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14 장 (15/26)

제 14 장

낮에 나누었던 대화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며 문평을 괴롭혔다.

처음에는 천마가 자신을 왜 속였는가가 문제였지만, 천마의 고백이 있고 난 이후로 그것은 부차적인 사안이 되어 버렸다. 마음에 둘 여지도 없다고 여겼지만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본능은 그의 감성을 압도했다. 눈앞에 들이닥친 위협이 있으니, 그의 생존 본능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설사 그 사람의 마음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안 되는 일이다. 남자고 여자고를 떠나서 그 사람만은 절대 안 돼.’

그냥 해본 소리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아니라면 정말 큰 문제다. 자칫하면 인생 자체가 저당 잡힐지도 모르는 일이니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한다.

이번 일만 봐도 알 수 있듯 천마는 남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문평에게 진심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일로 상처받은 문평이 눈앞에서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스스로의 정당함을 변호할 뿐 마지막까지 결코 사과는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친다면 문평은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대상이다. 그런데도 그는 문평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헤아려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굽힐 생각이 없는 것이다. 무서우리만큼 철저한 자기 본위. 그의 오만함은 실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물론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다. 그는 천하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고, 홀로 정점에 선 채 수십 년을 지내왔다. 그 길고 긴 세월 동안 다른 이를 위해 스스로를 꺾을 필요가 없었고, 남에게 양보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오연함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에서 나온 것이고 그 자부심에는 명확한 실체가 있다.

그런 존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상대는 자기 자신뿐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분석은 해도 공감은 하지 못했다. 문평은 그런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천마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딱 하나, 주제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그는 자신이 천마를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러니 그가 고민하는 것은 천마를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서 잘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좀 더 전략적인 차원에서의 고민이었다.

“내리지 않으십니까?”

그가 골똘한 생각에 잠긴 사이, 마차는 객잔 앞에 도착했다. 어느새 날은 저물어 사위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딴생각을 하느라 마차가 선 줄도 몰랐던 문평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멍하게 있다가, 부름을 듣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윤승효의 모습으로 완벽히 돌아간 천마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쪼르르 내려선 자옥이나 말 없는 파면객도 묵묵한 태도로 그가 마차에서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문평은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이게 다 천마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천마는 매력적인 윤승효의 미소를 지으며 문평을 바라볼 뿐이었다.

‘천마 주제에 그 사람의 표정으로 웃지 말란 말이지.’

옛사랑의 앙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문평은 속으로 울컥하고 말았다. 천마가 윤승효고, 윤승효가 천마라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이해해도 감정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문제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지금에 와서도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릿해진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그리 쉽게 끝낼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이런 꼴을 당하고도 아직껏 잔재가 남아 있다니, 사랑이 끈질긴 건지 그가 미련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말들에겐 콩을 섞은 여물을 주고, 쉴 곳을 마련해 주게. 방은 사람 수대로 준비해 줬으면 좋겠군. 식사는 씻은 후에 하도록 하지. 방으로 안내해 줄 수 있겠나?”

천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행의 우두머리 노릇을 해냈다. 관화官話4)다운 기품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귀공자의 말투. 우아하고 온후한 태도며 상냥한 눈빛까지.

문평이 사랑했던 그 모습은 어느 한 군데 달라진 곳이 없었는데도, 저 사람은 더 이상 그가 사랑하던 이가 아니었다.

문평은 천마가 자신에게 저지른 일의 진정한 의미를 알는지 궁금했다. 언젠가는 저 사람도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똑같이 겪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날이 올 것 같지는 않아서, 문평은 괴롭고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상의를 벗고 있던 문평은 등을 돌렸다.

당연히 파면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등 뒤에 있는 사람은 윤승효, 아니 윤승효의 탈을 쓴 천마였다. 문평의 눈이 천마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파면객도 따라왔으려나 하는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으나, 천마는 매정하게도 문을 닫으며 그 바람을 걷어 버렸다.

“……어쩐 일이십니까?”

반쯤 벗었던 상의를 다시금 어깨 위로 끌어 올리며 문평이 어색하게 물었다. 파면객에게 부탁했던 맑은 물이 든 대야와 흰 수건을 대신 들고 온 천마는 내외하는 규수처럼 몸을 사리는 문평에게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붕대를 갈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람보다는 내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대신 들어왔지.”

문평의 입장에서는 천마만 아니라면 세상의 어느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손수 하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내버려 두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신경이 쓰이니 어쩔 수 없지. 자처한 번거로움이니 누굴 탓할 것도 못 된다.”

퉁명스러운 태도를 감추지 못하고 꼬집듯이 말했는데도 천마의 태도는 답지 않게 선선했다. 그는 대야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붕대를 갈 준비를 했다.

“안 벗나? 붕대를 갈아 달라고 했다며?”

한쪽 팔에 깨끗한 붕대를 걸친 천마는 망설이고 있는 문평을 재촉했다. 깊은 한숨을 쉰 문평이 하는 수 없이 옷을 벗었다.

노파의 설명에 의하면, 화상으로 인한 화농은 천지간의 나쁜 기운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붕대를 가능한 한 자주 갈아 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천마의 앞이라고 해서 옷고름을 부여잡을 일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진짜로 상처가 덧나 죽을 고생을 하게 될 수도 있었다.

문평이 상의를 벗은 후 등을 돌리고 서자 천마가 감아 놓았던 붕대를 풀었다. 바늘 떨어질 소리도 들릴 만큼 적막한 방 안엔 사락사락 천이 흘러내리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민망한 광경을 연상케 하는 소음에 문평은 짐짓 먼 곳을 보며 딴청을 부렸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긴장된다.

“상태를 보니 고약도 갈아야겠다. 좀 따끔할 거다.”

그가 입은 상처는 하필이면 등허리의 한중간, 견갑골 사이에 위치한 등 한가운데 부분이다. 혼자서는 치료는커녕 손도 못 대는 부위인지라 붕대를 감을 때도 고약을 바를 때도 늘 남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환부에 닿았다. 환부 전체를 덮고 있는 고약을 제거하는 손길은 몹시 조심스러웠으나 짓무르고 화농이 인 피부는 그 정도의 자극에도 못 이기고 경련을 일으켰다.

“으읏.”

접착력 강한 고약이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는 듯 피부를 잡아당겼다. 뜻하지 않은 고통에 신음을 흘렸던 문평은, 더 이상의 신음을 참기 위해 이를 꽉 깨물었다.

쯧. 천마가 낮게 혀를 찼다. 그의 손길이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래도 다행이군. 조금만 잘못 맞았으면 척추를 다칠 뻔했어.”

악기惡氣를 흡수해 검고 딱딱해진 고약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후 천마가 혼잣말을 했다. 그렇지만 말하는 투로 봐서는 전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눈치가 아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인데도 한기를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싹하니 느껴지는 그 감각에 벗은 피부 위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추운가?”

그냥 묵묵히 약만 발라 줬으면 좋겠는데 천마는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그가 직접 한 질문을 무시할 수 없었던 문평은 어깨를 움츠리며 짧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거짓말이 습관화됐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닫혔다. 손을 움직였는지 발을 움직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이뤄진 능공섭물綾空攝物의 한 수는 실로 절묘했다.

“섭생을 좀 더 했으면 좋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시간이 없다. 그래도 그 할망구가 의술 하나는 확실히 뛰어나니, 주의 사항만 착실히 지킨다면 이보다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운 고약이 등에 발리는 느낌이 들었다. 꿀에 섞은 진득한 약재들이 향기로운 냄새를 내고 있다.

‘그 할망구?’

제아무리 천마라고 하더라도 너무한 명칭이라 문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자신은 그 노파 때문에 목숨을 건진 거나 마찬가진데, 말을 해도 너무 함부로 한다.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사이냐는 비꼼을 대놓고 할 수 없어, 문평은 가능한 한 돌려 말했다. 그런다고 천마가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다. 그는 낮게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에 힘을 꾹 주었다.

“알다마다.”

“억. 아십니까?”

억 하는 소리는 감탄사가 아니라 고통 때문에 나온 반사적인 신음이었다.

“늙어도 죽지 않는 늙은이지. 너는 은혜 갚기를 좋아하는 듯하니 이름 정도는 들어 두어라. 그 노파의 별호는 곤륜성모다. 너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유치하게 걸어오는 싸움마다 한 번도 안 져주고 꼭꼭 되받아치는 천마는, 응징을 하고 나서야 성이 풀렸는지 누그러진 음성으로 노파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곤륜성모요? 그렇다면 그분은 전전대의 고수 아닙니까? 그런 분이 아직도 살아 계셨습니까?”

“말했지 않아. 늙어도 죽지 않는다고.”

천마는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듯한 투로 곤륜성모의 장수를 비꼬았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 역시 그다지 남 말할 처지는 못 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곤륜성모는 세월이 너무 오래 지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 별호를 보면 알 수 있듯 곤륜파 출신의 노고수다. 천마보다도 오히려 한 배가 높은 배분으로 의술과 무공이 매우 빼어났는데, 구름 위의 신선처럼 노니는 곤륜파의 다른 도사들에 비해 속세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많아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같은 곤륜파 출신이니, 그녀와 검협劍俠의 사이도 남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검협의 사고師姑였다. 천마와 곤륜성모 사이의 인연이 그것만이라면 그나마 낫겠지만, 그가 가장 아끼던 부하인 육마戮魔의 실종과도 관련이 있어 이래저래 관계가 복잡했다. 게다가 이번엔 우연히 문평의 생명까지 빚지게 되고 말았으니, 비록 한자리에서 마주친 것은 손에 꼽힐 만큼 적었어도 노파와 천마 사이의 인연은 만만치 않은 셈이다.

“운이 좋았군.”

정말, 운이 좋았다. 천마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문평의 흉터를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등 한가운데의 속을 동그랗게 파낸 것처럼 생긴 상처는 눈으로 보기에도 참혹했다. 전체적인 크기가 큰 것은 옷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고, 상태가 심각해졌던 건 그 위에 나무 파편이 박혀서다.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았으면 화농 때문에라도 죽었을 만한 상처인데, 제때 곤륜성모를 만나 무사할 수 있었으니 천운이라면 천운이었다.

그 처참한 흔적을 눈으로 확인하니 마음속이 착잡해진다. 남겨 두는 것보다 데려가는 쪽이 더 위험하다고 여겨 놔두고 간 것인데, 정작 결과는 반대가 되고 말았다. 예측이 빗나가는 일이야 예전에도 종종 있었지만, 그 실수로 인해 이토록 참혹한 결과가 나왔던 것은 오랜만의 일인지라 여러모로 입맛이 썼다.

아직 부기가 가라앉지 않아 벌겋게 부푼 피부 위에 시커먼 피딱지가 앉았다. 고름을 짰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 빛깔 자체가 얼룩덜룩하다. 그러다 보니 매끄러운 곳과 흉이 진 곳의 차이가 극명했다. 갈색의 건강한 피부는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한데, 흉이 진 상처는 눈을 뜨고 보기에도 버거울 지경이다.

‘어떻게 해야 이 흔적이 없어질까. 환골탈태라도 시켜야 하는 건가?’

천마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안쓰러운 마음이 앞서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가장자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신법 외엔 내세울 만한 무공도 없고, 심법도 형편없다. 아무래도 무공을 하나 가르쳐야 할 모양이다. 적어도 초절정 정도는 만들어 놔야 어디 가서 맞고 들어오지는 않을 거 아닌가.

딴에는 그답지 않은 기특한 생각을 하는 중이지만, 그런 천마의 속내를 문평이 알 리 없었다. 그는 묵묵히 등허리를 쓸고 있는 손길을 느끼고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약을 바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손가락이 등을 떠나지 않는다. 상처를 만지는 것도 아니고 상처를 입지 않은 가장자리를 쓰다듬듯 어루만지고 있으니, 문평이 착각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람 등짝이 이 지경인데도 그럴 생각이 드는 건가. 천마의 행동이 유혹이라고 생각한 문평은 내심 아연해졌다. 원래부터 신용 따윈 눈곱만큼도 없는 천마였기에 그의 착각은 곧 단정으로 변해 버렸다.

‘하긴 그렇겠지. 개가 똥을 끊겠나.’

파면객에게 했던 부탁을 가로채어 들어왔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했다.

“오늘 밤은 무리입니다, 교주님.”

그래도 안 된다. 오늘은 절대로 안 된다. 문평은 독하게 마음먹고 자신을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몸을 떼 냈다.

“뭐라고?”

“오늘만큼은 무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체력이 바닥입니다.”

이 녀석에게 무슨 무공을 가르쳐야 할까. 시간도 없고 기초는 더욱이나 없는 놈이니 대기만성형의 무리武理는 가르쳐 봤자다. 교의 비고에 영약이 얼마나 남아 있었지? 이 녀석의 수준에 걸맞은 영물이 있던가? 문평을 훈련시킬 계획을 짜느라 한창 딴생각에 빠져 있던 천마는, 두 번째 대답을 듣고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내가 뭘 어쨌다고?’

울컥 기분이 상해 버린 천마는 손을 멈추고 문평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노려보는 시선을 느낄 텐데도 꿋꿋하게 시선을 돌리지 않는 문평에게는 결사 항전의 의지마저 느껴졌다.

‘하, 나 참. 기가 막혀서.’

자신의 인간성과 상식에 대해 어마어마한 모욕을 받은 천마는 너무 어이가 없어 화조차 나지 않았다. 자신을 대체 어떻게 봤기에 이따위 착각을 하는 걸까? 찔러 넣는 순간 그대로 급살 맞을 환자를 가지고 그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이놈은 제가 그렇게나 매력적인 줄 아나?

서시와 같은 미인이면 찡그린 얼굴조차 아름다워 보인다지만, 문평은 그 정도의 미남이 결코 아니다. 병색이 완연한 병자 주제에 이건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가? 자신에게도 심미안이라는 게 있다는 걸 무시하는 건가?

“……어디 가서 맞고 들어오지 말라고 무공이나 하나 가르쳐 주려고 했더니만, 그 무슨 헛소리냐.”

천마는 끓어오르는 노화 때문에 턱을 딱딱하게 굳히며 일침을 놓았다. 뒤돌아선 문평의 등이 움찔 굳었다. 기분이 확 상해 버리고 만 천마는 고약통을 닫고 문평을 다시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화가 난 손길로 붕대를 칭칭 감아 버리고 만다.

‘무, 무공? 무공이라고?’

무공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는 아니지만, 문평도 명색은 무인이다. 무인이 상승의 무공을 바라는 것은 승려가 화두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간절한 소망이다. 더군다나 최근에 끔찍한 꼴을 당할 뻔한 경험까지 있다 보니, 천마의 말이 더욱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마가 아닌가. 이 사람이 아는 것 중 가장 사소한 초식만 전수해줘도 나에겐 목숨을 구할 절기가 될 텐데.’

은가보다도 비싼 비단 화복을 얻어 입을 때도 생기지 않았던 욕심이 문평의 안에서 생겨났다. 무인이라면 무조건 힘이다. 천마도 그놈의 힘 하나로 저렇게 자기 멋대로 살 수 있는 거고, 자신 역시 힘이 없어서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이 아니던가.

기회란 있을 때 잡아야 한다. 자신처럼 운 없는 놈팡이에게 이런 기연이 또다시 다가올 확률은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 지나가던 도둑놈 머리에 떨어지는 것보다 더 적을 터. 문평은 머뭇머뭇 천마를 돌아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무공이라고 하셨습니까?”

빈말이든 아니든 일단 입 밖에 꺼낸 말이다. 그를 믿고 없는 용기를 쥐어짜 말을 걸었더니 천마가 문평을 노려본다. 단둘이 있을 때도 역용을 풀지 않아 여전히 윤승효의 모습인데, 그렇지 않아도 파란 눈에 새파랗게 날을 세우고 있으니 영락없는 날붙이다.

“허튼 생각 하는 와중에도 그 말은 귀에 들어오더냐?”

못마땅한 듯 낮게 혀를 차던 천마가 냉랭히 대꾸했다.

“정말 무공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스스로는 죽어도 꺼낼 수 없는 말이지만, 빌붙을 핑곗거리가 생겼으니 이를 놓칠 수 없었다.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며 물어보자 천마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했던 말 때문에 심기가 단단히 상한 모양이다.

“가르치는 것은 상관없지만 네가 제대로 배워내겠느냐?”

상승무공일수록 자질을 따지는 게 보통이니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말속에 다른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역시도 착각만은 아닐 터였다.

“자질은 모자라겠지만,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나이도 늦고, 자질도 없는 놈이 노력조차 없으면 어쩌려고.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구나.”

“……예.”

“진짜 배울 생각이냐? 원한다면 내력을 증진해 줄 심법 하나는 일러 줄 수 있다. 대개의 경우 배움이 늦으면 효과도 느린 것이 심법이라지만, 이 심법은 보통과는 다른 탁월한 효험이 있으니 네게도 도움이 될 거다.”

천마가 넌지시 물었다. 그 질문을 들은 문평은 눈까지 열렬히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심법이 있다면 당장 배워야 한다. 도리를 벗어난 마공이라 배우다가 미쳐 사람을 잡아먹게 되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천마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구결을 일러 주었다. 뒤끝 긴 양반이 별다른 골탕도 먹이지 않고 순순히 불러주는 걸 보면 처음부터 마음에 정한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문평은 자신이 괜한 오해를 했다 자책하며 열심히 구결을 외웠다. 한 자라도 빠뜨리면 곤란했기 때문에 정말 필사적으로 외웠다.

“후위자경後位自剄 무위오경無位寤剄 반전불궤양反全不机陽.”

상승의 심법이라 그런지 직접적으로 혈도를 지칭하는 단어는 하나도 없다. 모든 구절이 은유적이고 비유적이다 보니, 학문이 짧은 그로서는 들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천마는 세 번에 걸쳐 구결을 불러준 후 그 뜻을 자세히 풀어 주었다. 혈도 명을 일일이 지칭해 운기법을 알려 주었기 때문에, 문평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 따라 운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가 윤승효가 아닌 천마에게 이렇게 밝고 맑은 얼굴을 보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신에게 진 신세가 고스란히 빚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렇게 기뻐하는 것을 보면, 약한 자의 설움이 내심 뼈저리게 깊었나 보다.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운기를 하고 나면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나를 찾아도 좋다.”

그렇게 좋아할 일이 아닐 텐데.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기쁨에 들뜬 문평을 심술궂은 눈으로 보며 천마는 생각했다.

그가 문평에게 가르친 심법은 채양보음술彩陽補陰術, 아니, 정확히 말해 채양보양술彩陽補陽術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잘못된 비방들과는 달리 도가 정통 양생養生의 도에 더 가까웠지만 말이다.

제대로 된 보양술은 기혈을 단단하게 하고 내력의 운행을 안정적으로 보정해 주는 효과가 있다. 근골이 이미 굳을 대로 굳었고, 재능조차 없는 문평이 초절정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내공밖에는 기댈 수 있는 게 없는데, 이는 영약만 가지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단시간에 기하급수적으로 내공을 늘릴 수 있는 방법 중 이것만큼 효과가 좋은 것은 달리 없다.

이놈 저놈 아무나 올라타고 다니면 잡기가 섞여 불순해지겠지만, 문평은 그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문평이 올라탈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그러니 그가 흡수하는 내공의 정순함은 걱정할 바가 못 된다.

이러니까 문평에게 미움받는 줄은 모르고, 천마는 자신의 선택이 탁월하다고 자화자찬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심술 반 뒤끝 반으로 저지른 일이면서도 후회조차 없다는 게 가장 문제지만, 불행히도 천마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속도를 냈으면 사흘이면 갔을 거리를 닷새 동안 달려, 그들은 무한武漢에 도착했다.

강호인들에게는 정도맹의 본거지로 더 유명한 무한은, 호북성의 성도省都로 오랜 세월 번영해 온 도시다. 중원을 횡으로 길게 가로지르는 양자강揚子江과 한수漢水의 합류 지점에 위치해 수륙 교통의 요충지이며, 세 가지 방향에서 뻗은 관로의 교차점이라 육로의 거점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무한은 구성지회九省之會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아홉 성의 필마가 모두 모인다는 뜻으로 무한의 사통팔달한 교통로를 적시한 별명이었다.

정도맹은 무한 중에서도 무한삼진武漢三鎭 중에 하나인 무창武昌에 위치했다. 오나라의 손권孫權을 비롯해 숱한 영웅들이 차지했던 병마필쟁兵馬必爭의 땅은, 오늘날 정도맹주인 현현천강玄玄天剛 장성학將星學을 필두로 한 중원 정파가 차지하고 앉아 천하에 그 위세를 뽐냈다.

‘세상에. 대단하군.’

문평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장관에 혀를 내둘렀다. 눈 두는 데서 눈 두는 데까지가 모두 다 같은 담벼락이다. 보통의 장원처럼 낮지도 않은, 무림인들조차 단숨에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삼 장여의 담장이 마치 절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끝없이 솟아 시야를 가렸다. 그것은 담장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성벽 같았다. 마주 보는 상대에게 압도적인 위압감을 선사한다는 점이 특히나 그러했다.

“어느 곳에서 오셨습니까?”

그들의 마차가 정문에 도착하자, 형형한 기도의 수문위사가 말을 걸어왔다. 차양을 걷은 천마가 바깥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말 못 하는 파면객에게 용건을 말하라 전할 수는 없는 일인지라 나서는 것은 내내 그의 몫이었다.

“화괴花怪라고 합니다. 배첩은 없습니다.”

수문위사가 천마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화협 윤승효가 색목을 가졌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 그는 배첩보다도 본인의 인상 자체가 가장 큰 통행패였다.

“기다리고 계시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쉽사리 통행에 대한 허가가 떨어지고, 세 대의 마차가 나란히 들어갈 수 있는 정문이 서서히 열렸다.

죽립을 깊게 눌러쓴 파면객은 말을 몰아 정도맹 안으로 들어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도맹에 도착한 문평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필이면 옆자리에 정도 최고의 숙적 천마까지 같이 있었으니 두근거림은 두 배로 뛰었다.

‘드디어 왔다.’

이곳으로 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사랑하던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되고, 죽을 뻔도 하고, 그 와중에 새로운 무공도 얻었다. 극적인 사건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이 꼭 억겁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제는 다 끝났다. 여기까지 왔으니 적들도 더는 추적하지 못할 것이다. 늦든 이르든 도착은 했으니 포영의의 명 또한 완벽히 수행한 셈이다.

그에게는 이곳에 도착하면 해야 할 일에 대해 마음속으로 결정해 놓은 것이 있었다. 그 결정을 다시금 되새기며 문평은 떨리는 눈빛으로 정도맹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는 작은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향후 그의 미래는, 오로지 그의 이후 행동에 따라 결정될 터였다.

당금의 천하제일세는 분명 마교지만, 그 영향력이 중원 전역에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은밀하게 뻗어 놓은 세력을 치지 않는다면 그 영향력은 신강을 넘지 않았고, 그들의 행사도 중원에까지 닿지 않았다.

그에 비해 정도맹은 중원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중원 정파는 그를 구심점으로 거미줄같이 얽혀 있다. 위로는 숭산의 소림과 무당파가 있고, 서쪽으로는 화산과 제갈세가가 있다. 구파일방을 위시한 정도의 대문파는 중원 전역에 위치하고, 그 사이사이를 메우듯 중소 문파들이 맥을 잇는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도맹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마교의 그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단순히 건물의 크기만을 따진다면 마교는 정도맹의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자금성紫禁城의 대로에는 대문만 백여 개가 있다더니 여기도 그에 못지않았다. 담장은 다섯 겹에 걸쳐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거대한 연무장과 건물들이 웅장하게 들어서 있었다.

어둠이 깔리고 있는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드나드는 사람들로 길이 분주했다. 위사의 안내를 받아 가던 그들은 세 겹의 담장을 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겉보기부터가 위용이 넘치는 어마어마한 전각 앞이었다. 호화로운 편액 위에 쓰인 금빛 글씨는 용사비등龍蛇飛騰한 자태를 스스럼없이 뽐내고 있다. 천이각天耳閣이라. 문평은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명칭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있어 보자. 천이각이 대체 뭐 하는 곳이었더라?’

“이곳입니다.”

수문위사의 확언을 들은 그들은 마차에서 내렸다. 어른들이 내리니까 따라서 내린 자옥은, 커다란 눈으로 둘레둘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다리고 있었네. 윤 공자.”

전각 앞에 미리 나와 있던 두 남자가 그들을 맞이했다. 둘 다 무인이라고 하기보다는 문인에 가까워 보이는 차림이었는데, 개중에서도 나이가 든 쪽은 학식 높은 서생이나 입는다는 심의深衣를 입고 있어 유달리 눈에 띄었다.

“오랜만입니다. 제갈 대협諸葛 大俠.”

“어서 오게.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네.”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천마는 실로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심의 사내에게 인사를 건넸다.

“제 일행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은 저의 호위인 파면객이라고 하고, 이 사람은 사인使人인 관량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자옥이라고 하는데, 제가 개양에서 데려왔습니다.”

“오. 그래? 이 아이가 바로 그 아이로구먼.”

심의 사내는 누구보다도 먼저 자옥에게 관심을 보였다. 갑작스러운 주목을 받은 자옥은 멈칫하더니 어찌할 바를 모르며 맞잡은 손을 뒤틀었다. 심의 사내의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아이의 전신을 훑었다. 그 시선을 느낀 아이는 더 불안해진 모양인지 무표정하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아이는 주춤주춤 문평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마침내는 문평에게 바짝 붙어, 그에게 의지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숨겼다.

자옥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늘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멀찍하게 거리를 두던 아이가 이렇듯 스스로 다가오다니. 의지할 데 없는 아이의 마음에는 자신 같은 사람이라도 곁붙이가 되는 건가 싶어 마음이 착잡해졌다.

“허어. 겁이 많은 아이로군.”

자신의 시선에 아이가 지나치게 겁을 먹자 무안해진 심의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어린 나이에 흉악한 꼴을 당했으니까요.”

“하긴. 그렇지.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하구먼. 아, 참. 소개가 늦었네. 이쪽은 내 조카일세. 자네와 같이 이번 일을 조사할 만한 사람이라 내 미리 불러들였네.”

“안녕하십니까? 윤 대협. 소생은 백우경白遇慶이라고 합니다. 강호상에서 옥기린玉麒麟이라는 과분한 칭호를 받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윤승효입니다. 화협으로 부르셔도 좋고, 화괴라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병색 짙은 얼굴로 절뚝거리며 다가온 사람은 낯익은 이름을 내뱉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렇구나. 이 사람이 옥기린이구나.’

멀리 있을 땐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이목구비가, 가까이서 보니 확연히 구분되었다. 문평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저 심의 사내가 옥기린의 숙부라면, 그는 천기수사天技修士 제갈부諸葛赴일 것이다. 그는 현 제갈세가주였으며, 지자智者로 이름 높아 정도맹의 군사직까지 맡고 있는 뛰어난 인물이다.

그러고 보니 정도맹의 군사부 이름이 천이각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말로만 듣던 그곳이 바로 여기였나 보다.

‘천이각주나 되는 사람이 직접 마중을 나와 준 건가? 대단하네. 강호상에서 화협의 이름이 이렇게나 높았던가?’

오대세가의 세가주이자 정도맹의 군사인 사람이 직접 마중을 나온 상대다. 마교로 치면 포영의가 추밀각追謐閣 앞까지 나와 맞아들이는 상대라는 이야기다.

그렇게나 이름 높은 정파의 협객이 어떻게 천마 같은 자와 연이 닿았을까? 문평은 잠깐 본 윤승효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신분상으로 볼 때도 그렇고, 기질상으로도 그렇고 천마와 윤승효의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둘이서 한 사람의 행세를 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의 흉내를 내기 위해선 그 사람의 겉모습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말투나 취향은 물론 인간관계 전반에 대한 지식도 같이 알고 있어야 겨우 가능한 일이다. 지금처럼 처음 보는 사람을 소개받았는데 아는 척을 하거나,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문평은 윤승효와 천마 간의 관계에 대해 강렬한 의문을 느꼈다.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텐데, 물어볼 만한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이제 와 새삼 말을 꺼내기는 힘들게 됐다.

“강호를 이끌어 나가는 젊은 두 사람을 보니 기분이 좋군. 마음 같아서는 좋은 술을 꺼내 의기를 나누고 싶네만, 불행히도 상황이 너무 위중하네. 일단 들어가지. 들어가서 자네가 가져온 사안에 대해 의논해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청이 하나 있습니다. 소문을 들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 와중에 다친 환자가 있으니, 일행들이 쉴 수 있도록 조처하여 주십시오.”

군자연에 일가견이 있는 천마가 정중한 어조로 청을 넣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저 그러려니 했다. 하나 천마의 정체를 알고서 보니, 이것만큼 무서운 광경이 따로 없었다. 배분은 물론이고 나이, 무공, 신분. 그 어느 것 하나도 비교가 안 되는 상대를 향해 천마는 예의 바른 후기지수 흉내를 내고 있었다.

다락같이 높은 자존심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울컥해 판을 뒤집어엎을 것만 같은데, 그러기는커녕 멀쩡한 신색을 유지하며 생글생글 웃고 있기까지 하니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떨린다.

‘저 사람이 저 정도로 참을성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대체 누가 알까?’

문평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자신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런가? 알았네. 그렇다면 일행들은 먼저 쉬도록 보내지. 이보게. 이 사람들을 영빈관迎賓館으로 안내해 주겠나?”

“네. 대인. 알겠습니다.”

천기수사는 천마의 청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그의 명을 받은 위사의 안내를 받으며 문평 일행은 다시 마차를 타고 영빈관으로 향했다. 마교에서 하급 무사 생활만 십여 년을 했는데, 이렇듯 정도맹의 영빈관에서 쉬게 될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본인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색다른 경험에 문평은 이상스러운 감회를 맛보았다. 이래서 세상은 일단 살아 봐야 하나 보다. 다음에 무슨 일을 겪게 될지, 일단 닥치기 전에는 알지 못하니까 말이다.

정도맹의 영빈관은 그 이름에 걸맞게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세심하게 마련된 공간이었다.

영빈관은 하나의 큰 건물이 아니라 여러 개의 별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각의 건물들은 서로 널찍이 떨어져 있고, 담장과 정원수와 가산이라는 삼중의 구조가 사생활을 보장했다. 내부는 최대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신경 써서 꾸며져 있어서, 일행 전체가 불편 없이 쉴 수 있는 구조였다. 시중을 드는 시비들은 교육이 잘 되어 있고, 대접하는 음식도 질이 훌륭했다. 무엇보다도 정성이 느껴지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들은 한데 모여 저녁을 먹고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다들 별로 말이 없거나 말을 못 하는 사람들이어서 담소를 나누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피곤했던 문평은 우선 씻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잠을 자서 그런지 짧은 잠은 금세 깨고 말았다.

눈을 비비며 시각을 보니 대략 자시子時다. 밤하늘 한가운데에 걸린 달은 교교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할 일도 없고, 잠도 오지 않았다. 침상에서 몇 번을 뒤척거리던 문평은 엎드려 있는 것도 지겨워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왕 정신이 깬 거 운기나 해 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문밖에서 기척이 들린다.

‘밤도 늦은 시각에 대체 누구지?’

문평은 의아해하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어나 계십니까?”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까 저녁때 시중을 들었던 시비였다.

“네. 일어나 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늦은 밤중에 죄송하지만 천이각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직 주무시지 않으신다면, 잠깐 발걸음을 해주셨으면 한다는군요.”

이 밤중에?

“알겠습니다. 준비해서 나가겠습니다.”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찾는다니 어쩔 수 없다. 문평은 옷을 갈아입고 문밖을 나섰다. 푸른색 비단으로 만든 등을 들고 서 있던 시비가 송구스럽다는 듯 허리를 숙인다. 한밤에 끌려 나온 것은 이쪽이나 그쪽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뭐 저렇게 미안해하나 모르겠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다시 천이각으로 갔다. 큰길로 왔던 길을 꼬불꼬불한 소로로 돌아가니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 길이 지름길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천이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평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문평은 그들의 갑작스러운 환대에 놀라 우뚝 발을 세웠다. 그들이 얼굴을 들자 방 안이 갑작스레 밝아진다. 한꺼번에 촛불 수백 개를 켜놓은 것마냥 눈이 부셨다.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되는 절세의 미남자라. 마치 송옥과 반안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호사스럽긴 하지만 낭비라는 느낌이 든다. 사내 얼굴에 눈 코 입이 달렸으면 그만이지, 이만한 외모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게다가 얼굴 잘난 것들은 죄 인물값을 하는 법이다. 괴팍하지 않으면 모질고, 모질지 않으면 간교했다.

이제껏 본의 아니게 수많은 미남과 미인을 만났지만 그중에서 심성이 고운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던 문평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 오셨습니까?”

안색이 창백한 백우경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깊은 울림이 있는 듣기 좋은 저음이다. 문평은 어색하게 답례를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천마가 산처럼 놓여 있던 두루마리를 치우며 앉기를 권했다. 당연하다는 듯 자기 옆자리를 치우는 바람에 속으로 울컥했지만, 문평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았다.

“아이는 어쩌고 있습니까?”

백우경은 다짜고짜 아이의 안부부터 물었다. 초췌한 얼굴을 보니 그 자신부터 우선 쉬어야 할 듯 보였지만, 백우경은 밤늦은 시간까지 회의청을 떠나지 않았다.

“잠이 들었습니다. 쉴 틈도 없는 강행군이었던 데다 중간에 흉악한 일까지 겪었으니 고단할 만도 하지요. 당분간은 쉬게 놔둘 생각입니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은 아이니까요.”

문평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하며 슬쩍 못을 박았다. 정도맹의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자옥은 아직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데다 병까지 있었다.

수일간 아이의 보호자 노릇을 해왔던 그는 자옥에게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고 할 수 있는 한 아이를 돌봐 주고 싶었다. 끝까지 책임질 마음도 없이 이곳까지 끌고 온 것만으로도 미안한 일인데, 정도맹의 무인들이 취조를 빌미 삼아 아이를 닦달하게끔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의 말을 들은 백우경이 힘없이 미소 지었다. 저러다 당장이라도 푹 꺼꾸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맥없는 웃음이다.

“아이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습니다. 맥증을 앓고 있다지요?”

“네. 그렇다고 하더군요.”

“이야기를 듣고 보림문保林門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다행히 신의께서 제자를 보내 주신다고 하시니, 잘하면 아이의 병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맥증은 고치기에 난해한 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가능하겠습니까?”

“신의께서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누구도 고치지 못할 겁니다. 그분의 의술에 희망을 걸어 볼 수밖에요.”

그러나 자옥을 진맥하는 사람은 신의가 아니라 그의 제자다. 두 사람의 실력이 같지 않음은 자명한데 그 사람에게 과연 자옥을 치료할 능력이 있을까? 문평은 문득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으나, 더 이상은 말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평은 그들이 이런 호의를 보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자옥의 증언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 아이를 치료해 줄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 마음에 걸린다면 돈푼이나 좀 쥐여 줄 것이고, 신경이라도 쓴다면 일할 자리나 마련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한데 뜻밖에도 옥기린은 문평의 예상을 뛰어넘는 배려를 보여 주었다.

본래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은 남의 어려움을 모르기 마련인데, 이 사람은 그런 상례를 벗어났다는 사실이 이채로웠다. 진심에서 우러나왔다면 군자의 도를 갖춘 것이고, 계산에서 나온 생각이라면 진정한 효웅이다. 하지만 문평은 백우경이 둘 중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의심스럽다고 해서 그의 뜻을 거절할 수는 없는 일. 그들만큼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문평은 자신이 나서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깊은 후의厚意에 감사드립니다.”

“천만에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를 드려야지요. 윤 대협과 관 대협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개양에서의 일이 이처럼 백일하에 드러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중원의 정기를 수호하는 것이 저희 정도맹의 일일진대, 이토록 큰일이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낌새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저희의 크나큰 불찰입니다. 큰일을 막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 강호의 모든 동도들이 두 분의 의기를 존경할 겁니다.”

백우경은 정파의 협사다운 진중한 태도로 그들을 치하했다. 명가의 후예답게 몸가짐이 고상한 그는 몸이 편치 않은 상황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태도 하나하나가 정중했을 뿐만 아니라 한마디의 말조차도 태산처럼 무거웠다.

왜 그가 대협으로 불리는지는 그 모습만 봐도 짐작이 갔다. 그는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 같은 정파의 협사였다.

그럼에도 이미 한 번 호되게 데인 경험이 있는 문평은 쉽사리 그를 믿지 못했다. 상대가 아무리 정중하게 굴어도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다.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가짜 윤승효가 증명했다.

무엇보다도 문평은 백우경의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기 드물게 빼어난 외모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도저히 그 얼굴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백우경은 기분 나쁘게도 지나치게 누군가와 닮았다. 빼다 박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문평은 이래서 씨도둑질은 못 한다고 하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낮게 혀를 찼다. 거친 바닷바람 때문에 진하게 그을린 피부와 염치도 없이 환골탈태한 노인네에 비해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인상 정도가 다를 뿐, 백우경은 천마와 거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 나이 차가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쌍둥이라고 해도 믿었을 정도였다.

‘아예 분신술을 쓰지?’

제갈세가의 피라고는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그의 얼굴에서 천마의 독한 핏줄을 느낀 문평은 홀로 불평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과한 말씀이십니다. 백 대협. 저희는 그런 치하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아이들을 구하는 것은 개방과 당문이 한 일이고, 구해낸 아이들 역시 희생된 생명에 비하자면 극히 미미한 숫자입니다. 생강시는 거의 회수하지도 못했을뿐더러 음모의 배후조차 밝혀낸 바가 없습니다. 저희가 한 일이라곤 고작해야 타초경사의 우를 범한 것뿐이지요. 칭찬이 아니라 외려 질책을 받아도 모자랍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천마가 말을 받았다. 백우경이 한 말과 마찬가지로 일견 정중하게 들리는 화답이었으나 문평은 그 말속에 숨어 있는 가시를 눈치챘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배후까지 놓쳤는데 뭐가 좋다고 얼굴에 금칠을 하느냐.’ 번지르르한 미사여구를 떼고 나면 본래의 뜻은 야박할 정도로 매서웠다. 대놓고 타박하는 것보다 한결 더 신랄한 빈정거림인지라 백우경의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문평은 미묘하게 싸늘해지는 분위기를 의식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말속에 뼈가 있으시군요. 과연, 틀린 말씀이 아니십니다. 제 언행이 경솔했음을 사죄드립니다.”

백우경은 깊이 포권하며 자신의 실언을 사죄했다. 천마는 그런 백우경에게 가볍게 손을 저었다. 정인군자인 체하는 것은 천마도 마찬가지로 일가견이 있는 일. 그는 백우경 못지않게 정중한 태도로 그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런 뜻으로 드린 말이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죄를 청할 사람은 외려 이 사람입니다. 저는 사죄를 받을 자격도, 용서를 해드릴 자격도 없으니 그만 거두어 주십시오.”

백우경에게 대인의 풍모가 있다면 천마가 흉내 내는 가짜 윤승효에겐 협의지사의 골기骨氣가 있었다. 그렇기에 백우경은 풀도 밟지 않는 어진 신수인 기린의 이름으로 불리고 윤승효에겐 협과 괴의 칭호가 동시에 붙여진 것이 아니겠는가.

강호의 다른 인사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인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 세상에 이유 없는 이름이란 없구나 하고 무릎을 치며 감탄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있는 문평은 감탄 대신 코웃음만 나왔다.

‘놀고 있네.’

천마 못지않은 신랄함으로 두 사람을 깎아 내린 문평은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서는 믿을 수 없다는 편견을 더욱더 공고히 했다.

몇 달 전만 해도 이렇게까지 인간을 불신하지 않았건만, 천마와 가짜 윤승효의 연이은 등장이 그를 완전히 망쳐 놓고 말았다. 천마와 가짜 윤승효가 결국 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그 경험 중에서도 가히 백미라 할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에 비하자면 당문오독 쪽이 더 낫다. 그들은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하다. 비열하긴 하지만 적어도 일관성은 있는 데다 겉과 속이 다르지는 않지 않은가?

게다가 배신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애초부터 믿음이 생길 리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사는 게 속 편한 일이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이 사람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이 사람의 진정한 속내가 무엇일지를 궁금해하며 전전긍긍 셈하는 것은 정말로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다.

자기들끼리 한참 시시덕거리고 나서야 이야기는 겨우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시 정색을 한 백우경이 문평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심유할 정도로 검은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관 형. 여정 중에 큰 부상을 입으셨다고 들었는데, 몸도 성치 않은 상황에 이렇게 불편을 드리니 송구합니다.”

한참 전에 했던 천마의 소개를 기억해두고 있었는지, 백우경은 스스럼없이 그를 관 형이라고 불렀다. 인사치레는 이미 들을 대로 들은 터라 문평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아직 잠들기 전이었습니다.”

“실은 관 형께서 부상을 당하신 바로 그 사건에 대해 여쭤볼 것이 있어 뵙기를 청했습니다. 화협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면 좋았으련만 듣자 하니 화협께서는 습격 당시 자리를 비우셨더군요.”

말인즉슨 틀린 말이 아니다. 당시 천마는 우경 때문에 대별산으로 갔고, 진짜 윤승효는 자묘랑을 쫓아 튀어 버렸으니, 윤승효란 윤승효는 둘 다 자리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당시 급한 사정이 있어 다른 곳에 계셨죠.”

그러나 그런 자세한 사정까지 굳이 들려줄 필요는 없는 일인지라, 문평은 적당히 둘러치며 백우경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희 쪽에서도 정보가 입수되긴 했지만, 당시의 혼란이 너무 커서 정확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습격인 데다 싸움은 난전이었고, 마지막에는 화탄까지 터지는 아수라장이었으니, 그 와중에 누군가 살아남았다 한들 제대로 설명했을 리 만무했다.

백우경이 무엇을 바라는지 깨달은 문평은 그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천마도 문평의 입에서 그 일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라 관심을 기울였다.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한창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인데,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더군요…….”

문평은 이야기를 하면서, 조목조목 중요한 부분을 짚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적들은 자옥을 분명히 지목했었다.

인원은 많았지만 집단전에 대한 훈련은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건 생강시 사건에서의 무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서 공통적인 무공이나 무기는 발견하지 못했다. 일반적인 무기들보다 기형 무기를 사용하는 자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사파 쪽의 세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귀두삼귀의 무공이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절정에 이르렀다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문평은 그중에서도 계살귀가 가장 악랄한 것 같더라며, 사감이 듬뿍 담긴 판단을 내놓았다.

꼼꼼히 붓을 놀리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우경이 귀두삼귀의 이야기에 유독 관심을 보였다.

“저도 그들이 그곳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세 사람이 모두 같이 있었다지요?”

“그렇습니다. 셋 다 있더군요.”

“그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이를테면 그들이 했던 말이나 행동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들의 행동에 뭔가 특이한 점 같은 건 없었습니까?”

“모든 게 다 특이했는데요. 살다 살다 그런 인간쓰레기들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들 세 잡놈, 특히 계살귀에 대해서라면 어떤 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문평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하지만 백우경은 진지한 태도로 다시 재촉했다. 아예 한 마디 한 마디 재연이라도 해 보라는 투였다.

하는 수 없이 문평은 그들 세 명과 처음 마주쳤을 때의 일부터 설명해 나갔다. 가능한 한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계살귀가 자신에게 걸었던 수작이라든가 그들이 던졌던 음담패설에 대한 이야기는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 없었다.

“초식은 단순했지만 내력이 충만했습니다. 내리치는 도를 도로 대항했는데, 날끼리 부딪힌 것임에도 도끼라도 막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저도 일류에 속하는 고수인데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절정이라는 것을 알았죠.”

“그렇군요.”

“이상했던 것은 그들 세 명의 흰자위가 모두 붉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의기투합해서 다닌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각자의 무공 내력은 다르다고 들었는데 어쩐 일인지 같은 심법을 익힌 듯한 분위기가 나더군요.”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정녕 셋 다 눈의 흰자위가 붉었나요?”

“네. 실핏줄이 몇 개가 터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혈안血眼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백우경은 그 말을 듣고 손가락 끝으로 턱을 쓸었다. 심각하게 가라앉은 안색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얼굴이 더 푸르게 보인다.

저 사람은 진짜 어떤 표정을 해도 닮았다. 천마가 나이가 더 들면……, 아니. 천마가 반로환동 하기 전이라면 그랬을 것 같은 모습을 고스란히 지닌 백우경을 보며, 문평은 문득 천마의 기분이 궁금해졌다.

이렇게 꼭 닮게 생긴 자식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태어나서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는 데다, 마교와 정반대인 정파에서 자랐으니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버린 거나 다름없는 자식일 텐데 말이다.

“……그것은 혈안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혈안일 겁니다. 다른 말로는 마령안魔靈眼이라고도 하지요.”

문평이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백우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혈안이건 마령안이건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천마는 이미 알고 있는지 침중한 목소리로 참견을 해왔다.

“진심으로 혈안이 다시 나타났다고 믿으십니까? 혈루단血淚團은 무생교無生敎와 함께 사라졌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실은, 그 무생교 자체가 다시 나타난 것 같습니다. 강호의 여러 장소에서 그들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문평은 그들처럼 무생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자, 백우경이 친절하게도 무생교에 대한 설명을 해줬다.

무생교는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송원 교체기에 나타난 사교邪敎 집단이다. 우승립郵承立이라는 이름의 승려가 처음 시작했는데, 송나라 말기의 사회적 혼란을 틈타 들불처럼 번져 갔다.

무생교의 핵심 교리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인생고해人生苦海 만즉무생萬卽無生’이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고, 가득 차는 것은 생이 없을 때에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원의 압박을 피해 강남으로 남진한 송나라는, 남송으로 다시 태어나고 나서도 상황이 악화 일로였다. 간신들은 원과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의 군량까지 빼돌릴 정도로 날뛰었고, 토호의 수탈은 갈수록 극심해졌으며 연일 기근과 재해가 있었다.

도처에 유민과 걸인들이 넘쳐나고, 백성들의 궁핍은 갈수록 도를 더해 산골지방에서는 차마 제 자식을 잡아먹을 수 없어 옆집 아이와 바꿔 먹는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민초들에게 ‘목숨을 끊는 순간 해탈이 온다.’라는 종교는 차라리 구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탈이라는 건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고련한 승려들도 결국 부처가 되지 못하는데, 그저 목숨을 끊는다고 해서 해탈이 온다면 세상에 부처 못 될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무생교도 그렇게 무리한 주장은 하지 않았다. 그들의 교리에서도 해탈은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아니었다.

사람의 인생에 고통이 있는 것은 그 영혼이 정화되기 위해서다. 세상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것은 정화될 영혼이 지나치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우승립은 그렇게 주장했고, 그 주장은 점차 과격성을 띠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지 개인적인 해탈을 위한 자살 숭배가, 나중에는 사회적인 해탈을 위한 살인 숭배로까지 번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죽여 나갔다. 정화되지 못한 영혼들이 너무 많아 고통이 만연하니, 자신들이 영혼을 정화시켜 그 업을 벗게 만들면 세상 전체가 받는 업도 줄어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아예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무인 집단까지 생겼는데, 그들은 이상하게도 하나같이 눈의 흰자위가 붉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혈루단에는 내력을 증진시켜 주는 효험이 있다고 합니다. 적게는 10년, 많게는 반 갑자의 내력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력도 충만해지며 쉬이 피로가 오지 않는다고 하지요. 대신 눈이 붉어지는데, 그래서 단약의 이름이 혈루단이라고 했습니다. 그 약을 먹고 나면 마치 눈이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입니다.

하나 그 약은 영단靈丹이 아니라 마단魔丹이었습니다. 그것을 만드는 방법은 실로 천인공노했죠. 아직 동정인 아이들을 한데 모아 어두컴컴한 굴속에 넣고, 굴의 통로를 무너트려 생매장을 합니다. 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고통과 배고픔에 아이들은 서로를 잡아먹게 되는데, 혈루단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그 후에 남은 아이들의 신체 부위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방문좌도傍門左道의 술법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우승립이라는 자는 승려가 되기 전에 모산파茅山派의 도사로도 있었답니다.”

자시가 넘은 시각에 듣기엔 지나치게 끔찍한 이야기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더욱 불쾌했다. 못마땅하게 얼굴을 찌푸리던 문평은 문득, 혈루단을 만드는 방법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은 여기에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가 더 있습니다. 우승립이 어린아이들을 생매장한 것은 혈루단이 아니라 다른 것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혈루단은 목표를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던 도중에 생긴 우연한 부산물일 뿐이었다는 거죠. 그는 평생 동안 한 가지 일에 몰두했는데,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낼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가 만들어 낸 것은 가히 마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죠. 피 자체가 무시무시한 극독이고 피부는 칼조차도 베어낼 수 없으며, 초절정의 고수가 아니면 죽일 수도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건예자로군요.”

“맞습니다. 그게 바로 건예자입니다.”

문평은 백우경이 어째서 무생교가 다시 나타났다고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을 납치한 자들은 건예자를 만들었고, 자옥은 혈안을 가진 자들에게 습격당했다. 건예자와 혈안은 서로 연관 있는 장소에서 등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생교는 이미 명맥이 끊긴 집단이지 않습니까? 당년에 교가 토벌될 당시, 우승립은 물론이고 후인까지 모두 몰살당했고 교도들 중에서도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무생교의 본당은 기둥뿌리까지 불태워진 것만으로도 모자라 연못으로 만들어졌고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천마가 반박했다. 사실 그 일은 마교가 한 일이었고, 천마는 마교의 역사서를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열흘 밤낮으로 불탔다는 무생교의 본당에선 살아남은 자가 아무도 없었다. 무생교와 원한을 맺은 마교는 산 전체를 둘러싸고 쥐새끼 한 마리도 남지 못할 정도로 그들을 말살시켰다.

“그랬었죠.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지 않습니까? 당시 무생교를 그렇게 철저하게 파괴한 사람은 전대 천마인 적백문翟伯文입니다. 그리고 그는 최후가 불분명한 유일한 천마이기도 하죠. 그가 중원으로 들어왔다가 실종된 건 유명한 이야기 아닙니까?”

적백문은 혁련상이 ‘수백 년 만의’ 천마가 되는 데 혁혁히 일조한 인물이다. 의발을 이은 제자도 남겨 놓지 않고 중원에 갔다가 그대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의 실종으로 마교는 대부분의 천마지공天魔之功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강한 것을 숭상하는 마교에서 교주가 신과 같이 추앙받았던 것은 그를 뒷받침할 강력한 무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것이 사라지자 교주의 위신은 형편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마룡쟁패魔龍爭霸가 목숨을 다툴 정도로 극심하게 격렬해진 것은 이때부터다. 배우는 무공들의 한계가 있는지라 실력이 죄다 고만고만해져서, 오히려 더욱 피 터지게 싸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천마는 남아 있는 절기들을 끌어모아 거의 재창안하다시피 해야 했던 지긋지긋한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는 진짜 죽어라 하고 수련, 수련, 또 수련뿐이었다.

“백 대협께서는 현재 기린패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그들이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화협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 강호를 떠돌고 있는 기린패는 본래 저희 집안 물건입니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몇 번 본 적이 있었지요. 확실히 말씀드리건대 기린패의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장보도는 물론이고 무공 구결도 없어요.

기린패에 대한 잘못된 소문은 누군가 일부러 흘리고 있는 겁니다.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습니다만 소문의 줄거리를 보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들은 마교를 노리고 있습니다.”

“마교를 노린다라.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그들이 강호 무림에 혼란을 주기 위해 기린패를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천마는 백우경이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어 미끼를 던져 보았다.

“첫 번째로, 일단 기린패를 노렸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지금은 상황이 혼란해져 온갖 소문이 다 붙었습니다만, 알 만한 사람들은 기린패가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마를 독대할 수 있는 패입니다. 그 물건에 손을 댔다는 건 궁극적으로 천마를 노린다는 뜻이 됩니다. 다른 어떤 것이 부로 붙어도 본래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로, 마교의 조사동에 대한 소문이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게 신경 쓰입니다. 그 소문은 특히 하북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는데, 요즘에는 구체적인 장소까지 같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천마는 설마 하면서도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이 조현趙縣입니까?”

“정확합니다.”

그럴싸한 이야기다. 하북성의 조현은 적백문이 실종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다. 덕분에 마교 내에서는 종종 조현 어딘가에 적백문의 무덤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확실히 마교를 노리고 있군.’

천마는 내심 침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그에겐 기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 사실이 더 마음에 걸렸다.

적백문이 가지고 사라진 무공은 천마지공天魔之功이기 이전에 조사지공祖師之功이다. 혁련상이 창안한 무공들이 아무리 빼어나다 할지라도 조사지공의 역사적 의미까지 무시할 정도는 아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조사지공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마교는 움직여야 한다. 그때는 설사 융중지약이라고 할지라도 그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다.

“마교의 동기가 무엇이든, 그들이 천산을 내려오면 정도맹도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실로 40년 만에 정마대전이 일어나게 되겠죠. 무생교는 그사이에 일어날 혼란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마교에게 복수하면서 교를 재건할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백우경이 암울하기 그지없는 전망을 내놓으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문평은 막연히 피어오르는 불안감 때문에, 천마는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 때문에 각각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지난 20년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나 보군. 그 부지런함만큼은 칭찬해 줘야겠어.’

천마는 쥐새끼처럼 부지런히 싸돌아다녔을 곽효를 향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짜증이 나서 견딜 수 없지만, 곽효가 성가신 적수라는 사실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껏 그 어느 누구도 천마를 이런 지경까지 몰아넣은 적은 없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런 일을 성공시킨 상대는, 그의 생을 통틀어도 오로지 곽효뿐이었다.

문평은 길을 안내하기 위해 시비를 붙여주겠다는 백우경의 제안을 마다하고 직접 등을 들었다. 자시도 넘어 벌써 축시丑時인데, 이 늦은 시간에 어린 아가씨를 어찌 밤이슬을 맞게 한단 말인가.

자박자박. 달빛을 밟으며 그들은 어둠 속을 걸었다.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오가는 사람조차 없다. 적막하기 짝이 없는 그 공기가 못내 불편해서, 문평은 조심스레 천마를 돌아보았다.

윤승효의 얼굴을 한 천마는 무심히 먼 곳에 시선을 던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수려하기 짝이 없는 이목구비에서 은은한 사색의 빛이 감돈다. 그리울 만큼 낯익은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아직까지도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 속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쉬이 그리움을 떨칠 수 없었던 문평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저 얼굴을 계속 보고 사는 건 참 못 할 짓이다. 채 연소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감정들이 그 얼굴을 볼 때마다 불씨가 되어 툭툭 튀어 오르곤 하니까 말이다.

“내 자식이 아니다.”

문평은 속절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먼 산을 바라보다가, 발이라도 걸듯 갑작스레 들려오는 말에 깜짝 놀라 어깨를 흠칫했다.

딴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이던 남자가 느닷없이 엉뚱한 소리를 한다. 생각 중에 말이 잘못 나온 건가? 도무지 맥락을 알 수 없는 말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 전 회의청에서, 그 녀석과 나를 번갈아 보며 그렇게 생각했지 않나. 피는 못 속인다고. 얼굴에 다 쓰여 있더군.”

‘젠장. 족집겐가.’

문평은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망연히 생각했다. 아들이란 생각도 했지만, 욕도 실컷 했는데. 설마 그것도 다 읽었으려나?

“아드님이 아니십니까?”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나 닮았는데요.”

아무리 버린 자식이라도, 자식이 아니라고까지 하는 건 좀 심한 게 아닌가 싶어 문평은 넌지시 되물었다.

“아니라니까.”

천마는 짜증이 나서 딱 잘랐다. 자신이 백우경의 아비가 되려면 그 전에 먼저 제갈희련 그 재수 없는 계집과 몸을 섞었어야 한다. 제갈희련을 혐오하는 천마는 무엇보다도 그 가정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내가 남색가라는 사실을 알면서 어떻게 그런 착각을 할 수 있는 거냐? 우경은 내 자식이 아니다.”

문평은 마중사기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들은 게 있어 틀림없다고 믿은 사실을 정면에서 부정당하자 어라?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중사기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그자들도 백우경을 천마의 자식이라고 여기고 있는 눈치던데……. 그럼 생판 남이 저렇게나 닮았단 말인가?

“마중사기들도 저분이 아드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던데요?”

“그 녀석들은 내게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니 나를 닮은 저놈을 보고 제멋대로 생각했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 게 아니냐. 내가 여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그건 사실이다. 천마의 주위엔 엄청난 미인들이 쌔고 쌨지만, 그는 그 여인들에게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제자들이 취향까지 꿰고 있는 골수 남색가다.

‘근데 잠깐. 동생이 있었다고?’

문평은 혈혈단신 고아로만 알고 있던 천마에게 숨겨진 혈육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백우경을 낳은 게 제갈희련이니 여동생이었을 리는 없고, 결국 남동생이 있었다는 소리다.

‘가만있어 보자. 백우경은 유복자였지? 그 사람 아버지라고 알려진 사람이 누구였더라? ……검협劍俠 백운정白雲靜?’

세간에 백우경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사람은, 40여 년 전 융중산에서 죽은 검협 백운정이다.

‘백운정이라……. ’

기묘하게 낯이 익은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보던 문평은, 그와 비슷한 이름을 예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예전에 천마가 윤승효의 신분으로 자신을 안았을 때, 돌연 이상한 이름을 들먹인 적이 있었다. 멀쩡한 제 이름을 놔두고 뜬금없이 그 이름으로 불러보라는 요구를 하며, 문평이 기어코 그리 부를 때까지 고문 아닌 고문을 했었다.

워낙 지독한 기억이라 그 이름은 잊히지도 않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변태인지도 모른다는 공포까지 느꼈던 상황이기에 그 각인은 더욱 또렷했다.

운강. 그것은 그때 천마가 불리길 원했던 이름이다. 운강. 운정. 가운데 돌림자가 들어가는 이 이름들은 누가 봐도 형제간을 위해 지어진 것이다.

‘뭐야? 그렇다면 저 사람의 진짜 이름이 혁련상이 아니라 백운강이란 말이야? 검협이 천마의 친동생이라고??’

가히 강호의 비사라고 할 만한 진상이다. 천마의 손에서 중원을 구했다고 알려진 검협이 실은 천마의 친동생이었다니 말이다. 그를 영웅으로 알고 있는 정도인들은 물론이고, 그에게 구원舊怨을 품고 있는 마교인들에게도 이는 충격적인 진실일 터였다.

‘그럼 천마는 친동생을 죽였다는 건가? 기린패를 준 것으로 보아 친동생이라는 걸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동생까지 죽이고서 퇴군은 왜 한 거지? 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두 형제 중의 한 사람은 마교의 교주로 자라고, 다른 한 사람은 정파의 젊은 영웅이 되었을까?’

일세의 영웅이 가지고 있는 기구하기 짝이 없는 과거사다. 사정에 대한 설명은 없이 뚝 하니 떨어진 진실에 이것저것 궁금한 것투성이지만, 문평은 그에 대해 감히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왜 그런 중요한 비밀을 저에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자 분들께도 여태 말씀하지 않으셨던 것을요.”

어설픈 호기심을 갖다 댈 사연이 아닌지라 문평은 멀찌감치 물러났다. 지금 그가 진정으로 궁금한 게 있다면 천마가 왜 이런 비밀을 자신에게 털어놓았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러하듯 그 역시 착각하게 내버려 뒀어도 되는 일이다. 백우경을 천마의 자식이라 생각하든 조카라고 생각하든 변하는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래 봤자 정도의 협객이 천마와 혈연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똑같다.

“글쎄? 왜 그랬을까?”

천마는 씁쓸히 웃었다. 상대가 자신이 말해 준 비밀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쯤은 그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이 일은 이렇게 충동적으로 남에게 말해도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죽은 동생의 명예는 물론이고 살아 있는 조카의 안위까지 걸린 문제가 아닌가. 자칫 이 이야기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백우경이 빠질 곤경은 대별산의 일과 비할 바가 아닐 터였다.

“네가 보기에 그 아이, 어떻더냐?”

“백 대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아이.”

“영민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더군요. 여러모로 출중해 보였습니다.”

잠깐 본 것만으로는 본성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래도 첫인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어느 쪽의 핏줄을 받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유능했고, 정의감도 투철해 보였다. 가짜 윤승효처럼 표리부동하지만 않다면 진실로 존경해도 좋을 만한 인격이다.

“하나 제 아비를 닮지는 않았지.”

그게 무슨 흠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마가 뒤를 이어 붙인다. 그가 자기 동생을 좋아했는지, 싫어했는지도 모르는 문평은 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천마는 그 말만 뱉어놓고는 생각에 잠겨 있어서, 함부로 말을 걸기도 곤란했다.

‘그 녀석을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천마는 내심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일전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백우경을 제대로 살펴볼 틈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시간도 많았고, 가까운 곳에서 천천히 관찰할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봐도 녀석에게서 아비를 닮은 구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순후하고 정 많던 운정과 달리 그는 친절하지만 딱 자른 것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의기義氣 하나로 세상을 산 동생은 자기 눈에 옳은 것이 아니면 물불을 가리지 못하고 뛰어들었지만, 우경에겐 냉정하게 선후를 판단하는 눈이 있었다.

개인적인 취향을 따지자면 세상 살기 고단한 동생 같은 성격보다 우경 같은 성격 쪽이 더 취향이다. 일단 말이 통하고, 지켜보기에도 덜 답답하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마는 조카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왕 그 녀석의 핏줄일 거면 녀석을 좀 더 닮기를 바랐다. 먼저 세상을 떠난 녀석의 일부만이라도 아들을 통해 느낄 수 있게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방적인 욕심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내심 기대하고 있던 바가 꺾이고 나니 아이에게 정이 가지 않는다. 밉지도 않고 곱지도 않고 그저 그랬다. 부정적인 방향으로라도 좋으니 좀 더 강렬한 감정이 느껴지길 바랄 정도다.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금세 전각 앞에 도착했다. 늦은 밤이라 전각은 어둠에 잠겨 있다. 천마의 비밀을 나누는 위험을 더 이상 감수하고 싶지 않았던 문평은 잽싸게 자기 방으로 달아날 궁리를 했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냉큼 인사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그는 천마에게 팔목을 붙잡혔다.

“오늘 밤에 붕대는 갈았나?”

매일 밤 천마에게 도움을 받았던 일인지라, 천마가 없는 참에 깜빡하고 말았던 문평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천마는 한숨을 쉬며 그의 팔을 잡아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단단한 손아귀에 잡힌 문평은 속절없이 그에게로 끌려갔다.

“자기 몸인데 자기가 챙겨야지. 어디에 정신을 놓고 있었어?”

“이제 거의 다 낫기도 했고, 오늘은 정신도 없었던 터라……. 하루쯤은 그냥 자도 괜찮습니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변명도 해 봤지만 먹히지 않았다. 문평은 식충 식물에 잡아먹히는 파리처럼 천마의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격한 입맞춤이 다가왔다. 문평은 자신을 떠밀듯 밀고 들어오며 입술을 삼키는 천마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허리가 꽉 끌어안긴 데다 뒷머리까지 잡혀서, 피하려고 해도 피할 방도가 없다.

뜨거운 혀가 헤집듯 입 안을 가로질렀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는 것처럼 허겁지겁 입 안 여러 곳을 탐하는 그의 모습은, 거의 조급하게까지 느껴진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오늘 밤에만 천마답지 않은 모습을 여럿 보게 된 문평은 불편함 반, 껄끄러움 반으로 그의 행위를 받아들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상의가 제멋대로 벗겨졌다. 이 와중에도 손만은 빠른 천마가 어느 사이엔가 허리춤까지 풀어 헤친다.

‘진짜 이대로 할 생각인가.’

문평은 이런 식으로 어영부영 천마에게 다시 안길 마음이 없었기에 초조하고 짜증이 났다. 그는 아직 이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다. 실은, 앞으로도 영영 용서할 생각 따위 아예 없다. 단지 예전의 경험을 통해, 그와는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포기하고 있을 뿐이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이러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등에 두른 붕대 때문에 칭칭 감긴 가슴이다. 흰 천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유두 위를 쓰다듬듯 어루만지는 천마의 손길을 피해 문평이 몸을 틀었다. 미는 대로 밀려오다 보니 어느새 침상 앞이다. 여기서 쓰러져 버리면 천마가 하고 싶은 일을 고스란히 당하게 된다.

지난 며칠간 마차 여행을 하면서 체력을 되찾아오긴 했지만, 아직도 건강해지려면 요원한 상태인 문평은 그런 상황을 정말이지 피하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 녹초가 될 때까지 달려드는 천마와 관계를 맺는다면 기껏 채워 놓은 체력도 도로 축나고 만다.

“지금쯤이면 제법 쌓이기도 했을 텐데, 정말 생각이 없나?”

천마는 혀를 내밀어 문평의 뺨을 핥아 올리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귀의 연골 근처를 아슬아슬하게 쓸고 지나가는 그 동작에 목덜미로 쭈뼛 소름이 돋았다. 할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애무에 쾌감이 솟는다.

도망치지 못하게 당겨 안은 허리 때문에 두 사람의 하체가 달라붙었다. 아직 발기는 하지 않았지만, 자극은 받고 있는 듯 뜨겁게 꿈틀거리는 그의 성기가 문평의 것을 비벼 온다.

천마의 허벅지가 문평의 무릎 사이를 갈랐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천마의 다리가 그의 사타구니를 희롱하듯 비빈다. 남자의 몸이란 자극을 받으면 반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문평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의 성기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하여간 남을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것에는 탁월한 인간이다.

문평은 자기 몸인데도 제 것 같지 않았다. 제멋대로 느껴지는 쾌감은 그것 자체가 형벌 같다. 문평은 정말로 화가 났다. 몸으로 느끼는 감각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마음은 싸늘해져 갔다.

예전 마교에서처럼 품는 대로 안기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타인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하는 건 한 번으로도 충분히 많은 일이다.

“자, 잠깐만요. 시, 싫습니다!!”

다시 한번 거부의 말을 내뱉으려고 했던 문평은, 허리춤이 풀어지고 바지가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다급해졌다. 바지를 움켜쥐려고 했지만, 그 전에 먼저 밀려 침상으로 쓰러지고 만다. 허벅지를 침상에 반쯤 걸친 상태로 쓰러진 그의 몸 위로 천마의 몸이 다가온다.

방어하려던 팔이 제일 먼저 잡혔다. 인간이 치사하게도 금나수禽拿手까지 사용해 저항을 봉쇄한다. 천마가 사타구니 쪽으로 정확히 체중을 실으며 문평의 입술을 막았다. 엄지손가락으로 손목 안쪽을 애무하면서도, 천마는 문평의 팔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문평이 힘을 주어 발버둥을 치려고 할 때마다 교묘하게 잡아 누르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가 보려고 애써 봤지만 천마의 앞에선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 같을 뿐이다.

용을 쓰느라 온몸에서 땀이 솟아 피부가 발그레해졌다. 고개를 돌리려고 해도 혀가 쫓아오고, 아래는 끊임없이 비벼지고 추어올려졌다. 목구멍 안쪽까지 깊숙하게 핥아오는 탐욕이 무서웠다. 부드러운 태도로 다뤄지고 있지만 이것 역시 강간의 일종이다.

‘빌어먹을 인간. 자기 하고 싶은 건 꼭 하고 말아야 직성이 풀리지!’

집요하기 짝이 없는 천마의 성격을 문평이 모를 리 없다. 배려나 양보라는 말은 아예 옥편에도 없는 천마다.

그에게 기분이 상할 만한 일이 있다는 건 문평도 알고는 있다. 무생교의 일이며, 조카의 일이며, 하나같이 안 풀리는 일이 전부니 짜증도 나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이용해 기분을 풀려고 들다니 이건 너무 제멋대로 아닌가?

동의도 하지 않았는데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파고들어 온다. 이 인간은 이런 짓을 하고도 감히 진심이라고 말하는 건가? 나를 아끼고 있다는 그 말을 믿으라고?

문평에게 천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해 본 상대이면서, 또한 가장 잔혹하게 자신을 배신한 상대였다. 그에게 당한 모든 일들은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상처는 그에게서 받았던 좋은 기억들 때문에 만들어졌다.

천마에겐 모든 게 지나간 일인지 모르지만, 문평에겐 아직도 진행형이다. 자신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너무나도 거대한 적이기에 차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뿐, 그는 자신이 당한 일을 무엇 하나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거부해도 이대로 범해질 거라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천마 앞에서 이런 일로 눈물을 보인 적은 여태까지 없었건만, 한 번 감정적이 되어 버린 기분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한두 방울이었던 눈물이 이내 줄기가 되어 흘러내린다. 서럽기보다는 분했다. 분하고도 원통하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일방적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화가 나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천마는 처음에는 이런 반응을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문평의 눈물이 자신의 뺨을 적시자, 못내 신경이 쓰여 행위를 계속할 수 없었다.

첫 정사를 치를 때도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악바리처럼 꼿꼿하던 놈이었다. 약하게 나오면 지는 거라고 생각하는지 부들부들 떨면서도 괜찮은 척 안간힘을 쓰던 녀석인데, 웬일로 눈물을 다 흘린다.

예전에도 몇 번이나 있던 일인데 뭐가 그리 분할까? 천마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문평의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가면을 쓰면 대하기 쉬운데 진심으로 대하면 더 어렵게 빗나간다.

“그렇게 싫으냐?”

조용히 한숨을 쉰 천마가 입술을 떼어내며 물었다. 집요하게 물고 빨아댄 탓에 아랫입술이 퉁퉁 부은 문평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흘러내린 눈물 때문에 두 뺨이 흥건했지만, 노려보는 시선은 날카로웠다. 물먹은 시선이 이렇게나 날이 서 있는 것은 처음 본다.

“교주님께서는 겁탈당해 본 적 있으십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하고 문평이 물었다. 천마는 그의 몸 위에 여전히 올라앉은 채, 그의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평생 그래 보신 적이 없으셔서 모르시는 모양인데, 경험자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지요. 정말 기분 더럽습니다.”

“…….”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독설을 떠드는 입술을 보니 다시금 입 맞추고 싶었다. 녀석이 질색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어지간하면 질릴 때도 된 것 같은데 이놈에게는 왜 아직도 눈길이 가는 것일까?

천마는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놈과 함께 있으면 자꾸만 건드리고 싶어졌다. 딴 곳을 보고 있으면 등을 찔러서라도 시선을 돌리게 하고 싶고, 싫어하는 걸 알아도 손바닥 위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

“내가 경험자가 아니라고 누가 그러던?”

천마는 문평의 눈가를 따라 흘러내린 눈물을 엄지로 닦아 내리며 덤덤히 되물었다. 문평은 천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작게 속삭인 것도 아닌데, 너무나 엄청난 내용이다 보니 언뜻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네 말이 맞다. 당하고 나면 기분이 정말 더럽긴 하지. 기어코 죽이고 나서도 두고두고 생각날 정도로 말이다.”

천마는 혼잣말처럼 말하며 손에 묻은 문평의 눈물을 핥았다. 짭조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싱겁다. 그새 식어서 그런가.

‘뭐야? 천마가 겁탈을 당한 적도 있단 말이야?’

문평은 뜻하지 않게 듣게 된 너무나도 엄청난 사실에 그만 기함하고 말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나오려던 눈물까지 쑥 들어가 버린다. 설마? 농담이겠지??

“경험이…, 있으신 겁니까?”

대체 얼마나 겁이 없으면 이 남자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걸까? 상상은커녕 믿어지지도 않는 이야기에 그는 망연히 반문했다.

거의 혼비백산이나 다름없는 문평의 반응에 천마는 웃었다. 오늘따라 웬일인지 옛일이 자꾸 떠오른다. 따로 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남에겐 평생 하지 않던 이야기까지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오늘 그의 기분은 꽤나 감상적인 모양이다.

‘아니면 곽효 그놈 때문인가? 하긴. 오늘은 우경이와 곽효를 동시에 만난 거나 다름이 없는 날이구나.’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두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가 이렇게 자꾸 나오는 건, 그들을 기억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존재들을 연이어 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경은 눈앞에서, 곽효는 이야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천마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두 개의 무덤을 파헤쳤다.

“그렇다곤 해도 어렸을 때 일이지. 보다시피 생긴 게 이렇다 보니 말이야.”

20대 초반의 수려한 얼굴로 그를 굽어보며 천마가 속삭인다. 눈가를 가볍게 찡그리며 말하는 태도 때문에 그 표정은 더 젊어 보였다.

하긴. 이런 얼굴이니까. 문평은 천마의 말 중에 반만 납득했다. 천하를 뒤져도 보기 드물 미모이니 그를 욕심내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것도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라고는 해도 이 사람이 그런 일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천마가 누구인데 그런 자를 살려 둔단 말인가? 감히 시도를 하려는 기미만 보여도 냉랭히 웃으며 목을 꺾어 버릴 것 같은 사람인데 말이다.

‘아니, 물론 죽이기는 죽인 모양이지만.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80년 세월이라는 게 정말 만만한 게 아니구나. 문평은 그 점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평생 독불장군,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아온 것 같은 천마조차도 살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은 듯했다.

“……겪어 보셨다니 더 잘 아시겠군요. 아시는 분이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천마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잠시 넋을 빼놓았던 문평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험악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알고 있다면 더욱이나 하지 않아야 할 일이다. 자기도 당해 놓고 왜 남에게까지 그런 경험을 하게 만드느냔 말이다.

행위는 그만뒀지만 천마가 문평의 몸 위에서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천마는 문평과 다리가 얽힌 그대로 몸을 겹친 채 얼굴이며 뺨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성적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친밀한 자세가 부담스러웠다.

천마가 반쯤 일으켜 세운 그것이 아직도 문평의 속곳 속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반쯤 일어난 천마의 것이 그 위를 누르고 있기 때문에, 성기는 쉽사리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복수하고 싶지?”

천마가 문평의 솔직한 마음을 느닷없이 쿡 찍었다. 속마음을 들킨 기분에 순간 움찔했지만, 천마는 그런 그를 확인하면서도 아무런 책망이 없다.

어쩔 수 없다. 그도 인간이다. 배신이나 다름없는 꼴을 몇 번이나 당했는데 원망 하나 없다면 그게 어찌 사람이겠는가.

천마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그를 나무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네가 감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는 추궁이 아니라, 당연히 그럴 테지 라는 뜻으로 묻고 있는 천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로 문평을 빤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속을 사람이 아니니 솔직히 말했다. 여태까지 흘러온 이야기의 전개를 볼 때 그런 대답을 한다고 해서 손해를 볼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대답에 천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상대가 자신보다 너무 보잘것없기 때문인지, 대놓고 복수하고 싶다는 데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 같다.

“나도 복수했다. 참고 기다렸다가 내 힘이 마침내 완성되었을 때 칼을 뽑아 들었지. 그들을 죽여 버리지 않는다면 기억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할 것 같았거든. 없애 버리기만 하면 시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행동을 후회하는 일 따윈 없을 거라고 믿었지.”

말끄트머리가 씁쓰레하게 가라앉는 게 왠지 의미심장했다.

‘그들? 그들이라고?’

천마는 자신을 겁탈한 사모와 그의 집안을 몰살한 사부를 한꺼번에 지칭하고 있는 거였지만, 문평은 그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그를 범한 범인이 여러 명이었다고 착각해 버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심지어 그 사람들이 모조리 남자이기까지 했다. 천마가 남색가이기 때문에, 그를 겁탈한 사람들 역시 당연히 남자라는 공식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후회, 하셨습니까?”

“아니. 전혀. 오히려 너무 쉽게 죽인 게 가끔가다 아쉽더군. 나는 몇 년이나 당한 일인데 그들은 한 번에 끝나 버렸거든. 지금 같았으면 좀 더 괴로워하도록 내버려 두었을 텐데 그때는 너무 젊었지.”

이야기의 반전이라도 있는 듯 말하기에 혹시나 싶어 물었더니, 천마는 쌈박하게 문평의 착각을 바로잡아 줬다. 이런 결론이면 이야기를 왜 그런 식으로 했단 말인가? 듣는 사람 헷갈리게?

“그러니 하고 싶으면 너도 해라. 말리지 않을 테니.”

“……예에?”

“하라고, 복수. 내가 참고 넘겼다면 너도 참으라 하겠지만, 나도 안 참아놓고 너만 참으라는 건 불공평한 일이지. 하고 싶으면 해도 좋다. 말리지 않으마.”

문평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걸 관대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정신이 나갔다고 해야 하는 건가? 천마는 지금 자기가 그랬으니 너도 그래도 된다고, 허가를 내려 주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사람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해도 참 이상하게 한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당해서 싫었던 일이면 남에게도 안 하고 마는데, 이 사람은 일단 자기가 하고 싶은 건 다 하면서 억울하면 너도 그렇게 하라는 식으로 실천한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뒷감당이 된다면야 무언들 못하겠는가? 마음 가는 대로만 행동할 수 있다면 천마의 뒤통수를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깠을 문평이다. 하지만 세상엔 후환後患이라는 게 있었고, 문평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돌아올 대가를 계산할 줄 알았다.

시원시원하게 허락했다고 천마의 뜻을 곡해해서는 안 된다. 복수를 해도 된다는 건, 그 일을 저지르는 것까지는 봐주겠다는 뜻이지 그런 시도를 했다가 실패한 후의 책임까지 져 주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그때가 되면 천마 식의 역지사지가 또다시 등장할 것이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했으니 이제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천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서 다 하고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천하를 통틀어도 몇몇뿐입니다.”

콕 집어 말해 너 말이야, 너. 너 같은 인간 빼곤 다 그렇게 산다고.

“내가 가르쳐 준 것이 있을 텐데. 잘 써먹으면 유용할 게다.”

복수의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인데, 천마는 진지하게 충고까지 해주며 그를 거들었다. 이건 무슨 농담 따먹기도 아니고. 상대가 무려 진심이라는 점이 이 대화에서 가장 어이없는 부분이었다.

문평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마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면 사람이 아니라 요괴쯤 되는 존재와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인간으로서 너무 먼 데까지 가버린 나머지, 돌아올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래 봤자 이제 겨우 닷새 배운 심법이 아닙니까?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반평생은 걸릴 텐데요.”

“채양보양술彩陽補陽術은 상대와의 궁합만 잘 맞으면 반년 내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는 심법이다. 상대의 내력이 어느 정도 받쳐주느냐 하는 게 관건이겠지만, 일방적으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니 노력만 하면 능히 서로에게 좋다.”

“…채양, 채양 뭐요?”

“채양보양술.”

처음에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천마는 두 번째도 똑똑하게 채양보양술이라고 말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그 심법은 명칭 그대로 채양보음술과 궤를 같이하는 무공인 듯하다. 그것도 일반적인 경우처럼 여자의 음기를 뽑아내는 게 아니라, 남자의 양기를 채집하는 방법인 것이다.

천마의 논리에 따르자면, 천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그와 열심히 정사를 나눠 채양보양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된다.

‘하아.’

애초에 이 사람을 믿은 내가 잘못이다. 어쩐지 뒤끝 없이 구결을 순순히 가르쳐 준다 했지.

적지 않은 기대를 걸고 열심히 운기하고 있던 심법의 정체가 어처구니없게도 채양보양술이라는 것을 깨닫자 문평은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게 정말로 채양보양술이라면, 정사를 하면서 운기를 하기 전까지는 효과가 코딱지만큼도 나타나지 않을 터였다. 결국 고수가 되고 싶다면 죽어라 하고 천마에게 다리를 벌리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천마처럼 그 일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 생각할 수 없는 문평은 천마가 자신에게 한 짓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아까 전의 상황만 하더라도 이보다 더 기분이 상할 수는 없을 거라고 여겼었는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천마는 그 일까지 기어코 가능하게 해버린다.

화가 난 문평은 무엄하게도 천마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동안 붙잡을까 했던 천마는, 목덜미까지 새빨개지도록 화가 난 문평을 보고 지금은 그냥 보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더 건드리면 또 난리가 날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단단히 점수를 잃은 모양인데 일부러 덧나게 할 짓은 할 필요가 없다.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화가 난 문평은 거칠게 쿵쾅거리며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많이 컸다. 제 성질 불뚝 섰다고 티를 낼 줄도 알고. 천마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맹랑하긴 해도, 찔러도 죽은 척하고 있을 때에 비하자면 지금이 훨씬 낫다. 적어도 현재의 모습에서는 살아 있는 것 특유의 활기는 넘쳐나고 있으니까 말이다.

***

정도맹의 앞마당인 무창엔 흑도가 없다.

중원 전체를 통틀어도 그러한 특징을 가진 도시는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져 봐야 이곳 무창이나 숭산의 등봉현登封縣, 호북성의 균현均縣 정도가 전부다.

당연하게도 이 세 곳에 흑도가 없는 이유는 그곳에 위치한 정파 때문이다. 숭산엔 천년 소림이 있고, 균현엔 무당파가 있다. 그리고 무창엔 정도맹이 있다. 전 중원의 정기를 수호한다는 자부심이 있는 이 고장들에선 흑도가 설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무창의 시장은 여타의 도시들과 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히 활기찼다. 이제껏 거쳐 왔던 모든 시장들을 모아 놓은 것 같은 어마어마한 모습이다. 구성지회九省之會라는 별명답게 중원 각지에서 물건이 모였는데, 비단 전에선 서역 비단과 항주 비단을 같이 놓고 팔며, 과일 전에선 운남에서만 난다는 여지荔枝가 산처럼 쌓여 있다.

문평은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주위를 둘러보며 길을 걸었다. 정도의 무사들이 숱하게 드나드는 장소라서 그런지 허리춤에 대놓고 도를 차고 있어도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마교 내에 있었을 때처럼 말이다.

몸이 아플 땐 연락을 못 했지만 깨어나고 나서는 다시 꾸준히 흑화를 보냈다. 천마에게 따로 주의를 받을까 봐 조마조마했으나 다행히도 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

저번에 보냈던 흑화는 이틀 전의 것으로, 일상적인 연락 외에도 간략한 용건을 함께 넣었다. 그것을 봤다면 어디엔가 답이 있을 것이다. 마영대가 자신을 놓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걷느라 문평은 정작 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우다다다 뛰어다니는 어린애들하고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던 그는, 황급히 신형을 바로 세우며 아이들이 지나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와아아아아!”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실로 요란했다. 누군가 용돈을 얻어 폭죽을 샀는지 투투투툭 폭죽 튀는 소리가 그 뒤를 따라 울려 퍼진다. 불꽃이 더 많이 튀는지,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 많이 튀는지 분간하기 힘들다. 혹여나 물건에 불씨가 튈까 어른들은 질색했지만, 어린애들이 아무런 걱정도 없이 노니는 광경은 보기만 해도 즐거워졌다.

‘자옥에게 당과라도 사 주고 올 것을.’

자유롭게 어린 시절을 즐기는 어린아이들을 보니 문득 그 아이 생각이 났다.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인간이라 정을 안 주려고 해도 자꾸 눈에 밟히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늘 그 아이는 자신과 같이 시장에 나오지 못했다. 어젯밤에는 유예되었던 증언을 하느라 천이각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도 어른들을 무서워하는 겁 많은 아이다. 낯선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끊임없는 질문을 받느라 두려워할 아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진다. 자신에게 일만 없었다면 자신도 취조에 참관을 했을 텐데, 아쉽게도 약속을 너무 촉박하게 잡아서 아이의 뒤를 봐줄 여유가 없었다.

‘엇, 저건?’

남겨 두고 온 것을 생각하느라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갈 뻔했다. 문평은 눈 곁으로 언뜻 지나가는 것을 스쳐 간 다음에야 되돌아보았다. 혹시나 싶어 얼른 확인을 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흑화가 맞다.

시전 대로길 바로 옆에 서 있는 커다란 다점의 2층. 바깥을 내다볼 수 있도록 열린 창문에 흰 수건 하나가 걸려 있다. 먹물이라도 번져서 말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건이지만, 그게 바로 그들이 사전에 약속해 놓은 접선의 표식이다. 아무렇게나 뿌린 먹물처럼 보이는 건 그들만이 읽을 수 있는 형상으로 된 글자였다. 영문을 모르고 보면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읽을 줄만 알면 충분히 뜻이 통한다.

‘제대로 따라왔군.’

중간에 배를 타기도 했고, 정신을 잃은 채 이동하기도 해서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방향을 알려주지 못했던 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영대가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이제 자신이 할 일은 하나뿐이다. 갖은 고생을 다 했지만 결국 끝이 보였다.

“어서 오십쇼!”

그가 다점 안으로 들어가자 점소이가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키는 작달막하지만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에 씩씩하게 웃는 얼굴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2층에서 약속이 있는데. 오른쪽에서 세 번째 방일세.”

문평이 밖에서 창문 수로 세어서 계산한 장소를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점소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아는 척을 했다.

“2층 세 번째 방이요? 그 방이라면 안 그래도 손님이 더 오실 거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요.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경쾌하게 움직이는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넓은 마루에 다탁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1층과는 달리, 각각이 칸막이 방으로 되어 있는 2층은 쾌적하고 조용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차를 마시거나 밀회를 할 때 사용하는 장소이기에 그럴 만한 격을 갖춘 것이다.

“안에 계십니까, 손님? 말씀하신 일행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오른쪽에서 세 번째 방의 방문 앞에 이르렀다. 문밖에서 기척을 낸 점소이는 정중한 어조로 안쪽에 사정을 고했다.

“모셔라.”

낮고 딱딱한 대답이 안에서 들려왔다. 마치 감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둘러 사라지는 짧은 어투가 왠지 의심스럽다.

쯧. 숨기려면 제대로 좀 숨기지. 평범한 사람인 척도 못하는 어설픈 연기력에, 문평은 내심 혀를 차고 말았다.

“들어가십시오.”

허락이 떨어지자 점소이가 손수 문까지 열어 준다. 아무 생각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던 문평은, 그 안에 서 있는 세 남자를 보고 발을 멈칫했다. 깊게 눌러쓴 죽립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체격들이 낯이 익었다. 언제인진 모르지만, 분명 어디선가 본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럴 리가?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되는 마영을 내가 어디서 봤다고??’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기묘한 불안감이 그의 판단을 재촉했다. 본능이 경고할 땐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는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빼고 신형을 뒤로 날렸다.

‘이 사람들, 마영이 아니다!!’

서술은 길지만 실지로는 찰나 간에 일어난 일이다. 문이 열리고 한 발자국 들어서자마자 바로 몸을 뒤로 뺐으니 그의 판단이 늦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하나 문평이 채 몸을 다 물리기도 전에, 뒷덜미에 번개같이 암기가 꽂혔다. 그가 대비하고 있던 방 안에서가 아니라 방 밖에서 날아온 암기였다. 문평은 숨을 들이켜며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까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점소이가 소매 속에 숨겨 두었던 암기통을 꺼내 그를 겨누고 있었다. 솔직해 보이는 그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흩어지기 시작한 정신은 매정했다.

문평은 허공에서 뚝 떨어지듯이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씨팔. 재미 좀 보면 안 돼? 그냥 맛만 본다니까? 이 새끼 끝내주게 쫄깃할 것 같단 말이야.”

“안 돼. 미친놈아. 기껏 잡아 왔는데 혀 깨물고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사내새끼가 계집애들이랑 똑같은 줄 알아? 똥구멍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사내새끼들은 자결 안 해. 지가 그런 꼴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상상도 못 해본 족속들이거든.”

“그래도 안 돼. 너도 어제 그 계집애 못 처먹게 했잖아. 그래 놓고 너 혼자 즐긴다는 게 말이나 돼?”

“염병할 놈이! 너는 못 처먹는 게 당연하지. 정도맹의 코앞에서 애새끼를 간살 했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귀두삼귀가 여기 왔노라 방문이라도 써 붙일 셈이야?”

티격태격. 자기네들끼리 신나게 싸우는 소리가 의식을 깨웠다. 문평은 귓전에서 들려오는 험악한 상소리를 들으며 힘겹게 눈을 떴다. 정신은 점차 맑아지고 있는데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눈꺼풀이 풀로 붙여 놓은 것처럼 딱 달라붙었다. 팔다리가 저리듯이 무겁고, 속에서 헛구역질이 난다. 침을 삼켜도 뒷맛이 떫은 것을 보니 미혼약迷魂藥에 당한 모양이다.

“아, 깼다. 깼어.”

“생각보다 빨리 깨네? 약이 적었나?”

말하는 투만 들어서는 시시껄렁한 시정잡배들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은연중에 풍기고 있는 기운만큼은 사뭇 만만찮았다. 문평은 내심 긴장을 늦추지 못하며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했던 눈이 정상 시력을 되찾자, 상대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잘났다고도 못났다고도 말할 수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얼굴. 그러나 희어야 할 자리가 붉게 빛나는 두 눈.

그 붉은 눈자위 때문에 문평은 그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얼마 전 유람선을 습격했던 귀두삼귀였다.

그가 시선을 들자, 문평과는 제법 악연이라고 할 수 있는 계살귀가 유독 반가운 얼굴을 하며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문평은 아까부터 그의 귀를 괴롭히던 목소리들 중, 가장 거슬리던 목소리가 그의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오랜만이네, 이쁜아. 서방님이시다. 눈물 나게 반갑지?”

계살귀는 서로의 코가 거의 맞부딪힐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신나게 지껄였다.

불쾌해진 문평은 머리를 젖히려고 했다가 그대로 턱을 잡혔다. 피하려고 몸을 뒤틀어 봤지만 움직여지지 않는다. 팔은 기둥을 감싼 채 등 뒤로 묶였고, 손목엔 발목과 연결되어 있는 포승줄이 매듭지어져 있다. 혈도가 짚여 있어 내공도 일으킬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옴짝달싹도 못 하게 잡혀 버린 것이다.

육식 동물이 사냥감을 맛보듯, 길고 두꺼운 혀가 문평의 뺨을 진득이 쓸어 올렸다. 뜨거운 훈김이 훅하고 끼쳐 온다. 혀도, 입김도 모두 지나치게 뜨거웠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에게 희롱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문평은 자기도 모르는 새 진저리를 치고 말았다.

“하나도 안 반가운데. 설마 나를 쫓아 여기까지 온 건가?”

계집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이쁜이라. 계살귀에게 그따위 호칭으로 불릴 마음이 전혀 없는 문평은 냉랭히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계살귀는 그가 뭐라고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날은 진짜 잽싸게 도망치대? 내가 뒤에서 그렇게 애타게 불렀는데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말이야. 줄 듯 말 듯 애태워 놓고 그렇게 꽁무니를 빼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내가 그날 그렇게 널 보내 놓고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알기나 해? 잠잘 때도 삼삼한 네 엉덩이가 떠오르더라니까.”

계살귀는 문평이 진저리를 치면 진저리를 칠수록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음탕한 음성으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지껄이며, 벌어진 문평의 허벅지 안쪽을 노골적으로 쓰다듬었다.

현재 문평은 발목과 손목이 같이 묶이는 바람에, 무릎이 벌어진 자세로 다리가 열려 있는 상태였다. 그 빈틈을 계살귀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이를 냉큼 치고 들어와 문평의 열린 몸을 희롱했다.

그는 문평의 상의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의 유실을 꼬집었다. 붕대 안쪽에 숨겨져 있는 것을 천 사이로 일부러 끄집어내어 손톱으로 긁고, 자극으로 딱딱해지는 것을 아프도록 짓눌렀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희롱에 수치심을 느낀 문평이 고개를 돌려도 소용없었다. 계살귀는 일부러 턱을 꺾어 눈을 마주하게 만들고는 그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나 낱낱이 구경하기까지 했다.

연한 젖꼭지 살이 손톱에 찍혀 너덜너덜해졌다. 부풀어 오를 대로 올라 연약해진 살갗은, 조금만 더 하면 찢어질 것처럼 반들거렸다.

“아 씨팔. 못 견디겠다. 빨리 하자!”

수치심과 분노로 붉어지는 문평의 표정을 진득하게 지켜보며 제 다리 사이를 그의 허리춤에 비빌 기세로 요란을 떨던 계살귀가 돌연 소리를 질렀다. 그의 등 뒤에서 느긋하게 서 있는 시살귀는 혼자 신이 난 계살귀를 바라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나도 더 이상 저 꼴을 못 보겠으니까 빨리 하자. 저 새끼만 재미 보고 이게 뭐냐고.”

“알았어요. 알았어. 기다리세요.”

그들 세 사람만 방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이 대놓고 조급증을 내자 옆방에 있던 누군가가 대답한다. 머지않아 그는 쟁반 하나를 들고 그들에게로 돌아왔다.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은 냄새가 나는 물건들이 쟁반 위에 한가득 놓여 있었다.

문평은 새로이 나타난 사내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문평에게 암기를 쏘았던 바로 그 점소이 사내였다.

“이게 겉보기완 달리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고요. 다루는 데만 해도 상당히 손이 많이 가는 거라니까요?”

문평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던 미소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의 얼굴에 맴돌고 있었다. 사내가 계살귀에게 손짓하자, 계살귀가 아쉬워하면서도 뒤로 물러선다.

문평은 사납게 점소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언젠가 자기 손에 잡히면 산 채로 찢어발기겠다는 듯한 태도였으나, 점소이 사내는 그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입 벌리세요.”

점소이 사내는 쟁반 위의 도구를 챙기며 문평에게 명령했다. 친절한 어조가 생활화된 듯, 그는 이 와중에도 문평에게 존댓말을 썼다.

“입 벌리시라니까요?”

“누구 맘대로.”

두 번째로 권유했지만 문평이 말을 듣지 않자, 세 번째는 행동으로 나왔다. 그는 집게같이 우악스러운 손으로 문평의 입을 벌렸다. 그의 뜻대로 하지 않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대항해 봤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혈도를 짚이고 말았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실랑이 끝에 입이 벌어지고, 무언가 진득한 액체가 목구멍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미끈미끈한 액체 사이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비릿하고 역한 냄새가 입 안에 확 퍼진다. 마치 썩은 피에 돼지 똥이라도 섞은 것만 같은 냄새다.

문평은 속이 뒤집혔다. 구역질이라도 해서 토해내고 싶었지만 단단하게 턱을 틀어쥐고 있는 손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했다.

열린 목을 타고 액체가 흘러 들어갔다. 꿀꺽꿀꺽 거북하게 목이 움직였지만 그 정도의 근경련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작은 종지 안에 담긴 걸 남김없이 문평에게 먹인 사내는 혈도를 풀어 주고 뒤로 물러섰다.

“쿨럭, 쿨럭, 쿨럭.”

간신히 풀려난 문평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거세게 기침을 해댔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격렬히 기침을 해도 한 번 몸속으로 흘러 들어간 것들을 다시 뱉어낼 순 없었다.

“이제 심장에서 혈행이 몇 바퀴 돌 때까지 기다리면 돼요.”

그때가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기에?

바로 어제 백우경으로부터 건예자와 혈루단에 대한 비사를 들었던 문평이다. 덕분에 그는 무생교라는 집단이 이상한 사술을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끔찍한 액체를 강제로 먹일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만 역시 노리는 바가 있었던 거다.

자신이 사이한 술법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심장의 고동이 미칠 듯 빨라졌다. 이래서야 적들을 더욱 유리하게 할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위기를 느끼고 제멋대로 뛰는 박동을 주체할 순 없었다.

“그런 거라면 내게 맡겨둬. 시간을 아끼게 해줄 테니.”

점소이 사내의 말을 들은 계살귀가 자신 있게 나섰다. 그는 문평의 대퇴부 안쪽으로 손을 미끄러트리더니 다짜고짜 고환을 잡았다. 손아귀에 꽉 잡히는 실한 두 개의 알을 쥐어짜듯 움켜쥔 계살귀는, 고통 때문에 일그러진 문평의 미간을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남자의 급소를 비틀리듯 잡힌 문평은 치밀어 오르는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버텨 볼 수조차 없이 아팠다. 아랫도리를 그대로 잡아 뜯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윽! 으윽!”

“감창 좋고.”

“으윽, 이 개새끼!!”

“그렇게까지 싫어하진 말자고. 나도 손맛 좀 봐야 될 거 아냐. 너희가 좆같이 튀는 바람에 그 뒤를 쫓느라 취미 생활도 제대로 못 했어. 보름 동안이나 납작 엎드려 있어야 했단 말이야. 내가 지금 얼마나 고픈 줄 알기나 해? 하다못해 시살귀 저 자식의 시큼털털한 엉덩이에까지 눈이 간단 말이야.”

계살귀는 손에 쥔 고환을 쥐었다 폈다 하며 그를 괴롭혔다. 악랄하게도 내력까지 돋우고 있었기 때문에, 아래가 빠지는 듯한 통증은 갈수록 격렬해졌다.

문평은 허리를 활처럼 둥글게 휘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비명을 지를수록 더 좋아하는 계살귀에게 더 이상의 즐거움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지만, 고통에 찬 신음 소리는 악다문 잇새로도 여지없이 흘러나왔다.

“미친놈, 저 새낀 자기도 사내새끼면서 어떻게 저런 짓을 하지?”

“글쎄 말이야. 변태 같은 놈.”

어린 여자아이의 가랑이를 찢어 죽이는 것을 좋아하는 추살귀와 첫사랑의 여인을 품기 위해 그녀를 일부러 죽였다는 소문까지 있는 시살귀가 계살귀를 보며 수군거렸다. 계살귀는 자신의 마음에 찰 때까지 실컷 고환을 비튼 후에야 손을 떼주었다.

“허억. 허억. 허억.”

짧지 않은 순간, 고문을 당한 거나 다름없는 문평은 얼굴에서 땀을 뚝뚝 떨어트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은 물론 전신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너무 힘들어 온몸의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다. 아직도 고환이 불이 나는 듯 뜨거웠다.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아도 그것이 붓고 있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이쯤이면 됐겠지? 아님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한가?”

“아니요. 충분합니다.”

같은 남자로서의 동병상련을 느꼈기 때문일까. 점소이 사내의 웃음이 조금 떨떠름해졌다. 문평은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창백해진 입술이 분기 때문에 부들부들 떨렸다.

순간의 방심이 치가 떨리도록 후회됐다. 드디어 해방이라고 들뜨지만 않았어도 이런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 팔을 풀고 일어나 저자들을 모조리 도륙 내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걸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으나, 그에게 그럴 만한 능력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저, 이 일 내가 한번 해봐도 되겠나? 예전에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 실제로 해본 적은 한 번도 없거든.”

그들이 의도하는 ‘일’이 시작되려고 하자 시살귀가 쭈뼛쭈뼛 나서며 자청했다. 점소이 사내는 잠시 망설였으나 시살귀가 재차 독촉을 하듯 청해오자 더는 못 이기고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러십시오. 명령을 내리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이 곽을 손에 쥐고 있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점소이 사내는 자신이 손에 들고 있던 옥곽을 시살귀에게 넘겨주었다. 시살귀는 냉큼 옥곽을 받아 쥐더니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 물건은 겉으로 보기엔 어디에도 이상한 데가 없었다. 그냥 평범한 옥곽이다. 액체가 들어 있는 듯 흔들 때마다 찰랑찰랑 물소리가 나는 것을 제외하자면 말이다.

“이름을 말해 봐.”

문평은 다짜고짜 명령조로 내려지는 질문에 코웃음을 쳤다.

‘뭐라고? 미쳤냐. 너희들에게 이름을 말하게?’

어떤 것을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고문을 해도 입을 열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순간, 뱃속이 고통스러워졌다. 무언가 뜨겁고도 차가운 것이 창자를 뒤틀리듯 요동치게 한다. 살아 있는 무언가가 제 마음대로 헤집고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이다.

‘이게 뭐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감각에 오한이 치밀었다. 주먹 쥔 두 손에 식은땀이 한껏 배었다.

“석문평.”

느닷없이 그의 입이 열렸다.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단답형의 대답이지만, 그 말은 분명 문평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순간 얼어붙은 듯 등골이 서늘했다.

신이 난 시살귀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나이는?”

“서른넷.”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멋대로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문평은 공포에 질렸다.

“소속은?”

“마교 외전 소속. 참혼대斬魂隊. 삼조장.”

“와. 생긴 것답지 않게 마교 소속이었어? 이거 끝내주는데?”

추살귀가 그의 대답을 듣고 휘파람을 분다.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대답을 억제하려는 어떤 노력도 무용지물이다. 그의 입은 몸에서 독립이라도 한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너 자옥이라는 년하고 같이 왔지? 그년 지금 어디 있어? 그년 숙소가 정확히 어디야?”

“같이, 천이각, 영빈관…….”

“씨팔. 뭐라는 거야?”

“질문을 정확히 해주셔야 합니다. 여러 개의 질문을 한꺼번에 하면 심면충心面蟲이 제대로 파악을 못해요.”

문평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이 꼬이자 시살귀가 짜증을 냈다. 그러자 참을성 나쁜 어린아이를 달래듯, 점소이 사내가 찬찬히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아, 알았어. 다시 묻는다. 자옥이라는 그년, 지금 어디 있어?”

“천이각.”

“그년 숙소는 정확히 어디야?”

“영빈관. 영화소축榮華小築. 왼쪽에서 첫 번째 방.”

자제할 틈도 없이 대답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자옥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이 속수무책으로 적들에게 넘어갔다. 문평은 자신의 혀를 그대로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빌어먹을 턱은 그의 의지를 외면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비루먹은 개 같은 계집을 좋은 데서 재우네. 영빈관이라. 거기까지 어떻게 기어들어 가지?”

“교에서 방법을 마련하겠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아. 젠장. 그럼 또 다음 지시가 올 때까지 죽치고 있어야 하잖아. 좀이 쑤셔서 죽겠구먼.”

문평의 대답을 들은 귀두삼귀가 자기들끼리 쑥덕였다.

‘설마, 아직도 자옥인가?’

문평은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옥이 벌써 정도맹에 도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직도 그 애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수천의 일류 고수들과 수십의 절정 고수, 그리고 몇 명의 초절정 고수가 늘 포진해 있는 정도맹은 황궁보다도 오히려 뚫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성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게까지 할 것 없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걸 잠자코 듣고만 있던 점소이 사내가 참견을 해왔다.

“뭐야?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어?”

일행 중에서 머리를 쓰는 일을 전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점소이 사내는, 자신을 향해 눈을 빛내는 귀두삼귀의 귀에 쏙 들어오는 조언을 해주었다.

“방금 전, 심문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건 곽독충과 심면충을 섞느라 그런 겁니다. 그놈들이 서로를 잡아먹지 않게 하려면 특별한 비법이 필요하거든요. 손은 많이 가는 대신에 효과는 탁월하죠. 곽독충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정도맹에 잠입하지 않고도 손쉽게 그 계집아이를 빼내 올 수 있을 겁니다.”

“뭐야? 어떻게?”

“곽독충의 효능이 그런 거거든요. 잠시만, 시범을 보일게요.”

자신의 자랑거리를 남 앞에 보여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이 난 사내가 문평에게 다가왔다.

“가만히 있어.”

그는 명령조로 문평에게 말을 뱉었다. 그러더니 칼을 꺼내 그를 묶은 줄을 풀었다. 그에 더해 눌러놓은 혈도까지 풀어 준다. 어차피 자기들 쪽엔 절정 고수가 세 명이나 있으므로 긴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귀두삼귀는 흥미로운 기색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줄이 풀렸는데도 문평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력을 일으키지도, 신법을 끌어 올리지도 않은 채 처음 묶여 있던 그 자세 그대로 멍하니 앉아만 있다.

귀두삼귀가 신기하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도 바보는 아니었던지라 점소이 사내가 그들에게 뭘 보여 주려고 하는지를 알아차렸다. 문평이 이렇듯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점소이 사내의 명령 때문이었다.

“일어서!”

문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사람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본 문평은 미칠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몸 안에 정신이 갇혀 버렸다. 고작 벌레 한두 마리가 어떻게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걸까? 스스로가 당하고 있음에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호오. 곽독충郭禿蟲이라더니 왜 곽독충인 줄 알겠군. 이건 완전 꼭두각시 아냐?”

남의 몸을 명령 하나로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즐거워하며 추살귀가 말했다. 계살귀의 눈빛은 더욱 빛났다. 그의 시선은 길을 걷다 야명주라도 발견한 것처럼 희열에 가득 차 있었다.

“이거 정말 재미있겠는데?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잠깐만 빌려주면 안 되겠나? 곱게 쓰고 돌려주지.”

계살귀가 입술을 초조하게 핥으며 제안했다. 점소이 사내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안 된다는 건지 괜찮다는 건지 알 수 없는 태도였다.

“또 뭐 하려고 그래, 이 새끼가?”

아까부터 혼자 신나 있는 그가 못마땅했던지, 시살귀가 시비를 걸었다. 자신은 재미를 못 보고 있는데 계살귀 혼자 한껏 기분을 내니 내심 시기심이 드는 모양이다.

“구음口淫을 한번 해보려고. 내가 다른 건 다 해봤는데, 그것만 못 해봤거든. 그나마 이를 뽑아 놓고는 해본 적이 있는데 이가 멀쩡할 때는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어. 새끼들이 이빨만 있으면 물어뜯으려고 지랄을 해서 말이야.”

“호오. 그래? 하긴. 나도 그런 건 못 해본 것 같은데.”

이야기를 듣던 추살귀가 귀가 솔깃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친다.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에 그 짓밖에 들어 있지 않은 놈들은 문평이 잡아 놓은 물고기라도 되는 것마냥 그의 다양한 활용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니까. 이 기회에 한번 해보자고. 이런 기회가 그리 흔히 오는 건 아니잖아.”

점소이 사내는 아직 허락도 안 했는데 계살귀는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된 것처럼 말하며 두 손을 비볐다. 음흉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자신의 입술을 바라보는 계살귀의 시선에 문평은 몸을 떨었다.

뜻하지 않게 추살귀까지 흥미를 보이자 무게 추는 쉽게 기울어졌다.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는 시살귀는 빠진다고 했지만, 계살귀와 추살귀는 벌써부터 기대가 가득한 얼굴로 문평을 훑어본다.

‘죽여 버리겠어, 개새끼들. 진짜로 죽여 버린다!!’

문평은 핏발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자신의 몸이 다시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게 된다면, 그래서 스스로의 손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제일 먼저 검을 들고 저자들에게 달려들 터였다. 자신이 그들에게 당할 수 없는 실력이라거나, 그렇게 죽어 봤자 개죽음밖에 안 된다거나 하는 이성적인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나부터 해볼게. 나부터! 내가 제안한 거잖아.”

계살귀가 벌써부터 허리춤을 풀어헤치며 문평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점소이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차라리 다녀오고 나서 일을 벌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지금은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가기 전에 잠깐 맛만 보자고. 자네도 알잖아.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지루하게 있었는지.”

“후우. 알았습니다.”

하지 마. 이 새끼야. 하지 말라고!! 문평은 비명처럼 부르짖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의 절망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점소이 사내는 기어코 명령을 내렸다.

“무릎 꿇어.”

문평의 몸은 반항의 동작조차 없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입을 벌려.”

계살귀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문평의 얼굴 앞에서 허리춤을 풀었다. 추살귀도 회가 동한 눈치로 그 모습을 지켜본다.

시커먼 물건이 문평의 코앞에 덜렁 드러났다.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지 시커멓게 변색한 계살귀의 성기는 인사라도 하듯 벌써부터 발기가 되어 꺼떡거리고 있었다.

문평의 코 바로 앞에 놓인 성기에서 쉰 정액 냄새가 풍겼다. 토할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게 가능할 리 없다. 문평의 입술은 느슨하게 벌어진 채 명령을 따를 준비를 했다.

남의 말에 따라 인형처럼 움직이는 그의 몸이 스스로를 노리갯감으로 제공했다. 눈을 감을 수도, 시선을 돌릴 수도 없는 처지로 억지로 입을 열고 있는 문평의 머릿속은 타오르는 분노로 인해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이 치욕을, 이 수치를, 도저히 참아 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퍽!

바로 그때였다. 너무나도 갑작스레, 느닷없는 소성과 함께 뜨거운 액체가 얼굴에 튀었다.

처음에는 계살귀가 흥분을 못 이겨 미리 파정破情한 줄 알았다. 그러나 눈앞에서 꺼떡거리던 성기가 그대로 뻣뻣해지고, 더불어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몸까지 마룻바닥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자 자신의 추측과는 다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닥으로 넘어진 계살귀의 몸에는 머리가 없었다. 주먹으로 부순 수박처럼 완전히 박살 나 있다. 뇌수와 뼈가 박살 나 사방으로 튄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신의 얼굴을 더럽힌 것이 무엇인지, 문평은 그 모습을 보고서야 짐작할 수 있었다.

“뭐야, 이 새끼가!”

계살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본 추살귀가 갑자기 난입한 남자에게 분기탱천해 달려들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추살귀는 자신과 비슷한 무공수위의 계살귀가 단 한 수에 절명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순간적인 감정만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의 어리석은 착각은 곧 처참한 대가로 돌아왔다.

퍼억! 뼈와 살이 터지는 파육음이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두 번도 아니었다. 단 한 번. 그저 주먹을 내지르는 것만으로 상대의 가슴을 함몰시켜 거대한 구멍을 만든 남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시살귀를 바라보았다.

추살귀보다 눈치가 빨랐던 시살귀는 그때 벌써 몸을 날리고 있었다. 절정 고수 두 명을 각각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격살시킨 상대는 상상할 수도 없는 절대의 고수였다. 덤빈다고 해서 이길 가능성도 없을뿐더러, 살아남을 가능성은 더욱 없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다른 두 놈을 위해 복수를 할 만한 의리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뭉쳐 있으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이기에 붙어 다녔을 뿐, 그들은 서로에게 친구도 무엇도 아니었다.

“쥐새끼 같은 놈.”

절대 고수는 감정 없는 무심한 어조로 말하더니 권을 내질렀다. 허공을 격해 쏟아지는 격공장擊空掌이 그의 손에서 발출되었다.

보통 격공으로 이뤄지는 장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위력이 작아지는 법인데, 절대 고수의 격공장은 거리를 초월하는 파괴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퍼어억! 이번의 파열음은 이제껏 들려왔던 것들에 비해 유달리 과격했다. 창문을 향해 달리던 시살귀는 등에 격공장을 맞았고, 그 덕에 가속이 붙어 피떡이 된 채로 벽에 충돌했다. 피와 살이 곤죽이 되어 벽에 달라붙었다. 사람의 형상을 거의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으깨진 상태라 눈 뜨고 보기 어려웠다.

“으, 으아아아!!”

어떤 일이 있어도 웃음을 잃을 것 같지 않던 점소이 사내가 순식간에 도륙된 세 명의 시체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남에겐 잔혹한 짓을 태연하게 할 수 있어도 자신이 그런 꼴을 당하면 견디지 못하는 전형적인 비열한인 듯, 그는 자신의 눈앞에 닥친 흉사에 좀처럼 냉정을 찾지 못했다.

절대 고수가 자신을 돌아보자, 점소이 사내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맨손으로 절정 고수 셋을 때려죽인 고수가 흉흉한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하체에서 노란 물이 흘러도 그걸 알아차릴 틈이 없다.

“사, 살려, 살려 주…….”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나지막하게 코웃음을 친 고수가 수도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한다. 날붙이도 없이 그저 가볍게 손을 그었을 뿐인데 점소이 사내의 목에 불그스름한 혈선이 생겨났다. 예리한 보검으로 한 번에 매끈하게 베어낸 듯 점소이 사내는 울부짖는 얼굴 그대로 천천히 목이 잘려 나갔다.

목이 몸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린 듯 떨어져 내린 목에서 표정이 변했다. 경악으로 일그러진 그 얼굴엔 처참한 비명이 어울릴 듯했지만, 다행히 소리가 나기 전에 성대가 잘려 시끄러운 꼴은 면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이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났다. 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은 문평은, 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기에 시야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은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손 하나 까딱하는 것으로 사람 네 명을 파리처럼 때려죽였다. 잔인하기 그지없는 손속이 속 시원하게 느껴지는 건, 문평에게 심어진 원한이 그만큼 컸던 탓이다.

장내의 쓰레기들을 정리한 연유에야 절대 고수, 즉 천마는 문평을 돌아보았다. 그는 문평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채고는 쯧 하니 혀를 차고 만다.

“무슨 일이냐?”

“…….”

문평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의아해진 천마는 문평에게 다가와 상태를 검사했다. 자칫 빠트리기라도 할까 싶어 신경 써서 꼼꼼히 검토해 봤지만, 어디에도 혈도를 짚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무생교인가 하는 놈들이 사특한 사술을 쓴다더니만, 설마 그런 것에 당한 것인가?’

답답해진 천마는 안력을 돋우고 문평의 몸 안을 관조했다. 정확히는 문평의 몸 안을 휘돌고 있는 기의 움직임을 살핀 것인데, 다행히도 깨트리기 어려운 내력이나 사악한 술법 비슷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천마가 살펴보니 기의 운행도 정상적이고, 혈행도 괜찮았다. 다만 뇌호혈腦戶穴에 기묘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 꿈틀거리며 뇌의 기능을 방해하고 있어 신경에 거슬렸다.

기운만 따지자면 고와 비슷한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와는 또 다른 이질적인 기운까지 함께 품고 있다.

‘무생교에서 만들어 낸 새로운 장난감인가?’

천마로서도 처음 보는 물건이지만, 기의 흐름을 느끼며 잠시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대강 파악이 가능했다.

‘뇌의 기능을 교란시켜서 숙주의 몸을 지배하는 형식이로구먼. 개념 자체는 연가시에서 따온 듯하지만 그보다 구조가 조잡하다. 급조를 했거나 만들어 내는 자의 솜씨가 형편이 없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순도 높은 금기金氣를 이길 수 있는 악기惡氣는 거의 없다. 이것들처럼 구조가 조악한 물건은 더욱 그렇다. 천마는 문평의 몸에 진기를 넣어 벌레들을 감싸고 금기로 단숨에 태워 버렸다. 짧은 순간 꿈틀하지도 못하고 타버리는 것을 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몸 밖으로 내보낸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문평이 눈을 깜빡거렸다. 충혈된 눈을 안정시키기 위해 열심히 눈꺼풀을 깜빡거리던 문평은 반쯤 젖은 눈을 들어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아무거나 주워 먹고 다니지 말라지 않았더냐. 저번에는 고독이더니, 이번에는 정체 모를 벌레냐. 흙이라도 먹고 다니는 게야?”

자신을 바라보며 안심한 어린아이처럼 어깨가 풀려 버리는 문평의 모습이 낯설어서, 천마는 괜히 통박을 주었다. 그러나 문평은 천마의 타박 따윈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머리를 깊게 숙이며 천마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두 명의 음적들에게 입으로 겁간당한 후, 자기 손으로 자옥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될지도 몰랐었던 끔찍한 순간이 아니던가. 때마침 나타난 천마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했을 터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문평이 다시 한번 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천마에게 이토록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같은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방금 천마는 그의 목숨만 구해 준 게 아니었다. 그의 자존심과 그의 긍지를 같이 구원해 주었다.

이제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이 쫙 퍼졌다. 자기 자신의 몸속에 갇혀 있는 동안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던지, 지금까지도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허리를 내려 앉히며, 문평은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십년감수 했다는 건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어찌 된 영문이냐?”

천마는 뒷짐을 지고 주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물었다. 이곳에 도착해 보니 문평의 입으로 구음을 하려는 자들이 줄을 서 있고, 녀석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기에 일단 다 패 죽였다.

욱하는 기분에 저지른 일임에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놈들을 다 죽이고 나니 상황을 파악할 단서가 없다. 이 녀석이 왜 이런 데에 끌려와 있는지, 저딴 놈들은 또 어쩌다 맞닥트린 건지.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대체 뭐냐?”

발끝으로 시체를 물건처럼 걷어보며 천마가 물었다. 누구냐고 묻지 않고 이것이 뭐냐고 묻는 점이 참으로 그다운 처사다.

“귀두, 삼귀였습니다.”

“귀두삼귀?”

그 이름을 천마가 모를 리 없다. 그렇지 않아도 동정호에서의 일로 내심 벼르고 있던 놈들인데, 설마하니 이놈들이 그놈들이었을 줄이야. 천마의 눈빛 속에서 순간적으로 광망이 번득였다.

“이자들을 어떻게 만났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닥에 굼벵이처럼 웅크리고 있던 문평이 그 질문을 듣고 갑자기 움찔한다. 상황을 보면 일방적인 피해자인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영 대답을 못 한다.

문평은 천마가 질문을 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바닥에서 머리를 웅크리고만 있었다. 지나치게 시간을 끄는 그의 행동 때문에 천마의 마음에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한데 바로 이때였다. 이번에는 문평 쪽에서 질문이 되돌아왔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내 두 손 안에 얼굴을 묻고 있던 문평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천마를 바라보았다. 문평 못지않게 속으로 움찔한 천마였으나, 그는 문평에 비해 일 갑자 가까이 더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노련한 태도로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의아한 듯 반문했다.

“뭘 말이냐?”

“제 위치 말입니다. 정신을 잃은 채로 끌려온 거라 저조차도 이곳이 어디인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교주님께선 제가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짐짓 눙치듯 말을 돌리는 천마를 용서하지 않으며 문평은 예리한 추궁을 했다. 문평의 추궁으로 인해 자신이 한 짓이 이미 들통났음을 깨닫게 된 천마는 외려 당당한 태도로 문평의 질문에 답했다.

“추종향追從香을 썼다.”

“저한테 추종향을 묻혀 놓으셨습니까?!”

예상은 했던 바지만 직접 들으니 기가 막힌다. 자기는 꼬리가 붙는 것이 싫다고 죄 없는 수하의 목까지 베었다면서, 남한테는 어째서 일말의 양해도 없이 그런 걸 막 묻히는 건가? 언제 어디서든 내 위치를 알아서 도대체 뭘 어쩌려고?

“그러는 너야말로 말 돌리지 말고 설명해 보거라. 너는 이곳에서 대체 뭘 한 것이냐? 바깥에 나갈 일이 있으면 파면객이라도 데리고 다니라고 일부러 당부까지 했건만, 도마뱀 꼬리 자르듯 쏙 빼놓고 혼자만 나오다니. 무슨 비밀스러운 행사가 있었기에 그런 위험을 자처했느냐?”

문평이 찌르고 나서자 천마도 역습을 했다. 어차피 인간관계란 주고받는 것. 딴에는 짐작 가는 것이 있어 추종향을 묻혀 놓았던 천마는, 함부로 나다니다가 눈 뜨고 볼 수 없는 봉변을 당할 뻔한 문평에게 냉담하게 되물었다.

“개,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 그랬습니다.”

“흐음. 개인적인 볼일이라? 이틀에 한 번씩은 꼭 있는 바로 그 개인적인 볼일 말이냐?”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비꼬는 천마의 태도에 문평은 내심 뜨끔했다. 눈에 무슨 투시경이라도 달려 있는지, 사람이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하는 것만 조목조목 짚어 내는 특기를 가진 천마다.

설마 다 알고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조여 왔지만, 지은 죄가 상당한 문평은 할 수 있는 한 뻗대기로 마음먹었다.

“그, 그는 속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임무로, 군사께서 직접 명령하신 일입니다.”

“이틀 후, 무한 성시. 십파자十破字 표식. 뒤따라오는 마영들과 접선해 뭘 하려고 했지?”

그가 읊고 있는 것은 문평이 마영들에게 남겼던 흑화다. 앞의 두 개는 날짜와 시간이고, 뒤의 십파자란 접선을 할 때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사용하는 흑화의 종류를 말한다.

다 알고 있었구나. 눈앞에 바짝 들이댄 증거를 본 문평은 앞이 깜깜해지고 말았다.

‘알고 있었겠지. 교의 흑화를 썼는데.’

이제 와 다시 생각해 보니, 천마도 뻔히 읽을 수 있는 내용으로 용건을 전달한 게 멍청한 짓이었다.

교주인 천마가 마교에서 통용되는 흑화를 읽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는 체계가 없던 정보대를 추밀각으로 개편하면서, 흑화 체계 자체를 완전히 새로 고안해 냈다는 장본인이다. 따지고 보면 문평보단 오히려 그가 더 전문가인 셈이니, 그 문자를 이용해 비밀을 지키려고 했던 자신은 병신 삽질을 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미 아시고 계셨군요.”

문평은 체념하며 중얼거렸다.

“언제 어디서 도망간다고 미리 찔러주기까지 하는데 어떻게 그걸 모르는 척하겠느냐. 잘 쫓아가 주려고 추종향을 좀 뿌렸다. 그래. 내가 구해줘서 많이 고까우냐?”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진작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문평이 마영대에게 천마의 정체를 넘기려고 한 것도, 그렇게 의무를 벗어 버리고 홀가분하게 몸을 감추려 했던 것도, 그는 모두 다 알고 있었다.

문평은 그래서 천마가 무서웠다. 말도 하지 않은 사실을 미리부터 알고 있는 것보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다 결정적일 때 뒤통수를 친다는 점이 더 무서웠다.

앉아서 천 리, 서서 만 리라더니 이 사람이 하는 짓이 그랬다. 이래서야 자신은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밖에 될 수 없지 않은가.

“……말씀드렸습니다. 구해 주신 것은 감사드린다고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문평은 웅얼거리듯 다시 인사를 건넸다.

소 뒷걸음질 치다 개구리 잡은 식으로 구해 준 거지만, 어쨌든 은인은 은인이다. 처음의 감사했던 마음이 진실을 알게 된 후엔 절반 정도는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입은 은혜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문제다.

도망가는 자신을 쫓기 위해서 뿌렸던 추종향이 도리어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니 그에 대해 추궁을 하는 건 배은망덕한 짓거리가 될 것이다. 그 일에 대한 근본을 따지자면 오히려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겠지.

설사 스스로가 잘못한 것을 알아도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이 천마다. 그러니 지금처럼 자신의 잘못이 큰 상황에서는 천마의 작은 잘못 정도는 흠도 아니게 될 게 분명하다.

여태까지의 경험을 볼 때,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충분히 예상되었다. 문평은 길게 한숨을 쉬며 엎드렸던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평생을 통틀어도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흉험한 경험을 했건만, 그에 대한 감회는 어처구니없도록 쉽게 휘발되어 버렸다. 천마와 잠시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에 정신이 팔려 다른 것 따위엔 정신을 팔 새가 없었던 것이다.

천마와 있으면 언제나 이랬다. 마치 가지고 놀 듯 제멋대로 남의 감정을 쥐고 흔드는 사람이다 보니, 그 때문에 너무 휘둘려서 딴생각을 하나도 못 하게 된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문평은 분간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지배를 받는 것 같은데, 또 어떨 때 보면 보호받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귀두삼귀를 척살하던 천마를 볼 때도 느꼈던 거지만, 같은 편일 때 이 사람만큼 안심이 되는 존재도 없었다. 대부분은 아군이라는 실감이 도통 안 난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뭘 그렇게 넋 놓고 앉아 있는 거지? 이렇듯 피 칠갑한 방에서 밤새 앉아 있을 참이냐? 일어나거라. 돌아가 밥부터 먹어야겠다.”

이 자리에서 계속 논쟁을 하기 싫다는 듯 천마가 자리를 정리했다. 거의 윽박지르는 것과 다름없는 그 태도에 문평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6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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