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문평은 하마터면 앞으로 곤두박질할 뻔한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긴 하품을 했다. 따뜻하고 조용한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자꾸만 졸음이 왔다. 어제 너무 무리를 해서인가. 제대로 누워 잠깐 눈을 붙였는데도 불구하고 피로가 가시지 않는다.
‘이렇게 태평하게 졸고나 있을 때가 아닌데.’
문평은 입맛을 다시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 계곡을 따라 사라진 윤승효에게서는 여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의원을 찾아오지 못할까 싶어 일부러 머물던 객잔에까지 돌아가 연락처를 남기고 왔는데, 그는 물론이고 그가 돌아오면 연락을 주겠다던 객잔에서도 소식이 없다. 그런 걸 보면 윤승효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지금도 계속해서 그들을 쫓고 있는 것일까? 설마 또다시 건예자인지 뭔지 하는 것들과 맞닥트린 것은 아니겠지?’
문평은 윤승효의 안부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다.
“역시 그때 따라갔어야 했어.”
문평은 윤승효에 대한 걱정을 이기지 못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시에는 혹시나 자신이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어 그의 발목을 잡을까 봐 따라나서지 못했던 것인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무리 그래도 그냥 따라갔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윤승효를 위해서라도 그랬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거추장스럽다는 말 따위 모르는 체하고 그냥 눈 딱 감고 따라갈걸. 이렇게 뒤에 앉아서 일이 어떻게 됐나 걱정하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러는 편이 나았을 텐데.
‘……하지만 그랬다면 이 애는 구하지 못했겠지. 그 자루 속에 하루만 더 있었으면 틀림없이 죽었을 테니까.’
문평은 눈길을 내려 침상 위에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죽은 것처럼 소리 없이 자고 있었다. 애를 강제적으로 잠재우는 건 아무래도 좋은 일 같지 않아서 수혈은 일단 풀어 둔 상태였다. 그러나 어지간히 지쳤는지 아이는 쉽사리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자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의식을 잃은 건지도 모르겠다. 의원이 어깨를 맞추고 부러진 팔에 부목을 댈 때까지도 아이는 깨지 않고 계속 잠든 상태였기 때문이다.
의원의 말에 따르면 아이의 상태는 정말 최악이라고 했다. 너무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고, 지속적인 학대를 받아 몸도 엉망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체력도 심각할 정도로 떨어져 있어서 보통 아이라면 한두 달이면 거뜬히 붙을 팔도 이 아이는 반년 가까이 낫지 않을지도 모른단다. 의원은 어린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지독한 꼴을 당했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아이에게 지병까지 있다는 겁니다.”
일단 겉으로 드러난 외상을 치료한 후, 전체적인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진맥을 해 보던 의원이 근심스럽게 덧붙였다.
“맥이 차고 느려요. 게다가 혈도 곳곳이 막혀 있기까지 합니다. 심장이나 비장 쪽에 이상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운이 나쁘다면, 심지어는 절맥류일 수도 있습니다.”
혈도 곳곳이 막혔다는 이야기에 문평은 윤승효가 죽인 사내들이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들 역시 이 아이가 절맥이라고 말했었다. 그들이 했던 말과 의원의 말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다면 아이는 진짜로 맥증을 앓고 있을 수도 있었다. 문평은 그 사실을 알고 나자 아이가 더욱 가여워졌다.
구음절맥九蔭節脈으로 유명한 맥증은 주로 여자아이들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기경팔맥과 십이경맥 중 음맥의 몇 군데가 막히는 바람에 생기는 희귀한 병이다.
문평은 의원이 아니라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강호에서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절맥증을 타고난 아이는 매우 어여쁘고 재지가 뛰어나 문일지십이 아니라 문일지백도 능히 가능한 영재라고 했다.
그러나 그 미모도 재지도 제대로 사용될 일이 없었다. 여자아이의 나이가 열 살이 지나면 서서히 맥증이 발동하기 시작하는데,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이를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맥증은 천형天刑이라고도 한다. 하늘이 내리는 형벌이라는 뜻이다. 우연히 발병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타고나는 것이며, 어마어마한 고통 속에서 살다가 필히 목숨까지 잃고 말기에 그리 부른다.
간혹가다 그 병을 벗어나는 아이가 있기도 하지만, 그런 아이들은 대부분 집안이 대단한 부자이거나 권세가였다. 죽어가는 자식을 위해 천금도 마다하지 않고 영단을 구해 주는 헌신적인 부모를 가진 아이들과 이 꼬마는 처지가 완전히 달랐다.
‘나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났다고 생각했었지만, 너는 나보다 더하구나.’
문평은 한숨을 쉬며 생각에 잠겼다. 이 아이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의지할 데 없이 상처만 입은 아이를 내려다보는 문평의 마음은 그저 착잡하기만 했다. 세상 모든 만남이 인연이라면 아이와 자신의 만남 역시 인연이리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인연이 이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흠. 흠. 저 박 의원입니다, 손님. 잠깐 뵈어도 되겠습니까?”
한참 상념에 잠겨 있는데 문밖에서 의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문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지? 설마 윤 형의 소식이 들어온 것인가?’
문평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걸음을 빨리했다.
“무슨 일입니까?”
미닫이문을 열고 문평은 밖을 내다보았다. 사람 좋은 의원이 난처한 기색을 얼굴에 가득 띠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문평이 고개를 갸웃하자 의원은 바깥쪽을 힐끔 쳐다보며 내키지 않는 투로 입을 열었다.
“바깥에 손님을 찾는 분들이 와 계십니다.”
‘분이 아니라 분들? 하지만 나를 여기까지 찾아올 이들이 없는데.’
“정확히는 어젯밤에 크게 부상을 당하고 온 사람을 찾는 분들인데, 저희 의원에 그런 사람이 들었다는 정보가 있었다며 막무가내이십니다.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들 같지는 않지만 한번 만나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의원은 바보 같을 정도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의원의 말을 들으니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문평은 짧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방으로 돌아와 풀어 놓은 도를 찾았다. 잠깐 장창도 가져갈까 생각했지만, 무기 두 개를 한꺼번에 휘두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좁은 실내 안에서는 길이가 짧은 도가 나을 것 같아 장창은 그냥 두었다.
문평이 무장을 하고 나서자 의원이 긴장한다. 그가 무림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별 실감이 없었던 모양인데,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진 손님이 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칼부터 찾는 것을 보고 그제야 어이쿠 하는 표정이 됐다.
문평은 내심 쓴웃음을 머금었다. 자신 때문에 괜히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까지 말려들고 있는 것 같다. 저 의원이 잘못한 일이라고는 자신을 환자로 받아 준 것뿐인데 말이다.
문평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람들이 있는 외원으로 나갔다.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로 붐벼야 할 외원이 사람 그림자도 없이 썰렁하다. 환자들을 위해 내놓은 평상 위엔 다섯 명의 사내들이 앉아 있었다.
문평은 그들의 정체를 눈치채고 발걸음을 멈췄다. 사내들도 문평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오.”
여전히 냉막한 음성을 하고서 당문오독의 수장 당적형이 아는 척을 했다. 기세등등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잡는 자들을 한차례 돌아본 문평은 가볍게 포권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당문오독 여러분 아니십니까. 한데 저를 찾으셨다고요?”
“정확히는 그대를 찾은 것이 아니라, 어젯밤에 큰 부상을 입고 찾아든 무인을 찾았지. ……그런데 자네는 다리가 편치 않아 보이는군. 언제 다쳤나?”
당적형은 문평의 몸을 비릿한 눈으로 훑어보며 물었다. 문평이 다리를 다쳤다는 것은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미리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새삼스레 질문하는 저의가 뭘까? 문평은 당적형의 음흉스러움에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에 다쳤지요.”
“어젯밤? 어디서 다쳤지?”
“당가의 형제들은 소생을 만나면 항상 많은 것을 묻는군요. 저번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질문이 있다면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부터 먼저 말하시오. 당신들이 물으면 이유도 모르고 무조건 대답해야 하는 겁니까? 아니면 설마 이번에도 수상한 무리를 쫓는 와중이신가요?”
문평이 빈정거리자 당적형의 시선이 그를 똑바로 향했다. 문평은 당적형의 감정 없는 눈이 꼭 먹이를 노리는 뱀 같다고 생각했다.
“말 잘했군. 하나 물어봅시다. 어째서 우리가 수상한 무리를 쫓을 때마다 형장을 마주치게 되는 게요?”
“글쎄요. 그건 소생도 모르지요. 혹시 압니까. 형장들이 항상 잘못된 곳을 쫓고 있어서 그런지?”
날카롭게 말하며 문평을 살피던 당적형은, 문평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눈썹을 휘어 올렸다.
“……방자하군. 화협을 믿고 그러는 것인가?”
“설마.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 믿고 내가 그러겠소? 소생은 소생의 정당함을 믿을 뿐이오.”
당적형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문평의 말은 사실이다. 만약 이 자리에 윤승효가 동석하고 있었다면 문평은 결코 이런 오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문평은 자신 때문에 윤승효와 당문 사이에 껄끄러운 관계가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와 함께 있었다면 공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며 당문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현재 그의 곁에는 윤승효가 없었고, 문평은 이제껏 자신을 지켜 주던 방패 없이 맹수 앞에 서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상대는 서슴없이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할 터였다.
문평은 내심 긴장을 늦추지 못한 채 당문오독을 바라보았다. 당적형은 산 채로 문평을 찢어발기고 싶은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 소가장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나?”
한참 동안 흉흉하게 문평을 노려보고 있던 당적형이 문득 말을 꺼냈다. 그가 언급한 것은 뜻밖에도 소가장이다. 문평은 미간을 찌푸리며 당적형을 바라보았다. 소가장이 왜? 설마하니 아이들을 생강시로 만드는 정체불명의 집단과 명문 정파의 일원인 당가 사이에 무슨 연계라도 있는 것인가?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군요. 한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문평은 숨기지 않고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윤승효의 말마따나 변복도 하지 않고 그 앞에서 서성였으니, 알 만한 사람이라면 모두 윤승효가 소가장의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문이라고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의외로군. 숨길 생각이 없는 건가?”
“알고서 찾아오신 게 아닙니까. 당문이라면 그만한 정보력은 갖고 계시리라 짐작했는데요.”
문평이 알고 있다, 라고 말한 것은 물론 윤승효가 소가장의 일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적형은 악의를 갖고 그 말을 해석했다. 애초부터 그러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당문의 정보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어젯밤에 일어난 혈사의 진상까지 알아내기는 힘들지. 어젯밤의 일이라면 자네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가 적을 게야. 그러니 여기까지 물으러 온 것이 아닌가.”
“혈사라니요? 무슨 혈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젯밤에 소가장에서 일어난 그 끔찍한 혈사를 모른다고 말할 셈인가? 어젯밤. 소가장에 있는 식솔들이 모조리 도륙당했네. 경비를 서던 무인들은 물론이고 무공을 모르는 하인들까지도 죄다 죽임을 당했고, 소가장에서 돕고 있던 구빈원의 아이들은 모두 사라졌지. 심지어는 장주를 비롯한 그의 일족들까지 실종됐네. 그야말로 하나의 장원이 완전히 사라진 셈인데, 우리는 그 흉수를 뒤쫓고 있네. 오늘 아침 관의 연락을 받았거든.”
강물이 우물물을 침범하지 못하듯이, 우물물도 강물을 침범치 못한다. 무공을 배운 강호인들이 저지른 범죄는 관병들이 해결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강호인의 소행으로 알려지는 범죄는 주로 그 지역의 명문 정파에 의뢰를 해 자체적으로 해결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문도 그런 식으로 관에게 의뢰를 받은 모양이다.
귀주는 예로부터 무림 세력이 발달한 고장이 아닌지라 유명한 정파 세력이 드물뿐더러, 있다 해도 당문처럼 세가 견고하지도 못하다. 지방 현령의 입장에서는 고만고만한 무관 주인에게 일을 의뢰하느니 마침 근처를 지나던 당문 측에 의뢰하는 편이 더 믿음직스러웠으리라.
당적형의 이야기를 들은 문평은 충격을 받았다. 무공을 모르는 하인들이 죄다 죽임을 당했다는 대목 때문이었다. 구빈원의 아이들이 사라지고 장주 일가가 도망친 것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죄 없는 하인들이 몰살당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문평이 장원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하인들은 살아 있었다. 외곽 경비를 서던 물정 모르는 경비 무사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설마 우리가 떠난 이후, 내원을 경비하던 자들이 이변을 깨닫고 살인멸구를 해 버린 것인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맞닥트리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속이 뒤집혀서 토할 것 같다. 상종 못 할 개새끼들인 것은 알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할 줄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주인을 섬기던 사람들을 그저 입을 막기 위해 도륙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들은 무림인도 아니고 그저 양민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냥 놔두었어도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았을 자들인데 잔인하게도 그 죄 없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다니.
“물론 그런 짓을 저지르고서 아주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던지, 장원 외곽 곳곳에 저항의 흔적이 있더군. 우리는 시체들을 검안하고 흉수의 일부가 크게 다쳤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냈네. 그래서 개양 안의 의원들을 돌아다니며 다친 무인들을 찾아다녔던 터인데, 이것 참. 마침 자네가 이곳에 있지 않은가. 어제 일이 있기 전까지 줄곧 소가장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는 윤승효의 일행인 자네가 말이야. 게다가 이렇게 다치기까지 했군그래.”
당적형은 윤승효를 더 이상 화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손아랫사람을 칭하듯 가볍게 이름만 불렀다. 그의 말투를 들은 문평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래도 그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의도한 것이 있는 눈치다.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대공자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자니 적잖은 의도가 느껴집니다. 설마하니 화협께서 그 혈사를 일으키셨다고 믿고 계시는 겁니까?”
경계심을 감추지 못하며 문평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너희들이 의도하는 바가 뭐냐? 대체 뭘 원하기에 이따위 수작을 벌이고 있는 것이냐?’
대놓고 날을 세우는 문평에 비해 당문오독의 태도는 참으로 느긋했다.
“윤승효가 강호상에 떨치고 있는 명성은 나도 잘 알지. 하지만 그러한 명성만을 믿고 이번 일에 가장 많은 단서를 가졌을 법한 자를 놓아 보낼 수는 없지 않나. 그는 어디 있나? 이 일은 자네가 아니라 그와 직접 이야기할 일이라고 생각하네만.”
뱀처럼 교활한 사나이가 짐짓 능청스레 윤승효의 행방을 캐물었다.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답이 상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고 있는 문평은 상황이 난감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당문은 이번 혈사를 윤승효에게 뒤집어씌울 작정인 듯했다. 당문이 사천도 아니고 귀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의뢰를 맡은 것도 모자라 이리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이 일에서 윤승효를 끌어내릴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당문이 사실을 조금만 조작해도 윤승효가 얼마든지 뒤집어쓸 수 있는 일이었다. 혈사가 나기 직전 윤승효와 자신이 그곳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에, 문평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문평은 사내들을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노려보며 침묵을 지켰다. 자신의 태도가 상대에게 어떻게 해석될지 뻔히 알면서도 입을 열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섣부르게 한 말실수가 윤승효에게 어떤 식으로 되돌아갈지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평은 지금처럼 자신의 머리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이 원통한 적은 없었다. 그의 머리가 포영의만큼, 아니 적어도 임학만큼만 되어도 이 지독한 궁지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었을 터인데. 배운 것 없고 임기응변에도 약한 문평은 그저 이를 악물며 그들을 노려보기만 할 뿐 윤승효를 위해 아무런 변명도 해줄 수 없는 처지였다.
“윤승효가 지금 어디 있는지 물었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당적형은 재차 물었다. 분해서 이를 악물고 있던 문평은 윤승효를 완전히 범인으로 단정을 내린 듯한 당적형을 새파란 눈길로 노려보며 말했다.
“화협께선 당신네들처럼 헛다리만 짚지는 않으시지요. 그분은 진짜 흉수의 뒤를 쫓는 중이십니다.”
“진짜 흉수라?”
“그렇습니다. 진짜 흉수. 소가장의 혈사를 일으킨 진범은 그간 사천과 광동, 복건 등지에서 어린아이들을 납치한 자들과 동패인 자들입니다. 화협께서는 그들을 쫓아 귀주까지 오셨습니다. 당신네들은 자기 발밑에서 벌어지는 일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섣부른 거짓말이 들키면 꼬투리가 될 것을 알기에, 문평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윤승효가 지금 이 자리에 없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는 것은 그의 신상에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문평은 상관하지 않았다.
당적형은 사납게 웃으며 문평을 마주 보았다. 그는 문평이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소식이 짧았기에 사천성에서 아이들이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당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당가타 근처에선 사라진 아이들이 없는 데다, 폐쇄적인 성격의 당문에서는 자신들과 관계없는 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림없는 수작을 하는군. 사천 땅에서 아이들이 없어졌다고?”
“모르고 있었습니까? 사천의 패자를 자처하는 것치고는 어이없는 일이군요.”
비웃듯 냉랭한 당적형의 어투에, 문평은 똑같은 방식으로 비웃음을 되돌려 주었다. 그에 당적형의 눈썹이 꿈틀 경련을 일으킨다. 편협한 인간답게 자신이 남을 비웃는 것은 괜찮아도 남이 자신을 비웃는 것을 용서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사천뿐만 아니라 광동, 복건에서도 없어졌다라. 그랬는데 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그렇게 광범위하게 벌어진 일이었다면 주목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을 법한데.”
“당문에서만 몰랐을 뿐이지요. 개방도 하오문도 이미 알고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복건성에서 일어난 일은 옥기린 대협의 증언을 통해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하오문은 몰라도 개방과 옥기린이라면 당문으로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문평이 자신 있게 그 두 개의 이름을 언급하자 당적형은 멈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문평이 하는 말이 근거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두 개의 이름이 무거워서였다. 윤승효만으로도 모자라 개방과 옥기린이라. 그들은 결코 만만히 생각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당적형은 문평의 말을 쉽사리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는 것도 아니고, 이 자리에 없는 자들의 이름이 당문의 행사를 방해할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윤승효와 문평에 의해 치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당문오독은 어떤 명분을 내세워서라도 그 수치를 갚고 싶었다. 윤승효가 이 자리에 없다면 이 버르장머리 없는 군관에게라도 빚을 갚아야 한다. 실제로 그들에겐 혈사를 일으킨 진범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에겐 그저 윤승효를 압박할 수 있는 핑계가 필요할 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 설사 자네 말대로 각 성에서 납치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고 치세. 그런데 그 일과 이번에 소가장에서 일어난 혈사가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 다른 성에서는 아이들만 납치하던 자들이 왜 귀주 땅에서는 혈사를 일으켰지? 그것도 왜 하필이면 소가장인가?”
“화협의 추적이 소가장에까지 와 닿았음을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꼬리를 끊어 낸 것이지요.”
“하. 그 말인즉슨, 소가장 자체가 그들과 한 패거리였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소가장의 장주가 되시는 분은 한림원 학사로 이름 높았던 소헌수訴憲洙 대인이시다. 이곳 개양의 현령과도 친분이 있고 중원에서도 명망 높은 문인인데, 그런 분이 납치범 따위의 작자들과 한 패거리라고?”
오늘 아침. 개양 현령에게 특별히 소헌수 대인의 안위를 부탁받았던 당적형은 당치도 않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거창하게 개방과 옥기린의 이름까지 나오기에 무슨 소린가 했더니만, 듣고 보니 아전인수 격으로 끌어다 붙인 말도 안 되는 변명이나 하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소헌수 대인이 어린아이를 납치해 팔아먹는 인사들과 연루되어 있다고? 소가장 혈사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억지가 너무 심했다.
“소헌수 대인은 귀주에서 배출한 몇 안 되는 명사로 개양은 물론이고 귀주 전체에서 추앙을 받는 분이시네.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는 것에 급급해 그런 분의 이름까지 더럽히려고 들다니, 자네의 언사가 너무 지나치군. 이 자리에 귀주의 무인들이 아니라 당문이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게. 그렇지 않았다면 자네의 목은 벌써 땅을 뒹굴고 있었을 게야.”
경고하듯 말한 당적형이 비릿하게 웃으며 손짓을 했다. 그의 신호를 받고 소매에 손을 넣은 나머지 당문오독들이 문평을 둘러싼다. 문평은 도첨을 손바닥으로 움켜쥐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당적형은 이기죽거리며 그런 문평을 조롱했다.
“자네의 횡설수설한 변명을 더는 들어줄 수 없군. 납득이 가는 이야기라면 귀 기울여 보겠는데, 자네의 말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거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자네는 당분간 우리와 같이 있어야겠어. 자네가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솔직해질 기분이 들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거든.”
당적형은 빠른 시일 내에 솔직해지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솔직해지게 만들어 주겠다는 투로 말했다. 윤승효가 없다는 이유로 더욱 쉽게 드러나는 그들의 본색에 문평은 차갑게 웃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 상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라니, 과연 당문은 당문이다. 한번 노린 먹이는 죽어도 놓지 않는 뱀 같은 작자들. 저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분명한 진실조차도 거짓으로 날조할 자들이었다.
말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미련을 떨친 문평은 서슴없이 도를 뽑아 들었다. 어젯밤의 일로 날이 상한 박도가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발도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당문오독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덤빌 테면 덤비라는 건가? 아니, 제발 먼저 덤벼달라는 거겠지.’
비열한 그들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문평이 먼저 덤벼든다면, 그들은 상대가 손을 쓰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할 수 있다. 그들은 그 변명을 써먹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을 터다. 그러기에 그가 도저히 참을 수 없도록 도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평은 허리를 낮춰 자세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그들의 얼굴을 차례차례 살폈다. 순순히 따라가서 죽도록 고문당하나, 끌려가기 싫어서 반항하다 여기서 죽으나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다. 고문을 당해 있지도 않은 거짓말로 윤승효의 청명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살심을 굳힌 문평은 처음부터 도에 도기를 입혔다. 속전속결로 끝을 내지 않으면 놈들에게 타격을 입힐 수 없다.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가야지.
살벌한 결심을 하며 빙긋 웃는 그의 눈앞에서 당문오독도 자세를 세우며 공격에 대비했다.
“명성만을 믿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것은 아주 좋은 버릇인데, 불행히도 당대공자께서는 일관성이 없으시군요.”
일촉즉발의 순간이다. 누구라도 먼저 손을 쓰면 당장에 피바람이 불 상황. 그 한가운데에 난데없이 느긋한 목소리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어째 예전에도 한 번 같은 일을 겪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장면이다. 게다가 목소리의 주인은, 전에도 이런 상황에서 나타나 문평을 구해 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문평은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 좋은 버릇을 이 윤 모에게는 적용하시면서 어째서 소 대인에게는 적용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니 실수를 하시는 게 아니신지요?”
시의적절한 순간, 미리 시간을 맞춘 듯 딱 맞춰서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윤승효였다. 객잔에 들렀다 왔는지 야행의 대신 늘 입곤 하는 호화로운 화복 차림을 한 윤승효는, 태평하게도 부채를 부치며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의 움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만 한 나뭇가지에 몸 전체를 평온하게 기대고 있었다.
보기엔 한가로운 광경이었으나, 윤승효가 내보이고 있는 신법의 경지가 얼마나 지고한지를 알아볼 수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핏기를 잃었다. 윤승효의 행동이 일종의 무력시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당적형의 경우는 더욱 심해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까지 흘리며 윤승효를 바라보았다.
“……화협이 아니십니까? 대체 언제 오신 겁니까?”
저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의 기척을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으로 인해 윤승효와 당문오독 간의 무공 고하는 확연히 드러난 셈이다. 게다가 지금 윤승효가 보이고 있는 경지는 입신의 경지에 다다른 신법. 윤승효의 무공이 절정의 수위라고 소문이 났지만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번번이 당문오독의 행사를 가로막을 리 없다.
당적형은 그런 불안한 사실들을 떠올리며 초조한 마음을 애써 내리눌렀다. 덫을 놓으러 나왔다 덫에 걸린 기분이 들었다. 설마 윤승효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을지 어찌 알았겠나. 동행의 반응을 보고 멀리 나섰을 줄 알았는데 이토록 가까이 있었다니.
당적형은 속은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저 군관과 윤승효가 서로 짜고 자신들을 함정에 빠트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토끼도 도망갈 굴은 세 개를 파는 법인데, 저 교활한 여우가 대책 없이 자리를 비웠다고 믿은 게 실수였다.
“도착한 지는 조금 되었습니다. 한데 이곳에 와보니 당대공자께서 제 동행과 무척이나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고 계시더군요. 호기심이 들어 잠시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색이 들어간 유리알 뒤로 윤승효의 눈동자가 한껏 가늘어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유쾌한 웃음이었으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당적형의 마음은 달랐다. 그는 마치 비웃음이라도 들은 듯 치욕을 삼키며 윤승효를 올려다보았다.
나뭇가지 위에서 상체를 일으킨 윤승효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공기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는 듯한 몸놀림은 꼭 학이 내려오는 것처럼 고아했다.
윤승효의 가벼운 발걸음은 당문오독과 문평이 대치하는 곳까지 이어졌다. 그가 다가오자, 별다른 위협의 말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당문오독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눈으로 자신들의 수장을 바라보며 의견을 물었다. 상대의 무공수위를 익히 짐작하고 있는 당적형은 아무 말 없이 그들에게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야기를 모두 들으셨다니 말씀드리기가 쉽겠군요. 저희는 소가장의 혈사 때문에 화협을 찾았습니다. 화협에게 여쭤볼 것이 적지 않으니 대답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윤승효가 자리에 없을 땐 이름을 막 불러 젖히더니, 윤승효가 돌아오자마자 호칭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그 비굴하기 그지없는 처세가 얄미워 문평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저런 자들이 문파 최고의 후기지수씩이나 되다니, 당문의 앞날이 어찌 될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그에 대한 대답은 제 동행께서 모두 해주신 것으로 아는데요. 저로서는 제 동행의 대답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윤승효는 당적형의 말에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죽은 것은 물론이고, 명망 높은 관인까지 실종된 대사건인데도 불구하고 그를 언급하는 윤승효의 얼굴은 한없이 편안하기만 했다.
윤승효의 말을 믿고 싶지도 않고, 믿을 생각도 없는 당적형은 서늘하게 눈을 빛내며 윤승효를 노려보았다. 마음속에 품은 독이 눈빛에까지 흘러나왔는지 두 눈빛에 시퍼런 독이 스며 있었다.
“그러면 화협께서도 저 군관과 같은 주장을 하시는 겁니까? 소가장이 인신매매를 하는 자들과 연계되어 있었고, 어젯밤 일어난 소가장의 혈사는 그들이 자신들의 꼬리를 자르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요?”
“정확히 알고 계시는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소 대인의 실종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설마 그들과 함께 손을 맞잡고 도주했다 주장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것은 저로서도 모를 일이지요. 소가장을 세운 소 대인이 진짜 소 대인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이름을 내건 타인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요. 소 대인은 분명 귀주 출신이지만 개양은 그의 고향이 아니지요. 이곳에서 그가 진짜인지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전무하다는 이야깁니다.
제 생각을 솔직히 말할까요? 저는 낙향한 선비가 자신의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 터를 잡았다는 사실이 몹시 의심스럽습니다. 이왕 귀주로 돌아왔으면 고향 땅인 육반수六盤水로 돌아갈 일이지 어째서 개양에 머물렀을까요?”
당적형의 냉소적인 태도는 윤승효의 태연자약함을 흔들 수 없었다. 윤승효의 태도는 가볍지만 견고했고, 당적형으로서는 그의 언행에서 흠될 것을 찾기 힘들었다.
윤승효는 억지나 권위로 누를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힘으로는 더욱 불가능했다. 윤승효의 논리와 맞서려면 그에 걸맞은 논리가 있어야 하는데 당적형에게는 근거가 빈약한 의심만 있을 뿐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뜻밖의 말씀을 하시는군요. 개양의 현령이신 척戚 대인께서 소 대인과 절친하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설마하니 척 대인께서 친인을 못 알아보실까요?”
“저도 들었습니다. 하나 척 대인과 소대인 사이에 친분이 생긴 것은 소 대인이 개양에 장원을 세운 이후의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소가장에서 그러한 일이 정말로 있었다면, 어째서 화협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겠습니까?”
“아마 모두가 모른 것은 아닐 테지요. 미리부터 알았지만 증거가 없었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정히 의혹이 가시지 않으신다면 개양의 개방 분타로 가셔서 확인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중원 남단에서 일어나는 어린아이의 납치 사건으로 개방 역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들에게 물어본다면 적잖은 정보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윤승효의 입에서 다시 한번 개방이 언급되었다. 확인만 하면 쉽게 들통이 날 일을 가지고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는 없을 터. 저자는 뒷수습을 확실히 해둔 게 분명했다.
분하지만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침음을 삼킨 당적형은 패배를 시인했다. 윤승효가 도착하기 전에 저 군관만이라도 끌고 갔어야 하는 건데, 괜히 시간을 끌어 적에게 기회를 주었다. 모욕을 주러 와서 도리어 모욕을 받고 말았다. 겨우 이런 꼴을 당하자고 여기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연이어 두 번이나 같은 사람에게 치욕을 당했다고 여긴 당적형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 윤승효에 대한 원한이 단단히 똬리를 틀었다. 다음에는 결코 이런 꼴을 당하지 않겠다. 같은 실수를 세 번이나 반복하지는 않으리라.
당적형은 자신이 적반하장격으로 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배운 대로 오로지 그 자신만 정당하고 스스로만이 정의라고 믿었다.
“……화협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잘 알겠습니다. 소가장의 일에 다른 진상이 있는지 더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화협이 가장 중요한 참고인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변함이 없으니 개양을 떠나는 일은 당분간 삼가셨으면 합니다.”
“흉수들은 이미 개양을 떠났습니다. 저희는 그들의 뒤를 쫓을 생각입니다.”
“안 될 말씀입니다. 그렇게 행동하신다면 화협의 이름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이 남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의 오해는 씻었을지 모르지만 아직 관의 오해가 남지 않았습니까. 그를 풀지 않는다면 화협의 본가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일단 포기는 했어도 순순히 보내 주긴 싫은 모양인지 당적형이 쓸데없는 트집을 잡았다. 자기들은 괜찮지만 관이 오해할까 두려우니 당분간은 개양에 발이 묶여 있으라는 거다.
순전히 심술 때문에 하는 말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윤승효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의 웃는 얼굴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모르는 당적형은 그 웃음의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당문의 형제들께서 가지신 진심을 이 윤 모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해주시는 충고는 모두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마침 잘되었군요. 저에게 당문인을 만나면 돌려 드리려고 간직해 두었던 물건이 있습니다. 허튼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네요.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윤승효는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 진기를 실었다. 허공섭물 정도는 아니었으나, 진기에 의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게 된 상자는 당적형의 앞으로 수월히 날아갔다.
어렵지 않게 상자를 잡아챈 당적형은 별생각 없이 상자를 내려다보다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적송으로 만든 상자의 겉면에 당문의 직인이 찍혀 있고, 상자의 옆면에는 은성표국의 수결이 적힌 봉인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이것은 분명 그들이 잃어버렸던 표물 중에 일부가 분명했다. 당적형은 화급히 뚜껑을 열고 안을 살펴보았다. 수결이 뜯겨 있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내용물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이것을, 이것을 어디서 발견하셨습니까?”
수십 일을 찾아도 발견하지 못했던 흔적을 엉뚱한 곳에서 맞닥트렸다. 자신들이 윤승효에게 하려던 짓을 까맣게 잊은 모양인지, 당적형은 다급함을 감추지 못하고 윤승효에게 질문을 던졌다. 윤승효는 여전히 경쾌하게 미소 지으며 당적형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의 웃는 얼굴은 티 한 점 없이 선하고 온화했다.
“어젯밤, 소가장에서 혈사를 일으킨 자들의 뒤를 쫓다 발견한 것입니다. 너무 급하게 도망가던 와중이라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더군요. 당대공자께서 흥미로워하실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뜻밖의 증거품을 본 당적형은 할 말을 잃었다. 문평이 말하던 혈사의 진범이라는 자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조차 믿기 힘든 판국인데, 그들이 당문의 표물을 털었던 자들과 동일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건 더더욱 믿기 힘든 현실이다. 얼마나 대범한 자들이길래 그런 일을 감히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융중지약이 맺어진 이후에 태어나 평온하기 짝이 없는 강호에 길든 당적형은 자신들의 적이 단순한 도적 이상일 거라고 예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앵속을 빼돌린 자들이 돈에 미친 흑사회의 일원들이라고만 여겼지, 그보다 큰 음모의 일부일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이 속에 담겨 있는 내용물이 어찌 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셨습니까? 저희는 이 상자 안의 내용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당적형은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윤승효에게 물었다. 그는 자신이 묻는 바가 공시적으로 대외비에 속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윤승효가 이미 모든 내막을 짐작하고 있음을 그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발견했을 때부터 이미 빈 통이었습니다. 죄송한 말입니다만, 당문에서 탈취된 앵속은 모두 사용되었을 게 분명합니다. 제가 어젯밤 뒤쫓은 배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울음소리 하나 나지 않더군요. 다들 취해 있었던 까닭이겠지요.”
당적형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윤승효의 말이 암시하고 있는 바를 이해했다. 윤승효는 지금 당문의 앵속이 아이들을 납치하는 데에 사용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당문에서 앵속을 훔친 자들이 그것을 아이들을 잠재우는 데 썼고, 덕분에 아이들은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그들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고.
정말 사정이 그렇게 됐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닐 수 없다. 당문이 저지른 짓은 아니지만 책임론을 피할 수는 없는 문제다. 앵속처럼 위험한 물건을 대량으로 사들이면서 관리를 못 한 것은 전적으로 당문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선 당적형이 눈을 번들거리며 윤승효에게 물었다. 초조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그의 표정은 그야말로 급박하기 짝이 없었다.
“그자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었습니까?”
“남강 하류로 흘러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뒤를 놓쳤습니다. 혼자 몸으로 배를 끝까지 따라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그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당문오독이 몸을 돌렸다. 그들은 일제히 몸을 날려 의원을 빠져나갔다. 소가장의 혈사고 뭐고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하긴. 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남의 사정이 보일 리 없지. 윤승효는 끌끌 혀를 차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윤승효의 모습을 문평은 찬찬한 시선으로 살폈다. 그토록 안부를 궁금해했던 사람이 돌아왔는데도 선뜻 반가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왠지는 모르지만 위화감이 느껴졌다. 딱히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미묘하게 불편한 느낌이랄까.
손톱 아래에 거스러미가 앉은 것처럼 까끌까끌했다. 이상하다. 뭔진 모르지만 이상해. 문평은 마음에 와닿는 위화감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놓치신 겁니까?”
문평은 심중의 동요를 애써 감추고 윤승효에게 말을 걸었다.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 또 한 번 그의 목숨을 구한 윤승효가 그를 돌아보았다.
색이 들어간 애체 밑에서 새파란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저 푸른 눈……. 설사 역용을 한다고 할지라도 저 눈만큼은 쉽게 흉내 낼 수 없다는 걸 알지 않나. 문평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석문평.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설마요. 놓쳤다면 이렇게 돌아왔을 리 없지요. 그들이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태도로 윤승효가 쾌활히 대답했다. 그의 청명한 푸른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이다. 그렇겠지. 그동안 줄곧 쫓아오던 적들의 정체를 드디어 알아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까닭이 있나.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기묘한 위화감은 문평의 심장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뭐지. 대체 뭘까?’
문평은 자신이 왜 이렇게 동요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흐릿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걱정하던 사람이 돌아왔는데 어쩐지 기쁘지 않았다. 상대에게서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처음 만난 듯한 느낌이랄까. 마치 신발 속에 모래가 들어간 것같이 껄끄러웠다.
“다친 곳은 어떻습니까. 별 탈 없다고 하던가요?”
윤승효는 자상한 성격 그대로 문평의 안위부터 먼저 챙겼다. 문평은 붕대를 감은 허벅지를 쓸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저런 걱정을 들을 만큼 큰 상처는 아니었다. 이런 상처쯤이야 진검 대련을 하다가도 얻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괜찮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으세요. 많이 다친 것도 아닌데요.”
“작은 상처라고 얕봐선 안 됩니다. 치료받을 수 있을 때 제대로 받으세요. 오늘 저녁부터 다시 길을 떠날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 전에 미리 처치를 받아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윤승효는 진지하게 말하더니 문평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섬세하고 우아한 손가락이 친밀하게 어깨에 와 닿았다. 그 손길에 문평은 흠칫 놀랐다. 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의아한 듯 어깨를 돌아보았다.
어젯밤만 하더라도 그렇게 두근거리던 심장이 지금은 고요했다. 같은 손이 거의 비슷한 시간 동안 자신의 몸에 와 닿았는데도, 그때와 달리 지금은 무기물이 닿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는다.
문평은 그러한 자신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윤승효의 손길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싫었지만, 그럴 때조차도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이런 방식은 뭔가 이상하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없는 감각의 혼란. 원인 모를 불편함은 문평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존재를 호소했다.
머릿속의 어딘가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아니면 감각 중의 어딘가가. 문평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건예자의 피에 중독이라도 된 게 아닌가 의심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아무것도 모르는 윤승효는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문평은 굳은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띄워 올리며 윤승효에게 말했다.
“어젯밤에 구하라고 말씀하셨던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처치를 모두 끝내고 지금 의방 안에 있는데, 들여다보시겠습니까?”
애써 태연한 척 굴고 있었지만, 불행히도 문평은 뛰어난 연기자가 아니었다. 그의 평연치 못한 태도는 윤승효에게도 고스란히 읽혔다. 그러나 윤승효는 그의 동요를 모르는 체하고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그 아이도 같이 준비를 하는 게 좋겠군요. 오늘 저녁 안으로 개양을 뜰 생각입니다. 긴 여행이 될 테니 채비해 두십시오.”
“저 아이를 데려가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적의 소굴로요?”
뜻밖의 말에 놀란 문평이 윤승효의 의중을 되물었다. 문평 하나도 감당 못 한다던 사람이 아픈 아이까지 끌고 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뇨. 우리는 호북湖北으로 갑니다. 정도맹이 있는 호북성 무한으로 갈 겁니다.”
정, 정도맹? 느닷없는 윤승효의 선언에 놀란 문평이 눈을 크게 떴다. 드디어 암중 세력의 근거지를 찾았다고 해서 각오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도맹은 웬 정도맹인가? 하지만 윤승효는 문평의 반응 따윈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윤승효는 정말로 정도맹으로 갈 생각이었다. 아니, 정도맹으로 그들을 ‘보낼’ 생각이었다.
“네. 우린 정도맹으로 갈 겁니다.”
그는 굳은 결심이 서린 목소리로 단호히 대답했다.
***
멀리서도 상대의 모습은 확연하게 보였다. 상대는 관도 곁에 있는 가장 큰 나무 아래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한가롭게 발을 쉬고 있는 길손 흉내를 내고 있었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알고 있는 천마는 행상인으로 변장한 길손이 그의 의손자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보았다.
‘당분간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왜 또 나타났지?’
천마는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의손자의 앞에서 신법을 멈추었다. 그의 발끝에서 의도적으로 끌어 올린 먼지구름이 피어오르자 윤승효가 과장되게 콜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코에 주독이 오른 장돌뱅이의 모습으로 그러고 있으니 제법 잘 어울렸다.
“무슨 일이냐.”
천마는 무뚝뚝하게 윤승효의 용건을 물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코를 하고 윤승효는 싱긋 웃었다. 늙고 추레한 얼굴에 유달리 깨끗한 이빨이 드러나는 게 묘하게 이질적이다. 이왕 역용을 하려면 완벽하게 해야지 저건 또 뭐람. 윤승효에게 역용의 기초를 가르쳤던 천마는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백조부님께 전해드릴 것이 있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싶어 다른 쪽 길에도 사람을 깔아 놓았는데, 다행히 제가 있는 쪽으로 와주셨군요.”
못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윤승효가 말했다.
꼭 전할 이야기가 있다니. 설마 옥기린에 관한 것인가?
윤승효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스스로가 당부한 바를 떠올린 천마는 눈빛으로 윤승효의 대답을 재촉했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얼른 해 보라는 뜻이다. 윤승효는 싱글거리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태연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윤승효의 모습을 하고 백조부님의 동행과 만났었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가셨다간 낭패를 보실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리려고 기다렸습니다.”
“……뭐라고? 대체 왜??”
윤승효가 윤승효의 모습으로 문평을 만났다. 천마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속이 확 뒤집혔다.
“무슨 소리냐? 대체 뭣 때문에 감히 그런 짓을 했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으면 대번에 때려죽일 것 같은 기세로 천마는 윤승효를 노려보았다. 거의 살기까지 어린 것 같은 그의 눈초리에 놀란 것은 윤승효였다.
윤승효는 예상했던 것보다 한층 더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천마에게 내심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두고 화를 내실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엄청나게 진노하실 줄은 미처 몰랐었다.
성미가 부드러운 분은 아니지만 이런 작은 일에 격노하실 정도로 화급한 분도 아니신데, 오늘은 어쩐 일로 이리도 활화산 같으신 걸까.
“무, 물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당문오독이 백조부님의 동행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소가장의 혈사를 백조부님과 그 동행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훤히 보이는 터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정말 어쩔 수 없이 나선 것뿐입니다. 백조부님. 이해해 주십시오.”
잘못하면 정말 맞아 죽겠다. 윤승효는 황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천마의 진노는 쉽게 누그러들지 않았다.
“정말 그것밖에 이유가 없느냐, 승효야?”
“그렇습니다. 백조부님께서 동행을 아끼시는 것 같아서,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당분간 곁에 얼씬하지 말라 일렀거늘 볼 것은 다 보고 있었구나. 날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더냐. 승효야? 왜? 내가 네 모습으로 간적질이라도 할 것 같아서?”
냉랭하게 비꼬는 천마의 어투는 신랄하기 짝이 없었다. 조카도 아니고 손자뻘. 촌수로 따져도 까마득한 아랫사람인지라 천마가 사정을 봐주는 몇 안 되는 신분의 인간이었던 윤승효는 이런 천마의 태도가 무척 낯설었다. 늘 여유 있게 선을 풀어 놓는 듯했던 천마가 갑작스레 줄을 꽉 조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평생을 절대자로 살아온 남자의 기세는 숨이 막힐 정도로 위압적이다. 자칫하다가 정말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윤승효는 바짝 긴장했다. 이럴 때의 천마는 그의 백조부가 아니라 정말로 천하제일인 같았다.
“백조부님께서 특별히 신경을 쓰시는 일이 생겼으니 거기에 관심이 생겼을 뿐입니다. 천하제일인인 천마께서 남의 신분까지 빌려 가며 직접 뒤를 쫓는 일이니 천하에 그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오문은 정보 단체입니다.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더 많아야 하는 곳이지요.”
“그래서, 내 뒤를 캤다?”
“그렇습니다. 한데 어째서 처음 듣는 양하시는 겁니까. 백조부님께서도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계셨던 일 아닙니까? 제 사람들이 아무리 은밀하다 한들 백조부님의 시야를 벗어날 수는 없었을 텐데요. 묵인해 주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정 마음에 차지 않으신다면, 그러시다는 의사 표시를 해주셨을 테니까요.”
천마는 공손한 자보다는 당돌한 자를, 예의 바른 처신보다는 솔직한 태도를 더 좋아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윤승효는 대놓고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그의 말대로 실제로 천마와 윤승효 사이에는 일종의 묵약이 있었다. 윤승효는 정보를 얻기 위해 천마의 주위를 서성거렸고, 천마 또한 언제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는 일이라 하오문이 주위를 서성거리는 것을 내버려 뒀다. 그래 놓고 이제 와 그 일을 트집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도지죄餘桃之罪를 추궁하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치사하지 않은가 말이다.
불같이 치솟은 분노 때문에 억눌려 있던 이성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윤승효가 했던 말을 찬찬히 되씹어 본 천마는 그가 딱히 잘못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문평이 진짜 윤승효를 만나고 말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불쾌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분풀이를 윤승효에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윤승효가 다소 과한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덕분에 문평의 목숨을 구했다면 칭찬해 줄 일이지 나무랄 일이 아니니까.
천마는 들끓는 노여움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이를 악물었다. 이제껏 감정을 다스리는 것에 어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오늘따라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다.
왜 이렇게까지 거센지 모를 분노를 간신히 추스르며 천마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윤승효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그의 안색을 살핀다. 천마는 퉁명스러운 태도로 윤승효를 흘겨보았다.
“……혹시, 알아보는 기색은 없더냐?”
문평이 진짜 윤승효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제껏 가짜인 자신과 함께 있다가 처음으로 진짜를 만났으니, 혹시나 그 차이를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다.
윤승효는 천마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천마가 그의 동행을 유난히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은 윤승효의 눈으로도 직접 확인한 일이다. 매사 자기 멋대로에 남에게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는 천마가 의아할 정도로 관심을 쏟고 있는 대상이 그의 동행이니, 눈치 빠른 윤승효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설마요. 누군들 알아보겠습니까? 얼굴은 몰라도 눈이 있는데요. 저희 꼬맹이도 몰라봤던 역용입니다. 고작 보름을 같이 있었던 사람이 이를 꿰뚫어 볼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윤승효는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그의 말대로 사람들은 윤승효의 모습이 역용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못했다. 얼굴의 골격이야 축골공으로 바꿀 수 있다지만 독특한 색을 가진 그의 홍채만큼은 다른 사람이 흉내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윤승효만 하더라도, 천마가 그를 위해 천면변환공千面變幻功을 개조해 주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으로 역용을 하는 일이 불가능했을 터였다. 세상 사람들은 인세에 사람의 눈 색깔조차 바꿀 수 있는 절세의 역용술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전 중원을 통틀어 윤승효로 분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천마뿐이다. 그리고 천마는 하오문주의 신분일 때는 천면인호千面人狐라는 별호로 불리는 윤승효에게 천면변환공을 가르친 역용술의 스승이기도 하다.
천마가 윤승효로 역용하면 윤승효 본인조차도 자기 자신을 의심할 정도로 완벽한데, 그런 두 사람의 차이를 꿰뚫어 본다는 것은 심안이 열린 고승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네 꼬맹이는 이제 고작 열두 살이 아니냐. 그런 어린애의 눈썰미와 다 큰 성인의 눈썰미를 비교해서는 안 되지.”
저간의 사정을 잘 알면서도 천마는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상대가 알아채길 바라는 건지, 못 알아채길 바라는 건지 알 수 없는 그의 태도에 윤승효는 어설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해가 지났으니 이제 열세 살입니다. 겉으로는 그리 보이지 않지만요…….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알았다면 분명 반응을 보였겠지요. 제가 손을 댈 때마다 다소 과민하게 구는 것 같긴 했습니다만, 듣자 하니 백조부님과 함께 있을 때도 똑같이 그런다면서요.”
“손을 대다니. 네가 그 녀석의 몸에 손을 댔다고?”
조금 잠잠해지나 싶더니만, 문평의 몸에 손댔다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천마의 눈초리에 다시금 불이 붙었다. 뜨끔한 윤승효는 서둘러 사태 진화에 나섰다.
“손을 댔다고 하니 이상하지만, 기실 그냥 어깨를 두드려 준 것뿐입니다. 겨우 손가락 끝만 살짝 닿았습니다. 살짝. 아주 살짝. 딱히 건드리고 싶어서 건드린 건 아니란 말입니다.”
어깨에 손가락 좀 닿은 것을 가지고도 저렇듯 예민하게 구는 천마를 보자니, 그가 손을 댔을 때 문평이 보인 반응이 조금 이상하긴 했다는 사실은 끝까지 함구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괜히 나서서 실토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설마하니 그 평범한 사내가 진짜로 눈치를 챘겠는가. 그냥 직감적으로 이질감을 느낀 정도에 불과했겠지.
윤승효는 애써 그렇게 믿으며 슬며시 치미는 불안감을 속으로 삼켜 버렸다. 이런 사실을 천마에게 들키면 진짜로 죽을 듯이 혼날 것 같아서 윤승효는 감히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어 고할 수 없었다.
“그 외에는? 그 외에 또 달리 저지른 것은 없느냐? 네가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이왕 얼굴을 드러낸 김에 욕심껏 사고를 쳤을 거라는 걸 내 이미 짐작하고 있다. 그러니 어서 털어놔 봐라. 또 무슨 짓을 한 거냐?”
문평의 일로 쓸데없이 화를 내긴 했지만 천마는 바보가 아니다. 윤승효가 천마를 아는 만큼, 천마도 윤승효란 놈이 어떤 놈인지 알고 있다. 그는 빈정거림이 가득한 안색으로 윤승효를 내려다보며 여죄를 털어놓기를 재촉했다.
천마의 정확한 추궁에 윤승효는 다시 웃었다. 하하하. 뻣뻣하게 굳은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걸리자 참으로 볼만했다.
“당문오독을 남강 어귀로 내려보냈습니다. 소가장에서 나온 앵속을 미끼로 썼는데, 미끼가 제대로 먹혔으니 귀주에 들어온 당문의 종자들은 죄다 그리로 몰려갔을 겁니다.”
운이 나빠 제대로 찾아갔다면 감히 ‘윤승효’를 핍박한 죗값을 치르겠지요. 생각만 해도 흐뭇한 듯 윤승효가 히죽 웃었다. 천마도 그 일은 딱히 나무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럴 여유만 있었어도 윤승효가 아니라 자신이 저지르고 싶었던 일이다. 천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만행을 추궁했다.
“그리고?”
“백조부님의 동행에게 여행 채비를 하라 당부했습니다. 소가장의 손아귀에서 구해 온 여자아이랑 같이 말입니다. 목적지는 호북성의 무한이라고도 미리 일렀고 말도 세 필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자들의 근거지를 찾아내셨으니 이제는 정도맹으로 가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가 실수한 건 아니겠지요? 지나치게 넘겨짚었습니까?”
윤승효는 비실비실 눈치를 보며 천마에게 물었다.
천마는 어이가 없어 하, 하고 낮은 코웃음을 치며 윤승효를 노려보았다. 일은 자기 멋대로 다 저질러 놓고 이제 와 자기 눈치를 보는 척하는 꼴이 퍽이나 가소로웠다. 뻔히 목적한 바가 있어서 만들어 놓은 일이면서 꼭 자신을 위해 그랬다는 듯 포장하는 저 솜씨라니.
이런 못돼먹은 버르장머리는 그의 제자들에게나 바랐었던 천마는, 막상 바라던 놈들에겐 싹도 보이지 않던 일이 의손자에게만 잎이 무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낮게 혀를 차고 말았다.
세상에 안 되는 것이 없던 천마건만 후인 교육만큼은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자질이 괜찮은 녀석을 넷이나 들였는데, 정작 그가 가장 바란 대로 자란 사람은 공들여 기른 제자가 아니라 심심할 때마다 물이나 줬던 곁가지 자리 의손자다.
이걸 마교로 끌어들일 수도 없고, 따로 써먹으려야 써먹을 수도 없고. 천마는 입맛을 다셨다. 이런 인재를 자기 뜻대로 부려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아니. 일 처리는 제대로 했다. 내가 입 댈 일도 없게 만들었으니 떠나는 것이 수월하겠구나. 하지만 네가 굳이 내 일을 대신 해 준 연유가 궁금하다. 일없이 남의 일에 손댈 네가 아닌데 어쩐 일이더냐? 나를 호북으로 보내고 싶어 할 만한 이유가 따로 있는 거냐?”
어젯밤의 일로 곽효가 아이들을 납치해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알아냈다. 그 시점에서 이미 납치 사건에 대한 관심은 사라진 천마였다.
윤승효가 잔꾀를 써서 당문을 그리로 보냈으니 희생될 아이들을 구하는 것은 이제 잘난 정파인들의 몫. 마무리를 위해 정도맹으로 가서 귀주에서 일어난 일의 진상을 알리는 것까지가 천마가 마음먹은 이번 일의 뒤처리였다.
그런데 윤승효는 그런 천마의 마음을 미리 읽기라도 한 것처럼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 놓았다. 입 안의 혀처럼 살가운 처리였지만 그런 일을 한 저의는 적잖이 의심스러웠다.
“제가 호북으로 보내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백조부님께서 그곳으로 가셔야 할 만한 일이 생겼습니다.”
윤승효는 그렇게 운을 떼더니, 싱긋 웃으며 천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웃는 얼굴이긴 했으나 녀석의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녀석이 이런 눈을 할 때마다 골치 아픈 소리만 늘어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천마는 이번에는 또 무슨 헛소리를 할까 궁금해하며 눈을 굴렸다.
“일전에 뵈었을 때 말씀드렸던 것 기억나십니까? 기린패에 대한 기이한 소문이 하북 땅에 퍼지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 소문이 들불처럼 번져 호북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심지어는 곳곳에서 기린패가 나타났다며 소동이 벌어져 벌써 수십 명의 무림인들이 죽거나 다쳤지요. 강호 전체의 인심이 흉흉해지고 있습니다. 조만간에 이보다 더 큰 일이 벌어질 듯한 예감이 듭니다.”
전에도 한 번 들었던 이야기의 연장이 윤승효의 입을 통해 이어졌다. 저번에도 한 번 거절 했던 주제가 또 나오는 게 아닌가 해서 천마는 짜증이 났다. 그는 싸늘히 코웃음을 치며 서슬 퍼렇게 대꾸했다.
“주체할 수 없는 욕심으로 명을 재촉하는 것은 저희들 탓이다. 나더러 그 멍청한 싸움에 끼어들란 말이냐?”
“아니 설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 그들의 다툼 사이에서 옥기린의 일행이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저기서 가짜 기린패가 튀어나오고 있으니 진짜의 향방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옥기린이 기린패의 행방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일이니, 기린패를 찾다 실패한 자들이 옥기린의 주위를 맴돌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윤승효의 분석은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러웠다.
“지금은 겨우 수십 명에 불과하지만 이제 곧 수백으로 불어날지도 모릅니다. 그 상황에서 옥기린이 기린패를 손에 넣게 된다면 일행 전체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은 불 보듯 뻔한 것. 제 눈에도 훤히 보이는 미래가 옥기린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겠지요. 그래서 옥기린은 지금 방향을 틀어 무한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정도맹에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입니다. 늦지 않게 도착하신다면 옥기린의 일행에 자연스럽게 합류하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제가 미리 준비를 해드렸던 것은 이 일 때문입니다.”
천마의 성질을 잘 아는 윤승효는 그런 만큼 비위도 잘 맞췄다. 제 실속대로 차릴 것은 다 차리면서도 욕을 안 먹게 하는 그의 처신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오문주다웠다.
“아, 그리고 이 옷, 가지고 가십시오. 낮에 이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이미 보았으니 차림새를 통일해야지요.”
속으론 못마땅하면서도 딱히 트집 잡을 일이 없어 가만히 있다는 걸 뻔히 아는 주제에, 윤승효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싱글벙글하며 손에 들고 있던 보따리를 천마에게 건넸다.
옷을 갈아입을 새가 없었던 탓에 찢어진 상의에 하의만 덜렁 입고 있던 모양새의 천마는 말없이 윤승효가 건네는 옷을 받아 들었다. 그러더니 그는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허리춤에 끼고 있던 흰 천을 꺼내 들었다.
본래는 상의 안에 걸치고 있던 속옷이었는지 바느질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는 흰 천에는, 숯으로 그린 정교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잊을 뻔했군. 이것을 개방에 전하도록 해라. 납치한 아이들이 생강시의 재료가 되고 있는 장소다.”
“설마, 강시였습니까?”
천마와 문평의 뒤는 쫓았지만, 막상 건예자와 맞닥트린 적은 없었던 윤승효는 생강시라는 말에 아프게 얼굴을 찌푸렸다. 강호인들을 납치해 강시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있지만, 아직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것들을 재료로 그런 것을 만들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천마가 단언했으니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천마는 정확하지 않은 말은 입에 담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직 동정을 잃지 않은 아이들에게, 다른 아이들의 정을 흡수하게 해서 만든 강시더군. 내가 보니 마치 고를 만들듯이 만드는 것 같았다. 하나를 만드는 데 다른 목숨 수십이 소용될 테니 그 수가 많지는 않겠지만, 하나하나가 초절정 고수가 아니면 상대하기 힘든 수준이다. 피조차도 지독한 독물이라 닿기만 해도 사람이 죽으니 그를 미리 당부해 두어라.”
고蠱는 본래 남만에서 나는 특이한 독충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중원에서는 그 고와는 달리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고가 따로 있다. 남만의 고처럼 영성을 가지고 사람을 조절하지는 못하지만, 독성만큼은 그보다 오히려 더 지독하다고 알려진 중원의 고는 독사, 전갈, 지네, 거미, 두꺼비라는 다섯 가지의 대표적인 독물을 가지고 만든다.
만드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흙으로 구운 단단한 단지 안에 서로 상성이 맞지 않는 다섯 개의 독물을 집어넣고 밀봉해 땅속에 묻어 둔다. 좁은 항아리 안에서 먹이도 없이 맞닥트린 독물들은 서로 치열하게 싸워 생명을 다투는데, 그중에서 가장 강한 한 마리가 나머지 독물들을 먹어 치우며 살아남아 고가 된다.
이렇게 만든 고는 다른 독물들의 독을 모두 흡수해 지독하게 강한 독을 품게 되는데, 이 독은 한 방울의 독으로 소 다섯 마리를 죽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런 꼴을 미물도 아니고 사람이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그깟 강시 하나 만들자고 죄 없는 어린것들을 얼마나 희생시켰단 말인가. 아연한 윤승효는 애꿎은 입술을 짓씹으며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얼마나 됩니까?”
“마지막으로 옮겨진 애들 정도가 고작일까.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애들이라도 살려야지요.”
“그렇게 빨리 일어날 일이 아니니 서두를 것 없다. 당문을 보냈다니 당분간은 무사하겠지. 개방에 연락을 보낼 거면 시간을 잘 계산해. 일단 당문이 생강시와 부딪힌 연후에 도착할 수 있도록 말이다.”
마음이 급한 윤승효와 달리 천마는 냉정했다. 윤승효가 당문을 그곳으로 보냈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계획이 완성되었다. 그는 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당문이 먼저 생강시들과 마주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당문에 적절한 피해를 입힐 뿐만 아니라, 생강시의 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기회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성품의 당문은 자신들의 피해가 커지면 아이들의 생사 따윈 상관없이 그냥 철수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의협심 하나만큼은 믿을 수 있는 개방을 뒤이어 보낸다. 이미 당문과 일차적으로 격돌한 이후이니 암중인들이 숨어 있는 계곡 안으로 진입하는 것은 보다 쉬워질 터. 게다가 그들에겐 천마가 직접 그린 지도가 있으니 아이들을 구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백조부님!”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 천마가 보이는 태도는 지나치게 건조했다. 자신이 나설 것도 없이 천마가 직접 나섰다면 지금쯤 아이들은 모두 구조되었을 텐데. 기껏 거기까지 가서 위치만 확인하고 돌아오다니,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
마인인 천마가 정파의 협사들처럼 인의를 지키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측은지심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죄 없는 어린 생명들까지도 외면할 수 있는 걸까? 화가 나고 서운했다. 심지어는 원망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윤승효는 실망한 눈빛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소리칠 것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라진 아이들의 운명 따위 관심도 없던 네가 아니냐. 설마 이런 꼴이 될지 몰라서 무심했던 것도 아닐 터인데, 새삼 원망이라니.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천마는 가소로운 반응을 보이는 윤승효를 향해 시린 냉소를 보냈다. 네가 그러니 위군자라는 게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더냐? 없어져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을 아이들만 골라서 끌고 갔는데, 사태가 이리될 거라는 걸 정녕 몰랐었다고?
“내가 홀로 구했다면 소문도 없이 조용히 끝났겠지. 그랬다면 중원은 저들 스스로가 지은 죄도 알지 못하고 잊었을 게다. 사라진 아이들이 기천이 되도록 아무도 몰랐다고? 정말 몰랐던 게 아니겠지. 제 이득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기에 모르는 척한 것이다. 너도 그와 다르지 않다. 너 역시 사라진 수백의 아이들보다 기린패의 행방에 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느냐.”
천마는 얼음으로 된 송곳처럼 날카롭게 웃으며 단정했다. 윤승효는 감히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천마의 말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임을 그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무슨 자격이 있어 나를 탓한단 말이냐. 정히 분하다면 소문을 내거라. 그들이 모르쇠로 눈을 돌렸던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 말로는 협의를 부르짖는 자들이 모르는 척 외면한 생명들이 끝내는 어떤 꼴을 당하고 말았는지. 그 모든 일을 세상에 알려 너 같은 위군자들을 부끄럽게 만들 거라.”
윤승효의 알량한 협의심은 천마가 눈앞에 들이댄 무자비한 진실 앞에서 초라해졌다. 말로는 천마를 탓했지만, 실상 자신 역시 천마가 아니었다면 이런 사안에 연루되지 않았을 것이다.
윤승효는 착잡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늦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았기에 그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어두운 낯빛을 한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의손자를 내려다보며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나마 이놈에겐 양심이라도 남아 있어 다행이다. 정파의 다른 놈들은 아예 그런 것도 없어서, 제가 진실로 잘못한 일을 앞에 두고서도 그 일을 인정할 줄 몰랐다. 입으로 지껄이는 말에 취해 자기 자신이 하는 행동은 돌아볼 줄 모르는 한심하고 어리석은 작자들.
그들은 저 스스로가 내뱉는 고귀한 말들을 쓰레기로 만들었다. 천마는 그래서 정파가 싫었다.
***
‘내가 꿈을 꿨었나?’
문평은 고개를 갸웃하며 앞서가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풍광 유람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말 위에 앉아 말을 몰고 가는 남자는 틀림없이 윤승효, 그가 맞았다.
그래. 윤승효였다. 그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정겨운.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을 뛰게 만드는 바로 그 남자. 지금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윤승효가 맞았다. 그의 모든 감각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잠시 동안이나마 문평을 혼란스럽게 했던 이질감은 그가 볼일을 마치고 의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냥 사라진 거였다. 아무런 이유나 납득도 없이. 원래부터 그런 것 따윈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갑자기.
처음부터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 느껴졌던 감정이 아니다. 그러니 아무런 징조 없이 사라지는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일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문평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자신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능적이면서도 원초적인 감각의 경고.
전장에 있을 때는 주로 목숨에 관련된 일에만 발현되던 것인데, 살기가 편하다 보니 고장이 났는지 이제는 그냥 마구잡이로 발동이 되는 모양이다. 문평은 손이 닿지 않는 등 한가운데가 간지러울 때나 느낄 법한 답답함을 느끼며, 무심결에 목덜미를 긁었다.
“어, 어??”
“엇. 미안. 괜찮으냐?”
엉뚱한 생각에 골몰하느라 말안장 앞에 어린아이를 앉혀 놓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을 타보는 아이는 겁에 잔뜩 질려 문평의 소매를 움켜쥐고 있다가, 그가 팔을 움직이는 바람에 그 손을 놓치고 위태롭게 비틀거렸다.
뒤늦게 아이의 존재를 깨달은 문평은 다급히 손을 뻗어 조그만 아이의 몸을 고정시켜 주었다. 아이의 몸은 너무 작았다. 손을 크게 펼친 것만으로도 아이의 등이 다 가려졌다. 잘못 쥐면 부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뼈로 지탱되는 허약한 육신. 아이의 어깨를 지탱해 주고 있자니 뼈도 다 자라지 못한 새끼 새를 손아귀에 움켜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안하다. 내가 딴생각을 하다 그만……. 안장이라도 꽉 잡으려무나. 그게 편하다면 그리해도 좋다.”
난처한 기분에 주섬주섬 변명을 주워섬기려던 문평은, 얼마 안 있어 자신의 말이 아이의 귀에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덩치 큰 사내를 본능적으로 무서워하고 있는 아이는 문평이 두려워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손을 대고 있는 작은 어깨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것을 느끼고, 착잡한 마음으로 아이의 몸에서 손을 뗐다.
그가 손을 떼고 나자 아이의 떨림이 다소 가라앉았다. 아이는 문평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 조그만 손으로 안장을 꽉 움켜쥐었다. 핏기 없는 손잔등에 힘줄이 돋을 정도로 힘껏 붙드는 것을 보니 이젠 소매를 잡는 것조차도 싫은 모양이다.
하다못해 일행 중에 여인이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문평은 그 점을 아쉽게 여겼다. 사내들에게 줄곧 험한 꼴을 당하는 바람에 사내라는 종자 자체를 무서워하게 된 아이에게 남자 둘뿐인 그의 일행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포의 대상이다.
문평이 생각하기에 저 아이에겐 따뜻한 여인의 손길이 필요했다. 세상을 떠났다는 아이의 어미처럼 아이를 넉넉히 감싸 안아주고, 아픈 상처를 호호 불어서 낫게 해줄 따사로운 성품의 여인이 말이다.
“어딜 가는 거예요, 나만 빼놓고? 지금 나 몰래 도망가는 거죠?”
……내가 바라던 것은 저런 철없는 꼬맹이가 절대 아닌데.
누군가가 그의 생각을 읽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시의적절하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상대는 그저 성별만 여자일 뿐 어린 데다 발랑 까지기까지 한, 아무리 봐도 가출한 게 틀림없는 어린 소녀였다.
문평은 고르지 못한 숨을 헉헉 들이쉬며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은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자묘랑. 고양이 아가씨라는 아명에 걸맞게 앙칼지기 그지없는 눈매의 소녀가 그 뾰족한 콧대를 한껏 치켜세우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소저는 아직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문평이 한 생각을 윤승효도 똑같이 했던가 보다. 그는 문평이 속으로만 했던 말을 겉으로 꺼내며 침착하게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녹의홍상綠衣紅裳을 입은 꽃다운 소녀와 백마를 타고 있는 흰색 문사의의 청년이 서로 마주 보고 있으니 옆에서 보기엔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속내를 살펴보면, 소녀 쪽에서는 어떻게든 청년을 덮쳐 두 사람의 관계를 기정사실로 만들려고 하고 있고, 청년은 그를 경계하며 피하고 있으니 막장 중에서도 막장이다.
“출관한 후 나왔으니 상관없어요.”
“소저가 정말로 환희루 사람이라면, 춘관春關뿐만이 아니라 추관秋關까지 거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귀 루의 상례상 출관은 춘추관을 모두 거쳐야 정식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아는데요.”
돌려 말하고 있지만 뜻은 간단했다. 너 가출한 거 아니까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거다. 하지만 소녀는 그 말을 듣고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체 뭘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태도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다.
“저는 이미 춘추관을 다 거쳤어요. 정식 출관한 거 맞아요.”
자묘랑은 어깨를 으쓱하며 주장했다. 윤승효는 그 말을 듣고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소저의 나이는 이제 겨우 열두 살이지 않습니까? 춘추관을 모두 끝내려면 적어도 4년은 걸린다고 들었습니다만.”
춘추관? 출관? 환희루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문평에게는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고 가기 시작했다.
“열세 살이에요. 해가 지났으니까.”
“그런데도 정식 출관했다?”
“그래요.”
“소저는 천재였군요. 소생이 알기론 귀 루에서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춘추관을 통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현 루주가 되시는 반천호접盤天虎蝶조차도 춘추관을 끝내는 데 2년 반이 걸렸었지요.”
윤승효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문평은 자묘랑이 제 입으로 열세 살밖에 안 됐다는 소리를 시인했을 때 깜짝 놀라 하마터면 말에서 굴러떨어질 뻔하고 말았다.
‘열, 열세 살? 저 키에 저 얼굴로 이제 겨우 열세 살이라고?! 철이 없는 게 아니라 조숙하게 보이는 거였군. 이제 열세 살이라니. 그 나이면 처녀도 아니고 아예 어린애잖아.’
훤칠하게 큰 키와 조숙한 얼굴을 보고 적어도 열예닐곱은 되었으리라 짐작하고 있던 문평은 기가 찼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서 다시 생각해 보니 과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도 같다.
자묘랑은 자신과 윤승효가 열 살 때 장래를 약속했다고 주장했었다. 곧이어 팔찌를 받은 후로 2년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 윤승효가 변심했다고도 했다. 두 이야기를 합쳐서 생각해 보면 지금 나이가 딱 나온다. 외견에 눈이 멀어 문평이 지레짐작을 했던 것일 뿐 소녀는 처음부터 자신의 나이를 밝혔던 셈이다.
“저희 환희루에 대한 이야기는 바깥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데, 외인치고는 너무 상세히 아시는군요. 어쩐 일이세요. 가가? 이제 저를 다시 아는 척하기로 하신 건가요?”
자묘랑이 뾰족한 태도로 되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래도 공손한 척이라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 사이에 여러 가지로 맺힌 게 많았는지 윤승효에게도, 문평에게 그랬던 것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다.
“소생이 아는 것은 환희루지 소저가 아닙니다. 곡해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시치미를 떼겠다는 건가요? 그런 식으로 절 무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 윤 모는 단 한 번도 소저를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소저께서 소생을 무시하셨지요. 소저께서 이제껏 소생이 한 말을 한마디만 귀담아들으셨더라도 이런 실랑이는 벌이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소저. 비켜 주십시오.”
“못 비켜요. 개양을 떠날 거라면 저도 데리고 가세요.”
곱게 큰 어린아이의 고집은 지독했다. 자묘랑은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며 윤승효의 앞을 막아섰다. 이제는 몰래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고 아예 데리고 다니란다.
같이 가지 않으면 길을 비키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자묘랑의 의사는 굳건했다. 윤승효는 조용히 자묘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푸른 눈에 순간적으로 새파란 한망이 흘렀다.
“저희는 호북의 무한으로 갈 겁니다. 그래도 같이 가실 겁니까?”
호북성의 무한은 일반 백성들에겐 동호로 유명한 곳이지만, 강호인들에겐 그보다는 중원 정파의 총본산 정도맹의 본성이 있는 곳으로 더 이름 높다. 그곳에 사마외도로 이름 높은 환희루의 소루주가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하지만 자묘랑은 여타의 사정 따윈 생각지도 않고 고개부터 끄덕였다. 따라가겠단다. 그녀의 조그마한 얼굴에선 윤승효의 곁이라면 지옥이라도 같이 가겠다는 굳은 결의가 엿보였다.
“같이 가겠어요.”
고갯짓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자묘랑은 다시 말을 덧붙여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윤승효는 서늘한 시선으로 자묘랑을 내려다보더니, 힐끗 눈을 돌려 자묘랑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뭐가 있는가 싶어 문평도 그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지만 특이하다고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등짐장수 하나가 멀리서 다리를 쉬고 있는 광경이 보일 뿐, 굳이 눈을 돌려 확인해야겠다 싶은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정 그러시다면. 마침 저희에게 말이 한 필 더 있군요. 필요하시다면 저 말을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좀처럼 허락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윤승효가 갑작스레 마음을 바꿨다. 소녀를 떼어 놓으려면 오랜 실랑이가 필요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던 문평에게도 의외였지만, 고집을 부리고 있던 소녀에게는 더 의외였던 모양이다.
자묘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승효를 올려다보았다. 진의를 의심하듯 가늘어진 눈초리가 윤승효의 표정을 훑는다.
그러나 윤승효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빙긋 웃기만 할 뿐, 자신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다. 그럴 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 정말로 말을 내주라고 문평에게 부탁까지 해왔다.
자묘랑은 얼떨떨해하면서도 말에 올라탔다. 자묘랑이 타고 있는 말은 본래 아이의 몫으로 데려왔던 것으로, 교미도 시킨 적이 없는 어린 암말이었다. 승마에 익숙하지 않을 아이를 위해 일부러 가장 순한 놈으로 골라 온 터였는데, 승마를 해 보기는커녕 말 자체도 난생처음 본 빈민가의 아이에겐 그조차도 버거웠다.
하는 수 없이 문평은 아이를 자기 앞자리에 태웠다. 하지만 그 동행은 아까도 묘사했듯 서로에게 불편한 동행이었다. 우연히 신체가 닿을 때마다 아이가 눈에 띄게 놀랐고, 그런 아이의 반응 때문에 문평까지 덩달아 놀라는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대신이라고 하면 뭣하지만, 자 소저. 저 아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석 형이 감당하기엔 어려운 아이이니 자 소저께서 저 아이를 돌봐 주십시오. 그런 조건이라면 동행을 허락하겠습니다.”
자묘랑이 말에 올라타고 나자, 윤승효가 다시 말했다. 윤승효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아이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자묘랑이 의아한 눈길로 문평을 돌아본다. 같은 여자인데도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아이가 그 시선 앞에 조그맣게 어깨를 움츠렸다. 덩치가 큰 문평의 앞자리에 앉아 있어서 더욱 작아 보이는 아이를 그제야 발견한 자묘랑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쪼끄만 꼬맹이네요. 저 정도야 기꺼이 감당할 수 있어요. 이봐. 꼬마! 이리 와. 여기에 앉아. 내가 이제부터 널 돌봐 줄게.”
나이로 따지자면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것 같은데, 본인은 완전히 어른 같은 기분인 모양이다. 자묘랑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아이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아이가 그 손짓에 흠칫 겁을 먹었다.
그러나 자묘랑은 아이의 기분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코 제 앞에 태우고 말았다. 놀라 부들부들 떨면서도 한마디 말도 못 하는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자묘랑에게 끌려가 그녀와 동행이 되었다.
문평은 자신의 작은 몸놀림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아이에게서 벗어나자 어깨가 가벼워졌다. 몰랐는데 은연중에 꽤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문평은 꼿꼿하게 세웠던 허리에서 힘을 빼며 한숨을 쉬었다. 윤승효가 웃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이제 좀 편하게 가겠지요, 석 형? 속도를 좀 올립시다. 이러다간 오늘 저녁 내로 여경余慶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짐 덩어리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었는데도 윤승효의 얼굴은 이상하게 해맑았다. 남의 짐을 맡은 게 아니라 남에게 짐을 떠넘기기라도 한 것 같은 태도다. 문평은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그를 따라 말을 출발시켰다.
세 필의 말이 관도를 따라 나란히 달렸다.
하나는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순백의 백마고, 다른 하나는 늠름하게 어깨가 벌어진 흑마다. 자그마한 암말은 그 조금 뒤에서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다른 말들보다 체구도 작고 다리도 짧았지만 싣고 있는 무게가 가벼워서인지 발걸음이 경쾌했다.
물론 그 말을 몰고 있는 이들은 윤승효의 일행이다. 비단 화복을 화려하게 차려입어 멀리서도 귀공자로 보이는 윤승효가 백마를, 수수한 청의 차림인 문평이 흑마를, 꽃단장을 한 자묘랑과 자옥이 암말을 함께 탔다.
그림만 봐서는 윤승효를 필두로 한 부잣집 자제들을 호위무사인 문평이 모시고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묵었던 객잔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보았다. 오해라고는 하지만 별반 상관이 없는 문제다. 일부러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알아서들 생각해 주니 딱히 위장에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배고파요. 밥 먹고 가요.”
뒤에서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혀가 입천장에 붙은 것 같은 자옥이 한 말일 리는 없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밝히는 데 주저함이 없는 자묘랑이 하는 말이다.
문평은 때가 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밥 타령하는 소녀를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보았다. 한창 자랄 때라고는 하지만 여자아이가 저렇게 먹는 걸 밝히는 건 처음 본다. 몰랐는데 사내애들뿐만 아니라 여자애들도 성장기엔 저렇게 먹성이 좋은가 보다.
“앞으로 십 리는 더 가야 마을이 나옵니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저 앞에 객잔이 보이잖아요. 그냥 저기로 들어가요.”
자묘랑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길손들을 상대로 하는 간이 객잔이었다. 관도 옆에 자리 잡은 허름한 점포에 탁자 몇 개를 늘어놓고, 뜨내기손님을 받아 근근이 장사하는 곳. 맛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허기를 채울 수는 있을 듯했다.
“어떻습니까, 윤 형? 저기서 끼니를 때우고 갈까요?”
문평은 윤승효의 의견을 물었다. 한 번이라도 끼니를 거르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아는 자묘랑을 데리고 다니다 보니, 애를 어떻게 하면 조용히 데리고 다닐 수 있을지 방법을 터득했다.
먹여야 할 때는 일단 먹이고, 재워야 할 땐 재운다. 겉보기와 달리 애는 애인지라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감당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문평이 터득한 진실을 윤승효도 깨달았는지 그는 문평의 제안에 반대하지 않았다.
일행은 간이 객잔 앞에서 말을 세웠다. 점소이도 없이 주인 혼자서 장사를 하는 곳이다 보니 맞이하러 나오는 사람도 당연히 없다. 자옥을 이끌고 말에서 내린 자묘랑이 문평에게 말고삐를 넘겼다. 문평은 아무 생각 없이 말에서 내리다가 의아해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건 뭡니까?”
“뭐긴 뭐예요. 말고삐지?”
문평이 의아한 만큼이나 자묘랑도 의아한 모양이다. 그녀는 문평이 왜 자기 말고삐를 잡지 않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다 그냥 고삐를 놓았다.
얼떨결에 그녀의 고삐를 잡아 쥔 문평은, 감사의 인사조차 하지 않고 돌아서는 자묘랑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자신이 말구종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문평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그녀가 고의적으로 모욕을 주기 위해 그런 거였다면 문평도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자묘랑은 아무런 의식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아무래도 그녀는 문평을 자신의 아랫사람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녀가 뭘 시키면 당연히 일을 해야 하는, 하인이나 몸종쯤으로 말이다.
“이리 주십시오. 제가 말을 매어 놓겠습니다.”
문평이 당하는 꼴을 옆에서 지켜보던 윤승효가 담담히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별로 불쾌하다는 티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말을 매어 놓겠다고 먼저 나서는 것을 보면 자묘랑의 태도가 탐탁지 않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아니. 제가 하는 것보다는 자 소저를 불러서 매게 하는 편이 낫겠군요. 자기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법입니다.”
문평에게 손을 내밀던 윤승효는 그러다가 생각을 바꿨다. 이치를 따지는 데 엄격한 윤승효는 정말로 묘랑을 부르려고 했다. 괜한 소란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았던 문평은 애써 그를 만류했다.
“괜찮습니다. 이왕 손에 쥔 것, 오늘은 제가 매겠습니다. 어린 아가씨라 말을 맬 줄 모르는 모양이지요.”
사나이에겐 언제나 자존심이 중요한 법이다. 연심을 가진 상대 앞에서 새까맣게 어린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고, 그에 더해 징징거리는 꼴까지 보일 수 없었던 문평은 짐짓 대범히 말했다.
“모른다면 배워서라도 익혀야지요. 모른다고 내버려 두면 언제까지나 계속 모르게 됩니다.”
정론이긴 하지만 자묘랑에게도 통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한 번쯤은 봐줘도 됩니다. 그냥 들어가십시오. 배가 고프니 식사를 먼저 시켜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를 데리고 드잡이질하는 게 뭐했던 문평은 말 그대로 이번 한 번만은 참기로 하고 말들을 나무에 매었다. 윤승효는 못마땅한 듯 문평을 지켜보았지만 더는 만류하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자리에 돌아와 보니 상 위에 사람 수대로 담담면擔擔麵 그릇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외에 다른 음식은 팔지 않는 모양인지 담담면 외에는 만두조차 보이지 않았다.
담담면은 사천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운 면 요리인데, 마찬가지로 매운 요리가 특징인 귀주에서도 인기가 있는지 간간이 이렇게 요리하는 집을 찾아볼 수 있었다. 매운 음식이라 더운 날씨에도 잘 상하지 않으니 길거리에서 팔기에 적당한 모양이다.
“랄초3) 기름 좀 더 갖다주시겠어요? 약간 싱겁네요.”
문평이 아직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자묘랑이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도 그녀는 겸양의 말조차 없이 코끝으로 사람을 부리려 들었다.
문평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윤승효가 서늘한 눈빛으로 자묘랑을 돌아본다. 그러나 눈치 없는 그녀는 두 사내가 왜 자신을 쳐다보는지 알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랄초 기름, 몰라요? 담담면에 뿌려 먹는 거요. 사천에선 다들 그렇게 먹던데.”
‘그걸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지 이 아가씨야. 네 태도가 문제라고.’
문평이 한 번 거절해서일까. 이번에는 윤승효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담담히 자묘랑을 바라보고 있기만 할 뿐인데 왠지 몰라도 그 태도가 자못 두렵다. 어디까지 하는지 두고 본다는 느낌이랄까. 잘못 대처하면 자기까지도 혼날 것 같은 그 기세에 문평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직접 가서 찾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는 아직 젓가락도 못 들었습니다만.”
“일어서 있는 김에 해주면 좀 어때서 그래요? 내가 어려운 걸 시킨 것도 아닌데.”
넌 뭐가 모자라 그런 것도 못 하냐는 시선이 되돌아왔다. 이 아가씨는 아예 문제의 근본조차 파악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진 문평은 한마디 말을 더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자묘랑이 선수 쳤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자옥을 내려다보더니 손수건으로 그 입매를 닦아 주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얘 얼굴 좀 봐. 홍초 같네. 담담면이 너무 매웠나 봐요. 아저씨, 차 좀 갖다줘요. 얘 이러다 속 버리겠어요.”
문평의 눈에도 자옥이 매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린 게 맵다는 말도 못 하고 눈에 눈물만 그렁그렁한 채 쩔쩔매는 게 너무도 안돼 보여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차를 가지러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자묘랑이 다시 소리쳤다.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 그리고 가는 김에 랄초 기름도 갖다주세요!”
주인에게 달려가던 문평이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그러나 이왕 가는 길에 까짓 그거 하나 더 갖다주는 건 일도 아닌지라 그만 포기해 버리고 만다. 문평이 차와 함께 랄초 기름을 가져다주자 자묘랑이 당연한 듯 그것을 받았다. 문평은 아무 소리도 않고 그저 한숨만 쉬며 식탁 앞에 앉았다.
‘병신.’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던 천마는 구제할 수 없는 멍청이인 문평을 향해 입모양만으로 중얼거렸다.
저 녀석을 보면 지 팔자는 지가 만든다는 말이 떠올랐다. 자묘랑같이 기가 센 어린애에게 초장부터 얕잡아 보이다니 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걸까? 하는 꼴을 보니 앞으로도 계속 밥이 될 공산이 크다.
강한 자 앞에서는 부러질 때까지 뻗대면서 자기보다 약한 것 앞에서는 저리도 무르게 굴다니. 살다 살다 저렇게 처신을 못 하는 놈은 처음 봤다. 자신의 앞에서는 그래도 제법 버티기에 적어도 제 밥그릇은 찾아 먹고 살 줄 알았는데. 내가 설마 저놈을 잘못 봤던 것일까.
……그가 잘못 본 게 맞는가 보다. 간이 객잔에서의 일을 계기로 문평은 완전히 자묘랑의 하수인이 되고 말았다. 자묘랑은 당연하다는 듯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모두 문평에게 떠넘겼고 문평은 기가 막힌 얼굴을 하면서도 거절을 못 하고 아이의 부탁을 모두 들어주었다.
자기 딴엔 어린애랑 싸우기가 싫어 그러는가 본데, 보는 천마의 입장에선 그냥 병신 같은 짓만 골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싸워봐. 거절해야지. 세경 받는 머슴도 아니면서 뭐 하러 시키는 족족 일을 다 해?’
천마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면서 문평이 거절하기를 기다렸다. 못할 게 뭐 있는가. 자신에게도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았던 문평 아닌가. 천마는 문평이 자묘랑의 억압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겐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보다 철모르는 어린애가 더 어려울 수도 있는 모양이다. 문평은 며칠이 지나도록 끝내 자묘랑에게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했다.
기다리다 못해 분통이 터진 천마는 열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오냐, 그렇다 이거지?’
화가 나면 반대로 가는 성향이 있는 천마는 오기가 생겼다. 그는 자기도 문평을 막 부려 먹기 시작했다.
덕분에 문평은 일행의 공식적인 하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자묘랑만으로도 모자라 윤승효까지 왜 이러는지 몰라 고민하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신세를 감내했다. 아니 실은, 윤승효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아니까 더 말을 못 했다.
문평은 윤승효가 하는 행동을 무조건 좋게만 해석하기에 그가 자신에게 화풀이한다고는 미처 생각 못 하고, 거절 못 하는 자신을 질책한다고만 여겼다. 그래서 문평은 외려 윤승효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
“이대로라면 점심나절 안으로 소양현邵陽縣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점심을 먹고 배를 수배하면 저녁 안으로 출발이 가능할 겁니다.”
개양에서 출발한 후 하루에 이백 리씩을 달려 닷새 만에 호남성에 들어섰다. 윤승효가 골라온 말은 하나같이 준족駿足이었고, 무공을 익힌 기수들은 하루 종일 말을 달리면서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일행 중에 몸이 아픈 아이가 없었더라면 그보다 더 속력을 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윤승효가 무엇 때문에 서두르는지 알고 있는 문평은 그의 뜻을 묵묵히 따랐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빠르다며 짜증을 부리던 자묘랑 역시, 문평이 무슨 일로 무한으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자 더는 불평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석 형. 오늘은 소양현에서 묵을 생각입니다. 출발은 내일 아침에 합니다.”
문평의 의견을 들은 윤승효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문평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소양현까지는 관로를 타고, 거기서부터는 자수資水를 타고 동정호洞庭湖로 내려가는 배편을 알아본다는 것은 사전에 약속되어 있던 일정이다. 하지만 거기서 반나절가량 쉬어간다는 것은 지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문평은 말을 달리며 자묘랑을 돌아보았다. 혹시 네가 졸랐냐는 물음이다. 자묘랑은 붕붕 고개를 내저으며 격렬히 부정했다. 피곤해서 얼굴이 노랗게 질린 아이는 아예 논외였다. 저 아인 길을 떠난 후 단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었다. 아이는 또래도 비슷하고 성별도 같은 자묘랑하고도 말을 하지 않은 채 병든 새처럼 줄곧 움츠리고만 있어서,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 문평의 마음을 속상하게 했다.
“그곳에서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자신도 아니고, 자묘랑도 아니고, 아이는 더욱 아니고. 그렇다면 소양현에서 쉬는 원인은 윤승효에게 있다는 소리가 된다. 궁금해서 다시 물어봤더니 윤승효가 웃었다. 그러더니 또다시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내뱉어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말도 없이 천 리를 달리고 나면 제아무리 고수라도 피곤할 테니까요. 그러니 하루쯤은 쉬게 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말도 없이 천 리를 달리면 죽을 것같이 힘들다는 사실은 문평도 잘 안다. 그러나 누가 그렇다는 소린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문평은 의문 어린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특별히 따라오는 것처럼 보이는 자는 없었다. 저 멀리 까마득한 곳에서 사람 그림자가 비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명색이 관도인데 지나는 행인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윤승효는 문평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고 말을 달렸다. 문평은 그를 따라 말을 달리며, 저 사람도 참 모를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어쩌면 저렇듯 수수께끼 같은 면모가 있어 더욱 끌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존재 앞에서 신비를 느끼곤 하니 말이다.
‘첫사랑치곤 참 근사한 인간이긴 하지. 남자라서 문제지만.’
문평은 한숨 어린 어조로 생각하며 말의 배를 걷어찼다. 놀란 흑마가 길게 울더니 속력을 높인다. 한적한 관도 위에 말발굽 소리만 요란히 울려 퍼졌다.
***
호남성 중부에 위치한 소양현은 자수資水와 소수邵水의 합류 지점에 있어 일찍부터 수로가 발달한 도시이다. 물이 좋은 곳이기도 하지만, 그런 만큼 산도 좋아서 량산莨山과 같은 이름난 명산을 품고 있기도 했다.
소양현의 거리는 번화했다. 나루터를 낀 외곽 지역에서부터 형성된 시장 거리는 현의 북쪽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고, 상인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들의 물건을 팔기 위해 애썼다. 호남성은 농수가 풍부하고 땅이 기름져서 예로부터 곡창 지대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 그에 더해 수량이 풍부한 강까지 끼고 있다 보니 시장은 한층 더 활기를 띠었다.
윤택한 차림의 아낙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았다.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거지보다는 깨끗한 옷차림의 어린아이들이 더 많다. 소란스러운 만큼 정겹기도 했다. 문평은 말을 탄 채 천천히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다. 좁은 길을 비집고 가는 터라 속력을 낼 수 없었다.
“우선 객잔부터 잡고 움직입시다. 말을 맡기고 나면 석 형은 나와 함께 갈 데가 있습니다.”
왁자지껄한 소음을 뚫고 윤승효가 말을 붙여왔다. 문평은 고개를 돌려 윤승효를 돌아보았다. 하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자묘랑이 새치기를 했다.
“저도, 저도 함께 가요. 저도 따라가고 싶어요.”
자묘랑은 손까지 흔들며 열렬히 말했다.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일행에 합류하게 된 게 기회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어떻게든 윤승효의 마음을 돌려 보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
같은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 문평이 보기엔 얄미우리만큼 적극적인 태도였으나, 그는 자묘랑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선천적으로 미인과 여자에게 약하게 태어나기도 한 데다 자묘랑의 나이까지 발목을 잡아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묘랑의 나이는 이제 열세 살. 겨우 열세 살이다. 해가 지나 서른네 살이 된 문평은 자기 나이의 삼분의 일밖에 안 되는 소녀를 진지하게 견제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윤승효에게 자기 마음을 전할 생각도 없이 이 마음이 그냥 사그라지기만 바라고 있는 그이니만큼, 까마득하게 나이 어린 경쟁자의 등장은 전의를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만 키웠다. 자신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린 사람을 흠모하게 된 것만으로도 부끄러운데, 그보다 스무 살도 더 어린 여자아이가 연적이기까지 하니 문평이 힘이 날 리 없었다.
문평은 흐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도 같이 가라고 말해줘’라고 열심히 눈짓을 하는 소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데리고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객잔에 아이들끼리만 놔두기도 뭐한데요.”
그렇다고 해서 자묘랑이 마냥 기껍기만 한 것은 또 아니다. 문평은 자묘랑이 싫어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그녀를 ‘아이’라고 불렀다. 티를 내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긴 하지만 그도 인간인 이상 일말의 심술만큼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자묘랑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하루빨리 윤승효와 신방을 차리는 것을 염원하는 그녀는 남들이 자신의 나이를 상기시키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어디서 얻은 근거인지는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윤승효가 자신을 거절하고 있는 이유가 지나치게 어린 나이 때문이라고 믿게 된 그녀는 본인의 나이를 윤승효와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겼다.
“아이들을 데려가는 건 번거롭지 않겠습니까?”
윤승효는 문평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왜 자꾸 아이들이라는 거야. 나는 춘추관도 이미 끝냈는데.”
옆에서 자묘랑이 투덜거렸지만 윤승효는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진지한 시선으로 문평을 바라보며 그의 의견만을 물었다.
“가고 싶다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지요.”
그것으로 자묘랑의 동행이 결정되었다. 자묘랑이 움직이는 바람에 자옥도 덩달아 동행하게 되었다. 일행 중 누구도 자옥을 객잔에 혼자 두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당한 객잔에 짐을 맡기고, 윤승효가 문평을 데려온 곳은 다름 아닌 포목점이었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문평은 윤승효와 함께 포목점에 들어서며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히 전에도 윤승효랑 포목점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저 맹랑한 꼬마 아가씨와 처음 만났었으니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는 기억이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포목점이라니요. 우리가 또 어딘가로 잠입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저번에 포목점에 들렀을 때는 개양의 도박장에 잠입하기 위해 비단옷을 샀었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문평이 미심쩍게 질문을 던졌다. 윤승효는 경쾌한 태도로 문평의 의문을 시인했다.
“네. 있습니다.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살벌한 장소 중 하나지요. 그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그에 걸맞은 무기가 필요합니다.”
윤승효는 대답을 마친 후 점원에게 가장 좋은 비단을 내어 달라고 부탁했다. 비단이라는 소리에 자묘랑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녀는 자옥의 손을 끌다시피 하고 다가와 눈을 빛냈다.
“비단옷 지어 주시려고요, 윤 가가? 저희에게도 지어 주실 건가요?”
살랑살랑 기분 좋게 흔들리는 꼬리가 보일 정도로 살가운 태도로 자묘랑이 물어보았다. 애교 만점인 자묘랑과 달리 주춤주춤 자묘랑을 따라온 자옥은 고개만 푹 숙이고 말이 없었다. 고운 옷 따위엔 관심이 없는지 주위에서 곱게 염색한 색색의 천이 빛나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아이의 왜소한 어깨가 초라했다. 문평은 그런 아이를 보며 내심 고개를 저었다.
“자 소저께서는 이미 아름다운 옷을 여러 벌 갖고 계신데 그럴 필요가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옥이에겐 한 벌 필요하겠군요.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너무 누추해 괜한 시선을 끌고 있으니까요.”
자묘랑의 말을 받는 윤승효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자상하고 차분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매정해 보이기도 했다. 애교까지 부렸는데 거절당하고 자존심이 상한 자묘랑은 입술을 비죽이며 뒤로 물러섰다. 윤승효는 모르는 척 몸을 돌려 점원들이 내온 비단을 받아 들었다.
“아니, 이런 것 말고. 소주에서 들여온 비단은 없는가? 가능하면 소수蘇繡4)가 놓인 것이었으면 하는데.”
소주는 사주지부絲綢之府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비단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소주 비단은 중원에서 나는 비단 중에서도 가장 귀하게 취급되는 것으로, 그와 격을 같이 하는 것은 오로지 항주의 비단뿐이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소주에는 예로부터 자수 놓는 법이 발달하였다. 소주의 자수는 소수라 하여 중원의 4대 명수 중에서도 으뜸으로 칠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데, 덕분에 소수를 놓은 소주 비단은 같은 무게의 은가銀價로 거래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한 내력의 비단을 윤승효가 찾자 점원의 얼굴에 돌연 생기가 돌았다. 산지에서도 엄청난 값을 부르는 비단인데 성을 넘어왔으니 더욱 비싼 것은 불문가지의 일.
점원은 생기발랄한 얼굴을 하고 얼른 창고로 뛰어갔다. 어느새 그의 말을 들었는지 심지어는 멀찍이 서 있던 주인까지 다가와 윤승효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문평은 당황해하며 윤승효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 정도면 아이에게 입혀도 되겠다며 한 번 물리쳤던 비단을 자옥에게 대보고 있던 윤승효가 고개를 돌려 문평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석 형.”
“아니, 그게. 혹시나 해서 묻는 거긴 합니다만, 윤 형. 소주 비단을 찾으시는 게 설마하니 저에게 옷을 해주시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아니라고 그러면 부끄럽겠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문평은 소심한 태도로 머뭇머뭇 질문을 던졌다. 윤승효는 그가 어렵게 질문하는 것을 듣더니,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갑자기 그런 것을 묻는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석 형께 무기를 장만해드리러 왔다고 말입니다. 저에겐 쓸 만한 옷이 제법 있습니다. 자기 몫이 없는 것은 석 형이지요.”
“대체 어딜 가기에 이런 과한 준비를 하십니까. 설마 황궁이라도 들어가는 겁니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황궁보다 무서운 곳입니다. 고운 옷차림과 그럴듯한 겉치레가 없으면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곳이지요. 저는 석 형이 그곳에서까지 무시당하는 꼴은 볼 수 없습니다. 거기서까지 석 형이 하인 취급을 받아야 쓰겠습니까.”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가히 좋은 곳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좋은 곳이기는커녕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사람 같다. 애써 유지하고 있는 온화한 말투 속에 영문 모를 사심이 득실득실 들끓고 있는 것을 느끼며 문평은 눈을 깜빡였다. 무엇 때문에 윤승효가 이렇게 이를 갈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도맹으로 가는 중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중간에 다른 곳에 들르기라도 하는 모양이지?’
“여기 있습니다. 찾으시던 소주 비단입니다. 소주 비단 중에서도 이름난 장인이 몇 달을 걸쳐 수놓은 소수가 놓여 있는 최상품의 물건이지요. 자랑은 아닙니다만, 이 정도로 품질 좋은 소주 비단을 갖고 있는 집은 소양현 전체를 통틀어도 저희 집밖에 없습니다.”
점원이 자랑스럽게 내놓는 비단은 모두 일곱 필이나 되었다. 이 집 창고에 있는 소주 비단은 죄다 꺼내 온 모양이다.
적색, 청색, 황색, 홍색, 옥색, 백색, 자주색. 현란하게 아름다운 칠색 비단이 윤승효의 앞에 펼쳐졌다. 눈앞에서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았다. 함초롬하게 고개를 떨군 동백의 문양 위로 살아 있는 듯 생생한 사마귀가 뛰어다닌다.
그 자체로도 이미 완성된 예술인 것처럼 빛나는 비단들을 보며 문평은 넋을 잃었다. 이런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으려면 대체 얼마나 큰돈을 내야 할지, 그로서는 계산이 서질 않았다.
“앗, 이건 완전히 제 것이네요. 저를 위한 비단이에요!”
윤승효에게서 딱 잘라 넌 안 사준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단단히 삐져 있던 자묘랑이 돌연 호들갑을 떨며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기뻐하며 집어 든 것은 개나리꽃처럼 여린 노란빛이 인상적인 아름다운 비단이었다. 그 비단에 새겨진 자수는, 소수 문양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는 고양이 문양이다.
노란 비단 위에 새하얀 고양이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진짜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털 한 올 한 올까지도 섬세하게 수놓아진 고양이들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놀이터 안에서 자기들끼리 뒹굴며 놀았다.
자기가 삐져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완전히 잊어버린 자묘랑은 홀딱 반해버린 얼굴을 하고 비단에 뺨을 비볐다. 그녀의 두 볼이 사랑스러운 홍조를 띠었다. 그녀는 어리광이 가득한 목소리로 윤승효에게 말했다.
“전 이걸로 사주세요, 윤 가가. 이거면 돼요.”
윤승효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주겠다 혹은 안 사주겠다는 대꾸도 없이, 그냥 물끄러미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다.
마음에 꼭 드는 비단을 발견하는 바람에 잠시 상황을 잊었던 자묘랑은, 윤승효의 조용한 시선을 받고서야 그가 자신에게 비단을 사주지 않겠다고 말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니, 그러니까 이건…….”
자묘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안하고 자존심이 상한다. 내가 왜 그 말을 잊어버렸을까.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저질렀던 실수를 원망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일까지 윤승효에게 말도 안 걸겠다고 다짐했던 결심을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망신을 자초하고 말았다.
단둘이 있는 자리도 아니고 저 얄미운 석문평도 같이 있는 자리인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문평이 윤승효와 잤다는 이유로 그를 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묘랑은, 연적 앞에서 망가진 체면을 속상하게 여겼다. 더불어 자신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도 끝까지 모르는 체하는 윤승효에게 야속함을 느꼈다. 해도 너무한다. 어떻게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매정할 수 있는 걸까.
“자, 잠깐 말실수를 한 거예요. 원래부터 내가 사려고 한 건데 깜빡하고 그만. ……이거 얼마죠? 내가 살 거예요.”
자묘랑은 무너진 자존심을 수습하기 위해 얼른 말을 바꾸며, 점원을 돌아보았다. 기묘한 표정으로 자묘랑을 바라보고 있던 점원이 비단의 가격을 말해 주었다.
“금자 세 냥입니다.”
은자 열 냥이면 한 가족이 한 달 동안 살 수 있는 시대다. 금자로 세 냥이라면 은자로는 육십 냥. 한 가족이 반년을 놀고먹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어린 소녀가 그렇게 큰 금액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여행에 필요한 경비 정도는 갖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은자 부스러기. 부유하게 자라긴 했지만 직접 물건을 사 본 적이 없었던 소녀는 당황해 안색을 달리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문평은 소녀의 곤욕을 안쓰럽게 여겼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대의 어린 소녀에겐 지나친 수치였다. 일부러 냉정하게 대해 소녀를 포기시키려는 윤승효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보다 못한 문평은 윤승효에게 눈짓으로 어떻게 좀 해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윤승효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묘랑이 스스로 돈을 내겠다고 한 시점부터 그녀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린 그는, 비단들을 둘러보며 어느 것이 문평에게 더 잘 어울릴지를 고심할 뿐 다른 것에는 일말의 관심도 쏟지 않았다.
“이 옥색 비단은 어떻습니까? 대나무 문양이 은은히 들어간 것이 품격 있고, 빛깔도 석 형에게 잘 어울립니다.”
붉으락푸르락. 창피하고 속상해서 울상이 된 소녀가 옆에 있는데도 윤승효는 비단을 고르는 것에만 몰두했다. 그는 옥색 비단과 청색 비단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는데, 문평의 어깨에 양쪽을 번갈아 대보고도 성에 안 찼는지 나중에는 양어깨에 동시에 비단을 걸쳐 한꺼번에 둘을 비교해 보기까지 했다.
옥색 비단엔 말했던 대로 대나무가 수놓아져 있고, 청색 비단엔 우아하게 뻗은 해송海松이 걸려 있다.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둘 다 아름다운 옷감들인데 그래서인지 윤승효의 마음도 쉽사리 정해지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청색도 옥색에 빠지는 것이 아니군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결정이 쉽지 않군요. 차라리 두 개를 다 고를까요? 단벌로 버티는 것보다는 갈아입을 옷도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윤승효는 자묘랑의 심기를 긁어내는 소리만 골라서 한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 문평은 당황했다. 새빨갛던 자묘랑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녀는 뺨이라도 맞은 것 같은 얼굴로 윤승효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푸르스름한 물기까지 돈다. 아이고. 저러다가 울겠다.
“그 비단, 아가씨께서 사실 건가요?”
어깨를 툭 건드리면 눈물이 톡 하고 떨어질 것 같은 상태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자묘랑에게 누군가가 말을 붙여 왔다.
자묘랑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속눈썹을 심하게 깜빡거리면서 말을 거는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등 뒤에, 어느샌가 호리호리한 인영 하나가 다가와 있었다. 훤칠하게 키가 크고 청초한 눈매가 아름다운 20대 중반의 여인이었다.
여인이 가리킨 것은 자묘랑이 아직도 품에 안고 있는 노란색 비단이다. 그녀가 뭘 원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 자묘랑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비단을 지킬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비단을 내려놓았다.
“아니요. 인제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요. 옷감도 거칠고 자수도 볼품없군요.”
그녀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렸지만, 그녀가 본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인은 생긋 미소를 지으며 자묘랑이 품에 안고 있던 비단을 집어 들고 점원에게 값을 치렀다.
자묘랑은 그토록 원해도 사지 못하는 물건이었는데, 그녀는 너무도 수월히 금자 세 냥을 내놓는다. 그 옆에서 윤승효도 값을 치른다. 금자 일곱 냥. 결국 두 필의 비단을 모두 샀나 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문평에게 밀렸다. 나는 한 필도 안 사주면서 저놈한텐 두 필이나 사 안기다니.
자묘랑은 날 선 시선으로 비단을 선물 받은 문평을 노려보았다. 안방마님이 새로 들인 첩을 보는 시선도 저것보다는 부드러울 것이다. 기생첩이 남편을 꼬드겨 패물을 뜯어내는 꼴을 지켜보고 있는 정실마냥 자묘랑의 눈빛에는 샘이 득실득실했다. 윤승효만 곁에 없었다면 할퀴기라도 했을 성싶었다.
“이봐요, 작은 아가씨?”
저걸 어떻게 요리해야 좋을까? 윤 가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니며, 사사건건 방해만 되는 저 요물을?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문평을 노려보고 있던 자묘랑은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자 귀찮은 듯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가 갖고 싶었던 비단을 가로챘던 아가씨가 아직 안 가고 그 자리에 서 있다.
얄밉게도 눈앞에서 남의 물건을 채가더니만, 또 뭐가 모자라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일까. 독이 잔뜩 오른 자묘랑은 심술이 덕지덕지 묻은 태도로 아가씨에게 대답했다.
“왜 불러요? 키 큰 아가씨?”
“부탁이 있어서 불렀어요. 노란색이 고와 사긴 샀는데, 생각해 보니 이 비단은 제게 어울릴 것 같지 않아요. 너무 귀여운 문양이라서 저보단 작고 깜짝한 사람에게 더 어울릴 것 같네요. 마침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앞에 있어 다행이에요. 괜찮으시면 아가씨가 이 비단을 가지지 않으실래요? 돈은 필요 없어요.”
이게 지금 누굴 놀리나. 자묘랑의 눈초리가 휙 하니 치켜 올라갔다. 고양이보다는 삵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정도로 눈초리가 표독스러워진 자묘랑은 날카롭게 높은 목소리로 아가씨에게 화를 냈다.
“버리고 싶으면 길에 버려요. 왜 나한테 그런 걸 버리려고 해요?”
팩하니 토라진 음성이 정떨어지게 매정했다. 하지만 키 큰 아가씨는 마음이 상하지도 않았는지 자묘랑의 그런 태도를 보고도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버리다니요. 귀한 비단인걸요. 제가 입진 못해도 누군가는 입어야죠.”
“돈이 되게 많은가 보네요. 정 그러면 물러요. 그러면 되잖아요.”
“한번 산 물건을 어떻게 그래요. 그냥 받아 주세요.”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겠네? 왜 제가 남의 적선을 받아요. 당신 눈엔 내가 거지로 보여요?”
“아뇨. 거지가 아니라 아주 작고 예쁜 고양이 아가씨로 보이네요. 그래서 드리는 거예요. 예쁘잖아요. 이 고양이 문양. 아가씨와 똑같이 생겼어요.”
보살처럼 마음이 넓은 키 큰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더니, 비단을 자묘랑의 품에 안기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막 화를 내려던 자묘랑은 ‘고양이 아가씨’라는 말을 듣고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단지 듣기 좋으라고 던진 말일 뿐인데, 그 말을 들은 어린 소녀의 얼굴에 말로 하기 힘든 미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왜, 왜 나를 고양이 아가씨라고 불러요. 무슨 자격으로?”
자묘랑이 생기를 잃은 어투로 그렇게 물었다. 여전히 밉살스러운 태도이긴 했지만, 당당하던 기세가 꺾였다는 사실은 누구의 눈에도 확연하다. 키 큰 아가씨가 고개를 갸웃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런. 기분 상했어요? 제 눈에 그렇게 보여서 그리 부른 것뿐이에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화나게 했다면 미안해요.”
“당연히 화가 났어요. 왜 나, 남을 그렇게 함부로 불러요?”
“미안해요. 그럼 그 비단은 사과의 뜻으로 받아 주세요. 그럼 괜찮겠지요?”
자묘랑은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키 큰 아가씨는 그런 자묘랑을 자애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가느다란 손으로 자묘랑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키 큰 아가씨는 더는 용건이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가게를 나갔다. 처음부터 자묘랑에게 비단을 사주려고 들어온 것처럼 말이다.
착한 것 같긴 한데, 객관적으로 보면 좀 지나쳐 보이는 오지랖이다.
키 큰 아가씨가 나가고 나서도 자묘랑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듯 조용히 품에 안은 비단을 쓰다듬으며 힐끗힐끗 윤승효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어떤 기억을 떠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묘랑의 얼굴이 답지 않게 애잔해졌다. 그리운 눈빛이 절절한 그 시선은 아무 상관 없는 문평의 마음마저 애달프게 했지만, 윤승효는 그 시선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팔불출.”
윤승효는 입술만 달싹이며 누군가를 욕했다.
‘응? 팔불출?’
윤승효와 자묘랑 사이의 묘한 신경전을 지켜보느라 숨죽이고 있던 문평은 윤승효가 중얼거리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팔불출이라니. 갑자기 웬 팔불출? 그는 근처에서 누군가가 자기 자식 자랑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싶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결국 그 아가씨의 정체는 뭐였지?’
문평은 길을 걸으며 조금 전 포목점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키 큰 아가씨의 정체가 의심스러웠다. 이상하지 않은가. 상관도 없는 낯선 이에게 금자 세 냥이나 되는 비단을 덥석 안겨주곤 그냥 가버리다니 말이다. 그 비싼 비단을 아무 조건도 없이, 배고픈 아이에게 만두 하나 사주듯이 그렇게 던져주고 사라지다니. 설사 보살 같은 마음 씀씀이를 가진 사람이라도 그런 식의 적선은 하지 않을 터였다.
‘자기가 행세한 대로 그냥 길 가던 사람이라고 보기엔 많이 수상했어. 꼬마 아가씨에게 지나치게 친절했던 것도 그렇고, 그녀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태도도 그렇고. ……역시 환희루에서 보낸 사람인가? 소루주를 혼자 내보내 놓고는 걱정이 되니까 따로 호위를 붙였나 보지?’
문평이 생각해 낸 것 중 가장 가능성이 있는 추론은 바로 그것이었다. 환희루에서 자묘랑을 위해 보낸 호위무사. 마침 같은 여자이기도 한 데다, 검을 차고 있는 강호의 고수이기도 했으니 제법 그럴듯한 추측 같았다.
문평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다. 그래. 환희루 소속의 여고수가 맞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 상관도 없는 자묘랑을 그렇게 챙겨주고 갔을 리 없다.
‘그런 것치고는 청순한 미인이었지. 뺨도 희고, 손가락도 희고. 눈매는 함초롬하고.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단 말이야. 묘하게 낯이 익어. 그런 미인을 전에 만난 적이 있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는데 말이야. 내가 언제 그런 아가씨를 만났지? 지난 10년간 천산 밖으로 나온 적도 별로 없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낯이 익은 게 아니라 기도가 익숙했다. 꼭 예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예전에 그런 미인을 만났던 기억이 없다.
그는 딴생각에 골몰하며 번화가에 접어들었다. 아까 말을 타고 지났던 시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손가락 끝에 백묵을 쥐고 있었다. 몇 번이나 사용해 이미 반 이상 닳아 있는 백묵은 문평의 손끝에서 반질반질 윤기를 발했다.
오늘은 사흘에 한 번씩 돌아오는 흑화를 남기는 날이다. 윤승효에게 적당한 핑계를 댄 문평은 거리로 나와 흑화를 남기기에 남길 만한 장소를 찾는 중이다. 남의 눈에 너무 띄는 곳이 아니면서도, 뒤를 쫓아오는 마영들이 확인할 수 있는 장소여야 한다.
문평은 서서히 장이 파하고 있는 시장통을 둘러보며 어디쯤이 적절할 것인지 속으로 가늠해 보았다. 마침 마땅한 곳이 보였다. 한 마을에 두 개 이상은 존재하기 힘든 약종상을 발견한 것이다.
문평은 그 집의 간판 아래 얼핏 보면 낙서 같은 표기를 남기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두어 발자국만 더 걸으면 간판 아래에 서게 될 참인데, 갑작스레 누군가가 보내는 전음이 귓전을 때렸다.
“그 자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
감정의 고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음산한 음성. 문평은 흠칫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발걸음을 늦췄다.
“다음 골목에서 왼쪽으로. 그 길을 끝까지 걷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서. 허튼수작은 부리지 말도록. 나는 자네 뒤에 있으니까.”
차디찬 목소리가 경고하듯 속삭여왔다.
누구지? 너 뭐 하는 놈이야?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문평은 백묵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끝에서 백묵은 연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흔들 듯이 손을 털어 백묵 가루를 버린 문평은 자연스럽게 허리에 손을 얹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칼을 뽑을 생각이라면, 마영 43호. 후회하게 될 거라는 경고를 해주지.”
냉혹한 경고라고 하기보다는 단순한 사실 통보에 불과한 그 말투는, 무미건조하기에 더욱 소름 끼쳤다. 문평은 상대가 자신을 꽤 오래전부터 노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문평이 혼자가 되는 기회를 줄곧 기다려 왔던 게 분명했다.
마영 43호.
그것은 문평이 천산에서 내려오기 전 포영의에게 직접 받은 소속 번호다. 물론 43호라고 해서 그 앞에 마흔두 명의 마영이 더 있다는 뜻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영에 대한 정보는 모든 것이 극비다. 한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정보라고 할 수 있는 인원수를 이렇듯 어이없는 방법으로 노출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의 소속 번호를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상대는 마영이다. 아마도 그의 뒤를 쫓고 있는 마영대의 일원일 것이다. 최소한 목숨을 노릴 상대는 아닌 것 같아 안심되지만, 갑작스러운 호출은 여전히 신경 쓰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명령대로 길을 걸었다. 약종상과 지물포 사이의 골목길로 들어가 다시 왼쪽 길로. 그러다가 길을 꺾어 오른쪽으로.
시키는 대로 이리저리 걷다 보니 막다르고 외진 골목길이 나왔다. 묘하게 집마다 등을 맞대고 있어 담으로만 이뤄진 으슥한 길. 문평은 거기까지 이르러서야 겨우 상대를 만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대와 접촉을 했다.
“크윽.”
다짜고짜 뒷덜미가 잡혀 머리를 담벼락에 처박혔다. 어디서 나왔는지 낌새조차 눈치챌 수 없었던 남자가 그의 관절을 꺾고, 그의 이마를 담벼락에 짓누른 것이다.
방어할 새도 없이 굴욕스러운 자세를 취하게 된 문평은 부지불식간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튀었다. 뜨뜻한 핏줄기가 눈썹을 타고 흘러 뺨까지 흐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다짜고짜 이게 웬…….”
느닷없이 봉변을 당한 문평이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의 항의는 채 끝도 맺지 못한 채 사그라졌다. 목덜미를 움켜쥔 상대의 손아귀에 위협적으로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맨손으로도 충분히 목을 부러트릴 수 있는 강한 악력의 상대는, 손끝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 자신이 전하고 싶은 뜻을 충분히 전달했다.
“감히 내게 항의를 하는 건가? 임무 따위는 까맣게 잊고 풍광 유람이나 하고 있던 네놈이?”
저승사자처럼 온기가 없는 목소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재판을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의 결정을 내린 판관의 말투. 단단한 손톱 끝이 목울대로 파고들어 상처를 남겼다. 문평은 숨을 쉴 수 없어 가슴으로 헐떡이며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임무를 잊었다고요? 그럴 리가요. 납치되었던 아이들이 어디에 쓰였는지를 찾아냈습니다. 그 아이들이 납치되어 있던 장소도 알아냈고요. 개양 분타에서 보고서까지 보내 드렸었는데 못 받으셨습니까?”
“그런 것 따위가 네 임무라고 생각했나? 별 볼 일 없는 고아 애들의 행방을 찾는 것이?”
“제가 받은 명령은 그러했습니다만. 제가 받은 밀마密嗎를 보여 드릴까요?”
“허튼소리 마라. 추밀각주님의 밀마는 납치 사건을 쫓으라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쫓는 와중에 드러나는 천마님의 그림자를 찾으라는 거였다.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것은 교주님의 안위. 그를 소홀히 여기고도 네게 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마영이 강한 어조로 문평을 질책했다.
‘아, 그러시겠지. 너희들에겐 그럴 거야. 오로지 교주, 교주, 교주.’
교주밖에 모르는 마영들의 행태에 진절머리가 난 문평은 날카로운 비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의 대가로 더욱 강하게 목을 움켜잡혔지만, 문평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문평은 교주의 행방을 빌미로 자신을 핍박하는 마영에게 오히려 되묻고 싶었다.
‘내가 중간에 도망이라도 갔어? 눈앞에 천마가 있는데 일부러 피하기라도 했나?’
아이들의 납치 사건을 뒤쫓다가, 그를 쫓는 천마를 찾아내라고 한 건 추밀각주였다. 그는 추밀각주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그가 시키는 대로 개를 쫓았지만 구름도 용도 발견하지 못했던 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애초에 명령을 내린 사람의 예상이 틀렸던 것을 두고 왜 자신을 탓하는가?
아직까지 뱃속에 고가 있었다면 이렇게 배짱을 부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승효 덕분에 그는 고에게서 벗어났고,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휘둘러대던 교의 영향력 아래에서도 한 발짝 물러날 수 있게 되었다.
문평은 자신이 마영에게 추궁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적극적으로 천마의 존재를 캐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임무를 방기한 것은 아니다. 누가 뭐라든 그는 포영의가 시키는 것은 모두 다 했다. 그가 그러고도 천마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포영의의 잘못이다.
“그렇다면 선배께서는 제가 자의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했다고 보시는 겁니까? 추밀각주님의 명을 거역하고, 제 독단으로 일을 처리해야 했다고요?”
“임무를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가? 내가 보기엔 연애 때문에 임무 따윈 안중에도 없는 것 같던데.”
“연애요? 제가 무슨 연애를 했다고 그러십니까?”
“화협이라고 했던가? 자네가 같이 다니는 그 젊은 친구, 보통 사이가 아니더군. 교주님과 자네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설마 중원에 나와서까지 그럴 줄은 몰랐던 터라 당황했었지.”
마영이 문평의 반박을 내리누르려는 듯 냉담한 어조로 빈정거렸다. 그는 마교인이고, 그중에서도 천마의 가장 측근에서 맴돌던 마영의 일원이다. 그러한 내력으로 보아 그가 천마와 문평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는 천마와 문평이 정사를 나누는 광경을 직접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진짜로 그런 적이 있었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도 않다. 천마는 정사를 치르는 순간조차도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았다.
문평이 화가 난 것은 그가 천마를 언급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인내심이 끊어진 것은 윤승효의 이름이 저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문평에게 있어 천마와 윤승효는 전혀 다른 위치에 존재하는 자들이다. 천마는 그의 몸을 장난삼아 가지고 놀던 상대일 뿐이지만, 윤승효는 자신을 구해 주고 이해해 준 단 하나밖에 없는 은인이다.
그런 두 사람이 똑같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문평은 견딜 수 없었다. 윤승효는 그런 식으로 폄하되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
“저 때문에 선배께서 당황하셨다니 죄송합니다. 사내끼리 붙어먹는 꼴을 보는 줄 아셨을 테니 오죽이나 놀라셨겠습니까.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교주님의 취미에 함께 어울려 드리긴 해도 거기까지 물들지는 않았습니다.”
문평은 독을 품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마영이 으득 이를 갈았다. 타인의 사랑을 모독한 대가로 자신의 신앙을 모독당한 그는 살벌한 어조로 문평에게 경고했다.
“방자하군. 귀한 분의 이름을 함부로 일컫는 그 혀를 끊어줄까?”
“몰랐었군요. 저의 처분에 대해 결정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 선배셨습니까? 그런 줄 알았으면 좀 더 조심할 걸 그랬습니다. 목숨줄을 틀어쥔 분께는 잘 보여야지요.”
목을 움켜쥔 손에서 진기가 흘렀다. 꼭 정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잡힌 곳이 따끔따끔하게 아파 왔다. 뒤로 꺾인 팔의 상태는 더 심했다. 어깨에서 관절을 잡아 빼려는 듯 강하게 움켜잡은 상대 때문에 팔이 엉망으로 뒤틀렸다.
비명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은 문평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10년을 몸담고 있던 곳이지만 이젠 마교와 관련된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정말로 죽여 버리고 싶은 것처럼 등 뒤에서 진한 살기가 일어났다. 상대가 손에 조금만 더 진기를 불어넣는다면 그의 목은 그대로 꺾여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문평이 지적한 대로, 그를 겁박하고 있는 상대에겐 그의 목숨을 좌우할 권한이 없었다.
마영은 식지 않아 여전히 뜨거운 살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문평의 목을 움켜잡았던 손을 풀었다. 문평은 벽에 이마를 댄 채 콜록대며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마영에게 붙잡혀 있던 곳이 욱신거렸다. 목울대 아래는 손톱에 찢겨 엷은 핏기까지 비쳤다.
“아직 쓸모가 있으니 살려 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또 한 번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처벌을 각오하고서라도 너의 방자한 혀를 벌할 것이다.”
맹목적인 천마의 개가 짖었다. 문평은 입술을 뒤틀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오냐. 짖어라. 짖는 것은 개의 본능이니 내가 그걸 어찌 막을까.’
그러나 웃고 있는 그의 눈엔 살벌한 오기가 스몄다.
‘이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다. 네가 한 짓, 너의 목소리. 죽어도 잊지 않고 기억해 두마.’
“너희 일행이 무한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도맹에 도착하면 옥기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의 일행에 합류하도록 해라. 이제 교주님의 흔적을 뒤쫓을 수 있는 단서는 옥기린뿐이다.”
사람을 걸레처럼 짓밟아 놓고 마영은 그에게 새로운 지령을 하달했다. 문평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핏줄기를 훔치며 돌아섰다. 검은 그림자처럼 흐릿한 것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려서, 상대의 정확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천마에게 바친 교주의 그림자는 대낮에 몸을 드러냈을 때조차 모습을 다 보이지 않았다. 문평은 마영들이 천마에게 바치는 이런 식의 헌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타인의 그림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는 삶이라니. 그 얼마나 헛되고 부질없는가.
“봉명하겠습니다.”
문평은 고의적으로 정중히 상대를 향해 포권해 보였다. 과도하게 꾸민 예의가 외려 불손함을 강조했다. 상대가 그에게 보여 준 존중에 정량으로 비례하는 예의.
서늘한 살기를 남기고 마영은 사라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엔 기척도 없이, 마치 허공 속에 녹아내린 것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 같았다. 신체적으로 남아 있는 흔적이 아니라면 정말로 백일몽이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아픈 목을 움켜쥔 문평은 허공을 노려보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대의 궤적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뚫어지게, 그는 상대가 사라진 바로 그곳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여전히 마영을 좇지 못했다. 홀연히 사라져 흔적을 알 수 없는 천마처럼, 천마의 그림자 역시 흔적 따윈 남기지 않고 가버렸다.
***
“흠. 석 형. 접니다. 안에 계십니까?”
문밖에서 윤승효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척을 내느라고 습관적으로 내뱉는 헛기침 소리가 정겨웠다. 금창약을 꺼내 마영이 남긴 상처를 치료하고 있던 문평이 그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예. 안에 있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평은 잠시 망설였다. 맘 같아선 들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다. 피곤하기도 하고, 지금 심정으론 다른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윤승효는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오늘 저녁에 얼굴을 맞대나 내일 맞대나 결과는 똑같다.
하필이면 얼굴과 목이라는, 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부위에 상처가 남은 탓에 자신의 부상을 숨길 수도 없는 처지인 문평은 한숨 어린 태도로 이마를 문질렀다.
“들어오십시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윤승효가 방으로 들어왔다.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어서 그런지 옷차림이 지극히 가벼웠다.
“밤이 늦었는데 죄송합니다. 내일 일정을 상의할 것이 있어 왔습니다. 한데, 이마의 그 상처는 무엇입니까? 목은 또 왜 그렇게 되신 거지요?”
아니나 다를까. 윤승효는 문평의 상처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나름대로 용건이 있어 건너왔을 사람이 문평의 얼굴을 보자마자 관심사를 달리하며 다급히 묻는다.
문평은 한걸음에 다가와 그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윤승효에게 어설픈 웃음을 내비쳤다. 윤승효가 너무 놀라니까 외려 그가 멋쩍었다.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크게 찢어진 상처도 아닌데 윤승효의 반응은 격렬하리만큼 즉각적이다.
“볼일을 보던 와중에 잠시 오해가 생겨 실랑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염려할 만큼 큰 상처가 아니니 괘념치 마십시오.”
“잠시의 실랑이로 생긴 상처가 아닌 것 같은데요. 손의 형상대로 고스란히 자국이 남았을 정도인데……. 무슨 일이었습니까, 석 형. 대체 무슨 연유로 이런 험한 꼴을 당한 겁니까?”
차라리 칼에 찢기거나 암기를 맞았다면 시비 때문에 그랬다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평에게 남은 것은 보다 더 고약한 흔적이다. 압도적인 무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짓눌린 자국. 앞에서도 아니고 뒤에서 목을 잡혔다는 건 상대에게 힘으로 눌리는 겁박을 당했다는 뜻이다.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인연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언제고 한두 번은 이런 일이 있을 거라 미리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로 그친 게 차라리 다행입니다.”
아직까지 문평은 자신이 마교인이라는 사실을 윤승효에게 고백하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 넓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사실까지 이해해 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데다, 아직도 그들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위험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윤승효도 내심 짐작하고 있는 바가 없진 않을 테지만 그에 대해서는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알면서 모르는 척 덮어 두고 있던 은밀한 비밀. 문평은 이번에도 그 비밀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것을 거부했다. 윤승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런 문평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이 끝까지 비밀을 고수했다고 믿고 있는 문평과 다르게 천마는 그가 한 두루뭉술한 말만을 가지고도 모든 사실을 눈치챘다.
정리하지 못한 인연이라고 했으니 그를 겁박한 상대는 마교인이다. 설마 중원에 나와 있는 비밀 분타에 소속된 교인이 본산 직속의 무인에게 저리 굴었을 리는 없으니 상대도 본산 출신. 일류 고수인 문평이 급소인 목을 잡혔을 정도의 수위를 가진 상대라면 본산의 무인 중에서도 무공이 높은 자일 터다.
그렇게 범위를 좁혀보면 범인이 딱 나온다. 제자들이 자기 몫으로 딸려 보냈을 마영들 중 하나. 그 외에는 달리 그럴 만한 존재가 없다.
‘어떤 빌어먹을 놈이 애 목을 저렇게 만들어 놨지? 마영이라면 저 녀석이 어떤 신분인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어떤 놈이 감히?’
천마는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자기도 정사를 나눌 때나 자국을 남기지 그 외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고 곱게 데리고 있는 아이인데, 그런 아이에게 다른 놈이 흠집을 내놨으니 화가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다.
개를 때릴 때도 주인을 보고 때리는 법이다. 하물며 문평은 개도 아니고 첩이 아닌가. 천마 자신이 예뻐하며 끼고 도는 잉첩인 걸 뻔히 알면서 손을 대다니, 그놈은 무슨 생각으로 그따위 짓거리를 벌인 것일까?
그동안 교주 위를 물려주기 위해 바깥으로 나돌기만 했더니 교의 기강이 말도 못 하게 해이해졌다. 제자라는 놈은 고를 먹이질 않나, 수하라는 놈은 감히 목을 잡고 흔들지 않나.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자신이 직접 그런 일을 당한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천마는 노여워했다.
내 것, 내 사람에 대한 집착이 유달리 강한 그는 마교로 돌아가자마자 단단히 단속을 해 놓으리라 결심하며 치미는 유감을 꾹꾹 눌러 놓았다.
뒤끝 많은 그는 한번 마음에 둔 것을 잊는 법이 없었다. 지금 당장은 그냥 넘어가지만, 끝까지 그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행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닙니다.”
돼지 오줌보도 아니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꼴만 줄곧 내보이는 문평에게도 적지 않은 유감이 생긴 천마다. 그는 냉담하게 말하며 문평의 손에서 금창약을 빼앗아 들었다. 거울도 없이 혼자 처치를 한 터라 약이 엉망으로 발렸다.
손도 곰손인 게 잘하는 짓이다. 그는 못마땅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금창약을 덜었다.
살갗이 벗겨진 부분에 손가락이 닿자 따가운 듯 문평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게 누가 이런 꼴을 당하고 오래.’
심술이 돋은 천마는 일부러 더 꾹꾹 누르며 상처를 치료했다. 문평은 쓰게 웃기만 하며 그런 천마의 처치를 말없이 받아들였다.
“이런 꼴을 당했는데 어째서 다행이란 말입니까. 이런 꼴이 당연한 경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부당한 일을 당했으면서 왜 그냥 납득하는 거지요? 잘못된 일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용기가 없는 겁니까? 그냥 혼자 억울하고 말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비단 이번 일만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묘랑에게도 그렇고, 윤승효의 탈을 쓴 자신에게도 그렇고. 그동안 문평이 멍청하게 손해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천마는 이 기회에 문평의 어리석은 처신을 고쳐 놓고 싶었다.
문평이 엄한 손해를 보며 돌아다니는 것도 짜증이 났지만, 눈앞에서 자꾸 그런 꼴을 봐야 한다는 사실에도 염증이 생겼다.
살면서 자기감정을 별로 참은 적이 없었던 천마는 인내의 폭이 짧았다. 계속 이런 꼴을 보다간 애꿎은 자신이 화병이 날는지도 모른다.
“윤 형.”
“나는 석 형을 좋아하지만, 석 형의 그런 점만은 도무지 좋아할 수 없습니다.”
문평의 눈앞에서 윤승효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화가 난 것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아름다운 두 눈은, 격렬해진 감정 때문인지 여느 때보다 짙은 빛을 띠고 있었다. 덕분에 그 눈동자는 옥빛이 아니라 쪽빛으로 보였다. 깨끗한 물에 염료를 푼 것만 같은 투명한 쪽빛.
문평은 그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며 화를 내는 윤승효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깥에서 맞고 들어온 아이를 닦달하는 어미처럼, 그를 채근하면서도 속내에는 걱정이 실려 있었다. 문평은 그 다정한 눈이 좋았다.
솔직히 말해 문평은 윤승효의 모든 것이 좋았다. 처마 끝처럼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콧날도 좋았고, 가끔은 신랄하고 또 가끔은 재기가 넘치는 그의 영민한 입술도 좋았고, 아프라고 꾹꾹 누르면서도 꼼꼼하게 약을 발라 주는 정성스러운 흰 손가락도 좋았다. 그와 관련된 것은 모두가 아름다웠다. 문평은 그의 전부를 사랑했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왔던 감정들이 찰랑거리며 수위를 높여 갔다. 몸 안의 모든 부분이 그를 향한 감정으로 가득 찼다. 단지 뼈와 살뿐만 아니라 심장에도. 체온을 담은 피부 위에도, 심지어는 혈도까지도.
들어찰 수 있는 모든 곳을 빼곡히 채우며 감정은 자라났다. 종내에는 그의 몸이 더 이상 담을 수 있는 것이 없을 때까지. 그 혼자만의 힘으론 주체할 수 없어 모든 것이 흘러넘칠 때까지도 말이다.
“……저도, 좋아합니다.”
문평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약을 발라 주던 윤승효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문평은 자신의 입술에서 말이 아니라 감정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문평은 다시 속삭였다. 죽어도 상대에게 전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마음이 허망할 정도로 쉽게 흘러나와 발치를 적셨다.
“좋아하고 있습니다. 윤 형.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가 말하는 ‘좋아함’은 윤승효가 말한 ‘좋아함’과 성질이 달랐다. 그것은 은애한다, 혹은 사모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한 감정이었다. 정염보다는 좀 더 순수하고 가련한 무언가가 그 말 속에 숨어 있었다. 모든 첫사랑이 그렇듯 그 감정은 풋풋하게 애잔했다.
천마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순간에,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렇게 돌연 고백을 해올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미친놈. 설마 진짜로 고백을 해?’
제일 먼저 천마에게 떠오른 감정은 불쾌감이다. 문평이 ‘윤승효’에게 고백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못마땅했던 그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손을 뒤로 물렸다. 느닷없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문평이 줄곧 그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계속 자기 마음을 감출 거라고 생각했었다. 기본적으로 용기가 없는 놈이기도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약해빠진 녀석이다 보니 남자에다 은인이기까지 한 윤승효에게 자기 마음을 털어놓을 리는 없을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문평이 품고 있는 짝사랑의 감정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보고도 모르는 체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차피 그러다가 말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평은 천마의 확신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어떤 결실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문평은 윤승효에게 고백했다. 충동적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었다. 정말로 해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덕분에 천마는 자신이 아닌 ‘윤승효’에게로 향한 문평의 마음을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천마는 정말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는 티가 확연한 투로 입을 열었다.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긴 했지만, 천마는 그런 목소리로도 충분히 상대의 뺨을 때리는 거나 마찬가지의 효과를 낼 줄 안다.
문평은 다정하기 그지없던 눈동자 안에 한 겹의 막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거부감’이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장막 하나가 격의 없던 그들 사이에 그늘을 드리웠다.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한 말일 뿐입니다. 그저 전하는 것에 만족하는 말이니 유념치 마십시오.”
이미 시작해 버린 일이다. 중간에 멈출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고의였을지도 모른다.
“석 형 같으면 그런 말을 듣고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는 무슨 뜻으로 석 형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인지 그 연유를 알고 싶습니다.”
“윤 형.”
“저를 좋아하신다고 하셨습니까?”
“…….”
“그 말뜻은, 석 형께서 제게 욕정 한다는 뜻입니까?”
윤승효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매서운 말이 문평의 마음을 할퀴었다. 욕정 한다라. 그렇게 되나. 문평은 씁쓸히 웃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사내가 사내를 은애한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그렇게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문평은 자신의 감정을 고작 그런 단어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처녀와 총각의 그것처럼 고운 빛깔로만 치장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은 사랑이었다.
비 온 뒤의 하늘처럼 청명하고, 갓 내린 이슬처럼 투명한.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밖에 간직할 수 없는 결 고운 첫사랑.
“그냥 좋아합니다. 다른 빛깔은 한 올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저 그렇게 좋습니다.”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달라고 하는 말도 아니다. 그저 넘쳤을 뿐임을. 제 속에 담을 수 있는 양 이상으로 차오르다 그만 넘친 것이, 때마침 윤 형의 앞이었음을 알리고 싶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다.
동요도 없이 담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문평에게서 원인 모를 향기가 났다. 언뜻 맡아서는 느껴지지 않지만, 한 번 의식하고 나면 외면하기 힘든 은은한 향기가. 천마는 그 향기가 문평의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잡초로 치부하느라 잊고 있었다. 하나 들꽃도 꽃은 꽃이었다. 제아무리 하찮은 들풀이라도 때가 되면 꽃을 피운다. 보잘것없고 초라하지만 돌아보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헌신적인 꽃을.
문평이 피운 들꽃은 소박하나마 아름다웠다. 천마는 자신의 발밑에서도 이런 게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봉오리가 지고 꽃잎이 피는 광경을 낱낱이 지켜보아서일까. 유달리 그 꽃이 어여쁘게 느껴진다. 초라한 외관 탓에 피어도 별 볼 일 없으리라 여겼는데 그가 틀렸다. 만개한 그것은 사랑스럽고 탐스러웠다. 저런 고운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할 정도였다.
‘윤승효가 네게 해준 건 아무것도 없다. 네 목숨을 구해줬던 것도 나고, 네게서 고를 없애 준 것도 나다. 네게 비단옷을 사준 것도 나고 네 상처를 치료해 준 것도 나고, 네가 힘들 때 옆에서 지켜 준 것도 나다. 네가 사랑에 빠지게 된 모든 계기는 내가 만들었는데, 넌 어째서 윤승효 따위와 사랑에 빠진 거냐?’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는데 엉뚱한 놈에게 가로채였다. 눈앞에서 보물을 빼앗긴 기분에 천마는 화가 났다. 그렇지 않은가. 이제껏 문평을 돌봐 주고 아껴준 사람은 윤승효가 아니라 천마였다.
문평은 진짜 윤승효를 이제껏 단 한 번 보았고, 그때조차 그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니 그가 정말로 사랑해야 하는 사람 역시 윤승효가 아니라 천마다. 자신이 한 일들 때문에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이니, 그의 사랑은 당연히 자신에게로 향해야만 했다.
“석 형이 나를 좋아하는 것은, 내 외모입니까?”
‘윤승효’가 좋다는 말이 설마하니, 계집애같이 곱상해 빠진 이 외모인가 싶어 천마는 운을 띄워봤다. 문평은 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 형의 외모도 물론 좋아합니다만, 윤 형의 외모 때문에 윤 형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모가 아니라면 나의 조건을 좋아하는 겁니까? 내가 권문세가의 자식이고 내 어머니가 왕부의 군주라서요?”
“조건 때문에 그럴 마음이 들었다면 애초부터 황상을 사모했지 윤 형께 기울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째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문평은 윤승효가 그답지 않게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번도 사랑을 해 보지 않은 사람처럼 엉뚱한 것만을 물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요. 그럼 나의 뭐가 좋은 것입니까? 내가 대체 뭘 했기에 같은 사내가 사내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요?”
“제가 좋아한 것은 윤 형의 다정함입니다.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의 위험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 돌아설 수 없는 다정함이오. 저는 윤 형의 재치도 좋습니다. 가끔 감당 못 하게 괴팍해지는 그 성미도 좋고, 웃으면서 모진 소리를 할 줄 아는 강단도 좋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외면보다 내면이 좋습니다. 윤승효라는 사람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뼈대를 좋아합니다.”
문평의 말을 들은 천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세한 내용을 들어보니 딱히 윤승효가 좋다는 소리도 아닌 것처럼 들렸다.
문평은 윤승효의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이 좋다고 했는데, 그 내면이라는 건 탁 까놓고 이야기해서 천마 자신이다. 물론 본래의 천마는 다른 사람의 위험을 봐도 못 본 척 잘할뿐더러 윤승효처럼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는 성격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알맹이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내가 나라는 사실을 밝혀도 그 마음이 변할 리는 없겠군그래?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 좋다니, 껍데기가 바뀐들 상관없겠지.’
천마의 마음에 은근한 심술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는 문평이 자신을 두고 감히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했고, 그 감정이 티 하나 없이 맑은 순애라는 사실에도 짜증이 났다.
자기 거라고 내심 점찍어 놓았던 사람이 눈앞에서 외도하고 있는데 그 꼴을 보고 어느 사내가 마음이 편하겠느냔 말이다. 외도를 하는 상대가 우연찮게도 자기 자신이었으니 문제가 커지지 않은 것이지, 정말로 다른 사내와 정분이 난 거였으면 문평이고 상대고 가만 내버려 뒀을 리 없었다.
천마는 이번 일이 여러모로 못마땅했다. 우연의 일치로 외도가 실현되지 못하긴 했지만, 그럴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다. 문평이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는 걸 천마 자신은 알지만 정작 문평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는 다른 사내에게 마음을 주면서도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자각이 없다면 자각을 만들어 주지. 꽃을 기른다는 건 물만 줘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잘못 자란 가지는 쳐내 줘야 하고, 엇나간 뿌리는 잘라 줘야지. 엉뚱한 방향으로 웃자라기 전에 말이야.’
천마의 심술은 그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자신이 마음 상했던 만큼 문평의 마음도 상해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문평을 거절하는 대신 그를 더욱 상심케 할 수 있는 방향을 향해 모질게 머리를 굴렸다.
불이 무서운지 모르는 어린아이는 불에 데어 봐야 정신을 차리는 법이다. 섣부르게 시도하는 불장난을 만류하기 위해서는 물보단 불이 더 큰 약이 될 수도 있다. 천마는 문평에게 그런 종류의 교훈을 주고 싶었다.
“그 말, 진심이십니까?”
천마는 윤승효의 푸른 눈으로 문평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연약하고 겁먹은 듯. 혹은 깨어질 것처럼 애처롭게. 방어적으로 내세웠던 거부감은 일부러 키우고, 그러면서도 약한 모습을 내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볍게 떨리고 있는 윤승효의 입술을 문평은 어리둥절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저를 떠보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닙니까? 제가 석 형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미리 아시고서 일부러 그러시는 거지요?”
천마는 부러 원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문평은 여전히 이해를 못 하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윤승효가 왜 갑자기 자신을 탓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니면 저를 조롱하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제가 석 형에게 품는 삿된 욕심을 나무라시려는 건가요?”
윤승효의 목소리가 커졌다.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북받치는 것처럼 곳곳이 깨어져 나간 음성.
문평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런 속내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고백을 하실 수 있으신 겁니까? 아무런 계기도 없이, 문득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저는 무거워서 입 밖에 내지도 못했던 말입니다. 힘들고 괴로워 가슴속에 묻어 두고 그저 잊히기만 바랐던 말인데, 석 형에겐 어찌 그리 가벼울 수 있습니까?”
윤승효의 목소리엔 가벼운 비난의 기색마저 어려 있었다. 문평은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윤승효에게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던지는 비난은, 문평이 각오하고 있던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문평이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무겁고, 답답한.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간신히 삐져나온 듯한 느낌. 축축한 진흙 같은 것이 발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문평이 흘려보냈던 물 같은 감정에 비해 한결 점성이 높고 진득한 것이다.
윤승효는 그것이 자기 마음이라고 했다. 문평에게 들킬까 봐 숨겨 놓고 있던 그의 진실한 마음이 바로 그것이라고, 그는 힘들게 인정했다.
“무슨 뜻입니까, 그건?”
자신의 귀로 듣긴 했지만, 자신이 바로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문평은 간신히 더듬거리지 않으며 윤승효의 진의를 되물었다. 섣부른 오해는 하고 싶지 않다. 바보처럼 자기 좋을 대로 착각했다가 비웃음을 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윤승효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윤승효의 괴로운 눈빛 속에는 입으로 감히 말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모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당신을. 당신과는 달리 저는 당신에게 욕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같은 사내에게 이런 감정을 품고도 숨겨 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을 곁에서 지키면서 가장 좋은 친구인 척을 했지요. 그것을 탓하시려는 거라면 탓하셔도 좋습니다. 저도 이 마음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니까요.”
윤승효는 창백한 입술을 떨며 속삭였다. 그는 힘들고 괴로운 듯 그 말을 하고 있었지만, 문평에게 그의 말은 마냥 감미로울 뿐이었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데, 그도 자신을 사랑한단다. 두 사람이 모두 남자인데도 서로의 마음이 통했단다.
혼자 누운 밤에도 이런 결말은 감히 상상해 보지 못했던 문평이었다. 깨고 나면 서러울 게 두려워 꿔보지도 못했던 꿈인데, 꿈도 아니고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탓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그와 같은 마음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 마음 때문에 윤 형을 탓하겠습니까.”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훨씬 더 더러운 마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더럽습니까? 사내가 사내를 좋아하는 마음이라 더러운가요?”
“입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럽습니다. 그 옷을 벗기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단순히 마음만 있었던 게 아니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마음속엔 석 형의 육체도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잘못을 토설하는 죄인처럼 힘겹게 고백해 왔다.
“제가 머릿속으로 무엇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석 형은 모르실 겁니다. 저는 석 형의 옷을 벗기고, 석 형의 다리를 벌렸습니다. 춘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석 형의 몸을 열었던 그때를 쾌락으로 기억하고 되새겼지요. 병들어 누운 사람의 몸을 강제로 열고 비집고 들어가는 상상을 했습니다. 당신을 품던 장면을 떠올리며 욕정하고, 심지어는 그때처럼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당신을 안을 수 있는 상황이 오기를 은밀히 바라기까지 했습니다.”
윤승효가 드러내는 욕망의 흔적은 적나라했다. 천마가 그에게 내비쳤던 노골적인 욕망과는 또 다른, 격렬하고 원색적인 욕정.
문평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한가하게 꽃이나 키우고 있던 그와 달리 윤승효는 육욕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이 사람에게도 저런 면이 있었나. 윤승효를 천상의 일부인 양 생각하던 문평은 그 사실을 알고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윤 형.”
“이런 저를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까, 석 형? 이게 바로 저의 본색입니다. 성인군자인 양 겉치레를 하고 있지만 제 속내는 이렇게 한없이 야비하고 천박합니다. 저는 위군자이자 소인배에 불과합니다. 석 형은 이런 인간을 사랑할 수 있으십니까?”
천마가 윤승효를 위군자라고 생각하는 건 사실이다. 그 녀석이 가능한 한 자신이 하는 말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며 사는 것은 알지만 시야가 좁고 정파의 시각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어서 중용을 지킨다고는 볼 수 없었다.
게다가 뒷구멍으로 호박씨도 잘 까는 놈이다. 스물도 넘은 놈이 고작 열세 살짜리를 붙들고 운명이니 뭐니 하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 천마는 여장을 하고 다니는 열세 살짜리 남자아이를 운명의 상대라고 믿고 있는 놈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웠다.
그 속내야 어떻든, 진심이 흠뻑 담긴 위군자 선언은 문평에게 먹혀들었다. 천마가 내비치는 진심의 종류를 착각한 문평은 그가 자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동정심을 품었다.
전도유망한 청년이 밝은 길만 걷다 발을 헛디뎠다. 그 바람에 음지로 내려서 빛 너머의 광경을 처음 목격했다. 윤승효는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광경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문평에게 그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사내라는 게 다 그렇다. 윤승효까지 그렇다는 건 다소 놀라운 일이지만, 남자라는 게 원래 마음이 동하면 그곳도 같이 동하는 생물이 아닌가.
“다 자란 사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열여섯 살 소녀였다면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윤 형보다 열 살이나 나이가 많지 않습니까? 사내의 습성이 원래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탓하지 마십시오.”
문평은 침착한 어조로 천마를 달랬다.
“이해하신다고 하셨습니까?”
천마는 문평의 손을 잡고 그 손등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그가 다짜고짜 신체 접촉을 해올 줄은 몰랐던 문평은 움찔 놀라 손가락을 움츠렸다. 그런 반응을 모르는 척하고 천마는 다시 물었다.
“제가 이런 것을 원해도 이해해 주실 겁니까?”
고작 손등에 입을 맞춘 걸 가지고 예민하게 굴 수는 없다고 여겼는지 문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긍정의 대답을 얻어 낸 천마는 좀 더 대담한 수작을 부렸다. 그는 문평의 손에 자신의 손을 깍지 끼고, 상대의 손가락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몸이라서일까. 문평의 손에선 지나치게 달콤한 살 내음이 풍겼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정사를 가진 적이 없었다. 천마는 머리가 아니라 몸도 슬슬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능청스레 물었다.
“이보다 더한 것을 원해도, 용서해 주실 겁니까?”
문평은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가 약했다. 그는 주로 귀 뒤나, 목덜미, 팔꿈치의 안쪽 같은 신체의 연결 부위가 약점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쉽게 공략당하는 것이 바로 손가락 사이의 연한 살이었다. 천마는 능숙하게 그 부분을 찾아내 혀로 핥았다.
느끼는 부분을 직격으로 공격당한 문평이 낮은 신음을 삼키며 헐떡였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듯 달싹거리는 입술을 천마는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용서해 주실 겁니까? 제가 무슨 짓을 하든지. 제 사랑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는 사랑에 몸이 단 젊은이처럼 격정적인 동작으로 문평을 껴안으며 강하게 속삭였다. 그의 말은 지나치게 교묘해서, 문평이 얼른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다짜고짜 덮치고 보는 사내에게 당황하면서도 문평은 거절의 말을 내뱉지 못했다. 섣불리 거절의 말을 했다가 윤승효가 고백을 거절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어쩌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일단 진정을 하고…….’
마음이 통했다고 해서 그대로 침대로 뛰어들 생각이 없었던 문평은 깍지를 끼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의 의사 표시로 굶주린 맹수처럼 달려드는 사내를 감당할 수 없었다.
윤승효는 문평의 몸을 꽉 껴안고 밀어붙이듯 움직여 침상으로 향했다. 문평은 채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침상에 눕혀졌고, 만류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옷이 벗겨졌다. 젊어서 그런지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어리바리 대응도 못 하고 옷이 벗겨지는 문평을 내려다보며 천마는 눈을 차갑게 빛냈다. 작정하고 속이고 있긴 했지만, 속아도 너무 잘 속으니까 그것도 신경질 났다.
‘너 오늘 한번 죽어 봐라.’
다른 사내가 눕히는 줄 알면서도 저항도 하지 않고, 그저 곤란한 표정만 짓고 있는 문평을 향해 이를 간 천마는 그동안 쌓인 불만과 욕정을 모두 풀어 버릴 각오를 하고 문평에게 덤벼들었다. 다른 사내의 품이 그리도 소원이라면 그 원을 풀어줄 생각이었다. 평생 두 번 다시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제대로 말이다.
문평에게 처음으로 사내 경험을 시켜 준 사람은 방중술을 완전히 통달하고 있는 백전노장 천마였다. 그는 거의 말만 한 자신의 생식기를 문평의 신체에 부담도 주지 않고 집어넣을 수 있는 경이적인 기술력과 그 거대한 것을 몸에 넣고도 쾌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노련함을 한꺼번에 갖춘 사람이었다. 덕분에 사내와의 관계는 처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에 부담감까지 가지고 있던 문평도 그 관계에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관계에서 문평이 한 일은 별로 없었다. 어깨를 끌어안으라면 어깨를 안았고, 다리를 벌리라면 다리를 벌렸을 뿐. 시키는 것 외의 행위는 해 본 적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윤승효와의 관계는 그와 달랐다. 젊은 사내의 욕망은 천마의 것과 달리 서툴고 거칠었고, 문평은 그 사실에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몸 위에 제멋대로 구는 거대한 맹수를 얹은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이대로 놔뒀다간 어떤 끔찍한 꼴을 당할지 모른다. 예전에 보니 윤승효의 그것은 천마의 것 못지않게 대단하던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것을 감당했다간 내일 아침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자, 잠깐!”
문평은 자신의 입술을 허겁지겁 먹어 치우며 등을 끌어안는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손바닥으로 살갗을 벗기고 싶은 건지 윤승효는 문평의 몸을 거칠게 문지르고 있었다. 자기 손안에 문평을 구겨 넣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였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매우 아팠다.
“그, 그런데, 윤 형께선 사내와 하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어떻게 해야 서로에게 부담이 없는지를 아시나요?”
윤승효의 단단한 팔에 허리를 끌어안기고, 다른 손으로는 턱이 잡혔다. 뜨거운 혀가 목덜미를 쓸 듯이 휩쓸어 간다.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은 열기가 목을 타고 흘렀다.
문평은 잠시라도 이성을 차려보려고 노력하며 윤승효에게 물었다. 그의 목을 핥고 빠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던 윤승효가 문평에게 대답했다.
“헉. 헉. 알고 있습니다. 전에도 한 번 해봤지 않습니까.”
춘약 때문에 온몸이 노글노글해진 상대와 제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는 상대는 분명히 다를 텐데, 윤승효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 자신만만했다. 조급하게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이러다 진짜 사람 잡지.’
문평은 자기 목덜미에 아예 얼굴을 박고 있는 윤승효의 등을 불안한 마음으로 끌어안았다. 이 순간처럼 윤승효가 젊어 보인 적이 없었다. 문평은 이 젊고 미숙한 남자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암담해졌다.
“햐, 향유는…….”
“향유는 갑자기 왜요? 등에 기름을 발라 드릴까요?”
문평이 애타는 심정으로 남자와의 관계에서의 필수품을 찾았지만 윤승효는 그가 그것을 찾는 의도조차 알지 못했다.
내게 이런 짓을 허락해 주시다니, 당신은 정말로 좋은 분이시군요. 바라고 바라던 뼈다귀를 드디어 얻은 것처럼 행복하게 헉헉거리는 젊은 남자는 자기 것이 된 뼈다귀에 침칠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강도를 조절 못 하는 손이 문평의 가슴을 아프게 꼬집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의 손이라지만 아픈 건 아픈 거여서, 문평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랬더니 윤승효가 더 좋아하며 가슴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유실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제멋대로 희롱당했다. 아프게 눌리고 쓸리는 바람에 연한 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향유가 있어야, 흐윽. 과, 관계가 부드럽게 진행됩니다. 나, 남자의 몸은 여성의 그것과 달라서, 기름이 없으면 무리가, 아읏.”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윤승효의 고운 손이 덥석 성기를 잡아 왔다. 사전에 그러겠다는 기색도 없이 갑작스레 말이다. 그는 평균적인 크기의 문평의 그곳을 한 손에 잡더니 그 하얗고 예쁜 손으로 성기를 흔들어 주기 시작했다.
낯선 이의 손에 잡힌 성기가 성을 내며 일어섰다. 능숙한 솜씨는 아니지만 묘하게 느끼는 곳만을 자극하는 손은 몇 번 어루만지는 것으로 손쉽게 그를 발기시켰다.
배려 없이 움직이는 그 때문에 예민한 부위가 마구 스쳤다. 동그랗게 부푼 요도의 끝을 손톱으로 긁기도 하고, 문평이 가장 느끼는 부위인 귀두의 끝부분을 손바닥으로 죄기도 한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더니 그 말이 참말이었다.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번쩍 튀었다. 문평은 허리를 뒤틀며 신음을 흘렸다. 쾌락에 젖은 신음 따위 윤승효의 앞에서 흘리고 싶지 않았는데, 인간의 자제력으로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기름이 필요하다고요. 흠. 그랬군요.”
지금 처음 들어보는 말이기라도 한 것처럼 윤승효가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여전히 문평의 성기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팽팽하게 선 기둥에 굵은 힘줄이 맺히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다루어지면서도 그게 좋은지 문평의 성기는 한계까지 꼿꼿하게 발기했다.
“하지만 어쩌죠. 지금은 기름이 없습니다. 기름을 가져오려면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것도 싫어요.”
눈앞에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는데 어떻게 중간에 일어나 자리를 비울 수 있냐는 투였다. 하지만 문평은 향유가 꼭 필요했다. 벌써부터 허벅지에 와 닿는 딱딱한 성기의 거대한 크기가 향유를 절실하게 만들었다.
‘절 죽일 생각이십니까? 경험도 없으신 분이 뭘 믿고 그렇게 배짱인 겁니까?’
문평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향유가 없으면 집어넣지도 못, 으읏.”
“그래선 안 되죠. 꼭 넣어야 합니다.”
윤승효는 큰일 날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야무지게 대꾸했다.
‘꼬, 꼭 넣으실 겁니까? 그건 좀 너무한 심보가 아니신지요…….’
윤승효가 너무 확신에 찬 대꾸를 하니까 문평은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내들끼리 관계를 한다고 해서 꼭 삽입을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천마도 가끔은 입이나 손가락만으로 끝내 주곤 했었고, 귀찮다고 허벅지만 빌린 일도 있었다.
그의 거대한 크기를 생각한다면 그런 행위야말로 진정으로 상대를 아끼는 마음이다. 남의 엉덩이에 그런 걸 집어넣겠다는 심보야말로 이기주의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윤승효는 ‘꼭’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꼭’ 하는 사람이었다. 손은 쉬지 않으면서도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윤승효는, 마침내 무엇을 결심했는지 문평의 몸에서 손을 떼더니 파전을 뒤집듯 그의 몸을 뒤집었다.
얼떨결에 몸을 굴린 문평은 침상에 머리를 박고 얼떨떨해졌다.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윤승효가 다리를 벌리며 뒤쪽에서 다가들었다. 윤승효의 양손에 엉덩이가 잡혔다. 오랫동안 신법을 훈련해 온 덕에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는 천마에게도 그랬지만 윤승효에게도 무척 매력적으로 비치는 모양이었다.
문평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윤승효가 기분 좋은 듯 탄성을 발했다. 그는 엉덩이의 양쪽을 붙잡고 엉덩이골을 벌렸다. 문평은 자신의 항문이 상대의 시야에 드러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해 허리를 틀었다.
“유, 윤 형.”
“……석 형은 자신의 이곳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곳이 얼마나 예쁘고 귀엽게 생겼는지, 석 형은 압니까?”
윤승효는 황홀경에 젖어 그렇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문평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예쁘고 귀여워 봤자 똥구멍은 똥구멍이다. 살다 살다 똥구멍의 미모를 찬사받을 줄은 몰랐던 문평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이불을 움켜잡았다.
“그 무슨? 윤 형!”
“어여쁜 복숭아색입니다. 꼭 도화 꽃잎을 붙여 놓은 것처럼 새초롬하고, 주름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깊습니다. 예전에 볼 때보다 더 예뻐진 것 같네요. 마치 화장이라도 한 것 같습니다.”
문평이 보기에 윤승효는 인격이 변한 것 같았다.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나? 괴팍한 구석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맛이 갈 줄이야.’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조금 소름이 돋았다. 천마도 음담패설이 장난 아니었지만, 천마야 원래가 그런 사람이고 문평이 그에게 기대하는 바도 없었으니 문제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윤승효는 아니었다. 얌전해 보이는 외모와 정숙한 행동 때문에 그를 식물이나 초식 동물처럼 푸르게 여겨 왔던 문평은, 그가 실상은 욕정에 달뜬 평범한 젊은이이고 거기다 살짝 변태이기까지 하다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거기는, 헉!”
어떻게든 상대의 시선을 돌려볼 생각으로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던 문평은, 말을 맺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방금까지 사내의 열렬한 찬양의 대상이 되었던 곳에서 뜨거운 감각이 느껴졌다. 단단한 혀가 그의 주름 골을 핥았다. 자신이 찬미하던 섬세한 주름을 직접 맛보기라도 할 모양인지 혀가 주름을 따라 흘렀고, 그러다가 방사선으로 모인 중앙의 한 점까지 이어졌다.
뒤를 직접적으로 핥아 올리는 윤승효의 태도에 문평은 오싹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승효에게 자신의 뒤를 핥게 만들다니. 신성 모독이라도 한 것 같은 패덕적인 쾌감이 문평을 사로잡았다.
참지 않으면 자지러지는 교성이 터질 것만 같았다. 문평은 입술을 터질 듯 깨물며 이불 위로 머리를 박았다. 현란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파고들었다. 윤승효가 혀를 놀릴 때마다 문평의 감은 눈 속에선 별이 떨어졌다.
“무슨 짓을, 윽, 그, 그만하십시오.”
문평은 윤승효를 사랑하기도 했지만 존경하기도 한다. 그런 상대에게 자신의 엉덩이를 핥게 하는 건 경우가 아니라는 생각에 문평은 윤승효를 만류하려고 했다. 하지만 윤승효는 행위를 그치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그 일에 몰두해서, 문평의 말이 아예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굴었다.
문평이 허리를 들려고 하자 그는 손으로 늘어진 문평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상대에게 가장 예민한 부분을 잡혀 버린 문평은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덩이를 세웠는데 윤승효는 그 자세가 더 마음에 들었는지 문평의 무릎을 벌려 그 자세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문평은 바닥에 상체를 댄 채로 상대의 얼굴에 엉덩이를 들이밀게 됐다. 문평은, 정말 쪽이 팔려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위라도 하는 것처럼 적극적인 손놀림이 문평의 성기를 가지고 놀았다. 그러면서도 혀는 진지하게 집중해 문평의 엉덩이 주름을 핥는다. 윤승효는 문평의 주름뿐만 아니라 그 아래의 고환까지도 함께 빨았다. 그렇지 않아도 팽팽하던 고환이 그의 뜨거운 혀에 의해 더욱 단단해졌다.
윤승효의 혀가 내벽을 두드렸다. 향유에 묻은 손가락이라거나, 심지어는 붓이라거나. 성기를 제외하고도 몇몇 이물질이 드나든 적이 있는 구멍이긴 하지만 남의 혀가 들어온 것은 처음이다.
뜨겁고 적극적인 근육이 문평의 구멍을 헤집었다. 단단하게 다물려 있던 구멍이 그 끈질긴 침입을 버티지 못하고 잠금장치를 풀었다.
문평은 신음을 참으며 허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삽입 때 느껴지는 격렬한 쾌락과는 또 다른 종류의 쾌락이 그의 하반신을 덮쳤다. 삽입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장작불이 타는 것 같은 거센 열기라면, 뒤를 핥아 올려지는 것은 숯불 속에서 작은 불티가 튀어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타닥타닥. 끊임없이 튀어 오르는 섬세한 불티가 그의 신경을 달구었다.
단절적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말초적인 전율이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문평은 그러한 감각을 느끼고서야 자신의 항문이 성기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이 성기가 아니라면, 단지 핥는 것만으로 이런 감각이 느껴지지는 않을 터였다.
뒤가 질척할 정도로 농염한 애무가 이어졌다. 윤승효는 집요할 정도로 한 가지에만 집착했고, 문평은 그의 집착을 막을 수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이를 악물어서 턱 근육이 얼얼했다. 신음을 참느라 깨문 입술도 너덜너덜해졌다.
이제 충분하니 대강 만족했으면 좋겠다고 문평은 생각했다. 주름만으로도 모자라 구멍 안쪽까지 샅샅이 핥아 올려지고 깨물렸으니 이제 더 이상은 애무당할 자리도 없었다.
하지만 문평은 착각하고 있었다. 그의 뒤를 핥는 것이 윤승효가 원하는 바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윤승효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런 사전 작업을 한 거였다.
착각의 대가는 지독했다. 엉뚱한 생각에 골몰한 탓에 몸은 준비가 되었지만 마음의 준비는 전혀 되지 않은 채 거대한 것을 맞아들여야만 했다. 문평은 뜨거운 혀가 드디어 물러나 잠시 안심하고 있다가, 그보다 더 큰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어린아이의 팔뚝만큼이나 거대한 윤승효의 성기가 문평의 몸속으로 단번에 밀려왔다.
“아악. 아아악!”
무지막지한 크기의 것이 기교도 없이 밀어붙여졌다. 오랫동안 혀로 핥아 풀어진 근육으로도 감당이 안 될 만큼 엄청난 크기다. 내장이 납작하게 짓눌리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문평이 비명을 질렀다. 교성이 아니라 분명히 비명이었다.
윤승효의 것은 정말로 컸다. 진짜로, 무지막지하게 컸다. 눈으로 볼 때보다 몸으로 겪어보니 더 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정신이 아닐 때나 받아들일 수 있지,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물건이 문평의 엉덩이 속을 파고들어 왔다.
한 치라도 더 깊게 넣고 싶어 하는 상대의 마음은 절실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아팠다. 천마에게 익숙해진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틀림없이 삽입하는 중간에 졸도하고 말았을 정도로 엄청나게 아팠다.
문평은 내장이 통째로 뒤틀리는 것만 같아 숨을 몰아쉬며 허리에서 힘을 뺐다. 윤승효가 집어넣는 걸 포기하지 않을 것 같으니 자기가 맞춰 줘야 한다. 천마와의 경험 덕에 큰 것을 집어넣는 요령 정도는 숙지하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아픕니다. 석 형. 왜 이렇게 힘을 주는 겁니까?”
자기가 남에게 주는 고통은 생각도 하지 않고, 윤승효가 문평을 원망했다. 어떻게든 그 거대한 물건을 자기 몸 안으로 수용해 보려는 문평의 노고 따윈 아랑곳없이, 그는 마치 문평이 일부러 자신을 밀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운해하며 투정을 부렸다.
‘아프냐? 내가 더 아프다.’
윤승효만 아니었다면 뒤돌아서서 한 대 후려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문평은 이를 갈았다. 아직 젊으니까 봐주는 거다. 자기 크기는 생각도 안 하고 왜 애먼 나한테 와서 불평인가?
“허억. 헉. 살살, 살살 하세요. 저도 최대한 힘을 뺄 테니, 윤 형도…….”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라고 하고 싶었다. 윤승효는 기껏 충고해주고 있는 경험자의 마음을 무시한 채 힘차게 허릿짓을 시작했다. 그게 자기 뱃속에 있다는 사실에 간신히 적응하고 있던 문평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불붙인 홍두깨처럼 거대한 것이 문평의 엉덩이를 드나들었다. 젊어서 그런지 허릿심이 유달리 좋아서 한 번 퍽퍽 쳐올릴 때마다 몸 전체가 밀린다.
그렇지 않아도 후배위라 깊게 들어가는 체위인데, 상대마저 더 깊게 들이박지 못해 안달을 하자 문평은 완전히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사랑하니까 참는 거였다. 천마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안았더라면 그가 아무리 천하제일인이고 천하제일세의 주인이었어도 진작 줄행랑을 놨으리라. 문평은 지금 이 순간만큼 윤승효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절감한 순간이 없었다.
이러고도 찢어지지 않는 것이 천행이다. 윤승효가 하는 짓을 봐서는 피바다가 되었어도 모자라지 않았을 것인데, 천마에게 단련된 그의 구멍이 버텨주는 덕에 그나마 그런 참사는 면한 것 같다.
윤승효는 오로지 문평을 괴롭게 하는 것만이 목적인 사람처럼 그를 파고들었다. 어떻게 된 게 하면 할수록 더 아픈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문평은 눈물을 찔끔 흘렸다.
이런 순간에 떠올려선 안 될 생각이긴 하지만, 천마가 그리워졌다. 정확히는 천마의 자상한 배려와 부드러운 기술이 그리웠다. 미안한 이야긴데, 윤승효는 천마에게 가서 좀 배워야 했다. 아직 젊고 경험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의 청춘에 대한 대가를 자신의 몸으로 치러야 하는 문평은 온전히 너그럽지만은 못했다.
지독하고 괴로운 밤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이 통했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아픈 밤. 다행히 문평은 그 밤이 이제 막 시작되기만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면 그 행위가 끝날 때까지 정신을 차린 채로 버티고 있지는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문평의 희생정신이 무색하게도, 남자의 행위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윤승효는 지나치게 젊었고, 문평은 그의 젊음을 과소평가했다. 덕분에 그는 하늘이 노랗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남자에게 시달려야만 했다.