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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전 (25/26)

외 전

“잠깐만요. 지금 농담하시는 겁니까?”

문평은 지끈지끈한 이마를 누르며 억눌린 소리로 되물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편두통이 다시 도지는 느낌이었다. 송곳 같은 것으로 머리 안쪽을 찌르는 것처럼 오른쪽 이마 안쪽이 욱신욱신 쑤셔 온다.

창백해진 문평의 눈치를 살피며 란란이 조심스레 책자를 거두었다. 그러나 철없는 초교연은 손뼉까지 쳐가며 이 새로운 사실을 반겼다.

“세상에나. 너무 낭만적이에요, 마후님. 우리 사부님께 이런 면이 있으신 줄은 저도 몰랐어요.”

아가씨만 모르셨을 줄 아십니까? 나도 미처 몰랐습니다. 문평은 울고 싶은 기분으로 생각했다. 문평이 보기에 이건 낭만적인 게 아니라 그를 놀리려는 수작이다. 심술이 하늘에 뻗친 천마가 순전히 문평을 괴롭히기 위해 이러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새로 지어지는 태상가주전의 명칭이 비익전比翼殿으로 결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러려니 했어요. 그런데 새로 파는 연못의 이름을 비목지比目池라고 짓고, 그 옆에 조성하는 정원마저 연리지로 꾸민다니. 세상에 이렇게까지 지극한 애정 표현이 어디 있겠어요? 마후님은 좋으시겠다. 저도 이사형에게 이렇게 지독한 사랑을 한번 받아 보고 싶어요.”

의외로 소녀 같은 감성을 지닌 초교연은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문평을 바라보았다. 괴롭히는 것이라면 화를 낼 수라도 있겠는데, 이 아가씨는 오로지 일편단심으로 문평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이 독특한 감성을 가진 아가씨에게 문평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순진하고는 거리가 먼 똑똑하고 영민한 아가씨인데, 왜 하필 이러한 일에만 초점이 엇나가는지 모를 일이다.

“태상께서 농담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설마 진심으로 그런 이름으로 지으시겠습니까?”

천마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문평은 애써 진실을 외면했다. 순간적으로나마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장난으로 치부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란란은 그러한 현실 도피마저도 길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미안하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문평의 필사적인 외면을 산산이 깨부수었다.

“저기,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마후님. 비익전의 편액은 이미 장인이 만드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연못도 파고 있습니다. 벌써 땅 고르기가 끝났다고 하는데요.”

그 말을 들은 문평은 깊은 신음 소리를 내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반대로 초교연은 다시 한번 손뼉을 치며 매우 기뻐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마치 진주분이라도 바른 듯 번쩍번쩍 빛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화용월태花容月態가 따로 없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우리 사부님은 하겠다는 일은 기어코 하시고야 마는 분이니까요. 마후님께선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어떻게 하셨길래 우리 사부님처럼 냉철하신 분을 이렇게 완벽하게 사로잡으실 수 있으셨어요? 제발 제게 그 비법을 좀 가르쳐 주세요. 저도 시집은 가야 하잖아요. 이러다 처녀 귀신 되겠어요.”

그녀는 탁자에 기대 문평에게로 몸을 숙이며 진지하게 속삭여왔다. 문평은 그렇지 않아도 심한 편두통이 더욱 격렬해지는 것을 느끼며 어설프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딱히 무슨 비법 같은 게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정말로 그냥 그렇게 일이 진행된 겁니다. 아가씨.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가 결과를 의도하고 행동한 적은 없답니다.”

“어머. 말씀 편하게 하세요. 사부님의 반려이시니 제게는 사모 격이신데, 말씀을 높이시면 제가 불편하잖아요.”

그녀는 듣는 문평이 부끄러울 정도로 뻔뻔스럽게 천마와 문평의 관계를 인정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문평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천마의 아내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은 둘째 치더라도, 단지 그와 엮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중사기의 윗사람 대접을 받는다는 건 소심한 그에게는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그래도. 아가씨와 저의 관계는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아가씨의 사부인 것도 아니고, 태상께서도 편한 대로 하라고 하시고…….”

“물론 마후님께는 편한 대로 하라고 하셨겠죠. 하지만 아랫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세요. 마후님께서 이렇듯 꼬박꼬박 존대를 하시면, 사부님께서 저를 가만히 내버려 두시겠어요?”

물론 가만히 안 내버려 두겠지. 이미 당해 본 것이 적지 않았기에 문평은 초교연의 질문에 차마 거짓을 답할 수 없었다.

평생을 마교의 절대자로 살아와서 그런지 천마는 위계질서에 매우 민감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 문평에게 해당하는 위계질서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신경을 썼다. 정작 본인에게는 어떻게 대하든 상관하지 않는 것 같은데, 누구 하나라도 문평에게 잘못 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자를 절대 그냥 두지 않았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실수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사람들이 모조리 천마의 길디긴 뒤끝에 희생당하자 이후로는 아무도 문평을 건드는 이가 없었다. 요즈음의 그는 천마가 장담했듯이 ‘천마처럼’ 대접받았다. 어쩌면 천마보다 더욱 대접을 받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부님께서는 저를 연아라고 부르세요. 저희 부모님 말고는 저를 그렇게 부르시는 분은 사부님뿐이시죠. 마후님도 그렇게 부르실래요? 그렇게 부르시면 더 친근할 것 같아요.”

천마와 문평의 관계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 문평에게 가장 사근사근하게 다가온 제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초교연이었다.

그녀가 문평에게 유달리 싹싹한 것은 따로 이유가 있어서다. 그녀가 문평에게 달라붙는 이유는 그녀가 막내라서도 아니고, 마중사기 중 유일한 여자여서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평생 동안 해결하지 못한 고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연애 문제였다.

이사형인 곽진무의 관심을 도무지 끌 수 없다는 것이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녀는 천마를 제대로 꼬신 문평을 보고 큰 관심을 보였다. 대체 어느 정도로 대단한 능력이 있길래 자신의 사부 같은 남자를 붙잡아 둘 수 있느냐는 거였다.

“사부에게도 통할 정도의 능력이라면 이사형 따위야 문제없겠죠?”

처음 인사를 나눈 그 날 당돌하게 물어 왔던 그녀는 그때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문평에게 찾아와 그의 조언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문평은 그러한 초교연의 터무니없는 착각을 정정해 주려고 온 힘을 다했으나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천마의 고백을 받아들인 후 천마의 팔불출 기질은 완전히 개화하고 말았다. 그는 말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도 문평을 금지옥엽처럼 대했고, 초교연은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문평을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아직 그렇게까지는 좀……. 노력해 보겠습니다. 좀 더 편해질 때까지 기다려보죠.”

지금 같아선 평생이 가도 편해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소위 높은 사람으로 살다 보니 외교적 수사라는 것이 늘었다.

문평이 웃는 얼굴로 얼버무리자 초교연이 아쉽다는 듯 입술을 비죽였다. 그녀는 나이는 서른이 넘었지만 하는 행동이 언제나 어린 소녀처럼 천진했다.

“아쉽네요. 하지만 뭐,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녀는 긴 머리 타래를 손가락으로 꼬며 문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처럼 아름다운 여인에게 긴 응시를 당하자 사내일 수밖에 없는 문평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설렜다. 그녀는 단순호치라는 표현 그대로 입술은 붉고 이는 새하야며 눈은 새까맸다. 빙기옥골의 흰 피부에 커다란 눈이 서글서글했고, 미소 짓는 모양도 애교 있고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적극적인 구애를 참사검은 왜 거절하는 걸까?’

문평은 도통 곽진무의 속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초교연이 살짝 드센 성격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점 빼고는 어느 곳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규수였다. 집안도 좋고, 사문도 좋고, 인물도 아름다우며 무엇보다도 오로지 일편단심으로 그 하나만을 사랑한다. 사내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여인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부님은 마후님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셨을까요?”

바라보는 시선이 왠지 깊다 했더니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문평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초교연의 질문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글쎄. 천마가 내 어디를 그렇게 좋아한 걸까?’

가끔은 그도 동경을 앞에다 놓고 자문해 볼 때가 있다. 그가 얻은 남자는 너무도 과분한 상대라 누가 봐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는 본인조차도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의심을 할 때가 있으니 초교연이 그런 의문을 가진다고 한들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그 질문은 제가 아니라 교주님께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전들 이유를 알겠습니까.”

“아시잖아요. 사부님의 성격을. 여쭈어봤자 비웃음만 당할 게 뻔한데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사부님이 절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것 같더라고요. 신혼이나 다름없는 기간인데 뻔질나게 뇌정전을 드나든다고 은근슬쩍 눈치가 장난이 아닌…….”

“은근슬쩍 눈치를 준 적 따윈 없다. 대놓고 눈치를 주었지.”

입술을 비죽이며 문평에게 천마의 험담을 늘어놓으려던 초교연은 본인에게 그러한 사실을 딱 걸리고 말았다. 당황한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짧은 외출에서 돌아온 천마가 문간에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는 비스듬히 문간에 기대고, 발목 즈음에서 발을 교차하고 있는 모습이 누가 봐도 시비를 걸겠다는 듯한 자세다.

초교연은 순간적으로 놀란 표정을 떠올렸으나 곧바로 안색을 수습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날아갈 듯 예를 올리며 천마의 비위를 맞췄다.

“태상교주님을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어요?”

“그간이고 뭐고 간에 넌 그제도 오지 않았더냐? 요즘 꽤나 한가한 모양이지?”

천마는 특유의 비웃는 듯한 시선으로 초교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평은 아직도 그런 시선에 당황하곤 했으나, 오랜 세월 단련된 초교연은 완벽하게 표정을 감추며 싹싹하게 웃었다. 지나치게 성격이 나쁜 사부를 오랫동안 모시고 산 탓에 비위를 맞추는 데는 이골이 난 초교연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천마가 어떤 태도에 약한지 잘 알고 있기도 했다.

“한가하진 않은데 시집가고 싶어서요. 마후님께 비법을 전수하러 다녀요.”

초교연은 천마에게 ‘시집’과 ‘마후’를 강조하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천마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는 설마하니 저 사람에게서 진무를 잡을 수 있는 비법 따위를 전수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거냐?”

“그렇게까진 생각하지 않았지만, 제가 모르는 무언가를 아실 수도 있죠. 아시다시피 전 이제껏 연정다운 연정을 품어보지 못했거든요.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도망 다니는 바람에 말이에요.”

여인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만천하가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제 입으로 그런 사정을 토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초교연은 자신의 사정과 절박함을 천마에게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어린아이처럼 무방비한 그 태도는 문평에게도 제법 익숙한 것이었다. 자신도 천마를 대할 땐 종종 그러한 태도가 되곤 하기 때문이었다.

천마에게는 확실히 그런 구석이 있었다. 딱히 잘 받아 주는 것도 아닌데 왠지 의지하게 된다. 자신의 힘으로 풀기 힘든 난제가 눈앞에 보이면, 우선 천마부터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공통적인 특징인 것 같았다.

“그놈이 필사적으로 도망을 다니는 것은 네가 필사적으로 쫓아다니기 때문이지.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세우는데 그놈이 도망을 가지 않고 배기겠느냐?”

“제가 언제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나요. 저는 언제나 사형을 배려하고 있어요.”

“그래. 너는 언제나 그 녀석을 배려하고 있지. 먹이를 노리는 암호랑이처럼 언제나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고, 그러다가 결정적인 공격의 순간에만 슬쩍 물러나며 배려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 않으냐. 너는 배려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녀석에게는 혼놀이나 다름없지. 그럴 때마다 녀석은 피가 마를 게다.”

혼놀이란 호랑이가 동물을 잡을 때 한다는 행위로 급소를 물고 흔들며 하늘로 던져 올렸다가 받아 내는 것을 말했다. 상대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결정적으로 맥을 끊어 놓는 짓을 일컬음인데, 천마는 초교연이 그런 짓을 곽진무에게 하고 있다고 대놓고 지적했다.

한 번 마음을 먹은 그는 사정도 봐주지 않고 마구 몰아붙였다.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 제자에 여제자인데도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가차 없었다. 그는 참으로 공평하기 짝이 없는 스승이었는데, 첫째인 호완평을 대할 때나 막내인 초교연을 대할 때나 모두 동등하게 대했다. 여자라고 특별 대우를 해주지도 않았고, 어리다고 더 귀여워하지도 않았다.

“네가 정말 그놈을 차지하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놈을 멀리하고 모르는 척 무시하거라. 본래 사내란 뒤에서 쫓아오면 신고 있던 신발까지 벗어 던지고 도망가는 겁 많은 족속들이다. 반면에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 부러 쫓아와 집적거려 보는 호기심 많은 짐승이기도 하지. 네가 해야 할 일은 그놈의 호기심을 자극해 녀석이 스스로 찾아오게 만드는 거다. 그러니 엉뚱한 데서 삽질하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해라. 너 때문에 뇌정전의 문턱이 다 닳겠다.”

무시당할 거라고 생각했던 초교연의 얼굴이 그의 말을 듣고 환해졌다.

별 기대를 안 하고 있던 문평은 천마의 대답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기대 오든 말든 상관없이, 자신이 내킬 때만 그 기대에 응해 주는 변덕스러운 사람이 웬일로 제법 그럴듯한 조언을 다 한다. 지난 몇 달간 자신이 얼버무렸던 수많은 헛소리에 비하자면 훨씬 값지고 보람 있는 충고 같다.

“정말 그렇게 하면 사형이 저를 돌아보게 될까요, 사부님?”

반짝반짝 두 눈에 별을 담은 초교연이 설레는 음성으로 물었다.

‘글쎄. 그놈은 보기보다 간단한 놈이 아니라서. 하지만 지금 네가 하는 짓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성과가 좋을 거다.’

솔직하다면 그리 말해야 되겠으나, 문평에게로 향하는 초교연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싶었던 천마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네가 내 말을 얼마나 충실히 이행하느냐에 따라 달렸지.”

천마의 제자들은 의외로 사부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다. 딱히 인덕이 따를 만한 인물도 아닌데 그의 제자들은 천마가 하는 말은 일단 믿고 보는 경향이 있다. 초교연도 그러한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천마의 충고를 금과옥조로 가슴에 담으며 날아갈 듯 대례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계속 문평을 귀찮게 하다 보면, 문평이 아니라 천마에게라도 뭔가가 떨어지지 않을까 했던 초교연의 노림수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교연이 계속 신혼 생활을 방해하는 것이 귀찮았던 천마가 그녀를 떨어트려 놓기 위해 제법 큼직한 미끼를 제물로 던져 준 것이다. 물론 천마가 초교연의 그런 속셈을 모를 리 없다. 아니까 더 꼼꼼하게 챙겨주지 않은 것이다.

알면서 이용당해 주는 사람이나, 이용하면서도 당한 척하는 사람이나. 두 사람은 안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도 서로 간에 꿍꿍이가 참으로 잘 맞았다.

말 한마디로 초교연을 쫓아 보낸 천마는 란란도 물리고 문평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누가 볼세라 조심스레 그의 뺨에 입을 맞춘다. 어디서 온 풍습인지 모르겠으나 요즘 들어 부쩍 천마는 인사 대신 입맞춤을 하곤 했다. 문평은 열없이 웃으며 그런 천마를 마주 바라보았다.

“나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천마가 돌아온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반가운 것은 천마 덕분에 당분간 초교연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고민거리 중에 하나가 사라져서인지 지독하던 편두통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더니만, 지금은 바늘로 찌르는 것 정도로 바뀌어 견디는 게 한결 편해졌다.

천마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스스로 차를 따랐다. 그의 처소에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최상급의 기문차가 특유의 다향을 짙게 피워 올렸다.

“별거 아니었다. 안부를 물으러 온 놈을 만났으니 인사나 들었지. 그 녀석과 나 사이에 할 말이 뭐가 있겠느냐?”

문평과 관계가 진전된 이후 좀처럼 뇌정전 밖으로 나가지 않던 천마가 오늘 외출을 했던 것은, 마교로 직접 찾아온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승효와 동행해 이 먼 신강까지 천마를 만나러 온 사람은 천마의 조카인 백우경이었다.

문평에게는 백우경이라는 이름보다 파면객으로 더 익숙한 그는 지난 마정대전 이후 처음으로 마교를 방문했다. 요 근래 바깥에서 온 손님을 받지 않았던 천마지만 그마저도 뿌리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문평을 홀로 두고 조카를 만나러 나갔고 근 반나절을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천마의 파란만장한 과거를 익히 알고 있는 문평은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그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여러 가지로 사연이 많은 천마는 자신의 혈육들과 그다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조카인 백우경에게는 본의 아니게 이중 삼중으로 피해를 입힌 전과마저 있었다.

약점이 많은 천마가 조카에게만큼은 약하다는 걸 문평은 알고 있었다. 안 그런 척하고 있지만 자신 때문에 인생을 망쳐 버린 그에게 은근히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랬기에 더욱 백우경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가 궁금했다. 천마나 백우경이나 서로에게 할 말이 많은 것은 확실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드러내 놓을 만큼 편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저 안부를 묻기 위해 이 먼 신강까지 오셨다고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안부도 묻고, 부탁도 하고, 겸사겸사였나 보지.”

문평이 놓치지 않고 채근을 하자, 마지못한 천마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환인전에서의 비밀 혼인식이 들킨 이후로 문평을 속이는 일을 가능하면 하지 않게 된 천마는 요즘 들어 거짓말을 할 거면 아예 말을 하지 않는다는 신공을 새로이 터득했다. 하지만 문평도 꼬치꼬치 캐묻기라는 비기를 개발했기에, 천마의 새로운 신공이 빛을 발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부탁을 하셨다고요? 파면객께서 당신께 청이 있으셨나요?”

“그렇다고 하더군.”

“무슨 청을 하셨는데요? 태상교주님의 손을 빌릴 정도라면 심상치 않은 일이겠군요.”

혈육의 정도 만나고 부대껴야 쌓이는 법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아버지를 죽인 백부와 그 백부 덕에 인생을 제대로 말아먹은 조카라는 입장으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서로가 혈육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저 데면데면했다.

가엾은 내 조카라고 끌어안을 만큼 천마가 살가운 성격도 아니고, 평생 동안 정파인으로 살아온 파면객도 무려 천마씩이나 되는 존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들은 숙질간이면서도 남들이 보면 서로 안면이 있는 사람들 정도로만 여길 정도로 사이가 편치 않았다. 한데 그런 불편함을 무릅쓰고 파면객이 청을 넣었다면 정말 보통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천마의 곁에 붙어 있으면서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재난들을 숱하게 겪었던 문평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제2차 마정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또 무슨 사건이 터져 이 사람이 필요한 건가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조그만 머릿속으로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네가 걱정하고 있는 그런 일이 아니니 안심하거라. 정말 별일 아니었다.”

“이제껏 보고 들은 것이 있는데 그 정도의 말로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이제 천마라는 별호가 가진 무게를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직접 움직여야 할 일이라면 그는 강호 전체를 좌우할 만한 사건이라는 뜻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건은 언제나 위험한 법이지요.”

가진 명성의 위력이 크면 클수록 그에 대한 책임은 더욱 커지는 법이다. 문평은 하급 무사로 살 때는 몰랐던 사정을 천마를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천마의 위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가 짊어져야 할 의무도 많았다.

마교주라는 직위는 이미 벗었지만, 천하제일인이라는 이름은 천마가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것은 천마에게 명예이면서도 족쇄였다.

“정말로 그런 일이 아니라니까……. 그 녀석의 부탁은 사소한 거였다. 자신의 인생을 되찾고 싶으니 자신을 화경의 고수로 만들어 달라더군.

너도 알다시피 환골탈태를 하면 옛 껍데기를 벗고 몸을 재구성할 수 있다. 그 녀석에게 있어 자신의 얼굴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화경이 되는 것뿐이지. 거기에 대한 도움을 받으러 나를 찾아온 거다. 무슨 위험한 임무 따위를 맡기러 온 것이 아니라.”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 함구하려고 했지만, 그러려고 하다 보니 문평의 근심이 지나치게 커졌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했던가. 천마로 사는 것이 어떠한 일인가를 간접적으로 경험해 봤던 문평은 그가 가진 지위와 책임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로서는 모르고 넘어가는 게 더 낫다 싶은 부분까지도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니, 서로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아는 것도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아,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파면객께서 얼굴을 되찾는 것은 교주님께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교주께서 그 일을 도와주신다면 그간 본의 아니게 지셨던 마음의 빚을 청산할 수 있으실 테지요.”

새외에서 중원을 침공하려는 세력들이 일어났다든가, 황궁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란을 막아 달라든가 하는,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거창한 부탁들을 줄줄이 떠올리고 있던 문평에게, 백우경의 용건은 소박하기 짝이 없게 들렸다.

물론 화경의 고수라는 게 이루기 쉬운 목적은 아니지만, 천마는 현경에 이르렀고 백우경은 이미 초절정이 아닌가. 천마와 같은 핏줄인 데다, 천하의 재지를 한 몸에 지녔다는 제갈세가를 외가로 둔 백우경의 자질이 그리 뒤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부탁이라면 기꺼이 도와줘야지요. 그래도 친조카가 아닙니까?”

단순한 문평은 금세 얼굴이 밝아져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는 내심 씁쓰레하게 웃으며 손안에서 찻잔을 돌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실 백우경의 부탁에는 그보다 더 복잡한 내력이 숨겨져 있다. 백우경이 화경의 고수가 되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연유는 얼굴을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리멸렬한 정도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지난 마정대전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보유하고 있던 화경의 고수를 모조리 잃고 각 세력의 수장들마저 잃은 것도 큰일이었으나,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곽효와 손을 잡고 저지른 그들의 모든 비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정파의 탈을 뒤집어쓰고 감히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인면수심의 행동들을 서슴없이 저질렀고, 그 과정에서 무림인들은 물론이고 죄 없는 민초들까지도 숱하게 희생을 당했다.

숨겨 왔던 그들의 여죄가 백일하에 드러나자 강호엔 공분이 들끓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으로 푸르게 빛났던 정도맹의 이름은 진창에 처박혔다. 곽효의 음모에 가담했던 팔파와 오대세가는 봉문을 해야 했으며, 자신의 사문에 실망한 젊은 후기지수들이 사문을 탈퇴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 일들도 허다하게 일어났다.

문제는 그들뿐만이 아니라 그들과 관련이 없는 다른 정파인들까지도 수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호기를 놓칠 리 없는 사파인들은 곽효의 난에 동참하지 않은 정파인들까지도 한 무더기로 싸잡아 비난했다.

죄 없는 자들은 당연히 억울해했지만 강호의 민심은 그저 싸늘하기만 했다. 어디에도 정파인들이 발을 붙일 장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뼛속까지 정파인인 백우경이 이 양상을 잠자코 지켜볼 리는 없었다. 그 역시 지난 잘못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정파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었다. 의와 협을 따른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정파에는 아직도 조세화와 백결개 같은 사람이 남아 있었고, 그들의 신념은 여전히 올곧게 빛났다.

그간의 잘못된 관행들은 확실히 고쳐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파의 존재 의의까지 부정해선 안 된다고 백우경은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는 천마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해 강해지려고 한 것이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다. 적어도 화경의 고수 정도가 되지 않으면 그의 의지를 관철할 수 없었다.

백우경은 속이는 바도 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중원 정파들을 사실상 멸문시킨 거나 다름없는 천마에게 직접 그들의 재건을 요청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스스로의 명분을 믿고 있는 백우경은 천마의 앞에서도 당당하기만 했다.

‘내 손으로 부순 것을 내 손으로 고친다라. 우경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위선이나마 선을 지키는 정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림인들은 그저 도적 떼에 지나지 않게 돼. 적이 없는 마교는 나태해지기 십상이고…….’

천마는 백우경이 제안한 일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지했다. 자신이라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마교주의 직위에서 물러나고, 공식적으로는 은거를 하고 있는 처지가 되어서도 강호에서 발을 뺄 수 없다는 사실이 적잖이 불만스러웠다.

그는 이제 은거자의 몸이다. 따로 금분세수를 하지는 않았지만 가지고 있던 모든 것에서 손을 털었고, 살고 있던 장소조차도 제자에게 물려주기 위해 새로운 처소를 짓고 있는 중이다.

이제 남은 인생은 문평과 함께 유유자적 세월을 보낼 일만 남았다고 여겼는데, 그 생각이 한낱 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가 강호로 나가지 않았더니 강호가 그를 찾아왔다. 이제 그에게는 아무런 의무도 존재하지 않건만, 그들은 뻔뻔하게도 천마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이리 오거라. 더 가까이.”

짜증이 치솟은 천마는 불쾌해진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문평을 불러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딱히 좋지는 않은 눈치였으나,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지 문평은 순순히 그의 무릎에 앉아 주었다.

따뜻한 체온이 품 안을 덥혔다. 천마는 문평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그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간지러운 듯 문평이 어깨를 움츠린다. 천마는 한 손으론 문평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손으론 문평의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아직 뇌정전에 남아 있어서 일이 자꾸 찾아오는 모양이다. 하루빨리 비익전이 완성돼야 은거를 할 수 있을 텐데. 숨고 싶어도 핑계가 없으니 답답하구나.”

글쎄요. 당신이 하려고 마음먹은 그런 걸 과연 ‘은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문평은 홀로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사람들은 보통 은거라고 하면 초막을 짓고 텃밭을 일구는 소박한 인생을 생각한다. 하지만 천마는 마교의 가장 안쪽에 으리으리한 새 대전을 짓고 그 안에서 은거할 생각을 했다.

결 고운 비단옷이 아니면 입지를 않고, 최상급품이 아니면 쓰지를 않는 사치스러운 성격이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상식에만 익숙한 문평으로서는 천마가 ‘은거’를 입에 담을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천마가 투박한 백포를 입고 농사나 짓고 밭을 갈면서 남은 인생을 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건 뭔가 아니지 않은가?

“……비익전의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만, 교주님. 근래 이상한 소문이 들리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백우경 때문에 잠시 다른 일을 잊고 있었던 문평은, 천마의 말을 듣고 중요한 용건을 퍼뜩 기억해 냈다.

빳빳하게 허리를 세운 그는 고개를 돌려 천마를 바라보았다. 문평을 어루만지며 심란한 심산을 달래고 있던 천마가 그의 시선을 느낀 듯 눈을 들어 올렸다.

“이상한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

“지금 짓고 있는 비익전 앞에 새로 연못을 파고 정원까지 조성하신다면서요?”

“그래. 그럴 거다. 처소를 새로 짓고 있으니 그는 당연한 일이 아니냐?”

아직까지 뭐가 문제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천마는 의아해하며 그에게 되물었다. 천마에게 있어 처소란 방이 기본적으로 수십 개가 딸려 있고, 마당엔 연못이 있으며, 담장 안에 가산 한두 개 정도는 딸려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원체 그런 사람이니 어쩔 수 없지.’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깨달은 문평은 그의 터무니없는 기준을 지적하는 것을 단념했다.

“제가 문제로 삼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문제는 그 연못과 정원에 붙을 거라고 소문난 이름들입니다. 그게 정말 사실입니까? 새로운 처소의 이름을 비익전으로 지은 것으로도 모자라, 연못 이름을 비목지로 짓고, 정원에 연리지를 심으실 건가요?”

비익전은 비익조에서 따온 말로 암수가 서로 하나씩의 날개만을 가지고 있어서 둘이 합치지 못하면 날 수 없다는 전설상의 새를 말한다. 비목지는 아마도 비목어에서 따온 것 같은데, 비목어는 각각 눈이 한 개뿐이라 한 쌍이 같이 있지 않으면 헤엄치지 못하는 전설상의 물고기다. 연리지는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하는 나무인데, 어떤 특정한 종류의 수목을 뜻한다기보다는 두 개의 각기 다른 나무가 한데 얽혀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게 된 기목奇木을 일컫는다.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모두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연인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오죽하면 백거이가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을 노래할 때,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길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라고 표현했겠는가.

“이런. 그게 벌써 소문이 났더란 말이냐. 놀라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 말을 듣고 문평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지 못하는 천마는, 진지한 태도로 심히 아쉬워했다. 마치 깜짝 선물이라도 준비하려 했다가 실패한 것처럼 진심으로 섭섭해하는 눈치였다.

문평은 어이가 없어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먼저 극악하기 그지없는 작명 솜씨부터 탓을 해야 할까? 아니면 그런 이름을 듣고 자신이 좋아하리라고 여긴 그의 착각부터 지적해야 할까?

“왜 그런 이름들을 택하신 겁니까? 다른 멀쩡한 이름들도 많을 텐데요.”

“비익전과 비목지가 어때서 그러느냐? 두운도 맞고 운치도 있는 데다, 딱 적당하지 않으냐.”

“절대로 적당하지 않습니다. 누가 봐도 적당하지 않아요. 하나면 몰라도 세 번이나 중첩되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남들이 들으면 비웃습니다.”

“너는 아직도 남들의 시선이 두려운 게로구나. 아니면 내 사랑이 부끄러운 게냐?”

네. 부끄럽습니다. 어쩔 땐 진심으로 창피하기도 합니다. 목구멍 끝까지 올라오는 말이 있었으나 문평은 그 말을 삼켰다. 솔직한 게 다가 아니라는 걸 모를 만큼 그는 어리지 않았다.

그도 종종 경험했다시피 천마는 뒤끝이 긴 사람이다. 게다가 한번 틀어지면 그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대단히 고생을 해야 한다. 뻔히 알면서도 누가 그런 화약고를 건드리겠는가.

문평은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삼키며 천마를 달래려 들었다.

“교주님.”

“남의 시선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이냐? 어차피 너나 내 앞에선 아무 소리도 못 할 것들이다. 너는 그저 나에게만 집중하면 된다. 다른 것 따윈 돌아볼 필요도 없다.”

천마는 손을 뻗어 문평의 뺨을 감싸 쥐었다. 문평은 서로의 속눈썹까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닿은 천마에게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깃털같이 긴 천마의 속눈썹이 문평의 속눈썹을 간질였다. 나비가 입맞춤을 하는 것처럼 간질간질했다.

“내가 과시욕이 많은 남자라는 걸 모르지 않겠지. 나에 대해 모르고 나를 선택한 것은 아닐 테니까. 나는 자랑할 것이 있으면 자랑을 하는 인간이다. 겸손 따윈 취급도 하지 않는다. 너는 내가 평생을 거쳐 얻은 것 중 가장 값진 보물이고, 나는 이 보물을 기꺼이 자랑할 거다.”

“저를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주님뿐이십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저는 구슬이 아니라 자갈입니다.”

“자갈이라도 내 자갈이고, 잡초라도 내 잡초지. 내 것을 내가 아끼겠다는데 누가 토를 달겠느냐. 그런 놈이 있으면 내 앞으로 데리고 오거라. 내가 그놈에게 분수라는 것을 가르쳐 주마.”

천마는 빙그레 웃으며 문평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촉, 촉, 촉. 속눈썹만큼이나 달콤한 간질거림이 목덜미로 퍼져 나갔다. 물색없다고 느끼면서도 문평은 웃고 말았다.

이 사람은 진짜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거침이 없었다. 보통 사내라면 낯이 붉어져서라도 하지 못할 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히 해대니,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문평으로서는 정말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나뿐인 정인이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태연히 사랑을 속삭이곤 하니, 난처하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문평은 천마의 목에 자신의 손을 둘렀다. 그는 천마처럼 뻔뻔하진 않아서 말로 사랑을 전하지는 못한다. 그 대신 그는 몸으로 속마음을 표현했다. 문평은 천마의 입술 위에 자기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입술을 벌려 천마의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사양하지 않고 마주 감아 오는 천마 덕분에 다정하던 애정 표현이 농염한 전희가 되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은 방 안에 질척하게 달아오른 입맞춤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을 감고 서로에게 몰두한 두 사람은, 달콤하기 짝이 없는 감각을 탐닉하기 위해 서로의 몸을 어루만졌다.

천마의 섬세한 손길이 문평의 옷자락을 풀어헤쳤다. 천마의 무릎에 올라앉은 채로 반 나신이 된 문평은 자연스러운 태도로 흘러내리는 옷가지를 벗었다.

빛나는 오후의 햇살 아래 벌거벗은 문평의 상체가 드러났다. 허리춤도 온통 풀어 헤쳐졌고 다리 사이에는 벌써부터 성기가 곤두서 있었다. 천마도 옷차림이 흐트러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슴께가 완전히 드러난 천마는 불룩하게 일어선 앞섶을 문평의 사타구니에 문지르며 금속성이 섞인 신음을 흘렸다.

“이곳에서 해도 괜찮으냐? 아니면 침상으로 갈까?”

그는 문평의 귓불을 자근자근 씹으며 은근하게 물었다. 말로는 침상으로 가자고 하지만, 조급하게 다리 사이를 문질러오는 천마의 그것은 벌써부터 정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아랫도리를 감싼 바지가 천마의 탁액으로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문평은 깊이 헐떡거렸다. 자신이 천마의 위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이 먼저 정사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그를 평소보다 도발적으로 만들었다.

“아니요. 여기에서 해도 괜찮습니다. 해 주세요, 교주님.”

문평은 붉은 입술을 열어 아랫입술을 핥으며 요염하게 속삭였다. 물론 요염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천마의 시각이고, 문평은 그저 목이 말라서 그런 거였다. 천마는 손을 내려 문평의 허리춤을 잡아 내리며, 그의 입술에 길게 자신의 입술을 묻었다.

문평의 회음부에서 천마의 거대한 물건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뜨겁게 고동치는 그것이 연약한 피부에 와 닿자, 다리 사이에 심장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마는 울퉁불퉁하게 핏줄이 튀어나온 부분으로 문평을 문질러 댔다. 약하디약한 피부를 거칠게 희롱당한 문평이 깊은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공중에 띄웠다.

“교, 교주님.”

“운강이라고 불러라. 잠자리에서는 그렇게 불러도 된다. 아니 너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다.”

천마는 문평의 귓속으로 달콤한 밀어를 속삭였다. 그의 손가락이 문평의 비부 속으로 향했다.

툭하면 드나들곤 하는 그것에 이제는 적응이 되었는지 문평의 비부는 놀라지도 않고 그 손가락을 물었다. 흥분으로 인해 수축을 반복하는 문평의 구멍은 음란하기 짝이 없는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기대감에 달뜬 허리가 벌써부터 떨렸다.

자신이 너무 밝히는 것만 같아 면구스러워진 문평은 천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나지막하게 웃으며 문평의 귓전에 입을 맞춘 천마는 그의 속으로 손가락을 더욱 깊게 밀어 넣었다.

“하악. 하악. 학.”

기교가 가득한 손놀림에 몸이 달아올랐다. 그저 근육을 푸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애무요 전희이다 보니 성희는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다. 처음부터 흥분이 고조되어 있었던 만큼 문평이 보이는 반응은 드물게 솔직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점차 음란함을 더해 가자,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천마의 목덜미에 코를 비벼대던 문평이 더는 참지 못하고 그 목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이 끝에 닿아오는 천마의 감촉은 그야말로 천상의 것이다. 감촉은 부드러우면서 맛은 달았고, 근육에는 탄력이 넘쳤다. 이를 박을 때마다 느껴지는 단단한 반탄력은 살아 있는 사냥감의 목을 깨문 듯한 쾌감까지 느끼게 했다. 보드랍고 연약한 여자의 몸과는 달리 남자의 몸은 깨무는 재미가 남달랐다. 그 몸의 주인이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는 남자라 심리적인 쾌감이 더욱 큰 건지도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천마를 이렇게 깨물어 댈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일 터였다. 세상에 누가 감히 천마의 몸에 이를 댈 수 있겠는가?

천마는 문평이 모처럼 적극적인 이 상황을 그야말로 마음껏 활용했다. 그는 문평의 엉덩이를 크게 벌리고, 그가 힘들지 않을 정도로 조절을 해가며 자신의 몸을 밀어 넣었다.

그의 허벅지 위에 마주 앉은 자세로 천마의 몸을 받아들이게 된 문평은 허리를 둥글게 젖히며 깊은 신음을 삼켰다. 한껏 달아오른 몸에 장작불이 지펴졌다. 정성스레 준비된 몸은 천마가 주는 쾌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문평은 좀 더 깊이 상대를 끌어들이기 위해 허리를 움직였다.

“조급하긴. 아직 다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천마는 성급한 문평의 허리를 잡아 그를 고정시키고 다시 한번 문평의 몸속으로 성기를 들이밀었다. 두 번에 걸친 전진으로 인해 비어 있던 안쪽이 그득해졌다. 내장 구석구석까지 천마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아흣!”

문평은 저도 모르게 비음을 흘리며 얕게 숨을 헐떡였다. 잔인할 정도로 격렬한 쾌감이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자신의 체중이 아래로 향하고 있기에, 내벽으로 향하는 압력은 더욱 거셌다. 몸 전체의 감각이 오로지 뱃속의 물건에만 쏠리고 있었다. 내벽 속에 존재하는 자극점이 천마에 의해 자극당했다. 거대하고 묵직한 물건이 그곳을 제멋대로 찔러 대며 문평의 신체를 조종한다. 천마가 찔러 올릴 때마다 문평은 헝겊 인형처럼 튕겨 올라갔다. 발끝까지 치닫는 감각이 그의 전신을 휘감는다.

조일 듯 물어오는 문평의 안은 몹시도 뜨겁고 감미로웠다. 천마는 그 따뜻한 극락을 마음껏 음미하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지할 곳이 없어 천마의 목을 끌어안은 문평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내며 그에게 달라붙어 왔다.

오늘의 문평은 특별히 난잡하고 매혹적이었다. 숨기지도 않고 내뱉는 교성은 천마의 귀를 즐겁게 했고, 적극적으로 감겨오는 그의 몸은 이제껏 주었던 그 어떤 쾌락보다 더한 쾌락을 안겨 주었다.

천마는 문평의 움직임에 맞춰 그의 몸속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자세의 한계 때문에 깊게 드나들 순 없었지만, 그런 만큼 둔중하게 치고 올라가는 힘만큼은 비교할 수도 없이 거셌다.

“아흣. 아흐흑. 아흣.”

문평은 거의 울듯이 신음하며 천마와 동작을 맞췄다. 천마의 호흡도 그에 맞춰 가파르게 솟아올랐다. 한낮의 정사는 무릇 느긋함으로 대변되지만, 그들은 서로의 쾌락을 좇는 일에 조급해 느긋함 따윈 찾아볼 여유가 없었다.

점점 더 깊이 문평에게 파고들었던 천마의 성기가 마침내 파정의 순간을 맞았다. 문평은 뱃속 깊숙이에서 느껴지는 용틀임을 느끼며 동시에 파정했다. 탁한 유백색의 액체가 벌거벗은 두 사람의 배 위로 치솟았다. 바깥에도 안쪽에도 정액으로 흠뻑 젖어 버린 문평은 부르르 몸을 떨며 남은 쾌감의 여운을 즐겼다.

“오늘따라 감도가 유달리 좋구나.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힘없이 벌어진 문평의 입술을 이 끝으로 지분거리며 천마가 기분 좋은 듯 눈꼬리를 휘었다.

만지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천마는 정사가 끝난 이 순간에까지 문평의 몸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순식간에 몰아닥친 쾌감에 방심 상태가 된 문평은 멍한 시선으로 천마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도 방금 전의 자신이 유달리 밝혔다는 것은 모르지 않았지만, 아직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부끄러움을 느끼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니요. 기분 좋은 일 같은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까만 해도 편두통까지 있었는데요.”

“그래? 편두통이 있었어? 하면 지금은 어떠냐? 지금도 계속 안 좋으냐?”

유난히도 감도가 좋아서 몸의 상태도 괜찮은 줄 알았던 천마는, 편두통이 있었다는 문평의 고백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안색을 확인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정말 나 편두통이 있었는데? 그게 지금 어디로 간 거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았던 문평은, 어느 사이엔가 말끔히 사라져 버린 통증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그런 게 있기라도 했냐는 듯, 지독한 고통은커녕 약간의 지끈거림조차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괜찮은 것 같은데요. 다 나았나 봅니다.”

“편두통이 다 나았다고? 그건 꽤나 질긴 물건인데.”

신경이 예민한 포영의는 편두통을 달고 산다. 그로 인해 편두통이라는 병이 어떤 증상을 지니는지 잘 알고 있는 천마는 문평의 말을 선뜻 믿지 못했다.

“그러게요. 보통 한번 편두통이 생기면 한나절은 가곤 했는데요. 웬일로 싹 나았네요. 지금은 아무런 통증도 없습니다.”

천마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상태에 의문이 있는 문평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신의 이마를 만져 보았다. 약간의 잔통마저 남아 있지 않으니 오히려 이게 더 수상쩍었다.

“아마도 편두통엔 정사가 특효약이었던 모양이구나. 정사 한 번에 편두통이 사라지다니, 이야말로 만병통치약이 아니냐. 다른 데는 어디 아픈 곳이 없느냐? 내가 이번에도 고쳐주마.”

문평의 반응으로 인해, 그에게서 진짜로 두통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천마가 짓궂게 그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일로 놀림을 당한 문평은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어떻게든 천마의 놀림을 피하려고 했지만, 한번 흥이 오른 천마의 기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사양할 필요 없다. 의술을 행하는 일인데 뭐가 부끄럽단 말이냐. 또 어디가 아프냐? 그러고 보니 예전에 허리가 약하다고 했지? 이번에는 그걸 고쳐줄까?”

예전에 내 허리가 아팠던 건 전적으로 당신이 무리를 시켰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내가 심장병에 걸리면 모두 당신 탓이라니까요!

문평은 어이가 없어 소리라도 버럭 지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천마는 엄청나게 끈질겼고, 문평의 말솜씨로는 그놈의 입을 도무지 닥치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문평은 다시 한번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두 손으로 그 목을 꽉 끌어안은 후 끊임없이 놀려대는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묻어 버린 것이다. 그 행위는 두 번째 정사로 곧바로 이어지고 말았지만 문평은 자신이 한 일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두 번째 정사에 몰두하는 바람에, 천마가 이제껏 놀리고 있었던 것을 까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문평은 그것으로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승리는 순간일 뿐이었다. 천마는 두 번째 정사를 즐긴 후에도 그 사실을 가지고 놀렸고, 세 번째 정사를 가진 후에도 마찬가지의 행동으로 문평을 도발했다. 네 번째로 몸을 섞은 후에야 문평은 자신이 이제껏 천마에게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언제나 번번이 이랬다. 아무리 용을 쓰고 뛰어 봐도 도무지 천마를 이겨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천마가 여전히 천하제일인인지도 몰랐다. 세상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자는, 아직 수련이 부족했다.

〈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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