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17 장 (18/26)

제 17 장

“저기다! 저곳에 기린패를 가진 조화투호造化偸狐가 있다!!”

어떤 빌어먹을 놈이 탕원초碭袁俏의 행적을 발견하고는 크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저런, 똥물에 튀겨 죽일!’

우묵한 나무 그늘에 숨어 은형술을 펼치고 있던 탕원초는 지독하게 눈이 좋은 개자식을 원망하며 빠르게 몸을 날렸다. 표홀하기 그지없는 신법으로 자리를 피하자마자, 그가 있던 자리에 암기가 날아들었다.

대체 무슨 독을 얼마나 처발랐는지, 시퍼렇게 물이 든 암기에선 쾌쾌한 독 향이 풍겨 나왔다. 한두 명이 던지는 것이 아닌 듯 암기의 종류도 모양도 모두 각양각색이다. 탕원초는 턱 끝까지 치솟는 욕설을 간신히 삼키며 발을 움직였다.

양상군자 생활 20여 년 만에 이렇듯 심하게 쫓기는 것은 처음이다. 자신이 이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탕원초는 무엇보다도 그 사실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죽은 삼음응백三陰鷹魄의 시체에서 이 보물을 훔쳤다. 당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를 일이었는데, 저자들은 그가 물건을 손에 넣은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알아냈다.

‘빌어먹을 새끼들. 내가 너희들에게 잡히면 조화투호가 아니다.’

강호에 이름난 도둑 중의 하나인 조화투호는, 자신의 인생을 바꿀 만한 기회가 드디어 왔다고 여겼다. 날렵한 몸 하나만을 믿고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이다. 부잣집의 곳간을 털고 다니니 생활은 풍족했지만 마음은 늘 허전했다.

처음 칼을 들고 강호에 투신했을 때, 무명武名을 드높이길 바라지 않았던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가진 재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 도둑질이나 일삼고 다니지만, 그에게도 한때는 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꿈을 이룰 수 있는 엄청난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탕원초는 죽는 한이 있어도 이번 기회만큼은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라고 평생 도둑놈 소리만 듣고 살라는 법 있어? 천마지존공이라면 나도 천마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목숨을 살리기 위해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와중에도 그의 마음은 꿈에 부풀었다. 천마지존공天魔至尊功이라.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듣자 하니 이 무공은 당금의 천마조차 익히지 못한 마교의 조사지공이란다. 그 무공을 익혀 천하를 호령할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하니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는 달리면서도 히죽히죽, 미친놈처럼 웃었다. 도망가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았다.

만약 그가 강호에 재출도를 하는 날이 온다면 오늘 그를 쫓은 자들은 평생 동안 제가 저지른 죄를 후회하게 될 터였다.

탕원초는 자신을 쫓아오던 자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천마지존공을 익힌 후에 강호로 되돌아오면, 그들은 감히 강호지존이 될 절대자를 몰라보고 함부로 핍박했다며 바닥에 머리를 박고 벌벌 떨게 될 것이다.

상상이라고 하기보단 망상에 더 가까운 생각을 하면서도 탕원초는 마냥 행복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에게는 미래가 없었는데, 지금의 그에게는 새로운 내일이 생겼다.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은 살아보고 싶은 희망찬 내일이 말이다.

“거기 서라! 이 쥐새끼 같은 놈!”

발 하나는 드물게 빠른 그가 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고 다니면서 몸을 숨기자, 뒤따라오던 놈들 중 하나가 분통을 터트렸다.

‘너 같으면 서겠냐 미친놈아?’

적들이 내뱉는 흉흉한 욕설에도 탕원초는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조금이라도 빨리 발을 놀려서 적들을 떨쳐낼 마음뿐이었다.

“흥. 건방지군. 내 앞에서 감히 등을 보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느닷없이 등 뒤에서 한기 어린 비웃음이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불길한 낌새를 느낀 탕원초는, 달리던 자세를 허물어트리지 않고 그대로 몸을 굴렸다. 치욕스럽기 그지없는 나려타곤의 자세였으나 덕분에 목숨은 건졌다.

무언가 엄청나게 날카로운 것이 그의 허리가 있던 부분을 스쳐 가더니 그가 있던 자리뿐만 아니라 주변까지도 온통 초토화시켰다. 어른이 두 팔로 끌어안아야 할 정도로 굵은 등치의 나무들이 그 공격에 맞아 허리가 절단되었다.

우람한 나무가 예고도 없이 쓰러지자, 그를 바짝 쫓아오고 있던 자들 속에서도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악!”

콰지직.

뿌드득.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와 부서지는 소리가 동시에 부딪혀 요란한 가운데, 탕원초는 굴리던 몸을 그대로 벌떡 일으켜 다시 달렸다. 약이 오른 듯 차가운 음성이 혀를 찼다. 그는 다시 탕원초의 등줄기로 검을 날리며 소리를 질렀다.

“놈! 도망가지 못한다!!”

이제까지의 상대들과는 달리, 이 상대는 스스로가 한 말을 정확히 실행에 옮겼다. 그대로 달리다간 척추가 잘려 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한 탕원초는 앞으로 꼬꾸라지듯 쓰러지며 몸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의 몸 전체가 흙투성이에 먼지투성이가 됐다. 그 흉한 꼴을 보고도 상대는 쫓아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을 더 굴러 몸을 피하던 그는 결국 더는 가지 못하고 상대에게 목을 밟히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경추를 부러트릴 듯 험악하게 그의 목을 밟은 남자는, 반 토막이 난 검 끝을 탕원초의 코끝에 겨누며 서슬 푸른 얼굴 가득 인상을 썼다.

“기껏해야 좀도둑 주제에 강호의 보물을 넘보다니. 내 생전에 너처럼 용감한 좀도둑은 본 기억이 없구나.”

강퍅하고 모질어 보이는 겉모습 그대로, 상대의 입담은 독랄하기 짝이 없었다. 탕원초는 숨을 쉴 수 없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내가 그의 목젖 위를 힘주어 밟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이기는커녕 호흡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데굴데굴 굴리는 그의 눈동자를 따라 반 토막 난 검 끝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눈알을 파낼 듯이 위협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날붙이에 잔뜩 긴장한 탕원초는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열어 간신히 질문을 던졌다.

“서, 설마 절검노귀?”

“어리석은 쥐새끼에게도 눈은 달려 있나 보구나. 그래. 내가 바로 절검노귀切劍老鬼 중염천仲廉天이다.”

중염천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폭로했다. 내공을 가득 담은 그의 목소리가 사위를 울리자, 시끄럽기 짝이 없던 주위가 일순 고요해진다. 심지어는 간간이 들려오던 신음조차 뚝 그쳤다. 그의 이름이 가진 위력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절검노귀 중염천은 점창파의 파문 제자로, 그 무위가 초절정에 근접하고 있다는 절정 고수였다. 특별한 뒷배가 없는 정사지간의 인물이지만, 손속이 매섭고 한 번 원한을 맺으면 그것을 갚을 때까지 결코 잊는 법이 없기 때문에 섣불리 그를 적으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문을 당할 당시 반으로 잘린 절검切劍은 그의 독문 표식이나 마찬가지여서, 그것만 봐도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강호의 보물에는 임자가 없다지만, 땅을 기는 두꺼비 주제에 감히 하늘의 거위 고기를 욕심내다니 분수를 모르는군. 길게 말할 것 없다. 기린패를 내놓아라.”

“모, 못 준…, 컥!”

“살아서 내놓을 테냐, 죽어서 빼앗길 테냐? 너 하나의 목숨 정도야 우습지도 않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나?”

상대가 반항을 하자 중염천은 발끝에 강하게 힘을 주며 탕원초를 압박했다. 마음 같아서는 단숨에 죽여 버리고 물건을 빼앗고 싶지만, 혹시나 물건을 다른 곳에 숨겨 두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는 없기에 간신히 충동을 눌러 참았다.

미물인 토끼조차도 도망갈 구멍은 세 개를 판다고 한다. 하물며 상대는 교활하기 그지없는 도둑이다. 그가 어떤 얕은꾀를 짜냈을지 짐작하지 못하는 중염천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저, 절대 안 돼. 차라리 죽여라.”

탕원초도 그런 중염천의 심중을 눈치채고 있었다. 손속 독하기로 유명한 중염천이라면,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 사람 목숨 한두 개 정도는 우습게 없앨 위인이다. 그런 자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여태껏 살려 두는 것은 그가 보물에 부려 놓았을 수작을 염려했기 때문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순순히 기린패를 내주었다간 보물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잃을 게 뻔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탕원초는 끝까지 버텼다. 버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도 했다.

“시건방진 놈.”

교활하게 굴러가는 탕원초의 눈동자를 본 중염천의 심중에 분기가 치솟았다.

‘고작해야 이류에 불과한 좀도둑 주제에 어디서 감히!’

목을 자르진 못해도 사람 몸엔 자를 수 있는 것이 제법 많다는 사실을 놈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지가 멀쩡한 채로 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만 한 복인 줄도 모르는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중염천은 싸늘하게 눈을 빛내며 검을 미끄러트렸다. 검신이 반으로 부러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쇠도 자르는 보검이었던 절검이 탕원초의 어깨 위에 그대로 꽂혔다. 날카로운 절검에 검기까지 더해지자 팔 하나가 잘리는 것은 우스웠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순식간에 팔이 잘린 탕원초는 경악에 사로잡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모골이 송연하리만큼 처절한 비명이 숲속에 메아리쳤다. 그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조용해졌던 사위는 더욱 고요해지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탕원초의 뒤를 쫓고 있었는데, 그 많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다 어디로 갔는지 숲을 감싼 적막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아직 자를 것은 세 개가 더 남았다. 아니, 네 목과 양물까지 합치면 도합 다섯 개지. 내가 물을 때마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씩 자르겠다. 고자가 되어 죽을지, 앉은뱅이가 되어 죽을지는 네가 직접 고르거라.”

발끝으로 툭 쳐서 어깨에 치솟고 있는 피를 지혈한 중염천이 냉엄한 경고를 던졌다. 너무 아파 반쯤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탕원초는 고통스럽게 중염천을 올려다보았다.

중염천은 정말로 그의 사지를 양단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 끝이 그의 하나 남은 반대편 어깨로 향했다. 이동하는 순간에도 검기를 거두지 않은 덕에 그 흔적을 따라 한 줄기 혈선이 생긴다.

“으윽. 으으윽.”

극심한 공포감에 질린 탕원초는 애원조차 못 하고 검이 지나가는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탕원초의 피부를 헤치며 반대편 어깨 쪽으로 검을 옮긴 중염천은 혼잣말인 양 중얼거렸다.

“팔이 둘 다 없으면 물건을 꺼내주기 힘들겠지? 역시 다리 중에 하나를 자르는 것이 맞겠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른쪽 허벅지 아래가 잘려 나갔다. 사소한 절삭음조차 없이 가볍게 베어졌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두려웠다.

순식간에 팔 하나와 다리 하나가 잘려 나간 탕원초는 거의 혼절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하나 중염천은 가차 없이 가슴의 당문혈當門穴을 걷어차 기절하기 직전인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탕원초는 입에서 피거품을 물며 다시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천하를 질타할 꿈에 부풀었는데, 순식간에 반병신이 되고 말았다.

이게 정말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부렸기에 받은 벌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다. 설마하니 원래부터 사람의 운명이 이따위였을 리가 있겠는가.

회한에 잠긴 탕원초의 눈가로 짙은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꿈을 꿀 자격이 있다. 도둑이라고 해서, 이류 무사라고 해서 천하를 꿈꿔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중염천은 거만하게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분수를 모르는 탕원초의 꿈은 존재 자체가 죄요 부덕이었다.

“남은 사지나마 온전히 간직하고 싶다면 대답해라. 기린패는 어디에 있느냐?”

“큭, 크크크큭.”

“웃어? 이 상황이 네겐 아직도 우스운 게냐?”

“우습다마다.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지. 네가 나라면, 자신을 이 꼴로 만들어 놓은 놈에게 순순히 보물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천만에. 다른 자들에게 넘기는 한이 있어도 네놈에게만은 절대 못 준다.”

탕원초는 피거품이 그륵그륵 끓고 있는 입을 용케도 움직여서 저주 같은 말을 내뱉었다. 원독으로 이글거리는 눈은 핏발이 터져 온통 혈안이 되어 있다.

화가 난 중염천은 거두고 있던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이놈은 아직도 좀 더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건방진 놈. 여기까지 와서도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군.”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야, 절검노귀.”

독기 어린 태도로 키득키득 웃던 탕원초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모든 내공을 한꺼번에 목소리에 짜낸 듯, 그의 목소리는 불문의 사자후처럼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자들은 들으시오!! 당신들이 아는 대로 내게 기린패가 있소! 하지만 여느 멍청이들처럼 그것을 직접 들고 다니는 바보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소!! 누구라도 좋으니 내 눈앞에서 절검노귀를 죽여 주시오!! 하면 그 사람에게 기린패를 숨겨 놓은 장소를 알려 주겠소!!”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숲으로 퍼져 나갔다. 설사 귀머거리라고 할지라도 숲에 있는 이상 이 엄청난 고함을 듣지 못한 자는 없을 터였다.

“이 개새끼가!!”

설마 탕원초가 이런 짓을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중염천은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탕원초를 걷어찼다. 내력이 듬뿍 실린 발길질에 거세게 걷어채는 바람에, 탕원초의 상세는 한층 더 엄중해졌다. 쇄골이 부러지고 늑골이 깨져 나갔다. 조각조각 깨진 뼛조각은 살 속에 틀어박혀 심각한 내출혈을 일으켰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탕원초가 울컥 피를 토했다. 그가 토해낸 검붉은 핏줄기엔 점점이 내장 조각마저 섞여 있었다.

‘이 개만도 못한 놈이 주제를 모르고!!’

중염천은 다시 한번 탕원초를 걷어차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계속되지 못했다. 그의 발 앞에 누군가가 날린 암전이 쏘아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발끝을 스쳐 지나간 암전은 바닥에 깊숙이 꽂혀 꼬리를 떨었다. 하마터면 발등이 꿰뚫릴 뻔했던 중염천이 노기충천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암전이 튀어나온 쪽을 노려보자, 나무줄기가 베어져 엉망진창이 된 숲속에서 몇 명의 인원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앞에 나선 사람들은 모두 열두 명이었다. 대부분이 일류 고수의 무위를 넘어섰고, 그중에서도 둘은 무려 절정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다.

모두가 똑같은 흰옷에 푸른색으로 염색한 띠를 허리에 둘렀고, 소매 끝은 토시 속에 집어넣어 활동성 있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또한 어깨에는 손바닥 길이의 소전을 쏠 수 있도록 만든 단궁檀弓을 들었는데, 천하를 통틀어 그런 차림새를 고수하는 집단은 오직 하나뿐이기에 그들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거 이거, 혹시 진가陳家가 아니십니까? 광동에서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중염천은 감히 말을 놓지는 못하면서도 비꼬는 것만은 참지 못했다. 가슴께까지 늘어진 탐스러운 미염을 가진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화답했다.

“허허허. 이거 재미있는 일이구려. 우리 진가는 멀리 광동에서부터 왔건만, 스스로 소개도 하기 전부터 모두가 알아주니 말이오. 먼 곳에 있는 친구는 잊기 쉽건만, 강호의 동도들은 역시 의리가 있는 것 같소.”

언중유골言中有骨. 온화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말하고 있으나 진 가주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부드러운 태도 속에 숨어 있는 담담한 경고를 알아들은 중염천은 더 이상 대거리를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중염천이 예상하고 있는 바 그대로 광동 진가廣東陳家의 무사들과 함께 나타난 미염의 노인은 광동 진가의 가주인 노호일보怒虎一步 진궁인陳穹寅이다. 그는 강호에서 구를 대로 구른 노회한 늙은 생강이었다. 이미 오래전 절정의 경지에 들었기에 이미 초절정이 아닐까 의심이 되는 노고수이며, 그의 휘하에 자리하는 무인들은 왜구와의 잦은 싸움으로 단련된 백전노장들이다.

광동 진가는 요 근래 왜구들의 발호가 이토록이나 극심하지만 않았더라면 오대세가가 아니라 육대세가가 되었을 거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욱일승천하고 있는 가문인데, 그런 가문의 주요 무인들이 하나도 아니고 열둘씩이나 나타났으니 혼자 몸인 중염천이 감당하기는 힘든 상대였다.

“진 가주께서도 설마 마교의 보물을 노리고 오셨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싸움에 진 개처럼 스스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로지 혼자의 힘만으로 독보강호獨步江湖 해 온 고수의 골기가 그런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주인을 잃은 지 수백 년이 지났다는데, 이제 와 보물의 임자가 따로 있겠소?”

“신선 같은 행색을 하고 염치가 없으시군요. 명색이 정도의 일맥인 광동 진가에서 사마외도의 무공을 탐내다니요.”

“그러는 절검노귀께서는 어째서 마교의 무공을 탐하시는 게요? 구대문파의 떳떳한 제자가 감히 마교의 무공에 눈이 멀어 사람까지 해치다니. 아무리 파문 제자라 하나 도가 지나치지 않소.”

노회한 진 가주는 중염천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여전히 허허 웃으며 말했다. 엄중하게 꾸짖는 것도 아니고 존장이 가볍게 나무라고 있는 태도를 취하는지라, 욱하는 성미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검을 뽑을 수 없었다.

중염천은 날카로운 눈으로 광동 진가의 고수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이 본격적으로 덤비기 시작한다면 그 한 몸으로는 도저히 저들을 당해내기 어려웠다.

“하하하하. 늙은 영감탱이가 혀에 기름을 바른 듯하구나. 그런다고 네놈이 뱃속에 품은 검은 칼이 감춰질 것 같으냐? 어림도 없는 수작이지!”

그들이 서로의 기색을 경계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주위의 공기가 덩달아 진동했다. 급히 내기를 끌어 올려 방비하지 않았다면 내상을 입었을지도 모르는 가공할 웃음소리에, 사람들은 분분히 위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큰 웃음소리가 대지를 뒤흔든다. 큰 종이 깨지는 것처럼 쟁그라운 그 소리에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크게 신형이 흔들렸다.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것은 진 가주와 중염천, 그리고 또 한 명의 절정 고수 정도가 고작이다.

충격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한 사람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웃음소리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고수임을 짐작하게 하는 그 사람은, 화려한 금란 가사를 입고 옥으로 된 염주를 주렁주렁 매단 우람한 풍채의 승려였다.

중 주제에 알록달록한 비단옷을 입은 것도 참으로 가관인데, 손가락마다 커다란 보석이 달린 반지를 끼고 있으니 지독한 악취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장내의 사람들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도 감히 경시하지 못했다. 알이 커다란 보석 반지를 낀 승려의 손가락이 고작 일곱 개뿐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칠지악불七指惡佛!!”

중염천은 부지불식간에 상대의 별호를 외쳤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초절정으로 의심되기만 하는 고수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건만, 진짜로 초절정으로 분류된 고수까지 나타나 버렸다. 상대의 정체를 알아본 중염천은 오늘 자신의 운수가 길하지 못할 것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반 토막 난 정파의 애송이가 이 어르신의 존함을 알고 있구나. 그래. 내가 바로 칠지악불이다.”

장내에 내려선 칠지악불은 좀 전에 중염천이 했던 말을 그대로 흉내 내며 사납게 웃음을 터트렸다.

칠지악불은 겉보기에는 50대 중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자지만 실은 일흔이 넘은 노고수다. 하고 다니는 행색만 중일 뿐 중다운 짓은 전혀 하지 않는 사파의 고수인데, 불공을 드리는 여인을 겁탈하는 것을 즐기고 탁발하는 학승을 보면 때려죽이는 것을 취미로 여기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자였다.

그의 이름이 강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0여 년 전 초절정 고수로 유명하던 신주투검神州鬪劍 누형동僂炯動과의 혈투 때부터였다. 아이를 낳은 후 근처의 절에 불사를 드리러 갔던 신주투검의 아내를 겁탈한 칠지악불은, 그의 악행에 분노해 검을 들고 쫓아온 신주투검까지 도륙함으로써 스스로의 악랄함을 만천하에 알렸다.

실의에 빠진 누형동의 아내는 그만 자결하고 말았고, 신주투검의 사문이던 태검문太劍問에서는 복수를 위해 그를 쫓았으나 도리어 추적대만 피해를 입었을 뿐 칠지악불을 단죄할 수는 없었다. 수십이 넘는 사상자를 낸 태검문이 칠지악불을 포기하고 봉문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무위가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신만만한 중염천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자를 만만히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긴장으로 등을 굳히며 칠지악불을 노려보았다.

“크륵. 좋군. 아주 좋아. 조개를 노리는 것이 황새라면, 황새를 노리는 것은 어부란 말이지. 하하하. 하하하하하!!”

바닥에 누워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탕원초가 통쾌하다는 듯 웃기 시작한다. 붉게 물든 이빨 사이로 가래가 섞인 피가 튀었다. 안색이 점차 검어지고 흰자위가 누르스름해지는 것으로 볼 때, 그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듯 보였다.

“이 빌어먹을 개새끼가!”

벌레만도 못하게 봤던 탕원초에게 다시 한번 농락을 당하자, 분함을 참지 못한 중염천이 발길질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발을 채 들기도 전에 화살이 쏘아졌고, 칠지악불이 선장禪杖을 들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두 곳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감당치 못한 중염천은 화살을 피하려다 종아리에 선장을 얻어맞고 말았다.

딱!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마찰음이 요란하게 들리더니 정강이에서 끔찍한 고통이 올라왔다. 다행히 뼈가 상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근육이 상했다. 미처 준비를 못 하고 있던 터라 고작 한 수로 큰 손해를 본 셈이다.

낭패를 당한 중염천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두세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칠지악불은 선장으로 중염천을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나는 너에게 별다른 사심이 없다. 하지만 탕원초가 네 목 하나에 기린패를 걸었으니 어쩔 수 없구나. 보물을 가지지 못한 죄려니 생각하고 포기하거라.”

칠지악불이 다짜고짜 중염천을 공격하려고 하자, 다시 한번 암전이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셋이나 되는 사람이 한꺼번에 화살을 날렸기에, 화살이 꽂힌 모양새가 마치 발 앞에 선을 그은 것처럼 되었다.

모처럼 마음먹은 행사를 방해받은 것에 짜증이 난 칠지악불은 화난 표정으로 진 가주를 돌아보았다. 진 가주는 여전히 여유 있게 웃으면서 점잖게 말했다.

“중씨 어린아이와는 본인이 먼저 이야기 중이었소. 칠지악불.”

“하? 그래서? 차례차례 순서라도 지켜 가며 목을 자르잔 말이냐?”

비슷한 나이에 같은 배분임에도 불구하고, 진 가주는 존댓말을 쓰고 칠지악불은 반말을 사용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은, 강호상에 알려진 두 사람의 무위에 확고한 차등이 있기 때문이다.

칠지악불 정도가 되는 초절정의 고수에게는 일문의 주인에게도 말을 놓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강자존의 율법이 횡행하는 강호에서는 오로지 강한 자만이 모든 특권을 누렸다.

“허허허. 본인이 누구처럼 사마외도의 사람도 아닌데, 물건을 얻자고 다짜고짜 사람을 죽일 순 없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저리 꺼져. 귀찮게 옆에서 깔짝대지 말고!!”

“나 원 참. 성격도 급하시긴. 다짜고짜 죽여 놓고 나면 어쩌려고 그러시는 게요? 탕원초에게 좀 더 자세한 조건을 들어 봐야 하지 않겠소? 다 죽어 가는 사람의 말만 믿고 행사를 벌이기엔 걸려 있는 사안이 너무 중대하지 않소이까.”

진 가주와 칠지악불은 이 자리에 중염천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처분에 대해 의논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욕적인 일에 중염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태어나서 이런 모욕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이러한 난관을 타개할 만한 비책이 없었다.

“나에게, 그륵, 다른 의도는 없소. 다만 이 몸이 죽기 전에 원수를 갚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요.”

그들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어질까 봐 걱정이 된 것일까? 잠긴 목에 피가래를 그륵그륵 끓어가며 탕원초가 참견을 해왔다. 자신의 앞을 막아선 진 가주를 못마땅하게 노려보고 있던 칠지악불은, 탕원초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발까지 쾅쾅 구르며 우악스레 화를 냈다.

“이러다 저놈이 기린패의 행방을 불지도 않고 죽어 버리면 어쩌려는 거냐? 정히 대화를 더 나누고 싶다면 죽은 놈을 붙잡고 말을 붙여 보거라. 나는 그 전에 저놈을 먼저 죽여야겠다.”

뚱뚱하고 거대한 몸이 땅을 박차고 날았다. 광동 진가의 무사들은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암전을 겨누었다. 잠시 고민하던 진 가주는, 칠지악불이 중염천을 향해 쏘아져 나가자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 암전의 방향을 바꾸었다.

짧은 파공음이 들리더니 중염천의 어깨 옆으로 날카로운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결국 광동 진가까지 중염천의 목숨으로 기린패를 사기로 결정한 것이다.

탕원초의 말 한마디에 쫓는 입장에서 졸지에 쫓기는 입장이 되어 버린 중염천은 거세게 이를 갈았다. 그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발로 신법을 펼쳐 장내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 섣부른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가 옮기는 발걸음마다 암전이 먼저 쏘아져서, 번번이 달려가는 방향을 바꿔야만 했던 것이다.

광동 진가의 궁술은 듣던 대로 놀랍기 짝이 없었다. 살을 놓는 순간에 바로 다시 살을 메기는 것처럼 살과 살 사이의 간격이 전혀 없다. 정신없는 빠르기로 쉴 새 없이 암전이 날아오니, 공격을 하기는커녕 몸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할 지경이다.

칠지악불이라고 해서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혹시나 선기를 빼앗길까 봐 두려운지, 득달같이 달려든 칠지악불은 족히 80근은 되어 보이는 무지막지한 선장을 매섭게 휘둘러 댔다.

거대한 무기가 공기를 가로지를 때마다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엄습해 온다. 빗맞기만 해도 뼈까지 두 동강이 날 것 같은 엄청난 기세다. 검사라고는 하나 반검을 쓰는 중염천은 그에 감히 맞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보검이라고 할지라도 저런 무기와 맞부딪히면 내력이 진탕될 게 뻔했다.

하지만 그를 공격하고 있는 자는 단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칠지악불의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지, 그에 더해 진 가주까지 직접 싸움에 뛰어들어 한 손을 보탰다. 덕분에 그들의 공세는 특이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칠지악불과 진 가주는 중염천을 죽이려고 하다가도, 자신보다 상대의 수가 더 빨라 보이면 서슴없이 상대를 공격함으로써 그의 목숨을 구해냈다. 상대가 중염천을 죽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동시에 자기 손으로 그를 죽이려고 하니 일이 번잡해진 것이다.

고래 싸움에 얻어터지는 새우마냥 중염천은 그들의 공세 사이를 어렵게 헤쳐 나갔다. 칠지악불은 듣던 바대로 확실한 초절정의 고수였고, 진 가주 역시 소문대로 이미 초절정에 올라 있었다. 둘의 실력이 서로 엇비슷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중염천은 진즉에 갈가리 찢어지고 말았을 터였다.

중염천의 몰골은 곧 형편없이 변했다. 날카로운 권풍에 옷이 찢어지고, 선장에 빗맞아 온몸이 퉁퉁 부었다. 두 사람의 초절정 고수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바람에 한 번도 직통으로 맞은 적은 없지만, 그랬기 때문에 몸은 더 만신창이다.

중염천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처량해진 자신의 처지에 피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가 천하의 절검노귀가 이런 꼴을 당하게 되었단 말인가? 평생을 칼 한 자루에 의지해 독야청청 강호를 떠돌았는데, 하필이면 막판에 이런 자들에게 걸려 불에 그슬린 개꼴이 되고 말았다.

초절정 고수와 절정 고수가 뒤얽힌 어마어마한 혈투에, 다른 자들은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보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혹은 요행을 바라고서 탕원초의 뒤를 쫓아온 자들이 적지 않았으나, 진짜 고수들의 흉험한 격전을 보고 있자니 내심 모골이 송연해지고 만다.

중염천보다 먼저 탕원초를 잡았더라면 본인 또한 저런 꼴을 당하게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과 중염천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운이 나빴다는 것이고 중염천은 운이 좋았었다는 것뿐이다. 세상사 새옹지마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본인들도 언제 저런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 중염천의 처지에 동병상련의 정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거참, 일을 번거롭게들 하시네요.”

그런 상황에서, 또 한 명의 고수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한 사람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몹시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복장이 매우 독특해, 가만히 서 있어도 절로 시선을 끌었다.

양지유가 얽힌 듯 희디흰 가슴을 반 이상 드러낸 당의唐衣를 입었고, 매끄러운 어깨엔 결 고운 견사로 만든 피백을 둘렀다. 머리는 고계로 틀어 올렸고, 비단으로 만든 목단 화관을 그 위에 얹었으며, 눈썹을 누에 날개 모양으로 그린 후에 미간에 화전까지 찍었으니, 완전히 당대의 귀부인 같은 복장이다. 풍염하고 농밀한 몸매에 그런 복장까지 갖춘 여인은 보기만 해도 절로 양귀비楊貴妃가 연상되는 구석이 있었다.

향기로운 여인이 한들거리며 나타나 흰 뺨에 손을 대고 곱게 한숨을 내쉬자, 여색에 약한 칠지악불이 힐끔힐끔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진 가주는 그녀의 복색을 보고 정체를 알아차렸는지,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런 두 사람의 상반된 태도에도 여인은 그저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넌 누구냐?”

아직도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한 칠지악불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희디흰 손가락으로 뺨을 짚고 있던 여인이 맑은 교소를 터트리며 칠지악불에게 말했다.

“강호 사람들은 소녀를 철마희라고 부른답니다. 하지만 오라버니께서는 그저 아화我花라고 부르시면 돼요.”

자신을 소개하는 그녀의 태도는 교태롭기 짝이 없었으나, 칠지악불은 그녀의 이름을 듣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철마희라고 하면 무려 무림공적으로까지 선포된 희대의 요녀다. 겉으로 보기엔 이제 겨우 서른이 되었을까 말까 한 외모지만, 사실상 팔순이 다 된 노파로 칠지악불보다도 오히려 나이가 많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매끈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두 다리 사이로 숱한 남정네의 정기를 빨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암사마귀와 같아서, 한 번 그 품에 빠져든 남자는 살아서는 떠날 수 없었다.

‘제길. 기린패가 별별 요물을 다 부르는군. 심지어 철마희까지 나타나다니 말이야.’

그녀의 채양보음술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고 있는 칠지악불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소문을 듣자니 무림공적으로 지목된 후 정도맹에 사로잡혀 흑마옥에 들어갔다던데, 죄다 헛소문이었던 모양이다. 팔십 먹은 할망구 피부가 저렇게 팽팽하다는 게 바로 그 증거 아니겠는가? 그 사이에 무공이 한 번이라도 전폐가 된 적이 있다면, 아직도 저런 피부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철마희鐵魔姬 기일화紀一花는 자신의 등장으로 인해 싸움이 소강상태가 되는 것을 즐거운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특히나 강호를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버릇없는 고수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매우 즐겼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그녀의 강력한 지배욕을 고취시켰다.

동침한 사내가 떠나는 것이 싫어 한 번 품은 사내는 무조건 죽여 버릴 정도로 강한 독점욕을 가진 그녀는, 본인의 영향력을 이런 식으로나마 확인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철마희 선배께서도 기린패 때문에 오신 것입니까?”

정파 출신인 진 가주는 철마희와 같은 요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공만은 화경을 넘어섰다는 소문이 있는 고수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겉으로 내비치는 태도만큼은 짐짓 공손했다. 철마희는 자신을 선배라고 부르는 늙은이를 새침한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다 늙어 머리까지 성성한 게 지금 누구더러 선배라는 거지?’

그녀는 마치 모욕이라도 받은 것 같은 느낌으로 진 가주를 쏘아보다가 흥 하니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이 자리에 기린패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요? 당연한 이야기를 왜 새삼스럽게 묻는지 모르겠군요.”

칠지악불에게는 간이라도 내어 줄 듯 알랑거리던 그녀지만, 진 가주에게는 찬바람이 불도록 냉랭했다. 하지만 진 가주는 그런 철마희의 태도가 오히려 반가웠다. 저 요녀의 눈에 잘못 들었다가 내공은 물론 목숨까지 잃은 남자가 한둘이 아니다. 괜히 그녀의 눈에 띄어 목내이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무시당하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하다.

“이놈은 내가 잡았다. 뒤늦게 어슬렁거리며 들어와 놓고 새치기를 하는 건 용서 못 해!”

진 가주보다 성미가 급한 칠지악불은 혹여 그녀가 자신의 먹잇감을 채가기라도 할까 봐 잔뜩 경계하며 이빨을 드러냈다. 칠지악불과 진 가주만으로도 모자라 철마희까지 등장하자, 도망갈 의욕조차 잃어버린 중염천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낭패할 대로 낭패한 몰골에 넋까지 빠졌으니 상거지가 따로 없었다.

“어머, 오라버니.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설마하니 뒤늦게 나타나 오라버니의 노고를 가로채려고 하겠어요? 저는 다만 모두에게 이 상황이 덜 번거롭기를 바라는 것뿐이랍니다. 제가 우리 세 사람 모두에게 이로운 방법을 하나 알고 있거든요.”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매력적인 음성으로 간드러지게 칠지악불의 경계를 녹인 철마희는, 은어 같은 손가락으로 중염천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한데 그러기 전에 먼저 저자의 머리가 필요하거든요? 누구 저에게 저자의 머리를 선물해주실 분 안 계신가요?”

말로는 선물해 줄 분을 찾는다면서, 손에서는 바로 지풍이 나갔다. 그녀의 나긋나긋한 태도에 일순 방심하고 말았던 칠지악불은, 그녀가 쏘아 낸 지풍에 넋 나간 중염천의 미간이 그대로 꿰뚫리는 것을 보고 있는 대로 노성을 내질렀다. 진 가주도 험악한 표정으로 낮게 혀를 찼다. 죽 쒀서 개 준다는 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빌어먹을! 이 냄새나는 계집이 사람을 방심시켜 놓고 수작을 부려!!”

칠지악불은 더러운 성미를 주체 못 하고 선장을 휘둘러 댔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향해 출수할 것 같은 거센 기세에, 철마희는 짐짓 어깨를 움츠리며 울상을 지었다.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하려는 일은 우리 세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요. 화를 내시려거든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보시고 화를 내세요.”

“요녀가 또 무슨 감언이설로 사람을 속이려고 드는 거냐? 내가 멍청하게 또 속을 것 같아?”

“아이참. 정말 사람을 못 믿으시네요. 진정하세요. 꼭 제가 진정을 시켜드려야겠어요?”

여전히 몸을 움츠리며 가련하게 속삭이는 철마희였으나, 그녀의 말에는 명백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칠지악불은 그녀의 방약무인한 태도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이 참았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이 자리에서 철마희와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철마희가 마지막 적이라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붙어 보겠지만, 그녀의 뒤에도 막강한 적수가 첩첩산중으로 쌓여 있으니 섣불리 나설 수는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중가 놈이 조개였지만, 자칫하다가는 그조차도 조개가 될 수 있다. 지금 이 자리에만 초절정의 고수가 셋이나 있다. 이후에 또 어떤 자들이 나타날지 누가 알겠는가?

“조용하니까 좋네요. 생각을 정리하기도 편하고요. 이봐요. 거기 눈 큰 양반. 그래요, 당신 말이에요.”

철마희는 진가장의 무사들 중 가장 준수하게 생긴 남자를 찾아 손끝을 까딱였다. 잠시 주인의 눈치를 보던 무사는, 철마희의 행동을 두고 보기로 한 진 가주가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마지못한 표정으로 철마희의 앞에 나섰다.

“내 말 잘 듣고, 그대로만 하세요. 시키지도 않은 허튼짓을 하면 가만 안 두겠어요.”

“……알겠습니다.”

“일단 중염천의 머리를 잘라 탕원초에게 가져다주세요. 그러면 그가 기린패를 건네줄 것입니다.”

여전히 사근사근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철마희가 명을 내렸다. 그러자 그녀의 행동을 눈여겨보고 있던 진 가주가 의문을 표했다.

“기린패를 건네줄 거라니요? 그게 아니라 기린패의 행방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닙니까? 저놈이 본인 입으로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만?”

“어머나. 순진도 하셔라. 그건 당연히 거짓말이지요. 설마 진 가주께서는 죽어가는 사람은 절대로 거짓말을 못 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진궁인은 진지하게 물었는데, 철마희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희롱하듯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짧은 말을 진 가주가 이해하지 못하자, 하는 수 없이 자신이 내린 명령에 대해 풀어서 설명한다.

“따지고 보면 간단한 일이에요. 탕원초는 기린패를 손에 넣은 후 줄곧 쫓겼어요. 처음에는 시간에 쫓겼고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쫓겼죠. 잠시도 쉬지 못하고 줄곧 달렸으니 물건을 숨길 만한 시간도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보물은 아직 저자의 품속에 있겠죠.

중염천이 저자를 잡자마자 멱을 따고 품속을 뒤졌다면 그는 아직도 살아 있었겠죠.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고나 할까요? 생각이 너무 많았던 게 문제였어요.”

그녀는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탕원초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고 있던 진 가주 역시 그녀의 말을 듣고 나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명을 내리자 진가장의 무사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꼴좋구나. 중염천.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죽은 중염천의 머리를 잘라 탕원초에게 들고 가자, 새카맣게 물든 그의 얼굴에 돌연 빛이 돌아왔다. 상세가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회광반조回光返照의 조짐이다.

무사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무릎을 꿇고 앉아 앞섶을 뒤졌다. 탕원초는 그가 마음대로 앞섶을 뒤지도록 내버려 두면서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철마희 쪽을 바라보았다.

“고맙소. 철마희 선배. 선배가 죽어가는 사람의 한을 풀어 주는구려.”

딱히 좋은 의도를 가지고서 한 일은 아니지만, 남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듣기 좋은 일인지라 철마희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좀처럼 물건을 찾을 수 없어 이리저리 품 안을 뒤져가며 찾는 무사의 손길을 느낀 탕원초는 혼잣말처럼 무언가를 입에 담았다.

“그보다 아래쪽…… 허리춤에…….”

말을 끝까지 맺지도 못하고 그의 목소리는 점점 사그라졌다. 붉게 충혈된 눈에서 빛이 꺼지고, 부글거리던 피거품도 가라앉으며 한줄기 핏물로 변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사람에게 기어코 복수를 하고 말았으니 죽어 가면서도 한은 없겠으나, 한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는 모습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허망하다.

진가장의 무사는 그가 마지막으로 언급한 장소를 뒤져 손바닥만 한 옥패를 찾아냈다. 정교하기 짝이 없는 기린의 문양이 섬세하게 새겨진 그것은 딱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귀물이었다.

“찾은 것 같습니다!”

이 물건 하나 때문에 광동에서 하북까지 수천 리 길을 거슬러 올라와야 했던 무사가 흥분된 어조로 소리쳤다. 소리 없이 그들을 훔쳐보고 있던 숲속이 일순 술렁인다. 격동을 참지 못한 듯 칠지악불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고, 진 가주도 안색을 달리하며 무사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만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저 물건에 가까이 가지 마세요. 섣불리 움직이면 그 사람부터 공격하겠어요.”

장내에서 유일하게 침착성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철마희였다. 그녀는 냉정한 어조로 모두에게 경고를 날리더니, 기린패를 들고 있는 무사를 돌아보았다.

“기린이 그려져 있는 앞면 말고, 뒷면을 보세요. 거기에 혹시 그림이나 글씨가 새겨져 있나요?”

그녀의 질문에 무사는 황급히 뒤를 확인했다.

“이, 있습니다. 뭔가가 있어요.”

“잘됐군요. 요철이 분명하게 느껴지나요?”

“네.”

자신의 손에 천마의 보물이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모양인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상태로 무사가 말했다. 생긋 미소를 지은 철마희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그의 발치에 던졌다.

자신의 발치에 던져진 흰 종이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던 무사는, 철마희가 그것을 주우라는 시늉을 하자 고분고분하게 종이를 주워 들었다.

“솔직히 말해 저는 기린패 따위 필요 없거든요. 천마를 직접 불러내 봤자 그 양반은 여자 치마폭에 휩싸이는 분도 아니어서요. 내가 바라는 건 오로지 기린패의 탁본뿐이에요. 그 탁본을 이 자리에 있는 세 사람이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면 서로 싸울 필요도 없겠죠?”

맹목적으로 기린패 자체에만 집착하고 있던 사내들에게, 그녀는 기발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어차피 천마비고天魔秘庫를 바라는 자들에게 기린패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비고로 통하는 지도만이 중요할 뿐이다.

어두웠던 눈이 탁 트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칠지악불과 진 가주가 무릎을 쳤다. 맞다. 그런 수가 있었구나.

생각해 보니 그런 식으로 탁본을 뜨게 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첫 번째 이점은 원하던 대로 천마비고로 향하는 지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점은 온전한 기린패의 주인이 됨으로써 무림인들의 집중 표적이 되는 가능성을 덜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밖에 없는 물건의 주인이 되어 수백 수천의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쫓기는 것보다는, 셋으로 나뉜 물건의 주인이 되는 편이 한결 안전하다. 그런 식으로 이목이 분산된다면 뒤를 쫓는 자들도 당연히 줄어들 게 아니겠는가.

철마희가 제안한 이 새로운 방법은, 비고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구미가 당기는 방법이었다. 설사 비고 안에서 이 사람들을 다시 만나 생사를 결해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그러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니 말이다.

칠지악불과 진 가주의 적극적인 동의하에 기린패의 탁본이 만들어졌다. 각자 한 장씩 나눠 가진 사람들은 미련 없이 기린패를 부수고 세 방향으로 흩어져 갔다.

이제껏 하나의 물건만을 쫓던 자들은, 그들의 행방이 나뉘자 쉽게 방향을 잡지 못하며 그 자리에서 맴돌았다. 그들은 누구를 쫓아가는 게 가장 이득일지, 또 누구의 뒤가 가장 안전할지를 고심하느라 머리를 굴렸다.

이때부터 기린패를 둘러싼 소동은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어떻게든 기린패를 탈취하려는 움직임에서, 천마비고로 가고 있는 세 사람의 뒤를 쫓는 것으로 소동의 양상이 바뀌었다. 어차피 기린패가 사라진 이상 그들이 비고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세 사람의 뒤를 쫓는 것뿐이었다. 천마의 이름을 등에 업은 천마지존공의 위력은 이렇게 또다시 천하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

“관 형, 여기입니다!”

문평이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자, 아래층에서 백우경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일행 중 그가 가장 늦게 일어난 것인지 대부분의 탁자는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뜩이나 공간도 좁은데 사람들까지 빽빽하게 앉아 있으니 꼭 콩나물시루 같다.

그들이 묶고 있는 객잔은 남양에서 가장 큰 객잔이었으나 50여 명이나 되는 일행을 한꺼번에 받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웃에서 빌려 온 것이 분명한 짝이 맞지 않은 탁자까지 놓으며 꾸역꾸역 자리를 만든 터라 비좁을 뿐만 아니라 통로까지 모자랐다.

마음 같아서는 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느니 그냥 아무 데나 빈자리에 앉아 주는 밥을 먹고 싶다. 그러나 굳이 손까지 흔들어가며 아는 체를 하는 백우경의 체면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문평은 하는 수 없이 좁은 통로를 비집고 들어가 백우경이 앉아 있는 탁자로 향했다. 일행의 대표 격인 자들만 앉아 있는 그 탁자에는 백우경은 물론이고 천마와 파면객도 함께 앉아 있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아지셨습니까?”

그가 겨우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백우경이 아침 인사 대신 그의 안부를 물었다. 전날 천마에게 거의 업혀 가다시피 하고 사라져 소식이 없었으니, 추적대를 통솔할 입장으로서 걱정을 할 만도 하다.

문평은 절로 낯이 붉어지는 것을 억지로 감추며 소리 없이 웃었다. 어제 천마와 일이 좀 있어서 이 화제는 꺼내기 껄끄러운데, 아무것도 모르는 백우경에게 그런 사실을 설명할 자신도 없으니 그저 난감할 따름이다.

“괜찮습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윤 대협의 추궁과혈이 효과가 있었나 보군요.”

“……물론입니다.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문평은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번쩍 드는 추궁과혈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이쯤 되면 뭐라고 한마디 할 만도 한데, 천마는 아무 말도 없다.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무시하려고 그러는 건가? 천마의 심중을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문평은 무표정한 그의 속내가 궁금했으나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주문을 일괄적으로 해놓았는지 특별한 요청도 없었는데 밥과 탕이 나왔다. 문평은 젓가락을 집어 들고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도 하루 종일 달릴 예정이다 보니 반찬이 간단하다. 간단히 볶은 소채 몇 가지와 기름을 적게 사용한 생선 요리 하나가 전부다. 소화가 안 되는 음식을 먹었다가 속이라도 부대끼면 안 되기 때문에 식단 자체도 세심히 안배한 기색이다.

“그나저나 걱정이군요. 아직 부상에서 회복하지도 못하셨는데, 앞으로는 매일같이 강행군일 테니 말입니다. 이렇게 무리하시다가 자칫 건강을 해칠 수도 있으십니다.”

지금 당장은 괜찮다고 하더라도 매일의 피로가 쌓이고 쌓이면 어떤 병증으로 자랄지 모른다. 잘 쉬게 놔둔다면 쉽게 나을 상처도 잘못 다스리면 골병이 될 수 있다. 무인이기에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백우경은 문평을 걱정했다.

본인 말대로 그의 건강이 신경 쓰이기도 할 것이고, 그 때문에 일행의 발걸음이 늦춰질까 염려하는 마음도 있을 터였다. 두 가지 경우 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문평은 백우경이 내심 바라고 있을 말을 해줄 수 없었다.

“그래 봤자 앞으로의 여정은 겨우 사흘이 남았을 뿐입니다. 아무리 기력이 부족해도 그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습니다.”

몸도 안 좋은 나를 감히 어디다 두고 갈 생각이냐. 중간에 버리고 갈 거면 애초에 왜 데리고 온 거냐. 은근히 압력을 넣은 얼굴로 싱긋 미소를 짓자,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것 같던 백우경이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상대가 천마였으면 윽박지르고 억눌러서라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을 텐데, 그와 한 핏줄이면서도 그런 점은 닮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 대협. 어차피 제 고집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니, 저 사람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여정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두 사람의 실랑이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천마가 조용히 끼어들어 상황을 정리했다. 얼핏 들어서는 단순히 문평을 두둔하는 것으로만 들리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은근히 완고한 벽 같은 게 느껴진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참견하지 마’로도 요약을 할 수 있는 그의 말에 멋쩍어진 백우경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친우이자 주군인 사람이 무안을 당하는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게 된 조세화는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굳이 일정만을 걱정해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제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었다면 사과드립니다.”

어떤 순간에도 예의를 잃지 않는 백우경이 옷자락을 고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천마는 말없이 고개만 까딱하는 것으로 그 인사를 받았다.

평소에는 맘에도 없는 인사치레도 잘만 하더니만 오늘은 대체 무슨 일이래? 문평은 그답지 않게 직설적인 태도를 보이는 천마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지금 자기가 누구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지를 까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윤승효의 탈을 뒤집어쓰고 천마같이 굴면 보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참. 그러고 보니까 대주님. 오늘의 목적지를 아직 못 들었는데요. 오늘은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전에 없이 쌀쌀맞은 태도로 분위기를 가라앉힌 천마 덕에 식탁 위의 대화가 잠시 사라졌다. 한동안 묵묵한 적막이 계속되자 더는 참기 힘들었는지 일행 중의 한 명이 나서서 애써 명랑한 화제를 이끌어 냈다.

분위기 쇄신을 위해 솔선수범해서 나선 사람은, 시커먼 사내들만 가득 있는 이 탁자에서 유일한 홍일점인 조수란曹秀蘭이다. 그녀는 이제 고작 열아홉에 불과한 방년芳年의 아가씨인데, 어린 나이에 벌써 일류에 다다른 빼어난 무재를 갖고 있으면서도 성품이 맑고 착했다.

두 사람의 성을 보면 알겠지만 조세화와 그녀는 서로 친인척 간이다. 촌수로는 사촌 간이지만, 두 사람 간의 나이 차이가 워낙 많이 나는 터라 조세화는 내심 그녀를 조카딸 비슷하게 여기고 있었다.

“오늘은 신향新鄕까지 갈 예정입니다.”

어린 아가씨의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백우경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당했으면 앙금이 남아 있을 법도 한데, 이 남자는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물같이 고요하고 정갈하기만 했다.

어떻게 천마의 집안에서 저런 제대로 된 인간이 나올 수 있었던 걸까? 천마의 질긴 핏줄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던 문평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홀로 감탄했다.

역시 가정 교육이 문제인 모양이다. 뿌리가 같은 피라도 마교가 키우면 천마가 되고, 정도가 키우면 백우경이 되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히 와 닿았다. 맹모삼천지교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닌 듯하다.

“와! 그러면 하루 만에 하남성을 거의 종단하게 되는 셈이잖아요. 한데 그런 여정을 사람은 버텨도 말이 버틸 수 있을까요?”

마음씨 고운 조수란은 백우경의 답변을 듣고 대뜸 말부터 걱정했다. 그녀의 일행은 하나같이 내력이 두터운 내가고수들이니 문평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사람이 상할 리는 없겠지만, 한낱 미물인 말들이 그런 강행군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던 까닭이다.

“하하. 조 소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말들은 바로 대완마입니다. 그 옛날 왕쌍王雙이 타고 다녔다는 천리정완마가 바로 이 대완마였죠.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피처럼 붉은 땀을 흘리는 한혈마汗血馬도 아니고, 하루에 천 리를 달리지도 못하지만, 대완마는 다른 어떠한 종류의 말들보다 속도가 빠르고 지구력이 우수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감히 천마天馬라는 별명으로 불릴 수 있겠습니까?”

“어머, 대완마를 달리 천마라고 부르기도 하나 보죠?”

“그렇습니다. 천마는 대완마의 가장 대표적인 별명 중 하나입니다.”

“그럼 우리는 ‘천마’를 타고 달리는 셈이로군요?”

“듣고 보니 그런 셈이 되는군요.”

이 천마가 그 천마는 결코 아니지만, 두 단어의 음이 같았기 때문에 충분히 중의적인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백우경과 조수란은 가볍게 농담을 나누고 있을 뿐이지만,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문평의 등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래서 사람은 남의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건가 보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고 천마 말은 천마가 듣는다. 화약 창고 옆에서 폭죽을 터트리는 어린아이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문평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것들이 감히 누구의 앞인 줄 알고 천마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진심으로 천마 한번 타보고 싶어? 진짜로 그런 일이 생기면 울고불고 난리가 나는 것은 틀림없이 너희들일 텐데?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런 이야기는 함부로 입에 담는 게 아닙니다. 얼마 전 신강에서 정검문의 청백쌍조靑白雙鳥가 당한 일에 대해 듣지 못하셨습니까? 바깥에서는 어디에도 듣는 귀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위험한 농담을 주고받는 그들이 못마땅한 것은 문평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간을 찌푸린 조세화가 나서더니 두 사람에게 주의를 준 것이다.

조세화가 엄격한 원리원칙주의자에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성품임을 익히 아는 두 사람은 그의 주의를 받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죄송합니다.”

조그맣게 사과를 한 조수란이 백우경과 눈이 마주치더니 살짝 웃었다. 백우경도 입을 다물면서도 눈가는 슬며시 풀어지고 있다. 백우경의 나이가 올해로 마흔하나였으니 방년인 조수란과는 거의 아버지와 딸 정도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허물없이 보였다.

결국 조세화의 꾸지람으로 막을 내리긴 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 농담이 오고 간 덕에 식탁 위의 분위기는 많이 풀렸다. 간간이 대화도 나누고 자유롭게 사담도 하면서, 아침 식사를 끝낸 일행들은 각자의 방에서 채비를 마치고 다시금 모이기로 했다. 천마, 아니 대완마를 타고 또다시 종일 달리기만 해야 하는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문평은 각오를 단단히 하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래도 어제의 경험이 있으니 요령 없이 당하기만 하지는 않을 터다. 처음부터 내력을 돋워서 달리고 틈틈이 자세도 바꿔줘야지. 기합을 단단히 넣은 상태로 자신의 말을 찾던 문평은 천마가 두 마리의 말을 한꺼번에 끌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특별히 고른 것 같은 새하얀 백마 옆에 그의 붉은 말이 서 있었다. 붉은 말이라고는 해도 적토마처럼 멋있게 붉은 건 아니고, 듬성듬성 갈색 털이 섞인 적갈색 말이다.

마구간의 한가운데서도 산책 나온 귀공자인 양 품위 있게 선 천마는, 손에 든 접선을 천천히 부치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래?’

이제껏 천마에게 당한 게 한두 개가 아닌 문평은 그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경계심을 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윤 대협. 그 말은 제 말이 아닌가요?”

다행히 마구간에 그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일행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문평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며 천마에게 다가갔다.

천마의 푸른 눈동자가 가소롭다는 듯이 좁혀졌다. 이목구비는 분명히 윤승효인데, 그 얼굴 위로 윤승효와 천마의 표정을 자유자재로 드러내는 특이한 재주를 선보인다. 그런 천마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꼭 변검變臉을 구경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 재미를 붙일 수 있는 배짱만 있다면 그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를 터였다.

“책임진다고 했으니 책임져야겠지요. 저는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관 형.”

문평의 질문을 들은 천마가 천연덕스럽게 그의 말을 받아넘겼다. 역시 천마는 한마디 말을 하더라도 버리는 게 없었다. 그저 지나가듯 한마디 해놓고는, 그 말을 가지고 옴짝달싹도 못 하게 사람을 옭아매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던진 말이었는지도 모르지. 저 사람이 어디 계획 없이 행동하는 걸 본 적 있어?’

문평은 주춤 그 자리에 서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를 고심했다. 그러나 천마에게는 이미 사람들 앞에서 해둔 말이 있었고, 상대에게 명분이 생긴 이상 다소 억지스러운 행동을 하더라도 이해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가 아무리 고민을 해봤자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천마가 그렇게 하도록 놔두지도 않았다.

그는 문평의 팔을 끌고 와서 말에 태웠다. 문평의 붉은 말이 아니라 자신의 흰말 위로 태운 것이다.

‘뭐야? 말을 바꿔 타자는 게 대책이었나?’

그가 무슨 수작을 벌이려는 건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문평은, 뒤이어 천마가 자신의 뒤에 올라타자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자, 잠깐? 왜 말 한 마리에 두 사람이 타는 거지? 말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오늘도 하루 내내 달릴 예정인데??’

“잠깐만요, 뭔가 이상한데요? 설마 이게 대책입니까?”

건장한 사내 둘이 동시에 올라탔으니 제아무리 명마라고 하더라도 속력을 낼 수 있을 리 없다. 사람이 둘씩이나 탄 이상 말이 달리는 속도는 당연히 느려질 것이고, 속도가 늦어지면 일행을 따라잡기는 더욱 요원해지고 만다.

상황이 그렇게 되면 일정에 차질을 빚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던 장담조차 무색해질 텐데, 이 사람은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러는 걸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말은 한 사람의 무게만 느낄 테니까요.”

문평의 근심을 들은 천마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문평의 허리에 양팔을 두르고 자기가 대신 고삐를 잡는다.

그가 윤승효로 있을 때는 두 사람의 키가 엇비슷하기 때문에 자세가 조금 우스워졌다. 둘 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상태에서 뒤의 사람이 고삐를 잡다 보니, 정작 고삐를 잡은 사람에게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일부러 허리를 세우지 말고 편하게 등을 기대세요. 제 가슴에 기대시면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한술 더 뜬 천마는 요상하기 짝이 없는 요구를 했다. 그의 말을 들은 문평의 얼굴이 확 하니 붉어지고 말았다.

다정한 한 쌍의 연인도 아니고, 뒤에 앉은 사람의 품에 기대앉은 채 말을 타라니 어불성설이다. 남이 보면 그 얼마나 꼴 보기 싫겠는가. 문평만 해도 남자들끼리 그런 꼴을 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런 억지스러운 요구를 하시는 겁니까? 그런 자세로 어떻게 말을 타라고요?”

“사람은 하려고만 마음먹으면 다 해내는 법입니다. 괜한 까탈 부리지 말고 제가 한 말에 책임질 수 있게 도와주시지요.”

문평이 말을 안 듣고 반항하자 천마가 희디흰 이빨을 드러내며 상큼하게 말했다. ‘너 참 더럽게 말 안 듣는다. 냉큼 이리 와서 시키는 대로 안 해?’를 윤승효 식으로 하면 그런 문장이 되나 보다.

다시 한번 싫다고 말을 하려던 문평의 눈에 의미심장하게 꼼지락거리는 천마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허리춤 근처의 장문혈章門穴을 은근히 맴도는 그 손가락들은 정 말을 듣지 않으면 혈도라도 짚어서 제 뜻대로 할 기세로 번득이고 있었다.

폭력과 위협에 약한 문평은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버티다가 혈도를 짚이고 나면, 천마 성격에 더 민망한 자세로 놔둘지도 모른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시키는 대로 윤승효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마구간에서 한참 말을 달릴 준비를 하던 사람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하게 뜬다. 쪽은 팔리는데 뭐라고 말할 것도 없고, 그저 얼굴만 홧홧하게 붉어진 문평은 고개를 외로 꼬며 쏟아지는 시선들을 모르는 척했다.

남의 얼굴이라고 아예 철판을 깔고 있는 천마는 무심하게 고삐를 잡으며 말을 몰아갔다. 뒤늦게 객잔에서 나오던 백우경이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방심한 듯 입을 벌렸다. 그의 옆을 따르던 조수란도 적지 않게 놀랐는지 동그랗게 치뜬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정신없이 바라본다.

“그, 무슨……?”

어찌나 놀랐는지 달변인 백우경이 말을 다 잊었다. 고양이가 혀를 물어 가기라도 한 듯, 말문을 못 열고 있는 백우경에게 천마는 온화한 태도로 자신의 뜻을 천명했다.

“보시다시피, 확실하게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 책임이 설마 그 책임이었단 말인가? ‘책임’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범위 자체가 워낙에 광범위하다 보니, 문평은 천마가 말하는 ‘책임’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천마는 문평에게 책임질 일을 유독 많이 저질렀기에 그 많은 책임 중에 대체 어떤 책임인가조차도 알 수 없다.

신혼의 부부처럼 친밀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달라붙은 두 사람은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를 내며 얼어붙은 인파들 사이를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차라리 그냥 혈도를 짚어 주시면 안 됩니까?”

상상보다 현실이 훨씬 더 충격적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문평이 천마에게 물었다. 천마는 목을 울리며 나직이 웃더니, 태연자약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다. 정신 잃은 놈을 안고 가는 게 무슨 재미라고. 너를 위해 내가 이런 수고까지 해주는데 나도 즐거움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게 아니냐.”

역시 사람의 상식으로 천마를 이해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문평은 자신이 어쩌다가 이런 남자에게 걸려들었는지를 새삼 후회하며, 절망적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남부끄러운 자세인 것만 제외하자면, 천마의 처방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문평은 길을 떠난 지 반나절이 되지 않아 그 점을 깨달았다. 아침부터 지금껏 어제와 비슷한 속도로 달리고 있는데도 등이 전혀 아프지 않았다. 체중의 절반을 천마에게 분산시키고 있는 데다 고삐를 쥐는 것도 스스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을 오래 타고 있으니 허리가 울렸지만, 이 정도야 감안할 수 있었다.

천마는 기마술이 매우 뛰어났다. 말을 다루는 재주에 무공이 도움이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평은 이제껏 이렇게 자유자재로 말을 다루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꼭 말 위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편안히 말을 몰았다. 진동도 거의 없고 자세도 안정적이어서, 그에게 기대고 있는 문평까지도 같은 흐름을 타게 된다. 자기 체중을 말이 못 느끼게 하겠다는 장담까지도 진심이었는지, 두 사람이 함께 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 달리는 속도는 다른 말들과 거의 엇비슷했다.

처음에는 이상하다는 듯 그들을 보던 일행들이 나중에는 감탄의 시선을 보내왔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을 모는 것은 그들도 처음 보았던 것이다. 덕분에 신기한 동물 보듯 하는 시선들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두 사람이 취하고 있는 자세가 독특하긴 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려니 하고 스스로 납득하고 넘어가 버린 것이다.

“이렇게 말을 모는 법을 어디에서 배우셨습니까?”

천마라고 해서 뭐든 타고난 것은 아닐 거다. 분명 노력도 했을 테고, 익히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겪었을 터다. 하지만 지닌 재주가 너무 많다 보니 가끔씩은 그런 당연한 사실에도 의심이 들었다.

한 사람이 한 가지 재주에 능숙해지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 사람은 지나치게 많은 걸 가졌다. 머릿속에 담고 있는 게 너무 많아서 인간성이라거나 상식 같은 부분은 넘쳐흘러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선친께 배웠지.”

“선친이라면, 전대 교주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외적으로 천마는 전대 교주인 풍령마존風鈴魔尊 혁련무기赫鍊武機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그가 양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마교인들뿐이다. 오랫동안 마교에 몸을 담았던 문평도 그가 양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랬기에 문평은 천마가 두 명 중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천마는 문평의 질문을 듣고 삐딱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하. 아버지라.’

천마가 생각하기에 혁련무기는 그런 호칭을 들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천만에. 그는 사부인 적은 있어도 아버지인 적은 없었다.”

실은 사부조차 아니라 무공교두에 불과했으나, 그에 대한 설명을 길게 하고 싶지 않았던 천마는 그 정도만 하고 말을 그쳤다.

“그럼 선영先塋이십니까?”

각각 정마 양도를 대표하는 영웅인 천마와 검협의 친부모라. 어째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무리 상상해 보려고 해도 신선 같은 사람들 아니면 삼두육비의 괴물 정도만 연상이 된다. 문평의 상상력이 빈곤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자식들의 이름값이 너무나 큰 까닭도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문평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천하의 영웅이었다. 천마든 검협이든 그들이 이름을 떨친 것은 까마득한 예전부터인데, 그런 자들의 시작이 되는 부모라니 거의 시원始原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 선친이셨다.”

“선영께서 말을 잘 다루셨나 보지요?”

“우리 집이 원래가 마방馬房이었거든. 당시만 해도 백가장百家莊이라고 하면 감숙 제일의 마방으로 유명했었지.”

천마는 거리낄 것 없는 태도로 자신의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이제껏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좋게 마무리되는 기억이 아닌지라 따로 추억한 적조차 드물었는데, 어쩐지 오늘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도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근심 없이 즐거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빙그레 미소를 머금게 되니,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본 것이 언제였나 싶다.

“아, 백가장이라면 저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유명했던 마방이었다지요. 옥문관玉門關에선 백가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도 종종 회자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옥문관의 병영에서 나고 자란 문평은 나이 지긋한 병사들로부터 옛이야기를 많이 전해 들었다. 그 이야기들 가운데에는 스스로가 말한 대로 백가장에 대한 언급도 분명히 있었다.

본디 병사들에게 있어 제일의 불평 거리는 바로 보급이다. 시절이 수상해지면서 국경인데도 불구하고 예전만큼 보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불평하던 병사들은, ‘예전에 백가장에서 말을 대고, 화종철방에서 무기를 대던 때가 제일 좋았다’며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했다.

당시에는 백가장이 언제 존재하던 곳인지를 몰라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 보니 백가장이 실제로 존재하던 때는 물경 칠십 성상 가까이 되는 아득히 먼 옛날이다. 당시 불평을 하던 병사들 가운데 실제로 백가장이 댄 말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불평도 대를 물려 내려오나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났다. 병사들이라면 늘 하게 되는 습관적인 불평이다 보니 백가장이나 화종철방의 이름이 관용 어구처럼 쓰이게 된 모양이었다.

“그래? 세월이 그만큼이나 흘렀는데 그곳을 아직도 기억하는 자들이 있어?”

“예. 제법 됩니다. 아무래도 직접 기억하는 게 아니라 윗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 같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중에도 백가장에서 두 명의 절세 고수가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데 제가 듣기로 그곳은 영문 모를 멸문을 당했다고 하던데요. 그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룻밤 사이에 그 넓은 마방이 죄다 잿더미가 되고, 말들까지 싹 사라져서 난리가 났었다지요? 말을 노린 몽고족의 소행이라는 소문까지 흉흉했다 들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백가장에 대한 소문을 되새겨 보던 문평은, 뒤늦게 그곳이 멸문지화를 당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했다.

예전에 집안을 멸문당한 검협이 곤륜으로 들어갈 때의 나이가 매우 어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니 그를 감안한다면, 백가장이 멸문한 때는 적게 잡아도 한 갑자는 더 되었다는 소리다.

나라에 말을 댈 정도로 큰 마방이 어쩌다 그런 흉사를 당했을까? 문평은 은연중에 떠오르는 의문을 풀 수 없었다. 감숙성이 아무리 국경 지대라고는 하나 엄연히 옥문관 안쪽의 땅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본래 마교의 일 처리가 그렇다. 자신이 한 일을 남이 모르게 하고 싶다면, 뒤처리를 완벽히 해야 하는 법이지.”

“그게 무슨……?”

“그 당시 지리멸렬하던 교의 힘으로도 그 정도의 일은 충분히 꾸며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천마가 하는 말의 뜻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던 문평은 잠시 동안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 아주 느리게, 어리석을 만큼 천천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헉! 뭐가 어째? 천마의 집안을 멸문시킨 자들이 다름 아닌 마교였다고?’

뒤늦게 천마의 말을 이해한 문평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경험을 했다. 이건 또 무슨 사연인가 싶었다. 천마가 종종 던지는 말들로 봐서 그의 과거가 남달랐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바지만, 하다못해 이런 기가 막힌 사연까지 숨어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자, 잠깐만. 그럼 천마가 교주 위에 오를 당시에 줄줄이 생겨났던 의문사는 숙청이 원인이었던 거였어? 그 당시에 이상하게 죽은 자들이 워낙 많아서 원인 모를 괴질이 돌고 있다는 소문까지 났다고 하던데 말이야.’

당시 이상하게 목숨을 잃은 자들 중에는 혁련상의 양부인 혁련무기와 그의 부인인 감교령甘嬌玲도 있었다. 문평이 알기로는 처음에는 혁련무기가 급사하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부인까지 그 뒤를 따랐다. 한데 두 사람 다 정확한 사인死因이 발견되지 않아 쉬쉬하면서도 은근히 뒷말이 많았었다고 한다.

그저 괴사怪事라고만 알고 있던 옛이야기에 뜻하지 않은 진실이 숨어 있었다. 이를 알게 되고 나니 괜히 뒷골이 서늘해졌다. 술안주로 주고받던 숱한 이야기들 속에 또 얼마나 많은 비밀들이 숨어 있을 것인가?

그동안 남의 이야기라고 함부로 했던 모든 말들이 섣부르게 느껴졌다. 이런 일들에 관한 정확한 판단은, 겉으로 보이는 상황뿐만이 아니라 그 뒷면의 사연까지 모두 알아야만 비로소 가능할 터였다.

‘이 사람은 뭐가 이렇게 기구해? 어째서 가지고 있는 사연 하나하나가 어디 한 군데 범상한 구석이 없냔 말이야.’

천마가 자신의 비밀을 한 가지씩 던져 줄 때마다 그 무게에 휘청대며 쩔쩔매던 문평도, 이번만큼은 감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집안의 멸문이 천마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에 대해서 상상해 보니 함부로 불평하는 것마저 미안하게 느껴졌다.

자신이야 아예 태어나면서부터 고아였다지만, 천마는 좋은 부모 밑에서 행복하게 자란 사람이다. 집안이 사문에 의해 느닷없이 멸문당한 후, 어렸던 천마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라났을까?

그가 자란 환경을 생각해 보면 딱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자에게 양육당하고, 원수를 꼬박꼬박 아버지라고 불러야만 했을 터였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려면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천마는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홀로 인고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복수를 하고 난 후에는 마음이 편해졌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가 복수를 해야 했던 대상은 다름 아닌 양부와 양모다. 낳아주진 않았지만 길러준 사람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던 셈이다. 사승으로 얽매이고 인연으로 맺어진 자들을 향해 칼을 뽑아 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평은 당시 천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복잡하게 꼬인 인연이다. 어디서도 찾기 힘든 지독한 악연. 문평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 나서야, 오늘날의 천마가 왜 이렇게 비뚤어진 인간이 되었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일들을 겪고 자란 사람이 보통 인간과 같을 수는 없는 일일 터였다. 천성은 타고나는 거라지만, 인격을 만드는 것은 세월이 아니겠는가.

문평은 돌덩이처럼 무거워지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 없이 던진 말 하나가 가슴에 파문을 만들었다. 천마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재주는 하늘에 닿았고, 영민함은 감히 상대할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나지만, 가슴에는 지나치게 매듭이 많았다. 옹이 많은 나무처럼 삐뚤어진 그의 인격은, 그렇게 맺힌 것들이 상처가 되어 남아 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이미 다 지난 일인데 이제 와 무슨 한숨이냐?”

자신이 꺼낸 말 한마디에 문평이 지나치게 가라앉아 버리자, 천마는 재미없다는 듯 그를 내려다보며 가볍게 타박했다.

문평이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준 덕에 모처럼 기분이 좋았었는데, 하필이면 멸문 이야기가 나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까지 함께 끄집어내서 좋았던 기분을 도로 망쳐 놓는다. 그가 순수하게 어린 시절을 떠올릴 일이 평생을 두고도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참으로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만 셈이기도 했다.

문평은 천마의 어깨에 뒤통수를 기댄 채 먼 산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도로 모르게 되어 버리는 이 남자는, 이렇듯 몸을 맞대고 있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다.

혁련상이면서 동시에 윤승효였던 사내. 천마이자 백운강인 남자. 그를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하나둘이 아니었으나, 그 어떤 이름도 그를 정확히 표현하지는 못했다.

“지난 일이니 잊히던가요?”

문평은 정말로 궁금한 마음이 들어 천마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난 일이니 잊을 필요가 없더구나.”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이 그리도 많으면 힘들지 않으십니까?”

“어차피 마음의 무게라는 건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 아니냐. 무겁다고 생각하면 무거운 것이고, 가볍게 생각하면 한없이 가벼운 것이지.”

어지간한 사람은 쉽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천마는 참으로 간단히 말했다. 문평은 씁쓸히 웃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다. 무섭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고.

“……괜찮으시다면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해주십시오. 듣고 싶습니다.”

문평은 처음으로 윤승효가 아니라 천마가 궁금해졌다. 무슨 마음에서 일어나는 궁금증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를 조금이나마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천마는 의외라는 시선으로 문평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그의 심중을 짐작할 수 없는 모양이다.

“뜬금없이 무슨 이야기를 하라는 거냐? 할아비랍시고 옛날이야기라도 들려달란 말이냐?”

“그냥 평범했던 어린 날에 대해서 들려주십시오. 저는 전장에서 자라 세상의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크는지 알지 못합니다. 스쳐 지나며 보긴 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매우 드물지요.”

“평범한 어린 시절이라. 그런 이야기가 무슨 재미가 있을지 모르겠구나. 말꼬리에 불붙이고, 편자에 아교 바른 이야기라도 해주랴?”

“그런 이야기도 좋습니다. ……한데, 진짜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물론 한 적 있다. 우리 마장에 도통 길이 안 드는 몹쓸 놈이 하나 있었거든. 마질은 훌륭해 길들이기만 하면 천하의 명마가 될 놈이었는데, 더럽게 말을 듣지 않아서 마장 안의 모든 조련사들이 고생했었지. 나도 그놈 한번 타보려다 호되게 걷어차인 적이 있었다. 팔이 부러져서 석 달을 고생했었거든. 그래서 복수를 해주자고 생각했지.”

문평의 채근을 못 이긴 척, 천마는 다시금 옛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문평은 그에게 등을 기댄 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평범한 어린 시절을 이야기해 달라고 했더니, 천마는 진짜로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을 풀어냈다.

문평은 천마 같은 사람에게도 그런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이야기 자체는 무척 흥미로웠다.

문평은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유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련한 향수를 느꼈다. 그 자신이 직접 느낀 감정이라기보단, 옛 추억을 풀어내는 천마의 그리운 마음을 같이 공유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만약 그 옛날 백가장이 불타지 않고, 천마가 마교주가 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오늘날 이렇게 나란히 옛이야기를 하고 있을 수 없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해 보자면 사람 사이의 인연이 참 묘했다. 그게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묘했다.

***

그들이 신향新鄕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급보를 전하기 위해 친히 하남성河南省 정주鄭州 지부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정주라면 그들이 오는 길에 지나쳐 왔던 장소인데, 정주 지부장은 그들의 발걸음을 늦출까 두려워 오히려 앞서 신향으로 들어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급박한 재촉에 일행들은 머리 위에 가득 쌓인 흙먼지를 털지도 못하고 정도맹의 안가로 향했다. 천마 덕분에 하루 종일 달리고도 기운을 유지하고 있던 문평은, 그를 떼놓지 않으려는 천마의 의중 때문에 덩달아 수뇌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정주 지부장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 앉아 있게 된 사람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백우경과 조세화, 그리고 천마와 문평, 덤으로는 파면객까지. 조세화는 그나마 백우경의 보좌를 맡고 있기에 따라붙은 것이지만, 문평과 파면객은 아무런 역할도 없다.

천마가 가는 곳이기에 문평이 가는 거고, 문평이 가는 곳이기에 파면객도 따라왔다. 파면객에게 호위를 지시했던 천마의 명이 아직까지 거두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북에서의 일에 무슨 변고라도 생겼습니까?”

따지고 보면 하북혈사 자체가 이미 변고지만, 그런 세세한 부분에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백우경은 서둘러 질문을 던졌다. 문평 일행만큼이나 정신없이 달린 모습인 정주 지부장은, 어깨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그들에게 상황을 알렸다.

“네. 큰 변고가 생겼습니다. 지금 조현에서 엄청난 피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기린패가 조현에 도착하기까지 아직 시일이 남았을 거라고 여기고 있던 일행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기린패가 벌써 조현에 도착했단 말입니까?”

“정확히는 기린패가 도착한 것이 아니라 탁본들이 도착했습니다. 기린패가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로 늘어난 셈입니다.”

줄곧 말을 달리느라 최신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일행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궁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초조한 듯 두툼한 입술을 핥은 정주 지부장이 하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 탁본을 나눠 가졌을 때만 해도 세 사람은, 물건이 나뉜 만큼 추격이 나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나이던 물건이 세 개가 되었으니 그만큼 사람 수가 나뉘리라 단순히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순진한 착각에 불과했다. 탁본에 대한 소문이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하면서, 강호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기린패에 대한 소문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긴가민가하던 사람들이, 탁본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천마비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본체인 기린패가 세 사람의 손에 의해 사라져 버린 연후였다. 그러니 다른 자들에게 있어 세 사람이 가진 탁본은 천마비고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느닷없이 탁본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만만치 않았던 난장판은 눈더미처럼 덩치를 키웠다. 잠자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은거 고수들과 전대의 거마들까지 탁본을 노리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만한 고수들이 그동안 다 어디에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이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탁본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옛 은원을 가진 자들을 다시 마주치는 바람에 곳곳에서 처절한 혈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고수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죽어 나가는 사람들의 숫자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탁본을 나눠 가진 세 사람 중 추적자들의 손에 제일 먼저 목숨을 잃은 이는 다름 아닌 칠지악불이다. 그는 하남의 정파인 서권문書拳門에게 추적당하다 절정 고수 다섯 명의 합공을 받고 끝내 절명했다.

그다음에 모습을 감춘 것은 철마희였다. 그녀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그녀의 몫일 게 뻔한 탁본이 홀로 돌아다니게 되는 바람에 그녀의 실종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두 사람의 연이은 실종에 경각심을 가지게 된 진 가주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탁본을 필사해 마구 뿌리기 시작했다. 필사본이 많으면 많을수록 탁본의 희귀성이 떨어져 자신들이 받는 위협이 줄어들 거라고 여긴 것이다. 덕분에 하북성 내에는 수십 장의 탁본들이 나돌게 되었다. 그중에는 명백한 위조품도 섞여 있어서, 진위여부까지 가리느라 상황은 한층 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그 탁본의 필사본입니다. 따로 감정을 해본 바에 따르면 위조가 된 것 같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정주 지부장이 그들의 눈앞에 한 장의 종이를 내놓았다. 과연 넓은 종이 한가운데에는 사각형의 작은 그림이 선명히 그려져 있었다.

백우경은 필사본을 앞으로 당겨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문평도 뭐가 있나 싶어 슬그머니 건너다봤다. 하지만 문자는 암호 같고 그림은 낙서 같아서 도대체 뭘 뜻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혹시 이 지도가 어떤 장소를 나타내고 있는지도 알고 계십니까?”

강호에 돌고 있는 소문이 적들이 뿌리는 유력한 단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백우경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정주 지부장은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속에서 또 하나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가 새로이 꺼낸 것은 정교하게 그려진 하북성의 지도였다. 지도 아래쪽에 하북 성주의 관인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관의 물건인 것 같다. 이런 물건은 민간인에게는 결코 유출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구했을까? 관군의 경험이 있는 문평은 정주 지부장의 수단을 신기하게 여기며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워낙 소문으로 도는 것이 많아 긴가민가한 것도 있지만, 주요하게 떠도는 말들을 간추려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로, 천마비고는 조현에 있다고 합니다. 주로 조주교趙州橋에서 북서쪽으로 십 리쯤에 위치한 불련산不緣山이 언급되고 있는데, 정확히 어느 봉우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불련산이라고 쓰인 산을 짚었다. 조현 같은 큰 마을에서 십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면 그다지 외진 곳도 아니다. 그런 곳에 정말로 천마비고라는 게 있다면 어떻게 여태까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요?”

“두 번째로, 일단 비고가 열리면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거라는 이야기가 떠돕니다. 마교에서 도굴꾼이나 침입자를 방지하기 위해 강력한 기관을 설치했는데, 그 기관의 기능이 실로 악랄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소문이 오히려 천마지존공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을 거라는 환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보물이 없으면 무거운 자물쇠 따윈 필요 없을 거라는 논리지요.”

천마지존공天魔至尊功이라니?

명색이 마교인인데도 불구하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문평은 고개를 갸웃했다. 천마지공天魔之功이라면 들어본 적 있지만 천마지존공? 마교에 그런 무공도 있었단 말인가?

과문寡聞한 것은 그뿐만이 아닌지, 백우경도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의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고서야 그들이 그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정주 지부장은, 송골송골 맺힌 이마의 땀을 닦으며 천마지존공의 정체에 대해 설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천마지존공이란 천마비고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마교의 조사지공을 말하는 겁니다. 천마비고의 위치가 실전되는 바람에 그 무공 또한 실전되었다고 알려져 있죠.”

도대체 누가 소문을 지어내는지는 몰라도, 말을 만드는 솜씨 하나만큼은 탁월한 것 같다. 소문 속에서만 존재하는 마교판 상아총象牙塚에는 어느새 천마비고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붙더니만, 천마 본인조차 존재 여부를 모르는 조사지공에는 무려 천마지존공이란 그럴듯한 명칭까지 생겨났다.

듣다 못한 천마가 피식,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미처 몰랐던 일인데 곽효에겐 재담가의 자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천마지존공이라니. 이왕 촌스러울 거면 차라리 화끈하게 천마앙복공天魔仰伏功이라고 하지?

“강호에 떠도는 소문이 저들이 일부러 흘리는 정보라는 점은 이제 비밀도 아니죠. 아무래도 그들은 우리가 그 천마비고라는 곳에 들어가기를 원하나 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소문에 휘말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백우경 일행은 이 모든 소동 자체가 적들이 만든 함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달콤한 과일 냄새로 벌레를 유혹하는 식충 식물처럼, 적들은 무림인들의 무덤이 될 가상의 상아총을 파놓고 수많은 무림인들을 유혹했다.

그러나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현재 하북혈사에 휘말린 자들은 남의 말을 듣고 움직일 만한 상태가 전혀 아니다. 욕망에 눈이 먼 데다 이미 피 맛을 보았고, 광기에 찬 분위기에 전염돼 모두가 반 광란 상태다.

그런 자들에게 모든 것이 조작이고 당신들은 속은 것이라고 외쳐 봤자 들을 리 없다. 오히려 무슨 허튼수작을 부리는 거냐며 비웃음만 살 것이다.

모든 것이 적들의 수법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점. 하나 그걸 알면서도 적들의 흉계를 잘라낼 수 없다는 점. 이 두 가지의 모순된 사실은 백우경 일행을 진퇴양난의 길로 밀어 넣었다.

정파의 연합체인 정도맹의 입장에서는 숱한 죽음이 생길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헛되이 죽어갈 사람들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그들 역시 천마비고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스스로를 희생하려고 마음먹었다 한들, 얼마만큼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들이 결정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부분 때문이었다. 그들의 희생이 헛된 개죽음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천마비고의 기관이 그들이라고 해서 피해 갈 리 없다. 자칫하다간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들어갔다 덩달아 물에 빠지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차라리 비고의 앞을 막아선 채로 사람들의 출입을 막으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그 입구를 막아 버린다면, 함정 자체도 발동되지 못할 터이니 말입니다.”

백우경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 알고 있는 조세화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타협안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백우경이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일류 고수가 오십. 절정 고수가 다섯. 초절정 고수가 둘이면 어지간한 중소 문파도 하룻밤에 몰락시킬 인원이긴 합니다. 하지만 천마비고로 몰려드는 강호인들의 수는 수백, 아니 수천이 넘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들을 다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그곳이 사지인 걸 알면서도 무작정 들어갈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저희야 상관없다 하더라도 용호대원들은 아직 젊습니다. 저는 그들의 꽃 같은 목숨이 아깝습니다. 채 피워 보지도 못한 그 아이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꺾여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조세화의 목소리에 웬일로 감정이 실렸다. 목석같은 그에게도 정은 있었다. 근래에 형제 같았던 청혈단원들의 목숨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그는, 또다시 죄 없는 젊은 목숨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다른 용호대원들의 목숨도 아깝지만, 그가 무엇보다도 근심하고 있는 것은 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사촌 여동생의 안위이다.

조세화가 겉보기와는 달리 속정이 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백우경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일개인의 감정만으로 일을 좌우하기엔, 이에 연관된 생명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어차피 죽을 자리라는 것을 아는데 모두가 다 갈 필요는 없습니다. 무위가 약한 사람이 가봤자 방해만 될 뿐이고, 자칫하면 다른 사람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겠지요. 호랑이 굴에는 자신의 몸을 챙길 수 있는 사람만 가면 됩니다.”

워낙 많은 일이 걸려 있다 보니 결정은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다. 침묵이 무게가 되어 묵직하게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와중에 돌연 천마가 입을 열었다.

일행들의 시선이 천마에게 가 닿았다. 심지어는 정주 지부장조차도 단추 구멍 같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본다. 어느샌가 펴든 접선을 살랑살랑 부치며, 천마는 태연하게 그 시선들을 마주했다.

“우리 정도의 인원으로 비고의 앞을 가로막는다는 건 자살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일행을 모조리 이끌고 안으로 돌입해 봤자 애꿎은 사상자만 내겠지요.

이왕 그럴 거라면 차라리 확실한 사람 몇만 들어가 일을 도모하는 편이 낫습니다. 적들이 함정을 만들었다면 그 함정을 파헤쳐야지요. 그래야 어리석은 중생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함정을 파헤치다니요?”

천마의 말투가 워낙 자신만만하다 보니 듣는 사람조차 얼떨결에 휘말리게 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찌할 바를 몰랐던 백우경은, 어둠 속에서 동아줄을 잡은 듯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화급히 되물었다.

“적들이 뿌려 놓은 정보대로라면, 천마비고라는 곳은 불련산의 산중에 있습니다. 그곳에 밖으로 드러나는 건축물이 있었다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을 리 없으니 당연히 지하에 있겠지요. 제갈세가가 기관에 능통하니 백 대협께서도 이미 아시겠지만, 지하에 정교하게 움직이는 기관을 만드는 것은 지상에 기관을 설치하는 것보다 다섯 배는 어려운 일입니다. 비고가 수천 년이나 되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닐 테니, 그 기관은 스스로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기관을 지하에 만들려면 천문학적인 거금이 들어가는데, 그만한 돈을 고작 기관 따위에 쏟아붓는 멍청이라면 이만한 일을 꾸밀 수도 없었을 테지요.”

하나하나의 가능성을 짚어가는 천마의 말투는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신랄해졌다.

문평이 보기에 윤승효가 반, 천마가 반인 상태인 것 같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확하게 상황을 꼬집는 그의 분석에 그저 혀를 내두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택할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비고의 문이 열리면 제일 먼저 안으로 들어가, 함정을 움직이는 자들을 찾아내 제거하는 겁니다. 그런 연후에 함정을 모두 정지시키면 비고를 탐내는 자들은 마음 놓고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찾아다닐 수 있겠죠. 어디 한번 마음대로 돌아다녀 보라고 하세요. 목숨이야 사람 목숨이니 아까워서 구해주는 것이지만, 제 스스로의 어리석음에서까지 구해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말입니다.”

명쾌한 그의 마무리에 백우경과 조세화가 서로의 눈을 마주 본다. 천마의 말이 신빙성이 있다 여긴 것이다.

“그럼 화협께서는 이번 임무에 누가 어울릴 것 같으십니까?”

자신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바를 짚어 내는 천마에게 믿음이 생겼는지, 백우경은 아예 인선까지 떠맡기며 눈을 빛냈다.

윤승효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방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지나가는 길에서 문득 눈이 마주쳤던 문평은,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좁은 곳에서 손발이 맞지 않으면 서로가 곤란할 테니 익숙한 사람들끼리만 갑시다. 백 대협과 조 대협, 그리고 저와 파면객, 마지막으로 이 사람 관량까지 함께 가면 인원이 딱 맞겠군요. 나머지 절정 고수들은 용호대원들을 통솔해야 하니 남겨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전부터 생각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천마의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백우경이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옆에서 의견을 경청하던 조세화는 의혹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인선은 그럭저럭 납득이 가는데, 그 사이에 문평이 끼는 것만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평을 제외하자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절정 이상의 고수로 자기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문평은 일류 고수에 불과한 데다 몸 상태까지 좋질 않아서, 윤승효의 표현대로라면 ‘발목 잡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한데, 인선이 좀 이상하군요.”

나도 딱히 딴죽을 걸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라는 표정으로 조세화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 사람은 좀 아니지 않습니까?’ 겉으로 말은 못 하지만 그의 생각에 열렬하게 동의하고 있는 문평은 조세화가 자신을 걸고넘어진다는 사실을 전혀 고깝게 여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아직 몸도 성치 않은 관 형까지 끼어 계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분의 몸 상태로 이런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사람의 낯을 깎을 수는 없었던지, 조세화는 좋게좋게 돌려 말했다.

천마는 그 말을 듣더니 서슴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웃음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입꼬리가 왠지 모르게 얄미웠다. 남을 사지로 밀어 넣고 있으면서, 뭐가 그리 좋아 웃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 사람에 대해서는 따로 신경 쓰실 것이 없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저 사람은 제가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그저 저와 한 몸이려니 생각하십시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책임을 져야 한다면 오히려 놔두고 가야 하지 않습니까? 비고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숱하게 해야 할 터인데요. 자기 한 몸 구하기도 바쁜 상황에서 일일이 남의 목숨까지 책임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쪽도 남자고 이쪽도 남자고, 둘 다 신체 건장한 남자인데 왜 자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고 우기는 걸까? 천마가 변명이랍시고 갖다 붙인 이야기에 조세화의 눈초리가 도리어 요상해진다.

‘이 양반이 지금 뭘 하는 거야? 또 무슨 엄한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시작하는 거냐고!’

문평은 이상한 소리를 멋대로 해대고 있는 천마를 화들짝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천마는 문평의 놀란 눈초리를 역력히 느끼면서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요염하게 붉은 입술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팔랑팔랑 부채질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만 하세요. 화협께서 괜찮으시다면 괜찮은 일이겠지요. 영민하신 분이니 틀린 판단은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고요.”

조세화가 끝까지 반대하려고 하는 눈치를 보이자 백우경이 슬쩍 끼어들어 그를 말렸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툼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가 중간에 나서자 조세화도 더는 반대할 수 없게 되었다. 친우이기 이전에 주군인 사람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곤란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납득하지는 못했지만 어쩔 수 없이 조세화는 입을 다물었다.

백우경은 양해를 바란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천마를 돌아보았다. 천마도 마찬가지로 가느다란 눈웃음을 치며 백우경과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약점이란 남의 눈에 띄게 놔두는 게 아니지.’

천마는 푸른빛 도는 동공에 한 줄기 안광을 번득이며 홀로 생각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문평을 둘러싸고 온갖 티를 다 냈으니, 곽효도 문평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터였다.

마교 출신인 그가 천마의 남색 기질을 모를 리 없고, 한때는 측근이기도 했으니 그의 취향 역시 소상하게 꿰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문평을 혼자 내버려 둔다는 것은 병아리를 어미 닭도 없이 볕에 내놓는 것과 같다. 잠깐이라도 한눈을 판다면 고양이가 채어 가든, 솔개가 채어 가든 누군가는 채어 가버릴 것이다.

남의 속도 모르는 문평은 하필이면 제일 위험한 곳까지 골라 데려간다며 입이 제대로 나와 있는 것 같았다.

제 목숨 여기기를 신앙처럼 여기는 놈이니, 이런 처사가 불공정하게 느껴지겠지. 어쩌면 단둘이 남았을 때를 노려 따지고 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요즘 제법 머리가 굵어져서 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하고야 마니, 이번 일 또한 그냥 넘어가는 일은 없을 터이다.

하지만 천마는 진심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문평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자신의 옆이라고 말이다. 생각 없이 남에게 그를 맡겼다 호된 꼴을 당했던 적이 있는 천마는 더 이상 타인을 믿지 않는다. 같은 실수를 두 번 할 생각도 없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실패에 불과하다. 그리고 실패란, 천마가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 중에 하나다.

둘이 남았을 때, 뭐라고 한 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천마는 뜻밖에도 아무 소리가 없는 문평의 태도에 도리어 불안해졌다.

이놈이 이렇게 곱게 넘어갈 만한 놈이 아닌데 어쩐지 말이 없었다. 여태껏 보아 온 놈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이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놈은 왜 상의도 없이 남의 일정을 정하는 거냐고 악악거려야 했고, 혹은 이번만이라도 같이 안 가면 안 되는 거냐고 사정조로 매달려야 했다.

한데 문평은 생각에 잠긴 듯 곰곰이 눈을 내리깔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화를 내는 것 같더니만, 나중에는 그조차도 가라앉은 듯 묵묵하고 고요할 뿐이다.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기에 이리도 조용한 걸까? 다음 날 바로 짐을 챙겨 조현으로 달려가면서도, 천마는 못내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렇다고 해서 왜 잔소리를 하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가만히 있는 녀석을 괜히 들쑤셔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들이 조현으로 들어서기도 전부터 혈사는 조짐이 보였다. 이제 한창 보리를 걷기 시작할 철임에도 밭이랑엔 낱알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지른 불 때문에 곱게 탄 재만이 검붉게 땅을 그슬린다.

말을 타고 지나는 천마의 눈에는 남의 밭에 맘대로 널브러진 시쳇더미들보다는 넋이라도 나간 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농부의 얼굴이 오히려 더 선명했다.

거센 혈풍의 흔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수나라 때 건립된 것으로 유명한 조주교趙州橋의 아래로 붉은 강물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어젯밤에 이 다리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 속에 가라앉아 있는 시체는 그 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보다도 많아 보였다.

무인들의 갑작스러운 난행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집 안에서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었다. 심지어 창문까지도 꼭꼭 닫아걸어, 사람이 안에 있다는 기척은 흔적조차 내비치지 않는다. 상당한 규모의 마을인데도 불구하고 동네 전체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무인들의 등쌀에 관병들조차도 버티지 못한 듯 현청조차 텅 비었다.

“진정 참혹한 몰골이로군요. 죄도 없는 민초들에게 이 무슨 행패란 말입니까?”

마치 전란 중의 모습과도 같은 비참한 정경에, 백우경은 길게 탄식하고 말았다. 말고삐를 잡은 천마는 냉정한 눈빛으로 조현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것이 바로 정파인의 본색이지.’

천마는 비릿하게 혼잣말을 하며 푸른 눈동자 속에 마을의 광경을 차곡차곡 담아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런 짓을 벌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 있는 자들이 정파인이다. 아무리 곽효가 감언이설로 꼬드겼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속에 욕심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참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고도 입으로는 정의와 관용을 외칠 수 있다니, 그들의 낯짝은 참으로 후안무치했다.

존재하지도 않은 무공 때문에 무수히 많은 무인들이 죽어갔다. 정도맹의 주요 전력들은 짐짓 발뺌을 하고 있는 가운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정사지간의 고수들과 중소 문파들만 그 소동에 정신없이 휩쓸려갔다.

현재 그들이 받는 엄청난 피해는 고스란히 대문파들의 이득으로 돌아갈 터였다. 그러나 당장의 욕심에 눈먼 자들은 그런 당연한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다.

혈겁을 일으킨 무인들이야 스스로의 욕심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이지만, 천마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입은 피해는 애꿎은 민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들이 일으킨 혈겁에 죄 없는 민초들이 휘말려 죽어갔다. 부모 없는 어린것들이 무슨 죄로 강시가 되어야 했을까? 단지 이 마을에 살고 있었을 뿐인 주민들은 또 무슨 죄가 있어 이런 떼죽음을 맞이했는가?

단지 이곳뿐만이 아니다. 맨 처음 기린패가 나타났던 양원과 역현은 물론이고, 하북혈사가 일어났던 모든 장소에서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어야만 했던 덧없는 목숨들. 무엇보다 천마를 염증 나게 한 것은, 이 모든 일이 무려 자신의 이름을 앞세워 일어났다는 점이었다.

모두가 이 일을 아무 상관 없는 자신의 이름과 결부 지어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이 모든 일을 계획한 자들조차도 애초의 원인은 그라고 생각할 게 뻔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지. 그들은 내가 없었으면 이런 무도한 일 따윈 저지르지 않았을 거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탐욕은 들여다보지 못하면서 남의 속내는 읽어낼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뻔뻔한 놈들. 내 마음속의 야욕은 읽을 줄 알면서 저희들 마음속에 있는 지옥은 보이지도 않았겠지.’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질 줄도 모르고, 그에 대한 반성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들만이 정의라는 도취된 오만함이 그들을 그토록 타락시킨 것이다.

천마가 정도맹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을 꾸민 자들은 지금 저지르고 있는 짓과 똑같은 짓거리로 그에게서 동생을 앗아 갔다.

추잡한 그들의 습성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한 게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만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한다.

‘역시 그때 그 녀석의 유언을 들어주지 않았어야 했다.’

천마는 뒤늦게 지난날을 후회했다. 그 아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조현의 참경을 바라보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눈을 딱 감고 정파를 갈아엎었다면. 그래서 놈들의 더러운 술수가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려 주었다면, 오늘날 또다시 이런 참극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천마라는 그들의 생각은 결코 틀린 게 아니었다.

“가능하면 빨리 일을 끝내야겠습니다. 불련산으로 갑시다.”

침중한 목소리로 백우경은 일행들을 이끌었다. 나머지 일행들은 묵묵한 태도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불련산의 산기슭으로 들어가자마자 진한 피비린내가 풍겨 왔다.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혈겁의 흔적은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흉악하기 짝이 없는 고수들의 싸움 때문에 울창하던 숲 가운데 여러 개의 빈터가 생겨났고, 그저 산길을 걷고 있음에도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시체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다가갈 때마다 시체에 맛을 들이고 있던 산짐승들이 후다닥 모습을 감추었다. 어디에서 날아온 건지, 머리 위에서는 까마귀 떼가 맴돌며 다음에 생길 신선한 먹이를 기다린다.

저 멀리서 아련히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신음 소리. 그리고 목숨이 끊기면서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 고요하던 산중은 인간들의 탐욕 때문에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불련산의 산중에서 해석을 덧붙인 필사본을 들고 일행을 이끈 것은 다름 아닌 백우경이었다. 말을 타고 이곳으로 달려오는 동안에도 줄곧 골몰하던 그는, 도무지 알아볼 수도 없는 글씨체와 그림들을 해석해 천마비고가 존재하고 있는 곳의 위치를 알아냈다.

이 필사본이 널리고 널린 상태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위치를 알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일행들은 가능하면 자신들이 가장 먼저 도착하기를 바라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지도를 해독한 백우경이 그들을 이끈 장소는 천향봉天香峰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봉우리의 근처였다.

“이곳은 참으로 교묘한 곳이군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줄곧 말이 없던 문평은 백우경이 그들을 이끄는 길을 둘러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이제까지의 침중함을 벗고 신기한 눈길로 주위를 연신 둘러본다. 문평의 말대로 지도에 나타난 지형은 흔히 보기 힘든 기묘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일단 밖에서 보면 웅장하게 산을 가로지르는 폭포가 있었는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끝없이 높아 마치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폭포 곁을 거슬러 올라가는 소로를 따라 꼭대기에 서면, 그 뒤로도 바로 폭포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본래의 물줄기는 하나이건만 물이 내려가는 길은 하나의 절벽을 타고 앞뒤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폭포의 아래에는 깊숙이 자리 잡은 숨은 계곡이 있다. 조물주가 한 짓궂은 장난 같은 지형이다.

그들은 계곡에 난 좁은 길을 타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사람이 만든 길이 아니라 산짐승이 만든 길처럼, 길 중간중간이 끊겨 있어 걷기 어려웠다. 하지만 일행들은 그러한 어려움을 도리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길의 상태로 보아하니 아직 다른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계곡 밑으로 완전히 내려온 문평은 감탄하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숟가락으로 부드러운 두부의 가운데를 푹 떠낸 듯, 절묘하게 팬 절벽이 보였다. 둥글게 속이 파인 계곡 위로 푸른 하늘이 커다란 달처럼 떠 있었다.

아래에서 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정말로 이름 모를 신비지처에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신비롭다 못해 몽환적이기까지 한 광경이다.

“천마비고를 찾은 것 같습니다.”

내내 지도와 지형을 대조하고 있던 백우경이 마침내 말했다. 천마는 그 말을 듣고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절벽의 한쪽으로 다가간 백우경은, 젖은 넝쿨들을 밀어젖히며 절벽에 새겨진 글씨를 보여 준다.

ㅊ마비고二魔秘庫.

전서체로 쓰인 네 글자가 그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지냈다고 주장하고 싶은 모양인지, 천 자는 심하게 깨어져서 제대로 읽을 수 없었고 나머지 글자 위로도 덕지덕지 이끼가 끼어 있었다.

어느 위조쟁이가 손댔는지 모르겠지만 솜씨가 아주 좋아 보였다. 오랜 세월 동안 풍상에 시달린 덕에 글씨의 끄트머리가 마모된 자국까지 그대로 재연해 냈으니, 명인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위장을 무척이나 잘해 놓았군요. 모르고 봤으면 깜빡 속았겠습니다.”

이곳이 정말로 천마비고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한 천마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이곳으로 들어가야 하나 봅니다. 이쪽에 석문의 흔적이 있습니다.”

백우경은 석문으로 보이는 이것을 어떻게 건드려야 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며 턱 끝을 문질렀다. 겉으로 보기엔 바위와 문이 완전히 일체화된 것 같아서, 도무지 짐작 가는 방법이 없었다.

천마는 고개를 돌려 문평을 바라보았다. 딱히 할 일이 주어지지 않은 문평은 반쯤 방관자 같은 기분인 모양이었다. 그는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신경 쓰지 않고, 구경꾼마냥 한가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라.”

천마는 문평에게 전음을 보냈다. 멍하니 딴생각을 하다가 그의 전음을 받은 문평이 흠칫하며 고개를 든다.

“티 내지 말고 뒤로 물러서. 폭포를 구경하는 척이라도 하고 있어라.”

문평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그가 엉뚱한 일에 휘말릴까 걱정된 천마는, 문평을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며 취해야 할 행동까지도 꼼꼼히 일러 주었다.

다행히 문평도 눈치가 아주 나쁜 편은 아니다. 그의 말뜻을 즉시 알아듣고, 주위의 풍경을 구경하는 척하며 용소 쪽으로 다가갔다.

반대편 폭포와는 달리 흐르지 않는 물은 호수처럼 둥글게 고여 있었다. 흘러들어 오는 물은 있는데 밖으로 나가는 물길은 없으니, 아마도 소의 깊은 안쪽에 다른 물길이 있는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매우 특이한 형태여서, 문평은 곧 깊은 관심을 가지고 폭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들어가야 할까요? 외가가 제갈세가이건만, 부끄럽게도 기관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혹여 화협께서는 짐작 가시는 일이 있으십니까?”

도무지 방법을 찾지 못해 벽을 밀어 보고, 당겨 보고, 두드려도 보던 백우경이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천마는 느긋하게 팔짱을 낀 자세로 훌륭하게 연기를 하고 있는 백우경을 구경했다.

백우경, 아니 곽효는 그 못지않은 훌륭한 연기자였다. 그가 미리 상황을 짐작지 못했더라면, 저 진실해 보이는 얼굴에 깜빡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 물건을 직접 만든 사람이 기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니요. 혹시 요새 건망증이라도 생기셨습니까?”

천마는 짐짓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소곤소곤 말하는 어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폭언에 백우경이 놀란 시선으로 그를 돌아본다.

“……뭐라고요?”

“제 말뜻을 아직도 못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여기까지 나를 데려온 노고는 가상하게 생각하는데, 굳이 그 안에까지 들어가 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쪽도 잘 알겠지만 원래 호랑이를 잡을 때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보다 호랑이를 유인해 내는 편이 더 쉽지요.”

천마는 입가에 삐뚜름히 미소를 베어 물면서도 목소리만은 상냥하게 속삭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조세화가 어리둥절해서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먼 곳에서 폭포 구경이나 하고 있던 문평도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이쪽을 돌아본다.

백우경의 준수한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사라졌다. 말없이 있을 때조차도 온화한 기운이 풍길 만큼 인상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는데, 물에 씻겨 나가기라도 하는 듯 그러한 기질이 서서히 사라졌다. 천마는 그런 백우경, 아니 곽효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인사가 늦었군요. 오랜만입니다, 교주님.”

백우경의 입에서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갑게 날을 벼린 비수를 연상케 하는 서늘한 음성.

뜻하지 않은 변고에 놀란 조세화가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뭔가를 묻고 싶기라도 한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입장에서는 두 사람이 갑자기 귀신에라도 씐 것 같아 보일 터였다. 서로에게 영문 모를 말을 내뱉는가 하면, 갑자기 목소리가 변하고 분위기가 달라진다. 한때는 누구보다도 가깝게 여겼던 사람인데, 느닷없이 전혀 모르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나 조세화가 겪고 있는 혼란과 비슷한 혼란을 겪어 본 적이 있는 문평조차도 지금의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다. 상황을 알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것은 그나 조세화나 다를 게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문평은 돌변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백우경이 곽효였어? 그럼 진짜 백우경은 어떻게 된 거야?’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충격을 받은 문평은 분주하게 머리를 굴렸다. 눈앞의 백우경이 가짜 백우경이면 진짜는 어디로 간 것일까? 설마하니 천마와 윤승효가 그랬던 것처럼 신분을 주고받았을 리는 없다. 그가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떠올려 본다면, 차라리 백우경을 죽이고 그 자리를 강탈했다는 편이 더 어울린다.

무생교라는 이름으로 저질러 왔던 만행들도 그렇거니와, 자기 부인에게 한 짓을 봐도 그랬다. 반란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를 서슴없이 이용한 사람이 바로 곽효 아닌가. 그런 그에게 아무런 상관없는 젊은이 하나 죽이는 일이 뭐가 그리 어려웠겠는가.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이군요. 여태까지 조카분을 한 번도 만난 적 없으신 분이, 제가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찌 아셨지요?”

자신의 본색을 천마에게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곽효의 반응은 지극히 태연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겉으로는 동요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곽효의 질문을 들은 천마가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은 미소라고 하기보단 비소에 가까웠다.

“그렇지 않아도 거의 속을 뻔했지. 내가 아니라 내 동생과 좀 더 닮게 만들어 놨다면 좀 더 쉽게 속았을 거야.”

“어차피 같은 핏줄이니 누구를 닮든, 닮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고작 그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으셨을 텐데요?”

“그래. 혹시나 하면서도 확신은 못 하겠더군. 아니라는 마음이 9할이 넘는데, 겨우 1할 때문에 도저히 손을 못 대겠어. 딱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는 조카 놈에게 그렇게까지 마음이 쓰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알고 보니 정이라는 게 참 무섭더라고.”

천마가 빈정거리는 건지 자조하는 건지 모를 기색으로 대답했다. 곽효는 그런 천마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웃는 얼굴로 만든 가면을 뒤집어썼고, 다른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만든 가면을 뒤집어썼다.

가면에, 가면에, 가면의 연속. 문평은 다시 한번 변검을 떠올렸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가면이 일곱 개씩 바뀌는 변검의 고수보다, 민얼굴로 가면들을 만들어 내는 저 사람들이 더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네놈은 한 가지 실수를 했어. 자신이 한 일을 남이 모르게 하려면 뒤처리가 완벽해야 하는 법인데, 그 수칙을 사소한 쾌감 때문에 무시했더란 말이지. 진짜가 버젓이 살아 있으면 가짜는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나? 할 수 있을 때 깨끗이 죽여 버렸어야지. 그랬으면 오늘날 이런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천마가 미동도 없이 서 있는 파면객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설마 하는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던 곽효는, 파면객이 천천히 죽립을 벗어 얼굴을 드러내자 쓰디쓴 웃음을 남겼다.

‘설마 정말로 살아 있었다니.’

곽효는 기가 막힌 기분으로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백우경이 저런 꼴을 당하고도 여태 살아 있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었다. 당연히 그날 산에 버렸을 때 들짐승 밥이 되었을 줄로만 알았건만. 천마의 말대로, 숨이 끊긴 것을 확실히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다.

‘……그런가. 그때부터 나는 이미 실패를 하고 있었던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착각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지금 눈으로 확인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천마에게 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에 발이 걸린 것이다.

진실을 알게 되자 못 견디게 속이 쓰려 왔다. 수십 년을 공들여 온 계획이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더 그를 좌절하게 하는 건, 천마의 눈앞에서 자신이 저지른 실책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천마는 그의 앞에 승리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언제나 여유 있고 자신만만한 천마의 태도는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전혀 변한 바가 없다.

그 앞에서 자신은 언제나 패배자였다. 실패자고, 싸움에 진 개다. 20여 년을 송두리째 바쳐가며 노력해 왔건만, 모든 것이 도로 제자리였다. 그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의 우위는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정해진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갑갑하게 꼭 이 모습으로 이야기를 해야겠나? 네가 그 꼴을 하고 있으면 찝찝해서라도 쳐 죽이기가 곤란한데 말이야.”

“저도 별 상관은 없습니다. 이왕 들통난 거 본모습으로 이야기하죠.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이 얼굴 때문에 손을 삼가실 마음은 없지 않습니까?”

곽효는 쓰라린 패배감을 애써 감추며 천마의 여유를 흉내 냈다. 언제나 그가 가장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남자 앞에서 비참한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말이 나온 김에 역용까지 풀었다. 괴상한 기음이 울려 퍼지며 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장대하던 키와 덩치가 다소 가라앉고, 그 대신 영민해 보이는 날카로운 눈초리가 생긴다. 곽진무를 닮은 입매와 곽씨세가 특유의 높은 광대뼈가 드러났다. 예년에 비해 나이가 든 얼굴이 새로운 인상이다. 그새 환골탈태를 했는지 얼굴의 흉터는 씻은 듯이 가셔 있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드러낸 곽효의 진면목이었다.

그에 맞춰 천마도 자신의 본모습을 내보였다. 몸집이 줄어든 곽효와 반대로 천마는 골격이 커졌다. 키도 머리 하나가 더 컸고, 체구도 장대해졌다. 가장 기괴한 것은 그의 얼굴이 점점 더 백우경을 닮아 가고 있다는 거였다. 정확히는 백우경을 열 살 정도 어리게 만든 듯한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조세화의 눈은 초점까지 흐려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귀신 놀음이 되어 가니, 이런 상황을 감히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그로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 이, 이, 이건 뭐…….”

조세화가 반쯤 넋이 나가 천마에게 손가락질을 시작하자, 귀찮아진 천마가 가볍게 지풍을 튕겨 마혈을 짚었다. 백우경의 친우이자 의형제라며 지나치게 달라붙어 다니기에 혹시 곽효의 조력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에 굳이 그까지 끌고 온 거였는데, 그것까진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조세화가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면 이런 판에 끼어들게 할 필요는 없었다. 일이 다 끝날 때까지 잠이나 재워 두는 것이 그를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편한 일이다.

하관이 다소 좁고 눈매가 싸늘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제법 그럴싸하게 생긴 중년 사내의 모습으로 돌아온 곽효가 가볍게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너무 오랜만에 본모습으로 돌아와서 어색한지 얼굴을 만져 보는 손길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그새 배짱이 많이 좋아졌군.”

이제껏 해온 모든 일이 완성되기 직전에, 천마가 그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하다못해 천마비고의 안까지만 들어갔더라도 조금의 승산은 있었을지 모르는데. 이제 승산은커녕 제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음에도 곽효는 짐짓 태연해 보였다. 자신의 목숨을 방기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또 무슨 숨겨 둔 재주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감히 교주님을 상대로 천하를 다투려면 배짱을 기를 수밖에 없지요.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모두 드러났다고 벌벌 떨며 죽음만 기다리는 것은 지나치게 꼴사납지 않습니까?”

“싸움에 진 개 주제에 솔직하게 꼬리를 말지 않는 것도 꼴사나운 것은 마찬가지다.”

“싸움에 진 개를 이제껏 살려 주시는 건, 그 기개가 가소로워서가 아닙니까?”

천마 앞에서 기죽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곽효가 애써 당당히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천마는 정말로 가소로워져서, 어이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착각이 심하군. 웃기지 마라. 네놈이 이뻐서 살려 두는 게 아니다. 아직 올 사람이 더 남아서다.”

“올 사람이라니요? 누굽니까?”

“정말 귀찮게 구는군. 그놈이 오면 직접 확인하지 그러냐.”

천마는 정말이지, 당장에라도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설마 초지백 그 사람이 온 겁니까? 이제 드디어 잘린 팔에 대한 빚을 갚겠답니까?”

곽효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갑자기 그들의 머리 위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요.”

어지간한 곽효도 그에는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황급히 돌아보니 한 사람의 인영이 비탈진 언덕길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낭랑한 목소리로 천마 대신 곽효의 질문에 대답했다.

“염왕께서는 교의 일이 바빠 오시지 못하셨죠. 그래서 대신 제가 왔습니다.”

그는 모처럼 흰 비단옷을 차려입었으나, 전신에 피 칠갑을 하고 있어 새 옷을 입은 보람이 없었다. 그가 땅으로 늘어트리고 있는 칼끝에서 검붉은 선혈이 뚝뚝 흘러내렸다. 방금까지도 사람을 죽이다가 왔다는 티가 너무도 생생하게 드러나는 그 모습에, 곽효는 자기도 모르게 생침을 삼켰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절벽 위쪽이 사람들의 그림자로 가득 찬다. 어둠 속에서 소리 없는 결전이라도 치르고 온 듯, 절벽 위에 나타난 인영들은 하나같이 선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동안 별래무양하셨습니까, 아버님? 소자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옷 전체에 사람의 피와 내장이 튄 끔찍한 몰골을 하고 곽진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곽효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찾는 듯 그의 어깨 너머를 돌아본다. 그 시선을 발견한 곽진무가 빙긋 웃었다. 그는 칼에 묻은 선혈을 짐짓 털어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 혹시 뒤에 남겨 두신 자들을 기다리시는 겁니까? 뭐라더라? 건예자니 뭐니 하는 그 인형들하고 말이지요? 죄송한 말이지만, 그것들은 이제 이곳으로 올 수가 없습니다. 모처럼의 대면에 제가 늦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거든요. 생각보다 의외로 손이 많이 가서 치우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태연한 미소를 띠며 곽진무가 말을 맺자 곽효의 얼굴이 조금 질렸다.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하기 짝이 없던 사람이, 마지막 패라도 놓친 듯 안색이 변했다.

‘흥. 고작해야 생강시 따위를 가지고 장난칠 생각이었나?’

곽효가 감추고 있던 비장의 한 수가 완벽히 무산되는 것을 지켜보며, 천마는 냉담하게 혀를 찼다. 곽효는 사전에 이것저것 준비는 많이 하면서 항상 뒷심이 약했다. 일단 뱃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비수만 걷어내면, 그 뒤는 어이없을 정도로 손쉽게 무너진다.

어떻게 천하를 뒤엎을 거대한 음모가 탁상 위에서 짠 계획대로 빈틈없이 움직일 수 있겠는가? 곽효는 항상 변수에 약했다. 그런 점에 있어서만큼은 진무가 제 애비보다 차라리 나았다.

“하하하. 이거 정말 대단합니다. 제대로 몰아가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사실은 제가 함정에 빠진 것이로군요. 역시 상대하기 힘든 분이시군요, 교주님. 두 번 다 제가 졌습니다.”

자기 아들이 스스로가 믿고 있던 마지막 패를 깨부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곽효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제 곽효는 손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미처 패를 꺼내 들어 보기도 전에 판 자체가 아예 박살이 났으니, 제아무리 곽효라고 하더라도 더는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곽효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실의를 감추었지만, 천마는 의연한 패자인 척하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천마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끌고 싶었다면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에게 달려들었어야 했다. 혹은 스스로 자결이라도 하거나 말이다. 하지만 곽효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천마에게 곽효는 고작 열등감과 열패감 때문에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온 가족을 망친 어리석은 인물일 뿐이었다. 그는 그 무모한 시도로 인해 전도가 양양했던 미래와 지위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던 아내까지 잃어버렸다.

천마의 눈에 그 설익은 자존심은 하찮고 가련하기만 했다. 너무 꼴 보기가 싫어서 자기 손으로 직접 죽여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어차피 그의 옆에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어린것들이 두 명이나 있다. 눈앞에서 어미를 빼앗긴 곽진무나 인생 전체를 도둑맞은 백우경의 복수심이 자신보단 치열할 터였다.

천마는 둘 중 누구라도 원하는 자에게 곽효의 목숨을 맡기리라 마음먹었다. 굳이 저 비천한 자의 피를 제 손에 묻혀, 저자의 마지막 만족감을 충족시켜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에는 절대로 지지 않을 겁니다. 벌써 두 번이나 실패를 해봤으니 그때는 이보다 조금 더 낫겠지요.”

“다음번이라. 네게 그럴 만한 기회가 있을까, 곽효?”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틀림없이요.”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 곽효가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곽효가 떠올리고 있는 미소는 결코 허세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순간 어떤 직감이 천마의 등골을 꿰뚫었다. 거의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필연적인 감각이 그의 온몸에 전율처럼 내달렸다.

“아악!”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상황은 갑작스럽게 벌어졌다. 그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지더니, 무언가 무거운 것이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마는 황급히 몸을 돌려 용소를 돌아보았다.

용소 옆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간곳없었다. 수면 위로 손 같은 게 하나 보인 것도 같았지만, 그조차도 물 밑으로 빠르게 끌려 들어가 버린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놀란 천마가 불같이 화를 내며 노성을 내질렀다.

“건예자죠. 저들은 살아 있지 않아서 호흡 없이도 물속에서 잘 놉니다. 그러나 관 형이라는 사람은 얼마나 버틸까요? 일각? 일식경?”

설마 용소 속에 건예자가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던 천마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길게 화를 내고 있을 틈이 없다. 생강시에게 붙들려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다면, 문평 혼자의 힘으로는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천마는 문평을 구하기 위해 다급히 몸을 돌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곽효가 크게 웃었다. 그는 허둥지둥하는 천마를 비웃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한 가지 정보를 더 알려 주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용소 밑에 긴 지하수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족히 수십 장이 넘는 길이라 한번 빨려 들어가면 살아서는 나올 수 없죠. 거기가 바로 건예자들이 머무는 장소입니다. 시킨 일을 모두 끝냈으니 이제 다시 그곳으로 향하고 있겠군요. 새로운 장난감을 데리고서 말입니다.”

“진무, 우경! 저 새끼를 잡아! 놓치면 너희들부터 가만 안 두겠다!!”

“하하하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부디 귀여운 새끼 새를 구하실 수 있길 빕니다.”

곽효는 유유히 몸을 날려 장내를 떠났다. 대경한 곽진무와 백우경이 그를 쫓아갔지만, 한 번의 환골탈태를 하고 화경의 경지에 오른 그를 제대로 쫓을 리 만무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천마는 도망치는 곽효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 그의 화단이, 내 잡초가 수면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빌어먹을!!’

천마는 마음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정신없이 용소로 달려들었다.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아득하게 깊은 물은 어두운 남빛으로 물들어, 수면 아래의 모습을 쉽게 보여 주지 않았다.

그는 지체 없이 아득한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폭포수의 기운이 그의 몸을 감쌌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발에 감기며 옷자락을 아래로 잡아끌었다. 아래로 잠수해 갈수록 몸을 짓누르는 압력이 거세진다. 천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을 헤치며 점점 더 깊이 잠수해 갔다.

하지만 아무리 애타게 찾아도 문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깊고 어두운 물이 그를 그대로 삼켜 버린 것 같았다.

〈7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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