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장
마치 집 나갔던 고양이가 되돌아오는 것처럼, 의식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주인에게 되돌아왔다.
문평은 뻑뻑하게 피곤한 눈을 조심스럽게 깜빡였다. 처음에는 흐릿하던 사물이 점차 자리를 찾아갔다. 낯선 공간이 그의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문평은 정신이 든 자세 그대로 가만히 누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대들보가 드러나도록 만들어진 초라한 천장이 눈에 띄었다. 텃밭이 있는 시골집이 으레 그러하듯, 대들보 아래는 말린 소채와 잘게 자른 무말랭이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사이사이에 소채로는 안 보이는 풀이 매달린 것도 보였다. 공기 중을 떠도는 알싸한 향기로 보아 아무래도 약재인 것 같다.
‘……약재라. 그렇다면 여긴 약방인가?’
문평은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무심결에 팔을 들어 침상을 짚었는데, 그 동작을 하자마자 전신에서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굳이 일어나려고 애쓸 것 없수. 아직 피육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함부로 움직이면 덧나거든. 하루나 이틀쯤 더 쉬구려. 그렇지 않으면 크게 흉이 돼.”
문평의 발치에서 졸린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해 거기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의자를 하나 가져다 놓고 앉아 있는 노파의 모습이 보였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 일견 해학적이기까지 한 그녀는, 문평의 격한 움직임을 보고 깜짝 놀라며 낮게 혀를 찼다.
“저런. 그렇게 움직이면 안 된다니까 그러네. 괜찮수? 많이 아플 텐데?”
노파의 말대로였다. 정말로 아팠다. 진심으로 아프고 무지막지하게 아파서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문평은 등가죽 전체를 잡아 찢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황급히 도로 누웠다. 그 고통을 느끼고 나니 자신이 엎드린 채로 눕혀져 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은 아마도 등을 다쳤던가 보다.
‘하지만 어째서 다쳤던 것일까? 무인이 앞가슴도 아니고 등을 다치다니, 이게 무슨? ……아, 화탄? 그래. 화탄이 터졌었지.’
조각조각 부서졌던 기억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하나둘 떠오르는 기억들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맞춰지고 있었지만, 그 속도는 짜증이 날 만큼 느렸다. 자신이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방금 깨어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문평은 흐릿한 기억을 의아하게 여겼다.
‘그렇지. 자옥을 찾으려 그자들이 사람을 보냈어. 유람선이 습격당하고 계살귀에게 걸려 죽을 뻔했었지. 가만, 그렇다면 지금 자옥은 어디에 있지? 배에서 탈출할 때만 하더라도 내 품속에 있었는데?’
완전하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 가던 문평은 자옥의 존재를 한참 만에야 기억해 내고는 희게 질렸다. 혹시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같이 구명되었다면 언급이라도 있었을 텐데, 노파가 아이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진다.
“할머님, 혹시 작은 아이 하나를 못 보셨습니까? 정신을 잃기 전까지 제가 데리고 있던 아이인데요, 무척이나 작고 마른 여자애입니다. 표정이 없고 우울한 인상이에요. 그런 아이 못 보셨습니까?”
“아아. 자옥이? 그 애기를 말하는 거유? 그럼. 본 적 있지. 오늘 아침에도 봤는걸.”
“예? 그 애를 보셨어요?”
“아까까지도 집에 있다가, 댁 상처에 바를 고약을 만드는 데 자근紫根이 필요하다니까 그거 뽑는다고 밭에 나갔는데. 좀 있다 밥때가 되면 돌아올 거유. 왜? 불러 드릴까?”
혹여나 애를 잃어버렸을까 봐 초조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물었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천하태평. 무심해도 이리 무심할 수 없었다.
세상만사 근심할 게 하나도 없는 듯한 노파의 태도를 보니 문평까지도 맥이 풀린다. 괜한 걱정을 했나 보다. 문평은 온몸으로 했던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는 무사합니까?”
문평은 자옥에게 별다른 이상이 없을 거라고 짐작을 하고 있으면서도 확인하듯 물었다. 노파는 합죽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애기야 괜찮지. 문제는 댁이었구먼.”
“……제가 며칠이나 정신이 없었습니까?”
“가만 보자. 따져 보니 아직 사흘이 안 된 것 같수. 그제 새벽녘에 검둥이 총각이 업고 들어왔으니, 이제 이틀인가?”
“그럼 그렇게 오래 누워 있었던 것도 아니군요.”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상태가 문제였수. 깜빡 잘못하면 정말로 황천길 갈 뻔했다니까?”
그런 것치고는 그의 몸 상태가 너무 멀쩡했다. 등에 입은 화상을 제외하면 별다르게 느껴지는 외상도 없고, 내상조차 자는 동안 저절로 치유된 듯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많이 호전되었다.
진기를 운행해 스스로의 상태를 확인한 문평은 노파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무림인의 상처를 돌본 적이 없던 노파가 보기엔 충분히 험해 보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연세도 많은 노인네가 병시중하느라 고생하셨을 테니 이 정도 생색쯤이야 못 받아 줄 것도 없다.
“그랬다면 정말 천운이네요. 정말 운 좋게 할머님 같은 분을 만나서……. 잠깐. 잠깐만요. 지금 검둥이 총각이라고 했습니까? 그 사람이 저를 이곳에 데려왔습니까?”
문평은 넉살 좋게 엄살을 받아넘기다가 노파가 했던 말 중에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되짚어 물었다. 끄덕끄덕. 노파가 다시 고갯짓을 했다.
‘검둥이 총각이라니. 이 동네 사람인가?’
문평은 순박하다 못해 촌스럽기까지 한 호칭에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아무렴. 그 사람이 데려왔지. 치료비도 넉넉히 주고 밥값이라고 웃돈까지 얹어줬는걸.”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만나 볼 수 있나요?”
불현듯 머릿속에서 거친 쇳소리로 가득하던 전음이 떠올랐다. 검둥이 총각이라는 사람이 이 동네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의 생각에는 아무래도 유람선에서 도움을 줬던 사람과 동일한 인물일 것 같았다.
물에 빠진 채로 정신을 잃었던 자신이 자력으로 떠올랐을 리 없다. 분명 누군가 곁에 있다 그를 건져 냈다는 소린데, 문평이 알기로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검둥이 총각도 밭에 갔수. 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에구. 저기 오네. 애기하고 검둥이 총각하고 같이 오는구먼. 그런데 뭔 자근을 저리도 많이 뽑았누. 밭 전체를 뒤집어엎었나?”
문평은 노파가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인영이 그의 시야로 들어왔다. 노파의 말대로 뭔가가 잔뜩 든 커다란 대바구니를 옆에 낀 사내 하나와 사내의 허리춤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그마한 여자아이 하나가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문평은 ‘검둥이 총각’의 실제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순박한 별명으로 마구 불리기에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눈은 소처럼 큰 순진한 청년을 상상했는데, 막상 실제로 마주하게 된 검둥이 총각은 육 척이 훨씬 넘는 키에 전신을 검은색으로 휘감은, 마치 저승사자와 같은 자태를 한 무시무시한 형상의 남자였다. 키만 큰 게 아니라 풍채도 남달랐고, 조용한 가운데 풍기는 은은한 위압감은 ‘자신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고수’라고 일컫던 윤승효의 장담을 믿게 만들었다.
‘옷차림만 보면 마영대가 따로 없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이라니. 저래서 검둥이 총각이란 말인가.’
시골 할머니치고는 참으로 배짱이 대범하다고 생각하며 문평은 쓰게 웃었다.
검게 칠한 죽립 아래로 사내의 시선이 느껴진다. 문평은 초절정의 고수에게 누운 채로 인사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며, 최대한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십니까?”
딴에는 최선을 다한 인사였으나, 검둥이 총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고개만 까딱하더니, 옆에 낀 바구니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옥은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검둥이 총각을 따라 들어간다. 문평에게는 눈인사로 알은체하는 것이 전부였다.
‘응? 아니, 이봐. 꼬맹이 아가씨. 나보다 그 저승사자가 더 좋은가? 이래 봬도 우리는 생사고락을 같이한 전우 사이인데 너무하잖아?’
자신을 바라보는 게 너무 부끄러워 부엌으로 몸을 숨겼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문평은, 저 겁 많은 아이가 어떻게 사람을 따르게 되었을까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 아닌, 저렇게 보기만 해도 겁이 나는 인상을 가진 사람을 말이다.
훤칠하게 키가 큰 남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방으로 들어왔다. 자옥은 여전히 부엌에 있었고, 노파는 참견할 거리가 생기자 기회라도 잡은 듯 냉큼 방을 나갔다.
무료하게 몸을 엎드린 채 꼬박꼬박 졸고 있던 문평은 기다란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우는 것을 깨닫고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나름대로는 긴장하며 기다렸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사이에 잠이 들어 버렸다.
체력이 생각보다 더 많이 저하된 상태인가 보다. 봄볕에 내놓은 병아리처럼, 잠시만 긴장을 풀고 있으면 금세 머리를 끄덕이게 된다.
남자는 노파가 앉았던 의자를 끌어다가 문평의 머리맡에 두고 앉았다. 남자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목을 길게 빼고 있던 문평은, 사내가 죽립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의 반응을 본 사내의 눈매가 슬며시 일그러졌다. 얼핏 보아 눈 주위의 근육이 움직이는 것 같긴 한데, 단지 그것만 봐서는 웃는지 우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놀란 감정을 드러내 놓고는 뒤늦게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결례를 저질렀음을 깨달은 문평은 민망함에 얼굴을 못 들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 죄송합니다. 무례하게 굴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정중한 사과를 받은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문평의 손을 잡았다.
「괜찮습니다.」
두껍게 못이 박인 투박한 손가락이 손바닥 위를 간질이듯 지나갔다. 그는 손바닥에 글씨를 쓰는 것으로 의사 표시를 하고 있었다. 문평은 시선을 들어 그의 목까지 내려온 흉터를 바라보았다. 목울대 위를 정확히 가르고 지나간 상처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죽립을 벗은 그의 얼굴은 본래의 이목구비가 어땠을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콧날은 일부러 짓누른 듯 납작했고, 광대뼈도 한쪽이 내려앉았다. 얼굴 전체에 빡빡하게 난 칼자국은 입술마저 피하지 않아서, 멀리서 보면 네 개의 어긋난 입술이 한데 모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끔찍한 흉터는 얼굴뿐만이 아니라 목에도 있었다. 얼굴과 턱, 목을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그어 댄 흔적이었다.
사람이 타인에게 어느 정도의 악의를 가져야 저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일까? 문평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인 혹독한 흉터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피에 중독돼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기거나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 쾌감을 느끼게 된 자들을 본 적도 있지만, 그런 놈들조차도 산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든 적은 없었다.
“저기 말씀을, 그러니까 목소리가……?”
유람선에서 분명 전음을 들은 것 같은데, 지금 보니 말을 아예 못 하는 것처럼 보이는지라 문평이 조심스레 물었다. 손바닥 위에서 딱딱한 손가락이 다시금 움직였다.
「전음을 들으셨으니 아시겠지만, 듣기 거북한 목소리입니다. 목을 많이 다쳤는지라 소리를 내는 것도 쉽지 않고요. 그래서 평상시엔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곤 합니다. 이 방식이 불편하신가요?」
아니, 천만에. 저런 꼴을 당하고 말도 못 하게 된 사람에 비하자면 불평할 건더기도 없다.
문평이 서둘러 고개를 젓자 사내의 눈가 근육이 다시 일그러진다. 얼굴 전체가 눈을 둘 데가 없을 정도로 흉측한데도 눈빛은 온화했다. 조개로 깎은 바둑알처럼 선명하게 검은 눈동자는 속눈썹이 남아 있지 않은 눈매 속에서도 선해 보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제 이름은 석문평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잊었습니다. 윤 공자는 저를 파면객破面客이라고 부르지요. 형장께서도 그렇게 불러 주십시오.」
얼굴이 망가진 사람에게 대놓고 파면객이라고 부르다니, 실례도 이만저만한 실례가 아니다. 실례를 넘어 무례에 가까운 짓이 아닌가. 하지만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그렇게 부르길 재차 권했다.
강호인이라면 타인이 자신의 약점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생사결生死結을 치르곤 하는 자존심 높은 인종들인데, 이 사람은 반대로 자신의 약점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괴벽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쁜 느낌은 아니다. 과장도 허세도 없는 담담한 태도가 믿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평이 짐작했던 대로 그는 윤승효가 두고 간 호위가 맞았다. 그는 윤승효가 개인적으로 받아들인 빈객賓客으로, 윤승효에게 직접 요청을 받아 처음부터 같은 유람선에 탑승하고 있었다고 한다. 윤승효가 배를 떠난 후에는 그의 임무까지 승계받았지만, 그들의 앞에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쉽지 않아 몸을 감추고 주위에서 지켜보기만 했었단다.
문평은 자신이 이렇게 커다랗고 시커먼 사람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이 사람의 거대한 덩치로 봐선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윤 공자께는 인편을 통해 상황을 전해드렸습니다. 지급으로 보냈으니 지금쯤 확인했을 겁니다.」
‘윤승효에게 상황을 전달했다’라. 이 사람이 말하는 윤 공자란 진짜 윤 공자일 테지.
그는 충동적으로 파면객에게 당신이 아는 사람 말고 또 다른 윤승효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볼 뻔했다. 치졸하기 짝이 없는 심술이었으나 한번 꼬이기 시작한 마음을 되돌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의 윤승효뿐만 아니라 파면객까지 곤란해지는 게 아니었다면, 진짜로 그렇게 물어봤을는지도 모른다.
문평이 정말로 소식을 전하고 싶은 상대는 진짜 윤승효가 아니라 가짜 윤승효였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 한때는 연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것조차 확실하지 않은 남자를 문평은 만나고 싶었다.
그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두 사람 사이엔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도 존재했다. 하지만 문평은 그에게 소식을 전할 만한 어떠한 방법도 갖고 있지 못했다.
문평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사람이 언제나 돌아올지, 혹은 돌아오기나 할는지도 아는 바가 없다.
어이없는 노릇이지만, 문평이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라고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 사람이 무인답지 않은 손바닥을 갖고 있다는 것.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이면서도 그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굳은살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를 간직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문평은 문득 생각을 멈췄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잠시 동안 대체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껄끄럽게 만들었는가를 고민하던 그는 천천히 눈길을 내려 파면객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는 확연히 다른, 너무나도 대조적인 형상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꿈에 볼까 두려운 얼굴과는 달리 파면객의 손은 그렇게까지 험하지 않았다. 그의 손은 평범하고 전형적인 무인의 손이다. 수련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손바닥 전체가 굳은살로 뒤덮였고, 혹사당한 손마디는 굵을 대로 굵어졌다. 파지把持2)를 하는 엄지와 중지에는 아예 지문이 지워진 상태다. 보기에는 거칠어 보이지만 지난 세월의 노력과 열정만큼은 정직하게 보여 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고수라면 누구나 이런 손을 가졌다. 이렇게 될 때까지 피와 땀을 쏟지 않고서는, 경지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평은 그렇듯 흔하디흔한 형태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새하얗게 질려갔다. 물이 흐려지듯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고, 무서운 것이라도 보는 것처럼 동공은 휘둥그레 열렸다.
갑작스레 발작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그 모습에 당황한 것은 파면객이다.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문평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안 좋기라도 한 겁니까?”
일일이 글자를 적어 뜻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파면객은 전음을 사용해 질문을 던져왔다. 문평은 그의 물음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장이 통째로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위장뿐만 아니라 심장, 폐, 간, 비장, 그야말로 내장이라는 내장은 모조리 다 뒤틀리고 있었다. 희게 식은 얼굴 위로 식은땀이 솟아올랐다. 더 이상 참는 게 힘들었다.
“죄…죄송, 죄송하지만 요강 좀…….”
문평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그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깨달은 파면객은 허둥지둥 침상 아래에서 요강을 꺼냈다. 덕분에 늦지 않고 토사물을 받아 낼 수 있었다.
문평은 요강을 끌어안고 뱃속이 뒤집어지도록 토하고 또 토했다. 그가 토해내는 것은 위장의 내용물이 아니라 핏덩어리들이었다. 정신적 충격 때문에 기혈이 진탕돼, 다잡아 가고 있던 내상이 도로 도진 것이다.
그가 토하는 소리가 방 밖까지 들렸는지 부엌에 나가 있던 노파가 돌아와 문평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노파의 치마꼬리를 붙든 자옥은 안쪽을 들여다보며 안절부절못한다. 아무리 걱정스러워도 그들이 문평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평은 생목이 찢기는 고통이 느껴질 때까지 토하고 또 토했다. 그러나 아무리 힘겹게 몸부림쳐 봐도, 명치끝에 걸린 묵직한 괴로움은 토해지지 않았다.
***
존재하는 모든 수수께끼가 증명하는 것처럼, 답을 가장 정확히 설명하는 것은 바로 질문이다.
자신에게 존재하던 최대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 문평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껏 자신이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스스로가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정보를 단락으로만 받아들이고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깊이 매달렸기 때문에, 그는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답을 보면서도 그것이 답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제 와 다시금 되돌아보니, 당시에는 뜻을 모르고 지나쳤던 암시들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눈뜬장님 노릇을 하는 와중에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지만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줄에 꿰인 구슬을 보듯 모든 것이 일목요연했다.
개를 뒤쫓으면 주인이 나온다.
잉어는 그물로 잡아도 용을 그물로 잡을 수는 없다.
용을 찾으려면 구름을 쫓아라. 구름은 개를 따라 흐를 것이다. - 母」
‘용을 찾으려면 구름을 쫓아라.’
문평은 그 명령을 따라 귀주로 갔다가 윤승효를 만났다.
‘구름은 개를 따라 흐를 것이다.’
개를 쫓아 아이들의 납치 사건을 파고들었더니, 윤승효가 동행을 자처했다.
돌이켜 보면 두 사람의 만남 자체도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목적부터 행선지까지 그렇듯 딱딱 맞아떨어질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보낸 사람은 없는데 홀연히 놓여 있던 흑화. 누구보다도 천마를 잘 아는 군사의 지시를 따라 움직여도 그림자도 찾을 수 없던 천마. 윤승효가 선택하는 방향은 마교의 지시와 이상하리만큼 일치했고, 그의 능력은 믿을 수 없이 비상했다.
이런 것도 대오각성大悟覺醒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런 건 돈오라고 하는 것일 게다. 돈오頓悟가 아니라 돈오豚悟다. 미련한 돼지의 뒤늦은 깨달음인 것이다.
실제로 문평은 자신을 돼지 같다고 여기고 있었다. 돼지가 아니면 원숭이다. 남의 장단에 실컷 놀아나고도 그러한 사실조차 모르는 원숭이.
그 사람이 어떤 심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을지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수줍은 척 고백한 것도, 서투르게 몸을 열어 자신을 힘들게 한 것도, 모두 연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모든 것을 다 내주는 자신을 보며 속으로 얼마나 재미있어했을까? 원래부터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걸 즐기는 인간이니만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즐겼을 터였다.
그 사람의 정체를 알고 나자, 이제껏 그를 괴롭히던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해소되었다.
그는 왜 윤승효의 행세를 하고 있었던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의 신분을 빌리는 것만큼 자신의 정체를 확실히 감출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어떻게 타인의 모습을 하고서 자신을 안을 수 있었을까? 그래도 상관없으니까. 혹은, 그러는 게 더 재미있으니까.
그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밝힐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는데도 말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윤승효의 행세를 계속했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문평을 기만하는 것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온갖 상상을 하며 애태웠던 마음이 허무하게 짓밟혔다.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때는 그나마 부여잡을 수 있었던 최후의 희망이, 상대를 알고 나자 손안에서 산산이 흩어져 버린다. 소담히 피던 어여쁜 것. 그가 가져 본 것 중 유일하게 가치 있던 그 감정마저 순식간에 뿌리를 잃어버렸다.
첫사랑이었다. 마지막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모든 건 혼자만의 착각에 불과했다. 그가 상대에게 바친 모든 마음은, 상대에게는 그저 가벼운 유희거리였다. 천마는 몸을 희롱했던 것과 같은 의미로 그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다.
흐르지 못한 눈물은 신열이 되어 몸과 마음을 태웠다. 직관적인 깨달음이 있은 직후부터 끓어오른 열은, 그를 이대로 녹이기라도 하려는 듯 맹렬하게 타올랐다. 스스로에 대한 조롱과 냉소 속에서 문평은 뜨겁게 앓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발열에 노파가 밤을 지새우고, 자신의 실수 때문에 문평이 골병들었다고 생각한 파면객이 부지런히 수발을 들었지만, 문평의 상태는 도통 안정되지 않았다.
열이 너무 높은 나머지 간신히 가라앉아 가던 화상에 화농까지 생겼다. 잘하면 흉이 질 수도 있다고 혀를 차며 노파가 고름을 닦아 냈다. 정신을 잃었다가 간신히 추스르면 울 듯 얼굴을 일그러트린 자옥이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아프지 마요.”
스스로의 의지로는 한 마디도 내뱉지 않던 아이가 되풀이해 속삭이는 말은 열에 들뜬 그의 귀에도 선명히 들렸다.
“아프지 마세요. 제발. 나 때문에 아저씨가 아프면 안 되잖아요.”
울먹거리며 말을 건네는 자옥이 귀엽고 애틋했지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들뜬 신열은 그의 목소리까지 앗아 간 듯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밤낮도 구분 못 하는 비몽사몽 한 그의 이마에 낯선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
“하필이면.”
그 사람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이마에 가만히 손을 얹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내가 곁에 없을 때…….”
차분하기 그지없는 낮은 목소리 속에는 누구에게 향하는 건지 알지 못할 분노가 은은히 날을 세우고 있었다.
이것저것 말이 많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 사람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사람은 조용히 이마에서 손을 뗀 후, 문평의 머리맡에 앉아 침상을 지켰다.
문평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떠오르긴 했지만, 하나가 아니라 두세 개의 이름이 한꺼번에 떠오르는지라 누구라고 특정 짓기 힘들었다.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문평은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울긋불긋 열꽃이 피어 불그스름한 얼굴에서, 힘없이 달싹거리는 그 입술만은 유달리 희었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는 것은, 깊은 물을 빠져나오는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몸이 떠오를 때 그렇듯이, 정신도 수면에 충분히 가까워져야만 비로소 부력을 받을 수 있었다.
천천히 솟아오르던 의식이 한순간에 급격히 맑아졌다. 툭 하고 떨어지듯 잠을 깬 문평은 깜짝 놀란 사람처럼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새카만 어둠이었다. 깜빡, 깜빡. 몇 번 눈을 깜빡여 봤더니 그제야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다.
짙은 약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문평은 반쯤 벌거벗은 채로 엎드려 누워 있었는데, 그걸로는 모자랐는지 등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물수건까지 얹혀 있다.
상황을 보아하니 한두 시간 그렇게 있었던 게 아닌 듯하다. 낮아진 체온 때문에 손발이 얼얼하게 시렸다. 차갑게 식은 것은 코끝 역시 마찬가지다.
문평은 자신이 왜 이런 꼴로 누워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골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들었다.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머리맡에 앉아 침상을 지키던 사람이, 그의 움직임을 보고 말을 걸어온다. 치명적일 만큼 익숙한 음성이다. 설사 말이 아니라 한 음절의 신음만 들렸어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목소리. 한때는 그 음성이 세상 그 어떤 음악보다 아름답게 들렸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디찬 칼날이 목에 닿은 듯 그저 섬뜩하기만 했다.
“……설마. 윤승효?”
“네. 접니다. 윤승효. 알아보시겠습니까?”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이런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다니. 문평은 하마터면 나올 뻔한 신음을 삼키며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그래. 윤승효겠지.’
그는 내심 이를 갈며 생각했다. 근데 어느 쪽이냐고?
“어떻게 된 겁니까?”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진짜든 가짜든 다 필요 없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체력과 분노가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니, 홀로 내버려 두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윤승효는 그가 한 말의 진의를 몰랐고, 그랬기에 친절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유람선에서 화탄이 터졌던 것은 기억나시지요? 그 파편을 등에 맞았는데, 상처가 중했습니다. 일단 한 번 치료는 했는데 그게 덧났다고 하더군요. 나흘을 꼬박 앓았습니다.”
문평이 앓은 건 화탄의 파편이 아니라 지나치게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얻은 지혜열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알 리가 없는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가 쉬운 방향으로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그렇군요.”
“다행히 좋은 의원이 있어 화농은 막았고 내상도 잡았습니다. 워낙 심하게 앓은 터라 체력이 많이 떨어졌을 겁니다. 당분간은 바깥출입을 삼가고 조리에 치중하라더군요.”
문평은 조곤조곤 온화한 어조로 그의 상세를 근심하는 윤승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너무나도 컸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 이런 일을 겪었다면 걱정해주는 것이 고맙고 마음 쓰게 하는 것이 미안해 몸 둘 바를 몰라 했으련만. 알 걸 다 아는 상태에서 저런 모습을 보니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가 가식적으로만 느껴졌다.
“……목이 말라서 그러는데요, 죄송하지만 물 좀 주시겠습니까?”
문평이 피곤한 어조로 청하자, 기다렸다는 듯 상대가 대접을 내밀었다. 물이 담긴 대접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의 손끝이 슬쩍 스쳤다. 와 닿는 감촉이 감미로웠다. 사람 피부가 무슨 비단결 같았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그렇지 않아도 출렁거리던 기분이 울컥 뒤집어졌다. 아직도 고스란히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상처가 새로운 충격에 자극받아 핏기를 머금는다.
문평은 떠오르는 표정을 대접으로 감추며 꿀꺽꿀꺽 힘겹게 물을 들이켰다. 치솟는 성미를 참느라 목에 핏대가 섰다.
“아무리 물이라도 그렇게 급하게 드시면 속에 안 좋습니다. 천천히 드세요.”
남의 속도 모르는 천마는 짐짓 걱정 어린 태도로 그를 만류했다. 그러나 문평은 그 말을 들은 체도 안 하고 물 한 대접을 단숨에 들이켰다.
미지근한 물이라도 물이 한 잔 들어가자 들끓던 열기가 수그러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치받아 버리고 싶었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참았다.
천마는 무모하게 덤빈 적이 요행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결코 아니다. 그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싸움을 걸든, 복수를 하든, 하다못해 도망을 가든. 천마를 상대로 하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도 즉흥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좀 눕겠습니다. 아직도 피곤하네요.”
주책없는 마음이 끓었다 식었다 난동을 부리니 느끼는 피로감이 한결 커졌다. 아직 성치도 않은 몸이 지나친 감정 소모를 견디지 못하는 눈치다.
문평은 배 아래에 깔려 있던 이불을 몸 위로 끌어 올리며 침상 안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갔다. 싸늘하게 식어 있던 손발이 추라도 달린 듯 무거웠다. 어째 으슬으슬하니 한기가 드는 것을 보니 잘못하면 고뿔 들리겠다.
‘그렇게 되면 정말 끝내주겠군. 화상에, 열병에, 연이어 고뿔이라. 거기까지 가면 정말로 골병들겠는걸.’
문평은 무거운 눈꺼풀을 감으며 쓰게 중얼거렸다. 요즘 들어 운이 안 좋다고 했더니만 상황은 점점 더 악화일로로 가고 있다. 마치 세상의 악운이라는 악운은 모조리 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중에서 가장 큰 악운은 천마라는 이름을 가진 천재지변이다.
천마는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인생을 바꿨고, 재미 삼아 그의 마음을 산산이 무너트렸다.
“필요하다면 더 주무십시오. 아직 인시寅時3)도 되지 않았습니다.”
문평에게는 자라고 권하면서, 천마는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마 여기서 밤새 지키고 있을 생각인 건가? 문평은 감으려던 눈을 도로 뜨고 천마를 바라보았다.
“윤 형께서도 이제 주무셔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 밤은 제가 이곳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앓고 있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정신이 들었는데요. 이렇게까지 호전되었는데 다시 나빠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건너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한 폐를 끼치기 민망합니다.”
“폐가 아닙니다.”
머리맡에 천마를 두고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부탁했지만, 천마는 문평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섬세하고 배려 깊은 성품이 윤승효의 특징이긴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지 뭐가 이렇게 초지일관인가 싶다. 배역 몰입이 지나치게 완벽하다. 제법 심취해 있는 모양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폐가 아닙니다. 이렇게 들여다보기라도 해야 마음이 놓입니다.”
문평이 눈을 감지 않고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천마가 조용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손길이 다가와 가만가만 정수리를 쓸어 넘긴다. 잠들지 않겠다고 투정 부리는 어린 아들을 잠재우는 것처럼 고요하면서도 다정한 손놀림이다.
“주무세요. 곁에 있겠습니다.”
차분한 음성이 들리더니 부드러운 손끝이 이마를 떠났다. ‘곁에 있겠다.’라. 어딘지 모르게 묘한 울림이 있는 말이다. 그저 오늘 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먼 미래까지 기약하는 것 같고, 어쩌면 약속처럼도 들린다.
그러나 천마가 암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이루어질 리가 없다는 사실을 문평은 알고 있다. 그가 직접 입 밖으로 꺼낸 말조차도 믿을 수 없는데, 어떻게 분위기만 풍기는 암시 따위를 믿겠는가. 마음속 깊숙이 와 닿는 말조차도 거짓일 수 있음을 문평은 경험으로 배웠다. 천마가 하는 말에는 그 어디에도 진심이 없었다.
그는 다만, 능숙하고 교활한 거짓말쟁이일 뿐이다.
***
동정호변을 끼고 있는 작은 마을 우향촌優香村은 중원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농촌 마을이다. 동정호변에 있지만 물길과는 다소 떨어진 곳이라 어업에 종사하는 자는 거의 없고, 관도를 빗겨나 있어 드나드는 객도 드물다.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밥을 팔고 있는 가게는 천송객잔千松客棧인데,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실제로는 살림집을 포함한 방이 두 칸에 식사는 야외에 친 장막 아래에서밖에 할 수 없는 조촐한 곳이다. 가끔 드나드는 뜨내기들을 제외하자면 주로 동네 사람을 상대로 장사하는 가게라서 값이 비싸지 않은 대신 솜씨는 별로였다.
바로 그 천송객잔의 주인인 우춘虞椿에게는 요즘 들어 고민이 하나 생겼다. 근래에 거의 매일 들르고 있는 새로운 단골손님이 생겼는데, 이 양반을 대접하는 일이 의외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우춘의 골칫거리 손님은 오늘도 천송객잔을 방문했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밖에 없는 화사한 자태를 보며 우춘은 허리가 꺾어져라 인사를 건넸다.
그가 맞이한 손님은 언뜻 보기에도 굉장한 귀공자다. 객잔 전체를 팔아도 못 살 것 같은 진귀한 비단 화복을 걸친 데다 요상하게 색이 들어간 유리를 콧잔등에 얹었고, 허리춤엔 패옥을 찼으며 손에는 접선까지 들고 있다. 귀공자인 동시에 그림으로 그린 듯이 완벽한 화화공자다.
평생 적지 않은 인간들을 봐왔지만 이만큼이나 수려하고 귀티가 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우춘은 그에게서 풍기는 기품만으로도 충분히 기가 죽었다.
“차 한 잔 하고, 글을 쓸 수 있도록 종이를 준비해 주게.”
단골손님은 자리에 앉자마자 늘 하는 주문을 했다. 동네의 주점 겸 밥집에서 갖춘 차란, 오래 갖다 놔도 상관없는 질 낮은 흑차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첫날, 주문을 받은 우춘은 우물쭈물하다가 있는 것을 그대로 바쳤었다. 그랬더니 손님은 차에는 손도 안 대고 돈만 놓고 떠나 버렸다. 화려한 차림을 보고 그럴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긴 했지만, 진짜로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민망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괜히 신경질이 났다.
한데 둘째 날, 비슷한 시간에 같은 손님이 또 들렀다. 긴장한 우춘은 어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몰래 숨겨 놓았던 비장의 동정차凍頂茶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이날도 손님은 찻잔에는 손을 대지 않은 채 값을 치렀다. 이쯤 되자 평생 밥 팔아먹고 살아온 자존심에 오기가 생겼다.
그리하여 셋째 날, 우춘이 내민 차는 촌장님께 사정을 설명하고 간신히 얻어 온 귀하디귀한 옥산차玉山茶였다. 손님은 향기로운 차는 한쪽으로 밀어 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썼다. 하는 행색을 보아서는 차를 마시러 온 사람이 아니라 글을 쓰러 온 사람 같았다.
뭘 그렇게 열심히 쓰나 싶어 어깨 너머로 건너다봤더니, ‘死’, ‘不容’ 같은 무시무시한 말들이 가득했다. 평소엔 몇 줄 안 되게 쓰던 사람이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종이 전체가 빡빡하도록 붓을 날린다.
서신을 쓰는 데 너무 열중했던 손님은 이번에도 차를 마시지 않았다. 이제까지 보낸 서신들 중에서 가장 긴 서신이지만, 받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우춘은 탁자를 치웠다.
오늘이 넷째 날. 마을 안에서는 더 이상 좋은 차를 구할 수 없어 옆 마을까지 나갔다 와야 했던 결전의 날이다. 조금씩 질을 올려서 내놓은 승부수들을 여지없이 걷어차인 우춘은, 이번에는 정말 큰마음을 먹고 송백장청松柏長靑을 샀다. 차 한 냥에 은전 반 개나 하는 무시무시한 가격이지만, 그 손님이 이 차를 마셔 주기만 한다면 그럴 만한 값어치는 있는 거라고 여겼다.
우춘에게는 평생을 지켜온 자존심이 걸린 일이다. 거지도 아닌데 하는 일도 없이 공짜로 돈을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돈을 받았으면 음식을 팔아야 한다. 그것이 우춘의 신념이다.
그는 손님에게 종이를 가져다주고 정성 들여 차를 준비했다. 어떻게 차를 타야 맛있게 탈 수 있는지는 다도에 관심이 많은 촌장님께 특강을 들었다. 그래 봤자 당일치기라 다도의 근처에도 못 가는 실력이지만, 일단 뭐가 중요한지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차를 달이는 데는 차가운 샘물이 좋다고 해서 새벽녘부터 뒷산에 가서 물을 길어왔다. 다기는 모두 깨끗이 씻어서 말려 놨다가 주문을 받고서야 처음 사용했다. 제대로 하자니 차를 달이는 일에도 만만찮은 품이 들었다. 우춘이 차를 달이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동안, 그의 뭉툭한 콧잔등에는 송골송골한 진땀이 맺혔다.
“주문하신 차 나왔습니다. 손님. 송백장청입니다.”
그는 어제가 되기 전까진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고급 차 이름을 자랑스럽게 내뱉으며 차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손님은 관심이 없는 듯, 물 흐르는 듯한 달필로 서신을 쓰며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대꾸도 받지 못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온 그는 손님이 차를 마시는지 안 마시는지 확인하기 위해 힐끔힐끔 곁눈질을 했다. 항상 그렇듯 차보다는 서신을 완성하는 데 더 큰 관심이 있는 손님은, 여느 때보다 글월을 짧게 맺은 후 붓을 내렸다.
‘앗. 설마? 이번에도 그냥 가는 걸까?’
이제나저제나 찻잔을 집어 들길 손꼽아 기다리던 우춘은, 손님이 자리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이번에도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정도로 비싼 차도 안 되는 건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감도 거셌다. 젠장! 차를 마실 생각이 아니라면 도대체 시키기는 왜 시키는 거야?
“주인장. 여기 종이봉투 좀 주게.”
차를 주문한 후, 서신을 쓰고, 먹을 말리고, 종이봉투를 찾은 후 값을 치른다. 나흘 동안 손님의 행동 양식은 항상 일정했다. 그에 익숙해진 우춘은 자신의 이번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고 여겼다.
“네. 있습니다.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습죠.”
맥이 풀린 얼굴로 시무룩하게 대답한 우춘이 방 안에 들어가 종이봉투를 찾아왔다. 천송객잔은 이래 봬도 마을 안에 있는 유일한 가게다. 따로 물건을 파는 곳이 없다 보니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음식 외에도 받아 두고 있는 물건이 몇 개 있는데, 종이와 종이봉투는 그가 늘 구비해 두고 있는 물품 중 하나였다.
“여기 있습니다. 손님.”
뒤져 보니 이것이 마지막이다. 우향촌에서 네 장의 종이가 팔리려면 반년이 걸리는데, 이 손님은 나흘 만에 반년 치를 해치워 버렸다.
늘 하던 대로 탁자 위에 종이봉투를 내려놓은 우춘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 봐도 반듯한 자세를 지닌 손님이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 게 보였다.
‘……응? 찻잔?’
처음에는 무심히 보아 넘겼던 우춘은 잠시 후에야 손님이 차를 진짜로 마신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마, 마셨나? 진짜로 마신 건가?’
한 모금 맛을 본 손님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 속의 찻물은 확실히 줄어 있었다.
‘마셨네? 마셨어!’
겉으로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우춘은 좋아서 죽을 지경이었다. 하루하루 똑같이 살 때는 느끼지 못했던 성취감이 뱃속을 가득 채운다. 마실 가치도 없다는 듯, 손도 안 댄 찻잔을 치울 때 느꼈던 은근한 모멸감이 한순간 모두 풀렸다. 손님이 다시 한번 차를 마셨다. 이번에는 찻잔을 아주 깨끗이 비운다.
손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며 우춘은 엉겁결에 따라 일어났다. 아래위를 단단히 봉한 서신을 손에 든 손님이 다가와 그에게 서신을 맡겼다.
“이 서신을 대나루 옆 상춘객잔의 다섯 번째 점소이에게 전해 주게.”
이런 엄청난 귀공자와 객잔의 점소이가 대체 무슨 사연으로 서신을 주고받는지 우춘은 모른다. 그렇지만 쥐여 주는 사례금이 넉넉했기 때문에 그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 그리고 이 말도 전해 주게. ‘굳이 답장할 필요는 없다. 다음에는 내가 직접 찾아갈 테니까.’”
“굳이 답장할 필요는 없다. 다음에는 내가 직접 찾아갈 테니까. 이렇게 전하면 됩니까, 손님?”
“정확하네.”
귀공자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 미소가 아주 묘했다. 우춘은 아무 생각 없이 마주 보고 있다가 그 눈을 마주친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고 말았다.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다리가 떨렸다. 자신을 향한 미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왠지 살려 달라고 빌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귀공자는 눈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려 가게를 나갔다. 후들후들한 다리로 의자 위에 앉은 우춘은 잠시 서신을 내려다보다 그걸로 파닥파닥 부채질을 했다.
“어이쿠. 참 별일일세.”
한평생을 평온하게 살아온 우춘은 자신이 겪은 이상한 감각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무슨 사람의 눈이 그런 식으로 번쩍거리누. 어둔 곳에서 호랑이 눈이 번득여도 그렇지는 않겠네.’
딱히 들은 말은 없지만, 저 공자의 신분이 여간 범상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눈만 가지고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저런 사람이 어째서 자신의 객잔처럼 어울리지 않는 곳을 찾았던 것일까? 우춘은 자신이 들고 있는 서신이 대체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하며 이리저리 궁리해 봤다.
‘대체 이 점소이란 놈이 무슨 짓을 했길래 저리도 무섭게 구는 거지? 도망간 종놈인가? 아니면 안주인이랑 바람이라도 폈나?’
정답은 ‘안주인을 놔두고 도망갔다가 딱 걸렸다’ 이지만, 우춘이 그 사실을 알 도리는 없었다. 그러나 사소하다면 사소할 이 일조차도 무료한 촌사람들에게는 쓸 만한 안줏거리여서, 우춘은 이후로 몇 년간이나 이 이야기를 두고두고 우려먹었다.
***
은밀히 말을 전하기 위해 만든 흑화는 주로 은어로 만들어져 있어서 풀이가 어려운 대신 뜻은 최대한 간단하게 만들어졌다. 그런 흑화를 가지고도 유장하고 화려한 협박을 전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실을 나흘째 몸소 보여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천마였다.
그는 우향촌에 도착한 후 습관인 양 행하던 아침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지금 머무는 장소는 부엌까지 합해도 네 칸이 전부인 다 기울어져 가는 오두막이다. 이 오두막은 비좁을 뿐만 아니라 초라하기도 했다. 회칠을 하지 않아 벌건 흙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고, 늘 달이고 있는 약탕 때문에 마당에는 매캐한 연기가 떠돌았다.
천마는 이런 집구석을 난생처음 보았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그가 견디기엔 지나치게 혹독한 환경이다.
피치 못할 사정만 아니었다면 그가 이런 토굴 같은 집에 머무를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마도 인간은 인간이다 보니, 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것은 있었다.
“에구. 벌써 다녀오시는 길이우? 오늘은 일찍 오네.”
그가 매일 아침 좀 떨어진 마을까지 발걸음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노파가 합죽한 입을 벌리며 그를 맞이했다. 자글자글한 주름 하나하나에 미소가 맺혀 있다. 나이를 험하게 먹긴 했지만 인상은 유달리 좋은 노파다.
희게 세어 몇 가닥 남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가시 비녀로 찌르고, 회색의 낡은 무명옷을 걸친 노파는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촌로처럼 보였다. 그러나 겉모습과는 다르게, 이 노파가 바로 천마의 발목을 잡은 ‘피치 못할 사정’이다.
노파의 모습을 발견한 천마는 옷차림을 가다듬으며 공손한 척 머리를 숙였다. 본래대로라면 이렇게까지 예를 표해야 할 상대가 아니지만, 지금은 윤승효로 신분을 위장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네. 다녀왔습니다. 할머님. 그 사람은 깨어났습니까?”
“조금 전에 깼수. 어서 들어가 보시구려.”
노파는 선선한 태도로 말하며 바구니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대바구니에 가득히 풀 쪼가리만 든 것을 보니, 오늘 점심상도 토끼가 뛰어노는 풀밭이겠다.
가만히 지켜보자니 휘적휘적 걷는 모양새가 극히 자연스러웠다. 일정한 간격으로 걷는 정돈된 무인의 걸음도 아니고, 간격은 적당히 흐트러졌지만 무시할 수 없는 기세가 담긴 고수의 발걸음도 아니다. 누가 봐도 평범하다고 여길 법한 보통 사람의 발걸음. 덕분에 걷는 모습만으론 노파의 정체를 짐작할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천마는 얼마 없는 예외 중의 하나였고, 그의 눈은 노파의 걸음걸이가 뜻하는 바를 예리하게 읽어 내렸다.
‘저 할망구, 그동안 무공에서도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모양이지?’
예전에 봤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발걸음을 알아본 천마의 눈 안에서 서늘한 이채가 지나갔다. 저 정도라면 거의 현경現境 근처까진 온 셈이다.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룬 사람을 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그의 발뒤꿈치나마 쫓아오고 있는 상대는 근 십여 년 만에 처음이다.
‘잘만 하면 손을 섞어 볼 만한 상대가 생길지도 모르겠군.’
반평생 동안 호적수 없이 지낸 천하제일인은, 자신의 뒤를 바짝 쫓아온 노파의 무공에 흥미가 일었다. 비록 종이 한 장 차이를 넘지 못하고 평생을 보낼 수도 있는 게 현경의 경지이긴 하지만, 노파 정도가 되면 기대는 걸어 볼 만한 일이다.
하지만 당장에 일을 벌일 수는 없다. 노파에게도 시간이 더 필요하고, 천마에게도 다른 볼일이 있다.
그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문평의 거처로 쓰이고 있는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인영이 들어 있었다. 한 사람은 이제 막 잠에서 깬 문평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곳에 와서야 처음으로 본 파면객이라는 사내다.
그들은 뭐에 그렇게 열중했는지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말을 못 하는 파면객은 문평의 손을 잡고 열심히 글씨를 쓰고 있었고, 문평은 파면객이 뭐라고 할 때마다 고개를 젓거나 자기 의견을 말했다.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 흐트러진 옷차림도 옷차림이지만,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외간 사내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문평의 손이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모습이 은근히 보기 싫었던 천마는, 낮게 헛기침을 해 주의를 환기시켰다.
의도적인 기척을 드러낸 후에야 문평은 그를 돌아보았다. 앓느라 수척해진 얼굴이 무심해 보였다.
파면객은 그가 들어선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마는 묵례로 파면객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는 그가 비워 준 자리에 냉큼 주저앉았다.
“깨셨군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그가 지켜보기론 나흘 만이지만, 듣기로는 거의 엿새 만에 일어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열은 내렸다지만 아직 걱정되는 게 많은 천마는 꼼꼼한 시선으로 문평의 안색을 살폈다.
문평은 수척해진 얼굴에 마른 미소를 머금었다. 높은 열이 수분을 다 빼앗아 가버린 듯, 퍽퍽하기 그지없는 미소다.
“푹 자고 일어난 느낌입니다. 아무 데도 불편한 곳이 없습니다.”
문평의 태도는 거의 의례적이었다. 문평이 진심일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알고 있는 천마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문평에게선 자신을 향할 때마다 번지던 봄꽃 같은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제 딴에는 드러내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던 수줍은 연심도 없다. 받는 사람이 익사할 것만 같은 전폭적인 애정 공세에 익숙해져 있던 천마는, 문평의 그러한 태도 변화를 민감하게 눈치챘다.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 있던 사람이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상대와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천마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문평과 윤승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문평의 행동이 이렇듯 확연히 달라질 이유가 없었다.
뭐,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스스로가 원하던 일이기도 하고, 승효에게 따로 말을 해 놓은 것도 있으니 진짜로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놈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그놈이 일을 저지르기만 했지 보고는 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리가 없는 천마는, 녀석이 친 뒤통수 덕에 황하에 뜬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윤승효는 현재 행방불명 상태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스스로 모습을 감추었다. 뒤를 좀 지켜 달라고 맡겨 놨더니만 그새를 못 참고 홀랑 자리를 비웠고, 자신이 없는 사이에 수습할 수 없는 큰일이 벌어지자 서신 하나만 달랑 던져 보내고 그대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천마는 그나마 쓸 만하다고 여겼던 놈에게 엉뚱한 해코지를 당하고, 너무나 기가 막힌 나머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으면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스스로 기어 나와 죄를 고해야지, 벌이 무섭다고 튀어 버리는 건 대체 어디에서 배워 먹은 버르장머리인가 싶었다.
‘지금 당장 잡으러 못 간다고 영영 못 잡을 줄 아는 건가? 이러다 잡히면 괘씸죄까지 추가될 터인데?’
아무래도 그동안 그놈을 너무 오냐오냐했던 모양이다. 까마득한 손주뻘의 녀석이라 어지간한 일은 그냥 봐주고 넘어갔던 것이 문제였을까? 천마는 윤승효가 들었으면 백조부님이 대체 언제 그러셨냐고 펄쩍 뛸 만한 생각을 하며 서늘히 마음을 다잡았다.
‘두고 보자.’
그는 다짐했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화가 나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음이 누그러진다지만, 천마는 그렇지 않았다. 제대로 된 매듭을 짓지 못한 채 시간이 쌓이면, 쌓이는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감정이 깊어지는 성격이다.
그의 두고 보자는 말은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환담을 그렇게 하고 계셨습니까? 옆에서 보니 상당히 진지해 보이던데요.”
머릿속으로 하고 있는 흉험한 생각과는 딴판으로, 문평을 향한 천마의 목소리는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설명은 길었지만 그 많은 생각이 흘러간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머릿속은 끊임없이 회전시키면서도 신색을 태연히 유지하는 것은 늙은 생강다운 노련함이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어차피 윤 형께도 의논을 드려야 할 사안이었으니, 두 번 말을 나눌 필요는 없겠군요.”
천마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해 보라는 재촉이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마차를 하나 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갑자기 마차는 왜요?”
“이만 길을 떠났으면 해서요. 말을 타면 더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렇게까지 무리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러니 마차가 나을 것 같습니다. 윤 형께서 힘써주실 수 있겠습니까?”
문평이 꺼내 놓은 뜻밖의 용건에 천마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다. 길을 떠나자고? 자기 몸도 스스로 가누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지나치게 성급한 의견 같은데요. 석 형의 건강이 이리도 안 좋은데, 어떻게 길을 나설 수 있겠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잠이나 자라고 하고 싶었으나 진짜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고 싶은 말을 맘대로 못하는 것은 윤승효의 탈을 빌려 쓴 것에 대한 가장 큰 대가다.
처음부터 천마의 반대를 예상하고 있던 문평은 파리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앓는 동안 살이 빠져 얼굴이 퀭했다. 볼 거라곤 건강밖에 없는 놈인데 그새 반쪽이 되어 버렸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벌써 엿새가 지났더군요. 본의 아니게 시간을 너무 지체했습니다.”
“그 엿새가 석 형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말이 아니라 마차로 움직이면 지금의 체력으로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다 덧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화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화가 났기 때문에, 천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문평의 고집 역시 만만치 않았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말이 나오기도 전에 먼저 양보하던 사람인데, 이번 일에는 목숨이라도 건 것처럼 강하게 나온다.
“그자들은 자옥의 입을 막기 위해 백에 가까운 무인들과 절정 고수 셋을 보냈습니다. 생강시의 일이라면, 당문과 개방의 행사로 인해 널리 소문이 퍼져 이미 수습할 수 없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막고 싶어 한 것은 생강시의 일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겠죠. 어쩌면 자옥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 예상이 들어맞는다면, 적들 또한 한 번의 실패로 살인멸구를 포기하지는 않겠지요.”
문평이 고집을 꺾지 않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유람선을 습격한 자들의 규모를 들었을 때부터 그와 비슷한 예상을 하고 있던 천마는, 문평의 지적이 예리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들이 머무는 장소가 발각되면 적들은 다시 한번 습격을 감행할 터였다. 지난 실패로 교훈을 얻었을 테니 준비도 더욱 철저히 하겠지.
사실 천마는 문평이 깨어나기 전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곽효의 다음 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정도맹으로 들어가 봐야 하는데, 문평의 건강이 너무 나빠서 길을 재촉할 수 없었다.
문평의 부상은 심각했다. 치료한 사람이 성수聖手라고까지 불리는 신의神醫 곤륜성모崑崙聖母가 아니었다면 엿새는커녕 여섯 달을 누워 있어도 깨어나지 못했을 중상이었다.
축난 몸을 보하려면 비단보에 고이 싸서 몇 달을 요양시켜도 부족할 판인데, 그런 사람을 길거리에 끌고 다닌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평을 놔두고 떠날 수는 없다. 처음부터 아무 연관이 없었으면 또 모르지만, 그는 이미 사건에 휘말린 후다. 이만큼 얽혔다면 적들도 그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를 혼자 떨어트려 두고 간다는 건 망망대해에 사람을 던져 놓고 판자도 없이 헤엄쳐 오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저도 명색이 무인인데 이만한 일로 죽기야 하겠습니까. 뒤에 남았다가 죄 없는 마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싫습니다. 무리인 줄은 알지만 부탁하겠습니다. 제 뜻을 이해해 주십시오.”
천마가 내릴 수 없었던 판단을 문평이 먼저 내렸다. 오랜 세월 낭인으로 살아왔던 문평은 목숨이 걸린 문제는 신속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각적인 상황에 반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허망하게 목숨을 잃고 마는 것이 바로 전장이다. 그는 지금 강호라는 이름의 전장 속에 있었고, 더군다나 최전선에 속해 있었다. 곁에 믿을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으니 자기 자신이라도 믿어야 한다.
그가 그렇듯 끝까지 밀어붙이자, 천마도 문평의 제안을 무시할 수 없었다. 현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 한정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혼자 죽으라고 버려둘 것이 아니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끌고 가야 한다. 자신의 눈이 닿는 곳에 두고 있으면 적어도 이번 같은 꼴은 당하지 않겠지.
마침내 천마도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문평의 안위가 마음에 걸려 어울리지 않게 주저했던 것인데, 본인 스스로가 가겠다고 나서니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일단 마차는 수소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행은 파파婆婆께서 허락을 하셔야만 가능합니다. 그분의 허락이 없으면 어떤 이유가 있어도 여행은 불가능합니다. 그를 알아 두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방금 파파라고 하셨습니까? 어떤 파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석 형께서도 이미 뵙지 않았습니까? 이 약방의 주인이신 파파 말입니다. 그분께서 석 형의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어떤 내력인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의술만큼은 경지에 달하신 분입니다.”
전대도 아닌 전전대의 고수로, 여자의 몸으로 곤륜파 최고수이기도 했던 곤륜성모가 어째서 곤륜산이 아니라 동정호변의 작은 마을에 몸을 숨기고 있는지 천마는 모른다. 하지만 딱히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라, 짐짓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척하며 괜한 번거로움을 피했다.
한편 문평은 그럴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지 입을 크게 벌린 채 눈만 껌뻑껌뻑했다. 강호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건 노인과 여자와 아이라고 한다. 정체를 숨긴 은거기인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설마하니 그 이야기가 약방 노파처럼 친근하게 생긴 작은 할머니에게까지 해당하는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얼핏 보기엔 수더분하고 태평스러운 평범한 노인네던데, 그런 분께서도 설마하니 신분을 숨긴 고수셨단 말인가?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더니.’
자신이 알고 있는 ‘신분을 숨긴 고수’ 한 명 때문에, 세상의 모든 신분을 숨긴 고수들에게 편견을 가지게 된 문평은 깊은 회의와 불신을 느끼며 홀로 한탄했다.
왜 고수라는 족속들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대로 믿고 살게 내버려 두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그렇게 뒤통수를 치지 않아도 세상은 충분히 살기 힘든데 말이다.
강호상에서 은거기인에 대해 전해 오는 이야기들은 대개가 비슷하다.
그들은 스스로 신분을 숨기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각기 일절이라고 손꼽힐 만한 절기 하나씩은 가졌지만 아무에게나 베풀어 주지 않았고, 한 번 베푼 은혜는 아예 잊거나 혹은 죽을 때까지 우려먹었다.
성격은 까다로운 편이고, 상식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혼자만의 원칙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며, 대접받는 걸 은근히 좋아한다.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자기 일에 참견하는 사람은 그냥 두지 않는다.
쓸데없이 들은 것만 많은 문평은 그런고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정체를 모르고 지나갔다면 또 모를까 이미 알게 되었으니 쉬이 넘어갈 수는 없으리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노파는 허무할 정도로 선선히 그들의 여행을 허락해 주었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떠나라는 조건이 달려 있긴 했지만, 어차피 마차를 구하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그 정도는 조건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지도 않고 까다롭게 굴지도 않았다. 정체를 알기 전에도 알아낸 후에도, 그녀는 그저 수더분한 할머니일 뿐이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천마가 마차를 수소문하러 나간 동안 할 일이 없던 문평은, 처음의 충격을 뒤로하고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가 평범한 하급 무사로 있을 때 고수라는 존재는 먼발치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운인 별나라의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천마를 만난 후부터는 사정이 달랐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상상도 못 했던 고수와의 인연이 연이어 만들어졌다. 마중사기는 물론이거니와 당문오독, 윤승효, 화산의 후기지수인 난삼릉과 사란. 그에 덧붙여 파면객까지. 예전 같았으면 문평은 그런 존재와 자신이 마주해 대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직접 보기 전까진 전설인 줄로만 알았던 생강시도 보게 되었고, 소문보다 무위가 높은 귀두삼귀와 칼을 맞댔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신묘한 의술을 가진 은거기인과 우연히 만난다는, 기담집의 주인공이나 얻을 법한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평생 맞닥트린 사건보다 요 반년 동안에 일어난 일이 더 극적이다. 문평은 자신에게 이런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이, 단순히 자기 팔자가 꼬여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천마 같은 거물과 잘못 엮이는 바람에 그런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생각해 봐도, 그 선후를 꼽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두고 다투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 말이다.
다음날, 문평 일행은 인심 좋은 노파가 한가득 싸 준 만두를 싸 들고 마차에 올랐다. 마부는 파면객이 맡기로 했고, 환자와 아이와 귀하신 분은 마차에 타기로 결론을 내렸다.
달가닥달가닥.
단조로운 말발굽 소리가 관도 위를 울렸다. 따사로운 봄볕이 지붕을 달군다. 출발한 지 꽤 여러 시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차 안은 조용했다. 원래 말이 없는 자옥은 창밖을 구경하다가 곯아떨어졌고, 짐짓 자는 척 눈을 감은 문평 때문에 윤승효, 아니 윤승효의 모습을 한 천마는 그에게 섣불리 말을 붙이지 못했다.
문평은 처음에는 정말 천마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는 척을 했다. 하지만 따뜻한 봄볕을 장시간 쬐고 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정수리가 따끈따끈해졌다. 멀쩡하던 정신을 슬그머니 졸음이 잡아당긴다. 지친 몸은 졸음의 유혹을 반가이 맞아들였다.
꾸벅꾸벅. 문평은 졸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허리를 펴고 앉아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고개가 뚝 떨어져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세를 잡고 한숨 잤으면 하는 마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등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마차 벽에 몸을 기댈 수도 없는 처지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불편하게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비몽사몽간에 자세를 무너트렸다가 화들짝 놀라서 깨는 일을 몇 번 반복하던 문평은, 그러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렸다.
꿀맛 같은 오수가 얼마나 되었을까? 그야말로 한잠 푹 자고 난 문평은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처음엔 의식이 맑지 않아 자신이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누군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흠칫 놀란 문평은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 그의 허리를 다정하게 감싸며 누군가 입을 열었다.
“더 주무세요. 아직 다음 마을에 도착하려면 멀었습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람이 어느새 자신의 곁에 앉아 어깨를 빌려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깨뿐만이 아니라 가슴까지 빌려준 것이다. 문평은 자신이 천마에게 반쯤 끌어안긴 자세로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몸을 물렸다.
“아니, 제가 언제 이렇게…….”
자신이 이제껏 어떤 자세로 있었는지를 깨닫는 순간 확 하니 볼이 달아올랐다. 불로 지지는 것처럼 화끈하게 뺨이 뜨거워진다.
윤승효가 그에게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는지, 천마의 행동은 그가 사라지기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연인 사이이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마의 그런 태도를 접할 때마다 문평은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그 모든 것이 단지 허상일 뿐이었다는 사실이 눈앞에서 증명되고 있는데, 그것을 어찌 편한 마음으로 견디겠는가?
문평은 흐트러지지도 않은 옷매무새를 바로잡는 척하며 천마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자신의 눈에 떠오를 게 분명한 짙은 모멸감과 수치심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천마는 짐짓 당혹한 듯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혼수상태에서 깨고 난 후 문평의 태도가 쌀쌀맞아졌다는 것은 눈치챘지만, 이렇듯 눈에 띄게 몸을 피해 버릴 정도로 마음이 상했다고는 생각지 못한 듯 뚜렷하게 동요했다.
“주무시는 자세가 불편해 보여 자리를 옮겼습니다. 저 때문에 놀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천마는 죄 없는 사람들이 예의 때문에 머리를 숙여야 할 때 그런 것처럼, 지나치게 정중해 오히려 불편한 사과를 했다.
자신이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문평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잠결이라 그랬던 것뿐입니다. 딴마음이 있어 그랬던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아니라고 부정하긴 했지만 티 나게 어색한 부정 자체가 도리어 의심을 부추겼다.
“제게 뭔가 서운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나 다를까. 문평의 태도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챈 천마가 넌지시 질문을 던져왔다.
비가 갠 직후의 하늘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짐짓 온화한 시선이지만,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눈빛임을 알고 있는 문평은 내심 긴장해 숨도 쉴 수 없었다.
이렇게 빨리 들켜서는 안 되는데. 무심결에 일어난 일이라 수습하기 더 힘들다. 문평은 자신의 본심을 직통으로 들킨 것 같아 가슴을 두근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럴싸한 변명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한 기분이 그를 부추겼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저…….”
아무거라도 생각해 내라, 석문평. 핑계를 대. 네 행동이 이상했던 이유를 설명하란 말이야.
“그저…….”
빨리 생각해 내!!
“그저? 그저 제가 누군지를 알아낸 것뿐입니까? 그래서 그저 마음이 변하셨단 말이지요?”
문평이 변명도 못 하고 더듬거리고 있는 것을 본 천마가 도움이라도 주려는 듯 입을 열었다.
부드럽게 속삭이듯 되물어 오는 질문에 필사적으로 돌아가던 머리가 딱 멈췄다. 잠깐이지만 그 순간, 시간조차 정지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방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문평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는 그 시선을 마주하면서, 윤승효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그랬던 거로군.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그렇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더 이상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게 마치 자연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윤승효의 얼굴에서 천마 본인의 목소리가 태연하게 흘러나왔다.
“어, 어떻게?”
“이왕 남의 흉내를 낼 생각이었으면 제대로 내야지. 자기 눈빛도 제대로 감추지 못했으면서 들키지 않을 줄 알았나? 그렇게 있는 대로 티를 다 내고도?”
천마는 느긋하게 마차의 벽에 등을 기대며 웃었다. 그의 신랄한 빈정거림에 문평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문평은 뺨이라도 맞은 듯 충격받은 표정으로 망연히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이렇듯 잘난 척하고 있긴 했지만, 천마도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엔 그도 몰랐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혼수상태에서 막 깨어난 사람이니 상태가 여느 때와 다른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제 아침. 마차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으로 나왔을 때, 천마는 마침내 문평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다른 사람의 결정에 온전히 맡기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상대방의 지혜와 판단력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완벽한 선의까지도 고스란히 믿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문평은 윤승효에게 완벽한 신뢰를 보냈다. 자신의 목숨보다 상대의 의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사지死地라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의 뒤를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어제의 그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문평은 윤승효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천마는 그 모습을 보고, 그가 윤승효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겉으로는 대의를 말했지만, 그의 속내는 철저히 자기방어적이라 할 수 있었다. 아직 성치도 않은 몸으로 길을 떠나는 것을 택한 것은, 자신 혼자만 뒤에 남겨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부지불식간에 드러낸 단서는 결코 작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문평이 윤승효를 불신한다. 윤승효를 믿지 않고, 의지하지도 않고, 더는 사랑도 하지 않는다. 그 모든 변화가 서서히 진행되었다면 단순한 변심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나 모든 것은 느닷없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진행되었고, 천마는 눈치가 빨랐다.
진짜 윤승효가 어떻게 행동했든, 그 짧은 시간에 이런 결과가 나타날 수는 없다. 결국 바깥이 아니라 문평의 내부에서 뭔가가 바뀐 것이다.
“어떻게라는 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너는 내 정체를 어떻게 알았지? 설마하니 승효가 이실직고하진 않았을 텐데?”
윤승효를 흉내 내고 있을 때의 그와 천마로서 존재하고 있을 때의 그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다.
위협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으며 물을 뿐인데도 등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무기로 사용해도 될 정도의 강력한 위압감이 찍어 누르듯 어깨를 짓눌러 온다. 한동안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공기의 무게가 되돌아왔다. ‘그’를 마주하고 있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이 문평은 숨이 가빠졌다.
“손, 손바닥이…….”
자철磁鐵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자기도 모르게 대답이 나갔다. 말을 하고 나서야 아차 싶어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래 봤자 이미 늦은 일이다.
천마는 문평의 말을 듣고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사정이 이해가 된 모양인지, 그의 눈가로 짧은 눈웃음이 번졌다.
“아, 이건가? 엉뚱한 부분에서 예리하군. 나도 이런 약점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자신이 저질렀던 기만이 결정적으로 폭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태연히 감탄했다. 어떻게 보면 작은 단서를 가지고 정답을 찾아낸 문평을 칭찬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문평은 내심 기가 막혔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있을 수 있을까. 기습이나 다름없는 천마의 행동으로 잠시 혼비백산했던 그는,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대체 자신이 왜 천마에게 추궁당해야 한단 말인가? 문평은 기가 막혔다. 따지고 보면 자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었다. 정체를 숨기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의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논 적도 없다. 화를 내도 자신이 내야 하는 거고, 추궁을 해도 자신이 해야 하는 거다. 천마에겐 지금처럼 행동할 만한 아무런 권리가 없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도 유분수지, 이게 지금 무슨 짓거리인가?
“……할 말은 그것뿐입니까?”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서서히 핏기가 돌았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이다.
그는 시선을 똑바로 들어 천마를 노려보았다. 극심한 긴장에 턱이 굳고 입술이 떨리면서도, 천마를 향한 그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정말 단단히 화가 났군.’
천마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생각했다.
“내게서 듣고 싶은 말이 있나?”
장난삼아 폭죽에 불을 붙이는 아이들처럼, 천마는 도발이 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질문을 되돌렸다.
“제게 하셔야 하는 말이 있지 않으십니까?”
“글쎄?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순순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천마는 정말 짚이는 것이 하나도 없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부드럽게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자신이 저질렀던 일의 진상이 모두 드러났음에도 그는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미안해하기는커녕 멋쩍어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설마 용서한다는 말을 바라는 건가? 그렇다면 그 말은 쉽게 해줄 수 없겠는데.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거든.”
한데,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천마는 그에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용서? 용서라고?’
문평은 그의 입에서 감히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용서요? 그게 당신이 제게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제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 제가 당신을 기만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누구처럼 남의 진심을 짓밟고, 존재하지 않는 마음을 빌미로 몸을 희롱했습니까?”
막아 놓은 둑이 터지듯 문평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저러다 이가 다 갈려 없어지지나 않을까 싶을 만큼 무시무시하게 이를 갈며 그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천마는 마차 안에 기막을 쳐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미리 막을 쳐두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의 대화가 고스란히 파면객에게로 흘러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자던 어린애도 깨서 지금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를 엿들었겠지.
평소에는 죽어라 하고 주위에 신경 쓰는 놈이 한 번 폭발하고 나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정말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나?”
“제가 잘못한 게 대체 뭡니까?”
“죽을죄를 지었지.”
“하. 죽을죄요?”
한마디 할 때마다 따박따박 대꾸가 돌아온다. 몸을 사리는 데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녀석이건만, 지금은 그런 점조차도 돌아보지 않고 있다.
‘흐음. 그렇게 당당할 처지가 못 될 텐데?’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기실 문평만큼이나 화가 나 있는 천마는 기세를 꺾지 않는 문평의 태도에 냉랭한 조소를 머금었다.
차라리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화를 내고 악을 썼더라면 천마도 이렇게까지 기분이 어긋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평은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서도 제 감정을 숨기려고 했고, 천마는 그 사실에 결정적으로 속이 뒤틀렸다.
모든 것을 알고 나서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단정 내리고, 혼자 삭였다. 그래 봤자 속으로는 도망갈 궁리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뱃속에 고를 집어넣을 정도로 떠나고 싶어 하던 독한 놈이니 이제 와 그 마음을 돌렸을 리 없다.
‘그래. 윤승효는 사랑해도 천마는 용서조차 못 하겠더란 말이지?’
일말의 여지조차 없는 단호한 태도 변화는 어이없으리만큼 솔직한 그의 진심을 고스란히 말해 주었다. 이 정도가 되면 이미 차별 대우 따위를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천마 자신과는 아예 상대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 괘씸한 속내를 모를 리 없는 천마의 기분은 단단히 틀어졌다.
맹랑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쯤 되면 귀여운 정도를 넘어섰다. 그의 마음은 조금씩이나마 문평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기에 자존심이 더욱 상했다.
“따라오지 말라는 명을 특별히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어기고 따라붙었다. 교주의 명이 곧 법인 교에서, 그는 항명죄에 해당한다. 교의 명을 따르는 입장에서 내부의 비밀을 외부인에게 발설했지. 단순한 외부인도 아니고 적대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정파의 인물에게 말이야.
교가 적의 첩자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고 있나? 산 채로 피부를 벗겨 본보기로 걸어 놓는다. 보아하니 보고도 제대로 하지 않을뿐더러, 맡은 임무도 완전히 망각하고 있더군. 불복종에 항명, 게다가 임무 방임까지. 네가 저지른 일은 하나하나가 다 목숨을 잃어야 하는 중죄다. 그래 놓고도 죄가 없다고 할 것인가?”
더 치사하게 굴자면 자신을 놔두고 감히 바람을 피운 것까지 언급했어야 하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그것만은 막았다. 보아하니 본인은 그 사실을 인식조차 못 하는 것 같은데, 괜히 언급해 봤자 구차해지기만 할 뿐이다.
음흉하고 속 좁은 늙은이는 속으로 잔뜩 삐져 있는 상태였으나 겉으로 그런 모습은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얼굴 속에서 눈동자만 차갑게 가라앉혔다. 절대자에게 어울리는 위엄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그의 능숙하기 짝이 없는 가면을 문평은 꿰뚫어 보지 못했다.
문평은 말문이 막혔다. 설마하니 천마가 그런 식으로 치고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는, 억울하면서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감정적으로 상황을 판단했던 그와 다르게 천마가 들고나온 것은 지엄한 교의 율법이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의 본질이 무엇이든 천마가 그런 식으로 물고 늘어지면 스스로를 방어할 방법이 없다.
“그랬다면 죽이셨어야지요.”
너무 분해서 손이 떨렸다. 상대는 그가 무엇을 원망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놀리기라도 하듯 본질을 흐렸다. 가해자는 저쪽이고, 피해자는 이쪽이건만 지금 이 순간에도 농락당하고 있는 것은 그뿐이다.
그래서 뭐?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살려 달라고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하란 말인가? 목을 자르지 않고 가지고 놀기만 해주어서 고맙다고 절을 할까?
“제가 정말로 죄를 지었다면, 교의 윗전으로서 벌을 주셨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게 정말 죽을죄였다면 죽이셨으면 됩니다. 제 목 하나 베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셨을 텐데요.”
“너는 지금, 너를 살려 준 은혜에 대해 따지는 것이냐?”
“살려 둔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것이 공정합니다. 하오나 그 벌은 죄에 걸맞은 것이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교주께서 제게 하신 일은 벌도 무엇도 아닙니다. 고작해야 희롱이요, 장난질일 뿐이지 않습니까?”
“난 널 희롱한 적이 없다.”
일을 당한 당사자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천마는 천연덕스럽게 발뺌했다.
그렇지 않아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던 문평은 천마의 그 말 한마디에 결정적으로 속이 뒤집혔다. 어떻게, 어떻게 감히 그따위 변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 일을 부인할 수 있는 거지?!
“당신은 저를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숫제 고함을 치는 문평의 눈이 새빨갰다. 어찌나 열이 올랐는지 눈 안의 실핏줄까지 터져 버린 것이다. 이대로 분에 못 이겨 숨이 끊긴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분기탱천한 그는 감히 천마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가며 그를 비난했다.
“그래. 사모한다고 했었지.”
“저를 사모한다고 하셨고, 제게 욕정 하셨습니다. 제 마음을 빌미로 몸을 농락하셨지요. 그런데 그게 희롱이 아닙니까?”
“사모한다고 했지. 욕정 한다고도 했다. 스스로가 위군자에 소인배라 고백도 했지.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너는 왜 그게 거짓말이라고 여기는 게냐? 내가 그를 거짓으로 말했다고 누가 그러던? 그냥 너 혼자 생각하기에 그래 보이더냐?”
천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문평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윤승효의 얼굴인데도, 표정만은 완연히 천마의 그것이다.
문평은 천마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가 싶어 그를 노려보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장난감으로 보는 건가 싶어 노여움이 불타올랐다.
“그걸 말로 들어야 아는 겁니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익히 아는데, 어찌 짐작하지 못하겠습니까?”
“네가 나를 어찌 생각하는지는 잘 알겠다. 하나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서 멋대로 정하는 건 경솔한 일이지.”
“그럼 제가 뭐라고 물었어야 합니까? 교주님께서 정말 저를 사모하시냐고 물었어야 하는 겁니까? 당신이 하셨던 그 모든 행동과 거짓말 가운데,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거짓이었나를 가려 달라고 애원이라도 했어야 하나요?”
“그렇게까진 하지 않아도, 한 번쯤은 내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기는 했었어야지. 네 말대로 나는 너를 죽였어야 했다. 네가 교내의 사정을 윤승효에게 밝혔던 바로 그 순간에, 너의 목숨은 이미 없었어야 하는 것이었지. 그러나 나는 너를 살려 두었다. 왜 그랬을 것 같으냐?”
흔히들 별호라고 생각하는 ‘천마天魔’는, 기실 한 사람의 자연인에 대한 칭호가 아니다. 그것은 마교의 교주인 동시에 교의 수호자이기도 한 자를 지칭하는 특별한 명칭이다. 교의 법을 지키고, 그를 규율하고 감독하는 최고위자의 신분. 따지고 보면 그 명칭은 이름이 아니라 직위를 나타낸다.
문평은 그가 뿜어내는 강렬한 개성에 압도돼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언급되는 죄상을 듣자 뒤늦게나마 그 사실이 떠올랐다. 처음엔 그저 트집이나 잡아보자고 꺼낸 말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예상외로 천마는 그 죄를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듭하여 그 일을 언급하는 태도가 전에 없이 진지하다.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한 자리를 끝내 따라온 부하를 왜 데리고 다녔을 것 같으냐? 춘약 때문에 미쳐 죽을 뻔한 것을 구해 주고, 고를 없애 주고, 위험한 자리에선 최우선으로 지켰던 것은 또 무슨 이유일 것 같으냐? 교의 반도를 뒤쫓고 있는 급박한 와중에 겨우 장난 따위나 하자고 그런 번거로움을 감수했을 것 같으냐?”
물론 반쯤은 장난삼아 그런 것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런 적이 전혀 없었다는 듯 시침을 뚝 떼는 게 현명한 일이다.
천마가 의외로 진중하게 나서며 조목조목 꼬집자 문평은 얼른 반박을 못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쉽사리 설명할 수 없었다.
윤승효가 아니라 실은 내가 다 해준 거라고, 천마가 생색내는 걸 깨닫지 못한 문평은 또다시 천마의 수법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꽃을 피우려면 나를 향해 피워. 꽃이든 잎이든 죄다 나를 보고 있으란 말이야.’
문평은 꿈에도 알지 못할 것이다.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자신을 바라보며 천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천마는 자신을 아예 논외로 두는 문평을 있는 대로 흔들 생각이었다. 다른 곳만 보며 딴청 하는 녀석의 시선을 돌아보지 못하게 잡아 두고, 자유로운 사지를 꼼짝 못 하도록 짓눌러서 가둘 것이다. 제 마음대로 변심하고 돌아서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한때 윤승효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가져야만 했다.
문평을 자신이 만든 울타리 속에 온전히 들여앉혀 예전에 봤던 그 예쁜 꽃을 다시금 피우도록 만들 결심을 한 천마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태도를 바꿨다. 이런 부분에서 ‘진심’이 아니라 ‘계획’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마도인의 천성 때문이다.
평생을 협잡과 계략 속에서 살아온 천마에게 문평의 약점은 너무나도 빤했다. 그리고 천마는 눈에 빤히 보이는 약점을 잡지 않을 정도로 마음씨 좋은 노인네가 아니었다.
“마음이 변했다면 네가 변한 것이고, 거짓말을 했다면 네가 한 것이다. 나는 정체는 속였어도 진심을 속인 적은 없다.”
의심 반 당황 반으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문평에게 천마가 쐐기를 박았다.
헛수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천마가 하는 말에 속수무책 말려들어 가고 있던 문평은, 느닷없는 매도에 당황해서 반박했다.
“제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나의 외면보다 내면이 좋다고 했지. 윤승효라는 사람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뼈대를 좋아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너는 나의 정체를 알자마자 마음을 바꾸었지.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못했으니 그것은 거짓말이고, 맹세한 마음이 바뀌었으니 또한 변심이다.”
“그런 궤변이 어디 있습니까? 진정한 정체를 속이고 있었으니 속았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요.”
“남을 비난하는 것은 쉽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너를 탓하지는 않겠다. 어차피 빌미를 준 것 자체가 내 자신이니, 너를 탓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문평은 화가 나면서도 어리둥절해졌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왠지 더 두려워졌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완전히 거짓말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슬슬 떠오르자 머리를 가득 채우던 분기가 가라앉으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천마가 얼마나 능숙한 거짓말쟁이인가를 잘 알기에, 문평은 슬그머니 치밀어 오르는 ‘혹시나’하는 의혹을 강하게 부정했다.
‘에이, 아니겠지. 설마 그러려고. 천마씩이나 되는 사람이 뭐가 모자란다고 나 같은 사람에게 진심을 가질까.’
문평은 이야기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신빙성 있는 단서들에 대해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천마가 아예 마음에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말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윤승효로 분한 천마가 문평을 몇 번이고 구해줬던 것은 사실이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 버렸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상황에서도 그는 문평을 거둬 주었다. 교의 추적을 그토록 꺼리는 사람이 뒤를 밟힐 걸 알면서도 문평을 데리고 다녔다. 심지어는 문평이 심각한 부상을 입자, 급박한 일정까지 뒤로 미루고 며칠씩 곁에서 보살펴 주기도 했다.
상대가 윤승효라고 생각했기에 아무 의심을 하지 않았던 호의들도 그의 정체를 알고서 생각해 보니 미심쩍어진다. 교의 반도를 쫓는 중이라는 남다른 정황은 그의 행동들에 뜻하지 않는 진실미까지 채색시켰다.
‘말도 안 돼. 어차피 또 한 번 나를 놀리려고 드는 수작일 거야. 내가 어디까지 속아 넘어가는지 재미 삼아 지켜보는 거라고. 한 번 당했으면 됐지 두 번이나 당해서는 안 돼.’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믿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인지라, 문평은 마음속에 드는 의혹들을 애써 떨쳐 버렸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바에야 차라리 가지고 놀았다는 고백을 듣는 쪽이 훨씬 더 편하다. 상대의 정체도 모르고 멋대로 순정을 바치는 꼴이 웃겨서 일부러 장단이나 한번 맞춰본 거라고. 그런데 의외로 일찍 눈치채는 걸 보니 생각만큼 맹탕은 아니라고. 그렇게 비웃었어야 정상이건만, 어째서 그런 쉬운 고백을 놔두고 이렇게까지 끈질긴 짓을 하는 걸까?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 봐도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애초에 믿었던 것들을 되새기려고 발버둥 쳐봤지만, ‘혹시나’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끈질기게 남아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천마가 네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식으로 입을 다물어 버린 것조차 더할 나위 없는 부담이다.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지? 아니 그 이전에, 이 일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
갈피를 잡지 못한 문평은 멍하니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두서없는 생각들이 너무나도 어지러워 무엇부터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꼭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뱃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뱃속이 울렁거리니까, 설상가상으로 위까지 쑤셔 온다. 이러다 토할지도 모르겠다. 문평은 눈을 감으며 뒤집히는 속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그의 건강엔 화상보다 천마 쪽이 더 해로운 것 같았다. 옆에 이 사람만 없어도 요양이 될 것 같은데, 천마는 그런 쪽으론 도무지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남자를 한때는 어떻게 그토록 사랑스럽다고 여길 수 있었던 걸까?
문평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