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장
천마의 대욕탕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용화소축의 욕탕도 상당히 공을 들여 꾸며 놓은 장소다.
돌 중에서 가장 단단한 돌이라는 청석으로 바닥을 마감하고, 욕조는 향기 좋은 삼나무로 짜 넣었다. 욕조의 가장자리 위에 놓인 옥곽 안에는 솜씨 좋은 시비들이 정성 들여 갈아 낸 홍화씨와 살구씨 가루가 들어 있다.
문평으로서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천마의 욕탕보단 이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워낙에 단아하고 아늑한 느낌이다 보니 절로 마음이 푸근해졌다.
등에 화상을 입은 후, 욕탕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은 등의 상처에 물이 닿지 않게 하려고 물수건으로 몸을 닦는 정도에 그쳤었는데, 오늘은 천마가 저지른 화려한 복수 때문에 얄짤없이 수욕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물에는 들어갈 수 없는 처지라 욕탕 밖에서 물을 길어 몸을 씻어 냈다. 그가 물을 뿌려 씻어 낼 때마다,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계살귀의 흔적들이 수챗구멍 밖으로 흘러나갔다.
한 사람의 최후가 이렇게 허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 강호가 갖는 비정함이다. 하지만 문평은 계살귀의 그러한 운명이 하나도 가엾지 않았다. 그 하나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천마가 말한 것처럼, 그의 죽음이 겨우 한 번으로 끝났다는 게 억울할 지경이다.
태어나서 이렇듯 겁을 먹어 본 적은 처음이었을 정도로 끔찍한 경험이었으나, 의외로 몸에 남은 외상은 많지 않았다. 눈에 띄는 상처라곤 계살귀가 손톱으로 꼬집어 피를 낸 젖꼭지 한쪽과 아직도 붓기가 가시지 않은 고환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문평의 기분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강호에선 약하다는 것이 곧 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처참하게 유린당하고 나니 그저 한숨만 나온다.
‘정말 실력을 키워야겠군.’
문평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스스로의 실력이 별 볼 일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제껏 그 사실을 이토록 뼈저리게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실력인 상황에선 실력이 낮다 한들 그다지 눈에 띄지 않게 마련이다. 같은 하급 무사들 사이에서 살고 있을 땐 문평도 그랬다. 스스로를 하급 무사라고 불러도 거기에 대해 별로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주위 사람들도 다 그런 데다, 목숨이 오갈 만큼 위험한 상황을 겪을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일단 중원으로 나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현재 중원은 서서히 태풍우가 칠 준비 중이었고, 문평은 그 한가운데에 대책 없이 휘말린 상태였다.
그는 나오자마자 연이어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솔직히 말해 그 혼자만 있었으면 이미 예전에 비명횡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일을 당할 때마다 그때그때 도와준 사람들이 있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긴 했지만, 그게 얼마나 아슬아슬한 고비였는지는 누구보다도 문평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사람은 언젠가는 혼자가 되는 법이다.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구하지 못한다면, 그게 단 한 번의 위기라 하더라도 두 번 다시 결과를 되돌릴 수 없게 된다.
결국 최후에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뿐이다. 스스로의 실력을 상승시켜 놓지 않으면 조만간 낭패를 보게 될 게 뻔했다.
‘……하지만 이제 와 어떻게 실력을 높이지?’
강해져야 할 필요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문제는 능력과 소망이 항상 일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문평은 실력을 높이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는지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솔직히 말해 나이 서른이 넘은 일반 무사가 뒤늦게 상승 고수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전설 속에 나오는 만년화리萬年火鯉 같은 엄청난 영물의 내단을 구하거나, 전대의 절대 고수가 남긴 비급을 수습하든가 하는 수준의 기연을 만나지 않는다면 평생 고만고만하게 썩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 무사의 입장이다.
그는 믿고 의지할 스승도 없고, 기댈 만한 사문도 없다. 본의 아니게 고수급 몇몇과 안면을 트긴 했지만 다짜고짜 무공을 사사해 달라고 조를 수 있을 정도의 친분은 없다.
‘뭐? 천마? 하!’
그 사람이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의 전형이다. 천하제일인이면 뭐 하고 마교 제일의 고수면 뭘 하는가. 무공을 가르쳐 준다면서 실은 채양보양술 따위나 가르치는 색골 늙은이인데 말이다.
‘채음보양도 아니고 채양보양이 뭐야 채양보양이. 세상에 그런 무공이 어디 있다고? 만일 그런 무공이 정말로 있다면, 보나 마나 스스로 만들어 낸 걸 거야. 그 인간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해괴한 무공을 창안하겠어?’
채양보양의 충격은 아직도 문평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천마에게 심법을 사사한다는 생각에 기쁘게 수련했던 며칠이 있기에 그 배신감은 더욱 컸다.
문평에게 천마에 대해 갖고 있던 존경심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그의 인간성 때문이 아니라 그의 무공 때문이다. 아무리 천마가 문평의 마음속에서 까이고 씹혀도, 천하 마의 조종이라는 그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마교의 천마 숭배 사상에도 영향을 받은 데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무위에도 감명을 받는다. 인간적으로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지만 그의 무공에 대해서만큼은 문평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천마의 무공은 문평이 천마에게 경외감을 품고 있는 유일한 요소이기도 했다.
절대 고수들 사이에도 등급은 있다. 화경이니 현경이니 하는 무위 수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크게 종사宗師와 대종사大宗師로 나뉘는 무학의 깊이에 따른 등급을 말한다.
강호상에 일대의 종사라는 말은 자주 쓰인다. 이는 자신이 가진 무공의 극의를 보거나, 스스로가 택한 무기의 끝을 본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구대문파라면 한 대에 한두 번, 오대세가라면 서너 대에 한 번은 꼭 나오는 것이 이 일대의 종사다. 이는 자신의 힘으로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는 수준이라 일컫기도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중소 문파의 경우 대부분 개파 시조들이 일대 종사다.
하지만 대종사라는 말은 그리 함부로 사용되는 게 아니다. 대종사란 소림少林의 달마達磨나, 무당武當의 장삼봉張三峰 정도 되는 존재를 부를 때만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무학의 기초를 새로이 하거나, 자신만의 기풍을 가진 무학 이론을 정립하는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들을 수 있는 호칭이니, 무림인이라면 그 이름을 함부로 일컫지도 않고 낮추어 말하지도 않는다.
당금의 천마인 혁련상 역시 대종사의 칭호를 받고 있다. 마교가 오랜 세월 동안 잃어버렸던 천마지공을 새로이 창안하고, 천 년간 무림의 한 축을 이루었던 마도 무공의 재정립을 혼자 손으로 이뤄냈기 때문이다.
옛것을 보조할 순 있어도 새것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통용되는 현 강호에서,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무공을 창안하는 경지에 이른 유일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무려 무공에 대한 일을 가지고 자신을 놀렸으니 문평이 입은 상처는 상당했다. 이건 마치 존경하는 대학자에게 수학을 하러 간 서생이 야담집野談集을 교재로 강학 받은 것과 같은 일이지 않은가.
무사에겐 죽음은 줄 수 있어도 수치를 주는 법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 사람에게는 문평을 가지고 노는 것 자체가 인생의 낙인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은근히 화가 났다. 자신에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심각하기 짝이 없는 상황인데도, 그 사람은 그걸 가지고 약이나 올리고 있다.
천마가 자신에게 한 짓이 물에 빠진 사람한테 막대기를 줬다 뺐다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세상에는 장난을 칠 게 있고 쳐서는 안 될 게 있는데, 아무리 봐도 천마는 그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고 사는 것 같았다.
문평은 살구씨 가루를 넣은 삼베를 잔뜩 움켜쥐고 박박 팔을 문질렀다. 생각을 해봐야 뭐 하나 싶다. 용기를 내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해도, 그러면 제일 먼저 침상에 누우라고 할 사람이다. 채양보양 같은 괴상하기 짝이 없는 무공을 창안해 던져 주면서 생색이란 생색은 있는 대로 다 내면서.
처음엔 차분하게 시작되었던 상념인데 뒤로 가면 갈수록 천마에 대한 지탄이 되었다. 언덕 아래로 굴러가는 마차처럼 시간이 갈수록 가속도가 붙는 분기憤氣에 점차 고조되어 가던 문평은, 마구잡이로 헤쳐져 있던 생각의 갈피에서 문득 엉뚱한 사실을 발견할 때까지 끊임없이 천마를 욕하고 또 욕했다.
‘그런데, 잠깐? 방금 뭐라고 했지? 그 사람이 직접 창안한 무공이라고?’
그러나 어느 순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홍수처럼 쏟아지던 생각들조차 멈출 수밖에 없는 강력한 무언가가 예기치 못하게 발목을 낚아챈다. 문평은 때를 밀다 말고 머릿속을 더듬어 봤다. 뭐가 자신의 발목을 잡았는지 그 정체를 알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채양보양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 자체에 기겁했던 문평이다. 그는 그 단어에 지나치게 학을 뗀 나머지, 더는 깊이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그저 세상에 그런 황당한 무공이 어디 있냐고, 그런 게 진짜로 있으면 그가 직접 만들었을 거라며 치부하고 화를 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와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만 여길 게 아니었다.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생각의 방향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천마가 직접 만든 무공이라면 어지간한 고수가 만든 무공보다 차라리 낫지 않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대종사’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직접 만들었다는데 말이다.
시야를 바꾼 것만으로 상황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같은 쇠로 칼을 만들어도 명공이 만드는 것과 도제가 만드는 것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무공이야 오죽하겠는가.
시작부터 끝까지 정연하게 이어지는 무학의 논리가 있을 것이고 이론 체계 역시 완벽할 것이다. 비록 천마지공 같은 지고한 절학은 아닐지라도 나름 자부할 만한 무공으로 완성되었을 텐데, 이전에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던 문평이었다.
‘장난삼아 만들었다고 대충 만들었을 천마가 아니지 않은가. 천마의 성격대로라면, 장난이라 오히려 더욱 심혈을 기울였을 가능성도 있는 일이야. ……이거 알고 보면 진짜 엄청난 신공神功인 거 아니야? 그 인간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인데.’
천마 같은 사람이 남에게 던져 줄 정도라면 그건 그만큼 완성이 되었다는 소리다. 채양보양이라는 이야기에 지레 질색해 던져 버리고 말았지만, 천마가 직접 장담했을 정도라면 진짜로 효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채양보양술을 익히라는 건, 자기 내공을 나눠 주겠다는 뜻이기도 한 거잖아?’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니 그동안 모르고 있던 다른 사실에도 덩달아 생각이 미친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그 말은, 희한한 방식이긴 하지만 내력을 전수해 주겠다는 소리도 되었다.
무인이라면 친자식에게도 나눠 주지 않는 것이 내공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목숨을 나눠 주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소리니, 한 사람의 무인이 다른 무인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호의이기도 하다.
강호상에서 내공을 주고받는 것은 대개가 사승 간이나 혈연 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도 한쪽이 다 죽어가는 상황이 되어 어쩔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인데, 그런 대단한 일을 대수롭지도 않게 언급하니 문평이 그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들을 리 없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희대의 기연을 걷어찬 바보가 되는 건가?’
문평은 뒤늦게 속이 쓰린 것을 느끼며 씁쓸히 중얼거렸다. 알고 보니 천마가 제안했던 방법은 전대 고수의 비급과 만년화리의 내단이 동시에 떨어진 것과 같은 엄청난 기연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나은 기회였을는지도 모른다. 고수의 비급은 비의를 해독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고, 화리의 내단은 스스로가 담을 그릇이 부족하면 도리어 화가 될 수도 있다.
반면 천마라는 명사의 지도를 받으며 그가 창안한 무공으로 내공까지 급속도로 쌓을 수 있다는 것은, 태어나자마자 벌모세수伐毛洗髓를 받고 자질을 인정받아 자파 최고수의 적전 제자가 돼 그 무공을 전수하는 것과 다름없다. 아무런 위험 부담도 걱정할 것 없이 이미 닦아 놓은 길을 따라 달리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원래 놓친 고기가 더 커 보이는 법. 아무것도 모르는 채 넘어갔더라면 마음만은 편했으리라. 하나 한번 그 존재에 대해서 알고 나자 자꾸 신경 쓰였다. 기회도 잡을 줄 아는 사람만 잡는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하필이면 포장이 그따위라 딴에는 신경 써서 내밀었을 선물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내팽개쳤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자신이 한 제안의 진정한 의미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그가 천마의 눈에는 얼마나 미련해 보였을까?
문평은 새삼 안타까워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기회를 줘서 또 한 번 그때와 같은 제안을 한다면…… 물론 그 방법이 방법인 만큼 고민을 심하게 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일단 시간을 두고 생각은 해봤을 거였다. 그때처럼 두 번 다시 말도 못 꺼내게 매몰찬 거절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만시지탄晩時之歎. 이미 때는 늦었다.
천마는 한 번 지나간 기회를 다시 줄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문평은 한숨만 푹푹 쉬며 몸을 씻고 또 씻었다.
지나치게 때를 밀어 피부가 얼얼했다. 하지만 문평은 그런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의식조차 못 하고 있었다.
문평은 수욕 때문에 불그스름하게 열이 오른 피부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유효 기간이 지나도 한참 지난 일 때문에 뒤늦게 속이 쓰렸던 문평은 심란한 김에 지나치게 목욕에 열중했고, 현재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그동안 쌓인 때가 밀려 개운하긴 했지만 심력을 너무 소모해 피로하고 탈진했다. 이대로 침상에 오르면 그대로 쓰러져서 내일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죽은 듯이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상태로 보면 차라리 그러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이제 와 어쩔 수 없는 일로 골머리를 감싸 쥐는 것보다는 말이다.
“늦었군. 수욕물에 빠져 죽었나 했다.”
그러나 그러한 평범한 소원조차도 문평에겐 쉽지 않았다. 그의 방에는 예상치 못한 손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본연의 모습보다 더 친숙한 윤승효의 모습을 한 천마는, 마치 자신의 방인 양 태연하게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느긋하게 등을 기댄 모습이 매우 불량스러웠다.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게 되어 불만이 쌓인 모양이다.
“이 밤중에 어쩐 일이십니까?”
웬만하면 오늘 저녁만큼은 마주치지 않길 바랐던 상대와 딱 마주쳤다. 마음이 불편해진 문평은 시선을 돌리며 마지못한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세속에 많이 찌들긴 찌들었구나. 문평은 천마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천마와 관계를 가지면, 바로 저 윤승효의 모습과 맺어져야 한다. 천마 본인이라고 해도 망설여지는데, 하물며 저 얼굴이라니.
반쯤 기울었던 생각이 그 얼굴을 보자마자 번쩍 제자리로 돌아왔다. 자신이 여태껏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를 되새겨 보니 낯이 다 화끈해진다.
‘아서라 아서. 무슨 욕심이냐, 석문평. 몸을 팔아 내공을 얻겠다고? 네 주제에 가당키나 한 일이겠다.’
비록 실체조차 없는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더라도 문평의 마음속에 첫사랑의 의미는 실로 남다르다. 저 모습을 한 사람과 단지 이익만을 위해서 정사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문평은 뻔뻔하지 못했다.
어차피 못할 일이었는데 괜히 생각만 많았구나. 포기하고 나니 마음만은 편해진다.
“밤이 늦어도 붕대는 갈아야지. 요즘 좀 나았다고 관심이 소홀해졌구나. 모든 상처는 예후가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렇게 쉽게 방심을 해서야 어쩌겠느냐.”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임무라도 되는 것처럼, 천마는 극성스럽게 붕대 가는 것을 챙겼다. 나름대로는 신경을 써주는 일인지라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문평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옷 벗어라.”
그 말뜻은 물론 약 발라야 하니 옷 벗으라는 뜻이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엄한 고민에 몰두하고 있던 문평의 귀에는 그 말이 의미심장한 뜻으로 들렸다.
순간 당황스러워진 문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더듬거리는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목깃을 부여잡는다.
“뭐 하는 게냐? 옷 벗으라니까.”
아직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천마가 무심하게 재촉했다. 문평은 괜히 실수했다가 이 사람에게 트집이라도 잡히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고 있기에 두 번째 재촉을 듣자 하는 수 없이 옷을 벗었다.
수없이 보인 맨살인데도 새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웠다. 채양보양의 수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 봤다는 사실이 쓸데없는 자의식까지 함께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천만다행으로 천마는 그런 문평의 태도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옷 벗는 걸 싫어하는 건 늘 똑같았으니,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돌아선 문평의 등에 천마가 고약을 발라 나갔다.
‘이런 식으로만 가면 덧나지는 않겠군.’
험하게 흉이 졌지만 그거야 이미 어쩔 수 없는 거고, 다행히 아무는 속도가 양호해 예상보다는 빨리 낫겠다. 문평이 짐작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신경을 상처에 쏟고 있는 천마는 양호한 등의 상태에 마음이 누그러졌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 생긴 거라서, 내심 스스로의 책임처럼 느껴지는 상처다. 가능하면 빨리 낫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의 정성도 지극했다.
부드러운 손가락의 움직임은 실로 섬세했다. 곤륜성모가 직접 조제한 것이니 약의 효과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명약이라고 할 수 있는 고약은 좋은 재료를 써서 정성 들여 만들었기 때문에 효능은 물론이고 감촉조차 탁월했다. 하지만 그 감촉이 아무리 빼어나도 천마의 손이 주는 감각에는 비할 바 못 된다.
혹시나 자신 때문에 아플 것이 두렵기나 한 것처럼, 천마의 손가락은 거의 힘도 들이지 않고 세심하게 문평의 상처 위를 스쳐 갔다. 아직 화기가 다 빠지지 않아 예민하게 들떠 있는 피부인데 그 위를 거의 자극도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니 그 재주가 신기에 가까웠다.
있는 듯 마는 듯 공기처럼 가벼운 그 감촉에 등허리가 뻣뻣해진다. 더할 데 없이 부드러운 손가락 끝이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새끼 고양이가 등을 핥는 것처럼 간질간질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예민해진 감각이 그 손가락 끝을 물듯 쫓아다녔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피부가 움찔거렸다.
대놓고 과민한 문평의 반응을 천마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항상 몸을 빼는 것만 봐왔기 때문에, 천마는 이러한 문평의 반응을 오히려 반대로 해석했다.
“……안 잡아먹는다.”
험한 꼴을 당할 뻔하고 온 바람에 경계심이 강해졌구나. 그답지 않은 순진한 결론을 내린 천마는 터무니없는 오해 속에서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은 자신이 무슨 짐승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왜 하필 이럴 때만 경계를 하는 거냔 말이다. 여태껏 아무것도 안 하고도 잘만 있었는데 하필이면 왜 오늘 같은 날 발정하겠는가? 네놈이 다른 놈들한테 욕볼 뻔한 게 자극적이라서?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천마의 삐딱한 일침에 놀란 문평이 서둘러 오해를 정정했다.
‘그런 게 아니라니? 뭐가 그런 게 아닌데?’
문평의 서두른 반응 속에서 무언가 색다른 것을 읽어낸 천마가 고개를 기울이며 문평의 뒤통수를 살펴보았다.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여느 때와는 확연히 다른 기색이니 그리 추측할 만하다. 하지만 문평은 고개를 내저었다.
“없습니다.”
천마에게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했던 제안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장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어도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은 없다.
문평이 지금 예민해진 것은 그를 ‘상대’로 의식했던 잔재가 남아 있어서인데, 이것은 스스로 다스릴 일이지 천마에게 말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십시오. 웃어른이라면 가끔은 그런 아량을 보일 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문평은 간절하게 바랐다.
‘흐음. 이것 봐라……?’
천마는 한쪽 눈썹을 휘어 올리며 귓불까지 발갛게 물든 문평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천마에게 웃어른의 아량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여태까진 몰랐어도 지금까지 모르면 그가 어디 천마겠는가. 그는 문평의 상태가 보통 때와는 여실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홀로 눈을 빛냈다.
“이상하군. 내가 알기론 분명 있을 텐데?”
천마는 짐짓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문평의 속을 태웠다. 화들짝 놀란 문평이 황급히 천마의 질문을 부인한다. 말을 하면 할수록 녀석의 귀는 더욱 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 아뇨. 없습니다. 정말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럴 리가.”
“저, 정말입니다. 없다고 하는데 왜 이리 깊이 추궁하십니까?”
발뺌을 하다못해 지레 찔려 발칵 화까지 내는 문평을 천마는 느긋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느릿느릿 자신이 맘에 담아 두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낸다.
“우선 씻고 나면 이야기를 하자고 해놓고 이제 와 발뺌을 하니 하는 소리지. 네가 품었던 딴생각이야 어차피 다 들킨 일이다. 이제 와 숨겨봐야 네 죄가 덮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냥 순순히 털어놓지 그러느냐? 세상에는 정상 참작이라는 것도 있는 법인데 말이다.”
처음에 문평은 천마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참 만에야 간신히, 그가 낮의 일에 대한 정황을 묻는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엉뚱한 착각에 낯이 붉어졌다.
천마가 부러 노리고 한 짓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문평은, 그저 자신이 딴생각에 빠져 있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라고만 여기며 홀로 민망해했다.
“그, 그러니까 그 일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문평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서둘러 입을 여느라 처음에는 말을 더듬었지만, 요즘 들어 보고가 잦은 터라 이내 말투가 안정됐다. 그로서는 자신의 이상스러운 태도에 주목하는 것보다는 낮의 일에 집중해 주는 편이 더 고마운 일이었다.
말도 돌릴 겸 무안함도 해소할 겸 해서, 점점 열성적이 돼 가는 문평의 태도에 천마도 진지하게 경청한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일의 전말을 늘어놓고 보니 다시금 상황의 흉험함이 와 닿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직접 노려 설치된 함정이었다. 적들이 자옥도 아니고, 윤승효도 아니고 문평 자신을 노렸다는 것은 그들의 시야에 이미 자신까지 들어가 버렸다는 뜻이다. 이제는 그도 그들의 표적이다. 본의 아니게 그들의 행사를 방해하곤 했으니 억울하다고도 못 할 판국이다.
‘이제는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구나.’
문평은 자신이 더 이상 도망갈 수도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을 하면서야 깨달았다. 정도맹의 코앞까지 펼쳐진 적들의 눈과 귀다. 천마를 피하겠답시고 도주했다간, 그놈들의 손아귀에 고스란히 떨어지게 되고 말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 목숨을 건졌지만 다음까지 그럴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자기 자신의 몸속에 갇혀야 했던 기분 나쁜 기억을 떠올린 문평은 진저리를 치며 어깨를 움츠렸다. 살아서 그런 꼴은 두 번 다시 당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 것은 싫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 사방이 온통 가시밭길이다.
‘난 왜 항상 이런 꼴만 당하는 걸까.’
문평은 발 디딜 틈 하나 없는 미래를 내다보며 암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움치고 뛸 수도 없다. 천마의 그늘을 벗어났다간 바로 비명횡사일 텐데 어떻게 감히 도망갈 생각이나마 품겠는가.
“그들이 마교의 흑화를 이용하고 있었다고? 그게 사실이냐?”
“네. 그렇습니다. 분명 정확한 십파자의 표식이었습니다.”
한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천마는 문평과는 다른 논점에 주목했다. 귀두삼귀가 문평이 남긴 표식을 역이용해 그를 불러냈다는 소리를 들은 천마는, 그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박에 알아듣고 안색이 달라졌다.
‘적들에게 교의 흑화가 유출이 되었다는 소리로군. 곽효의 끄나풀이 아직 내부에 남아 있었던가? 그들이 흑화를 알고 있다면 정보를 교란하는 것 또한 어렵지는 않은 일일 것이다. 놈들에 대한 정보가 어떻게 그렇게 오리무중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
위태로운 상황일수록 냉정히 돌아가는 두뇌가 이 순간에도 빛을 발했다. 천마는 뜻밖의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달리 먹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마냥 교와의 연락을 끊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흑화 체계가 노출되었다는 것은 교의 정보망 전체가 드러난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가짜 정보로 인해 정보망이 교란된다면, 설사 비선이 유지되고 있더라도 그 혼란은 실로 극심할 터. 영의가 어리석지 않으니 상황을 눈치채고는 있겠지만, 자신 때문에 섣불리 대응하지도 못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녀석이 좀 더 대담했다면 자신을 신경 쓰지 않고 움직였겠지만, 영의 그놈은 지나치게 소심해 그런 수를 사용하지 못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자신이 그놈에게 맞추는 수밖에 없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그러나 이로 인해 마냥 천마 혼자만 손해를 본 것은 아니다. 일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천마도 곽효의 계획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 흐름을 전반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머리를 쓰긴 했는데, 너무 많이 쓰다 보니 단서까지 너무 많이 흘리고 말았다. 대부분은 밑에서 일하는 놈들이 칠칠치 못해서이고, 어떤 부분은 노골적으로 의도를 자랑했기 때문에 드러난 일이다.
천마는 머릿속으로 차곡차곡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같이 어울려 줬으니 이제는 그가 나설 차례였다. 싸움이라는 게 원래 치고받아야 공평한 것 아닌가. 너무 한쪽만 당해도 보는 사람이 재미없는 법이다.
“흑화가 드러났다는 것은, 교의 정보망 자체가 적들에게 노출되었다는 뜻이나 진배없다. 교에서 아직까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큰 낭패를 보게 될 터. ……문평아.”
천마는 홀로 생각을 정리한 일을 일부러 한 번 더 입에 올리며 문평을 불렀다. 언제나 태연자약한 인간이 심각하게 낯을 굳히자, 덩달아 낯을 굳힌 문평이 진지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부르셨습니까.”
“아무래도 네가 교로 돌아가야겠다.”
“……네?”
“내가 직접 갈 수는 없으니, 네가 가야겠지. 천산으로 가면 일부러 돌아올 필요는 없다. 앞으로의 여정은 여태껏 지나온 것보다 한층 더 위험할 터. 일이 끝날 때까지는 몸을 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천마의 말을 들은 문평은 말문이 막혔다. 그가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천산에 꼭 전해야 할 이야기도 있고, 자신의 안위도 걱정스럽다. 그러니 겸사겸사, 두 가지 일을 한 번에 해결하고자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혼자 힘으로 천산까지 돌아갈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무생교의 세력이 천하에 창궐한 판국이다. 강남 전체를 아우르고 강북에까지 이른 그들의 세력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들에게 귀두삼귀 외에 또 어떤 마두가 더 있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자기 혼자 덜렁 길을 떠난단 말인가? 몸이라도 성하면 또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 말이다.
“가능, 하겠습니까?”
문평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오늘 낮까지만 하더라도 자기 발로 도망가겠다던 놈이 이런 말을 하면 얼마나 우스울지 짐작 가지만, 미우나 고우나 목숨을 부지할 길은 천마의 그늘에 의지하는 것뿐이다. 취지 자체는 좋으나 보내 주려면 진즉 보냈어야 했다. 적어도 놈들이 자신을 노리기 전에는 말이다.
“저 혼자의 힘으론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데는 차라리 전서구가 더 나을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무인 된 몸으로 자신의 무력함을 피력하는 것보다 낯 뜨거운 일은 없다. 모자란 반편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문평은 얼굴을 붉혔다.
그의 대답을 들은 천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듯, 문평의 말을 듣고서야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눈치다.
“그도 그렇군. 내 생각이 짧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천마는 낮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깨가 내려앉았다. 딱히 탓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명치끝이 저릿하게 짓눌려 온다.
천마가 문평의 몸에 손수 붕대를 감아 주었다. 그 묵묵한 손길에 문평은 말없이 몸을 내맡겼다.
다시금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동정에 기대야만 했던 그 시절처럼, 지금 문평은 천마의 자비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는 입장이니 말이다.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건만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그가 다시금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아직도 충분할 만큼 강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문평이 윤승효만큼, 아니 파면객만큼이라도 강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일방적인 처지가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참 염치가 없는 동물이다. 아니, 문평의 생존 본능이 염치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것보다 상황이 엄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마음속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다름 아닌 채양보양…… 아니, 천마가 가르쳐 준 무공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일을 할 수는 절대로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면서, 신변이 위태로울 거라는 자각이 들자마자 바로 그것부터 떠올리게 된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 앞에는 체면이고 양심이고 아무런 소용도 없나 보다. 문평은 처절하리만큼 즉물적인 스스로가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무공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체면 불고 하더라도 내가 살아야겠으니 당신 내공을 좀 나눠달란 이야기는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방법이라는 게 남에게 말했다간 음담패설 소리를 들을 수준의 일이니, 아무리 사정이 어렵다고 한들 그런 방법까지는 사용하고 싶지 않다.
언감생심 천마가 장담한 만큼의 성과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어떻게 그 반 정도만이라도 무공을 향상시킬 방법은 없는 걸까?
매달릴 데라곤 천마밖에 없는 문평은 그의 눈치를 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꼼꼼한 손길로 마무리 매듭을 지어주고 있던 천마가 그의 말을 듣고 건성으로 되묻는다.
“무공이 뭐가 어쨌다는 거냐?”
“아니, 딱히 무공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제게 간단한 초식이라도 하나 가르쳐 주시면 안 됩니까? 그저 한 번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정도면 됩니다.”
“한 번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초식이라면 구명절초라는 말인데, 구명절초 중에는 간단한 초식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눈치 빠른 사람이니 거기까지만 말해도 충분히 알아들었으련만, 천마는 짐짓 상관없는 딴소리만 하고 있었다. 내심 애가 탄 문평은 천마의 다리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 되어 사정조로 부탁했다.
“저도 제가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는 싸움이 더욱 커질 터인데, 교주님께서 일일이 신경 쓰시기에 번거로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일입니다. 저도 무인이니 방법만 알려 주시면 됩니다. 제 목숨 하나 정도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천마가 문평에게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의 급박한 상황이라면 혼자서는 무슨 수를 써도 살아남지 못한다. 천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괜히 사실을 말함으로써 문평의 얼마 안 되는 자존심까지 짓밟는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방향으로 문평을 공략했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문평이 가진 얄팍한 속셈을 보기 좋게 꺾어 버린 것이다.
“내가 가르쳐 준다 한들, 그런 초식을 짧은 시간 내에 익힐 수 있을 것 같으냐? 형形에 익숙해지려면 반년이 걸릴 것이고, 의意를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1년이 더 소모된다. 기초가 있다면 그보다는 짧겠지만 불행히도 네겐 그럴 만한 기초가 없지. 네가 원하는 것은 당장의 몇 달을 버티는 것일 텐데, 그래서야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을 게다.”
너무나 현실적인 지적인지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가르쳐 주는 건 괜찮은데 네게 소용은 없을 거라고 일러 주니 야박하다 원망할 수도 없다. 기가 꺾인 문평은 시무룩함을 숨기지도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인간이 이렇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걸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스스로의 처지가 딱했다. 눈앞에 절벽이 있으면 등 뒤에라도 길이 있어야 하건만 눈을 씻고 돌아봐도 길은커녕 샛길조차 보이지 않는다.
“뻔히 있는 길을 두고 돌아가는 것은 미련하기 때문이냐, 욕심이 없기 때문이냐?”
문평이 자신이 파 놓은 함정 앞에서 마지막 한 발자국을 디디지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자 천마가 나섰다.
그가 슬그머니 허리로 팔을 두르며 귓전에 속삭이자, 문평이 흠칫 몸을 굳히며 그를 돌아보았다.
“교주님?”
놀란 토끼같이 휘둥그레 떠진 눈이지만 그 눈에서 순진함은 엿보이지 않았다. 느닷없는 상황 때문에 난처해하긴 해도, 예전처럼 완전히 뿌리치지는 못했다. 내심 갈등하고 있는 바가 적지 않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역시.’
천마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허리를 감싼 두 팔에 힘을 주었다.
“내가 네게 전수해 준 무공은, 너의 상황에서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설마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런 것을 가르쳤을 성싶으냐? 노리개로 삼을 생각이었다면 방중술을 가르쳤겠지, 채양술을 가르치진 않았을 거다.”
보석 박힌 빗으로 어린 동기를 꼬시는 한량처럼, 천마는 막대한 내공을 가지고서 문평을 꼬드겼다.
그가 붉게 달아오른 귓전에 속삭이자 문평이 어깨를 움츠린다. 그의 노골적인 유혹이 당황스러운 듯 귓전은 발갛게 물들었다. 금방이라도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귓불을 천마는 다디단 당과라도 되는 것처럼 베어 물었다. 말랑말랑한 귀의 살점이 달콤할 정도로 뜨거웠다.
“하, 하지만…….”
“네 목숨을 네가 지키고 싶다면, 너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 보여라. 통하지도 않을 방법으로 아등바등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실현 가능한 방법을 이용해 보라는 거다. 이건 내가 주는 기회이기도 하다. 모든 건 네가 하기에 달린 일이지. 모르는 체 손을 놓겠느냐, 아니면 기회를 잡겠느냐?”
교묘하기 그지없는 입담이 문평을 몰아갔다. 자근자근 귓불을 괴롭히던 입술이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허리에서 거슬러 올라와 가슴께에 다다른 손이 붕대로 감싸인 살점 위를 지그시 누른다.
계살귀 때문에 상처가 났던 연약한 유두가 천마의 손길에 부풀어 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팽팽한 피부에 피가 몰리자, 아릿한 통증이 가슴께로 퍼져 나간다.
숨이 막힐 정도로 농밀한 유혹에 문평은 헐떡였다. 밀어붙이기만 하는 상대에게 익숙해져 있던 그는, 몰아가는 것으로 방법을 바꾼 천마의 의도를 읽어내지 못했다.
마음이라도 굳건하면 또 모르겠지만 몸보다 먼저 흔들린 것이 마음이었다. 문평은 천마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도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아남는 것이 강하다. 과연 그러한가. ……여기까지 오고 나니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회의로 가득한 마음이지만, 살고 싶다는 욕망을 뿌리칠 순 없었다. 문평은 체념하듯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존에 대한 욕구는 언제나 그를 움직이는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였고, 문평은 이번에도 그 욕망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비루하고 구차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인생이다. 스스로가 신경 쓰지 않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사소한 생명이지만, 그래도 문평에게는 그 목숨이 소중했다.
방금 목욕을 끝내고 온 피부가 손끝에서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발그스레하게 열이 오른 빛깔이 꼭 잘 익은 복숭아 같다.
천마는 아직도 살구 냄새가 풍기는 문평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살이 내리는 바람에 더욱 가늘어진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가냘프게 드러난 쇄골이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군살이 빠지는 바람에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 몸매는 예전보다 오히려 더욱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그, 그 모습으론 싫……. 교주님!”
천마는 문평의 뒤돌아선 몸을 돌려 제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허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옷부터 벗겨오는 손놀림은 노련하기 짝이 없었다. 벗고 있다는 인식도 하기 전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천마가 둘러 준 붕대뿐이었다.
천마는 문평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허벅지를 밀어붙이며 그의 두 뺨을 움켜쥐었다. 깊은 입맞춤이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탐하고 또 탐하는 탐욕스러운 입술 때문에, 그리 길게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 숨이 막혔다.
“뭐라고?”
한참 문평에게 열중하고 있던 천마는 문평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입맞춤을 하는 틈틈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기는 하는데, 워낙 짧은 순간에만 말을 할 수 있었기에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문장으로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말을 하려거든 알아들을 수 있게 하거라.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냐?”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천마는 뻔뻔하게 말했다. 헐떡이던 문평이 젖은 눈으로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숨이 막힌 와중에 생긴 생리적인 눈물이었지만, 촉촉하게 젖은 눈매로 올려다보고 있으니 어쩐지 요염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 모습은 싫다고 했습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천마는 문평의 말을 듣고서야 아직도 자신이 윤승효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치 빠른 그가 문평이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모를 리 없다. 실체도 없는 그림자에게 아직도 연연해 하는 그를 보니 은근슬쩍 마음이 상했으나, 이런 분위기에서 그에 대한 실랑이를 시작하는 것 역시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네 말인즉슨, 정도맹의 한복판에서 본색을 드러내란 말이냐?”
“……어려우시겠습니까?”
“어려울 거야 없지. 적지 않은 긴장감은 있겠다만. 네 취향이 그런 쪽일 줄은 몰랐구나.”
간단히 비꼬는 것으로 못마땅한 마음을 대신한 천마는 역용을 풀고 본모습을 보였다.
우둑, 우둑, 우두둑.
문평의 눈앞에서 천마의 골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새파랗던 눈동자가 검은색으로 물들고, 섬세하던 이목구비는 좀 더 직선적인 구조로 자리가 바뀐다. 늘씬하던 몸매가 단단한 근육질로 변했다.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으로 변모되고 있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급격히 아름다워졌다.
윤승효도 여간한 미모가 아닌데, 이렇게 일대일로 비교하게 되니 어쩐지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문평은 숨소리조차 내뱉지 못하며 두 번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엄청난 광경을 지켜보았다.
일다경一茶頃이 채 지나기도 전에 윤승효는 천마가 되었다. 문평보다 한 뼘은 더 커지고, 어깨도 반 뼘은 더 넓어지게 된 남자는 천계의 신장인 양 휘황찬란했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 정말로 잘생겼다.
‘세상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생길 수 있는 것일까?’
후광이라도 비칠 것 같은 찬연한 미모에 눈이 빼앗긴 문평은, 자기도 모르게 그 얼굴을 멍청히 올려다보았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얼굴인데도 오랜만에 보니 새삼스럽다.
저런 남자가 대체 뭐가 모자라 자신 따위에게 연연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입 다물어라. 침 떨어진다.”
반쯤 넋이 나간 듯 자신을 바라보는 문평에게 천마는 심술궂은 일침을 남겼다. 화들짝 놀란 문평은 반사적으로 입가를 훔쳤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묻어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교주…….”
짓궂은 천마의 태도에 한마디 하려던 문평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문평의 허리를 안은 천마가 오금을 받치고 완전히 안아 올려 버렸기 때문이다.
신혼의 부인처럼 천마의 품에 안기게 된 문평이 당황해서 허리를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천마는 그를 허락하지 않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침상으로 걸어갔다. 찰나조차 낭비하기 아깝다는 듯, 그의 발걸음은 서두르는 빛이 역력했다.
“교주님, 읍!”
침상에 내려놓자마자 다시 몸이 겹쳐졌다. 잠시 동안 비워 놓았던 것이 원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천마는 문평의 입술에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뜨거운 혀가 혀를 휘감고, 가지런한 치아가 문평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잡아당겼다. 체중은 싣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몸을 붙인 자세 덕분에 천마의 피부와 그의 피부가 빠짐없이 밀착되었다.
자연스레 벌어진 다리 사이를 천마의 몸이 비집고 들어왔다. 허벅지 안쪽의 얇은 피부를 통해서, 단단한 그의 성기가 내뿜는 체온이 지나치리만큼 생생히 느껴진다. 팔이 하나 더 얹어진 것 같은 묵직한 무게감이 오히려 하체를 달구었다.
두 사람 사이의 열기는 빠르게 피어올랐다. 악기를 다루는 악공처럼 능숙하기 짝이 없는 손놀림은 문평이 느끼는 곳을 정확하게 일깨우고 있었다. 문평은 뜨거운 숨을 연달아 내뱉으며 천마의 목을 끌어안았다.
천마의 반쯤 일어선 성기가 문평의 성기와 고환 사이의 약한 부분을 쿡쿡 찔렀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피부가 그 뜨거운 자극에 경련을 일으키듯 잘게 떨렸다. 살짝 부어 있는 고환 위를 과실처럼 단단히 익은 천마의 성기가 범하듯 진퇴를 되풀이한다. 덕분에 얇디얇은 피막 사이로 뜨겁기까지 한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그냥 이렇게만 하면 되는 겁니까?”
예전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잃어버릴 뻔했던 문평이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천마에게 물었다. 그저 정사를 나눌 생각이면 이대로 쾌감에 몰두해도 상관없지만, 문평에게는 따로 목적한 것이 있다. 그놈의 채양보양인지 뭔지 하는 것으로 내공을 늘려야 하니, 예전처럼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문제였다.
문평의 입술에 집착하고 있던 천마가 그 말을 듣더니 낮게 웃는다. 잔잔히 떨리는 웃음기가 마주 댄 입술을 통해 선명하게 다가왔다.
“설마. 이렇게만 하면 그냥 기분만 좋아지지. 내공 따윈 눈곱만큼도 늘지 않는다.”
“그럼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필요한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그러니 너는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말고 집중이나 하거라.”
문평에겐 그 일이 결코 ‘사소한 것’ 따위가 아니었으나, 간단하게 일축해 버린 천마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문평의 몸에 몰두했다. 고금을 통틀어 ‘오빠 믿지?’ 신공을 안 써먹는 사내가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문평은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잠자코 천마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설마하니 천마가 이런 걸 가지고 자신을 속이랴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대종산데 자기가 한 말은 지키겠지.
“아읏!!”
딴생각에 정신이 팔린 것을 벌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천마의 손이 문평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단단하게 중심이 잡힌 천마의 성기와 반쯤 일어선 문평의 성기는 그 주인들처럼 서로 얽혀 끈끈한 애액을 흘리고 있었는데, 천마의 손이 두 개의 성기를 한 번에 잡고 마찰을 시작했다.
비단처럼 보드라운 살결과 울퉁불퉁하게 혈관이 솟아오른 단단한 기둥 사이의 극심한 격차가 문평의 성기를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의 향연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문평은 허리를 거세게 퉁기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민감하기 짝이 없는 귀두가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과감한 자극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움찔거렸다. 번개가 꽂히는 것처럼 강렬한 감각이 뇌를 관통한다.
“아윽. 앗!”
한동안은 그야말로 자위조차 없던 나날이었다. 몸이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괴로워서 그런 쪽으로는 아예 생각조차 미치지 않았었다.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금욕이라면 금욕을 한 셈인데, 그래서인지 첫 파정은 유달리 빨리 찾아왔다. 몇 번 문지른 것 같지도 않은데 금세 발기가 되더니 순식간에 눈앞이 아득해진다.
짧고 강렬한 사정감이 문평의 하반신을 습격했다. 그의 성기는 경련처럼 꿈틀거리며 유백색의 액체를 천마의 손아귀 안에 토해냈다.
“빠르군. 그동안 혼자 한 적도 없었던 모양이지?”
자신의 손아귀를 흠뻑 적신 액체를 흥미로운 듯 내려다보며 천마가 입을 열었다. 문평의 정액은 그의 손뿐만 아니라 배와 가슴께에도 사정없이 튀었다. 완미完美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완벽한 몸에 그런 게 묻어 있으니, 감히 마주 보기가 부끄럽다.
문평이 사정감으로 녹진해진 허리를 두 팔로 지탱하며 천마를 바라보았다.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아 있던 천마는 손아귀에 묻은 정액을 맛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맛보는 것도 아니고 구음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의 손아귀를 느긋이 핥아 올리며 보는 사람의 시선을 빼앗고 있다. 정액을 핥는 그의 혀는 선정적일 정도로 붉었고, 웃음기 어린 그 눈매는 허리 아래가 아릿할 정도로 요염했다.
평상시의 천마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지만, 침상에서의 그는 절대자가 아니었다. 능숙한 유혹자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정부情夫다.
이래서 ‘그들’도 이 사람한테 욕심을 부렸던 것일까? 사람 같지도 않은 그 미모를 보니 돌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천마에게 이런 속내를 들켰다간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멍하다 보니 생각이 제멋대로 튀어 다닌다.
홀린 듯한 시선으로 천마를 바라보던 문평은 뒤늦게 눈을 깜빡거렸다. 사적으로 감정이 결코 좋은 상대가 아니건만, 그런 자신조차 넋을 잃고 보게 되니 인물 하나는 정말 대단하다.
“그거, 맛있습니까?”
문평은 어떻게든 다른 데로 생각을 돌리고 싶어서 말을 꺼냈다. 그러나 너무 서두르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멍청한 소리나 하고 만다. 천마는 그의 말을 듣더니 빙그레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미소가 이 와중에도 눈이 부셨다.
“정액이라면 너도 전에 먹어 본 적이 있을 텐데. 맛있더냐?”
“아니요, 별로.”
정액 따위가 맛이 있을 리 없다. 문평은 고개까지 흔들며 그의 질문을 부인했다.
“네 것도 똑같다. 맛 따위로 먹는 게 아니지.”
그럼 왜 먹는 거냐고, 하마터면 물을 뻔했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는 바람에 천마의 노림수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물어봤자 자신의 정신 건강에 해가 되는 답변만 돌아오리라는 것을 깨달은 문평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 모습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천마의 눈매에서 물결치듯 눈웃음이 번졌다. 그는 한층 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문평의 입술 위에 정액이 묻은 입술을 겹치며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이젠 돌아눕거라. 할 건 계속해야지.”
감미로운 목소리는 또 한 번의 쾌감을 약속하고 있었다. 단순히 기분이나 좋자고 시작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벌꿀처럼 농도 짙은 쾌락에 몸이 먼저 홀려 버린다.
문평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순순히 몸을 돌렸다.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천마에게 등을 내보이자, 천마가 허리를 세워 엉덩이를 들게 만들었다. 상체는 침상에 엎드리고 하체는 무릎을 세운 채로 문평은 천마 앞에 자세를 잡았다.
뒤를 이은 천마의 행동은 도발적이기 짝이 없었다. 그는 동그스름하고 단단한 문평의 엉덩이를 손자국이 생길 정도로 꽉 잡더니 엉덩이 사이의 골에 혀를 갖다 댔다. 부드럽기 짝이 없는 점막에 직접적으로 혀가 닿자 움찔 허리가 튀었다.
‘바, 방금 뭐?’
기껏해야 기름 묻은 손가락 정도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던 문평은 혼비백산해 천마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허리를 뒤틀어도 천마는 꿋꿋이 문평의 항문에서 혀를 떼지 않았다.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으로 문평이 그를 불렀다.
“교, 교주님. 교주님!!”
“시끄럽기 짝이 없군. 천마가 여기 있다고 아예 사자후獅子吼라도 내뱉지 그러느냐?”
정도맹 한복판에서 교주님을 연발하는 문평이 성가셨는지, 천마가 마지못해 얼굴을 들었다. 문평은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창백하게 물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지금? 그, 그곳에…….”
“꼭 전에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구나. 기름이 없는 걸 어쩌란 말이냐.”
불행히도 오늘 밤에 일을 치를 거란 예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천마에게도 문평에게도 향유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천마에게 자신의 거기를 핥게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 문평은 강하게 항변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윤승효의 모습일 때도 한 적이 있는 일이니 천마의 모습으로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 그렇지 않았다.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천마라는 사실이 문평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이게 들키면 나는 죽겠지. 호완평에게는 목이 베이고, 포영의에겐 심장이 찔리고, 성격 나쁘다고 소문난 초교연에게는 사지가 절단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감히 천마에게 뒷구멍을 핥게 만들었다는 죄가 얼마나 클지 짐작도 가지 않는 문평은 절대로 그런 엄청난 일을 허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이게 아니면 달리 방법이 있더란 말이냐? 설마 적시지도 않고 나를 받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네가 지금보다 배는 능숙해져도 그런 묘기는 못 부린다. 찢어져서 어기적거리며 걷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라.”
그러나 문평보다 더 단호한 것은 천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넣어야 된다고 주장했던 예전의 윤승효처럼, 천마 또한 자신이 손수 핥아주는 한이 있어도 꼭 넣어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다.
‘거기가 찢어진다고?’
문평은 협박조로 던져진 천마의 말 한마디에 빳빳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고도 많은데, 그 협박을 듣고 나니 계속 반박하기 어려웠다.
천마의 성기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경험으로 아는 일이다. 그런 괴물 같은 것을 적시지도 않고 넣었다간 정말로 유혈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주님…….”
“진짜로 그냥 넣을까?”
“아, 아닙니다. 그, 그냥 하십시오.”
문평의 반항이 어쩔 수 없이 수그러들자 천마의 행동이 계속되었다. 방금 씻고 온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배설구인데, 천마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문평의 항문을 핥아 내렸다.
한동안 관계가 없었던 탓에 다시 조밀하게 다물린 주름은 긴장한 듯 뻣뻣이 굳어 천마의 혀를 밀어냈다. 말 안 듣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천마의 혀가 참을성 있게 주름을 달랬다. 긴장해 굳어 있는 근육을 달래는 솜씨가 과연 보통이 넘었다.
엉덩이에 닿는 뜨끈뜨끈한 감각에 문평은 이불을 움켜쥐었다. 방금 전까지 안 된다고 펄쩍 뛰기까지 해놓고 이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천마의 혀가 움직일 때마다 허리가 움찔움찔 튀었다.
같은 점막이라고 하더라도 입 속의 점막과 직장의 점막은 감각의 밀도가 다르다. 민감하고 자극에 약한 아래쪽의 점막은 천마의 혀가 스치기만 해도 자지러졌고, 문평은 그럴 때마다 허리 안쪽이 조이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방금 사정을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성기가 뻣뻣이 힘을 받았다. 작아졌던 고환도 다시금 부푸는 듯한 느낌이다. 덕분에 손마디가 새하얗게 변하도록 힘을 주어도, 조르듯 허리를 움직이고 싶은 욕망은 가라앉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그의 아랫구멍을 드나드는 것은 혀뿐만이 아니게 됐다. 자신의 혀로 구멍을 듬뿍 적셔 놓은 천마가 문평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천천히 손가락을 집어넣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에 불과했지만, 곧이어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됐다. 손끝이 부드럽게 내벽을 자극하고 문지르듯 비비며 길을 넓혔다. 내장 깊숙한 곳을 어루만져진다는 공포감은 능숙한 쾌감을 이기지 못했다.
철벅철벅하는 질척하고 음란한 소음이 들릴 때마다 문평은 등을 떨며 허리를 굽혔다. 헐떡거리는 신음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팔라졌다.
“혀를 입천장에 갖다 대고, 진기를 중부혈中府穴에서 경문혈京門穴로 끌어 내려라.”
손가락으로 문평의 항문을 한껏 열어젖힌 천마가 명령을 내렸다. 정신이 몽롱해져 있던 문평은 그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진기를 움직였다. 일단 움직이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것은 천마가 가르쳐 주었던 심법의 시작 부분이다. 경각심이 일어 정신을 차리려는데 두 번째 주문이 연이어 떨어져 내렸다.
“태충혈太庶穴 쪽으로 진기를 내렸다가, 하음혈下陰穴로 끌어 올려라.”
문평은 또다시 시키는 대로 했다. 몸 안을 소주천한 진기를 하음혈에 모으자 하체가 녹진해지면서 허리에 힘이 풀린다.
바로 그때, 천마의 성기가 몸속으로 침입해왔다. 자신의 성기로 하음혈을 직접 두드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강하게 밀치고 올라온 성기는 단숨에 문평을 꿰뚫어 버렸다.
“악!”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문평은, 순간적으로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천마가 충분히 풀어주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찢어졌을지도 모른다.
무식하리만큼 한꺼번에 밀고 들어온 성기 때문에 아랫도리 전체가 꽉 틀어막힌 듯 답답해졌다. 가득 찬 것은 뱃속뿐만이 아니었다. 기혈도 그랬다. 천마의 명령에 따라 하음혈에 모인 진기는 갑작스레 멈춘 운기에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고인 채로 맴돌았다.
쇳덩어리라도 매단 것처럼 아랫도리가 무거워졌다. 갑작스레 더해진 무게에 척추가 휘청하고 내려앉는다. 위기감이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무게감에 문평은 젖은 눈으로 천마를 돌아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러다 저 죽겠습니다.’
그가 차마 말도 못 하고 애절하게 바라보기만 하자, 천마는 안심하라는 듯 그의 등을 두드리며 문평이 해야 할 일을 말해 주었다.
“잠시만 운기를 멈추고 있어라. 자세를 바꿔야 한다.”
원래 채양보양술은 선녀강림仙女降臨의 자세로 운기해야 한다. 위에 있는 사람이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체위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마의 성기는 위에서 올라탄 채로 집어넣기엔 지나치게 크기가 크다. 그 크기로 인해 문평의 몸이 느낄 부담을 고려하자면 어쩔 수 없이 편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뒤에서부터 집어넣고, 몸을 돌려 체위를 바꾸는 것으로 삽입의 부담을 덜었다.
후배위에서 순식간에 기마 자세가 되어 버린 문평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빠듯하던 뱃속이 체중까지 실리자 완전히 가득 찼다. 여태까지의 모든 자세를 합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깊었던 적은 없었다. 지금의 삽입은 너무 깊어서 공포감마저 들 정도였다.
문평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버둥거리자, 천마가 손을 뻗어 허리를 잡아 주었다. 커다란 손이 허리를 꽉 붙잡고 있자 도망도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일을 시작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은근히 무서워진다.
“이제 운기하거라. 허튼 생각 따윈 하지 말고 집중해서. 네가 딴생각을 하면 너뿐만 아니라 나까지 위험하게 된다.”
천마는 문평의 몸속에서 짙은 쾌감을 맛보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엄하게 말했다.
울상을 지은 문평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운기를 계속했다. 그의 진기가 하음혈에서 움직이자, 진기에 의해 자극당한 내벽이 흡수라도 하듯 강력하게 천마를 조였다. 단순히 근육의 힘만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내력까지도 이용하기에 천마의 성기는 문평의 몸 안으로 빨려들듯 잡아당겨졌다. 물론 잡아당겨지는 것은 성기뿐만이 아니라 그의 내공도 마찬가지였다.
심후한 내공이 아랫도리를 타고 들어오자 문평이 참지 못하고 허리를 휘었다. 천마는 그에 맞춰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문평의 몸이 튀듯이 솟아오른다. 뾰족하게 솟은 젖꼭지가 붕대를 뚫고 도드라졌다.
문평에게는 지금,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뱃속에서 느껴지던 무게감이 덜해지는 것으로 모든 일은 시작되었다. 허리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던 무거운 중력도 사라지고, 불쾌하리만큼 뻑뻑하던 근육도 조금씩 유연해져 갔다. 내심 겁을 먹고 있던 문평은 그런 반응들을 느끼고서야 안심했다. 이제는 좀 괜찮아지는가 싶었다.
하나 일은 그렇게 단순히 끝나지 않았다. 조금씩 풀어지는 것 같던 내벽이 갑자기 왈칵 조여들었다. 문평이 스스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진기 때문에 몸이 저절로 반응한 거였다.
자신의 근육이 천마의 성기를 죄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비틀어 쥐어짜듯 강하게 뒤흔드는 내벽의 힘은 순수한 근력으로는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강력했다. 그러더니 곧이어 기묘한 무언가가 내벽으로 흘러들었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도 몰랐지만, 그 기운이 기혈을 타고 움직이자 뒤늦게 짐작이 갔다. 그것은 천마의 단전에서 잠자고 있던 내력이었다. 그의 순도 높은 기氣가, 마치 흡수라도 되는 것처럼 몸속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한번 가속이 붙은 운기는 천마의 의지 없이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하음혈을 타고 올라온 천마의 진기는 허락도 받지 않고 그를 따라 회전했다.
좁은 기혈을 무지막지하게 밀어 올리는 강력한 내력에 문평은 쾌감과 고통을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엉덩이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한꺼번에 범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슨 환락분이라도 들이마신 것처럼 오감이 활짝 열리면서 온몸의 감각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거대한 옥경이 내벽을 짓누르듯 하며 쳐들어오고, 강력한 진기가 기혈을 겁박한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강력한 쾌감이 문평의 통각을 불태웠다. 지나치게 짙은 쾌감은 차라리 고통보다 못했다. 기분이 좋기보다는 아프고, 즐겁기보단 무서워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천마가 만든 심법은 천마 본인만큼이나 지나쳤다. 지나치게 농밀하고 과도하게 압도적이었다.
“아악! 악! 아악!!”
문평은 바깥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세상 대부분의 무공은 운기를 하면 입을 열 수 없지만, 다행히 천마가 창안한 채양보양술은 그런 종류의 심법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 사용할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 천마의 배려 아닌 배려 덕에, 운공 중에 소리를 질러도 주화입마에 걸리지 않도록 설계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문평은 그런 세세한 상황에까지 생각이 미칠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아프고 또 아플 뿐이었다.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번개가 치고 있었다. 온 사방이 금속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번 내리친 뇌전은 흡수가 되지 않고 온몸 구석구석에 골고루 튕겨 다녔다. 온몸을 태우는 푸른 불꽃들이 번쩍거리며 피부의 안쪽을 지졌다. 진기가 들어올 때마다 몸이 부풀고, 도로 나갈 때마다 몸 안쪽까지 완전히 쪼그라드는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 이거 안 해. 두 번 다시 안 해.’
퇴행이라도 한 것처럼 어려진 문평의 머릿속은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아무리 채양보양이라고는 하지만, 대가도 없이 남의 무공을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평은 두 눈이 쏙 빠지도록 울면서 그 사실을 배웠다.
***
밤새 무리한 덕에 그렇지 않아도 시원찮은 체력은 바닥을 치고 말았다.
문평은 봄볕 따뜻한 뜰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뜨끈뜨끈한 열기가 뒤통수는 물론이고 등허리까지 달구었다. 화상을 입은 등이 쑤셔 왔다. 혹사당한 허리는 말할 것도 없다. 하체는 두 다리를 뗐다가 다시 붙인 듯한 느낌이었고, 엉덩이 사이의 골은 지나친 마찰 때문에 쓰리고 아팠다. 한계까지 시험당한 구멍은 바늘 하나 못 들어갈 정도로 퉁퉁 부었다.
‘한 번으로 족하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세 번씩이나 하다니.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지?’
그렇지만 그를 진정으로 괴롭히고 있는 것은 몸의 고통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이다. 문평은 지난밤 천마가 자신에게 저지른 만행을 곱씹으며 원통함을 금치 못했다.
‘그것도 나중에는 운기하지 말자는 애원까지 뿌리치고 자기 힘으로 운기해 가면서 밀어붙였다고! 덕분에 내공은 좀 늘었지만 그러면 뭐 해. 걸을 수가 없잖아. 걸을 수가! 이따위 상태로 적을 맞았다간 내공 따위 써먹어 보지도 못하고 사망이야.’
겉으로는 멀쩡하게 앉아 있지만, 속까지 멀쩡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엉덩이 속의 근육은 아직도 욱신거리고, 마찰 때문에 피부가 벗겨질 뻔한 허벅지 안쪽은 스치기만 해도 얼얼했다. 말이 좋아 세 번이지 시간으로 따지자면 꼬박 두 시진 반을 시달린 거다. 창밖에 희미하게 동이 터오기 시작할 때야 겨우 끝났으니 밤을 새운 거나 다름없다.
채양보양은 자기가 했는데, 어째 기분상으론 뼛골까지 빨려 먹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노인네가 기운도 좋지. 어떻게 젊디젊은 자신이 따라가지도 못할 정도로 밝히는 건가.
툭. 툭.
진이 빠져 더위에 지친 개처럼 늘어져 있는 그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것을 느끼고 돌아보니, 이 더운 날씨에도 온몸을 빈틈없이 감싼 파면객이 서 있었다.
검은색 무복은 물론이거니와 턱 끝까지 감추는 죽립을 쓰고 있어 딱 보기에도 저승사자 같은 몰골인데, 그 모습을 하고 찻잔이 든 쟁반을 받쳐 들고 있으니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
“뭡니까, 그건?”
섬세한 국화꽃 무늬가 정성스레 박힌 찻잔을 발견한 문평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파면객은 문평이 권하는 대로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찻잔을 문평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국화차입니다. 아무래도 기력을 못 차리시는 것 같아서요.」
물론 파면객은 지난밤에 일어난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 조심성 있는 천마가 기막을 펼쳐 소리를 감춘 데다, 뒤처리도 말끔하게 했다. 그러니 그들의 방을 치운 시비들조차도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할 터였다. 하나 내심 찔리는 것이 많은 문평은 별 뜻 없는 파면객의 행동을 보면서도 공연히 뒤가 켕겼다.
“아니, 뭐 이런 걸 다…… 세심하시네요. 찻잔의 무늬를 차와 맞추신 겁니까?”
받아 든 찻잔의 뚜껑을 열어보니, 봉오리째 말린 국화가 그대로 들어 있는 게 보였다. 뜨거운 물을 부어 자극을 받았는지 차 속에서 하나씩 꽃잎이 펼쳐지는 모습이 지극히 진귀하고 아름다워서, 무심결에 넋을 놓고 보게 된다. 파면객은 손가락 끝으로 문평의 질문에 답했다.
「시비 아이들이 세심하더군요. 그런 데까지 신경을 써주니 말입니다.」
거친 손매로 쓰이는 글씨임에도 어쩐지 나긋나긋한 느낌이다. 파면객은 험하기 짝이 없는 외양과는 달리 배려심 깊고 진중한 성격이었다. 일행들을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을 보면 의외로 세심하기도 했고, 나서지는 않지만 언제나 뒤에서 묵묵한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솔직히 말해 그의 일행 중 이 사람의 인품을 따라갈 사람은 없다. 정인군자에 약한 문평은 그런고로 파면객을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감복한 바가 적지 않으니 자연 태도가 다듬어지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신경 써서 직접 가져다주기까지 한 차이니 모른 척할 수가 없다. 문평은 고맙게 받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질 좋은 국화를 사용했는지 그윽한 국화 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향이 정말 좋다. 어디서 이런 차를 구한 것일까?
「그런데 화협께서는 어디에 가신 겁니까?」
노곤한 몸에 스며드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홀짝홀짝 차를 마시던 문평은 파면객의 질문에 어색하게 고개를 들었다.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지려던 찰나였는데 하필이면 그 인간 이야기가 또 나올 줄이야. 파면객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한 언급이지만 문평은 은근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볼일이 있어 잠깐 밖으로 나갔습니다. 늦지 않게 들어오신다니 오후에는 돌아오시겠지요.”
오늘 아침, 천마와 문평은 그 일로 거의 싸울 뻔했다.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자신이 올 때까지 용화소축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고, 안에 있을 때라도 파면객에게 꼭 붙어 있으라며 신신당부한 천마에게 문평이 발끈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말썽 많은 애새끼를 두고 가는 어미도 아니고 다 큰 사내에게 그게 무슨 당부란 말인가. 위험천만한 적진 안이라면 또 모를까, 다름 아닌 정도맹 안인데 말이다.
‘……그렇게 말했더니 그 인간이 비웃었지. 마교의 밥을 10년이나 먹은 주제에 정도맹 안이 적진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멍청하니 혼자 놔둘 수 없는 거라고.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너무하잖아. 꼭 그렇게 모질게 말할 필요가 있어?’
그렇지 않아도 허리 아프지 다리 아프지, 온몸이 다 아파서 신경질이 나는 판국이다. 하물며 원인을 제공했던 남자가 신랄하게 비꼬기까지 하니 참을 수 없었다.
자기가 필요할 땐 온갖 감언이설을 하며 꼬시지 못해 안달이더니만, 제 볼일 다 보고 난 연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안면몰수다. 왠지 모르게 속았다는 느낌이라 속에서 불이 들끓었다.
천마의 변덕스러움엔 장단 맞추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몸이 못 따라간다. 이럴까 봐 애초부터 휘말리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상황이 이상하게 꼬이다 보니 어느새 다시 몸을 섞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은 왜 찾으십니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그분께 여쭤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습니다. 원래는 어제 여쭈려고 했었던 말인데 저녁 늦게 들어오시더니 오늘 아침에도 일찍 자리를 비우셨더군요.」
파면객은 문평이 어제 귀두삼귀에 의해 습격당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들과 조우한 과정도 문제인 데다, 지나치게 압도적이었던 천마의 무위 또한 남들 눈에 드러낼 것이 못 된다. 숨길 것이 많은 두 사람은 그 일을 그냥 덮어 두기로 했다. 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파면객으로서는 천마의 잦은 출타가 그저 의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문평은 웃는 얼굴로 얼버무렸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비밀이란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잘 지켜지는 법이다.
“이걸 어쩌지요? 그런 줄 알았더라면 오늘 아침에라도 잡아 놓았을 텐데요.”
「그렇게까지 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저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던 것뿐이니까요.」
“대체 무슨 일이신가요?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입니까?”
파면객은 평소에 자신이 나서서 말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의사를 전달하는 과정도 불편한 데다 과묵한 성격이라 걸어오는 말에 답을 하긴 해도 스스로가 말을 거는 것은 드물었다. 그런 사람이 두 번이나 천마를 기다렸다는 사실에 문평은 다소 놀랐다. 어지간한 용건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석 형께서 제 의문에 답을 해주실 수도 있으실 것 같군요. 자옥에 대한 일이니까 말입니다.」
“자옥에 대한 일이요?”
「네. 그렇습니다.」
어젯밤 문평이 돌아왔을 땐 이미 잠자리에 들어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자옥이다. 아무 일 없이 돌아와 있는 것 같아 별 신경을 안 썼는데, 그 애에 관련된 질문이 있다니?
문평의 마음에 퍼뜩 걱정이 생겼다. 혹시 나도 모르는 새에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면 기꺼이 답해드리겠습니다.”
파면객의 용건에 관심이 생긴 문평이 진지하게 태도를 바꿨다. 파면객이 그의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혹시나 해서 여쭙는 겁니다만, 자옥이 그 아이가 당문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당문이라니? 설마하니 저기 저 사천 당문을 말하는 건가?’
문평은 뜬금없이 나오는 당문의 이름에 눈을 껌뻑였다. 자옥이 당문과 연관이 있다니, 이야말로 금시초문이다.
“아뇨. 그렇지는 않은 걸로 아는데요. 제가 알기론 그 앤 당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문평은 파면객의 질문을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사천도 아니고 귀주 태생, 그중에서도 개양 토박이인 자옥이다. 오라비가 파락호고 본인은 빈민가 출신이다. 그런 아이가 대체 무슨 재주로 당문과 연을 맺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아이가 의원에 있었을 때 당문오독이 찾아온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정신을 잃고 있던 자옥인 그 사람들을 보지 못했죠. 그 후로는 당문과 마주친 일도 없고, 얽힐 일도 없었지요. 한데 어째서 그런 것을 물으시는 겁니까?”
그들과 적지 않은 악연으로 얽힌 문평도 그때를 마지막으로 당문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그 아이가, 당문의 장로 중에 한 사람을 알아보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당문의 장로를요?”
「네. 표비수剽飛手 당추양唐秋陽을 아는 듯한 눈치더군요.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놀란 빛이 역력했습니다.」
“표비수 당추양이라니……. 그자가 지금 정도맹에 있습니까?”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자의 이름이 들리자 문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문평의 속내를 모르는 파면객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그자가 왜 왔답니까?”
「이번 생강시 사건의 진상은 당문에게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앵속을 탈취당한 데다 당문오독도 적지 않게 상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안다. 알지만…… 내가 하는 말은, 왜 하고많은 당문도 중에 하필이면 당추양인 거냐고!’
표비수 당추양은 비도술로 이름 높은 당문의 고수다. 더군다나 그는 과거 만자외를 뒤쫓는 추격대를 이끌었던 사람으로, 문평과도 만만찮은 악연이 있는 자였다. 직접적으로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문평은 그라면 이를 갈았다. 그자의 끈질긴 추적에 쫓기다 못해 신강까지 갔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자가 그토록 집요하지만 않았더라도 마교에 투신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런 점을 감안해 본다면 표비수는 문평에게 있어 원수나 진배없었다.
그러나 원한이라면 상대편에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나중에 듣자 하니 표비수는 당시 만자외와 그의 제자 즉, 문평 자신을 모두 놓쳤다는 죄목으로 근신형에 처했다고 들었다. 그 일로 당문 수뇌부의 신임까지 잃어 몇 년간 두문불출했다고 하니, 자기 눈에 들보는 모르고 남의 눈에 티끌만 아는 당가인의 특성상 보통 아닌 원한을 불태우고 있을 게 뻔했다.
하필이면 그런 자와 정도맹의 한복판에서 맞닥트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생기자 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평온한 인생을 살면 지루할까 봐 그러는지 위기는 쉴 새도 없이 찾아온다.
남의 이야기라고 손뼉 치며 들었던 영웅담의 주인공들도 사실은 이렇게 고달팠던 것일까. 문평은 아득히 멀어진 평온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이라도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지만, 당추양이라면 더 모르겠군요. 파면객께서도 아시다시피 그자는 좀처럼 당가타를 떠나지 않는 자입니다. 이번에 정도맹에 파견된 것조차 이례적인 일이라 할 정도인데, 자옥이 그런 사람을 알고 있을 리 있겠습니까?”
문평은 당추양에 대해서라면 알고 있는 바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도리어 파면객의 말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파면객에도 나름의 근거는 있었다. 신중한 그가 증거도 없이 의혹만으로 나섰다는 것은, 의혹 자체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컸기 때문이다.
「아이의 태도로 봐서는 잘못 봤다거나, 착각을 했다거나 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원래 겁이 많은 아이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심하게 겁을 내는 건 처음 보겠더군요. 더 이상한 것은 표비수의 태도입니다. 처음 보는 아이가 자신을 겁낸다면 민망해한다거나 불쾌해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어떤 반응이 있어야 할 텐데, 그 사람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더군요. 마치 겁먹은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
「자옥은 그 사람을 보고 나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심문이 거의 끝나가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크게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다행히 옥기린이 그 자리를 무마해주긴 했지만, 심문에 참석했던 자들 중엔 불쾌해하는 인사들도 분명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까맣게 모르던 일들이다. 자신의 일에 정신이 팔려 심문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그 아이를 본 기억이 없다. 단순히 피곤해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로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단 말인가? 뒤늦게 아이의 상태가 걱정스러워진다.
“그럼 아이는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방 밖으로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시비들이 먹을 걸 들여보내 줬던 모양인데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몸도 성치 않은 아이가 무슨……. 가봐야겠군요. 그 애가 그러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파면객의 말을 듣고 문평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파면객이 따라오려는 듯 같이 몸을 일으킨다. 자옥의 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리던 문평은 뜻밖의 사람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화사한 봄볕 아래에 그림 같은 미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문평은 순간적으로 천마가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 줄 알았지만, 그가 온화하게 미소 짓는 것을 보고서야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검박한 청의에 피처럼 붉은 띠를 허리에 맨 남자는 다름 아닌 옥기린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관 형. 별래무양하셨습니까.”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깊숙이 포권을 취하는 정중한 태도에, 문평도 마주 답례를 했다. 기껏해야 하루를 못 보았는데, 몇 년을 못 본 듯 정색을 한 인사가 어째 낯간지러웠다.
“저야 정도맹 측의 후의 덕분에 편히 지냈습니다. 그런데 연통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죄송합니다. 결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마음이 앞서는 바람에 예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실은 다름이 아니라, 방금 보림문保林門에서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신의 본인은 아니지만, 석계 선생께서 더 이상 가르치실 것이 없다고 극찬하셨던 수제자이니 아이에게 필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석계石谿란, 신의 엄만형嚴萬形의 호다. 자옥의 절맥을 고치기 위해 의원을 초빙했다더니 그 의원이 벌써 도착을 한 모양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문평은 반색했다.
“벌써 도착했습니까? 시간이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예. 다행히도 마침 근처에 있다가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길이라 오래 지체할 수는 없지만 아이의 병증 정도는 봐줄 수 있다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자옥을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한데 마침 그럴싸한 핑계까지 생겼다.
문평은 망설이지 않고 우경을 자옥의 방으로 안내했다. 파면객은 백우경이 나타나자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고 있다가, 그들이 움직이자 묵묵한 태도로 뒤를 따라나섰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옥기린 대협.”
말만 앞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는 성의가 고마워 문평은 백우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예전에 곤륜성모를 만났을 때, 그녀의 정체를 몰라 미처 아이를 보이지 못했다는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던 문평에게 지금의 치하는 정녕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였다.
“무슨 말씀을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사후 약방문일 뿐입니다. 어찌 보면 그 아이가 그런 험한 꼴을 당했던 것은 저희 강호인들이 제 할 도리를 다 못했기 때문입니다. 공과를 따지자면 공보다는 과가 더 크니, 생색내어 말할 것은 못 됩니다.”
헌앙한 기도의 고수가 태도조차 가지런했다. 마교인들은 이런 걸 가지고 정파인의 위선이네 뭐네 하지만, 그렇든 말든 간에 일단 듣기는 좋았다.
말 예쁘게 한다고 누가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고 빈말이나마 반듯하게 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 같은 말을 해도 꼭 한 번 비틀어서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어떤 인간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위선이란 인간 생활에 꼭 필요한 예의의 일종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옥아. 자옥아? 안에 있느냐?”
얼마 걷지 않아 그들은 자옥의 방 앞에 도착했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안 될 만큼 조용한 방 앞에서, 기척을 낸 문평은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방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혹시 못 들었나 싶어 다시금 목소리를 높여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전무했다.
“혹시 안에 없는 게 아닙니까?”
설사 몸을 숨기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공을 모르는 어린아이이니 사람의 기척은 느껴져야 하는데, 방 안에서는 그런 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문평보다 기감이 예민한 백우경은 그 사실을 먼저 알아차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문평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대답 없이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안으로 뛰어 들어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자옥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있다가 나갔다는 흔적조차 없는 말끔한 방이다.
혹시나 단서가 있을까 싶어 꼼꼼하게 방 안을 훑어보던 그는 없어진 것이 아이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는 물론이고, 그 녀석이 들고 있던 보따리까지 함께 사라졌다. 보따리라고 해봐야 천마가 사줬던 비단옷 두어 벌이 고작이지만, 그것까지 사라졌다는 것은 아이가 아예 짐을 챙겨 나갔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 애가 과연 자기 발로 나간 것일까? 여태껏 동행한 일행들에게 작별조차 하지 않고서?’
그 아이가 낯을 많이 가리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진 않았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지나치게 봐서 그렇지,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쯤은 영리하게 구분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점점 더 기분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말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던 까만 눈동자가 생각난다. 끝까지 돌봐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곁을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꼴만은 나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냥 사라진 것도 아니고 납치가 된 것이라고, 문평은 직감했다.
어제 오후에 당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았다니, 자신이 너무 안이했다.
정도맹의 코앞에서도 자옥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이다. 귀두삼귀가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순순히 포기할 족속들이 아니건만, 설마하니 이렇게 빠르게 손을 쓸 거라고는 예상치 못하는 바람에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아이가 사라졌다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심상치 않은 상황을 깨달은 백우경은 안색을 달리했다. 어린아이가 사라졌다. 무려 정도맹의 내부, 가장 귀한 손님들만을 모신다는 영빈관 안에서.
백우경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문평은 굳은 얼굴을 하고 주위를 노려보며 빠르게 말했다.
“언제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침 식사에 나오지 않았고, 오전에도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어제의 심문이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 여겼지만, 실은 그게 이유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이는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습니까?”
“전 어제 외출을 했었기 때문에 오전 이후로 쭉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문평이 그를 돌아보자, 파면객이 문평의 손바닥에 빠르게 글씨를 썼다.
“어제 오후에, 심문이 끝난 직후라고 합니다. 이곳까지 데려다주고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하셨다고 하니 저녁도 되기 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벌써 한나절 동안 그 아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로군요.”
백우경의 지적은 그가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이 아니라 어제저녁쯤에 이미 납치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겠지만 문평은 그건 아닐 거라고 판단했다.
어제 오후라면 귀두삼귀의 실패가 교의 윗전에까지 알려지지는 않은 시점이었다. 무생교의 정보망이 아무리 빨라도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상황을 알아차렸을 리는 없다.
“아직 단정을 내리기는 힘듭니다. 저녁 시간과 아침 시간 내내 아이가 없었다면 시비들이 먼저 의심을 품었을 테니까요. 여태껏 보고가 없었다는 것은 시비들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아이가 사라진 시점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을 겁니다.”
문평은 자신이 왜 어제를 의심하지 않는지를 말할 수 없었기에 대강 둘러 말하며 실종 시각을 한정시켰다. 문평의 추론이 틀리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백우경의 눈에서 형형한 불꽃이 튀었다.
“그렇다면 적도들은 멀리 가지 못했겠군요. 맹 내에 비상종을 울리겠습니다. 아이를 찾아와야지요.”
백우경은 결코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정도맹 내에 일급 경보 태세를 알리는 비상등이 울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타종에 놀란 무사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천기수사에게 지휘권을 일임받은 백우경은 각 대대의 무사들에게 상황을 하달하고, 아이의 용모파기를 내붙였다.
곧이어 육중한 정도맹의 대문이 열리고 무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악한 사교 집단에 납치당한 어린아이를 찾기 위해 수백의 무사가 무창 안으로 한꺼번에 몰려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어린아이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마치 하늘로 솟았거나 땅속으로 꺼진 것처럼, 자옥은 완전히 증발했다.
새벽이 다 되도록 아이를 찾아다니던 문평은,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팔다리는 피곤 때문에 축축 늘어지고, 제대로 걷는 것도 힘들어 허리까지 굽을 것 같다.
사방 곳곳을 헤매느라 전신이 먼지로 가득한 것을 털지도 않은 채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왔던 문평은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인영에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밤도 늦었는데 천마가 그의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지런한 태도로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천마는, 문평이 오히려 자신의 휴식을 방해한 것처럼 못마땅하게 시선을 들더니 그의 몰골을 찬찬히 훑어 내렸다.
“오셨습니까?”
뭐라고 더 말을 할 기력도 없다. 문평은 시큰둥한 태도로 천마를 아는 척했다. 천마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미간에 내 천 자로 주름이 섰다.
“지금껏 어디에 갔다 오는 거냐? 오늘은 밖에 나갈 생각 말라고 분명히 일렀을 텐데.”
아무리 외출을 하고 왔어도 이렇듯 일이 커졌으니 저간의 사정쯤은 들었을 텐데, 천마의 태도는 그를 개의치 않은 듯 냉랭하기만 했다.
생판 모르는 남이라도 취하지 않을 무미건조한 태도가 야속해, 문평은 울컥하는 기분으로 사실을 고했다.
“자옥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애가 사라졌다고요. 무생교에게 납치가 된 겁니다. 그러니 찾아야 할 것 아닙니까?”
문평이 주장한 것은 인정仁情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납득할 보편타당한 논리다. 그러나 천마에게 보통 사람의 감정을 바란 것은 무리였던지, 그는 하나도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무생교가 그 애를 납치해 갔다고 누가 그러더냐?”
천마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무생교가 아니고서야 그 아이를 데려갈 자들이 없지 않습니까? 어제의 일만 봐도 그렇고…….”
거기까지 말하던 문평은 문득, 지금의 상황이 상당히 낯이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문평이 천마에게 어떤 상황에 대해 호소를 하고, 천마는 거기에다 대고 생뚱맞다는 듯이 ‘~가 ~하다는 것은 누가 한 말이냐?’라고 되묻는 것 말이다.
그의 기억에, 이런 경우 대부분 천마가 범인이었다.
“설마 해서 여쭙는 겁니다만……, 자옥이를 데려가신 분이 교주님이십니까?”
아니겠지. 아무리 천마라고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제멋대로일까. 머리 한편에는 천마를 믿어주고 싶은 마음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제껏 당한 바가 적지 않았기에 한 번 머리를 들기 시작한 의심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문평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천마를 살폈다. 천마는 천하의 바보천치를 보는 표정으로 그런 문평을 마주 보았다.
“당연히 내가 데려갔지. 설마하니 무생교가 그렇게 손이 빨랐을 거라고 믿느냐?”
애가 없어지는 바람에 사람 애간장이 다 녹은 줄도 모르고, 천마는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범행을 시인했다.
그 말을 들은 문평은 속이 확 뒤집어졌다. 그게 그렇게 자랑스럽게 인정할 일이란 말인가? 내가 그 일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신 겁니까? 말도 없이 애를 왜 데려가셨어요?!”
애가 없어져서 난리가 난 것은 자신들뿐만이 아니다. 백우경도 그렇고 정도맹의 수뇌부도 그렇고, 모두가 발칵 뒤집어져 초비상사태로 돌입했다. 애가 없어진 것도 없어진 거지만, 정도맹 내부에서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했다는 사실이 실은 더 큰 문제였다. 정도맹 전체에 아직도 전시 체제에 준하는 1급 경계령이 유지되고 있었고, 수백의 무사들은 무창 곳곳을 헤매는 중이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확대된 사실을 천마가 모를 리 없었다. 아마 천마라면 일을 벌이기 이전부터 이러한 사태를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적진 한가운데에 맨몸으로 들어와 있으니 납작 엎드려 있어도 모자란 판국인데, 대체 뭘 믿고 이런 엄청난 일을 만들어 냈는지 문평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죄 없는 어린것이니 목숨이나마 부지하게 해주려고 데리고 나갔지. 그럼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이곳에 계속 놔두란 말이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곳에 놔두면 죽다니요.”
“너는 어제 일을 겪고서도 모르겠더냐? 이곳이야말로 그 아이에게는 사지가 아니더냐.”
천마가 한심하다는 듯 핀잔했지만, 문평은 여전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의 일은 그도 겪었다. 무생교에서 아직도 자옥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문평은 그렇기에 더욱 정도맹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리는 적이 강대하니 그를 지키는 힘도 강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도맹이 잘 방비만 한다면 그 어린 목숨 하나 지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터였다.
“교주님께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무생교가 호시탐탐 그 아이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더욱 정도맹의 울타리가 필요한 게 아닙니까?”
문평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소리만 해대자 천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은 마교의 밥을 10년이나 먹어 놓고도 이렇게나 물렀다. 지금쯤이면 위선자의 위선만큼 믿지 못할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 때도 됐는데 말이다.
‘닳을 대로 닳은 녀석이 묘한 데서 순진하단 말이야.’
아직도 세상의 선의 따위를 믿고 있는 그를 보며 천마는 홀로 혀를 찼다. 윤승효에게 사정없이 약한 것을 봤을 때부터 짐작했던 것이지만, 이 녀석에게는 아직도 선과 정의에 대한 기묘한 동경이 남아 있었다. 비록 자신에게는 없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아직도 그런 것이 남아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귀엽고 깜찍한 소망이지만 불행히도 사실은 아니다. 그 대상이 정도맹이라면 더욱 그랬다. 정도맹은 천마가 아는 위선자들 중 가장 더럽고 썩은 자들만이 드나드는 장소였다. 겉으로는 샘물인 척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시궁창과 다름없다.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그 이면을 읽어 봐라. 어제의 일이 왜 일어났을 것 같으냐?”
거짓말쟁이는 용서해도 머리 나쁜 자는 용서 못 하는 게 천마다. 그나마 상대가 문평이니까 말로 하고 끝내는 거지, 제자라도 되었으면 단박에 비수부터 날리고 봤을 거였다.
하지만 평소의 천마가 얼마나 무지막지한지를 모르는 문평은 대놓고 무안을 주는 그의 태도에 내심 불만을 느꼈다. 그렇게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처럼 영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어째서 이해를 못 하나 모르겠다. 자신에게 천마 같은 능력이 있다면 마교 교주를 했지 하급 무사나 하고 있었겠는가?
“……자옥을 죽여야 하는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불만이 치민다고 해서 천마가 직접 하문한 일에 입을 닫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평이 마지못해 대답을 하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그놈들에겐 자옥을 꼭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럼 관점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거라. 너라면 어떤 상황이어야 그 아이를 죽이려고 하겠느냐? 너도 알다시피 그 아이가 알고 있는 것은 생강시에 대한 일뿐이었다.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 탐문해 본 결과로는 그런 것도 아니었지.
그 애는 무생교에 대해 더는 아는 것이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정도맹처럼 경계가 철저한 곳에서 보호까지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왜 꼭 죽여야 할 것 같으냐? 가만히 놔두어도 해가 될 것은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천마의 질문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절대로 순순히 가르쳐 주지 않겠다는 듯 유도 신문까지 던져 가며 문평을 꼬셨다.
항상 가르치는 입장에 있었던 사람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천마는 하나를 가르쳐도 단순하게 알려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언제나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라며 끝까지 밀어붙인다. 덕분에 문평은 본의 아니게 뇌를 혹사해야 했다.
“그들이 보기엔 무해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 아이는 결정적인 무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아는 게 없지만, 장래에는 정말 중요한 것을 폭로할 수도 있는 단서를 말입니다.”
거기까지 말을 하던 문평의 뇌리에 퍼뜩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문평은 빳빳하게 굳은 채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천마를 돌아보았다.
“어쩌면 그 아이는 누군가를 봤던 건지도 모릅니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미처 모르는 상황에서 우연히 마주쳤겠지요. 하지만 그 사람은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생교와 연결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인물이었으니까요. 이를테면…….”
당추양.
문평은 오늘 낮 파면객이 털어놓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걸 이 상황에 대입해 보면 모든 것은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분명히 만난 적이 없었을 사람을 보고 자옥이 왜 놀랐던 건지, 자신 때문에 기겁하는 어린아이를 보고서도 당추양은 어째서 아무런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는지. 문평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파의 인사 중에 있었겠지. 자옥이 알아봐서는 안 되는 사람이. 아마도 정도맹 내에서 마주치게 될 가능성이 높을 상대였을 것이다. 가만있어 보자. 이번에 당문에서 파견된 장로가 누구지?”
“……표비수 당추양입니다.”
“그럼 그놈이겠군. 일이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앵속은 탈취당한 게 아니라 스스로 제공한 거다. 어리석게도 직접 거기까지 가서 전해 준 거겠지. 무생교가 흘린 뒤를 당문이 닦느라 애썼겠구나. 애꿎은 당문오독을 절반이나 날려야 했을 테니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문평처럼 파면객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도 아닌데, 천마는 그 상대까지 정확히 맞췄다.
‘뭐야? 단지 귀두삼귀가 여전히 자옥을 노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거기까지 추리한 거야?’
귀신같이 맞아떨어지는 천마의 추리에 문평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같은 사람이라고 머리까지 다 같은 수준인 것은 아니었다. 문평의 두뇌가 녹슨 박도라면, 천마의 두뇌는 예리하기 그지없는 보검이었다.
천마의 추론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문평은 낮에 있었던 파면객과의 대화를 고스란히 전했다. 천마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문평은 말을 하면서도 맥이 풀렸다. 이런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마음을 졸이며 애를 찾아다녔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몸도 성치 않은 상황에서 무리까지 해가며 돌아다녔건만 그게 모두 헛고생이었다니. 너무 기가 막혀서 허탈하고 진이 빠진다.
“그래도 미리 귀띔은 좀 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정말로 잃어버린 줄 알고 혼을 뺐습니다.”
천마가 아이를 빼돌렸던 이유에 대해서는 이제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띔조차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 하지 않고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문평은 이야기를 맺는 끝에 타박을 매달았다. 그랬더니 천마가 문평을 째려보았다. 누가 누굴 노려봐야 하는 상황인데?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천마의 적반하장은 멈출 줄 몰랐다.
“그러기에 내가 미리 일러두지 않았더냐. 오늘은 용화소축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그게 그 뜻이었습니까? 그렇게만 말하면 대체 누가 알아듣습니까?”
“이제는 알 때도 되지 않았느냐. 내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경단이 생긴다. 너 나쁘라고 시키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시키면 시키는 대로만 하거라.”
진짜로 잘난 사람이 자기 잘났다고 으스대는데 그 당연한 모습이 왜 이렇게 보기 싫은 걸까. 문평은 밑도 끝도 없이 말 한마디 던져 놓고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주장하는 천마를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는 이 인간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실은 저 사람이 아직도 인간의 범주에 속해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그럼 자옥인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정도맹의 힘으로도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곳에 잘 있다.”
“저뿐만 아니라 옥기린께서도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순수하게 걱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차라리 대놓고 아이를 데려간다 하시는 게 낫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랬다면 다시 데려와야 하는 일이 생겼을 때 도로 데려와야 하지 않겠느냐? 무슨 수를 써서 되불러 올지 모르는 일인데 위험하게 뭣 하러?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 아이 행방은 모르는 것으로 해둬야 한다. 네가 오늘 시치미를 잘 떼주었으니 앞으로 새삼 추궁받는 일은 없겠지.”
후룩, 차를 마시며 천마는 조용히 말했다.
‘역시 일부러 그런 거였잖아, 일부러!’
자신을 미끼로 써서 의심을 피해 갔다고 고백하는 거나 다름없는 천마의 말에 문평은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이러니까 내가 당신을 못 믿는 거잖습니까.’
문평은 마음속으로 한탄하듯 생각했다. 결과는 좋을지도 모르지만, 항상 과정이 문제라고요. 죽을 목숨 구해 주겠답시고 죽기 직전까지 사람을 끌고 다니면 그 사람이 과연 고마워할 것 같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댁만큼 단단하지 못하다는 걸 왜 이해를 못 합니까?
그러나 문평은 알지 못했다. 천마 딴에는 문평을 위해 많은 양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문평이 자옥을 아끼지 않았다면 그는 자옥을 피신시켜주는 친절 따윈 베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아이를 미끼로 삼아 정도맹 안에서 맴도는 무생교의 무리를 끌어냈을 터였고, 그자들을 모두 도륙하고 나서야 아이를 풀어 줬을 것이다.
그런 쉬운 방법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자옥을 그런 식으로 이용했다간 문평이 더 큰 상처를 입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쓸데없이 정만 많은 문평은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마음을 아이에게 주고 있었다. 그러니 그 아이가 다치면, 문평까지 같이 다칠 게 분명했다.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문평이 스스로를 자옥의 보호자라고 생각하고 있듯, 천마도 문평만큼은 지켜주고 싶었다. 원래 화단을 지키는 건 주인의 의무다. 잡초는 그냥 잘 자라기만 해도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