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프랑스 – 폴 리카르 서킷.(1권) (1/20)

체커드 플래그 1권

1. 프랑스 – 폴 리카르 서킷.

성공은 행운에 기적이 더해져야만 거머쥘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시즌 스무 번의 그랑프리 중 네 번째인 프랑스 그랑프리. 에단은 오늘 폴 리카르 서킷에서 앞선 레이스 카 네 대가 리타이어1)하는 행운을 맞이했다. 하지만 팀이 그를 전폭적으로 밀어주는 기적은 없었다. 차라리 평소보다 더한 방해라는 표현이 알맞았다.

헬멧 안 비틀린 입매에서 욕설을 뱉어 냄과 동시에 페달을 짓이기듯 밟자 초록색 레이스 카가 날듯이 결승선을 넘어섰다. 레이스의 끝과 동시에 스탠드석에서부터 쏟아진 환호가 엔진의 굉음을 넘어 드라이버의 귓전을 울린다. 에단은 그 쏟아질 듯한 환호가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루 이틀이 아닌 일이지만 오늘따라 그 사실이 폐부를 짓눌러 왔다. 에단은 애써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뱉는 숨마다 심장이 내뱉어지는 것만 같은 뻐근함이 몰아쳤다.

굉음과 함께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속을 줄이는 그의 귀에 레이스 엔지니어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 체커기 받았어. 4위야. 축하해.

“그래.”

짧은 대답을 들은 팀의 레이스 엔지니어가 잠시간의 침묵 끝에 다시 말했다.

- 사고가 많았는데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해서 다행이야.

“그러게.”

- 오늘 정말 멋졌어, 에단.

그 말에 드라이버는 땀으로 젖은 입술을 달싹였다가 멈췄다.

스스로 생각해도 오늘 드라이브는 좋았다. 손에 꼽힐 만큼 멋진 경기였다. 제멋대로 업그레이드되어 밸런스도 맞지 않는 레이스 카를 끌고 나간 덕분에 토요일 예선에서 10위를 기록했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게 10위로 시작한 순서를 본 레이스에서 4위까지 끌어올렸으면 괜찮은 성적이 맞았다. 빌어먹을. 3랩을 남겨 두고 쓸데없이 타이어를 교체하자 불러들인 팀 오더만 아니었다면 3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테지만.

여전히 대답 없는 드라이버의 귓전에 레이스 엔지니어의 칭찬이 거듭 이어진다. 에단은 거칠게 스티어링 휠2)을 틀며 긴말을 끊었다. 경기 중 모든 라디오가 전 세계에 생중계된다는 생각 따위가 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됐으니까 들어가서 이야기해.”

- ……그래, 오늘. 수고했어.

에단은 대꾸 없이 곧바로 통신을 종료했다.

앞서가던 레이스 카들은 시상대 앞 팻말을 둔 자리에 들어온 등수대로 멈추어 선다. 1위, 2위, 3위. 그리고 그 바로 뒤.

어떤 팻말도 없는 자리에 멈추어 선 에단의 레이스 카는 우르릉거리던 엔진 소리를 멈췄다. 손끝의 세포 하나까지 저릿했던 집중의 감각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엔진 소리가 사라지자 사방의 소란스러움이 더욱 높아졌다.

레이스 카 앞에는 각양각색의 색을 입은 이들이 펜스를 밀어 낼 듯 돌진하며 요란스럽게 고함을 치고 있었다. 붉은색, 검은색, 초록색까지. 한데 엉키고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마저 요란하다. 그 소란 속에서 에단은 신경질적으로 스티어링 휠을 뽑아냈다.

“페라리! 페라리! 페라리!”

열정과 광기에 젖은 붉은 깃발이 푸른 하늘 아래에 나부낀다. 차에서 내려 메인 스트리트의 열기를 바라보던 드라이버는 초록색의 헬멧을 힘주어 벗었다. 화재를 대비한 방염 천까지 한 번에 벗어 내자 땀에 젖어 반들거리는 쭉 뻗은 콧날과 검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두 시간여 만에 드러난 드라이버의 얼굴은 다른 열아홉 명의 드라이버와 조금 다른 생김새였다. 다양한 인종이 섞인 포뮬러 원이지만 에단 한은 그중에서도 드물게 동양계 피가 섞인 드라이버였다.

뒤늦게 시상대로 달려가던 카메라맨과 리포터가 에단을 발견한 순간 멈칫했다. 에단을 바라보고,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찬 시상대 앞을 번갈아 보던 리포터가 ‘이미 늦었잖아.’라고 중얼거리며 고갯짓을 했다. 그 고갯짓을 따라 카메라맨이 대충 들고 있던 카메라가 어깨에 얹혔다.

둥근 마이크가 시상대를 등지고 걸어 나가던 에단의 턱 앞에 갑자기 들이밀어졌다. 검은 눈동자가 마이크를 지나 카메라의 동그란 렌즈를 마주 보자 리포터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에단. 오늘 경기에서 이번 시즌 최고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그러고도 아쉽게 포디움3)에는 오르지 못했지만요. 기분이 어때요?”

“뭐, 괜찮네요.”

한쪽 입꼬리를 미약하게 끌어 올리며 대답하는 모습에는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땀에 젖은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는 모습을 카메라가 놓치지 않고 클로즈업하는 동안 리포터의 질문이 이어졌다.

“마지막 세 바퀴를 남겨 놓고 피트4)로 불러들였던 팀의 판단은 적절한 전략이었다고 생각합니까?”

“데이터에 따른 판단이라고 하더군요.”

그 순간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고함이 더욱 커졌다. 우승자의 이름을 외치는 목소리마저 파묻힐 만큼 거대한 환호의 물결이 레이싱 트랙을 휩쓸었다. 에단은 잠깐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꽃가루가 흩날리고 연기가 진동하는 시상대는 바로 그의 등 뒤에 준비되어 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바로 몇 걸음 뒤에.

붉은 연기를 등진 드라이버의 모습을 카메라의 렌즈가 길게 잡아냈다. 리포터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그때 타이어 교체를 부르지 않았다면 오늘 3위에 오른 팀메이트 레오에게 제쳐지지 않고 포디움에 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에단의 길게 빠진 눈매가 옆의 더티 블론드를 늘어뜨린 리포터를 향했다. 동공이 큰 검은 눈동자가 여전한 열기를 머금고 카메라를 응시했다. 계속 응시할 뿐이었다.

계속되는 침묵을 기다리다 침을 한 번 삼킨 리포터가 막 마이크를 거두려던 순간, 에단이 손을 들어 마이크를 제 쪽으로 당겼다. 리포터의 뒤로 설렁설렁 걸어오는 팀 크루 한 명이 보였다. 그는 눈매를 살짝 찌푸리며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아무 말도 지껄이지 말라는 거겠지. 무표정한 눈매로 다가오는 이의 초록색 팀복을 노려보던 에단은 열이 올라 불그레해진 입술을 가까이 대고 움직였다.

“그랬겠죠.”

“어때요. 이 일에 대해 항의할 생각인가요?”

“글쎄요. 내가 항의한다고 우리 팀이 듣기나 할지 모르겠네요.”

가까이 다가와 인터뷰를 듣자마자 사색이 된 팀 크루가 에단과 기자의 사이에 끼어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에단!”

에단은 가까이 다가온 팀 크루를 힐끔 보고는 어깨를 얕게 으쓱였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다시 질문하려는 리포터를 밀어 내며 다가온 남자가 대신 마이크를 붙잡았다.

“질문은 공식 기자 회견에서 받겠습니다.”

“에단. 방금 답변은 어떤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말한 그대로죠.”

에단의 옆모습과 함께 곁에 선 크루의 당황하는 표정까지 아웃 포커싱으로 완벽하게 한 컷에 잡혔다. 많은 이들이 이제 막 우승자를 호명하기 시작한 시상대에 집중하겠지만 이 생방송을 지켜보는 이도 있기 마련이었다. 리포터는 소리가 잡히지 않게 입 모양만으로 카메라맨에게 중얼거렸다.

“이제 안 참을 생각인가 본데?”

에단이 소속된 알파 타우리의 피트는 한산했다. 대부분의 팀 크루가 시상대에 달려가 오늘 3위를 기록한 레오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 한산한 와중에 기적적으로 남아 있던 팀 매니저는 방금 전 이야기를 전해 듣더니 한껏 얼굴을 구기며 에단에게 다가갔다.

그사이 레이스 슈트의 지퍼를 내리고 땀에 젖은 얼굴에 부채질 중이던 에단은 팔짱을 낀 채 마주 선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매니저는 무표정한 에단의 표정을 한참이고 응시하다가 찬 물수건을 건네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발언은 왜 한 거야?”

수고했다는 말보다도 먼저 나온 힐난이었다. 에단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꾸했다.

“왜.”

“방금 인터뷰. 좀 더 팀을 옹호할 수도 있잖아.”

“글쎄. 그 이상 어떻게 옹호할 수 있는지 알려 주면 앞으로 반영해 볼게.”

건네받은 물수건으로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문질러 닦으며 에단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길게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팀 매니저는 결국 태도를 바꾸어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하긴, 팀 오더로 순위에서 밀려난 드라이버가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어쨌든 다음에 이야기하자. 오늘 수고했어.”

그리고 팀 매니저마저 다른 크루들과 함께 피트를 빠져나갔다. 개러지5)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한산해졌다. 레이싱 슈트의 지퍼를 아랫배까지 내린 에단은 소매가 질질 끌리는 꼴도 개의치 않고 뒤쪽 통로를 거쳐 공터로 향했다. 막 다가오던 그의 매니저 조지가 오른팔을 높이 올리며 에단을 향해 외쳤다.

“축하해, 에단. 오늘 역대 최고 성적이야!”

“고마워.”

짧게 대답하며 팔을 올려 하이 파이브를 한 에단은 다 마신 물병을 찌그러뜨리고 팀 빌딩으로 들어가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오늘 처음 듣는 축하 인사야. 정말 고마워.”

“다른 크루들은?”

“바쁘겠지. 드디어 레오가 포디움에 올랐으니.”

대기실의 문이 닫히고 단단한 컨테이너 박스의 구조물은 바깥의 소음을 미약하게 통과시킨다. 펑. 펑 하고 연달아 터지는 축포 소리를 들으니 이제 샴페인이라도 터트리는 모양이었다. 숱하게 보아 외운 지 오래인 식순이었다.

에단은 창가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지난했던 레이스의 피로가 몰려온다. 눈을 천천히 깜빡이고 있는 에단의 앞에 선 조지가 우물쭈물 눈치를 보고 있었다. 소심한 매니저가 눈치를 보느라 앉지도 못하는 걸 뒤늦게 알고 에단이 손짓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조지의 소심한 성격은 변하질 않았다.

“괜찮으니까 앉아.”

“으응.”

도대체 누가 매니저이고 드라이버인지 모를 지경이군. 오늘따라 불편한 심기 때문인지 쓸데없는 생각이 들자 에단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문지른 뒤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에단. 오늘 마지막 피트인은…….”

“알아. 레오를 앞서 보내려고 그런 거.”

“내가 항의했어.”

“고마워.”

뒤에서 달리는 레오를 앞으로 먼저 보내라는 지시를 무시했더니 이제는 타이어 핑계를 대며 불러들이는 놈들이었다. 속력이 나서 따라붙어야 자리를 비켜 주기라도 하지. 겨우겨우 굼벵이처럼 느릿하게 커브를 도는 놈에게 자리를 양보해서 대체 뭘 어쩌려고.

됐다. 결국 그렇게 포디움에 밀어 올렸으니.

몸을 늘어뜨려 앉은 에단은 상체를 젖혀 고개에 힘을 풀었다. 레이스 내내 몇 배의 중력을 받은 온몸이 늘어진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만큼.

바닥으로 잡아끄는 이 무기력한 감각은 피로 때문인 걸까. 아니면.

“이야기 나오는 팀 없어?”

그랑프리 시즌의 초반인 이때부터 굵직한 이적 논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에단이 답답함에 묻자 맞은편에 앉던 조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팀 계약은 아직 없어.”

“팀 계약은?”

“다른 건 연락 온 거 있기는 한데.”

“어떤 거. 광고?”

“아니, 그거 말고. 있잖아. 가끔 들어오던 거.”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에단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홀로 눈살을 찌푸렸다. 만류할 생각으로 젖히고 있던 허리를 다시 펴 앉았지만 이미 조지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지난번에 연락 왔었던 홍콩계 스폰서 말이야.”

“아, 그 스폰서?”

“으응…….”

에단은 오버롤 아래 너른 가슴이 훅 부풀었다 꺼지는 게 보이도록 숨을 내쉬었다. 스폰서, 스폰서 쉽게 말해서 그런지 ‘그런’ 종류의 스폰서도 거리낌 없이 제안을 넣는 바닥이었다. 테이블 위 다른 생수를 따서 한 모금 마시고도 짜증이 풀리지 않아 씹어 뱉듯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스폰서.”

물병을 내팽개치며 일어난 에단은 맞은편의 조지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물론 제가 물어 대답한 것임을 알지만. 몇 번을 거절하면 눈치를 챌 것이지.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가.

“앞으로 그딴 식의 스폰서를 물어 올 거면 거물로 물어 와.”

“아니야. 내가 미안해.”

“알았어? 팀 하나쯤 거뜬히 살 놈이 아니면 앞으로 말도 꺼내지 마.”

툭 내뱉은 에단이 거칠게 문을 열고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

호텔로 돌아온 에단은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4위.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는 순위였지만 후반까지 3위를 달리던 순위가 미끄러진 결과라 생각하면 도무지 화를 주체할 수가 없다. 3위와 4위. 그 사이에는 시상대라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이마에 손바닥을 대어 보았다가 떼어 냈다.

스스로의 몸 상태는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감기 따위의 무슨 병 같지는 않았다. 그저 화가 치민 것이리라. 쉼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에 손바닥을 올려 보던 에단은 소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침대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시끄럽게 진동하는 휴대폰을 잡아채 던질 듯 들어 올렸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액정 위에 떠 있는 이름이 익숙했다. 헤센. 메르세데스 팀의 두 드라이버 중 한 명이자 오늘 시상대에서 2위의 자리에 오른 친구이기도 했다. 눈을 들어 시계를 본 그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는 다시 털썩 드러누웠다.

- 헤이.

“2등 축하해.”

- 고마워. 오늘 레이스는 진짜 개판이었어.

“그러게.”

전화 너머로 들리는 소음에 에단은 휴대폰을 조금 더 귀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어디야?”

- 출국하러 가는 중이지. 한, 너는 내일 출발이야?

“아침 일찍.”

- 4위 축하해.

“젠장.”

축하 인사에도 씁쓸한 어투를 느낀 전화기 너머 남자가 호주 억양이 도드라지는 영어로 다시 말했다.

- 그래. 젠장이지. 일단 시즌 최고 성적이니 축하부터 한 거야.

“고마워.”

- 마틴은 너 밀어내고 제 조카를 3위에 올려서 기쁘다고 밤새 인터뷰할 작정 같던데. 아까 리포터들이랑 술이 떡이 돼서 어울려 다니더라고.

자축 파티에 안 보인다 싶더니 그러고 다니던 중이었군. 마틴. 그 이름을 곱씹던 에단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의 팀 알파 타우리의 메인 스폰서이자 자신의 팀메이트인 레오 피페르의 삼촌이었다. 그랑프리가 열리는 트랙마다 졸졸 쫓아다니는 빌어먹을 영감탱이는 제 뒤에 따라붙는 조카의 꼴이 안쓰러웠는지, 타이어 교체랍시고 에단을 피트에 들르게 해 기어코 조카의 순위를 밀어 올려 줬다. 그렇게 허비된 시간 덕분에 바뀐 등수가 오늘의 4등이다. 에단은 맥없이 손을 뻗어 천장을 향했다가 꾹 쥐어 보였다. 오늘만큼은 닿을 줄 알았던 시상대가 이렇게나 멀다.

“그거 알려 주려고 전화한 거야?”

- 아니. 축하할 겸 전화한 거지. 할 말도 있고.

그 순간 헤센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 내년 계약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아직 별말 없어.”

- 재계약할 생각이야?

“다른 데가 없다면 여기라도 해야지.”

- 마틴이 벌써 네 재계약 때 연봉을 낮추겠다 떠들고 있어. 알아?’

“들었어.”

어느 누가 그런 소문을 내고 있었나 했더니 당사자였나 보군. 에단은 이제 더 이상 뭐라 말할 기력도 없었다.

“좋은 핑곗거리도 있지. 포디움에 오른 적이 없다고.”

올해로 스물여섯. 현 팀인 알파 타우리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시즌이자 마지막으로 여겨지는 시즌이었다. 누구보다도 이적하고 싶었지만 지난 2년간 말아 먹은 성적은 다른 팀과의 재계약조차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실력 때문에 말아 먹은 성적이라면 군말 없이 레이싱에 몰두했겠지만 다만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온 팀의 역량이 레오 피페르의 성적 올리기에만 집중되어 있으니 에단으로서는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두 대의 레이스 카 중 에단의 차는 언제나 실험 대상이 되었고 그로 인해 차량 결함으로 리타이어 하기 일쑤였다. 그나마 잘 달리고 있으면 어떻게든 레오를 앞으로 보내기 위해 오늘과 같이 발목을 잡기까지 하니.

결승선을 넘어 체커기를 받기까지 고작 3랩이 남아 있었고 제 뒤를 쫓아오던 레오와의 간격은 5초대였다. 그 순간 귀에 꽂힌 이어 플래그에서 흘러나온 지시를 듣기까지는 말이다.

‘에단. 피트인 해. 타이어를 교체해야 해.’

타이어? 타이어는 아무 문제 없었다. 기가 막힌 지시에 대답하지 않자 레이스 엔지니어는 끊임없이 그를 불러 대었다.

‘에단. 타이어 상태가 심상치 않아.’

그 역시 웃기지도 않은 소리였다. 드라이버도 이상을 못 느낀 타이어가 고작 3랩을 버티지 못할까.

결국 감독마저 통신을 연결해 부르자 그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마음이 되어 피트인을 했다. 그사이 레오는 저를 앞질러 갔고 오늘 드디어 제 커리어 최초로 시상식에 올라가고야 말았다.

- 계속 남아 있을 생각이야?

“글쎄. 갈 곳이 있어야지.”

- 작년에 알파 타우리로 들어가는 게 아니었어.

“어쩔 수 없지. 포뮬러 원은 일단 데뷔하는 게 우선이잖아. 그리고 그때 더 챙겨 준 연봉으로 빚을 갚았으니 할 말도 없어.”

그리고 올해의 연봉 역시 빚을 청산하는 데에 쓰였다. 버거운 금액의 부채이지만 F1 드라이버로 계약을 계속하면 어떻게 갚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었다. 그런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기에는 그의 개인 매니저 조지가 아직 내년 계약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이동 중인지 부산스러운 소리가 번갈아 울리던 휴대폰 너머로 헤센이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 그래서 전화한 거야.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 헤인즈 팀이 린드베르그에 매각된다던 이야기.

“그렇다며.”

‘- 새 드라이버를 구할 거라고 하더군.

“그것도 들었어.”

- 그럼 미켈라와 계약하지 않는다는 것도 들었어?

그 사실은 뜻밖이었다. 미켈라는 작년 시즌 3위. 올해 시즌의 20경기 중 4경기가 치러진 이 시점에서 드라이버 순위가 4위와 5위를 오가는 성적을 내고 있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새 계약을 따내야 하는 드라이버 중 가장 성적이 준수했다. 그런 미켈라와 계약하지 않겠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건 처음 들었어.”

- 린드베르그 쪽에서 계약하면서 여간 간섭하려 드는 게 아닌가 봐. SNS를 하는지, 휴일에 뭐 하는지까지 묻는다던데. 미켈라의 올해 성적이 조금 처진 것도 트집을 잡았다고 하더군.

그 말에 에단은 무표정하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그럼 내 성적은 더 볼 것도 없겠네.”

20명의 드라이버 중 올해 지금까지의 성적은 12위. 작년의 성적은 15위였다. 알파 타우리의 작년 레이스 카는 겨우 굴러가는 고물이었고 툭하면 프론트 윙6)이 날아가는 최약체였기 때문이다.

- 그래도. 한번 접촉해 보는 게 어때. 네 성적이 레오 때문인 건 다들 알잖아.

“글쎄. 우리는 기록으로 결과를 남기잖아.”

- 그래. 그런 의미에서 아까 그 인터뷰를 기록으로 남긴 건 잘했어.

“그것 덕분에 한 소리 들었어. 팀 판단을 뭘로 보는 거냐고.”

- 엿이나 먹으라고 해.

F로 시작하는 욕설이 연이어 이어졌다. 에단은 그 욕설을 무표정하게 들으며 동조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동조할 기운조차 없었다. 이미 제 팀에 대한 욕설은 작년 한 해 질리도록 자신의 입에서 되풀이되었었다.

헤센은 곧 비행기를 타야 한다며 통화를 종료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에단은 스러지듯 침대에 다시 누웠다. 천장의 새어 들어오는 불빛을 보던 눈을 감았다. 칠십여 바퀴를 도는 레이스는 극도로 체력을 소모하게 해 한 번 치를 때마다 몸무게가 2, 3kg은 쑥 빠지곤 했다. 하지만 지친 몸에 저항하듯 정신은 첨예하게 날카로워지기만 한다.

뒤척임 끝에 결국 잠들지 못한 에단은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호텔의 창 너머 열기가 식어 불빛이 꺼져 가는 구불구불한 서킷이 스탠드석과 피트 사이를 기어가듯 길게 이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어서 멀고 아스라이 이어지는 조명등과 점점이 이어지는 야경이 프랑스 남부 코타주르의 밤을 밝힌다.

구불구불한 서킷의 끄트머리가 아득한 어둠에 묻힌 그곳을 응시하던 에단의 눈동자가 한없이 무거워졌다.

린드베르그. 연초부터 9위의 포뮬러 원 팀 헤인즈를 인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던 다국적 기업이었다. 에너지 사업과 자동차를 주축으로 하는 가족 경영의 기업이라던가. 자동차 제조사 중 톱급에 들지만 이미 수소차와 전기 차 개발을 시작한 회사였기에 뜬소문인 줄만 알고 있었다.

린드베르그. 자신을 지원해 줄 만한 발음의 기업은 아니었다. 다국적 기업이라 해도 창업주의 국적이나 인종은 존재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에단은 자신의 기대와 정반대의 행동을 했다. 차라리 미약한 기대의 끈을 끊어 버리고자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곁에 두고 있던 휴대폰을 들어 번호 하나를 꾹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기 전에 매니저가 전화를 받았다. 조지는 오늘 레이스를 치른 드라이버보다도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 나 방금 풀려났어.

“무슨 일 있어?”

- 팀에서, 앞으로 발언 주의해 달라는 말을 수십 번은 들은 거 같아.

“미안.”

- 어쩔 수 없지. 오늘은 너무했잖아.

늘 지나치게 저자세로 굴던 매니저마저도 위로를 덧붙였다. 에단은 가늘게 경련하는 오른 눈가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일어나는 눈가 경련이었다. 이미 만성이 되어 일상에 스며든 지 오래인 증상이다.

“아까 쓸데없이 짜증 낸 건 미안해.”

- 괜찮아. 말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또 말한 내가 문제지.

그 대답을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는 눈동자는 캄캄한 호텔 방 안의 희미한 빛을 빨아들인 듯 어둡게 반짝였다.

“다른 팀 계약 말이야.”

- 다시 접촉해 볼게.

사실 여기까지 올라온 것 자체가 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불쑥 치미는 것을 누르며 에단은 짧게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남은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린 그는 심호흡 후 물었다.

“린드베르그 이야기 들었어?”

- 어. 들었어. 헤인즈 인수 확정했다는 말도 있더라고. 뜻밖이지.

“이야기가 오가던 미켈라와의 계약이 엎어졌다고 하더라고.”

- 정말?

“의사라도 물어보는 건 어때.”

그 제안을 건네는 제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져 에단은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조금 놀란 듯하던 그의 매니저가 바로 답변했다.

- 알아보고 바로 연락 줄게.

***

비행기가 착륙한 공항 활주로에는 우중충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위를 미끄러지듯 착륙한 비행기에서 내린 에단과 알파 타우리 팀 크루들이 게이트를 통과해 나왔다. 어제 일로 자신의 눈치를 보는 이들과 비행기에서 내린 에단은 조금 귀찮은 기분에 모자를 푹 눌러썼다. 어차피 저래 봤자 하루 이틀 뒤에는 다시 쓰레기 같은 세팅을 맞춰 줄 거다.

넉넉한 크기의 볼캡이 그의 눈가를 가리고 매끄러운 하관만을 드러냈다. 그런 모습으로 공항을 가로질러도 알아보는 이는 존재했다.

“에단? 에단 맞죠? 알파 타우리의 에단 한!”

깊게 모자를 눌러 쓰고 있는 자신을 용케 알아본 팬의 환대에 에단은 의무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셀피를 찍자는 요청에 응하며 입꼬리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그래 봤자 환희로 상기된 여자 팬의 얼굴색과 자신의 희멀건한 낯빛이 더더욱 비교되는 것만 같았지만 말이다.

목적을 달성한 그녀가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에단의 레이싱 엔지니어가 곁으로 다가왔다.

“시상대를 오른 레오보다 인기가 많은 기분이 어때.”

“별건 없네.”

다만 사진을 찍는 팬을 보며 꺼 두었던 휴대폰을 다시 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별 반응 없는 에단에게 몇 번 말을 걸던 레이싱 엔지니어는 다른 이의 부름을 받고 곁을 떴다. 그제야 휴대폰을 다시 켜 보았다. 밝아진 액정 화면에는 아직 중요한 연락이 없었다. 할 일 없이 SNS의 반응과 잡지 기사를 쓱쓱 넘겨 보니 예상한 반응들이 많았다.

레오 시상대에는 삼촌이 함께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니야?

어제 에단 퍼포먼스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아쉽네.

인상적이기는 한데 포디움감인가 하면 그건 아닌 거 같아. 실수가 많잖아.

주니어 시절 미친놈처럼 밟던 에단은 어디 간 거야?

팬들에게 귀에 박히도록 듣던 소리였다. 에단은 휴대폰을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으려다 메시지 알람이 뜬 것을 보고 손을 멈췄다. 매니저가 보낸 메시지였다. 평소 행동이 느리던 조지답지 않게 빠른 답변이 돌아와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전화해.

잠시 주변을 둘러본 에단은 크루들이 짐을 체크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조지는 상기된 목소리로 말을 빠르게 쏟아 냈다.

- 에단! 연락해 보길 잘한 거 같아. 린드베르그에서 바로 연락 왔어.

“뭐래.”

- 약속 잡고 한번 보자는데? 느낌이 좋아.

귀가 먹었나. 제대로 들은 게 맞겠지. 사실로 받아들이고도 마음이 들뜨지는 않았다. 쉽게 기뻐하기에는 시작되기도 전에 어그러졌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애초에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했던 제안은 아니었고. 그냥, 답답함을 어떻게든 해소하고자 해 본 말에 가까웠건만.

크게 기대하지 말자. 그저 한번 보자는 것뿐이다. 막상 갔더니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후려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에단의 귓가에 갑자기 목소리를 한껏 낮춘 조지의 말이 들렸다.

- 그런데 있잖아, 에단.

“응.”

- 지난번에 했던 말 있잖아. 그…….

“잘 안 들려.”

정말 귀가 안 좋아졌나. 에단은 전화를 받고 있던 왼쪽 귓바퀴를 무뚝뚝하게 툭툭 친 뒤 다시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조지는 방금 전보다 아주 조금 목소리를 키웠을 뿐이었다.

- 웬만한 거물급 아니면 스폰서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했잖아.

“그랬지.”

- 그게…… 그래서 질문이 들어왔거든.

보통 그렇게 말하면 그냥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자고 입을 연 건지 모를 지경인 조지의 목소리는 더욱더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무슨 질문.”

에단은 휴대폰이 귓가를 짓누르듯 바싹 누르고서야 조지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 너 스폰서 있냐고 린드베르그에서 물어봤어.

“그걸 대체 왜?”

- 아마… 그런 쪽으로 물어본 게 아닐까 싶은데.

“그런 쪽?”

- 어제 네가 그랬잖아. 팀을 살 정도가 아니면 말을 꺼내지도 말라고 했지만… 이쪽은 팀을 사는 거잖아. 그래서 이야기 꺼낸 거야. 그러니까 화내지 마.

주절거리며 늘어놓는 변명을 듣던 에단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뭐야. 진짜 팀을 살 놈으로 스폰서를 물어 오기라도 했다는 거야?

기가 막힌 상황을 들은 에단이 저도 모르게 뱉은 욕설에 지나가던 팀 크루가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의심쩍은 눈길에도 에단은 얼굴을 펴는 대신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그러곤 다시 중얼거렸다. FUCK.

***

루크 린드베르그가 F1 팀 구매에 관심을 보인 것은 그의 인생에서 몇 되지 않는, 지극히 충동적인 결정 중 하나였다.

그는 낭비를 아주 싫어했다. 그것이 시간이건, 혹은 격식을 갖추거나 예의를 갖추기 위한 어떤 것이건. 그가 ‘그런 일’을 참는 경우는 자신의 아버지나 조부의 지루한 행사에 참여할 때뿐이었다. 관대하게 가끔 형의 생일 파티까지. 그 외 대부분의 경우에 그는 원치 않는 걸 참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컨설팅 회사가 고리타분한 스왑 분석을 통해 린드베르그 자동차 사업의 위기와 기회 따위를 발표할 때 지루한 기색을 내비치는 것쯤은 아주 쉬웠다.

따분함을 참다못해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 그의 팔꿈치가 테이블 위로 올라온 순간이었다. 바뀐 자세는 마치 고뇌에 빠진 조각상 같은 모습이었지만 양옆의 비서에게 신호나 다름없는 몸짓이었다.

두 명의 비서는 은밀히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두 비서 중 키가 작은 여자가 어떻게든 발표자에게 루크의 의사를 표현하고자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움직였던 그때였다. 그날따라 루크는 짧은 인내심을 드러내며 마이크를 손끝으로 당겨 왔다.

“좋아요. 그래서.”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가 발표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갑작스러운 루크의 발언에 막 그래프를 띄워 설명하려던 발표자의 말이 멈췄다. 모여든 시선 사이에서 고전적인 금발과 푸른 눈의 미남은 조용해진 회의실을 울리는 유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스왑 분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손 들어 봐요.”

루크의 말대로 그런 이는 없을뿐더러 눈치 없게 발언하는 이도 없었다. 스물이 넘는 인원수에 어울리지 않게 고요해져 가는 회의실의 분위기 속에서 루크는 검지로 마이크를 툭툭 건드려 다시 한번 이목을 모았다. 비스듬히 비치는 프레젠테이션의 불빛이 그의 우묵한 눈매와 갸름한 뺨 위에 흘렀다. 푸르스름한 블루 라이트는 잘생긴 얼굴을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주고 있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제시하고 싶은 해결책이 뭡니까. 재작년 우리가 전기 차 결함으로 대규모 리콜을 진행했고, 그 결과 린드베르그의 차가 자동차가 아닌 에어팟 같은 전자 기기쯤으로 취급받고 있는 이 애매한 상황에서의 해결책 말입니다.”

“혁신의…….”

다시 반복되는 단어에 루크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왼쪽 눈썹을 조금 과장되게 움찔해 보였다. 제스처를 알아본 발표자는 붉은 머리카락이 흔들릴 듯 고개를 떨더니 말을 빠르게 했다.

“지나치게 혁신적이었던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전기 차가 익숙하지 않은 고객들에게 낯선 차체 결함이었기 때문에 더 예민하게 받아들여졌다고 저희는 판단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혁신을 없앨까요?”

“혁신을 없애기보다는 린드베르그의 자동차 사업에 좀 더 무게감 있는 신뢰가 더해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신뢰를 주어야 우리 차를 튼튼한 자동차로 인식할 수 있을까요. 더 빠르고, 더 안전한 자동차로 말입니다.”

“저희는 인식 개선을 위한 홍보에 예산을 추가하고 언론 통제를 더 강화할 예정입니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겠습니까.”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발표자와 양옆에 마주 앉은 이들을 둘러본 루크는 엄지손가락으로 제 미간을 가볍게 문질렀다.

제조업의 첨단을 달리고자 혁신을 거듭해 기어코 상용 전기 차 시장을 선점했더니 이번에는 지나치게 혁신적이어서 고객들이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다, 라. 루크는 식은땀을 훔쳐 내듯 이마를 문지르는 중년의 남성을 지그시 응시했다. 저 컨설팅 회사의 조언대로 혁신을 위해 기업 마크를 파란색으로 바꾸며 지불한 비용도 상당했다.

기다란 손가락을 맞물리도록 깍지를 낀 루크는 되는 대로 질문을 던졌다.

“신뢰. 믿음. 어디 사 올 만한 데 있습니까. 자동차 제조업 중 신뢰할 만한 브랜드로.”

“리스트 만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포뮬러 원 경기라도 나가야 자동차처럼 보이려나?”

루크의 마지막 말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가늠하지 못한 임원진과 컨설턴트는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잠시 수런거리는 웃음이 회의실을 울린 뒤 루크가 마이크를 밀어 내자 다시 발표가 시작되었다. 처음의 적막과 달리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 이후 마케팅과 인식 개선을 위한 캠페인 계획을 듣던 루크의 왼쪽에 있던 한 남자가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이탈리아계의 특징이 도드라져 갈색 눈과 갈색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이만 가 보셔야 합니다.”

“듣던 중 제일 반가운 소리네.”

비서의 말에 루크는 눈을 내리깔아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흑판의 시계 위를 가로지르는 화이트 골드 빛 시계 침이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12시 15분에서 막 몇 초가 지난 시간을 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번 시선이 모였다.

“시간이 돼서 먼저 가 볼게요. 이후 진행은 사라에게 전해 주면 됩니다.”

루크는 오른쪽에 앉은 체구가 작은 여자 비서를 남겨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을 나와 복도 끝에 준비되어 있는 엘리베이터에 타 내려가는 동안 중년의 비서는 그에게 웃음 섞인 말을 건넸다.

“그래도 조금만 들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2개월 동안 이백만 달러를 잡아먹은 것치고 지나치게 형편없잖아.”

“그렇긴 했습니다만.”

루크의 눈길을 받은 빈터 역시 크게 부정하지 않고 긴 목을 움직여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회의 중간에 빠져나온 루크의 다음 일정은 스웨덴이었다. 아버지의 생일 만찬에 참여하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던 그는 템스강을 지나 느릿하게 기어가는 차창 밖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전통과 신식이 섞여 묘한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런던은 회색의 음울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신년에 딱 맞는 날씨야. 홀로 중얼거리고는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장 높은 빌딩의 광고판을 턱짓했다.

“우리도 저기 광고할까?”

“알아볼까요?”

“글쎄. 스포츠 스폰서십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중간에 박차고 나왔지만 여전히 회의 내용을 곱씹고 있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화였다.

그때 스쳐 지나가던 높은 건물들 사이로 하나의 슬로건이 우연히 그의 눈에 들어왔다.

BE FASTER. 단순한 카피 라이팅을 아래에 흰 글씨로 휘갈겨 둔 한 남자의 포스터였다. 얇은 흰색 스포츠 상의의 목 부근에서 막 머리를 통과한 듯 남자의 하관이 약간 가려져 있었다. 덕분에 헝클어진 머리 아래로 시원하게 트인 눈매와 곧은 콧대가 돋보인다.

루크는 차가 멈춰 있는 동안 그 얼굴을 응시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동양계 느낌이 흠뻑 묻어났다. 특히 눈동자에서. 빛이 들지 않을 것만 같은 무저갱의 검은 눈동자가 어떠한 것도 비추지 않은 채 깨끗했다. 아득한 먼 곳을 응시한 듯 초점이 흐리기도 했다.

루크의 푸른 눈이 오래도록 향한 곳을 보고 빈터가 설명했다.

“스포츠 회사 광고입니다.”

“누구지?”

“아마, 에단 한입니다. F1 드라이버 중 한 명이죠.”

잠시 차는 신호에 걸려 움직임을 멈추었다. 다시 보고를 시작하려던 비서의 말보다 루크의 말이 빨랐다.

“빈터. 어떨 거 같아?”

되묻는 말은 짧기만 했다. 드라이버에 대한 질문치고는 뉘앙스가 묘해 비서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루크가 다시 물었다.

“사 온다면.”

“에단을… 저희 광고 모델로 기용할까요?”

“아니. F1 팀 말이야.”

“포뮬러 원 말씀이십니까.”

“차 하나 사서 파란색으로 칠하는 데 얼마나 들겠어.”

“보고 올리겠습니다.”

“괜찮은 생각 같아?”

옅은 웃음을 띠는 보스의 말에 빈터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수긍했다.

“F1은 자동차 경주니까요. 전통 있고 유서 깊은 제조사들이 참여하는 경기이니 신뢰를 사는 방법으로 괜찮을 것 같기도 합니다. 좀 더 조사해 봐야겠지만요.”

“위험 요소는?”

“일단 보스께서 모터스포츠에 참여하는 데에 대한 여론의 반응이 있겠죠.”

“생각하니까 벌써 보람차네.”

빈터의 걱정을 가볍게 받아친 루크가 다시 눈짓했다.

“그래. 조사해 봐.”

차는 런던 도심을 계속해 가로질러 갔다. 루크는 관심을 완전히 끄고 태블릿 피시에 띄워진 그래프를 보고 있었다. 그사이 빈터는 그의 건너편 창밖에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건물마다 상업 포스터와 광고 프로그램이 매력적인 이들을 다양한 연령대로 전시하고 있었다. 대중을 유혹하기 위해 제작된 광고들은 다양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중에 포뮬러 원 레이싱 팀을 욕망하는 이가 생길 수도 있는 법이었다. 빈터는 그렇게 홀로 납득했다. 루크가 고른 것 중 간만의 사치품이라 할 만한 물건이었다.

***

F1 레이싱 팀 인수 비용에 대한 추정 보고서는 루크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미팅의 요약 보고서와 함께 스웨덴으로 전달되었다. 빈터는 그 전달을 맡아 기꺼이 스웨덴으로 직접 향했다. 루크의 어머니를 쫓아다녔던 남자는 그녀가 떠난 후 루크의 뒤치다꺼리를 시작한 지 어언 스무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년의 겨울은 볕이 들고 하늘은 맑았지만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옷깃을 파고들었다. 가볍게 새 사냥을 나갔다는 소식에 빈터는 회색 캐시미어 목도리를 단단히 두른 채 너른 사냥터의 입구를 서성이던 중이었다.

발끝이 곱아드는 찬 기에 몸이 움츠러들 무렵, 너른 어깨에 사냥용 라이플을 메고 숲을 헤쳐 나온 루크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를 숙여 정강이에 묻은 눈을 터느라 빈터를 바로 발견하지 못했다. 빈터는 따로 아는 척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허리를 편 장신은 두꺼운 몸통이 도드라지도록 가죽조끼를 여미고 긴 허벅지 아래로 갈색 가죽 부츠를 신은 모습이었다. 말 옆에 서자 한 편의 화보와 같았다. 그 모습을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빈터가 가까이 다가서자 루크는 인기척을 느꼈다. 눈썹을 약간 치켜올리는 것만으로도 갓 내린 눈처럼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언제 왔어?”

“얼마 안 됐습니다.”

말의 엉덩이를 툭툭 친 루크의 발걸음이 먼저 움직였다. 눈 밟는 소리가 저택을 향한 궤적을 만들어 낸다. 그 발치를 낑낑거리며 따르던 사냥개의 울음소리가 길게 울렸다.

거대한 대문 앞에서야 루크는 따라온 검은 개의 머리를 툭 두드렸다. 그제야 개는 꼬리를 살랑이며 몸을 돌렸다. 유순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혈통 좋은 사냥견의 덩치는 흉악하기만 했다. 다가온 사용인이 그런 사냥개를 끌고 별장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빈터는 루크의 곁에 나란히 걸었다.

“그냥 두고 가도 된다니까.”

“괜찮습니다.”

부츠를 신은 채로 별장으로 들어간 루크는 서류를 받아 들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훑어보았다. 동아시아 지부의 세금 회피를 위한 유한책임회사로의 개정, 린드베르그 에너지사와 협약 체결과 같은 굵직한 주제가 몇 가지 지나갔다.

건네진 서류 중 마지막 페이지에 한 장의 예산안이 첨부되어 있었다. 맨 윗줄부터 읽어 내려가는 루크의 푸른 시선이 천천히 종이 위를 훑었다. 곁에 서 있던 빈터가 그의 관심이 오래 머무르는 서류를 보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때 말씀하신 포뮬러 원 레이싱 팀 인수에 대한 서류입니다. 일단 한 대를 사는 건 불가능하고 두 대를 사셔야 한다고 하네요. 한 팀당 두 대의 차를 내보내는 게 규칙이라고 합니다.”

“그러네.”

“포뮬러 원 팀의 인수를 생각한다면 좋은 타이밍인 것 같다고 합니다. 하위 팀 중 하나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매각설이 나온 지 꽤 되었는데 접촉해 보니 구천만 달러 정도면 인수가 가능할 것이라고 봅니다.”

“어때.”

“어떤 걸 말씀이십니까.”

“그 정도 값어치를 치르고 살 만해 보여?”

뻐근한 목을 한 바퀴 돌린 루크가 싱긋 웃었다. 192cm의 장신에 장대한 뼈대를 가진 그는 독일계 부친의 굵은 선과 덴마크 사교계에서 이름난 모친의 우아한 혈통을 이은 손꼽히는 미남이었다. 그의 얼굴이 언론에 등장했을 때 얼마나 많은 가십과 낯부끄러운 찬사가 끊이질 않았던가.

그러나 그의 뒤를 쫓아다니는 빈터는 그런 외적 찬사보다도 능력 자체에 조금 더 점수를 주는 편이었다. 주관적 표현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그의 보스는 날카로운 사업가로서의 이지가 남다른 편이었다.

이런 사람은 우연히 골라잡는 사업도 다 의미가 생기는 법이다. 빈터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가 관심을 가질 만한 정보를 읊었다.

“헤인즈. 명성은 꽤 있는데 가족 경영으로 부채가 쌓인 제조사입니다. 엔진까지 모두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팩토리 팀이고요. 시설 전반을 살펴보니 오래전부터 풍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운영비가 부족해서 올해는 가동도 못 했지만요.”

풍동은 프로펠러가 돌아 바람을 일으켜 기류가 물체에 미치는 작용을 실험하는 거대한 터널과 같은 시설이었다. 현세대에서는 비행기와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공기의 흐름을 테스트하는 데 중요한 시설로 손꼽히곤 했다.

“본래 레이스 카의 섀시 제조 명가였다고 합니다. 이번 저희 차체 결함이었던 빗속 주행 중 강풍으로 인한 빗물의 예측 진행 시뮬레이션에도 도움이 될 만한 데이터가 많이 축적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개발된 데이터를 F1 레이스 카에 적용해 미리 굴려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여겨지고요.”

“그래. 올해에는 우리 차, 컴퓨터로만 시뮬레이션 돌리지 말고 풍동에 몇 개월쯤 처박아 놔.”

이미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된 결함을 상기한 루크가 짧게 미간을 구겼다 펴며 물었다.

“인수하면 문제 될 만한 사업적인 요소는?”

“앞으로 환경을 위한 전기 차를 만든다며 친환경적으로 홍보했던 캠페인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기는 합니다.”

“해결 방안은 어떻게 되겠어.”

“내년부터 포뮬러 원 협회는 하이브리드 규정을 더욱 강화하고 연비를 점차 절감해 나가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합니다. 연비 절감으로 궁극적인 친환경을 실행하고 더욱 나은 퍼포먼스 개선을 위한 또 다른 실험이 될 거라 홍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고심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것보다는 더 나은 멘트가 있을 것 같군요.”

비서의 솔직한 발언에 루크는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서 해. 내가 포장하는 데는 별 재능이 없잖아.”

“그럴 리가요.”

루크는 옷을 벗어 던지며 총을 지탱하느라 힘이 들어갔던 팔을 스트레칭했다. 한껏 목을 틀어 근육을 이완하던 그가 턱짓으로 지시했다.

“살 만하면 한번 사 와 봐. 그 과정에서 주요 기술자가 빠져나갈 것 같으면 미리 접촉해서 조건 들어줘.”

“어떤 기술자를 중점적으로 체크할까요.”

“에어로다이내믹.”

“알겠습니다.”

비서의 대답과 함께 노크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문간에는 루크와 비슷한 이미지의 조금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특히 웃는 눈가의 주름이 좀 더 잡히는 편이었다.

머리칼은 갈색에 가까운 검은색이었지만, 활짝 웃어 보이는 미소만은 같은 혈통임을 증명하듯 닮은 분위기였다. 방금 전 보고서에 재정 상황이 기록되어 있던 린드베르그 에너지사의 대표이자 루크의 형인 제레미였다. 그는 방 안의 정경을 살펴보더니 과장된 태도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까지 와서 일 이야기일 줄이야.”

“잠깐 했어.”

“무슨 파트인데.”

“차.”

“전기 차 그만 집중하고 우리 기름 태워 줄 차나 만들어 봐.”

“안 그래도 그러려고.”

장난으로 던진 말에 루크가 반응했지만 제레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믿는 태도는 아니었다. 사냥복을 벗고 광택이 도는 실크 타이가 팽팽하도록 양손으로 쭉 당겼던 루크는 그것을 셔츠의 목깃 아래 둘러 바짝 조인 뒤 제레미에게 말했다.

“포뮬러 원 어떻게 생각해?”

“네가 그걸 왜.”

“하나 살까 해서.”

가볍게 이야기를 건네던 제레미는 장난기 없는 루크의 태도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F1에는 관심 없는 척하더니. 나야 환영이지!”

“꽤 주고 사는 거니까 광고 몇 개 팔아 줘.”

“내가 원하는 드라이버 데려오면 몇 개든 깔아 주지. 스폰서로 참여도 할게.”

“드라이버?”

그렇지, 드라이버. 차를 굴리려면 앉힐 드라이버도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그 순간 루크가 에단을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자신이 포뮬러 원 레이싱 팀 구매를 다시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되었던 드라이버를. 어두운 배경에 파묻혔음에도 강렬하게 정면을 응시하던 눈빛을 말이다.

그 눈빛에서 열망을 제거하면 뭐가 남으려나. 다소 어울리지 않는 상상을 하던 루크는 멈췄던 손을 움직여 능숙한 솜씨로 매듭을 지으며 비서에게 물었다.

“그 드라이버에 에단 한이라는 드라이버도 영입 대상이 될 만할까?”

“확인해 보겠습니다.”

빈터의 업무 목록 마지막에 에단 한의 계약 기간 확인이라는 새로운 한 줄이 추가되었다.

***

린드베르그의 전용기가 히드로 공항 활주로에 멈춰 선 날은 흐린 하늘에서 옅은 빗방울이 가늘게 떨어지던 날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온 그는 힐끗 눈을 들어 하늘을 곁눈질했다. 마중 나온 비서 사라가 거대한 우산을 든 수행원의 곁에 서며 그를 반겼다.

“오시는 걸 반기는 것처럼 비가 내리네요.”

“이 도시는 늘 나를 이런 식으로 반기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말이에요.”

다정한 대답 대신 루크의 환한 외모를 환대로 삼은 사라는 활짝 웃으며 마중 나온 검은 세단의 뒷자리에 함께 탑승했다. 질 좋은 회색 정장을 구기며 차에 앉은 그는 셔츠 소매에 닿은 물기를 쓱 털고는 차창 밖을 보았다. 차는 소리 없이 공항의 활주로 옆을 달려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파랗다 못해 중앙에 거무스름한 빛이 도는 눈동자가 그녀를 향하자 사라는 들고 있던 태블릿 피시를 건넸다.

“저희 포뮬러 원 팀 인수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에요. 파워 유닛은 직접 제조를 포기하고 메르세데스에서 구입해 오는 쪽으로 조율했고요.”

“파워 유닛?”

“엔진이요.”

보스의 눈높이에 맞춘 설명을 덧붙인 사라가 보고할 항목을 다시 체크하다가 물었다.

“보스. 포뮬러 원이 어떤 스포츠인지는 대충 아시는 거죠?”

“알아. 출발 불이 꺼지는 순간부터 정해진 바퀴를 가장 빨리 돌면 체커드 플래그를 받고 우승하는 거잖아.”

그 와중에 묘하게 핵심을 짚은 설명이었다. 그녀는 의심쩍은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네. 중간에 타이어 교체로 한두 번 서기도 해요. 그리고 새 드라이버가 후보가 한 명 생겼어요.”

“지난번 그놈처럼 자기 의지가 강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루크의 ‘나는 거들먹거리는 놈들은 싫어’라는 발언으로 인해 드라이버 후보 중 절반을 제외하게 된 사라는 요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난번 흥미로 들러 보았던 미팅 자리에서 거들먹거리던 이탈리아계 드라이버를 떠올린 루크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짓는 대부분의 웃음은 진정성을 가지기보다 고도로 사회화된 리액션에 불과했다. 불쾌한 기분을 가리기 위한 연막작전이랄까. 그런 웃음의 의미를 모를 리 없는 사라는 루크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빈터에게 말씀하셨다는 에단 한을 확인 중이었는데 마침 연락이 왔더라고요.”

다시 듣지 않아 지시한 당사자에게도 기억의 표면 아래 가라앉아 있었던 이름이었다. 루크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을 떠올렸다.

“어떤 연락.”

“개인 매니저가 저희 미켈라랑 계약 안 한다는 말을 듣고 먼저 접촉해 왔어요.”

“실력은 어때?”

“애매해요.”

“그래? 분위기는 벌써 월드 챔피언이라도 한 것 같던데.”

그 간극에 루크는 이유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혀를 차는 소리를 듣고 사라는 자신의 몫으로 가져온 태블릿 피시를 들며 설명을 시작했다.

“실력이 애매하다기보다는 성적이 애매하다는 뜻이었어요.”

“무슨 뜻이야.”

“에단 한. 한국계와 영국계 혼혈 드라이버예요. 큰 스폰서를 끼지 않고 자잘한 스폰서만으로 용케 F1 드라이버 자리까지 올라온 드문 케이스죠. 재능이 있었거든요. 빚도 지고. 그래도 3년 전 F2 그랑프리 우승자였어요. 페라리의 주니어 드라이버이기도 했고요.”

“그럼 지금 성적은 왜 애매한 건데.”

“알파 타우리라는 팀과 계약한 뒤 작년부터 F1 드라이버가 되었는데 나머지 한 드라이버가 스폰서를 크게 업고 소유주만큼이나 투자를 많이 했어요. 마틴 피페르의 조카예요. 피페르는 기억하시죠? 스페인 기반의 식료품 다국적 기업이요.”

루크는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잠시 눈을 먼 곳을 응시하듯 앞을 보았다.

“길마다 오렌지가 떨어져 있던 거기?”

“네. 그 자선 파티에서 한 번 마주치신 적이 있으세요. 거기서만 만나신 건 아니지만……. 어쨌든. 포뮬러 원의 레이스 카는 한 해 내내 레이스를 달리면서 계속 업그레이드를 하는데 피페르의 성적을 끌어올리려고 시험적 업그레이드를 모조리 에단 한의 레이스 카에 적용시키나 봐요. 그 때문에 예선 성적이 안 좋아서 항상 본선 맨 뒷줄에서 출발한다네요. 가끔 순위가 괜찮으면 어떻게든 레오의 순위를 밀어 올리려고 순위를 양보하라는 팀 오더를 내리고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올해 12위 정도면 괜찮다는 평가가 많아요. 일단 불이 붙으면 잘 달린대요. 아직 강한 한 방은 없지만.”

“한 방이 없으면 문제 아니야?”

“그 한 방이 있는 드라이버 중 한 명을 퇴짜 놓으셨잖아요.”

사라의 불만 섞인 지적에 루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 미팅은 제가 당신들을 테스트하러 온 겁니다. 내게 맞는 차를 줄 게 아니라면 나 역시 계약을 고려할 생각이 없습니다. 따위를 지껄이며 기선 제압부터 하려는 놈을 어떻게 받아들여. 내 팀인데 내가 보기 싫어지면 어떡해.”

“보실 생각은 있으셨고요?”

“가끔 볼 수도 있지.”

“룰도 모르시면서!”

“어쨌든. 연봉을 듣더니 헐레벌떡 달려온 주제에 웃기잖아. 안 맞을 거 같으니 피차 보지 않는 게 낫지 않겠어?”

이 뻔뻔한 발언 때문에 포뮬러 원 팀의 인수를 추진 중인 직원들 모두가 발을 동동 구르며 새 드라이버를 물색 중인 것이었다. 사라의 다부진 눈매를 보던 루크가 딴청을 피우듯 말했다.

“드라이버 한 명만 있으면 안 될까?”

“그건 제게 물으실 게 아니라 FIA(국제자동차협회)에 요청해 주세요. 한 팀에 반드시 두 명의 드라이버가 두 대의 차로 출전해야 한다고 하네요.”

“로비를 좀 더 빨리할 걸 그랬어.”

“보스. 진심은 아니죠?”

“아니면 그냥 내년은 포기하고 그다음 해부터 출전한다고 할까?”

그 말에 몇 날 며칠 동안 내년 포뮬러 원 팀 운영 예산안을 치열하게 계산했던 사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비서의 얼굴을 본 루크는 그제야 진정한 웃음을 지었다. 그를 짜증 나게 했던 미켈라라는 드라이버를 물 먹이고도 남아 있던 고약한 성질머리가 이제야 풀린다.

루크는 태블릿 피시의 화면을 두드려 문서를 띄웠다.

에단 한.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 동양인의 단정한 생김새인가 싶은 얼굴은 자세히 보니 제법 눈매가 깊고 입술이 도톰해 보였다. 루크는 사진 너머 에단의 무표정한 얼굴과 목이 쭉 뻗은 곧은 자세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정보를 읽던 그의 눈이 한군데에 멈췄다.

“가정 환경은.”

“집안이 작은 사업을 했었다네요. 어머니는 한국계이고요. 영국계 아버지의 이름은 마이클 앤슬리였어요. F1에서 맥라렌의 드라이버로 2년 동안 선수 활동을 했었지만 그 후 재계약을 따내지 못하고 인디카 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드라이버예요. 제 아들들을 모두 카트에 태워 보다가 에단 한의 재능을 알아보고 어떻게든 키워 보려 했던 모양이에요. 영국의 기사 칭호를 가진 이였고 영지는 딱히 없었어요.”

“나는 작위만 있는 귀족은 잘 몰라.”

“별거 아니었어서 기억하실 일이 없으셨을 거예요. 에단의 어머니는 마이클 앤슬리와 재혼을 한 사이였어요. 앤슬리는 5년 전 심장 문제로 사망했는데 그때 어머니와 에단은 집안에서 교외의 저택 하나만 받고 인연을 끊은 거 같아요. 이 저택도 부채가 상당한데… 거의 버린 거죠. 어쨌든. 본래 에단 앤슬리이던 이름을 에단 한이라고 바꾸고 어머니의 성을 따르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라네요. 어머니는 한국으로 돌아간 지 오래고 에단만 영국에 남아 이리저리 돈을 송금하고 있어요.”

“빚이 많아?”

“F1 드라이버로 계속 뛰면 해결될 만해요. 더 자세히 설명드릴까요?”

“됐어. 스폰서는.”

“패션이나 그런 쪽 자잘한 광고들은 붙어 있는데 굵직한 스폰서는 없어요. 그래도 4년 전에 폴로 월드 캠페인에서 동양인 남성 파트를 맡기도 했었네요. 모델이 많아서 묻히긴 했지만.”

“그래.”

감흥 없는 목소리로 듣고 있던 루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 쪽 스폰서 없어?”

“그런 쪽이요?”

반문하던 사라는 루크의 뉘앙스를 곧바로 알아들었다.

“없는 거 같아요. 애초에 그랬다면 빚을 다 갚지 않았을까요.”

“그래? 이상한데.”

“왜요. 뭐 들은 루머라도 있어요?”

웬만한 조사에 자신 있는 사라였지만 루크만큼 많은 것을 알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크는 한껏 고조된 의문이 무색하도록 싱겁게 대답했다.

“빚도 있다며. 절호의 찬스인데 왜 저걸 그냥 뒀지?”

“세상에. 보스도 똑같네요.”

“내가 뭘.”

“따로 아는 게 없으시다면 사생활에 별문제는 없었어요. 다른 F1 선수들이랑 비슷한 정도? 지금은 연인도 없는 거 같네요.”

“그럼 진행해 봐.”

“정말이시죠?”

“스폰서가 없다니 좋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거잖아.”

“네. 꽤 절실한 상태라 연봉 협상도 유리할 거 같아요.”

반질반질한 태블릿 피시의 면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듯 두드리며 말을 마무리하던 루크가 불쑥 말했다.

“정말 그런 쪽 스폰서 없었어?”

“네. 제가 찾아 봤을 때는 없는 거 같았어요.”

“진짜?”

“네. 아마…….”

확신을 가지고 있던 사라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무슨 일일까. 성미에 안 맞으면 마음껏 시비를 걸던 보스가 이렇게 애매하게 걸고넘어지는 경우는 처음이라 동그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짧은 침묵 끝에 퍼뜩 고개를 내려 에단 한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설마 하며 에단의 눈동자와 요모조모를 뜯어보던 사라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쪽으로도 우리가 제안 넣어 봐요?”

“나 어차피 메인 스폰서잖아.”

“그, 그러니까. 그거 말고 그런 쪽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더한 것도 할 사람으로 보이죠.”

루크는 그 말에 짐짓 상처받은 양 눈꼬리를 연극처럼 움직여 보였다가 대답했다.

“물어보기만 해. 있는지 궁금한 거야.”

“어떻게 물어볼까요?”

“알아서 해.”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지시에 사라는 그저 사무적으로 메모를 적어 넣기만 했다. 사적 스폰서 여부를 확인만 해 보기. 확인이라는 단어에 다시 한번 동그라미를 쳤다.

“그런데 이번에도 보러 오실 거예요?”

예의상 묻는 것이 분명한 어투였지만 루크는 그 기대를 저버리는 대답을 했다.

“어디서 만날 거 같은데?”

“마침 이번 주 경기는 실버스톤이라니 런던에서 만날 거 같아요.”

설마 오실 건 아니죠? 갈색의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사라의 표정을 본 루크가 천천히 멈추기 시작하는 차창 밖을 가볍게 손가락질하며 대답했다.

“마침 여기도 런던이네.”

“네. 하지만 바쁘시잖아요.”

“이번 주는 다 카나리 워프 일정이잖아. 괜찮아.”

“네……, 그렇죠.”

“그럼 잠깐 들르지. 우리 팀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까.”

그 운명을 제 손아귀에 넣고 뒤흔드는 남자의 미소에 사라는 조금 우울해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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