이었다. 그 생각의 결론을 상상해 내는 데 성공한 밤은 없었다. 그 끝은 늘 새까만 공허로 끝이 난다. 그만큼 에단은 다른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래서 난 레이스밖에 할 줄을 몰라.”
“무슨 소리야.”
“그런 내가 드라이버가 아니게 되면 대체 뭐가 남겠어.”
웃으며 얼버무린다 해서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 라고 말하려던 조지는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아 결국 같잖은 위로를 그만두었다.
평생을 경쟁하고 이기는 것에 목을 맨 삶이다. 그 삶을 가장 가깝게 지켜봤던 주제에 쉽게 말을 할 수가 없다.
F1 드라이버 주변에 있어야 할 사람은 걱정으로 발목을 붙잡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직 등 뒤를 떠밀어 최고 속력을 내게 해 주는 이만이 필요했다. 자신의 의무를 곱씹던 조지는 지푸라기 같은 탁한 색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다가 결국 응원의 말을 덧붙였다.
“내년에는 원 없이 달려 보자.”
***
다음 주. 적도 부근의 들끓는 더위와 싸우며 야간 레이스가 펼쳐질 싱가포르 레이스의 당일 에단 한의 다음 해 이적이 발표되었다. 린드베르그 레이싱으로의 이적이었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사백만 달러라는 그의 연봉도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옵션을 포함하면 육백만 달러가 넘는 금액이 이미 연봉인 양 확정적으로 말하는 기자도 있었다.
모두가 신이 나 떠들 만한 이슈였다. 단 한 번의 그랑프리 우승 경험도 없고, 실력도 애매한 F1 드라이버에게 과분한 연봉이라는 의견이 다양한 언어로 연일 보도되었다. 그에 따른 소문도 물밑에서 상당했다. 그런 종류의 스폰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었다. 대부분 우스갯소리로 지나가기는 했지만.
싱가포르 레이스 직전 공식 기자 회견에서 에단에게 현 팀인 알파 타우리와 당일 레이스에 대해 묻는 기자는 없었다. 모조리 내년의 이적만을 캐묻고 늘어졌다. 결국 알파 타우리의 홍보 담당자가 질문을 끊고 기자 회견을 종료하는 그 순간까지도.
루크는 언론에 물어뜯기는 에단의 얼굴을 지구 반대편 자신의 집무실에서 휴대폰으로 지켜보았다. 산란하듯 터지는 플래시만큼이나 질문도 제각각이었다.
“에단. 올해 레이싱 중 어떤 순간이 린드베르그 레이싱에게 큰 감명을 준 걸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던 것이 좋은 기회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에는 그 가치를 증명해 보일 수 있겠죠?”
“그럴 생각입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이크에 할 수 있는 대답은 모조리 린드베르그의 홍보 담당자가 미리 지정해 준 답변뿐이었다.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리를 뜨는 마지막 얼굴을 지켜보던 루크는 영상을 종료한 뒤 휴대폰 번호를 하나 찾아 눌렀다.
라이브 방송을 바로 본 게 아니니 인터뷰를 하고 꽤 시간이 지났을 것이었다. 루크가 싱가포르와 이곳의 시차를 머릿속으로 계산한 순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가끔 코치를 건너뛰어 사생활을 직접 보고받았더니 에단은 이제 루크의 연락을 곧잘 받곤 했다. 집무실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며 양다리를 스툴에 올린 루크가 다짜고짜 말했다.
“내가 인터뷰 영상을 지금 봤거든요.”
- 뭐 잘못 답변한 거 있습니까?
“워낙 물어뜯기길래. 우리 계약 조항을 다 까면 괜찮아지려나?”
- 어떤 걸요.
“사생활 하나하나 내게 다 보고한다고.”
이때쯤 에단은 이미 단련이 되어 루크의 말을 그저 미캐닉들이 지나가며 하는 잡담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 그렇게 말할 순 없잖습니까.
“왜. 난 좋아요.”
에단은 그 후 제게 연봉 사백만 달러를 꽂아 넣은 스폰서의 말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는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뚝 끊긴 휴대폰을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보던 루크는 기가 막혔다.
그거 알아? 내 전화를 이딴 식으로 끊은 건 네가 처음이야. 내가 지금 고작 이거 재밌으려고 에단 한 연봉을 꽂았나?
“재밌긴 하네.”
하는 혼잣말과 함께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루크에게 마침 사라가 다가와 서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보스. 혹시 드라이버를 괴롭히려고 스폰서 하시는 거예요?”
“나도 안 그러려고 노력하는데 반응이 재미있잖아.”
“예에…….”
그때 보스가 스폰서를 물었던 게 정말 순수한 질문이기만 했던 걸까? 장난이라기엔 너무 심하기도 하고. 난 모르겠다. 잠깐 흥미를 보였던 사라는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 화면에 띄운 엑셀 창을 건드리며 웃음을 점차 잃어 갔다.
***
올 시즌, 에단의 순위는 11위로 마무리되었다. 빗발치는 질문과 의혹 속에서 에단이 압박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 나은 성적을 보이는 것뿐이었다. 린드베르그가 왜 자신의 연봉을 몇 배를 불려 계약했는지 그 증명을 위해서.
그렇게 발버둥 쳐 올린 한 칸의 등수였지만 그걸 루크가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에단은 본래 그런 성격이었다. 목표는 오로지 자신의 내부에 존재했고 그것을 신념으로 삼았다. 외부의 평가나 시선은 부차적인 요인일 뿐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후련하게 치러 낸 마지막 레이스였다.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인사하러 다가오는 미캐닉들이 많았다. 호기심이 반, 그리고.
“가서 얼마나 잘 탈지 지켜볼게.”
이런 농담으로 가린 저열한 흥미가 나머지 반이었다. 이죽대는 그들과 악수하는 것은 에단에게 있어서도 미련을 털어 내는 후련한 과정이었다.
알파 타우리를 나서던 에단은 갑자기 갈 길을 막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인사하지 않은 팀원인가 했더니 팀메이트인 레오였다. 그는 머리에 생수를 통째로 끼얹었는지 젖다 못해 축축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에단은 피하지 않고 레오를 마주 보았다. 뭐 이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제 앞을 막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까 레이스 중 길을 비켜 주라는 지시를 듣지 않았던 것 때문일까. 마지막이니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에서 지른 일이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한마디 하러 온 건 아니겠지. 드라이버 대기실로 돌아가 짐을 챙길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물었다.
“할 말 있어?”
“고작 선택한 게 린드베르그일 줄은 몰랐어. 헤인즈가 만든 레이스 카를 이제 와 얼기설기 뜯어고친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말이야.”
안 그래도 린드베르그 레이싱의 다음 해 레이스 카를 걱정하고 있던 에단은 그 빈정거림을 듣고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레오의 이유 모를 적대감이 가득한 표정만 아니었다면 정말 그랬을지도 몰랐다. 걱정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런 치열한 생각을 모르는 레오는 에단이 별다른 대응을 않자 기세등등하게 어깨를 폈다.
“너는 네가 나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
에단은 하마터면 그것마저도 그렇지, 라고 긍정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진심이었기에 상대의 화를 돋우는 데 더 효과적이었을 대답이었다.
올해 순위는 자신이 11위. 레오가 12위였다. 기록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기에 에단도 굳이 레이스 하나하나를 끄집어내 레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 형편없는 레이스는 기억하지 않는 편이라 이젠 잘 기억나지도 않았고. 그래서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대신했다.
“글쎄. 내년에 보자고.”
“헤인즈를 허겁지겁 산 린드베르그의 레이스 카 퍼포먼스가 뛰어나 봤자 얼마나 뛰어날 거 같아?”
“아직은 아무도 모르지.”
“우리 팀도 밸런스를 이만큼 잡는 데 2년이 걸렸어.”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것만큼은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래서 도대체 뭘 어쩌라고? 에단보다 두 살 어린 스물네 살의 스페인 청년은 억센 눈매로 에단의 무표정을 노려보았다.
“넌 우리 팀을 나간 걸 후회할 거야.”
“하하.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
“어차피 거기서도 세컨드 드라이버일 게 뻔하잖아?”
에단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가는 길에 아주 끝내주는 작별 인사로군. 어디 언론 매체 없나?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가라앉는 마음과 반대로 입매를 비틀었다. 린드베르그와의 계약 직전 갑자기 알파 타우리가 백만 달러의 연봉을 부르는 기행을 저지르지 않았었다면 장갑을 벗고 반질반질한 레오의 얼굴에 주먹질하기 딱 좋은 순간이었다.
대신 왼손으로 한 번 감싸 쥐었던 오른손을 레오의 어깨에 올렸다. 손바닥 아래 붙잡힌 어깨가 딱딱해지는 걸 느끼며 손아귀에 힘을 준 에단이 얼굴을 약간 가까이 하며 속삭였다.
“돈으로 처발라도 못 올라가는 네 세컨드 취급보다는 낫지.”
다음 순간 에단은 붙잡은 어깨를 밀듯이 치고 지나갔다. 몇 걸음을 걷고 나서 뒤에서 무언가 걷어차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는 낮은 휘파람을 휘익 불며 생각했다. 멋진 마무리군. 아주 잘 어울려.
대기실에서는 짐을 미리 정리하던 조지가 양손에 가방을 든 채 낑낑거리며 나오던 중이었다. 에단이 짐을 받아 들려 하자 조지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왼쪽 바지 주머니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뭐야.”
“주머니에 네 휴대폰 있어. 아까 린드베르그 팀 오너가 문자 한 거 같더라고. 무슨 연락이야?”
“뻔하지. 사생활 보고하라는 거 아니겠어?”
계약이라는 명목으로 별걸 다 묻곤 했다. 오늘은 또 무슨 개소리를 지껄여 두었을까. 혼잣말하며 문자를 확인했다. 짧은 한 줄이었다.
몇 등 했어요?
“뭐래?”
“몇 등 했냐고 물어보네. 보고해 주는 사람도 없나.”
말은 그러면서도 에단은 착실히 문자를 보냈다.
11등입니다.
축하해요.
……11등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는 건가. 예상치 못한 답장을 되새김질하며 손가락을 구부렸던 에단은 결국 더 이상 문자를 보내지 못했다. 괜스레 가슴이 먹먹하다.
그 순간 거대한 폭죽이 하늘을 갈랐다. 노을을 거스르며 사방을 불사르는 불꽃은 한 해 그랑프리 일정을 마무리하는 폭죽이었다. 오로지 우승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의 노고를 축하하는 공평한 불꽃이기도 했다. 에단은 그런 감상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이니까. 그러니 어쩌면 이 순간만큼은 관대해져도 될지 모른다. 저 가벼운 문자, 한마디처럼 말이다. 고작 11등인 등수가 나의 최선이었고 잘했다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올해는 그렇게 묻어 두고 나아가도록 하자.
붉은 불빛을 바라보던 에단은 눈부신 빛무리에 결국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