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22 장 (23/26)

제 22 장

천마와 문평에게 있어 가장 빠른 이동수단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발이다. 천마에게는 천하에 상대할 자가 없는 웅혼한 내력이 있었고, 문평에게는 장거리에 특화된 걸출한 신법이 존재했다.

그러나 호북을 종단하는 거나 다름없는 긴 여정을 신법만으로 움직인다는 건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도 감히 도전하기 힘든 일이었다. 천마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문평에게는 그랬다.

장촌까지 신법을 운용해서 달렸다간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자신의 몸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려 마정대전이 일어날 장소를 그러한 몸 상태로 찾아간다는 것은 고차원적인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말을 고르는 안목이 특출한 천마가 마시장에 들러 보기 드문 준마 두 마리를 구해 왔다. 정도맹에서 그들에게 마련해 준 대완마 정도는 아니었으나, 털빛이 고르고 눈빛이 유난히 총명한 것을 보면 혈통 자체가 남다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말을 달려 중원을 가로질러 갔다. 그들이 있던 곳이 마침 호남성의 끄트머리이긴 했으나 호북성을 말로 횡단한다는 건 쉽지 않은 여행이었다. 호북성은 그 이름 그대로 거대한 호수와 두 개의 강,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잇는 지류들로 얽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지형이다. 그들은 가끔씩 배를 타야 했을 뿐만 아니라, 물을 건너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몇 번은 그래도 참는 눈치더니만, 강 때문에 다섯 번째로 길이 가로막히자 천마의 인내심도 드디어 바닥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혼잣말처럼 말한 천마는 문평을 말에서 끌어 내린 후, 엉덩이를 쳐서 두 마리를 모두 쫓아 보냈다. 문평은 눈앞에서 일렁이는 황토빛 강물을 착잡하게 바라보다 천마를 돌아보았다.

“어쩔 심산이십니까?”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강은 장강長江은 아니지만 그의 지류로, 도도히 흐르는 강폭이 거의 수십여 장이 되어 보였다. 이런 규모의 강을 배도 없이 건넌다는 건 무림인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 사람은 나루터도 없는 곳에서 무슨 짓을 하려고 말을 쫓아 보낸 거지?’

의심스럽게 천마를 바라보고 있던 문평은 천마가 갑작스럽게 허리를 잡아 오자 화들짝 놀랐다.

‘설마 내가 의심하는 그런 시도를 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문평은 애절한 시선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천마는 그런 문평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그에게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양자택일의 문제를 강요했다.

“업히겠느냐, 안기겠느냐?”

“갑자기 그런 것은 왜 물어보십니까?”

“헤엄쳐서 건널 게 아니라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게 아니냐. 다시 묻겠다. 업히겠느냐, 안기겠느냐?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도록 만들지 마라.”

문평의 경지가 올랐어도 절정에 불과해, 등평도수와 같은 지고한 경지엔 이르지 못했다. 그러니 천마가 신법으로 강을 건너가기 위해서는 문평을 안거나 업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처했는지를 깨닫게 되자 문평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다 큰 사내가 남세스럽게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강을 건너야 한다니! 그러나 강경한 천마의 태도를 보니 별다른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천마는 대답을 종용하는 눈빛으로 문평을 내려다보았다. 문평은 그 시선을 피하며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한갓진 곳이라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강 중간중간에 어선이 몇 척 떠 있긴 해도 거리가 워낙 멀어서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 외에는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상황이 이렇게 엄중하지 않았다면 뻗대 보기라도 했으련만. 자신의 존재가 천마의 발목을 잡는 것을 원치 않았던 문평은 눈을 딱 감고 한 가지 방법을 선택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안겨서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업히는 게 나았다. 안기면 천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봐야 하지만, 업히면 그래도 뒤통수만 대하면서 갈 수 있지 않은가.

“업히겠습니다. 교주님.”

문평은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사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라면 천마가 굳이 문평을 데리고 다녀야 할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이제 와 문평을 노릴 만한 자들은 없을 뿐만 아니라 문평이 옆에 있어 봤자 천마에겐 짐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그러니까 문평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천마조차도 그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마치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떻게든 두 사람이 같이 움직여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 업혀라.”

마음이 급하긴 급했는지 천마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문평을 등에 업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등이 문평의 가슴께에 맞닿았다.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대 보기도 했고, 등 근육에 손톱을 박고 매달려 본 적도 숱하게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업히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문평은 홧홧하게 붉어지는 낯을 감추기 위해 천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이 남자를 만나고 나서 별별 경험을 다 해 보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도 다른 사람의 등에 업힌 적이 없는데, 이 나이가 되어서 다른 남자의 등을 타고 오르자니 민망하고 면구스러워 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천마의 두 손이 문평의 엉덩이를 단단히 잡았다. 다른 의도는 전혀 없고 그저 떨어트릴까 봐 그런 듯하지만, 그 손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문평은 저도 모르게 등줄기를 움찔 떨었다.

천마는 등평도수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찰박찰박 수면을 걷어차는 소리가 귀에는 들렸지만 등에 업힌 문평은 그가 등평도수로 강을 건너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물 위를 달리면서도 그의 자세는 흔들리지 않았다. 혼자 몸도 아니고 사람 하나를 업고 달리는데도, 천마의 자세는 마치 땅 위를 달리는 것처럼 고르고 안정적이었다.

채 일다향도 되지 않아 천마는 강을 건넜다. 하지만 천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문평은 그가 강을 다 건너고 나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천마가 강을 건넌 후에도 그를 내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지나치게 강폭이 넓은 것 같은데? 이제는 다 건넜을 때도 되지 않았나?’

그가 등에 업힌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내리라는 말이 없자 의아해진 문평은 빼꼼히 얼굴을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째 물 차는 소리가 안 들린다 했더니만 지금 천마가 밟고 있는 것은 물이 아니라 마른 땅이다.

당황한 문평이 천마의 어깨를 두드렸다. 강을 건널 때라면 몰라도 땅 위에 올라와서까지 자신을 업고 뛰다니. 이 사람이 무슨 심산으로 자신에게 이런 망신을 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 내려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강은 다 건넌 것 같은데요.”

작지 않은 소리로 상대의 주의를 환기시켰지만 천마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다. 문평에게는 뒤통수만 보이는지라 정말로 안 들리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주변이 잔상으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달리고 있어 목소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믿기엔 문평이 천마를 너무 잘 안다. 오기가 생긴 문평은 이번엔 전음을 보내 천마에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이미 강을 건너지 않았습니까. 내려주십시오, 교주님.”

전음을 보냈으니 그의 의사가 분명히 상대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천마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문평은 속이 답답해졌다. 지금이야 한적하니까 그래도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좀 있으면 관도도 나올 거고, 관도에 도착하면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점차 많아지게 될 터였다.

‘늘 흰머리가 많다고 구박하더니만, 정작 내 흰머리를 늘리는 건 당신이 아닙니까?’

문평은 할 수만 있다면 천마의 어깨를 흔들면서 소리치고 싶었다. 내가 늙는 건 당신 때문이야. 내 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면 그건 모두 당신이 내게 저지르는 일들 때문이라고!

“교주님!”

“조용히 해라. 뒤를 따르는 무리가 있다.”

또 장난을 치려는 거지? 하루라도 장난을 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지?! 섣부른 단견으로 치밀어 오르던 울화가 천마의 대답에 턱 하니 막혔다. 문평은 천마의 어깨를 두드리려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뒤를 따르는 무리가 있다고? 그러니까 그건, 그들이 천마의 일행임을 알면서도 뒤를 쫓는 자가 있다는 소리인 게지?’

누가 감히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단 말인가? 강호상에 알려진 천마의 위용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믿기지 않는 말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납득하지 않을 수도 없는 처지다.

문평은 꼿꼿하게 세웠던 등을 다시금 굽히고 천마의 귓전에다 낮게 속삭였다. 전음으로 말하니 누가 엿들을 자도 없는데, 오랜 습관이 그의 행동마저도 쓸데없이 은밀하게 만들었다.

“누가 뒤를 따르는 겁니까? 정체를 아시겠습니까?”

“이 정도의 속도라면 쉽게 쫓아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텐데 끝까지 뒤를 따르고 있군. 보아하니 절정을 넘지는 못한 것 같은데 신법들이 제법이다. 호북성에서 이토록 매끄러운 신법을 가진 자들이라면 아마도 무당이겠지. 정도맹이 우리를 찾아낸 것 같구나.”

문평의 질문에 천마는 당연한 추론을 했다. 무당에는 제운종이라고 불리는 절정의 신법이 있고, 제운종은 곤륜의 운룡대팔식과 함께 손에 꼽히는 정파의 신법이다. 하긴 호북은 정도맹 이전에 무당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그들이 정찰대로 무당의 인원을 동원했다고 해서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의문인 것은, 그들의 출신 배경이 아니라 고작해야 절정 고수 몇 명을 보내 그의 뒤를 쫓게 한 윗전들의 꿍꿍이속이다. 천마씩이나 되는 고수가 그들의 흔적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데, 여봐란듯이 당당히 저들을 내보낸 것을 보면 보이는 것과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이쪽으로 올 것은 어찌 알고?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쳤구나.’

천마는 머릿속에서 기척이 들려오는 방향을 감지하고는 대략의 상황에 대해 감을 잡았다.

‘이건 추적이 아니라 몰이다. 앞에 함정이 기다리고 있는 건가? 과연, 그냥 지나칠 생각은 없는 거군. 내가 장촌에 도착하기 전에 일을 끝내려는 심산이야.’

천마는 민활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가 곽효의 입장이었다고 할지라도 각개 격파를 먼저 생각했을 터였다. 천마와 마교는 각각으로도 위협적인 적이지만, 그 둘을 합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공포가 된다.

곽효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그를 마교에서 끌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곽효는 자만심이 넘쳤으나 어리석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호락호락 당해 줄 수만은 없지. 함정인 걸 알면서도 빠져 줄 정도로 나는 관대하지 못하거든.’

호기를 자랑하기 위해 호랑이 굴로 걸어 들어가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천마는 냉담히 웃으며 진기를 끌어 올렸다. 순정한 그의 내력이 단전을 타고 올라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의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기 시작했다.

진기를 끌어 올리고 있음에도 천마의 발걸음은 오히려 늦어졌다. 무섭게 속도를 올려 추격해 오던 자들은 갑작스럽게 늦어진 그의 속도에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기의 수발이 자유로운 고수라도 순식간에 내력의 운용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천마의 속도를 잡기 위해 최대한의 속력을 내고 있던 무당의 제자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둘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천마는 거의 달리지 않는 거나 다름없는데 무당의 제자들은 발을 멈추지 못하니 원하지 않아도 둘 사이의 간격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들켰다. 쳐라!”

천마가 자신들의 의도를 눈치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 중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들키긴.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천마는 용맹하다 못해 이성을 상실한 자들을 바라보며 냉랭히 비웃었다. 한쪽 팔로는 문평을 여전히 업고 있기에, 나머지 한 손만을 든 그는 박자를 두드리는 것처럼 손가락 끝을 튕기며 조용히 말했다.

“너희들의 임무는 그게 아니었을 텐데. 어설픈 만용이 화를 부르는구나.”

미행하다 들켰으면 바로 도망을 가야지. 대체 뭘 믿고 이리도 달려든단 말인가? 역시 정파 놈들은 정신 교육이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천마는 낮게 혀를 찼다.

마교인이라면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했을 것이다. 전원이 장렬하게 옥쇄하는 것보다 한 놈이라도 살아남아 이 소식을 교에 전하는 것이 조직을 위해 더 나은 결과일 테니까.

하지만 머릿속에 돌만 든 이놈들은 한 놈도 빠지지 않고 일제히 날아올라 천마를 향해 검을 찔러 왔다. 전략은 물론이거니와 상식이라는 것도 없는 놈들인 듯했다.

탕, 탕, 탕, 탕, 탕.

한 곳으로 날아오던 칼들이 마치 무형의 막에 튕긴 듯 도로 튕겨 나갔다. 얼핏 보면 호신강기에 당한 듯했지만, 천마는 고작 그들을 상대로 호신강기를 일으키는 짓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몇 가닥의 지풍을 쏘아 놈들의 칼들을 쳐 냈을 뿐이다.

칼을 들고 몰아쳤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일제히 서너 걸음씩 뒤로 물러나 울컥 피를 토했다. 너무나 엄청난 반탄력에 내상까지 입은 그들은 자신들이 설마 지풍에 당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관대하지 못한 천마는 그들에게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한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일에는 항상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다음 생에서는 부디 이 교훈을 깊이 간직하길 바란다.”

천마는 다시 지풍을 쏘아 뒤를 쫓던 자들의 미간을 꿰뚫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에서 각기 달리 쏟아져 나온 지풍들이 현묘한 각도로 다섯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갔다.

첫 번째 지풍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도 남은 운이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날아온 두 번째 지풍이 그들의 목덜미를 꿰뚫은 것이다.

각각의 몸에 엄지손톱만 한 상처를 남긴 채 시체가 쓰러졌다. 눈 깜빡할 새에 일곱 사람이 죽은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그들은 무당의 제법 이름난 본산 제자인 무당칠궁武當七宮이었으나, 천마의 앞에선 한낱 개미 떼만도 못했다. 문평은 섣불리 감탄조차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무위에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말았다.

손을 터는 것 같은 동작 몇 번으로 고수 일곱을 죽인 천마가 몸을 돌렸다. 문평은 천마가 자신의 몸을 다시 고쳐 업자, 감히 반론도 못 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이제 쫓아오는 사람도 없으니 내려줘도 될 것 같은데 천마는 계속해서 그를 업고서 이동하려는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내 발이 있다고 뻗댔겠으나 한순간에 죽어 나가는 시체들을 보고 나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린다.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도 아니고 절정 고수가 일곱이었다. 하나하나가 자신과 같은 경지였다는 소린데, 그런 자들이 떼로 덤벼도 천마의 왼손 하나 상대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이러한 광경을 보자니 천마가 어떤 존재인지 새삼 실감이 났다. 확실히 천외천天外天이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어쩔 수 없군. 귀찮지만 당분간은 이대로 계속 달려야겠다. 뒤가 따라붙을 때마다 손을 썼다간 시간이 모자랄 테니 일단 꼬리는 떼놓아야겠지.”

귀찮은 날파리라도 내쫓은 것처럼 중얼거린 천마는 동의를 구하듯 문평을 돌아보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길이 늦어져도 내 발로 걸을 테니 뒤가 잡히는 족족 미행을 쳐 죽이라고 할까? 아무리 찾아봐도 입 밖에 꺼낼 말이 없었던 문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천마의 화끈한 실력 행사는 문평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가 동의한다는 뜻으로 목에 두른 손에 힘을 주자 천마는 빙긋 웃고 말았다.

‘그렇다고 또 일일이 졸아들기는.’

아무리 힘자랑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설마 저에게까지 그러할까? 이놈의 잡초는 다른 건 다 좋은데 너무 소심한 게 흠이었다.

과정이야 어쨌거나 천마는 문평의 동의를 얻었다. 마음이 편해진 천마는 문평을 고쳐 업고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만약 문평이 곁에 없었다면 느긋하게 기다렸다 따라붙는 놈들을 족족 때려죽이는 재미를 느껴 보았겠지만, 보호해야 할 사람을 데리고 있다 보니 쓸데없는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가능하면 사양하고 싶다. 아무리 그가 문평을 지킨다 한들 세상엔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는 법이 아닌가? 괜한 싸움에 문평까지 말려들게 되는 건 천마로서도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것을 피하기 위해 관도를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축지성촌縮地成寸의 묘용을 깨우치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걸음에 주변의 풍경이 달라진다.

문평은 천마가 진심으로 달리는 모습을 보고서야, 예전에는 그가 자신을 봐준 거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문평의 능력으로는 설사 선천지기까지 모조리 뽑아내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이 속도를 따라잡을 방도가 없었다.

천마는 마치 한 줄기 검은 구름처럼 달리고 있었다. 설사 일반인이 아니라 무림인이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모습을 보고 그가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못할 성싶었다.

***

문평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영광을 얻었다.

무려 천마를 말처럼 타고 여행을 하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하지만 문평은 이 엄청난 영광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러한 경험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사람의 등에 업혀서 달려도 녹초가 될 수 있다는 사실과 허벅지 안쪽의 살벌한 근육통뿐이었다.

밤에는 자고 낮에만 움직였음에도 여행에 대한 피로는 만만치 않았다. 말을 타고 온종일 달려 본 적도 있지만, 그때 느꼈던 것과 지금의 피로는 그 종류가 확연히 달랐다.

네발 달린 짐승과 두 발 달린 사람은 몸의 구조 자체가 다른 법이다. 아무리 자세가 안정적이라고 해도 말보다 요동이 클 수밖에 없었고, 등에 업힌 상황에서는 자세를 달리해 볼 방법도 없었다.

그러나 문평은 그에 대해 아무런 불평도 하지 못했다. 그만한 장정을 둘러업고 하루 종일 달린 사람도 있는데, 짐덩이마냥 그저 업혀 오기만 한 사람이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도 남 못지않은 체면과 염치 정도는 있었다.

다행히 흥산 근처에 이르자, 천마도 더는 같은 방식의 이동을 고집하지 않았다. 덕분에 문평은 이틀 만에 제 발로 땅을 디뎠다. 한 자세로 너무 오래 있어서인지 온몸이 뻐근했다. 간간이 내력을 이용해 운기를 한 상황이었음에도 그랬다.

“의외로 조용하군요. 어디에도 무림인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난밤을 지냈던 아랫마을에서 장촌이 위치한 방향에 대한 설명을 들었던 문평은 산길을 걸어 올라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본적으로는 화전민 마을에 광산촌의 역할을 겸하고 있던 장촌은, 높은 산세에 둘러싸인 고산마을로 산중에 생긴 분지형의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흑마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딱히 소문난 적이 없던 한미한 산촌이었는데, 이제는 전 중원의 관심이 오로지 이곳에 쏠려 있으니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산으로 오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문평은 얼마 전 조현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장촌이 위치한 매량산埋樑山에서는 그 어디에도 살육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산새는 한가롭게 울었고, 들짐승도 두려움 없이 산길 주변을 뛰어다녔다. 고적한 길섶엔 비명은커녕 사람의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폭풍 전야의 고요라는 거지. 그때처럼 아무 세력이나 마구잡이로 부딪치는 일이 아니지 않으냐. 정도맹과 마교가 정식으로 맞붙는 자리다. 무림인이라고는 하나 그 정도의 군세가 움직이려면 군기의 엄정함은 필수지.”

“……그렇군요.”

이는 막상 일이 일어났을 때, 그보다 더 참혹한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엄정한 군기를 가진 정예병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는 문평은 내심 한기를 느꼈다.

말 그대로 마정대전이다. 20년 동안 칼을 갈아 온 곽효의 세력과 천하제일세인 마교가 한자리에서 충돌하게 될 테니, 정말 그 일이 일어난다면 시신이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룬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 얼마나 많은 목숨이 죽어 가게 될까? 우리 참혼대의 사람들은 과연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낯모르는 사람보다 지인을 걱정하게 되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본능이다. 참혼대는 마교에서 가장 하위에 속하는 무력대고, 이런 일에 제일 먼저 소모될 수밖에 없는 순번을 가지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장촌에 집결하는 마교의 군세 중엔 참혼대의 동료들이 포함되어 있을 게 뻔했다.

대형인 악 형을 제외하곤 일류를 벗어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게다가 임학은 같은 일류라 할지라도 나이가 어려 내력이 부족한 편이다.

문평이 천마같이 경천동지할 무공이 있다면 제일 먼저 그들부터 구하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작 절정의 경지로는 제 한 목숨 부지하기에도 빠듯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겨 있던 문평을 흘낏 돌아보던 천마가 길게 말을 끌었다. 천마의 대답을 듣고 대화가 끝난 줄로만 알았던 문평은 의아한 눈길로 의미심장하게 웃는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는 담담한 시선으로 앞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붓으로 그린 듯 선명한 그의 눈썹이 냉소적으로 휘어 오르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무림인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네 속단인 것 같구나. 여기저기 위선자의 냄새가 진동을 하지 않느냐? 매복을 하고서도 기척도 제대로 숨기지 못하니 덜떨어진 놈들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림인도 아니라고 치부하는 건 지나친 폭언이 아니더냐.”

그의 낭랑한 목소리가 숲을 향해 울려 퍼졌다. 웃음기를 머금은 온화한 음성이었으나, 그 말속에 드러난 신랄한 빈정거림을 알아듣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흠칫 놀라 경계를 한 문평의 시야에 흔들리는 풀숲이 보였다. 천마의 말을 듣고 격동한 매복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가 막히게도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 자리와 문평과의 거리는 거의 서너 장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상대의 기척을 전혀 몰랐다고?’

그 사실 하나만 놓고 보아도 심상치 않은 적들이었다. 절정을 훨씬 상회할 대단한 고수들. 문평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내력을 북돋웠다. 천마를 노리고 온 상대들이라면 자신에게는 틀림없이 벅찰 테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천마의 짐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필사적인 오기가 있었다.

“허허허. 시주께서는 언제 뵈어도 입이 매서운 분이시구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천마 시주.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어두운 녹음 사이에서 나타난 사람들은 도불속의 갖가지 옷차림을 한 십여 명의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 대표 격인 듯한 노승이 그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며 천마에게 인사를 건넸다.

붉은 승복에 황색 가사를 걸친 그 노승은, 일반적인 합장合掌 대신 반장半掌을 했다. 팔을 잘라 도를 구한 선종禪宗의 제이조第二祖 혜가慧可 이후로, 합장 대신 반장을 하는 것은 소림 승려만이 가진 고유한 풍습이다.

문평은 그 인사를 본 것만으로도 상대의 정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노승은 소림의 고승이었다. 천마를 향해 스스럼없이 반 존대를 하는 것으로 봐서는 배분 역시 상당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별 시답지 않은 것을 다 묻는군.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강호의 물을 다 흐리고 있는데, 땡추 눈에는 내가 평안해 보이는가? 다 늙은 몸이 오죽 시끄러웠으면 직접 잡으러 내려왔겠느냔 말일세.”

누에처럼 흰 눈썹이 턱 끝까지 내려온 노승을 향해 천마는 천연덕스럽게 늙은이라 자처했다. 겉보기엔 20대 청년으로만 보이는 천마였기에 짐짓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지만, 그가 반로환동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반로환동을 하셨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정말로 어리시군요. 그 나이에 그런 젊음을 유지하시다니요. 참으로 염치도 없으십니다.”

노골적으로 노승을 비꼬는 천마의 태도가 불쾌했던지, 뒤에 서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참견을 해왔다. 그녀는 여인임에도 도복을 입고 있었는데, 소맷부리에서 빛나는 찬란한 매화 문양이 그녀의 출신을 짐작하게 했다.

50대의 중년 미부처럼 보이는 여도사. 게다가 화산파 출신이라. 문평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이름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그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현재 화산 제일검은 무려 화경의 경지에 이른 고수로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그녀는 여인의 몸으로 매화검법梅花劍法을 대성했는데, 그 덕에 환희루주 자옥군慈玉君과 더불어 여중제일인의 위치를 다투고 있기도 했다.

그녀의 이름은 추요선자秋謠仙子 종리선옥鍾離腺屋. 현존하는 여고수 중 가장 검과 혀가 매섭다고 소문난 그녀는 불꽃처럼 튀어 오르는 붉은 시선으로 천마를 노려보았다.

“나 이것 참. 보아하니 늙어서도 죽지도 못한 것들이 이곳에 다 모였나 보군. 나 하나를 잡기 위해 그대들 십존이 모두 몰려온 건가? 보아하니 빠진 사람은 반천호접盤天虎蝶 정도밖에 없는 것 같군.”

이를 갈고 있는 종리선옥을 무시한 채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보던 천마의 눈에 문득 이채가 스쳤다. 그는 그를 찾아온 자들 중 가장 덩치가 큰 자를 바라보더니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도굉司徒宏 자네까지 여기에 끼어들 줄은 몰랐군. 정파라면 자네도 나 못지않게 지긋지긋해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적의 적은 제게도 동지인 셈이지요.”

한족이 아닌 듯 붉은 머리에 푸른 눈빛을 한 사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천마에게 대답했다. 그는 마치 여포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덩치를 하고 있었는데, 등에는 거대한 화극을 메고 있어 더욱 패도적으로 보였다.

천마의 말대로 그가 정말로 사도굉이라면 그 역시 화경의 고수다. 사도굉은 사파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십존에 오른 인물로 사도 제일의 방파인 적룡보赤龍堡의 보주이기도 했는데, 인상착의를 보아하니 그가 사도굉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은 천마가 반로환동한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일 같았다.

‘세상에. 정말 이들 모두가 십존十尊이란 말인가?’

문평으로서는 그들 중 한두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어려웠지만, 천마는 이미 그들 모두와 안면이 있는 듯했다. 이자들의 정체가 정말 십존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원래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라고 했다. 문평에겐 그가 노는 물이 있듯 천마에게도 천마에게 어울리는 물이 있을 것이다.

당금 천하에 있어 단 하나의 태양이 바로 천마라면, 그의 바로 밑에는 열 개의 빛나는 별이 있었다. 한 세대에 손에 꼽힐 만큼 나타난다는 화경의 경지에 오른 자들이 현대에는 유달리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한 자들을 무림인들은 십존이라고 불렀다. 그들 십존은 천마를 제외하고는 각기 당할 자가 없다는 절대자들이었다. 출신 성분은 편중된 편이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 여덟이 나왔고, 정사지간에서 하나, 사파에서 또 하나가 나왔다.

그러니 문평은 지금 강호사에 보기 드문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셈이었다. 천하제일인인 천마와 천하제이를 다투는 십존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지금의 이 자리는 정사마를 통틀어 최고의 고수들이 한데 모인 거나 다름없었다.

이번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낯선 산중에서 이런 엄청난 조우가 일어나다니. 문평은 성라대연星羅大宴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광경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제법 그럴듯한 계산이긴 하군그래. 맞는 말이야. 화경의 고수가 열 명이 모이면 현경의 고수 하나 정도는 상대할 수 있겠지. ……한데 이대로는 조금 부족하지 않겠나? 정확히는 열 명이 아니라 아홉 명 반이로군. 그 나이를 먹었으면 작은 구멍이 결정적인 패착이 될 수도 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어찌하여 저런 자까지 이 자리에 끌고 온 거지?”

십존 중 반천호접이 빠졌는데도 사람은 열 명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들 중에 화경의 고수가 아닌 자도 있다는 소리다. 천마가 지적한 ‘구멍’은 바로 그자를 일컬음이었다.

천마의 말 한마디에 졸지에 반 명분이 된 그는 40대 후반의 검수였다. 화경과 현경의 고수들이 즐비한 가운데도 형형히 눈을 빛내고 있는 그는 추요선자 못지않게 살벌한 눈으로 천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개인적인 원한이 득실거리는 시선이었다.

“그의 모자란 실력은 오랜 세월 날을 갈아온 독기가 대신해 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천마 시주께선 오 시주를 만나 본 적이 없으시지요? 이 시주가 바로 초혼일절招魂一絶입니다. 멸문한 공동이 키워 낸 마지막 인재지요.”

공동이 멸문한 것은 40여 년 전, 천마의 기습적인 공격 때문이었다. 초혼일절로 알려진 오인량午仁倆의 부친도 그때의 일로 목숨을 잃었다.

소림 고승의 소개를 받고서도 초혼일절은 천마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천마 역시 그의 인사 따윈 기대도 하지 않았다. 원래 정파의 젊은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 자신들과 같은 파벌이 아닌 선배를 만나면 인사를 건네기는커녕 꼬박꼬박 대들기에 바빴다.

“그것참 안타까운 일이군. 내 그때 공동파를 멸문시키긴 했지만, 오래된 정종의 무공이 사장되는 것이 아까워 명맥만은 잇게 해주었는데. 분수를 모르는 후인 덕에 그마저도 소용없게 되었으니 이제 공동의 이름은 영영 강호에서 사라지겠군.”

천마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초혼일절을 도발했다. 꿈틀, 눈썹을 움직인 초혼일절은 당장에라도 출수를 할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천마는 그런 초혼일절을 코끝으로 내려다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든 것으로도 모자라, 어리석은 후인까지 이런 일에 끌어들이다니. 역시 자네들이 할 법한 행동이로군.”

“우리들이 죽을 자리라. 자신만만하시구려, 시주. 천마 시주가 경지를 넘어선 것은 알지만 그래도 아직은 인간이라오. 시주는 진정 혼자 몸으로 우리들 열 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오?”

“질문이 잘못됐군, 각천覺天. 내가 보기에 그 질문은 선후가 바뀌어야 할 것 같은데. 나 혼자 몸으로 그대들을 상대하는 게 아니야. 고작 그대들 열 명이 나를 상대하는 것이지.”

“하하하하. 역시 천마 시주답소.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도 광오하시다니. 과연 천하를 홀로 종횡했던 영웅다운 기세요.”

각천대사는 호탕하게 웃으며 천마를 치켜세웠지만, 흰 눈썹 아래 감춰진 그의 눈은 뜨겁게 빛나고 있었다. 과연 천마는 천마였다. 천하에 그들 십존을 앞에 두고 저렇듯 스스로를 내세울 수 있는 자가 천마 외에 달리 누가 있겠는가?

그의 오만함엔 근거가 있었고, 각천대사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명색이 화경의 고수라는 자신들이지만 단신으로는 감히 천마의 앞에 나설 수도 없는 처지였다.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각기 천하제일임을 자부했을 만한 경지를 이룬 이들이었으나, 하필이면 천마와 같은 시대에 태어나는 바람에 평생을 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천마와 그들의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초절정에서 허덕일 때 천마는 홀로 화경을 넘어섰으며, 그들이 화경에 이르러 겨우 안심했을 때 천마는 현경을 이루었다.

그렇지 않아도 따라잡기 힘들었던 그가 반로환동에까지 이르렀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각천대사는 진심으로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늙어 죽을 때가 다 된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자라날 정파의 미래가 걱정이었다. 앞으로도 수년, 혹은 수십 년을 천마는 젊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터였다.

늙어서도 죽지도 않을뿐더러 도리어 젊어지기까지 한 저 괴물은 그들에게 주었던 고통을 그들의 후대에까지 물려줄 것이다. 천하를 도모하기 전에 천마부터 물리쳐야 한다는 백우경의 설득에 쉽사리 마음이 기울었던 것은, 그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생각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파가 마교에 짓눌려 있던 세월이 40여 년이었소, 시주. 우리는 그러한 치욕을 대를 이어서까지 물려줄 생각이 없소. 설사 이 자리에서 우리가 모두 동귀어진하게 될지라도 천마 시주만큼은 살려 보내지 않을 생각이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머지 아홉 사람이 몸을 날려 천마의 주위를 둘러쌌다. 감히 그가 서 있는 이 장의 반경 안으로 들어오는 자는 없으나,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위치를 선점한 그들은 명백한 합격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형태는 십방진十方陣의 일종이군. 소림에서 문호를 개방한 건가?’

찬찬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본 천마는 그들의 준비가 심상치 않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들은 진심으로 이 자리를 천마의 무덤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 같은 절세의 고수들이 한 사람을 합격하는 짓까지 벌이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곽효가 애를 썼군. 확실히, 이 정도의 함정이라면 빠져 줄 만하지.’

천마비고의 일은 너무 조악하다고 여겼던 천마였으나 이번만큼은 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존을 동시에 움직인다는 건 그조차도 예견치 못했던 일이다. 이런 흉계가 기다릴 줄 알았으면 태평하게 문평을 끌고 여기까지 나타났을 리 없지 않은가.

혼자의 몸이라면 어떻게든 해볼 자신이 있었으나 문제는 문평이다. 한 명도 아니고 아홉 명의 화경 고수가 있으니 아무리 그라고 하더라도 문평의 안위까지 챙기기는 버거웠다.

짐짓 태연한 척 뒷짐을 진 천마는 조용히 문평을 돌아보았다. 잔뜩 긴장한 문평이 자기도 싸울 것처럼 자세를 잡은 게 보였다. 이 자리에서 가장 약한 몸이면서도 기세만큼은 누구보다도 당당하다.

‘역시 꿋꿋해. 이래야 내 잡초지.’

좀처럼 기가 죽지 않는 그를 기특하게 여긴 천마는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문평만 보면 웃음이 나오니 참으로 큰일이었다.

“동귀어진도 좋고 합격진도 좋고 다 좋은데, 일을 벌이기 전에 저 아이는 보내 주는 것이 어떤가? 윗전의 일에 애꿎은 목숨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천마는 문평을 돌아보며 웃는 낯으로 제안했다.

‘왜 그러십니까? 저도 싸울 겁니다.’

제 목숨이 가장 중요한 놈이 무슨 헛바람이 들었는지, 문평은 당당하게 눈으로 요구를 해왔다.

‘아서라. 괜히 다친다. 내가 설마하니 이 정도 일에 몸이 상할 것으로 보이느냐?’

천마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만용을 만류했다.

젊은 세대는 몰라도, 어느 정도 연배가 있는 이들은 천마의 성향을 잘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그에게 흠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 뿐이기에, 쉬쉬하면서도 제법 여러 입을 오르내린 것이다.

천마의 말을 들은 각천대사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문평을 바라보았다. 천마가 남색을 한다고 하기에 대단한 미동이라도 데리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눈에 보이는 것은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청년이다. 나이는 젊어 보였으나 어리지는 않았고, 아름답기는커녕 미색이라고 봐줄 구석조차 없었다.

“저자가 누구길래 그리도 특별히 돌보시는 것이오? 천마 시주의 제자라도 됩니까?”

수백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천마가 손수 목숨을 챙기기에 처음에는 남색의 상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청년에겐 아무리 뜯어봐도 그럴듯한 색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설마하니 천마씩이나 되는 존재가 저러한 청년을 두고 남색을 즐겼을까?

호기심을 품고 찬찬히 문평을 뜯어보던 각천대사는 이내 회의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봐도 저 사내는 아닌 것 같았다. 천마라면 얼마든지 더 아름답고 어린 상대를 만날 수 있는데, 저런 평범한 청년에게 만족했을 리 없다고 여긴 것이다.

“제자라니, 설마. 내 연동이지. 길이 멀어 지루한 김에 재미 삼아 데리고 다니던 아이다.”

그러나 각천대사의 섣부른 판단은 천마 본인에 의해 간단히 부정되고 말았다. 천마는 스스럼없는 태도로 문평을 자신의 연동이라고 인정했다. 청천벽력 같은 그의 고백에 주위 사람들의 눈살은 일제히 찌푸려졌다.

반면 문평의 얼굴은 시뻘겋게 물이 들었다. 그는 부끄러움과 당혹함을 참지 못하고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는 당장이라도 고함을 칠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쉿. 입 다물어라. 다 된 일을 망칠 셈이더냐.”

막 ‘교주님!’이라고 소리를 치려던 문평의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가 가라앉았다. 문평은 항변이라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직 천마처럼 티를 내지 않고 전음을 보내는 법은 연마하지 못했기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그들이 전음을 주고받는 것을 알게 되면 저들에게 괜한 의심을 받게 될는지도 몰랐다.

전음을 보내는 것을 보니 천마에게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의 경솔함으로 그 일을 망칠까 봐 두려웠던 문평은 치미는 감정을 누르고 그가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었다.

“흠흠. 시주. 이런 순간에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하시는 겁니까? 저희들은 시주의 그런 깊은 사정까지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리 천마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의 색사까지 알고 싶은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천마가 즐기는 것은 남색. 남녀 상생의 도리를 어기는 도착적인 행위가 아니던가.

결벽증이 있는 추요선자의 얼굴에 강한 경멸감이 드러났다. 다른 십존들도 적나라하게 펼쳐진 천마의 색사에 편치 않은 표정이다.

대표자였기에 어쩔 수 없이 말을 붙이게 된 각천대사는 곤란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나름대로는 목숨을 건 비장한 공격을 앞두고 있는 찰나인데, 갑자기 남색 이야기가 나오고 연동까지 나오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순간이니 하는 말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저 아이가 가운데 끼면 이야기가 꼴사나워지지 않은가. 연동을 데리고 유람 나온 천마가 매복에 당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나라도 그게 망신이라는 것은 알아. 십존씩이나 되는 존재들이 합격진을 이뤄 공격했는데 천마는 무사하고 연동만 죽었다? 목숨까지 도외시하고 합격을 해왔는데 그런 소리를 들어서야 저승에서라도 한이 되지 않겠는가? 상관없는 녀석은 보내 주도록 해. 고수 간의 대결엔 그에 걸맞은 무게가 있어야지.”

천마는 문평의 존재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태도로 각천대사에게 말했다.

눈앞에서 존재를 모멸당한 문평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그는 멍청이가 아니니 천마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천마는 그를 보내 주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였다.

그가 자신을 아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약점으로 붙잡히게 될 게 뻔하다. 그러니 부러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차갑게 내쳐 문평의 신변을 보호해 주려는 거였다.

하나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마음이 아팠다.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욱신거린다.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일쯤이야 평생 동안 숱하게 겪어왔는데 왜 이렇게 괴로운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이런 일 따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천마의 진심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견디기 힘들었다.

‘믿을 수 없군. 이런 어리광이라니. 내가 이렇게까지 저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었단 말인가?’

문평은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가 깊은 충격을 받았다. 천마가 자신을 유달리 귀엽게 여긴 것은 사실이지만, 본인이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이 올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었다. 이제껏 천마가 하는 일마다 화를 내고 불평만 했었는데, 그러면서도 내심으로는 그에게 기대는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문평은 마치 부모에게 매달리는 어린아이처럼 천마에게 매달리고 싶은 감정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그가 그런 행동을 한다면 천마는 정말로 곤란해질 게 뻔했다.

“전설이 만들어지는 조건은 간단하지. 모든 과정이 완벽할 것. 오로지 그게 전부야.”

“천마 시주.”

“선택은 자네들의 몫이니 강요하지 않겠네. 자네들이 거절한다면 그것도 저 아이의 운명이겠지.”

은근슬쩍 십존들의 명예욕을 자극한 천마가 빙그레 웃으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천마가 그를 걱정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각천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를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은 성격 급한 추요선자였다. 그녀는 가느다란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신경질적으로 콧잔등을 찌푸리며 말했다.

“고민할 게 뭐 있나요, 대사님? 저 어린것은 그냥 보내 주세요. 괜한 일로 시간 끌 것 없지 않습니까?”

겉보기엔 50대이지만, 그녀는 이미 환갑을 넘긴 몸이다. 문평을 두고 어린것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추요 시주…….”

“천마의 말 대로예요. 오늘의 일은 역사가 기록할 결전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빛나도 모자라죠. 괜한 오점을 남겨 두고두고 추문에 엮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녀도 문평이 천마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오연한 자존심은 그렇게까지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거부했다.

하나도 아니고 아홉이나 되는 화경의 고수가 합격진을 이뤄 합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치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연동마저 인질로 붙잡는다면 설사 천마를 죽인다 한들 부끄러워 얼굴이나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다른 십존들도 그녀와 생각이 다르지 않은지 모두들 문평을 보내 주자는 의견을 내보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각천대사는 포위망을 열도록 지시했다. 문평과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남궁연광南宮嚥侊이 그의 신호를 보고 길을 열어 주었다.

“교주님…….”

문평은 이곳이 사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천마는 아홉 명에 반분이라며 비웃었지만, 아홉 명의 화경 고수와 한 명의 초절정 고수는 천마에게도 그리 호락호락한 대상은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천마를 혼자 내버려 두고 간다는 건 그더러 혼자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천마는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보내 줄 때 갈 일이지 왜 이렇게 망설이는지 모르겠다. 이러다 녀석까지 붙들리면 정말 방법이 없는데, 자신더러 어쩌라는 소린가?

“내가 정히 걱정된다면 한시바삐 장촌으로 가라. 그곳에 가면 완평이 마교의 세를 이끌고 와 있을 것이 아니냐. 네가 할 일은 여기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구원군을 불러오는 것이다. 내가 설마하니 아무 생각 없이 너를 여기서 내보내겠느냐?”

실제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내는 것이지만, 천마는 문평이 떠날 수 있을 만한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눈언저리가 붉게 달아오른 문평은 그래도 떠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웃는 낯도 보기 힘든 문평이지만 우는 얼굴은 더 보기 힘든데, 저 녀석의 두 눈엔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분하거나 화가 나서 흘리는 눈물은 종종 보기도 했지만 지금 눈물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잡초의 눈에 조롱조롱 매달린 눈물을 보자 천마의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의 기분은 더욱 불쾌했다.

늘 웃게만 만들어도 모자랄 사람을 괜한 일로 울게 만들었다. 새침하다 못해 앙큼하기까지 한 저놈이 얼마나 힘들면 자신의 감정조차 감추지 못하겠는가. 자신을 둘러싼 십존에 대해 생기기 시작하던 앙금이 그 눈물로 인해 결정적인 분노로 화했다.

‘이것들이 감히 내 잡초를 울렸단 말이지. 나를 공격하려고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사람 눈에 눈물까지 나게 만들어?’

천마는 사납게 눈을 번득이며 이를 갈아붙였다. 이러고도 저들이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천마는 그들의 사정을 봐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 하셨죠.”

붉어진 눈으로 천마를 똑바로 바라보던 문평이 문득 입을 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두 눈을 하고서도 그의 얼굴은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데서 그런 소리 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그 녀석 고집 한번 참.’

천마는 섣부른 태도를 보이는 문평에게 다시 한번 혀를 차며 젖은 눈을 마주 응시했다.

“그 약속을 믿겠습니다. 그러니 꼭 살아 계십시오. 만에 하나라도 돌아가시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문평은 밝게 웃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그렇게 웃으니 솔직히 말해 바보 같았다. 하지만 천마는 그런 모습을 보고서도 문평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꼭꼭 감추고, 그에 대해 느끼는 모든 감정을 부정하기만 하던 문평이 처음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돌려주었다. 문평은 그를 믿는다고 했다. 그리고 살아 있으라고 했다. 숫기 없는 문평에게 있어 그 말은 최고의 애정 표현이나 다름없었다.

문평은 몸을 돌려 그 자리에서 뛰어나갔다. 천마가 시킨 대로, 정말로 마교의 응원군을 불러오려는 모양이다. 그가 떠난 자리를 남궁연광이 다시 메웠다. 완벽하게 구도를 가다듬은 십방진이 천마의 주위를 살벌하게 둘러쌌다.

“이제 시작해도 되겠소?”

본의 아니게 남남 간의 상열지사를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사도굉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뒷짐을 지고 있던 팔을 내려 소매를 떨친 천마는 기다렸다는 듯 그 말에 대답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이제 시작하지. 시간 낭비를 너무 오랫동안 하지 않았나.”

그가 내공을 주입하자, 그의 옷자락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힘으로는 보기 힘든 어마어마한 압력이 십방진의 내부에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미 그의 기세는 구체적인 무게와 부피를 가지고 십존을 압도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펄럭거리는 그의 소매 덕에 푸르게 핏줄이 돋기 시작한 흰 팔뚝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갈까? 아니면 너희들이 오겠느냐?”

성난 짐승처럼 흰 이를 드러낸 천마가 조롱하듯 날카롭게 물었다. 그나마 반 존대하던 것마저도 완전히 사라지고, 아랫사람을 대하듯 하대를 하는 그는 십존을 완전히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미 급한 추요선자가 울컥해 달려드는 것으로 십존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천마의 반격이 이어졌다.

우르릉, 쾅, 와르르르.

그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십존과 천하제일인 간의 세기의 대결이 펼쳐졌다. 그들의 다툼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전투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거대했다. 한 장 한 장, 장을 교환할 때마다 산이 울렸다. 그들이 내쏟는 권풍과 검기의 여파에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갔다. 스쳐 간 경기에 바위가 가루가 되도록 부서지는가 하면 제대로 맞은 공격에 산길의 지반까지도 내려앉았다.

천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은 분명 전설이 될 가치가 있었다. 이 싸움에서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이후의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으니, 그 중요성이란 감히 어떤 비무에도 비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천마는 싸우면서 그렇게 거창한 것 따윈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상처받은 문평과 그가 흘린 눈물만을 떠올렸다. 그가 아홉 명의 화경 고수와 한 명의 초절정 고수에 대해 전의를 불태우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호북성의 흥산은 본디부터 산이 많은 고장이었다. 지명에서부터 산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것은, 물이 유달리 많은 호북에서는 보기 드물게 강이 아니라 산이 더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흥산에는 큰 도시보단 소소한 산촌들이 많았고, 단단한 화강암 지반을 가지고 있어서 광산도 제법 있었다.

흑마옥은 지반 전체가 화강암인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이곳 장촌에 자리를 잡았다. 화강암은 쉽게 마모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밀도가 높고 단단하다. 인간의 맨손으로 그러한 화강암 지반에 구멍을 뚫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동굴들은 감옥으로 사용하기에 적격이었다.

그들이 흑마옥으로 사용했던 폐광은 원대元代에도 정치범의 노역소로 쓰이던 장소였다. 자연적으로 수직 동굴이 생성되어 있는 것을 활용해, 도르래 줄에 엮어 사람을 내려놓고 그곳에서 평생 바깥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고즈넉한 분지에 무림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크게 보아 두 무리로 나눌 수 있는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각각 마을의 한쪽 끝으로 자리를 잡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행위는 지극히도 자연스러웠다. 그들은 태어나기를 서로와 분리되어 태어난 것처럼 한 사람도 섞이는 일 없이 자기 무리로 찾아 들어갔다.

“마지막 분대까지 모두 도착했습니다. 교주님.”

그들이 임시로 본부처럼 사용하고 있는 빈집으로 들어서며 포영의가 호완평에게 말을 걸었다. 장촌에 도착한 이래로 말없이 차만 마시고 있던 호완평이 포영의의 말에 얼굴을 들었다.

“사부님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계십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결국은 나타나실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저들의 준비는 어떠한가?”

“그들이 먼저 시작한 일 아닙니까. 준비가 제법 단단합니다.”

포영의가 비웃듯이 대답하자 호완평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검박하기 그지없는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포영의가 특별히 준비해 준 화려한 겉옷은 입지 않고 그대로 탁자 위에 올려 둔 채였다.

“입지 않으실 겁니까?”

호완평의 소박한 성정은 알고 있으나, 지금은 그가 교주로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대외적인 자리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천마만은 못해도 그에 준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한 포영의는 평소 천마가 즐겨 입던 것과 비슷한 화려한 비단 용포를 마련해 호완평에게 내밀었다. 하나 호완평은 포영의의 질문에 지긋이 웃기만 할 뿐 그의 뜻을 따라주진 않았다.

포영의와 달리 호완평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있었다. 수려한 외모를 가진 사부님께서 이 옷을 입으신다면 옷과 미모가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켜 더욱 광채가 나겠지만, 수수하기 짝이 없는 그에게 그러한 옷차림은 오히려 평범한 외모를 더욱 강조하는 구실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아서라. 뱁새가 황새 따라 하단 가랑이가 찢어진다.”

“교주님.”

예전이었다면 호완평은 자신이 천마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에게 있어 유일한 목표는 바로 천마처럼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요 몇 달 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의 태도가 적지 않게 바뀌었다.

체념이라고 말할 만큼 그늘진 것은 아니지만, 예전처럼 맹목적으로 천마의 뒤만 쫓지는 않게 된 것이다. 누구보다도 가까이에 있음에도 포영의는 호완평의 이러한 변화가 어디에서 연유했는지를 알지 못했다. 요 근래는 너무 바빠 차분히 호완평을 지켜볼 시간도 없었다.

“저들이 마을의 입구로 향하고 있습니다, 교주님. 이제 행동을 개시할 모양입니다.”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서던 곽진무는,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곤 의아한 듯 걸음을 멈췄다.

말없이 웃은 호완평이 툭 하니 포영의의 어깨를 치곤 밖으로 나갔다. 잠시 멍청하게 그 자리에 서 있던 포영의는 호완평의 뒤를 서둘러 따라 나갔다.

다 합해서 채 30여 호도 안 되는 조그만 마을 사이로 수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었다. 마을의 끝에서 끝으로 모여 있다고는 하지만 모여 있는 사람들이 수천 명을 헤아리다 보니 두 무리 사이의 거리는 고작해야 십여 장 정도에 불과했다.

이 많은 자들이 모두 추리고 추린 각 세력의 정예들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 몸을 부딪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날카롭게 도사린 예기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누군가 하나가 섣부르게 굴기라도 하면 불붙인 화약고처럼 터져 나갈 것이 분명한 분위기였다.

호완평은 막 마을 입구로 나서고 있는 적들의 수뇌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도 호완평의 일행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서로에게 기세를 흘리던 무인들이 자신들의 주인을 발견하곤 정중하게 기세를 물렸다.

호완평은 정도맹주인 현현천강과 그의 측근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의 일행 중엔 곽효도 포함되어 있었다. 말단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기수사의 뒤에 시립 한 그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호완평 일행을 응시하고 있었다. 호완평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현현천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뵙겠소. 본좌는 호완평이오.”

현현천강玄玄天剛 장성학將星學은 십존엔 들지 못했지만, 그에 거의 필적한다고 소문이 난 화경의 고수였다. 다른 십존들처럼 확고한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혈혈단신으로 그만한 경지를 이룬 까닭에 그 중립성을 인정받아 정도맹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그는, 어찌 보면 지극히 운이 좋은 사내이기도 했다.

“이번에 마교에 새로이 세대교체가 일어났다고 하더니 그 말이 참이었군. 본좌는 현현천강이라고 하오. 정도맹주의 직위를 맡고 있소.”

적대 세력이라고는 하나, 나이도 어리고 배분도 낮은 호완평이 먼저 호의를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도맹주가 상대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은 살벌한 대치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깍듯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태도가 깍듯하다고 해서 그들의 내심까지 상대를 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포권을 건네면서도 예리하게 상대를 살피고 있었다. 허점이라도 발견한다면 당장에 출수할 것 같은 형형한 시선들이다.

“이런 곳에서 정도맹주를 뵐 수 있다니 영광이구려. 한데 정도맹은 지금 어디를 가는 중이시오?”

상대의 목적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호완평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붙였다. 무생교를 치기 위해 길을 나선다는 시늉을 하고 있었으나, 기실 마교의 도발을 기다려 왔던 정도맹주는 서슴없이 그 말을 맞받았다.

“우리 정도맹의 목적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바요. 우리는 암암리에 음모를 꾸며 강호를 도탄에 빠트린 적도들을 상대하려고 하고 있소.”

무생교를 특별히 지칭하지 않고, ‘적도’라 두루뭉술하게 칭한 것은 장성학이 뜻하는 상대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노회한 늙은 생강의 날카로운 혀에 호완평은 빙그레 웃었다.

저 늙은것은 자신의 혀가 꽤나 매서운 줄 아는 모양이지만, 천마의 옆에서 수십 년을 살다 보면 겨우 이 정도의 빈정거림엔 눈 한쪽도 깜빡하지 않게 된다.

“적도라.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구려. 이제껏 강호에서 일어났던 비극이 정도맹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내 귀가 잘못된 겁니까?”

호완평의 적극적인 도발에 장성학의 눈빛이 붉게 변했다.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모를 리가 없는 정도맹의 무리들 사이에서도 심상치 않은 살기가 터져 나왔다.

뒷짐을 진 장성학은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호완평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작 초절정의 경지밖에 이르지 못한 완평이 어떻게 이렇게 건방질 수 있는지 그 연유를 알지 못했다.

“젊은 사람이 호기가 지나치군. 교주는 무슨 뜻으로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오? 설마하니 우리 정도맹이 이번과 같은 무도한 사건에 관여가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게요?”

오랜 세월, 절대자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의 존재감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천마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를 제외하면 허리를 굽힐 자가 거의 없었던 현현천강은 자연스레 기세를 발산하며 호완평을 압박해갔다.

그러나 호완평은 화경 고수의 기세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호랑이처럼 형형한 호목에 푸른빛이 돌았다. 발톱을 숨긴 맹수처럼 속으로 갈무리한 은밀한 힘이 그의 단단한 어깨를 팽팽히 긴장시켰다.

“그럼 아니라는 거요? 우리 마교를 장님으로 보지 마시오, 맹주. 우리가 그대들이 저지르는 수작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소?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이라. 하늘의 그물은 성기지만 결코 놓치는 법이 없소이다.”

“이런 발칙한!”

“어디서 헛수작인가! 감히 우리 정도맹에 무생교의 방수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우다니!”

노기에 찬 고함은 장성학이 아니라 그의 뒤에서 터져 나왔다. 정도맹을 두고 뒤에서 수작질을 부리는 흑도의 무리쯤으로 취급하고 있는 호완평에게 진심으로 분노한 자들이 여기저기에서 노성을 질러 댔다. 당장이라도 출수를 감행할 듯 들끓는 분위기에, 마교의 무사들도 기세를 끌어 올렸다.

보다 못한 장성학이 손을 들어 고함을 멈추게 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분노하는 다른 자들과는 달리 그의 눈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설마하니 천마가 일의 선후도 분간 못하는 머저리를 후계자로 삼지는 않았을 텐데. 호완평이 대체 무얼 믿고 이렇게 도발을 감행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생교와 우리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더욱 신중해야 할 텐데? 무슨 확신이 있기에 이리도 담대하게 나서는 거지?’

확실히 동수라고 하더라도 고수의 수는 마교 쪽이 월등히 많다. 하지만 천마가 빠진 그들은 절대 고수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쪽에는 화경의 고수가 셋씩이나 있는 반면, 저들은 교주조차도 초절정에 불과하지 않은가.

숨은 화경의 고수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살펴본 바에 의하면 적진엔 그 유명한 축융도나 만수백요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누명인지 아닌지 확인시켜줄 사람은 따로 있소이다. 내가 그대들을 막아선 것은 그자들에게 따로 부탁받은 것이 있기 때문이오.”

“무어라?”

“그대들이 이대로 무생교로 쳐들어간다면, 그간 그대들이 해왔던 일들에 대한 모든 증거가 사라질 게 아니겠소? 눈앞에서 교묘하게 벌어지는 금선탈각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할 수는 없는 일이외다.”

호완평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장성학의 속을 긁었다. 하지만 장성학은 그의 버르장머리 없는 말버릇보다 그가 하는 말의 속내가 더 신경 쓰였다.

이제껏 정도맹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정도맹과 마교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 왔다. 중간에 끼어들 여지가 있는 세력들은 자기들 휘하에 두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잔가지를 치듯 쳐낸 터라 주변을 완벽하게 정리했다고 여겼다. 한데 호완평의 암시에 의하면 그럼에도 그들의 시야를 빠져나간 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느닷없이 등장한 제삼의 존재에 긴장한 장성학이 자기도 모르게 백우경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뒤에 서 있던 백우경이 그의 시선에 설핏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아차 싶었던 장성학은 다시 시선을 돌려 호완평과 눈을 마주했다.

“양의검은 언제까지 기다릴 작정이시오? 이만하면 무대는 모두 준비된 것 같은데?”

호완평은 장성학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양의검? 양의검이라고?”

얼마 전 마교의 간자로 판명돼 무림공적에 오른 자의 별호가 호완평에 의해 거론되자 정도맹의 진영에 강한 파문이 일었다.

양의검 조세화라면 정도에서도 지지자들이 많던 이름난 협객이었다. 그 주군인 백우경 정도는 아니었으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의만을 좇는 대협으로 명망이 높은 자였는데, 하루아침에 변절해 마교의 편에 붙는 바람에 숱한 사람들의 마음에 실망과 분노를 안겨 주었었다.

그의 부름을 들은 조세화가 마교의 무리들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아직도 여전히 청혈단 특유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새파란 청의에 붉은 허리띠는 마치 그의 몸의 일부인 양 잘 어울렸다.

그가 정말 양의검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세인들의 입에서 강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교의 무리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에게 가장 화를 내고 있는 자들은 다름 아닌 청혈단의 형제들이었다.

조세화가 사라진 이후 그의 빈자리를 채우던 송기산宋企珊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침이라도 뱉을 듯 경멸에 찬 눈으로 조세화를 노려보았다.

“이 더러운 배신자 같으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모습을 드러낸 거냐? 의를 맹세했던 형제들과 단주에게 부끄럽지도 않단 말이냐?!”

한때는 친형제처럼 가까웠던 사람의 원색적인 비난에도 조세화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물처럼 담담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두 손을 들어 올려 깊이 포권했다.

“강호의 여러 동도들에게 인사를 보내오. 본인은 강호에 양의검이라는 별호로 불리던 조세화라고 하오.”

시끄럽다. 뻔뻔한 변절자가 하늘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의 인사에 여기저기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동요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는 것 정도는 미리부터 예상을 하고 있었던 눈치다.

“여러 동도들은 제 말을 들어 주시오! 제가 감히 오늘 이 자리에 나선 것은 푸른 하늘 아래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바라건대 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침묵을 부탁드리겠소. 저의 용건이 끝나고 나면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하셔도 겸허히 듣겠소이다.”

조세화는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낭랑히 외쳤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키운 그의 목소리는 마을을 둘러싼 산봉우리에까지 퍼져 메아리처럼 주변에 번져 나갔다.

당당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에 정도맹의 무인들은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조세화에게는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단순한 변절자라고 생각하기에는 그의 태도도, 그 눈에 어린 정광도 모두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대들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잘 알고 있으나, 나는 변절자가 아니오. 마교와 미리 내통한 적도 없었고, 내부의 정보를 바깥으로 빼돌린 적도 없소. 내가 변절자라는 것은 분명한 모함이며, 그 모함은 정체를 들킨 진정한 변절자가 내게 자신의 혐의를 뒤집어씌웠기에 생긴 것이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스스로의 무고함을 밝히려고 합니다. 강호의 동도들은 나의 이러한 억울함을 이해해 주기 바라겠소이다.”

주변의 소란이 일순 가라앉자 조세화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송기산이 반격에 나섰다. 그는 변절자로 알려진 조세화에게 가장 큰 적의를 불태우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기가 막히는군.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기껏해야 그따위 헛수작을 벌이는 건가? 자네가 지금 누구를 변절자로 몰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거냐고! 자네가 모함하는 자는 우리들의 단주야. 옥기린 백우경, 청혈단의 정신이나 다름이 없으신 단주님을 모욕하는 건 우리 청혈단을 모욕하는 거나 다름없어!”

그의 고함을 들은 청혈단의 다른 형제들도 노기가 등등한 얼굴을 했다. 조세화는 침착한 태도로 그런 송기산의 노여움을 맞받았다.

“송 형제. 형제는 저자가 옥기린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계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단주님께서 옥기린이 아니시라면 대체 누가 옥기린일 수 있겠나?”

“나 또한 그의 진면목을 볼 때까진 그가 백우경인 줄 알았소. 하지만 아니더군. 그는 우리 청혈단의 정신이 아닐 뿐만 아니라 진짜 백우경도 아니오.

그가 우리가 믿던 바로 그 사람이라면 대별산의 참사를 조장하지 않았을 거요. 무생교를 이용해 강호를 도탄에 빠트리지도 않았을 거고, 백귀야겁을 뒤에서 조종하지도 않았겠지.”

“조세화, 이 악적!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송기산은 그가 하는 주장을 좀처럼 믿지 않았다. 다만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조세화의 뻔뻔스러운 술수라고 치부하곤 아까보다 더한 분노를 불태우며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송 형제는 대별산의 일로 동생을 잃지 않았소? 눈을 똑바로 뜨고 보시오. 자신이 이제껏 누구를 위해 충성을 다 바쳤는지! 저자는 백우경이 아니라 곽효라는 자요. 마교의 반도이며, 천마를 암살하려다 실패해 도주한 진정한 악적이지. 여태껏 강호에서 일어난 모든 피바람은 저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술책이었소.”

조세화는 거침없는 태도로 백우경의 정체를 까발렸다. 그러나 피를 토하는 듯한 주장에도 그 말을 믿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은 채 조세화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기에 무언가 숨겨둔 한 수가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정도맹의 무인들은 허탈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조세화가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 주장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대체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누가 믿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물귀신 작전이라도 쓰겠다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옥기린이 변절자라고?

“자네는 지금 내 조카의 청백한 명예를 모욕했네. 그 빚을 어찌 갚을 작정인가?”

이번에 나선 것은 송기산이 아니라 백우경의 외숙인 천기수사였다. 제갈부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여 대고 있는 조세화를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역시 귀가 없지 않으니 요 근래 떠도는 소문을 들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그는, 곽효라는 자의 존재 자체를 아예 믿지 않았다.

그간 강호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그와 백우경의 합작품이었다. 기린패의 일은 물론이고 무생교로 인한 혼란도, 백귀야겁도 모두가 그들이 한 일인데 곽효인지 나발인지를 그가 알게 뭐란 말인가.

‘천마가 정말 바보 천치를 뒤에 세운 건가?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더니 그 말도 모두 헛된 것이었군.’

마교의 터무니없는 수작이 가소로웠던 제갈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고 말았다.

“이번에는 내가 묻겠네. 자네는 그가 자네의 조카임을 어찌 확신하고 있는가? 겉모습이 자네의 혈육 같아서인가? 아니면, 그의 마음 씀씀이가 자네와 똑같아서인가?”

어디선가 창노한 음성이 날아와 제갈부에게 질문을 되돌렸다. 누가 감히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지를 알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제갈부는, 느릿느릿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 일단의 거지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허리를 곧추세웠다. 허리에 십결의 새끼줄을 두른 늙은 거지 하나를 필두로 수백의 거지가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개방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푸른 청죽장을 짚고, 거지의 옷차림치고도 심하게 기운 누더기를 입고 있는 그 늙은 거지는 다름 아닌 개방의 용두방주 백결개百結丐 구장방具帳房이었다.

그의 뒤에는 후개의 표식을 한 젊은 거지 하나가 공손히 뒤를 따랐고, 열 명의 팔결 장로들도 모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을 제외한 다른 거지들도 족히 일류가 되어 보이는 제자들이었다.

하나하나가 무시 못 할 고수들이다 보니 마교와 정도맹의 양측은 더불어 긴장했다. 과연 천하제일의 방파다운 위용이다. 그들이 마음먹고 드러낸 전력은 정도맹이나 마교에 비해서도 그리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용두방주님? 여기까지 오시는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백결개 구장방은 표의개의 사제로, 정파의 어른 중 가장 배분이 높은 인물 중에 하나다.

어색하게 낯빛을 달리한 제갈부는 정도맹의 수뇌들을 대신해서 그의 안부를 물었다. 그의 등장을 모른 척할 수 없었던 다른 수뇌들 역시도 분분히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백결개는 그런 그들의 인사를 무시하며, 형형한 눈빛으로 제갈부를 바라보았다.

“허례에 불과한 인사는 되었으니 내가 한 질문에나 답하게. 자네는 그가 자네의 조카임을 어떻게 확신하고 있는가?”

“갑자기 그게 어인 말씀이신지요. 물어보나 마나 당연한 일 아닙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혈육인 아이를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흘흘흘.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다 이건가?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우리 개방도 바로 그러한 정 때문에 오랫동안 안개 속에서 헤맸으니 말일세.”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들이 이제껏 해온 짓거리들을, 우리가 모두 알게 되었다는 뜻이라네. 어쩌면 자네들이 모르는 일들까지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적어도 나는 저자가 자네의 친조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거든. 양의검의 말이 맞아. 저자는 백우경이 아니라 곽효야. 그는 내가 보증할 수 있는 바네.”

증거가 없다며 조세화의 주장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지만, 무려 개방 방주의 보증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체 누가 천하제일의 이목을 자랑하는 개방주의 확언을 거짓으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놀란 무림인들은 경악의 눈길로 백우경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야. 그럼 정말 저자가 옥기린이 아니라고?’

‘저자가 마교의 반도에, 이 모든 난세를 일으킨 주모자란 말이야?’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르자 곽효도 가만있지는 못했다. 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서서 개방의 방주에게 포권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옥기린이라고 합니다.”

곽효는 그의 정체를 밝힌 개방 방주 앞에서도 스스로를 옥기린이라고 칭했다. 노회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개방의 방주가 싸늘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자네가 누구인지 이미 다 알고 있네. 내 앞에서까지 가면을 쓸 생각인가? 그대가 옥기린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아네만.”

“아닙니다. 방주님. 저는 옥기린이 맞습니다. 방주께선 제가 백우경이 아니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겠으나, 옥기린이라는 별호는 진짜 백우경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손에 넣은 것이니 저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세인들의 앞에서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인정하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정도맹의 무사들은 일시에 혼란에 빠져들었다. 한 치의 부끄럼도 없이 스스로를 정의라고 믿고 있던 자들은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가 곽효라는 사실은, 정도맹이 무생교의 배후라는 주장에 대한 가장 확실한 근거였다. 그렇다는 것은 마교의 주장대로 그들 자신 역시 그간의 음모에 일익을 담당했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당당한 정도의 무사였던 그들이 졸지에 무생교와 다름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자부심 하나로 살아왔던 그들은 이처럼 치욕스럽고 놀라운 일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제갈부였다. 그는 틀림없이 조카라고 믿었던 자가 실은 조카가 아니라는 고백을 듣고, 정수리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저 아이가 내 조카가 아니었다고?”

제갈부는 백치라도 된 것처럼 혼잣말을 되풀이했다. 저 사람이 내 조카가 아니라면, 나와 함께 이제껏 모든 일을 해온 저 아이가 진정한 내 혈육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내 진짜 조카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이 무슨…….”

하지만 곽효는 이미 효용 가치가 다한 제갈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부드럽게 웃는 낯빛으로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개방의 방주를 보았다. 그린 듯이 온화한 미소와 차가운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백결개는 경멸에 찬 시선으로 곽효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 얼굴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구먼. 검협도 아니고 무려 천마의 얼굴이야. 그 얼굴을 하고 돌아다니는데도 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던가? 다들 둔해 빠졌군.”

백결개는 낮게 혀를 차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개방에서도 수십 년간이나 모르고 있던 일이지요. 남들을 탓할 게 아닐 것 같습니다만.”

“하긴. 그도 틀린 말이 아니지. 정도맹의 수뇌 사이에 자네 같은 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도 몰랐으니 개방의 눈이 멀었다고 말한들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지난 20년간 참으로 교묘히 버텨 왔군. 내 근 백수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왔으나 자네같이 교활한 자를 만난 것은 처음일세.”

“칭찬 감사합니다. 제가 자랑할 재주는 오로지 그것뿐이지요.”

곽효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이미 정체가 들통났으니 더 이상 백우경의 얼굴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역용을 풀고 스스로의 진면목을 세인들의 눈앞에 드러냈다.

사람들의 눈앞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해 갔다. 마치 사술처럼 보이는 그 광경에 사람들의 눈이 찌푸려졌다.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당당했던 협객이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비열하고 교활한 음모가로 변모했다. 아닌 말마따나 정말 뱀 같은 얼굴이다. 그의 본모습도 딱히 못생긴 건 아니었으나 조금 전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답다 보니 그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진저리를 치며 곽효의 변모를 지켜보았다. 정도맹의 무인들 사이에서 깊은 탄식과 한숨이 울려 퍼졌다.

“이제 모두들 사실을 아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금번에 강호에서 일어난 이 무참한 일들은 모두 저자의 소행이었습니다. 우리는 저자의 농간에 휩쓸려 그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켜 왔던 겁니다. 이미 모든 것이 음모라는 사실을 알았는데 또다시 저자에게 놀아나실 겁니까? 우리 정도맹은 중원의 정기를 지키는 기틀입니다. 대의와 명분이 없다면 근본을 잃게 됩니다! 더는 농락당하지 마시고 눈을 뜨십시오. 이번에 일어날 뻔한 정마대전은 저자의 야욕을 채우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조세화가 나서서 웅변했다. 이번에는 송기산도 그에게 반박하지 못했다.

조세화의 이야기를 들은 정도맹의 무인들은 확연히 동요했다. 개중 몇몇은 조세화에게 이미 사정을 전해 들은 바가 있었기에 깊이 탄식하고 있기도 했다. 긴가민가하면서도 그의 말을 온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는데, 눈앞에서 이러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그간 자신들이 해온 일에 대해 깊은 회의가 들었다.

“아미타불. 시주의 말씀이 사실이었군요. 부디 아니기를 바랐었는데…….”

아미파의 여고수인 정련靜蓮 사태가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불호를 외었다. 그녀를 비롯해 조세화와 미리 접촉했던 사람들은 어이가 없는 듯 머리를 젓거나 한숨을 쉬고 있었다.

고수들뿐만 아니라 일반 무사들의 동요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정의의 편인 줄 알았던 자신들이 오히려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웅성거리며 서로 간의 의견을 교환했다.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확연한 일이었다. 개방의 방주까지 나서서 곽효의 정체를 밝혔고, 본인 스스로도 인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은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당하시는군요. 저번의 일이 교훈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에도 같은 방법에 속수무책이시네요.”

사면초가四面楚歌. 말 그대로 적들에게 둘러싸인 거나 다름없는 아비를 바라보며 곽진무가 참지 못하고 빈정거렸다. 하지만 의아할 정도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곽효는 곽진무의 말을 듣고 되레 웃기 시작했다.

고요하지만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새겨졌다. 그는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오연히 장내를 둘러보더니, 자신을 조롱하는 아들에게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속수무책이라니, 그럴 리가? 너는 이 아비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말하지 않았더냐. 다음에는 그렇게 쉽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과연 그런가요? 제가 보기엔 궁지에 몰린 자가 입으로만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 네가 아직 어린 것이지. 사람은 언제나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있어야 하는 법이란다.”

웃으면서 말한 곽효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돌연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곽진무는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결개 역시 돌변한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듯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기색으로 곽효를 바라보았다.

“잠깐, 이게 무슨 일이냐? 갑자기 이게 웬……?”

“나이가 드셔서 판단이 흐려지신 모양이군요. 나설 데 안 나설 데를 가리지 못하는 것은 개방의 특성인가요? 그대로만 계셨으면 아름답게 빛나는 정도의 천하를 보셨을 텐데요. 물색없이 끼어드시는 바람에 그 좋은 세상을 못 보시게 되었군요.”

조금 전까지 같이 의견을 나누던 동료가 칼을 들어 목을 찔러 왔다. 언제나 등을 지켜주던 동문 사형제에게 등이 베이는 자도 있었다. 여태까지 친우였고 형제였던 자들이 갑자기 돌변해 그를 믿고 있던 사람들을 공격해갔다.

정도맹의 무인들은 당황하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때를 맞춰 일단의 무리들이 난전을 거듭하고 있는 자들의 사이를 빠져나갔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움직임은 일사분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의 정체는 여태껏 곽효와 손발을 맞춰 왔던 동조자의 무리였다. 개방과 곤륜을 뺀 나머지 팔파와 오대세가, 그리고 맹주 본인과 그의 직속 무력단체까지. 그들은 미리부터 짜기라도 한 것처럼 곽효의 등 뒤에 서서 나머지 사람들과 적대적으로 대치했다.

“이, 이게 무슨!”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있지요. 천마에 대한 정파의 원한은 제 예상보다 컸던 모양입니다. 저의 정체를 알고도 기꺼이 협력해주는 친구들이 있더군요. 간혹가다 도무지 말을 들어먹을 것 같지 않은 자들도 있긴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던 곽효는 힐끔 제갈부를 바라보았다. 곽효에 이어 자신의 가문에게까지 배신당한 제갈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대부분은 시세를 파악하는 일에 능했습니다. 아, 물론. 옛 선인들이 남겨 준 유산 역시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지요.”

곽효가 그동안 해 온 작업 덕분에 정도맹의 하위 무사들 중엔 곽독충에 중독된 자가 알게 모르게 많았다. 그들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곽효의 숨겨진 칼이 되었고, 곽효는 본인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그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동지라고 믿었던 적에게 당한 사람들이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주로 정도맹의 주도 세력에 반발하던 자들이거나, 구파 일방에게 위협을 줄 정도로 세력이 커진 이들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현재 정도맹이 가고 있는 노선을 반대할 만한 강직한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조세화가 미리 접촉했던 상대들이기도 했다.

“이런 천인공노할 놈들! 이러고도 네놈들이 정파라 자부할 수 있단 말이더냐!”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에 분노한 백결개가 사자후와 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는 이런 참담한 일을 꾸민 곽효보다도, 그에 순순히 따르고 있는 팔파의 무리들을 더욱 노여워했다. 그를 따라온 개방의 정예 제자들 역시 의분을 참을 수 없는지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곽효는 그의 엄청난 진노에도 말없이 웃기만 했다. 영민한 그의 두 눈에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가 흘렀다.

“물론 저들은 정파입니다. 오늘의 전투가 끝나고 나면 그들의 이름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게 되겠지요.”

그가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리자 사방의 산봉우리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속속들이 솟아났다. 그들은 무생교의 이름으로 감추어 두고 있던 흑마옥의 무림공적들이었다.

하나같이 예전의 무공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혈루단까지 복용해 한 단계 더 높은 성취를 이뤄낸 그들은 독 안에 든 쥐를 보는 것처럼 의기양양한 태도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비릿한 살소를 흘렸다.

“정파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정도맹을 위하여. 이만 사라져 주셔야겠습니다. 방주.”

곽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결개의 옆구리가 화끈해졌다.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설마 등 뒤에서 습격을 받을 줄은 몰랐던 백결개는 놀란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습격한 사람은 기가 막히게도 그의 후개인 비영의개飛影醫丐였다. 후개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시선으로 소매 속에 감춰 두었던 비수를 휘둘렀다.

손자처럼 귀여워하던 제자에게 목숨을 위협당한 백결개는 급한 김에 손으로 비수를 막았다. 하나 아무리 호신강기를 둘렀다고 하더라도 쇠를 두부처럼 자르는 비수를 인간의 피육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결개의 오른손 손가락 중 절반이 그 자리에서 잘려나갔다. 놀란 장로들이 달려들어 후개의 앞을 막아섰지만 백결개의 목숨을 노리는 후개의 암습을 멈추지 못했다.

보다 못한 호완평이 마교의 무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대로 가다간 모든 것이 곽효의 뜻대로 될 게 뻔했다.

“공격하라! 저들이 결코 뜻을 이루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그의 명이 떨어지자 그렇지 않아도 몸이 달아올라 근질근질하던 마교의 무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적에게 달려들었다. 곽효의 무리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교도들에게 칼끝을 돌렸다. 무생교의 잔당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쏟아지는 해일처럼 분지 아래로 분분히 몸을 날리며 싸움터에 뛰어들었다.

세 개의 세력이 한데 뒤엉킨 싸움은 처절한 난전으로 화했다. 이 싸움은 본인이 살기 위해 필히 타인을 죽여야 하는 싸움이었다. 살아남는 자가 정의가 될 것이며, 이기는 자만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적자생존의 혈투.

호완평도 곽효도 이 한 번의 승부에 모든 것을 걸었다. 조용하던 산촌 마을이 피와 고함으로 가득 찬 지옥도로 바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굴을 모르는 자는 모조리 적이었고,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안심할 수 없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믿을 수 있는 그들의 싸움은 약한 자들부터 차례차례 희생자를 낳았다.

곡물조차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메마른 토양 위에 단비처럼 혈우가 쏟아져 내렸다. 한때는 사람이었던 고깃덩어리들이 차곡차곡 바닥에 몸을 누인다. 눈을 뜨고 보지 못할 잔혹한 참상이 여기저기에서 이어졌다.

무려 40여 년 만에 일어난 정마대전은 이렇듯 잔혹하게 막이 올랐다.

***

‘헉. 헉. 헉.’

문평은 쥐어짤 수 있는 모든 진기를 쥐어짜 달리고 또 달렸다. 그의 평생에 있어 이토록 절박하게 달려 본 적이 없었다. 필요하다면 선천지기라도 기꺼이 끌어 썼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다리가 너무 느린 것이 한스러웠다. 아무리 내력을 쥐어짜도 그가 원하는 속도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늦으면 안 돼. 그러면 그 사람이 죽어. 아무리 그가 천마라도 십존 중의 아홉 명을 홀로 상대할 수 없단 말이야!’

숨이 끊길 듯이 달리면서도 그의 뇌리를 채우는 것은 오로지 천마뿐이었다.

본인을 제외하자면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아홉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오연히 웃던 그 남자. 절체절명의 위기를 앞두고도 자신의 신변보다는 문평의 안위를 먼저 염두에 두었던 바로 그 사람.

문평의 인생에 그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천마는 심술궂지만 다정했고, 얄밉기 짝이 없는 말만 골라 해도 끝내 미워할 수만은 없는 남자였다. 그는 퉁명스럽게 굴면서도 언제나 문평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괴롭히고 놀리면서도 결정적인 부분에선 항상 그에게 져 주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를 최선으로 여겨 준 남자가 그 남자다. 오만하고 거만하고, 가끔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수 없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수천의 생명보다 너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해 주는 사람은 그 사람이 유일했다.

천마가 어느새 이리도 깊이 들어온 것일까? 문평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를 마음에 품었던 첫 번째 순간을 떠올릴 수 없었다.

처음에는 분명 미워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엔가 이리되었다. 그가 윤승효의 행세로 자신을 농락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만 하더라도 그를 원망하고 혐오했었는데 이제는 그의 목숨이 무엇보다도 간절했다. 언제나 자신만을 생각해주는 그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못되고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문평에게 천마는 하나뿐인 존재였다.

그를 살리고 싶었다. 앞으로도 그와 계속 같이 있고 싶었다. 윤승효에게 느꼈던 것과는 다른 감정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것 역시 사랑일는지도 모른다.

‘살아 계셔야 합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원망하겠습니다. 원망하고 미워할 겁니다. 사람을 이렇게 길들여 놓고는 무책임하게 내버리고 가시다니요. 책임을 지세요. 교주님. 당신이 내게 한 모든 일에, 당신이 내게 준 바로 그 마음에,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책임을 지시란 말입니다!’

붉어진 눈시울 때문인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문평은 손등으로 눈을 닦아 내며 진기를 운용했다. 한순간에 나무와 숲이 사라지고 바위가 뒤로 처졌다.

멀리서 은은히 칼부림 소리와 거친 함성이 들려왔다. 익숙한 전장의 소리. 죽음의 소리다. 이미 장촌에서도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문평은 더욱 빠르게 몸을 날렸다. 너무 늦지 않았다면 좋을 텐데. 몇이라도 지원군을 데리고 갈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러나 그가 산마루에 올라서서 본 광경은, 그가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가져온 모든 희망을 산산이 깨부수는 것이었다. 그의 발아래 이제껏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오로지 서로를 죽이는 일에만 몰두한 자들이 시체로 산을 이루고 피로 강을 만들었다. 어찌나 많은 피가 바닥에 흘렀는지 흙이 질척질척했다. 피로 만든 진창이 생긴 것이다. 그들이 날리는 강기와 검기에 마을이 온통 폐허가 되었다. 개중 고수들의 싸움은 더욱 지독해서, 주변에서 싸우고 있는 다른 자들조차도 그들의 곁엔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문평은 안력을 돋워 호완평의 모습을 찾았다. 제멋대로 뒤엉켜 있는 난전 속에서 사람 하나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호완평은 고수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자였다. 주위에 가장 많은 공간을 두고 싸우는 이들 사이에 그가 속해 있었다. 그의 곁에는 곽진무와 포영의가 함께 싸우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검고 푸른 그림자가 희끗희끗했다. 최소한 초절정 고수 이상은 되는 자들의 싸움인지라 이 거리에서도 그 격렬한 여파가 느껴졌다. 하지만 문평은 그들만이 천마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최소한 호완평 정도의 무위가 아니고서는 십존의 손에서 천마를 도와줄 수 없었다.

문평은 굳은 결심을 하고 용감하게 몸을 날려 난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허리에 차고 있던 박도를 단단히 손에 든 그는, 천뢰신공을 이용해 빠듯한 뇌기를 끌어 올렸다.

아직 무공의 수위가 일천해 그럴듯한 위용을 보일 순 없지만, 그래도 천뢰신공은 그가 알고 있는 무공 중 가장 강한 무공이다. 대적할 수 없는 고수라면 모르겠으나 그와 비슷한 수준을 상대한다면 이 정도의 수위로도 제법 쓸 만한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으악. 아아악!”

“이런 개새끼! 죽어라!”

죽음과 삶이 난무하는 전장은 문평이라고 해서 피해 가지 않았다. 그가 전장에 뛰어들자마자 눈이 뒤집힌 사내 하나가 머리 위로 긴 장창을 휘둘러 왔다. 창으로 고수 소리를 들어 왔다면 제법 정련된 무공을 지녔을 텐데, 사내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마구잡이였다. 그가 지나친 살업에 반쯤 정신이 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문평은 가볍게 도를 휘둘러 그의 창대를 꺾었다.

창대에 도를 붙이자마자 뇌기를 흘려보내 상대의 몸을 경직시키고, 창의 중심부를 자르는 동시에 상대의 배를 걷어차는 일련의 동작은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매끄럽기 짝이 없었다.

사내가 뒤로 나가떨어지자, 그 사이를 철퇴를 든 자가 메웠다. 날렵한 흑의에 차려입은 각반 토시가 왠지 낯이 익었다. 이자는 아무래도 마교인인 것 같아 문평은 고함을 질렀다.

“나는 참혼대 소속이야! 저리 꺼져!”

다행히 그는 문평의 말을 제때 알아듣고 꺼져 주었다.

혼잡한 전장을 단신으로 헤치고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이 뒤집힌 자들은 칼을 든 상대만 보면 무조건 덤벼들었고, 문평은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닥칠 때마다 그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그러한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는 와중이니 그라고 안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의 몸 여기저기에 핏줄기가 비쳤다. 다른 자들의 무기에 의해 베이고 찢긴 흔적들이다. 하지만 이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탁월하게 운용되는 보법이 아니었다면 고작 이 정도의 상처로 끝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수백 장의 산길을 단숨에 달려 올라온 데다 숨도 고르지 못하고 격전에 뛰어들었던 문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기가 달리는 것을 느꼈다. 생사현관을 타통해 기의 수발이 자유로워졌다고는 하지만 그는 아직 절정에 불과할 뿐이다. 초절정에 가까운 내공을 다 제 것으로 만들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낭비하는 것도 많았다.

시간이 갈수록 도를 든 팔이 무거워졌다. 인간의 피와 기름에 젖은 박도의 날은 시시각각 무뎌지고 있었다. 전장에 뛰어들어 벌써 열에 가까운 사람을 해친 것 같은데도 그는 호완평에게 절반도 가 닿지 못했다.

이를 악문 문평은 자신의 목을 노리며 달려드는 암기를 쳐 내며 눈을 부릅떴다. 이런 데서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천마의 목숨은 시시각각 죽음에 맞닿아 있을 것이다. 머뭇거리다 때를 놓친다면 천추의 한이 되겠지. 문평은 그런 한을 가슴에 담고 살고 싶지 않았다.

문평은 내기가 부족한 걸 알면서도 반천회류의 수법을 시전했다. 그를 향해 검기를 날리던 자의 등 뒤로 몸을 옮긴 문평은, 그자가 따라잡기 전에 다시 한번 같은 수법을 사용해 그자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연이어 시전한 무리한 절초에 기혈이 진탕되어 울혈이 치솟았다. 문평은 목구멍까지 넘어온 울혈을 꿀꺽 삼키며 다시금 반천회류의 수법을 썼다. 누구와도 검을 맞대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은 채 그는 사람들 사이를 교묘하게 헤치고 나갔다.

서너 번을 더 같은 방식을 사용하자 이제는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현기증이 났다. 울컥울컥 계속해서 올라온 선혈로 인해 앞섶은 이미 피범벅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노력 덕분에 호완평의 근처에 이를 수 있었다. 그는 이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마중사기 중 세 사람이 맞서 싸우는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곽진무와 포영의가 합공을 하는 사람은 두 손에 시커먼 강기를 일으킨 광폭한 고수였다. 신선같이 자애로운 얼굴을 가졌음에도 그의 손속은 독랄하기 짝이 없었다.

정도맹에서 정식으로 귀빈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 문평은 상대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보아다. 그는 정도맹의 고수인 현현천강 장성학이었다. 그는 자신의 별호이기도 한 성명절기를 휘두르며 두 사람의 초절정 고수를 무섭게 압박해갔다.

그러나 그런 장성학조차도 호완평이 싸우는 상대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호완평이 단신으로 상대하는 자는 다름 아닌 곽효였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호완평은 화경의 고수인 곽효와 맞서면서도 그에 밀리지 않는 대등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밖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는 초절정이 아니라 화경의 고수였다. 심지어는 현현천강까지 그들과 거리를 둘 정도로 그들의 싸움은 흉험했다. 문평과 같은 경지의 사람으로서는 단지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혼을 제압한다는 뜻의 제백도劑魄刀는 태산 같은 압력으로 곽효를 베어갔다. 날렵한 협봉검狹鋒劍을 휘두르는 곽효는 교활하고 매서운 방식으로 그런 호완평의 빈틈을 기습했다.

그들의 싸움은 한 마리 호랑이와 독각룡의 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 베는 것이 아니라 찌르는 것에 특화된 곽효의 검술은 예리하고 살기가 넘쳤고, 호완평의 도는 웅혼하고 패도적이라 그 기질이 확연히 비교되었다.

그들의 무기가 한 번 부딪칠 때마다 무시무시한 기파가 퍼져 나갔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문평은 그들의 곁에 다가갈 수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문평은 자신 때문에 호완평의 정신이 흐트러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함을 질렀다. 그에게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건곤일척의 승부보다 천마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큰일 났습니다, 단주님! 교주님께서 지금 위험에 처하셨습니다!”

문평에게 있어 마교의 교주는 어디까지나 천마다. 그가 교를 떠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호완평은 제대로 된 교주가 아니었으니 천마가 아닌 호완평을 교주로 부르는 것에는 익숙지 않았던 것이다.

주변의 상황을 돌아보지 않고 눈앞의 상대에만 집중하던 호완평이지만, 문평이 외친 소리에는 얼굴을 들었다. 솔직히 말해 호완평에게도 ‘교주’란 사부를 뜻하는 말이었기에, 문평의 말에 반사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제야 문평이 걸레 꼴이 된 모습으로 자신의 근처에까지 와 닿은 것을 알았다. 그는 놀란 눈빛으로 문평의 주위를 둘러보며 사부의 안부를 물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냐? 사부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지?”

“이곳으로 오시는 도중에 습격을 받으셨습니다. 십존 중 무려 아홉 명이 모여 그분을 기습했습니다!”

“뭐라고?!”

호완평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현현천강을 어렵게 상대하고 있던 곽진무와 포영의도 덩달아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거, 이거.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이 안 되는구먼?’

곽효는 상대하기 쉽지 않은 적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흔들어준 문평을 기특하게 여기며 빙그레 웃었다.

천마가 애지중지하는 새끼 새가 저 꼴이 된 채 혼자서 도착을 한 것을 보면 그가 보낸 십존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모자라는 것보단 남는 게 낫다고 여겨 무리수를 두긴 했다. 하나뿐인 화경 고수를 잃은 각 문파들에게 이 대가를 치르려면 등골이 휠 터인데, 천마 하나를 없애자고 그런 손해를 감수했으니 그로서도 남는 장사는 아니다.

“여전히 비열한 수법만 쓰는군. 한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화경 고수 아홉을 보냈단 말이지?”

강호의 상식대로라면 그 정도의 함정에선 천마가 아니라 대라신선이라고 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기가 막힌 호완평은 두 눈에 표독하게 날을 세우며 곽효를 노려보았다.

눈빛만으로 사지를 토막 낼 것 같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곽효는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입가에 잔인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진짜로 비겁한 건 내가 아니라 천마야. 무려 아홉이나 되는 화경 고수를 보내야 겨우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하다니, 그거야말로 반칙이 아닌가? 공정하지 못함을 탓하려면 내가 아니라 그자를 탓해야지. 그자야말로 불공정함 그 자체니까.”

곽효는 태연자약하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분노한 호완평은 부득 이를 갈아붙이며 제백도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혼백조차 제압한다는 날카로운 도가 흉험한 도강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는 등 뒤를 돌아보지도 않으며 그의 호위들을 불렀다. 천마가 물리친 후 그에게 따라붙어 있던 마영들은 이런 격전 속에서도 그림자 속에 숨어 주인의 안위를 지키고 있었다.

“마영들은 모두 들어라! 속히 이 자리를 벗어나 태상교주께로 향한다! 그분에게 만에 하나 일이라도 생긴다면 모두가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하도록!”

“존명!”

“너는 마영들을 이끌고 어서 빨리 사부님께 돌아가라. 이곳은 내가 정리하겠다.”

사부의 안위를 걱정한 호완평은 자신의 마지막 목숨줄을 모조리 문평에게 붙여 주었다. 놀란 포영의가 반대하려고 했지만, 그가 입을 열기엔 현현천강의 기세가 너무 막강했다.

“사형!”

포영의는 채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이쪽을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그러나 호완평은 포영의의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문평을 재촉했다.

“어서 가거라. 어서!”

“그렇게 놔둘 순 없지. 내가 그런 꼴을 가만 두고 보리라고 생각하나?”

이런 상황에서 만에 하나 천마가 살아남는다면, 이제껏 해 온 모든 일들이 도로 아미타불이 되어 버린다. 천마가 적에게 얼마나 무자비한 존재인가를 잘 알고 있는 그가, 어설프게 후환을 남겨 두는 바보짓을 할 리 없다.

곽효는 순식간에 몸을 돌려 문평의 목을 찔러 갔다. 천마의 위치를 알고 있는 그의 입을 봉함으로써 마영들의 발걸음을 늦추려는 수작이었다. 대경한 호완평이 황급히 그사이로 끼어들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호완평보다 문평이 더 급하다고 생각한 곽효가 본격적으로 문평을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날렵하기 짝이 없는 협봉검의 기묘한 움직임을 무거운 대도로 따라가는 것은 벅찬 일이다. 더군다나 호완평은 남을 지키면서 싸워본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막상막하로 싸울 때와는 달리 등 뒤가 막히자 호완평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문평은 그사이를 틈타 몸을 날리려고 했지만 교활한 곽효는 그의 도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짧은 사이에 수많은 공방이 지나갔다. 어떻게든 문평을 죽이려는 곽효와 문평을 밖으로 내보내려는 호완평은, 문평을 가운데 두고 격렬하게 맞붙었다. 그들의 공세 때문에 문평은 멀쩡하던 옷이 찢어지고 팔다리에 지금까지보다 더 험한 검상을 입었다.

검풍에 머리가 날려 봉두난발이 되어 버린 문평은 자신의 도를 움켜쥐고 곽효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그 눈을 본 곽효가 비릿하게 입매를 뒤틀었다. 고작해야 벌레 같은 남첩 주제에 건방진 눈을 하고 있는 것이 그의 비위를 뒤집어 놓았다.

“천마와 잠시 어울렸다고 해서 너 자신의 가치를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고작해야 정액받이에 불과한 주제에 맹랑한 눈이다.”

곽효가 그의 처지를 대놓고 조롱하자 문평도 곱게 참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곽효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였다.

“닥쳐라. 이 개자식아!”

“너같이 주제를 모르는 놈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남았을까? 너무 서러워 마라. 천마보다 어쩌면 네가 먼저 저승에 도달할 수도 있으니. 살아서도 사이좋은 봉황이었으니, 죽어서는 비익조가 되려무나.”

천마가 애지중지하고 있는 상대를 난도질할 기회가 생긴 것에 곽효는 적잖은 만족감을 느꼈다. 자신의 손으로 천마를 직접 죽일 수는 없었으나, 그가 가장 아끼는 연인을 죽인다면 아내에 대한 빚은 충분히 갚는 셈이다.

곽효는 길게 검을 뻗어 문평의 미간을 노렸다. 별것 아닌 그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 주고 싶었다. 이따위 사내를 천마가 어째서 마음에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마의 정인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를 죽일 이유는 충분했다.

“개를 때릴 때도 주인을 보고 때린다는데, 넌 대체 뭘 믿고 내 잡초를 함부로 잡아 뽑는 거냐? 화단을 보면 주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지.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너는 참 머리가 장식이구나.”

협봉검의 날카로운 강기가 문평의 머리를 막 두 쪽으로 만들 무렵이었다. 곽효의 머리 위에서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 커다랗고 둥근 것이 그의 얼굴 위로 강렬하게 날아왔다. 피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엄청난 기세에 곽효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그가 급급히 물러선 바로 그 자리에 깨진 수박 같은 것이 퍽 하고 떨어져 내렸다.

사람의 골과 뇌수가 형편없이 깨져 바닥을 뒹굴었다. 정신이 없어 그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으나 어쩐지 생김새가 눈에 익었다. 등골이 서늘해진 곽효가 자세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그를 향해 둥근 물체가 다시 한번 쏘아졌다. 자기도 모르게 검을 뻗어 그것을 꿰뚫어 버린 곽효는 강하게 진탕되는 내기를 이기지 못하고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놀란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자신의 검에 꿰인 사람의 머리가 보였다.

막 죽은 것처럼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그 머리는 다름 아닌 사도굉의 것이었다.

“이, 이게 무슨…….”

십존 중의 하나인 사도굉의 머리가 목만 남은 채 그의 검에 꿰뚫려 있었다.

심장이 툭 떨어진 곽효는 믿기지 않는 시선으로 위를 응시했다. 그가 고개를 들자 하늘에서 몇 사람의 수급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도불속 가지각색의 모양을 한 그 머리통들은 곽효의 머리를 지나 발치에 나뒹굴었다.

정확히 열 개. 열 개의 수급이다. 곽효는 그 열 개의 머리가 살아생전에는 십존과 초혼일절로 불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머리 위에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센 기파가 맴돌고 있었다.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존재감이 전장 전체를 가득히 메웠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악을 쓰고 있던 무인들은, 그 무시무시한 기도에 마치 뱀 앞의 개구리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못 하고 얼어붙었다.

적자생존. 오로지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계에서 살아온 강호인들은 자신보다 강한 자를 본능적으로 알아보았다. 지금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강자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 오로지 홀로 오롯한 절대자였다.

발밑에 공기로 만든 계단이라도 있는 것처럼 천천히 대기를 밟고 내려오는 남자는 천인天人처럼 수려한 얼굴에 조각 같은 몸매를 한 미남자였다.

사람들은 단지 그의 얼굴만 보고도 그가 누군지를 알아차렸다. 당금 천하에 이러한 기도와 위압을 가질 사람은 달리 없었다. 그가 바로 천마였다. 천마 혁련상. 천하제일인이며 천하제일마. 그리고 어쩌면 고금제일인일지도 모르는 남자.

“이걸 모두 들고 오느라 무거워 죽는 줄 알았다. 한두 놈만 보냈어도 가뿐히 들고 왔을 텐데, 머리가 무려 열 개나 되니 흘리지 않게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적잖게 신경이 쓰이더구나.”

천마는 수급을 들고 있던 손을 귀찮은 듯 탈탈 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발치에서 뒹굴고 있는 수급들이 그가 한 말의 진정한 의미를 적나라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반천호접을 제외한 아홉 명의 십존이 모조리 그의 손에 죽었다. 각개 격파를 당한 것도 아니고, 동시에 공격했다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천마 또한 옷이 찢어지고 뺨이 긁히는 등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목숨을 건 생사투를 헤쳐 나왔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누가 봐도 천마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십존의 대다수가 덤벼들어도 천마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엄청난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 무림인들은 할 말을 잊었다. 다만 할 말을 잊었을 뿐만 아니라 솔직히 말해 싸울 의욕조차 모조리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 어떻게 이런, 어떻게 이럴 수가?”

이번만큼은 확실히 천마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곽효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댔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다음 한 수를 생각해 내던 그의 머릿속이 텅 비었다.

천마가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었다. 이건 숫제 괴물이 아닌가? 아무리 현경의 고수라고 해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질문에 일일이 답해 주기엔, 우리 사이의 관계가 그리 살가웠던 것 같지는 않군. 게다가 저번 일로 맹세한 것도 있어서 네 말을 길게 들어주진 못하겠다.”

“무, 뭐?”

천마는 피에 젖은 손을 곽효의 머리로 뻗었다. 사람의 손이라고 하기보다는 대량 살상 무기에 더 가까운 그것으로 급소가 겨눠지자 움찔 놀란 곽효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이번만큼은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천마가 그럴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마가 곽효의 머리를 향해 뻗었던 손을 강하게 움켜쥐자, 무른 두부가 으스러지듯이 그 손길 아래 곽효의 머리가 으스러졌다. 얼굴 전체가 산산이 깨어진 채로 그의 몸이 서서히 기울어 바닥으로 쓰러졌다.

넓디넓은 전장 위로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그 광경에 넋을 잃었다.

모든 음모의 배후자가 어이없이 죽어 버렸다. 20여 년간 다른 자의 탈을 뒤집어쓰고 살아왔던 교활한 남자가, 정도맹을 충동질해 인면수심의 일을 저지르게 하고, 곽독충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꼭두각시 삼았던, 그것도 모자라 구파일방 중 팔파를 자기 손에 넣기까지 했던 희대의 효웅이 고작 천마의 손짓 하나에 간단하게 머리가 날아가 버렸다.

억울할 정도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죽은 사람은 물론이고 산 사람들조차도 그 모습엔 그만 허탈해지고 말았다. 천마의 존재 앞에선 치열한 욕망에 아등바등 살아온 인생 자체가 한순간에 헛것이 되어 버린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모든 이들은 스스로의 존재가 미물처럼 느껴졌다.

천마는, 저 말도 안 되게 거창한 존재는 한갓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약속은 지켰다, 문평. 네 부탁대로 살아서 돌아왔다. 그러니 이제는 용서해 주겠지? 애초에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피가 묻은 손을 탁탁 털어내던 천마가 문평을 돌아보며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죽을까 봐 안달복달하고 있던 문평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눈을 크게 뜨며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뚝 뚝 뚝. 문평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안도의 눈물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떨리는 입술을 열어 그를 불렀다.

“교주님…….”

깜빡깜빡 그가 눈썹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다 큰 사내가 뭐 저렇게 우느냐고 생각했지만, 천마는 그 얼굴이 마치 비에 젖은 배꽃 같다고 여겼다.

격정을 참지 못한 문평이 달려와 천마의 품에 안겼다. 그토록 남의 눈에 신경을 쓰는 녀석이,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잃어버린 어미를 다시 찾은 젖아기처럼 한사코 매달리며 천마를 부르고 또 불렀다.

“교주님, 교주님! 맙소사. 교주님! 정말 무사하시군요.”

“그래. 그래. 무사하다. 약속은 지킨다고 하지 않았느냐.”

“정말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살아남지 못하실 줄 알았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정말…….”

“쉬이, 괜찮다. 울지 마라. 아가. 울지 말라니까. 그렇게 계속 울면 눈이 짓무르지 않느냐.”

마영들은 물론이고 그의 제자인 마중사기조차도, 천마가 이렇게 다정하게 상대를 어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아가라니. 누가 아가란 말인가? 나이가 서른은 넘고 온몸에 칼자국이 나 있는 저자가 아가인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은 혼백이 몸을 떠나는 것만 같은 충격적인 체험을 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수천 명의 시선 따윈 고려치 않은 뜨거운 애정 표현으로 서로의 사이를 과시하고 있었다. 천마는 아리따운 여인을 끌어안듯 문평의 허리를 안고 다정히 그를 달랬다. 문평은 그의 앞섶에 머리를 묻고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사람들은 눈이 썩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천마가 문평의 정수리에 입 맞추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상의 미남자가 바닥을 기어 다니다 막 일어선 것 같은 흙투성이의 남자를 보석처럼 감싸고 있었다.

강호에 알려지기로, 제2차 정마대전은 단신으로 십존을 꺾은 천마가 전장에 나타남으로써 갑작스럽게 종결되었다고 한다. 그는 홑몸으로 아홉 명의 화경 고수를 꺾었으며, 공동의 마지막 대를 끊었다.

그가 그날 죽인 고수는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곽효를 죽였고, 곽효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한 팔파의 장문인들을 한꺼번에 처결했다. 오대문파의 수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동안의 잘못을 문파에 묻지 않는 조건으로 스스로 자결해야만 했다.

그렇듯 음모의 배후가 사라진 후에도 천마는 뒷마무리까지 확실하게 했다. 그는 정도맹과 마교를 동시에 부려 무생교의 잔당을 쓸어버렸다. 흑마옥이 있던 동굴은 화탄으로 막아 버렸고, 혈마단을 복용한 자들은 제아무리 자잘한 놈들이라고 할지라도 살려 두지 않았다.

그런 후에야 천마는 마교의 인원들을 데리고 신강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처음 약속했던 바를 분명히 지켰다. 오로지 무생교의 잔당만을 처치한 이후에 신속하게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제2차 정마대전은 그 특이한 결말 때문에 이후로도 두고두고 전설로 회자되었다. 수천이 넘는 무림인들을 단 일인의 위세로 제압한 것은 이후로도 없을 기적 같은 위업이다.

그러나 그날의 일을 미처 보지 못한 자들의 안타까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은 그날의 일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 대략적인 사건 진행은 말해 주는 자가 있어도, 그날의 무용담을 신나게 떠드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질 좋은 술로 꼬시는 사람도 있었고 친분으로 달래는 자도 있었지만, 생존자들은 그 일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입을 다물고 그저 씁쓸히 웃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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