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낚시하고 배도 매지 않고 돌아와
釣罷歸來不繫船
달 저문 강촌에서 잠이 들었네
江村月落正堪眠
밤사이 바람이 제멋대로 분다 해도
縱然一夜風吹去
배야 갈대꽃이 핀 물가에 떠 있겠지5)
只在蘆花淺水邊
반짝반짝. 저녁노을이 반사되어 빛나는 금빛 수면 위로 그물들이 끌려 올라왔다. 파닥파닥 날뛰는 물고기의 비늘들이 보석 가루처럼 반짝거린다. 한가로운 강촌의 밤을 노래하면서 그물을 당기는 어부들에겐 아무런 근심의 빛이 엿보이지 않았다.
문평은 반쯤 방심 상태로 앉아 어부들의 일상을 구경했다.
‘나도 어부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태어나기를 전장에서 태어나 피 튀기는 병영 생활에만 익숙해 있던 문평은, 이런 일상적인 풍경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그에게는 단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었던 안온한 평화. 부럽지 않다면 솔직히 거짓말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다. 문평은 그 점이 가장 부러웠다.
‘이번 일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되고 나면, 나도 어부나 될까. 그물 끌어 올리는 것 정도는 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작살과 창은 쓰는 법이 비슷할 테니 고기잡이도 손쉽게 익힐 것 같고.’
하릴없는 망상이 그의 마음을 채운다. 그가 이렇게 태평하게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배 위에 있다. 동정호와 연결되어 흐르는 자수를 따라 내려가는 길. 이런 여객선 안에서는 뱃전에 걸터앉아 바깥 구경을 하는 것 외에는 따로 할 만한 일이 없었다.
멍하니 주위를 바라보던 그의 눈에 조그만 그림자 하나가 걸렸다. 멀찍이 떨어진 뱃전에 오도카니 앉아서, 그와 마찬가지로 어부들을 구경하고 있는 인영이다. 아이의 멍한 눈은 제 아버지에게 물일을 배우고 있는 작은 아이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려 구릿빛으로 물든 동체를 한 아이들은 발갛게 벗겨진 콧잔등을 하고도 행복해 보였다. 한 아이가 그물 속에서 물고기를 걷어 냈다. 자기 상체의 반만 한 커다란 잉어다. 아이가 신이 나 환호성을 지르며 물고기를 아버지에게 내밀자, 아비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문평은 아이가 무슨 심정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지 짐작이 가, 낮게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허리에서 우두둑, 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밤새 시달린 탓에 아직도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허리가 꺾일 듯 휘청거린다.
앉아 있을 때보다 서 있을 때가 더 아픈 것 같다. 욱신대는 통증 때문에 제대로 펴지지도 않는 허리를 애써 곧추세운 문평이 아이 곁으로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거기가 당겼다. 내벽이 잔뜩 붓는 바람에 예민한 속살이 쓰리고 아팠다.
“왜 바깥에 혼자 나와 있니. 자 소저는 어딜 가고?”
윤승효가 ‘네 몫이다’라고 지정을 해준 후, 자묘랑은 어딜 가든 자옥을 놔두고 다닌 적이 없었다. 자옥을 잘못 돌보면 일행에서 쫓겨날까 봐 두려웠던지, 심지어는 화장실에 갈 때조차 자옥을 끌고 다녔다. 돌봐 준다고 하기보다는 졸개를 끌고 다니는 것에 더 가까운 것 같았지만, 문평은 모르는 체했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또래끼리 어울리다 보면 자옥에게 좋은 영향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서다. 흉험한 일을 연거푸 당하고, 정신적 충격 때문에 의기소침하고 있는 애한테는 그렇게라도 손을 이끌어주는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았다.
“……방에, 있어요.”
문평이 곁에 다가와 털썩 자리에 앉자, 조그맣게 몸을 움츠린 소녀가 소심하게 대답했다.
소녀는 윤승효가 맞춰 준 연두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너무 말랐기 때문에 귀엽게 보이기보단 나무토막이 옷만 걸친 것처럼 보였다. 끼니때마다 풍성하게 먹이려고 애쓰는데도 불구하고 여행이 고된 터라 아이의 얼굴엔 도통 살이 오르지 않았다.
“방에? 혼자?”
소심한 자옥과 달리 자묘랑은 생기발랄하다 못해 극성맞은 성격이다. 그제부터 배를 탄다고 기대하고 있었으니 그 성격대로라면 좁은 여객선 안이 비좁다고 헤집고 다녀야 할 터인데, 어찌 된 일인지 자묘랑은 갑판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왜? 혹시 멀미라도 하니?”
무공을 배운 무인이니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어 문평은 물었다. 그의 질문에 자옥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멀미는 아닌가? 그럼 무슨 일이지?
“아침부터 그랬어요. 선실에서 울어요. 화…… 많이 났어요.”
“울어? 자 소저가?”
“네.”
“뭣 때문에?”
“……몰라요. 나는.”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다. 알아도 말하기 싫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묘랑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은 것은 아침부터였지. 문평은 자옥의 말을 듣고서야 자묘랑이 오늘 아침부터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묘랑은 아침 식사 때도 이상했다. 평소대로라면 젓가락을 갖다 달라 물을 떠 와라 별별 주문을 다 했을 텐데 유달리 조용했고, 배에 타고 나서부터는 아예 시야에서 사라져 하루 내내 보이지 않았다.
자기 몸을 추스르는 데 벅차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따지고 보니 정말 이상하다. 뭣 때문에 마음이 그렇게 틀어진 것일까? 어지간한 일로는 눈도 깜빡하지 않을 만큼 독한 구석이 있는 아이인데 말이다.
‘……설마하니 어젯밤의 일을 알아버린 것은 아니겠지. 그 애가 그렇게 동요할 만한 일은 윤 형에 관한 일뿐인데.’
자묘랑이 칩거하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던 문평은, 문득 끔찍한 가능성 하나를 떠올리며 흠칫했다. 혹시나 하고 떠올린 생각이지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것밖에 이유가 없는 것 같다.
어린 소녀에게 어젯밤의 일을 들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어젯밤에 부렸던 추태를 생각하면 윤 형의 얼굴조차 보기 민망할 지경이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덤벼드는 상대가 너무 힘들어서, 종내에는 살려 달라고 빌며 엉엉 울기까지 하지 않았나.
문평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윤승효뿐만이 아니라 자묘랑까지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단둘만 알고 있어도 너무 많이 아는 일이었다.
‘정말로 자묘랑이 그 일을 안다면, 나는 그냥 강물로 뛰어드는 것이 낫겠군.’
문평은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눌러 참으며 생각했다. 그 질투심 많고 입 매운 아가씨가 이번이라고 그냥 넘어가겠는가? 아니다. 천만의 말씀이다. 예전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원색적으로 묘사하며 비난할 게 뻔한데,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씩이나 그런 모욕을 감내할 자신이 없는 문평은 진실로 콱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좋아해서 좋아한다고 말했을 뿐인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이건 뭔가 아닌 것 같은데…….’
문평의 마음이 심란해졌다. 윤승효에 대한 마음을 그저 품고만 있을 땐 이런 고민도 없었는데, 이뤄지고 나니 오히려 고민거리가 늘었다.
마음이 맺어지자마자 몸부터 겹쳤다.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대신 육욕을 충족시켰다. 맥락으로만 봐선 혼자 앓던 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행복한 순간이건만, 문평은 어쩐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가 윤승효에게 바랐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단순히 입술을 맞대고 몸을 나눌 상대가 필요했다면 윤승효보단 좀 더 쉬운 상대를 원했을 것이다.
이 나이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문평은 그와 좀 더 순수한 교감을 나누고 싶었다. 서로 말없이 산길을 걷다가 문득 눈이 마주치거나, 편안한 술자리를 함께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동시에 웃어 버리는 것 같은, 육체적이기보다는 정신적인 친밀감이 느껴지는 순간들. 문평이 윤승효와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어쩌면 이것도 분에 넘치는 생각인지도 모르지. 너무 쉽게 원하던 것이 이루어져 맥이 빠진 것일 수도 있고. 엉뚱한 생각 하지 말자, 석문평. 이게 얼마나 이뤄지기 힘든 마음이었는지 알고 있지 않나. 이런 일을 두고 불평을 가진다는 건 복에 겨운 투정일 뿐이야.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연결되는 것도 어려운 판인데, 하물며 사내와 사내임에야.’
자신이 진짜로 원하던 것을 떠올리며 아련해하던 문평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스로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행운을 차지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한데 자신은 이런 일을 두고도 불평부터 떠올리고 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욕심이 많아진 것일까. 사람 욕심이란 정말 끝이 없는 모양이다.
“자 소저가 많이 우니?”
어제 자신이 승낙받지 못하고 거절당했다면, 마음에 못이 박힌 것은 자묘랑이 아니라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다른 건 몰라도 자묘랑이 윤승효를 얼마나 절절히 사모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문평은 자묘랑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자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한 번이 아니라 강조하듯 두세 번 연거푸. ……정말 많이 우나 보다.
“……네. 울어요. 울면서, 욕해요.”
누구 욕을 어떻게 할지 안 봐도 뻔하다. 문평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자옥이 여기 나와 있는 게 잘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니한테 잘해줘. 별로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많이 힘들 테니까. 언니 힘들게 하지 말고…….”
자묘랑이 자신을 욕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슬그머니 치솟던 동정심도 사라진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민망함과 면구스러움. 이 쪼끄만 꼬맹이가 자묘랑이 하는 욕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문평은 자옥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더듬더듬 말을 주워섬겼다.
자옥은 말끄러미 그런 문평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손이 닿을 때마다 자지러지더니만, 그래도 며칠 같이 보낸 시간이 약이 되었던지 예전만큼 무서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 길진 않아도 이렇게 한두 마디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됐으니 말이다.
“……언니, 아닌데.”
그녀는 혼잣말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자묘랑이 무슨 욕을 하고 있을지에 온 정신이 쏠려 있는 문평은 자옥의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언니, 아니던데. 자묘랑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가 언니가 아니라 오빠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자옥은, 자기도 알고 있는 일을 새카맣게 모르는 문평을 이상한 듯 바라보았다.
어린 그녀가 보기엔 이들 일행은 다 이상했다. 그녀의 오라비를 길 가는 똥개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걷어차던 눈앞의 남자는 자기 몸의 절반밖에 안 되는 어린애도 이기지 못해 절절맸고,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쁘게 생긴 웬 오빠는 여자애 옷을 입고 여자 말투를 쓰며 천생 여자인 척 흉내를 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이상한 건 눈이 새파래서 꼭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잘생긴 외모의 사내였다.
그 사내는 가끔씩 자기보다 키가 훨씬 큰 문평을 배냇짓 하는 강아지 보듯 바라보았다. 너무너무 예쁘고 귀엽긴 한데, 말썽을 많이 부리는 건 좀 짜증 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은근히 괴롭히고, 티 안 나게 구박도 하다가, 남이 혹시나 자기랑 비슷하게 굴면 갑자기 돌변해 상대를 잡아먹을 듯이 굴었다.
앵속에 취한 사람은 늘 앵속에 취해 있고, 도박에 미친 놈은 늘 도박에 미쳐 있는 단순한 세계에서 살아온 자옥은, 느닷없이 만나게 된 이 복잡한 사람들에게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붙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상한 건 이상한 거였다.
오랜만에 몸도 마음도 원 없이 풀었다.
천마는 뽀얗게 윤이 나다 못해 진주처럼 광택이 흐르는 피부를 자랑하며 뱃전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어젯밤 내내 그의 심술에 시달리다 못해, 끝내는 눈물을 흘리며 기절했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아직 몸이 불편한 듯 걷는 것도 시원치 않고 앉아 있는 자세도 구부정했지만, 천마의 눈엔 그렇기에 더욱 귀여워 보였다.
‘그동안 내가 왜 저 녀석을 그냥 내버려 둔 것일까?’
본의 아니게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눈앞에 두고도 ‘기다려’ 상태였던 천마는 스스로가 걸었던 제약에서 해방되고 나서야 자신이 그동안 굶주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사를 나누는 것을 즐기긴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허기져 본 적은 없었는데, 손닿는 곳에 문평을 놔두고도 아무 짓도 못 했더니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쌓이고 있었나 보다. 처음에야 일부러 배려 없이 굴었다지만 나중엔 진심으로 열중해서 상대 따윈 안중에도 없을 만큼 몰두해 버릴 정도였다.
‘오늘 저녁에도 그냥 안아 버릴까.’
천마는 문평의 뒷모습을 보며 남몰래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못하는 윤승효’에게 질릴 때까지 범해 줄 생각이기도 하고, 한 번 맛을 보고 나니 그런 핑계가 아니더라도 안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기승위로 사내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도 색다른 맛일 거다. 오늘도 향유 따위는 없이 그냥 해버려야지. 기름이 없으니까 보통 때와는 다른 풍미가 있었다. 문평의 보드라운 내벽이 더 쫀득하게 감겨오는 데다, 그야말로 생으로 모든 게 느껴져서 감도도 더 좋았다.
어제의 문평은 정말 귀여웠다. 배려 없이 멋대로 휘두르는데도 지고지순, 어떻게든 상대를 받아 주려고 애쓰며 노력하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고 애틋하던지.
진작부터 그런 모습을 보였더라면 금으로 만든 집을 짓고 옥으로 만든 침상에 앉혀 상아 밥그릇에 밥을 먹였을 텐데, 눈치도 없이 천마가 아니라 윤승효에게 그러고 있으니 그 꼴을 당하는 거였다.
문평을 보고 있으면 ‘첩살이도 눈치가 있어야 한다.’는 옛말이 떠올랐다. 그래. 맞는 말이다. 만약 문평에게 그에 걸맞은 눈치가 있었다면 지금쯤 양귀비 부럽지 않은 권세를 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눈치라곤 지지리도 없는 인간이었고, 그 덕분에 뱃고물에 앉아 아픈 허리나 두드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자기 팔자는 다 자기가 만든다. 천마는 문평을 보며 그 사실을 절절히 느꼈다.
“왜 그러셨습니까? 네? 대체 왜요?”
……눈치 없는 건 이놈도 마찬가지구먼.
천마는 모처럼 좋던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전음을 들으며 슬쩍 눈을 흘겼다. 그의 뒤편엔 보따리를 보물단지처럼 끌어안고 있는 시골 아낙이 서 있었다.
별로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표정이 얼마나 서글프고 애잔한지,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바로 강물로 뛰어들 것만 같아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여인이다.
“여장에 취미가 붙었느냐. 요즘 부쩍 여자 행세가 늘었구나.”
부창부수라더니 그 취미도 옮는 것인가. 천마는 요새 툭하면 여자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윤승효에게 통박을 주었다.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의 눈에서 빛이 번득인다. 어떤 모진 일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서러움이 가득한 두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제가 뭣 때문에 이런 꼴을 하고 다니는지 정녕 모르십니까? 우리 묘랑이, 그 불쌍한 고양이 아가씨. 잘 좀 대해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드렸는데 정말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 어린 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구박하시는 거지요? 그것도 하필이면 제 모습을 하시고서 말입니다!”
자기 정인에게 콩깍지가 씐 윤승효가 열렬히 항의했다. 네가 그렇게 싸고만 도니까 애가 그따위로 버릇이 없지. 천마는 흥 하니 코웃음을 치며 윤승효의 항의를 흘려들었다.
자묘랑 고 어린 것이 문평에게 했던 짓거리들을 생각하면 구박이 아니라 고문을 해도 모자랄 판국이다.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 먹어서는. 사람을 코끝으로 부리고서도 미안하다 소리 한 번 안 하는데 너무 얄미워서 가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이 정도만 하며 참고 있는 것은 윤승효가 제 정인이라고 애원에 애원을 거듭해서인데, 그 은공도 모르고 감히 불평을 늘어놓다니. 이놈도 요즘 들어 간이 너무 부었다.
“한데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제 모습을 하시고 사내를 안으셨습니까? 그것도 백조부님의 수하인 사람을요? 백조부님은 그저 재미나게 놀고 가면 그만이시겠지만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저보고 어떻게 뒷수습을 하라고 일을 이렇게 벌이시는 거예요?”
어지간하면 그냥 한 번 웃고 넘어가던 놈인데, 불평이 끊이질 않았다. 아무래도 그간 쌓인 게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화를 내는 데 몰두하느라 자기가 화를 내고 있는 상대가 천마고, 자기가 언급하는 게 그 천마의 잠자리 상대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 참. 별걱정을 다 한다.’
윤승효에게 뒷수습을 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던 천마는 어이없이 웃었다.
“누가 너더러 그런 걱정을 하라고 했더냐. 괜찮다. 네가 수습할 일 따윈 아무것도 없다.”
“뭐가 없습니까. 그 사람, 자기가 저랑 잔 것으로 알고 있을 텐데요. 나중에라도 절 찾아오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저 사람을 책임질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혹시나 자기가 저 사람을 데리고 살아야 되면 어쩌나 하는 허튼 걱정을 하는 모양인지 윤승효의 음성이 사정없이 떨렸다.
‘죽어도 그럴 일 없다. 내가 일이 그 꼴이 나도록 내버려 둘 것 같으냐?’
천마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지레 병을 만드는 윤승효를 냉랭하게 비웃었다.
“원래 내 사람이었다. 돌아갈 때도 잊지 않고 챙겨갈 테니 너랑 다시 마주할 일은 없을 게다.”
“……백조부님의, 사람이요?”
“그래. 내 거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본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사내를 안은지라 잠깐 놀고 버릴 상대일 거라고만 짐작했는데, 천마의 태도가 의외로 확고한 것이다. 자기 물건에 유독 집착이 강한 만큼 쉽사리 선 안쪽으로는 타인을 들이는 법이 없는 천마가 콕 집어 ‘내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는 상대인 게 분명하다.
미심쩍음을 금치 못한 윤승효는 자신의 의문을 풀기 위해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정확히 무슨 일인지를 알아야만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마 해서 묻는 겁니다만, 혹시 저자와 백조부님은 교에 계실 때부터 알고 계시던 사이인가요?”
‘관계하던 사이냐’라고 묻지 못하고 그냥 ‘안다’라고만 표현한 것은, 자기 입으로 그 적나라한 사정을 까발리고 싶지 않아서다.
“그때부터 내 것이긴 했지. 지금도 역시 내 것이고.”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뭐야 그럼. 저 사내는 원래부터 백조부님의 첩이었단 말이야? 그런데도 백조부님이 백조부님인 줄도 모르고, 그게 나인 줄로 알고서 같이 잤다고?’
복잡한 상황 때문에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저 사내는 천마와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다른 사내, 즉 ‘나’와 바람을 피운 것인가? 설마하니 저런 멀쩡한 얼굴을 하고서 태연히 사람 잡을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니겠지?’
윤승효는 불안한 표정으로 천마를 주시했다. 제발 아니기만을 바라면서 눈치를 살피는데, 자신의 얼굴을 한 천마가 은연중에 살벌한 미소를 짓는 게 보인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진짠가.’
윤승효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때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사랑에 빠졌다는 티를 온몸으로 내고 다니는 사내도 사내지만, 아무 말 없이 그런 행위를 묵인하기만 하는 천마에게서도 원인 모를 불길함을 느꼈었기 때문이다.
‘나랑 전생에 무슨 원한이 있어 이런 물귀신 같은 짓을 한 겁니까?’
겉으로는 대범해 보여도 천마가 얼마나 쪼잔한지, 그리고 뒤끝이 얼마나 긴지 익히 알고 있는 윤승효는 문평을 붙들고 묻고 싶어졌다. 장난이 아니다. 일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면 저 남자는 물론이고 아무 죄 없는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 있다.
천마가 얼마나 심술궂고 괴팍한 인간인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을 그냥 놔두겠는가. 정작 자신이 아무것도 한 짓이 없는 것을 알고 있어도 그저 괘씸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지옥 불에 빠트릴 수도 있는 사람이 바로 천마다. 물론 선대부터의 인연이 있으니 빠트렸다가도 도로 건져주기야 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불에 타는 것은 어차피 마찬가지가 아닌가? 윤승효로서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 따로 없는 셈이다.
“전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백조부님.”
억울하다. 분하다. 원통하다. 그의 죄라고는 서신 한 통 달랑 받고 신분을 빼앗긴 것뿐인데, 그 일로 벌을 받는다는 건 당치도 않은 처사다. 윤승효는 항의하고 싶은 기분을 듬뿍 담아 전음을 날렸다.
누가 뭐라고 했느냐? 천마는 윤승효의 전음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문평의 뒤태를 감상했다. 문평이 자옥이라는 아이에게 뭐라고 헛소리를 하는 게 보였다. 눈치가 빤한 어린것은 별 이상한 걸 다 보겠다는 시선으로 문평을 바라보았다.
“전, 진짜,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손이라도 한 번 잡았으면 원통하지나 않을 겁니다.”
“어깨는 잡았다며? 원통하지 않아 좋겠군.”
“그게 어떻게 잡은 겁니까. 살짝 두드렸을 뿐이라니까요. 저 사람의 어깨에 손이 닿았던 건 문 여느라 문고리를 잡는 시간보다 더 짧았습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무슨 생각에 빠진 건지, 지레 겁을 먹은 윤승효가 억울하다고 난리를 쳐댄다. 천마의 고약한 성미를 익히 알고 있다 보니, 혹시나 자신에게 불이익이 생길까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쯧. 약삭빠르기는. 천마는 일부러 시큰둥한 태도를 취하며 상대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문평의 일을 가지고 윤승효에게 화풀이할 마음은 없었지만, 지가 저렇게 알아서 멍석을 깔아 주는데 그걸 모르는 체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그럴 거라는 뜻인지 안 그럴 거라는 뜻인지, 정의하기 모호한 대답으로 윤승효의 머릿속을 어지럽힌 천마는 낮게 쿡쿡 웃으며 문평에게로 다가갔다.
“바람이 찬데 왜 나와 있습니까? 몸은 괜찮으십니까?”
천마는 짐짓 다정하게 말하며 문평의 옆자리에 앉았다.
말 없는 꼬마를 상대로 횡설수설,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던 문평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든다. 그는 온화하게 웃고 있는 천마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차마 눈을 피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단정한 눈매가 발갛게 익었다.
‘꼭 첫날밤을 보낸 새색시 같군.’
천마는 지그시 웃으며 그의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붙였다. 문평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윤승효만 보면 늘 눈부시다는 듯 가늘어지던 시선에도 난처함이 어려 있다.
새색시는 새색신데, 첫날밤을 지낸 후 밤이 무서운 새색시 같다. 물론 이런 결과를 원했던 천마는 문평의 반응에 지극히 만족했다.
자수資水는 장강長江이나 황하黃河처럼 큰 강이 아니라서, 강을 오르내리는 여객선도 크기가 크지 않다. 굽이굽이 흐르는 삼백 리 물길을 따라가는 여객선은 대부분의 승객을 갑판에 재우고, 선실은 고작 열 개만 갖춘 조촐한 규모다.
열 개밖에 없는 선실 중에 두 개를 차지한 것은 윤승효 일행이다. 자옥과 자묘랑이 한 개, 문평과 윤승효가 또 한 개. 성별에 따라 방을 나눈 그들은 저녁을 먹은 후 각자의 방으로 돌아왔다.
물론 자묘랑은 저녁 식사 시간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수부들이 선상에서 직접 끓인 어죽과 잉어회로 풍성한 저녁이었는데 먹는 걸 좋아하는 아가씨가 나와 보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녀가 마음에 품은 상심이 어느 정도 큰지를 알 수 있었다.
‘내일은 욕을 먹더라도 한번 들여다볼까?’
미우나 고우나 같은 일행인데,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저러고 있는 걸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평은 근심스러운 기분으로 생각에 잠겼다. 자기를 봐도 마음이 안 좋을 걸 아니까 들여다보기가 꺼려지면서도, 이대로 계속 모르는 척하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닌 것 같다.
달칵.
문평은 뒤를 돌아보았다. 자묘랑에 대한 일을 고민하느라 상대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는 문에 빗장을 지르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윤승효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가 빗장을 지르는 바람에 문평과 윤승효는 자신들의 선실에 단둘이 남게 되었다. 문평이 아연한 얼굴로 돌아보자 윤승효가 난처하게 웃으며 어색한 변명을 했다.
“혹시 모르는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선내잖습니까.”
비겁한 변명이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건 강도가 들어오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 선실 안에 묶는 일행은 초절정 고수 하나에 일류 고수가 하나다. 소가장 같은 작은 장원 하나는 무리 없이 헤집고 다닐 전력인데 고작 좀도둑이 무서워 빗장을 지른단 말인가.
“그렇군요.”
“그런데, 좀 덥지 않습니까? 저녁을 거하게 먹어서 그런가 체온이 오르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문평이 덤덤히 수긍을 하니까 윤승효가 연이어 수작을 걸어왔다. 누구 앞에서나 매끈한 처세를 보이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서툰 수작이다.
‘덥기는 뭐가 더워. 오히려 춥구먼.’
더운 지방인 사천과 귀주를 막 벗어나 호남으로 올라온 데다 강 위라 습기까지 많아 약간의 쌀쌀함을 느끼고 있었던 문평은 윤승효가 던지는 말에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기분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귀엽잖은가. 어떻게든 침상으로 같이 가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는 것 말이다. 능숙하게 상대를 자신의 범위 안으로 끌어들이던 누군가와 달리, 제대로 맞추질 못해 안달복달하는 걸 보니 정겨워서 좋았다.
“그러시다면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시겠습니까?”
문평은 농을 하며 문으로 다가갔다. 그가 짐짓 빗장을 열려는 태도를 취하자, 윤승효가 황급히 팔목을 잡았다. 그러더니 에라 모르겠다 싶었는지 다짜고짜 문평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텅, 하고 문짝에 강하게 등이 부딪혔다. 문평은 자기보다 훨씬 호리호리한 남자의 팔 안에 갇혀 입맞춤을 받았다.
집어삼킬 듯 뜨겁게 다가오는 입술은 여전히 서툴렀다. 서두르느라 이끼리 부딪치기도 하고, 잘못해서 아플 정도로 혀를 깨물기도 한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부딪쳐 오는 그 태도 때문에 문평의 몸에서도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문평은 자신도 윤승효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입속으로 자신의 혀를 밀어 넣었다.
잠자리를 일방적으로 요구받는 것은 문평에게 낯선 일이 아니다. 사내에게 다리를 열고, 그의 성기를 자신의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도 문평은 이미 경험이 있다. 덕분에 윤승효에게 요구받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대체 자신의 어디가 그렇게 욕정을 불러일으키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당연한 듯 갖고 노는 게 아니라 갈급하게 저를 원한다는 건 마음에 들었다.
“당신 안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윤승효가 문평의 귓불을 이 끝으로 물며 다급히 속삭였다. 옷 너머로 벌써부터 부풀기 시작한 그의 성기가 생생히 느껴졌다.
문평은 잡아 찢을 듯 다급하게 옷을 벗기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새로 지은 비단옷을 입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튼튼한 면목천이니 그나마 이런 취급을 견디지, 섬세한 비단이었다면 진작 찢어지고 말았을 거였다.
“넣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그 작고 좁은 곳에 내가 들어갈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것만 허락하신다면 당신에게 뭐든지 다 주겠습니다.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 드리겠습니다.”
문평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가 자신을 간절히 원한다는 건 알지만, 지금 한 말은 기분이 좀 상했다. 그가 자신에게 원하는 건 오로지 구멍뿐이라는 듯이 들렸기 때문이다.
상체 곳곳에 낙인이 찍혔다. 한동안 사라졌던 순흔이 다시 그의 몸으로 돌아온다. 어젯밤에 지나치게 혹사당해 껍질이 벗겨진 유두를 윤승효는 이로 깨물었다.
문평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허겁지겁 자신의 바지를 벗기는 사내를 도와 허리를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평은 문에 기대선 자세로 알몸이 됐다. 윤승효는 자기 옷은 벗지도 않은 채 바지만 내렸다. 그가 속곳까지 벗어 던지자 이미 완전히 발기해 배를 칠 정도로 솟아오른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름은요. 기름은 어디 있습니까?”
애무를 길게 끌지도 않고 다짜고짜 그의 몸속으로 뛰어들려는 상대의 기색에, 문평이 다급하게 물었다. 윤승효는 정신없는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기름이라니요, 무슨 기름을 찾으시는 겁니까?”
그는 문평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의아하게 되물었다. 이 사람이 그새 잊어버린 건가? 어젯밤의 일로 기름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리라고 믿고 있던 문평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윤승효를 바라보았다.
“향유 말입니다. 제 그곳에 바를. ……준비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밤에도 자신을 안을 생각이었다면 당연히 준비를 했어야 하는 거였다. 하지만 윤승효는 고개를 저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게 없다는 뜻이다.
“이런. 깜빡했습니다. ……사실 어제 일을 치르다 보니 별 필요가 없더군요. 그래서 깜빡했나 봅니다.”
어젯밤 내내 윤활유가 없어서 거기가 찢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 휩싸였던 문평에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필요가 없긴 왜 필요가 없어? 그게 없어서 오늘 하루 종일 엉덩이에 불이 나는 것 같았는데!!’
마구잡이로 쓸려 까지고 벗겨진 듯한 내벽의 통증이 아직도 생생한 문평은 무신경한 윤승효의 태도에 살짝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필요가 없다니요. 남자와의 관계에서는 당연히 필요한 겁니다. 게다가 윤 형은 누가 감당하기에도 힘든 크기 아닙니까.”
“손가락으로 풀어 드리겠습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한 번이고 뭐고, 그게 없으면 오늘은 진짜로 찢어질지도 모른다니까요!
문평은 말이 안 통하는 윤승효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윤승효의 손가락이 문평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부어서 어제보다 훨씬 좁아진 그의 항문은 손가락 하나도 버거워했다. 문평은 마른 손가락이 마른 항문을 비집고 들어오자 통증 때문에 숨도 쉬지 못하며 끙끙댔다.
“부드럽군요.”
자기 손가락 때문에 상대가 아파한다는 사실을 눈치도 못 챈 것처럼 윤승효가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점막의 감촉이 기분 좋은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띤 채였다.
“촉촉하고 매끈하고, 따뜻합니다. 비단처럼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끝내주게 조이는군요. 어째 어제보다 더 조이는 것 같습니다.”
어제보다 훨씬 더 부어 있을 테니 그는 당연한 소리였다.
“석 형은 제가 이제껏 안아 봤던 어떤 이보다 부드럽습니다. 이곳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신체 부위는 남자답고 단단한데 오로지 이곳만 그래요. 거의 감미로울 정도로 달아요, 당신의 여기는. 한번 맛보고 나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맛입니다.”
윤승효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열기를 띠었다. 근육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범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손가락은 거칠게 문평의 안팎으로 드나들었다.
처음엔 하나였던 손가락이 다음엔 두 개가 됐다. 그다음엔 세 개. 곧이어 네 개. 사정을 봐주지 않고 부피를 늘리는 손가락 때문에 뒤가 급격히 열렸다.
불편한 자세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쾌감과 함께 고통이 느껴졌다. 문평은 몸속에서 뒤엉키는 감각을 느끼며 윤승효의 어깨를 잡았다.
“저 이전에 석 형을 안아 본 사람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제 차례까지 돌아오는 일은 절대로 없었겠지요. 그 남자가 절대로 석 형을 놔주지 않았을 테니까요.”
윤승효가 문평의 구멍에 자신의 성기를 갖다 대며 격정적으로 속삭였다. 강제로 풀려 얼얼한 근육 사이를 단단한 귀두가 뚫고 지나갔다. 문평은 윤승효의 어깨를 안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춘약에 몸부림치는 당신을 안을 수 있었던 그 순간 이후로, 당신은 제 머릿속을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날 이렇게까지 몰두하게 만든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오로지 당신뿐이에요.”
윤승효는 달뜬 목소리로 고백을 하며 몇 번을 겪어도 적응되지 않는 거대한 것으로 문평의 몸속을 헤집었다.
문평은 거대한 기둥으로 몸이 관통되는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허리를 둥글게 휘었다. 그렇게 자세를 잡았더니, 뱃가죽에 그의 성기가 닿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뱃속이 묵직해졌다. 내벽을 벌리는 버거운 부피에 견딜 수 없는 충격이 그의 몸속까지 전해진다. 덕분에 근육이란 근육은 모조리 비명을 질러 댔다.
윤승효의 성기가 성대하게 꿈틀거렸다. 문평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누워 있는 것도 아니고 서 있는 자세로 사내를 받아들이려니 정말이지 죽을 것 같았다.
‘자기 크기를 생각해야지!’
당치도 않은 체위를 제멋대로 시도하는 윤승효가 원망스러워진 문평은 남몰래 이를 갈았다.
“아픕니다. 제발, 악!”
고통을 호소하던 문평은 말을 맺지도 못하고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뱉었다. 문평의 한쪽 다리를 자기 허리에 감도록 만든 윤승효가 거센 허릿짓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쾅. 쾅. 쾅. 상대의 몸짓에 못 이겨 문평의 등이 문짝을 거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삐거덕삐거덕. 문에 질러 놓은 빗장이 문평의 허리에 부딪혀 불길한 소리를 낸다.
문평은 자신의 그곳에 주먹을 직접 찔러 넣어도 이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독하게 아프고 또 아팠다. 자제할 틈도 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의 손가락이 윤승효의 등을 파고들었다. 요란하기 짝이 없는 열 개의 선이 윤승효의 등에 아로새겨진다. 하지만 문평은 자신이 상대에게 그런 흔적을 남기는 줄도 몰랐다. 그의 정신이 온통 자신의 다리 사이에만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파요. 아픕니다. 윤 형, 승효! 아파요!”
아프다는 소리를 이렇게 많이 해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그만하라고, 너 정말 너무한다고. 문평은 펑펑 울면서 상대의 어깨를 긁어내렸다. 그래도 상대가 치받는 힘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점점 더 세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울어요? 왜 울어요? 많이 아파요?”
자신이 하는 짓을 하나도 모르는 것처럼 윤승효가 뻔뻔하게 물어왔다. 너무 아파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문평이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윤승효가 짐짓 다정하게 문평의 뺨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아파서 어떻게 해요?”
윤승효는 정말로 안타까운 듯 문평을 향해 속삭이며 그의 눈물을 혀로 닦아 주었다.
허리 아래로는 여전히 문평을 범하는 짓거리를 하면서도, 위에선 달래듯 얼굴에 입을 맞춰주고 위로의 말을 속삭인다. 만약에 문평이 제정신이었다면 상대의 가증스러움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지금 그런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아파요, 윤 형. 제발. 제발…….”
“안 아프게 해줄까요. 석 형? 기분 좋게 해줘요?”
놀리듯 진득한 물음이 문평의 뺨에 와 닿았다. 지분지분 이 끝으로 문평의 뺨을 깨물며 윤승효는 낮게 웃었다.
“그럼 운강이라고 불러 봐요. 석 형. 윤 형이니 승효니 하지 말고, 운강이라고. 그러면 기분 좋게 해줄게요.”
천마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말했다. 자신이 왜 이런 말을 내뱉었는지 본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운강. 백운강白雲康이라. 그 이름은 40년 전 동생이 죽으면서 완전히 사라진 이름이었다. 더 이상 그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 줄 사람이 없어서 한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던 이름인데, 하필이면 왜 이런 순간에 그 이름이 생각나는 걸까?
‘모르지, 단순한 변덕인지.’
천마는 문평의 몸을 여전히 거칠게 유린하며 빙긋 웃었다. 자신이 변덕스러운 성격이라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는 일이다. 문평에게 그 이름으로 불리길 원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 녀석의 상태로 봐선 지금 하는 말 따윈 기억도 하지 못할 것 같으니 말이다.
“운강, 운강!”
문평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용케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천마의 이름을 불렀다. 문평이 애타게 부르짖는 이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졌던 이름이고, 이젠 누구도 모르는 천마의 진짜 이름이기도 하다.
천마는 빙그레 웃으며 문평의 허리를 잡았다. 호리호리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괴력으로 몸을 들어 올리자, 놀란 문평이 흐릿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내려다본다.
“계속 불러 봐요. 그 이름, 듣기 좋으니까.”
그는 문평을 안아 올린 채 침대로 데려가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문평은 구명줄이라도 붙잡은 것처럼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운강. 아프게 하지 마십시오. 부드럽게 안아 주세요.”
그놈의 ‘아프지 않게’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익히 들어왔던 말이다. 명색이 무인이라는 놈이 이 정도 가지고 엄살은. 천마는 마음속으로 혀를 끌끌 찼지만, 상대를 안는 동작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는 문평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그의 왼쪽 다리를 자신의 어깨 위에 얹었다. 서서 상대를 받아들여야 할 때보다 훨씬 안정적인 자세가 된 문평은 애원하는 듯한 얼굴로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에 젖어 남자다운 얼굴이 엉망이 됐다.
‘예쁘지도 않은 얼굴이건만 그나마도 보기 흉하게 시리.’
천마는 마음속으로 불평했지만 손으로는 어여쁘다는 듯 문평의 뺨을 쓸고, 너덜너덜한 입술에는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천천히 허리를 돌렸다. 처음처럼 막무가내가 아니라 상대가 느끼는 부분을 제대로 찌르고 눌러 주는 기교가 덧붙여진 허리 놀림이다.
고통만을 느끼던 문평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마부터 눈가로, 눈가에서 뺨으로 서서히 붉어지는 열기는 그가 느끼고 있는 쾌락의 강도를 상징한다.
“아읏!”
문평이 놀란 듯 붉은 입술을 벌리며 탄성을 질렀다. 천마는 노련한 악사처럼 자신이 길들인 남자의 몸을 마음껏 갖고 놀았다.
그의 움직임이 바뀌자 비명밖에 나오지 않던 입술에서 탄식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헐떡이는 신음이 되었다가 곧이어 숨넘어가는 교성으로 바뀌었다.
“아악. 아읏. 악!”
문평은 정신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고통이 사라지고 쾌락이 시작되었다. 그를 죽일 것이라고만 여겨졌던 상대의 성기가 언제부터인가 그의 온몸에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진한 쾌감이 그를 녹초로 만들었다.
죽도록 황홀한 기분이다. 이렇게 당하다가 죽어도 좋다고 여길 정도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아슬아슬하게 치닫는 쾌감이 그의 오감을 부수고 정신을 녹였다.
날카롭게 세워진 문평의 손가락이 다시 상대의 어깨와 팔을 긁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고통이 아니라 환희에 가득 차서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져다주는 열락이 자그마한 선실을 집어삼켰다. 뜨거운 신음과 억누른 비명. 성인 남자 두 사람의 체중을 받아 내는 바람에 심하게 삐거덕거리고 있는 침상의 마찰음까지. 모든 것이 고스란히 벽을 타고 선내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문평은 그러한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을 공격하는 쾌감에만 몰두했다.
모든 게 지나치게 달콤했다.
***
문평이 정신이 든 것은 다음 날 아침, 강변을 떠도는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그는 온갖 체액으로 뒤범벅이 돼 구제할 길이 없어 보이는 침상 위에서 눈을 떴다. 이불은 덮고 있었지만 씻은 자국은 없었고, 몸에는 체액이 묻은 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는 그의 뒤조차 어젯밤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땐 몸 밖으로 덜 마른 정액이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문평은 창백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좁은 선실 안에 가득 들어찬 퀴퀴한 공기에 머리가 아팠다.
‘이게 무슨…….’
남에게 들켰다간 자살하기 딱 좋은 꼴로 깨어난 문평은 자신의 모습을 살피다 한숨을 쉬었다. 이런 꼴로 일어나는 게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비참하게 다가왔다.
오늘뿐만 아니라 어제도 그랬다. 더 오래전으로 돌아가자면, 윤승효와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때 역시 마찬가지다. 그때도 윤승효는 문평을 안고 나서 뒤처리를 해주지 않았었다. 남자를 상대하는 것은 문평이 처음이다 보니 뒤처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나도 천마와의 관계가 없었다면 어떤 식으로 뒤처리를 해야 할지 알지 못했을 거다.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입맛이 썼지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천마는 8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모든 것을 완벽하고 노련하게 연마해왔을 사람이다. 천마와 비교하자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다 애송이에 불과하다. 그런 천마와 미숙하기 짝이 없는 젊은이인 윤승효를 어떻게 일대일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문평은 힘이 풀린 다리를 간신히 끌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흘러나오던 정액은, 그가 두 발로 서자 다리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을 못 하는 문평은 상상외로 엄청난 양이 흐르는 것을 내려다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그의 기억이나 추측보다 어쩌면 더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중간부터 기억을 잃었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양은 거기에서 한두 번을 더 한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양이 아니다.
20대 초반의 정력이란 30대의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적어도 윤승효와 자신을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한두 번 사정을 하고 나면 멀건 물만 나오는 자신에 비해 윤승효는 방금 사정을 하고 나서도 또다시 발딱발딱 잘도 섰다. 한 번 사정하고 다시 발기하는 데 일각도 채 안 걸리는 것 같았다. 늘씬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종마 같은 기세는 그 정력에서 나오는 걸지도 모른다.
문평은 구석으로 걸어갔다. 선실의 구석엔 물이 필요할 때 사용하라고 들여놓은 조그만 항아리가 있다. 문평은 몸을 닦을 흰 천을 들고 항아리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어젯밤에는 가득 차 있던 항아리가 텅 비어 있는 게 보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어 문평은 멍하니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들여다본다고 해서 없는 물이 생겨나진 않았다.
“아, 벌써 일어나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때가 되어 깨워드리려던 참인데요.”
인기척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문평이 휘청하는 허리를 손으로 짚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엉망진창의 몰골을 한 문평과는 달리 말끔하게 모습을 가다듬은 윤승효가 웃으며 서 있었다. 문평은 당황해서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문평이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윤승효의 눈시울이 가늘어졌다. 그는 문평의 벗은 몸을 음미하듯 바라보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윤 형. 혹시 여기에 있던 물은 윤 형께서 전부 쓰셨습니까?”
문평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빛나지 않는 구석이 없는 윤승효를 바라보며 미심쩍게 물었다. 윤승효는 태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몸이 엉망이라, 제대로 좀 씻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하던 윤승효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문평에게 미안한 듯 웃으며 구석으로 다가왔다.
“물을 다시 채워 놓는다는 걸 잊고 있었네요. 아침에 일이 있어서 그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새로 물을 떠 오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뇨. 별말씀을. ……그런데 아침에 봐도 아름다우시네요.”
항아리를 집어 들던 윤승효가 돌연 느끼하게 속삭이더니, 문평의 어깨에 입을 쪽 맞췄다. 문평은 흐리게 웃으며 항아리를 들고 나가는 그를 배웅했다. 온몸에 얼룩덜룩 정액을 묻히고 있는 데다 눈은 퉁퉁 부어 있고, 게다가 곳곳에 멍이며 순흔으로 물들어 있는데 그 모습조차 예뻐 보인다니 고마운 노릇이다.
‘사람은 참 좋아. 좋은 사람인데……. 아직 어려서 그런가. 무신경한 데가 있군.’
예전에는 몰랐었다. 친구로 사귀기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라 불만을 가질 구석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관계를 맺고부터는 종종 뜻밖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어젯밤의 기름 사건이나 조금 전에 일어난 상황처럼. 윤승효는 가끔씩 자기 본위 이상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실수들을 했고 그럴 때마다 문평은 몹시 당황했다.
본성이 착하고 자상하긴 한데 세세한 부분에까지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 같았다. 젊어서 그럴 수도 있고, 귀하게만 자라 와서 그럴 수도 있다. 태어나서 누군가의 뒤치다꺼리 따위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일 테니, 그런 부분에 대한 감각 자체가 결여되어 있을 수도 있는 거다. 그리 생각을 하면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가는데, 감정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상한다.
아마도 자신이 윤승효에게 가지고 있는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그럴 것이다. 사람을 무슨 천상의 선인인 것처럼 여겼으니 그의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지고도 일일이 놀라게 된다.
“물 떠 왔습니다. 넉넉하게 쓰시도록 닦을 천도 더 얻어 왔으니 필요한 만큼 쓰십시오.”
금세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 온 윤승효가 그의 발치에 항아리를 내려놓았다.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은 건지 부탁하지 않은 천까지도 한 아름 가져온다.
문평은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항아리의 물에 천을 적셨다. 윤승효는 민망하게도 눈도 돌리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문평이 몸을 닦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눈짓으로 고개를 좀 돌려 달라고 부탁해도 알아채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가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서 문평은 뒤처리를 하기가 힘들었다. 다른 사람의 눈앞에서 엉덩이에 손가락을 넣고 정액을 긁어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덕분에 문평은 뒤처리를 대충 할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을 정도로는 닦아 냈으니 일단 수습은 한 셈이다.
나중에 혼자 선실에 돌아와 다시 닦아 내야지. 낮게 한숨을 쉰 문평은 더 이상 처리하는 것을 포기하고 옷을 주워 입었다.
그러니까 윤승효의 이런 부분이, 문평은 참 아쉬웠다.
소양邵陽에서 배를 타고 이틀을 내려가 익양益陽에 닿았다. 익양은 자수와 동정호가 합류하는 지점에 있어 자수 일대의 집산지 역할을 하는 도시다. 동정 호반을 끼고 있는 수운의 중심지여서, 이제껏 들렀던 도시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번화하고 큰 도시이기도 하다.
윤승효 일행은 활기로 가득 찬 익양 나루에 내렸다. 그들은 이곳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동호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우선 식사부터 하고 갈까요? 모처럼 동정호에 왔는데 상채湘菜6)는 맛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행을 이끄는 사람이자 일행의 돈줄이기도 한 윤승효가 활기차게 제안을 한다. 그는 요즘 들어 계속 기분이 좋았는데, 그래서인지 평소에는 하지 않던 관대한 제안도 서슴없이 했다.
보통 때 같았으면 그 제안을 가장 반겼을 사람은 바로 자묘랑이다. 먹는 걸 남달리 좋아하고, 맛난 음식을 먹는 건 더욱 좋아하는 그녀가 아닌가. 하지만 문평과 윤승효가 두 번째로 몸을 섞은 날 이후로 계속 우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는 모처럼의 제안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군요. 점심부터 먹고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작은 아가씨 둘 다 말이 없다 보니 대답을 할 사람은 문평뿐이다. 윤승효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을 안내했다. 예전에도 몇 번 와 본 적이 있는 도시라더니 그 말이 거짓이 아닌지, 일행을 이끄는 발걸음이 거침없었다.
윤승효가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순래객잔順來客棧이라는 간판을 단 커다란 객잔이다. 객잔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름을 가진 덕인지 장사가 무척 잘되는 것 같다. 그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가자 점소이가 힘차게 맞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순래객잔입니다.”
점소이의 영민한 눈동자가 그들의 행색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딱 보기에도 귀티가 잘잘 흐르는 남녀 한 쌍에, 별로 잘나 보이진 않지만 옷만큼은 비단옷을 입고 있는 나머지 일행 둘. 귀한 댁 자제들과 그를 모시는 하인들로 계산을 내린 점소이는 허리가 부러져라 다시 인사를 내뱉으며 힘차게 물었다.
“몇 층으로 모실까요?”
“3층에 자리가 있는가?”
“그러문입쇼. 어서 이리로 올라오십시오.”
일행은 점소이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보통의 객잔들이 그러하듯 이곳에서도 층수에 따라 음식의 가격이 달랐다. 같은 음식이라도 층수가 올라갈수록 비싸지니 가난한 사람들은 감히 높은 층으로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1층은 바글바글하게 손님이 많은데도 3층에는 드문드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의 호화로운 옷차림이 점수를 땄는지, 점소이는 그들을 3층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로 안내했다. 동정 호반이 바로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다.
“이 자리가 저희 가게에서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지금은 날이 흐려서 보이지 않습니다만, 날이 맑을 때는 저 멀리로 군산君山까지 보인답니다.”
자기가 내준 자리가 얼마나 좋은 자리인지를 강조하고 싶은지 점소이가 연신 너스레를 떨어 댔다. 그의 행동이 무슨 뜻인지 잘 아는 윤승효는 웃으며 그에게 은전을 던져 주었다. 말 한마디에 바로 나온 은전에 감격하며 점소이가 입을 헤벌쭉 벌렸다. 이빨이 빠져서 듬성듬성 보이는 빈자리가 어쩐지 해학적이다.
“아이고, 나리. 감사합니다.”
점소이가 호들갑을 떨며 인사했다.
“내가 전에 이곳에서 먹어 본 요리가 있는데, 아직도 그 요리가 되나?”
“되구 말굽쇼. 한데 무슨 요리입니까?”
“동안자계東安子鷄와 홍외어시紅猥魚翅네.”
“아이고. 그 요리들이야말로 저희 순래객잔의 대표 요리지요. 빨리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술도 한 병 주게. 무릉주武陵酒가 좋겠군.”
윤승효의 입에서 문평은 듣도 보도 못한 음식 이름들이 줄줄이 나왔다. 역시 그는 문평처럼 몰라서 못 먹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그냥 자제하며 살았던가 보다.
점소이가 주문을 받고 물러나자 윤승효가 문평을 돌아보았다. 그는 밝게 웃으며 문평에게 말했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예전에 여기에서 먹었던 좋은 술과 요리가 있습니다. 석 형에게도 꼭 맛보여 드리고 싶어 상의도 없이 음식을 시켰는데, 괜찮으시지요?”
같은 일행인데 ‘석 형’에게만 맛보여 드리고 싶었다고 말하니 자묘랑의 표정이 오묘해진다. 문평은 혹시나 싸움이 날까 싶어 얼른 나서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전 호남성에 와 본 것이 처음이라 뭐가 좋은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방금 시키신 요리는 어떤 음식입니까?”
“동안자계는 매운 닭 요리입니다. 닭고기와 고추를 함께 볶고 그 위에 육수를 얹어 내는 요리인데 달고 맵고 시고 짜고 부드러우면서도 바삭바삭해 색다른 맛이 나지요. 홍외어시는 강에서 잡히는 상어의 지느러미로 만드는 요리입니다. 깔끔하지만 별미라 두고두고 기억이 나실 겁니다.”
자묘랑은 유달리 문평에게만 친절한 윤승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악을 쓰거나 화를 내지도 않고 그저 고요하게.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인다. 그악스럽게 기가 센 아가씨가 어쩐 일로 이렇게 조용한 걸까. 하루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벌써 이틀이 넘도록 같은 상태다. 이대로 놔둬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실례합니다. 아는 분이신 것 같아 여쭙습니다. 형장께서는 혹시 화협花俠이 아니신지요?”
도무지 맥을 못 추고 있는 자묘랑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던 문평은, 낯선 사람이 윤승효를 아는 척하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3층으로 올라와 자리를 찾던 일행이 어느샌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훤칠하게 키가 큰 남자와 곱게 생긴 여인 하나. 문평의 일행처럼 둘 다 아름다운 비단 옷차림이다.
“누구신지?”
“제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예전에 산음山陰에서 뵌 적이 있지요. 화산의 황서종況瑞琮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인제 보니 난삼릉蘭森陵 황서종 소협이셨구려. 일찍 알아 뵙지 못해 미안합니다.”
난삼릉 황서종은 매화검수梅花劍手로 이름 높은 화산의 젊은 고수다. 문평은 그의 이름을 듣고 황서종의 소매를 살펴보았다. 과연 그의 소매에는 매화검수를 뜻하는 열두 개의 매화가 찬연히 빛났다.
그의 옆에 있는 여인도 마찬가지로 화산 출신인지 소매에 매화가 수 놓여 있다. 여인의 소매에 드러난 매화는 모두 열 개. 일설에 의하면 화산파가 제자들의 소매에 나타내는 매화의 개수는 매화이십사수梅花二十四手를 시전할 때 만들 수 있는 매화의 개수라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젊은 나이에 벌써 열 개의 매화를 만들어 낼 정도의 고수라는 이야기다. 아마 그녀도 화산 고인의 제자겠지.
“이쪽은 제 사매인 상화빈上嬅斌입니다. 인사드려라. 이분이 바로 화협으로 이름 높으신 윤승효 대협이시다.”
“윤 대협께 인사드립니다. 화산의 상화빈입니다.”
“윤승효입니다. 운이 좋다 보니 화산의 자랑인 난삼릉 소협과 사란娑蘭 소저를 한꺼번에 만나는군요.”
다소곳이 절을 하는 상화빈을 향해 윤승효는 웃으며 포권을 했다. 난삼릉과 사란이라. 소문에 두 사람이 장래를 기약한 사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선남선녀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몹시 정겨워 보였다.
난삼릉 황서종이 난삼릉이라는 별호를 얻은 것은, 상화빈의 아버지이자 현재 화산파의 장문인이기도 한 매화고영梅花孤影 상일겸上一兼에게서다.
황서종은 겨우 약관의 나이로 매화검수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격 관문인 소요관을 통과한 젊은 천재였다. 그가 매화검수의 자격을 얻고 동문들 앞에서 특기인 매화삼릉검梅花三凌劍을 펼쳐 보였을 때, 그의 검에서는 화산 특유의 매화 향기 대신 은은한 난향이 났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상일겸은 무릎을 치며, 넌 매화나무가 아니라 난이 우거진 언덕蘭森陵이 되겠구나 하고 감탄을 했다. 그래서 그의 별호는 난삼릉이 되었다.
반면에 어려서부터 자태가 유달리 고왔던 상화빈은 개방의 고수로부터 춤추는 난초娑蘭 같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게 세간에 알려지면서 별호가 사란이 되었는데, 매화 어쩌고 하는 별호가 만연한 화산에서 난초라는 별호를 가진 두 사람은 유달리 이질적으로 눈에 띄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세인들의 이야기 속에 자주 묶여서 등장하곤 했고, 그 영향이 본인들에게까지 끼쳤는지 아예 연인이 되어 버렸다.
“제 일행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아이들은 우연히 알게 되어 무한까지 동행을 하게 된 아이들인데, 자옥과 자묘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제 집안사람인데, 이름은 관량입니다.”
윤승효가 문평을 가리켜 자신의 집안사람이라고 하자, 황서종은 무슨 추측을 했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권문세가인 윤승효의 본가에서 딸려 보낸 사인使人쯤으로 추측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합석하도록 하지요. 마침 저희도 요리를 막 시킨 참이었습니다.”
먼저 아는 척을 하고 인사를 해온 사람들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는지 윤승효가 합석을 권했다. 황서종과 상화빈은 사양하지 않고 그들의 자리에 함께 앉았다. 얼마 안 있어 요리가 등장했고 술도 나왔다. 분위기는 한결 편안해졌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개양에서 윤 대협께서 하신 일에 대해 듣게 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대협의 의기를 남몰래 흠모하고 있던 차였는데, 이렇게 공교롭게도 대협을 만나 뵙게 되다니 이 또한 보통의 인연은 아닌 듯합니다.”
순후한 태도로 황서종이 말했다. 개양의 일이라면 지금으로부터 열흘도 안 되는 일인데, 벌써 황서종이 알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윤승효도 그게 궁금했던지 의아한 얼굴을 하고 황서종에게 물었다.
“과찬이십니다. 의기라니요. 그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는 척할 수 없었던 것뿐인 것을요. ……그런데 그 일을 황 소협께선 어찌 아셨습니까? 아직 며칠 되지도 않은 일입니다만.”
윤승효가 궁금해하자, 황서종이 상세히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윤 대협께서 뒤처리를 부탁하신 개방에서 정도맹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아니라도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이야기지요. 윤 형께서 개양을 떠나신 후 당문과 개방이 같이 근거지를 습격했습니다. 그 일로 서른이 넘는 당문도가 죽고, 당문오독 중에서도 둘이나 희생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개방도의 피해는 더욱 커서 사망한 문도가 거의 이백이 넘었는데 이런 큰일이 어찌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희생이 그렇게 컸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두 구했다고 합니까?”
“다 구하지는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개방의 협개들이 본인들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노력했으나 겨우 300여 명을 구한 정도가 전부랍니다. 더군다나 생강시는 몇 구 파괴하지도 못해서, 적들이 물러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군요.”
대외적으로 윤승효는 모종의 단체에 의해 생강시가 만들어진 것을 보고하기 위해 무한으로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생강시를 만드는 자들을 추적하여 근거지를 발견한 것이 그였고, 개방과 당문에 사실을 알려 아이들을 구하도록 한 사람도 그였기에 보고를 할 만한 사람도 그밖에 없었던 것이다.
“큰일이군요. 그 생강시들은 저도 겪어 봤지만,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면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무섭고 독랄했습니다.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하면 차후 피해가 커질 것인데, 어찌 될는지 모르겠군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심지어는 피까지 극악한 독이라 당문조차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걱정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린패 때문에 강호가 혼란한 판인데 그에 더해 생강시까지 나타나다니요. 아무래도 암중에 숨어 혼란을 조장하는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황서종은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늦되군.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눈치채다니.’
천마는 마음속으로 혀를 끌끌 찼지만 겉으로는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황 소협께서는 호남에 어쩐 일이십니까? 화산에도 혹시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황서종은 매화검수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무공을 가진 자로, 차기 화산 장문인으로까지 거론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이런 시기에 이유도 없이 호남에 와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천마는 은근히 그를 떠보았다. 별로 반갑지도 않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초대한 것도 그가 이 자리에 나타난 연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천마의 질문에 황서종은 슬쩍 얼굴을 붉혔다. 그는 다소 난감한 기색으로 볼을 긁다 어쩔 수 없는 듯 입을 열었다.
“그는 개인적인 일이라……. 실은 사매가 아미산에 가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동문 사형제처럼 지낸 친한 친우가 아미에 있어 잠시 다니러 갔던 것인데, 갑자기 강호의 사정이 이렇게 혼란해지니 홀로 돌아오는 것이 불안해 마중 나온 것입니다. 팔불출이라 욕하지 마십시오.”
팔불출이 맞았다. 어이없는 진실을 들은 천마는 기가 막혔다. 차기 화산 장문인으로 일컬어지는 놈이 기껏 약혼자의 안위가 걱정돼 이 중요한 시기에 본산을 비워 두고 뛰쳐나오다니. 그게 제정신을 가진 놈이 할 짓인가?
본인 역시 곽효의 뒤를 쫓는 중차대한 일을 하는 와중에도 문평의 안위가 걱정돼 곁에서 떼어 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팽개쳐 두고서, 천마는 괜히 황서종만 욕했다.
진짜 별것도 아닌 일이다. 혹시나 쓸 만한 정보라도 얻어들을까 기대했더니만. 문평과 오붓하게 맛있는 술과 음식을 즐길 생각이었던 천마는 별 소득도 없이 불청객만 얻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괜한 짓을 했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래도 저는 사형께서 마중 나와 주셔서 안심되던걸요. 여기저기에서 흉흉한 일이 적지 않은 판국이라 내심 겁이 났었거든요. 더군다나 호북에선 지금 한창 기린패 때문에 피바람이 불고 있다고 들었어요. 옥기린 대협께서도 그 와중에 휘말려 다치셨다던데요. 그처럼 무공이 높으신 분께도 위험한 길이니 저 같은 것 따위가 혼자 걷긴 두렵지요.”
소매에 매화를 열 송이나 피워 올리고 있어도 상화빈은 다소곳한 규수인 모양이다. 그녀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면서도 조곤조곤 제 정혼자의 편을 들었다.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술잔을 기울이던 천마의 손이 멈칫 굳었다. 말없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며 닭 요리를 먹던 문평의 안색도 달라졌다.
‘뭐, 뭐라고? 옥기린이 다쳤다고?’
그들은 깜짝 놀라 동시에 상화빈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옥기린 대협께서 다치셨다고요?”
천마는 침착하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물었다. 황서종은 놀란 듯 눈을 치켜뜨며 그의 의문에 답했다.
“윤 대협께서는 그 일을 모르셨습니까? 벌써 소문이 파다한데요. 이틀 전, 정도맹으로 남하하시던 옥기린 대협의 일행이 암습을 당하셨습니다. 옥기린을 수행하던 청혈단淸血團의 절반 이상이 죽거나 다쳤고 옥기린 대협께서도 거동이 힘드실 정도의 부상을 입으셨다고 합니다. 지금 대별산大別山에 고립되어 계신데, 정도맹에서 급히 구원군을 출동시켰지만 아직 당도하지는 못했다 들었습니다.”
못 들었다, 그런 이야기. 미리 들었으면 이렇게 한가하게 밥이나 먹으러 오지는 않았겠지.
천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그의 맞은편 창가 쪽에서 밥을 먹고 있는 화복 중년인에게 강하게 전음을 보냈다.
“승효!!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전음을 받은 사람은 아마도 고막이 터져 나가는 것과 같은 충격을 느꼈을 터였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런 항의도 내뱉지 못했다. 옥기린의 일은 물론이고, 강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중요한 일들에 대한 정보를 천마에게 전달해야 하는 소임을 맡고 있던 화복 중년인은 얼굴이 새파래진 채 더듬더듬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지난 이틀간은 바깥에서 연락을 주고받지 못해 이 일을 미리 알지 못했습니다.”
윤승효도 천마와 마찬가지로 지난 이틀간을 배 안에서 보냈다. 여객선 안에서는 바깥으로 따로 연락을 할 방법이 없었고, 윤승효는 어쩔 수 없이 그 시간 동안 고립되어 있었다. 한데 하필이면 그 사이에 옥기린의 신변에 변고가 생겼단다. 우연치고는 참 더럽게 운 나쁜 우연이다.
“이게 죄송하다고 하면 끝날 일인가? 당장 나가서 옥기린이 정확히 어떤 처지인지 알아 와!!”
“알겠습니다.”
여유를 부리고 어쩌고 할 상황이 아니다. 자칫하면 천마의 노여움이 그에게로 다 쏟아질 판이다. 화복 중년인으로 변장한 윤승효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가 무전취식하고 도망간다고 생각했는지, 점소이가 깜짝 놀라며 그를 따라 나갔다.
“아이고 손님!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길게 꼬리를 무는 점소이의 목소리가 우스꽝스러웠지만, 천마의 얼굴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는 핏기가 사라질 때까지 주먹을 꽉 쥐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생강시의 일을 이렇게 복수한단 말이지? 내가 이번 일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짐작한 것이냐, 곽효?’
천마의 눈동자에 차디찬 한기가 흘렀다. 천마가 곽효를 아는 만큼, 곽효도 천마를 안다. 천마는 곽효가 자신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런 무리수를 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강시의 일은 곽효가 마지막까지 숨겨 두고 있던 비장의 패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것을 천마가 찾아내 일찍부터 드러나게 했으니, 곽효가 분을 참지 못하고 옥기린을 건드린 거고.
천마 자신을 끌어낼 수 있는 단 하나의 패인 옥기린에게 한 짓을 보면, 곽효가 이번 일로 얼마나 노여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결국 한 번씩 주고받은 셈이다. 서로의 꼬리를 무는 두 마리 뱀처럼 얽혀 있는 두 사람은 악연 중에도 지독한 악연이었다.
한편 문평 또한 옥기린의 소식을 듣고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교에서 두 번째로 받은 지령이 바로 ‘옥기린의 일행에 합류하라’였기 때문이다. 옥기린이 중간에 죽어버리면 그는 정말로 할 일이 없어진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따로 떨어져서 혼자서라도 옥기린을 찾아가야 하나?’
임무와 상황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문평의 얼굴엔 짙은 고뇌가 흘렀다. 솔직히 가기 싫지만, 가라고 하면 갈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마교와 그 사이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냐?”
대충 자리를 수습하고 몸을 일으킨 천마는 배편을 구해 온다는 핑계로 객잔을 빠져나갔다. 조금 전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있던 윤승효는 천마가 객잔을 나서자 발걸음을 재촉해 그를 따라갔다.
그들이 다시 자리를 잡고 마주 앉은 것은 순래객잔에서 조금 떨어진 또 다른 객잔 안이다. 윤승효가 짐을 풀고 있는 그곳은, 순래객잔보다 작고 초라하지만 방음이 튼튼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황서종의 정보가 거의 정확합니다.”
천마의 질문을 들은 윤승효는 자신이 알아 온 바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틀 전, 무한으로 내려오고 있던 옥기린 일행이 대별산 근처에서 의문의 적과 조우했습니다. 정체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초절정 고수인 옥기린을 상처 입힐 정도라면 전대의 고수나 은거기인이 합류한 일행일 겁니다.
상대의 합격진에 말려든 옥기린 일행은 대패해 대별산으로 숨어들었는데, 옥기린은 그 와중에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고 동료의 등에 업혀 떠났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정도맹과 옥기린의 사문인 무당에서 구조대를 급파했습니다. 옥기린의 사형인 현양도인鉉壤道人이 제자들까지 끌고 갔다는데, 그 일행은 아직 대별산에도 도착을 못 했답니다.”
호남과 호북 간엔 거리가 있어 그가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그게 다였다. 대별산의 상황을 주목하고 혹시 변경되는 사항이 있으면 자신에게 즉시 알리라 이르고 오긴 했지만, 전서구가 나는 속도를 감안해 봐도 여기서 받는 정보는 옥기린을 위험에서 구하는 데 별 소용이 없다.
천마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천마의 의손자인 윤승효는 옥기린과 천마의 관계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 정확한 사정은 몰라도 둘이 놀랍도록 닮았으니 서로 간에 혈연관계가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윤승효가 알기로 천마는 혈혈단신의 존재인데, 옥기린이 정말 천마의 혈육이라면 그는 천마에게 있어 단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기도 하다. 천마가 결코 외면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 그러나 천마 혼자라면 몰라도 일행 전체를 이끌고는 제시간에 도착할 방법이 없었다.
“승효야.”
짧지 않은 시간, 고민에 잠겨 있던 천마가 승효의 이름을 불렀다. 윤승효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백조부의 부름에 답했다.
“네. 백조부님.”
“……너는 당분간, 네 본모습으로 돌아와 내 일행들을 호위해라. 내가 떠나 있는 동안 그들을 무사히 무한까지 데려가는 게 네 임무다.”
천마는 일행을 이끌라는 말 대신 ‘호위하라’라는 말을 썼다. 그가 ‘호위’하라고 하는 사람이 누군지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 윤승효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윤승효’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는 문평은 그에게 껄끄러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 내 명을 거역할 생각이냐?”
윤승효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이유를 뻔히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천마는 냉랭히 그를 윽박질렀다. 윤승효는 울상이 됐다. 백조부님의 첩이니까 거의 백조모님뻘. 졸지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항렬이 같은 사내를 모시게 생겼다.
항렬이야 윗사람을 따르게 마련이니 젊은 백조모님을 모시게 된 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사람이 바뀐 것을 감추기 위해서는 예전과 똑같이 행동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지난 이틀간 천마가 그랬던 것처럼 문평의 침상을 파고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런 짓을 했다간 천마에게 맞아 죽을지도 몰랐다.
‘나더러 이 상황을 어찌 수습하라고?’
윤승효는 갈피를 잡지 못하며 천마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백조부님? 제가 그분을 어찌 대합니까?”
손끝 하나 댄 걸 가지고 두고두고 우려먹는 양반이니 자칫 잘못하다간 시키는 일을 하고도 봉변을 당할 수 있다. 윤승효는 천마에게 정확한 지시 사항을 요구했다. 따로 욕먹을 일 없게 딱 거기에만 맞춰 행동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오늘 배를 타게 되면 선실부터 따로 잡고, 당분간 모르는 척 멀리 떨어져 있어라. 그것만 지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상관없다.”
천마는 의외로 순순히 그의 행동 사항을 결정해 주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윤승효는 의문이 생겼다. 그렇게 행동했다간 일이 제대로 틀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원래는 안 그러셨지 않습니까?”
“안 그랬었지.”
“한데 그래도 됩니까?”
“윤승효는 원래 변덕스러운 인간이다. 겉으로는 군자인 척하지만 지나치게 곱게 자라서, 쉽게 얻은 것엔 쉽게 질리지.”
“…….”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은, 나더러 그분을 질리게 해서 떨쳐 내라 그 이야기지? 나만 나쁜 놈 만들고, 나한테만 나쁜 짓을 시켜서?’
대강의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한마디로 눈치채 버린 윤승효는 아연해졌다. 아무리 심술궂은 천마라지만 이건 너무 비열하다. 대놓고 엿을 먹이는 것과 뭐가 다른가. 어쩐지 ‘외도’하는 상대를 곱게 봐준다 했더니만, 속으로는 단단히 벼르고 있긴 했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갑자기 그러면 이상할 텐데요. 혹시 눈치를 채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사람이 바뀐 걸 그분이 알아채기라도 한다면요?”
윤승효가 소심하게 반항해 보았다. 아무리 따져봐도 이건 자기에게 너무 불리한 명령이다. 문평은 ‘외도’를 해도 다시 받아들여지는 엄청난 총희다. 그동안 천마가 그에게 들인 공을 생각해 본다면, 앞으로도 꽤 길게 천마의 곁을 지킬 사람일 게 분명하다.
그런 사람한테 내가 왜 밉보여야 하는가? 윤승효의 고민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사내는 첩에게 미치면 치마폭에 나라까지 쓸어 바치는 법. 당대의 권력자가 될지도 모르는 문평의 눈 밖에 나는 건 윤승효가 바라는 일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지 않도록 네가 잘해야지.”
그러나 천마는 윤승효의 사정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키워 주고, 무공 가르쳐 주고, 필요할 때마다 금은보화를 덥석덥석 집어 줬으면 그 값을 해야지?”
천마는 온화하게 웃으며 윤승효를 바라보았다. 그간 받아먹은 게 많고 지은 죄도 많은 윤승효는 그런 천마에게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냥 잘, 입니까? 윤승효는 눈으로 물었다. 천마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응. 그냥 잘.”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잘하는 수밖에. 천마는 말이 먹히는 상대가 아니었다.
***
호남湖南과 호북湖北. 이 두 개의 성省의 이름 앞에 들어가는 글자 호湖는 바로 동정호洞庭湖를 일컫는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물길이 도합 팔백 리. 두 개의 성 사이에서 자연적인 경계를 만드는 거대한 호수는 거의 바다라고 해도 좋을 만큼 크고 넓었다.
“정도맹으로 급히 가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유람선을 타고 가는 거지요?”
문평은 급행선까지는 못 타더라도 일반적인 여객선은 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윤승효가 뜻밖에도 유람선 선표를 가져오자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를 바라보았다.
“급하니까 유람선을 타는 겁니까. 이래야 안전할 테니까요.”
윤승효는 가끔 그러듯 생뚱맞은 말로 말문을 열었다. 문평이 선뜻 이해하지 못하자, 그는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 문평에게 설명해 주었다.
“황 소협의 말씀을 들으셨지요? 지금 강호에는 암중에서 남몰래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있습니다. 기린패의 일도 아마 그들의 소행일 것이고, 저번에 겪었던 생강시 사건 역시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던 문평은 아무런 내색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우리가 지금 정도맹으로 데리고 가는 자옥은 바로 그 생강시 사건에 대해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증인입니다. 적들이 만약 자옥의 존재를 안다면 필시 뒤를 쫓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천천히 가는 겁니다. 정도맹으로 가는 길을 감시하고 있을 그들의 눈을 혼란시켜야 하니까요.”
실은 천마가 대별산의 일을 해결하고 돌아올 때까지 일행의 발걸음을 늦추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지만, 윤승효는 가능한 한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지어내 문평을 현혹시켰다.
문평은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것도 괜찮은 방법 같다. 정말 적들이 자옥을 노린다면 그 아이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 말이다.
“자, 이것을 받으십시오. 이게 선표이고, 이건 선실의 열쇠입니다. 각자 방이 다르니 배에 타는 동안은 직접 보관하셔야 합니다.”
윤승효가 문평에게 선실의 열쇠와 선표를 건네주었다. 문평의 우려와는 달리 이번에는 각각 다른 선실을 쓰게 되는 모양이다. 문평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어 선표를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하마터면 잡지 못할 뻔했다. 손이 마주 닿는 것을 꺼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윤승효가 허공에서 물건을 놓아 버렸기 때문이다.
‘뭐지?’
손이 빨라 다행히 물건을 떨어트리지는 않았지만 윤승효의 기이한 행동은 묘하게 기억에 남았다. 문평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기 몫의 물건을 챙겼다.
윤승효는 자묘랑에게도 열쇠를 건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평은 그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한데 이번에는 자신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그냥 자연스럽게 물건을 건네주는 게 보였다. 아까처럼 신경 쓰고 있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건을 받고 나서 나루터로 향했다. 배는 이미 정박해 있었다. 유람선이라서 그런지 유달리 유복해 보이는 사람들만 배 위로 오른다. 그들도 줄을 서서 배 안으로 들어갔다. 돈을 아끼지 않은 윤승효 덕에 그들의 선실은 배 안에서도 가장 좋은 객실을 차지할 수 있었다.
동정호에서 새로 타게 된 유람선은 익양에서 탔던 여객선보다 훨씬 크고 안락했다. 말 그대로 동정호를 유람하는 유람객들이 몸을 싣는 배이기에 선실만도 수십 개가 되고, 그 모두가 고급 객잔처럼 깔끔히 꾸며졌다.
문평은 자신의 몫으로 떨어진 선실로 들어와 짐을 풀었다. 그러고 나니 할 일이 없다. 침상에 걸터앉은 그는 윤승효가 자신에게 주었던 선표를 내려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실은, 윤승효가 선표를 사서 돌아왔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다. 처음에는 이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기묘한 위화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덩치를 키워가며, 그의 기분을 흔들어 놓았다.
‘……이게 대체 뭐지? 이상하네. 전에도 분명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까슬까슬하게 불편한 감각이 그의 피부 위를 뒤덮었다. 손가락 끝에 가시가 든 것 같고, 눈 속에 모래알이 낀 것 같다.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인 느낌이 그의 마음을 성가시게 했다. 아직 배가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뒤집힌다. 어지러운 감각의 혼란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감정을 예전에도 한 번 느껴 본 적이 있었다. 문평은 자신이 이 감각을 언제 또 느꼈었는지 정확히 기억했다. 그때의 일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마치 쑥뜸을 뜨고 난 자리처럼, 당시의 감정은 사라졌지만 그런 느낌이 있었다는 기억은 흔적으로 남았다.
그날, 그 의원에서. 사지에서 돌아온 사람을 보고서도 전혀 반가워할 수 없었던 그때의 기분이 다시 한번 돌아와 문평을 붙들었다. 같은 사람,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인데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명확히 꼭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무언가가 달라진 느낌. 그때보다 이질감은 오히려 더 거셌다. 그의 본능이 경고라도 하듯 빠르게 깜빡인다. 뭔가가 잘못됐다. 뭔가 이상하다. 그의 본능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문평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술렁이는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자신이 왜 이런 감정에 시달리고 있는지 그 원인이라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그것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유람선 위에서 맞이하게 된 첫 번째 저녁 식사는 무척이나 호화로웠다. 요리가 맛있기로 유명한 일급 객잔의 숙수가 유람선에 탑승해 음식을 하는 까닭에, 배 위에서도 신선한 재료로 즉석에서 만든 훌륭한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윤승효의 방에 차려진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네 사람은 갓 잡은 잉어로 만든 잉어 꼬리찜과 해산물로 만든 맑은 탕국 요리를 앞에 두고 있었다. 모든 재료가 동정호에서 막 잡아 올린 것이기 때문에, 음식의 신선도는 내륙에서 먹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차이가 났다.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자옥까지도 맛있는지 젓가락을 놓지 않을 정도인데, 자묘랑은 그저 깨작깨작 젓가락으로 생선의 살을 헤치기만 할 뿐 별반 먹는 기색이 없었다.
“생선 요리를 싫어하십니까?”
그 모습을 보다 못했는지 윤승효가 끼어들었다. 자묘랑은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젓가락으로 생선 뼈를 골라냈다. 그녀는 살을 먹지도 않을 거면서 씹히지도 않을 잔가시들을 일일이 골라내는 수고스러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접시 한편엔 괜히 생선 가시들만 수북이 쌓였다. 밥그릇의 밥은 한 톨도 줄지 않은 채였다.
“생선이 싫으면 다른 요리를 시켜도 됩니다. 먹고 싶은 걸 시키도록 하세요.”
‘줄곧 자묘랑이 거기 있는 걸 눈치도 못 채는 것처럼 굴더니 어쩐 일일까? 역시 사흘이나 제대로 안 먹고 있는 게 걸리는 건가?’
보호하고 있는 일행을, 그것도 어린 여자애를 줄곧 굶기고 있다는 생각에 불편해하고 있던 문평은 윤승효의 참견이 반가웠다. 자묘랑에게 무언가를 권할 수 있는 사람은 일행 중에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에요.”
자묘랑은 억누르듯 말하며 젓가락으로 툭, 생선 가시를 쳐 냈다.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들은 익히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녀는 어둑한 시선을 들어 윤승효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자 소저?”
“한번 선택을 한 것 말이에요. 그렇게 간단하게 져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선택을 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말 아닌가요?”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그녀가 이야기하고 있는 건 요리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식사 자리에서 나온 느닷없는 본론에, 문평은 당황하며 윤승효를 돌아보았다. 윤승효는 담담한 시선을 들어 자묘랑을 바라보았다. 온화하게 무시하던 예전과 다르게 지금의 그는 자묘랑을 똑바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마음을 바꾸죠? 자신이 예전에 했던 선택에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심지어는 그 선택의 눈앞에서.”
자묘랑은 혼잣말처럼 말하더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못되고, 이기적이고, 건방진 그녀지만 단 하나뿐인 사랑 앞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녀는 진실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이 묶인 사랑 앞에서 그녀는 철저히 약자일 수밖에 없는 신분이었다.
사랑의 상처가 그녀를 부수고 그녀의 자존심을 마모시켰다. 부서지고 깨진 그녀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만만할 수 없었다. 어째서 사랑을 잃어야만 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지금의 고통도 납득할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아파야 하는 이유를 진실로 궁금히 여겼다.
“전 정말로 궁금해요.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왜 이렇게 내게 심하게 구는 거죠?”
고개를 숙인 자묘랑은 호소하듯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윤승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진한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이 자리를 피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문평은 진지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고민했다. 두 사람 사이에 숨겨진 사연이 있을 거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던 바다.
처음에는 무조건 모른다고 잡아떼는 윤승효의 말을 믿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간 윤승효가 보인 행동들은 도저히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할 법한 것들이 아니다.
상대가 오해할 걸 뻔히 알면서 애매하게 행동할 사람이 아닌데, 윤승효는 상대가 자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묘랑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을 어느 것도 받아 주지 않으면서도 그녀를 내치지 않았다.
눈치가 빤한 것은 자옥도 마찬가지다. 모처럼 맛나게 밥을 먹던 자옥은 분위기가 어두워지자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문평은 자옥을 바라보며 눈으로 물었다.
‘우리 나갈까?’
자옥이 모처럼 그의 뜻에 동의를 표해 왔다.
‘네. 나가요.’
문평은 그녀와 함께 식사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의 섣부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윤승효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손을 잡힌 문평은 굳은 얼굴을 하고 윤승효를 바라보았다. 윤승효는 그 손을 끌어당기며 그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윤승효의 의지가 워낙 확고한지라, 문평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도망치는 데 실패하자 자옥도 몸을 빼지 못했다. 의자에서 힘들게 내려왔던 자옥은, 힘들게 다시 낑낑거리며 의자 위로 올라갔다.
“이유를 말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까?”
윤승효가 자묘랑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자묘랑은 고개를 들었다. 윤승효와 문평이 손을 마주 잡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쪽은 내려다보지 않고, 꿋꿋하게 고개를 들고 윤승효의 눈만을 마주 바라본다. 윤승효는 다시 말했다.
“그러면, 포기할 건가요?”
윤승효의 물음을 들은 자묘랑이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그걸 원하는 건가요? 당신이 제게 원하는 것은 정말로 그것밖에 남지 않은 건가요?’
자묘랑은 윤승효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물었다. 하지만 매정한 남자는 그녀의 말 없는 질문에 아무런 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한참 동안 말없이 고민하던 그녀는 마침내 마음을 가다듬고 그의 질문을 긍정했다. 더 이상 구차해지는 게 싫었다. 눈앞에서 다른 사람을 안을 정도의 사람에게 계속 미련을 가지는 것도 더는 못 할 노릇이다…….
없는 용기를 간신히 끌어모아서 한 결심이었건만, 윤승효는 그녀의 힘겨운 결심을 가볍게 비웃었다.
“핑계를 원합니까? 당신이 저를 포기할 수 있는 그럴듯한 핑계를요? 제가 그에 대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공해 주길 바라나요?”
서리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자묘랑의 마지막 남은 마음까지 얼어붙게 했다. 자묘랑은 신음을 삼키며 윤승효의 이름을 불렀다.
“윤 가가…….”
“제가 한마디를 더 한다 한들, 혹은 안 한다 한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당신의 감정은 당신 것이잖습니까. 그 마음을 어떻게 정리하든 제가 알 바가 아니지요. 모든 것은 온전히 당신의 몫입니다. 거기에 제가 참견할 이유는 없습니다.”
윤승효는 매정하기 짝이 없게 말했다. 그를 포기할 수 있도록,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 단 한 가지만 말해 달라고 매달리는 그녀에게 윤승효는 그조차도 할 수 없노라 잘라 버린 것이다.
충격받은 자묘랑의 입술이 떨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조차 내팽개치고 매달렸는데, 그것을 거절당했다. 사랑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돌아와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저 왜 나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물어봤을 뿐인데.
윤승효는 그 대답을 돌려주는 것마저도 거부했다.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 사람을 붙들어서 옆에 앉히기까지 하며.
오로지 그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정말 매정하시군요. 제게 단 한 올의 마음조차 남아 있지 않나요. 아무 상관이 없는 낯선 이에게라도 이렇게 차갑지는 않을 텐데요. ……나는 당신을 모르겠어요. 한때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모르겠어요.”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소녀다운 생기가 모두 빠져나가 버린 그녀의 얼굴은 서글픈 것을 넘어 지쳐 있었다. 슬프게 고개를 가로저은 그녀가 일어서서 방을 나갔다. 잠시 눈치를 보던 자옥도 따라서 방을 나갔다.
윤승효는 자리를 떠나 버린 연인의 뒷모습을 아프게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지금의 그에겐 그럴 자격마저 없었다.
그가 왜 대답하는 것을 거부했는지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윤승효는 허탈하게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끝까지 그가 매정하게 굴었다고 생각할 뿐, 그가 겁을 내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눈을 바라보면 알았을 텐데. 예전처럼 그의 눈이 하는 말을 읽었으면 제대로 이해했을 텐데 말이다.
윤승효는 그녀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자신을 떠날 수 있는 이유를 말해 주는 것을 거절한 거였다.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면 그녀가 진실로 떠나 버릴 것 같아서. 자신이 그녀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는 오해를 한 채 그의 마음을 잊을 것만 같아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 매정하게 대했지만, 그녀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떠나려는 상대를 그렇게밖에 잡을 수 없는 바보 같은 남자가 된 윤승효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깊은 신음을 흘렸다.
지금처럼 백조부님이 원망스러운 순간은 없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이 순간만큼은, 천마가 너무나 밉고 원망스러웠다.
“……넌 누구지?”
스릉. 도가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자묘랑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을 괴로워하느라 잠시 방심했던 윤승효는, 자신의 목에 들이대진 도신의 차디찬 냉기를 느끼고서야 문평이 자신의 목에 도를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흠칫 굳은 그의 목에서 옅은 핏물이 배어 나왔다. 단순한 경고를 넘어, 진짜로 상대의 목을 베겠다는 의지가 담긴 날이 새파랗게 도기를 뿌렸다.
눈치챘나. 윤승효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눈만 돌려 곁눈질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한기가 풀풀 흩날리는 얼굴로 문평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평의 두 눈에서 살기가 스쳤다.
“넌 누군데 윤승효의 흉내를 내고 있지?”
문평이 살벌한 음성으로 그를 추궁했다.
“너는 그 사람과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는 거지? 심지어는 눈동자의 색깔마저도?”
설마 했는데 확실했다. 문평은 그의 정체를 정확하게 눈치채고 있었다. 진짜 윤승효를 가짜 윤승효로 착각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가 천마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알았을까?’
윤승효는 내심 궁금해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지? 모든 것이 완벽했을 텐데.”
윤승효는 진짜로 그것이 궁금했다. 천마의 역용은 완벽했다. 그가 윤승효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자묘랑도 몰랐고, 그의 부모도 몰랐다. 심지어는 평생 동안 천마와 벗한 외할아버님도 알아보지 못했다. 한데 문평은 그 역용을 고작 반나절 만에 꿰뚫어 보았다. 무슨 비결이 있는 게 분명했다.
“네 역용은 모든 게 완벽했지만 한 가지를 놓쳤어. 눈동자 색깔까지 바꿨지만 굳은살만큼은 미처 지우지 못했더군. 진짜 윤승효의 손엔 굳은살이 없어. 그의 손바닥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부드럽지.”
문평은 차갑게 웃으며 칼날을 더 깊게 밀어 넣었다. 경동맥의 바로 위,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동맥을 흐르는 피가 분수처럼 흐를 그 자리에 칼날을 갖다 댄 문평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윤승효를 채근했다.
“말해. 너는 누구야?”
못내 궁금해하던 비결을 드디어 알게 된 윤승효가 웃으면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이거야 원, 졌다. 설마하니 이 완벽한 역용에 그런 약점이 있었을 줄이야.
“내가 윤승효야.”
‘백조부님. 날 탓하지 마세요. 저 사람이 우리 정체를 알아차린 것은 백조부님 때문이었어요.’
윤승효는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천마에게 사과했다. 그렇지만 조금 전에 자묘랑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별로 미안하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내가 진짜 윤승효지. 오히려 가짜는 자네가 알고 있는 그 사람 쪽이야. 그 사람이 한동안 내 행세를 하고 있었거든.”
윤승효는 충격적인 고백을 하며 빙그레 웃음 지었다. 놀란 문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대가 거짓말을 한다고 믿고 싶었지만, 아니었다. 자신만만하게 미소 짓고 있는 윤승효는 자기가 진짜라고 말하고 있었고, 문평은 직감적으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사람이 진짜 윤승효다. 문평은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손에 굳은살이 있는 남자. 무인다운 손을 가진 남자. 그리고 어쩌면, 자묘랑의 연인일지도 모르는 남자.
‘그럼 누구지?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내가 이제껏 윤승효라고 알고 있던 그 사람은?’
혼란에 빠진 문평은 까마득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귓속에서 지독한 이명이 울었다. 물에 막 빠진 사람처럼 주변의 상황을 인식할 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주위 공기가 압도적인 무게가 되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믿을 수 없는 진실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의 사랑은, 그가 난생처음 느꼈던 그의 첫사랑은 진짜가 아니었다. 그는 사랑에 빠졌지만,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5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