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20 장 (21/26)

제 20 장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고 있다.”

천기수사 제갈부는 초조한 표정으로 집무실 안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찬찬히 그가 던져 준 서신을 읽어 보던 백우경이, 그의 숙부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서신을 보낸 문파가 벌써 십여 문파에 이른다는 겁니까?”

“그렇다. 심지어는 자신들이 직접 연판장에 서명을 한 자들마저도 말이다! 말이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것이지 한 발 빼는 것과 뭐가 달라? 마교가 중원으로 들어온다면 막을 생각부터 해야지. 뭐가 어째? 어부지리?”

그의 말대로였다. 한때는 정사 대연합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었으나, 마교의 발 빠른 선언이 이어지자 왕성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강호의 뜬소문에도 부화뇌동하는 자들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제갈부는 거의 다 이뤄져 가던 계획이 이런 식으로 틀어진 것이 화가 나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제갈부의 대답을 들은 백우경이 담담히 웃었다. 그는 손에 든 서신을 내려놓으며 자신의 외숙에게 말했다.

“이탈하고 있는 것은 어차피 정사지간의 문파와 사파들입니다. 그들에게 어찌 우리 정파와 같은 의리를 바라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적지 않은 전력이다. 잘만 이용한다면 유용한 방패막이가 될 수도 있었어.”

“네. 그렇죠. 하지만 처음부터 변수로 꼽고 있던 자들입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전력은 예상외로 넣고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일이 너무 잘 되어 갔던 겁니다. 사람이 세운 계획이라는 게 모두가 그렇게 딱 맞아떨어질 수는 없는 거지요.”

백우경은 담담히 말했다.

‘저런 모습은 정말로 누이를 닮았단 말이야.’

제갈부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나 버린 가엾은 누이를 떠올리며 백우경을 바라보았다. 여인이라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뛰어난 기질을 가지고 있던 그의 누이는, 눈앞의 조카에게 자신의 모든 장점을 빠짐없이 물려주었다. 어떠한 일을 앞에 두고 흐트러짐 없는 당당함뿐만 아니라, 치밀한 성격과 기품 있는 태도까지도 말이다.

솔직히 말해 태어나기도 전에 목숨을 잃은 아비가 저 아이에게 물려준 것은 성과 얼굴뿐이다. 평생을 제갈세가에 의탁해 자란 아이는 그에게 친아들과 다름없었다.

자랑스러운 조카의 안정적인 태도를 보자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 제갈부의 성급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정작 나이 어린 조카는 침착하기 그지없는데, 그 앞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나니 멋쩍은 기분마저 든다. 그는 볼썽사납게 방 안을 돌아다니던 것을 그만두고 서탁 너머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후우. 내가 못난 꼴을 보인 것 같구나.”

제갈부는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사과에 조카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닙니다. 숙부님.”

“사실 이제부터가 가장 중요한 시점이 아니냐. 그런데 자꾸만 하나둘씩 예상과 어긋나는 일들이 생기고 있으니 그만 초조해졌던 모양이다.”

“무엇이 그리도 걱정되십니까? 이탈하려는 자들이 간혹 있기는 해도 그 숫자가 생각만큼 많지는 않습니다. 재빠르게 연판장에 서명을 시켜 놓은 것이 효험을 보고 있으니까요. 전력을 모으는 것도 순조롭고, 각 대문파의 호응도 적극적입니다. 이만하면 작은 줄기는 몰라도 큰 줄기는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닙니까?”

“후우.”

“왜 그러십니까?”

“실은 다름이 아니라, 정도맹 내부에 수상쩍은 기운이 감돌고 있다.”

“정도맹 내부에요?”

금시초문인 듯 백우경이 눈썹을 휘어 올리며 제갈부를 바라보았다. 그의 의아한 눈빛이 재촉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갈부는 입을 열었다.

“너도 당문에 대한 몹쓸 소문을 들어 봤을 것이다. 그 소문은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당문의 위신이 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다.”

“네. 저도 그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당문오독의 대형이었던 당적형이 돌아와 그 일에 대해 추궁을 하며 가문을 발칵 뒤집어 놨더군. 당추양 그 칠칠맞은 작자가 증거를 흘리고 다니는 바람에 제대로 된 반박도 못 하고 고스란히 뒤집어썼어. 그 소동이 외부에까지 새어 나가는 바람에 추문이 증명되어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 버렸지. 덕분에 당문은 당분간 전력이 될 수 없게 되었다.”

당문의 내분이 생각보다 빠르게 가라앉는다고 해도, 그에 대한 소문이 바깥으로 퍼졌으니 소용없는 일이다. 정도맹에서는 무생교와 손을 잡았다는 의혹이 있는 당문과 행동을 함께할 수 없었고, 그들 자신도 언제 급변할지 모르는 상황을 인지하고 있을 테니 함부로 전력을 보태려 들지 않을 것이다.

제갈세가를 제외하면, 당문은 오대세가 중 가장 중요한 전력이었다. 그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을뿐더러, 그들의 독과 암기도 상당히 유용한 도구였다. 앞으로도 도움을 받아야 할 부분이 적지 않은데 제대로 써먹어 보지도 못하고 전력에서 이탈해 버리니, 이제껏 그들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수립해왔던 제갈부로서도 아까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이 단순히 당문만의 문제로 끝났다면 나도 이렇게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을 거다. 아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네 말대로 계획이란 항상 예상외의 변수라는 게 있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 추문이 빌미가 되어 다른 문파들까지도 점차 의혹이 번져 나가고 있으니 그것이 난감하구나.”

백우경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속이 답답한 듯 나지막하게 한숨을 쉰 제갈부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지금 강호상에는 당문뿐만 아니라 정도맹의 다른 문파들 중에서도 무생교와 손을 잡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무생교와 협력하고 있기 때문에 천하의 이목을 마교로 집중시키려 한다는 추측까지 나오고 있는 마당이다. 그 소문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 암암리에 우리 정도맹의 무사들까지도 알고 있다고 하더구나.

물론 특별한 증거가 나온 것은 아니기에 신빙성 있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정도맹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의혹을 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치명적이다. 정파가 명분을 잃는다면 누가 우리를 따르겠느냐? 게다가 협력자들도 은연중에 소문에 동요하고 있다. 당문의 선례가 눈앞에 있으니 자신들 역시 그리 당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치들이다.”

“뒤늦은 걱정이군요. 대의를 위해 처음 나설 때만 하더라도 어떤 오욕이건 서슴없이 감내하겠다고 맹세한 그들이 아닙니까? 물론 떳떳하다 할 수 없는 수단까지도 사용하고 있으니 최대한 기밀을 유지하여야 하지만, 당문 같은 불상사가 생기는 것도 아예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를 알고 있고, 동의하고 있다고 여겼는데요. 그만한 각오 없이 이런 일을 시작했단 말입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경아. 아무리 각오를 하고 있던 일이라 할지라도 막상 닥치면 흐트러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 아니겠느냐.

모두가 너처럼 투철한 신념 하나로 이번 일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가장 충실하게 계획을 이행한 문파들조차 속으로 주판알 한두 번쯤은 튕겨 봤을 터. 손해보다는 이익이 더 많을 거라 계산하고 움직였을 텐데, 피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커지니 본전 생각이 나는 게지.”

“그랬다면 더욱 뚝심 있게 밀어붙여야지요. 애초 계획의 겨우 절반에 이르렀을 뿐입니다. 벼는 익어야 거두고, 과실은 딴 후에야 제맛을 볼 수 있는 법입니다. 아직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섣부르게 구는 것은 이제껏 해왔던 모든 노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짓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태도가 대업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숙부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지. 지금은 우리가 흔들릴 때가 아니지.”

“그러니 숙부께서 도와주십시오. 숙부께서 나서서 그들을 다독여 주신다면, 한동안은 봉합될 겁니다. 현 상황에서 무엇보다 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파의 힘을 결집시키는 일입니다. 우리 정파가 마교에게 밀리는 것은 그들에 비해 모자라서도, 그들만큼 힘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너무 많은 세력으로 나뉘어 있어 하나로 힘을 합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교를 치기에는 이번이 가장 적당한 기회입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면 정파는 이제껏 그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영 그들의 발밑에 굴복해야만 할 겁니다.”

형형하게 눈을 빛낸 백우경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가 하는 말은 제갈부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했다. 여기까지 계획을 이끌고 온 이상 돌이키기에는 늦은 일이었다. 오로지 큰 뜻 하나만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개중에는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도 있었다.

정도맹에게 이런 절호의 기회가 생긴 것은 그 모든 희생을 감내하며 계획을 실현해 왔기 때문이다. 대의도 대의지만, 자신의 평생을 다 바쳐 이 일을 추진해 온 조카를 생각하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한다면 당분간은 괜찮겠지. 하지만 그도 한동안이다. 이후로도 상황에 변화가 없다면 전력의 이탈은 가속화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동조자들마저도 몸을 사리게 될 게 뻔한데 너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냐?”

“내지르는 창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방패로 막는 것뿐입니다. 눈앞의 사안에 정신이 팔려 모두들 그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하니, 누가 창이고 누가 방패인가 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

“우선 창에 맞으면 어떻게 되는가부터 보여줘야지요.”

백우경은 품속에서 하나의 책자를 꺼내 제갈부에게 건넸다. 겉보기엔 멀쩡한 책자였으나 기름 먹인 종이로 만들어 놓은 표지에는 아무런 제목이 없었다.

의아해하며 책자를 받은 제갈부는 그 속의 내용을 살폈다. 책자 속엔 익숙한 문파명들이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연판장의 사본인가 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렇지 않았다.

명단 중에는 연판장에 가입한 문파도 있고 그렇지 않은 문파도 있었다. 아니, 비율상으로 보자면 연판장에 가입되지 않은 문파들이 연판장의 문파들보다 더 많았다.

“이게 무엇이냐?”

“본보기가 되어 줄 문파들입니다. 창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면 누군가는 그 창에 맞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제갈부의 등골이 섬뜩해졌다. 백우경의 말을 듣고서야 그는 이 책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 책자는 다름 아닌 살생부였다. 마교의 방문으로 우왕좌왕하고 있는 강호의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본보기로 보여 줄 피의 제물.

어렸을 때부터 누이에게 마교에 대한 복수심을 주입받아 왔던 조카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교를 몰락시키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그 성격은 그의 누이인 제갈희련에게서 받은 철저한 교육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때때로 섬뜩해질 때가 있었다. 조카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저 단호한 결단력에는 가끔씩 질리고 마는 것이다.

난세에 태어났다면 익히 일국을 이룰 효웅이 되었을 만한 그릇. 제갈부는 자신의 조카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저 아이는 지금도 효웅인 건지도 모르지. 조용한 외견 속에 불꽃 같은 마음을 감추고, 강호상에 일어나는 숱한 일들을 보이지 않는 음지 속에서 홀로 조종하고 있으니 어찌 효웅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이 저 아이의 진면목을 모른다는 게 다행한 일이야. 그렇지 않았으면 그들은 천마뿐만 아니라 저 아이조차도 두려워하게 되었을 테니까.’

역시 핏줄은 핏줄. 호랑이의 피는 어디 가지 않는다.

무심결에 천마와 백우경을 동시에 떠올렸던 제갈부는, 뒤늦게 자신이 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고는 황급히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우경이 천마의 혈육이라는 것은 비밀 중의 비밀이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심지어 본인조차도 모르고 있는 형편이니, 섣부르게 떠올렸다 실수하는 일만큼은 절대로 없어야 했다.

‘우경은 어디까지나 제갈세가의 핏줄이어야 해. 죽은 검협이 낳았고, 제갈세가가 기른 정파의 핏줄.’

제갈부는 부지불식간에 떠올랐던 생각을 서둘러 지우며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그 많은 자들을 모두 처리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반 사정을 고려해 뽑아 본 명단인데, 외숙께서 지울 것은 지우고 더할 것은 더하면서 다듬어 주십시오.”

백우경은 정중히 청하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만들어 온 살생부의 완성을 제갈부에게 부탁한 것이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부탁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한 일이니, 외숙께서도 이를 감수해 주십시오.”

백우경의 태도는 의연하면서도 당당했다. 그의 단단한 눈빛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한 점 부끄럼도 없는 협사만이 가질 수 있는 강한 결기가 느껴졌다.

조카의 뜻에 떠밀리기라도 한 것처럼 제갈부는 살생부를 받아들였다. 책자를 되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서탁에 놓은 것은 이를 허락하겠다는 대답과 다름없다. 그 모습을 본 백우경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굳이 감사의 인사를 입에 담지는 않았으나 깍듯한 그 태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제갈부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다.

“그래, 너는 이제부터 뭘 할 생각이냐?”

“당분간은 수련에 몰두하겠습니다. 정도맹에 아무런 지위도 없는 제가 너무 나서는 것도 남들의 눈에는 좋지 않게 보일 것입니다.”

“그래. 그렇겠구나. 알겠다. 일단 이 책자를 완성한 이후에 널 다시 부르도록 하마. 건강 조심하고, 수련 열심히 하도록 해라.”

“예. 외숙. 명심하겠습니다.”

전해야 할 용건을 끝낸 백우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아하게 예를 갖춘 그가 집무실에서 물러 나가자 방에 남은 사람은 오로지 제갈부 혼자뿐이다.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책자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집안에서 올라온 서신을 보았다.

얼마 전 그의 가문으로부터 집안 사업과 관련된 곤란하기 짝이 없는 사건에 대해 처분을 묻는 서신이 도착했다. 산적한 일이 많아 잠시 미뤄뒀지만 잠시나마 한가해지고 나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집안일이다.

그가 정도맹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임시로 가주 대행을 맡은 동생에 따르면, 요즘 제갈세가는 지루한 영역 분쟁으로 적지 않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다. 오대세가의 수장 격인 제갈세가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는 자들은 양양襄陽의 뿌리 깊은 토호 세력인 천심산장天心山莊이었다.

최근 제갈세가의 가세가 욱일승천하면서, 양번을 넘어 양양에까지 영역을 넓히려고 시도했던 그들은 오랜 세월 양양의 지주로 군림해 온 천심산장에게 가로막혀 번번이 낭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양양의 경제를 휘어잡고 있는 천심산장은 외부 세력인 제갈세가에게 기반을 내주려 하지 않았고, 그 지방의 민심도 천심산장에게 쏠려 있었기에 제갈세가의 사업은 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그러나 제갈세가로서도 양양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북성을 가로지르는 관도 중 가장 중요한 관도가 양양을 지나 양번에 이르렀다. 양번 전체의 경제를 한 손에 쥐려 하는 제갈세가로서는, 양양에 거점을 마련하지 않고는 도저히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세가의 미래가 걸린 일이기에 수많은 재물과 시간을 투자했건만 모든 것이 제자리걸음이었다. 천심산장은 재물로도 넘어오지 않았고 호의를 보여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혼사까지 제안해 봤으나 여식의 몸이 미령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들의 태도가 그처럼 완강하니, 제갈세가로서도 난감할 따름이었다. 같은 정도 문파라서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것마저도 불가능했다.

‘……그러고 보니 이 명단엔 정도의 문파가 별로 없군. 이렇듯 티 나게 정도의 세력만 보전된다면 머지않아 이상한 것을 눈치채는 사람이 나타날 텐데.’

잠시 동안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제갈부는 마침내 결심하고 붓을 들었다. 조카가 남겨 놓은 흰 여백 위에 천심산장의 이름이 올라갔다. 조금 더 고민하던 그는 제갈세가뿐만 아니라 다른 동맹을 위해서도 몇 개의 이름을 더 집어넣었다.

화산의 속가 표국들과 치열한 경쟁 중인 방림표국芳林鏢局이나, 점창 장문인의 아들이 술김에 저지른 실수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 그들의 체면을 상하게 만들었던 장락보長樂堡와 같은,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손톱 밑에 박힌 가시였던 자들의 이름이 음험한 명단 위에 새로이 자리 잡았다.

몇몇의 이름은 지우고 몇은 채워 넣었다. 강호 전체의 균형을 고려할 뿐만 아니라 각 대문파의 이득까지 빠짐없이 고려한 살생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완벽하게 다듬어졌다. 백우경이 내놓았던 명단이 진정한 의미의 살생부가 된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이름에만 골몰하던 제갈부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따끔, 따끔.

느닷없이 정수리가 따끔거렸다. 작은 개미가 두피를 물어뜯고 있는 것처럼, 극히 좁은 부분이 확 따가웠다가 도로 잠잠해진다. 머리 위의 감각이 거슬린 문평은 힘겹게 눈을 떴다.

‘누가 자는 사람의 머리를 건드리는 거야?’

자는 와중에 신경질이 난 그는 손을 들어 머리 위를 휘저었다. 벌레라도 붙었으면 쫓아내려고 한 짓인데, 뜻밖에도 손이 잡혔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눈을 뜬 문평은 졸린 눈을 비비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더 자지 그러냐. 어젯밤에도 늦게 잠들었는데.”

달게 자던 사람을 깨워 놓고 천마는 태평한 소리를 했다. 말과 행동이 모순되는 주제에 빈말은 아니었던지 더 자라며 짐짓 자상히 가슴을 토닥거려 주기까지 한다.

문평은 거꾸로 보이는 천마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자신이 그의 무릎을 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무릎을 벤 것이 아니라, 강제로 머리가 놓인 거다. 스스로 그의 무릎을 벤 기억이 전혀 없으니, 이는 자는 동안에 당한 봉변이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멍하니 천마를 올려다보고 있는 와중에도 정수리가 따끔했다. 한 손으로 문평의 이마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론 문평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던 천마가 그의 질문에 담담히 대답했다.

“흰머리 뽑는다.”

“……흰머리요?”

“그래. 흰머리.”

‘내가 아직 잠이 덜 깼나? 어디서 헛소리가 들리는데…….’

잠시 동안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자위하고 있던 문평은 천마가 거듭 확인을 해주고 나서야 자신이 들은 말이 환청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싶어 곁눈질을 하니, 세상에. 머리맡에 펼쳐진 비단 위에 뽑힌 머리카락이 소복하다.

‘사람 자는 사이에 진짜로 흰머리를 뽑은 거야?’

어이가 없어진 문평은 기가 막힌 시선으로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자는 사람 머리는 왜 뽑으십니까? 그깟 흰머리쯤 몇 가닥 있으면 어때서요.”

“자꾸 눈에 들어오니 신경이 쓰여서. 얼핏 보면 잘 모르겠는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에 띄는 게 적지 않단 말이지. 요즘 뭐 신경 쓰는 일이 있느냐? 얼마 전보다 부쩍 늘었구나?”

물론 문평에게는 요즘 들어 부쩍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천마가 얼굴을 볼 때마다 하는 잔소리가 그것이었다. 머리가 일찍 센다, 피부가 거칠다, 흰자위가 누렇다, 눈가 주름은 또 왜 그 모양이냐. 천마는 요 근래 눈만 마주치면 사사건건 문평의 외양에 대한 트집을 잡았다.

‘그래서 뭐요. 어쩌라고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늙는 게 당연하잖아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웃고 말았지만 그런 지적이 자꾸만 되풀이되니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덕분에 그는 생전 안 보던 동경까지 들여다보며 나이의 흔적을 찾곤 했다. 자신의 얼굴에 그렇게 자주 남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흔적이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만 뽑으세요. 새치는 뽑으면 더 늘어난답니다.”

“그거야 새치에나 해당하는 말이고. 네 나이가 되면 이제는 새치라고 부를 수도 없지 않으냐.”

나이 팔십에 흑단처럼 윤기가 반지르르한 머리카락을 가진 노인네가 남의 아픈 구석을 사정없이 찔렀다.

‘아, 진짜. 신경 쓰이게!’

문평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사정없이 머리통을 확 잡아 내리는 천마의 손길 때문에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교주님!”

“가만있어 봐라. 거의 다 뽑아 간다.”

“저는 괜찮다니까요. 왜 자꾸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교주님의 흰머리를 뽑아 드리면 뽑아 드렸지, 교주님께서 제 흰머리를 뽑아 주신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따지고 보면 그도 맞는 말이었다. 순리대로라면 아직 이립而立이 지난 지 몇 년 안 된 청년의 머리를 산수도 넘은 노인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산수 노인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었을 테지만, 이립의 청년은 아직 그러기엔 세월이 많이 남았으니까.

하지만 반로환동으로 인해 일반적인 자연의 이치를 뛰어넘은 천마는 보통의 노인들과는 전혀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는 수십 년은 더 젊은 모습으로 살아갈 터였다. 몸이 항상 스스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으니 그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늙어갈 일은 없다.

반면 문평은 그와 처지가 달랐다. 지금은 젊지만 머지않아 나이가 들면서, 천마와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한 천마보다 이르게 죽게 될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천마보단 문평이 먼저 갈 가능성이 더 컸다.

잠든 문평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덜컥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천마는 벌써부터 마음이 초조해져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러게나 말이다. 나이로 보나 이치로 보나 네가 내 머리를 뽑아 줘야 하는데, 내가 네 머리를 뽑고 있으니 기가 막힐 일이지.”

천마는 문평의 볼멘 항의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는 기어코 찾아낼 수 있는 흰머리를 모조리 뽑아내고 나서야 문평을 놔주었다. 머리카락에 무슨 원수라도 졌는지 비단에 감싼 머리카락을 삼매진화로 태워 버리고, 그 재까지 진기를 이용해 밖으로 날려 보내는 것을 본 문평이 기막힌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벌떡 일어나 자리에 앉은 그는 마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천마와 무릎을 맞댔다. 천마는 손끝에 묻은 재를 털어내며 그런 문평을 마주 보았다.

“요즘 들어 왜 이러십니까?”

문평은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 적당히 참고 넘기려고 했더니만, 천마가 하는 짓은 점점 도를 넘어갔다. 그걸 빌미로 놀리기라도 하면 그나마 이해하련만, 지금 하고 있는 짓을 보면 문평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근심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구박이신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는 사람의 머리까지 뽑으시다니요. 본인께서 하는 일이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덕분에 이제는 저까지도 신경이 쓰입니다. 제가 왜 이 나이에 늙는 걱정을 해야 합니까?”

“그렇지? 신경 쓰이지?”

“당연하지요. 얼굴을 볼 때마다 늙는다 늙는다 노래를 부르시면서, 제가 그런 말에 신경 쓰지 않길 바라십니까?”

“신경이 쓰인다니 잘 됐다. 신경 쓰라고 일부러 하는 말인데 신경을 쓰지 않으면 어렵게 놀린 입만 아프지.”

문평이 참다못해 기어이 털어놓는 울화인데, 그런 절절한 마음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긴 천마는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의 대답이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한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문평은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아, 진짜 얄밉다. 이 사람은 가끔가다 정말 한 대 패주고 싶을 때가 있단 말이지.’

문평은 겉으로는 할 수 없는 속말을 마음속으로 내뱉으며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물론 그는 화가 난 것일 뿐 미친 것이 아니었기에 불끈 쥔 주먹을 천마에게 휘두르겠다거나 하는 발칙한 상상 따윈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감정을 추스르느라 주먹을 쥐었을 뿐이었다. 예로부터 주먹을 굳게 쥐는 것은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쓰이던 아주 유용한 방편 중에 하나이지 않은가.

“내 말이 듣기 싫다면 너도 노력해라. 환골탈태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적어도 노화순청爐火純靑까진 돼야지.”

이제 막 절정에 이르렀을 뿐인 문평에게 천마는 너무도 높은 목표를 요구했다.

노화순청. 그 말은 옛 도사들의 연단법에서 기인한 말로 ‘화로 안의 불꽃이 순청색이 나올 때’라는 뜻이다. 연단으로 등선을 하려고 하던 도사들은 화로의 불꽃이 순청색이 되면 연단에 성공했다고 보았는데, 무림인들은 그에 비유해 무공이 순숙純熟에 이르렀을 때를 노화순청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현재 그 말은 나이를 늦게 먹고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하게 된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었다. 무공의 경지 중 그러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보통 초절정 이상이기에, 초절정의 경지를 노화순청이라 말하기도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가 초절정이 되기가 요원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교주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절정이 된 것은 전적으로 내단의 힘이니 앞으로는 더욱 깨달음에 치중하라고요.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게 그렇듯 닦달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노력은 하겠습니다만 기약 없는 약속은 드릴 수 없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문평도 초절정이 되고 싶다. 초절정뿐인가? 화경도 되고 싶고 현경도 되고 싶고, 전인미답의 경지라는 생사경에도 이르고 싶다. 그렇지만 그런 게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노력도 중요하지만 자질도 중요하고 운도 정말 중요하다.

“그래도 예전에는 편법이나마 쓸 수 있었지. 그렇지만 앞으로는 순전히 네가 어찌하느냐에 달렸다. 네가 초절정이 되지도 못하고 늙어 죽느냐, 초절정이 되어서 나와 백년해로하느냐 하는 것은 모두 네가 알아서 할 몫이다.”

‘아니, 계산이 또 왜 그렇게 되는 거지? 언제부터 초절정에 이르면 저 사람이랑 백년해로해야 하는 거였는데?’

문평은 단순히 경지가 오르는 것만을 생각했지, 그렇게 된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초절정 고수가 되는 데 그런 부가 선택이 붙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이전에, 뭐라고? 편법이 있었어?

“편법이 있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는 데도 편법을 쓸 수 있습니까?”

기연을 얻어 단숨에 경지가 오른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편법으로 초절정에 오른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무공에서 편법이라 하면 마공이나 사공을 뜻하는데, 마교의 무공은 말이 마공이지 정순하기 그지없어서 중원 대파의 무공들만큼이나 편법을 사용할 여지가 적었다.

“네가 이번에 절정에 이른 것처럼 많은 내기로 한꺼번에 밀어붙이면 반쪽이나마 초절정에 오르는 건 가능했지.”

“그런 엄청난 양의 내기를 대체 어떻게 구한단 말입니까?”

화경 고수의 내단으로도 절정에까지밖에 이르지 못했는데, 단번에 초절정 고수가 될 만큼의 내력은 또 어디서 생겨서?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장담하는 천마에게 문평은 삐뚜름한 태도로 물었다. 그러나 천마는 언제나 그렇듯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알고 있었다.

“한 10년 정도 꾸준히 채양보양을 하면 되지.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만 했어도 10년이면 충분했을걸.”

천마는 내심 그 심법에 대해 깊은 자부심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입만 열었다 하면 그놈의 채양보양을 찾으니 말이다.

조건반사적으로 얼굴이 붉어진 문평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요즘이라고 정사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예전보다 정사의 횟수는 더욱 늘어났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제는 아예 밤이면 밤마다 하는 일일 행사가 됐다.

그런데 어째서 더 이상 편법을 쓸 수 없는 걸까? 편법을 써주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문평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저렇듯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행색을 보면 이제 와 내공 퍼주기가 아까워진 것은 아닌 것 같고. 대체 이유가 뭘까?

‘그러고 보니 근래에는 채양보양 하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군. 정사를 해도 그냥 몸만 섞었지, 수련을 목적으로 해본 적은 없었어.’

문평은 그제야 채양보양의 심법을 마지막으로 운기한 게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늘 정신없이 몰아붙이는 정사였던 데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 몸을 안아 오는 상대였기에 그의 기세에 휘말려 어영부영 관계를 맺다 보니 미처 깨닫지 못했다. 처음에는 나름의 핑계가 있어 안겼었는데, 그에 길들고 나니 나중에는 핑계가 없어졌어도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 편법, 이제는 왜 안 되는 겁니까? 제 내력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지금 문평에게 있는 무공의 내력들은 그야말로 잡다하다. 예전에 전장에서 배웠던 군문의 무예에, 마교의 기초 무공이 있고, 그에 더해 천마의 채양보양의 심법을 익혔다. 그 뒤에 다시 천뢰신공을 받아들였다.

다행히 예전에 배웠던 무공들은 천뢰신공에 비해 수준이 너무 낮았고, 채양보양의 심법은 도가의 토납법을 기초로 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기운을 가졌다기보단 순정한 내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천뢰신공이 몸에 들어와도 별 무리가 없었는데, 천마의 말을 들어보니 문평의 단순한 계산과는 달리 더 복잡한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천뢰신공 때문이다. 본래 네가 갖고 있던 기운은 워낙 잡스러울 뿐만 아니라 양도 적어서 특정한 기운이 없는 정순한 내력과 무리 없이 섞여들 수 있었다. 반면 천뢰신공은 다르지. 천뢰신공은 무려 천 년 가까이 무리가 다듬어져 온 고금의 절예다. 그와 같은 뿌리를 가졌지만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은 내 내력과 섞이기에는 지나치게 강하고 이질적인 기운이지. 네 녀석을 반신불수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더는 같은 수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이제는 네가 할 몫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

잡스러우니 뭐니 하는 말이 거슬릴 만도 하련만, 문평이 말없이 천마를 바라보았다. 가끔씩 문평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천마는 이 녀석이 또 왜 이러나 하는 시선으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자신이 뭘 잘못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장난 반으로 투정을 부리고 있던 놈의 낯빛이 조금씩 굳었다. 문평이 진지해진 태도로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꼭 쥐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한데 제게 왜 천뢰신공을 주셨습니까? 그런 걸 모두 알고 계시면서 말입니다.”

“말하지 않았더냐. 내게는 필요 없으니 네게 버린 거라고.”

일류 고수인 문평의 몸에서도 그의 기운을 거부하는 천뢰신공이다. 그러니 자신의 무학을 이은 제자들에게 줘봤자 그림의 떡이고, 그렇다고 해서 역대 천마의 상징이었던 천뢰신공을 다른 놈들에게 내릴 수도 없었다.

“네. 무려 옛 천마지공을 제게 버리셨지요. 덕분에 저는 절정 고수가 됐고, 더는 교주님께 의지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채양보양처럼 일방적으로 교주님의 은덕에 힘입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제 노력만으로도 애써 볼 기반이 생겼습니다. 덕분에 교주님께선 제 약점을 잡을 기회를 놓치셨고 말입니다.”

거기까지 말하던 문평이 똑바로 눈을 뜨고 천마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천마의 진정을 살피려는 것처럼 진지하게 그를 응시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셨습니까? ……왜 제게 이리도 잘해 주십니까?”

천마가 자신에게 준 심법이 채양보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내공을 전수하는 대가로 몸을 제공하라니 이토록 뻔뻔한 유혹이 어디 있을까. 흔치 않은 호의였으나, 호의가 호의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천마다웠다.

강호의 일이 대개가 그렇듯 천마에게 받는 것에는 모두 대가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방적으로 주고받는 사이면서도 거래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렇다. 거래 관계였다. 채양보양으로 내공을 받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문평에게 천마는 엄연히 거래의 대상이었다.

처음 천마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를 범했다. 그에게 문평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고, 그가 문평을 취한 것은 단지 그래도 상관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교에 있을 때의 천마는 문평을 마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그 시절의 문평이 천마를 힘겨워한 것은 인격을 무시당한 인간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천마는 점차 달라졌다. 강호에 나왔을 때. 그리고 윤승효의 모습으로 문평의 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는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나마 문평을 챙겨 주고 아껴 주었다.

상대의 정체를 몰랐던 문평은 그런 그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첫사랑이라고 생각했고, 유일한 상대가 되리라 믿었다. 그랬기에 그의 본색이 드러났을 때 문평이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마교에서의 일을 통해 천마의 차고 냉정한 성격을 알고 있던 문평은 그동안 그가 자신을 놀린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몸까지 섞어 놓고도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하는 멍청한 인간이니, 그런 자신을 비웃기 위해 접근해 온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의심은 사그라들었다. 본색이 드러난 이후에도 딱히 괴롭힘 같은 게 있지도 않았던 데다, 천마가 자신에게 정말로 신경을 쓰고 있다는 흔적이 여기저기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문평을 정말 열심히 챙겼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세심하게 마음 썼고, 문평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본인보다 천마가 먼저 알았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래. 내게 그 거래는 유용하면서도 불편했지만, 저 사람에게 그런 상황은 지극히 쾌적했을 거야. 적어도 저 사람이 내 몸만 원하고 있었다면 그보다 더 이상적인 상태는 아마 없었겠지.’

약점으로 삼아 마음껏 휘두를 기회를 천마는 스스로 버렸다. 문평은 이번의 일이 그가 해준 모든 일들 중에서도 가장 큰 배려라고 느꼈다. 바라는 대가가 전혀 없었으니 이보다 더 순수한 의미의 호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천마는 문평이 예상하던 것과 거의 일치하는 대답을 했다.

“네가 바라는 걸 알고 있으니 그랬지. 제 분수를 너무 잘 알고 있어도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야. 자신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 자격지심에 빠져 죽을 지경이 아니더냐. 네 그 고고한 자존심에 채양보양으로 초절정 고수가 된다고 한들 그를 자긍으로 삼을 수 있었을까?”

문평의 자조적인 태도를 적나라하게 꼬집은 천마가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좀 더 수련하라 채근하고 닦달하는 것이 낫겠다 싶더군. 그리하면 더는 뭘 할 때마다 주눅이 들어 빌빌거리진 않을 게 아니냐.”

좋은 말을 하면서도 곱게 해주지 않는 것은 천마의 천성이다. 하지만 문평은 그런 천마의 성격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천마에게 귀염을 받는다는 건, 난폭하고 어린 사내아이에게 귀염받는 강아지가 되는 것과 비슷했다. 상대가 자신을 예뻐해 주는 건 알겠는데 그 표현을 몸으로 받는 건 상당히 괴롭고 힘들었다.

“제가 빌빌거리는 게 그리도 못나 보였습니까?”

“당연하지. 못나도 그리 못날 수 없다.”

문평은 결코 모를 터였다. 천마가 ‘비 맞은 개 꼴’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못난 사람에게 참으로 과분한 배려를 해주셨네요.”

“못났으니 잘나게 만들어야지. 내가 아무에게나 만족하고 살 것 같으냐? 내 수준에 걸맞은 상대가 아니면 내 수준으로 만들면 되는 거다. 일단은 초절정부터 시작하자. 그 뒤로도 이뤄야 할 과업이 적지 않다만 당장 시급한 게 그것이니 그것부터 해결해야지.”

……천마는 사람을 잠시나마 감동하게 놔두지 않았다. 기껏 마음이 기울려고 할 때마다 저렇듯 초를 치는 걸 보면, 저 사람은 아무래도 그게 취미인 듯싶다. 천마처럼 눈치가 빠른 사람이 설마 모르고 저러는 건 아닐 게 아닌가.

문평은 자신을 앞으로도 들들 볶을 계획이라는 천마의 말에 훗날이 두려워졌다. 불현듯 예전, 마교에 있을 때 천마의 둘째 제자인 곽진무가 하던 푸념이 생각난다. 그때 그는 무공 사부가 무공만 가르치면 됐지 서역의 수리 산학도 배우라고 하고, 나전어도 익히라고 하고, 하여간 별별 것을 다 가르치려고 든다며 심히 투덜댔었다.

‘이 사람 곁에 좀 더 있다가는 나도 그렇게 되는 거 아니야?’

천마의 성정을 알 만큼 알게 된 문평은 그런 근심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무공을 가르쳐 준다면야 기꺼이 배우겠지만,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픈 사서오경四書五經이나 시서화詩書畵 따위를 가르치려고 든다면 도망가고 싶어질 게 뻔했다.

‘그리고 잠깐. 한 가지 더. 근데 아까부터 왜 자꾸 말끝마다 평생이라는 전제가 따라붙고 있는 거야? 같이 살 거냐고 한 번 물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너무 당연하잖아? 백년해로는 또 뭐고 일단 초절정은 또 뭐란 말인가. 일단이 있다는 이야기는 그다음도 있다는 뜻일 텐데?’

생각이 이즈음에 이르게 되자 문평은 천마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인생 계획이 궁금해졌다.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일방적으로 만든 계획이 대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문평은 섣불리 그런 질문을 했다가 받을 법한 강요가 두려워 차마 입을 열지는 못했다.

괜히 물어봤다가 ‘너도 동의한’ 것이 되어 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천마와 말싸움해서 이길 자신도 없는데,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하다간 정말로 코가 꿰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당탕, 쿵쾅!

입으로 화근을 만드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던 문평이 서둘러 화제를 전환하려고 할 때였다. 때마침 바깥에서 그럴듯한 소동이 일어나 핑곗거리가 되어 주었다.

옳구나 싶어진 문평은 서둘러 침상에서 일어나 옷을 꿰입었다. 짐짓 궁금한 듯 밖을 내다보는 시늉까지 했지만 그 속내야 뻔하다.

“바깥에 무슨 사달이 난 것 같은데, 제가 한번 나가보겠습니다.”

그가 서두르듯 말하자 천마가 시큰둥하게 그의 맵시를 살폈다. 따로 할 일도 없으니 좀 더 누워 있어도 좋으련만, 몸만 빠른 놈이 벌써부터 옷을 다 챙겨 입었다.

“사달이라고 해봤자 고작 싸움이 일어난 것뿐인데 뭘 그렇게 서두르느냐? 옷이라도 다 챙겨 입지?”

“다 늦은 저녁이라면 몰라도 아침부터 이러한 소란이 이는 것은 흔치 않은 일 아닙니까? 제가 보고 와서 무슨 일인지를 알려 드리…….”

그러나 문평은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차마 맺지 못했다. 그의 말을 끊고 문밖에서 처참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흰 창호지 위로 시뻘건 선혈이 튀었다. 고작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생과 사가 갈리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생명을 잃은 몸뚱이가 바닥으로 털썩 넘어갔다. 몸통과 완전히 분리된 목은 복도 밖으로 굴러나가다 아래층으로 툭 떨어져 버린다. 하필이면 그들이 머무는 방 바로 밖에서, 살벌하기 그지없는 칼부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시골 마을에서는 보기 드문 일류 고수 간의 대결이었다.

“죽어라, 이 마교의 개! 너희들이지! 너희들이 우리 가문을 무생교의 분타라 밀고한 거지!”

비통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울부짖었다. 아직 젊은 청년인 듯 보이는 그 목소리의 주인은 얼마나 울었는지 목이 쉴 대로 쉬어 있었다.

“이 개 같은 놈들이, 어디서 뺨 맞고 와서 화풀이야! 우리가 뭘 밀고해?!”

그에 대응하는 것은 칼칼하기 짝이 없는 중년 사내다. 그는 입버릇이 좋지 않은 듯 말끝마다 욕설을 붙였다.

“너희 낙성방落星幇의 방주가 어젯밤 마교의 군세를 남몰래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너희들이 갔다 오고 나서 하루 만에 우리 삼산파三山派가 멸문당했으니 허튼 밀고를 한 것은 너희들의 수작이 아니냐!”

“이런 니미 씨팔! 너희 삼산파를 멸문시킨 것이 정말로 마교였다면, 너희가 무생교의 수족이 맞았나 보지. 화를 내려면 자기들을 멸문시킨 마교에게 화를 내지 왜 우리더러 지랄이야, 지랄은!”

“우리 같은 정파가 무생교의 수족이라고? 과연. 이 좁은 분양촌에서 우리 삼산파를 모함할 자들은 너희뿐이라고 여겼더니 그게 사실이었구나!”

“이 쳐 죽일 놈의 새끼가 귓구멍에 좆을 처박았나? 에이. 씨팔. 몰라. 저 새끼 그냥 죽여!”

격렬한 칼부림 와중에도 고수답지 않은 저열한 욕설과 처절한 악쓰기가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아침 습격을 감행한 것 같은 청년은 문파의 멸문으로 완전히 이성을 잃은 눈치였다.

청년이 밀고했다고 고발했지만, 본인은 안 그랬다고 우기는 흑도 고수는, 청년의 돌발적인 습격에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다 내다가 인해전술로 밀어붙였다.

젊은 청년은 제 문파에서 꽤 촉망받던 고수였던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전열 속에서도 제법 잘 싸웠다. 사람의 팔다리가 날아가는 소리는 물론이고, 신음과 비명까지도 거창하게 들려왔다. 아직 아침도 먹지 않았는데 창호지는 피로 젖었고, 사람이 하나 쓰러질 때마다 문이 덜컹거린다.

처음 소란이 일었을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의 난전이 될 거라고 예상치 못했던 문평은, 어이없는 시선으로 문밖에서 벌어지는 난투전을 지켜보았다. 만약 저 문이 열렸다면 싸움은 그들의 방 안으로까지 밀려들었을 거였다.

“……저거, 나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잠시 동안 바깥의 동정을 살피던 문평이 천마를 돌아보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나무로 만든 창살 위에 창호지만을 바른 간단한 문이 몇 사람의 몸무게가 겹쳐져도 끄떡없이 버티는 건, 천마가 그 위에 얇은 기막을 펼쳐 놓았기 때문이다. 바깥의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문평마저도 나갈 수 없도록 문을 막아 놓은 천마는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 한다는 시선으로 문평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하게?”

“아니, 뭘 하다니요. 나가서 싸움을 말려야지요. 오해가 있으면 오해를 풀고, 또 애꿎게 말려든 사람들도 구하고.”

“어차피 바깥에 애꿎게 말려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싸움이 일어날 낌새가 생기자마자 진작 눈치를 채고 다 도망갔으니까. 넌 숱한 전란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어떻게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느냐?”

무림인들에게 한없이 무심한 천마는 어차피 평민들은 휘말리지 않았으니 저희끼리 싸우다 죽도록 내버려 두라는 식이었다.

그래도 마교가 얽혔는데. 진짜로 무고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천마만큼 냉정하지 못한 문평은 미련이 남는 얼굴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청년의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수십 명의 적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중과부적이다. 팔놀림이 점차 느려지고 상대의 공격을 허용하는 횟수도 늘었다. 청년의 상태가 신경 쓰인 문평이 다시 천마를 돌아보았다.

“너무 시끄럽지 않습니까? 그냥 제가 나가서 조용히 만들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시끄럽다면 조용하게 만들어 주마.”

천마는 기막에 기를 조금 더 덧붙여 소리까지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렇게 되자 방 안은 놀랄 만큼 고요해졌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험악한 난투극은 창호지 문 위에 비치는 그림자놀이처럼 보일 뿐, 고작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문평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경지가 조금 올랐다고 네가 무소불위라도 되는 줄 아느냐? 나조차도 강호의 모든 은원을 해결할 수는 없다. 은원은 맺은 자들끼리 풀도록 내버려 두고, 이만 침상으로 돌아오거라. 아무래도 빠른 시간 내에 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좀 더 자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천마는 냉소적인 태도로 말하더니 문평을 도로 불러들였다. 천마의 말은 그야말로 정론이었고, 강호를 살아가는 자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문평은 앞뒤 없이 행동하려고 한 사람이 천마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맞다. 내가 요즘 왜 이러는 거지? 정말 아무 데나 다 나서네.’

당문삼독과의 일이라면 개인적인 은원도 얽혀 있었으니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 오늘 같은 경우라면 그가 나설 이유가 전혀 없었다.

호협함에 목을 매는 정파의 협사도 아니고,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는 호사가도 아니면서 뭐 한다고 타인의 은원에 끼어들려고 했던 것일까? 두 사람 중 정확히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말이다.

이제껏 불의를 봐도 모른 척하고 지나간 적이 많았던 문평은 슬그머니 낯이 뜨거워졌다. 득어망전得魚忘筌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다. 천마가 자신더러 기고만장하다고 혀를 차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이 문평은 다시 침상으로 올라갔다. 도로 돌아가 침상에 앉으니 천마가 머리를 잡아당겨 무릎베개를 해준다. 질겁한 문평이 시선을 올리며 천마에게 물었다.

“아니, 또 흰머리 뽑으시려고요?”

유달리 시력도 좋은 양반이 보이는 족족 다 뽑아 버리면 나는 어쩌라고? 이러다 머리숱이 반으로 줄어드는 게 아닌가 걱정하며 문평이 눈썹을 찌푸렸더니, 천마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이마를 쓸어 준다.

“아니, 그냥 무릎베개해 주려고.”

“굳이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그냥 누워만 있으면 안 되는 겁니까?”

안 되지. 그러면 너는 필히 귀를 쫑긋 세우고 바깥에나 신경을 쓸 터인데.

문평이 행여나 몹쓸 버릇이 들까 염려하고 있는 천마는 처음부터 버릇을 다잡아 놓을 생각에 문평이 신경 쓰일 만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누워 있는 놈의 귀를 만지작만지작하면서, 문평이 애써 피하려고 했던 주제를 정면으로 들이댄 것이다.

“그런데 아까 했던 이야기 말이다. 일단은 초절정 고수라는 것. 그 외에도 내가 너에 대해 몇 가지 계획을 더 가지고 있는데, 한번 들어 볼 테냐?”

으아아악. 천마의 천연덕스러운 질문에 문평은 소리 없이 절규를 내질렀다.

‘아니, 저기요. 그것만은 제발요!’

하지만 문평을 괴롭히는 것이 인생의 낙인 천마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줄줄줄 자신이 문평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무공이 충족되고 나면 나전어부터 가르칠 생각이다. 중원과 그 근방에서 한자가 가장 위력이 있는 문자이듯, 서역에서는 나전어가 가장 세력 있는 문자거든. 그걸 배워 놓지 않으면 나중에 낭패를 보기 십상이니 그것부터 배우게 해야지.”

제일 먼저 문평을 괴롭힌 것은 나전어란 듣도 보도 못한 문자였다.

‘윽. 그거, 나름 천재라던 곽진무조차 머리를 감싸 쥐던 학문 아니던가?’

뛰어넘어야 할 장벽을 처음부터 너무 높게 지정해 주는 천마 때문에 문평은 머리가 아파 왔다.

“……그걸 배워 두지 않으면 왜 낭패라는 겁니까? 어차피 중원에서는 쓸 일도 없는데요.”

공부하기 싫어 안 배우겠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문평이 기껏 찾아낸 변명을 하며 몸을 뺐다. 그랬더니 천마가 정색한다.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냐는 듯이 말이다.

“중원에서는 안 써도 서역 가면 써야지.”

“제가 왜 서역에 가야 합니까?”

“그럼 너는 평생 동안 이 좁디좁은 중원에서만 갇혀 살 거란 말이냐? 더 넓은 세상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정저지와井底之蛙로 만족해? 이왕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볼 수 있는 것을 다 보고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려야지.”

천마의 말에 문평의 머리가 어찔해졌다. 그 나이가 되도록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천마의 태도는 참으로 본받을 만했으나, 실제로 그를 본받아 실천에 옮길 생각은 없었던 문평은 자신의 미래가 고단해질 것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운 자세 그대로 천마의 방대하다 못해 광오하기까지 한 인생 계획을 경청했다.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다 해 보고 죽으려면 300살까지 살아도 모자랄 것 같았다. 물론 천마야 그때까지 끄떡없이 버티겠지만 자신은 도저히 그때까지 살 재주가 없다.

천마가 신나게 문평을 괴롭히는 동안, 문밖의 소음은 차츰 사그라졌다. 죽을 사람은 죽고, 남을 사람은 남고, 떠날 사람은 떠났다. 누구에겐 생과 사가 갈린 갈림길이지만, 또 누구에겐 아침부터 일어난 성가신 사건일 뿐이다. 비정하게 느껴지지만 강호는 본래가 그러한 곳.

이때만 해도 문평은 자신들이 목격했던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날 아침 보았던 것과 유사한 광경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일들은 분양촌뿐만 아니라 중원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낙성방과 삼산파의 일은 그 거대한 현상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쌓아 둔 짚단에 옮겨붙은 불길처럼, 도살의 광기는 중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하룻밤만 지나고 나면 멀쩡하던 문파들이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은 정파였고, 어느 날은 사파였다. 또 어떤 날은 정사지간의 문파이기도 했다.

수많은 문파들이 속절없이 멸문하고 있었지만, 그 살겁殺劫 뒤에 누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교는 자신들이 손을 쓴 곳은 한 군데도 없다고 부인했으나 그 말을 믿는 이도 별로 없었다. 마교는 각 문파들이 멸문당할 때마다 무생교보다도 먼저 의심받곤 했다.

그러나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은 마교뿐만이 아니었다. 정파가 멸문당할 때는 무생교와 마교가 같이 용의 선상에 올랐고, 사파가 멸문할 때는 정도맹 이름까지도 조심스럽게 거론되었다.

하나라도 살아남은 자가 있다면 증언이라도 얻었겠지만, 불행히도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혈겁을 ‘백귀야겁百鬼夜劫’이라고 불렀다. 도처에서 살겁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마치 귀신이 한 일인 양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정체도 알 수 없는 자들의 무차별 습격에 불과했으나 뒤로 갈수록 살겁의 양상이 바뀌었다. 문파들의 연쇄적인 멸문이 시작된 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구류장九流莊이라는 문파가 다른 세력인 양 복면을 하고 경쟁 문파를 습격하려다 정체를 들켜 외려 본인들이 전멸당하고 만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자 그 여파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구류장의 행위 덕분에 몇몇 지자智者들이 미리부터 예측한 것처럼, 이 지옥 같은 혼란을 사사로운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자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이제껏 일어난 백귀야겁의 규모로 보건대 구류장이 그런 일을 시도한 첫 번째 자들은 아니었을 터였다. 만약 그 모든 백귀야겁이 단 하나의 단체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면, 강호는 진작 그들에게 일통되었지 여태껏 명맥을 유지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구류장은 그러한 일을 처음으로 시도한 자들이 아니라, 단지 처음으로 실패한 자들일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작은 불씨로 끝날 수도 있었던 살겁이 천하를 태울 겁화劫火로 커진 것은, 그 혼란을 자신의 이득에 이용하려는 자들의 적극적인 노력 때문이었다.

이전까지는 추측에 불과했던 일들이 사실로 입증되자, 그렇지 않아도 혼란한 천하 정세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제 중원의 각 문파들이 가장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마교나 무생교가 아니라 이웃이 되었다. 크게는 영역 분쟁부터 소소하게는 개인적인 비무의 결과까지, 무인으로 살아온 이상 맺을 수밖에 없었던 수없이 많은 은원이 등 뒤를 노린 비수가 되어 번득였다.

갖가지 이유로 인해 문파 간에 처절한 혈전이 벌어졌다. 심지어는 한 번 화해가 된 일조차도 재차 분쟁의 씨앗으로 화했다. 작금의 강호는 인세의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 모든 것이 곽효의 농간이었다.

시일이 지날수록 천마의 기분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문평은 천마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젊은이의 얼굴을 한 노인은 그 검고 깊은 눈으로 세상을 말없이 응시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눈동자는 마치 관조하듯 천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평은 천마가 그런 시선을 할 때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생각에 잠긴 그의 눈이 칼부림을 벌이고 있는 무사들을 바라볼 때, 혹은 적도의 손에 불타 잿더미가 되어 버린 중소 문파의 부서진 담장 너머를 향할 때. 문평은 손끝이 저릿저릿해지는 걸 느끼며 마음 한구석으로 묵직한 의문을 떠올리곤 했다.

곽효와 문평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했던 바로 그 순간, 문평을 선택한 천마의 결정은 천하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그 당시 천마가 문평의 목숨을 도외시한 채 곽효를 잡았더라면, 오늘날 천하는 이렇듯 도탄에 빠져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구한 셈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 때문에 다른 수천의 생목숨이 사라진 거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숨이 제일인 문평조차도 이러한 사안을 두고서 스스로를 먼저 꼽을 수는 없었다. 누군들 천하의 안위보다 자신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설사 황제라 하더라도 그렇듯 광오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아까부터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누대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는 그에게 천마가 지나가는 듯 무심히 말을 붙여 왔다. 문평은 그가 말을 걸고서야 상념에서 깨어나, 무연한 듯 먼 곳을 바라보며 설핏 웃는 낯을 했다.

“그냥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 조조의 무덤은 대체 어디쯤일까 하고요.”

그들이 지금 올라와 있는 누대는 조조가 세웠다는 그 유명한 삼대 중에 하나인 금봉대金鳳臺였다. 때마침 임장현을 지나게 되었던 천마가 지나는 길에 그 유명한 업성이나 한번 둘러보자며 의견을 제시했고, 문평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피와 살육에 지쳐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업성의 삼대 중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웠다는 동작대銅雀臺는 오래전에 무너져 흙무덤이 된 지 오래였다. 그와 더불어 좌측의 옥룡대玉龍臺도 자취를 감추었으나, 우측의 금봉대만큼은 화려한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되 아직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발밑으로 장하潭河의 강물이 도도히 흘렀다. 천 년 전, 찬란했던 업도鄴都의 기억을 아직 간직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햇살 속에 부서지는 장하의 물결은 반짝이는 황금빛으로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마침 15일이로군. 기일에 맞춰 누대에 올랐으니 기악을 연주하기라도 할 생각이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마가 내던지는 뜬금없는 질문에 문평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왜 기악을 연주해야 하며, 초하루가 누구의 기일이 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건넨 농담을 문평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천마는 조용히 웃더니 시 한 수를 읊기 시작했다.

“동작대 궁루는 재와 먼지로 변했고

銅臺宮觀委灰塵

장수 강가엔 위무제의 무덤만 남아 있구나.

魏主園陵潭水濱”

조금 전 자신이 말했던 것을 그대로 옮긴 듯한 시구에 문평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천마는 다시 웃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나머지 부분을 마저 읊었다.

“지금 서쪽을 바라보니 마땅한 감회만 남는데

卽今西望猶堪思

하물며 당시 노래하고 춤추던 사람들이야.

況復當時歌舞人”

그가 노래한 시는 영락한 옛 영화의 흔적을 둘러보고, 여세추이與世推移한 세상에 대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말하고 있었다. 하나 천마는 시를 읊으며 그러한 회고적 정서를 전혀 살리지 않았다. 그의 말투에 스며 있는 빈정거림 때문에 오히려 옛일을 조롱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짧게 시를 노래한 천마가 문평에게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문평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위무제魏武帝가 임종 시에 남긴 유언 중 이러한 대목이 있지. ‘내가 데리고 있던 비빈과 궁녀 및 기녀들은 아침마다 나에게 고기와 밥을 가지고 오고, 매달 15일마다 동작대에 올라 서쪽에 있는 나의 묘를 바라보며 기악을 울리도록 하라.’ 사실 그 유언은 천하를 뒤흔든 일세의 간웅이 남겼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치졸하지.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점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말이기도 하다.”

천마는 유명하다고 말했지만, 문평은 그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조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살면서 드문드문 듣게 되는 매담자의 이야기를 통한 것이 전부였다.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그런 고사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재미있다기보단 한심하지.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유장한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도 하고.”

천마는 냉소적인 얼굴을 하고 장하의 서쪽을 건너다보았다. 전설상에 조조의 무덤이 있는 위치로 알려진 방향엔 너른 평야와 나지막한 산 구릉이 드문드문 펼쳐져 있었다. 딱히 절경은 아니더라도 시야가 탁 트이는 눈맛이 있어 누대에 오른 보람이 느껴진다.

“그런 욕심이 있기에 일개 필부가 나라를 세운 게 아니겠습니까. 교주께서는 그러한 욕심이 없으십니까?”

“그러한 욕심이라. 어떤 욕심? 나라를 세우겠다는 욕심?”

“아니요. 몸이 죽은 후에도 이름만은 영원히 남기를 바라는 욕심 말입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인간이 불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것뿐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대로 죽어서까지도 살아 있을 때와 동등한 대접을 받고자 한 것은 보기 흉한 일이었다. 그러나 죽어서도 잊히고 싶지 않았던 위무제의 욕망만큼은 선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위무제의 유언은 치열하기 짝이 없는 강호인의 명예욕과 뿌리를 같이 했다. 위무제처럼 드러내지 못한다고 한들 인간으로서 그러한 욕망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의외의 배포가 있구나, 문평. 설마하니 너도 그런 욕망을 가진 것이냐? 영원히 기억되는 이름이 갖고 싶다고? 위무제나 소열제昭烈帝처럼 천세에 기억되고 싶다?”

“설마요. 저 같은 장삼이사에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그런 일이 가능한 분은 제가 아니라 교주님이시지요.”

놀리듯이 넌지시 묻는 천마의 말에 문평은 쓴웃음을 지었다. 칼을 쥔 무림인으로서 이름을 남길 마음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주제 파악을 잘하는 문평은 그러한 욕망이 실현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터무니없는 소망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일이 실제로 가능한 사람은 문평이 아니라 천마다. 그는 천하에 이름 높은 마도의 대종사였다. 천 년 전의 달마가 그러하고, 이백 년 전의 장삼봉이 그러하듯 그 역시 마찬가지로 세세토록 강호에 기억될 불멸의 존재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

천마는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을 떼지 않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깊은 심중을 모르는 문평은 의아한 눈길을 그에게 던졌다. 문평의 시선을 받은 천마가 예의 그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문평을 돌아보았다.

“나는 천하 마도의 종주이고, 정도의 가장 큰 대적자다. 그리고 한때는 거의 전 중원을 일통할 뻔했던 전적도 있다. 그 이름이 천세에 남는다는 것은 구대문파 전체가 내게 굴복했던 역사까지도 고스란히 남겨진다는 이야기인데, 그걸 과연 저들이 가만히 내버려 두겠느냐?”

천마가 언급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과거의 일들이었다. 이미 일어난 사건이고 이제 와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 일을 내버려 두고 말고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쩌겠습니까? 저들이 신도 아닌데, 흘러간 시간을 거꾸로 되감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모르겠으면 차라리 물어라. 질문할 용기를 내지 못해 평생 바보로 사느니, 묻는 순간 잠깐 바보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 닦달하듯 세뇌한 천마의 가르침 탓에 질문하는 것에 서슴없어진 문평이다. 그는 자신의 이해력이 모자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천마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럴 수 없으니 저러한 일들을 벌이는 거겠지. 과연 정파인들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사소한 것 따위는 아낌없이 희생하는구나. 아무렴. 그렇겠지. 고작 천마 따위의 이름을 전설로 남기는 것에 비하자면 수천의 생목숨 따위야 뭐가 대수일까?”

“……교주님께서는 백귀야겁이 정파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당연하지. 그들 외에 달리 누구의 소행이겠느냐?”

“저는 곽효라고 여겼습니다. 전에 교주님께서도 언급을 하셨듯이, 당금 강호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음모의 중심에는 그가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천마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문평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름을 조심스럽게 입에 담았다. 그 말을 들은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평이 내내 그 이름을 마음에 담고 있다는 사실을 천마가 모를 리 없었다. 시시때때로 자신의 눈치를 보는 그의 행동이며, 참사가 일어난 현장을 지나갈 때마다 어두워지는 안색까지, 문평이 이번 일에 대해 마음을 쓰고 있다는 증거는 그야말로 곳곳에 존재했다. 아마도 문평은 이번 일이 일어난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구구절절하게 알려 줬는데도, 끈질기게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문평에게 천마는 내심 혀를 찼다.

직접적으로 백귀야겁을 벌인 자들도, 그 원인이 된 것이나 다름없는 천마 자신도 그 일에 대한 책임감은 전혀 느끼지 않고 있는데, 엉뚱하게 아무런 상관도 없는 놈이 홀로 자책하고 있었다.

‘그럼 넌 그 당시에 내가 너를 포기했어야 했다고 말하는 거냐?’

마음 같아서는 놈을 마주 앉혀 놓고 따끔하게 물어보고 싶은 천마였지만, 이제는 그 역시 문평의 성격을 알 만큼 알기에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만에 하나 문평이 긍정의 대답을 한다면, 아니 차마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기만 해도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발상을 빌려준 것은 곽효겠지. 그러나 그 일을 손수 자행한 자들은 정도맹의 각 정파들이다.”

“그 사실을 어찌 확신하십니까? 무생교에 아직 여력이 남아 있을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아무리 곽효가 백 공자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다 해도, 정도맹에서의 그는 일개 식객에 불과합니다.”

“그 일개 식객이 당문을 움직이고, 흑마옥을 개방했으며, 정파의 힘으로 생강시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알고 하는 이야기겠지? 게다가 그들은 습격 사건에서 자신들의 정체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남기는 실수를 범했다.”

“그들이 어떤 증거를 남겼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알기론 백귀야겁을 주도한 자들의 정체는 아직까지도 드러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들의 정체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것. 바로 그게 상대가 정도라는 증거다. 보통 그러한 살겁은 자신들의 흉포함을 공포로 각인시키기 위해 자행하는 일이다. 그러나 백귀야겁을 처음 저질렀던 자들은 완벽할 정도로 본인들의 모습을 숨겼지. 집요하게도 참상을 전달할 생존자는 단 하나도 남겨 놓지 않았고, 죽은 시신은 모조리 모아 뼈까지 깨끗하게 태워 버렸다.

적들이 그렇듯 용의주도한 것은 필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터. 시체에 남은 상흔이 두렵지 않았다면 시체를 왜 태웠겠으며, 목격자의 증언이 두렵지 않았다면 어째서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존재하지 않았겠느냐?”

이러한 결론은 사실 간단한 소거법만 사용해도 쉽사리 추론할 수 있는 일이다. 백귀야겁이 일어난 방식은 마교라는 힘의 본질을 아는 포영의가 꾸몄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소모적이었다.

지금처럼 마교가 전 중원이 두려워하는 대상이 된 것은 패도 일변도로 변한 이후의 일이다. 그들에겐 압도적인 힘이 있었고, 필요한 곳이라면 그 힘을 서슴없이 휘두를 수 있는 과단성도 존재했다.

만약 이 일을 저지른 것이 진정으로 마교였다면, 백귀야겁은 그 명성을 생각해서라도 더 과시적이고 화려하게 치러졌어야 함이 옳았다. 강호 정세에 별 도움도 안 되는 소소한 문파들을 치는 데 힘을 소모하느니, 그 힘을 한데 몰아 구대문파 중 한 곳을 몰락시키고 그 엄청난 반향을 이용해 전략상의 우위를 점했을 것이다. 적어도 천마가 포영의에게 직접 가르친 바는 그러했다.

반면 그들의 용의주도한 처사는 백귀야겁의 배후로 오합지졸을 끌어다 모은 무생교를 의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무생교는 원래도 개성 강한 악인들인 데다, 혈루단과 같은 마단을 복용해 본능이 더욱 팽배해 있어 기본적인 명령을 수행할 수는 있어도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기는 어려운 종자들이다. 동정호에서의 일을 봐도 그렇고, 문평에게 계살귀가 저지르려고 했던 일을 봐도 그렇다.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대별산에 무생교의 악인이 아니라 자파의 고수들을 보냈을 터다. 각각의 전력을 마주한 적이 있는 천마는 급조한 무생교 따위가 그런 일을 저지를 만한 능력이 없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남은 것은 정도맹뿐이다. 오직 그들만이 고만고만한 세력들을 침으로써 다른 세력들을 자신의 그늘로 결집시키는 이득을 얻을 수 있었고, 오직 그들만이 그토록 용의주도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당문의 일로 정도맹이 배운 것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 많은 살겁을 자행하면서도 너무 완벽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실수도 남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거기까지 말한 천마는 서늘하던 냉소마저 거두며 문평의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 그렇지 않아도 담담하던 그의 음성이 아까보다 한층 더 낮아졌다. 그는 속삭이듯 조용한 어투로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알겠느냐? 때로는 너무 완벽한 것마저도 실수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너는 심지어 아직 완성된 것조차도 아니지. 네가 대체 뭘 믿고 내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기는지 모르겠구나. 나를 시험하는 것이냐, 아니면 너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냐?”

근처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문평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절정의 경지에 오르며 예전보다 배는 예리해진 기감氣感으로도 다른 사람의 기척 따윈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그는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듯한 천마의 태도에 진실로 소스라쳤다.

아니나 다를까. 천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림자 속에서 한 사람의 인영이 일어났다. 무공의 일종임이 분명했지만, 눈에 보이는 광경은 마치 사술 같았다.

검은 그림자가 쭉 늘어나듯 어두운 형상 하나가 일어서더니 불투명하던 그 모습이 서서히 사람의 그것으로 변모했다. 단출한 흑의 경장을 차려입고 활동하기 편하도록 팔다리에 토시까지 한 그는 외형상으로는 다른 마영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으나 복면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그들과 달랐다.

문평은 온통 검은 옷차림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 흰 얼굴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암살자처럼 은밀하게 다가와 있던 상대는 문평에게도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용서하십시오, 사부님. 정말 사부님이신지 궁금해 무례를 무릅쓰고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곽효가 또다시 사부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요.”

문평은 몰랐지만 마영단의 은형잠행술隱形潛行術은 여타의 은신술과는 달리 약간의 술법까지 가미된 독특한 무공이다. 천마가 직접 전수한 천마지공을 운용하는 자가 아니라면 제아무리 고수라도 그 기척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해서, 호위는 물론이고 암살에도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천마는 제자의 변명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문평에게 지어 보였던 것과는 온도 자체가 다른 그 미소는 금방이라도 상대를 얼음으로 만들어 버릴 것처럼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살기를 드러냈더란 말이지? 그것도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을 향해서?”

천마는 곽진무가 자신을 따라잡았던 시점부터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즉시 모습을 감추었던 것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미행이라도 하듯 몰래 뒤를 따르는 것까지 분명히 확인했다.

천마는 수상쩍은 제자의 의도가 궁금해 외진 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러나 주위에서 타인들의 눈이 완전히 사라져도 그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은밀하게 기척을 감추고 문평의 곁으로 다가와 그를 해하려는 시늉까지 했다.

천마는 이 철딱서니 없는 제자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도발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곽효의 이야기는 순전히 핑계에 불과했다.

상대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길을 벗어나고, 사방이 탁 트인 누대 위에 올랐다고 여길 만큼 곽진무가 멍청한 녀석이었다면 천마가 그를 거두었을 리 없다. 기재 중의 기재만 모은 네 명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영민한 제자는 포영의가 아니라 곽진무였다.

머리뿐만 아니라 재능도 뛰어나고 체질조차도 넷 중 발군이어서, 그에게 그럴듯한 기질까지 갖춰져 있었다면 마교를 물려받는 것은 호완평이 아니라 이 녀석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부가 사부이신지를 가장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였으니까요. 곽효라면 진정으로 저를 깨닫지 못했겠지만, 사부님 본인이시라면 모든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중이시라는 뜻이지요. 그런 상황이라면 저는 사부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나름대로는 어렵게 생각해 낸 고육지책이었으니, 저간의 사정을 참작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평대에 가까운 평소보다는 그래도 격식을 차린 태도로 곽진무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말이 격식을 차렸다고 해서 내용까지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다. 천마는 곽진무의 말속에서 의도된 빈정거림을 고스란히 읽어냈다.

어이가 없어진 그는 낮게 웃으며 제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귀엽다 귀엽다 했더니 할아비 수염을 잡아 뽑는 격이다. 네가 지금 내게 추궁을 하는 것인가? 내 행동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라고?

“꿇어라.”

천마의 입에서 냉담한 명령이 떨어져 내렸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누대의 바닥이 삐걱거리며 기분 나쁜 기음을 만들어 냈다.

곽진무는 위에서 짓이기듯 눌러 오는 만근의 압력에 낮게 신음했다. 주위의 공기가 모조리 쇠로 변해 버린 것처럼, 무섭도록 강한 압력이 그의 척추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 압력이 천마가 쏟아 낸 내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곽진무는 반항을 하기 위해 내공을 모았다. 그러나 초절정 고수의 내공으로도 천마의 압도적인 내력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곽진무의 무릎이 점차 꺾이기 시작했다. 그의 무릎과 함께 어깨도 꺾였다. 온몸에 식은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혈관이 확장돼 온 얼굴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저항해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만근의 무게로 어깨 위를 내리누르면서도, 약한 나무 바닥이 그 힘에 꺼지지 않게 기막을 깔아 둘 여유까지 있는 상대를 그가 이겨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부들거리며 그의 무릎이 하나씩 무너졌다. 빳빳하던 고개도 아래로 떨어졌고, 오체투지만은 면하기 위해 두 팔로 바닥을 짚었으나 그조차도 감당하기 버거웠다.

곽진무는 천마가 의도한 대로 고두叩頭라도 하는 모습으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천마는 그를 발밑에 무릎 꿇리고 나서야 성이 찬 듯 으스러트릴 듯 내리누르던 강한 내력을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정녕 용서를 빌고 싶다면 제대로 꿇어라. 입으로만 나불거린다고 해서 그것이 사과는 아니지. 상대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면 일단 형식이라도 제대로 갖춰야 할 게 아니냐.”

천마는 선을 지키는 한 제자들에게 관대했으나, 제자들이 그 선을 넘었을 때는 적보다도 더 무자비했다. 한번 틀어지면 상대의 자존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의 무정함은 상대가 곽진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곽진무는 나무 바닥에 땀을 뚝뚝 흘리며 입술을 뒤틀었다. 그는 천마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지 똑똑히 이해하고 있었다.

천마는 본인이 말한 것처럼, 자신에게 건방지게 굴었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문평에게 살기를 드러냈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그 증거로 곽진무가 머리를 조아리게 된 방향은 천마가 아니라 문평을 향해서였다.

머리 위의 압력을 교묘히 이용해 몸을 틀게 만든 천마는, 곽진무가 무릎을 꿇을 방향을 결정함으로써 진정으로 사과받아야 할 존재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적시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용서해 주십시오. 제자가 감히 사부를 시험했습니다.”

“용서를 빌 대상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네가 진정으로 용서를 빌 상대는 내가 아니라 저 아이지.”

“……제가 용서를 빌어야 합니까, 저 사람에게요?”

“네가 노린 목숨이 내 목숨이었더냐?”

바닥에 억지로 머리를 박아야 했던 곽진무가 고개를 들어 문평을 올려다보았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무려 마중사기 중의 한 사람을 발치에 무릎 꿇린 셈이 된 문평은 희게 질린 얼굴을 하고 천마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천마는 문평의 그러한 반응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얼음처럼 냉담한 얼굴을 하고 상대의 사과를 재촉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과민 반응이지?’

문평은 천마의 돌발 행동에 그야말로 식겁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노렸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 등골이 서늘해지긴 했지만, 자신은 그런 일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피해를 본 것도 없었으니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곽진무의 변명이 사실이라면 그 나름의 이유도 이해 못 할 것이 아닌데, 마치 적을 문초하듯 저리 대하다니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

하지만 이것은 제자와 스승 간의 일이고, 공식적으로 아무런 직위도 없는 문평은 이런 일에 함부로 나설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자신이 곽진무가 머리를 조아린 방향에 서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몸을 움직여 절을 받는 것을 피했다.

“절을 피하는 걸 보니 네 최선이 아직 저 녀석의 마음에 닿지 않은 모양이다.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려라.”

그 모습을 본 천마가 곽진무의 이마를 다시금 바닥에 닿게 만들었다. 난폭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문평은 정말로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냥저냥 기분이 괜찮아 보이던 사람이 왜 이렇게 순식간에 돌변해 버렸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지나치게 과분한 이 상황은 문평의 기분을 풀리게 하기보단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지금이라도 난 괜찮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내막이 있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문평의 머릿속은 완전히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저러다 사람 하나 잡겠다 싶어, 문평은 서둘러 천마를 만류했다. 사실 상대의 안위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이 일로 인해 곽진무가 자신에게 가지게 될 격렬한 반감이다.

물론 자신은 일을 이렇게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런 상황을 바란 적조차 없었지만, 모욕을 당한 곽진무가 그런 사실까지 너그럽게 헤아려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사부이자 절대 고수인 천마를 원망하는 것보다는 그의 등에 업혀 호가호위한 남첩을 미워하기가 더 쉬운 법. 문평은 향후 곽진무가 자신을 어떻게 대우할까를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고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다.

강호에 ‘참사검이 적이라면 후회조차 친구가 되어 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떠돌게 하는 남자가 바로 곽진무인데, 그런 사람에게 본의 아니게 끔찍한 모욕을 안겨 줬으니 오늘 밤부터는 잠자리가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일을 만드시다니, 사부께서는 저자가 정말로 중요하신 모양입니다.”

곽진무는 하라는 사과는 하지 않고 억눌린 듯 막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머리가 눌려 목소리가 짓눌린 듯 들릴 뿐 화를 내는 기색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의 태도는 의미심장하게 느껴질 만큼 차분한 편이었다.

천마가 머리를 누르던 힘을 풀자 그는 고개를 들어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천마의 힘에 대항하느라 충혈된 얼굴은 금방이라도 피가 배어 나올 듯 선명하게 붉었다. 그 얼굴보다도 더 붉은 것은 그의 눈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불덩이를 쏟을 듯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불련산에서의 일로 짐작하고 있던 바입니다만, 사부께서는 정녕 저자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군요. 이 제자보다도, 곽효보다도, 심지어는 천하의 대세보다도 저자를 먼저 생각하시다니 말입니다.”

감춰져 있던 빈정거림은 어느덧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곽진무는 작정을 한 사람마냥 천마의 처사를 냉소적으로 비꼬았다. 천마와 곽진무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 정말 왜 저래?’

다른 제자들에 비해 그나마 사이가 좋던 상대가 저 둘째 제자더니만. 이러다가 사제 간에 정말 칼부림이라도 날 것 같아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문평의 마음은 조마조마하기 짝이 없었다.

문평의 눈에도 곽진무가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게 훤히 보였다. 속이 좁고 뒤끝이 긴 천마는 쉽게 남을 용서하는 성격이 아니다. 제자라고 해서 봐준다는 법도 없었다. 자신의 사부가 어떤 성격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곽진무가 왜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걸까?

“내게 할 말이 있느냐? 있다면 알아듣기 쉽게 제대로 말해라. 도대체 무슨 불만이기에 핑계 삼아 이렇듯 방자한 행동을 일삼는 거냐? 네가 정녕 내 손에 죽고 싶어 이러는 것은 아니겠지?”

문평과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은 그 혼자만이 아닌 듯했다. 천마조차도 이렇듯 반항적으로 나오는 제자의 심중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겉보기엔 소탈하고 꾸밈없는 듯하지만, 기실 진무는 치밀하고 신중한 성격이다. 밖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속으로 감추고 있는 것이 더 많은 놈이 바로 이놈인데, 그런 놈이 이렇듯 무모하게 구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였다. 물론 이유가 있든 없든 맞을 짓을 했으니 맞아도 매우 아프게 맞아야겠지만, 그 이유에 따라 때릴 매의 횟수와 강도 정도는 조절해 줄 용의가 있다.

“사부께서는 곽효가 어떤 자인지 잊으셨습니까? 곽효의 손에, 누가 목숨을 잃었는지도 잊으셨습니까?”

“내가 나이는 들었어도 아직 치매는 아닌데, 그 사실을 잊을 리가 있느냐.”

“그런데 어찌 그러셨습니까? 그 일을 잊으신 것도 아닌 분이, 그날 어째서 곽효가 아니라 저자를 선택하신 겁니까? 그자가 당신의 눈앞에서 죽였던 사람은 바로 손여영입니다. 아니, 혁련여영이죠. 제 어머니였던 그분은 당신에겐 따님이기도 하셨습니다.”

곽진무는 사뭇 이를 가는 듯한 어조로 그 말을 했다.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문평은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

‘뭐, 뭐, 뭐, 뭐라고? 손여영이 천마의 딸이었다고?’

벼락을 뒤통수로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전에 백우경 사생아 설을 떠올렸을 때보다 이번이 더 큰 충격이었다.

본인 입으로 직접 ‘남색가라 자식이 없다’라고 주장을 해놓고, 이제 와 딸이 있었다니. 문평은 마치 사기라도 당한 것 같은 기분으로 천마를 돌아보았다. 이 망할 영감은 살아오는 내내 무슨 짓을 그렇게나 많이 저질렀는지 파도 파도 옛 사연이 끝이 없었다.

“그 아이가 내 딸이라…….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누르다 못해 터진 울분을 드러내고 있는 곽진무에 비해 천마의 안색은 한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일말의 동요도 없이 냉담한 그 얼굴은 무심하기 짝이 없는 그 태도와 썩 잘 어울렸다. 하지만 천마가 그 사실을 부인할 거라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곽진무는 그의 그러한 태도에도 섣불리 흥분하지 않았다.

“어머님께서 직접 해주신 말씀입니다. 당신께서는 거두어 주셨던 외할아버님께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육마가 그런 말을 했더란 말이지.”

평소엔 무던히도 입이 무거운 사람이, 자식에게만은 가벼운 것은 그 집안의 내력인 듯했다. 절대로 말을 하지 않을 것 같던 손규가 손여영에게 그러더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손여영까지도 자기 자식에게만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손규, 이 사람아. 여영은 정말 자네 딸이 확실하군.’

곽진무의 대담한 언급은 천마에게 오래전에 죽어 버린 충직한 부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의 뇌리에 손여영은 곧 죽어도 자기 딸이라고 주장하던 부하의 험악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친구의 마지막을 확인하지 못한 것은 아직까지도 큰 유감이다. 그렇게 갈 사람이 결코 아니었는데. 천마는 그의 인생에서 드물게 진실한 우정을 나누었던 상대를 아쉬워하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듯 시치미를 떼지 않으셔도 전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외할아버님은, 그러니까 제 어머니를 거둬 주신 육마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아주 솔직하게 털어놓으셨으니까요. 덕분에 어머니께서는 채 열다섯이 되기도 전에 자신의 친어머니가 친아버지의 손에 죽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아셔야만 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친아버님이신 당신을 수년간 겁간해 왔다는 사실도, 본인의 존재를 빌미 삼아 양아들이었던 아버지를 손에 넣으려고 했다는 사실마저도 모두 아셨죠.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딸을 찾으면 반드시 죽여 버릴 거라는 맹세를 하셨다는 것조차 알고 계셨습니다.”

말을 하는 곽진무의 목소리에 희미하게 물기가 비쳤다. 낮게 떨리고 있는 음색은 그가 겪고 있는 감정적인 동요를 선명히 드러냈다.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천마의 시선을 느끼며 곽진무는 이를 악물었다. 설사 모든 속내를 꺼낸 후 천마의 손에 목숨이 끊기는 한이 있더라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어머니는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 태어난 직후에 버린 후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천마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그분의 죽음을 천마가 이토록 하찮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견딜 수 없었다.

“그 모든 걸 아시니 그분이 우미인일 수밖에요. 그분의 심중에 항상 우수가 깃들었던 것은 모두가 당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평생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며 사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분이 가진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친아버님인 당신을 아버님이라고 불러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평생 자신을 외면해 온 아비의 앞을 가로막다 자기 남편의 손에 말입니다.”

충격은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었다. 곽진무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천마보다 오히려 문평을 더 경악시켰다.

‘뭐? 겁간을 당해 가진 자식이라고? 게다가,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상대가 무려 양어머니였어?’

곽진무가 토해 놓는 진실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설상가상이다. 문평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예전에 천마에게 들었던 고백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래. 그는 예전에 분명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게 억울하면 힘을 길러서 복수를 하라고 진지하게 대꾸했던 천마는, 본인이 과거에 겁간을 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털어놓았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년간 계속된 일이었으며, 본인이 어리고 예뻤던 시절의 일이라고 농담처럼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상대가 자신의 양어머니였다는 사실은 털어놓지 않았다. 그 상대가 아이를 빌미로 본인을 협박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천마의 양어머니라니. 그렇다면 상대는 천마의 사모였던 감교령이 아닌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정보들이 한데 짜 맞추어지자 전체적인 그림이 드러났다.

남편이라는 놈은 어린아이의 가족을 도살하고 아이를 납치해 오질 않나, 그 마누라라는 년은 어린 소년의 미색에 홀려 아이를 겁간하고 자식까지 낳아 협박하지 않나. 그놈의 부부는 남편이나 부인이나 어쩌면 그렇게 징그러울 정도로 똑같은지 모를 일이다.

문평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부부였으나, 그들을 생각만 해도 이가 갈렸다. 천마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들을 죽여 버린 것도 이해가 간다. 누군들 그러한 인간들을 참을 수 있었겠는가?

다시 한번 생각하는 바지만, 천마의 성질이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은 모두가 그 부부가 저지른 악업 때문일 터였다.

“사부님, 아니 외할아버님. 진정으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그분을 용서할 수 없습니까? 그분이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지금까지도, 그녀는 당신의 자식이 아닙니까?”

“그녀는 내 자식이 아니다, 곽진무.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그분이 그렇게도 용서가 안 되십니까? 그렇게 태어난 것은 제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셨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것도 아닌 죄를 평생 사죄하며 사셨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분을 편하게 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분의 단 하나였던 소망을 죽은 후에라도 들어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곽진무는 이럴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게 되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얗게 점멸되었다가 다시 밝아졌다. 너무 화가 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정신까지 아득해져 버렸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이지!’

진정이라는 것이 닿지 않는 듯한 독선적인 천마의 태도에 진무는 치를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세게 깨물어 피가 비치는 입술은 금방이라도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천마는 그런 곽진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주시했다. 그의 얼굴 위로 한 겹의 그림자가 장막처럼 내려앉았다.

본래도 속을 알기 쉬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천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무생물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흐르기를 멈춘 물처럼 고요히 서 있던 그는 문득 입을 열어 혼잣말처럼 가만히 중얼거렸다.

“애초부터 그 아이의 죄가 아니었으니, 그 아이를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살아생전 그 아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니 이제 와 그 아이를 내 자식이라 할 수는 없지.”

심연처럼 검고 깊던 천마의 눈에 한 줄기 빛이 돌아왔다. 그는 바닥에 엎드린 곽진무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혀 쪼그리고 앉았다.

실제로 피가 이어진 조손간.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닮은 구석이 있는 것도 같은 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진무. 너는 내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보느냐? 순간적인 기분으로 자식을 죽이겠다는 맹세를 했고, 자신의 말을 어기지 못해 평생을 그에 얽매여 살았다. 그런 내가 그 아이의 아비라고? 천만에. 난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더니 냉담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냉담할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자조적이기도 했다. 남을 비웃을 때 그랬던 것처럼, 천마는 스스로를 비웃을 때조차도 스스럼없었다.

“아비란 나와 같은 자에게 어울리는 호칭이 아니지. 네게 곽효가 아비가 아니듯, 그 아이에게도 나는 아비가 아니다. 손여영에게 아비가 있다면 그건 손규지, 나일 수 없다.”

어떤 자리든 그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가 있기 마련이다. 아버지라는 자리 역시 마찬가지. 본인이 겪어 본 바가 있기에 그에 더욱 엄격한 천마는 자기 자신을 손여영의 아비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손여영에게 아비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손규다. 손규는 손여영에게 새로운 생명과 이름을 선물했고, 죽는 날까지 그 아이를 위해서만 살았다.

천마의 대답을 들은 곽진무는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진심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천마는 여전히 손여영의 아비임을 부인하고 있었지만, 그가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곽진무가 믿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자격을 문제 삼은 대상은 손여영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직설적인 태도로 스스로에게 아비가 될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를 자처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천마는 남에게 엄격한 만큼 본인에게도 엄격한 사람이다. 자타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그의 기준은 절대적이었고,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뀐다는 식의 융통성 역시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른 게 이유라면 또 몰라도 책임과 자격의 문제라면 진무가 어떤 애원을 하더라도 그의 결정이 바뀔 리 없다.

늘 자신만만하고 오만하리만큼 패기에 넘치는 그가 무려 자조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그 누구도 상상해 본 적이 없을 법한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본 진무는, 놀라다 못해 얼이 빠진 듯한 시선을 하고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왜 곽효를 보내 주신 겁니까? 제 어머니의 아버지일 수 없다고 스스로 결정하셨더라도, 당신에겐 아직 그분의 빚이 남아 있습니다.”

“네 어미의 일로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놓친 후에 후회를 해 봤자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정말 지켜야 할 것이 있으면 결코 놓치지 않아야 한다. 만시지탄晩時之歎만큼 쓸모없는 게 어디 있단 말이냐?”

그 말을 들은 곽진무는 의아한 눈길로 문평을 돌아보았다.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연달아 받은 그는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이해도 안 간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으며 문평의 모습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문평은 마치 우시장에 나온 소를 살피듯 자신을 살피는 곽진무의 눈빛에 심한 부담감을 느끼며 거북한 표정을 간신히 관리했다.

‘겨우 저게?’

곽진무는 거의 그렇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태도로 문평을 노려보았다. 눈대중으로만 재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그의 얼굴에 불신이 팽배해졌다.

화가 난 그는 당돌하게도 천마의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왕 한번 죽기로 마음먹었으니 초지일관 생명을 도외시하며 끝까지 밀고 나갈 심산인 듯했다.

“지금 그 말씀을 믿으라는 겁니까? 사부 같은 분이 겨우 저따위 녀석에게 진심이 되셨다고요?”

곽진무는 천마가 자신의 행동을 얼버무리려고 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대놓고 반발했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천마가 자기 행동을 얼버무릴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문평을 천마의 남첩 이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곽진무는 파지 않아도 될 무덤을 기어이 파고 말았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다소 온건히 돌아왔던 천마의 목소리에서 돌연 온도가 뚝 떨어졌다. 눈치가 느린 편인 문평에게도 확연하게 보이는 변화인데, 머리 좋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곽진무가 그를 모를 리 없다.

진무는 본인이 내뱉은 한마디의 말에 즉각 표정이 돌변해 버린 천마를 아연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천마는 그런 그의 눈을 깊숙이 내려다보며 협박이라도 하듯 날카롭게 추궁했다.

“저따위? 녀석? 내 입으로 직접 내 사람이라고 말한 상대에게, 네가 지금 하대를 한 것이냐?”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인데, 천마의 반응은 지나칠 정도로 민감했다. 처음 곽효가 그를 향해 빈정거리며 덤벼들 때도 이렇게까지 칼 같은 기세는 아니었는데 겨우 한 마디 내뱉은 것만으로 상대를 죽일 듯 눈에 날을 세우다니, 방심하고 있던 곽진무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상한 천마는 옷자락을 털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를 굽히고 앉아 눈을 맞춰주던 자세에서 일방적으로 내려다보는 자세로 돌변해 버리니, 그에 따른 위압감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렇지 않아도 장신인 그를 바닥에 누운 거나 다름없는 자세로 올려다보고 있자니 시선을 마주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왔다.

‘내가 실수했구나.’

감이 빠른 곽진무는 자신이 진천뢰를 제대로 밟았다는 사실을 그 즉시 깨달았다. 천마는 정말로 저 평범한 사내를 자신의 마음속에 담고 있는 듯했다.

강호상의 배분으로 보나 교에서의 위치로 보나 천마는 결코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가 사사로이 하는 행동에 배분이 뒤흔들리고 위계 자체가 뒤바뀔 수도 있으니, 작은 일을 결정함에도 극히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그러한 이치를 모를 리 없는 천마가 문평에게 직접 ‘내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에 더해 제자인 곽진무가 아랫사람이라고 박아 놓기까지 했으니 이는 저 사내를 자신의 안사람으로 대접하라는 협박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이게 무슨…….’

천마에겐 이제껏 수많은 남첩이 존재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러한 예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 저 사내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 자들조차도 천마에게는 그저 잠자리 상대였을 뿐 연정이 아니었는데, 저 사내는 대체 얼마나 특별한 재주가 있기에 이렇게까지 다른 대접을 받는지 모를 일이다.

전무후무한 상황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한 곽진무는 불손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영민한 머리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굴러갔다.

‘설마 나는 이제껏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어쩌면 사부께선 한낱 남첩의 안위를 어머니의 죽음보다 우선시한 게 아닐 수도 있어. 그와 반대로, 무려 곽효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부에게는 저 사내의 존재가 중요했던 걸 수도 있는 거다!’

늦된 깨달음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단지 각 문장의 선후를 뒤집었을 뿐이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불련산에서의 일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했다. 지금의 상황을 한 문장으로 줄이자면 다음 같은 말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천마는 사랑에 눈이 멀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오싹한 정의였으나, 지극히 정확한 표현이기도 했다. 천마처럼 냉철한 사람이 객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정이 앞서는 행동을 했다는 것은 그의 상태가 얼마나 중증인가를 드러내는 반증이나 다름없다.

고금을 통틀어 사랑에 빠진 제왕처럼 맹목적인 연인은 없는 법이다. 경국지색이니, 일고경성一顧傾城5)이니 하는 말이 괜히 생겼겠는가?

사랑에 빠진 왕은 미인의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 비단을 찢고, 그 웃는 얼굴을 한 번 더 보기 위해 산중의 봉화를 지피는 짓까지 서슴없이 저지른다. 물론 천마처럼 노회한 사람이 그렇게까지 무책임해지지는 않겠지만, 그가 늦은 나이에 얻은 어린 총희를 금지옥엽 귀애할 거라는 사실은 지금 하는 행동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네가 그렇듯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질 자신이 있어서겠지. 말해 보거라. 내가 너를 왜 용서해야 하지?”

본래 천마는 그리 예를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런 그마저도 오늘 일만큼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곽진무가 한 행동은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아무리 격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스승이고 진무는 제자다. 여쭐 게 있으면 공손하게 다가와 여쭙고, 물러날 때도 예의를 갖춰 물러났었어야 함이 마땅하다. 한데 어디서 미행질에 암살 시늉에, 윗사람을 능멸까지 한단 말인가?

천마는 살벌하게 기세를 피워 올리며 곽진무를 압박해 들어갔다. 손여영의 아비임을 부인한 그에게 있어 곽진무는 외손자가 아니라 제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설사 진무를 진짜 손자로 여긴다고 할지라도 이런 방자한 태도를 용납할 정도로 천마는 너그러운 성품이 아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어머니를 핑계 대고 싶지는 않았던 진무는 변명을 일삼는 대신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천마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거슬러 놓고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었으나 진무는 사부의 손에 다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난세라 한 명의 고수가 아쉬운 마당인데, 적도 아니고 사부의 손에 전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에게는 아직 곽효에게 돌려줄 것이 남아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팔다리가 멀쩡해야 했다.

“사부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제가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은 사부님이 아니신 듯합니다. 제가 진정으로 실례를 저지른 상대는 사부가 아니라 사모가 아닌지요? 처음에 하신 말씀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사죄를 드릴 방향을 정말로 잘못 잡았군요.”

‘사, 사모?’

문평의 등허리에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저게 제발 자신을 부르는 말이 아니길 빌고 또 빌었지만, 곽진무의 시선은 똑바로 문평을 향하고 있었다.

고두까지는 아니지만 정중하게 자세를 추스른 그는 천마의 강요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머리를 숙였다. 다시 한번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진 문평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절을 받지 않는다는 건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컸으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선뜻 대응을 못 하고 망설이고 있는 문평에게 곽진무가 거듭 용서를 빌었다. 조금 전까지 서슴없이 하대하던 것과는 다르게 그의 말투는 거의 극존칭에 가까울 정도로 높아졌다.

“본의 아니게 사모님께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모르고 한 행동이었다고는 하나 그게 변명이 될 수는 없는 법. 이 제자 비록 불초하긴 하나 불한당은 아닙니다만, 순간의 실수로 하마터면 엄청난 패륜을 저지를 뻔했습니다.

저의 무도했던 행동을 용서해 주십시오, 사모님. 이번 일을 뼈에 새겨,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문평은 말끝마다 사모라고 연발하는 곽진무 때문에 미치도록 민망했다. 여인이라면 몰라도 사내인 자신을 두고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문평은 눈짓으로 천마에게 이 상황을 좀 어떻게 해결해 달라는 부탁을 건넸다. 그러나 제자가 무슨 짓을 하는지 두고 볼 심산인 천마는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심중의 폭풍우가 가라앉지 않은 듯 얼어붙은 얼굴은 고드름같이 싸늘했다. 얼음으로 만든 조각이라고 하더라도 저처럼 한기를 풍기진 않을 것이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부닥친 문평은 실로 난감해졌다. 곽진무는 그가 용서해 줄 때까지 일어나지 않으려는 듯 머리를 깊게 숙이고 있었다. 그는 천마의 제자인 동시에 외손자였으며, 문평에게는 까마득한 윗사람이기도 했다.

문평은 천마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먹이를 노리는 뱀 같은 태도로 천마가 곽진무의 뒤통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것은 그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차분하게 번득이는 그의 눈에선 용서나 관용같이 말랑말랑한 감정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꼬투리가 잡히면 크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의만 빛나고 있을 뿐이다.

한다면 기필코 하고야 마는 천마를 말리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만약 문평이 용서를 하지 않는다면, 천마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무례했던 곽진무에게 큰 벌을 내릴 것이다.

참사검의 윗사람 행세를 해야 한다는 현실에 아찔해진 문평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곽진무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신경을 쓰며 입을 열었더니 말을 꺼내는 첫마디가 홀랑 뒤집혔다.

“패, 흐흠. 패륜이니 뭐니 하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극공의 예를 받는 일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니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당황한 문평은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수습하고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사모님은 사부께서 직접 자신의 사람이라고 천명한 분이십니다. 고수의 말은 그 한마디 한마디가 천금 같은 것. 천하제일인의 확언은 그 자체가 약속이나 다름없습니다. 강호의 일개 무부라 할지라도 그 뜻을 존중할 터인데, 하물며 사부님의 제자인 제가 어찌 감히 거스르겠습니까?”

아직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 정확히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은 문평에게 곽진무는 진지한 어조로 되물었다.

말을 걸고 있는 대상은 문평이었으나, 그 진의가 자신에 대한 아부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천마는 그저 냉랭하게 코웃음만 쳤다.

‘흥. 얍삽한 녀석 같으니. 이제야 제 살길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를 눈치챈 건가?’

천마는 자신이 그렇게 몰고 간 면이 없지 않았음에도 제자의 교활한 처세가 가소로웠다.

어차피 이럴 거면 진작 알아서 행동할 일이지, 왜 꼭 눈치도 없이 뻗대다가 이렇게 피를 보느냔 말이다. 곽진무가 굳이 나서지만 않았더라면 그를 본보기로 내세우지는 않았을 텐데.

기실 천마는 아랫사람에게 본을 세울 자로 포영의를 점찍어 놓고 있었더랬다. 뒤끝 있는 천마는 그가 문평에게 고를 먹였다는 사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아, 아니. 그게…….”

“만약 말씀하시는 바가, 제게 아랫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을 돌려서 탓하신 거였다면 죄송합니다. 제자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짐짓 심각하게 중얼거린 곽진무는 다시 한번 머리를 깊이 숙였다.

곽진무의 이마가 바닥에 닿자 문평의 염통이 쫄깃해졌다. 이건 뭐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다. 과연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이자는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방식까지 천마와 비슷하단 말인가?

곽진무 역시도 천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진 말을 이용해 상대를 함정에 빠트리는 데 매우 능했다. 익숙하기 그지없는 방식임에도 고스란히 당하고 만 문평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긴. 이 집안 핏줄에 뭘 기대하겠어. 저 독한 천마의 피가 어디 가려고.’

문평은 천마를 힐끗 쳐다보았다. 천마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문평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지켜보고 있었고, 곽진무는 머리를 들지 않은 채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두 사람의 고수가 그의 입만 바라보고 있으니 꼭 생사판관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출세라고 하면 엄청난 출세지만 문평은 이러한 상황이 정말로 달갑지 않았다.

“머리를 드십시오. 그렇게까지 사죄를 하실 일이 아닙니다, 가 절대 아니라…….”

별일 아니니까 괜찮다고 말하려던 문평은 섬광같이 내리꽂히는 천마의 시선에 움찔했다.

‘아, 알았어요. 잘못했다고요.’

이제는 눈빛만으로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가 된 문평은 ‘목숨을 위협당하고도 별일이 아니라고? 너 정말 별일 한번 당해 볼래?’라고 묻는 천마의 시선에 진심으로 위축되었다. 제자에게조차도 무자비한 천마가 그라고 예외로 둘 것 같진 않았다.

등골이 서늘해진 문평은 재빨리 하려던 말을 정정했다.

“……물론 분명히 잘못은 하셨지만, 이렇게 깊이 반성하고 계시니 더는 추궁을 하기가 힘들군요. 모르고 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이 어찌 실수 한 번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앞으로 같은 실수를 하지만 않아 주시면 됩니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고자 꺼낸 입바른 말이었지만, ‘같은 실수를 하지 말아 달라’는 말에는 일말의 진정이 배어 있었다.

머리를 숙이고 있던 곽진무가 감읍한 듯 긴 포권을 했다. 문평은 민망한 기분으로 마주 포권하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임시 방책으로 상황을 모면하기에만 급급한 문평과 다르게 곽진무는 방금 일어난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문평을 윗사람으로 대했고, 상대는 그 대접을 받아들여 그를 용서했다. 그러니 이제 두 사람의 관계는 공식적으로 윗전과 아랫사람이 되었다.

이 자리에 그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다른 마영들도 함께했다. 모든 것을 지켜본 그들의 눈과 귀가 이 관계에 대한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이런 결정적인 선례를 만들었으니 진무가 문평을 사모로 모시는 것은 기정사실로 되어 버렸다. 곽진무는 자신이 천마에게 당하고 말았음을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이런. 인제 보니 나를 본보기로 삼은 거였군. 확실히 사부님다운 방식이긴 해.’

자신의 섣부른 도발을 천마는 참으로 적절히 이용해 먹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곽진무는 쓰디쓴 고소를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사부에겐 당할 방도가 없다. 교활하기로는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하는 자신조차도 머리 꼭대기에서 움직이는 천마의 심중을 짐작하기 힘든데,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남들 눈에는 빤히 보이는데 아직 본인만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 자신의 운명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는 문평이 진무는 가엾어졌다. 천마가 지금 하고 있는 꼴을 보아서는 평생을 가도 그를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하는 행동이며 태도를 보면 그다지 명석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천마의 손아귀에서 그 좋을 대로 굴려질 것을 생각하니 아무 관계도 없는 진무마저도 괜스레 마음이 짠해진다.

“매달릴 상대를 잘 골랐군. 하긴. 나에게 매달리는 것보다 저 속없이 무던한 놈에게 매달리는 게 만만하긴 하겠지. 당사자가 용서를 하고 말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스스로가 한 말은 깊게 새겨야 할 것이다. 한 번은 실수라도 두 번은 용서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사부님의 충고 역시 각골명심하겠습니다.”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면서도 천마가 참견을 해왔다. 문평은 곤란한 듯 천마를 바라보았지만, 진무는 그런 천마의 태도가 모두 다 가식이라는 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어쩌면 천마는 처음부터 일을 이렇게 만들기 위해 자신을 강제로 무릎 꿇렸던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는 듯 작정한 냄새가 솔솔 풍기는 것이 진무의 의심을 한층 더 깊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사부님, 한시가 급한 마당입니다. 교에는 언제 돌아올 예정이십니까?”

하지만 저런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천마다. 그가 가진 존재감은 실질적인 전력을 떠나 사기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절대병기나 다름없는 그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그들답지 않은 고육지책을 쓸 수밖에 없는 현재가 못마땅했던 곽진무는 이왕 찾은 천마를 교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을 느꼈다.

교에도 화경의 고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곽진무가 생각하기에 천마는 곽효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그의 무력이나 전략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연륜과 경험 역시 적지 않은 도움이 될 터인데, 그런 전력을 명승지 유람이나 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은 돌아갈 생각이 없다.”

제자의 초조한 속내를 알지도 못하는 듯 천마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찾았으니 당연히 돌아가는 게 수순이라고 믿고 있던 진무는 그의 대답에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네? 어째서요?”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내가 교에 잔존해 있다면, 과연 완평이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겠느냐? 그 녀석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기에 내가 교에 있다면 괜히 중심만 흐트러질 뿐이다.”

“사부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그러한 여유를 허락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습니다. 천하의 정세가 어찌 돌아가는지 사부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이 필요합니다. 부디 마교로 돌아와 주십시오, 사부님.”

곽진무는 간절하게 부탁했으나 그의 애원은 천마에게 쉽사리 먹혀들지 않았다. 천마비고에서 나올 때부터 마음에 뜻하는 바가 있던 천마는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더해 나는 확인할 것도 있다. 이번 기회에 후계를 택한 스스로의 안목이 옳았는지 글렀는지를 알아보려 한다. 내가 곁에 없으니 그 녀석들은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역량을 보일 수 있겠지. 난세이기에 놈들의 그릇이 더욱 뚜렷이 드러날 것이다. 내가 어찌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하겠느냐. 진무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으냐?”

천마는 당금 천하의 이 극심한 혼란조차도 후계 구도를 위해 기꺼이 이용할 마음인 듯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대답하니 진무로서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천마의 뜻이 확고하다면, 곽진무의 힘으로 천마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담담하기만 한 천마의 태도를 보면 내심 따로 염두에 둔 바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부님…….”

“때는 무르익고 있다. 환부가 깨끗하게 낫기 위해서 때로는 상처를 덧나게 할 필요도 있는 법. 이제껏 곪아 왔던 것들이 모두 터지고 나면 드디어 결전이 시작될 거다. 섣부르게 움직이지 말고 상황을 지켜보거라. 머지않아 기회는 틀림없이 온다.”

다행히 마교가 이제껏 움직여 왔던 방식은 천마의 눈에도 그다지 모자라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있을 때에 비해 조심스러운 행보이긴 했지만 손해를 본 적은 없었고, 드러내지 않고 차근차근 실익을 얻어 가는 것을 보면 내실 있는 두 사람의 성향을 짐작하게 했다.

마교의 견실한 움직임 때문에 곽효가 사용하는 수단들은 겉보기엔 화려해도 실속이 없었다. 그들이 굳건히 중심을 잡고 어떤 도발에도 흔들리지 않으니, 상황을 소모전으로 몰고 가려던 저들의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작금의 혼란이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정도맹도 바라는 일이 아닐 터. 적당한 선에서 수습하려면 백귀야겁의 혈겁은 조만간에 끝나야만 한다. 의도했던 대로 단합은 됐지만 전력 자체는 도리어 하락한 상황에서 정도맹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천마가 진면목을 숨기지 않은 채 천하를 돌아다니는 것은 곽효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또 하나의 수단이기도 했다.

“중요한 순간에는 빠지지 않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돌아가라. 대신, 이곳에서 나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언급해서는 안 된다. 진무는 물론이고 너희 또한 마찬가지다. 설사 대상이 완평이라 할지라도 나에 대해 발설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천마는 예리한 시선으로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마영들의 기척을 헤아리며 명령했다. 드러내진 않고 있었으나 그림자들을 돌아보는 천마의 내심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저들 중엔 분명히 문평의 목에 손자국을 냈던 놈도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문평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일임에도 천마는 그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그가 곽진무를 본보기로 삼은 이유의 절반은 저들 마영 때문이었다. 곽진무의 주변에 모습을 숨긴 마영들이 포진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천마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은, 험한 꼴을 당한 문평의 목덜미에 남아 있던 시커먼 손자국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놈을 콕 짚어 내서 손봐 주고 싶은데 너무 까마득한 아랫것이라 직접 손을 대기가 애매하다. 덕분에 애꿎은 곽진무만 욕을 본 셈이지만, 이번 일로 마영들에게도 톡톡히 경고되었을 테니 천마로서도 분이 반쯤은 풀린 셈이다.

‘그래도 이것만으로 넘어갈 순 없는 일이지. 나중에 한번 넌지시 물어봐야겠어. 대체 어떤 망종이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말이야.’

천마가 어떤 심중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지 알지 못하는 마영들은 은형잠행술을 풀고 일어나 깊숙이 절을 했다. 그들 하나하나의 기를 마음속에 새겨 둔 천마는 손을 저어 그들의 인사를 물리쳤다.

“이만 물러가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 다시금 마영들의 모습이 허공 속에 녹아들었다. 뒷걸음질로 물러선 곽진무도 일신에 은형잠행술을 일으켰다.

신기하게도 그가 무공을 운기하자, 신형이 발끝부터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한다. 그는 먼저 천마에게, 그다음은 문평에게 깍듯하게 인사한 후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사부님, 사모님. 그럼 제자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부디 다시 뵐 때까지 만수무강하시기를.”

졸지에 천마와 부부 취급을 받은 문평의 턱이 딱 벌어졌다. 그냥 부부 취급만 받은 것도 아니고, 애꿎게도 공경받을 노부모 취급까지 한꺼번에 받아 버렸다.

그가 항의하기도 전에 곽진무는 허공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천마지공은 천마지공이되 혁련상의 천마지공이 아니라 옛 천마지공을 익혔던 문평은 그가 도무지 어디로 사라졌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뭐가 이렇게 자꾸 기정사실이 되냐고. 난 이 사람이랑 살겠다는 이야기 따윈 한 번도 안 했다니까!’

곽진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마음에 걸린 문평은,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듯 숨이 턱 하니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자신과 천마 사이에 예상치 못한 진전이 있다는 사실은 본인도 자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하나둘씩 관계에 못을 박는 일이 생길 때마다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길을 잃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잘못된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따위는 아무것도 없는데, 미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예정되어 버리는 현실이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의 의지를 강제하는 이러한 상황은 문평의 마음에 적지 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은근히 사방을 조여 오는 압박에도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데, 천마는 그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모든 일을 빠르게 밀어붙였다. 그 때문에 문평은 뒤를 쫓기는 듯한 압박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런 천마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문평은 천마가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뜻 그에 대한 답을 되돌려 줄 수 없었다. 본인 스스로도 해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이 싫은 것은 아니야. 결코 그렇지는 않지만……. 정말 답답하군. 내 마음을 내가 모르겠으니.’

제자를 보내고 다시 한가로워진 천마는 누대의 난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문평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홀로 깊숙한 한숨을 쉬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운데 이를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문평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천마는 한순간도 그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뭘 그리 멀찍이 서 있는 게냐? 이리 가까이 와라. 가까이 오면 누가 잡아먹는다던?”

남의 속을 들끓게 만들어 놓고도 시치미를 뚝 뗀 천마가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며 문평에게 손짓했다. 그의 경쾌한 부름에 문평은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겨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장하의 강바람이 누대를 타고 올라 천마의 옷깃을 흔들었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이 바람결을 타고 흐르다 문평의 뺨에까지 와 닿는다. 간질간질하고 매끈한 그 감촉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문평은 손을 들어 뺨을 간질이는 상대의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문평의 손가락에 천마의 긴 머리카락이 휘감겼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그의 머리카락은 명주실인 양 매끄러운 윤기를 빛낸다. 가만히 그 머리카락을 감상하던 문평은 눈을 들어 천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천마는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팔을 뻗어 문평의 허리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그의 다리 사이에 서게 된 문평은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무릎을 조이는 천마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마음에 드나 보지?”

문평이 가까이 다가와서도 머리카락을 쥔 손가락을 놓지 않고, 오히려 손을 뻗어 더 많은 가닥을 감는 것을 지켜본 천마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그의 고운 눈매에 웃음이 잡히자 그 형상이 예쁜 반달형으로 변했다.

‘무슨 놈의 영감이 이렇게 애교 있는 눈웃음을 짓는 걸까?’

사내의 넋을 빼놓을 듯한 고혹적인 미소에, 문평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촉이 정말 부드럽습니다. 예전에 말씀하신 대로 제 것과는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타고난 것이 다르니 어쩔 수 없지.”

천마는 툭하면 문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지만, 문평이 천마의 머리카락에 손댄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천마는 너그럽게도 문평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기꺼이 허용했다. 대신에 그는 자신도 문평을 허벅지에 앉히고 문평의 몸을 마음껏 어루만졌다.

“그런데 웬일로 이렇게 얌전하지? 바깥에서 어루만지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문평을 품 안으로 끌어당기면서도 그가 적지 않은 앙탈을 부릴 거라 예견했던 천마는, 의외로 순순히 반응하는 문평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의 질문에 문평은 약하게 웃었다. 별 새삼스러운 걸 다 묻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우리를 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마영들과 참사검께서도 자리를 떠나셨으니 이제 인근에 있는 사람이라곤 우리 둘뿐 아닙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제가 뭐라고 해봤자 말을 안 들으실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요즘 들어 천마의 수법은 한층 더 교활해졌다. 문평의 발언권이 세지면서 예전처럼 단순히 윽박지르는 것으로 뜻하는 바를 이룰 수가 없게 된 천마는, 이제 방법을 달리해 불평을 토할 만한 여지를 원천 봉쇄함으로써 그의 항의를 억눌렀다. 문평이 강해지는 만큼 천마도 진화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의 말에 천마가 다시금 웃더니 두 손으로 문평의 뒷덜미를 잡고 그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마주 댔다. 정으로 쪼아 낸 것처럼 섬세한 콧날이 문평의 코와 맞닿았다. 모공조차 느껴지지 않는 깨끗한 피부가 목화솜보다 더 보드라웠다.

“너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은근슬쩍 코끝으로 문평의 코를 비비며 천마가 다정히 속삭였다.

‘이 사람이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걸까?’

문평은 의아한 마음으로 그의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슬쩍 입술을 움직여 문평의 아랫입술을 빨아 당겼던 천마는 온후한 태도로 문평의 두 뺨을 다정히 감싸 쥐었다.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릴 하는 거냐.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몰라도 네 말이라면 틀림없이 듣는다. 네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있는데, 그것을 내가 외면한 적이 있었더냐?”

실제로 그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지라 문평은 냉큼 사실을 사실대로 고했다.

“싫다고 하는 말은 거의 안 들으시잖습니까. 그만하라고 해도 모르는 척하시는데요.”

“말했지 않느냐. ‘진심으로’라고. 너는 입으로는 거짓말을 곧잘 하니 그런 말은 가끔 들어주지 않을 때도 있다.”

쾌감 때문에 진짜로 죽을 것만 같아 울부짖으며 그만하라고 했던 때도 있었던 문평은, 기막힌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거짓말 같으냐?”

천마는 부드럽게 혀를 두드려 문평의 입술을 열었다. 그가 혀를 내밀어 입술 사이를 두드리자, 문평은 길들여진 대로 입술을 벌리며 그를 받아들였다.

이럴 때의 문평은 정말 잡아먹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무심결에 입을 벌린 후에 뒤늦게 후회하는 것도 귀여웠고, 겁먹은 것처럼 움찔움찔하면서도 절로 가빠지는 호흡은 울부짖게 만들어 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했다.

“정말이라니까. 네가 믿지 않는다고 해도 이 말은 사실이다. 난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

천마는 상대가 믿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는 이 품 안의 요령 없고 단순한 연인이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문평이 만약 진심으로 애원을 한다면, 천마는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사랑하는 연인의 애원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이렇듯 어리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을 말이다.

“단, 그 청원은 아주 섬세하게 이뤄져야 한다. 입으로 하는 말만으로는 진심인지 아닌지 알기 어려우니, 좀 더 솔직한 방식으로 나를 설득해야겠지. 다행히도 너에겐 나를 설득할 수 있는 수단이 수없이 많다. 정말 원하는 게 있다면 요령을 터득하거라. 그 요령을 제대로 깨닫는 것만으로도 너는 무소불위의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천마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충고를 건네며 문평을 더욱 깊게 끌어안았다.

듣기에 아름다웠어도 그 말인즉슨, 원하는 바가 있다면 기꺼이 베갯머리 송사를 하라는 뜻이다. 천마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문평은 허탈하게 웃음 짓고 말았다.

‘나 참. 그러면 그렇지. 난 또 무슨 소리를 하나 했다.’

어이없이 일그러지는 그 입술을 천마의 입술이 덮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문평은 천마가 실없는 소리를 한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사실 천마는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는 거였다.

그는 정말로 문평이 원한다면 뭐든지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랑에 빠진 군왕이 어리석어지는 길을 그 또한 착실하게 거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천마를 홀린 미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했다.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성 하나를 기울게 하고, 소원 하나로 일국을 망하게 만들 수도 있건만 ‘하룻밤만 혼자 자게 해달라고 빌면 과연 허락해 줄까?’ 따위의 시시한 소원밖에 못 떠올리는 문평은 소박하기 그지없는 사내였다.

〈8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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