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16 장 (17/26)

제 16 장

가섭미라국迦葉彌羅國1)의 비단은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색감은 은은하고 다채로우며, 각도에 따라 다른 광택을 띠며 시시때때로 다른 빛을 낸다. 실 자체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극히 가는 세사細絲를 써서 촘촘하게 짰는데, 덕분에 멀리서 보면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결이 고왔다.

그러나 보기엔 아름다워도 손질을 하기에는 무척 성가신 물건이 바로 이 가섭미라국의 비단이다. 너무 얇아 한 겹으로는 사용하지 못하고 겹겹이 겹쳐 사용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 까다로운 비단을 뇌정전에서는 천개天蓋로 사용하고 있다. 사치스러움의 극치라 할 만했지만, 천마 정도가 되는 인물이면 이 정도의 사치야 아무것도 아니다.

“정신을 어디다 놓고 있는 거야? 그러다 비단에 누른 자국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시비의 머리 위에 불벼락이 쏟아졌다. 그늘에서 곱게 말린 비단을 한 아름 품에 안고 들어오던 란란은, 지나치게 오래 인두를 누르고 있는 시비를 발견하곤 당장 목소리를 높였다. 깜짝 놀란 시비가 인두를 들어 올리더니 허둥지둥 광목천 아래를 살폈다. 다행히도 그 아래에는 누른 자국이 생기지 않았다.

“저리 비켜라. 내가 직접 할 테니.”

늦지 않게 손을 거두어 일은 치지 않았지만, 성미 깐깐한 란란에게 들킨 이상 혼쭐이 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어깨를 움츠린 시비가 물러가자 란란이 시비가 서 있던 자리로 옮겨 왔다. 그녀는 깨끗한 탁자 위에 비단을 올리고 그 위에 다시 흰 광목천을 덧씌운 후 인두를 들었다.

천마가 마교를 떠난 이후에도 뇌정전은 줄곧 비어 있었다. 새로 교주 위에 오른 호완평은 자리를 물려받은 이후에도 뇌정전에 들어오지 않고 자기 처소에 그대로 머물렀다. 정식으로 양위 받은 것이 아니라 저어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고, 스승이 돌아올 자리를 남겨 두고 싶은 욕심도 있을 터였다.

몇 달간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도 뇌정전은 항상 깨끗이 유지가 되고 있었다. 여전히 뇌정전 소속인 예화와 란란이 열심히 쓸고 닦으며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머, 네가 직접 인두를 잡는 거니? 그런 건 아래 아이들을 시켜도 될 텐데.”

“애들이 일하는 게 영 시원치 않아서 그래요. 그러는 언니도 책 말리는 일을 직접 하시잖아요.”

“나야 소일거리로 하는 것이지. 번거로운 일도 아닌데 뭘.”

오늘 유달리 볕이 좋다며, 천마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을 바깥에 나가 말렸던 예화는 쑥스럽게 웃으며 품 안에 안고 있던 책들을 서가에 꽂아 넣었다.

차곡차곡 옆으로 쌓아 두는 중원의 서책과는 달리, 정장을 입힌 서역의 책들은 세로로 꽂아야 한다. 처음에는 다루는 방법을 몰라 애먹었지만, 서역책과 그럭저럭 10여 년을 보내다 보니 나름대로 요령이 많이 생겼다.

그녀는 능숙하게 책을 꽂아 넣으며 어지러운 서가를 정리했다. 천마가 없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책들에게도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소홍이가 안 보이는구나.”

예화는 품에 가득 안은 책을 정리하며 지나가는 투로 말을 걸었다. 비단에는 안 잡히는 주름을 미간에 대신 잡으며, 심혈을 기울인 다림질을 하고 있던 란란이 예화의 질문에 대답했다.

“걔는 요즘 내호각內護閣에 나가고 있어요.”

“응? 그게 무슨 소리니? 내호각엔 왜?”

“교주전의 안살림을 가르치려고요. 대공자께서 이제 교주 위에 오르셨으니, 교주전의 큰살림은 내호각 쪽에서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쪽 애들이 거기에 대해선 통 아는 바가 없으니 어쩔 수 있나요. 사람을 보내야죠.”

“세상에. 취영就永이가 기겁했겠다.”

“기겁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모르면 배워야죠. 사람이 모르는 걸 부끄러워해야지 배우는 걸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란란은 천마의 입버릇이나 다름없는 말을 하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좋게 이야기를 해도 좀처럼 꺾일 기색이 아니다.

내호각의 취영이는 란란과 동갑인데, 각각 교주전과 대공자전의 수석 시비라 예전부터 은근히 알력이 있었다.

교주전의 수석 시비란 교 전체의 시비들 중 우두머리나 다름없기 때문에 란란은 취영이 자신의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취영은 자신이 대공자전의 수석 시비라 장래 교주전의 안살림을 맡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란란의 지나친 위세를 몹시도 분하게 여겼다.

둘 다 자존심이 강하고 남에게 꺾이기를 싫어하는 성격들이다 보니 부딪히는 것은 필연이었다. 덕분에 그녀들의 치열한 앙숙 관계는 무인들까지 알게 될 정도로 유명해지고 말았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내게 말하지 그랬니. 소홍이를 보내는 것보다 내가 가는 편이 훨씬 보기 좋았을 텐데.”

“언니가 그곳으로 가시면 우리가 고개를 숙이는 형색이 되고 말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취영이 고 계집애가 요즘 위세가 장난이 아닌데, 그 꼴을 어떻게 눈 뜨고 봐요?”

지나친 처사가 아니었나 싶어 예화가 걱정하자, 란란이 그녀답지 않게 삐지며 어린애처럼 투덜거린다. 취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보통은 흠잡을 구석이 없을 만큼 어른스럽고 단정한 아이인데,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 여자아이라 귀엽기 짝이 없다.

예화는 떠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빙그레 웃고 말았다. 아직 어린애가 어린 짓을 하니, 보기에 그리 나쁘지 않았다.

“눈 뜨고 보기 싫으면 눈 감고 보렴. 네가 보기 싫어한다고 내가 태도를 바꿀 건 아니니까.”

한참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간에, 낯선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미소를 짓고 있던 예화는 웃는 얼굴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고개를 돌렸다. 투덜거리면서도 다림질에 열중하고 있던 란란도 얼굴을 들어 올린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한참 화제의 중심이 되어 있던 취영이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뒤에는 잔뜩 움츠러든 소홍까지 꼬리처럼 달려 있었다.

“무슨 짓이지? 허락도 받지 않고 감히 뇌정전 안으로 들어오다니.”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란란의 태도가 금세 서늘해졌다. 그녀는 들고 있던 인두를 화롯불 위에 올려놓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취영을 노려보았다. 취영은 눈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로 란란을 바라보았다. 모란꽃처럼 화사한 얼굴에 번진 오만한 미소는, 란란이 평소에 짓곤 하던 미소와 몹시 닮아 있었다.

“정식 손님도 아니고 일개 시비가 일 때문에 드나드는데,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언제부터 그런 법도가 생겼는데? 그리고, 거기에 대한 허락은 누가 해주는데?”

그녀는 당당히 물었다. 원칙적으로는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관례와는 확연히 달랐기에 예화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마의 처소인 뇌정전은 이제껏 마교 내에서 특별한 취급을 받아 왔다. 산이 높으면 그늘이 깊다는 말처럼, 천마의 높디높은 위세가 그 아랫사람의 위세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천마의 손님이 허락 없이는 함부로 뇌정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듯이, 다른 시비들도 란란이나 예화의 허락 없이는 이곳을 드나들 수 없었다. 먼저 오겠다는 연락은 당연히 못 했고, 아랫사람이 부름을 받듯 먼저 불러줘야 어렵게 발걸음을 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취영이 취하는 태도는 파격을 뛰어넘어 무례에 가까웠다. 어지간하면 웃는 얼굴로 넘어가는 예화조차도 더 이상 웃을 기분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네가 제정신이 아닌 게로구나. 제아무리 호가호위狐假虎威에 눈이 멀었어도 분수는 지켜야지. 교주님께서 지금 네가 한 짓을 아시면 뭐라고 하실지 생각이나 해본 게야?”

란란은 냉엄한 태도로 취영의 주제넘음을 꾸짖었다. 예화도 이것은 도에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자신들 간에 소소한 알력 따위야 윗전들도 별 신경을 안 쓰겠지만, 그 알력이 현 교주와 전 교주전 사이의 위세 다툼으로까지 번진다면 그분들도 그냥 두고 보지만은 못할 터였다. 사소한 일도 아니고 무려 천마의 체면이 걸린 문제다. 겨우 시비 주제에 건드리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생각이 모자라구나, 란란. 어째서 내가 허락도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교주님께서는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셔. 나는 교주님의 명을 직접 받고 온 거란다.”

“뭐야? 그게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지 않고. 설마하니 일개 시비인 내가 교주님의 명을 조작할 리 있겠니. 목숨이 서너 개도 아니고.”

취영은 재미있다는 듯 두 눈을 반짝이며 명랑하게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란란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예화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란란과 취영을 번갈아 보았다.

‘교주의 명령을 받고 왔다니. 그럼 설마 호완평 교주가 직접 명을 내렸단 말인가? 천마께서 안 계시는 틈을 타 뇌정전의 기세를 꺾으려고?’

그러나 그 말은, 그동안 호완평이 보여 왔던 모습을 생각하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결국 이런 날이 오고 말았네.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으면 하고 바랐었는데.”

란란은 착잡하게 말하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어쩐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예화는 그녀의 행동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란란이 그런 예화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예화가 그 눈동자 속에서 흐릿한 미소를 봤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란란의 몸이 마치 나비처럼 날아올라 예화를 공격했다. 예화는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책을 집어 던지며 허리춤에서 연검을 뽑아 들었다.

연검과 연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동족과 조우한 뱀처럼 서로의 검신에 휘어 감겼던 연검은, 두 사람이 자리를 바꾸는 사이에 풀어져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방금 전까지 언니 동생 하고 있던 사이였으나, 상대의 요혈을 노리는 칼날은 거침없었다.

두 사람의 무공은 막상막하였다. 그녀들은 평소에 검을 섞어 본 적이 많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약점과 단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살기 섞인 검을 주고받고 있지만, 겉으로는 마치 잘 짜인 검무를 추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상대가 검을 내지를 때마다 그 끝이 어디를 공격할지를 알고 있었다.

“병신 같은 계집애가. 정만 많아 가지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취영이 한숨을 쉬며 요대를 풀었다. 긴 비단천에 진기를 입히자 천이 날카로운 기운을 머금는다. 취영은 긴 기합성을 내며 예화에게 요대를 던졌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날아간 요대가 예화의 복부를 공격했다.

막 란란의 견정혈을 노리고 있던 예화는 갑작스럽게 들어온 공격을 피하기 위해 급하게 허리를 틀었다. 버드나무 가지처럼 낭창한 허리가 허공에서 휘며 치마 사이로 다리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정확히 아홉 개의 방위를 밟아 가며 움직이는 그 보법을 취영은 정확히 알아보았다.

“흥! 구전환영보九轉幻影步!!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요.”

여느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특색 있는 무공이 목숨이 위급한 순간에서야 드러났다. 구전환영보. 그것은 아미파의 독문무공으로, 적전 제자들이나 배우는 진산절기다. 부지불식간에 사용한 무공으로 스스로 정체를 폭로하고 만 예화는 당혹함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깊게 깨물었다.

“도망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제껏 기다린 것은 정체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시기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날카로운 기세로 예화를 공격하며 란란이 소리쳤다. 하지만 예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가 들킨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바보야. 그 여잔 간자라고! 말 붙이지 마!!”

옆에서 보고 있던 취영이 발을 한 번 구르더니 본격적으로 몸을 날려 싸움터에 뛰어들었다. 붉은 요대가 마치 칼날처럼 세워져 장태혈將台穴2)로 뻗어 나갔다. 같은 여자끼리라고는 하지만 거침없이 급소를 향하는 공격에 대경한 예화가 연검을 사용해 요대를 내리쳤다. 얇은 천이니 그대로 베어 버리려고 한 것이다.

불행히도 그런 예화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취영이 사용하는 요대는 천잠사로 짠 귀물로, 그녀를 어여삐 본 요왕妖王이 특별히 빌려준 것이다.

밖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란란과 취영은 모두 요왕의 기명 제자로, 내호각의 비밀 각원이기도 했다. 포영의가 운영하는 추밀각과 다른 계통의 정보대 소속으로 호완평의 직속 부하였는데, 예화는 그토록 오랫동안 란란과 같이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챙!

천과 검이 부딪혔는데도 검과 검이 부딪힌 것 같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딪히는 강도는 쇠와 같은데, 반탄 되는 내기는 단순히 쇠를 친 정도가 아니다. 넓은 천이 그녀의 진기 전체를 받아 냈다가 한꺼번에 되돌려 보냈다.

예기치 못한 강한 충격에, 진탕되는 내기를 견디지 못한 예화가 울컥 피를 토했다. 그 모습을 본 란란은 계속 공격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반면 거리낄 게 없는 취영은 용서 없이 달려들었다. 그녀는 요대를 포승처럼 사용해 예화의 손발을 어지럽혔다. 단지 칼날처럼 뻣뻣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공중에서 휘기도 하고, 몸을 감을 듯이 둘둘 말리기도 한다.

이런 기상천외한 기병과 싸워본 적이 없었던 예화는 한 번 입은 손해를 만회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운기할 시간이 없어 내상은 점점 더 심해지는데 취영의 공격에서 빠져나올 방도가 없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란란까지도 공격을 해오니 사정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마침내 예화는 취영의 요대에 두 손을 묶이고 말았다. 취영은 몸이 묶인 채 허공에서 떨어지는 예화를 거침없이 걷어차 버렸다.

손이 묶인 예화는 꼼짝없이 나가떨어졌다. 사로잡힐 것이 뻔하니 고문을 당하기 전에 혀를 깨물 생각이었으나,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란란이 서둘러 쫓아와 마혈을 짚어 버린 것이다.

두 팔이 묶이고 뻣뻣하게 몸이 굳은 예화는 커다란 눈을 들어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우울한 시선으로 예화를 내려다보던 란란이 고개를 돌린다. 취영은 제멋대로 풀어 헤쳐진 요대를 다시 허리에 감으며 뒤를 향해 소리쳤다.

“소홍! 군사님께 작전대로 간자를 붙잡았다고 전해드려라. 배꽃은 꺾었고, 과일은 따지 않았다.”

“예, 조장님.”

세 사람 간의 치열한 싸움을 지켜보던 소홍이 군기가 뻣뻣이 든 대답을 내놓더니 서둘러 뇌정전을 뛰쳐나갔다. 날씬한 허리에 천잠사로 만든 요대를 감아 격전의 흔적을 감춘 취영은,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란란의 어깨를 거칠게 두드리며 한마디 했다.

“분위기 잡지 마, 이 계집애야.”

포영의는 추밀각의 최상층에 앉아 속속 들어오고 있는 보고를 받았다. 뇌정전에 있던 간자 예화를 생포했다. 수전각水田閣의 삼총관 행세를 하던 기찬생夔讚生은 도주를 시도했기에 사살당했다. 내전 호위로 있던 한 명과 적호각赤豪閣 소속이던 두 명의 외전 무사는 압송 즉시 마라옥魔羅獄에 집어넣었다.

모두 다섯 명. 그들은 정파가 지난 수십 년간 마교에 투입한 간자의 전부였다.

이제껏 그들의 존재를 몰라서 가만히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다. 간자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정보를 얻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작자들이니, 간간이 역정보도 심어줄 겸 해서 살려 두고 있던 선들이다.

만약 그들이 곽효와 손을 잡지만 않았더라면, 포영의도 그들을 숙청하는 번거로운 일 따윈 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마교가 허락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서로 간에 암묵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불문율을 그들이 먼저 깨트렸던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놈들이 유능했다는 이야기지. 사부님을 교 밖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흔적도 없이 교의 흑화 체계를 훔쳐냈으니 말이야.”

포영의는 책상 앞에서 들려오는 참견을 짐짓 모르는 척했다. 며칠 전부터 그가 하는 일에 이런저런 딴지를 걸고 있는 저 사내는, 포영의의 집무실에 일부러 곡배교의曲背交椅3)까지 가져다 놓는 적극성을 보이고 있었다.

남의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치고는 참으로 파격적인 행보지만 포영의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처리할 일이 많아 골치 아픈데 신경에 거슬리는 존재까지 눈앞에서 알짱거리니 도무지 집중이 안 된다. 지끈지끈 이는 편두통을 눌러 참으며, 포영의는 섬세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사부께서는 아직도 정도맹에 계신다고?”

“그사이 일정이 바뀐 게 아니라면 그러시겠지요.”

“그분의 다음 행선지는 아마도 조현趙縣이겠고?”

“얼마 전에 왔던 서신을 같이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굳이 확인하지 않으셔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천마에게서 온 서신은 사형제들 전체가 동석한 자리에서 같이 읽었다. 그사이에 새로 온 서신도 없었고, 새로운 정보도 없었다. 그러니 포영의가 아는 일이면 곽진무도 아는 일이고, 곽진무가 모르는 일이면 포영의도 모르는 일이다.

며칠 전, 그동안 소식이 끊겼던 천마에게서 한 통의 서신이 날아왔다. 마교의 정보 계통이 아니라 뜬금없이 하오문의 비선을 타고 날아온 서신이었다.

사형제들 중 그 서신을 가장 반가워했던 사람은 이제나저제나 천마의 행방만을 찾고 있던 포영의였다. 곽진무가 곽효가 역용에 능하다는 정보를 가져오기도 전에 이미 상대의 흔적을 잡아냈지만, 천마의 위치를 찾지 못해 함부로 행동에 나설 수 없었다.

포영의는 천마가 보내온 서신 덕분에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노출된 흑화 체계를 뒤집어엎고, 곽효의 영향이 미치는 비선들을 잘라내고, 적의 간자를 숙청했다. 모두 할 줄 몰라 안 한 게 아니라 때를 기다렸던 일들이다.

그동안 미뤄 왔던 모든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나자 쾌감이 솟았다. 성격이 까탈스럽고 인내심이 부족한 포영의는 이제야 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기간 내내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사람을 들들 볶는 곽진무만 없었어도 진심으로 날아갈 것 같았을지도 몰랐다.

“마영대를 조현으로 보낼 생각이지?”

“마영대뿐만 아니라 내전의 무사들도 차출해서 보낼 예정입니다. 처음부터 사부를 노린 함정이라면,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겁니다. 만사를 튼튼히 도모해야지요.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포영의는 적들의 주체가 정파 수뇌부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곽효가 마교 내부를 염탐하는 데 사용했던 이들은 정파의 간자였다. 무생교니 뭐니 하는 걸로 눈가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실체가 아니라 자신들의 본색을 숨기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무생교의 이름으로 행동하던 자들은 거의가 오합지졸들이고, 그나마 거물급에 속하는 자들도 포섭된 자들이지 내부인이 아니었다. 혈안血眼이니 건예자乾麑子니 하는 특색 있는 물건들로 눈가림하려 애썼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미숙한 점은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행동 양상으로 보아 그들은 교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라 약속된 이익 때문에 움직이는 자들임이 틀림없었다. 그들의 행동은 교리에 충실한 신도들이라기보다는 낭인에 더 가까웠다.

‘그런 반면에 옥기린을 습격했던 자들은 고도로 훈련받은 무인들이었다고 했지. 목숨을 버리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라……?’

천마는 그들을 ‘혀 잘린 병신들’이라고 표현했었다. 직설적인 천마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그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직접적인 묘사일 게 분명하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혀를 자르는 것조차 기꺼이 감수하는 충성심 강한 무사들이라. 그런 무인들을 기르려면 오랫동안 공을 들여야 한다. 마교를 제외하자면 그런 수준의 고수들이 존재하는 곳은 한 군데뿐이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들은 정파의 진산 고수들이 틀림없었다.

‘그 일이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자파의 고수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포섭한 고수 가운데에는 절정 이상의 고수가 드물다는 것을 말해 준다. 초절정 고수와 절정 고수가 동행한 일행을 습격하려면 습격대가 적어도 절정 이상의 무인들로 구성되었어야 했는데, 포섭된 자 중엔 그럴 만한 패가 없었던 거지.

하지만 수십의 절정 고수라면 각 파 내에서도 귀중한 인재들이다. 이 일이 그런 자들을 일방적으로 희생시켜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 단순히 옥기린의 눈을 속이기 위해 그토록 많은 희생자를 냈다고?’

물론 존재하지도 않는 암중 세력을 포장하려 했다면, 그 정도는 해야 마땅하다. 실제로 대별산의 사건이 있고 난 이후로, 천하를 도모하려는 암중의 세력이 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가 강호를 뒤흔들었다. 만약 습격자들의 무위가 그토록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소문이 그렇게까지 급격히 퍼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포영의를 괴롭히는 것은 그들의 목적이 아니라 동기였다. 수십 명의 자파 고수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강호를 혼돈 속으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는 저들의 동기.

포영의는 그들의 정체를 알아낸 후 줄곧 그 점에 대해 고심했지만, 딱히 답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아낼 수 없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군. 곽효가 어떤 수단을 사용했기에 정도맹이 이렇게까지 내달리는 거지? 대체 뭐가 저들을 저토록 절박하게 몰아간 거야?’

지금 정도맹이 하고 있는 짓은 도저히 정상이라고 보기 힘들다. 원래대로라면 명분과 대의에 집착해야 할 저들이, 사마외도조차 하지 않을 일들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었다.

죄 없는 어린아이를 납치해 강시를 만들고, 무림공적들을 포섭해 유령 단체를 만들어 냈다. 기린패를 훔쳐 강호에 분란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헛된 소문을 퍼트려 수없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갔다.

마교의 강성함이 두려웠다고 하더라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마교와 중원 사이에는 융중지약까지 있어, 그들이 그토록 근심할 계제가 되지 못했다. 천마가 살아 있는 한 그 약속은 지켜질 터였다. 앞으로도 수십 년을. 혹은 반백 년 이상 동안이나.

“융중지약이 약속된 평화라고 생각하는 건 힘 있는 우리들의 입장이지. 정도맹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공할 힘을 가지고 있는 적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에 불과해. 뒷산에 식인 호랑이가 사는데 당장 마을을 덮치지 않는다고 마음 놓을 수 있겠어? 설상가상으로 사부님께서 반로환동까지 하셨으니 두려움은 더욱 컸겠지.

세월을 되돌리는 경지에 이르신 사부님이야. 앞으로 몇 년을 더 사실지 누가 알겠어? 이미 한 세대 이상을 천마의 이름 앞에 눌려 있던 자들인데, 거기에 더해 또 수십 년의 세월을 인내하라니. 더는 못 참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포영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곽진무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왔다.

포영의는 서늘한 눈을 들어 곽진무를 바라보았다. 곡배에 둥글게 등을 묻고, 방만한 자세로 발을 까딱이고 있던 곽진무가 포영의의 시선을 마주 받았다. 마치 추파라도 던지는 듯, 처진 눈가에 맺힌 미소가 짐짓 애교스러웠다.

“……제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그의 참견을 더는 견디기 어려웠던 포영의가 깊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집무실에서 버티고 있는지 포영의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뜻 일을 맡기기엔 내키지가 않아 이제껏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상대의 태도를 보니 그런 온건한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듯하다.

“뭘 새삼스럽게 물어보고 그래. 알고 있잖아? 내가 뭘 원하는지.”

곽진무가 여유 만만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어린아이가 당과라도 조르듯 가벼운 태도였으나, 포영의의 거절은 칼같이 단호했다.

“그럼 이사형께서도 알고 계실 텐데요. 제가 그 일을 허락할 수 없는 이유를 말입니다.”

“사제. 너무 깐깐하게 그러지 마. 어차피 인선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중이잖아. 대사형과 사제는 교를 지켜야 하고, 막내는 임무를 맡기엔 무위가 모자라지. 따지고 보면 우리 중에서 교를 비울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하지만 이사형에게는 자격이 모자라지요.”

굳이 입 밖에 내어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여태껏 회피하고 있었던 말이 포영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가능하면 이런 말까지는 안 하고 싶었건만, 끈질기기 짝이 없는 곽진무가 기어코 사람에게 못 할 짓을 시킨다.

“자격이라……. 역시 핏줄이 문제인가?”

포영의가 이제껏 암묵적으로 회피해 왔던 주제를 곽진무는 담담히 입에 담았다.

곽효에 대한 문제는 곽진무에게 있어 역린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천마의 사면을 받았다 한들 그의 가문이 지은 죄를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천마의 제자이기 이전에 반역자의 혈육이다. 그 죄는 무거운 족쇄가 되어 평생 곽진무의 발목을 잡았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군. 내가 이제 와 내 아비의 편을 들까 그것이 걱정된단 말이지?”

“사제 간의 관계가 인륜人倫이라면, 부자간의 관계는 천륜天倫이지요. 사형께서 제 입장이라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쉽게 허락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비만 천륜인 것은 아니지. 어미도 천륜이다. 혈육이라고는 하나 살모지수殺母之讐. 이제 와 애틋해질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곽진무의 고집은 예상외로 끈질겼다. 자신의 아버지를 불공대천의 원수로 표현하면서까지 내세운 뜻을 꺾지 않는다. 포영의는 떨떠름한 시선으로 그런 곽진무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살아오던 사람이 왜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태도를 바꾸는지 알 수 없었다. 석연찮은 출신 성분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의심을 받는 처지이면서, 어째서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려고 하는 걸까?

“고작해야 그런 말 한두 마디로 저를 설득하실 순 없으십니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는 게 그리 쉽게 정리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사제가 사람을 잘 못 믿는다는 것은 내가 잘 알지. 정 그렇게 못 믿겠다면 내게 금제를 해. 고를 먹여도 좋고, 독을 먹여도 좋다. 기꺼이 먹어주지.”

“이사형, 말씀이 과하십니다!”

“그냥 해 보는 말이 아니다. 사제. 진담으로 하는 이야기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시려는 겁니까? 제가 이 일을 반대하는 것은 사형을 못 믿어서일 뿐만이 아니라, 사형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합니다. 오이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 매는 것은 범부조차 삼가는 일입니다. 한데 사형께서는 왜 이런 위험을 자초하십니까?”

포영의가 지금 호위대를 보내려고 하는 것은 곽효의 위협에서 천마를 보필하기 위해서다. 한데 그런 호위대의 대주를 곽효의 아들인 곽진무에게 맡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도 어불성설이다.

곽진무의 신분으로는 무사들을 납득시키기도 어려울 것이고, 통솔은 더욱 힘들 터였다.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그가 작은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그 여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질지도 모른다. 본의 아닌 실수였다 하더라도 호위대의 무사들에게 그 사실을 순순히 이해받을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본인을 위해서도, 호위대를 위해서도 최악의 선택인 셈이다.

“위험을 자초하는 게 아니야, 사제.”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포영의가 진심으로 감정을 드러내자, 진무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늘 가면처럼 덮어쓰고 있던 웃음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의외로 냉막했다.

“나는 그저 도망치는 것을 멈춘 것뿐이다. 반평생에 가까운 시간 동안 뒤쫓아 오던 그림자에게 뒤늦게나마 대적하려고 말이다.”

그와 포영의는 빈말로도 의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다. 복잡하게 얽힌 서로의 과거 때문에 두 사람은 결코 가까워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서로를 위해 지키고 있는 최소한의 선이 있었다.

진무는 자신이 먼저 그 선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 일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이사형.”

“나는 그 사람에게 받아 낼 것이 있다. 장담하건대, 그에 대한 내 갈구는 너나 사부의 그것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자식의 눈앞에서 그 어미를 난자했을 때부터, 그자는 내게 아비가 아니었다. 금제를 하고 싶으면 금제를 해라. 감시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타협의 여지 따윈 없다는 듯 단호한 태도로 곽진무가 말했다. 만약 포영의가 끝까지 허락을 하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교를 뛰쳐나갈 듯한 기세였다.

포영의는 한쪽 손으로 지끈지끈한 관자놀이를 누르며 그런 곽진무를 바라보았다. 이사형은 진심이었다. 말로는 자신의 결정을 바라는 것처럼 하고 있지만, 실상을 따져 본다면 본인이 가겠다는 통고나 다름없었다.

“……저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는 일 같습니다.”

그는 곽진무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듣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뜻이 어떤지 모르는 것은 아니나 포영의에게도 자신만의 입장이 있다. 곽진무처럼 아무런 의무 없이 홀가분한 처지가 아닌 그는, 작은 일을 결정할 때에도 많은 부분을 더불어 생각해야 했다.

“이사형께서도 이번 인선이 여러모로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이런 일을 저 혼자의 독단으로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은 교주님께 이사형의 의사를 전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교주님의 의향을 여쭌 연후에나 정확한 대답이 가능할 것입니다.”

당장 확답을 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 대답을 유보했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지 곽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더군다나 이번 일은 성격이 성격인 만큼 대사형의 재가가 필요하겠지.”

은근히 뼈가 있는 말에 포영의는 씁쓸하게 입꼬리를 뒤틀었다. 벼르고 있던 용건을 끝낸 곽진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마치 한 몸인 양 붙어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태연자약한 어조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보아하니 아직도 일이 많이 남은 것 같은데,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으마. 하던 일 계속하거라.”

포영의는 무거운 짐이라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하게 자리를 떠나는 곽진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본인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으니 마음이 편한 모양이지만, 그의 짐을 대신 떠안은 포영의로서는 골치가 아픈 정도가 아니라 속이 쓰렸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산더미 같은 서류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몸은 하나인데, 처리해야 할 일은 태산같이 많았다.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만큼 첩첩산중이다.

***

그 옛날, 월나라에 서시西施라는 이름의 미인이 있었다.

그녀는 나무장수의 딸이었으나 태어나기를 절세의 미인으로 태어났다. 그녀가 자라자 그 미모는 곧 천하에 소문이 났는데, 산골에 살고 있는데도 그녀의 미모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서시를 보러 오는 사람마다 일 전씩 돈을 걷게 했더니만 그 돈이 산처럼 쌓였다는 말도 있다. 범려范蠡가 그 돈을 모아 군사를 길렀다고 하니 그녀의 미모가 얼마나 빼어났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얽힌 고사는 수없이 많다. 물고기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넋을 잃어 가라앉았다고 해서 침어侵漁라는 말이 생겼으며, 마음에 병이 있는 그녀가 늘 찡그리고 다니자 그 모습을 흉내 내느라 나라 안의 모든 여인들이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다고 해서 서자봉심西子捧心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옛이야기가 과장된 것인지, 아니면 서시가 그만큼 월등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천마는 이제껏 찡그린 얼굴까지 어여쁜 미인을 본 적이 없었다. 천하를 내 집같이 돌아다니며 이름난 미인들을 많이도 만나봤건만 찡그린 얼굴조차 아름다운 미인은 본 적이 없었다. 굳이 여인뿐만이 아니라 남자 여자를 통틀어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제아무리 빼어난 미인이라고 할지라도 찡그린 얼굴은 찡그린 얼굴일 뿐이었다.

문평의 미모에 순위를 매긴다면 그중에서도 최하위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럭저럭 눈코입이 제대로 붙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등 점수를 줄 만한 구석이 없는 이목구비에, 손질이라고는 전혀 안 된 거친 피부. 골격은 괜찮은 편이지만 요즘 들어 부쩍 곯는 바람에 몸매는 볼품이 없어져 버렸고, 창백하게 팬 볼은 도무지 살이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인다.

누구는 찡그린 얼굴도 남이 따라 할 만큼 어여쁘다는데, 이놈은 활짝 웃어도 예쁘다고는 못할 놈이다. 그런 주제에 곧 죽어도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니 대체 무슨 배짱인지 알 수 없다.

‘이놈은 자면서도 성미 독한 티를 내는군. 무슨 꿈을 꾸고 있길래 이리도 인상을 쓰는 거지?’

잠든 문평의 옆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할 일 없이 그 얼굴을 구경하고 있던 천마는 손가락을 들어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반듯하게 펴주었다.

그러나 주름이 반듯해지는 것도 그가 손을 대는 잠시뿐. 손을 떼고 나면 미간 사이의 주름은 어김없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꿈속에서 무슨 용을 그렇게 쓰는지 자는 얼굴인데도 힘겨움이 역력하게 느껴진다. 꿈자리가 무척 사나운가 보다.

‘쯧. 이래서야 곱게 재워준 의미가 없군.’

천마는 깨어 있는 것보다 오히려 더 힘들어 보이는 문평의 모습을 보고 낮게 혀를 찼다. 체력이 바닥을 치고 있는 게 뻔히 보여서 품고 싶은 생각을 억지로 누르고 혼자 자게 해줬더니만, 이놈은 어째 그 값어치를 못 한다.

‘무인 주제에 가위에 눌리다니. 살다 살다 이런 놈은 처음 보겠군.’

큰 부상을 당했으니 체력이 떨어지는 건 알겠는데, 명색이 내가고수內家高手가 기가 허해질 줄은 몰랐다. 참 골고루 한다 싶으면서도 힘들어하는 얼굴을 가만두고 보기가 어렵다.

‘보약이라도 지어 먹여야 하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떠나오기 전에 그 할망구에게 진맥이나 한 번 더 받아보는 건데.’

그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문평의 맥을 잡았다. 과연, 자는 사람 같지 않게 거칠고 빠른 맥이 뛴다.

천마는 문평의 맥문을 잡고 자신의 진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불안정하게 요동치던 문평의 내기가 천마의 기를 느끼고 서서히 안정되기 시작했다.

천마는 문평이 깨지 않도록 공을 들이며 천천히 내기를 순환시켜 주었다. 차츰차츰 문평의 찌푸려진 미간이 펴지기 시작했다. 험한 꼴이라도 보고 있는 듯 험상궂게 일그러졌던 표정도 편안해지고, 색색 거칠게 몰아쉬던 숨은 길고 느린 호흡으로 바뀌어 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느리고 부드러운 일주천을 세 번 거듭하자 문평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천마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기를 거두고, 식은땀이 송골송골한 이마를 소매 끝으로 정돈해 주었다.

“……그래도 못생겼군. 이건 대체 언제 이뻐지려나.”

천마는 편안하게 잠에 빠진 얼굴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그 얼굴에서 찡그린 표정이 사라졌어도 이뻐 보이는 구석은 없었다. 찡그린 얼굴조차 어여쁜 미인이라면 억울한 마음이라도 없으련만. 이놈은 어느 한구석 잘난 데도 없으면서 사람의 시선을 붙들고 놓질 않는다.

문평은 겉보기엔 만만하지만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상대였다. 잘 따라오는 줄 알고 앞서가다가 뒤돌아보면 어느 순간엔가 사라져 버리는 놈이니 마음 놓고 눈을 뗄 수도 없다.

성가시기 짝이 없는 번잡한 존재. 하지만 그럼에도 녀석을 놓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천마는 처음에 자신이 문평을 잡은 줄로만 알았었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그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돌아가는 낌새를 보아하니, 자신이 문평을 손에 넣은 게 아니라 문평이 자신을 손에 넣은 것 같다.

상대의 존재에 더 연연하고 있는 것도 자신이고, 어떻게든 돌봐주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는 것도 자신이니, 진정으로 상대를 소유하게 된 사람은 그가 아니라 문평이다.

80년이 넘는 그의 인생을 통틀어 봐도 이제껏 이런 위업을 달성한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자식을 미끼로 사랑을 사려고 했던 여자도 있었고, 그의 발밑에 자신의 왕국을 바치겠다고 애걸했던 왕도 있었다. 자신만의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겠다던 이 또한 적지 않았으나, 천마의 마음은 그 어떤 상대에게도 흔들린 적이 없다.

그토록 굳건하던 마음이 고작 문평 따위에게 흔들리게 될 줄은 천마 자신도 미처 몰랐던 일이다. 하나 물이 흐르듯 흘러 버린 마음은 이미 그의 손아귀를 떠나 버렸다. 그의 마음은 이미 문평에게로 가 있었고, 천마에게는 그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이 사람이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문평은 혹시나 상대를 깨울까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어젯밤에 그는 분명 혼자서 잠자리에 들었었는데, 깨어 보니 옆자리에 사람이 누워 있다.

마치 하나처럼 얽혀 있는 다리가 무려 네 개. 두 개는 내 것인데 나머지 두 개는 대체 누구 것이냐. 문평은 먼 옛날, 오쟁이를 지고도 아량을 보여줬다는 이유로 전설이 된 불쌍한 사내와 비슷한 감상을 떠올리며 옆자리에 누운 남자를 바라보았다.

허락도 없이 그의 침상을 비집고 들어온 상대는 역신, 아니 천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역용을 풀어 버린 본모습을 드러낸 천마는 문평이 깨어난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늘어지게 잠들어 있었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잠을 자도 곱게 자는 것도 아니고, 두 다리로는 문평의 다리를 휘어 감고 문평의 몸 위에 팔까지 한 짝 얹었다. 반로환동 하더니만 정신 연령까지 어려진 모양인지 애새끼 같은 자세로 잠이 든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이건 팔십 먹은 노인네가 잠을 자는 자세가 아니었다. 문평은 천마에게 깔린 왼쪽 어깨가 저린 것을 느끼며 눈에 띄지 않게 인상을 그었다.

‘자기 침상 놔두고 왜 여기서 잠이 들어? 내 방보다 자기 방이 훨씬 좋더구먼.’

아닌 말마따나 같은 용화소축이라고 하더라도 사용하고 있는 방의 등급에는 차이가 있다. 문평의 방도 제법 괜찮은 편이지만, 주빈主賓이자 귀빈貴賓인 천마의 방은 그에 비해 두세 배는 더 공들여 치장되어 있다. 침상은 목재 자체가 향을 품고 있는 자향목紫香木으로 만들어졌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월등히 아름답다. 심지어는 객실을 담당한 시비조차도 제일 예쁜데, 이 사람은 그런 좋은 방을 놔두고 툭하면 문평에게로 건너와 사람을 귀찮게 한다.

“일어나십시오. 벌써 해가 뜨고 있습니다.”

모처럼 개운하게 자고 일어났는데 불청객 때문에 아침을 망쳤다. 내 팔자가 그렇지, 하고 홀로 한탄한 문평은 잠이 든 천마를 조심스럽게 깨웠다.

그가 가볍게 어깨를 흔들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던 천마가 번쩍 눈을 떴다. 방금 잠에서 깼는데도 또렷한 검은 눈동자가 문평을 정확히 돌아보았다.

“음. 벌써 일어난 게냐?”

엎드려서 잠이 들었던 천마가 고개만 살짝 돌리며 그에게 물었다. 높이가 같은 베개 덕에 두 사람의 눈동자가 나란히 마주쳤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흰자위에 탁한 티가 전혀 없는 눈동자가 유달리 맑았다.

검은 구슬처럼 새카만 눈동자에 문평의 얼굴이 비쳤다. 검은자위도 흰자위와 마찬가지로 맑아서, 동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 선명하게 잔상이 맺힌다.

남의 눈동자에 맺히는 자신의 형상에 왠지 모르게 민망한 기분이 든 문평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천마는 가슴에 올려놓았던 손을 끌어당겨 문평이 일어나는 것을 방해했다.

“왜 이러십니까, 아침부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도로 드러누워 천마와 시선을 마주하게 된 문평이 당혹스럽게 말했다. 그랬더니 천마가 가볍게 눈웃음을 친다. 잠자리에서 보이는 요염한 미소와는 또 다른, 어딘지 모르게 애교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아침이니까 이러는 거지. 할 일도 없는데 좀 더 느긋이 있는다고 해서 아무도 안 잡아먹는다. 보아하니 요즈음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모양이던데 좀 더 누워 있거라.”

나이도 자실 만큼 자신 양반이 애교는 무슨, 이라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그 맵시가 몹시도 어여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눈이 홀렸다. 잠시 멍하니 천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문평은 뒤늦게 앗 하는 기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귓불은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서, 부끄러운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러다 시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죄 없는 어린아이들을 살인멸구라도 하시게요?”

그는 애써 딴 곳을 바라보며 천마에게 항변했다. 천마는 느긋하게 문평의 가슴께를 다독이더니 장난처럼 중얼거렸다.

“그럴 때를 위해 있는 게 바로 섭심술攝心術이지.”

“……심지어는 섭심술도 할 줄 아십니까?”

“내가 잡기를 좀 좋아해서. 어지간한 것들은 거의 다 할 줄 알지.”

천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본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고 있었으나 듣는 문평은 기가 질렸다.

잡기라니. 혹시 본인의 역용술 같은 것을 통틀어 말하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 만약 그의 섭심술이 역용술과 비슷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그 재주는 잡기 따위가 아니라 일절一絶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그래도 섭심술 같은 것은 사람에게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차후에 탈이라도 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의 정신이라는 게 의외로 허술하지. 작은 기억 하나둘 지우는 것 정도는 작은 암시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궁금하면 보여 줄 수도 있는데, 어떠냐? 한번 볼 테냐?”

“아뇨. 괜찮습니다.”

능청스럽게 시범을 보이겠노라 나서는 천마를 향해, 문평은 정색을 하고 거절했다. 천마는 농담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만약 보고 싶다고 하면 진짜로 아무나 붙잡고 섭심술을 보여 줄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그런 봉변을 당하게 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문평은 고개까지 저어 가며 자신의 뜻을 강력히 피력했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에까지 신경을 쓰곤 하니까 기가 허해지는 거다. 쓸데없이 아등바등하지 말고 얌전히 누워 있거라. 정히 신경이 쓰인다면, 누가 오는 기척이 들릴 때 알려주마.”

천마의 손이 다가오더니 문평의 이마를 눌렀다. 딱히 힘을 쓰는 것 같지는 않은데 교묘하게도 균형을 방해하고 있어 몸을 일으킬 수 없게 만든다. 문평은 하는 수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 누웠다.

누워 있어 봤자 할 일이 없으니 그저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천장을 바라볼 뿐이다. 신경 쓰이게도 천마는 그런 문평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고 문평의 앞머리를 손가락에 돌돌 말며 하잘것없는 장난을 친다.

“너는 머리카락이 왜 이런 거냐? 뻣뻣하기가 꼭 돼지 털 같구나.”

그러고 누워 있기를 얼마나 했을까. 천마가 남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다 말고 갑자기 시비를 걸어온다. 그럼 다 큰 사내 머리칼이 돼지 털 같지 비단결 같길 바랐단 말인가? 문평은 별 쓸데없는 일로 딴지를 거는 천마를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사내 머리가 다 그렇지요. 기름까지 발라가며 관리하는 아녀자들만 하겠습니까?”

“이건 관리가 안 되어 있다는 수준이 아니질 않느냐? 쓸데없이 억세고 거칠어 손에 감기는 맛도 없고.”

그래서 어쩌라고? 문평은 천마가 자신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장발 미인이 그리우면 미동을 품으면 될 일이다. 남창을 다루는 기루에 가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다듬어 매끈매끈하고 고운 미동이 종류별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왜 애먼 자신을 붙잡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너 흰머리도 있구나? 아직 불혹不惑도 안 된 놈이 벌써부터 흰머리라니. 이러다가 몇 년 내로 이마에 주름도 잡히겠다?”

“교주님처럼 세월을 거스를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원래 사람이란 다 그렇게 늙어 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게 순리니 따르는 수밖에요.”

천마를 처음 만났을 때 문평의 나이는 서른셋. 벌써 정월이 지났으니 이제 서른넷이다. 슬슬 노화가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나이인 셈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산수傘壽가 넘은 나이에 20대 젊은이의 모습을 한 천마가 파렴치한 거지 문평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멈춘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거꾸로 가다니,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은 천하에 천마밖에 없다.

“젊은 놈이 패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야망조차 없구나. 환골탈태를 하고서라도 늙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는 게냐?”

손가락으로는 여전히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면서 천마가 물었다. 못났다, 돼지 털이다, 퍼붓는 것 같지 않게 그를 다루는 손놀림은 부드럽기 짝이 없다.

“제가 무슨 재주로 환골탈태를 하겠습니까? 요원한 일이지요.”

“내가 좋은 방법을 하나 가르쳐 주지 않았더냐. 그 방법대로 열심히만 하면 된다.”

천마의 천연덕스러운 권유에 문평의 얼굴이 하얗게 식었다. 말도 안 된다. 그 짓을 나더러 또 하라고? 성고문이 따로 없을 만큼 지독했던 그 기억은 문평에게 아직도 공포로 남아 있었다.

“……그건 죄송해서요. 제가 무슨 기생충도 아닌데 교주님의 내공을 번번이 얻어 간다는 건 민망한 일 아닙니까.”

천마와의 정사는 평소에도 진저리가 날 정도로 진한데, 운기로 인해 오감이 개방된 상태로 그런 상황을 맞았으니 문평이 죽다 살아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아무리 내공이 좋아도 그런 일을 또 겪고 싶은 생각은 없다.

문평은 절로 도리질을 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애써 정중한 투로 천마의 권유를 사양했다.

“사양할 것 없다. 바다에서 물 한 모금 퍼낸다고 티가 난다더냐. 네가 아무리 얻어가 봤자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 마음껏 퍼가거라.”

문평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마의 권유는 제법 끈질겼다. 그와 더불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은근해지기 시작한다.

천마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이마 끝의 두피를 어루만졌다. 잠이 올 것만 같은 나른한 손놀림으로 머리카락의 끝을 꼬더니, 솜털이 송송한 이마 끝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예민한 피부를 자극한다.

노골적인 성욕으로 지분대는 거였으면 뿌리칠 수라도 있을 텐데, 무심히 만지는 척하며 은근슬쩍 사람의 감각을 돋우니 정색을 하기에도 애매하다.

간질간질한 전율이 이마 선을 타고 흘러 정수리까지 닿았다. 누군가가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목덜미가 오싹해진다. 목덜미 곁으로 소름이 돋아 올랐다. 천마가 주는 자극에 몸이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문평은 참다못해 천마를 돌아보았다. 하지 말라고 막 입을 열려는데, 따뜻한 입술이 내려와 말문을 막아 버린다.

따뜻한 혀가 이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입천장을 쓸었다. 탐하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다정한 입맞춤이다. 아랫입술에 와 닿는 입술의 감촉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젖은 비단처럼 촉촉하고 매끄러운 입술. 상냥하게 빨아 당기고, 조심스럽게 핥아 올리는 그 입맞춤은 연인들이나 나눌 법한 다정함으로 가득했다.

“……좀 더 입 맞추고 싶은데 그럴 만한 시간이 없구나. 누가 오고 있다.”

뜻하지 않은 상냥함에 얼이 빠져 거절도 하지 못했다. 그냥 멍하니 입을 벌리고 상대가 입을 맞추는 대로 놔두고 있었던 문평은 천마가 아쉽게 입술을 뗀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천마는 얼떨떨하게 눈만 깜빡이는 문평의 눈가에 입을 맞춘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둑. 우둑. 우두두둑.

천마가 침상으로 내려서자 괴상한 기음이 들려왔다. 뒷모습만 보고 있어도 그가 다시 축골공縮骨功을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남부럽지 않은 키와 덩치가 보다 섬세한 체형으로 바뀌어 갔다. 강인한 어깨가 늘씬하게 변하고 팔다리의 근육도 한결 가벼워진다.

천마는 딱 맞았던 비단옷이 헐렁하게 내려앉는 것을 다시 묶으며 탁자로 걸어갔다. 그가 탁자 앞에 앉자마자 문밖에서 기침이 들렸다.

“곽 형, 윤 대협, 안에 계십니까? 저 백우경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그들을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백우경이다. 천마는 문평이 허둥지둥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리하는 것을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

“예. 저는 이곳에 있습니다. 들어오십시오.”

마치 자기가 방 주인인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는 천마 때문에 문평은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침의 하나만 달랑 입고 있는 상황에서 손님을 맞이하게 됐기 때문이다.

엉뚱한 오해라도 사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정말. 화협이 남색을 한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엉뚱하게 윤승효가 화를 입을 터인데!

“들어가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백우경이 들어왔다. 아슬아슬하게 바지를 꿰어 입고 상의를 찾고 있던 문평은 아직 윗옷을 입지도 못한 상태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말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백 대협.”

문평이 어색하게 인사를 하자 백우경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상황에서 변명하면 더욱 어색하게 보일 것 같아 그저 웃기만 한 문평은 속으로 천마를 원망하며 마저 옷을 입었다.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백 대협께서 손수 이곳까지 행차하시다니요.”

천마는 여전히 방 주인 행세를 하며 백우경에게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백우경은 사양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으며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결례가 되는 줄 알고 있지만, 사안이 워낙 급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내외하는 사이도 아니고 급한 일이 있으면 그럴 수도 있지요. 마음에 두실 것 없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 대협.”

“인사는 그쯤 하면 됐고, 무슨 일인지나 말씀해 보십시오. 이렇듯 급박하게 저희를 찾으시는 것을 보면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문평은 백우경이 이렇게 서두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천마 또한 심상치 않은 그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여유롭던 얼굴에 긴장이 어리기 시작했다.

“제가 쫓고 있던 기린패가 산서山西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저는 추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추적을 당하던 입장이었던지라 적들의 흔적을 잡고도 끝까지 따라붙지 못했었습니다. 기린패를 탐내고 모여든 수백 명의 고수들이 호시탐탐 저를 노리고 있었으니, 설사 추적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피바람이 불게 될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틀리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데, 그때 놓쳤던 기린패의 행방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발견된 장소는 양원陽原인데, 마지막으로 소식이 들려온 곳은 역현易縣입니다. 움직이는 방향을 보니 조현趙縣 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양원은 산서성과 하북성의 경계에 위치한 곳이고, 역현은 북경 바로 아래에 있는 도시다. 그의 말대로 그들은 조현을 향해 가고 있었다. 표정이 굳은 천마가 자세를 바로 하고 백우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빛에서 불꽃 같은 광망이 어렸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십시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백우경의 말에 따르면 사정은 이러했다.

처음 기린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기독종奇毒宗이라는 별호를 가진 강호의 일류 고수 종충락終忠洛이었다고 한다. 그는 산서성 부근에서는 제법 악명을 날리는 사파의 고수였는데, 어떻게 기린패를 손에 넣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기린패를 얻었다는 소문은 무섭게 퍼져 나갔고, 강호인들은 보물을 빼앗기 위해 그를 추적해 갔다.

일류 고수에 불과한 그가 기린패를 길게 지켜낼 수는 없었다. 한바탕의 추격전 끝에 기린패는 양원의 대표적인 백도 세력이었던 북산문北山門에게 넘어갔다. 야망이 크다고 소문난 북산문주 복요명伏堯明이 문하의 모든 문도를 이끌고 추격전에 참여해 결국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린패를 소유할 수 있었던 시간은 이틀을 넘지 못했다. 절정의 경지에 이른 장문인을 얻어 한참 세가 욱일승천 중이던 북산문은 복면인들의 습격에 의해 무참히 불탔고, 생존자조차 남기지 못한 채 고스란히 멸문당했다.

북산문을 멸문시키고 기린패를 소유한 자는 잔양마운殘陽摩雲이라는 별호의 전대 고수였다. 별호대로 무공이 출중하고 손속이 잔혹하기로 소문이 높은 인물이었는데, 하루를 못 넘기고 독살당하는 바람에 기린패를 탈취당했다.

기린패가 나타난 지 아직 닷새도 되지 않았건만 그로 인해 죽은 사람들은 수백이 넘었다. 피해를 입은 것은 쟁탈전에 참여한 고수들뿐만이 아니다. 재수 없이 말려든 민초들과 중소 문파들의 피해도 격심했다.

과 불가원不可遠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무림인들이 무려 북경 인근에서까지 칼부림을 서슴지 않았다고 하니, 기린패를 쫓는 자들이 얼마나 광기에 젖어 있는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다.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고작해야 신외지물身外之物에 불과한 물건 때문에 사람 목숨이 상하고 있습니다.”

기진이보奇珍異寶에는 초연한 무림인이라도 신공神功이 관련된 일이라면 이성을 잃기 마련이다. 과거 이와 비슷한 혈사가 일어났을 땐 수백을 넘어 수천이 넘는 목숨들이 희생당한 적도 있었다.

“지금 맹주님과 군사께서는 하북혈사河北血事에 대처하기 위해 추적대를 조직하고 계십니다. 한시라도 빨리 기린패를 수거하지 않으면, 덧없이 희생되는 생명들이 늘어나겠지요. 저 역시 그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터라 추적대에 자원했습니다.

제가 윤 대협을 이른 아침부터 찾은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고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압도적인 무력이 없다면, 보물에 눈이 먼 강호인들을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말인즉슨, 정도맹의 추적대에 윤승효, 아니 천마도 합류를 해달라는 이야기였다. 문평은 천마가 원래부터 그쪽에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당장이라도 허락을 할 줄 알았다. 하나 천마는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뜸을 들이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장 팔을 걷어붙이는 일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백 대협께서도 아시다시피, 어제 저희는 일행으로 데리고 있던 어린아이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이상 무사히 돌려보낼 책임은 저에게 있는데,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도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 아이입니다. 이미 맺은 인연을 모르는 척 외면할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천마가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본인 스스로가 감춰 버린 자옥의 안위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우경은 천마의 말을 듣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나든 여럿이든 두 가지 일 모두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사실은 매한가지다. 정파의 협사가 죄 없는 어린 목숨을 포기하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그는 난처하게 머뭇거리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아이에 대한 걱정은 저 역시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정도맹의 내부에서 납치를 당했으니, 저희로서도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는 일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백우경이 천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윤 대협. 감히 말씀드리건대, 저희가 윤 대협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그 아이가 대협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에 모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정도맹에 상주하고 있는 무사들은 많지만 그들 전부가 자리를 비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곳에는 일반 무사들은 많지만 고수의 숫자가 적습니다. 이대로는 추적대를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일을 해결할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염치없다고 생각 마시고 상황의 어려움을 헤아려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아이는 어찌합니까?”

“제가 군사님께 따로 부탁드려 놓겠습니다. 아이를 찾을 때까지 수색을 멈추지 말아 달라고 말입니다. 어린아이를 찾는 일 정도는 일반 무사들로도 가능한 일입니다. 오히려 한두 명의 고수보다 여러 명의 일반 무사가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

백우경의 부탁을 들은 천마는 고심하는 시늉을 했다. 사정을 몰랐다면 깜빡 속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교하기 그지없는 연기다. 문평은 쭈뼛쭈뼛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상황의 추이를 살폈다.

‘설마 진짜로 기린패를 포기하려나? 아니, 그렇지는 않겠지.’

가긴 가는데 혼자서 가려고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정도맹의 추적대에 섞여 같이 움직이려면 여러 가지로 행동의 제약을 받게 될 테니 말이다.

“정도맹에서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면, 알겠습니다. 추적대에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문평 딴에는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셈을 해 보는 와중에, 천마가 백우경의 청에 대한 허락을 내렸다.

‘진짜로 다른 생각이 있어서 미루는 줄 알았더니만 그냥 한 번 튕겨 보는 거였나? 하긴. 협사라고 알려진 사람이 애가 없어진 상황을 신경도 안 쓴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지.’

역시 천마답게 용의주도하다. 사소한 부분조차 빼먹는 법이 없다.

“어려운 청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이 많이 필요하시다니, 파면객과 이 사람도 같이 데리고 가겠습니다. 파면객은 초절정에 준하는 고수이고, 이 사람도 자기 몸을 지킬 만한 능력은 있습니다.”

‘사소한 부분조차 빼먹지 않는’ 천마는 문평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백우경은 문평을 바라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별 뜻 없이 하는 행동이지 싶으면서도 은근히 찜찜한 기분이 든 문평은 머쓱하게 고개를 돌렸다.

‘설마 뭘 알고서 저러는 것은 아니겠지?’

남에게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광경을 보여줘야만 했던 문평은 괜히 노파심이 들었다. 보아하니 천마 못지않게 눈치가 빠른 사람 같던데, 그들의 관계에 대해 낌새라도 채고 있으면 어떻게 하나 싶다.

사람을 보아하니 그런 일을 남에게 옮길 성품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타인이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하여간에 저 사람이 문제라니까. 뭐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이렇게 티를 내는 거야?’

따지고 보면 백우경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사람을 괴롭히는 게 인생의 낙인 천마가 문제지.

문평은 홀로 투덜거리며 천마에 대한 분함을 삭였다. 이왕 다정하게 굴었으면 끝까지 다정할 일이지 왜 이렇게 한 번씩 삐딱선을 타는 걸까? 당하는 사람이 도무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게 말이다.

***

상황의 급박함 때문인지, 추적대는 빠르게 구성되었다.

추적대의 대주를 맡은 사람은 백우경이었다. 기린패의 본 주인이기도 하고, 본인이 강력하게 희망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는 아직 내상이 다 낫지 않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추적대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추적대의 인원은 용호대龍虎隊의 대원들이 차출되었다. 용호대는 정도맹 중에서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출신의 고수들만을 뽑아 만든 집단인데, 개개인의 전투 능력이 월등할 뿐만 아니라 다년간 수준 높은 합격진을 연마했기 때문에 집단전에 있어서 최고의 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주가 가는 곳에는 우리도 간다며 청혈단원들도 따라나섰지만, 대별산에서의 희생이 너무 컸던 터라 백우경은 그들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절정 고수인 조세화만큼은 예외였는데, 백우경의 동문 사형제인 데다 의형제이기까지 한 그의 신분을 감안해 보면 실로 당연한 인선이었다.

‘셈해 보면 초절정 고수가 둘에 절정 고수가 다섯. 일류 고수가 쉰한 명이라는 이야기군. 이거 웬만한 중소 문파 정도는 하룻밤에 전멸시킬 수 있는 전력인걸.’

위풍당당한 추적대의 구성을 본 문평은 내심 혀를 내두르며 생각했다.

강호의 구조를 도형으로 그려 보면 가파른 삼각형이 만들어진다. 강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수천의 이류와 삼류 고수들이라면, 일류 고수는 천이 되지 못하고, 절정 고수는 수백이 되질 않는다. 초절정 고수는 더욱 희귀해서 천하를 통틀어도 수십을 넘지 못한다. 화경급의 고수는 정사마를 통틀어도 그야말로 손에 꼽을만하며, 그중에서도 현경의 경지에 오른 자는 오로지 단 하나, 천마뿐이다.

그만큼 초절정의 고수는 희귀한 존재다. 중소 문파라면 문주조차 절정을 넘기 힘들고, 구파일방이라고 할지라도 초절정의 고수라면 문파의 대표 고수로 취급한다. 이른바 오대나한五代羅漢이나 매화검수梅花劍手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자들이 바로 초절정 고수들이다.

그런 자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추적대에 있다는 것은, 각 대문파의 대표 고수들이 몰려오거나 화경급의 고수가 나타나지 않은 이상 적이 없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정도맹이 얼마나 단단히 마음먹고 있는지는 추적대의 구성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부터 쉬지 않고 달릴 것입니다만, 따라오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청혈단을 상징하는 검박한 청의를 입고, 흰 이마에 푸른색 영웅건을 맨 백우경이 문평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마도 그의 부상을 걱정해 묻는 것 같지만 문평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대꾸했다.

“제가 달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 달리는 건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 대협.”

그가 타고 있는 말은 한눈으로 보기에도 훌륭한 대완마大宛馬다. 먼 길을 가야 하는 그들을 위해 정도맹이 어렵게 구해 준 말로, 추적대로 뽑힌 무사들 전원이 이런 말을 받았다.

“혹여 힘에 부치시더라도 달리는 것을 늦추시면 안 됩니다. 대신 노숙만은 피할 터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백우경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다시 한번 당부를 하더니 일행의 맨 앞으로 나아갔다. 문평은 피식 웃으며 말고삐를 잡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떼놓고 가신다고 할지라도 저는 반드시 따라가야 합니다. 혼자 남겨졌다간 호랑이 밥이 될 게 뻔하거든요.’

지난번에 무생교에게 당한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문평은 그가 당부하지 않아도 뒤로 처질 생각이 없었다. 달리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따라붙어야 한다. 뒤떨어졌다가 무생교에게 잡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죽어도 곱게 죽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어라? 앞으로 안 가십니까?”

백우경이 떠나고 나자 그의 옆자리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섰다. 자기 몸을 휘감고 있는 천의 빛깔처럼 온통 시커먼 흑마를 타고 있는 파면객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잡털 한 올 섞이지 않은 새하얀 백마를 탄 혁련상이다.

일부러 꾸미기라도 한 것처럼 선명히 대조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무척이나 이채로웠다. 둘이서 이러고 강호에 나가면 흑백무쌍黑白無雙 같은 별호가 붙을지도 모르겠다.

“백 대협께서 앞을 맡으시고 저는 이 뒤쪽을 맡기로 했습니다. 적들의 습격이 앞에서만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으니, 전력을 골고루 분배해야 합니다.”

파면객의 앞이라 그런지, 천마는 낯간지럽게 존댓말을 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윤승효 특유의 어투다.

“아, 그러십니까?”

“제가 곁에서 달릴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절대로 놓고 가지는 않겠습니다.”

천마는 의미심장하게 말하더니 씨익 웃었다. 늘 쓰고 다니는 애체愛逮 속에서 어여쁜 푸른 눈이 가느다랗게 접힌다.

이 사람에게서 이런 식의 말을 듣고 나면 결코 괜찮았던 적이 없는데. 문평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천마를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런 장담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오늘 저녁까지는 효감孝感에 도착해야 하니 쉬지 않고 달리겠습니다.”

앞에서 내공을 돋운 목소리로 백우경이 소리를 질렀다. 용호대의 대원들이 그에 맞춰 큰 소리로 대답했다.

“복명!”

정도맹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50여 기의 말이 빠르게 쏟아져 나갔다. 미리 무사들을 보내 대로를 비워두었기에 달리는 그들은 거침이 없었다.

문평도 그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등이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여정을 따라잡지 못할 그가 아니다. 맨발로 수백 리를 행군해 본 적도 있는 그가 아니던가. 좋은 말이 있고, 그에 더해 옆에서 채찍질해 줄 사람까지 있는데, 이 정도 행군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애초의 자신만만했던 예상과는 달리 온종일 말을 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보다 더한 행군을 윤승효, 아니 천마와 함께해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는 그가 몸이 성했을 때고 지금은 체력이 많이 축난 상태다.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허리에 힘이 빠졌다. 쉼 없이 마찰을 당한 허벅지 안쪽도 얼얼하게 통증이 번진다. 내력을 돋워 운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버티기가 만만찮았다.

“힘드십니까?”

자욱하게 이는 흙먼지 때문에 여태껏 대화가 없던 천마가 문평에게 물었다. 힘들다고 하면 천마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서, 문평은 입을 꼭 닫고 고개만 저었다.

“힘드시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각자 말을 달리고 있는 와중에 어떻게 도울지는 모르겠으나, 천마의 태도는 짐짓 자신만만했다.

“빈말이 아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고해라. 괜히 버티다가 탈이 나서 사람 고생시키지 말고.”

그래도 문평이 버티고 있으니까 천마가 전음을 날려 온다. 말하는 것만 들으면 그가 자신을 정말로 걱정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들어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살갑게 구는지 모르겠다. 잘못하면 사람 착각하게 말이다. 문평은 거절의 뜻을 담아 비스듬히 웃었다. 그리고 정말 괜찮다며 그의 호의를 사양했다.

문평이 두 번이나 연이어 거절하자 천마도 더는 권해오지 않았다. 자기가 고집한 바가 있었기에 문평은 남은 반나절을 더욱 악착같이 버텼다.

덕분에 그들이 효감에 도착했을 때 문평은 완벽하게 녹초가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저 욱신거리기만 하던 등이, 저녁 무렵에 와서는 아예 반란을 일으킨다. 화상을 입은 부위뿐만이 아니라 근육과 뼈마디까지 쑤셔 왔다. 척추 마디마디가 끊어지는 것 같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너무 아파서 등을 완전히 펴지도 못한 문평은 말에서 내려올 때 자세를 잡지 못해 하마터면 굴러떨어질 뻔하고 말았다. 그가 초라한 추락을 면한 것은 곁에서 보고 있던 천마가 얼른 잡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천마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한 문평은 신음조차 못 지르고 하얗게 자지러졌다.

“하여간, 이놈의 망할 똥고집.”

아득하게 멀리서 누군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문평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쓸 정신이 아니었다. 이대로 영원히 꼽추가 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등이 아파서, 헐떡거리며 아픔을 참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못 했다.

천마는 그런 문평의 어깨를 감싸 안고 객잔으로 향했다. 일행의 숙소를 마련하기 위해 객잔 주인과 흥정을 하고 있던 백우경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 사람의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제가 좀 살펴봐야겠습니다. 점소이에게 일러 제 방으로 뜨거운 물을 좀 날라 달라고 청해 주십시오.”

“그런……. 알겠습니다. 금방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문평을 바라본 백우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더니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천마는 문평을 부축해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면서도 한쪽 손으로 등을 추궁과혈 해 줬지만 별 효험이 없는 모양이다.

커다란 들통과 뜨거운 물은 빠르게 준비되었다. 백우경이 넉넉하게 웃돈을 찔러준 모양인지 2층까지 물을 나르면서도 점소이의 태도는 싹싹하기 그지없었다.

천마는 점소이를 내보내고 문평의 옷을 벗겼다. 다리부터 천천히 뜨거운 물에 집어넣자 문평이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런 미련한 것. 고생을 사서 하는 게 취미더냐?”

천마는 용서 없이 문평의 몸을 뜨거운 물 안에 완전히 밀어 넣었다. 덕분에 그는 턱 끝까지 물에 잠기고 말았다. 뜨거운 물에 전신을 담그자, 근육통으로 잔뜩 굳어 있던 몸이 그제야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한다.

문평은 들통의 가장자리를 손으로 잡으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아직 등을 펴지는 못하겠지만 통증이 훨씬 줄어들었다. 화기에 약한 등의 상처가 붉게 달아오르고 있어도, 그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천마는 옷을 벗고 역용을 풀었다. 언제부턴가 단둘이 있으면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버릇된 터라 망설임은 없었다. 대신 문은 단단히 잠갔고, 창문도 닫아걸었다. 기막도 넓게 펼쳐 놓았으니 누가 찾아오면 사전에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추궁과혈을 해줄 테니 등을 내밀어라.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엎드리면 된다.”

천마는 본인도 들통 안으로 들어가며 문평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통 안에 그까지 들어가자 바닥으로 물이 넘쳐흘렀다. 추궁과혈 해준다는 소리가 못내 반가웠는지 문평은 불평 한마디 안 하고 엉덩이를 움직인다.

문평은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가장자리를 붙들고 머리를 숙여 등을 둥글게 굽혔다. 천마는 양다리를 벌려 다리 사이에 문평을 앉히고 등을 문질러 주기 시작했다. 압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그의 손가락이 굳은 근육과 뒤틀린 기혈을 강하게 어루만졌다.

그의 손이 등을 누를 때마다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조금 전과 같은 끔찍한 고통이 아니라, 무언가가 해소되는 것 같은 시원한 통증이다.

“아흑. 아흐흐흑.”

누가 들으면 정사 중이라고 착각할 만한 신음이 문평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기가 듣기에도 낯이 뜨거워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했지만, 천마의 손이 닿을 때마다 그의 결심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천마는 척추를 따라 등 전체를 문질렀다. 단순한 추나推拏4)가 아니라 손가락 자체에 내기를 불어 넣고 타혈駝穴까지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손길은 정말로 효과적이었다.

일각이 지나지 않아 등 전체가 화끈화끈해졌다. 딱딱하게 굳었던 근육이 부드러워지고 통증이 느껴지던 부위에선 아픔이 사라진다. 뇌해혈腦海穴 바로 아래부터 미룡혈尾龍穴까지, 그야말로 등 전체가 시원한 느낌이다.

문평은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살 것 같았다. 혼자서 이런 꼴을 당했다간 정말로 큰일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천마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챙겨 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중간에 도움이라도 받을 걸 그랬나?’

정신이 들고 보니 뒤늦은 후회가 마음 한편을 차지했다. 지금 같은 꼴을 보이느니 순순히 말을 듣는 편이 나았을 뻔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말을 듣지 않았다는 죄목까지 뒤집어쓰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저기, 감사합니다. 교주님.”

문평은 천마의 눈치를 보며 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하필이면 등 뒤에 있어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앞만 바라보고 있자니 뒤통수가 몹시 따끔따끔했다. 그렇다고 얼굴을 마주 보겠답시고 돌아앉을 자신도 없다.

문평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천마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문평의 허리께로 손을 내렸다.

“허, 헉? 교주님?”

천마의 팔에 의해 그의 허리가 상대의 배에 밀착되었다. 단단한 복근이 탁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의 등에 딱 달라붙었다. 아까부터 거북하기 짝이 없던 거대한 살덩이가 엉덩이를 짓누르는 데 망설임이 없다.

천마는 문평을 꼭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턱을 갖다 댔다. 두 사람의 사이에 비해 지나치게 친밀한 자세로 천마에게 끌어안기게 된 문평은 곁눈질로 천마를 살피며 그의 의중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은 모양이지?”

소름 끼치도록 낮은 목소리로 천마가 물었다. 안고 있는 자세는 연인의 그것인데, 목덜미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사뭇 위협적이다. 목 안쪽 깊은 곳에서 울림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는 맹수의 가르랑거림을 닮아 있었다.

“……예.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내가 미리 경고했을 텐데? 괜히 무리하다 탈 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이야.”

정확히 하자면, 괜히 무리하다 탈 나지 말라고만 했지 그렇게 되면 가만 안 둔다는 말은 안 했었다. 그러나 천마는 자신이 한 말을 미묘하게 바꾸며 문평을 윽박질렀다.

풍부한 색을 가진 그윽한 목소리가 가라앉을 듯 낮게 내리깔렸다. 목소리를 높인 것 못지않은 어마어마한 박력에 문평은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죄송합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문평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몸을 괴롭히고, 천마를 번거롭게 했으니 한 소리 듣는 것 정도야 그도 각오를 하고 있던 일이다.

“네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하나뿐이다. 네가 네 몸 하나는 제법 잘 지킨다는 것이지.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요즘 들어 그러한 장점을 부쩍 잊어버린 것 같더구나. 교에서 벗어나는 바람에 해이해진 것 같은데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랴? 자나 깨나 네 안위만 걱정하도록?”

“구,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으신데요.”

“네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내가 잔신경을 쓰지 않을 것 아니냐. 자기 몸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번번이 나동그라지는 놈을 무슨 수로 데리고 다녀? 고작 말을 달리는 것 하나로 빈사 상태라니, 무인이라는 이름이 아깝다.”

천마는 모든 일에 능숙한 사람이다. 개중에서도 제일 능숙하게 해내는 일이 남을 괴롭히는 일인데, 갈굼에 있어서는 거의 반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망도 못 가게 꽉 붙들어 놓고 귓전에서 조곤조곤, 밀어라도 속삭이는 투로 갈구어대니 듣는 입장에서는 식은땀만 흐른다. 심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조롱을 하는 것도 아닌데, 단지 그 어투가 지나치게 의미심장해 진땀이 나는 것이다.

그가 ‘정신 번쩍 들게 해주랴?’라고 물었을 때는 정말로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아 두려웠고, 무인이라는 이름이 아깝다고 빈정거릴 때는 정말로 무인으로서의 자괴감이 느껴졌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하다니. 확실히 천마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따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말이다. 천마는 습관인 양 혀를 차더니 문평의 턱을 잡고 그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인도대로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던 문평은 천마의 어둡게 잠긴 눈빛과 시선을 마주해야만 했다.

“똑똑히 들어라. 내가 해줄 수 없는 일을 바란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 능력 밖의 일이니 네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이뤄주지 못하겠지.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굳이 아낄 마음이 없다. 그러니 앞으론 내 앞에서 염치를 찾지 마라. 겨우 너 하나가 내게 부담이 될 수는 없다.”

천마는 경고라도 하듯 서리서리 얼음이 어는 듯한 어투로 차갑게 주문했다. 엄중하기까지 한 그 충고에 문평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남에게 의지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그는 천마가 무슨 의도로 말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지금 천마가 한 말은, 얼핏 들으면 꼭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주겠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무엇이든지, 아끼는 것도 가리는 것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문평은 천마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부쩍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이런 말이 오고 갈 정도로 진전이 되지 않았다.

문평은 그저 무생교의 일이 끝날 때까지만, 그러니까 천마가 이 모든 혼란을 종식하고 자신의 신변을 안전하게 만들어 줄 때까지만 그와 함께 있을 생각이었다. 그런 문평에게 지금과 같은 천마의 배려는 지나치게 어색하고 무거웠다. 문평은 천마에게서 이런 약속을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문평은 자신이 천마에게 요구한 것이 많을수록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설사 천마가 아무런 사심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빚이다. 그가 홀가분하게 천마를 떠나고 싶다면 더 이상은 아무것도 받아서는 안 된다.

그 사실을 알기에 문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마는, 대답 없는 문평의 눈동자에 떠오른 한줄기 고집을 엿보고, 그의 대답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차렸다.

‘그래. 내게 함부로 도움을 받는 것도 무섭단 말이지? 그 도움이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은 너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니까?’

맹랑한 놈. 천마는 입가로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꿈 한 번 참으로 야무지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걸 보고도 모르는 건가?

천마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문평을 잡을 생각이었다. 남의 마음을 홀랑 가져가 버린 주제에 감히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 이놈은 어쩌면 이렇게 배짱이 큰지 모르겠다.

“눈빛이 좋구나. 누가 이기나 정녕 한번 해보고 싶은 게냐?”

천마는 문평의 턱을 잡고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그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문평의 눈빛이 흔들림을 이기지 못하고 가늘게 떨린다. 천마는 진하게 웃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에게 던져진 도전을 피해 본 적이 없었다.

“네가 정 그렇다면 어디 한번 해보자꾸나.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음기까지 가득 머금은 목소리가 선언처럼 들렸다. 차마 말을 못 하고 머뭇거리는 입술이 천마에게 뒤덮인다. 짧고 강렬한 입맞춤. 문평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은 천마가 물기 가득한 뺨에 흰 미소를 띠었다.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가 머물렀다. 하지만 그 미소는 문평에게 있어 또 다른 위협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또 감당 못 할 일을 저지른 것 같아 문평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건성으로나마 대답을 할 걸 그랬다. 순간을 모면하기라도 했으면 이런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진심으로 부딪혀 오는 상대에게 거짓을 말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상대가 설사 천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

한입 베어 먹은 만두처럼 어중간하게 부푼 반달이 창공에 떠올랐다.

사람들을 피해 객잔의 지붕 위로 올라선 파면객은 모처럼 죽립을 벗고, 차가운 바깥바람에 맨얼굴을 드러냈다. 아직 밤이면 쌀쌀한 기운이 맴도는 봄의 중엽. 건물의 지붕 위에 올라앉아 있으니 제법 바람이 차다.

하지만 파면객은 지붕에 등을 누인 채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옆구리엔 벗 삼아 가지고 올라온 화주 한 병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분명히 그 사람은 윤 대협이 아니다. 진짜 윤 대협과 눈빛까지 완전히 똑같지만, 같은 사람이 아니야.’

파면객은 잔도 없이 술병에 입을 대고 마시며,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요즘 들어 그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줄곧 신변을 의탁하고 있는 윤승효에게 이변이 생겼음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 저 아래에서 본인이 윤승효인 척을 하고 있는 사내는 절대로 윤승효가 아니었다. 기가 막힐 만큼 감쪽같은 역용술로 감추고 있긴 하지만, 그 사람과 윤승효는 근본적인 기질이 너무나도 달랐다.

여느 사람이었으면 그 차이를 알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면객은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정교한 역용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그런 자에게 얼굴을 빼앗겼던 과거가 있기에, 그는 더욱 그러한 일에 민감했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구지? 진짜 윤 대협은 어디에 가 있는 것이고? 유람선에 타고 있을 때만 해도 분명 그 사람이었는데, 우향촌優香村으로 돌아온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내가 일행을 우향촌으로 이끌었다는 건 비선을 통해 연락한 윤 대협 본인밖에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우향촌으로 보낸 게 윤승효 자신이라는 이야기가 돼.

설마하니 두 사람은 예전부터 한사람 행세를 하고 있었던 건가?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서? 하지만 이전까진 다른 사람이 그 사람 행세를 하는 걸 본 적은 없었다. 자세한 이유를 알았으면 좋겠는데. 의심을 버릴 수 없으니 무슨 일을 하더라도 두 번 생각하게 된다.’

씁쓸한 화주가 독처럼 목을 태우며 뱃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파면객은 조용히 입매를 닦으며 어둠 속에서 형형히 눈을 빛냈다.

예전에 역용의 고수를 만났을 때, 그는 인생 자체가 뒤바뀌는 경험을 했다. 용모를 훼손당했고, 거의 죽기 직전에 이를 만큼 심하게 다쳤다. 그가 그때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우연찮게도 그를 구한 사람이 곤륜성모였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파면객은 20여 년 전의 그날, 길에서 객사하고 말았을 터였다.

파면객에겐 그로 인한 뼈저린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진짜의 안위에 대한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드러나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본인도 알고 있는 일 같아 보이지만, 세상에는 만에 하나라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일방적으로 얼굴을 빼앗기고, 눈앞에서 자신인 양 돌아다니는 원수를 보면서도 인내해야 하는 거짓말 같은 상황도 있지 않은가. 얼굴뿐만 아니라 신분과 인생, 사람들까지 모조리 잃어버린 자신 같은 예도 있는데, 그와 비슷한 경우가 또 없으리라고는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그는 아버지의 사문을 방문하기 위해 청해靑海를 여행하다 예기치 못한 공격을 받았다. 악의가 느껴질 정도로 집요하게 용모를 훼손당하고, 심지어는 단전까지 파훼가 되었던 그는 산속에 홀로 내던져져 죽음을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잔인한 상대는 그를 단번에 죽이지도 않았다. 영문 모를 고통과 경악 속에서 죽어가기를 바라는 듯 인적없는 야산에 산 채로 버려 놓았다.

다행히 약초를 채집하고 있던 곤륜성모를 만나 목숨은 구했지만 건강을 되찾는 데는 반년, 잃어버린 무공을 되찾는 데는 꼬박 3년이 걸렸다. 그의 정체도 모르면서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었던 곤륜성모가 없었다면 그조차도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적은 그의 자리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용모를 잃고 목소리까지 잃은 그가 스스로를 증명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어머니까지도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파면객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파면객은 적이 왜 하필이면 자신을 선택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전도가 유망한 신분이긴 했지만, 강호 전체를 털어 보면 그 못지않은 신분의 사람들도 적지 않다. 오늘날 그의 이름이 천하를 위진시키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그의 신분을 빼앗은 사람이 그럴 만한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지 그의 신분이 잘나서가 아니었다.

20년 전의 그는 정말로 별것 아닌 애송이에 불과했다. 집안이 좀 잘 살고, 인물이 좀 빼어날 뿐인 그저 그런 애송이. 또래에 비해 무재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그의 신분을 빼앗은 사람의 무공은 그조차도 무색하게 만들었다.

‘일단 상부에 전서를 날려보긴 했으니 기다려 봐야겠지. 혹여나 뜻이 있어서 꾸민 일이라면 섣불리 방해하기도 어려우니까. 하지만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캐봐야 한다. 윤 대협에게 이제껏 받아 온 은혜가 있으니 그 정도 보답은 해야 마땅하겠지.’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의 각오는 벌써부터 단단히 매듭지어졌다. 어쩌면 이제껏 몸을 담고 있던 하오문조차도 그를 배신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 불의가 있는데도 모르는 척하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도 종종 한탄하셨듯, 무모한 싸움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는 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천성이었다.

반짝. 반짝.

술병을 기울이며 무심히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파면객의 눈에 이채로운 장면이 뜨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객잔을 마주 보고 있는 골목 마지막 집의 창문에서, 묘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은 규칙적인 박자로 드러났다 줄어들었다 하고 있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하는 바람에 그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파면객은 한참 후에야 그것이 하오문에서 사용하는 암호라는 사실을 읽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얼큰하니 달아오르던 취기가 싹 가신다. 누군진 몰라도 하오문에서 온 누군가가 그와 대면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파면객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며 죽립을 도로 쓰고, 이웃의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고양이처럼 사뿐한 신법으로 소리도 없이 착지한 그는 신호가 오고 있는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에 검은 옷을 입고 달리는 그는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신묘하기 짝이 없는 신법은, 곤륜파의 절기 중 하나인 신행미종보神行迷踪步였다.

하오문의 행사는 늘 은밀한 법이다. 섣불리 정문으로 다가설 마음이 없었던 파면객은 그 집의 지붕을 넘어 뒷문으로 들어섰다.

그가 정해진 격식대로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화답하는 구호가 들려온다. 파면객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폈다 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호롱불 하나만을 밝혀 둔 어두운 방 안에는 한 사람의 인영이 앉아 있었다. 왜소한 체구에 등이 구부정한 중년의 사내다. 몸이 편치 않은 듯 병색 짙은 얼굴을 한 남자가 파면객을 올려다보았다. 파면객은 정해진 수화로 그런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우물이 깊으면 물도 맑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깊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 제가 부른 것이 맞습니다.]

정확한 대답이 상대에게서 들려왔다. 파면객은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 병색이 짙은 사내는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얇은 입술을 열어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입니다. 파면객. 본의 아니게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지요?”

깜짝 놀란 파면객이 그를 돌아보았다. 왜소한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윤승효의 것이었다. 윤승효를 흉내 내는 가짜가 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진짜 윤승효가 분명했다.

[설마 인호人狐이십니까?]

천면인호千面人狐. 그것은 비밀에 싸인 윤승효의 또 다른 신분을 지칭하는 말이다. 대외적으로 화협 혹은 화괴라고 불리고 있는 그는, 본디 별호는 알려져 있으나 그 본색은 가려진 신비인 천면인호이기도 했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지만, 당대의 하오문주는 천면인호라는 별호를 대를 이어 쓰고 있다. 천면인호는 이름 그대로 누구도 본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알려진 역용의 고수인데, 대외적인 신분과 비밀 신분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는 윤승효에게 참으로 걸맞은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파면객이 여전히 조직에서 사용하는 수화를 이용해 질문을 던지자, 윤승효가 빙그레 웃으며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우두둑 우둑 우두둑.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기음이 울려 퍼지면서 굽었던 등허리가 곧게 펴졌다. 창백했던 안색에 혈색이 돌아오고 보잘것없던 외모가 준수해진다.

얼마 되지 않아 윤승효는 본모습을 되찾았다. 진면목이었다면 입었을 리 없는 초라한 의복만이 좀전의 모습을 기억나게 할 뿐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원래는 금방 돌아오려고 했던 길인데, 어쩌다 보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찾으러 가셨던 분은 어떻게 됐습니까? 찾으셨습니까?]

“그게……. 중간에 일이 꼬여서 놓치고 말았습니다. 엉뚱한 일에 휘말려 딴짓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종적을 찾을 수 없더군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날렸지요.”

준수한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담으며 윤승효가 멋쩍어했다. 짐짓 대수롭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검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보아 속으로는 대단히 실망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가 유달리 정이 많고 미련이 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파면객은 뭐라 위로할 말이 없었다.

“보내 주신 전서는 어제 받았습니다. 설명도 없이 움직인 저 때문에 걱정이 많으셨던 모양이더군요. 제가 대답이 없으면 근심이 더 커지실 것 같아 서둘러 왔습니다. ……한데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비우는 것을 알리고서 오신 건 아니시지요?”

[네. 아무도 모르게 왔습니다. 하오문의 일이 항상 비밀을 요한다는 건 저 역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다행이고요.”

대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파면객의 대답을 들은 윤승효는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파면객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가 권하는 대로 탁자에 마주 앉았다. 거친 옷이 불편한 듯 어깨를 슬쩍 긁으며, 윤승효가 입을 열었다.

“믿을 만한 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지금부터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디 남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사안이 매우 시급합니다.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숨기는 것 없이 드러낼 터이니, 비록 놀랍더라도 말을 막지 마시고 끝까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늘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던 사람이 전에 없이 심각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파면객은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윤승효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정말로 중차대한 일이 발생한 거다. 어지간한 사안도 농담처럼 다루는 사람이 저렇게까지 정색을 하는 것은 진정 보기 드문 일이었다.

“먼저, 궁금해하셨던 일에 대한 답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백우경 일행 속에서 저인 양 행세하고 계시는 분은 다름 아닌 천마天魔이십니다. 예. 그 천마가 맞습니다. 천하제일인이자 마교의 교주인 천마 혁련상 말입니다.”

파면객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설마하니 그가 천마였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토록 완벽한 역용술을 가진 것도 말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존재가 왜 하필이면 윤승효의 모습을 빌리고 있는 것일까? 권문세가 출신인 윤승효는 어떻게 그런 자를 알고 있고?

궁금해할 파면객을 위해 윤승효는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외할아버지인 서평왕이 옥문관玉門關 바깥으로 떠밀려 갔을 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친분이 생겼다는 것. 윤승효 본인도 어렸을 때부터 천마를 알고 지냈고, 그에게 무공을 사사하거나 무리를 해석 받은 적도 있다는 것. 외조부와 천마가 의형제 간이니 그는 천마에게 의손에 가깝다는 점까지 모조리 설명했다.

파면객은 잠자코 앉아서 윤승효의 설명을 들었다. 원래도 표정을 알아보기 힘든 얼굴에 죽립까지 뒤집어쓰고 있으니,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분이 지금 저의 모습을 하고 정도맹과 합류하고 있는 것은 마교의 반도를 쫓기 위함입니다. 지금 기린패를 훔쳐내 천하를 경동시키고 있는 무리들은, 마교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쫓겨난 잔당들이 분명하거든요. 그들은 20여 년 전에 시도한 일을 이번에야말로 완성시키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분의 도움이 있다면 저들을 잡는 것이 훨씬 쉬워질 것이기에 저도 신분을 빌려드리는 데 동의했습니다. 감히 그분에게 대적하려는 야망을 품은 자의 계획을, 그분 없이 상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요.”

저간의 깊은 사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모든 사연을 설명해 주려고 하니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입을 대지 않을 수 없었다. 혹여나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중요한 부분을 고스란히 설명한 윤승효는 잠시 숨을 돌렸다.

파면객은 무릎 위에 손을 얹고 돌덩이처럼 앉아 있었다. 비록 신분을 숨기고 있기는 하지만, 정파 출신이 분명한 그에게 이런 이야기는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윤승효는 사정을 낙관적으로 보았다. 아직 그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많고도 많았다. 남은 이야기까지 모조리 다 듣고 난다면, 그는 대의를 위해서라도 이 일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우선 제게 있었던 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묘랑이 저에 대한 오해를 하고 유람선에서 내린 이후, 저는 그 아이의 종적을 쫓아 동정호반에 내렸습니다. 그 아이는 원래 환희루 출신인데, 환희루는 강호상에 이름만 무성할 뿐 그 실체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나무는 숲에 숨긴다는 이론을 충실히 따라 겉으로는 일반적인 기루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기억해 낸 저는 제일 가까운 기루를 찾았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아이라면 가장 먼저 집부터 떠올릴 테니까요.”

그렇게 환락가를 찾아간 윤승효는 그곳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정확히는 만난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상대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여천동汝天瞳. 강호상에서는 흔히 사혼잔마死魂殘魔라고 불리는 악명 높은 사도 고수였다. 그는 전대의 사람으로, 죽은 시체를 산 사람처럼 부리는 사악한 술법에 능통했는데, 고루문 일파의 강시기공을 제멋대로 변형시켜 산 사람의 살을 뜯어 먹고 내장을 파헤치는 괴물까지 만들어 냈다.

그는 그 괴물을 이용해 피에 대한 욕구를 채우며 강호를 휘젓고 다녔다. 심지어는 작은 마을 하나를 통째로 가둬놓고, 마을 사람들의 시신을 일으켜 죽은 사람의 손으로 제 이웃과 가족들을 도살하게 하는 잔인무도한 혈겁을 일으켜 강호의 공분을 샀고, 그 죄로 무림공적이 되었다. 파면객이 알기로 그는 현재 흑마옥黑魔獄에 갇혀 있어야 했다.

정도맹이 사악한 사파의 거두나 무림 공적들을 가두곤 하는 흑마옥은 한 번 떨어지면 두 번 다시는 기어 나올 수 없다고 알려진 끔찍한 감옥이다. 무저갱처럼 깊은 굴속이라는 말도 있고, 해남 바깥의 혹독한 섬이라는 소문도 존재한다.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한 번 그 안에 잡혀갔던 사람이 다시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것으로 보아 난다 긴다 하는 고수들에게조차 탈출하기 어려운 장소임이 분명했다.

한데 여천동은 흑마옥으로 잡혀 들어간 지 10여 년이 지난 현재, 버젓이 바깥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독으로 인해 새까매진 손톱을 보고 그의 정체를 알아챈 윤승효는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어린 기녀를 끌어안으며 술집으로 들어가는 그는 어느 한 군데도 상한 구석이 없이 멀쩡했다. 죽기 직전의 까마귀 같은 안색도 그대로였고, 무공도 멀쩡히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윤승효는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 근래에 흑마옥에 관련된 미심쩍은 사건이 눈에 띄곤 했기 때문에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사명감에 여천동의 뒤를 쫓기 시작한 윤승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흑마옥에서 풀려나온 무림공적은 여천동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잔혹한 채양보음의 수법으로 숱한 젊은 고수들을 말려 죽인 철마희鐵魔姬 기일화紀一花도 밖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지나가다 옷자락이 스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 없는 중소 문파 하나를 혈겁으로 몰아넣은 혼세독각混世獨脚 강자류强子劉도 나와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생교라는 집단에 몸을 담고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곳에서 일종의 금제를 당하고 있는 듯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윤승효는 강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 흑마옥에서 흘러나온 죄인들이 하나같이 같은 집단에 몸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흘려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흑마옥은 정도맹의 엄중한 감시 속에 있어야 하는 장소다. 두 번 다시 강호로 나와서는 안 되는 죄인들이 버젓이 제 발로 활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윤승효는 정도맹 내의 누군가가 이 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임이 분명했다.

포기를 모르는 그는 자신이 잡은 단서를 믿고 추적을 계속해 나갔다. 적들의 심장부 깊숙이까지 들어간 것이기에 외부와는 제대로 된 연락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제가 그곳에서 찾아낸 사실은 정말이지 놀라웠습니다. 당금의 강호를 뒤흔들고 있는 많은 일들, 즉 무생교에서 만든 생강시와 혈안자들과 기린패에 대한 소문 전체를 포함한 그 모든 일을 꾸민 것이 바로 정파였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이 일들은 모두 정파의 수뇌부들이 만들어 낸 자작극입니다. 심지어는 제갈세가에서 잃어버렸다는 기린패조차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빼돌린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정파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흉악무도한 사파의 무리들도 하지 않는 짓을요.]

“아무래도 천마 그분의 존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천마께서 얼마 전에 반로환동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요? 그 일이 정도맹에 결정적인 자극이 된 것 같습니다. 천마께서 노쇠해 계실 때는 그저 기다리고만 있었지만, 그분의 세월이 거슬러 흐르기 시작하자 더는 참지 못했던 겁니다.

한 사람이 천하제일의 자리에 오른 지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자부심 강한 그들이 오로지 한 사람에게 눌려 있던 세월이 그만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을 겁니다. 나름대로는 후대를 지키기 위한 필사의 수단이라고 여겼겠죠.”

파면객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이야기라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귀가 맞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그들이 벌인 일은 하루 이틀의 준비로 되는 일이 아닌데, 고작해야 작년 봄에 일어난 천마의 반로환동이 계기였다고 하면 시기가 맞지 않는 셈이다. 그런 그의 의문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윤승효가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다시 말해 이런 겁니다. 누군가 이번 일을 하기 위해 물밑 작업을 벌인 이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언제든 사건을 일으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죠. 천마의 반로환동은 그런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된 겁니다. 망설이던 정파를 설득해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그 사람의 진짜 정체는 천마께서 쫓고 계시는 마교의 반도겠지요. 그는 지금 분명히 정도맹 수뇌부 중의 누군가로 위장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럼 천마는,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도맹으로 온 겁니까?]

“아마도 지금쯤은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안에서 돌아가는 사정을 직접 보셨다면 짐작 가는 게 있으실 테니까요. 하지만 정도맹에 잠입하신 원래의 목적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본디는 좀 더 사소한 것이었죠. 당신의 혈육을 지켜주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세상에 남은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니 그럴 만도 한 일이지요.”

[혈육이라구요? 정도맹에 그 사람의 혈육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추측건대 조카가 아닐까 합니다. 아주 예전에, 남동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분의 성향상 본인께서 직접 자식을 생산할 가능성은 없으니, 핏줄이 있다면 동생의 핏줄이겠지요.”

천마가 남색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윤승효는 백우경의 정체를 거의 정확히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는 게 없던 파면객은 윤승효의 대답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하 마의 종주인 천마의 혈육이 무려 정도맹 내에 있었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전대의 비사에 머리가 아파진 파면객은 수화를 사용해 상대의 정체를 캐물었다.

[그게 누굽니까? 어떻게 천마의 혈육이 정도맹 내부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사람의 정체가 혹시 정파로 파견한 간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파면객이 물었다. 그의 직접적인 질문에 윤승효는 곤란한 듯 웃으며 볼을 긁었다.

나름 출생의 비밀이라면 출생의 비밀인데, 자신이 함부로 그에 대해 말을 해도 좋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다. 아무리 파면객이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고는 해도 비밀이란 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드러날 위험이 커지기 마련이다.

“저도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천마께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내키지 않아 하시고, 전대의 사정을 캐보려고 해도 강호의 비사인지라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어 접근하기도 곤란하더군요.”

[어떤 비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이 마교의 간자가 아님을 윤 대협께서는 어떻게 장담하시겠습니까?]

“그건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본인은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거든요. 오래 지켜봐 왔는데 사람 자체는 무척 괜찮습니다. 천하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든 협객이고, 성정도 행동도 바르고 올곧아 다른 이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지요. 천마의 혈통 외엔 출신도 훌륭해서 그의 외가는 명문 중의 명문이고, 사문은 구대문파 중 하나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이제 와 정파를 배신할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마께서 그리 놔두지도 않으시겠지만 말입니다.”

천하의 협객. 외가가 정도의 명문. 게다가 사문은 구대문파라.

그 조건을 모두 맞추니 떠오르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파면객의 망가진 안면이 더없이 험상궂게 굳어 들었다. 꽉 움켜쥔 손등에서 핏기가 빠르게 빠져나간다.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윤승효가 예로 든 조건들이 너무도 확정적이다.

힘겹게 입술을 깨물고 있던 파면객은 좀처럼 열지 않는 입을 열어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다.

“천마의 혈육이라는 자 말입니다. 그 사람, 혹시 백우경 아닙니까?”

거칠게 갈라진 탁한 음성이 사람의 귀를 괴롭혔다. 인간의 목소리라고 하기보다는 쇠가 부딪치는 소리에 더 가까운 듣기 싫은 음성이다.

파면객이 상대를 정확하게 맞추자, 윤승효는 진심으로 곤란해지고 말았다. 딴에는 둘러 말한다고 한 건데 제시한 조건이 너무 정직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더듬지도 않고 저렇듯 정확히 짚어 낼까.

“확답해 드리기가 곤란하군요. 그 일은 제가 함부로 말할 계제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중요한 일입니다. 확답을 해주십시오.”

파면객은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었지만, 정확한 대답을 듣고 싶어 재차 물었다.

“백우경입니까?”

윤승효로서는 그가 왜 이렇게 천마의 혈육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 없어 심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직접 입까지 열며 연이어 몰아붙이는 파면객은 쉽사리 포기할 기색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윤승효는 파면객의 질문을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 사람이 바로 천마의 마지막 남은 혈육입니다.”

파면객은 평생 동안 궁금하게 여겨 왔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뜻밖의 장소에서 얻었다.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막혔던 둑이 무너지듯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해소되었다. 자신에게 그런 일을 저지른 자의 정체며 동기, 목적까지 전부 다 말이다. 그 사내는 마구잡이로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운 나쁘게 그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만을 겨냥한 이에게 노려진 것이다.

“그렇다면 알겠군요. 정도맹 내부에 있는 마교의 잔당이 누구인지. 백우경이 바로 그 잔당입니다. 지금 그의 행세를 하고 있는 사람은, 진짜 백우경이 아니니 말입니다.”

평소에 사용하는 수화나 필담 없이, 직접 입을 열어 말을 하는 파면객의 태도는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윤승효는 심상치 않은 그의 모습에 내심 긴장하며 그를 예리하게 주시했다.

깊이 눌러쓴 죽립 아래로 그의 입꼬리가 비틀어지는 것이 보였다.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근육의 뒤틀림이 험한 상처 위로 선명한 굴곡을 만들어 냈다.

“처음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윤 대협. 저의 진짜 이름은 백우경입니다. 20여 년 전, 뜻밖의 괴한에게 얼굴을 잃고 신분도 빼앗긴 멍청한 사내가 바로 저입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생긴 건지를 항상 궁금히 여겼는데 이제야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부터는 밤에 잠을 좀 더 편안히 잘 수 있겠군요.”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폭로에 윤승효는 아연해졌다.

‘백우경이라니? 정말 그렇게 말한 게 맞는가? 파면객이 사실은 진짜 백우경이었다고?’

서로 알고 지낸 세월이 십여 년이 넘었지만, 윤승효는 파면객이 그러한 사연을 감추고 있으리라곤 짐작도 하지 못했었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 시선으로 파면객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농담이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해 봤지만, 파면객은 그런 일로 농담을 하는 자가 아니었다.

‘이런 젠장. 그럼 정말로 이 사람이 백우경인 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우경에 대해서만큼은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던 윤승효가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트렸다. 백우경이 정말 곽효라면, 그는 본색을 완벽히 숨기고 있는 셈이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천마의 눈앞에서까지 스스로를 숨긴 것이니 말이다.

‘제길.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천마의 친혈육으로 위장하고 있다면 누구보다도 위험한 상대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잖아. 바로 천마의 감시를 말이야!!’

곽효는 그의 예상보다 더욱 비상한 인물이었다. 윤승효는 뒤늦은 전율에 몸을 떨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천마에게 숨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칫하면 방심하고 있다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는 일이니 미리 알려 드려야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천마의 눈앞으로 나서는 일은 썩 내키지 않았다. 그분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은 일은 일대로 치고 곧바로 줄행랑을 친 정신 나간 놈일 텐데,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분 앞에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영영 그분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살고 싶은 심정이다. 그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윤승효는 진실로 그 일을 행동에 옮겼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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