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21 장(8권) (22/26)

제 21 장

조세화는 창밖으로 손을 뻗어 손바닥에 마른 볕을 받았다.

늦은 봄은 천천히 여름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낮이 길어지고, 오후의 햇볕은 조금씩 열기를 더해 갔다. 하루하루 정오의 그림자가 달라지고 있었다. 바깥은 지금 한창 농사일로 분주할 터였다.

지금은 하루 중에 가장 바쁠 오시午時 무렵이다. 농부들은 새참을 들기 시작했을 거고, 상인들은 물건에 내리쬐는 볕을 막기 위해 차양을 칠 터였다. 무인들은 몸을 단련하기 위해 한창 땀을 흘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청혈단에선 이 시간에 항상 마보를 했다. 다른 문파들은 좀 더 날씨가 선선한 아침 무렵에 시작하지만, 숨이 턱까지 차는 난전에 걸맞도록 체력을 길러야 하는 그들은 일부러 시간을 늦춰 마보를 하곤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세화는 정신없이 바쁜 삶을 보냈다. 하루하루, 아니 한 시진 한 시진이 꽉 차 있는 보람 있는 나날이었다.

손에서 이토록 오래 검을 놓아 본 것이 얼마 만일까? 문득 하릴없는 의문이 들어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아무리 오랫동안 생각해 봐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의 첫 기억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그의 손에 첫 번째 목검을 쥐여 줬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때가 두 살이었던가, 세 살이었던가? 수련용 검이 아니라 장난감에 불과한 조그마한 죽도였지만 어린 조세화는 하루 종일 그 검을 손에서 놓질 않았다.

장난감 검이 수련용 목검으로 바뀌고, 그 검이 다시 진검이 된 뒤에도, 질 좋은 쇠로 정련한 철검이 부러지고 깨져 나가도 검을 바꾸고 또 바꾸어 가며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검을 수련해 왔다.

조세화는 텅 빈 눈으로 아무것도 없는 손바닥을 응시했다. 꾸준한 수련으로 인해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 위엔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평생을 같이해 온 검은 물론이고, 목숨보다 더 중요시했던 의형제도, 심지어는 그의 인생조차도 모조리 이 손아귀를 빠져나가고 말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참혹할 정도로 깊은 배신감과 텅 빈 공허뿐이다. 조세화는 손바닥 위에 쏟아지는 햇살을 잡으려는 듯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굳게 쥔 주먹 사이로 천천히 핏줄기가 새어 나왔다.

‘단 한 번도 정도가 아닌 것은 돌아본 적이 없었다. 의가 아닌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고, 협이라는 명분 하나에 내 인생조차 스스럼없이 바쳤다. 한데 그 대가가 고작 이건가? 내가 마교의 간자라고? 내가 형제들을 죽음으로 유도하고, 천하를 도탄에 빠트렸다고?’

조세화는 현재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불련산에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후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날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곽효의 간교한 거짓 주장 때문에 마교와 내통한 간자가 되어 버린 그는 명예롭게 가꾸어 온 명성을 짓밟혔을 뿐만 아니라 사문에서까지 파문당했다. 혈연보다 더 끈끈한 정으로 맺어졌던 청혈단의 형제들은 대별산의 혈사가 그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 오해했고, 그 때문에 먼저 간 형제들의 영전에 그의 수급을 베어 올려놓지 않으면 침상에 눕지 않겠다는 저주 같은 맹세까지 했다.

그 모든 일이 조세화에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누명을 뒤집어썼지만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리적인 증거도 없는 증언 하나 때문에, 변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사람들은 곽효의 말만 믿고 그를 배신자로 몰아세웠다. 그 누구도, 심지어는 사문의 웃어른들이나 청혈단의 형제들조차 그를 옹호한 자가 없었다. 그는 온 인생을 다 바쳐 헌신해 온 가치들에 철저하게 부정당했다. 맹목적일 정도로 깊은 믿음이었기에 실의는 더욱 컸다.

저벅.

누군가가 그가 머무는 뒤뜰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세화는 반사적으로 등을 곧추세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지금 자신이 있는 장소가 장소다 보니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경계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경계를 하기에도 풀기에도 애매한 상대다.

조세화는 부지불식간에 낮은 탄성을 발하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늘 입고 있는 흑의 자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온몸을 답답하게 감싸는 검은 천자락. 그리고 턱 끝까지 깊게 눌러쓴 어두운 죽립.

조세화가 알고 있던 누군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한 그 남자는 그 자리에 선 채 조세화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거칠기 그지없는 탁음이 그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목구멍에서 목소리를 긁어내어 말하는 사람처럼, 그는 한 마디 한 마디를 힘겹게 내뱉었다.

조세화는 복잡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이 집 안에 있는 다른 누구와도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금 찾아온 상대는 그가 마음대로 축객령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잠시 주저하던 조세화는 이곳까지 찾아온 상대를 차마 돌려보내지 못하고 뒤뜰에 내놓은 석탁 앞에 앉았다.

“……이리 와 앉지.”

남자는 그의 권유를 사양하지 않았다. 길게 머리채를 늘어트린 버드나무 그늘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서늘하게 식은 돌의자에서 옅은 이끼 냄새가 났다.

“내가, 자네를 찾아, 온 것은…….”

“굳이 힘들게 말로 하지 않아도 돼. 자네에게 더 편한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사용하게.”

조세화는 마교 사람들에게 들어 그의 상태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의외로 친절했던 그들은 그가 목을 심하게 다쳐 말을 잘 못 하고, 의사소통을 주로 필담으로 한다는 것까지 상세하게 전해주어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던 조세화의 머릿속을 더욱 엉망으로 뒤엉키게 하는 데 일조했다.

그의 제안을 들은 남자가 커다란 손을 뻗어 조세화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찔했던 조세화는, 그의 손이 손바닥 위에 글을 쓰기 시작하자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필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그저 단순히 종이에 글을 써서 나누는 대화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그런 방식이 아니었나 보다. 하긴. 사람이 늘 문방사우를 갖춰 다닐 수는 없으니 이렇게 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미리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군. 하지만 이렇게 오지 않으면 자네가 나를 만나주지 않을 것 같았어.」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미리부터 만나고 싶다는 청을 들었더라면, 거절을 하면 했지 승낙을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내게 용건이 있다고?”

일부러 찾아온 상대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와 길게 말을 나눌 마음도 없다. 가능하면 빨리 이 대화를 끝내고 싶었던 조세화는 담담하다 못해 냉정하기까지 한 자세로 상대의 용건을 채근했다.

「그래. 용건이 있지.」

투박한 손이 조세화의 손바닥 위에서 유려하게 움직였다. 조세화는 그 손을 내려다보며 투명할 정도로 아름답던 가짜 백우경의 손을 기억해 냈다.

본래도 외모가 수려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아름다워져만 가던 그는 신체 부위 중 어느 한 군데도 못생긴 구석이 없었다. 처음에는 분명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날이 갈수록 사람이 달라졌다. 단번에 변했으면 그도 알아차렸으련만, 시간을 두고 서서히 변해 갔던지라 오히려 깨닫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본래의 우경은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완벽한 미모는 아니었어. 매끈하게 다듬어졌다기보다는 순후하다는 인상 쪽이 강했었으니까.’

조세화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어린 시절 그의 모습을 추억했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이 남자가 바로 진짜 백우경이다. 가짜 백우경 스스로도 인정했던 일이니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옛 기억을 떠올릴 만한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귀공자답게 고왔던 손은 농군처럼 거칠어졌고 준수하던 외모는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조세화가 평생 동안 알아 왔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수십 년 동안 만나지 못한 낯선 인물이었다.

조세화는 그런 우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했다. 예전처럼 친우라고 부르기엔 서로를 모르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인사를 하고 싶군. 자네가 깨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찾아올 용기를 내기가 힘들었네. 오랜만이야, 세화. 아니 검동劍童. 그동안 잘 지냈나?」

어지럽기 그지없는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처럼 백우경이 조용히 물었다. 낯익은 글자가 우경의 손가락 끝을 타고 흐르자, 조세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검동. 검동이라.’

그 이름은 그가 진무관眞武觀에서 수학하던 시절 동문들이 붙여줬던 별명이다. 앉으나 서나 검을 들고 다니고 심지어는 침상에 들어갈 때까지 검을 놓지 않는다고 해서, 동문들은 그를 두고 검을 들고 따라다니는 시종 아이라 짓궂게 놀려 댔었다.

친우를 별명으로 부르는 것도 한 시절이다 보니 어느새 본인조차 잊고 있던 일인데, 수십 년 만에 만난 백우경은 그때의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는 검동이라 불리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지. 그 이름도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조세화는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뜻하지 않게 듣게 된 그리운 별명에 옛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진무관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 고만고만한 또래의 친우들과 한데 어울려 지내던 그때는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날들이었다.

「그래. 그런가. 벌써 그렇게 됐군. 돌아보면 눈 깜빡할 사이 같은데 그게 벌써 20년 전이란 말이지.」

홍안의 소년으로 만났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그들은 그새 불혹이 되었다. 그들이 오늘날 이런 초라한 모습으로 마주 앉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한 사람은 인생을 통째로 도둑맞았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그 도적에게 평생을 지켜온 모든 것을 빼앗겼다.

과정은 달라도 결과는 같은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는 꼴이 못내 우스워 조세화의 입가로 비릿한 쓴웃음이 지나갔다.

「먼 곳에서나마 자네의 소식은 간간이 들어 왔네. 내 일은 아니지만, 자네가 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무척 기쁘더군.」

“……나 혼자서 잘되었던 것은 아니지. 내 곁엔 항상 자네, 아니 가짜 백우경이 있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내가 강호상에서 혁혁한 명성을 쌓을 수 있던 것은 전부 그 사람의 공이야. 자네와는 달리 그자는 명성을 쌓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더군.”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비꼬는 듯한 말이 입술에서 새어 나갔다. 그 말을 듣고 글을 쓰던 백우경의 손이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조세화는 뒤틀리는 입매에 경련을 일으키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러면 안 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고 있는데,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곽효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백우경이다. 자신은 고작 몇 달에 불과하지만 백우경은 근 반평생을 잃은 셈이니, 그 시기로 보나 당한 고통으로 보나 자신이 그에게 댈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 점을 알고 있음에도 백우경에 대한 원망을 멈출 수 없었다. 분하고 화가 났다.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다.

백우경은 20년을 빼앗겼지만, 그 역시도 무려 20여 년을 속아왔다. 그 악적의 곁에 누구보다도 가까이 서서, 그를 위해 헌신하고 그의 대의를 위해 몸이 부서져라 싸워왔던 게 20여 년이다.

만에 하나 그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런 헛된 사명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는 짓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우경이 진작 본인의 정체를 밝혔더라면, 그래서 가짜의 정체가 미리부터 들통이 났었다면, 자신은 오늘날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되어 마교의 안가에 몸을 숨기는 참혹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안하네.」

조세화가 자신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백우경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순순히 사과했다.

“왜, 말하지 않았나. 어째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곪아서 진물이 흐르는 상처를 견디지 못한 조세화는 다시금 추궁하듯 입을 열었다. 백우경의 순순한 사과가 오히려 분노를 부추긴 모양이었다.

머리로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백우경에게 느끼는 분노가 본말이 전도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을 이성적으로 수습할 만한 여력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지치고 화가 난 조세화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쏟아 낼 상대가 필요했다. 이제껏 억눌러온 감정의 반작용으로 그의 속내는 정제되지 않고 바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자는 자네의 인생을 차지하고 있었어. 자네 얼굴을 뒤집어쓰고 자네 이름을 사용하며 자네 몫이어야 할 삶을 대신 살았단 말이야. 자네는 그런 자를 왜 20여 년이나 가만히 내버려 둔 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처음부터 스스로를 드러냈어야지.”

「…….」

백우경은 점점 더 치열해지는 비난을 그저 묵묵한 태도로 듣고만 있었다.

“자네가 진작 나섰더라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자의 정체가 일찍이 드러났더라면 오늘날의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거야.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던 청혈단의 형제들이 대별산의 참극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강호도 이와 같은 혈란에 휩싸이지 않은 채 평온할 수 있었겠지.

나 역시 마찬가지야. 자네가 일찍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면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대체 왜 그랬나? 왜 지금껏 침묵하고 있었나? 자네는 스스로의 인생을 빼앗기고도 어째서 여태껏 그냥 있었던 건가?”

조세화는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으로 백우경을 노려보았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동자엔 핏빛 눈물이 진하게 고여 있었다.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단련돼 무뎌진 백우경과 달리 조세화의 상처는 시뻘겋게 속살을 드러낸 날것 그대로의 상처다.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 바가 있는 백우경은 안쓰러운 시선으로 조세화를 바라보았다.

「……20여 년 전, 그자에게 일을 당한 후 몸을 추스르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 겨우겨우 몸을 고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내 자리에 낯선 사람이 있더군. 분명 나인데도 내가 아닌 상대였지. 바보가 아닌 이상 그가 누군지 모를 리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못했지. 나에게는 내가 나라는 증거가 없었거든. 모든 사람들이 그를 나라고 믿었어. 심지어는 내 어머니조차도 그를 당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네.」

그의 비난에 떠밀리기라도 한 것처럼 백우경은 서서히 이야기를 풀어냈다. 오랫동안 가슴속에 묵혀 두고 있었던 사연을 밖으로 꺼내려니 쉽지 않았다.

그때의 충격을 떠올리자 가슴속에서 둔중한 아픔이 밀려들었다. 이미 아문 지 오래된 상처도 가끔은 옛 고통을 기억했다. 백우경에게 있어 그런 상황은, 주로 어머니를 생각할 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어머니. 가엾은 나의 어머니.

당시 백우경에게 가장 충격이 되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조차도 자식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망가진 얼굴과 목으로도 그가 희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던 것은 어머니라면 자신을 알아볼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였는데, 그의 순진한 믿음은 그저 어리석은 환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일은 어머니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았나 싶었다. 태어나서 10년, 아직 외가에 의지하고 살 때만 하더라도 어머니와 그의 사이는 무척이나 돈독했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을 극히 귀애했던 어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그를 사랑했고, 백우경은 그런 그녀를 어머니인 동시에 아버지로 여기며 지극히 따랐다.

하지만 그들의 사이가 그토록 가까웠던 것은 고작 10여 년에 불과했다. 열 살 때 무당의 제자가 되어 본산으로 올라간 후 거의 8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간간이 서신은 주고받았지만, 자신의 존재가 아들의 수학에 방해가 될까 두려워했던 그녀는 직접 얼굴을 보러 오는 일만큼은 삼갔다. 열 살 때 헤어져 서로의 얼굴을 다시 본 것이 그의 나이 열여덟 살. 속가제자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익힌 후 하산한 해였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어머니와 고작 두 달을 같이 살았고, 아버지의 사문에 문안을 드리겠다는 명목으로 다시 곤륜으로 길을 떠났다. 어머니는 그가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지 못했고, 청년이 된 그에게 익숙해질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내 자리를 되찾을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 당시의 내게는 정말로 아무런 방도가 없었네.

나는 나를 습격한 자의 정체조차 알지 못했어. 그는 그 당시에도 무시 못 할 고수였고, 용의주도한 자였네. 게다가 그렇게 감쪽같이 한 사람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꾸미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나는 그자가 뭘 꾸미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어.

만에 하나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그자가 알았다면, 그는 제일 먼저 나를 죽여 증거를 인멸하려고 들었을 거야. 그리고 내가 살인멸구를 당하면 그자의 음모를 밝혀낼 존재는 영영 사라지게 되는 거지.」

오자서가 말하기를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고 했다. 백우경이 복수를 위해 기다린 세월은 20년이다. 정보를 얻기 위해 하오문에 투신했고, 처음에는 붕대로 나중엔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강호를 돌아다녔다.

친지와 친구들을 만나기는커녕 어머니조차도 그리워만 하며 만나 보지 못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음지에서 떠돈 그에게 어찌 한이 없을까. 그는 심지어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오랜 세월, 내면 깊숙이 쌓이기만 했던 고통이 백우경의 눈빛에 드러났다. 너무 오래 견디기만 한 탓에 견고하게 굳어 버린 고통은 묵직한 닻처럼 가슴 한가운데에 깊이 가라앉았다.

「나로 인해 자네가 겪은 일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에 자네까지 말려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 만일 내게 방법이 있었다면 일이 이 지경이 되기 전에 어떻게든 막았을 거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해서 상대의 감정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니, 말로 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진솔하게 와닿는 감정도 있게 마련이다.

조세화는 손바닥 위에 와 닿는 백우경의 손끝에서 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느꼈다. 그의 사정을 도외시한 일방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백우경은 순순히 머리를 숙여 잘못을 빌었다. 그의 사과는 결코 입에 발린 겉치레가 아니었다.

백우경이 진심으로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음을 확인한 조세화는 머릿속에 들끓던 열기가 식는 것을 느꼈다.

잠시 감정적인 기분이 들었다고 해서 이성조차 망각한 것은 아니다. 백우경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것이었고, 무고한 피해자에 불과한 그를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조세화의 성정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우경. 내게 사과를 할 필요는 없어. 자네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야. 나는, 나는 그저…….”

그는 그저 누군가가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져 주길 원했다. 좀 더 일찍 진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원망하는 데 지쳐, 그 원망을 바깥으로 돌리려고 했을 뿐이다.

치졸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속내를 정면으로 맞닥트린 조세화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얼마나 용렬한 짓인가. 무기력한 머저리처럼 얼이 빠진 채로 몸을 숨기고 있는 것도 모자라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 화풀이나 해대다니. 천하의 양의검이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였단 말인가?’

참을 수 없는 짙은 자괴감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지독한 자기혐오의 감정이 그의 기분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

“미안하네.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지. 안부 인사나 나누기 위해 내게 들렀을 리는 없지 않은가. 인사는 이쯤 하면 되었으니 용건이나 말해줬으면 좋겠군.”

마른 손바닥으로 두어 번 자신의 얼굴을 문지른 조세화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힘없이 말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행동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지금의 이 상황이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상대가 백우경이든 누구든 간에 더는 자신의 치부를 노출하고 싶진 않다.

그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선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일생을 걸고 믿었던 사람에게 당한 배신은 그를 근본부터 뒤흔들었다. 심지가 깊은 조세화로서도 쉽사리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긴 힘들었다.

그의 말을 들은 백우경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 행동이 다시 손을 달라는 뜻임을 깨달은 조세화는 그가 말을 계속할 수 있도록 자신의 손을 건네주었다.

아무런 추궁도 없이, 혹은 내색도 없이 담담히 그 손을 잡은 백우경은 필담을 계속해 갔다. 조세화에게 있어 그의 그러한 태도는 어떤 말보다도 더 고마운 배려였다.

「자네는 곽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직설적인 백우경의 질문에 조세화는 가늘게 눈썹을 떨었다.

‘곽효. 곽효라.’

그 이름은 그가 마교의 안가로 숨어들고 나서야 알 수 있었던 적도의 진짜 이름이다. 군자마검君者魔劍 곽효는 오래전에 잊힌 마교의 거마巨魔다. 전해 듣기론 천마에게 대적해 난을 일으켰다 쫓겨나 몸을 숨겼다고 들었는데, 그자가 설마 백우경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그날, 불련산에서 결정적인 장면을 목격하기 이전까지 상대의 정체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던 조세화는 심란한 낯빛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정말로 곽효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빌어먹을 일이지만 아는 것이 거의 없지. 심지어는 그의 진짜 이름조차도 이곳에 와서 듣지 않았다면 몰랐었을 테니까.”

백우경이 그에게 묻는 것은 곽효의 정체나 본색 따위가 아니다. 대외적으로 백우경의 제일 심복이었던 자신이, 곽효가 현재 꾸미고 있는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마교의 안가로 자리를 옮긴 후 그와 비슷한 심문을 적지 않게 받아 왔던 조세화는 단박에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거로군. 그렇지? 강호로 나간 곽효가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정신을 잃어 마지막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곽효가 마교의 손을 빠져나가 정도맹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조세화다. 그가 곽효의 모함에 걸려든 것은 결국 그게 이유였으니 말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그는 자세한 사정을 듣지 못했음에도 깨닫게 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무생교와 하북혈사의 배후는 곽효였다. 대별산에서 함정을 판 것도 그였으며, 백 부인의 임종 당시 기린패를 훔쳐 천하를 어지럽히는 불씨를 지핀 것도 그자의 짓이다. 그저 대략적으로 짐작한 사건만 이 정도이니, 그자가 뒷구멍으로 무슨 짓을 더 하고 다녔을지 조세화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눈뜬장님이 따로 있나. 내가 바로 장님이지.’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조세화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눈을 들었다. 그의 붉은 눈에 일순 광망 같은 것이 번득이다 사라졌다. 백우경은 착잡한 시선으로 그런 조세화를 지켜보았다.

「세화.」

“그자가 또다시 일을 저지를 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바야. 이미 정체를 들켰음에도 기어코 빠져나갔다는 건 그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수단이 있단 뜻이겠지.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 말해 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뜻하지 않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마교의 안가였다. 당연히 드나드는 사람은 마교인뿐이었고, 고지식한 조세화는 그런 자들에게 시시콜콜 사정을 캐물을 수 있을 정도로 넉살이 좋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몸을 의탁하고 있으나 그들은 사마외도인 마교의 무리가 아닌가.

세상과 연을 끊은 은자처럼 이 별채에만 처박혀 있는 그의 태도는 말보다도 더 확실한 거절이었다. 덕분에 마교에서도 그에게 볼일이 없으면 좀체 그를 찾지 않았고,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 두문불출하게 되었던 조세화는 바깥의 사정에 어두웠다.

그의 말로 인해 조세화가 강호의 혼란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백우경은 천천히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백귀야겁의 양상에서부터, 배후에 있는 정도맹의 음모. 그리고 그들이 그 일을 꾸민 이유까지도 낱낱이 털어놓은 것이다.

곽효가 음모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알게 되었어도, 다른 곳도 아닌 정도맹이 곽효의 음모와 연관이 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던 조세화는 백우경의 이야기를 듣고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신처럼 다른 정파 인사들 역시 곽효에게 일방적으로 속고 있다고만 생각했던 조세화는, 자신의 귀로 듣고도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그럴 리 없네. 사실이 아니야. 어떻게 정도맹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조세화는 평생을 믿어 왔던 모든 것이 발밑에서 무너지는 느낌을 받으며 되물었다.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일이라 화조차도 나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하고 모든 게 얼떨떨했다.

‘잘못 안 거겠지.’

조세화는 가슴 한구석에 이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지우며 백우경을 바라보았다.

동요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백우경이 손가락으로 다시 글씨를 썼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나도 믿고 싶지 않지만 모든 것은 사실이네.」

원치 않는 진실이라고 해서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지난 세월 동안 그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백우경은 감히 범접하기 힘든 단호한 기세를 드러내며 조세화를 설득했다. 그럼에도 정파와 정도맹을 종교처럼 맹신해 왔던 자의 믿음을 깨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세화는 더욱 강경히 고개를 저으며 백우경의 의견을 부정했다.

“자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혹은 속았을 수도 있겠지. 마교의 주장을 어찌 다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번 일의 배후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사마외도야. 저 곽효조차도 본래는 마교 출신 아닌가? 곽효를 빌미 삼아 정도맹을 흠집 내려는 음모일 수도 있어.”

「자네는 몸으로 겪고서도 아직도 모르겠나? 곽효뿐만 아니라 정도맹 또한 썩을 대로 썩었어. 생각해 봐. 자네가 무림공적이 된 것은 곽효가 자네를 모함한 지 채 이틀도 되지 않아서야. 고작 이틀 만에 자네는 무림공적으로 선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문에서까지 파문당했네. 어떤 고발이 들어와도 확정적인 증거와 증인 없이는 함부로 선포하지 않는 것이 무림공적이야. 그를 따져 본다면 실로 전례에 없던 일이지.

그들이 그토록 즉각적인 조처를 취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자네가 저지른 일이 너무도 극악해서? 여전히 신분을 숨기고 있을 다른 간자들에게 일벌백계의 위엄을 보여야만 하니까? 아니. 그렇지 않아. 곽효뿐만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자네의 입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야말로 살인멸구였던 거지.」

거기까지 말하던 백우경은 문득 치솟는 혐오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다행히도 죽립에 얼굴이 가려져 있어 보기 흉하게 뒤틀리는 안면이 조세화의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러나 죽립 밑으로 드러난 턱만으로도 그의 심경은 역력히 드러났다. 피부 위에 새겨진 거친 상처가 험악하게 꿈틀거리며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손상된 근육이 멋대로 움직이는 바람에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인상적인 표정이 만들어진 것이다.

조세화는 창백한 시선으로 그런 그의 턱을 바라보았다. 그 턱은 다른 사람의 눈이나 입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세화, 자네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정도맹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정도맹이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썩고 더러운, 악취 나는 시궁창이지. 그들은 그자의 정체까지는 미처 모르는 듯해. 하지만 여태껏 그가 해온 일들에는 모두 정도맹의 관여가 있었어.

나는 곽효의 뒤를 쫓으며 그들이 물밑으로 저지르고 있는 일들을 모두 보고 들었네. 정도맹뿐만이 아니라 소위 정파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의 위선과 패악을 고스란히 지켜봐야만 했지. 자네가 나를 쉽게 믿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잘 알아.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은 모두가 사실이야.」

본인조차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진 믿기 힘들었던 일이다. 그러니 조세화 같은 사람이 자신의 말을 처음부터 믿어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배신을 당했을지언정 조세화는 아직도 정파인이다. 믿음도 그렇지만 신념도 그리 쉽사리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세화처럼 마음이 굳건한 사람이 대상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내게 말해 봐. 자네에겐 나를 납득시켜야 할 의무가 있네.”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을 하고서도 조세화는 의연히 따지고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백우경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백우경의 말이 이간질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신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세화.」

“자네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대 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말로 함부로 정도를 모욕하는 건가? 위선과 패악이라고? 정도맹이 시궁창이라? 스스로가 말한 내용에 대해 책임을 지게, 우경. 그렇지 않으면 정도를 모욕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백우경이 한 이야기는 단순히 정도맹만을 모욕한 게 아니었다. 그는 정도맹과 공조하고 있는 모든 문파를 한통속으로 비하했는데, 그러한 모욕의 대상 중엔 그들의 사문인 무당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정도맹을 이루는 구심점은 무당을 위시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고, 그들은 정도맹뿐만이 아니라 전 중원 정파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다. 정파가 썩었다는 말은 그들이 썩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조세화는 그러한 결론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조세화의 반발을 예견하고 있던 백우경은 그가 드러내는 명백한 적의에도 쉽사리 동요하지 않았다. 그를 설득하기 어려울 거라는 사실 또한 염두에 둔 일이다. 완고한 사람은 고집 센 소와 같아서 밀어붙이는 힘만으로는 움직이게 하기 힘들었다.

백우경은 천천히 필담을 통해 입을 열어 지난 20여 년간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조세화에게 전했다.

그처럼 빛 속에서 살아온 자는 결코 알지 못하는 어둡고 추잡한 진실이 백우경의 손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그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음험하기 그지없는 음모들은 조세화가 결코 본 적이 없었던 정파의 또 다른 단면이었다.

백우경은 이왕에 털어놓는 김에 모든 것을 솔직히 전했다. 곽효가 저질러 왔던 음모에 있어서 정도맹의 역할은 물론이거니와, 과거 호남혈사 당시 그들이 검협에게 저질렀던 배신행위까지도 빼놓지 않고 말했다. 백우경 자신도 윤승효에게 듣지 않았다면 몰랐을 이야기니만큼 기린패에 얽힌 과거의 사연은 비사 중의 비사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조세화의 얼굴은 심각하게 변모해 갔다. 그렇지 않아도 희게 질려 있던 안색은 검게 타들어 갔고, 갈라진 입술은 자꾸 짓씹는 바람에 피가 터져 불그스레한 혈흔을 남겼다.

그가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대별산에서 그들을 습격했던 자들이 그들과 같은 정파의 고수였다는 사실을 들을 때였다. 욕지기가 치미는 듯 가볍게 목울대를 울린 그는 붉게 물든 시선을 늘어트려 자신의 무릎만을 내려다보았다. 말로는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참담함이 그를 짓눌렀다.

거짓이라 치부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조세화가 잘 알았다.

대별산에서 그들이 보았던 적들은 예기가 넘쳤고 검격에도 흔치 않은 품위가 있었다. 감추려고 했으나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그들의 기도에서는 정종의 심법을 익히지 않은 자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중후함과 명사의 지도를 받은 것이 분명한 엄정함이 흘렀다.

그러한 그들의 기질은 조세화의 마음에도 일말의 의심을 남겼었다. 어지간히 공을 들이지 않고서는 만들어 내기 힘든 고수의 출현에 미심쩍음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이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그때 느꼈던 의문이 무엇이었던가를 확연히 깨달았다.

차마 아군을 의심할 수가 없어 희미하게 이는 의문을 마음속 깊숙이 밀어 놓고 모르는 체를 해왔던 그이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 이르러서까지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군. 명색이 정파이면서 어째서 그런 일까지 서슴없이 저지르게 된 거지? 제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행함에 있어 의와 협을 잊는다면 그건 정파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정도맹은 이미 도를 넘었어. 나는 진정으로 눈뜬장님이었나 보군. 곽효뿐만 아니라 정도맹 전체가 그 지경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니. 난 대체 한평생 무엇을 하며 살아왔던 거지?”

덕분에 그는 다시 한번 심한 자괴감을 느껴야만 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진실을 꿰뚫어 보지 못한 스스로의 아둔함에 심한 혐오감을 느끼게 된 조세화는, 자신의 손으로 두 눈을 파내고 싶은 심정이 되어 비통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조세화를 바라본 백우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조세화가 필요 이상의 자책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정말 잘못을 한 사람들은 일말의 반성조차 없는데, 조세화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자가 그들이 한 일에 대해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말게. 돌에도 옥석이 있고, 썩은 낱알이 섞여 있다고 해도 가마 전체가 썩은 것은 아니니까. 자네도 알지 않은가? 정도에는 아직 자네와 같은 자들이 얼마든지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부정한 자들에 비해 열세라고 할지라도 정직한 자들은 아직 남아 있네. 아니, 주위가 온통 썩은 상황에서도 홀로 청정한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협사라고 할 수 있겠지.」

조세화를 달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전하는 백우경의 손끝이 신중해졌다. 획 하나하나를 새기듯이 내리누르는 그의 손길에 조세화는 참담한 얼굴을 들어 백우경을 바라보았다.

“우경…….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그는 백우경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에게 그럴 만한 용건이 없었다면, 굳이 찾아와 모든 진실을 털어놓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 의도가 있었고 조세화는 이제 그것이 궁금해졌다.

「세화. 나는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네.」

“부탁이라? 무슨 부탁인가?”

「뿌리가 정도라고는 하나, 나는 정도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나와 있던 사람이지.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쉽사리 믿지도 못할 거네. 하지만 자네는 다르지. 무림공적으로 낙인찍혔다고는 하나 자네의 됨됨이를 아는 사람들은 그 모함을 쉽사리 믿고 있지 않을 거야. 강경한 윗선의 반응에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필시 의심을 품고 있겠지.

자네는 그런 자들을 설득해 성한 낱알을 골라내 주게. 갈아엎을 때 갈아엎더라도 종자는 남겨 둬야 할 것이 아닌가? 지금 이 상태대로라면 정도는 영영 재기하지 못할지도 모르네. 저들에게 명분이 남아 있다면 세가 기운다 한들 상관없겠으나, 명분을 잃었으니 재기를 할 만한 발판조차 마련하기 힘들 거야.」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피폐해 있던 조세화의 정신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재기라니? 정파가 재기를 해야 한단 말인가?’

작금의 상황을 지켜보면 오히려 정도맹이 강호 전체를 제패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한데 백우경은 오히려 정파의 존속 자체를 걱정하고 있었다. 종자를 남겨야 한다는 건, 정파 전체가 동반 몰락을 하는 결과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 조세화는 서둘러 그를 채근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갈아엎는다니? 정도맹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할 거라는 건가?”

「마교가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짓을 알았네. 그들이 교의 반도인 곽효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간 해왔던 인면수심의 행동들에 대한 증거도 가지고 있지. 소비笑匕 포영의鮑迎意는 영리한 자야.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할지 벌써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마교의 힘만으로는 지금의 정도맹을 이기기 힘들어. 자네도 말했지 않은가? 백귀야겁으로 그들은 흐트러진 중원의 힘을 하나로 모았네. 천마도 없는 마교가 어찌 그런 정도맹을 이기겠나?”

「백귀야겁으로 모았으니 백귀야겁으로 흩어 놓을 수도 있겠지. 이야기했지 않나. 마교엔 그 일에 대한 증거가 있다고. 그들이 모은 증거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되면 중원의 중소 문파들은 결코 정도맹의 그늘로 되돌아오지 않을 거네. 오히려 적이 될 가능성이 더 크겠지.」

“하지만…….”

「그리고 천마는 살아 있네. 곽효조차도 그가 죽었다고는 여기지 않을 거야. 그가 천마의 죽음을 믿었다면 이렇듯 서둘러 일을 진행시킬 필요는 없었겠지.」

천마가 살아 있다. 그 말 하나에 반론하려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세화가 태어나기 전부터 전설이던 그는, 단지 한 사람의 고수일 뿐이라고는 치부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감으로 강호를 지배했다. 정도도 사마외도도 그를 경원했고, 아무리 작은 일을 할 때도 그의 존재를 계산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원에는 들어오지도 않는 사람이건만 중원 전체의 판도는 그를 향해 흘렀다. 그는 절대자이자 불패자였다. 그가 직접 나선 일에 실패를 할 거라는 생각은, 심지어는 정파의 일원인 조세화조차도 떠올릴 수 없었다.

“천마가, 살아 있다고?”

힘겨운 듯 더듬더듬 묻는 그의 질문에 백우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자네는 그가 정말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나?」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조세화도 그가 살아 있을 거라고 여겼다. 솔직히 말하면, 그의 생존 여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 따윈 아예 해 본 적도 없다. 반로환동까지 한 절대자를 죽일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검도, 병마도, 심지어는 시간마저도 그를 죽이기에 걸맞은 도구가 아니다.

“아니, 그렇지 않겠지. 그는 틀림없이 살아 있을 거야.”

「그래. 그는 분명히 살아 있겠지. 그리고 곽효와 정도맹에 대한 확고한 원한을 가지고 돌아오겠지. 예전에는 명분이 우리에게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마교의 것이야. 그들이 마음먹는다면 정도맹이 수렁에서 벗어날 방법은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내가 자네를 찾아온 거야. 닥치는 일을 피할 수 없다면 최악이 아니라 차악이 되게 만들어야지. 우리가 행동하지 않는다면 정파는 진실로 씨가 마르고 말 거네.」

배신을 당한 후 복수에 대한 의욕조차 없이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조세화지만,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이상 세월을 낭비할 수 없었다.

등골을 타고 강한 전율이 흘렀다. 이렇듯 맥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그의 허물어졌던 마음을 일으켜 세웠다.

정도맹이 저질러 온 만행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도맹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한통속이라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세화 자신처럼 그러한 음모엔 동조한 사람보다 모르고 있던 이가 더 많았다.

대다수의 협객들은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르고 세상에 드러나는 외면만을 보고 살아간다. 조세화는 그들 중에 자신 같은 피해자가 또다시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들이 썩은 자들과 도매금으로 취급되어 함께 도살당하는 것은 절대로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구체적인 계획이 뭐지?”

정도가 그를 버렸다고 해서 그조차 정도를 버릴 수는 없는 법. 마음을 다잡은 조세화는 허리를 곧추세우며 백우경에게 물었다. 백우경은 또박또박한 글씨로 조세화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뜻을 전했다.

「내가 필요한 사람들의 이름에 대해 알려주지. 그들은 이번 일에 연루되지 않은 자들이야. 자네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설득해야 해. 그래서 제대로 된 진실을 알려야 하네. 마교에게 응징당하기 전에 자정해야만 정파가 살아남을 수 있어. 천하의 민심이 등을 돌리기 이전에, 마교가 가진 명분을 내세우기 전에 내부에서 먼저 그들을 쳐 내야 한단 말일세.」

“그렇지만 외양적인 상황만으로 음모의 가담 여부를 어찌 판단한단 말인가? 나는 정도맹에 적을 두었지만, 그들이 그런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자네의 말을 듣고서야 처음 알았네. 곽효의 일을 생각한다면 나의 사람 보는 안목도 그다지 미덥지 못해.”

자조적인 한탄이 섞이긴 했으나 조세화의 의문이 엄살인 것만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상대를 잘못 선택한다면, 조세화는 뜻을 이루기 이전에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나 백우경은 그런 걱정을 개의치 않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확고한 자세를 보건대 그에게는 내심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말게. 내가 주는 명단의 이름들은 모두 결백한 자들뿐이야. 나는 오랫동안 하오문에 몸을 담았고, 하오문은 오랜 시간 그들의 뒤를 캐내고 있었지. 그것만으로도 미덥지 못하다면 내가 자네에게 도움이 될 분을 소개해 주겠네. 개방의 방주를 제외하자면 전 중원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지. 무공도 아주 뛰어나시니 자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걸세.」

백우경은 글씨를 쓰던 손가락을 멈추고 바깥으로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한 사람의 인영이 뒤뜰의 녹음 사이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다리가 불편한 듯 다소 절뚝거리고 있는 그는, 은으로 만들어진 여우 가면을 뒤집어쓴 호리호리한 체구의 사내였다.

그는 은녹색 화의를 걸치고, 허리춤에 백금색의 긴 수실을 호화롭게 늘어트린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 뒤집어쓴 요사스러운 여우 가면은 온통 흰 가운데 주둥이만 붉게 칠해져 있었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 특징적인 차림새만으로도 조세화는 상대의 정체를 충분히 추정할 수 있었다. 상대는 장막에 가려진 하오문의 문주, 천면인호였다.

천면인호는 천하가 좁다고 종횡하던 조세화조차도 처음으로 대면하는 인물이다. 워낙 소문만 무성하고 누구도 봤다는 사람이 없어, 어쩌면 가상의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소문이 났던 신비의 고수. 그런 그가 이렇듯 모습을 드러내자 조세화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호의 동도들은 소생을 천면인호라고 부릅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기묘한 목소리로 천면인호가 말을 건넸다. 아니, 성별은커녕 노인인지 소년인지조차도 구분되지 않았다. 분명 귀로 들은 음성임에도 그 목소리를 기억해 내기가 어려웠다. 꼭 꿈결에서 들은 양 가물가물한 것이, 그 목소리에서 특징적인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과분하게도 양의검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세화라고 합니다.”

얼떨떨하게 마주 포권한 조세화가 자신을 소개했다. 초절정 고수라고 알려진 천면인호는 배분도 조세화에 비해 한 배분이 높다. 그런 그가 먼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니 조세화로서도 답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상황이다.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임에도 웃고 있는 상대의 기색이 확연히 와닿았다.

천면인호라면 정사지간의 인물이긴 해도 딱히 악인은 아니다. 확실히 이 정도의 거물이라면 도움이 되겠지. 초절정 고수인 동시에 하오문의 문주이기도 하니까.

상대의 무공보다 그의 직위가 더 마음에 들었던 조세화는 그를 대면한 후에야 어깨에서 힘을 뺄 수 있었다. 적어도 하오문주가 직접 캐낸 정보들이라면 어이없는 개죽음을 당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목숨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순간의 실수로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을까 봐 두려웠던 조세화는 이제야 좀 안심이 되었다.

정보만 확실하다면야 일을 시작하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어찌 보면 자신이 줄곧 기다리고 있던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두고 보자 곽효. 이 조세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호락호락한 인간이 아니다. 너는 내 명성을 해쳤을 뿐이지만, 나는 네 일생의 고심苦心을 산산이 무너트릴 것이다.’

조세화는 마음을 다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어떤 관점에서 본다면 백우경의 부탁은 부탁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다. 복수를 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 주저앉아 있던 그에게 나아갈 방향을 일러 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단호한 결심으로 빛나는 그의 눈빛을 보며 윤승효는 빙그레 웃었다. 확실히 이런 사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선 미는 것보다 당기는 것이 중요했다. 의미심장한 눈빛을 백우경과 교환한 윤승효는 품 안에 있는 부채를 꺼내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머릿속으로 다음 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곽효는 윤승효가 이제껏 만나 보지 못한 가장 치열한 수 싸움의 상대다. 섣부르게 움직였다간 그 자신뿐만 아니라 하오문 자체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승효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긴 해도 그가 두렵진 않았다. 윤승효의 등 뒤엔 누구보다 믿음직한 존재가 있었고, 곁에는 손을 잡은 막강한 동맹이 있었다.

곽효와 달리 그는 혼자가 아니다. 믿고 등을 맡길 만한 상대가 옆에 있다는 것. 그것은 곽효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확실한,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

기름을 먹인 종이가 나달나달하게 닳은 책자는 언뜻 보기에도 무척 낡은 물건이었다.

곽효는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표지를 어루만졌다. 낡아서 부드러워진 종이가 마치 오래되어 해진 천처럼 가볍게 나풀거렸다. 나름 신경을 써서 보관을 해왔음에도 잦은 독서로 손때가 가득했고, 너무 오래되는 바람에 끊어져서 최근에 다시 묶어야만 했던 끈만은 또 새것이라 낡은 표지에 이채로운 흔적을 보탰다.

무심히 책자를 쓰다듬고 있는 손끝에 제목을 적어 붙인 종이가 닿았다. 숱한 세월에 마모되어 끝이 닳아 없어진 종이는 아예 표지의 일부가 된 것처럼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곽효는 시선을 내리고 표지에 쓰여 있는 글귀를 무심히 읽어 보았다.

「무생비록無生悲錄

이 책자는 겉표지에서 말하고 있는 이름 그대로 생이 없음을 슬퍼하는 자가 남긴 처절하기 짝이 없는 기록이었다.

이 기록을 남긴 사람은 300년 전, 무생교라는 이름으로 혹세무민했던 사교의 교주 우승립이다. 한때는 모산파의 도사로, 그리고 또 한 시절은 소림의 무승으로 살아오기도 했던 그는 도가와 불가의 깊은 가르침으로도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업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세상으로 뛰쳐나가 수많은 목숨을 해한 인물이었다.

그의 손으로 직접 죽인 사람들만 하더라도 물경 수백. 무림인도 아닌 힘없는 민간인과 어린아이를 서슴없이 도살한 그를 두고 강호인들은 악귀 나찰의 현신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세인들은 결코 모를 것이다. 그 사실을 본인이 얼마나 깊이 절감하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사람이 세상에 악의를 품게 되는 연유는 대체 무엇일까? 거창한 명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너무나도 사소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원한이 시작일 수도 있었다. 동탁은 권력을 탐하고자 수백년 간 이어온 한의 왕실을 무너트렸고, 달기는 황음을 위해 산 사람을 철판에 태워 죽이며 놀았다.

그러나 우승립이 숱한 민초들을 학살하게 된 것은 권력 때문도 즐거움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그런 악행을 저지른 것은 모두 젊은 날에 겪었던 일에 대한 지독하리만큼 깊은 복수심 때문이었다.

우승립이 젊었던 시절, 그가 아직 모산파의 도사였던 그때에 우승립에게는 연인이 있었다. 첫사랑이면서 동시에 첫 연인이기도 했던 상대는 놀랍게도 남자로, 몇 번이고 과거에 떨어진 한미한 출신의 낙방 수재였다.

문재는 뛰어난 편이었지만 뒷배가 없어 조정에 출사를 못 했던 그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한 장원의 식객이 되어 그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인물이었다. 그는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길을 잃은 덕분에 산중수련을 하고 있던 우승립과 조우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우정이었던 감정이 어떻게 사랑으로 흘러가게 되었는지는 우승립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머지않아 몸을 나누었고, 서로의 팔을 끈으로 묶고 천지신명을 앞두고 같이 살고 같이 죽으리라는 맹세까지 함께 했다고 하는 걸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꽤나 순조롭게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방술에 대한 뛰어난 자질 때문에 어린 시절 모산파에 발탁되어 사부와 함께 수련만 해왔던 우승립은 이 새로운 인연에 주체하지 못할 만큼 깊이 빠져들었다. 연인이 죽은 후 수십 년이 지난 후에 남겨진 기록에서까지 드러나는 절절한 그리움은 상대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얼마나 질기고 독한 것이었나를 말해 주었다.

아무런 일도 없이 정상적으로 연애가 진행되었다면 그의 감정이 그토록 지독히 썩어들어 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츰 마음이 흐려졌을 수도 있고, 두 사람 중 하나가 변심하며 끝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처참하게 막을 내린 그의 사랑은 우승립이라는 인간의 근본 자체에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흔을 남겼다.

우승립의 연인이 몸을 의탁하고 있던 장원은 근처에선 가장 큰 지주였다. 장원의 주인은 엄청난 구두쇠에 고리대금업자로, 구휼미를 핑계로 남의 땅을 가로채고, 보리 한 말에 딸을 팔게 하는 지독한 작자였다고 한다.

조금이나마 피가 닿은 우승립의 연인을 거두어 주고는 있었지만 열둘이나 되는 자식들의 유일한 글 선생으로 혹독하게 부려먹으며 먹을 것조차 제대로 챙겨 주지 않았다.

피가 닿는 인척에게도 그러했으니 생판 남에게야 어땠겠는가? 그 장원은 사방의 백 리 안에 원성이 없는 집이 없다고 할 만큼 깊은 원한을 사고 있었다.

일이 일어난 것은 두 해 동안 거듭된 가뭄으로 논바닥이 말라붙고 관의 구휼미가 바닥을 드러낸 시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독하게 수탈당해 왔던 장원 인근의 마을들은 거듭되는 가뭄을 제대로 이겨 내지 못했다. 사방에서 굶어 죽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를 보다 못한 우승립은 사문의 도움이라도 얻기 위해 길을 나섰다. 자신의 힘으로 그 많은 사람을 다 살려낼 수는 없겠지만 당장 눈앞에서 죽어가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젊은이다운 책임감 때문이었다.

우승립의 연인도 그의 의견에 동조하며 길을 떠나는 그에게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았던 패물까지 건네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장원의 창고라도 풀어 주고 싶으나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서 마음의 짐을 덜고 싶다는 뜻이었다.

연인을 남겨 놓고 사문으로 간 우승립은 원조를 거절당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패물을 팔아 간신히 한 수레의 식량을 얻었다. 그러나 가뭄으로 피폐해진 세상 한가운데로 식량을 끌고 돌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산적에게, 때로는 관군들에게까지 위협당했던 우승립은 어렵게 수레를 지켜 가며 연인이 살던 마을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그가 귀향했을 때는 그가 알고 있던 마을들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고, 심지어는 연인이 의탁하고 있던 장원마저도 불에 타 없어진 후였다.

영문을 알지 못했던 우승립은 혼비백산해 자신이 없던 동안의 사정을 청취했다. 그로 인해 그가 알게 된 진실은 차마 믿고 싶지 않은 참혹한 것이었다.

마을이 폐허가 된 것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화를 피해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장원이 불탄 것은, 굶어 죽는 사람들이 지척에 즐비한 가운데서도 굴뚝에서 흰 연기가 오르는 그 집안의 패악이 지나쳐서다.

배고픈 어린아이 하나가 밥 냄새를 맡고 뒷문을 두드렸다 맞아 죽은 일을 계기로, 쌓이고 쌓였던 분노가 폭발한 마을 사람들은 쇠스랑과 쟁기를 끌고 장원으로 쳐들어가는 폭도로 돌변했다.

그들은 굳게 닫아 걸린 문을 깨부수고 들어가 그동안 마을을 착취했던 관리인과 하인들을 때려죽였고, 기름진 배에 비단옷을 걸친 장원의 주인 식구들도 모두 죽였다. 그들은 그뿐만 아니라 장원에 있던 모든 사람을 모조리 잡아먹었다. 폭도들은 창고를 비틀어 열어 남은 곡식을 강탈했고, 죽은 시신을 삶아 고깃국을 만들어 먹었다. 몇 개의 마을이 합심해서 쳐들어갔기 때문에 그러고도 식량이 모자랐다.

그들은 장원을 강탈해 실컷 먹고 마신 후에야 제정신을 차렸다. 워낙 변방이라 아직 사정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저지른 일이 관청에 알려진다면 폭도였던 그들은 모조리 죽은 목숨이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뼈를 한데 모아 불태우고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어차피 굶어 죽을 목숨. 유리걸식이라도 하면 한목숨 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우승립은 자신의 연인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도 모자라 잡아먹히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런 죄도 없던 그의 연인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단 하나 남은 유물까지도 기꺼이 내어놓았던 마음씨 고운 그 사람이 인간으로서 당해서는 안 될 지독한 꼴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목숨처럼 사랑했던 연인임에도 타다 남은 유골 사이에서 그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연인은 피와 살뿐만 아니라 뼈조차도 남기지 못했다. 우승립은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절규했다. 그는 배고픔을 빌미로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자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가 힘없는 민초들 가운데 특히나 아이를 싫어했던 것은, 그의 추궁을 받았던 자들 중 하나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눈앞에서 자식이 굶어 죽었다. 연이어 굶어 죽어가는 자식을 지켜보는 아비가 대체 무슨 짓을 못 하겠느냐.’

나름 인간적인 깊이와 고뇌가 느껴지는 변명이었으나 그 말은 우승립의 분노를 결정적으로 자극하는 원인이 되었다.

우승립은 그의 변명을 그 후 10년 동안 곱씹고 또 곱씹었다. 사문을 버리고 나와 불문에 귀의하고, 불교의 경전를 읽고 또 읽으며 마치 화두처럼 그 말을 궁구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느껴지는 가슴속의 분노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의 분노는 더욱더 커지고 맹렬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자식이 배가 고팠기에 그의 연인은 잡아먹혔다. 그 사람들은 제 자식을 살리고자 죄 없는 다른 사람의 목숨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인간은 천박하고 이기적인 동물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타인 따위는 얼마든지 희생시킨다. 목숨이 이유가 된다면 어떤 짓을 저지르고도 죄책감이 없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긍지인 양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데 죄책감은 무어고 망설임은 다 무어란 말인가.

인생은 고해의 바다였고, 삶은 지옥이었다. 우승립은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혐오를 견딜 수 없었다. 인간 본성의 적나라한 바닥을 보았던 그는 모든 인간이 그저 추하고 역겨울 뿐이었다.

이성으로 감정을 몇 년간이나 억눌렀지만 타오르는 복수심은 수그러들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마음속에서 겁화가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그의 업이라면 업이겠지만, 우승립은 더는 그를 홀로 감당해 낼 수 없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된 그는 스스로 파계하고 세상으로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그의 마음속에 있던 지옥을 바깥세상으로 고스란히 풀어냈다.

곽효가 손에 넣은 무생비록은 그런 우승립의 일생이 담긴 일기와 같은 기록이다. 그 책자에 기록된 것은 간간이 회상하고 있는 과거의 기억이 다가 아니다.

우승립은 인간의 몸, 특히 어린아이들을 이용한 방문좌도의 술법을 오랫동안 연구했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들을 제외하고도 제법 쓸 만한 술법들을 여러 개 만들어 냈다. 술법을 거는 방식이 지독하고, 과정 중엔 종종 타인의 목숨을 요구하는 일까지 있었지만 효과는 가히 사술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났다.

우승립은 그에 대한 과정과 결과를 고스란히 글로 남겼는데, 곽효가 실제로 이러한 술법들을 제법 유용하게 써먹었다.

‘괜찮았지. 내가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게 다 무생비록 덕분이니까.’

곽효는 희미하게 웃으며 무생비록을 내려다보았다. 생각해 보면 이 책 하나가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만약 그가 이 책을 찾지 못했다면, 그는 감히 천마를 상대로 반란을 꾸미는 짓 따윈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만일 서투른 욕심을 부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날의 광경을 곽효가 지켜보게 만들지만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직껏 살아 있었을 것이다.

우승립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곽효도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이 모든 살겁을 저질렀다. 어쩌면 연인의 복수라는 명분이 있는 우승립이 더 나았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의 계기는 사소했다.

그가 처음 이 책을 찾게 된 것은 양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하기를 원한 아내의 소원 때문이었다. 아내의 양아버지는 오래전에 실종되었는데, 그가 실종된 원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깥출입이 잦았던 그는 일상적으로 교를 나갔다가 자취를 감추었고, 그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교에서 사람을 파견해 흔적을 살폈으나 그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찾아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내는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후 십수 년이 지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그녀는, 곽효와 혼인을 한 후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다섯 살이 되던 해까지 기다린 후에야 곽효에게 그러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떠나시기 전날 아버지는 저를 위해 찾을 것이 있다는 말씀을 남기셨어요. 그게 뭔지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제게 아주 유용하게 쓰일 물건이라고 장담하셨죠. 그때는 어려서 그분이 뭘 찾는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짐작하는 게 있습니다. 그분은 그때 틀림없이 전대 천마의 천마지공을 찾고 계셨던 거예요.”

아내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곽효의 뇌리에 ‘그날’의 기억이 선명히 되살아났다.

아내는 촛불 아래서 머리를 늘어트리고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처롭고 처연한 그녀의 눈빛에 대한 기억은 지금까지도 곽효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유일한 요소였다.

그의 아내는 어린 사슴처럼 연약하고 순수한 여인이었다. 침상에 누워 그녀의 말을 듣던 곽효는 손을 뻗어 비단처럼 매끄러운 그녀의 머릿결을 쓸어 넘겼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여 그 손에 뺨을 묻으며 서글픈 눈빛으로 곽효를 응시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천마지공이라니.”

“아버님은 제게 쉽게 이룰 수 없는 소원이 있다는 사실을 아셨거든요. 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실 수 있는 분이 아버님이셨지만, 그런 그분조차도 제 소원만큼은 들어주실 수 없으셨어요. 아마도 그래서 천마지공을 원하셨던 것 같아요.”

“어린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천마지공이 필요했다고?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참으로 담대했던 모양이군. 꼬마 아가씨가 그토록 거창한 소원을 품고 있었다니 말이오.”

그녀를 웃기기 위해 그는 농담 삼아 속삭였다. 물기에 젖어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잔잔하게 흔들렸다. 그가 의도한 대로 그녀는 웃었지만, 그 웃음은 깊은 못 위를 한 번 스쳐 가는 바람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우울하게 눈길을 떨어트렸고, 섬세한 속눈썹은 그런 그녀의 얼굴 위로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아내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되었던 곽효는 아내가 어째서 그런 확신을 했는지 내심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비록 양아버지이긴 했지만 손규는 아내에게 지극한 아비였다. 만약 정말로 단서가 있었다면, 그는 혼자의 힘으로 천마지공을 찾아 나섰을 게 틀림없었다. 천마지공을 탐내서가 아니라 그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는 자에게 내려질 특혜 때문이었다.

교주를 대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신물 같은 무공을 잃고 오랫동안 고생을 해왔던 선대의 교주들은 천마지공을 교로 돌려보내는 자에게 소원 한 가지는 무조건 들어주겠다는 황당한 유훈을 남겼었다. 그 유훈은 3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널리 알려져 마교에서는 어린아이들조차 모두 알고 있었는데, 우직한 손규라면 딸을 위해 그러한 전설을 사실로 만들 마음을 품었다고 한들 이상한 게 아니었다.

“지난 300년 동안 마교는 전력을 기울여 사라진 천마지공을 찾아왔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었소. 장인어른께서 무능력한 분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천마지공은 그분 혼자만의 힘으로 찾아내기 힘든 물건이라오.”

농담은 농담으로 끝낼 일이었다. 실제로 그것이 진시황의 황릉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곽효는 우울한 아내를 달래며 그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그의 말을 들은 아내는 흐리게 웃었다.

“알아요. 그러니 돌아오시지 못하셨겠지요.”

“……부인.”

“많은 것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 설사 그분께서 천마지공을 찾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요. 아버님은 저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신 분입니다. 그분의 유골만이라도 찾고 싶어요.”

영민한 그녀는 손규가 남긴 자료들을 통해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에 대한 단서를 이미 찾아낸 상태였다. 단서도 있고 동기도 충분하니 할 수만 있다면 그녀 자신이 스스로 나섰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무공을 배우지 않았기에 스스로가 나서서 아버지의 뒤를 추적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당신뿐이라며 곽효에게 간절히 매달려 왔다.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의 유골만큼은 꼭 수습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리고 사랑스러운 아내에게 푹 빠져 있던 곽효는 그녀의 애처로운 부탁에 못 이겨 그녀의 소원을 이뤄주겠노라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다. 게다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직접 한 약속이라면 그를 이행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 사랑에 빠진 사내에 불과했던 곽효는 아내에게 한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그녀가 준 단서를 들고 중원으로 나간 그는 어렵사리 손규의 흔적을 찾아냈고, 그의 뒤를 따라 불련산 기슭에 들었다. 적백문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장소인 조현은 손규에게도 마지막 장소였다.

곽효는 불련산을 모조리 뒤진 끝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던 비밀 계곡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손규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엿보았다. 그가 나중에 가짜 천마비고를 꾸미게 된 장소는 기실 그때 발견한 장소를 재활용한 것에 불과했다.

천마의 제일 심복이었던 육마는 과연 엄청난 고수였다. 그는 이제껏 듣도 보도 못했던 흉험한 기관들을 모조리 때려 부수며 전진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관문까지 힘으로 무너트렸다. 그의 뒤를 쫓았던 덕분에 곽효는 별 어려움 없이 동굴의 마지막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위험한 기관으로 가득했던 동굴의 가장 안쪽에 손규의 시신이 있었다. 어린아이 형상을 한 대여섯 구의 유골 사이에 홀로 있던 그는, 서 있는 자세 그대로 절명한 것처럼 보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손규를 공격했던 것은 분명 건예자였다. 그 마물들은 무려 300년이 지난 후까지도 살아 움직였던 것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목숨까지 바쳤는데도 손규가 찾아낸 장소는 전대 천마의 은거지가 아니었다. 어디서 뭐가 잘못됐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찾아낸 곳은 전대 천마가 아니라 우승립의 비밀 처소였다.

별다른 단서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곽효는 우승립이 어떤 마지막을 맞이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일생이 담긴 기록을 고스란히 남겼고, 곽효는 천마지공 대신 무생비록을 손에 넣은 채 마교로 돌아와야 했다.

무생비록과 손규의 시신을 수습해 마교에 돌아온 그 날, 곽효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의 아내가, 아름답고 애처로운 그의 사랑이 다른 사람을 향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광경을 말이다.

그녀의 선량한 두 눈에 눈물이 맺히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천마 바로 그자였다. 그녀의 생부이면서도 일생 동안 그녀를 부정해 왔던 남자. 하지만 그럼에도 아내가 누구보다도 그리워했던 상대.

이미 어둠이 가득한 정원의 뒤뜰에 마주 선 두 사람의 모습은 은밀하고 비밀스러워 보였다. 곽효가 그들에 대한 사정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밀회하고 있는 연인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제 아이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 주고 싶습니다.”

자신의 남편이 뒤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는 천마를 향해 하소연했다. 그러나 무공을 모르는 그녀라면 또 모를까 천마가 곽효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애써 기척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단번에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천마는 무심한 시선으로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일별이었으나 그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곽효가 아니다. 그는 경고나 다름없는 그 시선에 숨을 죽인 채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와 인지해 주시길 원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그 아이에게, 제 자식인 진무에게 사실을 말해 주고 싶은 것뿐입니다. 제발 그것만은 허락해 주세요. 교주님. 제 아이가 자신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는 천마를 향해 애원했다. 오랜 세월 천마를 향해 있던 해바라기 같은 그녀의 감정은 마침내 자신이 낳은 자식에게까지 전이가 된 모양이었다. 대외적인 인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자식에게만은 그 핏줄의 근원을 말해 주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는 슬플 정도로 처연했다.

하지만 천마는 눈앞에서 울고 있는 자식을 보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속내도 읽히지 않는 불가해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정적으로 기대오는 그녀를 밀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태도는 무감하기 짝이 없었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는 서늘하게 말하며 울고 있는 손여영을 냉담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아이의 근본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냐? 내가 그 아이를 제자로 삼고자 한 것은 그 아이의 혈통이 아니라 자질 때문이다.”

“교주님.”

“나는 너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누가 들으면 엉뚱한 의심을 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니더냐. 듣자 하니 곽씨세가 내에서 위치도 편치 않은 것 같은데, 이리도 경망스럽게 굴어서야 네게 누가 될 뿐이다.”

확실히 손여영이 한 말은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의혹을 품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천마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천마의 자식을 낳았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진한 그녀는 그런 쪽으로는 상상조차 못 해봤던 모양이었다. 손여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희게 질리며 그 큰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순진하긴 해도 멍청하진 않았기에 천마가 무엇을 암시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수치심 때문에 창백하게 질린 그녀는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는 그 시선을 고스란히 마주하며 입매를 뒤틀었다. 누구를 비웃는 건지 모를 냉소적인 비소가 그의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네 아비와의 옛정을 생각해서 오늘의 일만큼은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겠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용건으로 나를 불러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잘라내기라도 하듯 단호히 그녀를 밀어낸 천마가 다시 한번 그녀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모든 광경을 남몰래 훔쳐보고 있던 곽효는 감히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만큼이나 그 역시 짙은 모멸감을 느꼈다. 냉정한 천마는 그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모욕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당한 수모는 실상 곽효 자신이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천마가 경고하는 진짜 상대는 손여영이 아니라 그였을 테니까. 아마 그가 엿듣지 않았다면 천마는 손여영에게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대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냉엄하기 그지없는 그 시선에서 곽효는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천마는 이미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가 손여영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고, 그랬기 때문에 굳이 그녀를 선택해 혼사를 한 것임을 천마는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를 보는 천마의 눈길이 저리도 경멸에 차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마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가까이 닿고 싶어 했던 두 사람을 그 자리에 내버려 둔 채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넋이 나간 듯한 손여영은 하염없이 울며 그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던 그를, 그의 뒤돌아서는 발걸음을 서러워하면서도 차마 잡지도 못했다. 배꽃 같던 그녀의 얼굴이 이슬에 젖어 투명해졌다. 자신이 흘린 눈물 속에 녹아 없어져 버릴 것처럼 그녀의 자태는 한없이 애련하기만 했다.

그녀가 홀로 슬퍼하는 광경을 더는 견딜 수가 없었던 곽효는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분명 다른 의도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단지 목적만을 위해 그녀를 곁에 두는 게 아니었다.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아름답고 섬세한 그녀를 곽효는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가 울면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고, 그녀의 소원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들어주고 싶었다.

그래. 그때의 그는 그랬다. 그는 분명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평생 동안 목표가 아닌 것은 바라보지 않고 살아왔던 그가, 그녀에게만큼은 난생처음으로 목적도 없는 깊은 감정을 느꼈다.

“어, 언제 오셨어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소스라친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자식을 낳은 몸임에도 소녀처럼 가녀린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어깨를 떨고 있었다. 그녀의 서글픈 모습에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던 곽효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놀란 그녀는 곽효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뒤로 물러섰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녀에게 의지가 될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던 곽효는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그녀가 대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인, 왜 그러는 거요?”

날이 어두워 그녀가 자신을 식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 아래 곽효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목소리를 드러낸 후에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의 하얀 이마에 뚜렷한 감정이 드러났다. 그녀는 의기소침해 있을 뿐만 아니라 겁에 질려 있었다. 그녀는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당신, 당신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거예요?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가요?”

겁에 질린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그에게 물었다. 곽효는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보이는 행동들이 너무도 뜻밖이어서 그는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선뜻 판단되지 않았다.

“들었어야 할 이야기는 모두 다 들은 것 같소. 하지만 부인,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오해하지 마세요! 이 일은 겉으로 보이는 것관 전혀 달라요. 진무는 당신 자식입니다. 저는 결코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어요. 저는 단지, 단지…….”

이미 그녀가 천마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려던 곽효는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르는 아내에게 놀라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까 천마가 지적한 대로, 곽효가 진무의 출생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진실을 말하지는 못했다. 평생 속으로 감춰 두고 있었던 일인 데다, 조금 전 천마에게 또다시 거절당하기도 했기에 섣불리 입에 담을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아내는 무슨 변명이 더 하고 싶은 듯 더듬거리면서도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떨어뜨렸다. 그녀의 흰 뺨 위로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단지, 뭐란 말이오?”

곽효는 가엾은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가 사실을 말할 때까지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천마는 그녀의 존재를 여태껏 철저하게 부정해 왔고, 심약한 그녀는 그런 아버지의 의사를 쉽사리 거스를 수 없을 터였다.

시간을 주면 이야기를 하겠지. 설마하니 내가 계속 자신을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곽효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이번 일은 그녀의 정조와 더불어 진무의 핏줄까지도 의심받을 만한 일이었다. 어미 된 몸으로 자신의 친아들이 부정한 의혹을 받도록 내버려 둘 리 없었다.

“……단지, 저를 믿어 주셔야 한다는 거예요. 진무는 분명 당신의 자식입니다. 저는 당신 보기에 부끄러울 짓을 결코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곽효의 예측을 보기 좋게 배신했다. 한참 동안 주저하기만 하던 그녀는 그의 기다림에도 끝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서글프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행동에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게조차도 진실을 감추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진실한 비밀을 털어놓을 정도로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도 그녀는 남편이 아니라 비밀을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자신이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를 설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스스로 외면한 것이다.

자칫하면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심어 주게 될 수 있는데도 그녀는 그런 선택을 했다. 천마의 비밀을 함부로 발설하느니, 그를 잃을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부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당신을 믿을 수 있겠소? 나는 모든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소. 당신은 방금 교주께 진무의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했소. 당신 입으로 그와 진무가 관련이 있다고 말했고, 그 사실을 진무에게 알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지. 그런 말을 들은 내가 이 상황을 달리 어떻게 해석할 수 있단 말이오?”

곽효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믿기도 힘들었다.

어이가 없어진 그는 힘겹게 말을 내뱉으며 그녀의 대답을 유도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를 선택해 주길 바랐다. 일평생 그녀를 외면해 온 아비가 아니라, 그녀의 곁을 지켜 줄 자신을 더 중요시해 주길 원했다.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연정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거나 하는 가당찮은 착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도 그녀가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부정을 그리워하느라 천마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에겐 용납할 수 있는 한계라는 게 있게 마련이다. 어째서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신의 아버지를 최우선으로 선택한단 말인가?

곽효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천마가 아니라 그녀였다. 자신의 부모님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자식인 진무조차도 그녀에 비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단 한 사람, 자신의 아내만을 사랑했던 곽효는 자신 역시 아내에게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믿음은 지금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추궁을 받으면서도 그가 원하는 대답을 끝까지 내뱉지 않았다.

“……서방님.”

“대답을 해보시오. 부인. 내가 믿을 만한 근거를 주시오. 내가 내 눈으로 본 것보다 당신의 말을 믿어야 할 이유가 대체 뭐요? 나를 이해시켜 주시오, 부인. 나도 당신을 믿고 싶소. 내가 얼마나 간절히 그것을 바라는지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무슨 일이오? 당신은 왜 교주님께 그런 애원을 하고 있었던 거요?”

그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은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결정적으로 선택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천마라는 점뿐이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뿐입니다. 저는 결백합니다. 교주님과 저는 당신이 의심하는 것과 같은 그런 관계가 절대로 될 수 없어요. 제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걸 아시잖아요? 저를 믿어 주세요. 이번 한 번만은 제발 이유를 묻지 마시고 그냥 믿어 주세요.”

아내는 끝끝내 그의 바람을 뿌리치고 말았다. 진정한 비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오로지 정과 선의에만 호소하며 어려움을 자처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곽효는 자신이 이번에도 차선으로 밀려났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아내에게, 그가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바로 그 존재에 의해 천마보다 못하다는 낙인이 찍힌 셈이었다.

그가 일생 동안 가지고 싶어 했던 모든 것들엔 이미 주인이 있었다. 그보다 훨씬 일찍 태어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먼저 거머쥔 사람은 다름 아닌 천마였다.

그는 곽효가 아는 한 가장 강한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영리하고 교활한 자였다. 인간 같지 않을 만큼 빼어난 미모는 물론이거니와 아무도 따라잡지 못할 압도적인 재능을 지녔고, 그저 존재감만으로 타인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위압적이기도 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선천적으로 타고났다. 곽효로서는 무재武才로도, 지략으로도, 심지어는 잡학으로도 그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천마가 살아 있는 한 무엇에도 최고가 될 수 없음을 곽효는 알았다. 그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재질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천마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는 곽효에게 있어서 살아 있는 한계였고,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과 같았다.

‘어째서 하늘은 공명을 낳고 또 나를 낳았는가.’

주유는 제갈량의 자질에 닿지 못한 자신에게 절망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다. 곽효에게는 천마가 그러한 존재였다. 천마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곽효는 천마가 될 수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에만 만족해야 할 뿐, 그가 허락하지 않은 것은 무엇도 가질 수 없다는 치욕스러운 사실은 곽효의 오만한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곽효가 천마에 대해 갖고 있던 오래된 자격지심은 안 그래도 위험 수위까지 치달아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한 선택은,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곽효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구실이 되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안으로만 파고들었던 상처가 급속도로 곪아가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는 상처였기에 그것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손여영은 아마 죽을 때까지 몰랐을 것이다. 그 순간 그녀가 했던 선택이 곽효를 얼마만큼 바꿔 놓았는지 말이다. 그에게는 그 일이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그저 막연하던 천마에 대한 살의가 구체적인 형태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어쩌면 그것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필요였을지도 모른다. 천마의 존재로 인해 심각할 정도로 정체성의 위협을 받고 있던 곽효는,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상대를 눈앞에서 제거함으로써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다.

“계십니까? 단주님. 천이각에서 단주님께 회의 참석을 요청해 왔습니다. 다른 분들께서는 모두 도착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가 오랜 회상에 잠겨 있는 사이에,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곽효는 쓰다듬고 있던 책에서 눈을 들어 바깥을 돌아보았다. 그의 거처의 호위를 맡은 청혈단원 중 한 사람이 문밖에서 공손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곧 나가겠습니다.”

정기가 가득한 맑은 목소리를 일부러 뽑아내자, 문밖의 남자가 송구한 듯 허리를 숙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만약 그가 아직까지 마교에 있었다면 이러한 숭배는 전적으로 천마의 몫이었겠지만, 이곳에서는 그 자신도 천마 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말없이 웃음을 머금은 곽효는 삼매진화를 일으켜 손 안의 책자를 태웠다. 오랜 시간 동안 음모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던 무생비록이 그의 손끝에서 천천히 재가 되었다. 무려 300년을 버텨 왔던 책자가 한순간에 가루가 되어 버린다.

20여 년간 준비해 왔던 모든 일들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한때는 자칫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했으나 이번만큼은 천마도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할 터였다.

‘여기까지 와서 증거를 남겨서는 안 되겠지. 그렇지 않아도 무생교와 관련된 흔적이 여기저기에 드러나 뒤처리가 귀찮은 참인데.’

곽효는 재가 된 책자의 흔적을 창밖으로 날려 보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문을 열고 나서자, 그의 처소를 호위하고 있던 단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공경심이 가득 담긴 인사를 해왔다.

조세화가 마교의 간자인 것이 밝혀진 이후로, 곽효를 중심으로 한 청혈단의 충성심은 더욱 공고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조세화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곽효를 더욱 성실하게 섬겼다. 말로는 형제라고 하지만 이제 그들은 곽효의 친위대에 불과했다. 짐짓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곽효는 그들에게 마주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의 눈앞에 위용 가득한 정도맹의 풍경이 펼쳐졌다. 한때 세상을 지배했던 그들은 다시금 빼앗긴 옛 영화를 되찾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겉보기엔 그럴듯한 명분 아래로 위선과 탐욕이 판을 치는 정파인들은 곽효가 이용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제물이기도 했다.

‘마교의 교주가 될 수 없다면 정도맹의 맹주가 되어 주지. 어느 쪽이 되든 천하제일인의 이름에 모자라지 않는 자리일 테니까.’

야심이 가득한 눈으로 정도맹의 풍경을 내려다보던 곽효는 발걸음을 옮겨 천이각으로 향했다. 능력은 없으면서 탐욕만 득실거리는 늙은이들이 한데 모여 앉아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남모르게 조정해 왔던 곽효는 천천히 자신에 찬 미소를 머금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설사 천마라고 할지라도 이번만큼은 그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을 터였다.

***

벌써 두 번이나 사정을 받아 낸 문평의 뒤는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피곤 때문에 가라앉는 사지를 제대로 펴기 위해 몸을 뒤척이다,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뜨뜻한 액체에 진저리를 치며 힘겹게 눈을 떴다.

정사가 끝난 이후에도 그의 다리 사이에서 비키지 않은 천마는 문평의 무릎을 세워 두고 그의 엉덩이 아래에 흰 무명천을 받치는 중이었다. 기저귀를 갈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형상이 된 문평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세워 정액을 긁어내려던 천마가 문평의 시선을 느끼고 그를 쳐다보았다.

“깨어 있었던 거냐?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자고 있다기보단 정신을 잃은 줄 알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심하게 몰아붙인 데다 체위까지 격렬했다. 한 번은 자리에 선 채로, 또 한 번은 기승위 자세로 그를 받아내야만 했으니 고작 두 번 만에 나가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문평을 탓할 게 못 된다.

천마의 질문을 들은 문평이 힘없이 웃으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기가 심하게 한 줄은 아는 모양이지.’

속으로 불평을 내뱉은 그는 가물가물한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잠들어 있었습니다. 자다 깬 겁니다.”

잦은 정사에 길들여진 몸은 사소한 접촉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너무 피곤해서 당장 지쳐 죽을 것만 같은데도, 천마가 허벅지를 잡아 세우자 본능적으로 정신이 들어 버린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준비라도 해두라는 듯이 말이다.

문평이 무엇 때문에 정신이 들었는지를 깨달은 천마가 능글맞게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어쩌다 한 번 정도는 못 본 척 넘어가 줄 수도 있으련만, 이 사람은 언제나 이런 건수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새 더 민감해진 모양이군. 이런 사소한 행위에도 쉽사리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면 말이야.”

때로는 노골적인 희롱의 말보다 은근한 암시가 더 색정적일 때도 있는 법이다. 천마는 은근슬쩍 문평을 놀리며 그의 비부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쿨쩍, 하는 낯 뜨거운 소리와 함께 문평의 몸 안에서 흰 액체가 흘러나왔다. 젖은 점막이 손가락에 반응해 움찔거리자 문평의 허리도 따라서 흔들린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음란할 정도로 젖은 아랫구멍에서 흰 정액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손톱이 닿지 않도록 조심히 내벽을 긁어내는 천마의 손길은 심란할 정도로 자극적이다.

그의 손길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움직였다. 단순히 정액을 긁어내기만 할 생각이라면 손가락이 그렇게 깊이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문평조차도 인지하고 있는 자극점 근처를 간질이듯 문질러 댈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세 개로 손가락이 늘어날 필요도 없었다.

싸늘히 식어 가던 체온이 다시금 열기를 더해 갔다. 문평은 민망한 기분으로 눈을 감으며 입 안으로 볼을 꽉 깨물었다. 천마가 무슨 생각으로 그를 자극하는지는 알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에게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천마는 겨우 두 번 했을 뿐이지만 문평은 다섯 번이나 사정했다. 고환은 텅 비어 있고, 지나치게 쥐어짜인 탓에 아랫배가 심하게 당겼다.

이 상황에서 또다시 그를 받아 내라는 건 문평더러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었다. 문평은 애써 모르는 체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나 천마는 문평이 자신을 무시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세워져 있던 무릎에 천마의 입술이 와 닿았다. 전희라고 하기보단 후희에 가까울 정도로 느긋하게 입을 맞춘 그는 한 손으로 문평의 다리를 어깨에 얹고 꼼꼼한 태도로 다리를 핥아 나가기 시작했다.

남달리 하체가 발달된 문평은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래쪽에 유독 성감대가 몰려 있었다. 발가락 사이사이가 약할 뿐만 아니라 허벅지 안쪽도 심하게 간지럼을 탄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천마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부분을 거리낌 없이 즐겨 나갔다.

그는 문평의 오금을 한 손으로 받친 채 아래로 입술을 더듬어 내려갔다. 그의 입술이 허벅지를 타고 내려 사타구니 안쪽에까지 와 닿자 문평이 진저리를 치며 얕은 신음을 흘렸다.

꽉 깨문 볼살 때문에 억눌린 듯 흘러나온 문평의 신음은, 그렇지 않아도 할 마음이 가득했던 천마를 결정적으로 충동질했다.

“허리에서 힘을 빼는 게 좋을 텐데. 너도 느끼겠지만 네 속엔 아직도 내 것이 가득 남아 있다. 온종일 배탈로 고생하고 싶지 않다면 내 일을 방해하지 말아야지.”

그가 뭣 때문에 질척하게 내벽을 어루만지는지 뻔히 아는데도, 천마는 능청스럽게 굴며 문평을 달랬다. 빳빳하게 허리를 굳힌 채 가쁜 호흡을 내쉬고 있던 문평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천마를 쏘아보았다.

“그렇게 제 몸이 걱정되신다면 더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를 이대로 죽이실 작정이십니까? 여기서 더 하신다면 제 몸이 버텨내지를 못할 겁니다.”

그렇게 문평이 걱정된다면 저번 정사의 흔적도 아직 다 못 긁어낸 그의 뱃속에 다시금 정액을 집어넣는 일 따위는 하지 말아야 했다. 빼기도 전에 넣는 것을 이리도 자주 반복한다면 대체 어느 세월에 그의 속이 완전히 비어 있을 수 있느냔 말이다.

상대에 대한 원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천마가 다시 웃었다.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문평과 달리 천마는 그저 태연하기만 했다. 나름대로는 위협적으로 보이기 위해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를 보는 천마의 눈빛은 손톱을 세운 새끼 고양이를 내려다보는 듯 흐뭇하기 짝이 없었다.

‘나 같은 덩치를 어째서 저런 눈으로 보는 걸까?’

문평은 사랑스럽다는 빛이 절절한 그의 눈빛에 속으로 뜨악한 감정을 느꼈다. 천마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런 시선으로 장년의 사내를 바라보는 심리만큼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너는 너의 한계를 너무 낮게 잡는구나. 하긴. 너는 언제나 그게 문제지. 자신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지에 대해서 시험해 보고 싶어 하지 않거든.”

천마는 짐짓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리더니, 손끝으로 문평이 느끼는 부분을 슬쩍 찔렀다. 반사적으로 허리가 풀쩍 튀어 오른 문평은 원망스럽게 천마를 바라보며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더는 하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만, 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가능하면 길고 가늘게, 최대한 복지부동한 삶을 사는 것이 저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소심하다는 비난을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문평은 진심으로 복하사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한계를 실험한다는 명분 따위로 밤새 천마에게 시달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정신이 들었어도 계속 자는 체를 하는 건데. 괜히 깼다는 티를 내는 바람에 이러한 화를 자초하고 말았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장되었던 안온한 평화가 그리워진 문평은, 내심 눈물을 머금으며 자신의 어리석은 실수를 후회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일각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다시 한번 그에게 기회가 온다면 그는 결코 깨어났다는 티를 내지 않을 터였다. 천마가 무슨 짓을 해도 반응을 하지 않고, 새벽닭이 울고 동창이 밝아 올 때까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누워 미동조차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나 모든 것은 그저 만시지탄일 뿐이었다. 능수능란한 천마는 단지 몇 번의 애무와 입맞춤만으로 문평의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고,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의식과는 달리 그의 몸은 상대를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이건 용감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모르겠군. 내 앞에서 당당히 복지부동을 주장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다.”

천마는 문평의 대답을 듣고 기가 막힌 듯 웃으며 말했다.

‘하긴, 이 녀석은 이런 놈이었지.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안위만큼은 당당하게 챙기는 놈.’

그의 숱한 수하들 중 죽으라는 명령을 받고서도 죽는시늉만 할 놈은 오로지 이놈뿐일 터였다. 그러나 콩깍지가 씌어도 보통 씐 것이 아닌 천마에겐 문평의 그런 터무니없는 점까지도 모두 귀엽게만 보였다.

‘어쩌면 그게 이 녀석의 매력일 수도 있겠지. 애초에 이 녀석에게 관심을 가진 것 자체가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 때문이었으니까.’

문평에게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천마의 취향은 몹시도 독특했다. 본인조차도 자신이 이러한 악취미를 가졌는지 모르고 살아왔으니, 어쩌면 그의 취향은 문평을 만나면서부터 개발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번엔 최대한 부드럽게 해줄 테니. 설마하니 내가 견디지 못할 만큼 몰아붙이겠느냐. 근심하지 말고 눈을 감아라. 너는 그저 즐기기만 해도 된다.”

천마는 엄살을 피우는 문평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그의 몸을 천천히 뒤집었다. 몸을 뒤집으면 어떤 꼴을 당할지 익히 알고 있던 문평은 마치 물방개처럼 잠시간 바동거렸다. 하나 그는 정면으로 입을 맞춰 오는 천마의 공략을 길게 견디지 못했다. 문평은 결국 함락되었고 천마는 기어코 제 뜻을 이뤘다.

천마는 그의 목에 둥근 고리를 채우듯이 천천히 입술을 미끄러트리며 문평의 등 뒤로 올라갔다. 다른 체위보다 후배위로 하는 것이 견디기 쉬울 터였다.

천마는 젖을 대로 젖어 한껏 노곤해진 비부에서 손가락을 뽑고, 그곳에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었다. 몇 번의 정사로 기분 좋게 풀린 문평의 구멍은 나긋나긋하게 그를 받아들였다.

문평은 뱃속 깊숙한 곳에서 치미는 감각에 길게 신음하며 침상 위로 얼굴을 묻었다. 아래쪽에서부터 내장이 차오르고 있었다. 깊숙이 밀려 들어오는 거대한 기둥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충분히 문평을 버겁게 했다.

다리를 넓게 벌린 채 숨을 헐떡이며 문평은 두 손으로 침상의 이불을 쥐어뜯었다. 그의 움켜쥔 주먹을 따라 방사형으로 길게 주름이 잡혔다. 지난 정사로 한껏 눅눅해진 이불 위에 적나라한 정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하악, 윽!”

그가 이마를 침상에 박고 낮은 신음을 흘리자 천마가 달래듯 뒷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러더니 두 손을 뻗어 질릴 대로 질린 문평의 주먹 위를 감싸듯 어루만졌다.

천마가 본격적으로 체중을 실어 오자 엎드린 등 뒤로 묵직한 사내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 몸에 익숙해진 문평은 그의 무게는 물론이고 몸의 윤곽조차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더욱 깊게 몸을 밀어 넣자 고슬고슬한 음모가 문평의 엉덩이 사이에 와 닿았다. 한계까지 벌어진 문평의 연약한 구멍 위에 바짝 밀착된 그것은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감각을 더욱 곤두세우도록 부추겼다.

명확한 부피와 무게를 가진 물체는 문평의 몸 안에서 거친 꿈틀거림을 보였다. 그 움직임을 느낀 문평이 그에 반응이라도 하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쳤던 이전과는 달리, 지금의 천마는 결합된 감각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 상황을 즐기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평까지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느린 속도에 문평이 힘겨워하자 천마의 손이 문평의 납작한 배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힘주어 누르면 그 안에 있는 성기와 맞닿을 수 있을 정도의 위치를 어루만지는 천마의 손길은 무언가 암시라도 하는 것처럼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었다.

몸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농락당한 것 같은 기분에 문평의 머릿속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뱃속에서 고동치는 열기 덕분에 문평의 심장이 거칠게 박동했다. 흥분으로 인해 솟아오른 땀방울이 인중을 타고 흘러내려 입술에 떨어져 내렸다. 짭짜름한 소금 맛이 마른 입 안에 감돌았다. 질척하고 음란한 소음이 그의 귓전을 어지럽혔다.

천마는 천천히, 그리고 얕게 문평의 몸속을 살짝살짝 찔러 나갔다. 그는 조급하게 몸을 탐해오는 것이 아니라 유희처럼 한가한 느낌으로 문평의 몸을 즐기고 있었다.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무장을 해제시켜 나가는 그의 행위는 문평에게도 생경한 감각을 안겨 주었다.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이 행위는 여느 때처럼 집요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몰아치지도 않았고 그의 박자에 문평이 따라오도록 강요하지도 않았다.

천마는 앞서가다 돌아서서 기다려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드물게도 문평의 반응을 기다려 주었다. 길들 대로 길든 문평의 몸은 그런 천마의 행위에 솔직하게 반응했다.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으나 천마가 바라 마지않던 모습이었다.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문평의 허리가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박자를 맞추던 예전과는 달리 자신만의 호흡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분명한 움직임이다. 문평의 움직임에 따라 천마의 성기가 찔러 오는 각도가 달라졌다. 기분이 좋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모자랐다. 뭐랄까. 감질이 난다고나 할까? 그의 몸은 좀 더 깊은 결합을 원했다.

무지근한 열기가 온몸으로 퍼지자 슬금슬금 엉덩이 안쪽이 달아올랐다. 격렬한 쾌감의 기쁨을 알고 있는 내벽은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축을 반복하며 천마의 행위를 재촉했다.

그러나 천마는 이번만큼은 문평의 조름을 거절했다. 그는 얄미우리만큼 정확하게 자신의 박자를 고수하며 일부러 근처만을 맴돌았다. 문평이 느끼는 부분을 강하게 찔러 올리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비볐고, 어떨 때는 마치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근처까지만 들어왔다 나가기도 했다.

그저 한두 번이라면 견딜 수 있었지만, 천마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애만 태웠다. 온몸은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는데도 천마는 문평이 원하는 것을 좀처럼 주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자 문평은 약이 올랐다. 스스로 허리를 흔들어 쾌감을 유도하려고 해도, 천마는 교묘한 방식으로 그를 방해해 결정적인 재미는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반쯤 일어섰던 성기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자극에 미지근하게 풀려 갔다. 온몸이 진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절정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평은 점점 더 미칠 것만 같았다. 격정에 길들여진 그의 몸은 이런 식의 느긋한 성교를 도무지 참아내질 못했다.

“좀, 좀 더…….”

더는 견디지 못한 문평이 조그만 목소리로 사정하기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남자를 받아들이는 처지가 된 그는 잠자리에서 무언가를 조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자의식이 강한 데다 자격지심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하면 자신의 입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자제하는 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인내심마저도 이러한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인 듯했다. 머리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애원이 흘러나오는 입을 막을 수 없었다. 뇌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천마의 행위가 계속될수록 급한 마음이 드는 것은 천마가 아니라 문평이다. 문평은 여느 때처럼 정신을 송두리째 잃을 정도의 강렬한 쾌감을 원했다.

“좀 더 세게, 교주님 제발.”

이성을 잃은 그는 엉덩이를 힘껏 조이며 더욱 간절히 상대를 요구했다. 천마는 눈자위가 붉게 물든 채 자신을 돌아보는 문평을 바라보며 색정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부드럽게 해준다고 약속했었지.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어차피 약속이라고 해봤자 본인 스스로가 내건 일방적인 말일뿐이다. 적당히 사정을 봐주며 융통성을 발휘해 주면 참으로 고마우련만 끝까지 이러는 것을 보면 천마는 그를 단단히 골탕 먹일 속셈인 듯했다.

문평은 울먹거리며 허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천마의 기교는 서투른 그의 것보다 한층 더 교묘했다. 몇 번의 시도가 가로막히자 문평의 머릿속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부탁까지 했는데도 좀처럼 들어주지 않는 천마가 야속해 견딜 수 없었다.

자는 사람을 깨워 이렇게까지 몰아붙여 놓고는 이제 와 나 몰라라 하다니, 무슨 인간이 이렇듯 야비하고 비열하단 말인가.

“제가 바라는 것은 뭐든 들어주겠다고 하셨지요. 그 말은 약속이 아닙니까?”

천마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지 문평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약하게도 천마의 계교에는 언제나 알고 있어도 꼼짝없이 넘어갈 수밖에 없는 데가 있었다. 문평이 구차하게도 지나간 옛이야기까지 꺼내며 매달리자 천마의 눈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허리를 숙여 문평의 젖은 눈매를 입술로 닦아 주며 매혹적으로 속삭였다.

“그렇게까지 내 것이 갖고 싶으냐?”

그의 노골적인 수작을 마주한 문평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진짜 마지막까지 가보자는 거구만, 이 인간은.’

마음 같아서는 정말이지 모른 척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교묘하게 자극점 근처만을 맴도는 천마의 행위는 그를 더 이상 참지 못하게 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린 문평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천마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교주님. 저는 당신의 것이 갖고 싶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느냐? 더 강하게 박아 줄까?”

“예. 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해주십시오.”

이런 치욕을 당하고도 계속 정신을 차리고 있을 자신이 없었던 문평은 차라리 정신을 잃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했다. 그의 소망은 천마에게 분명히 전해졌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난폭한 방식으로 내장이 찔러 올려졌다. 자초한 일이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 문평의 입이 둥글게 벌어졌다. 그러나 그가 미처 정신을 추스르지도 못한 사이에 천마의 움직임이 재개되었다.

문평의 바람을 들어주려는 것처럼 천마는 거칠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 문평을 밀어붙였다. 그가 온 체중을 다해 찍어 올리는 바람에 문평의 허리가 꺾일 듯 휘었다.

그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커다란 침상이 같이 흔들리며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삐걱삐걱. 아래로는 천마에게 침습 당하고 귀로는 소리에 공격당한 문평은 비명을 참기 위해 이마를 침상에 내리누르고 이를 악물었다.

어중간하게 달아오르기만 했던 자극점이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있는 대로 발기한 문평의 성기가 딱딱하게 곤두선 채 젖은 이불 위에 마구 문질러진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흘렀다. 간질간질 애타던 감각들이 모두 불이 붙은 듯 여기저기서 불꽃처럼 쾌감이 마구잡이로 튀어 오른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죽을 것만 같아서 문평은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젖은 천에 마구 휩쓸려 이마가 빨갛게 물들었다. 생리적인 눈물이 뺨을 적시고 흘러내린다. 아래에서 치받아 오는 모든 것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천마가 그에게 주고 있는 것은 용암처럼 뜨거운 동시에 녹아내릴 듯 진득한 쾌감이었다. 문평은 애타게 바라왔던 모든 것이 이루어진 듯한 기분으로 거세게 내벽을 조였다. 거칠게 그의 몸을 드나드는 천마의 물건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악! 아읏! 좀 더, 좀 더 세게!”

이성을 잃은 사람에게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정신을 휩쓸고 지나가는 쾌감에 발버둥 치던 문평은 좀처럼 입에 담지 않았던 노골적인 요구까지 내뱉으며 천마와 동작을 같이했다.

부끄러움을 타는 수줍은 모습도 귀엽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역시 솔직한 태도만큼이나 성욕을 돋우는 것은 없었다.

문평의 서투른 요구 덕분에 천마의 기분은 한층 더 고조되었다. 천마는 문평의 비부 속을 더욱 강하게 파고들며 두 손으로 문평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고환까지 밀어 넣을 듯 깊이 파고드는 그의 삽입에 문평이 가는 경련을 일으켰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벌써 토정을 한 모양이었다.

“벌써 가면 안 되지. 나를 이렇게 달아오르게 만들어 놓고 고작 이 정도에 나가떨어지려고?”

천마는 부르르 몸을 떠는 문평을 움켜잡고 동작을 계속해 나갔다. 모처럼 그가 요구했으니, 정말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생각이었다. 부드럽게 해준다고 해도 마다한 녀석이니 그런 꼴을 당한다고 한들 그를 원망하진 못할 터였다.

사정을 한 후에도 뜨겁게 조여 오는 문평의 내벽은 천마에게 있어 참을 수 없는 유혹이나 마찬가지다. 그의 품에 안겨 있을 때의 문평은 무르익은 과실처럼 달콤했다. 몇 번을 안아도 질리지 않는 그 몸속으로 천마는 깊이 몰두해 들어갔다.

밤은 아직도 길게 남았고, 천마의 정력은 끝 간 데를 몰랐다. 괜히 입을 놀려 화를 자초했던 문평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하나 모든 것은 이미 늦었다. 그가 아무리 후회를 해봤자 한번 지나간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오랜만에 정말 죽을 듯이 시달렸기에, 수면도 죽은 듯이 하게 되었던 문평은 오후 늦게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하고 잠이 들었으나 배는 고프지 않았다. 내장 운동이 너무 격렬했던 탓인지 아직도 뱃속에서 얼얼한 둔통이 일었다. 살다 살다 내장이 아리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문평은 담이라도 온 것처럼 마구잡이로 당기는 아랫배를 움켜쥐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젯밤 처음으로 들어온 방인데도 어쩐지 천장의 생김새가 낯익었다. 왜 이렇게 저 천장이 익숙한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원인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어젯밤, 한 번 끝을 맺었다가 중간에 다시 시작했던 정사는 처음에는 후배위였으나 두 번째부터는 계속해서 정상위로 진행되었다. 그 덕에 문평은 천장 하나만큼은 외울 정도로 올려다볼 수 있었다.

저 나뭇결이 왠지 익숙하다. 천장에 박힌 옹이가 몇 개인지도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멀미가 날 정도로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용케도 보이던 것들을 기억해 낸 문평은 속으로 앓는 듯한 신음을 삼켰다.

‘이런. 젠장할.’

정신이 되돌아오자 기억이 나는 것은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맑은 정신으로 지난밤의 일을 모조리 기억해 낸 문평은 머리라도 싸잡고 싶은 심정으로 침상 위를 뒹굴었다.

창피하고 부끄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지난밤의 자신은 정말 뭐에 씌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낯부끄러운 짓거리들을 저지를 수 있었단 말인가? 이성을 되찾고 보니 어제의 일이 민망해도 이렇게 민망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낯으로 천마를 다시 봐야 할지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제 당분간 그 사람을 어떻게 보지? 그 사람이 결코 가만있을 사람이 아닌데.’

문평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마음에 걸려 견딜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꼬투리만 잡으면 그를 놀려대던 천마가 아니던가?

이런 거창한 빌미로 자진해서 붙잡혔으니 천마가 놀리지 않기를 바란다는 건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길 바라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바람일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분간 줄행랑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에게 그럴 만한 능력만 있었다면 진짜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일어났군. 늦게까지 정신을 못 차리더니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천마가 그랬다. 웬일로 그의 곁을 비웠던 천마는, 문평이 그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마치 부름이라도 받은 것처럼 문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겠지만,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적지 않았던 문평은 흠칫 놀란 시선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떼꾼한 안색의 문평과는 달리 천마는 언제나처럼 최상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평상시에 비해서도 오히려 더 안색이 맑아 보이기까지 했다.

‘확실히 괴물은 괴물이군. 그렇게 해대고도 피곤한 기색조차 없다니.’

나이로 따지자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이가 어린 그이지만, 기력이나 정력에 있어 천마에게 감히 댈 수가 없는 처지다 보니 내심 질리고 말았다. 성별이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사내인데 어쩌면 이렇게 두 사람 사이의 차이가 큰 건지 모를 일이다.

“지금은 몇 시나 됐습니까?”

해가 기울어져 가는 오후 무렵이라는 것은, 서쪽 창에 드는 불그스름한 오후의 햇살만으로도 충분히 추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 자신이 몇 시진이나 잠이 들었는 지까지는 계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문평은 천마에게 정확한 시각을 물었다.

“벌써 유시酉時다. 속은 좀 어떻지? 배는 안 고픈 게냐? 꼬박 하루를 고스란히 굶은 셈인데.”

“너무 오래 자서 그런지 몰라도 딱히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머리가 좀 무겁긴 하군요.”

“네가 이리도 오래 잠이 들었던 것은 모두 다 체력이 달려서 그런 거다. 그럴 생각이 없어도 끼니는 제때 챙겨야지.”

문간에 기대고 서 있던 천마가 문평에게 다가와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런 그의 접근에 위협을 느낀 문평은 움찔 놀라 엉덩이를 물리다가, 자신이 알몸이 아니라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처럼 뒤처리를 깨끗이 해놓은 것도 모자라 웬일인지 옷을 입혀 놨다. 간단한 침의일 뿐이긴 하지만 옷을 입고 잠든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어? 옷을 입고 있네요?”

문평은 얼떨떨해하며 무심결에 말했다. 천마가 웃으며 그런 문평의 귓전에 입을 맞췄다. 그는 아직도 농염함이 남은 눈빛으로 문평을 바라보더니 야한 눈웃음을 치며 은밀히 속삭였다.

“그럼. 옷을 입었지. 계속 벗겨 놓고 있으면 스스로를 자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거든.”

그렇게 하고도 모자랐던 모양인지 말을 마친 천마가 입맛을 다셨다. 반은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문평의 등허리에 주뼛 소름이 돋았다. 반이 농담이라는 말은 나머지 반은 진담일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해대고도 모자랐던 건가? 이 사람의 몸은 대체 뭐로 만들어진 거야?’

의식적으로 참지 않으면 슬슬 엉덩이가 뒤로 물러날 것만 같아 문평은 애써 허리에 힘을 주었다. 예전에 호랑이와 눈이 마주치면 눈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문평이 생각하기엔 천마를 대하는 법도 그와 같았다. 상대에게 피하거나 도망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섣불리 그런 모습을 보였다간, 원하지 않게 맹렬한 추격을 받게 될 것이 뻔했다.

“먹고 싶지 않아도 좀 먹어두도록 해라. 곤하다고 끼니를 거르면 몸이 더 축나는 법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필요 없이 방에다 식사를 가져오라고 하마. 특별히 생각나는 게 있느냐? 입에 당기는 거라도?”

“딱히 생각나는 건 없습니다. 간단한 게 좋겠군요.”

“알겠다. 준비해 주지.”

천마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얼마 안 있어 점소이가 방 안으로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죽순과 닭을 넣어 끓인 닭죽과 기름을 쓰지 않은 생선 요리, 맑은 오리 탕국 같은 담백한 요리들이 몇 가지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입맛이 없는 문평을 생각해 자극적인 요리는 일부러 피한 모양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늘 곁들이던 반주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를 대신하기라도 하는 모양인지 질 좋은 차만 한 주전자 들어왔다.

미주가효를 즐기는 천마를 곁에 둔 덕에 천하의 명주를 실컷 맛볼 수 있다는 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는 그 낙을 누릴 수 없을 것 같아 문평은 은밀히 실망했다.

“뭐 해? 식사하라니까?”

그다지 크지 않은 다탁 위가 음식들로 가득 차자 천마가 문평을 불렀다. 점소이가 방을 나갈 때까지 침상 위에 앉아 있던 문평은 그가 문을 닫고 나서야 침상에서 내려왔다. 어기적거리는 발걸음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걷는 것이 둔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문평은 천마가 앉은 건너편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선 속이나 좀 보하라는 뜻인지 천마가 닭죽을 문평에게 밀어주었다.

문평은 말없이 수저를 들어 올렸다. 때가 좀 이르긴 하지만 마침 저녁 무렵이어서 천마도 식사를 시작했다.

배가 고프지 않다고 생각했었지만, 일단 음식을 삼키고 나니 슬그머니 입맛이 돌았다. 아주 잘하는 요리는 아니지만 음식들은 하나같이 맛깔스러웠고 텅 비어 있던 위에서는 뒤늦게 허기가 느껴졌다.

급하게 먹으면 체할 것 같아 천천히 숟가락을 놀리던 문평은 맞은편에서 건너다보는 천마의 눈길을 느끼고 시선을 들었다. 우아하기 짝이 없는 자태로 생선 가시를 발라내고 있던 천마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천마처럼 우아하게 식사를 하지는 못해도 추한 꼴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밥 먹는 광경을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지켜보고 있으니 은근히 면구스러워졌다.

문평이 숟가락을 든 채 주저하며 묻자 천마가 웃으면서 그의 숟가락 위로 생선살을 얹어 주었다. 깜짝 놀란 문평이 멍한 시선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문평에게 속삭였다.

“이것도 먹어라. 많이 먹어 둬야지. 당분간은 정말 체력이 필요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의미심장한 그 한마디에 문평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거 먹여 놓고 대체 뭔 짓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저는 아직 어젯밤의 여파에서 회복도 되지 않은 상태인데요!’

진심으로 놀라 꽁꽁 얼어붙어 버린 문평은 두드리면 그대로 깨져 나갈 얼음처럼 보였다.

‘참 놀리기도 쉽단 말이지.’

천마는 속으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베어 물며 문평의 반응을 즐겼다. 그는 정말 아무리 갖고 놀아도 질리지 않는 놈이었다. 어째 사람이 이리도 의뭉스럽질 못하단 말인가? 늘 뱃속에 능구렁이 몇 마리쯤은 들여앉힌 놈들에게만 둘러싸여 있던 천마에게 문평의 이러한 반응은 언제나 새롭기 짝이 없었다.

“저, 저기. 그러니까 그 말씀은?”

“오늘은 일단 쉬고, 내일부터는 강행군을 해야 한단 뜻이다. 호북성이 지척이긴 하지만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 될 게다.”

불건전하게 치우쳐 있던 예상이 민망하게도, 천마의 의도는 의외로 담백했다.

‘하여간 사람을 놀리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되지.’

문평은 안도 때문에 절로 어깨가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저 못된 버릇, 대체 언제 고치려고 저러는 걸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거리에 재미있는 소문이 돌더군. 정도맹에서 드디어 무생교의 본거지를 발견했다고 말이야. 뜻밖에도 그들은 정도맹의 본거지인 호북성에 둥지를 틀었던 모양이야.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정도맹이 자기 안방에서 뒤통수를 맞았다고 전 강호가 시끌벅적해졌지.”

천마는 비웃음이 역력한 어조로 강호에 전해지는 소문을 옮겼다. 떠도는 소문은 일단 그렇다는 것이고, 천마 자신은 그 말을 하나도 믿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문평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제껏 그가 보고 들은 게 얼만데 순진하게 그런 말을 믿겠는가? 이번 소문 역시도 정도맹이 직접 만들어 낸 함정임이 분명했다.

“이상한 일이군요. 왜 그들은 그런 소문을 내는 걸까요? 호북성이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그들의 안방입니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들이 몰랐다고 하면 스스로 체면을 깎는 일일 텐데요. 어째서 하필이면 호북성이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평이 상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윤승효나 포영의처럼 영민함을 타고나지 못했기에, 천마의 도움 없이는 강호의 암수를 홀로 깨닫지 못했다.

“핑계가 필요했던 거지.”

“핑계라고요?”

“너도 소문은 들었을 게 아니냐. 흑마옥에 있어야 할 무림공적들이 밖을 나돌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 소문은 무생교의 배후에 대해 적지 않은 의혹을 낳았지.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는 자들이라면 그 배후로 정도맹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파인들이란 누구보다도 남의 눈치를 살피는 자들이니 그런 의혹을 어찌 그냥 내버려 두겠느냐? 그들은 모든 일을 무생교에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게다. 이제껏 그래 왔듯이 말이다.”

마교를 무생교의 배후로 몰아가기 위해 일으킨 백귀야겁은 절반은 성공했고 절반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탈하고 있던 전력을 정도맹의 아래로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들이 성공한 것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자중지란으로 정도맹의 전력은 오히려 깎인 상황에서 마교의 군세는 점점 더 중원으로 깊이 진군했다. 마교가 더 깊숙이 파고든다면 정도맹이 꾸몄던 음모가 만천하에 드러날 수도 있었다. 정도맹으로서는 그렇게 되기 전에 상황을 정리하고 싶을 터였다. 무생교를 핑계로 군사를 모으고 있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대상은 분명 마교였다.

무생교를 치기 위해 중원에 들어왔다고 천명했던 마교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설사 그들이 함정인 것을 눈치챈다 해도 피할 순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무생교의 본거지로 밝혀진 곳에 발을 들일 수밖에 없고, 정도맹과 마교의 세력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면 무력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건 의심할 것도 없는 곽효의 방식이군. 가장 간단한 수법이 가장 효과적이라 이 말인가?’

천마는 수염도 없는 턱을 쓸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다. 지루할 정도로 오래 기다리게 만들더니 이제야 움직일 마음이 들었는가 보다.

곽효가 결전을 결심했다는 것은 그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 냈다는 뜻이었다. 곽효가 무슨 꿍꿍이를 생각해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번처럼 허술한 음모는 아닐 것 같아 못내 기대되었다.

지난번에야 문평 덕분에 곽효가 살아남았지만, 이번에도 그런 요행을 바라지는 못할 터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생교의 본거지가 호북성에 있는데 어떻게 정도맹에게로 향했던 의혹이 벗겨진다는 말씀이십니까? 제 짧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이 더욱 깊어질 것만 같은데요.”

정도맹이 호북성 내부의 이변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은 그들이 스스로의 무능함을 자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명색이 중원 전체를 아우른다는 정도맹인데,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본거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천마는 이조차도 곽효가 의도한 바라고 믿었다. 현 정도맹 체제의 무능함을 부각시킨 것도 의도적으로 행해진 일이었다. 여태까지 해온 행태를 보면 짐작이 가는 일이지만, 곽효는 차기 정도맹주 위를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낸 소문에 의하면 무생교의 본거지는 바로 흑마옥이었다고 하는군. 무생교가 흑마옥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무림공적들을 사사로이 이용해 음모를 꾸며 왔다는 게다.”

“무슨…….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정도맹의 수뇌들은 모조리 바보 천치란 말입니까? 그런 중요한 장소를 몇 년간 점령당하고 있었으면서 아무도 몰랐다고요? 흑마옥이 감옥이니 간수들도 있었을 게 아닙니까? 그자들과 연락이 안 된다면 정도맹도 이변을 알아차렸을 텐데요.”

“그렇듯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들었으니 무생교의 행사가 더욱 무서워지는 것이지. 그들에겐 곽독충郭禿蟲이라는 벌레가 있는데, 그 벌레에 당한 사람은 마치 섭혼술을 당한 것처럼 시전자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 정도맹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흑마옥의 간수들은 모두 그 곽독충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라는 거야. 어때?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이야기 아닌가?”

곽독충이라는 말을 들은 문평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이름을 문평이 어떻게 잊겠는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기억을 선사했던 물건인데 말이다.

천마는 느긋하게 젓가락을 움직이며 그린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리니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웠지만, 그가 좋아서 웃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문평은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살폈다.

“흥미로운 것은 단지 그뿐만이 아니지. 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흑마옥에 대한 심상치 않은 소문을 감사하기 위해 보냈던 자들 중 한 명이 모산파 출신이었던 덕분이라더군. 신중을 기하기 위해 한 개의 대대를 보냈음에도 오로지 그자 하나만 살아 돌아왔다는데, 내가 보기엔 그놈이 가장 의심스러워.”

말로는 의심스럽다고 하지만 보나 마나 뻔한 일이었다. 모산파의 방계라고 한들 어지간한 술사가 아니라면 곽독충에 대한 것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산파 출신임에도 정도맹 소속이었다면 틀림없이 술사가 아니라 무인이었을 텐데, 그가 대체 무슨 방법으로 그들의 음모를 간파할 수 있었단 말인가?

소문을 듣자 하니 그에게 사기의 침입을 가로막는 법기法器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러한 물건은 제아무리 좌도방문의 종주라고 일컬어지는 모산파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가 겪어 본 바에 의하면, 곽독충은 단순히 술법으로만 이뤄진 게 아니었다. 독충을 기반으로 한 독술과 의술까지도 잡다하게 사용된 귀물貴物이라 한 가지 방면에만 조예가 있어서는 쉽사리 찾아내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흑마옥의 소재가 드러나게 되겠군요. 그간 소문만 무성했지,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었는데 말입니다.”

그와 같은 마교인이나 사마외도의 고수들에게 흑마옥은 공포의 이름이었다. 어디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장소인지도 몰랐지만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 그곳은 지옥이나 다름없는 장소다. 정도맹에 잡혀간 숱한 무림공적들과 거마들이 흑마옥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뼈를 묻었다.

이름은 널리 알려졌으나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던 장소가 드디어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하니, 아무 상관도 없는 문평조차도 조금 가슴이 뛰었다. 정도맹이 이번 일에 걸고 있는 각오가 문평에게조차 선명히 느껴졌다. 무려 흑마옥을 미끼로 내걸다니. 이건 그야말로 배수의 진을 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흑마옥의 소재가 어디라고 밝혀졌지요?”

“호북의 흥산興山. 그곳에서 조금 더 들어간 곳에 장촌樟村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근처의 산에서 광산인 양 위장하고 있었다고 하니 일단 장촌부터 찾아야겠지. 이번 일로 위치가 들통나고 말았으니 더는 그곳을 흑마옥으로 사용하긴 어려울 거야.”

한 가지 다행한 것이 있다면 흑마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마을 사람들은 모조리 짐을 싸 들고 산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이었다. 무림인들에게도 흑마옥은 공포의 장소니, 그들처럼 선량한 촌민들에게는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기린패로 인한 참극이 머지않았던 시점이었다.

칼에는 눈이 없으니 그 난전에 휘말린다면 애꿎은 명줄만 낭비하게 될 터. 목숨이나마 부지하고 싶다면 강호인들의 행사가 벌어지는 장소 근처엔 얼씬도 안 하는 게 현명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두어라. 당분간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시간도 없을 테니 말이다.”

결전을 기다린 것은 정도맹만이 아니다. 천마 역시도 치솟는 모든 감정을 억누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 왔다. 이제 그의 오랜 기다림도 끝을 맺을 때가 되었다. 썩은 종기를 짜내고, 그의 인생에 마지막으로 남은 걸림돌을 치울 때가 된 것이다.

건곤일척의 승부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는 곽효가 어떤 방법으로 발버둥을 칠지 너무도 기대가 되었다. 손여영을 해치고, 백우경의 인생을 빼앗았던 놈이다. 그도 모자라 문평의 목숨을 해하려 들기까지 했다.

그런 놈을 천마가 어찌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오랫동안 식어 있던 피가 들끓는 것을 느끼며 천마는 홀로 미소 지었다. 칼날을 베어 문 듯한 시퍼런 냉소가 그의 입가에 떠돌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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