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장
까마득한 물빛 너머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흐린 시야 때문에 제대로 확인할 순 없지만 물고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크기가 크고, 움직이는 모습 역시 어류와 달랐다. 주위보다 물빛이 한층 더 어두워지는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천마는, 그것들이 문평을 데리고 간 건예자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천마는 한 마리 돌고래처럼 유연하게 그들을 향해 헤엄쳐 나갔다. 따로 수공을 익혀 본 적이 없어서 마음만큼 속도가 나지 않았지만, 몇 번 움직여 보는 것만으로도 물속에서의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느리게, 하나 점점 더 빠르고 능숙하게 천마는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문제는 숨을 쉬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는 건예자들이 그보다 한층 더 빠르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천마도 수로로 들어갔다. 하지만 좀처럼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천마는 초조해졌다. 문평이 지금 어떤 상태일지 짐작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이미 의식이 없을까?’
그는 가능하면 전자의 상황이기를 기원했다. 정신을 잃은 상태라면 일각은커녕 반 각도 견디지 못할 터였다. 무공을 모르는 보통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숨이 붙어 있지도 못한다.
수로 안의 유속은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그에 더해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기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위험천만한 암초들까지 있었다. 어두운 시야로 빠르게 이동하다 보니 자칫하면 바위에 부딪힐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천마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그들의 뒤를 쫓았다. 빨리 따라잡았어야 하는 건데 너무 깊게 들어왔다. 이미 삼사십여 장을 지나온 것 같으니 돌아갈 때도 그만큼의 시간이 걸릴 터.
건예자들을 잡는 것도 문제지만 다시 물 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의 시간도 문제다. 문평이 일류에 속하는 고수라지만 숨이 모자란 상황에서는 그조차 살아남긴 어렵다. 지금 그들에겐 시간이 적이었다.
진기를 더해 물의 흐름을 타자 그의 몸이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천마는 두 손에 푸른빛 강기를 입히고 건예자를 쫓았다. 맨 끝으로 뒤처져 있던 놈의 등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놈의 머리통을 단번에 날려 버린 후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를 피해 물살을 갈랐다.
반격 한 번 못 해보고 망가져 버린 놈의 기척을 느꼈는지, 앞서가던 놈들 중 세 놈이 돌아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바짝 마른 어린 여자아이 하나와 남자아이 둘. 기껏해야 열 살이 넘지 않았을 가련한 것들이다.
천마는 동정심도 없이 그 시체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냈다. 초절정 고수인 척을 할 때는 고전하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본색을 드러내도 상관없는 지금은 무위를 드러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물속에서도 위맹하기 짝이 없는 그의 수강手罡에, 팔다리가 잘려 나간 것들이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아직도 흉성이 남아 시뻘겋게 뜬 눈을 사납게 희번덕거렸지만 이미 사지가 없으니 속수무책이다. 시간이 있었으면 일일이 목을 자르고 갔으련만, 문평의 안위가 근심인 천마는 여전히 눈을 뜨고 있는 그것들을 외면하며 앞으로 헤엄쳐 갔다.
얼마나 많은 어린아이를 생강시로 만들었는지 그 후로도 그의 앞길을 막는 놈들은 적지 않았다. 자그마한 몸에 오로지 살의만을 두르고 아귀같이 뛰쳐나온 그것들은 하나같이 포악하고 징그러웠다. 천마는 망설임 없이 그것들을 죽여 갔다. 몇몇은 머리를 터트렸고, 나머지는 팔다리를 잘라 뒤를 쫓지 못하게 했다.
운 좋게 스쳐 지나갔다 되돌아오지 못한 놈들은 그냥 놔두고 앞으로만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아이의 것과는 크기가 다른 몸뚱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축 늘어졌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아직까지 발버둥 치고 있는 문평의 모습이 몹시도 반가웠다.
문평을 끌고 가는 건예자는 모두 두 놈이었다. 한 놈은 문평의 목덜미를 휘어잡고 있었고, 다른 한 놈은 허리춤을 붙들었다. 아직 손에 강기를 입힐 실력이 못 되는 문평은 쇠조차도 튕겨내는 놈들의 피부 위를 허망하게 긁어대고 있었다.
‘저러다 독물이라도 스며 나오면 어쩌려고.’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그의 행위를 본 천마는 매섭게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냈던 핏물도 걱정이 됐다. 유속이 빠르다 보니 앞서가는 문평에게도 몇 방울 닿았을지 모르는데, 그 지독한 독이 녀석의 몸에 어떤 상처를 입혔을지 알 수 없다.
천마는 서둘러 다가가 문평의 허리를 잡은 놈을 떼어 냈다. 버둥거리는 놈의 목덜미를 잡아 반대편으로 돌리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척추를 부러트린 후 물이 흐르는 쪽과 반대 방향으로 집어 던졌다.
그으으으윽.
물속이라 진동처럼 퍼지는 괴성을 울리며 건예자가 사라져 갔다. 문평의 목을 잡고 있던 놈이 몸을 돌려 그와 대적했다.
천마는 그놈의 몸을 잡고 천근추의 수법을 사용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가라앉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놈은 만근 거석과도 같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천마와 함께 아래로 가라앉았다. 수로의 바닥까지 내려간 천마는 녀석의 목을 부러트리고 비좁은 암초 사이에 그 몸을 끼워 넣었다. 놈의 몸뚱이가 떠올라 독이나 다름없는 핏물을 흘리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손을 놓은 사이에 문평은 혼자 물살을 따라 흘러갔다. 더 이상 그 몸을 붙잡고 있는 놈들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숨을 참아온 탓에 반쯤 의식이 없는 듯했다.
천마는 문평을 따라잡고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흐릿하게 뜬 눈동자가 초점을 잡지 못하고 방황한다. 있는 힘껏 숨결을 불어 넣어주자 문평은 겨우 정신이 든 듯 떨리는 눈꺼풀을 열어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는 문평의 폐 속으로 더 많은 공기를 불어 넣어주며 머리를 굴렸다.
우여곡절 끝에 문평을 되찾긴 했지만 이제는 나가는 것이 문제다.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수로 속으로 더 깊이 들어와 버리는 바람에 빠져나가는 시간이 만만치 않게 돼 버렸다. 과연 문평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천마는 그 점을 자신할 수 없었다.
“정신 차리고 귀식대법龜息大法을 운용해라. 물 밖으로 나갈 때까지 숨이 남아 있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천마는 전음을 이용해 문평에게 해야 할 바를 알려 주었다. 아직도 정신이 혼몽한 듯했지만, 그의 목소리에 섞인 다급함을 알아들은 듯 문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는 문평의 허리를 안고 몸을 돌렸다. 들어온 곳으로 다시 나가려고 한 것이다.
그의 계획은 시도도 하기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가 막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려고 한 순간, 수로의 벽이 진동하더니 머리 위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거친 물살이 요동치듯 출렁였다.
우르릉, 쾅. 콰앙.
먼 곳에서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들려왔다. 자연적으로 생긴 일이 아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짓이다. 수로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의 머릿속에는 그의 곁을 스쳐 지나던 건예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법 머리를 썼군. 곽효. 비장의 한 수라 할 만해.’
강시가 이행할 수 있는 명이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는, 자연스럽게 뒤처진 그들의 모습을 보고서도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강시 주제에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저 몸이 단단한 시체였을 뿐이라면 곽효가 그렇게 기를 쓰고 만들어 내려고 하지는 않았을 터다. 어떤 기이한 술법을 사용했는지 놈들은 심령으로 조종이 가능했고, 심지어는 원거리에서도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녀석들이 한 가지 이상의 명령을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에 비하자면 그다지 놀라울 것도 못 됐다.
‘빌어먹을.’
들어온 곳으로 다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천마는 몸을 돌려 앞으로 헤엄쳤다. 뒤로 돌아갈 수 없으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현경에 이른 그조차도 물속에서 한 시진 이상을 버틸 수는 없었다.
그는 문평의 몸을 꼭 끌어안고 물살을 가로질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수공에 점점 더 능숙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수공에 숙달되어 봤자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소용없는 노릇이다. 한참 동안을 헤엄쳐 봐도 수로의 끝은 나타나지 않았다. 갈수록 무거워지는 품 안의 무게가 마음에 걸린다. 천마는 간간이 문평에게 숨을 불어 넣으며 헤엄치고 또 헤엄쳤다.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빛은 보이지 않았다.
***
끊임없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천마는 정신을 차렸다.
그가 깨어난 곳은 축축하게 젖은 바위 위였다.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진 옷자락이 그의 사지를 불편하게 휘감았다. 축축하게 늘어진 것은 옷자락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손을 들어 해초처럼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을 떴음에도 사위는 어두웠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아니었으나 달빛 흐린 날의 한밤중쯤은 되었다. 채 다섯 장이 넘지 않는 지척에서 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유속은 빠르지 않았으나 텅 빈 공동에 울리는 바람에 듣기 거슬릴 정도로 물소리가 컸다.
‘아직 깨지 않았군.’
천마의 옆자리엔 문평이 누워 있었다. 척척한 바위 위에서 그냥 잠든 그와는 달리 문평이 누운 곳은 보송보송하게 마른 모래 위였다. 지하에 만들어진 동굴 속에서 자연적으로 이런 자리가 생겨났을 리 없다. 그 잠자리는 말할 것도 없이 천마의 솜씨였다.
원래는 문평이 누운 자리도 바위투성이의 험지에 불과했다. 그런 것을 천마가 바위를 무너트려 모래로 만든 후 내력을 이용해 물기를 날려 보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었던 옷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말렸다.
그렇지만 그 지극한 정성도 시간이 지나니 도로 아미타불이다. 한숨 자고 일어나 보니 바삭하게 말랐던 옷이 다시금 축축해졌다. 문평의 얼굴이 저렇듯 창백한 것은 차츰 젖어 들어가는 옷에 체온을 빼앗겨서다. 이렇게 되면 옷을 말려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사실을 알게 된 천마는 간병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그는 문평의 옷을 벗기고 자신도 벌거벗은 몸이 되었다. 소주천을 해 온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낸 후, 체온이 내려가 차갑기 그지없는 몸을 단단한 품에 끌어안는다. 그 위를 말린 장포으로 덮었더니 그럭저럭 쾌적해진다.
추궁과혈을 하며 몸을 문질러 주자 문평의 몸에도 체온이 돌아왔다. 천마는 천천히 화색이 도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마른 입술을 어루만졌다.
의식 없는 문평의 입술은 말랑하지만 건조했다. 숨소리가 평온한 것을 보니 신체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도통 깨어나지를 않는다. 습관처럼 맥을 짚어 본 천마는 그의 맥이 정상적으로 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았다.
내기를 넣어 살펴본 결과 기혈이 다소 상하긴 했지만 그것은 미약한 내상일 뿐 심각하게 생각할 만한 상처가 아니었다. 아마도 숨이 모자란 상태에서 어렵게 귀식대법으로 전환하느라 운기를 서둘렀던 모양이다.
천마는 이 동굴 속으로 들어온 게 언제쯤인지를 짐작하지 못했다. 길면 이틀, 짧으면 하루 반나절 정도 되었을까?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문평을 끌고 수로 안을 헤쳐 나가다 간신히 발견한 것이 이 동굴이었다. 지하로 흐르는 물줄기가 지표면 아래에 생성된 공동과 만난 흔치 않은 장소인데,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문평은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순간 결정적인 방심을 했던 사람은 곽효가 아니라 천마였다. 그 교활한 쥐새끼를 눈앞에 두고 딴생각을 했으니 뒤통수를 맞을 수밖에.
처음 생각했던 대로 단번에 쳐 죽였어야 하는 건데, 다 잡았다는 착각에 여유를 부리다가 어처구니없이 당했다. 곁에 없던 것도 아니고 눈앞에서 뻔히 보면서도 그 수단에 넘어갔으니 이번만큼은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참 골고루 건드리는군. 여영에, 우경에, 이번에는 문평까지. 하는 짓이 누구랑 꼭 닮았어. 남의 약점을 가지고 비열하게 헤집는 행태가 아주 똑같아.’
정작 당사자는 건드리지 못하면서 주변 사람들만 건드리는 그의 행태에 천마는 짜증이 치밀었다.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라지만 곽효가 하는 짓은 그렇다고 하기에도 질이 나빴다.
그는 자신보다 힘없고 약한 자들만을 표적으로 삼았고, 그들을 방패로 이용해 일신의 안전을 도모했다. 천마의 지인 외에도, 그에게 당한 자들은 모두 그보다 약한 자들뿐이다. 건예자가 그랬고, 청혈단이 그랬다. 그가 눈가림용으로 내세운 무생교의 수족들 역시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소속도 모르고 장기판의 말처럼 이용당하기만 할 뿐이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에 버림받겠지.’
그들의 존재는 버려지는 바로 그 순간에 진정한 효용 가치가 있었다.
천마는 곽효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기린패와 옥기린처럼, 문평도 천마를 끌어들일 미끼에 불과했다. 건예자들에게 수로를 무너트리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에 대해 큰 기대를 걸진 않았을 터였다. 이 정도의 일로는 문평은 몰라도 천마를 죽일 순 없다. 기껏해야 잠시 가둬 두거나 곤란하게 하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곽효에겐 그렇게라도 해서 시간을 벌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쓸 만한 패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하긴, 무려 20여 년을 꾸민 음모인데 일거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리는 없겠지. 진무가 놈을 놓쳤다면 고생은 영의가 하겠군.’
그는 아직 청혈단이라는 무력 단체를 움직일 힘이 있었고, 정도맹에도 적지 않은 지분이 있다. 이제껏 벌여 놓은 판도 있으니 음모의 방향을 수정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터. 차분히 앉아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니 그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일지도 대강 짐작이 갔다.
“으, 으음.”
줄곧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던 문평이 뒤척이는 소리를 냈다. 그의 입술에서 옅은 신음 소리가 들리자, 천마는 시선을 내려 그의 안색을 살폈다. 갓 태어난 매미가 날개를 말릴 때처럼 문평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
깜빡깜빡.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며 눈을 뜬 그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다 천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문평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천마를 바라보다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잠긴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다.
“밤입니까?”
오랫동안 의식이 없었던 티를 내는 것인지 그의 목소리는 탁하고 무뎠다. 발음이 불분명해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든 질문에 천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줄곧 깨어 있었으면 짐작할 수 있었을 터인데, 중간에 잠깐 잠들었거든.”
“……여기는 어디입니까?”
“글쎄. 뭐라고 불러야 하나. 지하 동굴? 공동? 아니면 감옥?”
궁금해서 던진 질문에 대답 대신 수수께끼가 돌아온다. 아직 정신이 완전히 맑지 않은 문평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만 찌푸렸다.
시간이 지나자, 문평의 얼굴에 분명한 의식의 흔적이 떠올랐다. 마침내 기절하기 전의 상황까지 기억해 낸 문평은 새삼스러운 눈빛을 하고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저를 구해주셨군요.”
그는 다소 어리둥절한 태도로 그 말을 했다. 감사 인사라기보다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바가 정확한가를 되묻는 확인 절차 같은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문평은 천마의 이번 행동을 꽤나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천마는 깊은 물 속은 물론이고, 저 끔찍한 지하수로까지 감내해 가며 자신을 쫓아와 주었다. 그야말로 문평 하나를 살리기 위해 그 지나친 수고를 모두 감수했다는 이야기다.
“내가 네 목숨을 구한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새삼스러우냐?”
“이번은 지나가다 구해주신 게 아니니까요. 저를 구해주기 위해 오신 게 아닙니까? 저 길디긴 수로를 지나 이 동굴 속까지 말입니다.”
“지나가다 구해주다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네가 보기엔 내가 정파의 협사라도 되는 것 같으냐? 눈에 보이는 족족 사람을 구하고 다니는 얼간이도 아닌데 지나가다는 무슨 지나가다.”
그럼 눈에 보이는 족족 사람을 구하고 다니는 얼간이도 아닌데 자신만은 꼬박꼬박 구해줬다는 건가? 문평은 어리둥절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곱씹어 보니 천마의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다.
천마의 성격으로 볼 때 그가 남의 목숨을 ‘우연히’ 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마디 말을 하더라도 계획 없이는 말하지 않는 이가 아니던가. 그가 남의 목숨을 구해준다면,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천마가 자신의 목숨을 적지 않게 구해준 것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모든 일을 소위 ‘황소가 뒷걸음질하다 쥐를 잡은’ 일 정도로만 여기고 있던 문평은 가벼운 충격에 빠졌다. 천마의 말대로 새삼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문평은 이제껏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게 아니라,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탓이었다. 그에게는 천마가 자신을 특별히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따져 볼 용기가 없었다. 천마를 머리 위에 드리운 처마라고까지 여겼으면서 정작 그게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 보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민감한 이야기를 왜 꺼냈을까?’
문평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천마의 눈치를 살폈다. 자칫하면 보은報恩을 미끼로 엉뚱한 일을 강요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가슴은 두근반세근반 새가슴처럼 뛰고 있었다.
하지만 문평의 예상과는 달리 천마는 의외로 그에 대한 말을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자신이 또 한 번 목숨을 구해줬으니 이 은혜를 평생 잊지 말아야 한다고 으스대지도 않았고, 예상했던 것처럼 터무니없는 요구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는 조용한 시선으로 문평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웃기만 했다. 네 하찮은 걱정 따위 다 꿰뚫고 있다는 시선인데도 나무라는 구석은 없다.
천마답지 않은 현묘한 미소가 정말이지 의외였다. 그가 행동하는 것을 보면 본래 나이보다 외견상의 나이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은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맑은 두 눈에선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의 자애로움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웃으니 정말 사람이 달라 보인다.
그는 우아한 손가락을 들어 문평의 이마를 밀었다. 문평은 들고 있던 고개를 바닥에 뉘며 다시 한번 눈을 깜빡였다.
“정신이 들었으면 운기라도 해 보거라. 어디 상한 곳은 없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천마는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은 문평에게 딴생각을 할 여유를 주었다. 문평의 피해망상적인 예상과는 달리 이번 일을 자신의 실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천마는 그에게 대가를 요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자업자득이다. 자신의 것을 스스로 챙기지 못해 당한 일인데 그 책임을 어떻게 문평에게 묻는단 말인가? 천마에게 있어 대가를 받아 낼 상대가 있다면 그 사람은 곽효지 문평이 아니다.
사실 천마의 이러한 마음가짐은 생명에 대한 빚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보다 한층 더 심각했다. 불행히도 문평은 그러한 사실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는 더 추궁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운기를 시작했다. 기혈을 안정시키는 데에는 천마가 가르쳐 준 심법만 한 게 없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았기에, 그가 운기하는 심법은 예의 그 채양보양의 심법이었다.
뜨끈한 기운이 단전에서 일어나 상체로 올라갔다. 천마의 진기를 받아들여 한층 정순해진 진기는 탄탄하게 닦인 기혈을 타고 흘러 사지로 뻗어 나갔다. 문평은 눈을 감고 따끈따끈하게 몸을 달구는 기운에 집중했다.
천마가 만들어 준 채양보양의 심법은 기본적으로 도가의 양생술養生術을 기반으로 했고, 그중에서도 특히나 육자기결六字气诀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한 토납이 아니라 상승의 내공 공부로 바뀌며 여러 가지 공능이 더해졌다고는 해도 허嘘、가呵、호呼、흡歙、취吹、희嘻의 여섯 글자를 중요시하는 것은 변함없는 일인지라, 이 심법으로 운기할 때는 무엇보다도 호기呼气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이 심법도 내상을 치유하는 데는 상당한 효험이 있는데 말이지……. 좀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 붙일 순 없을까? 늘 채양보양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이 심법이 채양보양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그런 일에만 쓰는 것도 아니고, 혼자 운기할 때도 채양보양의 술을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낯 뜨거운데. 저 사람은 이 좋은 심법을 만들어 놓고 왜 이름도 안 짓느냐고.’
문평은 차마 천마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는 불평을 속으로 삭이며 운기를 계속해 나갔다. 무려 대종사의 반열에 오른 고수가 손수 만든, 제대로 된 이름만 있으면 강호의 일절이라고 불릴 만한 심법이 그의 몸을 휘돌며 소주천했다. 내기가 혈도를 타고 흐르자 문평의 정신도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나를 잊고, 동굴도 잊고, 천마도 잊는다. 운기에 깊이 빠져든 문평은 소주천이 아니라 아예 대주천을 하며 가볍게 입은 내상을 치유해 나갔다.
혹여 자신 때문에 문평의 집중이 흐트러질까 염려한 천마는 문평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던 손을 거두고 그의 운기가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똑같이 눈을 감고 있어도 의식이 있는 얼굴과 의식이 없는 얼굴은 보는 재미가 달랐다. 어떤 방법으로도 잴 수 없는 것이 영혼이라지만, 이럴 때 보면 혼백魂魄이란 게 진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천마는 질리지 않는 시선으로 문평의 얼굴을 감상했다. 그 시선은 문평이 마침내 운기를 끝내고 눈을 뜰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반나절은 족히 지난 것 같고, 어찌 보면 단지 일각만 흐른 것 같기도 하다.
문평은 지하수가 흐르는 강가에 우두커니 앉아 흐르는 물살을 바라보았다.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검은 물줄기가 콸콸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사방을 울리는 것은 오로지 물소리뿐이다.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물속으로 잠수해 갔던 천마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강제적으로 머물게 된 이 동굴은 제법 신기한 장소다. 너비는 약 오십여 장. 높이만 해도 거의 십여 장에 달한다. 지하에 뚫린 공동이라고 하기엔 쉽사리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크기다.
이 공동엔 다른 동굴들과 달리 천장을 지탱하는 석주가 없었다. 중간은 모두 텅 비어 있고 가장자리의 벽을 타고 올라가야 천장에 닿을 수 있었다. 의아하게도 벌레나 박쥐 같은 생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옛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석균이니 버섯이니 하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다 보니 먹을 것이라곤 진짜로 물고기뿐이었다.
막막하게도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수로의 한 축이 무너졌는데도 여전히 지하수가 흐르는 것을 보면 물이 유입되는 다른 장소가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장소를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야도 어두운 수로 안을 샅샅이 뒤져야 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현재로서는 수로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는 일조차 요원하기만 하다. 이곳으로 들어온 첫날, 문평이 운기조식을 끝낸 직후 천마는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탈출 방법을 확인하기 위해 반대편 수로를 탐색했다. 그러나 반 시진이 지나 동굴로 돌아온 천마는 고개를 흔들며 반대편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삼백여 장을 지나도 수로가 계속되는 바람에 수로가 끝나는 지점까지는 가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천마 혼자 나가는 것이라면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가 아니라 문평의 한계다. 귀식대법을 펼친다고 하더라도 문평이 물속에서 반 시진을 버티는 건 무리였다. 아니, 반 시진이 다 뭔가. 이 각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그는 빈사 상태가 될 뻔했다.
혹여 동굴 안에서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동굴 벽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동굴 천장에 박힌 야명주夜明珠를 보면 알 수 있듯 이 동굴에 인간의 손길이 닿은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문평이 아니라 천마가 손수 나섰음에도 으레 있을 법한 기관은 발견되지 않았다.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벽 전체를 샅샅이 훑어보고, 진기를 이용해 벽을 두드려 보기도 했지만 비어 있는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것이 천마의 감각인데, 그런 천마의 감각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정묘한 기관이 존재할 리 없었다. 마음먹고 나선 그가 찾지 못한 거라면 기관은 정말로 없는 거였다.
이럴 거면 대체 뭣 때문에 동굴 천장에 저 비싼 보석을 박아 놓았는지 모르겠다. 성 하나를 살 수 있을 만한 가격으로 거래된다는 것은 낭설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스스로 빛을 내는 보석이라는 건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기진이보奇珍异宝다. 덕분에 이 깊은 지하 속에서도 눈앞을 분간할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러웠으나 이곳에 야명주를 박아 놓은 선인先人의 의도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퍼덕, 퍼덕, 퍼덕.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문평은 지하수에서 돌연 물고기들이 튀어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흠칫했다.
계곡을 타고 흘러 내려온 듯, 맑은 물에서만 산다는 열목어 몇 마리가 동굴 바닥에서 퍼덕였다. 물고기가 스스로 물에서 튀어나올 리 없으니 이 기이한 현상에는 따로 원인이 있는 게 분명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커먼 수면 위로 그 원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가오는 기척도 없이 갑자기 수면으로 솟구친 그 사람은, 물 위를 미끄러지듯 헤엄쳐 문평에게로 다가왔다.
번번이 옷을 말리는 것도 귀찮다고 전라로 수로에 들어갔던 천마는 벌거벗은 몸으로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야명주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이 조각 같은 천마의 몸매를 비췄다. 옥을 깎은 듯 섬세한 근육 위로 맑은 물방울들이 진주처럼 흘러내렸다.
천마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찮은 듯 쓸어 올리더니, 귀에 들어간 물을 빼려는 듯 고개를 옆으로 숙여 몇 번 털었다.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의식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태도였으나 보고 있던 문평의 가슴은 덜컹 내려앉고 말았다.
‘제, 젠장. 뭐가 저렇게 고혹적이야?’
일부러 작정하고 덤벼들 때만큼 선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지금 모습이 더 위험스러워 보였다. 무심해서 한층 더 사람의 시선을 끄는 데다 본인이 스스로의 매력에 대해 별 자각이 없다는 점이 특히 치명적이다.
‘저런 외모를 가졌으니 천하제일인이 된 게 당연하겠지. 저 사람에게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다면 인생 자체가 불행해졌을걸.’
문평은 천마가 들었으면 경을 칠 생각을 하며 천마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는 고개를 든 천마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의아한 듯 한쪽 눈썹을 휘어 올리며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 뜨끔한 문평은 옆에 개어 놓았던 장포를 들고 천마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오래 걸리셨군요. 성과가 있으셨습니까?”
혼자라면 진작 빠져나갔을지도 모르는 천마를 붙잡고 있는 건 자신의 존재다. 그 사실을 알기에, 요즘 들어 문평의 태도는 무척 나긋나긋해졌다.
천마는 살가워진 문평의 속내를 훤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쁘지 않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나무토막마냥 뻣뻣하던 놈이 익숙하지도 않은 애교를 떠는 게 의외로 볼만했다.
어미 잃은 강아지처럼 주인 눈치를 보면서도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니게 된 것도 색달랐다.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지만 기실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아마 이런 재미로 노인네들이 어린 희첩을 두는 모양이다.
“아니. 별다른 성과가 없다. 지하수가 유입되는 구멍 몇 개를 찾아내긴 했는데 그곳들은 말 그대로 구멍이야. 사람이 지나갈 곳이 못 되더군.”
“그렇습니까?”
“무너진 수로를 다시 건드려 보려고 해도 지반이 약해 걱정이고……. 아무래도 다시 반대편 수로 쪽으로 가봐야겠다.”
“그쪽으로도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길이 있기는 한가 확인이라도 해봐야지. 저번에는 중간에 돌아왔으니 이번엔 끝까지 한번 가볼 작정이다. 그곳이나마 지상으로 통하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 한 군데라도 길이 나 있다면 영영 이 안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되니까.”
“……예.”
“식사나 하자. 물질을 오래 했더니 배가 고프군.”
천마는 벌거벗은 몸에 장포를 대충 휘어 감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문평은 바닥에서 여전히 퍼덕거리는 물고기를 주워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천마는 내공을 이용해 탁자처럼 매끄럽게 깎은 바위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이곳은 그들이 식사하는 장소로 이용하는 곳인데,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잠자리로 사용하는 모래 침상도 있었다.
“줘 봐라.”
천마는 아직 살아 있는 물고기를 문평에게서 건네받았다. 두 손에 각각 한 마리의 물고기를 손에 쥔 천마는 열양지력熱陽之力을 일으켜 구이를 만들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진짜로 불에 구운 것과 같은 맛이 나는 건 아니지만, 나무는커녕 이끼도 없는 이곳에선 달리 방도가 없다.
산천어회도 한두 번이지 매 끼니를 날것으로 때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맛이 있든 없든 간에 익힌 음식과 익히지 않은 음식은 목으로 넘어가는 식감 자체가 달랐다.
무공이란 참 다방면의 상황에서 유용한 물건이다. 본래 용도대로라면 사람을 죽이기 위해 고안된 힘이건만, 방법을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문평은 오히려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무공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일 거라는 객쩍은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활인검活人劍이 달리 활인검이겠는가. 어떻게 사용하든 사람을 살리면 그게 바로 활인검이다.
“운기는 잘 하고 있는 거냐?”
순식간에 몇 마리의 물고기를 모두 구운 천마는, 그중 한 마리를 집어 들고 뜯어 삼키며 문평에게 물었다. 천마처럼 탁자에 엉덩이를 걸친 문평은 그와 나란히 앉아 구운 물고기를 뜯어 먹었다. 따로 간을 하지 못했기에 그저 밍밍하기만 한 맛이지만, 그래도 먹어야 살 수 있다. 다행히 열목어는 살 자체에 단맛이 있어 다른 물고기들보다는 먹기가 한결 낫다.
“시키신 대로 대주천 두 번을 끝내고 동공動功도 했습니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 마보를 하다가 잠시 쉬는 참이었습니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자신의 무공수위라는 사실을 문평이 모를 리 없었다. 본의 아니게 천마의 발목을 잡게 된 그는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열성적으로 내공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외공이 아니라 내공이다 보니 무공 수련도 내가의 공부에 치중했다.
그러나 내가 공부內家工夫라는 게 하루 이틀 열심히 한다고 해서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몇 년씩 반복적으로 꾸준히 몰두해야만 비로소 효과가 나타나는 늦은 공부다. 그러다 보니 문평의 노력에도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진 않았다. 겨우 며칠의 열성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 문제이니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공부는 서두른다고 해서 진척되는 것이 아니다. 조급하게 굴었다가 주화입마라도 당하게 되면 더 골치가 아파지니, 운기를 할 땐 마음을 다스리고 머리를 비우도록 해라.”
“예.”
문평 같은 무인에게 천마의 조언은 고작 한마디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금과옥조다. 문평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물고기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열목어 자체가 그다지 몸집이 크지 않아 한 사람당 몇 마리씩을 먹는다고 해도 그저 배를 채울 정도에 불과했다.
식사가 끝나자 문평은 남은 뼈를 정리해 물가에 갖다 버렸다. 한쪽에 쌓아 두었다가 부패라도 하면 큰일이니 모든 쓰레기는 이렇게 즉각 처리한다. 흐르는 물이라 다행이지 고인 물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가 다시 자리에 돌아오자 천마가 겉옷을 바닥에 펼쳐 놓은 것이 보였다. 딱딱한 바위 위보다는 그나마 나은, 까끌까끌한 모래 위에 한 겹 천을 깔고 드러누운 천마는 뇌정전의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양 편안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그새 옷을 말렸는지 젖어 있던 장포가 보송보송했다. 모래에 쓸리는 바람에 여기저기 구멍 나고 찢어진 곳까지 있었지만 그래도 천이 한 겹 깔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문평은 자리에 길게 누워 자신을 기다리는 천마를 향해 머뭇머뭇 다가갔다. 배부른 맹수처럼 가늘게 뜬 시선이 그를 살피고 있었다. 벌거벗은 채 전신을 드러낸 건 상대방인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문평이다. 그는 시선 둘 곳을 몰라 허둥대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리 가까이 와라.”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하고 있던 천마가 손을 까딱이며 그를 불렀다. 반항하고 싶어도 그럴 명분이 없는 문평은 목줄이 붙잡힌 개처럼 그 손짓에 질질 끌려갔다.
천마는 문평이 스스로 제 앞에 설 때까지 그를 보고만 있었다. 웃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는 조용한 얼굴에, 까만 눈동자만 유달리 번득인다.
천마의 눈앞에 이른 문평은 목덜미까지 벌겋게 붉히며 옷을 벗었다. 사락, 사락, 사락. 물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게 뻔한 데도 문평의 귀엔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천둥같이 크게 들린다.
문평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되어 천마의 앞에 섰다. 천마는 그제야 비로소 손을 뻗어 문평을 끌어당겼다. 천마의 단단한 몸에 끌어안긴 그는 허벅지 사이로 서슴지 않고 들어오는 무릎을 느끼고 등줄기를 떨었다.
차갑게 식은 천마의 가슴이 긴장한 피부에 와 닿았다. 천마는 문평의 어깨선을 따라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커다란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색깔이 많이 진해졌군.”
천마는 손끝으로 문평의 유실을 짚으며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꽃다운 분홍색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완연히 적자줏빛을 띠고 있는 그의 젖꼭지는 확실히 예전에 비해 색이 짙어졌다. 그럴 만도 한 게, 문평의 가엾은 유실은 그동안 숱하게 핥아 올려지고 빨리고 깨물린 데다 때때로 꼬집히기까지 하며 적잖게 시달려 왔다. 그 행위를 한 사람은 대부분 천마였으니 이 일을 새삼스레 입에 담는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다.
“아래도 색이 많이 진해졌는데, 확인해 본 적 없지?”
천마는 짓궂게 농지거리를 하며 문평의 유실을 지분거렸다. 문평은 홧홧하게 붉어지는 낯으로 눈을 굴리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자기 항문을 일일이 들여다보며 확인하는 인간이 세상에 어디에 있다고?’
“별로 보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아깝군. 네 그곳이 얼마나 어여쁜지는 직접 봐야 알 수 있을 텐데.”
천마는 유실을 희롱하는 손의 반대편 손으로 문평의 엉덩이 사이를 가로질렀다. 긴 손가락이 문지르듯 비비며 들어오자 문평의 다물린 근육이 놀라 움츠리며 그 손을 조인다. 마보로 인해 단련되어 있던 괄약근이 단단하게 손을 물고 놓지 않았다.
천마의 것과 같은 대물을 머금었음에도 좀처럼 탄력을 잃지 않는 문평의 근육은 그야말로 명기라 할 만했다. 평소 단련되어 있던 하체 덕에 근육 자체가 건강한 데다 채양보양술 덕분에 근력도 늘어 조임이 탄탄하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빡빡한 그곳은 손가락을 머금기도 벅차 보였다.
이토록 평범해 보이는 사내가 엉덩이 사이에 극락을 숨기고 있음을 누가 알까? 천마는 요물이 따로 없는 구멍을 멋대로 희롱하며 은근히 미소를 지었다.
천마의 손가락이 내벽을 헤집자 다리가 절로 벌어졌다. 비스듬히 누운 채로 앞뒤를 모두 희롱당하고 있던 문평은 손 놓을 곳을 찾지 못해 허둥거리다 천마의 가슴을 짚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천마의 가슴 근육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피부 결은 비단이 따로 없을 만큼 부드러운데, 한 겹 아래의 근육은 돌덩이가 저리 가라 할 만큼 탄탄하다.
색이 진해진 문평의 것과는 달리 어여쁜 살굿빛을 띠고 있는 그의 유실은 공들여 세공한 보석이라도 되는 양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꼭 도화 꽃잎이 가슴 위에 떨어져 잠시 쉬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다.
‘이건 대체 뭐지? 미남은 심지어 젖꼭지까지 잘생겼단 말인가?’
여인을 안을 때조차도 본 적이 없는 절묘한 색감에 어이가 없어진 문평은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남의 유실은 보기 싫은 갈색으로 만들어 놓고 정작 제 가슴에는 어여쁜 꽃판을 달았다.
자기가 만지고 핥아 그렇게 만들어 놓은 주제에 시치미를 뚝 떼고 놀리기까지 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솟는다.
문평은 고개를 숙여 천마의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너도 한번 당해 봐라. 유치한 반발심에 이성이 마비된 그는 천마가 그러했듯 그 작은 유실을 괴롭혀 댔다.
다른 모든 피부와 마찬가지로 유실의 감촉은 매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가 혀로 문지르고 입술로 빨아 당기자 유실 위로 오돌토돌한 돌기가 돋았지만 그것조차도 새순인 양 연하다. 보드라운 피부의 감촉은 갓 피어난 여린 꽃잎을 연상케 했다. 반로환동으로 육체가 다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다지 틀린 비유는 아닐 터다.
“으음.”
문평의 적극적인 애무에 천마가 목 깊은 곳에서부터 신음을 흘린다. 귀가 아니라 피부로 들려오는 그 신음은 문평이 물고 있는 살 끝으로도 전해졌다.
아래를 헤집는 천마의 손길이 한층 더 집요해졌다. 한 손으로는 문평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다른 손으로는 그의 아래를 공략한다. 자기 몸을 들여다보듯 문평을 읽고 있는 천마는 내벽 안을 제멋대로 휘저으며 쾌락에 불을 지폈다.
자극적인 감각에 도취라도 된 듯 아랫도리가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단지 뒤를 건드린 것만으로도 뻣뻣해진 성기에서는 벌써부터 유백색의 탁액이 흘렀다.
문평은 천마가 깊은 곳을 찔러 넣을 때마다 이 끝에 힘을 주며 천마의 유실을 희롱했다. 그의 손은 어느덧 천마의 가슴을 더듬고 허리를 어루만지며 적극적으로 상대를 탐했다.
일방적으로 자극당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문평을 들뜨게 했다. 천마의 일방적인 노리개가 아니라, 자신도 마찬가지로 상대의 몸을 즐기고 있다는 인식은 도착적인 고취감을 낳았다.
따지고 보면 천마의 몸은 문평보다 어렸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종속적인 관계에다 일방적으로 강요를 당하고 있는 처지여서 의식하지 못했지만, 사실 상대는 천하에 짝을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미인이다. 설사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고 할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
이제 와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즐기기라도 하지 않으면 그만 억울해진다. 상대는 자신의 몸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데 문평이라고 해서 그 몸을 가지고 놀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문평이 행위에 전에 없이 적극적으로 나서자 두 사람의 분위기는 한층 더 끈끈해졌다. 천마는 배고픈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가슴에 집착하는 문평을 재밌게 여기며 그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문평은 천마의 허벅지에 성기를 비비며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다른 곳의 피부도 모두 부드럽지만, 약한 것이 당연한 허벅지 안쪽의 피부는 그야말로 천상의 감촉이었다. 뜨겁기 짝이 없는 천마의 성기만 아니라면 그 위를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사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가 겪어 본 어떤 여인도 이토록 부드럽진 않았었다.
‘하, 이 녀석 봐라?’
천마는 적극적이다 못해 노골적이기까지 한 문평을 헛웃음을 지으며 내려다보았다. 그가 무엇을 바라고 있을지 눈치 빠른 천마가 모를 리 없다.
이제껏 숱한 남자들과 밤을 보내 봤지만 이런 식으로 요구를 받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천마는 그의 이런 행태가 가소롭기만 했다. 그러나 생각 외로 화는 나지 않았다. 천마에겐 문평이 하는 짓은 모두 어린애 재롱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한번 대 줘 볼까?’
천마의 머릿속에서 돌연 기발한 발상이 떠올랐다. 뒤를 내달라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허벅지일 뿐이니 그까짓 것 한 번 내주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데,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상상하니 그것도 궁금했다.
슬쩍 입꼬리를 비튼 천마가 다리를 벌려 문평의 성기를 안쪽으로 미끄러트렸다. 그 위를 다른 허벅지로 덮고 밀착시키니, 천마의 허벅지 사이에 성기가 끼인 문평이 강한 압박감을 참지 못하고 움찔 허리를 떨었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새빨개진 문평의 귓전을 핥았다. 그리고 농염한 목소리로 유혹하듯 은근히 미끼를 던졌다.
“정 그렇게 해 보고 싶다면 하게 해주지. 만만찮은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을 거다.”
천마는 자신만만하게 제안했다. 그는 비싸다. 단 한 번 있었던 예외를 제외하면 남을 가지고 논 적은 있어도 남에게 농락당한 적은 없으니, 문평이 그의 허벅지에 사정을 한다면 그는 천마의 몸에 흔적을 남긴 최초의 인간이 되는 셈이다.
‘설마 그런 짓을 하고 도망갈 엄두를 낼 수는 없겠지.’
천마는 음흉하게 킬킬거리며 계산했다. 그의 진정한 속셈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문평은 이제껏 수도 없이 몸을 빼앗겼지만, 그 모든 걸 합쳐도 천마가 내주는 한 번과 맞먹긴 힘들다. 공정하지 못한 일이나 어쩔 수 있겠는가? 그게 천마와 문평의 차이인 것을. 설사 문평 본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계산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할 터였다.
“대, 대가라니요?”
“그래. 대가.”
“무슨 대가입니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결정부터 내리지 그래? 용기를 내 볼 테냐? 그렇지 않으면 허망하게 물러날 테냐. 내게 이런 식으로 도전해 온 놈은 네가 처음이다. 그 기념으로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테니 뜻대로 해 보거라.”
짐짓 너그러운 척 제안을 던진 천마는 허벅지를 움직여 문평의 성기를 자극했다. 매끄러운 피부로 뒤덮인 단단한 근육이 감미롭게 문평을 감싼다.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문평은 부지불식간에 눈을 들어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는 유혹이라도 하듯 자디잔 눈웃음을 치며 문평을 주시했다. 지극히 사내다운 외모인데도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구미호가 연상된다.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지복의 쾌락을 약속해 놓고, 약속을 지키는 대가로 남의 간을 빼 먹는 바로 그 구미호 말이다.
요염하기 짝이 없는 그 눈과 눈이 마주치자 미혼술에라도 걸린 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던 문평은, 천마의 허벅지 사이로 몸을 들이밀려고 했다가 자지러지게 허리를 떨었다. 무의식중에 움직이는 바람에 뒤에 천마의 손가락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덕분에 천마의 손톱에 내벽이 길게 긁혔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짜릿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치솟더니, 붙잡혀 흔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다행히 늦지 않게 떠오른 생존 본능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갑작스레 정신이 든 문평은 얼른 시선을 내리며 허겁지겁 안색을 바꿨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덫에 빠지기 직전에 정신을 차린 문평은 후다닥 발을 빼버렸다.
‘쳇. 하필 이럴 때에. 잘하면 넘어올 것도 같았는데.’
뜻하지 않게 실패해 버린 천마는 김이 확 빠졌다. 음험한 손만큼이나 계산도 빠른 그는 이후에 요구할 목록까지 작성하던 중이었다. 그중에는 문평이 멀쩡한 정신으로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만한 행위까지 끼어 있었기에 그의 실망은 더욱 컸다.
“……이제 넣어도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천마의 허벅지에서 슬그머니 자신의 것을 뺀 문평이 아쉬움에 움찔움찔 경련하는 성기의 끝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화제를 돌렸다.
천마는 시큰둥하게 문평을 바라보다 그의 엉덩이에서 손가락을 뺐다. 배려 없이 거칠게 빠진 손가락 때문에 내벽이 다시 긁혔다. 다치진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아래의 근육도 놀란 듯 세찬 수축을 일으켰다.
“아직 조금 모자랄 거다. 네가 스스로 넓힌다면 다치진 않겠지.”
“예?”
“물질을 오래 했더니 피곤하다. 일을 끝내고 싶다면 네가 스스로 넓힌 후 올라와야 할 게다.”
방금 전까지 물고 빨고 별 난리를 다 쳐놓고, 갑자기 피곤하다는 듯 하품까지 하는 천마의 태도는 참으로 얄밉기 짝이 없었다. 이 동굴에 들어온 이후 매일 밤 내가 수련의 일환으로 채양보양을 하고 있던 문평은 원망스러운 눈길로 천마를 노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공부에 성과가 없어 불안해 죽겠는데 저 사람은 그걸 꼬투리로 사람을 괴롭히려 든다. 사람이 치사하게 남의 목숨을 두고 이래도 되는 걸까? 안 그래도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자괴감에 괴로워 죽겠는데 이런 일에까지 심술을 부리다니. 모르고 하는 게 아니라 다 알고서 저지르는 일이기에 치솟는 원망은 더욱 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수혜를 베푸는 쪽은 천마이고 수혜를 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인 것을. 아쉬운 쪽은 천마가 아니라 문평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가 굽히고 들어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잠시 천마를 바라보고 있던 문평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조금 뒤로 물리고 자신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천마처럼 능숙한 기술이 없으니 마른 손가락을 넣기는 겁이 나고, 무엇으로라도 젖게 만들어야 그나마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있는 대로 자극당해 꺼덕거리던 성기를 붙잡고 흔들어대자, 머지않아 손바닥 안으로 탁액이 쏟아져 내렸다. 타인의 앞에서 자위를 해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그는 수치심을 참을 수 없어 눈을 뜨지도 못하고 행위를 계속해 갔다.
문평은 손가락에 정액을 바른 후 뒤쪽으로 그것을 집어넣었다. 집어넣고 보니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본인의 손가락을 집어넣은 것인데도, 천마가 할 때보다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손가락은 천마의 것보다 굵고 마디가 세다. 그뿐만 아니라 손끝에 굳은살까지 있어서 연약한 점막을 어루만지기엔 지나치게 거칠었다.
문평은 몸 안에 타인을 들여놓은 양 힘겨워하며 손가락으로 내벽을 어루만졌다. 그나마 천마가 풀어 놓은 게 있어서 두 개까지는 수월하게 들어간다. 하지만 천마의 것을 아래로 받아들이려면 손가락 두 개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스스로 뒤를 만지기가 힘들어 자세를 바꾸고, 다른 손으론 구멍을 넓혔다. 그러고 나서야 세 번째 손가락이 들어간다. 삽입된 각도가 잘못되었는지 그것만으로도 아랫도리가 꽉 차는 느낌이다.
“흣.”
이 면구스러운 행위를 계속하는 게 싫어 서둘렀다가, 잘못해서 몸 안 깊은 곳의 전립선을 건드린 문평은 허리를 튕기며 신음을 내질렀다. 상대에게 당한 게 아니라 스스로가 행해서인지, 늘 있는 일임에도 낯선 느낌이 든다.
생경한 감각에 등골이 오싹하게 달아올랐다. 성기를 자극하는 일상적인 자위만 해봤던 그에게 이와 같은 자극은 너무도 지독했다. 뒤로 느끼는 감각보다 머리가 느끼는 감각이 더 강렬해서, 지금 손가락이 범하고 있는 게 몸이 아니라 정신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스스로를 범하고 있다는 자각만으로도 머릿속이 온통 뒤범벅이다. 달아오르는 체온 때문에 뜨겁게 데워진 점막은 기분 좋게 젖어 있었다.
오랫동안 타인의 속살을 만져 본 적이 없었던 문평은 손가락을 휘감는 내벽의 감촉에 옛 기억을 떠올렸다. 익숙한 여인의 점막과 그의 점막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두 곳이 다 촉촉하고 매끄러웠고, 움직일 때마다 수축하며 손가락을 감쌌다.
더듬어지는 것만큼이나 더듬는 것도 이색적인 경험이다. 자신의 몸 안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던 그는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천마가 한 번씩 희롱하듯 입에 올리곤 했지만, 진지하게 들어 본 적이 없기에 진짜로 이럴 거라곤 생각도 못 해봤다.
내 몸 안에 진짜로 이런 곳이 있었구나. 그런 자각이 찾아오자, 그렇지 않아도 어지럽던 머릿속이 더욱 뒤엉키며 혼란스러운 감각만이 두드러졌다. 모든 생각이 제멋대로 엉켜 버리자 뭐가 뭔지 알 수도 없었다.
“앗, 아윽. 악, 악,”
서투르기 그지없는 손길이 아래를 문지르고 비볐다. 스스로 자극점을 누르기 시작하자 한 번 시들었던 성기가 다시금 고개를 든다. 두 다리가 저절로 벌어졌다.
처음에는 참으려고 했던 신음이 점차 소리를 키우며 이성을 잃은 입 밖으로 거침없이 빠져나온다. 눈을 질끈 감은 얼굴에서 뚜렷한 황홀감이 떠올랐다.
‘부끄러워 죽겠다는 시늉을 한 놈치고는 지나치게 느끼는군.’
문평이 하는 짓을 가만 보고만 있던 천마는 점점 더 회가 동하는 걸 느꼈다. 본인의 손으로 스스로를 범하며 몸부림치는 몸이 눈앞에 있는데, 회가 안 동한다면 그건 사내도 아니다.
“요망한 것 같으니.”
본래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괴롭히려고 했건만, 외려 조급해진 것은 문평이 아니라 천마가 되어 버렸다. 예상했던 시각도 채 못 채우고 달려든 천마는 문평의 손을 거칠게 빼버리고 그 속을 자신의 것으로 가득 채웠다.
거대한 쐐기가 몸을 가르듯 꽂혀 들어오자 흥분으로 달아올랐던 문평이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어느새 올라왔는지 그의 몸 위로 달려든 천마가, 문평의 두 다리로 허리를 감게 만들고 그의 구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교, 교주님.”
“혼자서도 즐길 수 있다니 많이 컸구나, 문평. 하나 그것만으로 온전히 만족할 수 있겠느냐?”
천마는 자기가 스스로 풀어 보라고 해놓고 트집을 잡았다. 아무래도 혼자 즐기고 있었던 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내 것에 길들었는데 고작 손가락 세 개로 만족이 되더란 말이지? 소박한 거냐 아니면 욕심이 없는 거냐?”
“앗, 아악, 교주님, 제발. 아, 아직 덜 풀렸…….”
“아직도 덜 풀렸다면 내가 풀어주마. 내 것을 품고 있지 않으면 종내에는 서운해질 정도로 확실하게 인을 박아 주지.”
스스로 해 본 것은 처음인지라 많이 서툴렀던 문평이다. 조금씩 풀긴 했지만 말 그대로 아직 다 풀지는 못했는데, 천마는 무식하게도 그 틈새로 자신의 거대한 성기를 밀어붙였다.
통증을 느낀 문평이 선처를 호소했다. 고집불통인 천마는 그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다. 천마는 못이라도 박듯 거칠게 문평의 몸을 찍어 눌렀고, 화풀이라도 하듯 매섭게 몸을 뺐다.
처음부터 무지막지하게 박아 드는 그의 동작에 아랫도리 전체가 욱신거렸다. 한계까지 벌어진 근육이 천마의 성기를 힘겹게 물었다. 어린아이 팔뚝만 한 것이 가감 없이 그의 몸 안을 드나드는 탓에 문평의 구멍은 고통스럽게 꿈틀거렸다.
침상도 아닌 모래밭 위다. 아래에 깔린 것이라곤 한 겹의 천밖에 없는데, 천마는 배려 없이 거칠게 문평을 찍어 눌렀다. 그가 드나들 때마다 아래위로 쓸리는 등이 따가웠다. 이러다 상처가 다시 덧나는 게 아닌가, 겁이 덜컥 났다. 하지만 그 생각조차 빠르게 덤벼드는 감각들 속에 휩쓸려 날아가 버렸다.
천마는 힘없이 미끄러지는 문평의 다리를 용서 없이 잡아챘다. 자세를 잡지 못한 그가 허둥거리자 아예 무릎을 세워 놓고 양쪽으로 벌려 고정시켜 버린다. 천마의 강인한 손이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아래에 깔린 문평은 천마의 성기뿐만 아니라 체중에까지 짓눌린 채 앓는 소리를 냈다.
천마의 움직임에 용서란 없었다.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이 문평에게 쾌감을 주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는지, 그의 움직임은 과시적일 정도로 현란했다. 그는 문평이 느끼는 부분만 집요하게 찔러 올리며 아플 때까지 박고 또 박았다. 박았다고 해서 단순히 왕복 운동만 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허리를 돌리고 문지르기도 하며 기교 넘치게 움직였다.
눈앞에 점멸하는 검은 점들이 보였다. 몸 안에 있는 전립선이 강한 자극을 받아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따라 문평의 성기도 함께 부풀어 올랐다. 빳빳하게 고개를 든 성기는 천마의 배에 제멋대로 비벼지다가 길게 버티지도 못하고 정액을 토해 냈다. 거꾸로 세워진 성기 탓에 그의 정액은 고스란히 자신의 상체와 얼굴에 묻었다.
천마는 그 모습을 보더니 몸을 기울여 문평의 입술을 거칠게 빨아대기 시작했다. 몰아치듯 퍼부어지는 일방적인 감각에 두려움을 느낀 문평은 천마의 등을 잡아당겼다. 치밀어 오르는 쾌락을 견디지 못해 손톱에 힘을 주고 긁어 내렸지만, 천마의 피부는 보이는 것과는 달리 강철 같았다.
퍽, 퍽, 퍽. 아래에서 강하게 치고 올라오는 힘에 문평은 턱을 젖히고 신음을 흘렸다. 물살에 휩싸여 속수무책으로 떠밀려 내려가던 얼마 전처럼, 지금도 그저 떠밀려 가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천마의 움직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되었다. 문평은 젖은 눈매로 도리질을 치며 그와 장단을 맞췄다. 천마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복상사도 아니고 복하사라니. 문평은 그런 꼴사나운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악. 악. 악!”
신음은 종내 비명이 되고 말았다. 두 번이나 연달아 사정했던 성기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시 부푼다. 이제는 고환도 비어서 더는 나올 게 없는데도 끊임없는 자극에 반응하고 만 성기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마지막 분량을 머금었다. 그와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천마의 성기도 요동치고 있었다. 용서 없이 죄어드는 내벽 사이를 마구잡이로 드나들던 물건이 마침내 사정의 기미를 보였다.
퍽. 퍼억. 퍼억.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한 천마가 더욱 거세게 쳐올리자 그의 고환이 엉덩이에 부딪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문평의 몸속 깊이 박혀 든 물건에서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다섯 번. 문평의 내장을 완전히 채우겠다는 듯 왈칵왈칵 쏟아지는 정액은 어찌나 양이 많았던지 결합부의 바깥으로 줄줄 새어 나오기까지 했다.
뱃속이 용암으로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문평도 마지막 사정을 했다. 장엄하기까지 한 천마와는 달리 시달릴 대로 시달린 문평은 맑은 물 같은 것을 두어 번 흘리는 게 고작이었다.
문평은 마구 두들겨 맞은 듯 정신이 없는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마는 절정의 여운을 음미하느라 눈을 감고 기분 좋게 허리를 떨었다.
사정을 했어도 만만찮은 크기의 물건이 문평의 몸속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벽이 욱신거리는 느낌을 받으며 문평은 눈을 깜빡였다.
정사가 아니라 무슨 폭풍이 지나간 느낌이다. 아랫배를 중심으로 허리가 우릿했고, 등은 피부가 벗겨진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화끈거린다. 뱃속에 가득 찬 정액 때문에 속도 불편했다. 도가 지나친 후유증이다.
“……이건 채양보양이 아니지 않습니까?”
천마가 너무 갑자기 덤벼든 탓에 운기를 하기는커녕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애초에 두 사람이 관계를 시작한 것은 정사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었는데, 엉뚱하게도 천마만 재미 본 꼴이다.
문평은 힘없는 음성으로 천마의 약속 불이행을 항의했다. 그의 말을 들은 천마는 씨익 웃더니 몸을 굽혀 문평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 그랬었지? 잊고 있었다. 오랜만에 회가 동한 나머지 그만. 약속을 어길 수는 없으니 한 번 더 하련? 이번에는 절대 목적을 잊지 않으마.”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데요. 오늘은 더 이상 그럴 만한 체력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야기했을 텐데? 내가 공부는 무엇보다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고작 이 정도의 일로 오늘을 포기한다면 내일은 또 무슨 핑계로 포기를 자처할 거지? 모랫바닥이 딱딱해 허리가 아프다고 할 셈인가? 어제의 피곤이 아직도 안 풀렸다고 할 거야?”
실제로 모랫바닥이 딱딱해 허리가 아팠고, 이 정사의 여파로 내일까지 앓을 것 같았지만 빈정거리는 천마의 앞에서 그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문평이 감히 반박을 못 하고 한숨만 쉬는 것을 본 천마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한 번의 정사로 사람을 반쯤 죽여 놓은 주제에 죄책감도 없는 그는 문평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내 멋대로 해버린 것을 사과하는 의미로, 오늘은 채양보양을 두 번까지 허용해주지. 가져갈 수 있는 만큼 가져가 봐. 마음대로 퍼가게 놔둘 테니까.”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윽!”
“대신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게다. 미리 경고까지 해줬는데도 제대로 가져가지 못하는 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니까.”
이 인간이! 방금 그만큼 싸지르고도 또 발기를 한단 말이야? 상식적으로 사람은 이렇게 빨리 다시 세울 수 없는 법이라고!
자신의 몸 안에서 점차 부피를 키우는 물건을 느낀 문평은 경악으로 희게 질렸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역시 사내라서 사내의 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훤히 아는데, 지금 천마가 하는 일은 보통의 사내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말도 안 되는 짓거리다.
‘사, 사술!’
문평은 정파의 고수들이 마도인들을 억울하게 탓할 때 자주 쓰는 말을 속으로 부르짖으며 허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더는 들어오지 말라고 한 짓이지만 거기에 더욱 자극을 받은 듯 몸속의 물건이 불끈 커져 버린다.
‘이 사람 진짜로 더 할 생각이군. 날 죽이려고 작정한 건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문평은 천마가 다시 움직일 기미를 보이자 황급히 운기를 하기 시작했다. 천마가 말한 대로였다. 어차피 당할 거라면 실속이라도 차려야 하지 않겠는가.
텅 빈 동굴 속에서 다시금 질척한 육음이 울려 퍼졌다. 태고 이후로 물소리 외의 것이 울려 퍼진 적이 없었던 공동 안은 두 남자가 내뱉는 신음과 교성으로 얼룩졌다. 유달리 정력적인 천마 덕분에 그 소리는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바깥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는 그들이니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정사를 나누는 새에 달이 뜨고 다시 지고 해가 떠올라 중천에 닿았다.
천마를 함부로 자극하면 어떻게 되는지, 문평은 그 시간들을 통해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채양보양으로 진기를 끌어와도 떨어지는 체력까지 감당할 순 없는 일이다. 나중엔 진실로 기진맥진한 문평은 채양보양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정신을 놓고만 싶었다.
그러나 한번 돌기 시작한 내기는 원한다고 해서 멋대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채양보양을 할 때처럼 두 사람의 기가 하나로 얽혀 있는 상태라면 더욱 그렇다.
덕분에 문평은 천마가 제 욕심을 다 채울 때까지 맨정신으로 시달려야만 했다. 실로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아픈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
정신을 잃기 전에도 밤이었는데 깨고 나서도 또 밤이다.
몽롱한 정신의 문평은 엉뚱한 착각을 하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희미한 빛이 눈앞을 아른거리고 있었다. 먼 곳에서 쏟아지는 별빛처럼 여리기 그지없는 빛이다.
가물가물한 눈을 비비고 초점을 바로잡은 문평은 시선을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서 야명주의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족히 십여 장이 넘는 거리에서도 그 빛이 보이는 것을 보면, 본래 크기는 제법 상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깨어났군.”
그가 일어날 때까지 팔베개를 해주고 있던 천마가 말을 걸어왔다. 정신을 잃기 전엔 이러다 정말 죽겠다 싶었는데 깨어 보니 의외로 온몸이 가뿐하다. 끈적끈적한 정액의 흔적도 없고, 허리의 근육통도 없다. 깨끗하게 씻겨 준 것만으로도 모자라 추궁과혈까지 해준 모양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는 마음에 드네. 뒤처리가 깔끔한 것.’
일견 사소해 보이는 배려였지만, 이런 배려를 해주느냐 안 해주느냐의 차이는 제법 크다.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몸 상태가 달라지니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문평은 누운 채로 가볍게 운기를 해 보았다. 그의 인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내력은 어제보다 훨씬 양이 많았다. 모르긴 몰라도 족히 반년 치의 내력을 한꺼번에 얻은 것 같다. 상당한 고생을 했지만, 결과를 보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룻밤에 반년 치의 내력이 늘다니. 문평은 명백하게 보이는 구체적인 성과에 고무되었다.
“내력이 많이 늘었습니다.”
문평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천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습기 많은 동굴 안이었지만 그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말린 모래 위에 천마의 겉옷을 깔고, 그 위에 천마와 나란히 누워 자신의 겉옷을 덮었다. 옷이 짧아서 발이 삐져나오는 게 흠이었으나 그 외에는 별로 불평할 여지가 없다.
체온이 높은 천마와 몸을 붙이고 있으니 건조하고 따뜻했다. 감히 천마의 팔을 베고 연인처럼 누워 있는 것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그래야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울려 준 의미가 없지.”
천마의 대답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거만하기 짝이 없다. 자기 좋을 대로 실컷 즐긴 주제에 꼭 남을 위해 희생하기라도 했다는 투다. 천마를 몰랐다면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었겠지만, 이미 익숙해진 문평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오만한 건 이 남자의 천성이고, 변덕은 그의 특기다. 윤승효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도 아닌데 위선을 부리면 외려 보는 사람이 어색해질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수로를 탐색하러 안 나가십니까?”
“귀찮다. 나른하기도 하고.”
“그럼 온종일 이러고 계실 건가요?”
“이러고 있으면 어때서? 어디 보는 사람이라도 있더냐?”
천마가 어울리지도 않는 게으름을 부리며 문평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사냥을 끝낸 맹수처럼 나른하게 늘어진 그는 문평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문평도 그를 따라 시선을 들어 올렸다. 먼 곳에서 빛나는 야명주의 빛이 다시금 두 눈으로 들어왔다.
“……바깥은 지금쯤 시끄럽겠지요?”
어떻게 나갈 수 있는지도 모르는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사람치곤 참으로 태평한 태도로 문평이 중얼거렸다.
이런 장소에 혼자 갇혔다면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터였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나 마음을 못 놓고 내내 전전긍긍했을 텐데, 심술궂긴 하나 의지되는 남자를 곁에 두고 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느긋해지고 만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재 문평은 자신의 처지를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눈치가 보이고 미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홀로 남을 거라는 불안감 따윈 전혀 없다. 혼자서 나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한 사람이 어떻게든 같이 데리고 나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다.
문평은 이제 그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믿고 있었다. 여태껏 필사적으로 부정해 왔던 일을 더는 부정할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시끄럽겠지. 잘하면 마정대전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고.”
“네? 마정대전이요?”
문평은 천마가 지나가듯 하는 말에 흠칫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마정대전이라니?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린가? 곽효의 정체는 이미 들통났고, 건예자 또한 곽진무가 없애 버린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곽효의 음모는 완전히 분쇄되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마교 무사 출신인 문평에게도 마정대전이란 쉽게 들어 넘길 만한 말이 아니었다. 벌써 40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때의 상처는 강호인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다.
구파일방은 공동파가 멸문하는 바람에 공동 대신 해남파가 포함되게 되었고, 강호의 오대세가 역시 피해를 입은 정도에 따라 서열과 위치가 재편되었다. 섬서 이북의 사파들은 거의 멸절당했다가 이제야 조금씩 고개를 드는 참이고, 호남혈사가 일어났던 일대에는 혈血이나 시체가 들어가는 이름으로 지명이 바뀐 곳이 몇 군데나 있다.
마교도 그때의 일로 피해를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최위명의 부모는 그때 모두 목숨을 잃었고, 악형대는 위로 세 형을 모조리 잃었다. 마교의 하급 무사 중 그 일로 가족을 잃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다. 문평처럼 외부에서 들어온 자가 아니라면 대개가 그랬다.
“그 자리에서 놈을 잡아 죽였더라면 그렇게 되었겠지. 놈은 도망쳤을 거다. 그 자리에 남아 있던 녀석들로는 놈을 잡을 수 없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참사검께서는 초절정의 고수시고, 파면객, 아니 백 공자도 그와 같은 경지가 아니십니까? 혼자의 몸으로 그분들의 손속을 피하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너도 그놈의 얼굴을 봤지 않느냐. 20여 년 전, 패해 달아나는 놈의 얼굴을 제대로 지져 놓았었는데 그날 보니 그 상흔은 흔적조차 없더구나. 그런 상처를 지우기 위해서는 환골탈태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환골탈태를 하려면 필히 화경에 이르러야 하지.”
문평은 천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진정 곽효가 화경급의 고수라면, 초절정 고수 둘만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대다.
‘그럼 그때 그 사람을 잡았어야지 뭐 했습니까?’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질문이 있었으나 그는 어렵게 그 말을 삼켰다. 그때 천마가 뭘 하고 있었는지는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알고 있다.
‘설마 나 때문에 마정대전이 일어난단 말인가? 천마가 곽효를 죽이지 않고 나를 먼저 구했기 때문에?’
문평이 얼빠진 얼굴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가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목숨을 구원받은 그로서는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반대급부가 너무나도 컸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모든 것을 뻔히 계산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일까?
천마는 느긋하게 웃으며 문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았다. 수천의 목숨보다 너 하나를 택했다고 말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심한 태도였다.
“그렇게 놀랄 것 없다. 따지고 보면 놈이 도망을 간 것도 나쁘지는 않은 일이니. 놈이 그 자리를 빠져나간 덕에 곪을 대로 곪은 고름을 짜낼 명분이 생겼다. 음모를 꾸민 것은 곽효지만, 그 일을 실행한 것은 사실상 정도맹일 터. 곽효만 잡고 정도맹은 그대로 놔둔다면 곽효의 입장에선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니겠느냐.”
뜻밖의 사실에 암울해진 문평과 달리, 천마는 오히려 이렇게 된 것이 더 잘된 일이라 여겼다. 놈이 도망을 가버린 덕에 애써 명분을 찾을 이유가 없게 되었다. 도발은 그들이 먼저 할 테니 그에 대응하기만 하면 된다.
천마는 그에 더해 이 일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마음마저 품고 있었다. 곽효와 정도맹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도 있고, 겸사겸사 호완평과 포영의의 능력을 확인해 볼 수도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다.
‘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놈들에겐 더 이상 의지할 구석이 없다. 덕분에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녀석들이 얼마만큼의 관리 능력을 가졌는지 알 수 있겠군. 내가 제자들을 제대로 키웠는지, 그렇지 않으면 쭉정이를 낱알로 잘못 알고 있었는지는 이 일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겠지. 그것만 확인하고 나면 더는 교에 얽매여 있을 이유도 없어. 이 정도면 나도 할 만큼 한 셈이니까.’
복수를 위해 교를 이용했고,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남은 인생을 바쳤다. 자신이 만들어 내다시피 한 세력이지만 거기에 대한 애정은 별로 없는 천마는 이제 그들에게서 벗어나 자연인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요즘 들어 부쩍 옛 생각이 나는 것도 그런 마음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싶다.
어떻게 보면 곽효가 늦지 않게 일을 쳐 준 덕분에 마지막 남은 앙금까지 털어낼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들을 정리하고 나면 천마는 더 이상 강호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하지만 마정대전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이들 중에는 음모에 관련된 사람보다 아무 상관도 없는 자들이 더 많을 겁니다.”
자책감에 빠진 문평이 어두운 목소리로 죽어갈 목숨들을 걱정했다.
가만히 보면 저 녀석은 마음 씀씀이가 꼭 정파 나부랭이 같단 말이지. 천마는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은 문평을 바라보며 끌끌 혀를 찼다.
“반대로 생각해야지. 마정대전이 일어나면 이번 하북혈사 때처럼 죄 없는 민초들에게까지 피해가 닿는 일은 사라질 거다. 놈들도 관의 눈치를 봐야 할 테니, 가능하면 선을 지키려 들겠지.”
“민초들뿐만 아니라 무인도 사람입니다. 사람 목숨이 누구는 귀하고 누구는 하찮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성인군자 같은 소리를 하는군. 네 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만 대상이 무인이라면 경우가 달라진다. 너는 무인이 칼을 드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마음을 정갈히 다스리고 몸을 다듬기 위해서? 도를 닦아 등선을 하려고? 하!
나는 한 갑자 이상의 세월을 강호에서 보냈지만 그런 고매한 뜻으로 검을 든 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내가 본 무인들은 모두가 남을 죽여 스스로의 이름을 드높이고 싶어 하는 자들뿐이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고, 절차를 따르기보다는 무력으로 상대를 갈취하는 것에 더 크게 뜻을 둔 자들이지. 하수에서 고수로 갈수록 그 성향은 더욱 뚜렷하다.”
천마는 냉정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믿지 않았고, 강호인이라면 더욱 믿지 않았다. 그는 본인이 무인이면서도 무인을 경멸했다. 정확히는 무인이라는 자들의 습성과 욕망을 혐오했다.
“너는 이번 하북혈사가 도대체 왜 일어난 거라고 생각하느냐? 곽효가 가공할 음모를 꾸며서? 정도맹의 부추김 때문에? 설마. 모든 것은 강호인들의 욕망 때문이다. 더 강해지고 싶은 욕망. 더 큰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 한 번 고조된 광기는 피를 보지 않고서는 가라앉지 않지. 이 상황에서는 마정대전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설사 곽효가 탈출하지 않았더라도 결국은 머지않아 같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을 게다.”
문평은 칼로 자르듯이 단호한 그의 주장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천마의 과거를 알고 있는 그는 천마가 이토록이나 무림인들을 혐오하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문평이 말문을 잇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자, 천마도 입을 다물었다. 잠시나마 언쟁이 오갔기 때문일까? 평온하던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서먹한 감정만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젊고 아름다운 천마의 얼굴 밑에는 냉혹한 절대자의 마음이 존재했다. 문평은 그 사실을 이번 대화를 통해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그러한 실감이 무겁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사람이라고 했던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천마의 여러 면모를 알게 된 문평은 무섭기는커녕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천마는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냉정한 사람이지만, 절대로 책임을 방기하지는 않았다. 일 처리는 공정했고, 하는 행동은 변덕스러웠지만 사리는 지켰다.
마도의 종주이자 천하제일인. 거기다 천하제일세의 주인. 그런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무려 40여 년간이나 천산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던 것에 대해, 기린패는 완벽한 대답이 되지 못했다.
동생의 유언이건 하나 남은 조카건 간에 천마에게 그럴 마음이 있었으면 모두가 소용없다. 아닌 말마따나 천마가 진실로 딴마음을 먹었다면 정도맹이 어떻게 버틸 수 있었겠는가?
그가 강호를 정복하려고 마음먹었다면, 곽효처럼 계략을 꾸밀 필요도 없었다. 그가 가진 힘만으로도 모든 것이 가능했을 테니까.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제를 할 수 있다는 것. 문평이 보기에 천마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점은 바로 그 철저한 자제력이었다.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목숨이 달린 일을 두고 이치만을 따질 수는 없는 일 같습니다. 저 역시도 연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적잖게 마음이 쓰이는군요. 사람 사는 일이 모두가 순리대로 이뤄진다면 좋을 텐데요……. 어째서 그럴 수 없는지 유감입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문평이 시무룩하게 입을 열었다. 전장의 참혹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는 천마의 단정에도 마정대전이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를 떨칠 수 없었다. 적게나마 그 일에 일조했다는 사실도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요인 중에 하나였다.
“세상에 순리대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뿐이다. 사람이 사는 일에 언감생심 그러한 이치를 바라겠느냐? 가끔은 자연조차도 그에 벗어나는 것을.”
“예.”
“…….”
거기까지 말하던 천마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더니 갑자기 문평의 어깨를 툭 쳐서 그의 시선을 위로 이끌었다.
“봐라, 문평아. 저 위를 가만히 보렴. 천장에 붙어 있는 야명주가 뭔가를 닮은 것 같지 않으냐?”
“야명주가요?”
문평은 그의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천마는 천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문평에게 재차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 야명주가 서로를 향해 있는 위치를 잘 살펴라. 저건 분명 우리가 아는 뭔가를 닮았다.”
그 말을 듣고 자세히 살피니 확실히 연상되는 게 있었다. 각각의 구슬이 아니라 구슬 간의 배치를 살피니 그 모양새가 제법 낯이 익다. 그것은 별자리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알아볼 만하고 어떤 것은 도통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배치는 분명 기억에 존재하는 모습이다.
“……어라?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야명주들은 밤하늘의 별자리를 닮았는데요. 그것도 중원의 별자리가 아니라 천산의 별자리를 닮았습니다. 간혹가다 위치나 모양이 다른 것이 있긴 하지만 틀림없이 천산의 별자리입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바뀐 것이다. 역법을 공부해 보면 알겠지만 밤하늘의 별자리라고 해서 늘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거든. 세월이 지나면 별도 바뀌고, 별자리도 바뀌지. 천산의 별자리가 저런 모습이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의 일이다.”
오늘날의 위치를 기준 삼아 역법을 암산해 보던 천마는, 의미심장하게 맞아떨어지는 300년이라는 숫자에 눈을 가늘게 떴다.
‘300년이라. 딱 300년이란 말이지?’
그 숫자를 되뇌는 순간 무생교가 강호에 퍼트린 터무니없는 소문이 생각났다. 처음에는 그저 아전인수 격으로 갖다 붙인 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설마하니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말이었단 것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천마는 두 눈에 이채를 번득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문평은, 벌거벗은 몸으로 야명주들을 노려보고 있는 천마의 눈치를 살폈다.
“틀림없다. 저 야명주들은 300여 년 전의 천산의 별자리를 묘사한 것이다. 자미원紫微垣의 위치도 들어맞고, 태미원太微垣도 일치하고, 천시원天市垣도 정확해.
……하지만 저건 뭐지? 하필이면 동궁東宮의 심수心宿가 방향이 비틀려 있다니? 동궁청룡칠숙東宮靑龍七宿은 이십팔성수二十八星宿1)의 기준일 텐데?”
천마는 문평이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성였다. 자미원은 뭐고 태미원은 뭔지. 동궁청룡칠숙은 또 어디에 있는 무림명숙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문평이지만 그는 조용히 기다렸다. 천마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문평, 옷 입어라.”
손가락까지 짚어 가며 한참을 계산하고 있던 천마가 눈을 빛냈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옷을 입으란 말을 하자 문평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천마가 마침내 야명주의 비밀을 알아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빠르게 자신의 옷을 주워 입은 문평은 바닥에 깔고 있던 겉옷을 탈탈 털어 천마에게 건넸다. 천마도 옷을 챙겨 입고 머리를 묶었다. 동굴에 있는 내내 귀찮은 듯 풀어헤치고 있던 머리가 오랜만에 단정한 제 모습을 되찾았다.
“뭔가를 알아내신 겁니까?”
문평은 머리끈을 묶고 있는 천마에게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졌다. 천마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눈짓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기관은 벽이 아니라 천장에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뻔히 보고서도 놓치고 있었으니 내가 아둔한 거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저 위에 빛이 반 정도밖에 안 들어오는 세 개의 별이 보이지? 천시원天市垣의 동궁에 있는 청룡 형상의 별자리 속에 말이다.”
천시원이 어딘지 모르는 문평은 대충 알아들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런 어설픈 태도로 천마를 속일 순 없었다. 눈살을 찌푸린 천마는 문평의 고개를 돌려 정확한 방향을 짚어 주었다.
“거기 말고 저쪽 말이다. 그래. 그 방향. 똑바로 위를 올려다보면 동궁청룡칠숙이 보일 게다. 그중에서 빛이 반밖에 드러나지 않는 곳이 심수心宿라고 하는 자리인데, 청룡의 심장을 나타내는 부위로 천자의 올바른 자리를 뜻한다.”
문평은 그제야 다른 별들에 비해 반 정도밖에 빛을 드러내지 않는 야명주를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제대로 된 방향을 주시하자 천마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설명을 계속했다.
“한데 알고 있느냐? 저 별자리에서 말하는 천자란 도리천주忉利天主, 즉 옥황상제를 말하는 게다. 도교식으로 말하자면 옥황상제고,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석제환인釋帝桓因이지. 천축에서는 그를 인다라因陀羅라고 하는데 이는 모두 같은 신을 부르는 다른 이름들이다.
심지어는 마교에서조차 그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 있다. 마교도 본래는 종교 집단이었으니까.”
문평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마교에 10년을 붙어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물론 단체 이름에 ‘교’가 들어가고, 그 수장을 교주라고 부르니 종교라면 종교일 수 있겠지만…… 대체 마교에선 무슨 신을 섬긴단 말인가? 마魔 자가 들어간 이름 그대로 나찰이라도 섬기는 건가?
“그런 것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럼 마교에선 그를 뭐라고 부릅니까?”
“천마天魔.”
“……예?”
“천마라고 한다. 정말 몰랐느냐? 본디 마교는 인다라 신의 화신체인 천마를 섬겼다. 역대 교주들 가운데서도 신의 화신체라고 확실히 인정되는 존재에게만 천마라는 이름을 붙였지. 내가 알기론 천 년 동안 천마라고 불린 존재는 다섯 손가락 안쪽이다.”
문평은 입을 딱 벌렸다.
‘그, 그러니까 원래 천마는 옥황상제, 그러니까 제석천의 화신化身에게만 붙이는 이름이었다는 건가? 마교 내에서만 신처럼 숭배받는 게 아니라 본래 신이었고?’
설사 뜻을 모르고 부르고 있는 이름이라 하더라도 한 사람의 인간이 가지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호칭이다. 세간은 그 이름을 천하제일인의 대명사쯤으로 기억했지만, 본래의 뜻은 그보다도 한층 더 엄청났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문평?”
문평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빡였다.
‘설마하니 자신이 진짜 화신체라고 고백하는 건 아니겠지.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짓을 여러 번 하긴 했지만 그래도 진짜로 인간이 아닌 줄은 몰랐는데.’
그는 터무니없는 것을 걱정하며 천마의 입술을 주시했다. 자신이 던진 말 때문에 문평의 머릿속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모르는 천마는, 차갑게 입매를 뒤틀며 싸늘한 눈초리로 야명주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적백문의 천마비고를 찾아낸 것 같구나. 곽효가 만들어 낸 가짜 따위가 아니라 진짜 천마비고를 말이다.”
한 번 들이친 벼락은 쉬지 않고 다시금 문평의 머리 위를 내리쳤다. 콰과광. 그의 머릿속에서만 들려오는 굉음을 들으며 문평은 얼어붙었다. 천마비고라니? 소문 속에서만 존재하던 적백문의 천마비고가 정말로 존재하고 있었단 말이야?
충격을 받아 멍하니 서 있는 문평을 놔두고 천마는 허공답보虛空踏步를 시전해 위쪽으로 올라갔다. 마치 공기로 만든 계단이라도 밟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밟고 올라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장에 닿았다.
천마의 손이 세 개의 야명주를 바르게 돌려놓았다. 오랜 세월 잘못 박혀 있었으니 그대로 굳어 버렸을 만한데도, 천마는 수월하게 그 야명주들에게 제자리를 찾아 주었다.
그의 손길이 떨어지자 야명주들은 완벽한 광채를 뿌리며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청룡칠숙을 이루는 별자리 판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그그그그긍.
철판이 긁히는 소리가 힘겹게 들리며 기관이 열렸다. 머리 위에서 붉은 녹이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꽤나 낡긴 했지만 300년이 지나도 제대로 작동이 되는 것을 보면 기관을 설치한 사람이 엄청난 심혈을 기울인 모양이었다.
천마는 먼저 위로 올라가 위험이 없는지를 확인한 후, 허공섭물로 문평을 끌어당겼다. 십여 장이 넘는 자리에서 한 사람의 무게를 옮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천마는 한 잔의 술잔을 옮기는 것처럼 가볍게 문평을 들어 올렸다.
문평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그 무위에 식겁해 파리하게 질렸다. 무형의 힘에 이끌려 공중으로 끌려 올라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하다못해 움켜쥐고 있을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안심이 될 텐데, 오로지 언제 끊길지 모르는 내기에만 의지해 위로 올라가고 있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의 불안과는 다르게 천마는 흔들림조차 없이 안정적으로 그를 천장 위로 데려다주었다.
발이 단단한 바닥에 닿은 후에야 마음이 놓인 문평은 등줄기를 흠뻑 적시는 식은땀을 느끼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천마는 그런 문평을 신경 쓰지도 않고 몸을 돌리더니 기관을 작동시켜 열어 놓았던 문을 다시금 닫았다.
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그간 갇혀 있던 동굴을 빠져나왔다. 천마가 야명주의 비밀을 밝혀내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아직도 저 아래에 갇혀 있어야 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동굴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반대편 수로로 헤엄쳐 나가거나, 문평의 무위가 천마만큼 높아질 때까지 죽어라 하고 채양보양을 수련해야 했을 거다.
강하고 야무지고 똑똑한 일행과 함께 하는 건 이래서 좋았다. 본인은 아무것도 안 하고서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문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마를 바라보았다. 사위가 너무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존재감만큼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느껴졌다.
“저기, 말씀드렸던가요?”
문평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천마를 향해 물었다. 쓸 만한 야명주는 아래 동굴에다 죄다 박아 놨는지, 위쪽의 석실에는 불빛이 없어 앞을 보기 위해서는 안력을 돋워야 했다.
천마는 무심한 태도로 문평이 서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안력으로도 시야를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어지간히 내공을 돋우지 않는다면 문평이 그림자인지 그림자가 문평인지조차 분간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내가 이러니 문평 저놈은 완전히 장님 신세겠군.’
낮게 혀를 찬 천마는 문평의 앞으로 걸어갔다. 사람이 오는 기척도 못 느끼는지, 문평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천마는 문평을 향해 걸으며 질문을 되돌렸다.
“뭘 말이냐?”
“감사하다는 말씀이요. 차마 갚지도 못할 큰 은혜를 입고도 정작 인사를 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주님. 저 동굴에서 혼자 나가시지 않고 저와 함께 머물러 주신 것도, 이곳까지 저를 데려와 주신 것도 모두 감사합니다.”
“알고 있다.”
“네?”
“알고 있다고. 이 정도로 깊이 신세를 졌으면서 그 은혜를 모른다면 그게 짐승이지 사람이겠느냐? 네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는 익히 짐작하고 있으니 따로 말할 필요는 없다.”
뭐가 그리 감격스러운지는 모르겠지만, 주절주절 말이 많은 것이 지겨워진 천마는 문평의 말을 자르며 그의 앞에 섰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훤히 알겠다. 틀림없이 억울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느닷없이 당과를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객쩍은 소리 말고 손이나 잡아라.”
천마는 손을 내밀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던 문평은 몇 번 헛손질하고서야 천마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깍지라도 끼듯 문평의 손을 꼭 잡은 천마가 앞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장님이 지팡이를 의지하듯이 그 손을 의지한 문평이 주춤주춤 천마의 뒤를 따라왔다.
나름대로는 진심을 전하기 위해 큰마음을 먹은 셈인데 어이없게도 단칼에 무시당해 버렸다. 천마가 얼마나 대가를 받아 내기 좋아하는지 알고 있으니 정말 단단히 각오하고 한 이야긴데도, 마치 허튼소리라도 한 것처럼 간단히 취급당한 문평은 서운하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앞서가던 천마는 문평의 물음을 듣고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천마앙복공天魔仰伏功을 찾으러 간다.”
“천마앙복공이라고요?”
“그래. 천마앙복공. 천마앙복공인지 천마지존공天魔至尊功인지 하는 그걸 찾으러 가는 거다. 기린패의 본 주인은 누가 뭐래도 이 몸인데, 바로 그 천마가 숨겨 놓았다는 보물의 정체도 모르고 있어서야 어찌 체면이 서겠느냐.”
누구보다도 천마비고의 존재를 비웃었던 사람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지껄여 댔다. 그 목소리에서 드러나는 명백한 흥미의 기색에, 그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문평은 한숨을 쉬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마교의 교주가 잃어버린 조사지공을 찾는다는 말이 저토록 가볍게 들리는 게 이상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인데, 왜 이리도 어색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는 천마를 너무 많이 알게 된 모양이다. 너무 속속들이 이해가 되다 보니 안 해도 될 고민이 생기고 몰라도 될 일까지 절로 알게 되어 버린다.
문평은 이런 것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우울하게 걸었다.
천마는 여러모로 장점이 참 많은 사람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단점도 함께 있었다. 한 인간의 몸에 공존하기엔 지나치게 거대하고 개성 넘치는 특성들이다 보니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한 문평으로서는 감당하기가 버겁기 그지없었다.
***
그들은 한참 동안 어둠 속을 걸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문평으로서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석실을 나가고 나니 길고 긴 동굴이 시작되었고, 어디에서도 빛은 찾을 수 없었다.
걷기 힘들게 울퉁불퉁한 길 위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감각뿐이다. 길을 이끄는 것은 천마지만,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었다.
그는 마치 감각도感覺刀를 익히는 사람처럼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사감을 총동원해야만 했다. 눈이라는 단 하나의 감각을 잃었을 뿐인데 온몸이 꽁꽁 묶인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마다 조심스럽고 겁이 난다. 이런 어둠 속에서 천마는 어떻게 저렇게 길을 잘 찾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가 의문이다.
“어떻게 찾아가고 있는 겁니까?”
한참 동안 미심쩍은 의문만 품고 있던 문평은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히 오르막이던 길이 다시금 내리막으로 변한 걸 느꼈을 때,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는 물론 천마를 믿지만, 그 믿음이 아무런 질문도 없이 맹목적으로 따를 정도로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앞서가던 천마가 어둠 속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돌려주었다. 동굴이 워낙에 깊은 탓에 그가 한마디 말을 할 때마다 우렁우렁 뒤 음절이 울려 퍼졌다.
“석주들 사이에 적백문이 흑화로 표시해 놓은 게 있다. 그걸 따라가는 거다.”
흑화도 지금 쓰는 흑화가 아니라 300년 전에나 쓰이던 옛 흑화다. 적백문이 비고에 남긴 표식들을 살펴본 천마는 그가 철저하게 마교만을 위해 흔적을 남긴 것을 깨달았다. 마치 마교에서 찾아온 누군가가 자신이 남긴 것을 수습해 주기를 바라는 듯한 태도였다.
‘이해가 안 되는군.’
천마는 모순되기 짝이 없는 적백문의 방식에 의문을 품었다. 비고에 남긴 흔적들에 의하면 이곳에 있던 적백문은 마교로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엄중한 상태가 아니다. 지하수로와 통하는 동굴에 설치해 놓은 기관도 그렇고, 미로 같은 동굴 속에 남긴 흑화도 그랬다.
3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틸 정도로 확실한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상황이라면, 실종 당시 그의 상태는 위중하기는커녕 할 일이 없어 시간이 남아돌았을 것이다.
마교에 무공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이따위 수수께끼를 만드는 것보다 본인이 직접 돌아가는 게 더 확실했을 텐데, 어째서 적백문은 마교로 귀환하지 않고 이 어둑한 굴속에 남았던 것일까? 자신이 사라지면 천마지공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이 어둠 속에서 그런 게 보입니까?”
“보이니까 따라가지. 너도 현경에 이르면 이 정도 어둠 속에서도 사방을 볼 수 있다.”
“……제가 살아생전에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가능할지도 모르지. 날마다 채양보양을 거듭하며 150년쯤 더 산다면.”
거듭되는 질문이 귀찮았던 것일까. 회의적인 문평의 질문에 가혹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절대 안 될 거라는 말보다도 오히려 더 독한 대답이다.
궁금증도 궁금증이지만, 적막한 길을 소리도 없이 걷는 게 답답해 말을 걸었던 문평은 무안한 기분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람이 싫어할 때는 귀찮을 정도로 치근대면서, 막상 이쪽에서 말을 걸면 제대로 된 대답을 하는 법이 없다. 청개구리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마냥 반대로만 하는지. 막 호의를 가지려고 하다가도 이런 모습을 대하면 마음이 식었다. 이렇듯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에게 섣불리 마음을 열었다가 상처를 받게 될까 두려워진다.
“조심해라. 두 발자국 앞에 돌부리가 있다.”
천마는 무뚝뚝하게 조언을 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문평은 그의 조언 덕분에 하마터면 발목이 부러질 뻔한 걸 막을 수 있었다. 아래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도 옆쪽에서 튀어나와 있었던지라 미리 경고를 받지 않았더라면 미처 피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고난에 찬 행군을 계속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들이 아니다. 정확히는 문평 혼자만 적지 않은 고생을 한 끝에 그들은 하나의 철문 앞에 이르렀다. 자연 동굴을 조금 손본 것에 불과하던 이제까지의 통로와는 달리, 떡하니 정면을 가로막고 있는 철문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이끼로 뒤덮여 있어 하마터면 문인 줄도 모르고 그대로 돌아나갈 뻔했다.
천마는 가볍게 손을 뻗어 이끼를 깎아 냈다. 사과에서 껍질을 벗겨 내듯 날카롭게 강기를 세워 다듬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철문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음새도 없이 매끈하게 다듬어진 철문의 가운데는 한 줄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꼭 금속으로 만든 활자들처럼 한 자 한 자가 각기 다른 철판에 새겨진 문장이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안력을 돋운 천마는 그 글자들이 한자가 아니라 범어梵語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중없이 멋대로 나열된 글자들은 제대로 된 문장이 아니었다. 홀소리와 닿소리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어 하나로 연결해 읽을 수도 없었다.
각각의 문자 조합을 유심히 살피던 천마는 철문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금세 알아차렸다. 범어를 읽을 줄만 안다면 답을 유추해 내는 건 간단했다. 이 문자들은 범어를 이용한 일종의 파자破字2)였다. 문 위에 새겨진 글자들을 조합해 제대로 된 단어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가 살펴본 결과 이 문자들의 조합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단어는 단 하나뿐이다.
샤크라.
한어로 번역하자면 석제釋提란 말이다.
석제. 석제환인, 제석천, 인다라. 결국 모든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이 문제만 봐도 알 수 있듯 적백문이 바란 것은 단 하나, 마교의 종교적 지도자가 이곳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것 참 재미있는 일이군.’
천마는 서늘한 비웃음을 머금으며 죽은 자가 낸 문제를 풀었다. 적법한 법통法統을 이어받은 본인이 사라졌으니 스스로가 마지막 정통을 이은 셈인데도, 적백문은 자신의 뒤를 이을 정통성 있는 후계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사라진 후 내홍을 겪은 마교에서 급격히 종교색이 흐려졌다는 사실을 몰랐으니 그랬던 것이겠지만, 적백문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인생에 피해가 막대했던 천마는 그런 그가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
“들어가자.”
철문 속에서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푼 문제가 정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천마는 서슴없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천마를 따라 들어갔던 문평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다가 준비도 없이 빛 속으로 나서게 되었다. 순간, 눈이 시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그는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가 뜨며 어떻게든 시야를 확보해 보려고 노력했다.
눈물을 흘려가며 한참 동안 진정을 시킨 다음에야 주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어디서 이런 환한 빛이 들어오는지 살펴보다가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거대한 야명주가 천장에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하 공동에 박혀 있던 야명주들은 저 야명주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것들이 반딧불이었다면 저것은 거의 달빛에 가까웠다.
‘저 정도 크기의 야명주라면 진짜 성 하나와도 바꿀만하겠는데?’
문평은 속으로 주판알을 튕기며 큼지막한 야명주를 올려다보았다. 저거 하나만 뽑아다가 팔아먹어도 석숭石崇 못지않은 사치스러운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함부로 건드리면 기관이라도 작동할 것 같아서 감히 손을 뻗지 못하지만, 솔직히 말해 죽도록 탐이 났다.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거냐? 진짜 보물은 이쪽에 있는데.”
문평이 천장에서 도통 눈을 떼지 못하자, 낮게 혀를 찬 천마가 시야를 좀 더 넓게 가지라는 조언을 자기 식대로 했다.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 문평이 천마가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돌리자 그리 넓지 않은 석굴의 한쪽에 두 개의 좌대가 마련되어 있는 게 보였다. 그 위에는 각각 한 사람의 인영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사람임에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해 절로 시선을 끌었다.
“굉장히 잘생긴…… 시체네요.”
보기 드물게 싱싱한 시체이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시체는 그냥 시체다. 문평이 고개를 갸웃하며 미심쩍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천마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더니 오른쪽에서 죽은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상대의 정체를 지목했다.
“저게 바로 적백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에게는 직계 조사에 해당하는 분인데도 천마는 불경스럽게 그 이름을 막 불렀다. 적백문이라. 그럼 저 사람이 바로 전대 천마란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십니까?”
“그가 더 고수니까. 네가 잘하는 대로 손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 굳은살이 하나도 없다. 적어도 한 번의 환골탈태를 거쳤다는 소리지.”
그의 지적에 문평은 오른쪽 시신을 바라보았다. 많게 봐야 30대 후반. 적게 보면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눈을 감고 있었다. 혁련상처럼 어마어마한 미남은 아니지만, 제법 준수한 외모에 몸매까지도 봐줄 만했다. 다만 인상 자체는 의외로 유약한 편이었는데, 외견상으로는 무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서생처럼 보였다.
영웅건 대신 문사건을 한 것도 그렇고, 폭이 넓은 문사의를 입은 것도 그렇고 차림새만큼은 완벽한 문사다. 무공을 익힌 사람 특유의 균형 잡힌 몸매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서생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왼쪽에 죽어 있는 사람은 그에 비해 나이가 들어 보인다. 마흔, 혹은 그보다 두서넛 이상. 그는 평범한 백성처럼 백포를 입고 있었는데, 젊었을 때는 꽤나 미남이었던 듯 수수한 차림인데도 귀티가 풍겼다.
오른쪽이 적백문이라면 왼쪽은 과연 누굴까? 문평은 눈을 굴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천마는 두 시신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백포 사내의 움켜쥔 손바닥을 펼쳤다. 가볍게 주먹을 쥐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손바닥을 펼치니 자자刺字3)가 된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응? 자자가 되어 있다고?’
문평은 선량하게 생긴 남자의 손에 죄인들이나 새길 자자가 있자 의아해하며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악유악보惡有惡報라. 죄는 지은 대로 간다?’
자자라는 것은 주로 본인이 지은 죄의 이름을 새기는 것인데 이 사람이 새긴 자자는 다소 특이했다. 문신도 어찌나 깊이 넣었는지 거의 뼈에 닿을 정도고, 파고 또 판 것처럼 새겨진 글자의 옆에는 상처 자국이 가득했다.
“특이한 자자군요. 내용으로 봐서 관에서 새긴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적백문 조사께서 새겨 넣으신 걸까요?”
적백문과 함께 죽어 있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던 문평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의 질문을 들은 천마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문평의 추리가 틀렸다는 뜻이다.
“내가 보기엔 본인이 직접 새긴 것 같은데. 남이 새긴 거라면 저렇듯 글자 주변에 상처가 났을 리는 없겠지. 저 상흔들은 고통 때문에 제대로 새기지 못하고 엇나간 흔적들이다.”
“자기 손에 스스로 이런 짓을 하다니.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진 몰라도 후회가 극심했던 모양이군요.”
“흥. 저지르고 나서 후회를 하면 뭘 할까? 그런 후회를 할 잘못이었다면, 애초에 저지르지를 말았어야지.”
절대로 남을 동정하는 일이 없는 천마는 냉소적인 태도로 코웃음을 쳤다. 문평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바닥 깊이 새겨진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백포 사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문평도 천마와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처지를 깊이 생각하는 문평이지만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는 세상을 살아 볼 만큼 살아 봤기 때문에 타인의 사연을 섣불리 동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렇게 처절하게 후회할 정도라면, 그만큼 큰 죄를 저질렀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죄는 크면 클수록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다.
세상에는 분명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 이 사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정체를 모르는 이상 상대를 무작정 옹호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곽효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순순히 그를 놓아 보낼 수 있을까? 아니, 천만에. 그런 일은 불가능해. 사람이 부처가 아닌 이상에야 어찌 그런 자들을 용서할 수 있겠어.’
알지도 못하는 자를 귀두삼귀나 곽효와 같은 급으로 놓기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문평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백포 사내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300여 년 전 이 남자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궁금했지만, 천마로부터 그 이상의 설명을 들을 수는 없었다.
“보물이 갖고 싶으냐?”
문평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천마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어깨가 닿을 듯 가까이에 주저앉아 있던 천마는 그답지 않은 진지한 눈빛을 하고 문평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확실히 농담은 아니군.’
상대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문평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천마가 말하는 ‘보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에 문평의 어깨는 절로 경직되었다.
“제가 갖고 싶은 건 저 거대한 야명주입니다. 제가 정말 저 물건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진짜 보물은 따로 있다고 아까부터 말했을 텐데?”
문평은 모르는 척 눙쳐보려고 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천마는 엉뚱한 소리로 김을 빼려고 드는 문평을 냉담하게 내려다보면서, 재차 같은 질문을 했다.
“대답해라. 보물이 갖고 싶으냐?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보물 중 가장 가치 있는 물건을 너에게 주마.”
“……이곳에 있는 보물의 주인은 본래 교주님이 아니십니까? 한데 어째서 직접 수습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내게는 저자가 남긴 보물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동안 나 스스로가 정한 길을 걸었고, 그에 따라 적지 않은 성취를 얻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그 길을 완성하는 것이지 남의 족적을 따르는 게 아니다.”
천마는 스스럼없이 준다고 했지만, 그가 주려는 것은 남이 준다고 해서 덥석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제 분수를 잘 아는 문평은 겸양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양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다면 제자 분들에게라도 기회를 주시지요. 교주님의 경지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제자 분들에겐 적지 않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 그 녀석들에게도 적백문의 보물은 별 쓸모가 없다. 그 녀석들의 손에 그것이 들어간다면 보물이 아니라 애물단지가 되겠지.”
“어째서죠?”
“너는 이곳으로 오면서 깨닫지 못했느냐? 적백문의 마교는 지금의 마교와 전혀 다르다. 그에게 마교는 종교였지만, 우리에게 마교는 뿌리일 뿐이지. 이제 와 옛 법통을 지키겠답시고 전통으로 회귀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것은 내홍밖에 없다. 오랜 세월을 지나며 교의 질서는 새로이 정립되었고, 내 제자들은 나의 길을 배웠다. 모든 것이 새로운 이치대로 돌아가고 있는데, 이제 와 옛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백련교와 소림이 그렇듯, 종교적 이념에서 파생된 무공은 그 교리를 따르는 법이다. 형形과 식式이 어떻든 간에 결국 목표는 종교적 교리를 내재화하고 그 이치를 함양하는 것이다. 소림의 무공이 해탈을 궁구하고 무당의 무공이 등선을 지향하듯, 옛 마교의 무공 또한 옛 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도리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는 천마는 이제 와 옛 천마지공을 되찾을 마음이 없었다. 제아무리 조사가 남긴 무공이라 할지라도 현실에 맞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그 무공이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교내로 유입된다면, 교론만 분열되고 쓸데없는 정통성의 시비만 들끓게 될 것이다.
“……제가 만약 그 보물을 받지 않는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없애야겠지. 기회가 닿았을 때 없애 버리지 않는다면 필히 화근이 될 물건이다.”
“그런 물건을 왜 저에게 넘기시려는 겁니까? 저에게 주면 화근이 되지 않을 것 같으신가요?”
“솔직하게 말하마. 나는 네게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화근을 버리려는 거다. 내게는 계륵일 뿐이나 네가 가지면 제법 쓸 만한 무기가 되겠지.”
천마는 덤덤히 대답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여상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으나, 그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제의를 하고 있는지 모를 문평이 아니다. 그는 지금 문평에게 엄청난 선물을 주려고 하고 있었다.
그가 주려는 것이 사소한 것이라면 모른 척 받아 챙길 수 있었다. 이제껏 그런 식으로 받아 온 게 적지 않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 그가 넘기려는 것은 이제까지 받아 왔던 것과는 규모가 달랐다. 그러다 보니 섣불리 받아먹기가 주저된다.
‘대대로 마교의 교주에게만 전수되었던 천마지공을 정말 내가 수습해도 되는 걸까? 내게는 그를 제대로 익힐 자질도 없는데?’
개 발에 편자라고 했다. 자신의 분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문평은 자신이 너무 과분한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겁이 나는 만큼 욕심도 생겼다.
그는 약한 것이 지긋지긋했다. 사사건건 무시당하고 길거리의 개처럼 걷어채는 일에도 신물이 난다.
그도 할 수만 있다면 천마처럼 살고 싶었다. 나태하고 오만무도한 삶이 부럽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탐을 내는 것은 거칠 것 없는 자유로움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하게, 오로지 자신의 기준에만 맞춰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 편할까.
“너에게도 필요가 없다면 어렵게 여기지 말고 대답해라. 굳이 강요하는 것이 아니니 사양해도 상관없다.”
문평이 분에 넘치는 혜택을 항상 경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천마는,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가 택할 몫이라고 생각하며 자유로운 선택권을 주었다.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천마지공을 수습하든가, 분수를 알고 고이 물러나 여전히 밑바닥 인생을 살든가. 둘 중 뭘 선택하든 천마가 강요할 문제는 아니다. 본인의 말대로 없애느니 버리자 싶어 문평에게 주려는 거니 말이다.
‘내가 안 받으면 없어진다는 거지? 마교의 조사지공이. 천여 년을 최고로 군림해 온 전설적인 무공 중의 하나가.’
꿀꺽, 마른침을 삼킨 문평은 천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고수가 되고 싶은 열망에 채양보양까지 해봤는데 뭐가 두려울까 싶다.
계속해서 천마의 짐 덩어리로 남아 있는 것보다는 잠깐 염치가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 역시 무림인인데 항상 천마의 도움만 바라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천마에게 보답이나마 하려면 지금보다는 나은 처지여야 했다. 지금처럼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한다면 이 일방적인 관계는 언제까지나 고착될 수밖에 없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목숨을 버려서라도 가지고 싶어 했던 무공이 아닙니까? 그런 무공을 제 손에 쥐여 주시겠다는데, 그를 모른 체할 수 있을 정도로 저는 초연한 인간이 아닙니다.”
마침내 마음을 굳힌 문평은 천마가 주는 기회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주제에 용케도 마음을 정했군.’
천마는 문평답지 않은 용기라고 생각하며 그가 해야 할 바를 일러 주었다.
“그럼 적백문에게 구배지례를 올려라. 저렇듯 고인 흉내를 내며 좌탈입망坐脫立亡한 것을 보니 생전의 성격이 얼마나 구태의연한지를 잘 알겠다. 그런 자에겐 형식을 제대로 지키는 편이 좋겠지. 가끔씩 후인의 예의를 시험하는 자들도 있으니 말이다.”
천마의 충고를 들은 문평이 자리에서 일어나 적백문의 시신 앞에 섰다. 살아 있는 듯 생생한 시신에 절을 하려니 왠지 어색하다. 그러나 상대는 그가 수습할 무공을 남긴 존재이고 까마득한 조사이기도 했다. 문평은 형식을 갖추는 게 당연하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적백문의 시신을 향해 절을 올렸다.
한 배, 두 배, 세 배. 마음을 정갈히 가다듬고, 엄격한 자세로 배사지례를 올리고 있던 문평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시체가 서서히 금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반면 천마는 팔짱을 끼고 선 채 뒤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빠짐없이 지켜볼 수 있었다.
배례가 계속됨에 따라 시신의 형태는 점점 더 크게 허물어져 갔다. 사람이 아니라 먼지로 만들어진 형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형태를 잃은 시신은 문평의 구배가 모두 끝나자 소복한 먼지 더미로 화하고 말았다.
이야기 속에서만 들어온 기이한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자 놀란 문평은 눈을 크게 뜨고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제 좌대 위에 남은 것은 소복한 먼지와 하나의 책자, 그리고 신비하게 빛나는 구슬뿐이다.
좌대로 다가간 문평은 낡아 너덜너덜한 책자를 집어 들었다. 달필의 전서체가 자신이 무공 비급임을 알리고 있었다. 천뢰신공天雷神功. 문평은 소리를 내어 그 글자를 읽었다.
‘어라, 천뢰신공이라고? 천마지공이 아니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이름의 무공이 나타나자 문평은 당황했다. 자신이 구배를 올린 자가 정말로 적백문이라면 천뢰신공이 아니라 천마지공이 나와야 하는데, 어째 아예 들어 보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온다.
문평이 이해를 못 하고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자, 천마가 한심하다는 듯 그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천뢰신공이 바로 천마지공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본디 마교에서 천마는 제석천의 화신이라고 불렸지. 제석천, 즉 인다라 신의 주 무기는 천둥과 번개다. 그러니 천마지공에서도 뇌기雷氣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그를 이용한 무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천마의 거처가 뇌정전雷霆殿이고, 그가 새로 만든 천마지공의 정식 이름이 뇌염마공雷焰魔功인 것은 다 그러한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운 사실을 알게 된 문평은 책자를 펼치고 내용을 읽어 보기 시작했다. 적백문이 남긴 물건에 대해 진심으로 아무 관심이 없었던 천마는 그저 뒷짐을 진 채 문평이 물건을 수습하는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다.
“……교주님. 여기 조사께서 남긴 서간이 있는데요, 이 글에 후인에게 남긴 당부가 있습니다.”
책자를 넘겨 읽기 시작한 문평이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천마에게 자신이 발견한 바를 고하자, 천마의 미간이 못마땅하게 찌푸려졌다.
300년 전의 사람이라 그런지 적백문의 사고방식은 고루하기 짝이 없었다. 기연을 남긴 고인들이 할 법한 짓은 모조리 다 하고 있으니 말이다.
기연이라는 건 옛사람의 흔적을 발견한 뒷사람들이나 하는 말이고, 본디 흔적을 남기는 자의 목적은 본인이 이룬 성취를 속세에 잊히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다 보니 구구절절 사연이 길 수밖에 없었지만, 천마는 그런 저간의 사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구차하군. 어디 한번 읽어 보거라. 그자가 대체 무슨 변명을 남겼더냐?”
천마는 냉랭한 투로 문평을 채근했다. 천마가 적백문에게 왜 저리도 진절머리를 치는지 몰랐지만, 그의 성마른 성미를 익히 알고 있는 문평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연자여.”
문평은 그가 시키는 대로 또박또박 서간을 읽어 내렸다. 기연을 남긴 고인들이라면 으레 그런 것처럼, 적백문의 서간은 자신의 유물을 수습할 사람을 향해 시작되고 있었다.
“그대가 찾아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거라고 본좌는 짐작한다. 이곳에까지 당도하려면 내가 낸 적지 않은 문제들을 풀어야만 했을 터. 그 문제를 모두 풀고 이 석실까지 올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우리 마교의 후인뿐이리라.”
마교의 후인이긴 후인이되, 자기가 직접 문제를 푼 게 아닌 문평은 이 부분에서 약간 찔리기 시작했다.
“그대에게 본좌가 감히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본좌의 실종으로 인해 마교가 어떤 분란을 겪었을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남은 자들의 고난을 알면서도 두 번 다시 돌아가지 못했으니, 본좌에겐 더 이상 법통을 이을 자격이 없다. 후인을 볼 면목이 없으니 어찌 시신이나마 남겨 두랴.
후인은 천뢰신공과 내단은 수습하되, 시신만은 수습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두 번 다시 청천 하늘을 마주하지 않으리라 맹세했으니, 죽어서도 그 맹세를 지키고 싶다. ……내단이라는데요, 교주님. 무슨 내단일까요?”
“이 좁은 굴에 영물 같은 게 있었을 리 없으니 보나 마나 본인의 내단이겠지. 옆길로 빠지지 말고 계속 읽어라.”
천마의 말을 들은 문평은 곁눈질로 좌대 위에 놓여 있는 신비한 구슬을 바라보았다. 저게 말로만 듣던 절대 고수의 내단이라는 건가? 이야기를 듣고 봐서 그런지 구슬의 광택이 한층 더 신비로워 보였다.
“흠. 흠. 그대가 무공을 수습해 나간 후 다시 문을 닫으면, 석실은 무너지고 우리 두 사람은 드디어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당부하건대, 후인이여. 나는 물론이고 내 옆에 있을 사람의 유골도 수습하지 않았으면 한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맹세를 지키지 못했으니 죽어서라도 같은 곳에 묻혀 그의 곁을 지켜주고 싶다.”
천마는 한쪽 눈썹을 휘어 올리며 죽은 자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적백문의 글귀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챈 건 문평도 마찬가지다. 물끄러미 백포 사내를 바라보고 있던 천마가 성큼성큼 다가가 그 옷자락을 풀어헤친다.
‘저 양반이 지금 시체에 뭔 짓을 하는 거지?’
그의 뜻밖의 행위에 깜짝 놀란 문평이 다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의 질문을 들은 천마가 귀찮은 듯 대답했다.
“흔적을 확인한다.”
“흔적이라고요?”
“사인死因을 확인하겠단 말이다.”
그가 백포 사내의 옷깃을 젖히자, 시신에 남은 끔찍한 흉상이 드러났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옷을 벗기고 보니 가슴을 가로질러 허리까지 이르는 부분이 벼락에 맞은 듯 시커멓게 그을려 있는 게 보였다. 피부는 열기 때문에 녹아내렸고, 그와 함께 내장마저 녹아내려 녹은 피부와 엉겨 붙었다.
문평은 욕지기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제껏 수많은 시신을 봐왔지만 이토록 처참한 형태를 한 시신은 본 적이 없었다.
“역시, 이 사내를 죽인 건 적백문이었군.”
천마는 혼잣말처럼 말하며 손가락으로 죽은 자의 피부를 쓸어 보았다. 보기에는 꺼칠꺼칠할 것 같은데 손끝에 닿는 느낌이 의외로 매끄러웠다. 조금 전 손을 만졌을 때도 느꼈지만, 역시 밀랍을 입혔다.
적백문의 시신이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것은 스스로의 내공 덕분이지만, 이자의 시신이 멀쩡한 것은 특별한 방부 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나뭇진 속에 곤충을 가두어 호박을 만들 듯, 이 남자의 시신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밀랍을 부어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천뢰신공의 흔적인가 보지요?”
“그렇다. 보면 알겠지만, 강호상에 이 정도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뇌기는 흔치 않지. 이 두 사람은 적백문의 말대로 같은 날 죽지 못한 것 같구나. 상황을 보아하니 이자가 훨씬 먼저 죽었어. 방부 처리가 제대로 되어 있는 걸 보면 처음부터 시체인 상태로 이곳으로 들어왔을지도 모르겠다.”
“방부 처리라니. 그럼 적백문이 시체와 함께 생활했다는 말입니까?”
시체를 직접적으로 만져 보지 않았던 문평은 천마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천마는 손끝을 문질러 기분 나쁜 촉감을 지우면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랬다는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있지 않으냐. 이 석실에 남은 물건들을 살펴보아라. 침상도 한 개고 의자도 하나다. 저기 보니 밥그릇도 하나구나. 여기저기 남은 흔적으로 봐선 이 석실에서 꽤 오래 살았던 듯싶은데, 다른 사람이 생활한 흔적이 없으니 둘 중 한 사람은 살아 있지 않았다고 봐야겠지.”
얼핏 들어 괴이했던 천마의 주장은, 자세히 들어보니 제법 그럴듯한 근거가 있었다. 자신의 눈으로 천마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한 문평은 먼지가 되어 버린 적백문의 시신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적백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나 기막힌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한 행동은 그야말로 이해하기 힘든 괴행이다. 상황만 봐서는 가슴 아픈 순애가 아니라 끔찍한 괴담이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 있는 사람이 할 만한 짓이 아닌지라 문평은 머리가 아팠다.
‘설마 천마라는 족속은 모두 다 이런 것일까? 남색가이고,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짓을 종종 저지르는 자들이어야 천마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건가?’
해괴한 의문에 시달리고 있는 문평과 달리 천마는 백포 사내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짚이는 것이 있었다. 오른손에 남은 자자의 글귀. 그리고 이마 위에 희미하게 남은 계인契印의 흔적.
적백문은 무생교를 무너트린 후 자취를 감추었고, 그 후 남은 평생을 백포 사내의 시신과 함께 보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할 만한 죄를 저지른 두 명의 사내라. 자세한 상황까지는 몰라도 대강의 사연만큼은 짐작할 만했다.
‘우승립과 적백문이라. 꽤나 험상궂은 인연이로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두 사람의 시신을 문평과 함께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천마는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묘해졌다.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뛴 두 사람의 천마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것도 흔하지 않은데, 그 둘이 똑같은 남색가인 데다 옆구리에 각자의 연인까지 데리고 있으니 이게 무슨 기막힌 우연인가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런 병신과 같은 수준이라는 뜻은 아니지.’
잠시 동안 그답지 않은 감상에 사로잡혔던 천마는, 죽은 우승립의 시신을 문평이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단순히 외양상의 조건만 따지자면 두 사람의 처지가 닮아 보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천마는 적백문 따위와 비교당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처신으로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친 것도 모자라, 지켜야 할 사람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놈이랑 자신의 어디가 비슷하단 말인가?
시신조차도 놓지 못할 정도로 소중한 상대였다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살렸어야만 한다. 지금 자신이 문평에게 그러는 것처럼,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다 해서라도 상대를 구했어야 한다.
정작 행동해야 할 때는 그 시기를 놓치고, 뒤늦게 시신을 붙들고 청승이나 떨어대다니. 한심해도 이렇게 한심할 수 없다. 저런 자에게는 솔직히 천마라는 호칭조차 아까웠다.
“엉뚱한 생각 마라. 저 작자보단 내가 백배는 낫다. 감히 누굴 누구하고 비교하고 있는 거냐?”
천마는 개운치 않은 기분을 털어 버리려는 듯 툭 하니 말을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마의 신통방통한 관심법에 다시 한번 속내가 들켜 버린 문평은 뜨끔한 기분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천마는 ‘네가 속으로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는 시선으로 문평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뭐. 별로 비교 같은 걸 하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냥 전대 천마님도 지금 계시는 분과 성향이 아주 비슷하구나, 천마는 다 그런가, 뭐 그런 소소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것뿐인데요.”
혹시 천마들이 배우는 무공이 지독한 마공이라 성격이 하나같이 그따위로 변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는 사실은 쏙 빼놓고 문평이 어물어물 변명했다.
“비슷하긴 뭐가 비슷해? 네가 보기엔 내가 저자처럼 시체 놀이나 할 법한 그릇 같으냐?”
“물론 교주님께서는 그런 괴벽스러운 일을 저지르지는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조그만 머리통 속에 쓸데없이 허튼 생각만 많구나. 똑똑히 기억해 둬라. 내가 살아 있는 한 너를 먼저 보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차라리 순장을 하면 했지, 나보다 먼저는 못 보낸다. 나이도 까마득히 어린놈이 언감생심 누굴 앞서겠다는 거냐?”
딱히 죽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건만, 문평은 괜한 꾸지람을 들었다. 그러나 꾸지람을 들은 것보다 더욱 마음에 걸리는 건 뜻하지 않게 들은 순장殉葬이라는 단어다.
‘순장이라니 웬 순장? 지금이 무슨 춘추 전국 시대인가?’
천마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어째 등골이 오싹해진다. 뜻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다 보니 농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뒤가 찝찝해지는 것이다.
‘이 사람 곁에 있다 잘못하면 진짜 순장되는 거 아니야?’
그는 질린 시선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보기와는 달리 저 인간은 나이도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문평이 은근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천마가 뻔뻔스러운 낯빛으로 그 눈을 마주 보았다.
‘왜? 순장당하는 건 싫은가 보지?’
천마가 눈빛으로 묻자, 문평 또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싫죠.’
‘그럼 너도 네 몫 정도는 해야겠지?’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들고 있는 그 책자부터 다 외워라. 그런 물건은 다 외운 후 아예 태워 없애 버려야 뒤탈이 없는 법이다.’
‘넵.’
천마의 명령을 받은 문평이 재빨리 손에 든 책자를 펴고 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오로지 순장이라는 단어만 머리에 박힌 문평은, 자신이 방금 눈빛만으로 천마와 대화를 했다는 사실 따윈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뤄질지 안 이뤄질지도 모르는 먼 훗날의 장례 방식보다는 지나치게 가까워진 당장의 거리를 더 의식해야 함이 옳은데도, 중요한 대목마다 헛다리만 짚는 문평은 결정적인 상황은 여전히 파악 못 하고 영 엉뚱한 곳에서 헤맸다.
천마는 코를 책에 박을 듯이 하며 구결을 외고 있는 문평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말은 몰라도 순장이라는 말은 진짜 농담으로 한 말인데, 그 한 마디에 기겁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 멍청한 꼴을 두고 보지 못하는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성격의 그가, 문평의 눈치 없음을 보고서도 귀엽다고만 느끼니 이거 참 큰일이다.
‘이러다 진짜 두고 가기 아까워지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요즘 애착이 강해지는 바람에 스스로도 위험하다 느끼고 있는데 말이다. 천마는 어리바리한 모습까지도 눈에 밟히는 문평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반로환동을 한 이상 이변이 없다면 문평보다 훨씬 오래 살게 되겠지만, 나이가 나이다 보니 생각하는 관점이 노인네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우.”
문평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크게 심호흡을 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두 손을 단전 앞에 모으고. 정석적인 좌공坐功 자세를 잡은 그는 숨소리조차 고르며 몸과 마음을 정갈히 했다.
머릿속에서 잡념을 몰아내고 어렵게 외운 구결들을 떠올려 본다. 무려 천팔백사십 자나 되는 구결을 사흘에 걸쳐 간신히 외운 문평은 자신이 잊은 게 없나 확인해 보며 눈을 반개했다.
“시작하겠습니다.”
혼자서 이 짓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긴장이 되어서 제정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명사의 가르침 없이 비급으로만 익힌 심법으로 전대 천마의 내단을 섭취하려고 하고 있으니, 어지간한 간덩이가 아니고서는 쉽사리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 다행히도 그에게는 천마가 있었다.
그는 내단을 섭취할 때의 요령과 주의 사항을 세세히 알려 주었고, 만에 하나 문평의 내력이 폭주하기라도 하면 도움을 주기 위해 그의 등 뒤에서 좌공의 자세를 취한 채 대기하고 있기까지 했다.
천마가 그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일까? 문평의 마음은 의외로 평온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사부나 아버지가 곁에 있어도, 이 정도로 마음이 놓이지는 않을 것 같다. 언제부터 이 사람을 이토록 의지하게 되었는지 문평은 기억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무섭고 압도적인 사람. 방심하면 피를 내게 만드는 매섭고 독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그는 운공 중의 등조차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 만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서둘러서는 안 된다. 네가 다스릴 수 없는 기운이라면 욕심을 내서도 안 된다. 알겠느냐?”
천마는 몇 번이나 했던 당부를 다시금 되풀이했다. 문평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어 전대 천마가 남긴 내단을 집어 들었다.
꿀꺽.
망설이지 않고 내단을 삼키자 손가락 두 마디 분량의 내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손으로 만지기엔 다른 구슬과 다름없이 딱딱하게 느껴졌었는데, 막상 입 안에 집어넣으니 청량한 감로수처럼 단번에 녹아 목구멍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내단이 위장으로 내려가자 그 부분이 얼얼해졌다. 지금 그것이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지나가는 곳마다 화끈한 자극이 인다. 음식이 일반적으로 소화되는 속도를 뛰어넘어 빠르게 내장을 타고 흐른 내단이 단전에 고이기 시작했다.
문평은 천뢰신공의 심법을 이용해 재빨리 운기를 시작했다. 좁은 단전이 꽉 차기 전에 서둘러 대주천을 하기 위해서다.
용암처럼 들끓는 기운들이 기혈을 타고 흘렀다. 그간 채양보양을 통해 기혈을 넓혀오지 않았더라면, 단번에 찢어발겨 졌을지도 모르는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행여나 진기가 폭주할까 싶어 진땀을 흘린 문평은 운기의 속도를 힘들여 조절했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을 따라 폭주하는 진기가 노도처럼 달려갔다. 좁은 기혈에 많은 기가 한꺼번에 밀어닥치자 혈도에 쌓여 있던 노폐물이 흩어지며 기혈이 확장된다. 내단에서 일어나는 진기는 마부를 잃은 마차처럼 그저 내달리기만 했다. 하나의 고리를 이루는 십이경맥十二經脈을 순서대로 따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거나 옆길로 새려고 한다. 그를 그대로 놔둔다면 모든 시도는 도로 아미타불이 되어 버릴 터. 문평은 사력을 다해 집중하며 운기의 방향을 이끌었다. 그의 의지가 고삐였고, 그의 노력이 마부였다.
투툭. 투툭. 투투둑. 그의 혈도를 따라 무엇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 진기가 드나들 정도로 좁았던 통로가 단번에 확장되면서 노폐물이 씻겨 나가는 소리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단전에서 밀어내듯 나오는 진기 때문에 운기하는 속도는 차츰 빨라졌다. 빨라지는 속도에 따라 소음도 더욱 커진다.
문평은 마치 빛을 따라 달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도 통제를 하기는커녕 고삐를 놓치지 않는 것에만 급급했다. 움직이는 기운 중에 제 것이라곤 절반도 안 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으나, 문평은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신 차려, 석문평. 네게 이런 기회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줄 알아? 감당 못 할 거라면 처음부터 욕심을 내지 말았어야지!’
지금 그의 등 뒤엔 천마가 있었다. 자신에게 이런 엄청난 기회를 제공한 장본인이, 그의 실패까지도 감싸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물론 고맙고 든든한 배려지만, 그런 마음과는 별도로 천마가 보고 있기에 더욱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존재했다.
천마는 세상에 모르는 공부가 없고, 못 하는 일도 없는 재주 많은 사람이다. 인간 같지도 않을 만큼 뛰어난 그에게 모처럼의 기회조차 놓치는 멍청한 모습을 보이는 건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은 일이다.
오기가 치솟은 문평은 운기에 더욱더 정신을 집중했다. 터질 듯이 부푼 혈도에서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임맥을 따라 회전하던 내기가 점차 빠르게 휘돌았다. 독맥을 따르던 내기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 듯 빠르게 서로의 뒤를 쫓던 내기들이 마침내 서로를 향해 부딪쳐 갔다. 쾅! 쾅! 콰광! 서로 다른 두 개의 방향으로 뻗어 가던 힘들이 거침없이 충돌했다. 연달아 들려오는 충돌음에 귓전이 먹먹할 지경이다.
임독양맥의 교차점이 정신없이 뒤흔들렸다. 마치 빠른 급류에 휩쓸린 통나무가 다리를 두드리듯이 연달아 들이박는 기운 때문에 머릿속에서 천둥 번개가 내리친다.
태어날 때는 모두 열린 채로 태어난다지만, 오랜 화식과 탁기로 굳어질 대로 굳어진 양맥의 벽은 두껍고 완고했다. 한두 번의 두드림으로는 흔들리긴 했지만 좀처럼 뚫리지 않는다.
하긴. 타통이 쉽다면 이곳이 감히 생사현관生死玄關이라고 불리겠는가? 타통을 하기 위해서는 생과 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나들어야 한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 생사현관이다. 이를 넘지 못하고서는 고수의 길로 나아갈 수 없었다.
튕겨 나온 내기가 역류를 하게 되면 그때부턴 바로 주화입마다. 문평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가다듬은 내기의 방향을 되돌렸다.
쾅, 콰앙, 콰앙. 다시 한번 내기들이 생사현관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한 번 내기가 부딪칠 때마다 몸 전체가 울렸다. 요동치는 내기 때문에 기혈이 뒤흔들려 내상을 입은 것처럼 속이 얼얼했다.
상한 기혈 때문에 핏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삼킨 문평은 지독하게 정신을 다잡았다. 거듭되는 시도에 벽들이 점차 허물어지고 있었다. 조금씩 벽이 얇아지는 느낌이 들더니 끝내는 물살에 휩쓸려 내려가는 제방처럼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문평의 전신에서 새까만 땀이 쏟아져 내렸다. 임독양맥이 타통되면서 혈도에 쌓여 있던 노폐물이 모공을 타고 흘러나오는 것이다. 혈도뿐만 아니라 몸 내부에 쌓여 있던 탁기도 같이 흘러나오고 있어, 그 악취는 감히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운기를 계속하는 문평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자신의 몸에서 나는 끔찍한 냄새를 눈치도 못 채고 있는 모양이다.
‘제법이군.’
행여 무리한 운기로 주화입마라도 입을까 걱정돼 예의 주시하는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던 천마는, 그 모습을 보고 문평이 임독양맥을 타통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법 성과를 얻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엄청난 결과를 얻을 줄이야.
천마는 이채로운 눈빛으로 문평을 바라보았다. 문평은 이번 일로 일류의 벽을 뛰어넘어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 깨달음으로 얻은 경지가 아니라서 무위 자체는 낮았지만 무려 생사현관을 타통했으니 그 능력은 여느 절정의 고수들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일반적으로 임독양맥이 타통되는 것은 절정에서 초절정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다. 그 정도 경지는 이르러야 생사현관을 관조할 만한 능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한데 문평은 고작해야 절정으로 올라가는 상황에서 생사현관을 타통해 버렸다. 아직 단단하게 굳어 있었을 철벽같은 혈도를 그저 엄청난 힘 하나만으로 무지막지하게 뚫어 버린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를 만큼 지독한 고통이었을 텐데 어떻게 참았을까? 문평에게 그만한 독심毒心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었기에, 천마는 이러한 예상 밖의 결과가 기특하기만 했다.
운기를 끝내고 문평이 눈을 뜨자, 검은색의 홍채 속에서 번개 같은 신광이 번득였다 사라졌다. 몰아의 경지에서 벗어난 문평은 그제야 자신의 몸에서 나는 악취를 깨달았는지 당혹해하며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깔끔 떠는 성격인 천마는 아예 뒤로 물러나 문평을 피하기까지 했다.
“너, 냄새난다.”
천마가 대놓고 지적하자 문평의 얼굴이 붉어졌다. 본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만큼 크나큰 모욕은 없는 법. 문평은 더듬더듬 말까지 더듬으며 자신의 상황을 변호했다.
“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생사현관이 타통되면 검은 땀이 흐르는 건 당연한 수순입니다.”
“저리 가라. 가뜩이나 공기도 탁해 죽겠는데 네 냄새 때문에 머리까지 아프다.”
천마는 기껏 임독양맥을 타통한 문평에게 축하한다는 치하 한 마디가 없었다. 자신보다 먼저 이 경지를 경험해 봤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을 뻔히 알 텐데도, 머리가 아프다는 둥 숨쉬기 힘들다는 둥 하며 사람을 쉴 새 없이 놀려대기만 할 뿐이다.
딴에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거둔 성과에도 별다른 반응을 얻을 수 없자 문평은 기가 꺾였다. 천마의 눈높이에서 봤을 땐 이 정도의 일은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하긴. 천마 같은 사람에게 고작 절정 고수쯤이야 눈에 차지도 않겠지.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되는 건가?’
예상하지 못한 큰 성취를 이루었으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도, 영 기운이 나질 않았다. 기쁘기는커녕 씁쓸하기만 하다.
“얼른 산을 내려가 씻고 밥 먹자. 몇 날 며칠을 물고기만 먹었더니 입에서 비늘이 돋을 것 같구나.”
이 석실 안에 도착한 후에도 먹을 걸 찾을 수 없어서 지하수로가 있던 동굴로 도로 내려가 물고기를 잡아 와야 했었던 천마는, 이제 두 번 다시 물고기 따위는 먹지 않겠다는 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예.”
문평이 힘없이 대답하자 천마가 그를 돌아보았다.
‘저놈이 왜 저렇게 맥이 빠졌을까?’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문평을 바라보던 천마는,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낮게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독한 놈. 아직 경지에도 이르지 못한 놈이 내단의 힘을 빌려 무식하게 타통했으니 생사현관을 열고 나서도 기력을 못 찾지. 조현 쪽으로 가면 환동주還童酒를 잘 빚는 객잔이 있다. 거기 가서 술이나 한잔하고 오늘 저녁은 푹 쉬거라.”
천마는 위로인지 칭찬인지 모를 알쏭달쏭한 말을 하더니 석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문평은 천마가 석실을 무너트리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문밖으로 나갔다.
석실의 문을 닫은 천마가 파자를 눌러 다시금 기관 장치를 작동시켰다.
우르르, 우릉, 우르릉.
처음에 들었던 것과 다른 진동음이 울리며 동굴이 흔들렸다. 두꺼운 철문 밖으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내부에 어떤 장치를 해놓았는지, 멀쩡했던 방이 그 한 번의 조작에 무너지고 있는 모양이다.
한참 동안 굉음이 울려 퍼진 후에야 소음이 가라앉았다. 그들은 지지대를 잃은 철문이 힘없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 뒤로 생긴 기다란 통로를 볼 수 있었다. 석실이 아래로 내려앉으면서 벽으로 가려져 있던 통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여태까지 지나왔던 동굴들처럼 반대편도 빛 한 점 없는 칠흑의 어둠이었다.
적백문의 시체 가루가 석실 안에 있었으니 무너진 석실 자체가 무덤인 셈이다. 예의 따위를 상관하지 않는 천마는 그 위를 성큼성큼 밟고 지나가 통로로 나갔다. 문평도 그 뒤를 서둘러 따라나섰다.
다시금 끝없는 어둠이 펼쳐졌으나 문평은 처음만큼 그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천마가 손을 내밀어 길을 인도해 주고 있는 데다, 예전보단 눈이 밝아져 그나마 사물의 형상 정도는 어렴풋이 보이는 덕분이다.
“아, 진짜 이 냄새. 못 참겠군. 내 손에까지 냄새가 배겠어.”
……비록 천마가 좀 많이 심술궂게 굴긴 하지만, 문평은 참았다.
말본새가 좀 나쁘긴 해도 뭐 어떤가? 그는 문평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은인이다. 목숨을 살려 준 데다, 사방이 막힌 동굴에서 데리고 나와 주기도 했고, 그에 더해 절정 고수까지 만들어 준 은인 중의 은인 아닌가. 저래 봬도 천마는 자신에겐 제법 잘하고 있었다. 그의 지랄 맞기 짝이 없는 성미를 생각한다면, 제법이 아니라 상당히 잘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