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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연정不變戀情 (26/26)

불변연정不變戀情

때는 햇살이 느른한 늦은 오후였다.

문평은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 그늘에 앉아 마음에 점을 찍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천마와 함께하고 있었다면 기름진 산해진미로 끼니를 때웠겠지만, 지금처럼 그가 출타해 홀로 있는 상황에서까지 그런 호사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온 그는 아침저녁이라면 몰라도 점심 정도는 단출하게 해결하는 편이 구미에 맞았다.

천마가 알게 된다면 궁상맞게 군다고 질색을 했겠지만, 수년간이나 같이 등을 붙이고 살다 보니 그 정도 타박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 된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도 결국은 천마에게 익숙해지고 말았으니 말이다.

“마후魔后님, 란란입니다.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막 식사를 끝내고 용정차로 입을 씻어 내고 있을 때 즈음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간단한 점심상을 봐준 후 조심스럽게 물러나 있던 그녀는 흔치 않게도 청하지 않았는데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 왔다.

예의 그 ‘공표’가 있고 난 이후로, 마치 천마를 대하듯 깍듯하게 예를 다하던 그녀는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태도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는데, 그런 그녀가 상례에 벗어나는 행동을 보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평은 고개를 갸웃했다.

“괜찮습니다. 용건이 있다면 말씀하세요.”

거참. 심지어는 천마와 사는 것까지도 익숙해진 마당인데, 저놈의 마후 소리는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여인도 아닌 사내가 후의 칭호를 받다니,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는 건지.

문평은 내심 입맛이 썼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가 뭐라고 해봤자 그를 부르는 명칭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마가 직접 천명한 대로 천마의 배우자다. 그랬기에 역대 교주의 부인들에게 따라왔던 칭호를 물리칠 명분이 없었다. 처음에는 기막히고 낯간지러워 그 칭호를 격렬히 거부했었으나, 그 혼자의 힘만으론 대세를 바꾸기에 역부족이었다.

나름대로 반항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번번이 천마에게 꺾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당했다. 심지어는 파면객조차도 ‘그러면 이제 백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요?’라는 말로 문평의 기를 꺾어 놨다.

마교 교주의 사모師母가 되고 파면객의 백모伯母가 되느니 천마후天魔后로 불리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포기한 문평은 그 후로 그에 대한 이견을 일절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말해 봤자 자신의 속만 답답하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체득한 탓이다.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배첩拜帖은 없으신데, 전언을 넣으면 마후께서 필히 만나 주실 것이라고 하시는군요. 손님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저의 판단으로 가부를 결정하기 힘들어 의향을 여쭙고자 합니다. 손님을 비익전比翼殿으로 모실까요?”

“손님이라고요? 외부 손님이 비익전을 찾았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란란의 말을 들은 문평의 얼굴에 호기심이 엿보였다. 천마가 태상太上으로 물러나 앉은 지도 벌써 10년. 무거운 짐을 던져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저리를 내며 교주 위를 대제자에게 물려준 천마는 단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교의 일에 간섭한 적이 없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정말로 놀고먹기만 했기 때문에, 그가 교내에 있을 때조차도 외부 사람이 찾아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간간이 제자들이나 교인들이 안부 삼아 들를 때가 있긴 하지만 그것조차 천마가 은거를 고집하며 내치는 마당이니, 요즘 들어서는 배첩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리 배첩을 내밀고 약속을 잡아도 문전 박대를 당하는 판국이니 감히 사전약속도 없이 찾아오는 배짱을 부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 천마가 있었다면 이번에도 물어볼 여지도 없이 일을 처리했을 게 뻔했다. 하지만 문평은 그처럼 야박한 성격이 못 되었다. 그는 손에 들었던 찻잔을 상 위에 내려놓으며 흥미롭게 물었다.

“배첩도 없이 찾아들다니, 흔치 않은 손님이군요.”

자신이 맡은 책임에 있어 소홀한 법이 없는 란란을 곤란하게 한 것만 보더라도, 상대의 신분이 심상치 않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굴까? 뉘가 있어 저 철혈의 여인을 저처럼 곤란하게 한 것인가?’

문평은 오랜만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셔 오세요. 이 먼 곳까지 발걸음을 하신 분이라면 그만한 용건이 있으신 분이겠지요.”

“하나, 마후님. 태상교주께서 자리에 계시지 않은데 정녕 괜찮으시겠습니까?”

못내 곤란한 듯 머뭇거리던 란란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천마에게 있어 문평은 그야말로 금지옥엽金枝玉葉이다. 따로 일이 없는 경우라면 노상 붙어 다니고, 같이 있을 때도 손안의 구슬 다루듯이 애지중지한다. 독점욕도 지독해서 심지어는 제자들조차도 문평을 만나기 전엔 천마의 허락을 얻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이나 지속되었으니, 가까운 거리에서 그 과정을 쭉 지켜봐 온 란란이 근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따로 걱정할 일이 없는 문평은 태평히 손을 흔들었다. 천마와 함께 살면서 배짱만 늘어난 그는 사람 하나 만나는 것도 내 맘대로 못 하느냐며 편안히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이제 제 한 몸 지킬 정도는 되니까요.”

란란은 자신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그 부분이 아니라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그녀가 모시는 마후님은 묘한 데서 둔하셔서, 그런 걱정을 늘어놓아 봤자 어차피 이해를 못 하신다. 하고 싶은 말을 한숨과 함께 삼킨 란란은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고 뒷걸음질을 쳤다.

나무 그늘에 상을 두고 일어난 문평이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손님이라는 말에 정신이 팔려 진짜로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사람이 찾아왔는데 이름도 물어보지 않고 다짜고짜 들여보내라는 허락부터 한 셈이다.

“아, 참. 잊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찾아온 겁니까?”

그 점을 잊은 것은 란란도 마찬가지. 그녀는 송구해 하며 머리를 숙였다.

“화괴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화괴라니, 윤승효 말입니까?”

“예.”

정도맹에서는 한사코 화협이라고 불리던 윤승효지만, 마교에서는 그와 반대로 늘 화괴라고만 부른다. 마도와 정도는 그토록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현격한 차이를 보였지만, 현재 문평이 신경 쓰이는 건 천년이 지나도 좁힐 수 없을 듯한 마정 간의 간격 따위가 아니었다. 정작 그가 놀란 것은 윤승효가 천산까지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이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천하를 돌아다니느라 바쁜 사람이 어인 일로 이곳까지 온 것일까? 문평은 고개를 갸웃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그는 서둘러 걸음을 옮겨 내전으로 들어섰다. 반가운 사람이 오랜만에 찾아왔으니 발걸음은 자연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백조모님. 어째 날이 갈수록 더욱 아름다워지시는 것 같습니다.”

문평이 방으로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난 윤승효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천마가 옆에 있을 때는 엄두도 못 내는 일이지만, 둘이 있으면 장난스러운 천성을 감추지 않는 그는 진심인지 농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싱글싱글 미소를 지었다.

문평은 문지방을 넘다 말고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아연한 기색으로 윤승효의 모습을 훑어보기만 하다가, 한참 만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러는 윤 형은 꼴이 그게 뭡니까? 제가 모르는 사이에 개방의 방도라도 되신 건가요?”

“하하하. 명색이나마 일문의 문주를 맡고 있는 제가 어찌 타방의 방도가 되겠습니까. 차라리 하오문에도 오의파汚衣派가 생겼는지를 물으셔야지요.”

문평의 어이없는 질문에 윤승효는 호쾌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드러내는 기색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태연자약했으나, 그 몰골은 실로 말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문평이 개방의 방도가 된 거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봤겠는가?

문평은 눈이라도 비비고 싶은 기분으로 다시 한번 그를 바라보았다.

천마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화사한 맵시를 자랑하던 사람이 완전히 상거지가 되어 있었다. 저런 꼴로 용케도 정문을 통과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윤승효의 상태는 형편없었다.

너덜너덜한 옷은 빨지도 않았는지 땟국물에 절었고, 늘 화사하던 흰 뺨은 바짝 말라붙어 초라할 지경이다. 한 몸인 양 끼고 다니던 애체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뜯어진 소매 속에서 흘러내릴 것 같은 부채는 비단이 찢겨 살만 앙상했다.

누가 보면 마적이라도 만나 봉변을 당했다고 할 행색이었으나 초절정에 이른 강호의 고수가 겨우 마적 따위에게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다.

머리가 아파진 문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 사람 별호에 괴 자가 들어가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바였지만, 이런 괴이한 꼴을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무슨 일을 당하셨기에 이 모양이십니까? 오는 길에 쉴 만한 곳을 찾기 힘드셨습니까?”

공작새 기질이 다분한 천마나 윤승효는 남의 눈에 허술한 꼴을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성미로 용케도 이런 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문평은 질문을 던졌다.

그의 놀람을 본 윤승효는 흰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부러 한 장난의 결과를 들여다보는 어린아이처럼 짓궂기 짝이 없는 미소가 그의 눈꼬리에 걸렸다.

“쉴 만한 장소는 많은데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쫓기고 있던 터라 발걸음을 멈출 만한 여유가 없었거든요. 이곳까지 오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백조모님. 진작 백조모님께 신법이라도 배워 둘 걸 그랬나 봅니다.”

그 말을 들은 문평은 평소라면 듣기 싫어했을 호칭조차 신경 쓰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황급히 되물었다.

“쫓기다니요? 하면 여기까지 쫓겨 오셨단 말입니까?”

“네. 이렇듯 낭패한 꼴을 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이곳으로 도망 온 게 맞습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당분간 저 좀 숨겨 주십시오. 제 생명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스스럼없는 태도로 윤승효가 청했다. 그러나 문평은 윤승효가 보기만큼 여유가 있지 않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나이가 들면서 눈주름과 함께 여유와 재담이 늘어난 윤승효는 어떤 상황에서도 조급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를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으려면 겉으로 드러난 태도가 아니라 내면을 꿰뚫어 봐야 한다. 다행히 다년간의 경험으로 윤승효에 대해 알 만큼 알게 된 문평은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집이 넓으니 사람 하나 숨기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계시고 싶은 만큼 계셔도 아무 상관 없어요. 하나…….”

“감사합니다. 역시 마음이 넓으시군요. 백조부님께 같은 청을 했다간 즉각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났을 텐데요. 때마침 백조부님께서 출타하신 와중에 당도할 수 있었던 걸 보면 제게 천운이 있었나 봅니다.”

정말로 천운이 따르는 사람이라면, 이런 황망한 꼴이 되어 남의 집에 숨어들게 되진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문평은 그 점에 대해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더는 묻지 말아 달라는 건가? 역시 피치 못할 사연이 있는 게로군.’

문평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속으로만 짐작했다. 하급 무사로 살아갈 때는 미처 몰랐지만, 강호의 고수들에겐 간혹 남에게 말 못 할 사정들이 생기곤 했다. 대표적인 예로 옛이야기 속에나 나올 법한 기구한 사연을 몇 개나 가지고 있던 천마를 들 수 있을 것이고,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심상치 않게 엉킨 인연의 실타래에 발목이 묶이는 일이 허다했다.

타인의 은원에는 참견하는 법이 아니라는 강호의 도리가 생긴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문평은 천마를 만난 후 많은 일을 겪어왔고, 그로 인해 헤아리는 마음이 깊어졌다. 게다가 윤승효의 성격상, 저렇게 나온다면 더 다그쳐 본들 대답을 듣긴 어려울 터였다.

“……마침 별채에 치워둔 방이 하나 있습니다. 당분간 그 방에 묵으시면 될 겁니다. 목욕물과 갈아입을 만한 의복도 준비하라고 이르지요. 지금 모습으론 편히 쉬실 수도 없을 것 같군요.”

자신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 만한 일이었다면 묻지 않아도 미리 털어놓았을 터였다. 도움을 청하면서 이유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한 무례인데, 윤승효는 그런 무례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지를 만한 사람이 아니다.

마음을 정리한 문평은 이마를 짚으면서도 집주인의 도리를 다했다. 윤승효는 고개를 숙여 감사하게 그의 호의를 받았다.

문평은 란란을 불러 그를 별채로 안내하도록 일렀다. 윤승효는 자리에서 일어나 란란을 따라나섰다.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하니 그의 심상치 않은 상태가 제대로 드러난다.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는 모르겠지만, 걷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해 절뚝거리는 발걸음을 본 문평은 눈살을 찌푸렸다.

‘의원도 불러야 하는 건가?’

겉으로 드러나는 외상이 없어 안심하고 있었는데, 걷는 것을 보아하니 보이지 않는 부분에 상처가 난 모양이다. 사소한 절상 정도야 스스로 치료할 수 있다지만 내상을 입었다면 혼자 힘으로 치료하기 곤란할 텐데.

잠시 망설이던 문평은 설렁줄을 잡아당겨 또 다른 시비를 불렀다.

윤승효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찾아든 손님인 동시에, 천마의 의손자다. 자신과도 적지 않은 인연으로 얽힌 그를 소홀히 대접할 수 없었던 문평은 마교에서 가장 솜씨가 좋은 의원을 윤승효에게 보냈다.

사람의 인정이란 통상 품 안에 날아든 새조차 그냥 보내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상대는 새도 아니고,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지인 아닌가.

정이 많은 문평은 불우한 처지의 승효를 차마 박대할 수 없었다. 그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문평은 윤승효가 기껏 보낸 의원을 그대로 물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별채로 건너갔다. 상대의 양해를 구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뜨거운 물을 세 번이나 갈면서 목욕에 열중했다던 윤승효가 문평이 내준 깨끗한 의복을 차려입고 다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탁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이 있었는데, 이제 막 상을 차린 모양인지 아직 젓가락도 대지 않은 채였다.

“그러고 보니 여쭙는 것을 깜빡했군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젓가락을 들고 있던 윤승효가 문평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평은 손을 저어 그의 인사를 막으며 대꾸했다.

“저는 이미 먹었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편히 드세요. 보아하니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입성이 깔끔해졌어도 예전 같지 않은 모습이다. 병이라도 앓고 일어난 듯 초췌한 안색이 적잖이 안쓰러워, 그와 얼굴을 마주한 문평은 자기도 모르게 걱정부터 건넸다. 그 말을 들은 윤승효가 무심결에 손을 들어 제 뺨을 쓸었다.

“그렇게 티가 납니까? 며칠간 육포로만 연명하기는 했습니다만.”

“깨끗이 씻기는 하셨지만 아직 동경을 보시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수려하던 외양이 볼품없어졌습니다.”

볼품없다는 말을 난생처음 들어 봤기 때문인지, 윤승효는 뜻밖에도 그 말에 신경 썼다. 문평은 쓴웃음을 지으며 본인의 얼굴을 문질러 대는 윤승효를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게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던 윤승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너무 웃어서 잡힌 눈가의 웃음 주름을 휘며 깊은 눈웃음을 날렸다.

“너무 심각하게 말씀하셔서 진짜인 줄 알았습니다. 정말 얼굴이 상한 줄 알았지 않습니까.”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상했는데요.”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겁니다. 아직 봐줄 만은 하잖아요. 이런 일을 겪고도 저만큼 수려함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백조모님은 매양 백조부님만 보고 사시니 보는 눈이 한없이 높아지신 모양입니다만, 그 넓은 중원 땅에서도 이 정도의 미모는 흔치 않습니다.”

별로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 입으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을 듣자니 어처구니없었다.

‘안 보는 사이에 능청만 늘었군.’

문평은 어이없는 기분으로 윤승효를 바라보았다. 윤승효는 씩씩하게 숟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진수성찬입니다. 여기는 언제 오더라도 대접이 좋단 말이지요. 어떨 때 보면 황궁보다 마교가 더 나을 때도 있어요.”

윤승효의 앞에 놓인 음식들은 갓 만든 타락죽과 맑은 자라탕, 연잎으로 감싸서 찐 잉어찜 등이다. 모두가 속을 보하면서도 위를 부담스럽게 하지 않는 것들이라 란란이 그의 대접에 제법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문평은 윤승효가 권하는 대로 그의 앞자리에 앉아 그가 먹성 좋게 식사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야 황궁의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으니 이곳 숙수의 솜씨가 황궁 숙수보다 나은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나 저희 의원이 태의太醫보다 낫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요. 생사판의生死判醫는 성미가 다소 괴팍하긴 하지만 솜씨 하나만큼은 천하제일입니다.”

우아한 젓가락질로 생선 뼈에서 살점을 발라내고 있던 윤승효가 눈을 들었다. 말꼬리를 붙잡듯 따라붙으면서도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화술이 제법 유려하다.

‘어떤 분과 함께 사시다 보니 배우는 것이 적지 않으신가 봅니다?’

예전의 문평이었다면 구사할 수 없었을 화법에 윤승효는 조용히 웃었다.

“그 사람을 그냥 돌려보낸 것이 마음이 쓰이셔서 오셨군요.”

“그렇습니다.”

윤승효의 단정에 문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괜한 걱정을 끼쳐 드린 것 같군요. 의원에게 보일 만한 상처가 없기에 사람을 물렸을 뿐인데, 그 때문에 신경을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상처가 없다니요. 아까 보니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던데요?”

“자세히 보셨군요. 하지만 그는 상처 때문이 아니라 근육이 놀라서입니다. 신법에는 제법 능숙하다고 여겼는데 며칠을 연달아 달리니 그렇지도 않더군요. 너무 오래 달리다 보니 안 쓰던 근육까지 모조리 당기고 뒤틀려 자칫하면 쥐가 날 뻔했습니다.”

“……초절정의 무인이 다리에 쥐가 나요?”

“그러니까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무려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제가 다리에 쥐가 날 뻔했다니까요. 내가의 고수랍시고 근력을 키우는 일을 소홀히 했다가 하마터면 큰 창피를 당할 뻔했습니다.”

윤승효는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는 문평을 향해 너스레를 떨어 댔다.

‘하아. 이것조차도 비밀이라는 건가?’

문평은 의뭉스럽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다 낮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윤승효의 행사가 비밀스러운 것은 원래부터 알고 있던 일이지만 오늘 보이는 태도는 여느 때에 비해서도 한결 더 조심스러운 데가 있었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도망쳤다. 윤승효는 그 외에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정보를 흘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정말 위험한 일에 휘말린 게 아닌가 하는 근심이 든다. 화협이면서 화괴, 동시에 하오문주라는 그의 복잡한 신분은 그런 근심을 키우기에 적당한 토양이었다.

“굳이 숨기고 싶으신 일이라면 말씀하시라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하나 이것만은 기억해 주세요. 윤 형과 저희는 남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을 해주셔도 됩니다.”

지난날 그에게 적잖이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는 문평은 진지하게 말했다. 천마가 옆에 있었으면 무슨 사정인지도 모르고서 그렇게 함부로 끼어들어도 되는 거냐고 핀잔을 줬겠지만,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도리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문평은 그래도 흔들리지 않았을 터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천마와 동등한 대접을 받으며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문평에게는 그에 걸맞은 기품 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본인은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그 차이가 확연하다. 윤승효처럼 하급 무사일 때의 그를 아는 사람은 격세지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윤승효는 진심으로 그런 문평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백조모님. 역시 의지하기에는 할머님만 한 분이 없으십니다.”

할아버님이라고 불러도 뜨악할 판에 할머님이라니! 한창 진지한 와중에 기분을 잡쳐 버린 문평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건너다보았다.

“여보세요, 윤 형. 그놈의 백조모님 타령은 그만하시면 안 됩니까?”

“아니, 백조모님을 백조모님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합니까?”

윤승효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문평에게 물었다. 짐짓 희롱같이도 들리는 말이지만, 그의 질문은 결코 농으로 건넨 것이 아니었다.

윤승효는 드물게도 문평을 마후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 중에 하나다. 관부 태생인 그는 강호인의 별호에 들어가는 칭호에 예민한 편으로, 그중에서도 특히나 왕작을 참칭하는 칭호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차라리 예전처럼 석 형이라고 하시든가요. 연배도 비슷한 이에게 엄한 호칭으로 불리니 당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아니, 그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까. 백조부님께서 직접 백조모님을 일컬어 ‘이 사람 보기를 나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 말씀을 따라야지요.”

“그는 단지 저를 존중해 달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일 뿐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셔서는 안 되지요.”

문평이 우겼지만, 윤승효는 문평보다 천마를 잘 안다. 문평의 주장과는 달리 천마가 한 말은 문자 그대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고스란히 이행하는 편이 신상에 이롭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윤승효는 문평에게 꺾이지 않았다.

“백조모님이 석 형이 되면, 백조부님은 혁련 형, 아니 백 형이 되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조부님이라고 모신 분인데, 인제 와서 호형호제를 하란 말인가요?”

문평은 그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어졌다.

천마가 고집하고 있는 바는 지금 윤승효가 하는 말과 완전히 같았다. 그는 늘 너는 나와 같은 항렬로 대접받는 게 마땅하니 그를 어색하게 여기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 중원의 풍습으로 보자면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처지를 떳떳이 여기지 못하는 문평은 그의 요구를 따르기 힘들었다.

문평은 천마와 남색 관계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민망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그로서는 아랫사람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내세울 수 없었다.

원래부터 자신의 자리였던 천마와는 달리, 천마를 만나 신분이 수직 상승한 문평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적잖은 자격지심이 있었다. 마침내 천마를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평생을 같이하기로 했어도 그런 마음가짐만큼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자격지심이 아니라도 할머님이라는 칭호는 좀……. 사내로 태어나 그렇게 불리고 싶은 사람이 대체 어디 있겠어?’

윤승효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호칭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기분이 언짢아진 문평은 불편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일을 쳐놓고 뒤늦게 마음이 쓰였던지 윤승효가 은근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곧 죽어도 형장 소리는 못 하겠다니 그렇게 부르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할머님 소리를 감내하는 것은 그가 싫었다. 하급 무사일 때는 별호가 없었고, 고수 소리를 듣게 된 이후에 겨우 얻은 별호가 천마후니 달리 부르라고 할 만한 호칭도 없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조만간에 강호에 한 번 나가야 할 성싶습니다. 그럴듯한 별호라도 하나 있으면 달리 부를 만한 이름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문평은 혼잣말처럼 농도 짙은 푸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윤승효는 화들짝 놀랐다. 본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할 때조차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그가, 문평의 이야기를 듣더니 경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그렇지만 홀로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문평은 그런 윤승효의 표정을 알지 못했다.

어떻게 구슬려야 천마를 떼버리고 홀로 강호에 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느라 분주한 나머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읽지 못한 것이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강호에 나가시다니요?”

윤승효는 문평이 발가벗고 대로에서 춤이라도 추겠다고 말한 것처럼 격렬하게 반응했다. 어떻게 그런 허황하고 미친 생각을 할 수 있느냐는 투였다.

“제가 별호를 얻으려면 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별호라는 건 스스로가 지어 붙인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이름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귀하신 몸께서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강호의 무부들 틈으로 뛰어드시겠다고요? 고작해야 별호 따위를 얻기 위해서요?”

“귀하신 몸이라니요. 농담이 과하십니다. 그런 말은 윤 형에게나 어울리지요. 저 같은 사람에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윤승효는 진심으로 말했는데, 이번에 건넨 말 또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문평이 웃으면서 받아넘겼다.

‘그게 아니라니까 이 사람아!!’

윤승효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제 가슴을 두드렸다.

‘당신이 강호에 홀로 나가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제3차 정마대전이 터지게 돼. 이번에는 천마의 폭주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고!!’

문평의 목숨 하나에 수백 수천의 생사가 걸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윤승효는 자신의 경솔한 입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참사를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만에 하나 자신 때문에 문평이 강호에 나가게 되면, 그는 제3차 정마대전의 원흉이 될지도 모른다.

“백조모님께선 도통 자각을 못 하시는군요. 본인께서 얼마나 존귀하신 분인지 알지 못하십니까? 그깟 별호쯤이야 제가 얼마든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사람 셋만 모여도 없는 호랑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데, 하오문의 정보력으로 그까짓 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마음만 먹는다면 백조모님께서는 여기 앉아만 계셔도 그럴듯한 별호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치 않은 생각은 아예 마십시오.”

윤승효는 허술하게 넘겼다가 진짜 일이라도 터질까 싶어 단단히 못을 박았다. 핑곗김에 강호에 나가고 싶었던 모양인지 문평이 은근히 서운한 시선을 보낸다.

그는 천마의 도움으로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이제껏 그 실력을 뽐내 볼 기회가 없었다. 지난 정마대전으로 정기가 쇠약해진 정도는 당분간 재기 불능이었고, 천마가 신처럼 군림하는 마교에서는 무력을 사용하기는커녕 큰 소리를 낼 일도 없었다.

“윤 형께 그런 수고까지 끼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산채 한두 개를 토벌하는 정도라면 지금의 저로서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는 수고를 자청한 게 아니라, 강호의 평화를 수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녀석은 그저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는 것뿐이니 부담스럽게 여길 것 없다.”

그에 대한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돌아왔다. 기척도 없이 등 뒤의 방문이 열리면서 들어온 사람이, 윤승효가 하고 싶었던 말을 속 시원히 대신해 준다. 초절정의 고수가 둘이나 있어도 사람 하나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론 천하에서 그런 이적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천마 하나뿐이다.

그는 망설임도 없이 문평에게 다가와 뺨에 입을 맞췄다. 중원에서는 보기 드문 민망한 인사였으나,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있는 문평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유일하게 상식을 가진 윤승효조차도 그 모습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마의 팔불출 행각은 지나치게 노골적이라서, 두어 번 그런 광경을 지켜보고 나면 그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놀랍다는 감상이 들지 않았다. 문평이 그러는 것처럼 보는 사람도 으레 그러려니 싶을 뿐이다.

“어쩐 일이십니까? 미리 말씀하시기로는 앞으로도 이틀가량 더 계시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파면객의 환골탈태를 위해 힘쓰고 있는 천마는 가끔 그가 폐관 수련하는 장소까지 찾아가서 그를 지도하곤 했다. 초절정의 고수가 화경에 이르는 것은 잉어가 등용문을 뛰어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파면객은 지난 10년간 폐관 수련장 밖을 나와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천마는 종종 그를 방문해 무리武理를 해석해주곤 했는데, 이즈음도 마침 그럴 무렵이었던지라 그는 벌써 며칠간 자리를 비웠었다.

“우경이가 그동안 쌓아 놓았던 벽을 허물 것 같아서 혼자 두고 왔다. 곁에서 누가 지키고 있으면 신경이 분산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니, 정말입니까? 그럼 파면객께서 화경에 드신 건가요?”

“화경으로 넘어갈지 초절정의 벽을 하나 더 깰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누구도 장담을 못 한다.”

천마는 시큰둥하게 말하더니 문평의 곁에 앉았다. 오래 살아온 부부들이 그렇듯이 두 사람 역시도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입에 들었던 음식을 얼른 삼킨 윤승효가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처음 천마가 방에 들어올 때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그는 천마가 앉으라는 허락을 내린 뒤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안부 여쭙겠습니다. 백조부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중원에서 무슨 사고를 쳤기에 이렇게 궁벽한 곳까지 몸을 피한 거냐. 혼자 힘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나 보지?”

문평이 처음 봤을 때처럼 궁상맞은 거지꼴로 있는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입성을 가다듬어 사람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마는 윤승효가 이곳에 온 이유를 정확히 알아차렸다.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사정부터 짚어 오는 천마의 태도에 뜨끔해진 윤승효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저 무심하게 건너다보는 눈길임에도 속내가 훤히 읽히는 느낌이다.

역시 그보다 세 배는 더 산 영감은 문평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나마 옆에 문평이 있으니까 이 정도로 자제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앞에 사람을 앉혀 놓고 속내를 훌렁 뒤집어 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나 봅니다. 당분간 별채에서 몸을 쉬도록 당부했습니다.”

“흥.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무슨 사연인지조차도 제대로 일러 주지 않은 게로군. 자네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야.”

옆에서 보던 문평이 윤승효의 편을 들어 줬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낮게 혀를 찬 천마는 문평에게까지 꾸짖듯 말하더니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뱀 앞의 개구리라도 된 것처럼 윤승효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문평과 함께 있을 때는 험한 꼴을 당하고 와서도 제법 웃더니만, 천마가 등장하자마자 간이 뚝 떨어진 모양인지 내심 마음을 졸이는 모양새가 겉으로도 훤히 보인다.

“굳이 이유를 들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강호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래저래 여의치 않은 사정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때때로 아는 것이 모르느니만 못한 법이지요.”

“모르는 척 지나가는 길이면 그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네는 지금 말려든 모양새지 않나. 저놈이 무슨 죄를 저지른 건지도 모르면서 뭘 믿고 숨겨 주냔 말이야.”

“저 사람을 하루 이틀 겪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인품이며 행동이 어떤지 뻔히 아는데 이 정도도 돕지 못합니까?”

문평이 끝까지 윤승효를 감싸자 기분이 상한 듯 천마의 안색이 싸늘해진다. 문평이 꼬박꼬박 말대꾸한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눈앞에서 다른 사내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이 더 고까웠던 천마는 혀끝에 날카로운 가시를 달았다.

“이러니 순진하다는 거다. 인두겁을 쓴 동물은 함부로 믿는 게 아니야. 그리 겪고도 모르겠나?”

“제가 겪은 바에 따르면, 제게 가장 많이 거짓말을 하신 분은 바로 눈앞에 계신 분이신데요. 의심을 하려거든 제일 먼저 당신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차라리 그리해라. 이렇듯 덥석덥석 아무나 믿는 것보다는, 나조차도 못 믿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

이 사람은 왜 항상 이리도 심술궂을까. 문평은 오랜만에 찾아온 손자를 쥐 잡듯이 잡는 천마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하나 천마는 말로는 문평을 꾸짖는 듯했지만, 그 말이 향하는 진짜 목표는 어디까지나 윤승효였다.

‘어디서 감히 문평을 이용해 먹느냐. 사람이 착하다고 저 좋을 대로만 굴어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입으로만 어른이라고 섬기지 말고 제대로 어른 대접을 해라.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따위 꼴을 보고도 그냥 넘길 줄 알았더냐?!’

행간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을 만큼 천마의 의도는 선연했다. 그러니 눈치 빠른 윤승효가 그를 놓칠 리 없다. 천마와 문평의 말다툼이 길어지자 그는 좌불안석하며 식사조차 제대로 못 했다.

본래 아랫사람에게 자상한 편은 아니었지만, 개중에서도 윤승효에게는 유독 까칠한 천마다. 친손주도 아니고 의손주에, 필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사사건건 호되게 부려먹으니 대접을 해줄 만도 하련만 어째 사사건건 고리채를 잡은 빚쟁이마냥 매섭기 짝이 없다.

곁에서 보는 사람도 가끔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당사자는 얼마나 서럽겠는가. 문평은 한마디 더 하려고 입을 여는 천마의 소매를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입니다. 피곤할 터인데 우리는 이만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나누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천마는 이거 놓으라는 듯 짐짓 험악하게 미간을 찡그렸으나, 문평은 천마의 소매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눈앞에서 문평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던 천마는 쌀쌀맞은 시선으로 문평을 째려보더니 휙 하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있는 대로 심통이 난 어린아이와도 같은 태도에 어이가 없어진 문평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식사 중이신데 괜히 방해만 된 듯합니다. 우리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더 있다가는 손님만 욕보일 것 같아 문평은 천마를 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승효는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와서 사람을 번거롭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젓가락을 놓았다 다시 잡는 게 이번만도 벌써 몇 번째인지. 문평은 버티는 천마의 팔을 품 안에 끌어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갑시다. 좀! 손주뻘인 손님을 면박하는 것은 이 정도로도 충분히 과합니다.’

문평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을 위해 하는 행동이라는 건 알지만 그의 역성이 지나치니 외려 창피하기만 했다.

“벌써 이립도 넘은 나이에 잘하는 짓이다. 대체 어떤 놈에게 당하고 와서 여기까지 도망친 게야?”

아직 분이 안 풀린 천마는 문평 모르게 윤승효의 귓전에다 전음을 때려 넣었다. 그들이 나서는 걸 배웅하느라 일어서 있던 윤승효는 그 말을 듣고 그만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더듬더듬, 천마에게 되물었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모를 리가 있나. 자리에 앉는 모습만 봐도 딱 알겠던데.”

과연 남색가로만 50여 년을 살아온 사람의 눈썰미는 함부로 속일 게 못 되었다.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그런 상황을 알아볼 수 있었단 말인가.

자신의 현재 상태를 타인에게 들키리라고 상상도 못 해봤던 그는 천마의 지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 얼굴을 의미심장하게 돌아보던 천마는 문지방을 넘어가며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그리고 너, 뜨거운 물로 목욕했지? 상처가 다시 터져서 뒤에 핏물 배었다. 의자에도 적지 않게 묻은 것 같으니 알아서 해결하거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면 말이다.”

윤승효는 그 말을 듣고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소스라친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의자가 피칠갑이 되었다면 그도 눈치를 챘을 텐데, 어찌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었는가 싶어 머리가 아찔해진다.

그러나 황급히 시선을 내린 윤승효의 눈에 보인 것은 상상했던 것만큼 참혹한 광경이 아니었다. 흥건하게 물든 피바다 대신, 옻칠한 나뭇결 위로 몇 방울의 핏자국만이 희미하게 비쳤다. 천마의 말을 듣고 자세히 살폈으니 알아챌 흔적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있는 줄도 모르고 넘어갔을 미미한 단서였다.

혹시나 해서 바지 뒤춤도 만져 봤지만 딱딱하게 굳은 핏방울 몇 개만 확인될 뿐 천마의 말이 암시하고 있던 것처럼 명백한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다. 유달리 예리한 천마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이 정도의 정황만을 보고 그가 당한 일을 알아차리지는 못했을 터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역시 이곳으로 온 게 잘못이었나?’

별다른 실수도 없이 자신의 처지를 간파당한 윤승효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나름 숨긴다고 숨긴 것이건만 천마에게는 눈 가리고 아웅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품에 두었던 영견領絹을 꺼내 의자 위를 닦고 삼매진화로 천을 불태워 버렸다.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아 창문을 열고 재를 날려 보냈다. 그의 비밀을 담고 있는 재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윤승효는 씁쓸한 기분으로 손을 털고는 돌아서서 창문을 닫았다.

문평이 천마를 자신들의 처소로 끌고 돌아가자마자 가장 먼저 당한 일은 입맞춤이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지 고작 닷새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는 수년간 마주하지 못했던 연인을 대하는 양 조급하게 입술을 눌렀다.

문평은 미처 방문도 닫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다 문설주에 등을 부딪칠 뻔했다. 다행히 미리 눈치챈 천마가 팔을 뻗어 가까스로 다치는 것은 면했지만, 그럼에도 천마의 입맞춤에선 벗어날 수 없었다.

촉촉하고 달콤한 혀가 입 안을 어루만졌다. 온몸이 단단한 근육으로 만든 벽에 둘러싸여 있는데, 오로지 입술만이 녹을 듯이 감미롭다. 서두르고 재촉하면서도 다치게 하는 법이 없는 입술이 문평을 관능 속으로 밀어 넣었다.

희디흰 치아가 문평의 윗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희롱하듯 슬그머니 잡아당겼다가 달래듯 입술로 두드리는 입맞춤은 아무 생각 없던 문평까지도 흔들리게 한다. 문평은 부지불식간에 천마의 등을 끌어안으며 깊은 신음을 삼켰다. 천마의 손길에 길들여진 몸이 자동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문평은 천마의 입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이제는 그도 입맞춤을 멈출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의 적극적인 반응에 회가 동했는지 천마의 손길이 바빠졌다. 어느새 허리띠는 풀어 헤쳐졌고 상의는 반쯤 벗겨진 채다.

문평은 맨가슴에 와 닿는 비단옷의 감촉을 느끼고서야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다. 생리적인 눈물이 차올라 흐릿해진 눈을 깜빡이던 문평은 자신이 닫히지도 않은 문 앞에서 반쯤 발가벗겨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흠칫 놀랐다.

“다른 사람들한테 제 몸을 보이는 게 좋으신가 봅니다?”

문평은 놓아주지 않으려는 천마에게서 간신히 입술을 떼어낸 후, 헐떡거리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빈정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차지였던 입술을 아쉽게 내려다보던 천마가 문평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좋다마다. 할 수 있다면 온 세상에 자랑이라도 하고 싶다.”

세상을 혼자 사는 인간이라 그런지 생각하는 것마저도 남다른 그는 문평의 예상과 엇나가는 대답을 했다. 지독한 독점욕을 보이는 평소의 모습만 생각했던 문평은 당연히 천마가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정색할 줄 알았는데, 현실의 그는 외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러겠다며 자신만만하게 웃기까지 한다.

“정말 하게 해줄 거냐? 그럼 우리 오랜만에 청간이나 한번 해볼까?”

문평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마가 지분거렸다. 내심 기다려 왔던 기회를 드디어 잡은 것처럼 천마의 유혹엔 적지 않은 진심이 묻어나왔다.

‘이런 변태 같은 늙은이.’

문평은 이 끝으로 자근자근 귓불을 괴롭히고 있는 천마를 흘겨보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양반의 열렬한 모험심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설마 이 정도로 상식이 없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다가 번번이 뒤통수를 맞고 마는 것이다.

“……늘 생각하는 겁니다만, 당신은 안 그럴 것 같은 부분에서 항상 상식을 뛰어넘으시는군요. 그것도 적당히 해야 도발적입니다. 지나치면 흉이 될 뿐이지요.”

그와 같이 살면서 독랄한 입버릇이 고스란히 닮아 버린 문평은, 천마가 할 법한 말로 상대를 나무랐다. 그 말을 들은 천마가 킬킬 웃음을 터트렸다. 문평이 재담이라도 던진 것 같은 반응이었다.

“걱정 마라. 교내에서 나를 흠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누가 당신 걱정을 한답니까? 제가 걱정하는 것은 가뜩이나 바닥인 저의 평판입니다.”

“내 평판이 너의 평판이고, 내 위신이 너의 위신이지. 남의 눈 따위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누누이 일렀거늘 아직도 이해를 못 하는구나. 괜찮다. 다른 사람들은 너보다 요령이 좋아서, 감히 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면 절대로 보지 않는다. 아예 보이지 않는 척을 하거나, 그게 어렵다면 스스로 눈을 뽑겠지. 우리에게 와서 감히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엄한 사람들을 장님으로 만들기가 싫은 거라니까요!’

문평은 천마의 말이 단지 비유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울컥 반발심이 치솟았다. 자신들이 삼가면 될 일을 굳이 저질러, 주위 사람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건 그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뭐라도 한소리 하고 싶은 기분에 고개를 들었던 문평은 지긋이 웃으며 내려다보는 천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눈이 부시는 것처럼 가늘게 뜬 눈매를 하고서 웃고 있었다. 입으로는 고약한 말을 하면서도 바라보는 눈매는 달콤하기 짝이 없다. 살짝 접힌 눈꼬리에 매달린 눈웃음은 등줄기가 오싹할 만큼 매혹적이다. 그리고 그 눈빛은, 마치 당과라도 되는 것처럼 혀가 아리게 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어여쁘고 귀여운 것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표정을 마주하고 있자니 치솟던 불만이 스륵 가라앉아 버린다. 인세에 보기 드문 미인은 정작 본인이면서, 보잘것없는 이쪽을 절세의 미인 보듯이 바라보고 있으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진다.

사실 천마니까 이렇게 보는 거지, 그가 아니고서야 이런 시선으로 자신을 봐 줄 사람이 없다. 빠져 죽을 것 같은 익애가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보여 주는 천마 앞에서 문평은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네가 싫다면야 굳이 강요는 않겠다. 쓸데없이 수줍음만 많더라도 그것이 너의 천성이니 어쩌겠느냐.”

그의 마음이 풀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천마는 뻐기듯 웃으며 허공섭물로 문을 닫아걸었다.

“문을 닫았으니 이제 시작해도 되겠지? 또 딴죽을 거는 건 아니지?”

천마의 손이 은근슬쩍 다시 옷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낮은 한숨을 쉰 문평은 천마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까 윤 형에게 그리 험히 대한 것은, 실은 이러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까?”

문평은 천마를 향해 의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전엔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해서 잘 몰랐는데, 이제 와 되새겨 보니 숨겨 둔 꿍꿍이가 있었던 것 같다. 천마는 문평의 몸을 두 팔로 안아 올리며, 농인 양 가볍게 대꾸한다.

“알아보겠더냐? 눈치가 많이 늘었구나.”

“눈치가 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쌓인 것입니다.”

“경험은 너만 쌓였겠느냐? 딴에는 나도 경험이 쌓여 그랬다. 데리고 오고 싶다고 다짜고짜 덥석 업어 왔으면 너는 지금쯤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겠지.”

천마는 문평을 비단 금침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울고불고하다니! 마치 열댓 살 난 어린아이처럼 취급당한 것에 발끈한 문평이 대놓고 투덜거렸다.

“울고불고하지는 않았을걸요. 화를 내고 잔소리를 퍼붓긴 했을 테지만요.”

“그거나 그거나.”

“제가 화를 내는 것이 울고불고 발버둥 치는 것과 똑같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거나 그거나 내 눈에는 귀엽기 짝이 없다는 것이지.”

문평이 눈을 부릅뜨자 천마가 슬쩍 눙치는 흉내를 냈다. 겉모습만 보자면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30대 중반의 장년인에게 건네는 말이니 우습기 짝이 없지만, 천마의 실제 나이를 알고 있는 문평은 그 말을 듣고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무시무시한 일이지만 천마는 몇 년 후에 백수白壽가 된다. 10년이 지나도 외양에는 변함이 없으니 실감은 나지 않지만, 그를 대하는 천마의 태도는 어린 애첩을 귀애하는 늙은 서방을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어 완전히 부정하기도 어렵다.

천마의 육체가 문평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그가 체중을 싣자 묵직한 무게가 피부를 짓누른다. 문평은 두 팔꿈치를 침상에 기댄 채 상체를 들어 올렸다. 문평의 허리 위에 걸터앉은 천마는 느긋하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와 천마의 어깨를 더듬었다. 천마의 벗은 몸 위로 황금빛 햇살이 흐르듯 쏟아져 내리자, 그의 몸에 돋아난 솜털까지도 반짝반짝 광채를 발했다.

머리를 묶었던 끈을 풀어 내리자 흑단같이 탐스러운 머리채가 허리춤까지 흘러내렸다. 상처 하나 없는 매끈한 동체에 검은 머리채가 감싸듯이 내려앉는 모습이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색정적이다.

‘진짜로 절세미인은 이쪽이라니까.’

문평은 홀린 듯이 감탄했다. 천마가 저렇듯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의 절반쯤은 저 외모에 있으리라고, 문평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렇게 생긴 이목구비를 날마다 동경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자신감이 자라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홀린 듯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한 천마가 빙긋 웃더니, 느릿하게 손을 내려 문평의 허리춤을 풀어 헤쳤다. 그의 성기가 속곳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천마가 탈의하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반쯤 발기한 그것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천마는 문평의 하의를 완전히 벗기고, 문평의 물건 위로 얼굴을 숙였다. 따끈따끈 기분 좋은 점막이 문평을 서서히 감쌌다. 다정한 혀가 희롱하듯 문평의 귀두를 간질이더니 갈라진 틈새를 할짝할짝 핥기 시작한다. 문평은 허리를 휘며 깊은 신음을 흘렸다.

다짜고짜 하반신을 직격하는 쾌감에 아랫도리가 급격히 뻣뻣해졌다. 단전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아릿한 동통이 퍼져 아랫배로 번져 나갔다. 쾌락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벌어진 허벅지에 들어가는 힘도 절로 세어졌다. 문평은 두 무릎을 세워 올리며 늘씬한 허리를 활처럼 휘었다.

“아읏. 앗!”

다른 모든 일에 그러한 것처럼, 천마는 구음에 매우 능숙했다. 어디서 어떤 실습을 거쳤는지는 차마 묻기 두려웠지만, 목구멍을 사용하는 법까지 익히고 있는 걸로 봐선 한두 해 해본 솜씨가 아니다.

천마가 지나가듯 한 말에 따르면, 문평의 것은 구음을 즐기기에 최적의 물건이라고 했다. 너무 크지도 지나치게 작지도 않으면서 경도가 쓸 만하고, 민감하기 짝이 없어 어떤 기술을 걸어도 자극적으로 반응한단다.

천마에게 일방적으로 몸을 바칠 땐 구음을 해주긴 해줬어도 받아 본 적은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상황은 반대가 되어 갔다. 요즘 들어서 문평은 천마에게 구음을 받았으면 받았지 해준 적은 거의 없었다.

천마는 그의 뒤를 희롱할 때만큼이나 즐겁게 그의 앞을 가지고 놀았다. 핥거나 빠는 것은 예사였고, 가끔씩은 이 끝으로 자근자근 깨물기도 했다.

귀두가 유달리 예민한 편인 문평은 그때마다 반쯤 죽었다가 살아났다. 어떤 여인과의 잠자리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지독한 쾌락 때문에 쥐어짜이는 느낌이 들 때까지 정액을 토해내는 건 예사였고, 때로는 그마저도 모자라 고환이 아릴 지경에까지 이를 때도 있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천마는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엉덩이를 단단히 붙잡고, 제 마음껏 그의 성기를 희롱했다. 문평은 강렬한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뒤틀었다.

예민한 기둥이 부드럽게 이 끝에 긁혔다. 오돌토돌하게 부풀어 오른 혈관 끝을 섬세하게 자극하며, 현란한 입술이 강한 흡입력을 만들어 낸다. 그의 물건이 천마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기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점막으로 뒤덮인 근육이 아랫도리를 죄며 끔찍할 정도의 쾌락을 이끌어 냈다.

문평은 발끝을 오므리며 숨을 헐떡였다.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번쩍 튀어 올랐다. 상대에게 구음을 당하는 게 아니라 산 채로 잡아먹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성기의 뿌리가 빠듯하게 죄어 오면서 아랫배가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안간힘을 다하며 참고 있는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천마가 힘주어 문평을 압박했다. 문평은 비단 금침을 찢어질 것처럼 부여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숨넘어갈 듯 쏟아지는 신음을 막을 수 없었다.

“하읏, 아악, 악!!”

끊임없이 자극당한 성기는 부풀 대로 부풀어 꺼떡거렸다. 그의 물건이 뒤틀릴 때마다 천마는 교묘하게 그를 부추긴다. 마침내, 더는 참을 수 없어진 문평이 천마의 입속에 진하디진한 토정을 시작했다.

온몸을 달구던 열기가 한곳에 몰려 타는 듯 뜨거웠다. 정액이 아니라 선천지기라도 빼내는 것처럼 전신이 경련을 일으킨다. 그 와중에도 엉덩이 사이의 주름은 움찔거렸다. 앞으로 다가올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그것은 기대감에 떨며 수축과 확장을 반복했다.

“맛이 진하군. 내가 없는 동안엔 혼자서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지?”

문평이 쏟아 낸 정액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아들인 천마가 혀끝을 내밀어 부풀어 오른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문평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짓궂은 천마는 그런 문평의 얼굴 앞에 기어코 자신의 얼굴을 갖다 붙였다. 그러더니 날름 혀를 내밀어 문평의 혀를 휘감아 버린다.

스스로가 쏟아 낸 액체의 미지근한 맛이 문평의 혀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자기 자신의 정액을 맛본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으나, 생각해 보면 천마는 자신의 것도 아니고 남의 것을 스스럼없이 마신 셈이다.

어차피 천마의 것을 먹어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피하면 더 좋아라 달라붙을 것을 알기에 문평은 순순히 입을 벌렸다. 천마는 문평의 혀에 자기 혀를 몇 번 문질러 댄 후 길게 입천장을 핥으며 빠져나갔다. 문평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쩝쩝, 입맛을 다셨다.

“어떠냐? 네가 느끼기에도 진하지?”

“평소 맛보던 것에 비하자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래 봤자 제가 당신에 비하겠습니까?”

“요즘엔 입에 넣어 주지 않고 아랫구멍에만 넣어 줬는데 그 맛을 알 것 같더냐?”

“한두 해 안 먹어 본다고 잊어버릴 수 있는 맛이 아니라서요. 아랫도리에서 긁어낼 때마다 그 맛이 생각나더군요.”

문평은 희롱 삼아 지분거리는 천마에게 지지 않고 농담을 던졌다. 문평의 대담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지 천마가 씨익 웃더니 다시 깊은 입맞춤을 해 온다.

문평은 천마의 혀를 느끼며 서서히 등을 눕혔다. 천마는 침상 옆에 놓인 소궤小櫃에서 향유를 꺼내 문평의 엉덩이 사이를 젖게 만들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기대감에 들뜬 속살을 헤집었다. 함부로 드나들 듯 난폭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손이 실제로 상처를 입히는 일은 결코 없다. 움찔움찔 들뜬 점막을 향기로운 기름이 감쌌다.

느끼는 지점을 슬쩍슬쩍 비껴가며 빈틈없이 기름을 바르는 그 손길에 문평은 감질이 나기 시작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르듯 다리가 벌어지며 허리가 흔들렸다. 왜 그렇게 주변만 맴도느냐고 원망하듯이 흥분한 내벽이 천마의 손가락을 자를 듯이 조여 온다.

농염한 빛으로 눈매를 물들인 문평이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천마는 힘이 잔뜩 들어간 문평의 다리를 들어 자신의 어깨에 얹으며, 그 발목에 입을 맞췄다.

“조를 필요 없다. 서두르지 않아도 오늘은 듬뿍 안아주마.”

언제는 듬뿍 안아주지 않았던 사람처럼 천마가 장담했다. 문평은 부끄러워서 차마 제 입으로 그래 달라는 말은 못 하고, 숨만 얕게 쉬며 할딱거렸다.

기름에 젖은 손가락이 문평의 종아리를 단단히 움켜쥐는 게 느껴졌다. 잔뜩 힘 받은 거대한 성기가 문평의 구멍에 조준되었다. 문평은 음란하게 흐트러진 자세로 천마가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윽, 악!”

기대하고 있는 문평의 몸 안으로 천마의 성기가 진입했다.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이런 거대한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았다. 문평은 몸이 반쪽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턱을 뒤로 젖혔다. 뜨거운 불기둥이 문평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허공으로 들린 두 다리가 애처롭게 파들거렸지만 천마는 가차 없었다.

천마는 문평의 두 다리를 어깨에 얹은 채 다시 한번 허리에 힘을 주었다. 서서히 몸 안으로 들어오던 물건이 갑자기 푹 하니 깊이 박혔다. 부들, 경련을 하며 문평이 거센 도리질을 친다. 그러나 천마의 움직임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홍두깨마냥 거대한 것이 뿌리 깊숙이까지 묻혔다.

부드러운 엉덩이 피부에 음모는 물론이고 단단하게 긴장된 고환까지도 선명히 와 닿았다. 긴장한 내벽이 맹렬하게 상대의 물건을 조인다. 그가 느끼는 부분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들까지도 모조리 천마에게 점령당했다.

천마의 성기가 강하고 빠르게 그의 몸 안을 두드렸다. 눈앞이 아찔했다. 잠시 시간이 어디론가 가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천마가 다시 움직임을 재개하자 사라졌던 감각은 한꺼번에 되돌아와 그의 온몸을 차지했다.

천마의 강렬한 허리 놀림에 내장 전체가 성기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상대가 치고 들어올 때마다 환희에 떨고, 어떻게든 더 깊게 받아들이기 위해 열성적으로 몸부림친다.

춘약에 중독되기라도 한 것처럼 뇌가 달아올랐다. 머리 위로 황금빛 햇살을 두른 천마가 사랑스럽다는 듯 온 얼굴에 입맞춤하며 문평을 공격한다. 뺨과 목덜미에 내려오는 입술은 다정하나 허리 아래의 움직임은 무자비했다. 천마의 공격이 살의를 띠고 있었다면 문평은 진작에 간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천마는 쾌감만으로도 능히 상대를 죽일 수 있을 만한 사람이었다.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은 격렬한 쾌감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문평은 자신이 도무지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죽어서 영혼만 남아 있거나, 살아 있어도 아랫도리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문평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천마가 주는 것들뿐이었다.

젖은 눈가로 떨어지는 그의 입술,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그의 땀방울. 그리고 그의 강렬한 허리 놀림. 그의 성기. 몸속으로 파고드는 강하고 순수한 힘. 더 세게. 더 강하게. 문평은 천마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움직이며 이를 악물었다. 천마의 집요한 공격에 몸뿐만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같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아앗. 아악, 아아악!”

문평은 신음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울부짖었다.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일방적으로 퍼부어지는 감각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다 익사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문평은 그 사실이 두렵지 않았다. 그에게는 공포감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정신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의 신경은 오로지 아래에서 치받아 오는 상대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울고 몸부림치고 허리를 흔들며 천마를 받아들였다. 천마는 쾌감 때문에 자신의 아래에서 격렬히 발버둥 치는 문평을 더욱 세게 밀어붙였다.

퍽. 퍼억. 퍼억. 젖은 마찰음이 늦은 오후의 공기를 가로질렀다. 문평의 교성은 닫힌 방문을 넘어 방 밖으로까지 퍼졌지만,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방으로 들어갈 때부터 사정을 짐작하고 있던 시비들이 덧문을 닫아걸고 모조리 물러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원래도 밤 생활이 격렬한 두 사람이지만, 잠시라도 떨어져 있다 다시 붙으면 그 관계가 한층 더 치열해졌다. 멋모르고 남아 있다가는 못 볼 꼴을 보게 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시비들은 당분간 비익전의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들의 경험상 그들의 정사는 한두 시진으로 끝날 게 아니다. 적어도 내일 정오 무렵까지는 끈질기게 계속될 정사니, 그때까지는 그녀들 또한 짧은 급가를 얻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

“며칠 새 얼굴이 핼쑥해지셨습니다? 행여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모처럼 얼굴을 마주하고 차를 같이 하게 된 윤승효는, 고작 사흘 새 얼굴이 반쪽이 된 문평을 살피며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의 말을 들은 문평은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뻔히 알면서도 저러는 걸 보면, 저 사람도 은근히 천마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지난 이틀간 있었던 일은 굳이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닷새간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꼬박 닷새를 채워 벌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천마에게, 이러다 내가 죽겠다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져 겨우 잠재웠던 문평이다.

처음에는 자신도 좋아서 달라붙은 거였지만 나중에는 지치다 못해 아파서 허리를 세우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행위가 그 정도로 가혹해지면 정사가 아니라 혹사라고 불러야 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몸 생각을 해준다고 횟수를 가늠하더니만, 내가 초절정에 오르고 나서부터는 완전히 하고 싶은 대로만 한단 말이지.

설마 이러고 싶어서 무공을 전수해줬던 것은 아니겠지? 정 억울하면 자신의 수준에 걸맞은 사람이 되라더니만, 설마하니 그 수준이라는 게 정사할 때의 체력을 이야기하는 거였나?’

계획 없이 행동하지 않는 천마의 습성을 잘 아는 문평은 한번 들기 시작한 의심을 쉽사리 거두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수상쩍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귀하디귀한 전대 천마의 내단을 선뜻 양보한 것도 그렇고, 채양보양에 그렇게나 집착해 놓고는 막상 때가 되니 별다른 미련도 없이 포기해 버린 것도 수상쩍었다.

그가 그때 그렇게 행동을 했던 것은 나름대로 염두에 둔 포석이 있어 그랬던 것이 아닐까?

천마 하면 제일 먼저 뒤통수가 생각나는 문평은 시일이 지나도 한참 지난 일로 뒤늦게 고민에 빠졌다. 이제 와 깨달아 봤자 소용없는 노릇이지만 한번 몰두하면 집착하는 성미인 문평은 본인의 생각에서 홀로 깨어 나오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이 사람도 만만찮게 특이하단 말이지.’

윤승효는 함께 차라도 마시자며 찾아와 놓고는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해 있는 문평을 웃는 낯으로 건너다보았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개성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천마의 곁에 너무 오래 있었던 건지 제대로 물이 들어 버렸다. 본인에게 그런 말을 하면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펄쩍 뛰겠지만 곁에서 보는 사람은 그의 변화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네.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하니 말이야.’

윤승효는 홀로 웃으며 생각했다. 지랄 같은 성미만 빼면 어느 한구석도 허술한 데가 없는 천마는 이제껏 약점다운 약점을 가진 적이 없다. 그런 천마에게 문평 같은 존재가 생긴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지만, 따져 보면 그것은 그다지 나쁜 일이 아니다.

문평은 천마에게 있어서 약점인 동시에, 그에게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다움이기도 했다. 천마는 자신의 인생을 완벽하게 꾸려 갔지만, 그 삶이 사람다운 삶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에게 문평의 존재가 없었다면 그의 삶은 아직도 차갑고 무미건조하기만 했을 터였다.

둘 다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느라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조용하지만 평온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 맴돌았다. 그 분위기가 깨어진 것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종소리 때문이다.

땡땡땡땡땡!

가볍게 눈가를 찌푸린 문평이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종소리가 너무 급박해 마교 내부의 사정을 잘 모르는 윤승효조차도,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중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윤승효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며 문평에게 물었다.

“이 종소리는 무슨 뜻입니까?”

“외적이 침입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비상령을 울리는 것은 내전에서부터입니다. 어떤 작자인지는 몰라도 이미 내전까지 들어온 모양이네요.”

외전에서 울리는 경계령과 내전의 경계령은 종을 울리는 방식이 다르다. 한때 외전의 경비 무사였기에, 외전의 경계망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문평은 의문에 잠겨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교의 내전은 매일같이 순찰하는 무인들도 무인들이지만 곳곳에 기관이며 진이 설치되어 있어서 그를 모르는 자들이 함부로 드나들 만한 곳이 아니다.

한데 어찌 된 일일까? 종소리는 점점 더 다급해져만 갔다. 천마와 함께 살게 된 지는 10년, 마교에 몸을 담은 것까지 합하면 족히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그이지만 마교 내에서 비상령이 울리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그저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종소리는 실제로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포영의가 평소 아랫사람들을 쥐 잡듯이 잡더니만, 필요할 때 효과가 있어 다행이다.

“앉으세요. 비익전은 내전 안에서도 금역禁域입니다. 설사 적이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여기까지 들이칠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바깥의 상황이 궁금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귀를 기울이는 윤승효를 보며 문평은 태연히 달랬다. 고수가 된 후 배짱이 든든해지기도 했고, 지척에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뒷배까지 있었으므로 아무 걱정이 없는 그는 교내에 외적이 침입했어도 남의 일같이 여겼다.

반면 마땅히 믿을 만한 구석이 없는 윤승효는 도통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문평을 바라보며 다소 엉뚱하게 들리는 질문을 던졌다.

“침입한 적이 초절정의 고수라면 어떻습니까?”

“수십 명의 초절정 고수라고 해도 어려울 겁니다. 마교의 내전은 절정 고수들이 우글거리고, 중원의 것과는 상례를 달리하는 기문진도 많습니다. 비상령이 울렸다면 기관까지 발동했을 테니 한층 더 복잡해졌겠죠.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그 어려운 경계망을 쉽게 뚫지는 못합니다.”

“기문이진奇門異陣에 능통하고, 신법이 남다른 고수라면요? 은형술과 은잠술도 아주 빼어난 사람 말입니다. 심심하면 가끔 도둑 흉내도 낼 법한.”

“그거 꼭 내 사부 같은 재주를 지닌 사람이군요. 말씀하신 능력이 흑야 만자외의 수준이라면 상황이 달라지겠지요.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자들은 몸을 빼는 능력 하나만큼은 탁월하니까요.”

문평이 수십 년 전에 잠깐 얼굴을 본 이후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 사부를 슬쩍 비꼬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윤승효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는 앉으라는 문평의 권유가 들리지 않는 듯 안절부절못하더니 방 안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뭐지? 이 사람 혹시 침입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가?’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상대의 능력을 추정하는 그의 질문에 문평은 당연하게도 의심을 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윤승효의 태도는 정말 이상했다. 윤승효는 문평이 곁에 없었으면 손톱이라도 씹을 듯한 기세였다.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는데 어찌 된 영문일까? 문평은 이채롭게 윤승효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윤-승-효!! 이 망할 자식!! 당장 못 나와?!”

그들의 귀에 돌연 벼락같은 고함이 떨어져 내렸다. 불문의 사자후라도 되는 듯, 웅장한 고함이 내전 전체를 떨어 울리며 윤승효를 찾는다. 그 소리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윤승효가 흠칫 놀랐다. 문평은 부지불식간에 어깨를 움츠렸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저거, 저 고함. 어째 윤 형을 찾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호기심 어린 눈빛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문평이 물었다. 어물어물 대답을 회피한 윤승효가 창백한 낯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두 손이 떨리듯 서로를 감싸고 있었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상당히 젊은 작자인 모양인데, 연배가 한참은 윗줄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거침없이 호쾌했다.

“여, 여기 어디 숨을 데가 없습니까? 천마께서 폐관 수련을 하는 장소라던가, 아니면 아예 참회동 같은 곳이라도 괜찮은데요.”

등 뒤까지 쫓아온 사냥꾼을 피하려는 사슴처럼 허둥대며 윤승효가 물었다.

“비익전 자체가 이미 금지에 속하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어디로 더 숨겠단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여기는 금지라고 해도 사람들이 스스로 삼가는 장소가 아닙니까. 제게 필요한 곳은 외부인들이 절대로 침입 못 할 비밀스러운 장소입니다. 마교에도 그런 곳이 분명 있겠지요? 천산에 자리 잡은 세월이 무려 천 년이나 되는데요.”

그 정도 되는 세월이면 아무도 접근 못 하는 지하 감옥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투로 윤승효가 요청했다. 교내에 실제로 그런 감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곳에 윤승효를 가둘 생각이 없는 문평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곳은 교주와 태상께서나 아시겠지요. 저 같은 일반 교인 출신이 뭘 알겠습니까. ……그나저나 안색이 창백하십니다. 진짜로 자리에 앉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문평은 윤승효가 왜 저렇게 긴장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 일이 심각해지면 그 사람이 직접 움직이겠지. 한동안 놀고먹기만 했으니 그 정도 밥값은 해야 할 게 아닌가.

천하의 천마를 집 지키는 개인 양 가볍게 여기며 문평은 빈 잔에 차를 따랐다. 그러고는 허공섭물로 윤승효에게 찻잔을 밀어냈다.

“긴장하지 마시고 한잔 쭉 들이켜세요. 윤 형은 저희 교의 손님입니다. 저희가 한번 손님으로 맞아들인 분을 외적에게 내줄 만큼 체면이 없겠습니까? 그 사람이 곁에 있는데 무얼 그리 걱정하십니까?”

멍하니 잔을 받던 윤승효는 문평의 위로를 듣고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뒤통수라도 거세게 얻어맞은 양 그의 눈 속에서 깨달음의 불꽃이 튀어 오른다. 그는 다급한 기색으로 문평을 향해 물었다.

“아, 맞다. 백조부님! 백조부님이 상황을 아시면 가만히 계시지 않으시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몸이 근질근질하신 것 같던데 말입니다. 그분이 손을 너무 과하게 쓰시면 어떻게 합니까? 잘못하면 그 녀석이 다칠 텐데요.”

“……지금 누굴 걱정하고 계시는 거지요?”

“그 녀석, 홍랑, 아니, 아니, 아무튼, 그 빌어먹을 녀석 말입니다! 침입자의 정체가 제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거든요. 생사대적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조금 상황이 꼬였다고나 할까, 옛 인연이 발목을 잡는다고나 할까 그런 복잡한 사이인데요, 영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백조부님께 심하게는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 좀 드리면 안 될까요? 물론 버릇없이 함부로 마교에 침입을 한 죄는 백번 죽어 마땅한 대죄입니다만, 상대는 아직 앞날이 창창한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윤승효는 숨도 쉬지 않고 화급히 호소했지만, 문평은 영문을 알지 못해 그저 미간만 찌푸렸다. 상대에게 확답을 듣지 못한 윤승효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진짜로 여기까지 찾아올 줄이야.’

그는 침입자의 정체를 확신하고 있기에, 상대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마교로 숨어들었으면 알아서 추격을 포기했어야지. 제가 무슨 장비도 아니고, 어쩌자고 혈혈단신으로 수만의 무사들 앞에 뛰어드냐고. 여기는 장판교도 아니고 제 놈 뒤에 다른 배경이 없다는 건 저들도 다 알 텐데!!

어리석고 한심한 녀석이다. 그리고 쓸데없이 집요하다. 천둥벌거숭이처럼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니 한번 제대로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릴 것 같은데, 불행히도 윤승효는 녀석이 그런 꼴을 당하는 걸 눈 뜨고 볼 자신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마음 때문에 머리가 아파 왔다. 그 녀석과 더는 얽히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이라도 더 그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

어쩌다 너와 내가 이렇게 된 것일까. 윤승효의 푸르스름한 눈동자에 설핏 서글픈 기운이 감돌았다.

그가 저지른 실수만 아니었다면, 아니 애초에 그들이 서로에게 내건 약속만 아니었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꼬이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나 모든 것은 애초부터 어긋나 버렸고 윤승효는 뒤틀린 관계를 바로잡을 만한 힘이 없었다.

“윤승효, 거기 있지? 어서 나와!!”

어느새 이곳까지 당도했는지 문밖에서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렸다. 그는 윤승효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놀란 문평이 눈을 크게 떴다. 윤승효는 창백한 눈을 들어 문밖을 바라보았다. 윤승효가 놀라기만 할 뿐 기척을 내지 않자 마음이 급해진 바깥의 인영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무례하게 침입한 불청객을 향했다.

문평은 방 안에 들어온 남자의 모습을 보고 내심 감탄했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윤승효를 쫓아 마교까지 찾아온 남자는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한 애송이였다.

강호상엔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고수가 적지 않지만, 천마처럼 반로환동까지 성공한 사람은 없으니 30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있어도 20대 초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는 극히 드물다. 그가 천마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보이는 것만큼이나 실제로도 어릴 것이다.

스무 살? 혹은 스물한 살? 아무리 봐도 약관弱冠에 불과한데 일신에 가진 무위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윤승효의 말을 따르자면 저 나이에 벌써 초절정이란다. 문평이 알기론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룬 사람은 천마뿐이다. 한데 저 젊은이는 영약을 밥 대신 먹고 고인에게 날마다 벌모세수라도 받았는지 그 나이대를 뛰어넘는 엄청난 성취를 보여 주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저 외모로군.’

매양 천마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살아서 저도 모르게 남의 미모에 무던해져 버린 그이건만, 상대의 외모는 그런 그조차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어마어마했다. 아름답기보다는 강렬했다. 압도적이면서도 우아했고, 요염하면서도 남자다웠다.

살아오면서 여러 미인들을 봐온 문평이지만, 그는 눈앞의 이 남자처럼 색정적으로 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남자로 태어나 그나마 다행이지, 여인이었다면 생긴 것만으로도 요부란 소리를 들었을 위인이다.

끄트머리가 가느스름하게 가는 눈매는 색기가 넘쳐흘렀고, 젊은 사내의 입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선명한 살구색의 입술은 오랫동안 입맞춤을 하고 난 것처럼 농염한 분위기를 풍겼다. 단단한 목덜미에선 야성미가 넘쳤고, 강렬하기까지 한 흑자색의 비단옷은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매혹적인 몸매를 은근슬쩍 강조했다.

“윤승효!”

여느 여인들이 봤다면 당장에라도 그 품에 달려들어 스스로를 던져버렸을 것 같은 미남자가 험상궂게 미간을 찌푸리며 윤승효에게 다가왔다.

야옹, 야옹. 사내의 외침에 화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양이가 울더니 윤승효의 다리에 다가와 스스럼없이 몸을 비빈다. 애교스럽기 짝이 없는 겉모습만 보면 짐작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고양이는 운남의 밀림에서 사는 것으로 알려진 전설이나 다름없는 칠색묘漆色猫였다. 눈앞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적아敵我를 정확히 구분하고, 한번 인식한 냄새는 만 리를 떨어져도 뒤를 쫓는다는 용맹하고 끈질긴 사냥꾼.

남자가 멀리 떨어져서도 윤승효의 흔적을 놓치지 않은 것은 이 칠색묘의 덕이 컸다. 용의주도하게도 그는 윤승효의 냄새를 칠색묘에게 각인시켜 놓았던 것이다.

“이 빌어먹을 작자가 이런 곳에 숨어 있었어? 왜? 아예 황궁으로 숨어 버리지? 마교의 대적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반역도가 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사내는 빈정거리며 윤승효의 앞으로 걸어갔다.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눈에 띄게 불안한 태도이던 윤승효는, 사내의 정체를 확인하자 도리어 안정을 되찾은 듯 똑바로 허리를 편 채 오연히 서 있었다.

그의 냉랭한 시선이 사내를 향했다. 사내는 그 시선을 확인하고 눈매를 일그러트렸지만, 그러면서도 윤승효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를 번거롭게 만든 것은 이 정도로 충분해. 돌아가자.”

사내는 당장이라도 윤승효의 어깨를 잡아끌듯이 서둘러 채근했다. 실제로 팔을 잡으려고 손을 뻗기도 했지만, 윤승효는 교묘하게 몸을 피해 거기에서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본 사내가 금나수를 썼다. 윤승효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금나수로 그 손을 비켜나갔다.

짧은 순간 몇 차례의 공방이 어우러졌다. 가볍지만 치열한 공방. 젊은 사내의 무위가 또래치고는 굉장한 편이긴 했지만, 오랫동안 고수의 자리를 지켜온 윤승효의 능란함을 당해낼 순 없었다.

승효가 미꾸라지 빠져나가듯 끝내 손을 피해 버리자, 화가 난 사내의 이마에 혈관이 솟아올랐다. 이만큼 험악하게 굴고 있으면 매력이 떨어질 만도 하련마는 사내는 화를 내면 화를 낼수록 도리어 색기가 진해졌다. 무슨 무공을 익혀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아예 선천적으로 그렇게 타고난 모양이었다.

“왜 이러는 거야? 돌아가자니까?”

사내는 벌컥 화를 내며 윤승효를 다그쳤다. 그러나 윤승효는 사내의 기세가 격해지는 것에 비례하듯 도리어 차분해졌다.

“왜 아는 척하는 거지? 그대와 나는 이제 모르는 사이일 텐데.”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당신을 왜 몰라. 얼마나 공을 들여 손에 넣었는데!”

“……우리는 춘몽례를 치렀지. 그대가 원한 대로 나는 약속을 지켰다. 춘몽례를 치르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미 치르고 난 후이니 그 약속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을 터. 그대가 나를 쫓아온 것은 루의 율법에도 위배되는 일이다.”

윤승효는 타이르듯 사내를 다독였지만 사내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내는 잘생긴 코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거세게 코웃음을 치더니,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당당히 대꾸했다.

“율법은 개뿔. 당대의 루주는 나다. 내가 율법이고, 내가 환희루야. 그따위 율법은 무시해도 상관없어. 누구도 내게 그 일을 따지진 못해.”

“위에서 사람을 다스리는 자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소리를 하는군. 본인은 지키지 않으면서 루인들이 법을 따르길 바라는 건가? 지배자일수록 오히려 더 법을 지켜야지. 네가 주인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원칙은 원칙이야. 함부로 무시하지 마라.”

“원칙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춘몽례 따위가 무슨 원칙이야? 한이 없는 사람에게 부러 한을 심어 주는 것도 원칙이야? 그건 어리석고 멍청한 악습일 뿐이야. 인간에겐 측은지심이라는 게 있어. 굳이 스스로 당해 보지 않더라도 가엾은 사연을 알게 되면 그에 동정하기 마련이라고.

태어나기를 환희루에서 태어난 내가 설마하니 그런 사실을 잊을 것 같아? 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는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어.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 따위로 날 피하려 들지 마. 난 당신 다신 안 놓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내 손에 굴러 들어왔으니 당신은 내 거야. 당신이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소용없어.”

내막을 알 수 없는 사연들이 진지하게 오고 갔다.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지켜보던 문평은 대화가 이쯤에 이르자 대강의 사연을 추측할 수 있었다.

‘자, 잠깐. 그러니까 지금 윤 형이 저 젊은 사내에게 구애를 당하고 있는 건가?’

눈치가 제법 빨라진 문평은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오묘한 분위기를 착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말하는 거로 봐선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꽤나 진전이 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춘몽례라는 말이 왠지 낯이 익은데. 어디서 들어 본지는 가물가물하지만, 분명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말이야…….’

윤승효는 사내의 말을 듣고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사내와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었다.

“가라.”

윤승효는 떨리는 입술로 상대에게 이별을 고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두고 가지 않겠다는 사내를 설득하기에는 지나치게 미약한 태도였지만 스스로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대와의 약속을 지켰다. 몸을 내주었고, 하룻밤을 온전히 주었다. 오래전에 그대와 맺은 맹세는 그것으로 이행된 것이다. 이제 내겐 더 이상 남은 의무가 없다.”

“의무? 하? 의무라고 했어, 지금?”

“그래. 그것은 의무였다.”

“건방지게도 잘도 지껄이는군. 내게 의무밖에 남은 게 없었나? 그랬다면 그날 당신은 왜 그렇게 슬피 울었지? 춘몽례를 끝끝내 거부하려고 했던 까닭은 또 뭐고? 나와 영원히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었던 거야, 당신은. 영문도 모르는 내게 진실도 가르쳐 주지 않으면서 피하려고만 했던 것도 그 때문이고. 내가 강제로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그놈의 의무 따위 영원히 이행하지 않으려 들었겠지.”

“은환殷幻. 그만해라.”

“그만 못 두겠어. 듣자 하니 지날수록 가관이라서 말이지. 당신이 진짜로 나를 떠날 수 있겠어?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가슴에 품어와 놓고, 이제 와 모든 걸 잊겠다고? 당신은 내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나를 받아들였어. 사내로서의 자존감도 잊고, 체면과 수치도 잊었지. 당신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나 하나뿐이야. 그런 상대에게서 등을 돌리겠다고?”

“그만, 그만해!”

“당신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니까 이런 말까지 하게 되는 거잖아! 대체 언제까지 도망칠 생각이야. 중원 끝까지 왔으니 이제는 서역으로 도망갈래? 나를 피해 천하의 끝까지 도망칠 생각인 거냐고? 내가 당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알 수 있잖아. 이쯤에서 그만 져 줘, 제발. 이건 당신이 져 줘야 하는 문제야.”

아무리 대화가 진행되어도 서로가 겉돌았다. 결코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는 이들끼리 자기주장만 되풀이하고 있으니, 이야기가 평행선을 긋는 건 당연한 결과다.

보다 못한 문평이 답답한 듯 입을 열었다. 서로에게 열중하고 있는 두 사람은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바깥의 사정은 아까부터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말씀 도중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이쯤에서 잠깐 자리를 피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바깥에서 무사들이 몰려들고 있는데요. 조금 더 지나면 포위망이 완벽해질 겁니다.”

상대가 마교를 침입한 적이긴 하지만, 그는 동시에 윤승효의 연인이기도 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마음이 사내에게 있다는 사실이 눈에 훤한지라 문평은 큰마음을 먹고 상대에게 호의를 내보였다.

문평이 말을 걸자, 그때서야 그의 존재를 알아챈 사내가 문평에게 시선을 돌렸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윤승효밖에 안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더니만, 그 태도는 시늉이 아니라 진짜였던지 돌아보는 눈길이 휘둥그레하다.

“뭐야 이건? 빌어먹을. 암고양이 놈이잖아!”

아, 암고양이? 문평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쏟아지는 사내의 폭언에 얼이 빠졌다. 수고양이도 아니고 암고양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목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사내가 윤승효에게 사나운 시선을 돌렸다. 윤승효는 낭패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끝내 눈을 감아 버린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이제 와 저 인물이 왜 당신이랑 한방에 있는 거냐고? 저따위 종자랑 아직까지도 만나고 있었던 거야?”

“함부로 말하지 마라. 저분은 네게 그런 말을 들을 신분이 아니시다.”

“함부로 말하지 마? 하! 제기랄! 웃기지도 않네. 당신이야말로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지금 누구 앞에서 누구 역성을 드는 거야? 저 발칙한 암고양이와 당신 사이에 있었던 일을 내가 잊은 줄 알았어? 그때 내 눈에서 그렇게나 피눈물을 뽑게 만들어 놓고, 그 관계를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거야? 설마 마교로 도망 온 것도 이 사람 때문은 아니겠지? 이 자식이 당신을 또 꼬여 냈어??”

사내는 불똥이 뚝뚝 튀는 눈으로 문평을 노려보더니, 당장에라도 머리채를 휘어잡을 것 같은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런 그의 앞을 윤승효는 필사적으로 가로막았다.

이 사람 건드리면 너 진짜로 죽어! 절박해진 윤승효는 안색까지 바꾸며 상대의 접근을 저지했다.

“이분은 우리 관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분이야. 엉뚱한 짓 하지 말고 뒤로 물러서.”

“윤승효……. 당신 정말 죽고 싶지?”

윤승효가 대놓고 문평을 감싸자, 이를 오해한 사내는 음산하게 이를 갈았다. 그러나 윤승효는 오해를 사는 것을 알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자기 몸으로 문평의 앞을 막은 그는 결연하기까지 한 태도로 사내에게 대답했다.

“정 그러고 싶다면 나 하나쯤이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도 돼. 하나 이분만은 건드리지 마.”

“하, 지독한 순애보로군. 내가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당신 속엔 정말로 내가 없었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저 사람만이 당신 마음에 있었던 거야??”

“이분을 그런 의미로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이야.”

“그런데 왜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을 택해? 어째서 내가 이런 꼴을 보게 만들어?”

“은환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째야. 벌써 두 번이나 내 앞에서 저 사람을 택하고 있는 거라고. 나도 더 이상은 못 참아. 내가 같은 실수를 또다시 저지를 것 같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은환이 허리춤에서 연검을 빼 들더니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무게가 가볍고 방향 전환이 빠른 연검은 주로 여인들이 애용하는 무기인데, 사내는 특이하게도 그런 연검이 주 무기인지 검을 사용하는 방식이 무척 능숙하고 교묘했다.

검을 풀어 놓았던 윤승효는 무기를 집어 들 새도 없이 맨주먹으로 사내에게 맞섰다. 내력을 팽팽하게 담은 소맷자락이 무기처럼 연검을 휘어 감았다.

사내는 윤승효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듯 연검을 흘리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윤승효도 상대를 놓치지 않고 따라붙었다. 강기를 담은 손바닥이 상대의 어깨를 급습한다. 사내는 진심으로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윤승효에게 분노해 이를 드러냈다.

“정말 해보자는 거야?!”

“죽기 싫으면 물러나라니까!!”

“고작해야 저따위 인간 때문에 날 죽이시겠다고? 그래! 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해봐. 내가 저 인간을 죽이는 게 먼저인지, 당신이 나를 죽이는 게 먼저인지 어디 시험해 보자고!”

울컥울컥 치솟는 젊은 혈기는 목숨까지도 쉽게 내걸었다.

‘당신 정인이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닐 텐데.’

상대가 명백히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문평은 두 사람의 격렬한 공방을 망연히 지켜보았다.

춘몽례. 암고양이. 두 번째. 사내가 쏟아내는 말들이 차곡차곡 아귀가 맞아 들어갔다. 하나둘씩 짜 맞추어지는 이야기에 진실을 알아차린 문평은 깊은 신음을 삼켰다.

아주 오래전, 천마가 윤승효인 척하던 그 시절에 문평은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자묘랑. 윤승효의 고양이 아가씨. 문평은 사내의 요염한 이목구비에서 옛 모습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세상에.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설마 자묘랑이 남자였어?’

문평은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는 걸 느끼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열두 살짜리 여장 소년과 사랑에 빠지다니. 그렇게 안 봤는데 윤승효는 참 취향이 별났다.

‘……그러고 보니 자묘랑은 환희루주의 자식이었지. 자묘랑이 아니라, 자은환이라. 그렇군. 그게 본명이었어.’

현재 환희루주의 이름은 자은환. 별호는 천묘홍랑天猫紅狼이다. 그 외의 정체는 밝혀진 바가 없어 드러난 것은 별호와 이름뿐이지만, 눈앞에서 본인을 직접 보고 나니 그렇듯 비밀스레 신분이 감추어진 연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환희루는 천하의 가희들이 한데 모인다는 전설과 같은 방파다. 전대의 환희루주도 드높은 무공만큼이나 빼어난 미모로 미명美名이 자자했는데, 저런 이리 같은 작자가 당대의 환희루주라니 세인들의 아름다운 환상이 무색해진다.

정말로 고양이를 데리고 다녀서 천묘고, 붉은 이리처럼 날뛰어서 홍랑이라니. 고양이와 이리가 들어가는 미묘한 별호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세인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기겁을 하겠는가.

눈앞에서 붉은 그림자가 번쩍번쩍했다. 신법이 뛰어나다더니 보법마저 빼어난지 허공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얽혔다 떨어지기를 어지럽게 반복한다.

자신이 여기서 윤승효를 도와야 할지, 그렇지 않으면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가만히 있는 게 더 나을지, 두 가지 선택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던 문평은 하릴없이 초절정 고수 간의 결투를 구경하기만 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기교는 윤승효가 더 나았지만 자은환의 체력과 내공은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천 년 묵은 이무기의 내단이라도 얻었는지 나이도 어린놈이 쉴 새도 없이 강기를 뿜어낸다.

내력이 달리는 데다, 무기도 없는 윤승효는 그의 공격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있는 힘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로가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을 저어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피를 보고 말았을 터였다.

“저 암고양이의 구멍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저런 놈 따위에게 서슴없이 목숨도 내놓는군. 마음을 돌려보는 게 어때, 윤승효?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당신 구멍도 만만찮은 명기거든. 그런 몸으로 사내에게 안기지도 못하고 산다면 너무 손해잖아. 당신도 박아 주는 사람 없이는 만족하지 못할 텐데.”

싸우면서 더욱 화가 치솟았는지 자은환이 막말을 시작했다. 생긴 바대로 뒷골목 파락호로 떠돌았는지 나이도 어린놈이 입 한 번 걸었다. 기가 막힌 윤승효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대놓고 구멍과 명기를 운운하는 상대가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창백하던 두 볼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시끄러. 빌어먹을 자식이 어디서 고얀 소리만 배워먹어서는!”

“오랜 정혼자 앞에서 시앗이나 두둔하는 당신도 천박하기로는 만만치 않지.”

“저분과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까! 말 함부로 하지 말고 입 다물어. 안 그러면 그놈의 입 정말로 찢어 버린다!”

“그래. 네가 찢어라. 내가 손을 대면 입 하나 정도로는 만족을 못 하게 될 것 같으니 네가 하는 편이 낫겠다.”

악다구니에 가까운 노성이 오고 가는 가운데 조용한 목소리 하나가 흘러나왔다. 목청 높은 고함 사이를 가로지르는 낮은 음성인데도, 마치 귀 옆에서 바로 말을 걸어온 것처럼 또렷하게 들린다.

남들이 듣기에 부끄러운 말까지 서슴지 않고 싸우던 두 사람은 그 목소리에 멈춰 섰다. 자은환은 그에 담긴 심상치 않은 내력 때문이었고, 윤승효는 올 것이 왔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문평은 열린 문지방에 기대 서 있는 천마를 바라보았다. 자은환 못지않게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그는 낮잠을 자다 막 일어난 모양새를 그대로 드러내며 문 앞에 서 있었다. 탄탄한 가슴이 벌어진 침의 사이로 엿보였다. 누가 봐도 조각이라고밖에 여길 수 없는 수려한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린 천마는, 오수午睡를 깨운 두 원흉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배, 백조부님…….”

사색이 된 윤승효가 우두커니 선 채로 천마를 불렀다. 천마는 나오는 하품을 감추지 않으며 호랑이처럼 나른히 말했다.

“어서 찢으라니까. 난 그거 보고 다시 들어가서 자야겠다.”

“이건 또 뭐야? 생긴 건 무슨 기생오라비처럼 생겨 가지곤, 어디서 어울리지도 않는 시건방을, 아얏! 왜 그래?”

“죄, 죄송합니다. 백조부님. 이놈이 어리석고 아둔해 아는 바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멋모르는 자은환이 천마에게 시비를 걸자, 기겁한 윤승효는 그의 종아리를 걷어차더니 얼떨떨한 뒤통수를 확 잡아당겨 깊이 머리를 숙이게 만들었다.

‘아, 왜 이래? 이 인간이 갑자기 돌았나?’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자은환이 버둥거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윤승효는 갑작스레 천생의 신력이라도 생겨난 양 강력한 힘으로 자은환이 고개를 못 들도록 내리눌렀다.

“찢어라.”

천마는 땀을 뻘뻘 흘리며 허리를 숙이고 있는 윤승효에게 낮게 말했다. 알아들었지만 못 들은 척하며 윤승효가 어색하게 되물었다.

“……예?”

“이번에 말하면 벌써 네 번째다. 찢어라. 네 손으로 그놈의 입을 찢으면, 그 녀석의 목숨만은 살려 주마.”

“배, 백조부님. 아니 천마님.”

“그놈의 입을 왜 찢어야 하는지는 누구보다 네가 가장 잘 알겠지. 놈은 마교의 안방에서 천마후를 모욕했다. 원래대로라면 교 전체에 척살령이 내려져야 하고, 환희루 역시도 교의 대적이 되어야 마땅하다. 아니, 그 전에 내 손으로 사지를 분시 해야지. 난 내 앞에서 내 사람을 모욕한 놈을 살려 둔 적이 없다.”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윤승효는 바들바들 떨리는 시선을 들어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지만 천마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냉혹하기만 했다. 기껏 들었던 오수에서 깨어난 것도 모자라 문평의 구멍을 운운하는 막말까지 들었으니, 그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한 번만 아량을 보여 주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아직 철모르는 어린것입니다.”

“철모르는 어린것이니 호된 꼴을 당하고 나면 철이 들겠지. 이것이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아량임을 기억하거라. 네가 내 의손자만 아니었다면, 그 녀석이 아직도 살아 숨을 쉬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른한 말투였으나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명백한 경고였다. 참담하게 얼굴을 찌푸린 윤승효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심상치 않게 돌변한 장내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자은환이 윤승효를 바라본다. 그는 성미가 급한 편이지만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윤승효가 일부러 강조한 ‘천마’라는 말도 분명히 들었다.

‘이런 젠장. 진천뢰를 밟았군.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저놈이 설마 천마였어?’

지난 두 번의 정마대전으로 인해, 이미 전설 그 이상이 되어 버린 천마 혁련상은 초절정 고수인 그에게도 까마득하게 높은 상대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그저 코웃음만 칠 만큼 자신만만한 은환이지만, 무려 천마씩이나 되는 존재를 대적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반로환동을 했다더니 진짜로 저런 모습일 줄이야. 외양상으로는 자신과 몇 살 차이도 안 나 보이는데, 실상은 자신보다 족히 다섯 배는 더 살아온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라며 자은환은 눈을 깜빡였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천하 마의 종주인 천마가 어째서 윤승효의 조부가 되는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대체 언제 천마후를 모욕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천마후는 천마의 남색 상대로, 한 번 보면 누구나 빠져들 수밖에 없는 엄청난 미남이라고 한다. 가히 경국지색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자라고 하는데 자은환은 마교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그 정도로 굉장한 미인을 본 기억이 없다.

윤승효를 제외하면 천마 본인이 가장 아름다웠고, 경국지색이라는 이름 역시도 그에게나 어울리는 칭호였다. 이런 남자가 푹 빠져 버릴 정도의 미남이라면 스쳐본 것만으로도 기억이 날 텐데 왜 아무것도 짚이는 게 없을까?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 봐도 생각나는 게 없는 그는 천마에게 생트집을 잡힌 기분마저 들었다.

“그만 하세요. 처사가 너무 과하십니다.”

보다 못한 문평이 한숨을 쉬며 나섰다. 자묘랑의 성격이 어떤지 익히 겪어 봤던 문평은, 자은환이 던진 폭언에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어린애가 멋모르고 한 말에 일일이 화를 낼 만큼 문평은 마음이 좁지 않다. 게다가 그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를 명백히 알고 있는 마당이니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측은하기까지 하다.

문평과 진짜 윤승효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무려 10년이 지나도록 자묘랑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성질이 드세고 독점욕이 강한 그가 그간 얼마나 속을 끓였을까를 생각해 보면, 기껏해야 한두 마디 욕을 얻어먹는 것 정도야 대수로운 일도 못 된다.

“자네는 나서지 말아. 이건 자네가 나설 일이 아니잖아.”

천마는 기껏 다잡은 분위기에 초를 치는 문평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문평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천마에게로 다가갔다.

“저 아이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자묘랑 그 애랍니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그사이에 벌써 저렇게 다 컸군요. 처음엔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저 녀석이 누구인지는 나도 알아. 자네 눈엔 내가 장님으로 보여?”

문평의 설명에 천마가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다. 문평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알면서도 이러신단 말입니까?’

성미 모진 서방을 다독이며 사느라 절로 흰머리가 느는 문평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천마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장님도 아니신데 어찌 그리 야박하십니까. 지금 윤 형과 저 아이의 사이가 저렇듯 험악해진 것은 죄다 당신 때문인데요. 모두가 오해로 인해 빚어진 일인데 처분이 너무 과합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오해는 말로 풀어야지요.”

“부처님 가운데 토막인가? 면전에서 욕을 본 것은 내가 아니라 자네야. 이런 모욕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용서하는 건 스스로의 낯을 깎는 일임을 왜 몰라? 한 번을 우습게 넘기면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지. 나는 가당치도 않은 놈들이 자네를 업신여기는 꼴을 두고 볼 마음이 없어.”

“사천왕 같은 당신이 제 옆에 버티고 섰는데 누가 그런 용감한 짓을 하겠습니까? 그런 걱정은 마시고, 윤 형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봐주십시오. 윤 형이 그동안 당신을 위해 해온 일을 떠올려 보세요. 그간의 공로를 감안한다면 이번 한 번쯤은 눈감아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싫어.’

천마는 눈빛으로 문평에게 말했다.

‘한 번만 봐줘요. 당사자인 내가 괜찮다잖아요.’

자칫하면 윤승효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문평은, 사정하는 눈빛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윤승효의 손으로 자은환에게 상처를 입히려고 들다니, 천마도 참 심보가 고약했다. 저 사람은 어쩌면 심술을 부릴 때만 저렇게 창의적인 것일까?

“자네는 승효의 체면만 생각하고 내 체면은 생각해 주지 않는군. 내가 몸소 나선 일이 그대에게 꺾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 줄 알아?”

문평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본 천마가 낮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문평은 미안한 기색으로 안색을 물들이면서도, 애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문평의 마혈을 짚은 후에 계속 윤승효를 다그치고 싶었으나, 진짜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간 당분간 각방을 각오해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각방만큼은 사양하고 싶은 천마는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 문평은 자신의 의지가 관철될 때까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고집을 독려하고 키워 온 것이 자신이었으므로 누굴 원망도 못 하고, 천마는 씁쓰레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전에 말했던 것, 그것에 대해 허락한다면 내 이번 일만큼은 양보해주지.”

천마는 아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전음을 흘려 문평에게 협상안을 제기했다. 이왕 물러서야 한다면, 실속이라도 챙겨야만 속이 편한 천마다.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쓰고 있던 문평은 천마가 한 제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미심쩍게 대꾸했다.

“개중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간 제안하셨던 일이 워낙 많으셔서 무엇을 원하시는 건지 짐작을 못 하겠습니다.”

가까이는 청간에서부터, 멀게는 새 연못을 파는 것까지. 천마가 해왔던 제안 중에는 기상천외한 것이 워낙에 많아 이번을 기회로 뭘 조르고 있는 건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설마 진짜로 술로 연못을 만들고, 숲에 고기를 매달아 주지육림을 실현해 보자는 건 아니겠지? 가뜩이나 소문이 안 좋은 내가 그런 짓까지 하면 남달기라는 소문이 부활할 텐데?’

“조만간에 둘이서만 오붓하게 여행을 떠나자고 했던 것 말이다. 당시에는 우경이 때문에 안 된다고 했지만, 우경이가 환골탈태를 끝내면 거리낄 것도 없겠지.”

문평이 도통 상황을 가늠하지 못하자 천마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꼭 짚어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서야 옛 기억을 떠올린 문평은 당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천마를 바라보았다.

“진정으로 교를 뒤로하고 여행을 떠나실 겁니까? 그 멀고 먼 나마羅馬1)까지요?”

“그럼. 정말이지 않고. 이왕 가는 거 화지관和地關2)도 구경하고, 서역에서 가장 권세가 강하다는 세속무당도 한번 보고 올 생각이다. 듣자니 대식국大食國3)까지는 육로로 갔다가 거기서 열나아热那亚4)로 가는 배를 타면 된다더군. 중원에서만 한평생을 살았으니, 이제는 다른 세상을 구경해 볼 때도 된 게 아니냐.”

천생 역마살이 낀 천마는 진정으로 서역으로의 여정을 원하는 듯했다. 문평은 딱히 내키지 않았으나 그간 윤승효에게 신세 진 것을 생각한다면 몇 년간의 외유 정도야 감수할 수 있는 대가라고 생각했다.

천마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성품이니 여행길이 고되진 않을 터였다. 나전어도 제법 잘하니 의사소통이 불편하진 않을 것이고, 평생 보지 못했던 이국적인 풍물을 구경하는 것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나마까지만 가면 되는 겁니까? 거기에서 여정이 더 연장되는 것은 아니고요?”

나마가 세상 끝이 아니라면, 그 이상도 돌아보고 싶어 할 게 분명한 천마이기에 문평이 못을 박았다. 천마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마까지만.”

그의 확답을 받은 문평은 드디어 마음을 결정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서역으로의 여정에 동행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들은 용서해 주십시오.”

전음으로 말이 오가니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문평이 자신들을 위해 청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윤승효다. 그는 숨을 죽인 채로 두 사람의 대화가 원만히 끝나기를 빌었다.

비밀리에 두 사람의 협상이 체결되자, 천마가 조용히 헛기침을 했다. 짧은 기침으로 주의를 환기시킨 그는 여전히 못마땅한 시선으로 자은환을 내려다보더니 쯧쯧, 낮게 혀를 찼다.

“저 사람이 저렇듯 반대하니 어쩔 수 없지. 마후의 마음이 모질지 못한 것이 너희에게는 천운이다. 두 번 올 수 있는 행운이 아니니 앞으로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일은 없도록 해라.”

“네. 감사합니다. 백조부님. 이 은혜는 뼈에 새기겠습니다.”

“인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구명한 저 사람에게 해야지. 그리고 승효.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고 싶지 않다면 서방 간수를 좀 해야겠구나. 어린놈이 기고만장해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니 이런 실수까지 하는 게 아니더냐.”

천마는 충고라기보다는 꾸지람에 더 가까운 말을 내뱉더니 문평의 허리를 끌어안고 방을 나가 버렸다. 천마에게 끌어안겨 허둥지둥 방을 나서던 문평은, 돌연 발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아직 두 사람 간에 오해가 풀리지 않은 것 같으니 밖에서 문을 걸어 두겠습니다. 적어도 이틀간은 열어 주지 않을 생각이니 해야 할 말은 모두 하고 나오세요.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도망만 치실 일은 아닐 성싶습니다.”

문평은 어안이 벙벙해서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싱긋 웃더니, 진짜로 문을 닫아걸고 덧문에 빗장까지 걸었다. 그 모습을 본 천마가 어이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타박했다.

“오지랖 넓은 놈. 이번에는 또 무슨 참견을 하는 게냐?”

“참견이 아니라 마무리지요. 애초에 당신이 윤 형인 척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아닙니까? 당신께서 신경을 쓰지 않으시니 저라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놈의 윤 형 소리 지겨워 죽겠군. 저놈도 멀쩡하게 이름이 있는데 호칭이 왜 아직도 그따위야. 혹시 아직도 저 녀석에게 미련이 있는 건 아니겠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제가 사랑했던 사람이 어디 저 사람이었습니까? 감쪽같이 속여 넘겨 억장이 무너지게 했던 이가 누군데 이러십니까?”

“왜 또 옛일을 꺼내나. 싹싹 빌고 사과했으면 대범하게 잊을 줄도 알아야지.”

“옛일을 먼저 꺼낸 사람은 당신이죠. 그리고 싹싹 빌었다고요? 언제요? 저는 그런 기억 전혀 안 나는데요?”

두 사람은 한없이 토닥거리며 문에서 멀어져 갔다. 윤승효는 졸지에 자은환과 한방에 갇힌 채로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말다툼을 들었다.

자은환의 머리를 누르던 윤승효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죽을 고비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것처럼 전신에서 힘이 풀린다. 허리까지 무너져 내린 윤승효는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 그와는 달리 낭패는 했어도 겁은 먹지 않았던 자은환은 편안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젠장. 저까짓 게 설마 천마후였어?’

은환은 어이없는 시선으로 문 쪽을 노려보았다. 별 볼 일 없는 놈팡이라고 생각했던 암고양이의 정체는 의외로 대단했다. 다른 사람들의 말만 듣고 천마후가 절세의 미인이라고 알고 있던 은환은 어쩐지 속은 것 같은 느낌에 입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뭐야, 윤승효? 당신 저 암고양이를 천마에게 빼앗긴 거야? 그래서 그렇게 극존칭을 썼던 거구나?? 처지 한번 처량하게 됐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의로 맺어진 조손간이라도 되는 모양인데, 할아비가 의손자의 남첩을 빼앗나?”

“……은환아. 제발.”

“제발 뭐? 아, 그놈을 암고양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암고양이를 암고양이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 불러. 안 보는 곳에선 천자 욕도 한다는데, 바람난 암고양이 욕정도야 뭐가 대수라고.”

문평이 윤승효를 차고 천마에게 간 거라고 철석같이 믿어 버린 듯, 외려 제가 분한 기색이 된 자은환이 멋대로 지껄여 댔다. 방금까지 그놈의 입 때문에 죽다 살아난 주제에, 한없이 가벼운 입은 여전히 나불나불 잘도 떠들고 있었다.

은환의 말을 듣고 있던 윤승효의 눈에서 시들었던 생기가 되살아났다. 아니, 그것은 생기가 아니라 차라리 불꽃이었다.

‘이 망할 놈의 자식. 하마터면 내 손으로 저놈의 입을 찢을 뻔했는데 여전히 자각도 못 하고!!’

자은환의 철없는 행동 때문에 십년감수를 한 윤승효는 퍼런 눈을 번득이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마침 잘 됐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은환이 이놈의 자식은 요 망할 놈의 입버릇부터 고쳐야 한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아온 은환은 그야말로 천방지축이었다.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생각도 안 거치고 그대로 떠들어 버리니, 가는 데마다 분란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적이 된다. 이래서야 천마의 말대로 머지않아 호된 꼴을 당하고 말 것이다.

“은환아. 내가 너를 미워해서 이러는 게 절대 아니다. 사랑해서 이러는 거다.”

“뭐? 무슨, 악! 왜 이래? 사람 죽일 생각이야? 수강이 시퍼렇잖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자은환은 머리 위를 휙 하고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강기에 그야말로 기겁을 하고 말았다.

“넌 좀 맞아야 해. 잠깐만 맞고 이야기하자.”

“그거 맞으면 진짜로 죽는다니까? 이보세요. 윤 씨. 윤 형. 승효야? 제발 정신 차려!!”

자은환이 애절하게 애원했지만 승효는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 그는 제 눈빛만큼이나 짙푸른 수강을 퍼렇게 번득이며 은환을 쫓아왔다.

그의 진심 어린 살기에 기겁한 자은환이 도망을 다니기 시작했지만, 초절정 고수의 작정한 손속을 모조리 피할 수는 없었다.

야옹, 야아옹. 주인의 위기를 본 천묘가 애처롭게 울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비익전의 별채에서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비명과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명을 들은 비익전의 시비들은 할아비나 손자나 똑같다고 생각하며 끌끌 혀를 차고 말았다.

〈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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