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장
“이것이 정도맹이 돌린 연판장의 사본입니다.”
포영의는 호완평이 앉은 서탁 위에 한 필의 두루마리를 올려놓았다. 호완평은 미간을 찌푸리며 두루마리를 집어 봉인을 풀어 보았다.
구파일방의 이름을 필두로, 중원에 적을 두고 있는 문파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는 게 보였다. 대개는 정파지만, 몇몇은 사파였고 정사 중간의 문파들 역시 적지 않게 이름을 등재하고 있었다. 적을 자리가 모자랄 만큼 빡빡한 서명 밑에는 수장들의 직인을 찍은 공간도 있다.
사람의 손으로 옮겨 적은 필사본이라 그것까지 베껴내진 못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기엔 충분하다.
“이 정도면 거의 강호 전체라고 봐도 되겠군. 이 일에서 발을 뺀 문파를 오히려 더 찾기 힘들 정도야.”
구파 중 곤륜파의 이름이 빠졌다는 것이 의외라면 의외일까. 하지만 고작 문파 하나가 빠진 것 정도로는 기울어가는 대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정도맹이 적극적으로 무림 총회의를 결의했으니 정파들이 대거 연판장에 이름을 올릴 거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정사지간의 문파들까지 적으로 돌아선 것은 예상했던 바였음에도 타격이 컸다.
“역시, 하북혈사가 원인인가?”
호완평은 착잡한 시선으로 포영의를 바라보았다. 포영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건으로 실질적인 피해를 본 자들은 대부분 정사지간의 중소 문파들입니다. 배후로 지목된 우리에게 복수심을 불태운다고 해서 이상할 일은 없지요.”
“그래. 그렇겠지. 게다가 사부께서 실종되었다는 소식까지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으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어찌 놓치겠어?”
호완평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조용히 말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교는 뒷산의 호랑이였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알지만 아무도 건드리길 원하지 않는, 무섭고 외경스러운 생물. 강호인들은 마교의 존재를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양 눈을 감고 살았다. 감히 도발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수로 그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한데 고작 몇 달 만에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마교가 먼저 뒤통수를 쳤다고 믿게 된 그들은 독이 잔뜩 올랐고, 가장 무서운 존재이던 천마의 실종을 호기로 여겼다.
불련산 기슭에서 달아난 곽효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르게 거짓 정보를 흘렸다. 그의 술수 때문에 기린패와 관련된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된 마교는 하북혈사의 배후로 지목받아 강호 공적이 되었다.
“무생교의 이름으로 곽효가 벌인 짓까지 우리가 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북 한가운데에서 진무와 호위대를 목격한 사람이 적지 않으니 우리가 어떤 대답을 내놓아도 변명으로만 여겨질 겁니다. 그들에게야 우리보다는 백우경이 훨씬 믿을 만한 존재지요. 명문정파 출신이자 천하의 협객인 옥기린이 직접 목격했다는데, 그를 의심할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곽효의 정체는 이미 들통났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마교뿐이다. 대외적으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으니 여전히 백우경 행세를 한다고 하더라도 거리낄 것이 없다.
불행하게도 마교에겐 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내세울 만한 증거가 없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잃은 파면객을 증거라고 하기엔 곽효가 그간 강호상에 쌓아 둔 명성이 너무나도 확고했다.
“조세화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 진무가 숨겨 두었다고 들었는데.”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직도? 시간이 꽤나 지난 일 아니던가?”
“우직한 사람들은 그래서 문제지요. 유연하질 못하거든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졸지에 마교의 간자가 된 마당입니다. 모함을 한 사람은 주군으로 섬기던 의형제였죠. 그런 상황을 그처럼 완고하게만 살아온 자가 어찌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안됐군. 제대로만 이용한다면 제법 쓸 만한 패였을 텐데.”
“의외로 별 도움이 안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곽효의 모함이 그럴듯하게 먹혔으니까요.”
톡. 톡. 호완평은 손가락 끝으로 서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포영의는 딱딱하게 굳은 뒷목을 주무르며 뻑뻑한 눈을 깜빡였다. 지난 며칠간 그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중원의 판도를 따라가느라 잠도 못 자고 일을 거듭했다. 그러다 보니 피로가 쌓여 머리가 무거웠다. 중요한 의논을 하는 중인데도 깜빡깜빡 정신을 놓게 되는 것을 보면 체력까지 바닥이 난 모양이다.
“진무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름대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던 호완평이 한참 만에야 물었다.
“사부님을 찾느라 아직 하북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북은 이미 호랑이 소굴일 텐데?”
“들키지 않도록 변복을 하고 각 분타에 나눠서 흩어진 상태입니다. 아직 비밀 분타까지는 적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으니 당분간은 안전합니다.”
불리하기 짝이 없는 현 상황에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그것은 점조직으로 조직된 중원의 비밀 분타들 중 정체가 발각된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중원 분타에는 마교 전력 중 3할 이상의 세력이 흩어져 있는데, 만약 그곳들이 각개격파 당했다면 그렇지 않아도 중과부적인 상황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철수시켜라.”
“……예?”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포영의는 호완평이 한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여러 가지로 염두에 둘 일이 너무 많다 보니 한 가지 일에 집중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포영의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있는 호완평은, 참을성 있는 태도로 다시 한번 명을 확인시켰다.
“그들을 철수시키라고 했다. 진무가 데려간 호위대의 일원들은 우리 교의 정예들이다. 뜻 없이 소모하기엔 너무 큰 전력이지. 각자 흩어져 본산으로 돌아오라고 전해라. 물론 진무도 같이.”
“아직 사부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사라지셨으니 도움이 필요하실지도 모르는데요.”
호완평이라면 틀림없이 사부를 찾으라고 할 줄 알았다. 설사 호위대 전체가 전멸하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그답지 않은 명령에 당황한 포영의는 그의 결정에 대한 재고를 주장했다.
호완평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도움이 필요한 건 그분이 아니라 우리니까.”
“사형?”
“그동안 우리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분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으신 분이야. 사부께서 자리를 비우시고 나니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간 진정으로 보호를 받고 있던 존재는 사부가 아니라 우리였어.”
포영의는 호완평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본인도 요 며칠 사이에 절감하고 있는 일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사람 하나일 뿐인데도 천마의 그림자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그의 존재 여부만으로 교의 위상이 달라질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강호가 마교를 경외했던 것도, 마교가 천하제일세였던 것도, 모두가 사부께서 우리와 함께 계셨기에 가능했던 거였다. 그분이 자리를 비우셨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지. 평소에는 꼬리를 감춘 개처럼 엎드려 있던 놈들까지도 그분의 빈자리에 승냥이 떼처럼 날뛴다.
우습고 가소로운 노릇이지. 비참한 일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를 합쳐도 그분 한 분의 무게를 이길 수 없을 것 같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사부께선 보기 드문 거인이시니까요.”
포영의는 씁쓰레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호완평이 가만히 웃었다. 조용하기 짝이 없는 온화한 미소였으나 웃고 있는 사내의 눈은 매서운 투지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잊고 있는 게 있다. 그분에게도 제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범의 새끼는 범일 수밖에 없음을 저 어리석은 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그분이 안 계셔도 마교는 마교고, 마중사기는 여전히 마중사기다. 나는 그들이 잊고 있었던 바를 확실하게 뼈에 각인시켜 줄 생각이다.”
호완평은 지독히도 천마를 닮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언제나 침착하고 점잖기만 하던 남자가 조용한 투지 속에서 자신의 기질을 드러냈다. 지금의 호완평은 혹여나 스승의 그림자라도 밟을까 전전긍긍하며 공손하게 뒤로 물러나 있던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오만한 고수이자 자신감 넘치는 지배자였고, 자신의 패기를 조절할 줄 아는 현명한 군주이기도 했다.
포영의는 그러한 호완평의 모습을 보고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역시, 그랬던가? 천마라는 그늘이 없으니 호완평의 모습이 더욱 잘 보였다. 삼가고 감추는 모습이 아니라, 그가 가진 본성 자체를 정확히 읽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보니 천마가 호완평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한 것은 단지 그가 대제자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천마는 그에게 지배자의 자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봤기 때문에 그를 뽑은 거였다.
참모의 자질밖에 없는 자신이나, 지나치게 자유로운 기질이 강한 곽진무, 그릇이 작은 초교연에 비해 호완평에게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교를 이끌 의지가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사형?”
작은 일을 꾸미는 것은 그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큰일을 결정하려면 사형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 호완평이 마음속에 뜻하고 있는 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포영의는 진지한 태도로 그의 진의를 캐물었다.
“영의야.”
“예. 사형.”
“우리 우선, 교의 반도를 치자.”
잠시 뜸을 들이던 포영의는,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다시 한번 물어봤다.
“교의 반도라니, 곽효를 직접 치잔 말씀이십니까?”
“그래. 곽효를 친다.”
호완평은 우직한 성품 때문에 갖게 되는 선입견과 다르게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불가능한 일을 막무가내로 주장하지는 않을뿐더러, 사태를 판단하는 눈이 아주 냉철하다. 그러니 그가 한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의 말에는 언제나 이면이 있었다. 단순한 표현 속에 숨겨진 예상 밖의 측면이…….
거기까지 생각하자마자, 포영의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번득이며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호완평과 마찬가지로 눈빛이 서늘해진 그는 그 생각을 음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곽효와 무생교의 존재를 부각하자는 말이로군요. 말해 봤자 믿지도 않을 일은 적당히 덮어 두고, 실제로 증거가 있는 일만 터트리자는 거지요?”
곽효가 백우경이라는 사실에 연연해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곽효는 실제로 존재하고, 그가 무생교를 움직였다는 흔적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백우경이 곽효라는 주장은 많은 반발을 살 테지만, 마교의 반도인 곽효라는 자가 무생교를 이끌었다는 주장은 어렵지 않게 먹혀들 터였다.
“그래. 그렇다. 무생교의 일에 대해서라면 우리 역시 적지 않은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이 우리에게 무기가 되어 줄 거다.”
“맞습니다. 그에 더해 우리에게는 당문이 있죠. 그들의 비밀을 대외로 터트리면 무생교의 존재가 새로운 논란거리로 떠오를 겁니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겠군요. 무생교의 정체가 확연히 드러나면 우리에게 뒤집어씌웠던 누명은 희미해질 거고, 하나였던 적이 졸지에 둘로 늘어나니 무림 연합의 단결도 느슨해질 겁니다. 우리에게든, 무생교에게든 어부지리를 노리게 내버려 둘 순 없으니 틀림없이 주의가 분산되겠죠. 상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교묘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만, 괜찮은 방법입니다.”
포영의는 순식간에 몇 가지의 구체적인 방안을 생각해 냈다. 현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면, 심지어는 마교의 전력 중 일부를 중원에 공식적으로 주둔시키는 것조차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판장을 잠시 가져가도 괜찮겠습니까?”
쓸 만한 수법을 몇 개 떠올린 포영의가 호완평을 향해 눈을 빛냈다. 피곤에 지쳐 축 늘어졌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갔는지, 순식간에 생기발랄하게 얼굴이 피어난 그는 당장이라도 일에 착수할 듯 서두르며 몸을 움직였다.
“물론 가져가도 괜찮지.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만 묻자. 영의야, 네가 제대로 잔 게 언제 적의 일이냐?”
호완평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연판장을 움켜쥐었던 포영의는, 그의 질문을 듣고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제대로 잔 적이라?’
곰곰이 따지고 보니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만 벌써 칠 주야 째다. 그 전에도 계속 집무실에서 새우잠이나 잤을 뿐이니, 생각해 보면 마지막으로 침상에 몸을 눕힌 것은 벌써 한 달도 전의 일이었다.
“한 한 달쯤 된 것 같습니다.”
포영의는 굳이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그가 고생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간 잠을 못 자고 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고생을 모른대서야 말이 되지 않으니 티를 내면 냈지 숨길 이유는 없다.
그의 당당한 대답을 들은 호완평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낯빛이 백지장이더니만, 다 원인이 있었던 거다. 이놈은 명색이 무인인 주제에 몸 관리도 제대로 안 하는 모양이었다.
“파리하기 짝이 없는 혈색을 보니 운기조식조차 제대로 안 하는 모양이구나. 네가 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혹사하면 몸이 축나기 마련이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과로를 하는 거냐?”
고생한다고 치하는 못 해줄망정 꾸지람만 내려오자 반발심이 생긴 포영의가 대놓고 반박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사형께서는 제가 좋아서 과로를 한다고 보십니까? 할 일은 많고, 일을 처리할 손이 적은데요.”
“넌 네가 제갈무후라도 되는 줄 아느냐? 이러다가 네게 무슨 사달이라도 나면 그 뒷수습을 대체 누가 할 수 있단 말이냐? 나는 너를 오래 두고 부려먹어야 한다. 그러니 잔소리 말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라. 마영을 붙여 놓을 테니 침소에 일을 갖고 들어갈 생각 따윈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게다.”
“사형! 하루 일이 밀리면 이틀을 고생해야 합니다. 제 사정 다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이러다 사제 잡을 것 같아서 그런다. 요즘은 동경도 안 보고 사는 게지? 처소로 돌아가면 동경이나 한번 들여다보거라. 그 곱던 얼굴이 반쪽이 됐다.”
떠오르는 발상들이 너무 많아 당장이라도 일에 착수하고 싶은데, 반대편에서 손을 잡은 호완평이 강경한 눈빛으로 그를 저지했다.
“내친김에 이것도 압수!”
그는 기어이 포영의가 쥐고 있는 연판장까지 빼앗아 들고 엄격하게 얼굴을 굳혔다. 포영의는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호완평을 바라보았다.
“정 연판장이 필요하다면 내일 아침 일찍 받으러 와라. 마영에게 제대로 쉬었다는 보고를 받는다면 연판장을 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루 더 급가를 줄 것이다.”
“너무 치사하신 것 아닙니까? 남의 일거리를 인질로 잡으시다니요?”
“그러는 넌 너 자신을 인질로 삼고 있지 않으냐? 딴소리 말고 어서 들어가 자라. 괜히 보는 사람 마음까지 심란하게 하지 말고. 이 말은 사형이 사제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교주가 군사에게 하는 말이다.”
호완평은 훠이 훠이 손을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뱉었다. 예전처럼 단순한 사형제 간이었다면 축객령을 받아도 뻗대고 앉아 있었겠지만, 교주가 군사에게 직접 내린 명령이다 보니 무시할 명분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포영의는 예를 표하고 내호각에서 물러 나왔다. 소리 없이 뒤를 따르는 기척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호완평이 정말로 마영을 뒤에 붙였나 보다.
‘하긴, 저 사람. 빈말로 남을 위협하는 사람이 아니지. 참으로 못 말리겠군.’
혼자 허탈하게 웃어 버린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 상황에서 반나절이나 쉬어 버리면 일이 밀릴 대로 밀리겠지만, 호완평의 뜻밖의 배려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살다 보니 정말 별일이 다 있었다. 사부께서 곁에 없어서 그런가? 저 사람이 웬일로 다른 사람까지 신경을 쓴다.
상대의 작은 행위에도 일희일비하는 것이 짝사랑이라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이 설렌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씁쓸한 고소苦笑 뿐이다. 자신의 이성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마음을 제 심장이 품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
그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술렁거림이 여지없이 시작되었다. 웅성웅성하는 귓속말 소리가 문간부터 번지더니 종내에는 안쪽으로까지 그 소란이 번져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마저 궁금함에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쪽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문평이 아니라 천마다. 산에서 내려왔음에도 역용을 하지 않은 천마는 맨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었다. 덕분에 그들은 어딜 가도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평소처럼 으리으리하게 차려입은 것도 아니고, 산골 포목점에서 산 소박한 흑의를 입고 있을 뿐인데도 그 인물은 빛이 바래지 않았다. 오히려 차림새가 검소하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 사람은 왜 옷을 소박하게 입으면 입을수록 지체가 높아 보이지? 화려하게 차려입었을 때는 입성이 입성이다 보니 그러려니 했는데, 저렇게 입고 있으니까 꼭 잠행하는 황족 같잖아. 그러니 사람들이 다들 눈이 튀어나와 이쪽만 바라보지.’
황족인 것은 아니지만 나름 잠행을 해야 하는 처지인데도, 지나치게 시선을 끄는 천마의 외모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던 문평은 불만이 적지 않았다. 어딜 가나 따라다니는 시선들 때문에 꼭 감시라도 당하는 듯한 기분이다.
아무리 천하가 넓다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그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텐데도 천마는 개의치 않았다. 오랜만에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다 보니 역용을 하기가 못내 싫은지, 심지어는 생긴 거라도 좀 못생기게 바꿔 놓자는 문평의 청조차도 냉담하게 거절했다.
“2층으로 안내해 주겠나?”
점소이가 그들을 보고 다가오자 문평은 재빨리 원하는 바를 말했다. 차려입은 옷차림으로 봐선 2층에 어울리는 손님들이 도저히 아니지만 천마의 인물은 황금 이상의 마력을 가지고 점소이를 설득했다.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숙인 점소이는 그들을 2층으로 안내했다.
그나마 2층으로 올라서고 나니 1층에 비해 시선이 덜해졌다. 나름대로 돈 있고 체면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천마에게 눈이 휘둥그레져도 남들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듯했다.
따로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바깥이 내다보이는 제일 좋은 창가 자리에 앉게 된 문평은 새삼 미모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가 만약 혼자 왔더라면 이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웃돈을 얹어 줘야 했을 텐데, 천마는 오로지 얼굴 하나만으로 그 특혜를 차지하니 미모라는 게 의외로 돈이 되기까지 한다.
“뭐, 뭐, 뭘 드시겠습니까? 손님?”
그들을 안내한 점소이는 아직 볼에 여드름도 가시지 않은 애송이였다. 나이는 어려도 눈은 제대로 박혔는지 내내 천마의 얼굴을 훔쳐보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송자주松子酒가 있으면 한 병 갖다 주고, 구운 오리 한 마리와 어향육사를 가져오너라.”
소박하게 차려입은 김에 서민 놀음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천마가 그답지 않게 간단한 식사를 부탁했다.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송자주 한 병에, 구운 오리 한 마리. 그리고 어향육사 한 접시.”
천마에게 말을 두 번 시켰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에 문평은 얼른 끼어들어 주문을 확인시켰다. 핑곗김에 다시 한번 천마의 목소리를 들어 볼 요량이었던지, 눈에 띄게 아쉬운 얼굴을 한 점소이는 너털너털 주방으로 내려갔다.
이제는 하다 하다 저 어린것까지 홀려놓다니. 문평은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천마를 흘낏 바라보았다.
“……정말 이렇게 다녀도 되는 겁니까?”
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 불쑥 문평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뭐가 불만인데? 천마는 줄곧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문평을 향해 서늘하게 웃으며 물었다.
“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냐?”
천마는 무슨 수배자라도 되는 것마냥 불안해하는 문평의 속내를 뻔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문평은 천마라는 이름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중원 한가운데에 홀로 떨어져 있다고 한들 설마하니 내가 개처럼 쫓길까? 문평의 무공도 제법 쓸 만해졌으니, 그가 거치적거리지만 않는다면 독보강호쯤이야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그렇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도 너무 불편합니다. 차라리 윤승효의 모습으로 계실 때가 시선을 덜 끌었던 것 같습니다.”
남의 이목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문평은 천마를 향해 푸념을 늘어놓았다. 윤승효의 모습은 워낙에 특징적이다 보니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그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그러다 보니 감탄하는 시선이나 동경하는 시선이 따라오긴 해도 상대의 정체를 탐색하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은 거의 없었다.
“제대로 쫓아오라고 맨얼굴을 드러낸 건데, 아무도 안 쫓아오면 섭섭하지. 보아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입질이 올 것 같다. 조급하게 굴지 말고 기다려 봐라.”
천마는 느긋하게 말하며 창밖을 확인했다.
‘뭐? 누가 쫓아오고 있다고?’
지나치게 이목을 끌고 있는 천마 탓에 신경 써서 주위를 살폈음에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문평은 천마를 따라 목을 길게 뺐다. 어디요? 누가 쫓아오는데요?
“어이구, 엇차. 이놈이 늙은이를 괄시하네. 내 일행이 여기 위에 있다니까 왜 자꾸 빽빽거려? 이놈아, 난 엄연한 손님이라니까?”
“이 냄새나는 거지가 어디서 먹히지도 않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글쎄, 2층은 너 같은 거지새끼가 드나들 만한 장소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정말 경을 치고 싶어서 그래? 식은 밥 한 덩이 정도는 내줄 테니까 뒷문으로 오라고!”
“허. 어린것이 입담은 더러워도 인심이 나쁘지 않아 봐준다. 안 그랬으면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 놓았을 게다.”
“빨다 만 걸레 같은 늙은이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다리몽둥이를 어쩌고 어째? 어? 어어어? 거기 안 서?!”
“늙은이 괄시 마라. 너는 영영 안 늙을 것 같으냐? 가시울타리로 막아도 돌아서 오는 게 세월이다.”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창밖이 아니라 아래층에서다. 뭔가 우당탕거리고 쿵쾅거리고, 여하간에 장난이 아닌 소음이 들리더니 투덕거리는 대화가 위층까지 울려 퍼졌다. 창밖을 내다보던 문평은 아래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요란한 시비에 시선을 돌렸다.
먼저 걸걸한 노인네의 목청 좋은 항의가 들리고, 그 뒤를 그들을 안내했던 어린 점소이의 새된 고함이 따라왔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그들의 실랑이는 둘 중 하나의 일방적인 실력 행사로 종결되었다.
대화의 내용으로 눈치챘지만 먼저 2층에 도달한 사람은 점소이와 실랑이를 벌이던 늙은 거지다. 노구를 이끌고 어린 소년조차 쫓아오지 못하도록 날렵하게 2층으로 뛰어 올라온 늙은 거지는 정말로 일행을 찾는 듯 둘레둘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창가에 앉은 천마를 발견하고 히죽 미소 지었다.
“이 늙은 영감탱이가 진짜 뜨거운 맛을 보려고!”
방심했다가 놓쳤다고 생각했는지 노인네의 뒤를 헐레벌떡 쫓아오며 점소이 소년이 이를 갈았다. 계단을 다 올라온 소년이 노인의 추레한 뒷덜미를 잡아채려는 순간, 미꾸라지처럼 교묘하게 그 손에서 벗어난 늙은 거지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어, 어어?”
노인이 사용한 보법이 취팔선보取八仙步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의 움직임이 남다르다는 사실만큼은 똑똑히 알아보았던 점소이 소년은 당혹해하며 왈칵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까는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같은 일을 두 번씩이나 겪고 나니 슬슬 감이 왔다.
점소이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노인네의 전신을 훑었다. 거지 노인은 듬성듬성 빠진 합죽한 이를 드러내며 흘흘 웃음을 흘렸다.
“내 일행 저기 있다. 그러니 괄시 말고 주문한 음식이나 재빨리 내오거라.”
늙은 거지는 문평 일행을 정확히 가리키며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그의 태도가 워낙에 자연스럽다 보니, 지켜보던 문평까지도 저 노인이 자신의 일행이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점소이 소년은 본래부터 범상치 않은 신분으로 보였던 문평 일행을 거지 노인이 가리키자 움찔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천마의 외모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려하긴 했지만, 그 엄청난 외모로도 그들이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가릴 순 없었다. 문평은 허리에 박도를 매고 있었고, 천마는 풍채 자체가 워낙 뛰어나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도 검은색의 무복이다.
‘젠장, 이 늙은이도 무림인이었군.’
점소이 소년은 뒤늦게 자신이 무림인을 상대로 무례하게 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의 정체도 모르고 함부로 대했으니,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박은 꼴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거지 노인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점소이를 응징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가 아니라 신경질적인 무림인에게 잘못 걸렸다면 벌써 목숨을 잃고 말았을 텐데 말이다.
“네, 네. 알겠습니다. 진작 말씀하시지 않고서요.”
밑바닥 생활을 오래 해온 점소이 소년은 눈치가 빨랐다. 그는 바로 돌변해 허리를 굽히더니 쏜살같이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늙은 거지는 거 보라는 듯 히죽 웃더니 보무도 당당하게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언제 마지막으로 씻었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 거지가 다가오자 주변으로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얼마 전 문평이 생사현관을 타통하고 났을 때 흘렸던 땀 냄새와도 비견될 만큼 어마어마한 악취였다.
거지라는 신분을 가진 자들은 본래 외양 자체도 볼품없다. 사지 멀쩡하고 헌앙한 거지에게 동냥을 줄 리 없으니, 나아 보이는 모습도 오히려 못나게 꾸며야 하는 게 거지들의 세계다.
늙은 거지는 그런 거지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띌 만한 존재였다. 키는 오 척이나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작달막했고, 아래위로 긴 얼굴은 좁고 협소했으며 남은 머리카락은 정수리에 한 줌 정도가 고작이었다. 검버섯이 가득 핀 얼굴은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이빨조차 성치 않아서 보는 사람이 절로 동정심을 느끼게 했다.
문평은 상대의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그 허리춤을 주목했다. 만지기만 해도 땟국물이 절로 묻어 나올 것 같은 누더기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늙은 거지의 허리에 묶인 것은 매듭을 엮은 새끼줄이다. 그에 더해 허벅지 위에 길이 잘 든 곤봉까지 늘어트리고 있으니 이는 영락없는 개방 제자의 행색이다.
‘개방의 팔결 제자라. 그럼 개방의 장로라는 이야기군.’
제일 먼저 매듭 수부터 세어 본 문평은 상대가 만만치 않은 고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경 수십만을 헤아리는 개방의 방도 가운데 팔결의 지위를 가지는 사람은 고작해야 열두엇에 불과하다. 십결은 개방의 방주를 뜻하고, 구결은 오로지 후개後丐에게만 허락되는 숫자니 팔결 제자들은 방주 직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떼같이 많은 숫자로 유명한 개방이지만 그들이 천하의 대방파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머릿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방도가 워낙 많다 보니 고수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그중에서도 장로급이라면 강호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고수들이다. 겉보기에 추레하기 짝이 없는 거지 노인이라도 함부로 경시할 수는 없었다.
“흘흘. 여기 앉아도 되겠소이까?”
느긋한 태도로 그들에게 걸어온 늙은 거지가 빠진 이 사이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천마가 누구라는 걸 정확히 아는지, 자유분방한 기풍을 자랑하는 개방의 고수답지 않게 제법 정중한 태도다.
천마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공섭물로 의자를 빼 주었다. 히죽, 헤픈 미소를 지은 늙은이는 사양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 덥석 앉았다.
‘천마가 낚으려고 했던 자가 바로 이 사람인가?’
문평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늙은 거지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거지들은 대개가 거지답게 생겼기 때문에 겉모습만 봐서는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다.
강호의 고수들은 독문 무기나 특유의 옷차림새 혹은 엄청나게 독특한 신체적 특징 등으로 구분할 수 있게 마련인데, 늙은 거지에게는 거지라는 특징 외에는 달리 알아볼 만한 것이 없어 정체를 추측하기 어려웠다.
“아이들이 교주의 종적을 찾은 것 같다고 소식을 보내왔을 때, 이 늙은 거지는 방의 정보망을 물갈이할 때가 된 건가 하는 의심을 품었소. 잘못된 정보가 걸러지지도 않고 윗선까지 고스란히 올라온 줄 알았거든.
인제 보니 실수한 것은 개목丐目들이 아니라 이 몸이었던 모양이오. 설마 하며 와봤는데 정말로 교주시라니. 흘흘흘. 늙은 눈이 호강하는구려.”
“개방의 정보가 생각보다 느리더군. 늦어도 어제쯤에는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거기에서 하루가 더 걸리다니.”
“그건 정보망 탓이 아니라 엉덩이가 무거운 노인네들 탓이라오. 교주께서도 겪어 보셨겠지만, 어디에서나 문제는 결국 늙은이들 아니겠소. 나이가 들어 양기가 입으로만 뻗친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조차도 왈가왈부, 지나치게 말들이 많지. 이 늙은이가 몸소 나서지 않았다면 아직도 입만 나불거리고 있었을 게요.”
천마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자가 그의 앞에서 늙은이를 자처한다. 그렇다는 건 상대가 천마보다도 나이가 많다는 이야기다.
오 척 단구에, 족히 천마에게 늙은이라 자처할 수 있는 나이 많은 노인네라. 확실히 개방에는 그런 조건에 걸맞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표의개漂義丐 신점구愼點丘. 그는 거의 백수白壽에 달하는 개방의 원로로 개방 장로 가운데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그는 현 개방 방주의 사숙으로 평생을 강호의 정의를 위해 헌신한 노협개인데, 그런 정파의 명숙이 웬일로 천마를 직접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개방에도 쓸모없는 늙은이들이 많은 모양이군.”
“흘흘흘. 몸이 늙었다고 마음까지 늙는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당장 눈앞의 교주께서도 이렇듯 독보강호 중이시니, 그 심정을 잘 아실 거라고 짐작하오.”
역시 오래도록 굴러먹은 늙은 생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천마가 개방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표의개는 온유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일침을 놓았다. 드러내는 칼날과 드러내지 않는 칼날의 대결 같았다. 평생을 적대적인 관계로 지내 온 사람들치고는 엄청나게 유연한 태도였으나, 역시 일말의 긴장감만큼은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점소이 소년이 차를 갖다주자, 천마는 슬쩍 냄새만 맡아 보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찻잔을 밀어내 버린다.
‘까탈스럽기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문평은 우선 표의개에게 차를 따르고, 자신의 몫으로도 한 잔 따랐다. 특별한 주문이 없다면 보통으로 내놓는 평범한 품질의 흑차가 구수한 향을 내며 김을 피워 올렸다.
“지금 개방이 걱정할 건 내 문제 따위가 아닐 텐데? 늙은이가 뭣 때문에 나를 찾아왔을지 익히 짐작하고 있으니, 시답잖은 염탐 따위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면 애초에 불러들이지도 않았을 테니까.”
“우리가 교주를 찾은 것이 아니라, 역시 교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거로군. 내 그런 게 아닐까 어림잡고 있었지.”
천마가 서늘한 태도로 말을 맺자 표의개는 호록호록 차를 마시며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천마는 서늘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다가 문평을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그가 무슨 뜻으로 쳐다보는지 몰랐던 문평은, 천마가 불만스러운 듯 찻잔을 툭툭 치고 있자 뒤늦게 눈치를 채고 그에게도 흑차를 따라줬다.
‘안 먹을 것처럼 굴더니 또 왜?’
아니나 다를까. 천마는 자신의 잔에 따른 차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시 표의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심본지. 기가 막힌 문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하오문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들었소. 듣자 하니, 개양에서의 일을 실제로 처리한 사람은 화협이 아니라 교주셨다고 하더군. 우리 쪽에 소식을 넣은 것도 교주 본인이셨고. 아니 그렇소?”
“맞는 말이다. 내가 개방에 연락을 넣었지.”
“왜 그러셨소이까?”
형형한 눈빛으로 묻는 표의개에게 천마는 태연한 태도로 답했다. 개양에서의 일이라면 예의 그 생강시 건이다. 그때의 일로 개방의 방도들이 무려 200명이나 희생됐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문평은 등줄기를 뻣뻣이 세우며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했다.
“당문을 믿을 수 없었거든. 그들만 보냈다간 살아 있던 아이들까지 죄다 죽일 거 같아서 말이지.”
천마는 스스럼없는 태도로 내가 너희를 이용했노라고 고백했다.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엿보이지 않는 그 얼굴을 표의개는 표정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러다가 진짜 개방과 붙게 될까 싶어 문평은 겁이 덜컥 났다.
한참 동안 천마를 바라보던 표의개는 문득 쓴웃음을 짓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거 참, 영광이로군. 다른 분도 아니고 교주께 그런 말씀을 들을 줄은 몰랐소. 우리 개방의 의기를 그토록 믿어 주셨다니, 이건 화를 낼 게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이군.”
그건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포권까지 하며 천마에게 머리를 숙였다.
“감사하오이다. 교주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 일에 대해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할 뻔했소. 실마리는 잡고 있었으나 도통 몸통을 잡지 못해 어두운 곳만을 헤맸는데, 교주의 도움 덕에 살아남은 아이들이나마 구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지극한 호생지덕이오.”
“나 역시 그럴 필요가 있어서 벌인 일이니, 개방의 감사를 받을 이유가 없다.”
개방은 역시 개방인가? 사소한 일로도 죽어라 하고 꼬투리를 잡는 당문과 달리 개방의 태도는 의연하기 그지없었다.
듣기로는 다른 문파들과는 달리 개방의 방규幇規는 오직 하나, ‘의를 숭상하라’라는 것뿐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의혈불사義血不辭라는 말이 어울리는 방파니, 개방의 방도들을 의개라 부른다 한들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소. 당문을 믿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대체 무슨 연유요?”
포권을 마친 표의개가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모르긴 몰라도 개방은 이 일 때문에 천마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표의개의 질문을 들은 천마가 서늘히 웃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저 남자는 빈정거리는 미소 하나만큼은 정말 일품이다.
“그렇게 묻는 것을 보면 개방도 따로 짐작하는 바가 있는 게로군. 그런 일을 굳이 내게 와서 물을 필요가 있을까?”
“단지 짐작만으로 처리할 수는 없는 일임을 교주께서도 아시지 않소? 우리에겐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오.”
천하에 이목이 깔렸다는 개방이지만, 그들조차도 때로는 남에게 정보를 구할 필요가 있었다. 정파 내부의 문제로 필생의 대적인 천마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이 괴로웠던지, 표의개는 편치 않은 표정으로 천마의 질문에 답했다.
“상대가 당문이 아니었다면 이렇듯 조심스럽지는 않았겠지.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심지어는 개방조차도 정파라는 허울에선 쉽게 발을 뺄 수 없는 모양이군.”
못마땅한 듯 천마는 낮게 혀를 찼다. 그러나 길게 심술을 부릴 생각은 없었는지, 의외로 순순히 입을 열었다.
“개방에는 신세를 진 것도 있으니 이번 한 번만은 대답해 주지. 당문이 개양 소가장의 일에 관련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납치된 아이들을 마비시킨 것은 질 좋은 앵속이었고, 앵속은 당문에서부터 나왔지.”
“아시다시피 당문에겐 그에 대한 변명거리가 있소. 그들이 앵속을 도둑맞았다는 것은 미리부터 알려진 일이었으니 말이오.”
“도둑맞은 게 아니라, 제 손으로 갖다준 거다. 멍청하게도 하수인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당문의 인사가 직접 갖다준 모양이더군. 딴에는 보안을 지키기 위해 한 짓이겠지만, 소가장에서 살아남은 아이가 그자를 알아보았다. 살인멸구조차 서슴지 않으려고 하기에 애를 숨겨야 했지.”
그 말을 들은 표의개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거무죽죽한 안색이 거의 시커메 보일 정도로 완전히 가라앉아 버린다.
“그 아이를 우리가 만나 볼 수 있겠소?”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냐, 아니면 물증이 필요하다는 거냐?”
“교주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객관적인 물증이 필요하오.”
“그놈의 물증 때문에 그 아이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게다가 그 일을 꾸민 것은 당문을 비롯한 정도맹의 수뇌부들이었지.
진심으로 물어보고 싶군. 개방 내에서도 그에 동조한 자가 없음을 자신할 수 있는 게냐? 섣불리 그 아이를 넘겼다가 너희 손에 물증을 잃게 되면 어찌 되는 거지?”
천마의 날카로운 질문에 표의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개방만큼은 절대로 안전하다고 주장하고 싶었으나, 요즘 들어 때때로 정보망이 흐려지고 중요한 정보들이 누락되고 있는 것을 보면 중간에 농간을 부리고 있는 자가 분명히 있었다.
“……다른 방도는 없겠소? 우리는 그들의 꼬리를 꼭 잡아야 하오.”
개양에서의 일로 개방 방도 이백이 죽었다. 하지만 그 숫자는, 강호를 휘감고 있는 암류를 뒤쫓기 위해 희생된 개방도의 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물경 오백. 제대로 된 무공도 없는 개목들까지 합해 개방이 잃은 방도의 숫자는 그토록 어마어마했다.
멋 모르는 사람들은 전 중원의 모든 거지가 개방의 방도인 줄 안다. 강호인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일반 거지와 개방도들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개방은 그래서 ‘십만 개방’이라는 거창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런 개방에도 오백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피해다.
방주뿐만 아니라 그 밑의 방도들까지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모두 독이 올라 있었다. 강호에 알려진 바대로 마교의 수작이었다면, 제일 먼저 마교로 달려갈 자들은 바로 개방도들이었을 것이다.
“무생교의 뒤를 캐고 싶다면, 제일 먼저 찾아봐야 하는 것은 흑마옥黑魔獄이다.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흑마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 공적들 가운데 풀려나 돌아다니고 있는 자들이 심심찮게 있다. 그에 관해서는 천면인호가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그에게 협력을 구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놈은 돈이 부릴 수 있는 귀신 중에서 가장 쓸 만한 귀신이거든.”
쓸 만하니까 문평을 두고 튀었던 그놈을 살려뒀던 거다. 천마는 결정적인 정보를 손에 쥐고서야 겨우 얼굴을 내밀었던 윤승효를 떠올리며 살벌하게 말했다.
자신의 명을 거역하고 튄 것도 모자라 문평을 곤경에 빠트렸는데, 그 죄로 겨우 다리 몽둥이 하나만 부러지고 말았으니 녀석은 정말로 운이 좋은 거였다. 녀석이 가져온 정보가 그토록 쓸 만하지 않았더라면, 다리 하나가 아니라 사지를 모조리 부숴놨을지도 모른다.
“역시 이 일에는 정도맹이 관련되어 있는 게요?”
정보 하나만큼은 천하에 꼽히는 개방이다 보니, 그들도 제법 많은 것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표의개는 착잡하기 그지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천마는 왜 자신에게 이런 걸 묻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차피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는 처지에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군. 더 알고 싶은 게 있다면 스스로 알아내라.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때마침 점소이 소년이 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표의개에게 저지른 실수에 크게 경각심을 가졌는지, 먼저 앉아 있던 사람들에 비해 그들의 음식이 더 빨리 나왔다. 숙수의 솜씨가 제법 나쁘지 않은 듯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침중한 안색을 하고 있던 표의개의 코가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계속해서 위엄을 지키고 싶은 눈치였지만,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거지로 살아온 근성이 그러한 체면을 모조리 무너트리고 말았다.
“흠, 흠. ……갓 만든 음식을 이렇듯 앞에 두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구먼.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이왕 같은 식탁에 앉았으니 내게도 한 젓가락 정도는 양보해 주면 안 되겠소?”
강호의 앞날을 걱정하는 명숙이었던 표의개가, 음식을 앞에 두더니 갑자기 보통의 거지로 돌아가 버렸다. 표의개는 정의파가 아니라 오의파汚衣派4)였기 때문에, 음식도 구걸하지 않은 것은 먹을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의 앞에 모처럼 막 만든 요리가 놓였으니 뱃속의 회충이 요동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안 되기는. 거지를 불러 놓고 적선을 마다할까? 원래부터 그쪽 때문에 시켰던 음식이다. 사양하면 내가 곤란하지.”
“그런 배려를 해주시다니, 이거 영광이오. 교주께 이런 대접을 받는 날이 올 줄은 미처 몰랐소.”
거지는 체면을 차리는 법이 없다. 그래도 표의개라면 개방의 장로인데, 사양하지 말랬더니 진짜로 사양을 하지 않는다. 표의개는 멀쩡한 젓가락을 놔두고 손가락으로 뜨거운 요리를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술은 병째로 마시고 요리는 손으로 마구 집어 먹었다.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경박한 모습이었으나, 원래부터 이럴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던 듯 천마의 태도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뜨겁지도 않은가, 저렇게 맨손으로 먹게?’
문평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덥석덥석 집고 있는 늙은 거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게걸스럽고 더러운 모습인데도 불쾌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와 같은 고수가 거지다움을 잃지 않는 것은, 그의 성품이 그만큼 소탈한 덕분이다. 게다가 그는 먹는다는 행위 자체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어 보는 맛이 나쁘지 않았다.
입에 먹을거리를 가득 채워 넣고 있던 표의개는 문평과 눈이 마주치더니 뭐라 뭐라 말을 하기 시작했다. 기름기로 번들번들해진 입술이 신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발음이 워낙에 불분명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머그라고 했소. 숙수가 솜씨가 아주 조아.”
표의개는 상냥하게도 문평에게 음식을 권하고 있는 거였다. 문평은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그의 손가락과 땟물이 묻어 얼룩덜룩한 음식을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많이 드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자신도 덥석 음식을 집어 먹을 수 있다면 참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문평은 아직 그럴 수 있을 만큼의 호연지기를 기르지는 못했다.
한 번 권한 것도 많이 권한 것인지, 표의개는 두 번 다시 권하지 않고 음식들을 먹어 치웠다. 커다란 오리 한 마리와 두 사람이 먹어도 될 만한 어향육사 한 접시를 모조리 비운 그는 술병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도 모자라 흑차까지 다 마셨다.
“흘흘흘. 좋은 대접 감사하오. 죽을 때는 순서대로 가는 게 낫다는 늙은이들에게 떠밀려서 여기까지 왔는데, 뜻밖의 환대에 거한 동냥까지 받았으니 세상사 새옹지마구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다른 늙은이들이 배가 아파 데굴데굴 뒹굴게요. 늘그막의 자랑거리를 만들어 주셔서 고맙소, 교주.”
배부르게 먹고 나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층 밝아진 안색을 한 표의개가 인사를 건넸다. 천마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여 그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표의개는 여전히 얼굴에 기름을 묻힌 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중에 무슨 뜻이 있어 새삼 독보강호를 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개방은 교주에 대해 걱정하지 않소이다. 이제껏 강호에 평화가 지켜진 것은 교주의 아량 덕분임을 잘 알고 있으니, 부디 그 덕이 마지막까지 이르기를 기원하고 있을 뿐이오.”
“구파일방의 충동질에 부화뇌동하지만 않는다면 나도 개방을 건드릴 생각은 없다. 할 말 다 했으면 가보거라. 지금부터 정신없이 바빠질 게 아니더냐.”
“부디 자비심을 가지시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량을 베푸시길.”
다시 한번 포권을 한 표의개가 그들에게서 떠나갔다. 의외로 개방은 천마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문평은 그야말로 기인奇人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표의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점소이! 이리 와 주문받아라.”
표의개가 떠나고 나자, 천마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더니 점소이 소년을 불렀다. 표의개가 아무런 해코지 없이 떠나자 안심되었던 모양인지 다시금 2층으로 올라와 알짱대고 있던 점소이 소년이 그의 부름을 받고 쪼르르 다가왔다.
“네, 손님. 부르셨습니까?”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하겠다는 듯 충직한 태도로 점소이 소년이 대꾸했다. 천마는 귀찮은 듯한 태도로 탁자 위를 가리켜 보았다.
“여기 있는 그릇들은 다 치우고, 찻잔도 모두 치워라.”
“예. 알겠습니다.”
“차는 몽산차를 내오도록 하고, 술은 고정공주, 요리는 백육조화소와 노화계를 내오거라.”
기다렸다는 듯이 천마가 줄줄이 시키는 음식들은 아까 주문했던 음식들과는 격이 다른 것들이었다.
몽산차는 사천四川 아안몽산雅安蒙山에서 생산되는 선차였고, 고정공주는 하북 지척에 있는 안휘성의 유명한 명주다. 백육조화소는 돼지고기를 정성 들여 끓인 뒤 기름을 걷어내고 십여 가지 조미료를 넣어 만들고, 노화계는 늙은 닭의 다리를 생강을 넣은 약주에 담갔다가 다시 튀겨 조리한다. 백육조화소와 노화계는 하북에서 잘하기로 유명한 요리들인데,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비싸기도 하지만 그 맛이 매우 빼어났다.
천마가 주문하는 모습을 본 문평은 홀로 치를 떨었다. 천마가 자기 먹으려고 시킨 음식들은, 아까 표의개에게 시켜 준 음식들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적선을 한 거였나? 해도 너무하는군. 사람이 치사하게 먹는 걸로 차별하다니!’
문평은 자신이 당한 일이 아님에도 분개했다. 잠깐밖에 보지 않았지만 표의개의 사람됨이 정의롭고 소탈해 큰 호감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와 같은 강호의 기인을 말 그대로 거지 취급을 했으니 문평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왕에 좋은 음식을 먹을 거라면, 여럿이서 같이 먹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문평은 은근한 태도로 천마의 치사함을 지적했다. 돌려서 말하고 있으니 그나마 지적이지, 그 속뜻은 완고한 비난이다.
‘이 녀석이 요즘 들어 부쩍 깐깐하단 말이지.’
천마는 눈썹을 휘어 올리며 문평을 건너다보았다.
제 딴에는 조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가끔가다 놈은 이렇게 잔소리에 가까운 말을 할 때가 있었다. 제자들이 하는 충언조차 귀찮게 여기는 그에게, 문평은 맹랑하게도 일이 있을 때마다 한마디씩 거들며 못마땅한 제 심사를 내비치곤 했다.
전전긍긍 자기 목숨에만 연연하던 모습에서 탈피한 것은 좋지만, 종종 이놈이 제가 뭔 짓을 하는 건지 알고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내가 편해졌나? 아니면 그냥 쉬워지기만 한 건가?’
평생 남에게 ‘잔소리’라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었던 천마는 문평이 하는 짓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발밑에서 쨍쨍대는 하룻강아지를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는 늙은 범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 진지하게 녀석의 목을 물어 볼까 고민하다가도, 진지하게 응시하는 까만 눈을 보고 있으면 화가 나기는커녕 기막힌 웃음만 나온다.
“늙은 거지 좀 먹여 보낸 게 그렇게 기분 나쁘더냐? 배불리 먹여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굶기는 게 낫다니, 의외로 마음 씀씀이가 야박하구나.”
천마는 문평이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
‘아니, 누가 굶기랬다고 이래? 좋은 음식은 같이 먹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한 건데?’
“누가 굶기자고 했습니까? 같이 먹자니까요. 정히 손때가 걱정됐다면, 한 접시씩 더 시키면 되는 거였잖습니까.”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문평을 바라보며 천마는 어이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오의파인 표의개에게 산해진미를 대접하겠다고? 그자가 동냥하지 않은 음식을 먹었던 것은, 그 음식들이 오의파의 기준에서도 별로 화려한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미주가효를 차려 놨었다면 그 늙은 거지는 감히 음식에 손도 못 대고 물러났겠지. 거지 동냥도 내미는 쪽박을 봐가면서 하는 게다.”
아. 그것도 그런가? 듣고 보니 천마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문평은 귀가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섬세한 배려가 느껴졌다. 겉보기엔 젊은 청년이라도 속은 늙은 생강이다 보니 작은 일 하나에도 생각하는 바가 차이가 있는 듯했다.
민망한 기분으로 고개를 몇 번 주억인 문평은 천마가 미간을 찌푸리고 자신을 바라보자 어깨를 움츠리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차 나왔다.”
네. 차가 나왔죠. 그러니까 왜……? 천마의 말대로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차는 금방 나왔다. 근방에 끽다거喫茶去로 유명한 백림선사柏林禪寺가 있어서 그런지, 쉽게 보기 힘든 상질의 차가 금방 준비된 것이다.
잠시 이해를 못 했던 문평은 천마가 다시금 찻잔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금세 알아듣고 찻잔을 채웠다. 천마는 문평이 찻잔을 채워 주고 나서야 차를 비웠다.
‘이건 또 무슨 짓이지? 나를 놀리려는 건가?’
문평은 의아한 기분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자꾸 안 시키던 차 시중을 들게 하는 게 이상했는데, 가만히 두고 보니 나중에는 차 시중만 시키는 게 아니라 술 시중도 시킨다.
자기 손으로 따라 마시면 될 걸 가지고 문평이 따라 주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잔을 채워 준 후에야 홀짝홀짝 맛을 보는 것이다.
새로운 괴롭힘 수법인가? 아니면 이 행동에도 무슨 깊은 의도가 있나? 도통 그 속내를 짐작하지 못한 문평은 고개만 갸웃거렸지만, 천마는 끝끝내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았다.
***
천마는 이제 형식적으로라도 방을 두 개 잡는 짓을 하지 않았다. 객잔 주인이 그 방은 침상이 하나뿐인 방이라고 난색을 표해도 끄떡없이 늘 방을 하나만 잡고 문평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거참, 인물은 출중한데 성미는 모진 주인일세. 종이라고 바닥에서 재우는 건가? 방을 잡을 때마다 객잔 주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그런 게 아니라고 굳이 변명할 수도 없어, 문평은 항상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객잔 주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천마는 문평을 절대로 바닥에 재우지 않았다. 같은 침상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베개조차도 같은 걸 사용한다. 그러나 잠을 제대로 안 재운다는 것만큼은 그들의 추측이 맞았다. 천마는 진짜로 문평의 잠을 안 재웠다.
요즘 들어 천마는 한층 더 색욕에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목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곽효를 잡으러 가지도 않고 마교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문평에게는 정처 없어 보이는 발걸음으로 길을 돌아다니다가 밤이 되면 객잔을 잡고 들어가 문평과 밤을 지새웠다.
덕분에 그는 어린 새색시마냥 밤이 무서워졌다. 저 멀리서 노을이라도 지기 시작하면, 괜히 울적한 마음에 눈물까지 핑 돌았다.
“여, 옆방에, 소리가 들리면, 흑, 아흑.”
쿵쿵, 벽에 등을 부딪치며 문평이 애원조로 속삭였다. 그의 머리가 벽에 부딪칠까 봐 한 손으로 뒤통수를 잡아 주고, 허리 아래로는 열심히 움직여 문평의 몸 안으로 파고들던 천마가 그 말을 듣고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어차피 옆방도 이곳과 같은 상황이니 상관없다.”
그쪽이나 이쪽이나 자기 일 하느라 정신없는 것은 마찬가지라며 그는 문평의 걱정을 일축했다.
“하, 하학. 하지만 신음 소리가…….”
천마의 말대로 옆방도 한창 밤일 중이라 여인의 감창소리가 희미하게 벽을 뚫고 들어왔다. 하지만 이쪽에서 나는 것은 여인이 아니라 사내의 신음이다.
세상에서 보기 드문 거대한 물건을 다리 사이에 품는 바람에 내장이 짜부라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있는 젊은 남자가 자칫하면 비명이라고 들릴 수도 있는 신음을 흩뿌리고 있는 것이다.
이 소리가 건너편으로 건너가면, 그들이 밤에 무슨 짓을 하는지 옆방 사람들도 알게 될 게 뻔했다. 옆방 사람들뿐인가? 객잔 주인이며 하다못해 점소이들까지 다 알아차릴 터였다.
이미 뼈저리게 겪은 일이지만, 그런 소문은 정말 말도 못 하게 빨리 퍼졌다. 아침이 되어 식사를 하러 내려가면, 전날의 일을 알게 된 사람들은 천마와 문평을 번갈아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 듯 수군거렸다.
“아니 그게 사실이야?”
“맞아. 내가 들었다니까…….”
그러고 나면 그들은 항상 천마를 바라보면서 끌끌 혀를 차곤 한다.
“쯧. 저 얼굴로 뭐가 모자라서 남색가가 됐을까? 무슨 피치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서 같은 이유로 문평을 걱정해 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 딴생각을 할 여유가 있어? 요즘 들어 이 조그만 머릿속에 생각이 부쩍 많아졌단 말이지.”
천마가 허리를 찔러 올릴 때마다 얇은 벽에 등이 부딪쳤다. 꼼꼼하게 지어 올린 가정집이 아니다 보니 가뜩이나 벽이 얇은데, 도끼질이라도 하듯 규칙적으로 벽을 쳐대니 시간이 지날수록 기둥까지 같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이러다가 벽이라도 넘어가면 어떻게 하지? 문평은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아래에서 쳐올리는 천마의 힘으로 볼 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문평이 불안하게 눈을 굴리고 있자 천마는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부러 괴롭히는 사내애처럼, 천마는 문평이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보는 걸 지나치게 즐겼다.
천마의 손이 문평의 무릎 안쪽을 파고들었다. 각이 지게 세워져 있던 무릎을 들어 자신의 허리에 감게 만들자 두 사람의 몸이 한결 가깝게 밀착되었다. 이렇게 자세를 바꾸니 문평의 몸 안에 성기를 찔러 넣기가 한층 더 수월하다. 천마는 몸 전체를 문평의 구멍 속으로 밀어 넣을 것처럼 힘차게 돌진해 들어갔다.
“아아악!”
그가 가장 느끼는 부분을 노리고 달려든 천마 때문에 문평은 숨넘어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찌걱거리며 울리던 마찰음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아앗, 아, 아프…….”
견딜 수 있는 자극의 한계를 뛰어넘자 문평은 줄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진짜로 아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플 만큼 격렬한 쾌감이 느껴지는 게 견딜 수 없었다. 몸 전체가 천마에게 범해지는 느낌이었다. 온몸의 감각이 오로지 한군데로만 쏠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뱃속을 꽉 채우고 있는 거대한 존재가 그를 지배했다. 천마의 성기가 거칠게 밀고 들어올 때마다 사지가 경련을 일으키고, 내벽 전체를 문지르며 빠져나갈 때마다 죽을 것만 같은 전율이 치닫는다. 문평은 무릎을 강하게 조이며 천마의 등을 끌어안았다.
천마가 깊게 고개를 숙여 문평의 입속을 탐욕스럽게 헤집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 번 파정을 하고 시든 문평의 것을 손으로 만져 주었다. 문평이 스스로 할 때보다 훨씬 더 기교 있는 손놀림으로 압박과 자극을 번갈아 주는 천마 때문에 문평의 것이 다시금 기력을 되찾았다. 천마의 손바닥에 용틀임하는 문평의 물건이 문질러졌다.
천마는 자신의 손아귀에 딱 맞는 적당한 크기를 귀여워하며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반들반들 검붉은 윤을 내고 있는 문평의 성기 끝이 잘 익은 과일처럼 달아올랐다. 살짝 부풀어 오른 요도의 입구에서 흰 탁액이 질금질금 흘러나온다.
좀 더 강한 자극을 바라는 듯 움찔거리는 요도 입구가 깜찍해 손톱 끝으로 슬쩍 긁어줬더니 문평이 내벽까지 조이며 길게 자지러졌다. 촉촉하고 따뜻한 문평의 몸 안이 너무 조여 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때 이른 사정을 할 뻔했다.
천마는 꿈틀거리는 욕망을 다잡으며 더 깊이 돌진했다. 반사적으로 허리가 튀어 오른 문평이 손톱을 세워 어깨를 할퀸다.
기어코 흘러내린 한 줄기 눈물이 문평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에 맺혔다. 그 눈물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깝기라도 한 것처럼 천마는 얼른 그것을 핥아 먹었다.
문평의 몸은 완벽했다. 처음에도 그럭저럭 쓸 만했지만, 자신의 취향대로 충분히 길들여진 현재는 환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조임은 훌륭하고, 수치심 때문에 억눌려진 반응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농염하게 익어 갔다.
본인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지만, 천마의 아래에서 음란하게 흐트러진 그는 이미 훌륭한 요부였다. 아프다고 하면서도 더 깊게 받아들이기 위해 허리를 움직였고, 사람을 감질나게 만드는 신음과 젖은 눈은 천마의 색욕을 치명적으로 자극한다. 밤새 붙들고 뒹굴어도 아침이면 아쉬움이 생겼다.
좀 더 강하게 그를 맛보고 싶었던 천마는 벽에 기대게 했던 문평을 끌어 내려 침상에 눕혔다.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그는 쌕쌕 숨을 몰아쉬며 천마를 끌어안았다.
가냘프게 떨리는 유실이 가슴 끝에 와 닿아 간질간질했다. 지켜주고 싶으면서도 부서트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렇게 온전히 갖고만 싶은 상대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천마는 문평의 두 손에 깍지를 끼고 힘껏 허리를 놀렸다.
바늘에 꽂힌 나비처럼 침상에 꽂힌 문평은 꼼짝달싹도 못 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깊이. 더 깊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의 행위에 문평의 호흡이 다급하게 쫓아왔다.
눈앞에서 현란한 색채의 홍수가 쏟아져 내렸다. 평생을 두고도 느껴보지 못했던 지독한 쾌감이 천마의 정신을 물들였다. 자신이 지금 안고 있는 상대가 문평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는 엄청난 열락을 느꼈다. 몸이 느끼는 쾌락 하고는 어딘지 다른, 좀 더 근본적인 곳에서 느껴지는 만족감이 그를 온전히 충족시켰다.
문평의 몸 안에서 천마의 성기가 정액을 토해 냈다. 그가 왈칵왈칵 정액을 토할 때마다 문평의 뱃가죽이 덩달아 움찔거렸다. 납작하게 올라붙은 단단한 배는 요즘 들어 더욱 집요해진 천마에게 시달려 한층 더 살이 내렸다. 원래도 탄탄한 근육질이었지만, 요즘 들어 사소한 군살들까지도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빠져 버리는 느낌이다.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천마는 그 배가 불모인 것이 아쉬웠다. 문평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그래서 그와 자신의 피를 잇는 자식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순간적이긴 했지만 그런 생각이 천마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떠올린 생경한 호기심은 그에게 끈끈한 감정의 뒷맛을 남겼다. 문평이 그의 자식을 낳는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그의 씨를 통해 결실을 맺어, 저 뱃속에 그의 핏줄을 품게 된다면? 열 달의 수태 기간을 거쳐 그의 아이를 해산한다면?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천마는 심상에 잠겨 이뤄지지 않을 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 잔소리 많고 성가신 어미가 되겠지. 제 자식이 예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잘못한 일만큼은 따끔하게 야단치는. 제법 그럴듯하겠군.’
결실을 얻을 수 없는 천마의 씨앗이 문평과의 결합부에서 흘러나왔다. 천마는 반쯤 정신을 잃은 채 흐릿하게 올려다보는 문평의 이마에 입술을 비볐다.
그래도, 귀여울 것 같았다. 문평을 꼭 닮은 그의 자식이 생긴다면. 자신을 꼭 닮은 자식을 끌어안고 있는 문평이라면. 정말이지 귀엽고 사랑스러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지도 모른다.
혈육이라고 하면 하나같이 비참한 기억밖에 없는 자신이 어째서 이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지를 의아해하며 천마는 흐리게 웃었다. 어쩌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마음 놓고 이런 망상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고, 그의 머릿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밀월 아닌 밀월을 즐기는 동안, 강호는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어느 날, 한날한시에 중원 전체 13개의 성도에서 마교의 입장을 알리는 방이 공개적으로 나붙었다. 마교에 대한 성토가 하늘을 찌르는 이때에 마교가 그토록 전격적으로 움직일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방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만천하에 선포했다.
정도맹도, 그들이 주최하고 있는 무림대회의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당당한 태도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그들은 첫 번째로, 마교는 강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하북혈사와 무생교의 사태에 대해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밝혔다.
두 번째로, 무생교는 마교가 만든 유령 단체가 아니라 20여 년 전 마교에서 반역을 일으켰다 쫓겨난 반도의 무리들이며, 그 수장은 과거 군자검이라고 불렸던 곽효라는 사실을 폭로했다.
군자검 곽효가 일으켰던 반란은 암암리에 세간에 퍼져 있던 사실이었다. 마교는 무생교가 벌였던 일들을 추적하고 그에 대한 증거를 내세워 자신들과 그들이 같은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똑똑히 확인시켰다.
세 번째로, 그들은 천마의 실종 역시 무생교의 반도들과 관련이 있으므로, 그들과는 절대 한 하늘을 이고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군사를 일으켜 무생교를 치겠노라 천명했다.
마교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의 목표는 중원이 아니라 무생교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해 ‘불선공 반멸절不先攻 反滅絶’이라는 색다른 원칙을 내걸기까지 했다.
불선공 반멸절의 원칙이란, 중원으로 들어온 마교의 전력을 다른 자들이 먼저 도발하지 않는 한 절대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 먼저 선공하는 자가 있다면 그 세력을 멸절시켜주겠다는 패기만만한 약속이었다.
그 모든 것은 새로이 교주에 오른 제백도 호완평의 이름으로 맹세 되었다. 비록 천마만 한 위명은 없지만, 새로운 마교 교주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이다 보니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단일 단체로는 가장 막강한 세력이며, 그 하나로도 충분히 중원의 절반 이상을 상대할 수 있는 무력을 가진 마교다.
그들이 내건 증거는 확실했고, 그들이 스스로가 한 약속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사실은 지난 융중지약이 증명하고 있었다.
하나로 통일될 수 있었던 강호의 의견이 이 일로 분열되었다. 제일 처음 마교를 하북혈사의 배후로 지적했던 정도맹의 세력들은 이 일을 두고 또 한 번 강호를 농락하려는 교활한 속임수라고 마교를 비난했다.
하북혈사로 적지 않은 손해를 본 문파들도 마교의 주장을 쉽사리 믿지 못했다. 듣도 보도 못한 세력에게 휘말려 손해를 입었다고 하는 것보단 마교에게 당했다고 하는 편이 자존심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도맹처럼 확고한 믿음이 없는 중소 방파나, 정사지간의 방파들은 마교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만약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눈에 보이는 적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적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마교가 드러난 검이라면 무생교는 보이지 않는 비수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경계하게 되는 사람의 심리상 그들은 마교보다는 오히려 무생교의 존재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마교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모든 게 얄팍한 거짓말일 게 뻔하잖아!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 중원 안에 전력을 밀어 넣고 안에서부터 파고들려는 술책이라니까!”
표사 차림을 하고 둘러앉은 세 명의 사내 중 가장 목청이 큰 사내가 탁자를 두드리며 벌컥 화를 냈다.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그들과 같은 탁자에 앉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변의 사람들까지도 그를 돌아보았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문평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막 엉덩이를 들려다 말고 천마의 눈치를 살폈다.
“안 일어나십니까?”
“저쪽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좀 더 듣다 일어나지. 어차피 시간이야 많은데 무슨 걱정이냐.”
마지막 남은 용정차를 음미하고 있던 천마는 느긋하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문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천마가 요즘 들어 부쩍 객잔 안을 도는 소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문평은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에이.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천마가 실종됐는데.”
목소리 큰 사내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시큰둥하게 반박했다. 애초에 목소리 큰 사내가 화를 낸 것은, 맞은편 남자가 아무래도 마교 측 주장이 사실인 것 같다는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천마가 진짜로 실종이 됐는지, 아니면 그냥 그런 척하는지는 또 어떻게 알아? 저들은 마교인들이야. 마교인들이 하는 말을 대체 어떻게 믿느냐고?”
목청 큰 사내는 마교인에게 마누라라도 빼앗긴 모양이었다. 그럴듯한 정파 출신도 아니면서, 마교를 증오하는 마음만큼은 그 어떤 정파의 협객보다 빼어났다.
“아니, 그건 사실인 모양이던데. 천마 말이야, 실종된 게 맞는 것 같더라고.”
마교 배후론을 주장하는 목청 큰 사내의 의견에 두 번째로 딴지를 건 것은 이제껏 조용히 앉아 안주만 축내고 있던 찢어진 얼굴의 사내였다. 그는 험상궂게도 얼굴의 한쪽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처가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칼에 베인 것 같지는 않고 범이나 곰 같은 산짐승에게 당한 것처럼 보였다.
“무슨 소리야? 자네 뭐 알고 있는 거라도 있어?”
“그게 말이지, 내가 며칠 전에 우리 이종사촌 형님을 뵈었거든.”
“자네 이종사촌 형님이라면, 왜 그, 정도맹 안휘 지부에 계신다는?”
“그래. 바로 그 형님.”
평범한 중소 표국의 표사인 자신과는 달리 정도맹의 무사씩이나 되는 친인척이 있다는 사실이 적잖이 자랑스러운지 찢어진 얼굴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목청 큰 사내는 못내 끼어들고 싶은 눈치였으나, 무려 ‘정도맹 소속’이라는 이종사촌 형님의 후광에 눌려 아무 말 못 하고 그저 입술만 달싹거렸다.
“한데 그분이 왜?”
“정도맹 안휘 지부에서 근무하셔야 하는 분이 웬일로 하남河南에 오셨더라고. 그 형님이 나를 원래 좀 많이 귀여워하시거든? 지척을 지나가시면서 모르는 척 그냥 가실 수는 없으셨는지 잠시 들러 술 한잔하고 가셨어.”
“사족은 빼고 본론만 풀어. 그래서? 그 형님이 대체 뭐라고 하신 거야?”
맞은편 사내는 무생교의 일보다 천마의 실종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그의 조급한 채근에, 찢어진 얼굴이 짐짓 느긋한 태도로 뻐기듯 대꾸했다.
“가만있어 봐. 이야기한다니까? 그래서, 그렇게 그 형님과 술을 마시다 나온 이야긴데 말이지, 아무래도 천마가 실종된 건 사실인 것 같대. 정도맹 내부에서는 이미 쉬쉬하면서도 모두 다 알고 있는가 보더라고.”
“아니, 어떻게 없어졌대? 천마 같은 초극 고수가 그냥 사라질 리는 없잖아.”
당연히 천마 같은 초극 고수가 그냥 사라질 리는 없다. 지나치게 고명하신 나머지 문평은 가는 데마다 자기 이야기를 엿듣게 되는 천마를 힐끗 돌아보았다.
자신들의 바로 옆에 천마가 앉아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저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까? 저 사내들이 이 객잔으로 들어온 순간, 한 번씩 천마의 얼굴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문평은 심술궂게도 그런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저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을 누리고 있는 셈이었다. 만약 천마가 자기 자신이 아닌 척하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이쪽에도 다 들릴 정도로 ‘기생오라비’ 어쩌고 하는 말을 떠들어 댄 목청 큰 사내가 여태껏 살아 있을 리 없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워낙 윗사람들끼리 쉬쉬하는 거라 형님도 자세한 것까지는 모르지만, 하여간에 어쨌든 실종된 것만큼은 확실하대. 정도맹 내부에서는 천마가 실종되었기 때문에 더 불안해한다고 하더군.”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못마땅한 듯 입을 다물었던 목청 큰 사내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두 사람의 대화에 난폭하게 끼어들었다.
“천마가 사라지면 정도맹의 가장 큰 대적이 사라지는 거잖아. 그런데 왜 정도맹이 불안해해?”
“이 사람아, 생각해 봐. 융중지약이 과연 어떤 조건으로 내걸렸는지. 융중지약의 전제 조건은 ‘천마가 살아 있는 한’이었다고. 증거인 기린패가 이미 사라졌으니 약속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셈이지만, 그래도 천마라도 있으면 약속을 지키라고 생떼라도 써볼 수 있는데 약속의 당사자조차 없어져 버렸잖아. 그러니 정도맹으로서는 붙들고 늘어질 상대마저 잃은 거지. 그러니까 마교가 자신들의 세력을 중원 안으로 끌고 들어오겠다는 소리를 해도 아무 소리 못 하는 거잖아. 융중지약이고 뭐고 이미 모두 깽판이 났는데 이제 와 뭐라고 하겠어?”
“듣고 보니 그도 그렇구먼. 기린패도 없고, 천마도 없으면 융중지약은 그야말로 종이 쪼가리지.”
맞은편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하게 동조를 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객잔에 들러 술을 마시는 게 낙인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하루의 고됨을 술자리에서 풀고 있었다. 그들이 일반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술자리에서 나누는 화제가 일상생활이 아니라 강호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평은 불현듯 옛 생각이 났다.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냈던 참혼대斬魂隊의 친우들과 제법 자신을 잘 따르던 부하들의 모습이 연이어 떠오른다.
지금 그 녀석들은 잘 있을까? 만약 강호에 전운이 일면 그 친구들 역시도 전투에 나가게 될 텐데.
맏형처럼 듬직하던 악 형과 개구진 최위명,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믿음직하던 임학을 떠올리니 가슴속에 그리움이 치밀었다. 시간상으로 따지면 채 1년도 되지 않은 일인데,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것만 같다.
“문제는 그 덕에 정도맹에서 신경이 바짝 섰다는 거야. 우리 이종사촌 형님만 하더라도 안휘 지부 목인대木仁隊의 대주이신데, 밑에 있는 무사들을 인솔하고 정도맹으로 가시더라고. 이야기를 듣자 하니 안휘뿐만 아니라 정도맹의 각 지부들 전체에서 무사가 차출되고 있다더군. 게다가 구파일방의 본산 제자들까지 산에서 내려오고 있다니, 자칫하면 40년 만에 정말 정마대전이 일어날지도 몰라.”
찢어진 얼굴의 사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걱정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은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들은 남의 의견을 자신의 것인 양 주워섬기는 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마교가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공격을 안 하겠다고 천명했는데, 설마하니 정도맹이 먼저 공격할까?”
셋 중 가장 이성적으로 보이는 맞은편 사내가 고개를 갸웃한다. 목청 큰 사내를 완전히 빼놓은 그들은 짝짜꿍이 잘 맞았다. 두 사람은 객잔의 낡은 탁자 위에서 저희들끼리 천하를 경영하는 양 심각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강호 정세를 토론했다.
“누가 먼저 공격을 할지는 모르는 일이지. 문제는 강호에 정도맹과 마교만 있는 게 아니라 무생교가 있다는 거야. 무생교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다면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정도맹인 것처럼 해서 마교를 선공할 수도 있는 거고, 마교인 척을 해서 정도맹의 뒤를 칠 수도 있는 거니까.”
“생각해 보면 제일 빌어먹을 놈들은 바로 그 무생교 놈들이야. 에잇. 천벌 받을 놈들. 그놈들이 어린애들 시체를 가지고 했다는 짓을 들었나? 어른 시체를 가지고 한 짓이라도 용서가 안 되는데, 애들 시체라잖아. 아니,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짓을 해?”
“듣자니 시체도 아니라던데. 그 썩을 놈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 애들을 강시로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자네 그 소문 들었나. 그 왜, 당문이 말이야…….”
“에이, 쉿. 이 사람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당문이 뭘 어쨌다고?”
찢어진 얼굴의 사내가 막 당문의 이름을 꺼내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내가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무심결에 공공장소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을 꺼낼 뻔했던 찢어진 얼굴은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입을 다문다.
두 사람은 당문에 관해 떠도는 소문을 알고 있는 눈치지만, 목청 큰 사내는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당최 짐작이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문이 뭐? 당문이 뭘 어쨌는데?”
그는 가뜩이나 큰 목청을 더욱 키우며 두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변 사람들이 다시 한번 그들을 돌아보았다. 새파랗게 안색이 변한 두 사람이 목청 큰 사내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입 다물라고. 이런 데서 함부로 말할 이야기가 아니라니까!”
“그래. 당문이 뭐? 어서 말해 보거라.”
하지만 그들의 만류는 이미 때늦은 것이었다. 세 사람의 머리 위로 음산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던 두 사내는, 명백하게 시비를 걸어오는 음산한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주변 사람들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흉악한 분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눈치 없는 목청 큰 사내뿐이다. 쓸데없이 큰 목소리로 일을 키운 그는, 다짜고짜 하대하는 상대에게 벌컥 화를 내며 삿대질을 했다.
“넌 또 뭐야? 뭐 하는 놈인데 갑자기 시비야?”
문답무용. 음산한 목소리의 사내는 삿대질하는 목청 큰 사내에게 대답 없이 암기를 집어 던졌다. 어느새 던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재빠르게 엄습한 암기는 목청 큰 사내의 술잔을 가르고 탁자에 박혔다.
음산한 목소리의 사내는 놀라운 고수였다. 예리한 암기에 의해 한가운데가 반으로 잘린 술잔에서 흥건하게 술이 쏟아져 내렸다. 종잇장처럼 얇고 가벼운 암기가 마치 칼날처럼 반듯하게 술잔을 가른 것이다.
탁자에 박힌 것은 시커멓게 번득이는 날카로운 독질려毒疾藜였다. 대체 얼마나 강한 독을 발랐는지, 독질려에 술이 닿자 액체가 기화돼 푸른 연기가 올라왔다.
코끝을 간질이는 매캐한 연기에 목청 큰 사내는 눈도 깜빡하지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돌이 되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뻣뻣이 얼어붙었다.
“다, 당문!”
목청 큰 사내 대신 반응을 보인 것은 맞은편에 있던 사내였다. 그는 음산한 사내가 사용한 무기가 당문 암기의 대명사인 독질려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희게 질렸다.
‘이런 제길. 된통 걸렸다.’
그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폭포수같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당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이야기하는 순간 당문인에게 걸리고 말았다. 평소에도 독 오른 살모사 같다고 소문이 자자한 당문인인데, 이런 상황에서 딱 마주치게 되다니. 어떻게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나 싶다.
“그래. 당문이다. 그러니 어서 이야기를 계속해 봐라. 우리 당문이 어쨌다는 말이냐?”
그들 세 사람에게 시비를 건 음산한 사내는 턱 끝까지 깊게 내려오는 죽립을 쓰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일행들은 모두 죽립을 썼다.
‘아니, 저건 청린사靑鱗蛇 당적형唐赤炯이잖아?’
몇 번이고 당문오독과 마주친 적이 있었던 문평은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 재수 없고 거만한 목소리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사소하기 짝이 없는 원한 따위로 부득부득 사람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던 그들이다. 윤승효, 아니 천마가 때마다 곁을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저 빌어먹을 놈들의 손아귀에서 한 줌의 고혼이 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대협. 저희는 감히 당문에 대해 불경한 이야기를 할 정도로 간담이 크지 못합니다.”
애당초 일의 발단이 된 찢어진 얼굴의 사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애원하듯 말했다.
‘에구. 이놈의 입.’
입이 만화萬禍의 근원이라더니 그 말을 이렇게 절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당문을 입에 올렸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부린 객기의 대가가 지나치게 크다고 생각하며, 찢어진 얼굴의 사내는 후회를 거듭했다.
“감히 무생교와 당문의 이름을 연결시켜 내뱉어 놓고 불경한 의도가 아니었다? 하! 너라면 과연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느냐?”
당적형은 예민하게 물었다. 그도 귀가 없지 않으니 요즘 들어 떠도는 소문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소문들을 그저 모함이라고 믿었기에 진심으로 분노했다.
어떻게 감히 당문의 이름이 이런 소문 속에 포함될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은 무생교 때문에 당문이 입은 엄청난 피해를 잊었단 말인가? 무생교는 개방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당문의 원수이기도 했다. 무생교와 당문이 서로 한통속이라니, 당적형은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토록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대체 누가 감히 이따위 수작을 부린 것일까? 당적형은 찢어진 얼굴의 사내가 소문의 진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원독에 찬 눈길로 노려보았다.
당적형이 더 화가 나는 것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추문이 제법 그럴듯한 진실인 양 퍼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적형은 처음 소문을 시작한 근원보다 그 말을 퍼트리고 나른 강호인들이 더 증오스러웠다. 헛소문을 핑계로 당문을 업신여길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 감히 그따위 이야기들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강호인이 자기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이지. 너는 너의 결백을 강호의 방식으로 증명해 보여야 할 것이다.”
몰랐으면 모르되 자신의 눈앞에서 봤으니 상대를 용서할 마음은 없었다. 당적형은 상대의 목숨으로 그의 경솔한 혀를 응징해 주리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그 말을 들은 찢어진 얼굴의 사내가 벌벌 떨었다. 동네 무관에서 배운 별거 아닌 몇 수로 조그만 중소 표국에 취직해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그는 고작해야 삼류 무사에 불과했다. 어디서 한칼하고 온 듯 흉험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으나 사실 제대로 된 비무 경험조차 없었다.
“저, 저는 이제 고작 삼류에 불과한 수준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당문의 고수들을 상대하겠습니까?”
“그럴 자신도 없으면서 당문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이 네 죄다. 자리에서 일어서라. 앉아 있는 자를 죽일 생각은 없다.”
“대, 대협. 한 번만 자비를!”
“어서!”
“……언제나 생각하는 겁니다만, 약자 앞에선 늘 당당하시군요.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당문오독의 수장이신 청린사께서 고작해야 삼류 무사를 향해 진지하게 칼을 뽑아 드시는 것이 말입니다.”
보다 못한 문평이 중간에서 참견하고 나섰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당적형이 몹시도 눈꼴셨을뿐더러, 저 세 사람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목숨을 잃는 꼴은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흥미롭게 상황을 구경하던 천마가 눈썹을 휘어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넌 갑자기 왜 나서서 초를 치냐는 눈빛이다. 문평은 짐짓 모르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 당적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거, 이거. 반가운 얼굴이구먼. 자네는 여전히 뜻밖의 상황에서만 만나게 되는군. 나설 데 안 나설 데를 구분하지 못하는 버릇도 여전하신 모양이지?”
문평의 얼굴을 알아본 당적형이 삐딱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그렇지 않아도 피를 봐야 하는 마당에, 전부터 손봐 주려고 마음먹었던 놈까지 덩달아 걸려들었다.
예전에야 곁에 윤승효가 있어 손을 대지 못했지만, 그만 없으면 이 건방진 군관 하나 처리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그는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군관의 옆자리를 곁눈질했다. 그가 여전히 윤승효와 동행하고 있으면 뒷일이 곤란해지니, 움직이기 전에 미리 확인을 해두려는 것이었다.
‘젠장. 저건 또 뭐야?’
죽립으로 앞을 가리고 있어 시야가 좁았던 당적형은 그제야 천마의 모습을 확인했다. 입고 있는 옷은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흑의였지만 그 옷을 걸친 사람은 흔히 보기는커녕 평생을 가도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엄청난 귀인貴人이다.
세상에.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까지 잘생길 수 있는 걸까? 여인도 아니고 남자인데,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넋을 잃을 뻔했다. 윤승효도 빼어나게 잘생긴 외모지만 저 사람에 대하자면 그는 얼굴도 아니다.
당적형은 상대가 심상치 않은 신분을 가진 존재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흐르는 데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오연한 오만함을 마치 천성처럼 두르고 있었다. 수려하기 짝이 없는 인물도 인물이지만 풍기는 위엄 자체가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변복한 황족쯤이라도 되나? 설마 황자는 아니겠지?’
당적형은 어지럽게 머리를 굴리며 상대의 정체를 추측해 봤다. 당대의 황족 중 저렇듯 빼어난 인사가 있다면 틀림없이 소문이 났을 텐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적당한 사람이 없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보아하니 귀한 분을 모시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함부로 나서도 되는 건가? 군관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명을 이행하는 것을 중요시 여겨야 할 텐데.”
젠장. 빌어먹을 개새끼가 운도 좋지.
본능적으로 손익 계산을 마친 당적형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누그러트리며 건조하게 말했다.
이렇듯 종종 마주치는 것을 보면 저놈과 자신은 적지 않은 인연이 있는 듯했다. 딱히 오늘만 날이 아니다. 저놈이라고 해도 언제나 운이 좋을 수는 없는 법. 언제라도 좋으니 단 한 번만 걸리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며 당적형은 이를 갈았다. 분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놓아줄 수밖에 없을 거라고 미리부터 단정한 탓이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당적형을 보며 문평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직접적으로 겨루어야 하는 상대도 아니고, 상대의 동행이 꺼림칙하다고 대결을 포기하려 들다니 역시 당적형은 당적형이다.
그는 여전히 상황이 이롭다 싶으면 나서고, 조금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발을 빼는 소인배였다. 그도 나름의 처세라면 처세겠으나 그토록 교활하게 행동하는 주제에 스스로를 정의라고 생각하는 건 좀 많이 주제넘은 짓이다.
당문에 이리저리 쌓인 게 많은 문평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너 잘 걸렸다 싶은 건 그 역시 마찬가지다.
“당 형께서 마음 쓰시는 것이 지금 제가 모시고 있는 분 때문이라면 그렇게까지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분께서 저와 동행이긴 하지만, 제 개인의 사사로운 비무까지 관여하실 만큼 한가하시진 않으시니까요.”
한발 물러서려는 당적형을 문평이 도발했다. 대놓고 비꼬는 거나 다름없는 그의 도발에 화가 난 당적형은 뱀 같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암기를 출수할 듯 움찔움찔하는 손끝이 그의 폭발적인 분노를 여지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당적형은 참았다. 강호의 일반 무부들처럼 앞뒤 없이 움직이기엔 어깨에 얹고 있는 것이 너무도 많은 그는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부터 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는 문평에게서 시선을 돌려 천마를 바라보았다. 찻잔을 손에 쥔 느긋한 자세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촌극을 구경하고 있는 천마는 하늘 위에서 속세를 굽어보는 관조자처럼 아득히 멀어 보였다.
당적형은 그런 천마에게 극히 공경스러운 태도로 머리를 숙였다. 겪어 볼수록 상대에 대한 확신이 깊어진 그는 스스로를 낮추는 일에도 서슴없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사천에서 일문을 이루고 있는 사천당가의 후예 당적형이라고 합니다. 미천한 강호의 야인이 귀인께 인사 올립니다.”
문평이 자신의 정체를 관군이라고 속였기 때문일까? 당적형은 천마를 관부의 인물로 아예 단정 짓고 있었다. 문평은 어처구니가 없어 입술이 뒤틀렸지만 꾹 눌러 참았다.
이런 상황에서 곧이곧대로 대답해 판을 깰 만큼 멍청한 위인이 아니었던 천마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장단을 맞춰 주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신분을 밝힐 수는 없지만, 그 인사만큼은 달게 받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신분을 밝힐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적형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무려 천마라는 사실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할 터였다.
대강 예상하던 것과 비슷한 대답이 돌아오자 당적형은 황송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는 더없이 공손한 자세로 천마에게 고했다.
“인사를 받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읍할 따름입니다. 여의치 않게 동행분과 시비가 일었으나,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 이 일로 귀인의 청청에 누를 끼쳤다면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지켜본 내가 공정하지 못하게 그대를 탓하겠는가? 마음 쓸 것 없는 일이니 더는 신경 쓰지 마라. 그만 일어나도 좋다.”
“감사합니다.”
그는 천마의 명령이 떨어진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가의 후손답게 예를 표하는 자세 하나만큼은 몹시 단정하다. 그 뜻은 내면화하지 못했으면서, 형식만큼은 멋들어지게 몸에 익힌 모양이다.
문평은 어울리지도 않게 군자연하는 당적형을 속으로 비웃었다. 당적형이 제아무리 위선을 떨어도 천마의 경지를 따라잡기란 요원한 일이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지, 감히 천마 앞에서 위선을 부려? 후안무치의 대명사인 곽효를 제외하자면 세상에 천마처럼 위선을 잘 떠는 사람도 달리 없다.
문평은 천마를 욕하는지 당적형을 욕하는지 알 수 없는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의 행동을 주시했다.
“지켜보셔서 아시겠지만, 관 백호와 저 사이에는 적지 않은 악연이 있습니다. 서로가 엇갈리다 보니 그 연을 풀지 못한 채 세월만 지났는데, 우연이나마 이렇듯 다시 만났으니 이번 기회에 옛 악연의 고리를 끊어 볼까 합니다. 귀인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관 백호와 정식으로 비무를 하고 싶습니다. 공정하고 정당한 강호의 방식대로 치르겠으니, 부디 비무를 허락해 주십시오.”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그와 문평 사이에 무슨 그럴듯한 사연이라도 있는 줄 알았을 거다. 하나 천마는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이라는 게 고작 호패 하나를 사이에 둔 실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저건 누굴 닮아 저렇듯 뒤끝이 길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천마는 문평이 당적형에게 원한을 가지는 것은 이해해도, 당적형 따위가 문평에게 원한을 가지는 것은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내심 못마땅한 마음으로 당적형을 바라보며 문평에게 전음을 흘렸다.
“어쩌려고 일을 이렇게 만든 거냐?”
당적형에게 원한을 풀고 싶은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시기를 이렇듯 빨리 잡은 것은 너무 섣부른 일이 아닌가 싶었다. 문평의 진의가 궁금해진 천마는 전음으로 그의 의중을 물었다. 이제 전음을 할 수 있게 된 문평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천마에게 대답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만들어 준 기회인데 이를 놓칠 수 없지 않습니까? 저자의 말대로, 그간 당문과 쌓아 왔던 악연을 털어 버릴 좋은 기회입니다.”
“절정에 이른 데다 임독양맥까지 뚫었으니 기고만장해지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나 상대는 당문의 고수다. 일류에 불과한 경지라 해도 독과 암기를 사용하니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은 절정 고수나 다름없는데, 이제 막 절정에 오른 네가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느냐?”
천마는 문평이 다치는 걸 원치 않았다. 임독양맥을 뚫었다고 해도 만독불침의 고수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해약 없는 독에라도 당한다면 천마라도 방법이 없다. 그러나 문평은 자신만만했다. 단순한 치기만은 아닌 것이,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저는 적어도 목숨이 위태롭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위험해지면 교주님께서 분명 손을 써주실 게 아닙니까? 여벌의 목숨을 가진 거나 다름이 없는데 제가 여기에서 무엇을 더 망설이겠습니까?”
맹랑하기 그지없는 문평의 말에 천마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제 입으로 참견하지 말라고 단호히 말하기에 정말로 참견을 말아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속으로는 저런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어째 자신만만하게 나선다 했더니 녀석은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나 보다.
비무를 앞둔 무인의 속셈치고는 지나치게 계산적이었으나, 그 말을 듣고 보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실은 기분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기껍다. 무모하게 목숨을 버릴 생각 따윈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데다, 자신을 굳건히 믿고 있는 그 태도가 제법 귀여웠다.
당신이라면 나를 절대로 위험하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니, 문평이 한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깜찍한 이야기다.
‘저렇듯 의심 한 점 없이 의지하고 있으면 주인 된 몸으로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을 도리가 없지. 기껏 길들인 고양이를 실망시킬 정도로 무능력한 주인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야.’
문평의 애교 아닌 애교가 천마의 마음을 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 제 속에 쌓인 분은 제 손으로 푸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자신이 아이들 싸움을 일일이 거들고 나설 수도 없는 일이잖은가.
문평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손을 거치는 게 편했다. 비록 모양뿐인 시늉이라고 해도 그런 시늉을 하는 것과 그조차도 하지 않은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관 백호도 말했듯 나는 그의 사사로운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사람의 목숨은 소중하니 비무를 하는 와중에라도 손속에 사정을 두길 바란다.”
천마는 당적형과 문평 두 사람이 다 기다리고 있는 말을 해주며 미소 지었다. 너 한번 당해 봐라, 그런 의미의 미소였으나 그런 상황을 알 리가 없는 당적형은 회심의 눈을 빛내며 정중하게 허리를 굽힌다.
당적형의 깊게 숙인 머리 위에서 천마와 문평이 시선을 교환했다. 짓궂은 장난을 공모하는 어린아이처럼 씨익 흰 웃음을 지은 문평이 고개를 돌려 당적형을 바라보았다. 천마에게서 몸을 돌린 당적형은 형형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불꽃이 튀어 올랐다.
“남의 객잔에서 함부로 일을 벌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밖으로 나갑시다. 작은 마을이라 경계를 벗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얼마 안 가서 쓸 만한 장소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문평은 적극적인 태도로 두 사람의 결투를 추진했다. 말이 비무지 솔직히 결투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둘 다 생사결을 마음먹지 않았는가.
당적형은 싸늘하게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구경꾼들 앞에서 저놈을 도륙 내지 못하는 것은 못내 안타까웠지만, 저 얄미운 놈에게 제 분수를 가르쳐 줄 수 있다면 그까짓 아쉬움이야 감수할 수 있는 일이다.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구나. 눈치가 빨랐다면 조금이라도 더 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 것을.’
당적형의 마음속에 시커먼 악의가 치밀었다. 그가 다루는 독처럼 검고 음습한 그 감정은 상대의 고통과 죽음만이 충족시킬 수 있는 어두운 공허였다.
“거기, 피라미들은 놔두고 저를 따라오지 그러십니까? 청린사께도 때로는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 당문오독께서 그 곁을 지켜주셔야지요. 아. 당문오독이 아니라 이젠 당문삼독인가요? 두 분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네 이놈!”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막 하는구나!”
속이 훌떡 뒤집히도록 사람을 갈구는 비법은 천마에게 직접 전수한 비장의 한 수다. 이 와중에도 잊지 않고 삼류 무사들을 처리하려던 당문삼독의 나머지 두 사람은, 문평의 빈정거림을 듣고 그야말로 분기탱천해 그를 노려보았다. 파랗게 독이 오른 그들의 시선은 그를 베어 버릴 듯 날카로웠다.
실제로 혈연관계였던, 그래서 더욱 서로가 친밀할 수밖에 없었던 당문오독은 형제들의 억울한 죽음을 가벼운 태도로 모욕하는 문평에게 극심한 증오를 느꼈다.
“지금이 기회이니 밖으로 물러나십시오. 저들은 뒤끝이 긴 자들이니 순간을 모면했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상황을 봐서 빨리빨리 튀어 버리지, 눈치도 없이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세 사람을 나무라며 문평이 전음을 보냈다. 그가 전음을 보낸 상대는 세 사람 중 그나마 제일 이성적으로 보이는 맞은편 사내다.
귓속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란 맞은편 사내는 그 목소리의 정체가 소문으로만 듣던 전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에게 전음을 보낸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나가라고요.”
티 내지 않고 전음을 보내 그들을 일깨워 준 사람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들의 목숨을 구해준 바로 그 무인이었다.
‘감사합니다.’
예전의 문평처럼 전음을 보낼 수 없는 맞은편 사내는 입 모양만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며 친구들의 팔을 끌었다. 여전히 멍해 있는 두 사람은 맞은편 사내가 팔을 꼬집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그를 내려다본다.
사내는 눈치 없는 친구들을 몰래 이끌고 객잔을 빠져나갔다. 다행히 당문삼독의 시선이 그 무사에게만 쏠려 있어서 도망쳐 나오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행여 들킬까 봐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객잔을 빠져나가자마자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호랑이라도 쫓아오는 것처럼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던 그들은 본인들이 일하고 있는 표국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두의 등짝이 땀으로 흥건했다. 힘들게 운동한 정도가 아니라 폭포수라도 맞은 것 같은 모습이다.
‘어휴, 십년감수했군.’
자신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실감한 그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술을 독연으로 만드는 끔찍한 독으로 무장한 자들이니 그들의 손에 걸렸다면 죽어도 곱게 죽진 못했을 터였다.
“독하다는 말은 익히 들어왔지만 저렇게까지 독할 줄이야.”
당문도를 난생처음 맞닥트려 본 맞은편 사내는 혀를 내두르며 혼잣말을 했다. 찢어진 얼굴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맞은편 사내에게 한탄했다.
“난 이제 사천 쪽으론 오줌도 안 눌 거야. 저런 독한 놈들이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하면 나오려던 오줌 줄기도 도로 들어갈걸?”
자신들의 생존을 실감하고 나니 뒤늦게나마 그들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 떠올랐다. 눈치 없는 그들이라도 문평이 자신들 때문에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들은 걱정스러워진 나머지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신들이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주기 위해 당적형뿐 아니라 당문삼독을 모조리 도발했으니, 그들은 그에게 은혜를 입어도 아주 큰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나저나 그분은 무사하실까? 당문 놈들과 구원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상황에 굳이 나서신 건 우리를 돕기 위해서였던 것 같은데.”
“괜찮지 않을까? 이길 자신이 없다면 무려 당문오독 앞에 그렇듯 당당하게 나설 수는 없었을 거잖아. 자네도 봤지? 그분이 모시던 주인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 그런 귀인을 단신으로 호위하는 무사라면 무위가 대단할 거야.”
그들에게 있어 자신들을 괴롭히던 당문오독은 지옥의 야차였고, 그들을 구해준 문평은 천상의 신장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기생오라비였던 천마조차도 덕분에 귀하신 분이 됐다. 그들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흥분하며 마구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 양반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아 보이지 않았어?”
찢어진 얼굴이 질문을 던지자 맞은편 사내가 맞장구를 쳤다.
“그럼. 그렇고말고. 모시던 귀인분께서도 그랬지만, 은인께서도 보통 분이 아니셨지. 두 눈에 정광이 빛나고 태양혈이 불룩한 것이, 한눈에도 대단한 고수더라고.”
생명을 다투는 위협 속에 혼미하게 풀렸던 그들의 정신은 어느샌가 상황을 마구 왜곡해 잘못된 기억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큰소리는 잘 쳐도 마음은 가장 심약했던 목청 큰 사내는 멍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더듬더듬 물었다.
“그, 그런데 당문 이야기는 대체 뭐였어? 그 이야기가 대체 뭐기에 당문오독이 그렇게 화를 낸 거야?”
분위기 파악 못하는 그가 질문을 던지자, 찢어진 얼굴이 돌연 화를 내며 말했다.
“이제 와 그 이야기는 뭐 하러 물어! 그 일 때문에 죽을 뻔한 걸 벌써 잊었어?!”
찢어진 얼굴은 사실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내심 찔리는 바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움찔 놀란 목청 큰 사내는 소심하게 어깨를 움츠리며 친구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맞은편 사내가 찢어진 얼굴을 달랬다.
겨우 소문 한마디 잘못 말한 걸로 목숨을 위협당했던 일에 앙금을 품은 그는, 찢어진 얼굴과는 달리 소문을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없는 자리에선 천자 욕도 한다는데 그깟 무림 명문쯤이야 뭐가 대수란 말인가.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지금은 당문 놈들도 곁에 없는데. 그리고 내가 생각해 봤는데, 놈들이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하는 건 다 찔리는 게 있어서인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고작 떠도는 소문을 말한 정도로 사람을 죽이려 들겠어? 우리가 그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닌데 말이야. 제아무리 독하다는 당문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정파야. 정파는 그런 짓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라고.”
자칫하면 험한 꼴을 당할 뻔했던 맞은편 사내는, 당문인들에 대한 매서운 원망을 자신의 말속에 풀어 넣었다. 제법 그럴듯한 설명이라서 찢어진 얼굴과 목청 큰 사내의 귀가 솔깃해졌다. 한 번 호기심이 생긴 건 죽어도 못 참는 목청 큰 사내는 기회라도 얻은 것처럼 다시 한번 당문에 대한 소문을 졸랐다.
“그러니까 말해 달라고. 자네들은 이유를 아는 것 같지만 나는 영문조차 모르고 당했단 말이야.”
그의 채근에 못 이기는 척하며 맞은편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이 있기 전이였다면 남에게 들은 대로만 옮겼겠으나, 이제 그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악의를 채워 넣으며 소문을 부풀렸다.
“저 녀석은 간담이 작아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내가 말해 주지. 그러니까 그 소문은 말이야…….”
그날 이후로, 당문에 대한 강호의 소문이 한층 더 험악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을 입에 담으면 당문이 입을 막으러 온다더라. 그 소문을 말한 사람은 물론이고 들은 사람까지도 모조리 몰살시킨다더라. 괴담에 가까운 덧말이 새로이 추가된 소문은 하남은 물론이고 호북을 넘어 강호 전체에까지 널리 퍼져 나갔다.
소문이 진담 되고 진담이 평판이 되는 상황에서, 당문의 평판은 날로 추락해 흙탕물에 처박히게 되었다.
그들이 자리를 옮겨 마주한 곳은, 마을 밖의 야산 기슭에 자리 잡은 넓은 공터였다.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개간을 위해 손을 보고 있는 장소인 듯, 갓 베어진 나무에서 풋풋한 나뭇진 냄새가 났다.
비무를 치르기 전에 우선 주위를 살펴봤던 문평은, 공터의 가장자리에 쌓아 놓은 나무 그루터기를 발견하고는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일 아침 공터에 왔을 때 흉험한 격전의 흔적을 발견하면 죄 없는 나무꾼이 얼마나 놀랄 것인가? 평범한 사람의 일터를 사람의 피로 어지럽힌다는 건 정말이지 못 할 짓이다.
‘가능하면 흔적이 남는 짓은 하지 말아야겠군.’
문평은 눈앞의 상대보다 얼굴을 모르는 공터의 주인이 더 걱정돼 그렇게 결심했다.
그들의 결투를 참관하는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다. 그 세 사람은 당문오독, 아니 삼독의 나머지 두 명과 천마다.
당문삼독은 하나같이 뼈째 갈아 마실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흉흉하게 문평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이 ‘높으신 분’이라고 믿고 있는 천마가 곁에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비무고 뭐고 칼부림부터 나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작하지.”
각기 오 장의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예의 그 넓은 소매 폭 속으로 두 손을 집어넣은 당적형이 죽립 너머로 문평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문평은 허리춤에 달고 있던 박도의 손잡이를 잡으며 그런 당적형을 향해 흰 이를 드러내 보였다.
“어차피 서로의 정체를 눈치챈 마당인데 죽립을 쓰고 있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걸 쓰고 있으면 시야도 좁아져 불리할 테니, 비무를 할 때만이라도 벗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문평은 짐짓 생각해 주는 척하며 당적형의 약을 올렸다. 말한 대로 그가 죽립을 쓰고 있으면 문평에게 유리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문평은 당적형에게 그가 진 이유에 대한 변명거리를 주고 싶지 않았다. 작은 핑계라도 있으면 기꺼이 그 핑계를 원인 삼아 스스로를 정당화시킬 인간이라는 걸 뻔히 아는데 그가 뭣 하러 그런 빌미를 마련해 주겠는가?
그의 말을 들은 당적형이 차가운 냉소를 날렸다. 그러더니 보란 듯이 죽립을 벗어 얼굴을 드러낸다.
“당당한 당문의 제자가 무엇이 부끄러워 정체를 숨겼을까? 내가 죽립을 쓴 것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가 죽립을 벗자, 살모사 같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그 형상이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준수하진 않았어도 이목구비 정도는 제대로 붙어 있던 얼굴인데, 오른쪽 귀 하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얼굴 반쪽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누군가가 오른쪽 얼굴 전체를 잡아 뜯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설마 당적형이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문평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천마조차도 그는 예상치 못했던 듯 흠, 하는 신음을 흘리며 당적형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본다.
“그새 큰일을 당하신 모양이군요. 천하의 청린사께서 그런 흉터를 가지게 되었다니 뜻밖입니다.”
강호를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당적형 같은 명문 제자가 이런 일을 당할 확률은 높지 않았다.
“나는 얼굴을 잃었을 뿐이지만, 내 형제들은 생명을 잃었지. 그대가 비웃은 바로 그 형제들 말이야. 그대는 무인으로서의 기본이 되어 있지 않더군. 옳은 뜻을 위해 숭고하게 목숨을 바친 자들을 비웃다니. 전장에서의 예의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태도는 강호에서는 결코 용납받을 수 없는 것이다.”
얼굴이 그 지경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문평보다 한 수 위라는 듯한 당적형의 태도는 여전했다. 문평은 도집에서 도를 꺼내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문오독이 당문삼독이 된 건 개양에서의 사건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혹여 제가 모르는 다른 원인이 있었던 건가요?”
“물론 개양에서의 일 때문이었지. 우리가 어떤 경위로 그 일에 뛰어들게 되었는가는 누구보다 자네가 잘 아는 일 아닌가?”
“잘 아니 하는 말입니다. 듣기에 이상해서요. 그 두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은 천하의 이목에서 당문이 저지른 일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인면수심의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고도 모자라서 자파의 제자들까지 희생시키다니, 과연 당문의 지독함은 천하에 따를 자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워낙에 조곤조곤한 태도로 말을 한지라, 처음에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평이 그의 면전에 퍼부은 것은 욕설보다 더 치욕적인 독설이었다.
예상치 못한 모욕을 받은 당적형은 산 채로 얼굴 가죽이 벗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문평을 노려보았다. 나머지 두 사람의 어깨에서도 자욱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팽팽했던 공기가 끓어오를 듯 뜨거워졌다.
“놈! 감히 네가 그 입으로 당문을 희롱해?!”
“희롱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아니면 당문에서는 듣기 싫은 진실을 말하는 것을 희롱이라고 말합니까?”
문평은 신랄한 어조로 당적형을 비웃었다. 고작해야 두 명을 잃어 놓고 엄청난 희생을 치른 듯 주장하는 당적형의 행세가 가소로웠다. 어차피 모두 한통속, 눈 가리고 아웅 하기 위해 자파의 제자들을 희생시킨 그들 아닌가. 제자의 목숨값으로 스스로의 치부를 가리려고 들다니 치졸해도 그렇듯 치졸할 수 없었다.
건예자로 희생된 다른 어린아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어린 자옥이 겪어야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문평에게 있어 당문은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나 다름없다. 문평은 그들의 위선이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당적형이 독질려를 꺼내 문평에게 흩뿌렸다. 무려 일곱 개나 되는 독질려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쏘아지며 문평의 전신을 엄습했다.
문평은 신법을 이용해 몸을 날렸다. 앞으로도 뒤로도, 심지어는 위로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반천회류反川回流의 수법을 사용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각도로 몸을 피한다. 예전에는 내력이 부족해 자주 사용하지 못했던 수법이지만 생사현관이 타통되어 진기의 수발이 자유자재가 된 현재에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통상적인 신법과는 다르게 비스듬한 반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몸을 움직인 그의 선택은 탁월했다. 고작 일촌一寸 정도를 사이에 두고 암기들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공격 목표를 잃은 독질려들은 무서운 기세로 바닥에 꽂혀 들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란 천마의 당부를 들어 놓고도 당적형은 처음부터 살수를 쓰고 있었다. 천마는 짜증이 나 미간을 찌푸리며 당적형을 노려보았다. 문평은 손에 든 도에 도기를 씌우며 낭랑하게 비웃었다. 타통된 생사현관의 효능을 느낀 후 자신감이 배가 됐는지, 아까보다 한층 더 기세가 등등해진 눈치다.
“당문은 자신들이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항상 살인멸구를 시도하더군요. 예전에도 한 번 당할 뻔했는데, 오늘도 같은 일을 겪게 되다니요. 몰랐는데 그것이 가풍인가 보군요?”
“호랑이 간을 삶아 먹었나 보군. 그따위로 입을 놀리고도 무사하길 바라나 보지? 뼈마디 마디가 분리되고, 제 입으로 내장을 토해내게 해주마. 네가 지금 저지른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하며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될 것이다.”
분기탱천한 당적형은 머리카락이 위로 솟아오를 정도로 분노했다. 그는 암기를 내팽개치고 허리춤에서 편을 꺼내 문평을 향해 내리쳤다. 그가 진기를 이용해 편을 펼치자, 편의 마디마디마다 날카로운 갈고리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도깨비 발톱처럼 사람의 살을 한번 물면 놓지 않는 구조로 만들어진 가시가 어두운 푸른빛으로 번들거렸다.
가시가 잔뜩 돋아난 지네와 같은 모양새가 된 독편이 문평의 몸을 빠르게 쓸어 왔다. 검이나 도 같은 직선적인 무기와는 달리 편은 곡선으로 움직인다.
제때 피하지 못하면 온몸이 잡아 뜯길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문평은 금리도천파의 수법을 이용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거의 이 장에 가까운 공간을 단번에 뛰어오른 그는, 발치까지 따라붙은 편의 움직임에 식은땀을 흘렸다.
“금사편법金蛇鞭法!”
하필이면 당적형은 당문의 편법 중 가장 상대하기가 까다롭다는 금사편법을 익힌 모양이었다. 금사편법이 아니라면 그 어떤 편법이 저렇듯 독사처럼 영활히 움직이겠는가? 독이 잔뜩 묻은 푸른 편으로 금사편법이라니. 문평은 그 초식을 목도 하고서야 당적형의 별호가 청린사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문평은 이를 악물고 녹수무영을 발휘했다. 공중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저 유명한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정도는 아니지만, 녹수무영도 공중에서 두어 번 몸의 방향을 바꾸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미끄러지듯 허공을 이동한 문평은 앞으로 쏘아져 내렸다. 푸른 도기를 입힌 그의 도가 당적형의 어깨를 찔러간다.
편은 원거리를 공격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신변을 보호하기엔 불편한 점이 많았다. 무기가 길어 되감는 속도가 느린 데다 가까운 거리는 타격 자체가 불가능하다. 당장 편을 들어 문평을 공격할 수 없었던 당적형이 황급히 단혼사斷魂沙를 뿌렸다. 피부에 닿기만 해도 살이 썩어들어간다는 무서운 독 모래를 전면에 뿌려 상대의 접근을 저지하려 한 것이다.
눈앞에 자욱한 독연이 생기자 문평은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공중에서 몸을 돌려 땅으로 떨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독편이 그의 허리를 향해 다가왔다. 한번 살 속에 박히면 몸을 찢기 전까진 떼어낼 수 없는 갈고리가 지척에 닿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도와주지 마십시오!”
보다 못한 천마가 손을 쓰려고 한 순간, 문평이 전음을 보냈다.
‘왜? 아까는 도와달라며?’
자신을 닮아 가는지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문평에게 천마는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쩌려고 그러느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정말 목숨이 위태로우면 그때 도와주시라고요. 여벌 목숨 하나로도 충분합니다. 비무까지 교주님의 힘으로 이기고 싶진 않습니다.”
겉보기엔 급박해 보이는데 꼬박꼬박 전음이 돌아오는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기분이 풀리지 않은 천마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는 참견하지 않았다. 문평이 대강 어떤 기분인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철판교의 수법으로 몸을 눕힌 문평은 도날을 이용해 편을 쳐 냈다. 무위는 절정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의 몸 안에 있는 내기는 절정 그 이상이다. 수습할 능력이 모자라 모두 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으나, 화경 고수의 내단을 섭취했으니 단순히 내공의 양을 따지자면 초절정 고수에 비례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임독양맥이 타통된 절정 고수에, 초절정급의 내력이다. 고작해야 일류 고수인 당적형이 그 기세를 버텨낼 리 만무했다.
터엉! 방금 전에 일어난 마찰이 쇠끼리 부딪친 게 아니라 힘끼리의 마찰이었다는 사실을 증빙하듯, 강렬한 폭음이 공터 가득 울렸다. 문평의 도날에 부딪친 편은 불꽃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강한 반탄력에 하마터면 편을 놓칠 뻔했던 당적형은 손잡이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이를 악물었다. 진탕된 진기 때문에 속이 울컥했다. 편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서 어슴푸레 핏기가 비친다.
‘이건 무슨?’
상대를 자신보다 하수로 보고 있던 당적형은 현재 상황을 믿을 수 없어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은 이토록 큰 손해를 보았는데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손해를 보기는커녕 이를 기회로 삼을 생각인지, 뒷걸음질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뛰어나오며 도기를 쏟아 내고 있다.
“너희 당가 놈들 때문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는 당적형을 향해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덤벼든 문평은 이를 갈며 도를 휘둘렀다. 팔을 노렸으나 몸을 피하는 바람에 소매만 잘렸다.
당적형의 찢어진 소매 속에서, 숨겨 두었던 각종 암기와 독약들이 흘러나와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아느냐? 구빈원의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었지? 유람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또 무슨 죄가 있었고?! 너희들의 피만 피고, 타인의 피는 피가 아닌 것 같더냐? 스스로를 위해서는 흘릴 수 있는 눈물이, 타인을 위해서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더냐?!”
문평이 다시 한번 도를 휘둘러 반대편 팔을 노리자, 당적형의 하나 남은 소매까지도 갈가리 찢겨 나갔다.
암기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 이는 치명적인 모욕이었다. 암기란 것은 본래 원거리라는 이점을 점유한 채 일방적으로 상대를 농단하는 무기인데, 이렇듯 가까운 거리를 허용해 소맷자락마저 잘렸다는 것은 목숨을 잃은 것보다 더한 수치였다.
“반성이라도 해라. 자신들이 한 일이 죄라는 것 정도는 깨달아! 고작 두 사람의 친인이 죽은 게 그리도 원통하다면, 너희들 손에 죽어 나간 수백의 어린 목숨을 기억해라!”
문평은 치욕으로 얼굴이 벌겋게 물든 당적형을 강하게 몰아 붙이며 화를 냈다. 까마득하게 높아 보였던 당적형과 자신의 위치가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래서 당적형이 더는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문평은 기쁜 게 아니라 오히려 불쾌해졌다.
‘그래. 그렇겠지. 나는 운이 좋았으니까.’
천하제일인의 비호를 받고 있는 데다 강호를 피로 물들게 했던 천마지공을 익힌 자신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전대 천마의 내단까지 얻었으니 기연 중의 기연을 얻은 셈이다.
하나 당문에게 피해를 입은 자들 중 문평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미 목숨을 잃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사람들까지도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끌어안은 채 평생을 살아야 한다.
‘자옥이가 너희들에게 무슨 죄를 지었느냐?’
머릿속에 까만 머루 같은 아이의 눈동자가 스쳐 지나가자 문평의 마음속은 울분으로 가득 찼다. 고작 열 살도 안 된 아이의 인생은 비참할 정도로 고단했다. 너무나 지독한 경험을 연달아 한 탓에 사람을 믿는 방법은 물론이고 말까지 잃어버린 아이다.
한데 당문은 그런 불쌍한 아이조차도 살인멸구를 하려 들었다. 단지 자신들이 저지른 죄가 바깥으로 드러날까 두려워서.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들키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강호의 뜬소문을 가지고 당문을 핍박하다니.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문평의 반말에 당적형도 반말로 맞받아쳤다. 두 사람의 눈에 핏발이 솟아오른다. 당문삼독의 나머지 두 사람도 싸움에 뛰어들고 싶은 듯 움찔거렸지만, 은근히 기세를 피워 올리는 천마 때문에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편을 들어 올려 문평의 검을 간신히 막아 내고 있던 당적형은 옷이 찢어지고 피가 배어나는 처참한 몰골로 화해 숨을 몰아쉬었다.
“그게 사실이라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당문이 무생교에게 앵속을 제공해 왔다는 사실이 들킬까 봐, 무려 정도맹 안에서조차 납치를 단행했던 게 너희들 아니냐. 그 불쌍한 어린것을 죽이려고 암살자까지 보내지 않았더냐? 모든 것을 보고 들었는데 내 앞에서까지 거짓을 늘어놓을 생각이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럴 리 없다. 우리 당문이 그럴 리 없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추양에게 가서 물어봐라. 소가장에 왜 갔었느냐고. 어째서 그들에게 앵속을 건넸느냐고.”
“헛소리 마라!”
일방적으로 문평에게 몰린 당적형이 발작적으로 외치며 편을 휘둘렀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해 달려든 편은 마치 나무를 타고 오르는 뱀처럼 문평의 도를 타고 올랐다. 문평은 그를 막기 위해 내기를 쏟아 천근추의 수법을 시전했다. 거대한 바위가 내리누르는 것처럼 도가 무거워졌다.
내력을 내력으로 눌러 버리자, 타고 오르던 편이 더는 거스르지 못하고 도날 위를 미끄러지다 멈췄다. 문평은 그 위에 더한 압력을 가했다.
수십 개의 분절로 만들어진 편이 머리맡으로 쏟아지는 천근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삐걱거렸다. 놀란 당적형이 편을 빼내려고 했으나, 가시끼리 맞물려 있어 퇴진이 쉽지 않았다. 문평은 기어이 편의 분절을 가닥가닥 끊어 놓고 나서야 쏟아부었던 내력을 거둬들였다.
“쿠, 쿨럭.”
본의 아니게 내력 대결을 하고 만 당적형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초절정 고수급의 내력을 겨우 일류 고수가 감당해야 했으니 짧은 공방 동안에도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뜻밖의 결과에 안색이 변한 당문이독이 당적형에게 다가가 몸을 부축한다.
창백하게 질린 당적형이 원독이 가득한 눈으로 문평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모습이면서도 독기만은 아직도 푸릇하게 그 눈빛을 채웠다.
“그게 사실이냐?”
그가 또다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말을 내뱉을 거라고 생각했던 문평은 당적형이 예상과 다른 질문을 던지자 멈칫 동작을 멈췄다. 깊은 내상을 입어 검은 피를 연달아 뱉어내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은 당적형이 피에 젖은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네가 방금 한 말, 그 모든 이야기가 정녕 사실이더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대형? 저따위 음해가 사실일 리 없잖습니까. 우리 당문은 엄연한 정파입니다. 당문이 뭐가 아쉬워 그런 범죄를 저지른단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다. 대형. 이건 모함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는 예전의 일로 앙심을 품은 화괴가 지어낸 말일지도 모릅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아직도 당문에 대한 믿음이 투철했다. 하지만 문평을 상대하면서, 그의 분노가 꾸며지지 않은 진실한 감정임을 느낀 당적형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저 말이 사실일까? 형제들을 잃은 이후로 밤마다 그날에 대한 악몽을 꾸는 당적형은 아직도 악몽 속에 있는 듯한 기분으로 문평을 노려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 사실이 아니야!’
마음을 다잡기 위해 속으로 다짐까지 해봤지만 한번 흔들린 믿음을 되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마음속엔 이미 의심이 암귀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가슴속에 떠오르던 수많은 질문이, 문평에 의해 독버섯처럼 만개해 포자를 터트린다.
“설마 당신들도 모르고 있었던 겁니까? 당신들의 가문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거짓 없이 절실한, 그야말로 세상 전체가 통째로 뒤흔들린 자의 눈빛을 당적형에게서 발견한 문평은 자신이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어쩌면 저들 역시 상부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을 수 있었다. 알고서 동의한 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당하기만 한 걸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문평은 그러한 모습을 전장에서도 본 기억이 있다. 상부에서 이미 버린 패였음에도 그것을 모르던 병사들은 전멸 직전에야 그 사실을 깨닫고 저주를 퍼부으며 죽어갔다.
“너는 증거를 댈 수 있느냐? 당문이, 쿨럭. 우리 당문이, 정말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우리를 납득시킬 물증을 내놓을 수 있냔 말이다.”
“……제가 증거를 내놓는다고 한들 그것을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믿고 말고는 내가 결정한다! 어서 대답이나 해!”
손톱이 벗겨지도록 바닥을 긁은 당적형이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그의 격렬한 기세에, 나머지 당문이독은 얼어붙은 듯 몸을 굳혔다.
아까와는 달리 착잡한 표정이 된 문평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런 사람에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처참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타오르던 증오는 빠르게 식어 버렸다.
“제가 당신에게 해드릴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일이 정말로 궁금하시다면 문으로 돌아가 당추양 장로의 뒤를 캐보십시오.”
구구절절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말을 들을 상대가 아니다. 당적형도 나머지 당문이독도,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겨우 믿을 사람들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모든 것을 말하는 대신 가장 핵심적인 부분만을 알려 주었다. 문평이 당문의 행적에 대해 아는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었으니 사실 그 외에는 달리 말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했다.
도신을 털어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편의 잔재를 털어낸 문평은 도집 속으로 박도를 갈무리했다. 상대가 하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더 손을 댈 필요는 없어 보였다. 처음 나섰을 때 마음먹었던 것보다도 더 호된 꼴을 당한 셈이니, 지난 앙금쯤이야 이쯤에서 털어 버려도 상관없을 것 같다.
“물러 빠진 놈. 사내가 도를 뽑았으면 팔다리라도 잘라야지. 다 이겨 놓고 왜 그냥 돌아오는 거냐?”
적을 제거할 땐 화근까지 없애야 하는 법이다. 삭초제근削草除根을 인생의 신조로 삼고 있는 천마는 미흡하기 그지없는 문평의 뒤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여간 독한 양반이라니까.’
자신의 검으로 당적형의 목을 기어이 베어야 만족할 듯한 천마의 태도에, 문평은 씁쓸히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저자가 하는 모양을 보아하니 살려 두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 저들이 저대로 당문으로 돌아가면 필시 분란이 일어나겠지요. 당문 내부에서도 저들처럼 아무것도 모르던 자들이 있을 겁니다. 그 사람들이 이번 일로 그 일을 알게 된다면, 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가 아니겠습니까?”
천마가 개방에 당문의 비밀을 흘린 것은 정파 내부의 결속을 막기 위함이었다.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문평은 거기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천마 같은 사람과 함께 있으니 배우는 게 적지 않았다. 자신이 이렇듯 전략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리라고 어느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문평은 스스로에게 뿌듯한 자긍을 느꼈다. 강호의 이름난 고수인 청린사를 단신으로 물리친 데다, 그를 이용해 당문의 분란까지 조장했으니 마치 그럴듯한 고수라도 된 기분이었다.
“핑계는.”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이지만, 천마는 문평이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행동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일단 행동을 하고 나중에 이유를 갖다 붙인 거겠지.
그간 순발력이 많이 늘긴 했지만, 천마에게는 아직도 그의 속내가 고스란히 다 보였다. 천마는 싸늘하게 코웃음 치며 몸을 돌렸다. 그가 공터 밖으로 걸어나가자 문평이 그 뒤를 잽싸게 따라붙었다.
“대형, 저자를 이대로 보내실 겁니까?”
상대를 만만하게 봤다 되레 크게 당한 직후이면서도, 분을 이기지 못한 당문이독은 당적형을 초조하게 채근했다.
한 사람이 부족하면 두 사람이 덤비면 되고, 두 사람도 부족하면 세 사람이 동시에 협공挾攻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그들의 특기는 합격진이니까. 지극히 본인 위주의 실용주의적 관점을 내세우는 두 사람과는 달리, 당적형은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놔두어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 당문의 이름이 진흙탕에 내동댕이쳐지고, 죽은 두 형제가 모욕당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는 오제의 말이 맞습니다. 대형. 대형께서는 설마 저자가 한 말에 귀를 기울이시는 겁니까?”
심상치 않은 당적형의 모습에 나머지 당문이독이 번갈아 가며 물었다. 독이 올라 번들거리는 눈으로 두 사람을 둘러본 당적형이 입가의 피를 닦았다. 뺨에 난 흉터 위로 긴 핏줄기가 지나가자 그 얼굴은 마치 흉신악살마냥 험악해졌다.
“생각해 봐라, 아우들아. 다른 무엇보다 우리 형제들. 억울하게 죽어간 두 사람의 핏값이 중요하다. 가문이 그들만을 버렸을까? 사석으로 내버려진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야. 저자의 말이 정녕 사실이라면 그날 건예자를 상대했던 자들은 모두가 버려진 패였다.”
당적형이 결정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당문이 앵속을 빼돌려 무생교 같은 집단에게 건네줬다는 거나, 그 앵속이 어린아이들을 납치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사실 따위는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분노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과 형제들이 버려졌다는 점 때문이다.
무림세가는 보통의 문파들처럼 단순한 사승의 연으로 맺어진 게 아니다. 모두가 한 핏줄, 혈연으로 이어진 집안 식구들이다. 혈연의 목숨을 그런 식으로 내던질 수 있다는 사실이 당적형에게는 충격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신들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이 누구였나? 당문오독. 장차 당문의 이름을 빛낼 당문의 후기지수가 아니었던가? 방계도 아니고 직계. 더군다나 차기 가주 위의 물망에 오르던 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을, 가문은 어째서 망설임도 없이 버렸던 것일까?
‘이 일을 꾸민 것이 당추양 장로라고? 하면 이번 일은 적명 형님의 소행인 거로군.’
당적형의 눈에 광망이 번득였다. 당추양의 이름을 듣자 후계를 두고 경쟁하고 있는 자들 중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가진 이복형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당추양은 적명을 지지하는 세력의 일원으로 당적형도 잘 알고 있는 자였다.
오래전 가문의 일에 실패하고 위신이 추락한 당추양은 잃어버린 신임을 되찾기 위해 남들이 손을 대지 않으려고 하는 어두운 일까지도 서슴없이 처리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자라면 그 정도의 일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어쩌면 그자는 그 일을 체면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정이 대강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깨달은 당적형의 얼굴에 광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머지 두 사람의 당문이독은 아직도 영문을 모른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단, 문으로 돌아간다. 돌아가서 당추양의 뒤를 캐보자.”
이미 상대를 적으로 규정한 당적형의 입에서 거침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이 그를 바라봤지만 이미 결심을 굳힌 당적형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형.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추양 장로는 가문의 어른입니다. 어쩌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상관없다. 정녕 그에게 우리 형제들의 피에 대한 책임이 있다면 어쩔 테냐? 억울하게 죽은 형제들의 원한이 너희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란 말이냐?”
“대형…….”
“돌아가자. 돌아가서 우리가 들은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자. 사실이라면 진정한 책임자를 처벌하고, 아니라면 감히 거짓된 정보로 우리에게 혼란을 일으킨 저 군관을 죽여야지.”
당적형은 소름 끼치게 다짐하며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가 죽은 형제들을 명분으로 내세우자 나머지 두 사람도 더는 반대를 하지 못하고 그의 뜻을 따랐다.
‘사람이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지.’
감각을 곤두세워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천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순진한 문평은 당적형의 반응을 보고 그들을 무고한 희생자라고 믿어 버린 모양이지만, 천마는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강호의 일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고작 일각에 불과할 뿐, 그 속에는 각각의 사연과 이유들이 난마처럼 어지럽게 얽혀 있다.
천마는 당적형의 반응을 통해 당문에 새로운 피바람이 불 것임을 예상했다. 외우내환이라. 나쁘지 않군.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푸는 격이니. 당문이 저지른 일에 대한 적당한 대가라고 생각하며 천마는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에선 아직도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는 문평이 종종걸음을 치며 따라오고 있었다. 천마는 무럭무럭 자라는 건강한 잡초가 지극히 만족스러워 입가에 진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화단을 다 뒤덮어도 좋으니 이대로만 자랐으면 좋겠다. 스스로 자신감을 찾는 모습을 보니 보기에 아주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