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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장 (24/26)

종 장

철수하는 마교를 따라 얼떨결에 마교로 돌아왔던 문평은, 뇌정전에 틀어박혀 며칠 밤낮을 두문불출했다. 하늘이 부끄럽고 세상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내가 미쳤지.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장촌에서의 일은 더욱 또렷이 되살아나 문평을 미치게 만들었다. 문평은 그날의 그 광경을, 마영과 마중사기뿐만이 아니라 수천 명의 무림인이 동시에 지켜봤다는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그 자리에는 단순히 마교인들만 있던 게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정파와 사파의 고수들은 물론이고, 개방의 거지들까지 한자리에 있었다. 그들 모두가 천마와 문평의 관계를 알게 되었으니, 이제 문평은 자기 자신의 이름보다는 천마의 남첩이라는 지위로 더 유명해질 터였다.

물론 그게 사실이긴 했으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사정을 만천하에 자랑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그들의 내밀한 속사정 따위는 남들이 모르면 모를수록 더 좋은 일인데 말이다.

‘아 정말 미치겠네. 나도 역용술이라도 배워둘까? 앞으로 강호에 나갈 일이 생기면 얼굴을 숨기고 다녀야 할 것 아니야? 이 얼굴을 들고 어떻게 뻔뻔하게 강호에 나가지?’

강호뿐만이 아니라 실은 교내를 돌아다니는 것도 문제였다. 안 그래도 남달기 소리를 듣는데, 그런 광경까지 보였으니 앞으로 또 얼마나 험한 소문이 나돌까? 남이 하는 말에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닌데도 벌써부터 가슴이 벌렁거렸다. 심장이 너무 거세게 뛰어서 도무지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는 천마의 넓디넓은 침상 위에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 누에고치처럼 그 안에 틀어박혔다. 다행히도 교로 돌아온 후 천마는 뭐가 그리 바쁜지 몇 날 며칠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밤에도 침전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예 잠조차 집무실에서 자는 모양이었다.

‘이 상태로 그 사람을 만나봤자 되지도 않는 투정만 부리겠지. 쓸데없이 어리광만 늘어가지고.’

문평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기대고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처럼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동안 천마와 마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겼다.

어린애처럼 일방적으로 천마에게 매달리게 되는 것은 그가 바라는 일이 절대로 아니다. 난생처음으로 의지할 사람이 생긴 것은 기쁘지만, 혼자 서는 버릇을 아예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천마의 그늘에 안주해 응석이나 부리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천마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기 때문에, 더욱더 스스로 서고자 하는 욕심이 생겼다.

‘내일부턴 다시 마보부터 시작해야지.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잖아. 그 사람도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하지 않았어. 우선은 초절정.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 사람과 똑같아지라는 법은 없어도, 최소한 그의 발목은 잡지 말아야 할 것 아니야.’

지나치게 잘난 애인 때문에 스스로의 못남을 똑똑히 바라보게 된 문평은 베개에 머리를 박고 꿍얼꿍얼 다짐했다.

무사안일이 평생의 소원이었어도, 천마 같은 사람을 마음에 담은 이상 그도 달라져야만 한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천마의 곁에서 버틸 수 없음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지나친 차이가 줄어들지 않으면 그 사람도 언젠가는 자신에게 질릴지도 모른다.

천마는 그 나이가 되어서도 학구열이 높고, 언제나 진취적인 사람이었다. 천마는 더 나아질 거라는 욕심이 없는 사람을 관용할 정도로 너그러운 성품이 아니었다. 문평은 그런 천마에게 모자란 상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자신의 마음을 인정한 이상 그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마영님. 저 란란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들이 교로 돌아온 이후 문평의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뇌정전의 시비 란란이다. 어쩐 일인지 예화 없이 홀로 뇌정전에 남은 그녀는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예전과는 비할 수도 없는 사근사근함으로 문평을 대했다.

그가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내상에 좋은 탕약을 달여 끼니때마다 들여올 뿐만 아니라, 옷가지도 최상의 것만 내주고 잠자리도 정성껏 돌보았다.

문평은 의도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확 바뀐 란란의 친절이 부담스러웠으나, 그는 예나 지금이나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약했다.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도 란란이 은근하게 자신의 의사를 밀어붙이면 사양하지 못하고 그녀의 시중을 그대로 받고 마는 것이다.

“들어오세요.”

말을 놓는 데 익숙하지 않은 문평은 존댓말로 그녀에게 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가씨가 들어오는데 누운 채로 맞이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이불 밖으로 기어 나와 침상에 올라앉으며 손가락으로 까치집이 된 머리를 빗었다. 품에 보따리 하나를 안고 들어오던 란란이 그 모습을 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주무시고 계셨나 보군요. 방해한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누워 있었습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한데 무슨 일입니까?”

며칠씩이나 하는 일 없이 방구석에서 뒹굴고 있던 인간에게 방해는 무슨. 면구스러워진 문평은 볼을 긁적이며 란란에게 물었다. 란란은 품에 안고 있던 보따리를 그의 침상 곁에 내려놓으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천마께서 마영님을 부르고 계십니다. 속히 환인전桓因殿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공식적으로 문평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지위는 마영 43호다. 문평을 존칭으로 부르기는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딱히 걸맞은 칭호는 없고. 내심 곤란했던 모양인지 열심히 궁리하던 란란은 며칠 전부터 문평을 마영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낯간지럽고 어색한 칭호이나 틀린 말은 아니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환인전이라구요? 저를 그곳으로 부르신단 말입니까?”

환인전은 마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사청으로, 주로 마교의 장로들과 교주가 모여 교의 중요한 사안을 논의할 때 사용하는 장소이다. 자금성으로 비유하자면 태화전太和殿쯤 되는 셈인데, 그런 장소에 자신을 부른다니 문평으로서는 천마의 의도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일로 부르시는지는 모르시지요?”

“예.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긴. 란란이나 자신이나 말단에 불과한 것은 마찬가진데 그녀가 천마의 속내를 알 리 없다.

침상에서 일어난 문평은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으며 동경을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란란이 한숨을 푹 쉬더니, 가지고 왔던 보따리를 풀며 중얼거렸다.

“환인전으로 가실 때 그런 모습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제가 의복을 준비해 왔으니 갈아입고 움직이세요. 빗질도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란란의 태도로 그 자리가 생각보다 격식이 있는 자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문평은 살짝 긴장했다.

‘어라? 그렇게 어려운 자리인가? 환인전에 그 사람 혼자만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보지?’

그러고 보니 마교에서 10년 가까이 살아왔지만 환인전으로 불려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외전의 하급 무사들로서는 어마어마한 승진을 하거나 끔찍한 대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거기까지 올라갈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문평은 란란이 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자기 손으로 머리를 빗어 몸가짐을 단정히 했다. 그리고 그녀의 안내에 따라 환인전으로 향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앞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닥칠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마영단 소속 43호 마영. 석문평이 태상교주님을 위시한 윗전들을 뵙습니다.”

말로만 듣던 환인전은 과연 으리으리했다. 성인 남자가 두 팔로 껴안아도 모자랄 정도의 거대한 기둥이 양옆으로 무려 열 개나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높이는 족히 사오 장은 되어 보였고, 기둥 사이의 간격이 무려 이 장이나 되니 전체적인 대전의 크기를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하기보단 위압감을 강조한 단청이 천장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얼핏 보기엔 탱화같이도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푸른빛 뇌전을 든 제석천과 아수라와의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었다.

검게 칠한 회벽에 우아한 비단천이 걸려 있었다. 청석을 다듬어 깐 회색 바닥은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들반들하게 윤이 났다. 천마는 그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정면의 가장 높은 태사의에 홀로 앉았다.

마치 천자의 정전이 그러하듯이 몇 개의 단으로 구성된 상석은 정점에 앉은 천마를 중심으로 한 계단씩 내려가고 있었는데, 마중사기와 마교의 원로들은 각기 자신들의 격에 맞는 계단 위에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엄격한 위계질서에서 우러나오는 장중한 위엄은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사람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는 그들의 시선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염라대왕과 생사판관의 그것과 유사했다.

단의 가장 아래에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렸던 문평은 그들의 면면을 보고 기가 질리는 것을 느꼈다.

그저 어려운 자리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공식적인 회합이다. 천마와 마중사기뿐만 아니라, 외부에는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는 원로들까지 모두 한자리에 나와 있었다.

대전의 양 끝으로 늘어선 자들은 내외전의 무력대를 담당하고 있는 고수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바늘 하나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엄숙한 분위기로 그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문평은 그들이 왜 이렇게 자신만 주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애초에 자신이 이곳에 불려 온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가시방석도 이런 가시방석이 없다. 따끔따끔한 시선들 때문에 얼굴 껍질이 벗겨질 것만 같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문평은 흘끔 눈을 들어 천마의 안색을 훔쳐보았다. 그러나 고작 눈꺼풀을 위로 치켜올리는 정도로는 까마득히 윗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천마의 턱조차도 볼 수 없었다. 문평이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시선보다도 높이 올라와 있는 낯익은 혁리화와 여전히 고급스러운 천마의 비단 옷자락이 전부였다.

“마영 43호는 들어라.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그대를 부른 것은, 그대가 공식적으로 답변해야 할 사안이 있기 때문이다. 허튼수작은 용서하지 않을 테니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답하라. 알겠느냐?”

그를 부른 것은 분명 천마라고 들었는데, 천마는 그가 환인전에 들어오고 난 다음에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포영의의 주도로 시작된 하문은 공식적인 답변을 묻는 게 아니라 숫제 죄인을 심문하는 것인 양 엄중했다.

‘이건 대체 뭐지?’

싸늘하다 못해 살벌하게 굳어 버린 대전 안의 분위기를 느낀 문평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이쯤 되면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네. 하문하십시오.”

딱히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없었지만, 사람이라는 게 원래 추궁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불안해지는 법이다. 하물며 지금처럼 질문하는 상대의 분위기가 불온하다면, 대답하는 사람은 지은 죄가 없어도 지레 가슴을 졸이게 된다.

“너는 몇 달 전, 불련산의 수로로 빨려 들어갔다가 천마비고에 도달한 일이 있지?”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포영의가 혼자 질문을 던졌다. 무슨 질문을 하려는 걸까 마음을 졸였던 문평은 냉큼 고개를 숙이며 그 말에 긍정했다.

“예. 그렇습니다.”

“거기에서 자네가 전대 천마이신 적백문 님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대 천마님의 시신을 발견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태상교주님이십니다.”

말이야 바로 하랬다고, 천마비고의 비밀을 푼 사람도 적백문의 시신을 발견한 사람도 모두 천마다. 그는 그저 천마의 뒤를 쭐레쭐레 따라다니기만 했기 때문에 공을 내세울 처지도 아니었다.

솔직하기 짝이 없는 그의 대답에 포영의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다른 사람들 역시도 해부라도 하려는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되어 그를 지켜보았다.

“……전대 천마님의 시신을 발견하고 나서, 자네는 무엇을 했나?”

“태상교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태상교주님이 자네에게 뭘 시키셨지?”

“전대 천마님의 천마지공인 천뢰신공을 수습하고, 그분이 남기신 내단을 섭취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그대로 따랐는가?”

“……네. 그렇습니다.”

그의 대답이 끝나자 대전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어디까지나 천마가 시켜서 한 일이고, 본인이 먼저 욕심을 냈던 것은 아니기에 처음에는 자신 있게 대답했던 문평이지만 대답을 거듭할수록 이게 왠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대답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대전 안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져만 갔다.

숨소리도 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환인전은 물속처럼 적요했다. 이게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문평은 바보가 아니었다. 갑갑하게도, 믿고 있던 천마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한마디 언급도 없이 잠잠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 지금, 큰일 나게 된 거 맞죠?’

문평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것을 느끼며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하나 천마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무심한 표정으로 포영의의 추국을 지켜보기만 했다. 지금 문평이 겪고 있는 일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무연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래서. 자네는 지금 마교의 조사지공인 천뢰신공을 익히고 있단 말이군?”

“그렇습니다.”

“……조사께 구배의 예는 다 했는가?”

“예. 구배지례를 마쳤습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한 말을 증명해 보일 수 있겠는가? 천뢰신공을 익혔다면 뇌기를 뽑아내는 방법도 알겠지. 천뢰신공을 운용해 내기를 보여 주게. 우리에겐 아주 중요한 일일세.”

어느 순간부터인가 하대이던 포영의의 말이 반 존대가 됐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눈치챌 만큼 예민하지 못한 문평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이게 해가 될 줄 알았어야 했는데. 약한 자는 보물을 가진 것만으로도 죄인이 될 수도 있어. 내가 왜 그런 당연한 사실을 잊었을까? 저 사람을 너무 믿었나?’

정확히 말하면 아예 잊었던 건 아니지만, 옆에 천마가 있었기에 그런 점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기연이었기에 정말 먹어도 되는 건가, 몇 번이나 물어보기까지 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나름 신중을 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겠는가? 보증을 서 준 천마가 등을 돌리면 끝장인 것을. 천마가 자신을 진짜로 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여태껏 편을 들어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야속했던 문평은 내심 그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까라면 까야 하는 게 아랫것의 비애다. 포영의가 직접 시킨 일인데 못 한다고 뻗댈 수 없었던 문평은 불안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천뢰신공을 운용했다.

환인전에 도를 차고 올 수는 없었기에 그는 맨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맨주먹 위에 푸른 뇌전을 실었다. 아직 기세가 미약해 정전기 수준을 간신히 넘기긴 했으나, 어쨌거나 뇌전으로 보이기는 하는 기운이 그의 주먹 위에 넘실거렸다.

갈지자로 흩어지는 뇌전의 기운을 모아 앞으로 쏘아내자, 푸른 번개가 매끈한 청석의 바닥을 뚫고 들어간다. 약한 기운이라도 뇌기는 뇌기인지라 뇌전이 부딪친 장소가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전대 천마의 내단까지 먹었지만 겨우 이 정도입니다.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

문평은 헛바람을 삼키는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확실하군요. 천뢰신공에 대해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천뢰신공의 뇌전은 푸른빛을 띱니다. 태상교주께서 새로이 정립하신 뇌염마공雷焰魔功이 금빛을 띠는 것과는 상반되게 말입니다. 이는 태상교주께서 새로운 천마지공을 만드실 때 뇌기와 더불어 금기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천하에 뇌기를 이용하는 무공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그중에서도 푸른색의 뇌전을 일으키는 무공은 오로지 하나 천뢰신공뿐입니다.”

문평이 일으킨 뇌기를 관찰한 원로 중의 한 명이 침중한 목소리로 고했다. 그의 말로 인해 문평이 전대 천마의 하나뿐인 전인임이 확실시되자, 대전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침음성을 삼켰다.

이제껏 문평을 시험하는 모양새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천마는, 그들이 마지못하게나마 문평을 인정하는 기색을 보고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았더냐. 저 아인 전대 천마의 후인이라고. 비록 교위를 계승하지는 못하였으나, 따지고 보면 저쪽이 오히려 적통이지. 그러니 앞으로는 저 아이를 나와 동등하게 대하라. 이제부터 감히 저 아이를 무시하는 자가 있다면, 아니지. 이제부터 감히 저 사람을 무시하는 자가 있다면 천마의 이름으로 내가 좌시하지 않겠다.”

천마는 우아하게 웃으며 문평의 위치를 순식간에 격상시켰다. 마중사기는 물론이고 원로들까지도 그 말을 듣자 숨이 턱 하니 막혀왔다.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것은 예전에 한 번 호되게 당했던 곽진무밖에 없었던 듯,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새파랗게 낯이 질린 채 눈을 내리깔고 부들부들 떨었다.

‘거짓부렁 하지 마십시오! 댁이 언제부터 전통을 따졌다고 그러십니까?!’

마교 적통의 무공이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에 기함한 원로들은 뒷목을 잡고 그대로 쓰러지고 싶은 기분으로 내심 절규했다.

‘정말 전통을 중요시했다면 저런 녀석에게 날름 먹이는 게 아니라 교로 들고 돌아왔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대 천마의 내단이 어디 보통 물건입니까? 천뢰신공이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삼재검법인가요? 그건 천마지공에 조사지공이었습니다! 그걸 누구 마음대로 애첩에게 주십니까! 조사지공이 무슨 옥비녀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마음먹은 대로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따지고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만 굴뚝같았지, 실제로 그렇게 따지고 드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들 깊이 침묵했다. 감히 천마의 면전에 대고 이치를 따지고 들 정도로 간담이 큰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천마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게다가 그들 중 그 누구도 말년에 어린 애첩에게 홀딱 빠져 속곳마저 벗어주고 있는 남자를 말릴 재간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에 눈이 먼 남자다. 저 사내를 얼마나 귀애하면 전대 천마의 내단에 천마지공까지 퍼준 것도 모자라, 자기와 똑같은 위치에 올려 두고 홀대하면 혼날 줄 알라고 눈을 부라리겠는가?

섣불리 토라도 달았다간 능지처참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원로들은 재빨리 알아차렸다. 저 뒤끝 많은 양반에게 꼬투리를 잡힌다는 건 죽어도 곱게 죽고 싶지 않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늙어 죽을 날을 받아 놨어도 자신의 목숨은 소중한 법. 그들 중 누구도 천마의 원한을 사는 어리석은 짓거리로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단축시키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이제 저 보잘것없는 남첩 놈, 아니 남첩님은 졸지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신분이 되었다. 단순히 애첩의 신분이 아니라 마교 적통의 후예가 되었으니 현 마교의 교주인 호완평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귀한 몸이시다.

천마가 애초에 이러한 것을 노리고 문평에게 내단을 먹였다는 사실을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두 눈치채고 있었다. 용의주도한 천마가 설마 아무런 계획 없이 그런 큰일을 저질렀겠는가? 세상이 두 쪽이 나면 났지 천마가 그럴 리는 없었다.

‘어?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위기가 왠지 이상한데.’

대전 안에 있는 사람 중 가장 눈치가 느린 사람은 순식간에 신분이 상승한 당사자 본인이었다. 그가 홀로 각오했던 바와는 달리, 천뢰신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분위기는 급변했다. 다른 사람들은 일제히 어깨를 늘어트렸고 천마 혼자 즐거워하고 있었다.

까딱까딱,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늘어트려 문평을 불러올리며 천마는 빙그레 웃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얼떨떨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문평이 고개를 갸웃하며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천마는 다시 손을 까딱여 그를 불렀다.

‘올라와.’

천마는 눈빛으로 문평을 종용했다.

‘거기 바닥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이리 올라오라고.’

주저하던 문평은 그의 재촉을 받고 단상 위로 올랐다. 그가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사람들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진실로 그를 천마와 동등하게 대하는 것처럼 공손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차례차례 다가오는 인사를 받으며 단상 위로 걸어 올라가는 기분은 참으로 오묘했다. 무서울 정도로 정중한 그 인사는, 심지어 곽진무와 포영의에게도 이어졌다. 다만 교주 신분인 호완평만은 절 대신 묵례를 했는데, 그러한 태도까지도 몹시 예를 다한 것이라 문평은 어색하기 그지없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쭈뼛거리며 그에게 마주 묵례를 되돌려준 문평은 천마의 발치에까지 도달했다.

천마는 마음 같아선 문평을 무릎에 앉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저놈은 또 울고불고 난리가 날 게 뻔해서 간질간질하게 치미는 욕망을 꾹 눌러 참았다.

‘이왕 체면을 세워 준 거 확실하게 세워 주지.’

모처럼 너그러운 마음을 먹은 천마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부름에 마영이 재빨리 그림자 속에서 뛰쳐나왔다. 천마는 흐뭇한 시선으로 문평을 내려다보며 마영에게 말했다.

“이 사람이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내오너라. 가져올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내와야 한다.”

“존명!”

절대자의 근처에서 시중을 들려면 눈치가 빨라야 한다. 천마에게 문평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지 않았기에, 그는 재빨리 뛰어가서 자기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의자를 찾아왔다.

천마는 자신의 태사의 곁에 그 의자를 놓아두게 하고 문평을 억지로 앉혔다. 바닥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신분에서 수직 상승해 천마의 옆자리에까지 오른 문평은 붉어지는 낯빛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꼭 이렇게까지 티를 내야 하는 건가 이 사람은? 누가 이런 걸 바랐다고?!’

말이 마교의 적통이지 이건 완전히 혼인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 생각 없이 불려 나왔다가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마음의 준비 따윈 하나도 못 했기 때문에 문평의 속내는 더욱 어지러웠다. 눈앞이 깜깜하고 손발이 떨리는 게 잘못하면 뇌졸중이라도 올 것 같았다. 그가 젊은 나이에 심장 마비로 죽는다면 이건 다 천마 때문이다. 저 사람은 사람을 놀래는 일을 지나치게 좋아했다.

“그리고 앞서 일과는 상관없는 문제지만, 이번 일을 처결하는 동안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그도 회의에 부치고자 한다. 이번이 내가 환인회의에 동석하는 마지막 자리가 될 것이기에 꼭 짚고 넘어가려고 하는데, 교주의 생각은 어떠신가?”

비록 태상교주라는 존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교 제일의 권력자는 어디까지나 교주여야 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천마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자신의 제자를 향해 존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질문을 들은 호완평이 머리를 숙였다. 사부의 열렬한 숭배자인 그가 천마의 뜻을 거스를 리 없었다. 물어보나 마나 대답은 긍정이다.

“예, 뜻대로 하십시오. 태상교주님. 태상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천마보다 한 단 아래에 앉아 공손하게 머리를 숙인 호완평은 전적으로 그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천마는 호완평의 바로 아래 계단에 서 있는 포영의를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천마의 시선을 받아야 했던 포영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추밀각의 각주이자 군사인 포영의는 앞으로 나서라. 내 그대에게 친히 추궁할 일이 있다.”

포영의는 예상치 못한 일에 다소 놀란 눈치였으나 아무 말 없이 앞으로 나섰다. 맨바닥에 꿇어앉아야 했던 문평과 포영의는 애초에 처지가 다르다. 그는 자신이 원래 서 있어야 하는 단보다 한 단 아래로 내려선 채 천마와 마주하고 서서 깊게 허리를 숙였다.

“하문하십시오. 태상교주님.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그가 깊게 머리를 숙이자 희고 단정한 목덜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마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런 포영의를 내려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몇 달 전, 강호에 마영을 내보내면서 고를 사용한 일이 있지?”

천마의 질문을 들은 포영의는 잠시 멈칫했다가 깊이 머리를 숙였다. 천마의 말을 들은 호완평은 놀란 시선으로 포영의를 돌아보았다.

“그렇습니다.”

“어째서 수하에게 함부로 고를 사용했는가?”

“……이번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교를 떠나고 싶다고 말했던 수하였습니다. 중요한 임무를 그런 자에게 함부로 맡길 수 없었기에, 예비책을 마련해 두고 싶었습니다.”

공식적으로 말해 그 ‘수하’가 누구인지에 대한 언급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몇 달 전 강호에 나간 마영이라는 말만 들어도 상대가 누군지 추론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달아올랐던 문평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하지만 천마는 뻔뻔스럽게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포영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고를 사용했나? 수하의 의지와 목숨을 네 손안에 종속시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하책 중의 하책을 사용했구나. 전부터 알고 있던 바이지만 너는 머리는 똑똑한데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모른다. 말 안 듣는 수하를 다루는 방법이 고작해야 공포를 이용하는 것이더냐? 그런 방법을 사용하다 보면 공포가 없이는 수하를 다룰 수 없게 돼 버린다. 그에 더해 너보다 더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상대에게는 수하에 대한 통제력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는 단점도 생기지. 그러니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자가 천하에 드문 것이다. 기껏해야 곽효와 나 정도가 고작이지.

그나마 곽효는 화경에라도 이르렀다지만, 넌 고작 초절정인 주제에 뭘 믿고 그렇게 담대한 짓을 저지른 게냐? 반감을 품은 수하가 배반이라도 한다면 제일 먼저 위험해지는 것은 너 자신이라는 사실을 정녕 몰랐더란 말이냐?”

“교주님.”

“내가 무슨 유가 선비도 아닌데, 덕으로 다스리라는 헛소리 따위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실 나는 네가 수하를 어떻게 다루든 그 뒤처리만 책임질 수 있다면 아무런 상관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야. 하지만 너는 그게 아니지. 위험한 불장난을 하고 있구나. 믿는 것은 머리밖에 없으니 기책을 일삼고, 사람을 믿을 줄 모르니 술수를 부리는 거다. 자신의 능력을 모르고 함부로 처신하는 너 때문에 교주뿐만이 아니라 교 전체가 위험에 처한다면 어쩔 생각이냐?”

천마는 강한 어조로 포영의를 질책했다. 포영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달라졌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다 못해 새파랗게 가라앉는다.

그는 천마가 단순히 문평의 보복만을 위해 이런 질책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정말로, ‘문평’이 아니라 ‘수하’에게 고를 사용한 그에게 화를 내는 거였다.

천마의 분위기가 보기 드물게 진지하고 엄숙했다. 지금의 천마는 모처럼 한 단체의 수장다운 위엄을 보여 주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 화를 불러일으킬 뻔한 포영의에게 명을 내린다. 지금부터 포영의는 일시적으로 단전을 폐하고 반년 동안 폐관 수련한다. 그동안 그는 교내의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외부와의 교류를 일절 차단한다.”

“태상, 그건 너무 과한 판결이 아닙니까? 군사의 체면도 있는데 어떻게 그토록 심한 중벌을 내리십니까?”

천마의 말이라면 무조건 긍정부터 하고 보는 호완평이지만, 이번 일만큼은 그냥 넘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어려워하면서도 천마의 앞에서 포영의를 두둔했다.

포영의가 잘못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단전을 폐하고 6개월이나 가둔다는 것은 심해도 너무 심한 처사다. 말이 폐관 수련이지 단전을 폐한 자가 무슨 무공을 수련하겠는가? 이는 듣기 좋게 포장한 금옥형이나 다름없었다.

“교주. 일벌백계라는 말이 있소. 이러한 벌은 포영의를 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와주는 일이 될 것이오.”

그러나 천마는 호완평의 의지를 무시한 채 강경하게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갔다. 혹여 문평에 대한 보복 조처가 아닌가 하여, 은근슬쩍 원망스러운 기색을 드러내고 있던 호완평이 다급히 물었다.

“태상, 어째서 그렇습니까?”

“군사가 수하에게 고를 사용했소. 교주는 이런 일에 대한 소문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기는 거요? 세상에 비밀이라는 것은 없는 법이지. 이미 수하들에게 군사는 수단을 위해서는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상전으로 낙인찍혔소. 그런 윗전을 어떤 수하가 진심으로 믿고 따를 수 있겠소? 신상필벌이라. 저지른 일에 대한 벌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군사에게는 이번 일에 대한 뒷말이 항상 뒤따르게 될 것이오. 그럴 바에야 확실히 벌을 받고 죄를 씻는 것이 낫소. 교의 장래를 위해서도, 군사 자신을 위해서도 이 방법이 최선이오.”

호완평은 포영의를 더 두둔해 주고 싶었으나 차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가볍게 입술을 깨문 포영의는 천마의 앞으로 나가 머리를 숙였다.

치욕스럽긴 했지만 천마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너무 쉽게 기책을 이용했고, 그로 인해 수하들의 신뢰를 잃었다. 단순한 복수라면 그도 승복하지 못했겠으나 천마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포영의는 담담한 태도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저의 죄를 인정합니다, 태상. 내리신 벌, 달게 받겠습니다.”

“군사…….”

“교주께서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작해야 반년 아닙니까?”

호완평은 걱정스레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데 포영의는 오히려 그린 듯이 밝게 웃었다. 애써 의연한 척을 하나 그 속이 편치 않다는 걸 누가 모를까?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문평의 마음도 그다지 편치만은 않았다. 구구한 사연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포영의가 저런 처벌을 받는 것은 그가 자신에게 고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천마가 명을 내리자 교법당의 집행부가 다가와 포영의를 폐관 수련실로 안내했다. 태상과 교주, 그리고 원로들에게 길게 읍을 해 보인 포영의는 당당한 태도로 집행부를 따라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호완평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제자들 가운데는 가장 사이가 좋은 편이어서 그런지, 그는 멀어지는 포영의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천마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호완평을 보고 속으로 남모르게 웃었다. 그렇겠지. 애가 타겠지. 언제나 제 곁에 딱 붙어 있던 놈을 반년이나 떼놓고 있어야 한다는데 얼마나 낯설겠는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상대에 대한 진심을 보지 못하는 저놈에겐 그 정도의 거리가 딱 알맞았다. 한 놈만 너무 애걸복걸하는 것도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좋지 않다. 이왕 끓을 바에야 두 놈이 같이 끓는 게 훨씬 더 나은 일 아닌가.

안 보는 척하면서 포영의의 속마음과 호완평의 진심까지도 꿰뚫고 있던 천마는 이번 일이 진전없는 두 놈의 관계를 진척시키기에 썩 괜찮은 계기가 될 거라고 여겼다.

포영의를 6개월간 떼어 놓는다면 멍청한 완평이 놈에게 허전함이란 게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줄 수 있을 것이고, 영의에겐 문평에게 했던 짓을 갚아 오랜 원한을 풀 수 있게 되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의 계책이다.

“일단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하고 있던 안건인데. 교주는 어떻소? 더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소?”

“아닙니다. 태상. 태상께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덕분에 산적한 현안을 모조리 풀 수 있었습니다. 이미 교의 공식적인 지위를 떠나신 분께 마지막까지 폐를 끼쳐 죄송했습니다.”

“아니, 뭐 그런 걸 가지고. 유종의 미라고 하지 않았소. 이제 나는 교의 일에 참견할 일이 없을 터이니, 모든 것은 교주의 뜻에 달려 있소.”

천마는 ‘나는 이제 할 일 다 했다. 더는 잡지 마라.’라는 뜻을 아주 확실히 표현했다. 그러나 마음이 반쯤 다른 곳에 가 있는 호완평은 그의 말을 듣고도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쭈, 이놈 봐라? 벌써부터 이 모양이냐?’

천마는 제자를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다른 원로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자유다. 천마의 공포 정치는 끝났다!

겉으로는 기쁜 기색조차 드러내지 못하면서, 눈만 과도하게 반짝거리는 늙은이들을 보니 천마 역시 적잖이 즐거웠다. 저것들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어서 기쁜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는 나쁘고, 추진력도 없고, 하라는 일만 죽어라 파고들면서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것들이었다.

무식하고 고집만 센 돌대가리들. 저놈들을 데리고 마교를 여기까지 이끄느라 천마는 등골이 휘었다. 먹이를 넣어달라고 입만 딱 벌리고 있는 게 자식새끼면 그나마 귀엽기라도 하지, 평생 동안 저 늙은이들의 뒷바라지나 했으니 그의 지난 인생이 무상하고 아까웠다.

“그럼 이만 회의를 마치도록 하지. 오랫동안 수고들 많았소. 앞으로도 새 교주를 보좌하여 마교를 잘 이끌어 나가도록 하시오.”

“예. 태상교주님. 태상교주님의 뜻을 명심 봉행하겠습니다.”

늙은것들이 고함 소리만 우렁찼다. 천마는 속으로 비죽 웃으며 문평을 끌고 단하로 내려갔다. 그의 발걸음 발걸음마다 원로들이 고두를 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아마 바닥에 처박은 저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을 터였다.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모두가 즐거운, 훈훈하다면 훈훈한 천마의 은퇴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질질 끌려왔던 문평은 들어올 땐 마영 43호로 들어갔다가 나올 땐 천마후가 되었다. 하지만 문평 본인은 그 사실을 본인의 몸으로 겪고서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인 게, 일단 천마는 본인의 입으로 문평이 자신의 안사람이라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문평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라’고 명시했으며, 본인의 바로 옆자리에 의자를 두어 앉히기까지 했다. 관례적으로 그런 예우를 받았던 것은 교주의 부인뿐이다. 그러니 문평은 공식적으로는 마교의 적통 대우를 받은 거지만 비공식적으로 천마의 부인 대접을 받은 거였다.

모든 것은 암묵적으로 일어났고 관례를 모르는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래도 한번 그러한 대접을 받은 이상 문평은 천마후였다. 문평 본인은 단지 비유로만 떠올렸는지도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

몇 번이고 말하는 바이지만 천마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천마와 문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뇌정전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환한 햇살이 정수리 위에 내리쬐었다. 문평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곰곰이 따져 보았다.

뭔가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히 정리가 되질 않았다. 바닥에 앉아 있다가 천마의 옆자리까지 올라갔고, 그러다가 포영의가 벌을 받는 걸 지켜봤다. 천마는 속 시원하게 마교주 자리를 털어 버리고 환인전에서 벗어났다. 굵직한 것들만 정리하면 그 정도지만, 각각의 사안이 미칠 여파가 남다르다 보니 해석을 하자면 또 한 보따리였다.

이런 중대한 사안들을 일사천리로 한꺼번에 처리를 해버렸으니 재빠르지 않은 문평의 머리가 빙빙 돌 수밖에. 천마의 신속 정확한 일 처리는 언제나 너무 빨랐다. 문평으로서는 그 속도를 따라잡기가 버거웠다.

“방금 전에 저에게 뭘 하셨던 겁니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었다는 것 정도는 문평도 눈치로 알고 있었다. 원래는 그리 눈치가 빠른 사람이 아니었는데, 천마에게 하도 당하다 보니 이런 부분의 감각만 엄청나게 늘었다.

말없이 뒷짐을 지고 웃던 천마가 문평을 돌아보았다. 어쩐 일인지 그는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가 뭘 했던 것 같으냐. 맞춰 보아라.”

“제가 갑자기 신분이 상승한 것 같은데요. 맞습니까?”

문평은 일단 자기가 이해할 수 있었던 부분부터 짚어 나갔다. 천마는 부드러운 태도로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마영 43호에서 태상교주와 동격이 됐으니 그도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러니까 저는 이제 공식적으로 뭐가 된 거죠?”

천마후. 천마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입으론 다른 말을 내뱉었다.

“마교의 적통.”

“……그게 좋은 겁니까?”

“글쎄.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후계를 키워서는 안 되고, 네가 얻은 심득을 따로 남겨서도 안 된다. 네 뒤로 너의 계통이 이어지면 결국 교내에 새로운 파벌이 생길 테니 네가 익힌 무공은 네 대에서 끝나야 하겠지. 그 점만 빼면 별로 나쁘지 않다. 말했다시피 나와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 일평생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다.”

문평은 후계를 키우는 데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천마가 단점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닥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가 찜찜했다. 단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는 무시 못 할 예감이 든다. 그것은 생각이라고 하기보단 본능이었다. 이제껏 그를 살아남게 해주었던 생존본능. 문평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천마를 주시했다.

“그거 말고 딴것도 있었던 것 같은데요. 당시 대전 안의 분위기가 몹시 미묘했습니다.”

당연히 미묘했을 거다. 문평은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마교에서도 처음으로 남성으로서 교주의 반려가 된 사람이다. 일반적인 교주의 반려라도 기함을 할 노릇인데 무려 천마의 부인이라니. 만약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이 천마가 아니었다면, 그 일은 반란을 불러왔을지도 모르는 엄청난 중대사였다.

하지만 천마는 의뭉스럽게도 그 점은 눙치고 넘어갔다. 그가 그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한 것은 당사자가 아니라 그 외의 자들에게 문평의 위치를 정확히 각인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문평은 계속 그 일을 몰라도 됐다. 이제 알아야 할 사람은 다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미묘했겠지. 졸지에 상전 하나가 더 생기는 거니까. 윗대가리일수록 자존심이 높은 법인데 모셔야 할 존재가 하나 더 늘었으니 반가울 리가 있겠느냐.”

“…….”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됐지? 너무 갑작스러운 출세라 마음에 걸리는 거냐?”

문평은 고개를 들어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문평을 마주 보았다.

“제게 왜 이렇게 잘해주십니까?”

언젠가, 혹은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 다시금 문평에게서 나왔다.

‘뭐가 그렇게 의심스러울까, 이 녀석은? 이유가 없으면 잘해줘서도 안 된다는 건가?’

윤승효에게는 이런 질문을 한 번도 안 했던 것 같은데 천마에게는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아직도 자신의 호의가 의심스러운가 싶어 천마의 마음에 씁쓰레한 앙금이 남았다.

“내가 잘해준다고 생각하느냐? 어째서?”

“제 목숨을 구해주셨고,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무공을 주셨습니다. 감히 감당 못 할 부와 명예도 안겨주셨고, 마음까지도 주셨지요. 이게 잘해주는 게 아니면 대체 뭐가 잘해주는 겁니까?”

“잘해준다는 말은 보통 되돌아오는 것 없이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 때나 쓰는 거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손해나는 짓을 할 생각이 없다. 내가 네게 뭔가를 주는 것은 당연히 보답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걸 아직까지 몰랐더란 말이냐?”

“제가 교주님께 돌려 드릴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저에게는 교주님께 드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없긴 왜 없어. 있다. 있어도 아주 많다.”

“교주님?”

“너는 내게 네 마음을 줘야 한다. 네 인생을 줘야 하고, 네가 짓는 웃음 전부를 줘야 한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모두 줄 테니, 너는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오. 그러면 공평하겠지. 각자가 가진 전부를 상대의 전부와 맞바꾸었으니 말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달콤한 말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저렸다. 말도 안 되는 불공평한 제안을 하면서도, 굳이 공평하다고 주장하는 천마의 속내가 무엇인지 문평이 모를 리 없다.

그는 볼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는 그를 자꾸만 소녀처럼 만들었다. 다 큰 사내이고, 인생을 겪을 대로 겪은 남자임에도 그의 앞에 있으면 어려지고 부끄러워진다.

“……교주님.”

“어려운 거래일 테니 천천히 생각해라. 네가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주겠다. 어차피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시간뿐이 아니냐? 평생을 기다리라고 해도 기꺼이 기다리마.”

그답지 않은 말을 해서 쑥스러웠던 것일까. 천마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문평을 두고 서둘러 말을 맺었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문평이 당장 대답을 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껏 겪어 온 일이 그리도 많은데, 그가 문평의 성격을 모르겠는가.

문평은 남자끼리의 관계라는 점에 얽매여 솔직하지 못했고, 남의 시선을 의식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도 두려워했다. 그래도 천마는 그런 문평이 귀여웠다. 그에게 씐 콩깍지는 너무도 심화되어서, 처음에는 잡초였던 문평이 이제는 난초로 보일 지경이었다.

말했다시피 그에게는 수십 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 어쩌면 문평의 인생 전체보다도 더 길지도 모르는 엄청난 시간이다. 천마는 그 시간을 모조리 그에게 투자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의무만으로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에 비하자면, 정말 얻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사용될 시간은 결코 아까운 게 아니었다.

“늦은 오후에 둘이서 산책하는 것도 오랜만이다. 다시 걷기나 하자.”

머뭇거리는 문평의 태도에 시간을 두기로 마음먹은 천마가 다시 몸을 돌려 산책을 계속하려고 했다. 하지만 주저하면서도 입을 여는 문평의 목소리가 그의 돌아서는 발걸음을 붙잡았다.

“……손해를 보는 건 틀림없이 교주님이실 텐데요. 괜찮으십니까?”

앞서 걷던 천마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문평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빨갛게 익은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네 입으로, 그 거래를 성사시키자고 말하고 있는 거냐?”

“거래 이전에 흥정부터 하자는 겁니다. 저는 교주님께 사기를 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 거래는 제가 아니라 교주님께서 손해를 보시는 겁니다. 그래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음만 먹으면 덜덜 떨면서도 충분히 맹랑해질 수 있다는 게 문평의 장점이었다. 천마는 당신이 손해를 보는 게 확실하다고, 그래도 진짜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냐고 묻는 상대를 향해 어이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 바보 같은 놈.’

천마는 계산이 형편없는 문평을 보며, 저놈은 절대로 상인만은 시키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분명히 말했다.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 것은 이쪽이라고. 사람 말을 제대로 안 들으니 저따위 질문이나 하는 거다. 이쪽은 결코 빈말이라는 걸 하지 않는데, 문평은 그렇게 겪고도 그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무슨 손해를 본단 말이냐. 손해를 보면 네가 보는 거지.”

“저는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교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평범한 하급 무사였고, 가진 자질도 변변치 못할뿐더러 특출한 재능도 없습니다. 하지만 교주님은 천고에 이름을 남길 분이 아니십니까? 이런 관계가 대등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물론 나는 보잘것없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 얻을 것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이는 많고, 직업은 없고, 자식은 없어도 제자며 손주며 줄줄이 딸려 있지. 나와 같이 있으면 종종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고, 때로는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복잡한 사연에 휘말려 골치 아픈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하고 있다. 너는 왜 나만큼 뻔뻔하질 못한 게냐?”

거기까지 말한 천마가 문평을 확 하니 앞으로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그의 팔에 안기고 만 문평은 머리 위에서 웃고 있는 천마의 기척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내 이름이 천고에 기억될 이름이라고? 그런 것 따위 한 번도 바란 적 없다. 내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한 사람이면 된다. 만인에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에게 천 번의 가을 동안 기억되는 것. 그게 내가 바란 전부였다.”

천마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문평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에선 진솔한 진심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단단한 팔에 끌어안긴 문평은 멍한 시선으로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런 가식도 없이, 비웃음도 없이 그저 맑게 웃는 천마의 웃음은 몹시도 아름다웠다.

‘이 사람이 이런 식으로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구나.’

항상 그의 냉소적인 모습만 보았던 문평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천마의 밝은 미소를 바라보았다. 믿기 힘든 노릇이었지만 천마도 이렇게 웃을 수 있었다. 남을 후벼 파듯 비꼬는 게 아니라, 조롱하듯 뒤틀린 게 아니라, 그야말로 가을 하늘처럼 맑고 투명하게 말이다.

“어떠냐? 네가 내 소원을 들어줄 테냐? 천 번의 가을 동안 내 이름 하나를 기억하며 살아 줄 테냐?”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천마가 문평에게 물었다. 실제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천마와 완전히 같은 표정이 된 문평은 홀린 듯이 그의 질문에 답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요. 예. 그러겠습니다.”

“네가 그렇게 하겠다면 나도 그렇게 하마. 너를 기억하지. 네 이름만을 마음에 새기겠다.”

이마 위로 금빛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다른 감정은 한 올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기쁨의 입맞춤. 문평은 그 입맞춤 하나에 자신의 인생을 맞바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들이 서 있는 뜰의 안쪽으로 한 줄기 긴 산바람이 불었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머금은 한 줄기 미풍은 두 사람의 주위를 한 바퀴 휘돌고 지나갔다.

인간에게 영원이란 살아서는 닿지 않을 미련이다. 천 번의 가을. 천 번의 꿈. 그것이 영원과 무엇이 다를까.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맞닿아 있다는 것만큼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 순간 진실한 맹세를 했고, 그 맹세를 충실히 지켰다. 약속했던 것과 같이 천 번의 가을까지는 아니었으되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은 한결같이 서로만을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고도 남았다.

〈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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